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고대 문화의 동질성을 재조명하는데 큰 의의를 두었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동질성에 기초한 것이다.

발해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이 698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만주 동모산(, 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에 ‘진국()’이라 이름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라고 고쳤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이와 같은 인식과 학문적 실증작업에 소홀했다.

발해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안정된 정치와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면서 926년 거란(, 요나라)에 망할 때까지 220여 년간 해동성국()으로 존재했다.

발해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구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국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계의 민족[]”이라 전제하고, 이어서 발해의 건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즉, 당()나라 즉천무후()가 대장군 이해고()에 명하여 대조영을 쫓게 하자 대조영은 고려[고구려]와 말갈의 민중을 모아 해고에게 항거하니 왕사(, 당나라 왕이 보낸 군사)가 크게 패해 해고는 간신히 탈출하여 돌아갔다. 즉천은 더 이상 대조영을 토벌할 수 없게 되므로,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개루부()의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웅거하게 되었는데, 말갈과 고려[고구려]의 여중()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지자 스스로 진국( 혹은 )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가 성력() 연간으로 698년이다.

여기에서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이 고려[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나라[진국]을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대조영의 민족 문제에 대해서 중국은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구당서』는 발해 건국의 양대 건국 유공자, 즉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내원을 구별하여 기록하였는데, 후세의 해석상에서 이를 구분치 않아 대조영을 혹자가 잘못 ‘말갈인’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 대조영을 ‘’이라고 분명히 지칭하고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 ······ ]”이라고 한 것이나, 『주서()』이역전에서 “백제가 부여의 별종[ ······ ]”이라고 지칭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계 민족이 건국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당서』가 말한 “ []”이란 것도 마땅히 대조영이 고구려계 민족이란 뜻이다.

둘째, “조영과 말갈의 걸사비우[]”라고 하는 구절인데, 여기에서 걸사비우 앞에 굳이 ‘말갈’을 지칭하였으나 조영 앞에는 ‘고려’가 생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당서』는 조영을 전구()에서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이미 종족명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라 하지 않고 조영 앞에 오는 종족명[고려]을 생략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이라 칭한 것은 “”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발해는 고구려와 동일시한 즉,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당서』는 「발해전」 앞에 분명히 「말갈전」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발해국의 민족 구성의 중요 성원이 고구려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발해 동경성지(東京城址)

 

오늘날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실정이지만 고구려와 발해국은 분명 우리의 역사에 속한다. 발해국이 우리의 역사로 인정되는 사료는 발해국이 중국사로 오인될 수 있는 사료보다 훨씬 많다. 또한 발해국의 문화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국의 문물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발해 성곽을 들 수 있다. 발해 5경() 가운데 상경용천부()인 동경성(), 중경현덕부()인 서고성(西), 남경남해부()인 청해토성()을 들 수 있다.

발해국의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인 동경성() 유적은 일찍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서 조사된 바 있다.1)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고 당시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한편 동경성 안에서는 수십 편의 와불()이 출토된 바 있다. 발해 석등()은 지상에 몇 안되는 건조물[조각] 중의 하나이다.

발해 동경성지 석등(石燈)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내 청나라때 흥륭사(興隆寺)가 있던 자리에 발해 석등이 남아 있다. 높이 6m.

 

상경용천부는 일명 동경성이라고 하는데 성의 축성 방법, 성안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발해 수도 동경성지(東京城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는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도성, 일명 동경성이라고 한다. 둘레 16,296m나 되는 외성 안에 황성과 궁성이 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시기[698~926]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로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사방 수백 리가 되는 평탄한 분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분지 둘레는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 처져 있으며 성의 서남쪽에 있는 경박호()에서 흘러나오는 모란강()이 성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감아 돌면서 자연해자()를 이루고 있다.

상경용천부는 궁성·황성·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상경용천부의 외성은 평지토성()이다.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 밖의 길이는 동쪽이 3,358m, 서쪽이 3,406m, 남쪽이 4,586m, 북쪽이 4,946m로 전체 둘레는 무려 1만 6,296m나 되며 성벽의 높이는 약 2m 정도 된다.2) 외성 밖으로 모란강 물을 끌어들인 해자()가 둘러져 있다.

