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열국의 강역

열국의 존속 기간만 삭감된 게 아니라 강역도 거의 축소되었다. 북방에 있었던 나라가 수천 리 남쪽으로 옮겨진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강역이 축소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경덕왕이 북방의 주군()을 상실한 뒤 북방의 지명과 유적을 남방으로 옮긴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고려1)가 쇠약한 탓에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의 지리를 기록할 때 북방 국가를 또한 남방으로 옮긴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그래서 조선의 지리에 관한 근거들이 수없이 뒤바뀌었다. 근세에 한백겸과 안정복의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수정되기는 했지만, 열국시대의 지리는 아직까지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다. 이에 관한 대략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부여에 관한 설명이다. 신조선은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다.

하나는 북부여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을 두었다. 《삼국지》에서 “현도군의 북쪽 1천 리”라고 했으므로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기존의 학자들은 아사달이 지금의 요령성 개원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동부여다. 동부여는 갈사나에 도읍을 두었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북벌’했다고 했으므로, 고구려의 동북쪽인 지금의 훈춘 쪽이 동부여였다. 그런데도 기존의 학자들은 갈사나가 지금의 강릉이라고 말했다.

셋째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 동부여가 양분됐다. 하나는 기존의 갈사나에 머문 북동부여이고, 또 하나는 남방에 새로운 갈사나를 건설하니 곧 남동부여다. 전자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고 국호를 없앴다. 후자는 문자왕 3년(서기 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됐다. 남동부여는 함흥에 있었다. 그런데도 기존의 학자들은 남동부여의 강역뿐 아니라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 한사군_옮긴이)에 관한 설명이다. 위만이 동쪽으로 건너간 곳에 있었다는 패수는 《위략》의 만반한이다. 이곳은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문번한으로 오늘날의 해성·개평 등지다. 지금의 헌우락이 바로 그곳이다. 한무제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므로, 한문제가 건설한 사군은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내에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기존 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강원·함경도 등과 고구려 도성인 지금의 환인 등지에서 찾으려 했다.

셋째는 낙랑국에 관한 설명이다. 낙랑국은 한나라 낙랑군과 별개로, 지금의 평양에 세워진 나라다. 기존 학자들은 둘을 혼동했다.

이 외에, 고구려·백제의 초기 도읍이나 신라·가야의 위치는 기존 학자들이 고증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주군() 명칭 혹은 전투 현장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 옮겨서 설치한 지명에 따라 표기됐다. 그래서 틀린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가능한 한 교정하면서 열국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열국의 강역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열국의 강역

열국의 존속 기간만 삭감된 게 아니라 강역도 거의 축소되었다. 북방에 있었던 나라가 수천 리 남쪽으로 옮겨진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강역이 축소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경덕왕이 북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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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동부여의 분립

1) 해부루의 동진과 해모수의 출현

북부여·양 동부여(북동부여와 남동부여_옮긴이)·고구려 4국은 신조선의 판도 안에 세워졌다.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가 되고, 부여가 분열하여 동부여·남동부여·고구려가 됐는지, 아니면 부여는 그냥 신조선의 별칭이고, 별도로 부여라는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신조선이 위의 4국이 됐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신조선이 흉노족 모돈에게 패배한 시점이 기원전 200년이고 북부여·동부여가 분립된 시점도 기원전 200년이니, 두 번째 것이 사실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분립된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을 다니면서 기도하며 아들 낳기를 간구했다. 곤연(경박호)에 이르자 왕의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상해서 돌을 뒤집어보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기가 있었다. 왕은 ‘이는 하늘이 주신 나의 아들’이라 말한 뒤 거두어 길렀다. 금와라고 이름을 짓고 태자로 삼았다. 얼마 뒤에 재상 아란불이 왕에게 ‘요즘 하늘이 내게 강림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차 내 자손으로 이 땅에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너희는 동해가의 가섭원으로 피하라. 그 땅의 토질이 오곡에 적합하다고 했다’면서 천도를 건의하자, 왕은 그 말에 따라 가섭원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 기존 도읍에서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수행원 100여 명은 흰 고니를 탄 채 웅심산(일명 아사산이요, 다르게는 녹산이니 지금의 하얼빈 완달산이다)에 내려왔다. 그러자 상서로운 구름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 퍼져 나왔다. 해모수가 십여 일 만에 산하에 내려와 새 깃털로 된 관을 쓰고 용의 광채가 나는 칼을 찬 채,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1)

