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고조선의 강역 (2) 고조선의 수도 :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 백악산아사달은 지금의 난하 유역, 장당경은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 본문
2. 고조선의 강역 (2) 고조선의 수도 :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 백악산아사달은 지금의 난하 유역, 장당경은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
대야발 2024. 4. 28. 18:18
신채호는 고조선에 삼경이 있었다고 하며 하나는 아스라, 즉 지금의 하얼빈, 또 하나는 아리티, 즉 지금의 개평현 동북에 있는 안시성 유적지, 또 다른 하나는 펴라, 즉 오늘날의 평양이라고 한다.(1)
리지린은 고조선 수도를 개평으로 보았다.
고조선 수도를 개평으로 인정하며 또 바로 그 부근에 《곰산》이 있다(성경통지 · 료동지). 이 《곰산》은 바로 《검산》으로 읽을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 국가의 발생지로 인정된다. 거기에 정착한 고조선족은 이미 국가 형성 이전에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바 그 일부는 오늘의 중국 하북성 《예수》濊水 지역에까지 진출하였고, 또다른 일부는 압록강 이남으로 진출하여 거기의 원주민과 융합하여 《한족》韓族을 이루게 되였다고 인정된다.(2)
윤내현은 고조선이 처음으로 아사달阿斯達인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을나라시대로서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400~2300년 이전이며,
평양성平壤城인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조선이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서기전 2400~2300년경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백악산아사달인 지금의 난하 유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온 서기전 1100년경 이전이며,
장당경인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 온 서기전 1100년경부터 한사군이 설치된 서기전 108년까지이고,
고조선이 도읍을 다시 아사달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현도군이 설치된 서기전 107년경부터 고조선이 붕괴되기까지였을 것이라고 한다.
『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조條에는 고조선의 도읍지 명칭으로 아사달阿斯達 · 평양성平壤城 · 백악산아사달 · 장당경 · 아사달 등이 보인다.
그리고 중국의 고대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독儉瀆(험독險瀆)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왕험성王險城)이 보인다. ...
지금까지 고증한 고조선의 도읍지 위치와 천도하게 된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은 원래 아사달이라는 명칭을 가진 고을나라였는데, 그 도읍명도 아사달로서 고을나라 이름과 동일하였다. 당시의 도읍은 지금의 평양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은 원래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서 출발한 고을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사달고을나라는 그 강역을 만주지역까지 넓히게 됨에 따라 도읍을 지금의 요하遼河 하류 동부유역에 있은 요녕성 본계시 지역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평양성이었다. 이때 황하 유역의 나라들과 교류를 갖게 되면서 아사달의 뜻을 한자로 표기한 조선朝鮮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고조선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지금의 난하 너머까지를 그 판도에 넣게 되었다. 이때에 황하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황하 유역의 세력들이 팽창해 오는 것도 견제하기 위해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백악산아사달이었다.
그런데 기자 일족이 서주로부터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난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해 오자 고조선은 이들을 난하 하류유역에 거주하도록 하고 거수국을 삼아 국경의 수비를 맡기고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장당경이었다.
그런데 그 후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난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하여 기자箕子의 후손인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한 후 서한의 외신이 되어 영토를 지금의 대릉하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그리고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하까지의 요서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조선은 더이상 대릉하 동부연안의 장당경에 도읍을 할 수 없게 되어 다시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은 고조선이 고을나라시대에 도읍했던 지금의 평양으로서 아사달이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보아 고조선이 처음으로 아사달阿斯達인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을나라시대로서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400~2300년 이전이며,
평양성平壤城인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조선이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서기전 2400~2300년경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백악산아사달인 지금의 난하 유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온 서기전 1100년경 이전이며,
장당경인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 온 서기전 1100년경부터 한사군이 설치된 서기전 108년까지이고,
고조선이 도읍을 다시 아사달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현도군이 설치된 서기전 107년경부터 고조선이 붕괴되기까지였을 것이다.(3)
신용하는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보았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魏書)≫와 ≪고기(古記)≫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고 하였다.
'아사달'을 지리 비정하여 찾는 연구작업에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사달'이 '밝달'이라는 말과 중첩되어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
삼국유사의 <고기>에는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기록하였다. '백악산'과 '아사달'이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되었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단군조선의 탁자식 고인돌들. ① 한반도 강동 문흥리 2호 고인돌 ② 요동반도 해성 석목성 고인돌 ③ 요동반도 개주 석붕산 고인돌 ④ 요동반도 대석교 석붕옥 고인돌
이상의 증거들에서 우리는 고조선의 첫 도읍은 '강동아사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은 강동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 후에 요동·요서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여러 진출 지역에 '부수도'를 두었다. 현재 밝힐 수 있는 부수도로서는 ①요동반도의 개주지구 ②요서지방의 창여현 험독지구 ③조양지구 ④동내몽고지방의 적봉지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또 다른 지역에도 부수도를 두었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4)
심백강은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을 대릉하 유역에 있은 조양(朝陽)으로 보았고, 요동의 험독을 고조선의 첫 수도가 아니라 후기의 수도이거나 제 2의 수도 즉 부도라고 보았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으며 뒤에 다시 백악산 아사달과 장당경으로 천도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에 대해 『위서』는 '아사달', 고기는 '평양성'이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서』에서 말하는 '아사달'과 『고기』에서 말하는 '평양성'은 서로 같은 곳인가 다른 곳인가?
