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아우라지 유물, 세이마 계통.. 한반도 청동기 뿌리는 시베리아"

2017. 11. 9. 03:01
 

강인욱 경희대 교수 논문서 주장

[동아일보]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3세기 청동 장신구(위 사진)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 장신구. 두드려서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형태가 서로 닮았다. 강원문화재연구소·강인욱 교수 제공

 

 
한반도 청동기의 뿌리는 기원전 20세기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라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 학계는 비파형동검의 중국 랴오닝(遼寧)지역 전래설 위주로 한반도 청동기 기원을 논의해 왔다. 이번에 제기된 견해는 지난해 11월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 청동 유물을 연구한 결과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최근 발표한 논문 ‘한반도 청동기 사용의 기원과 계통’에서 “정선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4점의 청동 장식은 한반도에 청동기가 들어온 연대를 파격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실제로 돌 반지처럼 얇게 편 고리와 대롱옥을 닮은 청동장신구 4점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3세기 유물로 판명됐다.

지금껏 남한에서는 비파형동검(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보다 앞선 시기의 청동유물이 드물어 이른 청동기시대를 놓고 ‘무문(민무늬)토기 시대’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청동기시대를 정의하는 핵심 기준인 농경 흔적은 확인되는데 정작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라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기원전 13세기의 이른 시기에도 청동기가 사용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강 교수는 논문에서 아우라지 청동기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를 비교했다.

돌 장신구에 끼울 수 있도록 청동기를 두드려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양식이 서로 일치했다. 그는 “아우라지 청동기는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무기나 마구보다 청동 장신구 위주인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청동기시대에 국한할 때 중원(中原)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다만 중국 북방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평북 신암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서북지방에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방통행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곡옥(曲玉)을 모방한 청동기처럼 한반도 고유의 문화 요소도 가미됐다.

 

강 교수는 “석기 전통이 강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가 들어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기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사용했다”고 말했다. 돌 장신구에 끼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아우라지 청동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철기가 도입돼 석기의 효용성이 사라진 세형동검 단계 이후에야 한반도에서 청동기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1)

 

 

 

 

(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흐르는 강물따라 문명이 어우러지다

“무릇 나흘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도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년)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산 첩첩 하늘 한 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메산골이었다.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이라 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아직은 정확한 분석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 ‘산 첩첩 하늘 한 뼘’ 이고 산 사람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7월 어느 날. 기자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 등과 함께 아우라지를 찾았다.

아우라지라. 태백산에서 출발, 정선 임계 쪽으로 굽이치는 골지천과, 평창 발왕산에서 발원한 물이 노추산을 돌아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려온 송천이 어우러진다 해서 붙은 아름다운 우리 말이다.

“여하간 예부터 사람은 모질기는 해요. 이 첩첩산중까지 진출했다니….”

안개비가 아우라지 심산유곡을 뒤덮은 시간. 잠시 감상에 젖었던 기자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한마디 던졌다.

“강변이잖아. 구석기 시대부터 한강변은 사람들의 터전이었지.”(조유전 관장)

“하기야 강의 역사를 모르면 사람의 역사를 복원하기 힘들기는 해요.”(이재 원장)

동쪽으로는 험준한 백두대간의 줄기가 사람들의 발길을 끊어놓았고, 한강의 숨이 끊어질 듯 최상류에 놓인 이 아우라지에 예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정선지역에는 신동읍 덕천리 소골과 운치리·여량리는 물론 영월 쌍굴유적, 횡성 중금리 등 남한강 유역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발견되었어요.”(조 관장)

“신석기뿐 아니라 덕천리 소골과 소사, 운치리, 수동, 정선읍 가수리, 용탄리 등에서 철기시대 유물이 확인됐고,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유적들이 다수 보이고…. 강변을 따라 있는 충적대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왔다는 얘기죠.”(지현병 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

■ “강(河)은 선사시대 고속도로”

그리고 2005년. 정선군은 아우라지(정선군 북면 여량2리) 일대를 아리랑을 주제로 한 관광단지로 조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뜻을 접어야 했다. 강변의 충적대지가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조상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석기~청동기~철기~신라시대 유적이 켜켜이 나왔어요. 특히 청동기 주거지가 무려 28동이 나왔는데요. 그러나 단순히 많이 나왔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윤석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조사1부장)

그랬다. 아우라지 유적에서 확인된 두 가지는 한국선사고고학을 뒤흔들 핵폭탄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의 출현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지난해 초 2007학년도 고교국사교과서에 수정된 청동기 기원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떠올릴 것이다.

아우라지에서 확인된 덧띠새김무늬토기.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개과정의 고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쯤에 중국 랴오닝(遙寧), 러시아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께에서 1500년께로 한반도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2007년판 국사교과서)

이 대목은 “신석기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쯤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는 기존 내용과 비교할 때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500~1000년 올려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계일각에서는 “너무 성급하다”고 비판하는 등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교과서 내용 중에 있듯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 속한다.

한반도 조기청동기의 시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대략 BC 15~13세기 정도이다.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출현하는 등 우리 민족사의 기틀이 마련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달리 보면 우리 역사를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반도로 국한시키니까 이런 논쟁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민족문화의 시원을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찾으면 논쟁의 여지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찌됐든 당시 교과서를 쓴 최몽룡 서울대교수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끌어올리면서 단적인 예로 든 것이 바로 막 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이었다.

“남한강 최상류인 정선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서 조기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각목돌대문토기(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런 토기는 정선뿐 아니라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어요.”(최몽룡 교수)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발해연안에서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로 한반도까지 뻗어 있어요.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다 BC 15~13세기 유적들이지.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그 당시의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지.”(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도로가 없었던 예전에는 강이 고속도로 기능을 했을 것”이라면서 남한강 최상류까지 선사유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했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닙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BC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는데요.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지.”(조유전 관장)

■ 인골이 간직한 비밀

또 하나, 아우라지에서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나왔다. 2005년 7월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고인돌 4기 가운데 한 기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대퇴부뼈가 나왔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물론 이 인골의 연대는 BC 8~7세기로 측정되었으므로,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BC 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인골분석을 맡은 서울대 의대팀은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 모두 현재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선군에 의해 훼손된 뒤 9개월째 방치된 아우라지 고인돌 군. 포장덮개로 덮인 채 널브러져 있다.

 

“현대 한국인의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귀 사이의 길이 비율)는 100대 80~82이고,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입니다. 그런데 황석리 인골은 100대 66.3이란 말이지. 이로 미루어 보면 황석리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일 수밖에 없어.”(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

더구나 얼굴전문가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이 복원한 황석리인은 그냥 보아도 서양인의 그것과 똑같다. 또한 지금도 충북과 경북 산간지역의 사람들 가운데는 황석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이런 상황에서 아우라지에서 출토된 서양인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의 노출 소식이 알려졌으니…. 무엇보다 황석리와 정선은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한반도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이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BC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거든. 그런데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하지만 아직은 서양인의 유전자와 관련해서는 퍽이나 조심스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한 주제다.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청동기시대 한반도를 지배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우리가 서양인의 후손이냐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황석리인이나 아우라지 출토 인골이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다만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겠지.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해야 해.”(김병모 교수)

하지만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분석을 맡은 서울대 해부학 교실팀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는 전혀 없습니다. 검증된 결과가 나와야 하고 해외 학계에서도 학술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신동훈 교수)

어쨌거나 지금은 일본과 이스라엘 등 해외기관에도 분석을 맡겨놓은 상태. 아직 분석팀의 연구결과와 공식발표가 없는 만큼 기다릴 수밖에 없다.

■ 무자비한 유적훼손과 방치

그런데 아우라지를 찾았던 그날. 인골이 나온 고인돌을 둘러보던 기자는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고인돌이 어디 있노?”

전문가인 조유전 관장도 4기나 된다는 고인돌을 좀체 찾을 수 없었다. 긴 풀을 헤치고 한참이나 더듬거리던 일행의 눈앞에 뭔가 흉측스러운 장면이 목격되었다. 줄로 아무렇게나 쳐놓은 펜스와, 그 안에 쓰레기를 덮은 듯한 파란 포장덮개가 내리는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저게 고인돌을 덮은 포장덮개야?”

자초지종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난해 9월, 정선군이 무슨 축제를 벌인답시고 포클레인을 동원해서 고인돌 4기를 마구 훼손시켰다. 그것뿐이면 다행이랴. 그것도 모자라 인골이 확인된 고인돌의 덮개돌을 조형물로 꾸미는데 사용했단다. 함께 놓여 있던 덮개돌 좌우편 파편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문화재청이다. 시굴조사 때부터 한반도 청동기시대 개막의 열쇠를 쥔 아우라지 유적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한 전문가들이 ‘빨리 사적으로 지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더욱이 고인돌 훼손사실을 조사한 뒤 문화재청이 한 일은 훼손된 고인돌을 흉물스러운 포장덮개로 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2007년 11월이니 9개월째 그런 한심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

조유전 관장이 민망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기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못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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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북한강변 화천 용암리·위라리 유적

‘3000년전 청동기마을’ 정밀한 사회구조 갖췄다

BC12세기부터 1000년이상 지속된 대규모 취락
31평형 대형 주거지·선반·벤치·침상생활 흔적
마을행사 회의하고 석기공장·석기수리점 구비

북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용암리 청동기 타운. 이 일대 전체가 선사시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 여기 토기편이 있네. 어! 돌도끼도 보이네.”

2001년 1월. 강원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일대를 둘러보던 지현병 당시 강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의 눈이 반짝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알알이 박혀있는 선사시대 유물들이 보였던 것이다.

“수상한 곳이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들러본 겁니다. 바로 윗동네에 있는 위라리 적석총도 조사할 겸 해서 왔던 것이고….”

수상한 충적대지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자. 이곳은 북한강변. 용화산(해발 878.4m)이 빚어낸 많은 지맥 가운데 북서로 향하는 구릉의 끝이 북한강과 맞닿은 곳에 펼쳐진 충적대지다.

