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홍원탁 교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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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序 야마토 왕국은 백제 사람들이 세웠다

 

1. 야마도, 백제인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2. 백제사람들의 일본열도 정복: 건국설화의 유사성

 

3. 야마도 지역으로 백제 사람들의 대량 이주

 

4.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 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5. 미마나 '임나일본부' 이야기

 

6. 칠지도/광개토왕 비문 : 한반도에서 싸우는 야마도 병사들

 

7. 정복의 길 : 고사기-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일본열도 정복과정

 

8. 원 일본인(原日本人)의 형성: 한반도로부터의 야요이 이주(移住) 물결

 

9. 백제 사람들이 전개한 일본열도의 후기 고분시대

 

10. 후기 고분시대를 전개한 백제사람들 이주 물결의 '타이밍'

 

11. 소가 대신을 포함해 모두들 백제 옷을 입고…

 

12.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

 

13. 왜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

 

14. 백제 정복자들 : 일본열도 정복자들에 관한 몇 가지 추측

 

15.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 왕조의 멸망

 

 


 

序 야마토 왕국은 백제 사람들이 세웠다

- 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

 

 

홍원탁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국제무역론’을 강의 한다. 경제학자로써의 홍교수는 무역과 성장, 한국경제 성장모형과 그 문제점 등을 꾸준히 연구해 오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3년 3월 ‘고대 한일관계사 : 백제 왜’ 라는 책을 내 화제다. 홍교수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는 1988년 영문판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Early Period: Paekche and Yamato Wa”의 발간을 시작으로, 1994년 국문과 영문의 '백제와 야마토 일본의 기원(Paekche of Korea &amp; the Origin of Yamato Japan)'을 비롯 이번이 세 번째 역작이다.

 

경제학자이면서 왜 이토록 한일 역사관계에 집착하는가?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왜 야마토 왕국을 백제사람들이 세웠다고 믿는가?

 

‘일본서기는 야마토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되었다고 기록 하고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도 이를 믿지 않는다. 15대 왕인 오진(應神)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서기 기록내용을 분석하면 오진(應神)은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동경대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대략 375년경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의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근거로,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왕국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레드야드 교수는 348년에 부여가 멸망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바로 부여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홍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을 근거로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바로 백제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백제 왕족인 호무다(오오진)가 거느린 백제 사람들이, 백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일찍이 가야(변한) 사람들이 건너가 아이누-말라요폴리네시안 선주민들과 어울려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야요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 것이다.

(이상은 2003. 8. 27 업코리아 김영근 기자의 기획기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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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가의 근원(1) :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그렇다면 390년경에 야마토 왕조를 세운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야마토 왜(倭)'는 어떻게 창건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토 일본이라는 나라는, '수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마토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 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 법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북중국-내몽골 지역의 기마 유목민족 전문가인 동경대학 교수 에가미(江上波夫: 1906-2002)의 기마민족설은, 아주 이례적으로, 야마토 왕국의 근원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 민족에 의한 정복에서 찾으려했다.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대략 4세기말을 전환점으로 해서 새삼 발견되는, 말과 관련된 다양한 고분 발굴 물이다.

 

하지만 에가미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일본 국민에게 주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그 기마 정복민족의 정체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또 신비하게 만들었다. 즉, 구체성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 학설에 대한 일본 대중의 거부감을 최소화 하려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나라에서 말을 타고 건너온 왕자와 그 일행에 의해 야마토 왕국이 창건되었다면 오히려 낭만과 신비감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기마(騎馬)민족설이란 바로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귀에 익은 (고사기-일본서기) 얘기에다, '말을 타고' 내려왔다는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한 꼴이었다.

 

에가미 교수가 1948년 이래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이 기마 민족설은,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야마토 왕국이 대륙에서 도래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복 왕조라면, 과연 그 도래인 집단은 누구였을까?

 

컬럼비아 대학교수인 레드야드(Ledyard)에 의해 1975년에 수정된 기마민족설은, 에가미가 말하는 그 기마 정복자들의 근원에 대한 일차적인 구체화 작업이었다.

 

레드야드의 '수정판 기마민족설'에 의하면, 4세기 후반에, 만주 땅의 기마 민족인 부여 사람들이, 조국의 멸망의 슬픔을 뒤로하고 한반도를 쳐 내려오면서, 백제지역을 지나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고분 발굴물의 성격이 크게 바뀐다는 시기와도 시대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된다.