황성과 궁성은 성의 북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궁성의 정남으로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도시계획이 정연하게 이루어진 모습이 마치 근대적 도시계획인 ‘전()자’ 형과 비슷하다. 이는 일찍이 552년부터 586년까지 대규모로 계획도시가 건설된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불케 한다. 평양성 역시 외성과 중성[황성], 내성[궁성]으로 된 기본적인 구조에 방어성인 북성을 축성하였다.

상경용천부의 외성의 성벽은 고구려가 평양성의 평지에 쌓은 성벽 축조 방법과 마찬가지로 돌로 성벽의 외연()을 쌓고 그 안에 흙을 다져 쌓는 판축방법으로 축성하였다. 판축수법은 중국과 같은 판축토성이기는 하지만 외연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방법은 중국의 고대 축성법과는 다르다.

상경용천부에서는 석재 건축유구를 비롯하여 유명한 발해 석등, 불상과 사리함 등 불교유물 및 여러 종류의 기와와 유약을 바른 기와 그리고 발해삼채()·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해에서는 삼채 말고도 녹유 도기, 백자 등이 제작되었다. 우리는 발해 자기의 유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유물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고구려적이다. 동경성의 서북, 모란강 북안의 구릉상에는 유명한 발해 삼령둔() 고분이 있다.

길림성 발해 용정현 중평() 사지 출토 발해 석조 삼존불상()

발해 삼채완()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북대 7호묘에서 최근 발견되어 공개된 발해 삼채완()이다.

흑용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동경성() 출토 발해삼채() 편]록.청.황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도기.(『동경성()』, 1936, PL.103)

발해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서고성지(西)는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남북 길이가 각각 720m, 동서 넓이 각각 630m로 전체 둘레 2,700m이다. 기저부 폭은 13~17m이고, 모양은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벽은 흙과 진흙을 번갈아 쌓으며 다졌다.[니토항축()]3) 외성의 사주에는 해자를 둘렀다. 최근 2000~2001년 발굴을 통해서 성안에서 41×25m 면적의 1호 궁궐지를 비롯하여 건물지와 연못지가 조사되었으며, 기와와 벽돌들이 출토 되었다. 그리고 유약을 입힌 기둥 밑 장식, 치미, 괴면, 전벽돌, 약간의 철정() 등 건축 장식 및 재료가 출토되었다.4) 이 성은 성의 구획, 건물의 배치, 규모, 형식, 건축장식 그리고 출토 유물에 이르기까지 상경 용천부와 유사하다.5) 이 곳은 발해 3대 문왕()이 수도로 사용하던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중경현덕부가 있던 현주()이다. 서고성지 주변에 발해 시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발해 정효공주() 무덤이 있다.

발해 서고성지(西) 발굴전 전경[1990]

발해 서고성지 발굴 장면[2002]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청해토성()이 있다. 이 곳은 남경 남해부가 있던 발해 5경 가운데 하나로, 5경 중 유일하게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6) 현재 남아 있는 규모는 동쪽 성벽 332m, 서쪽 성벽의 길이가 342m이며, 남쪽 성벽 328m, 북쪽 성벽의 길이는 340m로, 성벽의 둘레는 길이 1,342m이다. 그러나 원래의 성은 이보다 규모가 더 컸는데, 1916년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그 둘레가 2,132m가 된다고 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놓인 장방형이다. 성벽의 남은 높이는 2~3m이며 기저부 넓이는 약 8m이다. 성의 바깥 둘레에는 해자가 있으며 성벽에는 각루()와 마면()이 있다. 마면의 길이는 6m 정도이고, 높이는 2m이다. 성내에는 건물지와 우물지가 있으며, 출토 유물로는 초석·기와·벽돌·괴면·치미 등이 있다.

발해 남경남해부 청해토성지(靑海土城址)

함경남도 북청읍 토성리에서 동남쪽 16km 지점 남대천 하구에 위치한 발해 남경남해부의 청해성. 평지 토루(土壘)형의 성터는 지금 남아 있는 높이가 약 2m 정도이고, 둘레 1,342m의 정방형이다. 북한의 지정고적 제172호.