어떤 사람들은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서 신뢰할 수 없다고 하지만, 어느 나라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기 마련이고 후세 역사가들은 신화 속에서 사실을 채취하는 법이다.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거나 ‘하늘이 아란불에게 강림했다’거나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물론 다 신화다. 하지만 해부루가 남의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 태자로 삼은 것도 사실이고,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탁()을 믿고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다.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옛 도읍을 이어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북부여·동부여 분립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것이 북부여나 동부여 사람이 부여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기록한 게 아니라 고구려 사람이 자신의 시조 추모왕의 출신을 증명하고자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해부루와 해모수, 즉 동부여와 북부여를 분립한 두 대왕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했을 뿐이며, 부여 해부루의 출신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나마 고구려인의 기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신라 말엽에 한학을 공부한 불교 승려가 고쳐 쓴 것이다. 그래서 ‘신가’를 고구려 이두대로 상가()로 쓰지 않고 한문의 뜻에 맞춰 상()이라고 쓰고,2)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대로 ‘갈사나()’로 쓰지 않고 불경 표현에 맞추어 ‘가섭원’이라고 써서 본래의 문자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 또 다른 유감이다.

당시의 제왕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으며, 당시의 장군이나 재상은 장군·재상인 동시에 무당이고 점쟁이였다. 해부루는 제사장 즉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인물이고, 아란불은 신을 불러오는 무당인 동시에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를 겸한 상가()였다.

대단군과 상가는 둘 다 높은 지위였지만, 대단군의 책임이 훨씬 더 컸다. 《삼국지》 〈동이 열전〉에서는 “기후가 순조롭지 않고 오곡이 잘 자라지 않으면, 이를 모두 왕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런 경우에, 어떤 때는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때는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고 했다. 이처럼 신조선에서는 내우외환 같은 것은 물론이고 천재지변 같은 것도 대단군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래서 하늘이나 인간사에 불행이 생기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하지 않고 쫓아내곤 했다.

해부루가 천도한 이 시기는 흉노족 모돈과의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마 패전의 치욕으로 인민의 신앙이 약해져 대단군의 지위를 지킬 수 없었기에, 해부루가 아란불과 힘을 합쳐 갈사나 즉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는 해부루의 동족이자 추모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추모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했다. 따라서 해모수 역시 대단군의 칭호를 가졌을 것이다. 대단군은 하늘의 대표라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해모수는 해부루의 천도를 활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고 자처하고 왕이 되고자 했다. 부여는 ‘불’ 즉 도성이나 도읍을 칭하는 것이니, 해부루가 동부여란 표현을 사용하자 해모수는 북부여란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북부여란 표현이 역사서에서 빠지고 없기에 학자들은 동부여와 구별할 목적으로 비로소 해모수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2) 남북 갈사·남북 옥저의 양 동부여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즉 지금의 훈춘으로 천도해서 동부여를 세웠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했다. 그렇다면 갈사나는 무엇인가. 고어에서 삼림은 ‘갓’ 혹은 ‘가시’라고 불렀다. 고대에는 지금의 함경도, 길림성 동북부, 연해주 남부에 수목이 울창하여 수천 리를 가도 끝없는 삼림의 바다가 이어졌다. 그래서 ‘가시라’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삼림국(, 삼림의 나라_옮긴이)이라는 의미다. 가시라를 이두로 표현한 글자가 갈사국·가슬라·가서라·하서량 등이다. 이런 점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및 〈지리지〉에 나타난다. 대각국사 의천의 《삼국사》에 나오는 가섭원도 같은 뜻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가시라’를 옥저로 표기했다.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옥저는 ‘와지’의 음역어다. ‘와지’는 만주어로 삼림이란 뜻이다. 예() 즉 읍루는 만주족의 선조로, 《삼국지》나 《북사》에서는 읍루의 언어가 조선 열국(부여, 고구려 등_옮긴이)과 달리 독특하다고 했다. 우리의 ‘가시라’란 말을 예족은 ‘와지’로 발음했고, ‘와지’란 말을 중국인들은 ‘옥저’로 번역했다.

두만강 이북은 북갈사, 이남은 남갈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북갈사는 북옥저, 남갈사는 남옥저였다. 따라서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한다. 옛날 역사서에서는 남북 옥저의 토지가 모두 비옥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함경도는 척박한 곳이다. 옛날과 지금의 토지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은 순박하고 근검했다. 이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곳은 부여나 고구려 세력가들에게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생선과 소금, 농산물을 천 리까지 져다가 바치도록 했고 미녀를 뽑아 비첩으로 삼았다.

해부루가 북가시라 즉 훈춘으로 천도하고 동부여를 경영한 뒤, 아들 금와를 이은 손자 대소가 왕이 된 다음에 고구려 대주류왕에게 패해 죽었다. 그러자 대소의 동생인 모갑()3)과 사촌동생인 모을이 왕을 자칭했다. 모을은 옛 도읍에서 북갈사 혹은 북동부여를 경영했고, 모갑은 남갈사 혹은 남동부여를 경영했다.

