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3. 고조선 고고학(5)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본문

고조선시대/고조선

3. 고조선 고고학(5)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대야발 2024. 8. 13. 16:50
SMALL
 

 

 

 

신용하교수는 고조선에서 최초의 청동 유물이 나온 것은 BC 31세기경 청동합금 조각이 대동강 중상류인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 무덤에서 5069년 전(1995년 기준 BC 3074년)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靑銅) 합금 조각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청동 무기나 도구를 제조하기 직전의 준비된 중간재 청동 조각이지만, 이미 자연동(銅)과 석(錫)과 연(鉛)의 세 광석을 합금시켜 제조한 합금 조각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BC 31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고조선(단군조선) 성립기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 창끝이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 나왔고, 기원전 26세기(4593±167년 bp)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 단추와 청동 창끝도 발굴됐다고 합니다.

 

 

또한 상원 장리에서 BC 3000년기 전반기의 큰 규모 고인돌(오덕형) 무덤의 무덤 칸에서 청동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방울종 2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들이 나왔는데, BC 26세기의 유적·유물로 측정됐다고 합니다.

 

 

 

 

<지식카페>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한반도 서북 평남 성천군서 BC31세기 첫 청동조각 발견
용곡리지역 비파형 청동창끝 고조선 성립 BC26세기 추정

특유의 청동거울 ‘다뉴조문경’ 세계유일 조립식 ‘비파형동검’
아름다운 기하학도안 ‘팔주령’ 한반도·요동·요서 고루 분포

광석 녹여 합금하는 청동기술 문명 고도화의 중요한 지표
中, 빨라야 BC20~BC16세기 日은 BC4세기 들어서야 개막

 

인류는 신석기 시대 후기·말기에 자연동·자연금·운철(隕鐵: 운석 속의 타고 남은 철) 등 자연 광석을 채집·단조해서 금속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 광석들을 녹여 ‘합금’을 만들면 더 견고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합금’은 고도의 과학기술의 응용을 알려주기 때문에, 문명 형성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인류가 최초의 합금을 제조한 부문은 동(순동·자연동(自然銅))과 주석과 아연 등을 녹여 합금해서 제조한 ‘청동기’의 생산이었다. 청동기의 생산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인류가 과학적 문명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고조선문명권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고한반도 중부지방 ‘한강문화’였지만, 최초의 청동 유물이 나온 것은 BC 31세기경 청동합금 조각이 출토된 ‘대동강문화’였다. 대동강 중상류인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 무덤에서 5069년 전(1995년 기준 BC 3074년)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靑銅) 조각들이 팽이형 토기, 돌도끼, 돌도끼 조각과 함께 출토됐다. 이것은 청동 무기나 도구를 제조하기 직전의 준비된 중간재 청동 조각이지만, 이미 자연동(銅)과 석(錫)과 연(鉛)의 세 광석을 합금시켜 제조한 합금 조각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BC 31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서 고조선(단군조선) 성립기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 창끝이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 나왔다. 기원전 26세기(4593±167년 bp)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 단추와 청동 창끝도 발굴됐다. 또한 상원 장리에서 BC 3000년기 전반기의 큰 규모 고인돌(오덕형) 무덤의 무덤 칸에서 청동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방울종 2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들이 나왔다. BC 26세기의 유적·유물로 측정됐다. 이 가운데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은 서로 어깨를 끼고 발목을 합친 2인의 교예사가 각각 1개씩의 둥근 고리(環)를 들고 또 다른 2개의 둥근 고리 위에 올라서 재주를 부리는 형상을 제작한 것이다. 옷의 몸통과 팔 소매, 바지에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쳐 있고, 얼굴에는 입·코·눈·귀가 잘 묘사돼 있는, 작지만 매우 숙련된 기술의 우수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3> 참조).

 

 

 

또한 청동 방울종은 원추형의 종처럼 아가리가 넓고 꼭대기가 좁은 형태로, 울림통·고리·추로 이뤄진 작은 방울종이다. 역시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친 것으로서 숙련된 기술로 어려운 구조를 만든, 매우 뛰어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4> 참조).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동아시아 최초다. BC 31세기의 청동 합금 조각이 아직 청동기는 아니라고 불안해하는 경우에는 BC 26세기의 비파형 청동 창끝 2점, 청동단추, 청동 교예장식품, 청동 방울종 2점, 청동 끌, BC 25세기∼BC 24세기의 금동귀고리 3점 등 청동기 유물이 발굴돼 시계열이 완벽하게 형성됐으므로 이때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음은 명백한 것이다. 고조선은 BC 31세기∼BC 26세기에 초기 청동기 시대로 진입했다.