이 외에 갑옷·활촉·창끌 등 무기류와 말등자·말자갈 등 마구, 낫·삽 등 생산도구와 기타 토기류가 있다. 성벽의 중앙에서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옹성() 형식의 문터가 확인되었으며, 토성 주위에서는 발해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구려계의 문화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청해토성지 궁뜰

청해토성지 부근 발해 고분

 

함경남도 북청읍 명수리에서는 최근 수십 기의 발해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은 고구려 특유의 묘제인 소형 석실 봉토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발해의 산성도 고구려의 성곽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발해의 산성은 고구려의 산성과 같이 남쪽이 낮고 그 북쪽에 한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우묵한 골짜기를 낀 산 능선에 성벽을 두른 ‘고로봉식()’ 산성이다.

발해국의 성터를 고르는 방법에서부터 성벽을 쌓는 기술, 왕궁의 기본 구조와 건축술, 도시계획 그리고 무덤을 축조하는 짜임새, 주검을 묻는 방법, 그 밖에 건물에 사용되는 기와 종류와 형태는 물론 제작기술에 이르기까지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1)

 

 

[한국사의 안뜰] 〈27〉 발해 공주의 초대

강구열2016. 12. 30. 19:56

시간의 벽 넘어.. 공주의 무덤과 함께 발해의 문이 열렸다

죽어도 죽지 않고, 전생의 모든 기억을 지닌 채 검을 꽂고 고통 속에 사는 도깨비와 영원한 안식을 줄 도깨비 신부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가 요즘 인기다. 도깨비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정말 아픔을 딛고 살면서 흉복을 주는 존재인가는 알 수 없지만, 필자에게도 최근 드라마 도깨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강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무덤은 어느 날에야 다시 빛을 보리오.(河水之畔 斷山之邊 夜臺何曉)”

1949년, 중국 지린성 육정산에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가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나 그동안 육정산 고분군의 묘역과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자료를 통해서만 묘비와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었다. 올해 4월,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일반에 개방되며 정혜공주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문과 구름무늬 등이 장식된 변려체 해서로 쓴 정혜공주 묘비에는 총 21행 72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묘비는 파손정도가 심해 그중 234자는 무슨 글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1980년 중국 지린성 용두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 묘비에 기록된 총 18행 728자로 인해 비로소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공주는 20살의 나이차에도 그 삶의 행로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1949년, 중국 지린성 육정산에서 발굴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 발굴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나 묘역과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고, 올해 4월에야 개방돼 정혜공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과 어린 자식 먼저 보낸 불행한 삶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예쁘고, 총명하며 지혜로움이 남달랐다. 또한 견문이 넓고 안목이 높아 궁중 많은 이들의 찬사가 잇따랐다. 신령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두 공주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이 행복했던 시간을 묘비에는 “원앙새처럼 짝을 이루고, 봉황새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두 공주 모두 젊은 시절 남편을 갑작스럽게 여의었다. 불행은 이후 잇달아 두 공주 모두 어린 아들, 딸을 앞세워 보냈다. 기록에는 “온 세상이 캄캄했다. 그 어디를 돌아봐도 그리운 님, 사랑하는 자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햇빛은 잿빛이 된 듯 온 세상에 슬픔이 가득했다”고 한다.

“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달라, 두 새가 홀연 등을 돌리고, 두 칼은 끝내 외롭게 되어버렸다.(所天早化 幽明殊途 雙鸞忽背 兩劍永孤) 어린 아들이 일찍 죽으매 젊은이에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子又夭 未經諸郞之日) 어린 딸이 요절하매 방추를 가지고 놀던 때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女又夭 未逢弄瓦之日)”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정혜공주는 777년, 마흔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정효공주도 언니의 길을 따랐다. 지아비를 여의고, 사랑하는 딸을 여읜 슬픔을 안고 끝내 37살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아버지 문왕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왕도를 일으키셨으며, (중략) 해와 달처럼 온 천하를 비추었으며, 기강을 세워 어진 정치가 온 세상에 가득하였네. 이에 그 업적은 중화에 짝할 만하고 하우와 비슷하며, 상탕왕의 도야에 주문왕의 국량을 갖추었도다.(惟祖惟父 王化所興 … 若乃乘時御辨 明齊日月之照臨 立極握機 仁均乾坤之覆載 配重華而肖夏禹 陶殷湯而韜周文)”