“화천군은 고산준령으로 유명하잖아. 우리 옛날(1960~70년대)에 겨울철 일기예보를 들을 때 꼭 나왔던 전방과 강추위의 상징. 대성산(1073.1m), 백암산(1179.2m), 사명산(1197.6m), 화암산(1468m) 같은 10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니….”(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부연하자면 화천군에서 논과 밭의 비율은 8%에 불과하고, 그것도 밭이 논보다 3배가 더 많을 정도다.

“화천군 전 지역을 통틀어 개발할 곳을 찾는다면 이곳 용암리 충적대지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화천군은 이곳 일대에 생활체육공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연히 지표 조사가 수반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대학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는데, 지표상에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연히 화천군은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102.5㎡(31평)에 이르는 대형 주거지. 3000년 전 이 마을을 다스린 수장의 집일 가능성이 높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서는 ‘인접한 고고학적 양상과 지형적인 특성으로 보아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은 높으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여운을 남겼어요. 그래 이상한 기분이 들어 찾아온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강변의 충적대지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있고, 어로활동을 할 수 있으니 먹을 거리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 걱정 없는 요즘 사람들도 강변에 터전을 잡아 마을 이루고, 또 전원주택을 짓네, 아파트를 짓네, 위락시설을 만드네 하잖아. 화천군의 생활체육시설 조성도 같은 맥락이고…. 삶의 방식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겠죠.”(조 관장)

그러니 이런 충적대지를 만난다면 예외없이 옛 사람들의 흔적, 즉 유적이 남아있다고 보아도 좋다. 어쨌거나 선사유적의 존재를 확인한 지현병은 즉시 화천군청에 공사중지를 요청했다.

“유적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공사중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31기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곧 대규모 발굴이 이뤄졌다. 그 결과 BC 12세기부터 조성된 주거지 170기와 수혈(구덩이)유구 35기, 굴립주 유구 13동, 추정 토광묘 12기 등 230여기의 청동기시대 유구가 쏟아졌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정리한 유물만 1350점에 이를 정도다. 발굴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었다.

홍수에 잠긴 ‘청동기 타운’

“홍수로 인해 조사 중이던 유적지가 물에 잠기기 일쑤였어요. 특히 2003년 8월이었는데요.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대비가 2박3일 동안 내리더군요.”(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북한강으로부터 물이 범람해서 차기 시작합디다. 걷잡을 수 없었어요. 3000평에 이르는 유구밀집지역은 순식간에 수심 1m50㎝가량의 물바다를 이뤘어요.”(지현병)

이미 노출된 유구를 완전히 뒤덮은 물 위에는 물새들이 한가로이 둥둥 떠다니고….

벤치 혹은 침상, 아니면 선반의 흔적(양쪽에 직사각형 형태로 표시해놓은 곳)이 있는 19호 주거지 모습이다.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는데, 정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물론 유구 전체에 두꺼운 커버를 씌워놓기는 했지만…. 애써 조사한 유구가 물 때문에 모두 붕괴되거나 씻겨져 내려갔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사단은 양수기 4대와 경운기 1대를 동원,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물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선사시대에도 그랬을까. 이런 홍수와 범람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오랜 시간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런 범람의 원인 또한 사람 때문이라고 봐야지.”(조 관장) “무슨 소립니까?”(기자)

“바로 사람이 만든 ‘댐’이라는 녀석 때문이지요. 가뜩이나 손바닥만한 충적대지인데, 화천댐(1941년)과 춘천댐(1965년)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북한강 유역엔 물이 차기 시작했어요.”(김권중)

천신만고 끝에 물이 빠졌고, 유구에 남긴 상처는 비교적 가벼웠기 때문에 조사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마철을 예상하고 유구노출을 깊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구의 윤곽만 잡아놓고 여름철이 끝나면 바닥을 깊게 조사하려 했는데…. 장마철을 고려해서 작업했기 때문에 유구손상은 거의 없었습니다.”(지현병)

여름엔 장마와 폭염, 겨울철엔 북한강의 매서운 바람과 강추위….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발굴은 그야말로 ‘대박’ 그 자체였다.

청동기시대 31평 아파트, 석기공장, 수리점

“이곳은 BC 12세기부터 3~5번 정도 교체된 청동기 시대 대규모 취락지였음이 밝혀졌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세대가 터전을 잡고 살다가 후손대에 이르면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사는 형식으로 1000년 이상 지속된 청동기시대 마을이라는 것이다. 아니 유적의 규모와 연속성으로 보면 ‘청동기타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크게 보면 3단계였던 것 같아요. BC 12~9세기로 편년되는 초기 청동기시대와, BC 8~5세기를 풍미한 중기, 그리고 BC 5~2세기 사이에 조성된 청동기 후기의 유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김권중)

특별히 기자의 눈에 띈 몇몇 주거지가 있었다. 우선 길이 19.34m, 폭 5.30m, 깊이 40㎝, 즉 102.5㎡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이다. 평수로 따진다면 전용면적 31평이나 되는 중형아파트.

“재미있네요. 지금의 평형으로 치면 38~40평형 아파트 정도는 되잖아요. 신분이 얼마나 높았을까요.”

주거지 구조를 보면 중앙부분에 건물을 떠받친 것으로 보이는 7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주공 열 사이에는 모두 5기의 화덕이 역시 일렬로 설치됐다. 그런데 화덕에서는 불을 땐 흔적, 즉 목탄과 불에 탄 흙이 역력했다. 또 하나, 주거지 안에서는 무엇을 저장한 것으로 보이는 저장공이 27개나 됐다.

“BC 12~9세기 주거지인데 규모가 이 정도니…. 청동기 시대 때부터 계급분화가 이뤄지니까 이 청동기 마을을 지배했던 수장(지도자)의 집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예컨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의 흔적으로도 보이고….”(지현병)

또 하나, 조사단을 매혹시킨 구조가 있었으니 바로 19호 주거지로 대변되는 특이한 구조였다.

“19호는 면적이 약 11평 정도인데요.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벽을 따라 요즘의 벤치나 침상, 혹은 선반 같은 구조물이 3곳이나 존재했음을 알리는 기둥구멍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길이 201㎝·폭 57㎝, 길이 197㎝·폭 72㎝, 길이 203㎝·폭 58㎝짜리 등 3곳….”(김권중)

3000년 전 용암리 청동기 마을 사람들이 공회당인 이곳 19호 건물에 모여 벤치에 앉아 마을 행사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용암리 사람들은 일찍부터 침상생활을 즐긴 것은 아닐까. 혹은 선반 위에 물건을 보관해놓는 지혜를 지닌 것은 아닐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또 하나 특징은 이미 이 청동기 마을에서는 분업화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유구가 여럿 확인된다는 점.

“87호 유구를 보면 재미있는데요. 화덕이 보이지 않고, 돌가루와 미세한 석판들이 많아요. 잠을 자지 않았던 곳. 이곳은 바로 석기를 만드는 ‘석기공장(工房)’이었을 겁니다.”

158, 159호 건물지를 보면 더욱 흥미롭다. 즉 이곳에는 끝이 닳아버렸거나 깨진 석촉과 석부, 그리고 숫돌이 확인됐다.

“사용해서 닳아버렸거나 파손된 도구들을 숫돌로 갈거나 다시 만들었음을 보여주는데요. 한마디로 ‘석기 수리점’이었던 셈이죠.”

이 모든 조사성과는 용암리 사람들이 이미 3000년 전부터 지도자가 마을을 지휘하고, 회의를 통해 행사와 의례행위를 결정했으며, 석기공장과 수리점까지를 완비한 하나의 정밀한 사회구조를 확립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청동기 타운에서의 단상(斷想)

석기공장(공방)터. 석기제작 때 나오는 돌가루와 석편들이 즐비하다.

2008년 9월. 기자가 조유전 관장·지현병 강원문화재연구원장과 함께 용암리를 찾았을 때…. 이미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초등학교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청동기타운 밀집지역은 지금 국궁장(國弓場)이 되었다. 유적은 바로 그 땅 밑에 그대로 묻혀있고, 인접지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발굴해서 확인된 면적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다. 이곳 용암리~위라리에 걸쳐 얼마나 넓은 청동기 타운이 조성됐는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일행은 용암리와 인접한 위라리로 향했다. 소유자가 우사(牛舍)를 만들려고 했지만, 지난해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시굴조사 결과 용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 정식 발굴이 필요했던 상황.

“당시 예상 발굴비가 5억원 가까이 됐어요. 하지만 대안이 떠올랐어요. 문제의 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이 7000만~8000만원 정도라고 했어요. 그러니 거액의 발굴비를 들이느니, 차라리 8000만원으로 땅을 사서 보존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1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뒷소식이 없는 상태. 조유전 관장이 안타까워 한다.

“얼른 해결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합니다. 땅값이 오르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어요. 천문학적인 보상비가 필요한 풍납토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데….”

고개를 돌리자 용암리~위라리 사이 북한강변 충적대지에 심상치 않은 구릉 하나가 외로이 서있다. 구릉이라고 보기에도 너무 작다. 지현병 원장이 소리친다.

“저것이 바로 위라리 적석총이라 합니다.”

가까이 가보았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와 풀이 적석총을 뒤덮었으니, 차마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미 적석총의 외부벽은 주민들의 경작으로 인해 파먹히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위라리 적석총은 북한강변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상류에 있는 적석총이다.

지난 2월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이건무 현 문화재청장은 적석총이 방치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도 이 적석총은 아무런 조치없이 9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냥 그대로’다. 강원도 문화재위원회는 무엇을 하는지, 문화재청은 또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기분으로 출발했던 청동기 마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짜증 지대로’인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3)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의암댐 물 빠지자 드러난 ‘중도식 토기’… ‘원삼국’ 역사 다시 써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9월 7일 09시 03분 
 
 

<15> 춘천 중도 유적 발굴한 이강승 충남대 교수

이강승 충남대 교수가 지난달 24일 강원 춘천시 중도에서 1980년 발굴 당시 작업(아래 사진)을 회고하고 있다. 그가 발굴한 1호 집자리에서는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을 바꾼 ‘중도식 토기’가 발견됐다. 춘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지난달 24일 이강승 충남대 교수(67)와 찾은 강원 춘천시 중도(中島). 그가 1980년 발굴해 대학 교재와 교과서에도 실린 ‘중도식(中島式) 토기’가 나온 1호 집자리(주거지 흔적)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흔한 표지판조차 없이 삭막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만 유적 위를 덮고 있었다. 이 교수는 36년 전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1호 집자리가 있었을 위치에서 사진촬영을 마쳤다. 집자리 근처에서 50여 m 떨어진 레고랜드 사업부지에서는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4년 사업부지 안에서 1400여 기에 이르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주거지 등이 무더기로 발견돼 개발 논란이 일었다.

