인하대 융합고고학팀

 

 

 

인하대 융합고고학팀, 조개화폐 사실성 입증 27일 발표

  • 입력 2014.06.24 01:12
▲ 하남성 이리두 유적과 언사상성박물관의 조개화폐.
 

 

단군세기 창작설을 뒤집을 인하대학교의 논문이 오는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족하는 ‘세계환단학회 창립회의’에서 발표된다.
이번 논문은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 통해 강화도의 역사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국내 고고학계의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3일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에 따르면 이번 논문을 통해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과 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함에 따라 ‘단군세기’를 근거없이 창착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다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단군세기’가 고조선 역사의 실체를 담고 있다고 인정되면 기존의 교과서에 고조선 관련 기술을 채워 넣을 풍부한 검증대상이 확보된다. 또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쐐기를 박는 유력한 근거도 된다.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은 “단군세기의 5세 오사구단군 재위 시(BC 2133) 주조한 원공화폐 기록은 흥미롭게도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와 일치하고 있다”며 “개오지로도 알려진 카우리 조개가 이미 하나라 때부터 화폐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1987년 이후인데 1911년에 간행된 단군세기에서는 이 사실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개화폐에 둥근 구멍을 뚫어 사용한 사실 역시 하남시 정주 이리두 유적과 내몽고 하가점유적 발굴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단군세기에는 이미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요서지방 대전자(大甸子) 유적에서 납으로 주조한 조개모양 화폐가 발견돼 단군세기의 금속 조개화폐 주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관홍 인하대 해양학과 교수는 “카우리 조개는 쿠로시오 난류대에 서식하는 아열대성 종으로서 한류가 남하하는 중국 동남해안에서는 채집하기 어려운 것”이라 설명하며 “중국 본토가 아닌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면 발해만과 한반도 지역을 주 무대로 하는 해륙문화세력이 이 고대통화를 유통시킨 주체”라고 주장했다.


김연성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장은 “발굴 분포와 조개화폐의 출토량을 종합 고찰할 때 명도전이 그렇듯이 이 조개화폐도 고조선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중국 고고학계에서도 하가점하층의 조개화폐 사용이 중원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을 근거로 북방세력의 초기화폐문화로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기대 인하대 고고학 교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기록 모두가 창작이라는 기존 학계의 입장은 그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이고 경솔한 감이 없지 않다”며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정밀한 검증작업을 통해 ‘단군세기’ 기록 중 의미 있는 사실 기록을 추출해 내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달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범식을 갖는 세계환단학회는 40가지의 각기 다른 전공분야 교수 7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국내 최초의 융합학회로 등록될 전망이다.(1)

 

 

 

심백강

 

 

 

"그러나 「사고전서」와 같은 확실한 자료의 뒷받침을 통해 요동군, 요서군, 낙랑군의 위치가 밝혀진 이상 하북성 지역에서 발굴된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가 아니라 고조선의 화폐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2)

 

 

 

 

 

허성관

 

 

 

글 : 허성관(前 행정자치부 장관)

조선(단군)의 강역에서 절대적으로 많이 출토되...

조선(단군)의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는 조선의 화폐, 명도전...

 

고조선은 아득한 옛날 우리민족이 최초로 세운 나라다. 주류역사학계는 고조선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일반인들은 고조선이 짐승들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미개한 시대였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옛 역사책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에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주류 역사학계는 기원전 10세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우리 옛 사서의 기록이 타당하다고 논증하였다.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인가에 대해서도 주류사학계는 지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나라였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과 윤내현 등은 서쪽으로는 북경 동북쪽에 있는 난하부터, 동북쪽으로는 만주 북쪽의 아르군 강과 흑룡강 이남, 남쪽으로는 한반도 전부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밝혔다. 학문적 정치성에 비추어 윤내현의 논증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실상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시 경제를 연구를 연구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조선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조선에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면 그 경제발전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체제도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의 범금8조(犯禁八條) 중에 “도적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을 내야한다”는 조항이 있다. 50만은 화폐단위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가치는 알 수 없지만 고조선에 화폐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조선 화폐에 관한 자료가 드물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몇몇 자료에서 그 실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낙빈기(駱賓基)가 1987년에 발표한 금문신고(金文新攷)이다. 금문은 청동기에 쓰여 있는 글자인데 한자의 초기 형태이다. 낙빈기는 다음 사진에서 보는 청동기가 호미처럼 생긴 화폐인 조패(鉏貝)라고 보았다. 이 조패가 중국 전설 시대 첫째 임금인 신농(神農)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논증했다. 신농의 재위기간이 기원전 2517-기원전 2474년이니 기원전 25세기에 만들어진 청동화폐이다. 이 시대에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화폐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조패와 모양이 비슷한 청동화폐인 첨족포(尖足布) 등은 주(周)나라에서도 사용되었다.