위대한 조상들이 천하를 통일하고 반석에 올려놓은 나라를 이어받은 아버지 황상 문왕은 덕을 베풀어 3황 5제, 주나라 성왕, 강왕에 견주어질 만큼 칭송을 받았다. 그 왕이 고목처럼 쓰러져 목놓아 통곡했다. 손자손녀를 앞세웠고 또다시 그 사랑하는 두 딸을 떠나보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조회도 열지 못했고, 나랏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놓아버렸다. 공주들과 함께 나누고 즐겼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놀이와 음악도 그만두었다. 지친 몸, 애간장이 끊어지는 슬픔에서도 이별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손수 챙겼다. 그리고 상여소리에 실어 두 공주를 떠나보내며 가슴에 묻었다. 행여 추울세라, 행여 외로울세라 소나무, 가래나무를 벗삼아 주었다. 그리고 염원했다.

정혜공주 묘에서 출토된 석사자와 동경 등의 유물은 찬란했던 발해 문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구려 계승 자처한 황제국

발해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비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정혜공주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인 반면에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무덤이었다.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묘비 이외에 석사자등이 발견되었고, 정효공주 무덤에서는 발해 시기 생활모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12폭 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매장자가 발해 공주의 신분이었음은 물론 발해 왕실 귀족들의 성격이 확인되면서 발해사 전 분야의 자료 부족, 결핍의 갈증을 풀 수 있었다. 두 공주의 묘지명에서는 아버지 제3대 문왕이 57년간 재위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토록 하여 3황 5제와 견줄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발해가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재위기간 대흥(大興),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효감(孝感)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금륜성법대왕(金輪聖法大王), 즉 전륜성왕으로서 온 사방에 덕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성인(聖人), 황상(皇上)으로 불리며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었고 동궁, 공주, 능 등 외명부제나 동궁제, 능묘제 등을 실시한 흔적들도 기록하였다. 또한 정혜공주는 사망해서 장지에 묻힐 때까지 고구려 3년상의 전통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무덤은 고구려 전통의 굴식돌방무덤에 모줄임천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기록과 유물은 발해를 세운 자신들은 고구려 유민이고, 이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을 웅변하였다. 

초문과 구름무늬 등이 장식된 정혜공주 묘비. 21행 725자의 비문은 정혜공주의 삶을 전한다.
◆발해를 오롯이 전하는 육정산 고분군

그런데 그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던 육정산 고분군, 바로 정혜공주가 잠들어 있는 곳이 개방된다는 소식을 접한 필자는 그동안 가슴 졸이며 다가가 굳게 잠겨 있던 쇠난간 사이로 카메라를 집어넣어 사진을 찍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드디어 만나 볼 수 있을까. 조금씩 묘역에 접근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이 요동질을 쳤다. 묘역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사진을 찍고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사실들을 확인했다. 게다가 관람자들의 편의를 위해 일부는 내부시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유리관으로 만들어 놓았고, 안으로 들어가 형태를 직접 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었다.

도깨비처럼 행운도 이어졌다. 그동안 한번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석사자와 묘지비 그리고 여러 유물들이 필자가 길림성 박물관을 방문한 날 눈앞에 전시되고 있었다. 주둥이를 크게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이 앉아 있던 정혜공주 묘 출토 석사자, 반듯하고 아름다운 해서체로 왕국과 왕비의 생을 기록한 758자의 묘지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정효공주 묘역이 위치한 용두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팔각형의 뚜껑 가운데에 은상감한 용, 봉황, 역사상을 번갈아 수놓고 당초문과 구름무늬로 이은 은상감칠합, 두꺼비 형태의 손잡이를 둘러싸고 공작, 신수, 신조, 석사자 같은 동물을 배치하고 인동문, 새를 장식한 도금한 동경 등도 전시되고 있었다. 발해문화, 발해예술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전해졌다. 

그동안 판독문으로만 알려진 묘지비를 실제로 보니 가슴이 한없이 뛰었다. 과연 판독문처럼 기록되어 있는지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확인하면서 탄식을 쏟아내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눈 부릅뜬 석사자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다.