“많은 게 바뀌었지만 선착장 자리는 그대로군요. 모든 이야기는 저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지난해 정년을 맞은 노교수의 눈은 이미 1977년을 향하고 있었다.

○ 운명은 정해진 자의 몫
민무늬에 바닥이 평평하고 주둥이가 바깥으로 벌어진 전형적인 ‘중도식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가봐야 별 것 없을 거요. 내가 방금 가보니 토기 조각 하나 없습디다.”

1977년 5월 20일 춘천 중도 건너편 선착장. 지표조사차 중도행 배를 기다리던 이강승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안춘배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전 신라대 교수)을 우연히 만났다. 중도 조사를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안춘배의 말에 그는 별 기대감 없이 배에 올랐다. 하지만 운명은 정해진 자의 몫이던가. 그는 운 좋게도 중도에 도착한 직후 강물에 의해 깎인 중도 단층에서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의암댐 수위 조절로 만수위 때 중도를 방문한 안춘배는 물속에 단층이 잠겨 토기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강승은 수위가 낮아질 때 들어가 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행운이 계속 이어졌다. 3년 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1980년 5월 중도 사전답사를 나섰을 때에도 강가 단층에서 토기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지표조사 때보다 더 큰 수확을 얻었다. 조각이 아닌 완형(完形)의 토기가 나온 것이다. 그는 중앙박물관 고고부로 수습한 토기를 가져왔다. 그즈음 다른 업무차 고고부를 방문한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이 토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병삼은 “야,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내뱉고 서둘러 최순우 중앙박물관장을 만나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박물관이 이후 5년간 진행한 중도 발굴의 서막이었다. 이강승은 “한 관장은 경주에서 나온 와질토기(瓦質土器·회색이며 기와처럼 무른 토기)의 고고학적 맥락을 잘 알고 있었다”며 “중도 토기를 보고 와질토기와 대응하는 유물이 한반도 중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중도식 토기, 원삼국시대를 보는 창


1970년대 후반 경주 조양동 등에서 발견된 와질토기는 고고학계에 실체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 토기로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삼국시대 토기를 잇는 과도기 단계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와질토기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 토기가 중부지방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한동안 오리무중이었다. 민무늬 혹은 타날문(打捺文·실이 감긴 도구로 두드려 새긴 무늬)토기로 나뉘는 중도식 토기가 발견되면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계는 중도식 토기가 원삼국시대 문화 교류의 양상을 반영하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중도식 타날문토기는 연나라 등 중국 전국시대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전통을 잇는 것으로, 한반도 서북지역 혹은 동북지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강승은 “중도에서는 민무늬토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았다”며 “이곳 주민들이 타날문토기 제작 기술을 나중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노학자의 겸손 그리고 용기

누구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용기와 겸손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강승은 1980년 당시 1호 집자리가 ‘여(呂)자’형 구조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사각형 주거지에 대한 편견에 갇혀 주거 공간 앞에 또 하나의 전실(前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앙박물관의 1980년대 발굴보고서에는 1호 집자리가 말각방형(抹角方形·모서리를 둥글게 한 사각형) 형태라고만 기술돼 있다. 1호 집자리의 여자형 구조는 2010년 중도 재발굴 때 뒤늦게 밝혀졌다.

“중도는 현장 책임자로 첫 발굴이어서 미숙한 점이 많았고 부담감도 컸습니다. 돌이켜보면 시간, 예산의 제약으로 폭넓게 발굴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앞으로 원삼국시대 무덤과 문화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레고랜드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유적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신중하게 진행되길 바랍니다.”(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비파형동검 발굴의 달인… 국내 40점중 18점을 그의 손으로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8월 3일 04시 32분 

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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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3> 여수 적량동 고인돌 발굴 이영문 목포대 교수

이영문 목포대 교수가 7월 20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정유공장 내에 보존된 고인돌 2기 앞에서 발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고인돌 무게는 각각 90t에 이른다. 여수=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지난달 20일 전남 여수시 적량동 GS칼텍스 정유공장. 저유탱크들 사이로 나란히 선 거대한 돌덩이 두 개가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덮개돌 무게만 90t에 이르는 고인돌 2개. 하나는 고임돌 4개가 육중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바둑판식, 다른 것은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화석연료 공장 내부에 있는 거석(巨石)은 선사시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직접 발굴한 이영문 목포대 교수(63)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듯 고인돌 곳곳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는 “반경 500m 안에서 고인돌이 300기나 나왔는데 이 2기는 다른 것들보다 5∼10배나 컸다”며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고인돌처럼 외부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안에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돌을 바라보며 27년 전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 온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 첫 출토
2009년 전남 여수시 월내동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 동북아지석묘연구소 제공“선생님, 파괴된 석실에서 동검 조각 같은 게 여럿 나왔습니다.”

“동검? 자네 잘못 본 거 아닌가?”

“3년 전 주암댐에서 나온 것처럼 홈이 파여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그리로 가겠네.”

1989년 1월 18일 여수 적량동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공사 현장. 사업부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25기를 조사하던 도중 이영문은 제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어가 걸린 느낌에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붓과 꽃삽을 잡고 조심스레 유물을 노출시키자 비파형동검(銅劍)과 비파형동모(銅모·청동투겁창) 조각들이 보였다. 발굴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여수반도에서 동검과 동모가 처음 출토된 순간이었다.

그해 3월 5일까지 발굴이 진행된 이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 7점과 비파형동모 1점, 관옥 5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비파형동검이 이처럼 많이 나온 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고인돌에서 쪼개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이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동검을 2, 3조각으로 쪼개서 매장하는 게 보통이다. 동경(銅鏡)을 깨뜨려 무덤에 부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완형의 동검이 나온 고인돌(7호)은 보존 상태도 좋았다. 당시 덮개돌과 고임돌 6개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덮개돌을 걷어내자 작은 돌들로 채워진 지하석실이 있었고, 돌무지 아래서 동검이 나왔다. 다음은 이영문의 회고.

“경험상 석실 깊은 데에서 나오는 동검은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7호 고인돌 동검은 불과 지표로부터 20cm 아래에서 출토됐는데 상태가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굴한 것 중 최고로 치는 유물이죠.”

○ 팠다 하면 비파형동검 우수수…국내서 가장 많이 발굴

고고학계에서 이영문은 비파형동검 발굴의 1인자로 통한다. 그의 손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지금까지 총 18점에 이른다. 전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40여 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이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동검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그만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메카’ 전남 화순군이 그의 고향인 것도 마치 고인돌 고고학자의 운명을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고향인 화순 벽송리 마을에 고인돌들이 있어요. 어릴 때 선산을 오가면서 친척들이 ‘이게 뭔데 여기 있느냐’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그게 고인돌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서야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다. 전남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9년 해남 북평종합고 교사로 발령받았지만,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내고 전남대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인돌 발굴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안정적인 교직까지 버린 것이다.

고고학계는 그가 발굴한 비파형동검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북한을 거쳐 남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동북아 문명교류의 양상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만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기존 학설을 깰 수 있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묻자 그는 “청동기시대 당시 여수 일대에서 고인돌을 쌓은 집단들의 생활유적을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비파형동검들이 모두 외부에서 전래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여수에서 직접 제작했던 장소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겁니다.”(5)

 

 

평창 청동기시대 무덤 속 비파형동검 주인은 20대 여성이었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8년 2월 14일 10시 49분
  •  
  • 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 인골 분석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의 석관묘 내부에서 발견된 사람 뼈와 비파형동검의 모습. 한반도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두 유적이 함께 나온 최초의 발굴이었다. 2년간의 분석 결과 유골 주인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돼 학계의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떠올랐다. 문화재청 제공선사시대부터 고대 국가까지 사회를 이끈 리더는 으레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통념을 뒤집는 청동기시대 문화재가 출토됐다. 여성이 부족을 이끈 제사장이나 정치체제 수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人骨)이 국내 처음으로 확인됐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으로 확인됐다”고 13일 밝혔다. 청동기시대 여성 인골이 한반도에서 출토된 적은 있으나 당시 지배층의 전유물인 동검과 함께 발견된 것은 사상 최초다.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선 청동기시대의 정치체제에 대한 재접근이 필요할 만큼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비파형동검. 문화재청 제공이 인골은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진행한 2016년 발견 당시부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인골과 동검이 따로 발견된 적은 있으나 한반도에서 두 유적이 함께 나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2년 동안의 분석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김재현 동아대 고고미술학과 교수팀이 대퇴골 크기와 근육, 치아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의 나이는 20대 초반, 신장은 160.4cm로 추정됐다. 초기 철기시대 여성으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늑도 유골보다 10cm 이상 월등히 클 정도로 신체 조건이 좋았다.

청동기시대에 동검과 함께 매장하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동검은 제례 의식을 지낼 때 이용되는 제기(祭器)로 제사장이나 정치적 지도자의 무덤 등지에서만 출토된다. 이번에 발견된 비파형동검은 길이 26.3cm, 폭 3.8cm로 두 동강 난 채로 석관 동쪽 측면에 묻혀 있었다. 출토 동검의 양식은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지녀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인물로 추정된다.