 

레드야드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서기 346년에 부여가 망하게 되었다는 기록과,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조에서 발견되는 (대략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레드야드 말대로, 만약 이 부여 사람들이 한반도를 종횡무진으로 쳐 내려오는 길에, 한국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말 뒤에 묶어 끌고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산같이 큰 천황 묘들을 만드는데 부려먹었다면, 현대 일본 사람들의 기분도 아주 크게 상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나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내(홍원탁)가 1988년, 1994년 2003년에 출판한 저서들에서 주장한 것은, '4세기 후반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고, 천황족의 근원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것이다. 내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 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 왕조의 정식 역사 책(정사) 등의 기록들과,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과,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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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가의 근원(2) :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보면, 하타 씨족의 선조인 궁월군이, 오오진 16년[405년]에 120개 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오오진 20년 조는, 야마토 아야 씨족의 조상인 아찌 오미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 왔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들 하타 와 야마토 아야 두 씨족은, 백제의 부(部)제도를 본 따서, 야마토 조정의 재정출납 등 온갖 행정 기능을 맡아보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야마토 왕실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 성씨록에 의하면, 5세기 후반 유랴쿠 치세 때, 하타 씨족 사람 수가 (92개의 부를 구성하며) 총 18,670명에 달 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아찌 오미가 [2대왕] 사자키 에게 청하여, 아야 사람들(漢人)을 위해 이마끼 고을(今來郡)을 세웠다고 한다. 이마키 고을은 후에 타케치(타카이치) 고을(高市郡)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야마토 왕국의 중심지역 이었다.

 

아스까 촌주(村主), 누카타 촌주, 쿠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그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아야 씨족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타케치 고을이 너무 협소해져서, 셋쯔,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이들을 다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속일본기는 타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찌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일본서기 유랴쿠 7년[463년] 조를 보면, 안장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비단을 짜는 사람 등이 그 해에 대거 '백제에서' 건너왔다. 이들 새로 도착한 기술자들을 오오진 때 이미 건너와 있던 (야마토 아야 씨족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새로 건너온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 부르고, 기존 아야 씨족이 관할토록 했다.

 

동경대학 교수이었던 문화인류학자 이시다(石田英一郞: 1903-68년)는, “야마토 왕국이 한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수립된 것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것도 자유지만, 그렇게 되면 오오진 시대에 한반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Ishida, 1974:85).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토 궁중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백제 아신왕(392-405년)의 태자인 전지는, 397년부터 405년까지, 오오진과 함께 야마토에 살았다. 그는 405년에 부왕이 서거하자 백제로 돌아와, 그 뒤를 이어 전지왕(405-420년)이 되었다. 백제 전지왕은 자신의 누이동생 신제도를 야마토에 보내, 오오진을 모시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오오진의 아들 닌토쿠 치세 때의 기록을 보면, 백제 왕자 주군이 야마토 궁중에 와서, 매를 길들이고, 닌토쿠와 함께 매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백제 개로왕(455-475년) 때에는, 유랴쿠 왕에게 모니부인의 딸을 택해서 왕비 감으로 보내주었는데,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그만 화형을 당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 곤지를 야마토 조정에 보내 유랴쿠 왕을 돕게 했다. 479년에 백제 삼근왕(477-479년)이 죽자, 이 곤지의 둘째 아들이 백제로 돌아와서 동성왕(479- 501년)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백제로 떠나는 곤지의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505년, 무녕왕은 왕족 사아군을 보내 야마토 조정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597년 4월, 백제 위덕왕은 아좌 왕자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의 아들 풍장이 631년에 건너 왔다고 기록했다.

 

야마토 지배씨족 1,182개의 조상을 기록하고 있는 신찬 성씨록을 보면, 마히또(眞人)가 황족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수도지역의 마히또 씨족들을 제1권 첫머리에 수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록 내용을 검토해 보면, 모든 마히또 씨족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660년, 백제의 수도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왜에서 돌아온 왕자 부여풍장은 복신과 함께 주유성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당시 사이메이(655-661년) 여왕과 태자 텐지(662-671년)는, 큐우슈우 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 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663년, 야마토 조정은 구원병 만 여명을 보냈는데, 이들 왜군은 백촌강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주유성은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그러자 나라 사람들은 서로들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 주유가 함락 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찌 다시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인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상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시대 (신대) 기록을 읽어 보면, '일신(해의 신)'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나는 상권의 니니기와, 중권에서 등장하는 시조 이하레(진무)와 15대 왕 호무다(오오진), 이 세 명의 상이하게 기록된 존재가, 야마토 왕국의 실제 시조인 호무다 한 사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토 왕국의 시조에 대한 설화적인 기록은 니니기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진무(이하레)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오오진(호무다)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1. 야마도, 백제인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  홍원탁
  •  승인 2005.04.07 00:00

The Yamato Kingdom:The First Unified State in the Japanese Islands Established by the Paekche People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업코리아>는 오늘부터 한일 고대사와 관련, 홍원탁 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도 왕국의 시조는 호무다(應神)이고, 창건 시기는 4세기 중 이라는 것이 (극우 성향의 사람들을 제외한) 일본 사학계의 정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야마도 왕조를 세운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필자가 1988년, 1994년 2003년에 출판한 저서들에서 주장한 것은, “4세기 말경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고, 천황족의 근원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필자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중국 왕조의 정사(正史) 등의 기록들,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야마토 왕국의 시조, 창건 년도:  
4세기말에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홍원탁 (서울대 교수)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 (褒武多, 品陀, 譽田, 應神)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應神)를 제1대가 아니라 제15대 왕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도(倭) 왕국이 호무다로부터 시작 한다고 믿는다. 1 어째서 그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제 일본 사학계에서 거의 정설의 위치를 확보한 쯔다(津田左右吉)의 학설을 소개 한다. 