▲ 조패, 김대성의 『금문의 비밀』 50쪽
 

신농과 고조선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여러 역사서와 우리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고조선과 중국 고대왕조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의 고대 왕조 중에서 은(殷)나라까지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조패는 인류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만든 화폐일 것이다.

고조선에 화폐가 있었다는 자료는 환단고기에도 실려 있다. 제4대 오사구단군 재위 5년(기원전 2133년)에 “가운데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주조”하였다. 이 기록과 조패는 약 400년 시차가 있으나 같은 동이족 나라에 화폐가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들이다. 당시 청동 제조 기술이 있었는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최근 고고학 발굴 성과에 의하면 기원전 24세기까지 청동기 제조 상한이 올라가니 무시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 원절식 명도전과  방절식 명도전
 

은나라 중흥군주인 무정(武丁, 재위 기원전 1250-기원전 1192년)의 왕비인 부호(婦好)의 묘가 하남성 안양에서 1976년에 발견되었다. 부호는 무정의 왕비이면서 군사령관으로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여걸이었다. 2013년에 중국 산서성과 하남성을 답사하는 여행에서 필자는 부호의 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안내문에는 부호를 동이여장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묘 앞에 무기를 손에 든 예쁜 부호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묘의 부장품으로 전시된 유물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이 하얀 바탕에 까만 점이 있는 무당벌레처럼 생긴 작은 조개껍질 화폐였다. 부호 묘에서 6,800여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조개는 인도양에서 서식하는 귀한 마노조개 껍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노조개 껍질은 오늘날에도 가공하여 목걸이 등을 만드는 소재다. 돈을 의미하는 한자가 조개 패(貝)인데, 이 글자의 기원이 조개를 본뜬 상형문자이다. 기원전 15세기 동이족의 나라 은에 화폐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은나라 다음 주나라 시기 후대인 춘추전국 시대에 중국에서는 금속화폐의 사용이 정착되었다. 이 시기 각 나라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화폐는 조패와 비슷하거나 칼처럼 생긴 도전(刀錢)이다. 도전은 주로 연(燕), 제(齊), 진(晉)나라와 융적(戎狄)과 산융(山戎)에서 사용했다. 연과 제는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융적과 산융은 중국의 동북쪽에 거주한 이민족이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를 건설했는지 중국 역사서는 밝히지 않는다. 당시 중국 동북쪽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는 고조선 밖에 없기 때문에 산융은 고조선이 틀림없다, 오늘날에도 중국학자들은 고조선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산융 또는 동호(東胡)로 쓴다.

▲산융의 명도전

(자료:유비연과 단경고의

『동주전폐』(2012) 58쪽)

▲ 일반적인 모습의 명도전

(자료:유비연과 단경고의

『동주전폐』(2012) 56쪽)

 

각국의 도전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연나라 도전이 명도전(明刀錢)인데 이는 도전에 새겨진 글자가 아래 왼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明(명)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확하게 무슨 글자인지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명도전은 중국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하북성, 내몽고자치구, 한반도 등에서 출토된다. 이 지역들은 고조선과 연나라 강역이었다. 그래서 고조선은 연나라 돈인 명도전을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명도전이 연나라 지역인 하북성에서는 소량이 출토되었지만 고조선 강역에서는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북한학자 손량구의 연구에 의하면 고조선 지역에서 22,265개, 연나라 지 역에서는 7,368개의 명도전이 출토되었다. 박선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명도전 출토지역은 고조선 지역임을 나타내는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일치한다. 연나라보다는 고조선에서 대량으로 유통되었으니 손량구는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기보다는 고조선 화폐라고 주장했다.

 

주나라 무왕이 동생 소공(召公) 석(奭)을 기원전 1122년 제후로 봉한 곳이 연나라인 데 오늘날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기원전 323년 왕을 칭하고 제후국에서 왕국이 되었다. 진개(秦開)의 고조선 침략과 격퇴 등 연나라와 고조선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적국이었다. 연나라는 110년 간 존속하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한 고조선이 겨우 100여 년 존속한 적국의 화폐를 자국의 화폐로 사용했다는 종래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의문이 든다.