발굴 현장에서 석관묘의 덮개돌을 열기 전 모습.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제공지금까지 한국 선사·고대사에서 여성이 제사장이나 정치 지도자였던 기록은 신라 2대 왕인 남해차차웅의 여동생 아로공주(阿老公主)가 가장 빨랐다. 김창석 강원대 중앙박물관장(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은 “삼국시대 초기 여성이 제사를 주관했다는 극히 적은 기록이 있지만 이보다 앞선 선사시대엔 여성 제사장이나 지도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며 “고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성 인골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청동기문화의 양상을 새롭게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일본에선 청동기시대였던 야요이(彌生)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에 여성 제사장이었던 히미코가 왕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김재현 교수는 “그동안 한반도의 비파형동검 등 물질 중심으로 청동기문화가 일본에 전래됐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 발견을 통해 여성의 사회 참여 등 사회·정치적인 제도 역시 일본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이 같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일부터 평창 하리 일대에서 발굴한 석관묘와 인골, 관옥과 토기 등을 복원한 모습으로 전시한다. 김 관장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맞아 강원도의 유구한 역사와 고대 문화를 널리 알리고 관련 연구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6)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일본보다 600년 앞선 탄화미 발견… 내 인생 최고의 유물”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7월 13일 03시 00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2>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한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가 7일 경기 여주시 흔암리 유적 근처에 재현된 움집 앞에서 탄화미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여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허 참, 임 선생이 미국서 ‘요상’한 걸 배워왔네.”

1975년 11월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 이곳을 찾은 선배 교수들이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75·서울대 명예교수)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땅을 파기도 빠듯한 시간에 임효재가 이끄는 발굴팀은 화덕 자리(爐址·노지)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연구실에서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다. 교수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찾아내려는 건가?” “불에 탄 쌀(탄화미·炭化米)을 찾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낱알도 찾기 어려운데 땅속에서 그 미세한 걸? 음 알겠네….”
임효재는 1968년 스튜어트 스트루에버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창안한 부유법(water flotation technique)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흔암리 발굴 현장에 적용했다. 부유법은 탄화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을 물에 붓고 위에 뜬 물질을 채로 걸러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이다. 탄화곡물은 불에 탄 상태라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돼 있다.

유구에서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의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전부였던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는 것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40여 년 만에 흔암리 유적을 다시 찾은 임효재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한반도 최고(最古)의 탄화미를 결국 찾아냈다”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고(最高)의 유물”이라고 회고했다.

○ 일본 학계의 ‘한반도 전파설’을 깨뜨리다

1976년 4월 발견된 탄화미.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선생님, 아무래도 뭔가 나온 것 같습니다.”

1976년 4월 여주 흔암리 현장 연구실. 핀셋으로 부유물을 하나씩 헤집으며 한참 돋보기를 들여다보던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현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가 임효재를 급하게 불렀다. 전형적인 타원형의 탄화미였다. 꼬박 6개월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작업한 끝에 나온 값진 성과였다. 앞서 임효재는 1972∼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유학 시절 부유법을 배웠다. 임효재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 학계는 농경유적에서조차 곡물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 뜬 장님’과 같은 처지였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연대 측정을 위해 탄화미와 함께 출토된 목탄(木炭)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 동시에 보냈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 연구소에서 교차검증을 실시한 것이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놀라웠다. 두 연구소 모두 기원전 10세기로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흔암리 탄화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 동시에 일본보다 600년 이상 앞선다. 흔암리 발굴 이전 최고(最古) 탄화미는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기원후 1세기였다.

학계는 흥분했다. 벼농사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福岡) 현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기원전 3~4세기)가 김해 패총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흔암리 탄화미 발견을 계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임효재는 벼농사의 황해 횡단설을 제기했다. “중국 양쯔(揚子) 강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들어왔다고 봅니다. 이후 한강을 따라 퍼지면서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 아시아 문화교류사 열쇠를 찾아

1975년 탄화미를 얻기 위해 흙을 물에 넣은 뒤 체질을 하고 있다. 서울대 박물관 제공학계는 벼농사의 기원이 고대 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흔암리 발굴의 의미를 높게 평가한다. 벼농사가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 전파됐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교류사 연구에서도 중요하다. 1978년 흔암리 발굴보고서는 “흔암리 탄화미는 기원전 7∼13세기 전후 한반도 문화에 영향을 미친 중국 룽산(龍山) 문화의 파급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임효재의 제자인 이경아(미 오리건대 교수) 안승모(원광대 교수) 김민구(전남대 교수) 등이 식물고고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노교수에게 흔암리 유적의 남은 학술적 과제를 물어봤다. “흔암리 유적에 담긴 당시 사회구조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주거지별로 흙을 채취하면 곡물의 양이나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들 사이에 사회계급이나 기능의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죠. 후학들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7)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 전남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예기

입력 : 2008.06.20 17:49

 

엿장수 안목 덕분에 고철 위기 벗어난 ‘국보’

 

대곡리 팔주령. 새겨넣은 기하학 문양은 지금도 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제정일치의 수장이 흔들어 하늘신과 조상신을 불렀을 것이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두차례에 걸쳐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예기들. 한꺼번에 국보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자료이다.

 

2400년 전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큰 일이 터졌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왕이 붕어(崩御)한 것이었다.

제정일치의 시대, 즉 세상을 다스리면서 천지를 농단하여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 일인독존의 왕이 거한 것이다. 제사장이자 왕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장례를 의논한다. 왕은 본향, 즉 천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돌로 파서 무덤을 만드는 한편 그 안에는 굴피나무로 통나무관을 만들기로 한다.

우선 통나무 관 밑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 두 자루를 깐다. 액막이용이다. 그런 다음 통나무관에 시신을 누이고 청동신기(神器)들 즉, 청동검과 거울, 방울, 도끼, 새기개 등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 모두 생전에 제사장이 하늘신,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킬 때 쓰던 예기들이다. 통나무관을 구덩이에 내리고 돌과 흙을 채웠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가득 쌓은 무덤형식은 훗날 적석목곽분이라 일컬어진다. 소국은 또 새로운 왕(제사장)을 세우고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간다.

 

2400년 만에 현현한 소국의 왕

최초 발견자 구씨의 집은 지금 폐가로 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각설하고 2400년 만에 현현(顯現)한 이 청동예기들을 둘러싼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무령왕릉 발굴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던 그 해 여름, 1971년 8월 어느 날.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씨(당시 67세)가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자기 집 북쪽의 담장 밖에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났다.

‘땅 속에 뭐가 있어서 이렇게 소리가 나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씨는 땅을 팠다. 그런데 그 안에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녹 슬고, 흙 묻은 물건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마을에 철컥컬컥 소리가 났다. 엿장수의 가윗소리였다. 구씨는 “때마침 잘 됐다”면서 땅속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파낸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건넸다. 이제 엿장수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씨로부터 무심코 이 철물을 받은 엿장수는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철물들을 수거하면 그 가운데는 꽤나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이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 않는가. 엿장수가 보기에 구씨가 건네준 이 물건들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구씨로부터 들은 바로는 땅을 파니 나온 물건들이라 하지 않는가.

 

■ 엿장수의 선택

선택의 기로에 선 엿장수는 결국 ‘신고의 길’을 선택하고 전남도청을 찾았다.

“당시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매장문화재는 발견한 즉시 신고해야 하지만 최초 발굴자인 구씨는 매장문화재인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야 엿장수가 신고하게 된 거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최초 발견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인 12월24일 조유전 학예사가 청동기 전문가인 윤무병씨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대곡리 현장을 들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유구는 파괴된 상태였다.

“발견 당시의 상황을 구씨로부터 듣고,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고 도면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의 조사는 없었다. 무령왕릉의 졸속발굴 이후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유전 학예사 등에 할당된 조사시간은 24일 단 하루, 즉 한나절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빨리빨리 조사’였던 것이다.

여하튼 그때 확인된 청동 잔무늬 거울(정문경·精文鏡) 2점, 팔주령(八珠鈴) 2점, 쌍두령(雙頭鈴)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이듬해 3월2일 한꺼번에 국보(제143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하나같이 획기적인 유물들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국보유물을 11점이나 발견하고 신고한 구씨와 엿장수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자인 엿장수는 사라졌고, 발견자인 구씨는 처음에 신고 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좀 걸리고 해서…. 결국 누구도 보상받지 못했어요.”

 

■ “야호! 터졌다”

37년이 흘러간 2008년 2월13일. 71년 당시 국보가 11점이나 나온 대곡리 옛 구재천씨 집 담장너머에 대한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의 재조사가 시작했다.

흉측한 폐가로 변해 있는 현장에 대한 정비계획의 하나였다. 발굴단은 무덤 바닥에 남아있던 목관의 흔적을 두부처럼 잘라 들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관의 흔적을 3분의 2나 걷어냈지만 더 이상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만약 유물이 나오면 내가 춤을 춘다고 했어요. 사실 혹 요갱(腰坑·묘광 바닥 가운데에 중요한 부장품을 매장하는 시설)을 확인할 수 있을까 기대했으니까요. 그러나 막판까지 징후가 없어 포기상태였죠.”(은화수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

20일 그런 상태에서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지도위원회를 열었다. 조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일종의 수순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 11시30분. 무덤 바닥 남쪽에 있는 옅은 검은색 띠가 수상했다.

“이곳이 이상하지. 뭔가 느낌이 달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은 연구관이 트라우얼(Trowel·꽃삽 비슷한 발굴도구)을 넣었다. 뭔가 걸렸다. 살살 흙을 걷어냈다. 청동검의 끝이 2㎝ 정도 노출되었다.

“야호!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37년 전 구재천씨의 손을 피해 숨어있던 청동검 2점이 햇빛을 본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2400년 전 청동기인들이 붕어한 왕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부장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낸 것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BC 4~BC 3세기쯤 출현, 기원 전 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적석목관묘에서 출토되는 대표유물은 한국형 세형동검이다.

 

■ 볼수록 신비로운 국보 13점

한국형 세형동검의 선조는 BC 9세기쯤부터 발해연안, 즉 난산건(南山根) 유적을 필두로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진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청동단검)이다. 이 청동단검의 전통이 한반도로 이어져 BC 4세기 무렵부터 한국형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다.

대곡리 청동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이다. 2400년 전 제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을 겸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神)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청동거울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었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사람과 왕 사이를 구분하는 절지천통(絶地天通)의 도구였을 것이다.

