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고조선의 강역 (2) 고조선의 수도 :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 백악산아사달은 지금의 난하 유역, 장당경은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 본문
2. 고조선의 강역 (2) 고조선의 수도 :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 백악산아사달은 지금의 난하 유역, 장당경은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
대야발 2024. 4. 28. 18:18
신채호는 고조선에 삼경이 있었다고 하며 하나는 아스라, 즉 지금의 하얼빈, 또 하나는 아리티, 즉 지금의 개평현 동북에 있는 안시성 유적지, 또 다른 하나는 펴라, 즉 오늘날의 평양이라고 한다.(1)
리지린은 고조선 수도를 개평으로 보았다.
고조선 수도를 개평으로 인정하며 또 바로 그 부근에 《곰산》이 있다(성경통지 · 료동지). 이 《곰산》은 바로 《검산》으로 읽을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 국가의 발생지로 인정된다. 거기에 정착한 고조선족은 이미 국가 형성 이전에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바 그 일부는 오늘의 중국 하북성 《예수》濊水 지역에까지 진출하였고, 또다른 일부는 압록강 이남으로 진출하여 거기의 원주민과 융합하여 《한족》韓族을 이루게 되였다고 인정된다.(2)
윤내현은 고조선이 처음으로 아사달阿斯達인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을나라시대로서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400~2300년 이전이며,
평양성平壤城인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조선이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서기전 2400~2300년경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백악산아사달인 지금의 난하 유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온 서기전 1100년경 이전이며,
장당경인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 온 서기전 1100년경부터 한사군이 설치된 서기전 108년까지이고,
고조선이 도읍을 다시 아사달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현도군이 설치된 서기전 107년경부터 고조선이 붕괴되기까지였을 것이라고 한다.
『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조條에는 고조선의 도읍지 명칭으로 아사달阿斯達 · 평양성平壤城 · 백악산아사달 · 장당경 · 아사달 등이 보인다.
그리고 중국의 고대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독儉瀆(험독險瀆)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왕험성王險城)이 보인다. ...
지금까지 고증한 고조선의 도읍지 위치와 천도하게 된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은 원래 아사달이라는 명칭을 가진 고을나라였는데, 그 도읍명도 아사달로서 고을나라 이름과 동일하였다. 당시의 도읍은 지금의 평양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은 원래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서 출발한 고을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사달고을나라는 그 강역을 만주지역까지 넓히게 됨에 따라 도읍을 지금의 요하遼河 하류 동부유역에 있은 요녕성 본계시 지역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평양성이었다. 이때 황하 유역의 나라들과 교류를 갖게 되면서 아사달의 뜻을 한자로 표기한 조선朝鮮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고조선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지금의 난하 너머까지를 그 판도에 넣게 되었다. 이때에 황하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황하 유역의 세력들이 팽창해 오는 것도 견제하기 위해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백악산아사달이었다.
그런데 기자 일족이 서주로부터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난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해 오자 고조선은 이들을 난하 하류유역에 거주하도록 하고 거수국을 삼아 국경의 수비를 맡기고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장당경이었다.
그런데 그 후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난하 하류유역으로 망명하여 기자箕子의 후손인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한 후 서한의 외신이 되어 영토를 지금의 대릉하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그리고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하까지의 요서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조선은 더이상 대릉하 동부연안의 장당경에 도읍을 할 수 없게 되어 다시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은 고조선이 고을나라시대에 도읍했던 지금의 평양으로서 아사달이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보아 고조선이 처음으로 아사달阿斯達인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을나라시대로서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2400~2300년 이전이며,
평양성平壤城인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고조선이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서기전 2400~2300년경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백악산아사달인 지금의 난하 유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온 서기전 1100년경 이전이며,
장당경인 지금의 대릉하 동부유역 북진北鎭 동남지역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자가 망명 온 서기전 1100년경부터 한사군이 설치된 서기전 108년까지이고,
고조선이 도읍을 다시 아사달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현도군이 설치된 서기전 107년경부터 고조선이 붕괴되기까지였을 것이다.(3)
신용하는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보았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魏書)≫와 ≪고기(古記)≫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고 하였다.