 

명도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몸체가 곡선인 원절식(圓折式)과 직선인 방절식(方折式)이 있다. 이 중 원절식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고 중국 길림대학 장박천(張博泉) 교수가 주장했다.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의 다수가 원절식이다. 같은 원절식이라도 끝이 뾰족한 명도전도 있다. 앞의 사진에서 명도전과 산융의 도전을 비교해보면 몸체가 곡선이라는 점에서 원절식 명도전과 산융의 도전은 유사하다. 산융이 고조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이 화폐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청동기로 조패를 만든 시기가 기원전 25세기임을 생각해보면 아득한 옛날부터 사용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고조선은 신화 속의 미개한 국가가 아니었다. 고조선은 강역이 넓고 화폐를 사용하는 발전된 경제체제를 유지한 국가였다.(3)

 

 

 

 

 

 

한영달

 

 

 

[한국화폐 수집연구] 원절식 명도전·철정전 한국사 고전 명기해야

북한·일본·중국·러시아 일부 학자 최근까지 논증

 

한국화폐사에는 역사기록이 있으나 실물이 발견되지 않는 고려시대 은병화, 옛 지폐 저화(楮貨)등이 있고 역사기록에는 없으면서 실물이 발견되는 고려시대 희귀전인 해동원보(海東元寶) 같은 고전도 있다. 접는 칼 모양의 명도전(明刀錢)과 엷은 쇠막대 형태로 가운데가 휜 철정전(鐵鋌錢)은 고조선~삼국시대의 고화폐로 이제까지 왕릉 및 고분 등에서 많은 실물이 출토되면서도 확실하게 한국화폐라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한국보다 오히려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의 일부 학자들까지도 한국 고화폐라는 논증을 최근에도 펴오고 있으나 바로 잡혀지지 않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초·중·고교과서 심의위원회 등에서 관심을 갖고 늦었지만 받아들여 우리의 고대문화유산 콘텐츠에 포함시켜 넓히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인식부터 새롭게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원절식(圓折式)명도전과 철정전에 대해서는 그동안 필자가 6회에 걸쳐 우리고전임을 주장하며 화폐전문지 및 일간신문에 보도해왔다. 외국학자들의 주장 등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보았다.

 

 


● 원절식 명도전

B.C 3세기 고조선 땅 조양서 대량 출토


 

고조선이 제조유통 시킨 것으로 보는 원절식명도전의 유통시기는 춘추전국(B.C 770~B.C 221)시대 전국초기이다. 조선후국의 출현이후 지명인 명이(明夷)를 “朝鮮”국명으로 고치게 되자 화폐개혁을 단행, 도전표면 문양을 明자의 갑골문 “ ”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절식명도전 이후에 출현한 방절식명도전을 연나라 화폐로 보고 있다.(“ ”문양) 몇 주 전 텔레비전 방송국 퀴즈문제에서까지 명도전하면 모두 중국 연나라 화폐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방절식명도전 유통시기는 전국시대 중기부터 연나라 멸망까지로 고조선의 원절식명도전에 비해 1백년미만으로 시기가 짧다. 중국사서(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법금팔조(八條之敎)는 고조선에서 당시 통용되던 원절식명도전이 있었기에 50만의 속죄금을 무는 등 벌금 징수가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중국사서에는 연나라의 화폐주조와 관련된 기록도 없고 또 연나라에 명도전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도 없다. 춘추시대 혼란으로 인한 주민들의 빈번한 이동, 고조선과 연의 전쟁, 동북아정세를 감안할 때 화폐의 출토를 곧바로 특정정치체제나 국가의 강역과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연의 명도전에 대한 인식은 고고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이후 ‘명도전 출토’=‘연의 강역’이라는 도식을 내세워 중국문화유산의 일부라는 수를 두고 있다. 1994년 일본학자 다무라고이치(田村晃一)는 ‘청천강 이북의 명도전 출토유적 재검토’에서 중국의 주장을 반대하면서 요동이하의 명도전유적은 선고구려족(고조선)이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명도전을 그동안 식민사관으로 보아온 일본 학계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선미박사(서울시립대 국사학)는 몇 해 전 B.C 3~2세기 명도전 출토 유적지의 분포도를 처음으로 작성했는데 러시아의 저명한 고고학자 부찐의 고조선 강역도와 공교롭게도 일치했다. 이 지도에는 연의 중심지였던 북경 쪽에는 명도전의 출토지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부찐이 기원전 3세기 고조선 강역이라고 본 정봉과 조양에서 명도전이 대량 출토되었다. 북한 학자들도 명도전은 모두 고조선 화폐라고 규정하고 포전, 명도전, 오수전 등과 함께 출토되는 一化錢, 明化錢, 明四錢(일명 원전)까지도 고조선 화폐라는 주장이다. 고대화폐가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는 비슷한 문화권인 인접국과는 항상 견해차이가 많다. 사서기록의 사실 가운데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며 고조선~삼국시대의 고전들은 더욱 연구하고 개척할 분야이다.

