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①'문화공동체'한반도와 만주

만주ㆍ한반도 유물 닮은 꼴… 중국과는 '딴판'

조선일보

입력 2004.02.03. 18:44업데이트 2004.02.04.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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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①'문화공동체'한반도와 만주

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①문화공동체한반도와 만주 만주ㆍ한반도 유물 닮은 꼴 중국과는 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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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고대사] (2)화려했던 신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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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고대사 3 청동기 문명과 고대국가의 출현 예맥족 엘리트 집단이 첫 고대국가 고조선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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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고대사] 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한민족의 북방고대사 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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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북아의 최강국


만주장악한 고구려, 중국 南朝·北朝와 4강체제

   
   
   

 

“폐하, 고려 대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 직접 문상하지는 못하나, 이곳에서라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하니 동교(東郊)에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라.”

서기 494년 12월, 재위 79년 만에 세상을 뜬 고구려 장수왕의 부음을 듣고 중국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보인 반응이다. 이에 앞서 414년, 장수왕이 부친 광개토왕을 기리고자 세운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영락대왕의 은택은 황천(皇天)이 민(民)을 어여삐 여김과 같이 넓고, 그 위무는 사해(四海)에 떨쳐’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해란 천하(天下), 곧 온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고구려는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이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에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약했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이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것도 5세기의 고구려인이 지니고 있던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기원전 37년 시작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 압록강 중류 지대를 건국의 터로 삼았던 까닭에 주변에 대한 정복과 확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침략과 소멸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 ‘좌식자(坐食者·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불리는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 존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혼란에 빠진 5호16국 시대 북(北)중국에서 명멸했던 왕국들은 중원의 패권을 잡고자 황하 중류 지대로의 진출을 시도하기에 앞서 반드시 동방의 강국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 중국 지안의 삼실총 벽화 중 ‘공성도(攻城圖)’의 한 부분인 기마전 장면. 그림에 보이는 기병은 말까지 갑옷과 투구로 무장시킨 고구려의 정예병으로‘철기(鐵騎)’라고 불렸다.
   


그게 안 되면 굴복시키려 했다.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은 요동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를 의심해 이 동방의 강자와 일전(一戰)을 불사했고, 갈족( 族)이 세운 전조(前趙)는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는 서기 4세기 전반 중국 군현의 후신인 낙랑과 대방을 역사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만주와 한반도의 중심국가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북중국이나 남중국의 왕조들,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들은 동북아시아의 강대한 세력 고구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국제외교를 펼쳐나가야 했다.

 

   
  ▲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 그릇.
   


중국의 왕조나 내륙아시아 유목국가들에 요하 유역 일부를 포함한 동방세계 전체는 ‘고구려 세력권’이었다. 광개토왕의 20년에 걸친 사방(四方) 경략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의 영역 다지기가 낳은 결과였다.

서기 439년 북위가 북중국 통일을 이루면서 동아시아에는 중국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유목세계의 유연(柔然), 동방의 고구려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4강체제가 수립된다.

고구려는 내외로부터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임을 인정받게 되었고, 수도 평양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미 서기 397년 백제의 아신왕은 왕성을 둘러싼 고구려군의 압박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광개토왕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미국 버클리 대학 방문교수

저서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 ‘고분 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등

 

 

100년 넘은 4강구도, 6세기 들어 변화

 

 

   
  ▲ 고구려 전성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광개토대왕비.
   
   

 

만주 지역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중국과는 별개의 질서를 형성했던 상황은 6세기 중엽 정세가 바뀌면서 도전을 받게 된다. 100년 넘게 지속되었던 동북아의 4강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한반도 내에서도 역학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먼저 신라와 백제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략하면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잃고 한반도 안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어 수(隋)와 당(唐)이 250여년 동안 계속된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을 끝내고 통일 중국의 시대를 다시 열자 고구려는 그 압박을 받게 된다.

 

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文帝)와 양제(煬帝)가 잇달아 백만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등의 지략으로 고구려는 수를 물리쳤지만, 국력의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북방 유목 민족 돌궐마저 무너뜨리자 마지막 남은 고구려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한동안 유화 정책을 펴던 당은 고구려에서 대당(對唐)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자 태종(太宗)이 수십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세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양만춘(楊萬春) 등의 분전으로 이번에도 나라를 지켰지만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서기 668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동아시아는 결국 중국 중심의 단일 질서로 재편됐다. 그리고 이런 틀은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1000년이 훨씬 넘게 계속됐다.