청동방울, 특히 팔주령과 쌍두령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 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삽입돼 있어 흔들면 딸랑딸랑거린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8개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정문경(청동거울)에도 동심원이 8개 그려져 있고, 8개의 방울이 있는 팔주령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일광문이 보입니다. 8이라는 숫자는 일본에서 ‘풍요’ ‘많음’을 뜻합니다. 결국 청동거울과 팔주령 등은 당대 샤먼이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요.”(이건무 문화재청장)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샤먼은 지금의 무당이 아니라 제정일치 시대의 왕, 즉 수장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청동거울이나 팔주령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기하학 문양을 재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수수께끼의 제작기법이죠.(이건무 청장)

 

■ 이름모를 엿장수가 던진 교훈

지난 10일 오후. 37년 전 대곡리 유적을 긴급 조사했던 고고학자 조유전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노학자가 되어 다시 현장에 섰다.

곧 무너질듯한 폐가가 된 옛 구재천씨의 집, 그리고 담장 옆 텃밭으로 변한 출토현장. 보물이 13점이나 확인된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바뀐 모습이다. 그래도 정비계획이 섰다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저 뒷산(비봉산·해발 55.9m)에는 임진왜란 때 축조된 성(城)이 있었는데…. 참, 마을 안쪽에 서있던 석비는 어디갔나? 마을 안엔 고인돌이 여럿 있었는데….”

37년 전 조사 당시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듯 노학자의 말문이 터졌고, 함께 간 후학(이종철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의 대답이 줄을 잇는다. 젊은 고고학자의 시절로 돌아간 조유전 선생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최초 발견자 구재천씨와 이름 모를 엿장수다.

“지금도 구재천씨의 얼굴이 기억나요. 그분 덕분에 어쨌든 국보 11점이 발견됐잖아요. 그리고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엿장수도….”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엿이나 바꿔 주고 끝났으면 고물 신세로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고철은 사려깊은 ‘엿장수의 마음대로’ 신고가 되었고 마침내 11점의 국보로 거듭났다. 이름없이 사라져버린 엿장수의 이야기는 요즘 문화유산을 전봇대쯤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8)

 

 

 

이기환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인가”…2200년전 ‘세형동검 거푸집' 출현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기자2023. 7. 4. 05:00

 
2003년 도로건설 예정지인 전북 완주 갈동유적의 1호 움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청동거푸집. 세형동검과 청동꺾창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2200년전의 제작틀이 확인됐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보고서>(학술조사보고 46책), 2005’에서

 

1960년대초 한 골동품상이 국립박물관을 찾아와 유물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제안했다.

그것은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제품을 제작하는 틀인 ‘청동거푸집’이었다.

골동품상이 내놓은 거푸집 세트는 6쌍으로 된 12점과 한쪽만 남은 1점, 반쪽만 남은 1점 등 모두 14점으로 되어 있었다.

이 거푸집으로 세형단검·꺾창·창·낚시바늘·침·소형도끼·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갈동 출토 청동거푸집. 앞면에는 세형동검을 찍을 수 있는 거푸집 1쌍이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나 뒷면에는 청동꺾창 거푸집이 반쪽만 남아있다. 원래는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으로 제작·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흠결이 있지만 국보

박물관 관계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학자들이 뭐라 강변했던가.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적인 석기시대에 머물고 있다가 중국의 침략을 받아 청동기와 철기 같은 선진문물이 한꺼번에 유입됐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석기와 금속기가 함께 쓰였다는 ‘금석병용기’ 용어를 끌어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8종 24점이나 되는 청동제품을 제작한 증거(‘거푸집 세트’)가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립박물관은 이 거푸집 세트를 사들이지 못한다. ‘유물구입비’가 한푼도 없다는 어이없고도 기막힌 이유였다. 이 거푸집 세트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고 김양선 박사(1907~1970)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해외로 유출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유물세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정확한 출토지점’을 몰라 학술적인 생명력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세형동검 거푸집 쇳물 주입구의 그을음 흔적. 세형동검을 실제로 주조해서 생산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거푸집에는 짝을 맞추기 위해 새긴 짧은 선 표시가 있다.

이 경우 유물의 가치는 뚝 떨어지게 된다. 어떤 지점에서, 어떤 조건(무덤 혹은 집터?)에서, 어떤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는가를 알아야 그 유물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양선 박사 역시 그 유물 세트의 히스토리를 파악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실패했다.

다만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서 출토됐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다.

결국 이 거푸집 세트는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의 명칭을 얻었다.

그럼에도 1986년 국보로 지정됐다. 기원전 3~2세기 무렵 국내의 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대량 제작’한 정황증거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출토지점’을 모르는 한계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

2007년 갈동유적에서 확인된 고운무늬 청동거울. 문양과 기법의 정교함 덕분에 두 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국립전주박물관 제공

 

■황홀한 유물의 출현

그러던 2002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발굴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갈동마을을 지표조사 하고 있었다.

전주시 관내 국도의 우회도로 건설을 위한 사전조사였다. 그러나 아무런 고고학적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경우 ‘유적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공사를 진행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당시 한수영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현 고고문화연구원장)은 뭔가 찜찜했다. 이 일대는 해발 26~42m의 야트막한 구릉이 쭉 이어진 곳이다. 만경강과 서해로 확 트인 그야말로 비옥한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이런 곳이야말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입지가 아닌가.

아무 징후가 보이지 않은게 오히려 이상했다. 땅 밑에 유구와 유물이 훼손없이 보존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냥 스쳐지나가도 모를 이곳을 정식발굴지역에 포함시켰다. 그 동물적인 감각이 ‘대박 발굴’을 이끌 줄이야.

2007년 갈동의 도로변경노선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기류와 철기류. 고운무늬 거울 2점을 비롯해, 세형동검, 청동창 등과 철도끼, 철촉 등이 확인됐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에서

 

정식 발굴이 한창이던 2003년 8월1일이었다. 1호 움무덤(구덩이 파고 시신을 묻은 묘)에서 상상도 못할 유물이 출토됐다.

세형동검 거푸집 1쌍이었다. 거푸집 중 한 점은 벽에 붙어서, 다른 1점은 옆으로 기울어진채 확인됐다.

“거푸집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세형동검의 거푸집을 제 눈 앞에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황홀한지….”(한수영씨)

그랬다. ‘출토지 불명’인 ‘전 영암출토 거푸집’도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출토지점이 바로 이곳(완주 갈동)인 거푸집이, 그것도 세형동검의 거푸집이라니….

무엇보다도 2200년 전 최첨단 청동기를 찍어내던 하이테크 산업의 제작틀이 나온 것이다.

2003년과 2007년 완주 갈동의 도로건설 부지에서 출토된 기원전 2세기 무렵 초기철기시대의 각종 청동기류.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에서

 

■검게 그을린 거푸집의 의미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이름붙은 청동칼이다.

기원전 4세기~기원전후 주로 한반도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일컬어진다. 갈동 출토 세형동검은 기원전 2세기 유물로 판단됐다. ‘전 영암 출토 거푸집’이 한반도에 없다던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알리는 ‘정황 증거’였다면 어떨까.

2003년 갈동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및 꺾창 거푸집’은 청동기시대의 존재는 물론이고, 한국 고유의 청동검까지 대량 생산했음을 보여주는 ‘100% 확실한 물증’이었다.

그제서야 일제강점기 무렵 이후 100년 이상 계속된 한국고고학계의 오랜 갈증이 해소된 것이다.

2003년 도로건설예정지로 낙점된 완주 갈동에서 거푸집이 출토되자 노선이 변경됐다. 그러나 그 변경지점에서도 고운무늬 거울과 세형동검 등 기원전 2세기 초기철기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에서

 

이 갈동 출토 거푸집 세트는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을 만드는 ‘한 쌍’(합범·合范)이었다.

짝을 맞추기 위해 새긴 짧은 선 표시가 있다. 세형동검 거푸집은 안쪽 부분이 검게 그을린 상태로 확인됐다.

무덤에 넣기 전에 여러번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한쪽의 뒷면에 청동꺾창(ㄱ자 형태로 나무에 끼워 말에 탄 적병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원래는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으로 제작·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동 출토 거푸집은 엄밀히 말해 ‘세형동검(1쌍)’과 ‘청동꺾창(0.5쌍)’ 등 두 종이었던 것이다. 청동꺾창 거푸집 반쪽도 갈동 유적 어디엔가 묻혀있지 않을까.

전남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청동거푸집. 이 거푸집으로 세형단검·꺾창·창·낚시바늘·침·소형도끼·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출토지점을 모르는 단점이 있다.|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단박에 보물이 된 거푸집 및 청동거울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거푸집’의 출현으로 도로의 노선이 변경되었다.

2007년 그 변경노선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서도 획기적인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즉 5호와 7호 움무덤에서 ‘고운무늬 거울’(정문경)이 1점씩, 14호 움무덤에서 세형동검 1자루가 출토된 것이다. 이 두 점의 고운무늬 거울은 크기가 직경 14.5㎝(448g)와 직경 9.1㎝(142g) 정도여서 중소형에 속한다.

 

이 두 점의 거울(기원전 2세기)은 완형에 가까울 뿐 아니라 뒷면에 새겨진 문양도 가장 널리 알려진 ‘국보경’(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소장)에 버금갈 정도로 정밀하다는 평을 받았다. 14호 움무덤에서는 세형동검(길이 32㎝)이 1자루 확인됐다.

2003년 출토된 세형동검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장인 집단이 생산한 제품으로 추정됐다.

이렇게 갈동 발굴에서 출토된 ‘거푸집 세트’(2003)와 ‘고운무늬 거울 2점’(2007)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완주 갈동 유적의 위상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주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류.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국립전주박물관, <고고학으로 밝혀낸 전북 혁신도시>(특별전 도록), 2006’에서

 

■기원전 2세기 무렵의 도시유적

흔히 고고학 발굴도 유행을 탄다고 한다. 2000년대초 갈동 인근 지역이 전주 혁신도시 예정부지로 선정됐다.

대상 부지에 대한 발굴 결과 갈동 유적과 비슷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1세기)의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에서는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또 완주 신풍에서는 무려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군이 노출됐다.