또 그 주변에는 발해유적 곳곳에서 나온 각양각색의 유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자는 공주들의 손때 묻은 집안을 물건들을 살피면서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 속에 담긴 온갖 사연을 회상하고 나누듯이 한참이나 자리에 머물렀다. 자신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슬픔 뒤 간절함인 듯,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그들은 어느 샌가 필자 앞에 다가와 있었다.(2)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 - 고구려의 계승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2) [한국사의 안뜰] 〈27〉 발해 공주의 초대 (daum.net) 강구열2016. 12. 30. 19:56

 

 

 

 

<참고자료>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정부가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허룽(和龍)시에 있는 발해(698~926년)의 옛 도읍터를 국가고고유적공원으로 개발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16일 지린성 정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허룽시 소재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유적을 국가고고유적공원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지난해 말 투자자 공모에 나섰다.

중경현덕부는 발해의 제3대 왕인 문왕 대흠무(大欽武)가 755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현재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시)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허룽 일대 중경현덕부 자리에는 현재 궁궐터와 내성, 외성, 귀족 무덤군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정효공주(貞孝公主·대흠무의 넷째 딸) 무덤 벽화는 현존하는 발해 시대의 유일한 벽화로 알려져 있다.

현지 지방정부는 국가의 지원 아래 최근 수년간 허룽의 발해 궁궐터와 귀족 무덤군에 대한 발굴·보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2013년부터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해 관광객들을 맞기 시작했다.

중경현덕부 국가유적공원화 사업은 총투자비 3억7천800만위안(66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로, 문화재를 관광자원화하는 사업뿐만 아니라 박물관 건립과 발해 문화 및 농경 체험 구역 건설 등도 포함하고 있다.

발해를 '당나라 때 중국 동북 지역에 말갈족과 다른 민족이 세운 소수민족정권'으로 규정한 중국은 지난 1961년 상경용천부 유적을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한 채 본격적인 발굴작업을 벌인 뒤 궁성을 비롯해 복원을 마친 상경용천부 유적 일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2013년 말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를 자국의 대규모 문화재 보호 프로젝트인 국가고고유적공원으로 지정했다.

 

 

 

[시각] 5개월 對 8년.. 두 유물 공개 두고 엇갈린 태도의 중국 (daum.net) 유석재 기자2013. 4. 17. 03:12

지안고구려비, 5개월만에 공개

 

 

 

 

 

발해 역사 재조명, '한러 유물 특별전' (daum.net) YTN | 김선희2 | 입력 2006.10.31.

 

 

 

발해문자 해독 첫 시도 (daum.net)  2006. 11. 14. 

 

 

'금성리고분', 출토유물 사진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2004년 9월 북한의 함경북도 화대군 금성리에서 발견된 발해(698-926)시대 고분벽화가 북한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인 '내나라'를 통해 사진으로 공개됐다.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돌칸흙무덤) 형식인 이 금성리 고분벽화에서 그림은 등장 인물이 모두 무릎 아래 일부 모습만 남기고 있지만 발해시대 복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이 고분벽화는 그동안 발굴 개요 정도만 국내에 알려졌을 뿐, 그 실물을 담은 사진이 공개된 적이 없다가 발해 복식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민지(미국 거주) 씨가 국내에서는 접근이 차단된 '내나라'에 게재된 관련 자료를 발견해 문화일보에 제공함으로써 27일 알려졌다.

금성리고분은 안길(널길)과 장방형인 주검칸(널방)으로 구성된 석실분이다. 이곳에서는 주검칸 벽과 천장에 모두 회를 바르고 그 위에다가 동ㆍ서ㆍ북쪽 벽면에 벽화를 그렸지만, 발견 당시에는 북쪽 벽면 아랫부분에만 약간의 회벽과 함께 벽화가 남아있었다.

이 인물 그림은 흰 각반을 차고 검은 신발을 신은 사람의 다리를 표현했다. 또, 벽면에서 분리된 회벽 조각에서는 연꽃 위에 서 있는 신선 그림이 확인됐다.

이 벽화고분에서는 이와 함께 발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모양의 벼루 2점과 형태가 다양한 쇠로 만든 관못 38점(길이 3∼9㎝ 안팎), 활짝 핀 연꽃(6잎)을 형상화한 금동연꽃무늬장식판(지름 12.5㎝, 두께 0.05㎝) 등이 출토됐다.