 

 

 

四神圖 '주작 현무 청룡 백호' 당나라 벽화선 찾아볼 수 없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패권 국가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독자성과 보편성을 띤 고구려 문화를 만들어 세력권 안의 크고 작은 나라들에 전파했다.

고구려 문화의 높은 완성도는 7세기 전반 고구려의 화가들이 그린 고분 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안남도 강서대묘의 주작과 현무, 강서중묘의 청룡과 백호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였던 중국 당나라의 고분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신수(神獸)’라고 불린다.

그리고 ‘범(汎)고구려 문화권’의 힘은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는 물론 동아시아를 넘어 멀리까지 미쳤다. 만주 지안에서 발견된 장천1호분 벽화에서는 고구려와 중앙아시아 지역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종교 및 문화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

 

하늘세계를 지탱하는 존재로 그려진 우주(宇宙) 역사(力士)는 이목구비를 비롯하여 몸의 생김새 전체가 서역인(西域人)의 모습 그대로이다.

 

연꽃 잎을 뿌리며 여래의 덕을 기리고 있는 비천(飛天)들의 모습도 중앙아시아 불교회화의 전통과 맞닿는 존재이다.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삼실총 벽화에서도 서역인의 모습을 한 역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5. 문명·종족 다양했던 고구려

   
  ▲ 土城이 있던 자리 중국 랴오둥반도 남쪽 장산군도에 있는 고구려 토성 흔적. 고구려가 강력한 해양 방어체계를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는 북방을 향해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부터 100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북쪽으로는 농안(農安) 또는 그 이북,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 유역과 연해주 일부, 남쪽으로는 경기만~소백산맥 이남~삼척을 잇는 지역으로 팽창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역 너머 유목 지역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영향권은 더욱 확대됐을 것이다.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해양 활동도 활발하였으니,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영토가 커지면서 고구려란 나라는 폭넓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갖게 됐다. 송화강·두만강·혼하·요하·눈강 등 길고 수량이 많은 큰 강이 있었고, 산악 지형도 처음 나라를 세웠던 길림과 집안 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의 여러 지역과 연해주 지역, 흥안령의 대삼림 등으로 확대됐다.

 

요동의 넓은 평원, 북방의 초원, 호수 등을 골고루 가졌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비옥한 농토를 얻었다. 건조한 초원, 겨울에 몹시 추운 아한대 삼림지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온대 등 기후에 따른 식생대도 아주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자연환경은 경제양식의 차이는 물론 생활방식, 집단의 세계관과 신앙 등 문화의 형태와 성격에 다양성을 불러왔다.

 

농경문화가 무엇보다 굳건한 토대를 이루었다. 요동반도의 남단과 황해도·한강 유역의 경기만 지역에서 농사가 발전했다. 부여의 옛땅인 송요평원 역시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 광개토대왕 정복전쟁지/ 내몽골 대흥안령 부근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때 여러 차례 이 지역에서 대규모 정복 전투를 벌였다.
   

 

북방과 서북방으로는 유목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북류(北流) 송화강 하류와 눈강 하류 및 동류(東流) 송화강이 만나는 지역은 끝없는 초원지대로서 일찍부터 유목문화가 발달했다. 거기다가 거란(契丹)을 거쳐 유연(柔然) 돌궐(突厥) 등과 충돌하면서 유목 문화의 성격을 흡수해들였다.

고구려가 하늘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기마문화를 중시하며, 고분 벽화에 별자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유목문화의 영향이다. 이 지역의 산물인 명마(名馬)는 고구려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구려는 흥안령 산록에 사는 실위(室韋) 집단과 철을 팔고 말을 사는 마철(馬鐵) 교역을 추진하였고, 남쪽인 송(宋)에 800필의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 윤명철 교수 동국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해양문화연구소장
저서: ‘고구려 해양사 연구’ ‘말 타고 고구려 가다’ 등
   

 

 

동북쪽에서는 삼림·수렵문화가 발전했다. 동옥저로부터는 담비 가죽을 조세로 받았다. 담비 가죽은 북옥저와 접한 읍루(?婁)에서도 명산품으로 취급됐다.