'아사달'을 지리 비정하여 찾는 연구작업에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사달'이 '밝달'이라는 말과 중첩되어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
삼국유사의 <고기>에는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기록하였다. '백악산'과 '아사달'이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되었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단군조선의 탁자식 고인돌들. ① 한반도 강동 문흥리 2호 고인돌 ② 요동반도 해성 석목성 고인돌 ③ 요동반도 개주 석붕산 고인돌 ④ 요동반도 대석교 석붕옥 고인돌
이상의 증거들에서 우리는 고조선의 첫 도읍은 '강동아사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은 강동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 후에 요동·요서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여러 진출 지역에 '부수도'를 두었다. 현재 밝힐 수 있는 부수도로서는 ①요동반도의 개주지구 ②요서지방의 창여현 험독지구 ③조양지구 ④동내몽고지방의 적봉지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또 다른 지역에도 부수도를 두었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4)
심백강은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을 대릉하 유역에 있은 조양(朝陽)으로 보았고, 요동의 험독을 고조선의 첫 수도가 아니라 후기의 수도이거나 제 2의 수도 즉 부도라고 보았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으며 뒤에 다시 백악산 아사달과 장당경으로 천도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에 대해 『위서』는 '아사달', 고기는 '평양성'이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서』에서 말하는 '아사달'과 『고기』에서 말하는 '평양성'은 서로 같은 곳인가 다른 곳인가?
고조선은 20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나라이다. 나라가 오랜 기간 존속하다 보면 수도가 한 군데만 고정되어 있을 수 없고 여러 번에 걸쳐 천도를 하기 마련으로서 개국 당시의 국도 이외에 다른 여러 수도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단군이 개국할 당시에 정한 고조선의 첫 수도는 둘이 있을 수 없는데, 『위서』에서는 '아사달'이라 하고 『고기』에서는 '평양성'이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
......
평양이나 아사달은 본래는 이처럼 보통명사였는데 고조선이 거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고유명사로 탈바꿈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사달'을 아침 해가 선명하게 비치는 양달의 뜻도 되므로 한자로는 조양(朝陽)이나 조선(朝鮮)이 '아사달'에 가까운 번역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달 · 평양 · 조양 · 조선은 표기만 다를 뿐 의미와 내용은 같은 것으로 동일지역에 대한 다른 지명 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을 지칭하는 조양이란 지명을 요서 대릉하 유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중국과 한반도를 통틀어 조양이란 지명이 유일하게 대릉하 유역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이었다는 사실을 무언으로 입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고기』에 단군은 처음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고 하였다. 여기서 평양성과 백악산 아사달을 서로 다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의 민족은 밝달족이고 고조선의 첫 수도는 아사달이었다. 그런데 아사달을 의미하는 조양, 밝달을 의미하는 홍산 · 적봉 · 백랑산 이런 지명들이 오늘의 대릉하 유역에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밝달'과 '아사달'의 흔적이 조양 · 적봉 · 홍산 · 백랑산 등의 지명에서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다.
전 중국과 한반도를 통틀어 '밝달'과 '아사달'의 흔적을 이처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오직 요서 대릉하 유역뿐이다. 이것은 요서 대릉하 유역이 고조선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5)
중국 문헌에 고조선의 첫 발상지에 관해 직접 언급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왕 위만이 왕험에 도읍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위만은 단군조선 · 기자조선을 이어 조선의 왕이 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을 추적하면 고조선의 발상지를 알아내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
조선왕 위만이 정했던 수도 왕험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기』 「색은」에서 왕험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면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라고 하였고
응소는 "요동에 험독현이 있는데 이곳이 조선왕의 옛 도읍지이다."라고 하였으며,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서광이 말한 창려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험성이 사실은 같은 곳이고, 응소가 말한 요동군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험성은 다른 곳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수도는 요동의 요양 부근과 요서의 대릉하 유역 등 두 군데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요동의 험독과 낙랑군의 왕험성 가운데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응소는 요동의 험독을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로 보았고 신찬과 안사고는 응소와 달리 낙랑군의 왕험성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보았다.
낙랑군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조선현을 수현으로 거느린, 한사군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군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전 도읍인 왕검성이 이곳에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신찬과 안사고가 낙랑군의 왕험성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본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는 낙랑군 조선현은 위만조선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위만조선 건국 이전 기자조선의 도읍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그러므로 기자조선이 건국되기 전 이곳은 단군왕검의 왕검성이 있던 지역이 명백하며 따라서 낙랑군 조선현이 곧 고조선의 발상지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요하와 난하 사이 대릉하 유역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다.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 이곳은 기자조선의 수도였으며, 기자가 망명해오기 전에는 단군왕검의 왕검성이 여기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발상지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대릉하 유역의 요서인 것이다.