20세기 초, 와세다 대학의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호무다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쯔다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시조 진무(神武) 이후 신공왕후의 남편이라는 주우아이(仲哀) 왕까지의 (즉 2대부터 14대 왕까지의) 13명의 왕들은, 단지 죽은 다음에 만들어서 부여된 시호(和風諡號)로만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명칭들을 검토 해 보면, 전혀 각자의 고유성이 없다. 반면, 15대 왕이라는 호무다(應神) 부터는, 각기 왕자 때부터 실제로 사용된 특유한 이름을 그대로 왕의 시호로 기록했다. 오오진(應神)의 왕자 때 이름은 호무다(褒武多, 品陀)이고 (和風)시호도 호무다 (譽田)이다. 진무나 오오진이라는 중국식 명칭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원본에 기록된 명칭들이 아니라, 8세기 후반에 오우미 미후네(淡海三船, 721-85)라는 학자에 의해 새삼 중국식(漢風)으로 만들어 부친 시호들이다  

쯔다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14대 왕이라고 하는) 주우아이 왕까지의 왕위 승계 형식을 보면, 단한번의예외도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왕조의 전통인] 부자간의 왕위 승계란, 7세기 후반 덴지(天智, 626-72) 이후에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진(應神) 이후 덴지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이 아니라 [투르코-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간의 승계이었다.

쯔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3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2대 왕부터 9대 왕까지, 또 13대 왕에 대해, 기록이란 것이 거의 없다. 14대 왕 주우아이(仲哀)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신공(神功)왕후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다수의 전후세대 일본 역사학자들은, 6세기 초에 편찬된 제기(帝紀)에는 호무다(應神)로부터 게이타이(繼體)까지 12명만 기록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야마도 왕국이 오오진(호무다)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쯔다가 제시하는 근거에 추가해서) 네 가지 더 제시하려 한다. 

첫 번째의 추가 근거.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위승계가모두 부자간의 승계라는 특이점에 의혹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왕위승계가 아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오진 이후를 보자. 오오진에서 닌토쿠(仁德)로 승계될 때, 한바탕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닌토쿠에서 리츄우(履中)-한제이(反正) 형제로 승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한제이에서 닌교오(允恭)로 승계될 때, 유혈극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닌교오에서 안코오(安康)-유략쿠(雄略) 형제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도, 또 한바탕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있었다. 유략쿠-세이네이(淸寧)에서 겐조오(顯宗)-닌켄(仁賢) 형제로 승계될 때에도, 또 닌켄-부레츠(武烈) 에서 게이타이로 승계될 때에도,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제간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왕위승계가 항상 순탄치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오오진 이후의 고사기-일본서기 기록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의 추가 근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이라는 주우아이가 죽었다는 해(200)로부터 15대 왕이라는 오오진의 즉위(270)까지 장장 70여년에 달하는 공백 기간(201-69)을,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의 존재인 신공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다. 신공왕후는 3세기에 쓰여진 위서 왜인전(魏書倭人傳, 233-97년 간에 생존한 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왕 비미호(卑彌呼)라는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조한 가공의 인물로 간주된다. 4 따라서 오오진(호무다)부터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의 추가 근거. 712년에 고사기가 편찬 완료되자, 야마도 조정은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각 지방의 토산품, 특이한 동식물, 토지 조건, 지명의 유래, 구전돼오는 이야기 등을 조사하고, 기록을 해 올리도록 했다. 이들 기록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리마 풍토기(播磨風土記)는, 713-715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하리마 풍토기를 보면, 독자로 하여금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의 시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호무다는 수없이 순행과 사냥을 하고, 수많은 지명들이 호무다의 사소한 언행들과 연관 지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이 없다. 5  

네 번째의 추가 근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든 왕들 중에 유독 공식적 시조 진무와 15대 왕인 오오진(호무다) 만이 큐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진무는 황족의 조상신인 천손 니니기(邇邇藝)가 하늘에서 내려 온지 얼마 후에, 또 오오진은 모친(신공왕후)이 한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큐슈에 상륙한 직후에 각기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진무는 큐슈에서 동정(東征)의 위업을 이루는 장도에 오르는데, 갓난 아기 호무다는 큐슈로부터 모친(신공왕후)과 함께 축소판의 동정을 수행한다. 공식적 시조인 진무와 15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호무다(應神)만이, 오로지 야마도 지역의 무뢰한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큐슈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이 두 개의 존재가 바로 야마도 왕국의 시조 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6