 

동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은 동류 송화강의 일부와 우수리강이 흐르고 삼림이 무성한 지역으로 지금도 주변 종족은 어렵과 수렵으로 생활하고 있다.

 

고구려의 해양 문화는 일찍부터 동해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소금을 생산했으며, 고래를 잡는 등 다양하게 발전했다. 태조왕 때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지금의 단동 지역)을 공격한 이후 계속 황해로 진출을 시도한 고구려는 미천왕에 이르러 드디어 숙원을 풀었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요동반도를 영토화한 이후에는 황해 중부 이북은 물론 요동만도 고구려의 내해(內海)가 됐다. 이처럼 성장한 해양 능력을 토대로 양자강 유역의 송나라 등 남조(南朝)의 여러 국가들과 빈번하게 교섭하면서 남방 해양문화가 들어왔다. 일본 열도와 바다를 건너 문화교류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고구려는 거대한 영토 안에 다양한 자연환경과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국가였다. 대륙과 해양, 반도를 동시에 가지면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어우러지는 경험을 가졌던 것은 우리 역사상 고구려가 유일하다.

 

 

 

漢族·거란·말갈족등 흡수먼거리의 유목·수렵종족은 租稅받는 간접통치로 지배

 

고구려는 다종족(多種族) 국가였다. 예맥족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다양한 종족들이 고구려의 정치체제 안에 흡수됐다.

같은 예맥족인 동부여·북부여와 동예·옥저 외에 한(漢)군현의 잔재였던 낙랑과 대방 지역에 있던 주민과 화북(華北)의 유이민 등 일부 한족(漢族)도 들어왔다. 또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동몽골에 가까운 시라무렌 강 유역의 거란계 북방 종족들과 요하 유역에 있던 연(燕)의 선비족(鮮卑族)을 흡수하였으며, 동몽골 지역의 지두우족(地豆于族)도 일부 편입시켰다. 그리고 동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말갈계는 고구려의 강력한 구성원이 되었다.

고구려는 이처럼 광대해진 영역과 다양한 종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영토의 핵심 부분에는 욕살·태수 등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통치를 했지만, 먼 거리에 있는 유목 및 수렵 종족들은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과 영역을 보장해 주는 대신 조세와 군사력 등을 제공받는 간접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중원(中原) 고구려비에는 신라를 ‘형제국’이라고 부르며 독립을 인정해주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다층적(多層的)인 영향력 행사 방식을 갖고 있었다.

 

多종족·多문명 갈등 해결위해 中고급문명 적극 받아들여

 

거대한 영토를 가진 다종족·다문화 국가였던 고구려는 종족 간의 갈등과 문화적 혼란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고구려는 천손(天孫) 의식과 단군 신화를 중심으로 하는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중국의 고급 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문화적 통일을 시도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朱蒙)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와 달의 아들’로 묘사됐다. 또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점도 강조됐다. 하늘과 땅의 결합, 하늘과 물의 결합이라는 단군신화적 요소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주요 소재의 하나이다.

한편 고구려는 유교·불교·도교 등 고급 사상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수도에 유교 고등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어 지방에도 경당(?堂)을 세웠다.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유교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과 역사서, 문학서를 가르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려고 했다.

 

불교 역시 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에 의해 고구려에 전해졌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 신선이 많이 등장하고 도교의 기본 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이 널리 읽혔다는 사실에서 도교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6. 고구려 부흥을 꿈꿨던 발해


발해, 만주 중·동부 장악… 한국史上 가장 큰 영토 지배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서기 926년 1월 14일은 발해가 거란족에게 굴복한 날이다.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만주 동쪽 땅에 나라를 세운 지 228년 만이고, 고구려 멸망으로부터는 258년 만이다. 이날은 단지 한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날일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우리의 활동 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비운의 날이기도 하다.

 

   
  ▲ 발해가 시작된 동모산 발해의 첫 번째 도읍이었던 길림성 돈화시 부근 동모산의 모습. 발해는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이끌고 세웠다.
   

 

우리 조상들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중부지방까지 오르내렸다. 고구려와 부여도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점차 다가오는 중국 세력에 밀리면서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였고, 대동강 이남 땅만 통일신라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 이렇게 쪼그라든 무대를 다시 넓혀주었던 나라가 발해이다. 전성기의 발해는 만주 동부와 중부를 모두 차지하여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 그 영토는 대략 고구려의 1.5~2배, 통일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 정도였다.