상세한 내용은 제3장 한무제의 침입에서 서술하겠지만, 기존 학자들은 네 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째, 동부여가 분열하여 북동부여와 남동부여가 된 것을 모르고 하나의 동부여에 관해서만 기술했다. 둘째, 옥저가 갈사국인 줄 모르고 옥저 밖에서 갈사국을 찾았다. 셋째, 북동부여와 남동부여가 남북의 두 갈사나이자 두 가슬라이며 남북의 두 갈사나가 남북의 두 옥저인 줄 모르고, 부여·갈사·옥저가 저마다 제각각인 줄 알았다. 넷째, 강릉이 가시라 즉 가슬라로 불린 것은 신라 경덕왕이 북방 영토를 잃은 뒤 그곳에 가슬라란 지명을 새로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강릉을 가슬라 즉 동부여의 옛 도읍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명이 혼란해지고 사실 관계가 뒤섞인 것이다. 하지만 갈사·가슬·가섭의 이두 독법을 분석해보면, 전부 동일한 가시라임을 알 수 있다. 또 대소의 동생과 사촌동생이 각각 점유한 두 가시라의 위치를 보면, 두 가시라가 남옥저·북옥저임을 알 수 있다.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 ‘남쪽으로 도망했다’고 한 것과 고구려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칠 때 ‘북벌’했다고 한 것을 보면 북가시라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북부여의 문화

해모수가 도읍을 세웠다는 점과 북부여의 별칭인 황룡국이 〈고구려 본기〉 유류왕 편에 한번 나온다는 점을 빼면, 북부여의 역사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의 붓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고, 전해지는 게 있다면 다 중국사에서 채록한 것뿐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스라(아스라_옮긴이) 즉 부소량이다. 이는 대단군왕검의 삼경 즉 세 왕검성 중 하나다. 지금 러시아령 우수리는 

스라에서 나온 명칭이다. 지금의 하얼빈이 북부여의 서울이었다. 

스라는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이 잘 자라며, 굽이굽이 휘어진 송화강(옛 명칭은 아리라)이 있어서 교통도 편리하다. 또 인민이 근검하고 용맹하여 큰 구슬과 붉은 보옥을 채굴하고 채색 비단과 자수 비단을 직조했으며 여우·너구리·검은원숭이·수달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했다. 또 성곽과 궁전과 창고가 옛 도읍의 영광을 자랑했다. 또 단군왕검의 태자인 부루가 우임금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책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었고, 《신지》라고 불리는 이두 문장의 역사서와 《풍월()》이라고 불리는 이두 문장의 시가집도 나라에 보관되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예족과 선비족을 정복해서 강국이 됐지만, 예족과 선비족이 배신하고 고구려에 복속함에 따라 국세가 쇠약해졌다. 이 때문에 조선 열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부여의 분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부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부여(扶餘,夫餘, 기원전 4세기~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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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夫餘, 기원전 4세기~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북쪽으로는 헤이룽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마지막 왕은 잔왕이며, 494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다. 동명왕이 세운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그리고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가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 궁궐 · 성책 · 창고 ·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2]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4가(四加)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읍인으로 구성된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3]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4]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5] 특히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6]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부여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7] 한나라 이래로 동쪽의 읍루(숙신)를 신하로서 복속시키고 있었다.[8] 또한,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나라는 선비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고구려의 침략을 더욱 받게 되었다. 서쪽에는 선비족 남쪽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으며 특히 고구려는 부여를 보호국으로 삼고 부여를 지나서 북중국을 수시로 공격하였고 많은 북중국인들은 고구려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285년, 고구려 서천왕 16년 선비족 모용외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이때 북옥저 지역에 일부가 남아 동부여를 형성했다.),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며, 이후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문자왕)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국호[편집]

부여에 대한 국호의 한자 표기는 夫餘, 扶餘, 扶余, 夫余로 쓰인다. 중국의 문헌에서는 夫餘로, 한국의 문헌에서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부여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개발(開發)->자만(滋蔓)->평야(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설[9]과 《자치통감》의 “初,夫餘居於鹿山,”(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자리잡았다.)[10]라는 기술에서의 “鹿山”과 사슴[鹿]을 만주어에서 Puhu, 몽골어에서 буга(buga)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을 가졌다고 하는 설[11]이 있는데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평야를 의미하는 부리(夫里) 등과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12]산해경》의 “有胡‘不與’之國” (호족의 나라인 ‘부여’가 있어...)[13]과 관련하여 예(濊)의 한음(漢音) huì(‘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설(說)[14]도 있으나,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15][16]

역사[편집]

기원[편집]