특히 고운무늬 거울이 10점이나 출토됐고, 청동투겁방울(간두령·장대의 머리에 끼운 방울 모양의 청동기)이 한 쌍 확인됐다. 이 지역 수장급 지도자가 옥수수 모양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을 것이다. 또 신풍유적에서는 청동기 보다는 철기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 역시 청동기-철기의 과도기를 드라마틱하게 증거해주는 무덤 양상이다.

이렇게 갈동·원장동·신풍 등 인근 지역에서 무려 200기가 넘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집계됐다. 갈동유적의 현장책임자였던 한수영씨는 “당대의 도시 유적을 발굴한 느낌이었다”고 밝힌다.

모두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이 확인된 완주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방울. 이 지역 수장급 지도자가 옥수수 모양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을 것이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신풍 유적 Ⅰ- 가지구>(학술조사총서 180책), 2016’에서

 

■한 구덩이에서 웬 중국풍 동검 26점

이와같은 초기철기시대 발굴성과가 쏟아지자 새삼 각광을 받게 된 유적·유물이 있었다.

바로 1975년 학계에 보고된 완주 상림리 유적이다.

즉 그해 11월30일 전북 완주 이서면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심다가 수상한 유물더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26점이 묶인 채 발견된 청동검 더미였다. 이상했다.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곳에 덜렁 이 동검 더미만 묻혀있을까.

더욱이 형태나 기법상으로 보아 중국 산둥(山東)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제나라 동검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완주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기와 철기류.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양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신풍 유적Ⅰ-가 지구>(학술조사총서 180책), 2016’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 제작된 제품으로 판단됐다. 그러나 중국에서 ‘직구’한 제품은 아닌 것으로 추정됐다. 크기가 일반적인 중국산보다는 다소 작고, 또 두께가 얇아서 비실용적이었다. 사용한 흔적도 없이 달랑 이 26점 꾸러미만 매납해놓았다. 일부 납성분의 산지도 한반도로 추정되었다.

이상하다. 누군가 왜 중국 산둥산을 본떠 청동검을 26점이나 제작해서 고이 묻었다는 것일까.

하지만 상림리 출토 청동검 더미는 ‘중국풍’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이상의 화제를 뿌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갈동 등 전북 지역에서 상림리(기원전 3세기)보다 늦은 시기(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지자 새삼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5년 11월30일 전북 완주 이서면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심다가 발견한 중국풍의 청동검 26점. 왜 한반도에 중국풍의 청동검이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평범한 구덩이에서 출토되었는지 알 수 없다.|‘국립전주박물관, <완주 상림리 청동검>(테마전 도록), 2015’에서

 

■기원전 3세기 중국판 엑소더스

기원전 3세기는 중국의 대격변기였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기원전 221)했지만 12년만에 죽은(기원전 210) 뒤 단 4년 만(기원전 206)에 멸망한다. 이 무렵 수많은 난민이 살 길을 찾아 한반도로 피란했다.

그중 상림리 동검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산둥 반도에 웅거했던 제나라의 전횡(기원전 250~202) 관련 설화가 눈길을 끈다. 전횡은 진시황(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에 의해 멸망한 제나라의 왕족 출신이었던 인물이었다.

전횡은 제나라를 재건하려다가 실패한 뒤 한나라 건국(기원전 202) 후 산둥성 칭다오(靑島) 전횡도에 숨어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횡 문하의 빈객 500명도 따라 죽었다. 이들을 ‘절개를 떨친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라고 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완주 상림리 출토 중국계 청동검 26자루. 당대 한반도에서 유행한 세형동검과는 완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중국에서 ‘직구’한 게 아니라 현지에서 생산한 제품으로 판단됐다.|필자 촬영

 

그런데 전북 군산에서 가장 서쪽 섬인 어청도에서 바로 전횡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전횡과 500의사가 죽지 않고 망명길에 올라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청도 마을의 한가운데는 전횡을 모시는 치동묘(淄東廟)가 자리잡고 있다. ‘치’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가리킨다. 치동묘는 임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의미이다. 어청도는 산둥반도와 약 300km가량 떨어져 있다.

이 설화는 기원전 3세기 미증유의 혼란기를 겪던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유이민이 한반도로 건너왔음을 상징해준다. 그들이 바로 고향인 산둥풍의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한반도산 재료를 써서….

기원전 3세기 중국의 혼란기에 500명의 유민을 이끌고 군산 앞바다 어청도로 망명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어청도 치동묘(淄東廟). ‘치’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가리킨다. 치동묘는 임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의미이다.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인가

그렇다면 갈동 등에서 쏟아진 기원전 2세기 유적·유물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조선은 천하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그 시점에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있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후 고조선이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사가 그걸 말해준다. 진시황의 서슬퍼런 치하였음에도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진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조선에 망명의사를 타진한 연나라인 위만을 받아준 것이 화근이 됐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 고조선 준왕의 첫 상륙지라는 설화가 있다.|한수영 고고문화연구원장 제공

 

고조선의 준왕(생몰년 미상)은 “제가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위만(생몰년 미상)은 반란을 일으켰고, 준왕은 결국 망명길에 오른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기원전 194년 무렵)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땅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고 했다. 준왕이 망명했다는 그 시기(기원전 194년 무렵)가 바로 기원전 2세기가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전북 지역에는 준왕의 망명과 관련된 설화가 여러편 전해진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는 준왕의 첫 상륙지로 알려져 있다.

그곳의 공주산(公主山)은 망명한 준왕의 공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공주산의 건넛마을에는 임금(준왕)이 온 곳이라 해서 어래산(御來山)이라 한다.

전북지역에서 확인된 초기철기시대 유적을 상설전시중인 국립전주박물관. 완주 갈동 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과 고운무늬거울 등 2건의 보물이 출품되어 있다.

 

또하나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마한’조 등은 “고조선 준왕이 마한에서 왕이 된 후 그 후손이 멸절되었고, 지금은 마한사람이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준왕을 비롯한 고조선의 후손이 오래 가지 못해 끊어지고 토착세력이 다시 임금으로 복귀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갈동을 중심으로 한 전북 지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의 문화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준왕의 후손이 끊어졌다’는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20년만에 찾아본 완주 갈동 유적. 길가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안내석만 덜렁 두고 방치되어 있다. 2003년 도로공사 예정지로 낙점되었다가 청동거푸집 발굴로 현장보존되고 도로노선까지 변경시킨바 있다. 올해로 발굴 20주년을 맞이했는데, 그 흔한 발굴기념 학술대회도 열리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애써 현지보존한 유적 현장을 ‘그 지경’으로 남겨놓다니…. 그러려면 뭐하러 현장을 보존한걸까.|필자촬영

 

■방치된 갈동유적 현장

기자는 며칠전 20년 전의 기억을 살려 완주 갈동 유적 현장을 찾아가보았다.

2003년 8월초 탁 트인 현장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막 발굴된 따끈따끈한 청동거푸집 세트와 그것이 출토된 유구를 설명하던 한수영 당시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러나 기자는 현장을 한번에 찾지못했다. ‘완주 갈동 유적 440m’라 적혀있는 고동색 팻말을 보고 차를 몰았지만 쉽게 찾지 못했다. 다시 차를 돌려 느릿느릿 좌우를 살피자 허름한 공터 한가운데 쯤 뭔가 글씨를 새겨넣은 듯한 까만색 돌판이 눈에 들어왔다. 긴가민가 해서 차를 좁은 도로에 세워두고 걸어가 보았더니 아! 맞았다.

‘완주 갈동유적’이라는 안내판이었다. ‘이 지역이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이고, 초기철기시대 연구에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라 새겨져 있었다. 기자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중요한 발굴이 올해로 꼭 20주년을 맞이했는데…. 그 흔한 발굴기념 학술대회도 열리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애써 현지보존한 유적 현장을 ‘그 지경’으로 남겨놓다니….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려면 뭐하러 현장을 보존한걸까.(이 기사를 위해 한수영 고고문화연구원장과 국립전주박물관의 정상기 학예실장, 안경숙 학예연구관, 임혜빈·이기현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9)

<참고자료>

국립전주박물관, <고고학으로 밝혀낸 전북 혁신도시>(특별전 도록), 2006

국립전주박물관, <완주 상림리 청동검>(테마전 도록), 2015

국립전주박물관, <청동기·철기>(박물관 소장품 학술총서>, 2022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학술조사보고 46책), 2005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신풍유적Ⅰ-가 지구>(학술조사총서 180책), 2016

소재윤, ‘초기철기문화의 전래’, <흙속에서 찾은 역사>, 국립문화재연구소, 2020

한수영, ‘아이언 로드, 철기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문헌과 고고학으로 본 전북가야>(호남고고학보 특집호), 호남고고학회, 2020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국내 첫 발굴 환호… 日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설 밝혔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11월 2일 08시 55분 
 
 

<19>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한 안재호 동국대 교수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에서 안재호 동국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청동기시대 환호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울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 10분 정도 올라갔을까, 구릉 위로 평탄한 잔디밭이 넓게 펼쳐졌다. 인위적으로 흙을 파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 역력했다. 안재호 동국대 교수(62·고고학)는 “지금 우린 청동기시대 마을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릉 서쪽에는 강이 흐르고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막혀 취수(取水)와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1990년 당시 촬영한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 현장. 사각형의 주거지 유구 주변을 원형으로 감싼 환호가 보인다. 안재호 교수 제공 바로 이 잔디밭 아래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환호(環濠)가 묻혀 있다. 1990년 안재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한 환호다. 환호란 선사시대 마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싼 도랑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잉여 생산물을 놓고 집단 간 갈등이 벌어지는데, 환호는 이때 방어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자들은 환호가 계급 발생이나 초기 국가 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 일본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 입증

 “이쯤에서 끝나야 하는데 거참 이상타….”
 1990년 3월 초순. 안재호는 조사원 동진숙(현 부산시청 연구관), 이현주(정관박물관장)와 함께 청동기 주거지를 발굴하면서 의구심이 생겼다. 주거지라면 일정 범위에서 끝이 보여야 하는데 흙을 걷어낼수록 유구의 범위가 오히려 넓어지는 양상이었다. 발굴 경험이 많은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래쪽 유구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그때 ‘혹시 두 지점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어요.”