 

 

   
  ▲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도성 정문 유적.
   

 

비록 만주를 잃었지만 요동 지방만은 고려 말까지도 우리 땅으로 인식됐다. 성종 12년(993) 거란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 서희(徐熙) 장군은 “우리 나라는 고구려 후계국이다. 경계로 말하면 압록강 안팎이 우리 영토로서 오히려 당신의 동경(지금의 요양)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한다”고 꾸짖었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방문(榜文)을 붙여서 요양과 심양 사람에게 “그곳은 본시 우리 나라 땅이고, 그 백성은 우리 백성이다”라고 선포하였다.

 

고려 말의 요동 정벌도 이런 의식이 배경이 되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그런 인식마저 잘라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 땅의 경계가 되었고, 만주에서 일어났던 우리 역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세종 9년(1427)에 예조판서 신상(申商)은 “삼국의 시조 사당을 마땅히 도읍지에 세워야 하는데,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아뢰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거란 사신을 거부한 만부교 사건을 두고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하여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라고 하여 발해는 우리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 땅을 잃어버린 데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역사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 발해 시대의 절터. 석등과 석사자상 등이 남아 있다.
   

 

 

발해는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4강 구도를 구축하였고, 때로는 황제국으로 자처할 정도로 기개가 있던 나라였다. 9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송을 듣게 되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3년 뒤에 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핵심지에 있던 발해인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발해의 수도는 불에 타버린 채 인적이 끊겨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다. 요동 지방에 끌려온 발해인도 금(金)나라 초기까지 역사 기록에 그 종적을 보이다가 점차 중국인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발해가 사라진 빈 자리를 차지한 종족이 거란족과 여진족이었다. 멀리 요령성 서쪽에서 유목을 하던 거란족은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영도 아래 갑자기 세력을 키워 중국 북부와 만주를 호령하였다. 이것이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버린 요나라이다.

 

그 뒤에는 금·원·명·청나라가 이어가며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웠고 청나라는 그 후신인 만주족이 세웠다. 이들의 조상은 고구려 때의 숙신족이요, 발해 때의 말갈족이다. 지금 하얼빈 부근에는 금나라 발상지가 있고, 심양에는 만주족의 옛 궁전이 남아 있다. 원나라는 몽골족의 정권이었다. 이렇게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만주의 역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됐고, 단지 과거의 역사로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韓民族이 만주 농경지 개척19C말 조선·淸 間島국경분쟁/ 일본이 淸에 영유권 넘겨버려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를 잃어버리고 조선시대 들어 만주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역사의 기억마저 잊어버렸던 한민족이 다시 만주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1860년대 기근에 고통받던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의 농민들이 농사지을 기름진 땅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다. 말갈족의 후신인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창바이(長白) 산맥 일대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삼고 다른 민족의 거주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주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1881년 봉금이 해제되면서 한민족은 합법적으로 대거 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이주해 논농사를 시작했다. 이 지역의 농경지는 대부분 한민족의 손에 의해 개척됐다.

 

만주 지역의 한민족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였다. 일제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농민과 항일운동가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했다. 또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설에 따른 ‘만주 붐’으로 또 한 차례 한민족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을 되찾은 뒤에도 만주에 그대로 남은 한민족은 ‘조선족(朝鮮族)’으로 중국 내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 지역은 ‘간도(間島)’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지역이었다. 양국 정부는 1712년(숙종 38년) 함께 현지조사를 한 뒤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동쪽으로 압록강, 서쪽으로 토문강(土門江)’을 국경으로 정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과 중국은 토문강을 각각 송화강과 두만강으로 달리 해석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일본 제국주의는 1909년 간도 지방의 영유권을 청에 넘기는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했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7. 오늘날의 만주


中 “소외된 만주, 골칫거리 될라” 개발 한창

   
  ▲ 日 만주침략위한 철도공사 20세기 전반 일본의 만주 침략은 철도 건설과 함께 진행됐다. 일본 기술자들은 하루에 4㎞의 속도로 철로를 깔았다.
   