 

 

요하 서편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에서도 BC 30세기경의 순동(純銅)귀고리 1점과 거푸집이 발굴됐다. 이를 두고 중국 고고학자 일부는 홍산문화를 금석병용기로 설정하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동이지 아직 주석 및 아연과의 ‘합금(合金)’이 아니므로 청동기라고 볼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BC 26세기에 처음으로 청동기 시대가 성립돼 주위로 전파된 것이다. 서방 수메르 문명에서는 BC 33세기∼BC 30세기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해 이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고 보고 있다. 

 

 

고중국의 청동기는 고조선 후국 고죽국 지역 당산(唐山)에서 출토된 BC 20세기의 홍동(紅銅) 조각 2점과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BC 18세기의 작은 청동 추가 있다. 상(商) 시대의 하남성 이리두문화 유적에서 나온 삼족기 청동 술잔, 향로, 청동 칼, 추, 끌은 BC 16세기∼BC 13세기의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일찍 잡아도 중국에서는 BC 20세기∼BC 16세기 초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고조선 아사달지역의 BC 31세기∼BC 26세기보다 약 1000년 뒤의 일이다. 일본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야요이 시대(BC 4세기 중엽∼AD 3세기 후반)이므로 다시 이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고조선문명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한자(漢字) 만들기에도 반영돼 있다. ‘鐵’(철)의 옛 글자(상·서주 시대)는 ‘철’(철, 쇠, 금속)이었다. ‘철’(철)은 ‘동이의 금속’이라는 뜻이다. 즉 고대 중국 지식인들은 동·금·철 등 금속이 동이(고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임을 당시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1928년 상(商)의 청동기(BC 16세기∼BC 13세기)를 발견하고 경탄해 이때부터 ‘황하(고중국)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이 그보다 1000년이나 앞서 찬란한 청동기를 만들고, 상나라 사람 자체도 고조선의 청동기술을 갖고 간 고조선 이주민이었는데, 우리가 ‘고조선문명’론을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1) 

 

 


이형구교수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西) 유역에서 비교적 초기의 청동기가 발견되는데, 칼·끌·장신구 등 소형의 청동제품으로 이른바 하가점하층문화()라고 명명된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고,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20세기 내지 15세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신석기시대의 최대 발명은 토기의 발명이라고 했다. 인류의 또 하나의 큰 발명은 청동기의 발명이다. 청동기의 발명은 곧, 고대사회의 산업혁명이다. 청동기가 발명됨으로써 인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그래서 흔히 그것을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로부터 초기 국가 형태로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석기시대 말기에 인간이 처음으로 발견한 금속은 순구리[순동(), copper]였다. 자연계의 천연동광()을 채굴하여 1,000도 이상의 높은 열을 가해 순구리를 제련한다. 순구리는 불그스름한 빛을 발하기 때문에 일명 홍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구리는 비교적 연하고 무르기 때문에 생산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므로 주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중국 하북성 당산시 대성산 유적 출토 홍동패식(紅銅佩飾) 각종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순구리 제품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발견된 달아맬 수 있는 순구리 장식[홍동패식(紅銅佩飾)]이다. 초기 복골(卜骨)과 함께 출토된 2점의 홍동패식은 동북아시아 청동기시대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대성산 유적 출토 유물은 산동(山東)·하남(河南) 용산문화(龍山文化)와 매우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문화로서 그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연대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순구리의 사용은 청동기[합금(合金)] 제조의 이전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순구리의 다음 단계인 청동은 순구리보다 훨씬 발달된 제련기술에 의하여 합금된 금속이다. 청동은 구리[동(), Cu]에 주석[석(), Sn]과 납[연(), Pb]을 주성분으로 합금되었기 때문에 순구리보다 훨씬 단단하고 강해서 생산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인다. 청동제 생산도구와 무기의 사용은 인류의 산업을 급속도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성장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비교적 초기의 청동기가 발견되는 곳은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西遼河) 유역이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청동기는 칼·끌·장신구 등 소형의 청동제품으로 이른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명명된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20세기 내지 15세기에 해당된다.

요동반도 양두와(羊頭窪) 출토 청동장식

 

고조선시대의 강역인 만주 지방에서는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청동기가 주조되고 있다. 요동반도의 양두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과 우가촌() 적석총에서 발견된 청동제 화살촉·단추·반지·낚싯바늘 등 소형 청동기는 우리나라 청동기문화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15세기 내지 13세기 경에 해당한다. 대련시() 대취자() 유적에서도 청동제 화살촉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적의 C14 측정 연대는 기원전 1300~1100년이다.