야마도 왕국의 창건 연대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 되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 조차도 이를 믿지 않는다. 이는 곧 야마도 왕국이 언제 세워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서기에는 호무다(應神)가 270년에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해보면 호무다가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시대의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들 사이에 120년(2周甲)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전지(直支) 왕자가 오오진 8년(277)에 야마토 조정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전지왕자가 야마토 조정에 보내진 것이 397년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경우, 이 시대를 연구하는 세상 모든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도를 택한다. 또, 일본서기에는 백제 아신(阿花)왕이 오오진 16년(285)에 죽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나, 삼국사기에는 405년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 시조 오오진이, 270년이 아니라, 390년에 왕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7  

그렇다면 390년경에 야마도 왕조를 수립한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도대체 야마도(倭) 왕국은 어떻게 창건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도 왕국은, “수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마도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 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 법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에가미(江上波夫)-Ledyard-洪元卓: Model의 진화  

동경대의 에가미 (1948) 교수는, 일본열도의 고분들에서 4세기 말 이후에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등, "고고학적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일단의 기마민족이 대륙으로부터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Ledyard (1975) 교수는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혼란스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한 다음, 346년에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깨진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기마민족 정복자가 부여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홍원탁(1988, 1994, 2002)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 특히 호무다(應神) 이후의 기록들에 초점을 맞추어,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수립했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모델(Model)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일본열도의 신석기 죠몬(繩文, 10,000-300 BC) 문화는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이룩한 것이지만, 청동기-철기 야요이(彌生, 300 BC-300 AD) 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사람들이 건너가 아이누-말라요 폴리네시안 원주민들이 함께 이룩한 것이다. 8 원시 일본어를 사용하는 원시 일본인은 야요이 600년 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고분(古墳)시대 초기(c.300-375)는 야요이 문화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고분시대 후기(c.375-675) 문화는 4세기 말경에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9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 한 것은 370-390년 기간 중이며,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應神)는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정복이 시작되는 시점과 정복자들이 거창한 고분에 각종 마구와 함께 매장되는 시점 사이에는 얼마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정복할 즈음, 백제는 대방군을 점령하였다. 369년경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371년에는 평양 지역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다. 광개토대왕(391-412)이 출현하기 이전의 4세기는 백제가 이웃 국가들과의 무력충돌에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운 것이다. 상무적인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375-84) 재위 중, 백제의 군사력과 영토 확장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필자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 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중국 왕조의 정사(正史) 등의 기록들,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 (2005. 4. 9)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倭”혹은 “日本”이라고 한자를 쓰고 “야마도”라고 읽는다.
夜麻登(倭) (K: 162)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2. 쯔다의 논문이 잘 요약되어 있는 것으로 井上 等 編, 日本歷史大系 1: 原始古代 (山川 1984: 271-3) 참조 

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천황과 천황제도는 초법적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감히 천황과 황실의 원류에 대한 정통적 서술에 의문을 제기 하는 행위는 반역죄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40년에 쯔다의 주요 저술 네 권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1942년에는 황실의 존엄성을 훼손한 죄목으로 3개월간의 금고형을 언도 밭았다.  

4.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元年是年也 太歲辛巳 卽爲攝政元年 (NI: 349)
神功 攝政三十九年 魏志云 明帝景初三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斗米等 詣郡 求詣天子朝獻 (NI: 351)  
神功 攝政六十六年 是年 晉武帝泰初二年 . . . 十月 倭女王遣重譯貢獻 (NI: 361)
神功 攝政六十九年 . . . 皇太后崩 . . 時年一百歲 . . . 是年也 太歲己丑 (NI: 361)
三國志 魏書 卷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倭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 . . 其年十二月 詔書報 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 卑彌呼 . . . 正始. . . 八年. . . 倭女王與狗奴國 男王卑彌弓呼素不和. . . 相攻擊 . . . 卑彌呼以死. 

5. Aoki (1974: 35-39)는 “하리마 풍토기 등에는 호무다(應神)의 공격적인 품성과 전투적인 생애의 기록이 가득 한데도 불구하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호무다의 호전적인 행동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 이것은 호무다의 바람직하지 않은 면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호무다가 야마토 왕국의 지배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로 한 그의 호전적 행위를 감추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 편찬자들은, 호무다가 태어날 때 팔에 궁사(弓士)들이 사용하는 가죽 팔찌 모양의 굳은살이 있었다고 기록을 함으로서, 호무다가 강한 전투적 체질을 소유한 인물임을 암시했다. ..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의 호전적인 측면에 대해 침묵을 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간에, 오늘날 일본열도의 25,000여 개의 하찌만(八幡)신사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져 오는 것은 진무가 아니라 오오진(호무다)이다.  