부여는 일찍부터 문헌에 등장하는데, 《산해경》의 기사 외에 복생의 《상서대전》(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이라 하고, 《사기》에서 열전 화식편 오씨과(烏氏倮) 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倮)와 거래하던 상인 가운데 부여 사람이 나온다.[17][18]사기》 〈화식전〉(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19]라 하였다. 또한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挹婁,古肅慎之國也。... 自漢興以後 臣屬‘夫餘’”(읍루는 옛부터 숙신의 나라이다. ... 한나라가 흥한 이후, 부여에 신하로서 복속했다.)[20]라고 기록된 바, 여기서 한은 후한(後漢, 23~220년)이 아니라,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이다. 따라서, 부여는 전한 대부터 동쪽의 읍루(숙신)를 복속시키고 있을 정도로 국력도 강하였다.[21][22] 그리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23]라는 기사가 보인다. 부여는 늦어도 1세기 초의 후한(後漢) 대(代)에는 왕호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24][25]

부여는 맥족(貊族)이 고조선, 즉, 예인(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란 설[26]과 예(濊)의 일부가 맥(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예맥족(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설[27]이 있다.[28]

영토[편집]

부여의 영토 범위에 관하여는 《삼국지[29], 《후한서[30] 등에 언급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면 부여의 영토는 다음과 같다.

(1) 부여는 만리장성[31] 이북의 현도군 북쪽 천리에 있었다. 《한원》에서도 《위략》을 인용하면서, 만리장성 북쪽으로 1천리에 있다고 하였다.[32] 《삼국지》의 기사도 이 《위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33][34]

(2) 부여는 동쪽으로 읍루(挹婁)와 접하고 있었다. 《진서》(晋書)에 의하면 읍루의 후신인 숙신이 부여에서 60일이면 갈 수 있다[35]고 하여, 부여 중심부로부터 대략 1,000리의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읍루는 부여에 예속되어 있었던 까닭에 실지 부여의 영역은 읍루의 동변(東邊)인 연해주 일대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36]

(3) 부여는 서쪽으로는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선비(鮮卑)와 접하고 있었다. 《한서》(漢書)의 기록[37]에 따르면, 오환과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서 서로 접하고 있었으며, 부여의 서쪽에 오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한서》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오환(烏丸)이 흉노(匈奴)에게 정복당한 후에도 오환은 본래 거주지역에 그대로 있었으므로[38] 부여와 오환과의 지리적 관계는 기원전 1세기까지도 그 전 시기와 다름이 없었다. 기원전 1세기에 부여의 서쪽에 선비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 말 ~ 2세기 초 후한이 흉노를 격파한 후 급속히 장성한 선비족들은 이전 흉노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 부여와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여의 서변(西邊)은 서요하(西遼河) 일대였다. 즉, 기원후 2세기 중엽 선비의 우견(右肩)이었던 단석괴(檀石槐)는 흉노의 옛 땅을 차지하고 그 관할구역을 동부·중부·서부의 3개부로 구분하였는데, 동부지역은 우북평(右北平)으로부터 요동에 이르러 부여·예맥과 접하였다. 3세기 전반 가비능(軻比能) 대의 선비의 동쪽 변경은 요수계선(遼水界線)에 이르렀다고 하는데,[39] 2~3세기의 요수(遼水)는 오늘날의 요하(遼河)이며, 이 시기의 요동도 요하의 동쪽 지역이다. 그런데 당시 요하 하류에는 후한과 (魏)의 요동군·현도군 등이 있었으므로 선비의 동쪽은 요하 상류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와 접하는 부여의 서변(西邊)도 서요하(西遼河) 일대라고 할 수 있다.[40]

(4) 부여는 북쪽으로 약수(弱水)와 접하였다. 《후한서》의 기록[41]으로 보면 후한 대의 부여의 북쪽 강역은 약수(弱水)임이 분명하나, 약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① 《상서[42]와 《통전》(通典)[43]에 기록된 약수의 약(弱)의 옛 발음이 nziak 혹은 niak이므로 약수가 눈강을 가리킨다는 설[44]이 있으나, ② 《진서》(晋書)의 사료(史料)[45]에 의하면 약수라는 강은 부여 뿐 아니라 숙신의 북쪽까지도 경유하면서 흐르는 큰 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쑹화강 유역에 있었던 부여와 그 동변이 연해주의 해변지대까지 이르렀던 숙신의 북쪽을 경유하여 흐르는 큰 강으로는 아무르강 외에는 없다. 따라서 부여의 북경(北境)은 아무르 강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46][47]이 학설이 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48]