   
 

지금부터 100년 전 만주는 일본·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말부터 풍부한 인적자원과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하 정책을 폈고, 일본은 곡물 및 지하자원의 보고인 만주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넌 조선족에 한족(漢族)까지 몰려들면서 20세기의 만주는 원주민인 만주족과 몽골족 외에도 수많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복합민족구성체’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날 무렵 만주지역의 인구는 1841만명으로 중국 전체 인구 3억6815만명의 5%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된 한족의 만주 이주로 현재 지린·랴오닝·헤이룽장을 합친 동북 3성의 인구 비중은 1952년에는 전체 인구의 7.2%, 1985년에는 8.78%로 높아졌다가 2002년 말 현재는 8.34%(1억815만명)으로 약간 낮아졌다.

 

 

2000년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192만3400명. 이 가운데 120만명 정도가 지린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72만명 정도가 헤이룽장(30만명), 랴오닝(35만명), 그리고 기타 지역(7만명)에 흩어져 살고 있다.

 

 

조선족의 거주 집중도가 특히 높은 곳은 옌볜(延邊)자치주인데, 2000년도 조사결과 약 85만4000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계속된 한족의 이주와 조선족의 한국 이주로 현재 조선족은 자치주 인구의 39.7%밖에 안 되며 한족이 57.4%를 차지해 ‘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쑥스럽게 되어가고 있다.

 

 

 

 

   
  ▲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의 아파트 공사 현장.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낙후 지역이었던 만주에서는 최근 정부의 주도 아래 대규모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후 만주 지역은 ‘동북(東北) 3성(省)으로 개칭됐다. 지린성의 창춘 제1자동차·지린 화학, 랴오닝성의 안산 철강·번시 제철·금주 석유화학단지, 헤이룽장성의 하얼빈 군수기지 등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속속 들어서며 중화학공업이 중심을 이룬 이 지역은 70년대 말까지 중국 경제의 엔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홍콩과 가까운 동남쪽 지역의 경제특구들에 화교의 투자가 몰리고, 80년대 중반부터는 14개 연해도시가 대외 개방 혜택을 받는 와중에서도 동북지역은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90년대 중반 이후 동북지역과 화동·화남지역 간의 격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경쟁력이 없고 시장의 수요와 동떨어진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던 동북 3성의 국영기업들은 결국 국유기업 구조조정 조치를 맞게 된다. 근로자들은 철밥그릇이라고 생각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체불임금 지급과 새 일자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 ‘동베이현상’(東北現象)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한마디로 옛 만주지역은 중국의 고(高)성장의 축에서 소외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도부는 동북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잊지 않고 않았다. 21세기 중국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동북지역의 산업구조를 현대적인 것으로 변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동북지역 대개발사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것은 2001년에 기안되어 2002년 9월 후진타오 신체제가 탄생한 공산당 제16기 대회에서 확정됐다. 이 사업은 그동안 침체됐던 랴오닝·헤이룽장·지린 등 옛 중화학공업기지를 재건함으로써 지나치게 경공업과 IT 위주로 치닫는 중국의 산업구조 왜곡을 시정하겠다는 것이 목표이다. 중국 정부는 2003년 10월 말 100대 프로젝트에 1차 투자자금 총 610억위안(약 9조원)을 투입했다.

 

물론 여기에는 비경제적 요인도 고려되었다. 한반도 장래가 불확실한 상황 아래서 어느날 북한이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만주족과 조선족이 많고 낙후된 동북지역의 정치적 위험이 커질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한국을 등에 업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세력 범위를 확장하고 ▲원기를 회복한 러시아가 미국의 세력 팽창을 견제한다는 구실로 개입하고 ▲만주 지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본이 엔 차관과 경협 프로젝트를 구실로 만주 접근을 강화하는 상황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인식과 관련, 중국 정부의 ‘동베이 꿍청’(東北工程)은 21세기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걸맞은 만주의 역사적 위상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동북아지역 개발사업’이 옛 만주 경제의 영화를 재현시키려는 노력이라면 ‘동베이꿍청’은 홍콩 주권 환수와 마카오 주권 회복에 이어 마지막 남은 치욕의 역사적 잔재를 지우려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8. 김지하 ‘생명과 평화의 길’

 

입력 : 2004.03.01


“中, 고구려史 편입시도는 잃는게 더 많을 것”

평화!