고조선은 20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나라이다. 나라가 오랜 기간 존속하다 보면 수도가 한 군데만 고정되어 있을 수 없고 여러 번에 걸쳐 천도를 하기 마련으로서 개국 당시의 국도 이외에 다른 여러 수도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단군이 개국할 당시에 정한 고조선의 첫 수도는 둘이 있을 수 없는데, 『위서』에서는 '아사달'이라 하고 『고기』에서는 '평양성'이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
......
평양이나 아사달은 본래는 이처럼 보통명사였는데 고조선이 거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고유명사로 탈바꿈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사달'을 아침 해가 선명하게 비치는 양달의 뜻도 되므로 한자로는 조양(朝陽)이나 조선(朝鮮)이 '아사달'에 가까운 번역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달 · 평양 · 조양 · 조선은 표기만 다를 뿐 의미와 내용은 같은 것으로 동일지역에 대한 다른 지명 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을 지칭하는 조양이란 지명을 요서 대릉하 유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중국과 한반도를 통틀어 조양이란 지명이 유일하게 대릉하 유역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이었다는 사실을 무언으로 입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고기』에 단군은 처음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고 하였다. 여기서 평양성과 백악산 아사달을 서로 다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의 민족은 밝달족이고 고조선의 첫 수도는 아사달이었다. 그런데 아사달을 의미하는 조양, 밝달을 의미하는 홍산 · 적봉 · 백랑산 이런 지명들이 오늘의 대릉하 유역에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밝달'과 '아사달'의 흔적이 조양 · 적봉 · 홍산 · 백랑산 등의 지명에서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다.
전 중국과 한반도를 통틀어 '밝달'과 '아사달'의 흔적을 이처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오직 요서 대릉하 유역뿐이다. 이것은 요서 대릉하 유역이 고조선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5)
중국 문헌에 고조선의 첫 발상지에 관해 직접 언급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왕 위만이 왕험에 도읍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위만은 단군조선 · 기자조선을 이어 조선의 왕이 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을 추적하면 고조선의 발상지를 알아내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
조선왕 위만이 정했던 수도 왕험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기』 「색은」에서 왕험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면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라고 하였고
응소는 "요동에 험독현이 있는데 이곳이 조선왕의 옛 도읍지이다."라고 하였으며,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서광이 말한 창려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험성이 사실은 같은 곳이고, 응소가 말한 요동군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험성은 다른 곳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수도는 요동의 요양 부근과 요서의 대릉하 유역 등 두 군데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요동의 험독과 낙랑군의 왕험성 가운데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응소는 요동의 험독을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로 보았고 신찬과 안사고는 응소와 달리 낙랑군의 왕험성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보았다.
낙랑군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조선현을 수현으로 거느린, 한사군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군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전 도읍인 왕검성이 이곳에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신찬과 안사고가 낙랑군의 왕험성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본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는 낙랑군 조선현은 위만조선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위만조선 건국 이전 기자조선의 도읍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그러므로 기자조선이 건국되기 전 이곳은 단군왕검의 왕검성이 있던 지역이 명백하며 따라서 낙랑군 조선현이 곧 고조선의 발상지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요하와 난하 사이 대릉하 유역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다.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 이곳은 기자조선의 수도였으며, 기자가 망명해오기 전에는 단군왕검의 왕검성이 여기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발상지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대릉하 유역의 요서인 것이다.
그러면 요동의 험독은 무엇이가. 요동의 험독은 고조선의 첫 수도가 아니라 후기의 수도이거나 제 2의 수도 즉 부도라고 본다. 연나라 소왕 시기에 조선은 서쪽으로 2000여 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긴 일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때 조선이 요서 대릉하 유역에서 요동의 요하 유역으로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당시 조선왕의 도읍지가 요동의 험독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6)
<자료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65-270쪽
(3)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355-357쪽
(4) <지식카페>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 문화일보 munhwa 2019-09-11
(5)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19-224쪽
(6)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3-210쪽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신채호, 조선상고사, 위즈덤하우스, 2014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비봉출판사, 2007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하,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문정창, 고조선사연구, 한뿌리, 1969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유엠부틴, 고조선연구, 아이네아스, 2019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6
윤내현, 우리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윤내현, 고조선연구 상·하, 만권당,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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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한국고대사, 만권당,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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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연구, 2017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8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07
심백강,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바른역사, 2021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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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역사의 아침, 2012
정형진, 고깔모자를 쓴 단군, 백산자료원, 2003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유정희,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고구려의 역사, 아이네아스,2018
신채호, 조선상고사, 69-70쪽
정인보, 조선사연구 上, 우리역사연구재단, 133-139쪽
유 엠 부틴, 고조선연구, 아이네아스, 59쪽
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177-182쪽,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160-181쪽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142-150쪽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20_0010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20_0020
조선(단군)의 중심지는 중국 하북성 북경지역이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3.14
조선(단군)의 중심지는 중국 하북성 북경지역이다(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3.16
고조선 중심지는 대동강이었나, 요동이었나 (daum.net) 2016. 4. 13
KBS HD역사스페셜 – 첫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 KBS 2005.5.27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