(5) 부여는 남쪽으로는 고구려 및 현도군오환(烏桓)과 인접하였고, 진대(晋代)에 이르러서는 선비 모용씨의 진출로 선비와 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부여의 지역이 사방 2,000리였다는 것은 부여가 오늘날 지린성 창춘 시의 눙안 현[49] · 중심지 · 솽양 구와 쓰핑 시 이퉁 만족 자치현 일대(이상, 북에서 남으로)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무단 강과 그 너머의 장광재령 산맥(長廣才嶺 山脈)과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 지방, 북쪽으로는 아무르강 이남, 서쪽으로는 다싱안링산맥과 요하(遼河) 하류, 남쪽으로는 백두산 줄기에 이르고, 휘발하(輝發河)를 경계로 고구려와 접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50][51]

북부여[편집]

  •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역사가 해부루 왕부터 등장하는데, 솽양에서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기원전 59년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해부루가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또한 하백의 딸 유화에게서 주몽을 낳았다고 전한다.[52] 하지만 해모수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인물로 정작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 중에 주몽은 하늘의 아들(천제지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만 할 뿐,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대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으로 볼 때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실존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
  • 논형》에는 동명이 탁리국(=고리국)을 탈출하여 부여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부여의 유민들이 외세에 유린되는 부여를 탈출해 옛 북부여의 땅에 두막루(豆莫婁)를 세웠다고 《신당서》(新唐書)에 전해진다.
  •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17][18]

동부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동부여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북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부여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동부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동부여가 나타난 기록으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광개토왕이 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 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국가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으로 보는 설이 있다.[53] 북부여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동부여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상정하여 주장을 펴는 견해[54]가 다수이나,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를 동일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55]

  •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에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하던 시기에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으로 인해 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에 있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 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본래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에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북사》와 《수서》의 오류이다.[17][18]
  •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의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 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다가 41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에 멸망당했다.

갈사부여[편집]

  • 갈사부여(曷思夫餘)는 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사(曷思) 또는 갈사국(曷思國)이라고도 한다. 서기 22년 건국되었고, 서기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都頭王)이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갈사부여는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 병합되었다.

졸본부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입니다.
  • 졸본부여(卒本夫餘)는 《삼국유사》에는 동명성왕이 졸본에 세운 고구려의 별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졸본부여(卒本夫餘)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전승(傳承)이 기록되어 있어서, 졸본부여가 고구려의 전신 국가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졸본부여가 이미 있었다는 전승(傳承)은 이 지역에 선주(先住)하고 있었던 집단에 대해서 다른 기록이 이를 '졸본부여'라고 칭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56]

남부여[편집]

  • 부여(扶餘)[57]가 국성(國姓)이었던 백제(百濟)는 성왕(聖王) 시기에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로 변경하기도 했다.[58] 이 국호와 국성,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 계승 의식이 강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두막루[편집]

  • 두막루(豆莫婁)는 부여의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이다.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를 자처했다.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 달말루(達末婁)라고도 부른다. 두막루는 서기 410년경에 건국되어 약 300년간 존재하다가 726년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다. 두막루의 영토는 발해와 흑수말갈로 양분되었다가 결국 발해로 흡수되었다.(두막루 색인에서 상세한 설명)
 

 

입력 :2015-09-25 22:34ㅣ 수정 : 2015-09-25 23:14 

잊혀진 한국 고대사 700년 부여의 모든 것

처음 읽는 부여사/송호정 지음/사계절출판사/256쪽/1만 8000원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494년 왕과 일족이 고구려로 망명, 항복할 때까지 70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버텨낸 나라다. ‘사출도’(四出道)라는 제도로 중앙과 지방의 분권을 유지했다.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해 선조 이래 다른 나라에 패한 적이 없는 연맹체 나라였다. 우리 고대사의 잊혀진 조각, 부여다.

부여의 역사가 일반인의 인식에서 희미해진 것은 여러 요인이 있다. 멀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부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그리고 최근 역사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부여의 존재와 강역, 국가의 구성, 의미 등은 중히 다뤄지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의미 있는 연구 작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 등에서 ‘부여족 주족론’(主族論)을 내세우며 부여사가 북방 중심 고대사 인식 체계에서 주요한 왕조의 역사로 자리잡게 만든 공이 크다. 지금이야 부정적인 의미로 더욱 많이 통용되지만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신채호는 ‘국수(國粹) 보전론’을 주창했고, 주체적 역사의식의 필요성은 부여·가야·발해의 재조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부여사에 대한 연구의 발걸음은 거기에서 성큼성큼 나아가지 못했다.