삶 자체로부터 오는 참다운 평화가 아니라면 전쟁뿐이다. 거짓 평화란 없다.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지극히 평화를 기리면서도 현실에 있어 아슬아슬한 목전의 전쟁에 부딪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예감이나 담론 자체가 전쟁이요, 매일매일의 전쟁 논리가 곧 전쟁의 시작이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평화를 외치면서도 실제에 있어 매일 매시간 전쟁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에 관련된 것이거나 일본에 대한 것이었고, 흔히는 북한에 관한 얘기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중국이다.

 

중국!

 

먼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국과 얼추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서로 다른 그 중국이 단순한 예감의 차원을 넘어 전쟁의 확실한 가능성의 한계 안으로 다가들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상식화된 우리의 논리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너와 나는 언제나 싸우는 것이니, 너와 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김으로써 상대를 흡수 통합한다.”

 

이미 이렇게 우리는 마음 안에서, 이야기 속에서, 사유 속에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먼저 이 내면과 상식의 영역에서 평화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현실의 ‘악무한’(惡無限)인 전쟁으로부터 결코 탈출하지 못한다. 분명히 말한다.

 

 

   
  ▲ 중국 지안시 환도산성 내에 펼쳐진 고구려 고분군. 기원 3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에는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을 비롯하여 고구려 전성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조선일보 DB사진
   

 

탈출하지 못한다!

왜?

우선 동아시아는 그 자체의 독특한 문명적 ‘반대일치(反對一致)’ 안에 있다. 아직까지도 확실한 지역적인 경제공동체나 ‘시장합석(市場合席)’, 그리고 ‘호혜(互惠)의 망(網)’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儒)·불(佛)·선(仙) 등의 청천백일 같은 전통가치는 뚜렷이 공유하고 있다.

어쩌면 ‘반대일치’가 아니라 ‘일치된 반대’일 수도 있고, 그런가 하면 문명 후반의 지리멸렬이 아니라 오히려 새 문명의 새파랗고 확실한 가능성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진화론은 ‘군집(群集)의 개별화(個別化)’가 아니라 ‘개별성들 안에서의 얼룩덜룩한 군집화’이기 때문이다.

 

   
  ▲ 중국 지안의 고구려 고분 오회분 4호묘에 있는 벽화 중‘해의 신’.
   

 

분명한 것은 어느 쪽에서부터 제 길을 제대로 가지 않고 있음이다. 그 가장 명백한 국제적 오류는 중국에서부터 나온다. 민족적 패권주의나 중국제일주의가 곧 자기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문화대국으로서의 큰 포부, 큰 경륜을 애써 깨뜨리고 있음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자신의 소명과 경륜을 스스로 더럽히고 짓밟고 있으니―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공정(工程)’에 대응하는 주변 민족들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얼마 전에 만난 베트남 작가동맹 서기장 휴틴은 가라사대 “베트남은 작은 나라고, 중국은 큰 나라다. 양자 사이엔 프렌드십이 있을 뿐이다. 허허허.” 이 말을 반복하며 계속 웃고 있는 그 웃음에서 중국 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 가한 상흔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의 그런 전술적 태도가 아닌 한국인의 눈시리도록 명백한 대응으로서의 네 가지 얘기를 한편 한숨, 또 한편 실소(失笑)로 낮게, 느리게 띄엄띄엄 말해주던 일이 생각난다.

 

 

“첫째, 중국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이 다 참여하는 고대 아시아 문예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둘째, 미래의 새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는 관료주의에 대해 전 세계인이 참가하는 평화적인 문화대개벽이 일어나야 한다. 셋째, 우주 또는 지구생명학을 학제적(學際的) 차원에서 탐색하면서 전 세계가 참가하는 인간과 비인간 전부의 생명 공동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넷째, 이 세 가지 문화운동을 위해 문(文)·사(史)·철(哲)을 종합하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불붙어야 한다. 우선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이 선두에 서자.”

 

나는 지금 이 네 가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혼자서 아시아 고대 문예부흥 역할에 핏대를 올리던 때의 그 가슴시린 외로움 곁에, 한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민족들과 함께 우리 고대를 살펴봤으면 한다. 긴급한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할 동아시아 나름의 숙제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호혜망 등등. 나는 이 글을 다음의 말로 끝맺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동아시아가 한데 손잡고 위급한 세계사상사에 기여해야 할 부분은 역시 사상이다. 그러나 사상 문제가 바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현대의 특징인 것을 어쩌랴. 긴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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