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고조선 고고학 (3) BC 1500년 요녕성 금주 수수영자유적 청동꺽창 본문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에는 뉴허량(牛河梁) 13지점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라고 합니다.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이 청동꺾창은 중원의 허난성(河南省) 중부 옌스셴(偃師縣) 얼리터우(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둘 다 상나라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상나라의 전통이 발해연안에서도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에서는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그리고 직접적인 단서는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이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랴오둥(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터우와(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石戈)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터우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 연대와 비슷하다”면서 “이 돌창이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조선 수장의 권장(權杖)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청동기 기원뿐 아니라 고대국가(고조선)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과(戈·꺾창)를 자전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라.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이서우잉쯔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반면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를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청동꺾창이 나온 수이서우잉쯔는 랴오둥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어요.”(이교수)
여기서 기자는 이교수의 강조점을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수이서우잉쯔.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 즉 고조선의 터전이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왕)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좐싼쯔에서 확인된 도가니편들.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기원논쟁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병기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제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란 말인가.
기자는 다시 뉴허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거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이교수)
이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맞다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년을 앞당긴 중국고고학사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이 교란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실마리를 놓치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사단이 분석해보니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우한치(敖漢旗) 시타이쯔(西台子) 유적, 즉 훙산문화(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의 속에는 낚시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훙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1)
이형구교수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西遼河) 유역에서 비교적 초기의 청동기가 발견되는데, 칼·끌·장신구 등 소형의 청동제품으로 이른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명명된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고,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20세기 내지 15세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신석기시대의 최대 발명은 토기의 발명이라고 했다. 인류의 또 하나의 큰 발명은 청동기의 발명이다. 청동기의 발명은 곧, 고대사회의 산업혁명이다. 청동기가 발명됨으로써 인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그래서 흔히 그것을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로부터 초기 국가 형태로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석기시대 말기에 인간이 처음으로 발견한 금속은 순구리[순동(純銅), copper]였다. 자연계의 천연동광(天然銅鑛)을 채굴하여 1,000도 이상의 높은 열을 가해 순구리를 제련한다. 순구리는 불그스름한 빛을 발하기 때문에 일명 홍동(紅銅)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구리는 비교적 연하고 무르기 때문에 생산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므로 주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중국 하북성 당산시 대성산 유적 출토 홍동패식(紅銅佩飾) 각종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순구리 제품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발견된 달아맬 수 있는 순구리 장식[홍동패식(紅銅佩飾)]이다. 초기 복골(卜骨)과 함께 출토된 2점의 홍동패식은 동북아시아 청동기시대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대성산 유적 출토 유물은 산동(山東)·하남(河南) 용산문화(龍山文化)와 매우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문화로서 그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연대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순구리의 사용은 청동기[합금(合金)] 제조의 이전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순구리의 다음 단계인 청동은 순구리보다 훨씬 발달된 제련기술에 의하여 합금된 금속이다. 청동은 구리[동(銅), Cu]에 주석[석(錫), Sn]과 납[연(鉛), Pb]을 주성분으로 합금되었기 때문에 순구리보다 훨씬 단단하고 강해서 생산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 청동제 생산도구와 무기의 사용은 인류의 산업을 급속도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성장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비교적 초기의 청동기가 발견되는 곳은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西遼河) 유역이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청동기는 칼·끌·장신구 등 소형의 청동제품으로 이른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명명된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20세기 내지 15세기에 해당된다.
요동반도 양두와(羊頭窪) 출토 청동장식
고조선시대의 강역인 만주 지방에서는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청동기가 주조되고 있다. 요동반도의 양두와(羊頭窪)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과 우가촌(于家村) 적석총에서 발견된 청동제 화살촉·단추·반지·낚싯바늘 등 소형 청동기는 우리나라 청동기문화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15세기 내지 13세기 경에 해당한다. 대련시(大連市) 대취자(大嘴子) 유적에서도 청동제 화살촉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적의 C14 측정 연대는 기원전 1300~1100년이다.
만일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의 강역을 한반도에 국한시켜 논한다면 이 시기는 별 문제되지 않겠지만, 고조선시대의 강역이 요동반도를 포함한 만주 지방과 한반도임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과거에 인식되었던 시기보다는 훨씬 앞선 시기이다.
그러나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의 제작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반면 중국 은(殷)나라에서는 극도로 발전하였다. 은나라 시기[기원전 17~11세기]에는 제사용 청동 예기(禮器)가 유행하였다.』(2)
<자료출처>
(1)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7)고조선과 청동기 - 경향신문 (khan.co.kr)
(2)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의 창조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참고자료>
샤자뎬 하층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조선 자취’ 본격 논쟁판 열린다 : 한겨레 (hani.co.kr)2017-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