그사이 중국은 동북공정, 그리고 최근에는 ‘랴오허(遼河) 문명론’을 통해 끊임없이 역사전쟁의 정지작업을 이어왔고, 선양 랴오닝성박물관 부여전시장에 ‘부여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소수민족이다’로 시작하는 설명 자료를 붙여 놓았다. 그나마 최근 들어 옛 부여 강역 곳곳에서 발굴이 진행되면서 학계 일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부여, 가야를 포함시키는 ‘5국 시대’ 제안이 나오는 등 다시 부여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

‘국내 고조선 박사 1호’라는 별칭으로도 통하는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복원하려면 고조선사와 고구려사만큼 부여사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부여가 한국 고대사의 전개에 끼친 영향과 유산이 지대한 만큼 부여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예맥족이 세운 한국 고대의 역사로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형해화한 주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확한 사료와 발굴 자료를 통해 실증해야 한다’는 신념을 내세운다. 그리고 부여의 기원과 성쇠, 제도, 생활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저서를 부여사에 관해 가장 객관적이고 충실한 연구라고 자부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2008/03/30 [15:27]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부여사: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부여사

많은독자분들이역사관련기사를애독하고계십니다.저희플러스코리아는일제식민사관를청산하고우리의민족사를올바르게세우기위해[환단고기]등우리의

www.pluskorea.net

 

 

입력 2008-04-29 15:13

부여는 한국사의 뿌리다 :: 문화일보 munhwa

 

부여는 한국사의 뿌리다

부여는 고조선과 더불어 한국 고대사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국가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파생됐고, 부여족의 이동과 분산은 신라와 가야지역의 물질문화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

www.munhwa.com

 

부여는 고조선과 더불어 한국 고대사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국가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파생됐고, 부여족의 이동과 분산은 신라와 가야지역의 물질문화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한국사를 이룬 주요 구성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여사는 그동안 한국사의 주류로 대우받지 못했다. 부여에 대한 연구라 할지라도 주로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정복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한사군 설치 이후 중국 세력과 접촉한 고대 한국의 세력 가운데 하나로서만 파악해왔던 것이다.


반면 중국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활동한 소수민족정권으로 부여를 인식해왔다. 중국에 남아있는 부여 계통의 고고학 자료들은 한족의 영향이 강조되거나 고대 한국과 무관한 유목민의 것으로 둔갑해 중국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부여사와 그 주변’(사진)은 그동안의 부여사 연구를 총점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국내 전문가 6명이 참여, ▲‘삼국지’ 부여전의 문헌적 검토 ▲부여족의 분산과 이동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사에서 보이는 몇 가지 쟁점 ▲동명신화의 전개와 변용 ▲백제의 부여 계승 의식과 그 의미 ▲문헌으로 본 부여문화 등 총 6개 주제에 걸쳐 부여사를 정리하고 있다. 이 중 김기섭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팀장의 수록문 ‘부여족의 분산과 이동’을 통해 부여사의 큰 줄기를 짚어본다.

◆부여의 건국과 신화 = 부여가 언제 건국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 전한(前漢) 때 이미 중국과 접촉했고, 왕망(王莽) 집권기에는 중국의 정치외교 대상이었으므로 늦어도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국가로서의 위상이 분명했다고 할 수 있다. 부여의 건국설화는 동명신화(東明神話)다. 북방 탁리국의 시녀가 정령의 기운을 받아 낳은 아들이 자라나서 활을 잘 쏘는 능력 때문에 왕에게 쫓기게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부여라는 것. 그런데 동명은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의 시호는 아예 동명성왕이며, 백제 역시 동명을 시조로 받들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실이 부여국의 시조를 받들어 제사 지낸 탓인지 중국사서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를 흔히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부여의 정치변동 = 2세기 무렵 부여는 강성한 국력을 자랑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111년경 부여 왕이 보병과 기병 7000∼8000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공격했다고 한다. 121년에는 현도군을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했으며, 이듬해에는 요동을 공격한 고구려를 대신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활동은 부여의 국력을 과시하고, 중국에서 부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67년경에는 부여 왕이 직접 2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처럼 2세기경에 부여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외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며, 결과적으로 매우 부강해 외부의 침략을 받아 파괴된 적이 없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3세기 전반기부터 부여의 국력과 지배력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읍루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리고, 위나라와 고구려가 부여의 정치적 연대세력인 공손씨를 협공할 때에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가장 큰 타격은 285년에 있었다. 모용씨가 부여를 침략한 것. 모용씨와의 싸움에서 대패한 부여는 왕이 자살하고 지휘부가 옥저로 달아나 겨우 목숨만 보전하기에 이른다. 이후 346년경 또 한번 모용씨의 침략을 받았고 410년경에는 고구려가 동부여를 침략했다.