6. 天照大神之子 . . 娶高皇産靈 尊之女 (N1: 135) 而生 . . 次生 天津彦根火瓊瓊杵根尊 及至奉降 (N1: 161) 天神之子 則 當到 筑紫曰日向高千穗穂槵觸之峯 (N1: 149)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1: 155) 於是 . 日子番能邇邇藝能命 於. . 遇麗美人 . 一宿爲 婚 . . 所生之子. . .次生子 . . 弟火遠理命. . 海神之女. 見感目合而. . .卽今婚其女. . 於是海神之女 . . .乃生置其御子而. . 卽塞海坂而返入 . . . 是…日子. . 娶其姨 . . 生御子名 五瀨命. . 次. . 次. . 次若御毛沼命. . .亦名神倭伊波禮毘古命 (K: 130-146)
整軍雙船 度幸時. . 押騰新羅之國. . 其政未竟之間 其懷妊産 卽爲鎭御腹 取石以纏於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阿禮坐 阿禮二字以音 (K: 230- 232)  
神功 攝政前紀 皇后從新羅還之. . 生譽田天皇於筑紫 (NI: 341)  

7. Aston (1889: 51-65) 참조  

應神 八年 春三月 百濟記云 阿花王立...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應神 十六年 春二月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三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S2: 45). 腆支王 或云直支..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 十四年王薨. . 國人. . 迎腆支卽位 (S2: 46)

8. 소 빙하기의 시작과 같은 기후의 급작스런 변화가, 기원전 300년경에, 한반도 남부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로 하여금 좀더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은 땅을 찾아 대한해협을 건너게 했을 수 있다 기원전 400년경에 북극 빙산들이 남진하기 시작하면서 기온이 저하 했고, 그 상태가 AD 3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이 소 빙하기의 시작은, 유라시아대륙 서쪽 끝에서는 캘트족의 대이동과, 동쪽 끝에서는 전국시대(403-221 BC)의 시작과 일치한다 Mayewski and White (2002: 121), Lamb (1995: 150), K W. B, ed., “Climate Variations and Change,”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Vol. 16 (1986: 534) 참조  

9. 소 빙하기시대(400 BC-300 AD)는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던 로마제국과 중국대륙 한족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하였다. 소 빙하기가 끝난 직후인 AD 300-400년 사이에는 지중해 주변, 북아프리카, 그리고 멀리 아시아의 동쪽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최고조로 달하였다. 이 시기는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끝에서의 훈족에게 밀린 게르만민족의 대이동과 동쪽 끝에서의 5호16국 시대(304-439)의 전개와 일치한다. Lamb (1995: 150)은, 이 같은 가뭄은 정교한 수리시설의 도움을 받아 농경생활을 영위하던 지역을 황폐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기후의 급격한 변화는 한강유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백제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소 빙하기의 뒤를 이은 긴 가뭄 때문에 한반도 남부 연안에 살던 가야 농부들 중 일부는 4세기가 시작되면서 새삼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들의 먼 야요이 친족과 합류하여 초기 고분시대(c.300-375)를 전개 했을 수 있다. 반면, 전투적인 지도자의 영도 하에 한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백제 사람들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우선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마한의 여러 성읍국가들을 정복하고(369 AD), 그 일부는 곧 이어 일본열도로 진출해 후기 고분시대(c.375-675)를 전개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정통 역사학자들은 직업의식에서인지 기후변화에 의한 접근방법을 아주 꺼리는 것 같다.  

 

 

2. 백제사람들의 일본열도 정복: 건국설화의 유사성

  •  홍원탁
  •  승인 2005.04.14 00:00

The Japanese Islands Conquered by the Paekche People the foundation myth: trinity

 

고고학적인 물증을 분석한 다음, 사료에 근거해 야마도 왕국을 수립한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과정에서, 에가미는 전적으로 위서 동이전 기록에 의존 해 미마키를 영도자로 하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고, 레드야드는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기록에만 의존을 해 만주로부터 곧장 내려온 부여인 정복설을 주장했다. 나는 고사기-일본서기의 호무다(오오진) 이후 기록들을 근거로 백제 왕실의 일원인 호무다와 그를 따르는 백제 사람들 무리가, 백제 근초고왕의 축복을 받으며, 큐슈를 거쳐 야마도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에 대한 신화적인 기록은 니니기(邇邇藝)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이하레=진무(伊波禮, 神武)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호무다= 오오진(褒武多,品陀,譽田,應神)부분이담당하고있다.호무다=이하레=니니기는,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 속에서, 한 사람의 시조의 세가지 측면을 나누어 그리는 삼위일체의 존재인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며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은 백제 사람들이고, 일본 천황족의 뿌리는 백제 왕실이며, 그 근원은 고구려 시조 주몽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필자의 이론과 부합한다. 근초고왕 (346-75)과 근구수왕(375-84) 재위 중의 백제는 군사적으로 가장 강성하고 가장 큰 영토적 확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마한의 전 지역뿐 아니라, 일본열도 역시 백제의 군사적 전성기인 4세기 후반 중 (좀더 구체적으로는 370-390년 기간 중) 백제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Text In  PDF.../편집자 주

 

 

백제사람들의 일본열도 정복: 건국설화의 유사성 

니니기(邇邇藝) - 이하레(伊波禮, 神武) –호무다(褒武多, 品陀, 譽田, 應神): 삼위일체

 

서울대 교수 洪元卓  


야마도 왕국 창건 이론의 진화 

북중국-내몽골 지역의 기마 유목민족 전문가인 동경대학 교수 에가미(江上波夫: 1906-2002)의 기마민족설은 야마도 왕국의 근원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騎馬) 민족에 의한 정복에서 찾으려 했다.  