 그의 직관은 적중했다. 유구를 이어보니 휘돌아나가는 너른 구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형적인 환호였다. 수많은 환호가 발견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그때까지 한반도에서는 환호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학계는 자신들의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의 고대 철기문화도 삼한이 아닌 낙랑에서 넘어왔다고 설명하는 등 가급적 한반도 도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학계의 태도가 반영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울산 검단리를 계기로 전국에서 30여 기의 환호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일본 학계는 한반도의 영향을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환호 발굴 직후 국내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환호 안팎에서 수습된 청동기나 석기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구 간 맥락을 통해 사회상을 유추하기보다 유물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일본학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이 검단리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와 환호의 형태부터 주거지 개수까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2년 뒤 검단리 발굴 성과는 주요 학술지인 ‘일본 고고학 연구’에 다양한 컬러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게재됐다.

○ 한일 환호의 차이점은

 검단리 환호는 주변 유구의 양상을 감안할 때 존속 기간이 불과 한 세대(약 30년)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수백 년에 걸쳐 환호가 2중, 3중으로 계속 확대되는 일본 환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또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환호 내부의 주거지 수가 적어 쉽게 폐기될 수 있었던 점도 특이하다. 현장을 방문한 하루나리 교수도 검단리 환호 내 주거지가 21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과 일본 환호 유적의 차이는 무얼 말해주는가. 안재호는 “환호를 통한 차별화 내지 계층화보다 공동체를 하나로 인식하려는 한반도 선사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검단리에서의 환호 발굴은 유적층 위에 쌓인 퇴적층을 굴착기로 걷어내 전체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집중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발굴 현장에 중장비를 동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재호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흙을 걷어냈다면 둘레 300m, 면적 6000m²에 이르는 환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움은 남는 법. 검단리 발굴에서 후회되는 게 있는지 물었다. “당시 환호 안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들이 쌓였을 겁니다. 음식물부터 꽃가루까지 다양한 식생 자료가 포함됐을 거예요. 환호 바닥 흙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을 시도했다면 마을의 성격을 규명할 만한 다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10)
울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자연의 타임캡슐’ 저습지… 수천년전 유기물까지 원형 그대로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6월 30일 09시 09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1>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한 조현종 前 광주박물관장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괭이자루를 살펴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 2000여 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고고학자들에게 저습지(低濕地) 유적은 ‘대박’으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서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온갖 유기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보존은 유물이 포함된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여 외부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60)과 둘러본 광주 신창동 유적은 한국 저습지 발굴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이 총 2000여 점이나 출토됐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미시생활사 복원의 ‘종합선물세트’와 다름없다. 조 전 관장은 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사이의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로서 운이 참 좋았다”며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


○ 국도 방향을 바꾼 역사적 발굴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1997년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들(위 사진). 바퀴축과 바퀴살, 가로걸이대가 보인다. 아래 사진은 베틀 유물로, 방추차와 바디 등 부속품들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1992년 5월 광주 신창동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현장. 도로 포장을 위한 건설 중장비로 부산한 현장에 조현종(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 황급히 흙을 퍼 담았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흙을 채질한 뒤 물을 부었다. 물에 뜨거나 가라앉은 물질을 확인하다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조각과 볍씨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점토대토기는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농경 유적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 출토된 건 고작 불에 탄 쌀 몇 알이 전부였거든요. 영산강 유역 어딘가에 농경 유적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현실로 들어맞은 겁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현악기 등 각종 농경의례 유물들.
 
그해 6월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 방향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유적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원룡은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 지건길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먼저 저습지 발굴기술부터 배워 오라”고 했다. 그때 한국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조현종의 회고.
괭이, 따비 등 나무로 만든 각종 농사 도구들.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곧 수긍했습니다. 유적을 위해서도 저 개인을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죠.” 조현종은 그해 12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떠나 저습지 발굴을 배운 뒤 1995년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든 문짝. 고상가옥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 삼한 최고(最古)의 수레를 발견하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수레바퀴였군요!”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2000년 말 구라쿠 요시유키(工樂善通)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장을 만난 조현종은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해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나온 목기(木器) 형태와 흡사했다. 발굴팀은 해당 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유물은 바퀴살과 바퀴축,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車衡·거형)로 각각 밝혀졌다. 앞서 평양 낙랑고분에서 기원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됐을 뿐, 삼한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수레 유물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첨단의 수레 제조기술을 익힌 고조선 유이민(流離民) 집단이 삼한으로 이주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저습지 특유의 지난한 발굴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이었다. 땅속에서 수천 년 묵은 유기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급작스러운 부식을 막으려면 약품 처리와 습기 유지 등 꼼꼼한 준비가 필수. 워낙 조심스럽게 발굴이 진행되다 보니 신창동 유적에서는 가로 25m, 세로 25m 넓이의 유구를 3m 깊이까지 파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저습지가 아닌 일반 발굴 현장에선 같은 면적의 작업에 통상 2개월 정도가 걸린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최근 국립광주박물관장에서 정년퇴직한 그에게 남은 과제를 물었다. “신창동에서 야자수 열매를 꼭 닮은 나무 그릇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게 삼한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흔적이라고 믿어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11)
 
 
 
 
 
 

2000년 전 붓과 삭도… 한반도 문자문명 시대를 알리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3월 16일 13시 52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4회> 다호리 발굴한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

11일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을 찾은 이건무 도광문화포럼 대표(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는 28년 전인 1988년 다호리 1호 고분을 직접 발굴했다. 창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이 연구관, 창원 다호리 유적에 도굴이 심하다는데 직접 가서 조사해 보시오.”

1988년 1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건무 학예연구관(전 국립중앙박물관장·현 도광문화포럼 대표)에게 현장조사를 지시했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은 도굴꾼들 사이에서 ‘실습장’으로 통할 정도로 유물 도난이 빈번했다. 1980년대 국가 사적 발굴을 주도한 박물관이 묵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건무는 이영훈(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윤광진(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신대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사와 함께 다호리로 향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원삼국시대 고분을 파헤친 도굴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도굴 피해에 이건무는 다급해졌다. 한겨울 대기에 노출된 유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급격한 손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팀원들과 하루 내내 전체 고분에 대한 현황 파악을 마친 뒤 이 중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그달 21일 착수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그의 직감은 곧 ‘월척’으로 이어졌다.

도굴꾼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m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m, 길이 2.4m의 통나무 목관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목관 내 유물을 빼내기 위해 도굴꾼들이 상판 일부를 깨뜨려 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발굴팀은 목관을 빨리 수습하기로 하고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구덩이 안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진흙탕이 돼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했다. 겨울에 물을 퍼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축복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어어, 목관 밑에 뭔가 있다!”

목관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경(銅鏡) 조각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발굴팀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이었다. 요갱 안에는 △철검, 꺾창, 쇠도끼, 낫 등 철기와 △칼집, 활, 화살, 두(豆), 부채, 붓 등 칠기(漆器) △동검, 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원삼국시대 변한의 목관과 칠기가 부식되지 않고 2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물 덕분이었다. 매장 직후 물이 뒤섞인 진흙이 목관을 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의 진흙 구덩이에 묻혀 있던 통나무 목관(맨위 사진). 목관을 도르래로 꺼내(두 번째) 연구실에서 세척을 마친 뒤(세 번째)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목관 밑 구덩이에서는 2000년 전 붓(네 번째)이 발견됐다. 이건무 대표 제공이건무가 꼽는 다호리 유적 최고의 유물은 뭘까. 그는 주저 없이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씨를 깎아내는 지우개)를 들었다. 완형으로 처음 출토된 통나무형 목관도 학술적 의미가 상당하지만, 부장된 붓과 삭도의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고고학계는 다호리 유적의 붓과 삭도를 기원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본다. 이건무의 회고. “당시 한 일본학자가 옻칠용 붓이라며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쪽 자료를 검토해 보니 다호리와 마찬가지로 붓과 삭도, 천평(天枰·저울)이 한 세트로 출토된 사실이 확인됐어요. 마치 지금의 영수증처럼 천평으로 물건을 단 뒤 매매 기록을 죽간(竹簡)에 붓으로 기록한 흔적인 겁니다.”

이와 관련해 다호리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 위세품인 한나라 오수전(五銖錢)이 함께 나왔다. 기원전 1세기 변한의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와 교역을 벌여 부를 쌓은 이 지역 수장이 묻혔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28년 만에 다호리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그에게 혹여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는지 물었다. 그는 푯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한 1호분 자리를 한참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시 겨울인 데다 추가 도굴이 걱정돼 서두른 감이 있어요. 경찰에 유구 보호를 요청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발굴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발굴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밤에 고분 주변을 순찰할 정도로 도굴 우려가 컸어요. 지금이라면 가설 덧집을 세우고 실측도 꼼꼼히 하면서 진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발굴종합보고서를 2012년에야 뒤늦게 발간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12)
 
 
 
 
 
 

(7) 2000년전의 무역항 해남 군곡리

 

해남은 고대 동북아의 ‘물류허브’ 였다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해남 군곡리에서 확인된 뼈로 만든 연모.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야트막한 구릉이 온통 마늘밭이었어요.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일제시대 때 간척사업으로 땅이 됐다더군요.”(황 기자)

“야철지라든가 가마터라는 것은 제가 고증할 수는 없었고, 다만 패총이라는 것은 확실했어요.”(최성락 교수)

서울신문은 목포대 연구팀과 최성락 교수의 이름을 달아 군곡리 유적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간 최 교수는 급히 오라는 오창환 당시 학장의 ‘부름’을 받는다.

“최 교수, 최 교수. 우리 학교 경사났어! 중앙지 1면에 이렇게 우리 대학(목포대) 기사가 나오다니….”

그럴 만했다. 목포대가 사범학교~초급대를 거쳐 1979년 4년제 국립대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장님이 그러더군요. ‘뭐 해줄까.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말해봐’하고.”

최 교수는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원금으로 받아 이름뿐이었던 (목포대)박물관을 키우는 데 썼다.