김씨에 의하면 연꽃 위에 서 있는 신선 벽화그림은 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인 오회분 4호묘 등지에 등장하는 주제이며 흰 각반을 차고 검은 신발을 신은 인물 그림은 같은 발해시대 정효(貞孝)공주묘 주검칸의 동서벽 남단에 묘사된 시위(侍衛)들의 포와 바지, 신발차림을 연상케 한다.

발해시대 벽화고분으로는 1980년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와 91년 발해 수도였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상경성(上京城) 부근에서 발견된 싼링둔(三靈屯) 2호분이 알려져 있으나, 후자는 실물사진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금성리 벽화고분은 북한에서 처음 발견된 발해 벽화고분이다.

 

 

 

=서울대박물관- 특별전및 공개강연회 가져 고구려문화 계승자로서의 발해문화 재조명

(서울=연합(聯合)) 수수께끼 속의 발해(渤海)史를 해명할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발해(渤海) 遺物들 이 60년만에 처음 공개된다.

서울대학교박물관(관장: 任孝宰)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발굴·수집하여 소장해온 발해(渤海) 遺物 2백여점을 12일부터 31일까지 특별전을 통해 최초로 전시하는 한편 <발해(渤海)의 역사(歷史)와 문화(文化)>를 재조명하는 공개강연회를 12일 서울대학 캠퍼스에서 개최한다.

 

서기 6백98년부터 9백26년까지 한반도북부와 요하 동쪽에서 흑룡강 이남 대부분의 만주지역에 걸쳐 있었던 대제국인 발해(渤海)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워낙 이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데다 중국, 소련, 한국 등 지리적으로 소속국가간의 갈등 등 여러가지 제약조건으로 어려움이 많아왔다.

중국의 경우 발해(渤海)의 문화에서 고구려문화 요소를 거의 무시한채 당문화와 말갈문화 요소만 강조하고 있고 소련은 발해를 말갈국가로 보면서도 그것을 중국사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극동의 소수민족국가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으며 북한은 외래적인 요소나 토착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채 고구려문화 요소만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그동안 발해연구가 드물었는데 근래들어 한국사에서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발해와 신라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하고 고구려와 발해문화와의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작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학박물관의 이번 <발해유물특별전>은 국내의 본격적 발해사연구를 위한 신호탄이 되고 있는데 전시되는 유물은 발해 동경성(東京城)(黑龍江省寧安縣)과 半拉城(길림성(吉林省)훈춘현), 西古城(길림성(吉林省)화룡현) 등 10여 곳의 발해 고토(古土) 성지 유적에서 출토된 여러가지 기와편, 불상, 장식벽돌, 벽화편, 토기편 등이다. 이와 함께 광개토왕비문 탁본 2종도 전시되고 있다.

전시 유물중에서도 특히 녹유(綠釉)치미, 녹유(綠釉)기둥밑장식, 소조불상, 문자기와 등은 발해 건축및 불교미술과 문화전반에 걸쳐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대박물관이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발해유물을 소장하게 된 것은 경성제국대학 시절인 1932년 부속도서관상의회 위원장은로 부임한 일본인교수 鳥山喜一이 2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쳐 동경성(東京城) 등에서 발해유물발굴에 직접 참여, 유물들을 수집해온데서 비롯된다.

발해유물 대부분이 파편으로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현재 발해 유적은 우리가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실정인만큼 발해문화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이것은 매우 귀중한 고증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즉 이번 전시된 유물들을 통해 발해는 고구려문화를 직접 계승했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당나라의 영향 등 국제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祿釉의 사용이나 와당 등의 건축미술과 벽화, 불상 등에서 보이는 문화의 특징에서는 고구려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교수는 12일의 <발해 역사와 문화> 공개강연회 발표논문 <발해문화의 성격>에서 "발해의 사회구성을 보면 고구려유민들이 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말갈족이 피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서인 <類聚國史>에서도 증명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를 위시해 당문화, 토착적 말갈문화, 중앙아시아 지역이나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문화 뿐 아니라 발해가 건국된 뒤에 스스로 창조한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해문화의 복합성은 貞惠公主(737-777)무덤과 貞孝公主(756-792)무덤에서 찾아 볼 수있는데 정효공주무덤의 경우 구조나 벽화양식이 중국적이면서 순장을 행한 것이라든가 5월장을 치른 것 등은 부여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에 塔葬은 불교적 양식, 묘비의 내용은 유교적인 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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