그러면 요동의 험독은 무엇이가. 요동의 험독은 고조선의 첫 수도가 아니라 후기의 수도이거나 제 2의 수도 즉 부도라고 본다. 연나라 소왕 시기에 조선은 서쪽으로 2000여 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긴 일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때 조선이 요서 대릉하 유역에서 요동의 요하 유역으로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 당시 조선왕의 도읍지가 요동의 험독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6)
<자료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65-270쪽
(3)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355-357쪽
(4) <지식카페>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 문화일보 munhwa 2019-09-11
(5)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19-224쪽
(6)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3-210쪽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신채호, 조선상고사, 위즈덤하우스, 2014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비봉출판사, 2007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하,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문정창, 고조선사연구, 한뿌리, 1969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유엠부틴, 고조선연구, 아이네아스, 2019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6
윤내현, 우리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윤내현, 고조선연구 상·하, 만권당, 2016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만권당, 2017
윤내현, 한국고대사, 만권당, 2021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신용하,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연구, 2017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8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07
심백강,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바른역사, 2021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2021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6
김운회,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역사의 아침, 2012
정형진, 고깔모자를 쓴 단군, 백산자료원, 2003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유정희,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고구려의 역사, 아이네아스,2018
신채호, 조선상고사, 69-70쪽
정인보, 조선사연구 上, 우리역사연구재단, 133-139쪽
유 엠 부틴, 고조선연구, 아이네아스, 59쪽
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177-182쪽,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160-181쪽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142-150쪽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20_0010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20_0020
조선(단군)의 중심지는 중국 하북성 북경지역이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3.14
조선(단군)의 중심지는 중국 하북성 북경지역이다(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3.16
고조선 중심지는 대동강이었나, 요동이었나 (daum.net) 2016. 4. 13
KBS HD역사스페셜 – 첫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 KBS 2005.5.27 방송
대곡리 팔주령. 새겨넣은 기하학 문양은 지금도 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제정일치의 수장이 흔들어 하늘신과 조상신을 불렀을 것이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두차례에 걸쳐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예기들. 한꺼번에 국보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자료이다.
2400년 전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큰 일이 터졌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왕이 붕어(崩御)한 것이었다.
제정일치의 시대, 즉 세상을 다스리면서 천지를 농단하여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 일인독존의 왕이 거한 것이다. 제사장이자 왕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장례를 의논한다. 왕은 본향, 즉 천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돌로 파서 무덤을 만드는 한편 그 안에는 굴피나무로 통나무관을 만들기로 한다.
우선 통나무 관 밑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 두 자루를 깐다. 액막이용이다. 그런 다음 통나무관에 시신을 누이고 청동신기(神器)들 즉, 청동검과 거울, 방울, 도끼, 새기개 등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 모두 생전에 제사장이 하늘신,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킬 때 쓰던 예기들이다. 통나무관을 구덩이에 내리고 돌과 흙을 채웠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가득 쌓은 무덤형식은 훗날 적석목곽분이라 일컬어진다. 소국은 또 새로운 왕(제사장)을 세우고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간다.
2400년 만에 현현한 소국의 왕
최초 발견자 구씨의 집은 지금 폐가로 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각설하고 2400년 만에 현현(顯現)한 이 청동예기들을 둘러싼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무령왕릉 발굴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던 그 해 여름, 1971년 8월 어느 날.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씨(당시 67세)가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자기 집 북쪽의 담장 밖에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났다.
‘땅 속에 뭐가 있어서 이렇게 소리가 나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씨는 땅을 팠다. 그런데 그 안에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녹 슬고, 흙 묻은 물건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마을에 철컥컬컥 소리가 났다. 엿장수의 가윗소리였다. 구씨는 “때마침 잘 됐다”면서 땅속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파낸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건넸다. 이제 엿장수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씨로부터 무심코 이 철물을 받은 엿장수는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철물들을 수거하면 그 가운데는 꽤나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이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 않는가. 엿장수가 보기에 구씨가 건네준 이 물건들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구씨로부터 들은 바로는 땅을 파니 나온 물건들이라 하지 않는가.
■ 엿장수의 선택
선택의 기로에 선 엿장수는 결국 ‘신고의 길’을 선택하고 전남도청을 찾았다.
“당시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매장문화재는 발견한 즉시 신고해야 하지만 최초 발굴자인 구씨는 매장문화재인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야 엿장수가 신고하게 된 거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최초 발견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인 12월24일 조유전 학예사가 청동기 전문가인 윤무병씨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대곡리 현장을 들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유구는 파괴된 상태였다.
“발견 당시의 상황을 구씨로부터 듣고,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고 도면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의 조사는 없었다. 무령왕릉의 졸속발굴 이후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유전 학예사 등에 할당된 조사시간은 24일 단 하루, 즉 한나절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빨리빨리 조사’였던 것이다.
여하튼 그때 확인된 청동 잔무늬 거울(정문경·精文鏡) 2점, 팔주령(八珠鈴) 2점, 쌍두령(雙頭鈴)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이듬해 3월2일 한꺼번에 국보(제143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하나같이 획기적인 유물들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국보유물을 11점이나 발견하고 신고한 구씨와 엿장수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자인 엿장수는 사라졌고, 발견자인 구씨는 처음에 신고 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좀 걸리고 해서…. 결국 누구도 보상받지 못했어요.”