◇참고문헌
△장박천(中명도폐연구속설) △박선미(화폐유적을 통해본 고조선의교역) △田村晃一(日청천강이북의 명도전)


● 철정전의 형제(衡制)

한반도서 B.C 1 세기에 첫 제조 유통


▲ B.C 1세기~ AD 5세기 삼한 삼국시대에 제조 유통된 철정전. 일본에도 유통되었다. 사진은 대·중·소형 모습.

 

일본의 고대철기문화 학자(村上 英之助, 東湖)들은 한국 철정전의 무게, 체적, 형제(衡制) 등을 연구한 결과 중국과 연동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소형 철정은 대형에 비해 중량 체적 등이 20분지 1에 해당한다.

후한시대 오수전의 자료비와 주요 자료비를 합친 원가는 쇠(2.9그램)값과 대비해서 7.84배가 된다. 중국 오수전과 등가가 되는 철정 무게는 22.7그램이 된다. 이 무게는 한반도의 소형 철정 무게와 일치한다. 소형 철정 10개의 무게는 중국의 왕분 - 동진시대 1근의 무게 223그램과 거의 같다. 대형 철정은 소형의 약 20배인 428.3그램으로 체적대비는 22대1로 천마총에서 발굴된 것과 같다.

철정은 대부분 10개씩 묶여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10진법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1근 무게를 표준으로 시대 따라 변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철정전을 계산으로 따져보면 20분지 1까지 분할이 가능하고 소형철정은 2분지 1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다.

중국의 ‘삼국지’보다 뒤에 나온 역사서 ‘후한서’에는 ‘國出錢 濊倭馬韓 竝市之 凡諸貿易以鐵貨’라 적혔다. “철화로 사용하고 무역에서 활용했다”고 해석된다. 일본과 마한, ‘예’는 동해안 강릉을 중심으로한 집단사회로 볼 때 앞으로 이 지역에서 철정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철정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서기 신공기 46년조에 백제의 초고왕이 (A.D166~214) 일본 사신에게 철정 40개를 전했다는 사실에 비롯된 것으로 한국에서 건너간 말이다. 철정을 고분출토 철판과 연관시켜 처음으로 연구 발표한 사람은 1938년 한국에서 조직된 고전친목 단체인 조선고천회 墨田幹一(당시 경성제대 교수) 회장이다.

철정을 철정전이라 부르게 된 것은 2000년 7월 화동뉴스에 필자가 ‘철정전 발견 확인’ 글을 쓰면서 철정에 ‘전’자를 붙여 쓴 것이다. 철정전은 한반도에서 B.C1세기에 처음으로 제조 유통되었고 A.D3~4세기에는 광범위하게 유통된 실물화폐이다. 부의 상징으로써도 기능을 했을 것이다. 일본열도에서의 철정은 그 출토형상을 보면 10개를 단위로 끈으로 묶은 것 등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이 명확하다. 또 일본에서 6세기 이후 철정은 일본제품으로 보인다. 고고학자 정경희는 “철정은 실물화폐라기보다 주화에 가까운 유통매개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이 땅에서 그 옛날 철정전을 매개로 하는 경제사적 단계가 있었으나 ①대규모로 유통되었는지 ②무역화로써 역할 ③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졌는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4)

◇참고문헌
△村上英之助(日철정의 본질)△東湖(日변·진과 가야의 철)
△墨田幹一(日신라의 철정)△鄭璟喜(선삼국시대 사회와 경제)

 

 

 

 

<주>

 

 

(1) 인하대 융합고고학팀, 조개화폐 사실성 입증 27일 발표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joongboo.com)2014.06.24 

 

 

 

(2)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바른역사, 148쪽

 

 

 

(3) 명도전은 조선(단군)의 화폐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입력 2016.05.17 09:51수정 2016.06.04 14:59 

 

 

 

 (4) 국내보다 해외서 한국화폐 인정  - 강원도민일보 (kado.net)2008.08.01 한영달 고전(古錢)연구가 

 

 

 

 

<참고자료>

 

 

명도전(한글이 새겨진) 과 연나라, 고조선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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