만일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의 강역을 한반도에 국한시켜 논한다면 이 시기는 별 문제되지 않겠지만, 고조선시대의 강역이 요동반도를 포함한 만주 지방과 한반도임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과거에 인식되었던 시기보다는 훨씬 앞선 시기이다.

그러나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의 제작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반면 중국 은()나라에서는 극도로 발전하였다. 은나라 시기[기원전 17~11세기]에는 제사용 청동 예기()가 유행하였다.』(2)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에는 뉴허량(牛河梁) 13지점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라고 합니다.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이 청동꺾창은 중원의 허난성(河南省) 중부 옌스셴(偃師縣) 얼리터우(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둘 다 상나라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상나라의 전통이 발해연안에서도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에서는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그리고 직접적인 단서는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이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랴오둥(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터우와(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石戈)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터우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 연대와 비슷하다”면서 “이 돌창이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조선 수장의 권장(權杖)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청동기 기원뿐 아니라 고대국가(고조선)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과(戈·꺾창)를 자전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이서우잉쯔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라.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이서우잉쯔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반면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를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 청동꺾창이 나온 수이서우잉쯔는 랴오둥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어요.”(이교수)

 

여기서 기자는 이교수의 강조점을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수이서우잉쯔.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 즉 고조선의 터전이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왕)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좐싼쯔에서 확인된 도가니편들. 동북아 청동기 문화의 기원논쟁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수이서우잉쯔 출토 청동꺾창은 병기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제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란 말인가. 기자는 다시 뉴허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했다.(경향신문 12월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거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이교수)

 

이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맞다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년을 앞당긴 중국고고학사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이 교란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실마리를 놓치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사단이 분석해보니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우한치(敖漢旗) 시타이쯔(西台子) 유적, 즉 훙산문화(홍산문화·BC 4500~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의 속에는 낚시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훙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샤자뎬(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3)

 

 

 

 

강인욱교수는 아우라지 청동기는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라며, 무기나 마구보다 청동 장신구 위주인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한반도 청동기의 뿌리는 기원전 20세기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라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 학계는 비파형동검의 중국 랴오닝(遼寧)지역 전래설 위주로 한반도 청동기 기원을 논의해 왔다. 이번에 제기된 견해는 지난해 11월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 청동 유물을 연구한 결과다.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3세기 청동 장신구(위 사진)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sim;기원전 15세기 청동 장신구. 두드려서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형태가 서로 닮았다. 강원문화재연구소;강인욱 교수 제공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최근 발표한 논문 ‘한반도 청동기 사용의 기원과 계통’에서 “정선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4점의 청동 장식은 한반도에 청동기가 들어온 연대를 파격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실제로 돌 반지처럼 얇게 편 고리와 대롱옥을 닮은 청동장신구 4점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3세기 유물로 판명됐다.

 

지금껏 남한에서는 비파형동검(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보다 앞선 시기의 청동유물이 드물어 이른 청동기시대를 놓고 ‘무문(민무늬)토기 시대’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청동기시대를 정의하는 핵심 기준인 농경 흔적은 확인되는데 정작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라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기원전 13세기의 이른 시기에도 청동기가 사용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강 교수는 논문에서 아우라지 청동기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를 비교했다.

 

돌 장신구에 끼울 수 있도록 청동기를 두드려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양식이 서로 일치했다. 그는 “아우라지 청동기는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무기나 마구보다 청동 장신구 위주인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청동기시대에 국한할 때 중원(中原)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다만 중국 북방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평북 신암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서북지방에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방통행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곡옥(曲玉)을 모방한 청동기처럼 한반도 고유의 문화 요소도 가미됐다.

 

강 교수는 “석기 전통이 강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가 들어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기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사용했다”고 말했다. 돌 장신구에 끼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아우라지 청동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철기가 도입돼 석기의 효용성이 사라진 세형동검 단계 이후에야 한반도에서 청동기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4)

 

 

 

 
<주>
 
 
 
 
 

(1) <지식카페>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 문화일보 munhwa

 

 

 

(2)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의 창조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3)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7)고조선과 청동기 - 경향신문 (khan.co.kr)

 

 

 

(4) [단독]"아우라지 유물, 세이마 계통.. 한반도 청동기 뿌리는 시베리아" (daum.net)2017.11.09

 

 

 

 

 

<참고자료>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청동기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제가문화

 

 

 

무산 범의구석 유적(茂山 범의구석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평양 남경 유적(平壤 南京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용천 신암리 유적(龍川 新巖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