■ “야호! 터졌다”
37년이 흘러간 2008년 2월13일. 71년 당시 국보가 11점이나 나온 대곡리 옛 구재천씨 집 담장너머에 대한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의 재조사가 시작했다.
흉측한 폐가로 변해 있는 현장에 대한 정비계획의 하나였다. 발굴단은 무덤 바닥에 남아있던 목관의 흔적을 두부처럼 잘라 들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관의 흔적을 3분의 2나 걷어냈지만 더 이상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만약 유물이 나오면 내가 춤을 춘다고 했어요. 사실 혹 요갱(腰坑·묘광 바닥 가운데에 중요한 부장품을 매장하는 시설)을 확인할 수 있을까 기대했으니까요. 그러나 막판까지 징후가 없어 포기상태였죠.”(은화수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
20일 그런 상태에서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지도위원회를 열었다. 조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종의 수순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 11시30분. 무덤 바닥 남쪽에 있는 옅은 검은색 띠가 수상했다.
“이곳이 이상하지. 뭔가 느낌이 달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은 연구관이 트라우얼(Trowel·꽃삽 비슷한 발굴도구)을 넣었다. 뭔가 걸렸다. 살살 흙을 걷어냈다. 청동검의 끝이 2㎝ 정도 노출되었다.
“야호!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37년 전 구재천씨의 손을 피해 숨어있던 청동검 2점이 햇빛을 본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2400년 전 청동기인들이 붕어한 왕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부장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낸 것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BC 4~BC 3세기쯤 출현, 기원 전 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적석목관묘에서 출토되는 대표유물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 볼수록 신비로운 국보 13점
한국형 세형동검의 선조는 BC 9세기쯤부터 발해연안, 즉 난산건(南山根) 유적을 필두로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진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청동단검)이다. 이 청동단검의 전통이 한반도로 이어져 BC 4세기 무렵부터 한국형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다.
대곡리 청동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이다. 2400년 전 제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을 겸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神)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청동거울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었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사람과 왕 사이를 구분하는 절지천통(絶地天通)의 도구였을 것이다.
청동방울, 특히 팔주령과 쌍두령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 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삽입돼 있어 흔들면 딸랑딸랑거린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8개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정문경(청동거울)에도 동심원이 8개 그려져 있고, 8개의 방울이 있는 팔주령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일광문이 보입니다. 8이라는 숫자는 일본에서 ‘풍요’ ‘많음’을 뜻합니다. 결국 청동거울과 팔주령 등은 당대 샤먼이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요.”(이건무 문화재청장)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샤먼은 지금의 무당이 아니라 제정일치 시대의 왕, 즉 수장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청동거울이나 팔주령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기하학 문양을 재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수수께끼의 제작기법이죠.(이건무 청장)
■ 이름모를 엿장수가 던진 교훈
지난 10일 오후. 37년 전 대곡리 유적을 긴급 조사했던 고고학자 조유전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노학자가 되어 다시 현장에 섰다.
곧 무너질듯한 폐가가 된 옛 구재천씨의 집, 그리고 담장 옆 텃밭으로 변한 출토현장. 보물이 13점이나 확인된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바뀐 모습이다. 그래도 정비계획이 섰다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저 뒷산(비봉산·해발 55.9m)에는 임진왜란 때 축조된 성(城)이 있었는데…. 참, 마을 안쪽에 서있던 석비는 어디갔나? 마을 안엔 고인돌이 여럿 있었는데….”
37년 전 조사 당시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듯 노학자의 말문이 터졌고, 함께 간 후학(이종철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의 대답이 줄을 잇는다. 젊은 고고학자의 시절로 돌아간 조유전 선생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최초 발견자 구재천씨와 이름 모를 엿장수다.
“지금도 구재천씨의 얼굴이 기억나요. 그분 덕분에 어쨌든 국보 11점이 발견됐잖아요. 그리고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엿장수도….”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엿이나 바꿔 주고 끝났으면 고물 신세로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고철은 사려깊은 ‘엿장수의 마음대로’ 신고가 되었고 마침내 11점의 국보로 거듭났다. 이름없이 사라져버린 엿장수의 이야기는 요즘 문화유산을 전봇대쯤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8)
<주>
부여 송국리 선사 취락지(扶餘 松菊里 先史 聚落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창원 진동리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고남리조개무지
진주 대평리 유적(晉州 大坪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제주 삼양동 유적(濟州 三陽洞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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