◆부여와 고구려·백제의 관계 = 3세기 후반부터 부여의 왕이 자살하거나 끌려가고 성촌(城村)을 외세에 빼앗기는 사이에 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그중 상당수는 고구려·백제·신라 및 중국 방면으로 흘러들었다. 그 결과 고구려·백제에서는 부여가 왕실의 연원이 됐으며, 중국에서는 부여 왕족들 중 일부가 4세기 말∼5세기 초엽에 화북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부여 유민의 고구려 유입은 주몽설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린 주몽설화에서는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온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와 직접 고구려를 세운 것처럼 돼 있지만, 백제본기의 온조설화에서 주몽은 부인 덕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른 인물일 뿐이다. 부여에서 파생된 일족의 새로운 국가 건설인 셈이다. 부여와 백제의 관계도 건국설화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왕실을 기준으로 북부여→졸본부여→백제라는 주민 이동 경로가 매우 분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부여(扶餘)의 역사와 문화 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krm.or.kr)

부여(扶餘)의 역사와 문화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인문저술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
연구과제번호 2009-812-A00005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3 년 (2009년 07월 01일 ~ 2012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송호정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3회 수행 / 공동연구 3회 수행 / 학술논문 34편 게재 / 총 피인용 280회 ] 
연구수행기관 한국교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만주 일대에 존재한 한국 고대의 국가 가운데 700년 이상을 주변 국가에 영향을 미치며 중심 국가로 존속해온 扶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 것이다.
    그 동안 부여는 한국 고대사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만주 역사를 주도하였으나 渤海史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邊境의 역사로 취급받아 왔다. 주로 고구려의 원류로서, 그리고 고구려의 정복대상으로서 부차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고조선사와 비교해 주변의 역사로 인식되어 부여사 자체에 대한 연구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중심에는 부여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부여 지배층의 분화와 발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집단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발전에 중요한 연원을 이루고 있고, 부여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한 신채호는 중국 동북지방 일대에서 역사를 주도한 종족과 주민집단을 부여족이라 설정하고 고조선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부여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전술했듯이 부여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그간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한반도 북방에 위치한 초기국가라는 내용으로 다른 초기국가와 함께 간단히 언급된는 정도이다. 최근에야 고고학적 자료의 증가에 따라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나, 그 또한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국학자 대부분은 부여사를 고구려사와 마찬가지로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볼 뿐, 결코 한국고대사의 일부로서 부여를 인식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한 고대 국가의 역사를 어떠한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즉 지나친 자기민족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서는 객관적이고도 열린 시각으로 부여사에 대한 연구 역시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고대 이래 우리 민족에게는 범(汎) 부여족 의식이 있다. 이는 부여가 우리의 직접적 조상이 되었던 나라, 우리 민족의 원류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 부여는 고조선과 함께 우리 역사의 출발이 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고조선 연구에 가려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현재 일반인을 포함해 전문 연구자들조차도 부여가 700여 년 간 만주를 활동 무대로 하면서 한국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최근 길림성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고고학 자료가 조사되고 소개되어 있어 부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부여사와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 기록이 많이 참고된다. 그리고 고고학 방면에서 부여 王城으로 이야기되는 동단산․모아산 유적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들 자료 외에도 길림시와 장춘 일대를 중심으로 노하심 유적, 포자연 유적 등 부여와 관련된 많은 고고학 자료가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한계는 있지만, 현재 단계에서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잘 종합한다면 한국 고대사 속의 부여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동북민족과 강역연구총서>라는 이름의 시리즈 연구서를 내고 있다. 연구서 가운데 黃斌․劉厚生의 양인이 『夫餘國史話』(遠方出版社, 2005)라는 이름으로 부여통사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 서술 자체가 매우 조잡하고 부실하며, 서술 시각 또한 부여사를 중국의 고대 지방 정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학계에서도 이제는 부여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서술을 시도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그 동안 부여사 연구의 중요성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자료를 검토해 왔으며, 10여 차례 현지답사와 현지 연구자들을 만나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동안의 고찰과 자료를 중심으로 본 저술에서는 부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종합 정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그 동안 많은 논란이 되어왔던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 우리 역사인 부여사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주된 목표이다. 그 동안 부여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보다 정리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문헌에 보이는 부여의 성장 과정 및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나아가 지역별, 특성별로 고고학 자료를 정리하는 데 기본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三國志』魏書 東夷傳을 중심으로 중국 正史에 기록된 부여 관련 기록을 종합하고, 그 동안 발굴 조사된 중국 동북지방의 고고학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면 중국 동북지방 일대에 펼쳐진 고대 부여 역사의 실체를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동안의 중국 보고서들은 지나치게 중화주의 사관에 입각해 모든 고고학 자료를 중국 문화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 내용 또한 대단히 부실한 상황에서 현장에 대한 답사와 박물관 자료 등을 실제 견학하고 여타 문헌 및 연구 성과들을 종합 정리해 본다면 부여 역사 흐름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여사 관련 사진과 그림 및 도면 등을 보완하고 시기별로 자료들을 충실하게 정리하여 책자로 발간한다면 앞으로 남만주 일대에 펼쳐진 고대 역사, 특히 