 

에가미(1962, 1964)는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 중부 만주의 부여족 같은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으로부터 유래했으며, 이들은 일본열도를 침공하기 직전에 한반도 남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고 믿었다. 에가미는 이들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큐슈를 점령했으며, 그들의 후손인 호무다(오오진)가 4세기 말경에 근기(近畿) 지역을 향한 동정(東征) 에 올라, 마침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도 왕국을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에가미 기마민족설의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말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대략 “4세기 후반 중간쯤”의 시기 이후의 고분들로부터 급작스럽게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1  

 

에가미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미마키(御間城, 崇神)라는 존재가 바로 기마 침공군의 지휘자이었으며, 한반도 남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미마나(彌摩那)라는 지역으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왔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여,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고고학적 발굴물뿐만 아니라, 사료에서도 찾으려 했다. 위서 동이전은 당시 마한의 월지국에서 변진 24개국 중 12개국을 지배한 진왕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2 에가미는 기마민족 지도자들이 3세기 말까지 진왕 노릇을 하다가, 그 후손의 하나인 미마키가 4세기 초에 미마나를 떠나 일본열도를 정복하게 된 것이라고 믿는다. 3
 
에가미 이론의 결함은, 4세기 말경에 근기(近畿)지역으로 동정(東征)을 떠났다는 호무다(오오진) 만이 고고학적으로 보아 기마 정복자에 속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4세기 초의 미마키도 기마민족에 속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에가미는 미마키를 4세기 초의 인물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침공 역시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4세기 말)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반세기 이상을 소급시켜야 했다. 만약 에가미의 주장이 옳다면, 최소한 정복이 시작되는 큐슈 지역에서 만이라도 중기-후기 고분시대의 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해야 한다. 에가미는 이와 같은 증거물이 아직 발견 안된 연결고리(missing link)이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발견이 될 것으로 믿었다. 4 
 
에가미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일본 국민에게 주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그 기마 정복민족의 정체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또 신비하게 만들었다. 즉, 구체성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학설에대한일본 대중의 거부감을 최소화 하려 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나라에서 말을 타고 건너온 왕자와 그 일행에 의해 야마도 왕국이 창건되었다면, 오히려 낭만과 신비감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기마(騎馬)민족설이란 바로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귀에 익은 (고사기-일본서기) 얘기에다, “말을 타고” 내려왔다는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한 꼴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의 레드야드(Ledyard) 교수는 에가미의 이론을 수정 해서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과 좀더 일치 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레드야드(1975)는 352-372년 기간 중 언제인가 만주지역으로부터 부여의 피난민들이 내려와 한반도 남서부 지역에 백제를 세우고, 그 직후에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 한다. 이 주장은 고분 발굴물의 성격이 크게 바뀌는 시기와 시대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된다. 레드야드 학설의 핵심적인 근거는, 부여가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깨졌다는 기록과,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대략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366년(2주갑 수정 없이는 246년)에 해당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연맹의 일원인 탁순국의 왕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난 364년 어느 날, 구저, 미주류, 막고라는 이름의 백제 사람 3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방에 귀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백제 왕[근초고]께서 신들을 귀국 조정에 보낸 것 입니다. 그러 하오니 우리가 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요. 우리가 그 곳에 도달 할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 임금님께서 틀림 없이 후한 사례를 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기에, 나[탁순 왕]는 구저 일행에게,  ‘나도 바다 건너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들어 왔소만, 우리는 아직 그 나라와 직접적인 왕래가 없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을 정확히 모르오. 아무튼 우리와 그 나라 사이에는 험한 파도가 치는 넓은 바다가 있기 때문에, 큰 배를 가지고도 건너가기가 힘들 것이요. 그러니, 설령 그곳으로 오가는 나루터가 있다고 한들, 배도 준비를 안 하고 어떻게 갈 작정이요?’라고 말을 해 주었소. 그러자 구저 일행은, ‘그렇다면 당분간은 그 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겠습니다. 돌아가서 선박을 확보할 방도를 마련한 다음, 차후에 시도를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소.” 5 

 

독자는 이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부터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364년 당시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고, 마한은 한반도의 서남부를 아직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대한 상세한 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호무다와 그를 따르는 백제 사람들 일행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탐색대를 보냈던 364년으로부터 그리 먼 훗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 장군”들이 이끄는 야마도 군사에 의한 대규모 한반도 침공 얘기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369년에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에 파병을 한 것이 바로 신공왕후라는 것이다. 말인즉, 야마도 군대가 탁순에 도착했을 때, 그들 군대 규모가 너무 적다는 것을 깨닫고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으며, 얼마 후, 분명히 백제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신라를 정복하고, 탁순을 비롯해 6개의 나라를 평정한다. 여기서 그들 군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방 야만 족을 정복하고, 그 정복한 땅들을 모두 백제에게 하사 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백제의 근초고왕과 태자 수가 합류를 하고, 또 4개의 지역이 제물에 함락 된다는 얘기다. 6 