■ 준왕의 망명과 해상교역로의 탄생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貝塚)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굴 등의 껍데기가 쌓여 마치 무덤 같다 하여 명명됐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이죠. 쓰레기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요? 조개껍데기가 지닌 석회질(石灰質) 때문에 그 안에 버려진 토기(土器)와 석기, 그리고 사람과 짐승의 뼈가 잘 보존돼요.”(조 관장)

한반도 남부의 패총 유적은 1907년 일본 학자들이 김해패총을 조사한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김해패총에서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을 중시하여 이른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철기가 공존한 금석병용기가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참으로 헛된 식민학자들의 주장이었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잇달아 발굴되면서 이 금석병용기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은 사라지고 말지.’(조 관장)

어쨌든 최 교수가 이끄는 목포대 박물관의 3차례 조사 결과 군곡리 패총은 BC 2세기~AD 3세기 사이, 즉 약 400~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사용된 음식물 쓰레기장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현장에서는 철편과 철도자(칼), 철부(철도끼) 등 철기류와, 석촉·숫돌 등 석기류와 각종 동물뼈 등이 쏟아졌다. 특히 점을 친 흔적인 복골(卜骨)과 중국화폐인 화천(貨泉)은 문화교류와 공유의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다. 군곡리 패총은 철기문화의 유입과, BC 2세기부터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넘나드는 해상을 통한 동방교역의 루트를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당초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는 낙랑(BC 108년 설치) 이후 평양-한강-낙동강 등 강의 수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가 연안항로를 통해 유입된 시기를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년)인 BC 2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어요.”(최성락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 기사를 유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조 관장)

“예. 삼국지를 보면 (BC 194년) 위만에게 패한 조선왕 준(準)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 유입이 최소한 위만조선 때부터라는 것을 시사해줍니다.”(최 교수)

■ 동방교역로의 중심지

준왕이 망명한 종착지와 관련해서는 온갖 설이 난무한다. 하지만 망명지로 추정되는 충청도와 전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BC 2세기 무렵(위만조선 시기)의 철기유물들이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던진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적들이 대부분 서해안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의 유입설을 뒷받침한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군곡리에서 확인된 중국화폐인 화천은 기원 전 후 동방교역로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다.

중국화폐 ‘화천’

“연대가 확실하고 단기간에 주조·통용된 화천은 고고학 자료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에요. 왕망(王莽)의 신나라(新·AD 8~AD 23년) 때 주조된 경화인데, AD 12~40년까지 통용된 화폐였어요. 28년간 주조된 화폐였기에 고고학 연대를 추정하기에 안성맞춤이지.”(조 관장)

화천과 함께 진(秦)·한(漢)대에 통용된 반량전(半兩錢), BC 118년부터 주조된 오수전(五銖錢) 등도 교류의 증거다.

우선 사천 늑도에서 확인된 유물들은 군곡리 것과 거의 같다. 또한 고흥 거문도에서는 오수전, 제주도 산지항 유적에서는 오수전·화천, 창원 성산패총에서는 오수전, 김해패총에서는 화천이 각각 확인되었다.

물론 발해연안에서 출발, 은(상)~부여~한반도~왜 등 발해문명권에서 널리 확인되는 복골(卜骨)의 존재 역시 문화교류와 공유의 흔적이기도 하다. 근거를 대라고?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에 연한 물길로 한국을 경유하여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김해(구야한국·狗邪韓國)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7000리이다.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다. ~ 또 남으로 한해(澣海)를 건너면 큰 나라가 있는데(이키시마·壹岐島)~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로국(末盧國·규슈)이 있다.”(삼국지 위지 왜인조)

삼국지에 이토록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롭기만 하다. 고고학적인 자료와 삼국지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중부~서해안~남해안~왜로 이어지는 항로를 그릴 수 있다.

“한반도 서해안~군곡리~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壹岐島)~규슈를 잇는 동방교역로가 기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최 교수)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키시마의 하라노스지 유적에서 선착장 유구와 함께 하역장 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동방교역로에서 군곡리의 위치는?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연결되는 관문유적의 기능도 있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 나주 수문패총과 낭동 패총, 광주 신창동 등이 이를 증명하지요.”(조현종 관장)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었던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겠죠. 서해안의 긴 항로가 남해안으로 꺾어지는 길목이니까…. 군곡리에서 사람들은 다시 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규슈 등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준비했겠죠.”(최 교수)

“그러니까 동방교역로의 중간기착지이면서 영산강을 따라 한반도 내륙으로 물품을 수출입하는 국제무역항 기능을 담당했다는 얘기지.”(조유전 관장)

기자는 2000년 전 선진문물의 도입창구로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 동북아를 강타한 한랭기후

그런데 최성락 교수는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조개무지와 함께 발견된 토기류.

“한반도 ‘내륙’에서는 청동기 시대(BC 3세기까지)와 AD 4세기 무렵부터의 유적이 선후관계를 이루는 예가 많은데, 이상하게도 BC 2~AD 2세기까지의 유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최성락)

“그렇다면 내륙에서는 BC 2~AD 2세기가 공백기라는 얘기인데….”(조유전 관장)

“예. 그 공백기 사람들이 내륙에서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해안가에서 어업이나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보는 겁니다.”(최성락)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청동기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된다. BC 5세기 무렵 중국대륙에 약육강식의 시대인 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성행하는 철기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된다. 준왕의 해로를 통한 망명(BC 194년)에서 보듯 철기문화는 서해안을 따라 급속도로 파급된다. 군곡리와 늑도 등 주요 해상거점에 사람이 모여들고 무역거점이 건설된다. 서해안 해상루트를 통한 동방교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다 AD 100~AD 250년 사이에 동북아시아는 한랭기에 접어듭니다. 냉해가 극심해지고, 곡물생산량이 급감하게 됩니다. 내륙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해안으로 터전을 옮기며 식량문제로 약탈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최 교수)

최 교수는 그 근거로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 역사서를 들춘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오른쪽)과 최성락 교수가 호박밭으로 변한 군곡리 현장에서 토기편을 수습하고 있다.

“고기후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AD 100~250년 사이가 한랭기였음을 보여준다.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191~194년 사이 ‘원소와 원술의 기병’에는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등의 극심한 기아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70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2년 4월 서울에 눈이 3척이나 내렸다. 193년 왜인 천여명이 큰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우리에게 구하니~. 194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어 백성들이 굶주리니~.”(삼국사기)

음력 4월과 7월인데도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등 이상 한랭기후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해안 지역 집자리 유적을 살펴보면 불에 탄 곳들이 많아요. 또 패총도 해발 100m 이상 되는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극심한 기근 상태에서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부족간 전쟁이 일어났고, 패총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지로 올라간 거죠.”

■ 호박밭으로 방치된…

무더위가 막 시작되었던 6월 말. 조유전 관장과 최성락 교수, 그리고 기자가 해남 군곡리를 찾았다.

명색이 사적(2003년·449호)으로 지정된 곳이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그저 호박밭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무수히 박힌 하얀 조개무지가 널려 있었다. 굴, 꼬막, 바지락, 홍합, 피조개, 새조개, 가리비 등 2000년 전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아닌가.

“이곳이 명색이 사적이라는 곳인가요?”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조개무지의 흔적. 후손들은 2000년 전 동방교역로의 기착지이자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을 풍미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그저 ‘사적’이라는 간판 하나로 기릴 뿐이다. 정말 대단한 후손들이다.

“보존대책을 빨리 마련해야 할 텐데….”

노 고고학자는 끝내 말끝을 잇지 못했다.(13)

 
 
 
 
 
 
 
<주>
 
 
 
 

(1) [단독]"아우라지 유물, 세이마 계통.. 한반도 청동기 뿌리는 시베리아" (daum.net)2017.11.09

 

 

 

(2)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 경향신문 (khan.co.kr)2008.08.29

 

 

 

(3)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7) 북한강변 화천 용암리·위라리 유적 - 경향신문 (khan.co.kr)

 

 

 

(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의암댐 물 빠지자 드러난 ‘중도식 토기’… ‘원삼국’ 역사 다시 써|동아일보 (donga.com)

 

 

 

(5)  비파형동검 발굴의 달인… 국내 40점중 18점을 그의 손으로|동아일보 (donga.com)

 

 

 

(6) 평창 청동기시대 무덤 속 비파형동검 주인은 20대 여성이었다|동아일보 (donga.com)2018-02-14

 

 
 
 
 
 
 
 
 
 
 
 
 
 
 
 
 
 
 
 
 
 
 
 
 
 
 
<참고자료>
 
 
 
 
 

 

 

테마파크에 묻히는 한국의 스톤헨지.. '문화재 참사' 위기 (daum.net)2019.07.27

 

 

 

“춘천중도유적, 야만이 벌이지고 있는 야만의 현장...”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7.12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고대유적은 보존해야! (brainmedia.co.kr)2015.01.08

 

 

[경향의 눈]레고랜드냐 고조선랜드냐 - 경향신문 (khan.co.kr)2015.01.12

 

 

정선 매둔동굴서 청동기 유골 발견…"불로 의식 치른 흔적" - 뉴스1 (news1.kr)2017-05-23

 

 

청동기시대 무덤 안 사람뼈.. 매장의례 단서 찾았다 (daum.net)2017-05-24

 


다큐드라마 ‘한국사기’, 설 명절 민족의 조상인 고조선인의 얼굴을 만난다 | 서울경제 (sedaily.com)2017-01-27

 

 

 

아우라지에 3000년전 귀족이 살았나..희귀 유물 대거 발굴 (daum.net)2016.11.16

 

 

 

 

교과서 속 '농경문 청동기' 보물 아니었어? (daum.net)2014.05.13

 
 

'청동기 거푸집' 실체 보니 일제 식민사관 허구 드러나네 (daum.net)2011.03.16

 

 

 


˝中 적봉지역 고조선 유적 계속 발굴된다˝:경기브레이크뉴스(안양주간현대) (breaknews.com)강동민 이사장 | 기사입력 2008/07/23 [14:14] 

 

 

한반도最古 청동기시대 관개수로 발견 | 서울신문 (seoul.co.kr)200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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