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나흘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도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년)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산 첩첩 하늘 한 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메산골이었다.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이라 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아직은 정확한 분석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 ‘산 첩첩 하늘 한 뼘’ 이고 산 사람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7월 어느 날. 기자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 등과 함께 아우라지를 찾았다.
아우라지라. 태백산에서 출발, 정선 임계 쪽으로 굽이치는 골지천과, 평창 발왕산에서 발원한 물이 노추산을 돌아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려온 송천이 어우러진다 해서 붙은 아름다운 우리 말이다.
“여하간 예부터 사람은 모질기는 해요. 이 첩첩산중까지 진출했다니….”
안개비가 아우라지 심산유곡을 뒤덮은 시간. 잠시 감상에 젖었던 기자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한마디 던졌다.
“강변이잖아. 구석기 시대부터 한강변은 사람들의 터전이었지.”(조유전 관장)
“하기야 강의 역사를 모르면 사람의 역사를 복원하기 힘들기는 해요.”(이재 원장)
동쪽으로는 험준한 백두대간의 줄기가 사람들의 발길을 끊어놓았고, 한강의 숨이 끊어질 듯 최상류에 놓인 이 아우라지에 예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정선지역에는 신동읍 덕천리 소골과 운치리·여량리는 물론 영월 쌍굴유적, 횡성 중금리 등 남한강 유역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발견되었어요.”(조 관장)
“신석기뿐 아니라 덕천리 소골과 소사, 운치리, 수동, 정선읍 가수리, 용탄리 등에서 철기시대 유물이 확인됐고,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유적들이 다수 보이고…. 강변을 따라 있는 충적대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왔다는 얘기죠.”(지현병 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
■ “강(河)은 선사시대 고속도로”
그리고 2005년. 정선군은 아우라지(정선군 북면 여량2리) 일대를 아리랑을 주제로 한 관광단지로 조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뜻을 접어야 했다. 강변의 충적대지가 바로 신석기시대부터 조상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석기~청동기~철기~신라시대 유적이 켜켜이 나왔어요. 특히 청동기 주거지가 무려 28동이 나왔는데요. 그러나 단순히 많이 나왔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윤석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조사1부장)
그랬다. 아우라지 유적에서 확인된 두 가지는 한국선사고고학을 뒤흔들 핵폭탄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의 출현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지난해 초 2007학년도 고교국사교과서에 수정된 청동기 기원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떠올릴 것이다.
아우라지에서 확인된 덧띠새김무늬토기.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개과정의 고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쯤에 중국 랴오닝(遙寧), 러시아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께에서 1500년께로 한반도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2007년판 국사교과서)
이 대목은 “신석기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쯤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는 기존 내용과 비교할 때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500~1000년 올려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계일각에서는 “너무 성급하다”고 비판하는 등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교과서 내용 중에 있듯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 속한다.
한반도 조기청동기의 시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대략 BC 15~13세기 정도이다.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출현하는 등 우리 민족사의 기틀이 마련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달리 보면 우리 역사를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반도로 국한시키니까 이런 논쟁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민족문화의 시원을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찾으면 논쟁의 여지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찌됐든 당시 교과서를 쓴 최몽룡 서울대교수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끌어올리면서 단적인 예로 든 것이 바로 막 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이었다.
“남한강 최상류인 정선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서 조기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각목돌대문토기(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런 토기는 정선뿐 아니라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어요.”(최몽룡 교수)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발해연안에서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로 한반도까지 뻗어 있어요.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다 BC 15~13세기 유적들이지.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그 당시의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지.”(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도로가 없었던 예전에는 강이 고속도로 기능을 했을 것”이라면서 남한강 최상류까지 선사유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했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닙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BC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는데요.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지.”(조유전 관장)
■ 인골이 간직한 비밀
또 하나, 아우라지에서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나왔다. 2005년 7월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고인돌 4기 가운데 한 기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대퇴부뼈가 나왔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물론 이 인골의 연대는 BC 8~7세기로 측정되었으므로,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BC 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인골분석을 맡은 서울대 의대팀은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 모두 현재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선군에 의해 훼손된 뒤 9개월째 방치된 아우라지 고인돌 군. 포장덮개로 덮인 채 널브러져 있다.
“현대 한국인의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귀 사이의 길이 비율)는 100대 80~82이고,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입니다. 그런데 황석리 인골은 100대 66.3이란 말이지. 이로 미루어 보면 황석리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일 수밖에 없어.”(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
더구나 얼굴전문가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이 복원한 황석리인은 그냥 보아도 서양인의 그것과 똑같다. 또한 지금도 충북과 경북 산간지역의 사람들 가운데는 황석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이런 상황에서 아우라지에서 출토된 서양인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의 노출 소식이 알려졌으니…. 무엇보다 황석리와 정선은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한반도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이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BC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거든. 그런데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하지만 아직은 서양인의 유전자와 관련해서는 퍽이나 조심스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한 주제다.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청동기시대 한반도를 지배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우리가 서양인의 후손이냐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황석리인이나 아우라지 출토 인골이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다만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겠지.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테지. 그렇게 생각해야 해.”(김병모 교수)
하지만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분석을 맡은 서울대 해부학 교실팀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는 전혀 없습니다. 검증된 결과가 나와야 하고 해외 학계에서도 학술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신동훈 교수)
어쨌거나 지금은 일본과 이스라엘 등 해외기관에도 분석을 맡겨놓은 상태. 아직 분석팀의 연구결과와 공식발표가 없는 만큼 기다릴 수밖에 없다.
■ 무자비한 유적훼손과 방치
그런데 아우라지를 찾았던 그날. 인골이 나온 고인돌을 둘러보던 기자는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고인돌이 어디 있노?”
전문가인 조유전 관장도 4기나 된다는 고인돌을 좀체 찾을 수 없었다. 긴 풀을 헤치고 한참이나 더듬거리던 일행의 눈앞에 뭔가 흉측스러운 장면이 목격되었다. 줄로 아무렇게나 쳐놓은 펜스와, 그 안에 쓰레기를 덮은 듯한 파란 포장덮개가 내리는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저게 고인돌을 덮은 포장덮개야?”
자초지종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난해 9월, 정선군이 무슨 축제를 벌인답시고 포클레인을 동원해서 고인돌 4기를 마구 훼손시켰다. 그것뿐이면 다행이랴. 그것도 모자라 인골이 확인된 고인돌의 덮개돌을 조형물로 꾸미는데 사용했단다. 함께 놓여 있던 덮개돌 좌우편 파편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문화재청이다. 시굴조사 때부터 한반도 청동기시대 개막의 열쇠를 쥔 아우라지 유적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한 전문가들이 ‘빨리 사적으로 지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더욱이 고인돌 훼손사실을 조사한 뒤 문화재청이 한 일은 훼손된 고인돌을 흉물스러운 포장덮개로 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2007년 11월이니 9개월째 그런 한심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
조유전 관장이 민망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기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못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