 

만약 독자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 군사적 활약을 야마도 사람들의 작품으로 이해 한다면, 도대체 백제 장수들이 야마도 군대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이해할 길이 없다. 레드야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야마도 군이 차후에 그들이 정복했다는 지역을 어떻게 먼저 통과 해 탁순에 도달을 했다는 것인지, 또 야마도 군이 어떻게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 가면서 정복을 했다는 것인지를 이해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독자가 일단 이들 군사행동을 백제 사람들의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상당히 일관성이 있는 얘기가 된다. 레드야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하면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모든 얘기가 실제로 있었던 백제 군대의 남방 진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단계에서 레드야드는 전혀 불필요한 오류를 범 해, 백제 왕과 그 일행을 부여의 전사들이라 부른다.  

 

일본서기의 얘기는 백제왕과 일본열도를 향해 떠나는 야마도 군대의 지휘자가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며 작별을 고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느닷없이 부여를 끌어드릴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로 향해 출발하는 야마도 군사를 (백제왕족의 일원인) 호무다가 이끄는 일단의 백제 전사들로 간주하면 모든 얘기가 일관성이 있게 된다.  

 

사료에 근거 해 야마도 왕국을 수립한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시도에서 에가미는 전적으로 동이전 기록에 의존 해 미마키를 영도자로 하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고, 레드야드는 전적으로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기록에만 의존을 해 만주에서 곧장 내려온 부여인 정복설을 주장했다. 나는 고사기-일본서기의 호무다(오오진) 이후 기록을 근거로, 백제 왕실의 일원인 호무다와 그를 따르는 백제 사람들 무리가, 백제 근초고왕의 축복을 받으며, 큐슈를 거쳐 야마도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마한의 전 지역뿐 아니라, 일본열도 역시 백제의 군사적 전성기인 4세기 후반 중 (좀더 구체적으로는 370-90년 기간 중) 백제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의 유사성: 니니기-이하레-호무다 삼위일체
 
고구려와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 간의 유사성은 이미 많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지적이 되었다.7 나는 이들 건국설화 기록이,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은 백제 사람들이고, 일본 천황족의 뿌리는 백제 왕실이며, 그 근원은 고구려 시조 주몽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필자의 이론과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이규보의 구 삼국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는 그 핵심적인 주제(motives)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고구려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를 보면, 하늘나라에서 천신 혹은 일신(日 神)의 아들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되지 않은 장소로) 내려오고, 그 땅의 토착 통치자는 자리를 피해준다. 8 이 천제(天帝) 혹은 천신의 아들은 물의 신, 즉 하신(河神) 혹은 해신(海神)의 딸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다. 천제의 아들 혹은 천손(天孫)이, 명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내려(降)와 지상의 세계를 다니다가 (물의 딸인) 미인을 만나고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정말로 신의 아들인가 시험을 받은 다음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양쪽의 표현 기법까지도 똑 같다. 그런데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은, 완전히 인간화 된 아들을 낳은 다음,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한다. 건국 시조를 낳는 역사적인 역할이 끝나면, 이들 남녀가 각기 제 고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숙명 역시 똑같은 구도인 것이다. 그들의 로맨스는 지상 인간세계 왕국의 시조를 낳아주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신대(神代)에 속하는 신화가 된다.  그 다음에는,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이(혹은 그의 아들)가 자라나서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장소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이 부분이, 완전히 인간화 된, 인대(人代)의 전설이 된다. 인간세계의 시조는,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된 장소로 가는 도중에, 거북들 혹은 거북을 탄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9

 

오오바야시(1977)는 고사기 설화 중 거북, 까마귀, 곰 등 세 종류의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육지 동물인 곰 만이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또 마찬가지로 주몽의 설화에서도 거북, 비둘기, 짐승 중 육지 동물 만이 부정적 역할을 한다. 오오바야시는 “두 설화를 부호로 바꾸어 보면 그 구조적 유사성이 분명해 진다”고 말한다.  