부여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나아가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종합 분석 작업에 많은 진전과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 성과가 그 동안 부여사를 너무 자국사적 입장에서 해석하던 기존 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순수한 학술적 의미에서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부여사는 고조선을 뒤이어 일어난 초기국가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심 과제에서 부여사는 주변사로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부여사는 고구려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만주 일대에서 예맥족에 의해 주도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우리 고대 역사임을 많은 분들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본 연구는 이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즉흥적이자 수동적인 대응이 아니라 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한국 고대사의 체계화 작업, 그리고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 고대사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작업의 한 과정이다.
    최근에는 동북공정과 관련해 중국에서는 만주 지역은 물론 한반도에서 펼쳐진 고대 역사에 대해 중국사로 해석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본인은 부여사에 대한 섣부른 결론 보다는 현지 유적에 대한 답사와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그것을 우리 시각에서 종합 정리한 성과물을 내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 문제 및 고대국가 형성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얻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초기 국가의 모습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얻는데 도움을 줄 것이며, 이후 한국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정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계 국가다. 흔히 부여족이라 일컬어지는 예맥족의 한 종족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西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며 송눈(松嫩)평원 및 송요(松遼)평원을 개척하였고,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하였다.
    동북지방 역사발전의 주체로, 『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의 나라에 패해본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부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강한 통치력,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는 왕이 존재하여 귀족과 관리들을 거느리며 통치에 임하였고, 큰 종족적 기반을 가진 大加들은 왕이 살던 곳의 사방에 거주하여 연맹체 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
    부여족은 긴 존속 기간 동안 대체로 중국의 왕조들과는 빈번하게 교류하며 우호 관계를 지속한 반면, 북방 유목민족이나 고구려와는 대립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주변의 동옥저나 읍루 등을 복속시킴으로써 만주지역 고대 역사발전의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산업에서도 기후와 토질에 알맞은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을 겸비하였고, 말․옥․담비[貂]․구슬[美珠] 등의 특산물을 漢 민족에 수출하고 錦繡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진전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특히 한의 현도군을 비롯하여 고구려․읍루․선비 등 주변 정치세력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부여 왕조의 구체적인 변동상은 잘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오랜 만큼 주변 세력의 영향 아래 내부적으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으며, 중심 지역에서도 일련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에 대한 표기가 시기와 사료에 따라 북부여, 부여, 동부여 등으로 표기되는 점에서 입증된다.
    부여는 지리적으로 요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북쪽에 유목민족, 남쪽에 고구려라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漢代 이후 부여는 남방의 성장하는 고구려와 북방유목민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 중국과 부단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을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부여는 서쪽에서 꾸준히 성장한 모용선비 세력과 남방의 고구려의 압력을 받았고, 미처 중앙 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가야와 마찬가지로 국가 발달이 순조롭지 못하여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전환하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
    대체로 부여는 송눈평원 일대와 그 이북 지역에 위치한 일단의 종족집단이 길림지역에 이주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부여는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으며, 주몽 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 즉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동명묘를 설치하였다. 또한 6세기 중반 자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백제 등 예맥족계 국가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別種’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최근 가야 지역에서 나오는 귀가 두 개 달린 청동솥 등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계의 유물들을 보건대, 부여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나 주민 이동 등이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친 영향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그리고 기마민족 일본 정복론을 주창한 에가미 미나오(江上波夫)가 일본 황실의 시조 神武의 東征 전설이 부여 왕 전설을 그대로 옮긴 주몽전설과 같은 내용이라고 역설할 만큼 부여의 개국설화는 고대 동방 제 민족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를 승계한 발해 역시 대조영이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그 지배층의 분화와 발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집단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발전에 중요한 연원을 이루고 있고, 부여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본문 내용은 5개의 소주제, 즉 부여사에 대한 인식의 변천, 부여의 기원과 선주민 문화,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부여의 사회구성, 부여의 풍속과 문화로 설정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KBS 역사스페셜 – 2010 탐사보고, 동명루트를 찾아서

최초 공개: 2020. 1. 22.

https://youtu.be/P6zBlykWQu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를 복원하다 1부ㅣ역사이다

2018. 10. 18.

출처; https://youtu.be/gU7PLlW5q3Q?list=PLRAmvpNm4pmmOBSvqEqONRHRqMaXiK7j1 

 

 

 

고구려와 백제의 모국 - 부여국 시리즈1 - 부여의 영토와 역사

2020. 7. 8.

출처; https://youtu.be/-4_vXJPesd8?list=PLRAmvpNm4pmmOBSvqEqONRHRqMaXiK7j1 

 

 

 

<참고자료>

 

분자인류학논단 | 진[辰]...삼한..부여..만주족.. - Daum 카페

 

부여인 - Daum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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