 

설화의 끝부분을 보면, 고사기-일본서기의 건국설화는 백제의 전설과도 일치한다. 즉, 형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에 실패를 하고, 동생이 성공을 한다는 공통 주제를 발견한다. 백제의 건국 설화를 보면, 형 비류는 해변가로 가서 실패를 하지만, 동생 온조는 내륙 산악 주변에 정착을 해, 새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고사기-일본서기에서는 진무의 할아버지가 둘째 아들인데 산과 잘 어울리고, 그 형은 물과 잘 어울리는데 결국 실패 해 동생에게 신속(臣屬)을 하게 된다. 진무 자신도 아래 동생이고, 형은 동정(東征) 중 첫 번째 육지 전투에서 전사한다. 호무다(오오진) 역시 두 번째 아들이고, 그 형에 대해서는 고사기-일본서기에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10 백제 건국 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후에 고사기-일본서기의 건국설화를 쓴 사람들에게 추가적인 영감의 출처가 되었을 수 있다. 에가미에 의하면, 부여-고구려와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한 건국설화가 일본열도로 도입되어, 최소의 수정을 가 한 후,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11 오오바야시(1977)는 고구려와 백제 왕국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 사이의 놀라운 상호 대응 구조는 일본의 지배층문화의 원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군주제 문화는 5세기에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 왔으며, 이러한 문화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알타이 유목문화를 상당부분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해 일체화 시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본질적인 사고의 틀을 분석해 보면, 동일한 문화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서술한, 같은 유형의 건국 설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를 해 본다면, 현란하게 피어 있는 꽃들과 무수한 잔가지들을 다 처 버리고, 나무의 원형(原形)을 쳐다보면, 두 개의 나무 모양이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즉, 누군지 부여-고구려 건국 설화에 아주 친숙한 사람들이, 일본 땅에 신천지를 개척한 다음에,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서 독창적인 건국 설화를 쓴다고 쓴 것 같은데, 결과를 보니 그 근본이 되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부여- 고구려-백제의 건국설화와 야마도 왕국의 건국설화는 모두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12 

 

고사기 상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시대 (神代) 기록을 읽어 보면, “일신(해의 신)”아마데라스의 손자인 니니기(邇邇藝)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고사기 상권에 의하면 니니기가 신화(神話)상의 시조이다. 고사기 중권 인대(人代)는 속세 왕국의 시조 진무(이하레, 伊波禮)로부터 시작을 해, 15대 왕 호무다(오오진)로 끝을 맺는다. 고사기 서문은 “니니기가 최초로 다카치호 산봉우리에 내려오고, 이하레 (진무)가 아키츠 섬을 통과해 간다”라고 단숨에 말한다. 13 고사기 중권 첫 부분에서는 큐슈에서 태어난 이하레(진무)가 동정의 장도에 오르고, 끝부분에서는 한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막 일본열도에 상륙한 신공왕후와 큐슈에서 태어난 그녀의 갓난 아기 호무다가 축소판 동정(東征)에 오른다.  

 

해의 신 아마데라스는 손자에게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가 일본열도를 다스릴 것을 명하는데, 속세의 어머니인 신공은 그녀의 갓난 아기를 데리고 동정에 올라 그 아들이 야마도 지역의 이하레라는 도읍지에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 돌본다. 14 고사기에 의하면, 신탁(神託)을 했을 때, 호무다의 모친인 신공왕후는 “해의 신 아마데라스의 뜻은 바로 그녀가 이제 낳으려는 아기에게 그 나라를 주는 것이다. 네 아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라 … 그러니 진정 그 나라를 원 한다면 … 바다를 건너라!”라는 계시를 듣는다. 15 
 
나는 고사기 상권에 해의 여신의 자손이라고 기록된 니니기와, 중권의 첫머리와 끝부분에서 각각 지상왕국의 시조 이하레(진무)와 15대 왕 호무다(오오진)로 기록된, 이 세 명의 상이하게 기록된 존재가, 야마도 왕국의 실제 시조인 호무다 한 사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한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에 대한 신화적인 기록은 니니기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진무(이하레)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오오진(호무다)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호무다-이하레-니니기는 야마도 왕국 건국설화 속에서 한 사람의 시조의 세가지 측면을 나누어 그리는 삼위일체의 존재인 것이다.

 

야마도 왕국 시조의 공식 명칭: 가미(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

Ledyard(1975)는 (야마도 왕국의 공식적 시조인) 진무의 칭호에서뿐만 아니라, 호무다의 도읍지 명칭에서도 나타나는 “이하레”라는 표현에 주의를 환기한다. 16 일본서기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譽田)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磐余)에 정했다고 말한다. 고사기는 이하레를 이파례(伊波禮)라고 쓴다.  백제의 첫 번째 도읍지의 이름은 위례(慰禮)성이다.17 이파례의 세 번째 글자와 위례의 두 번째 글자가 동일한 것을 보면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Ledyard(1975)는 이하레의 한국식 표현은 “이파르”이며 거발(居拔)이라 쓴다고 말한다. 북사(北史), 수서(隋書), 통전(通典)은 거발성이 백제의 수도라고 기록을 했다. 그런데 “있을 거”라는 한자의 훈독은 “이”이기 때문에, 백제 사람들은 “거발”이 아니라 “이발”로 읽었을 것이다. 1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을 해 왔을 당시에는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비류수 언저리(渾江邊 桓仁)에 적당히 집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왕위를 계승한 유리명왕은 “국내 위나암”을 시찰한 다음, 서기 4년에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尉那巖) 성을 쌓았다고 말한다. 19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다. 20 도수희(1972)에 의하면, 위나(암), 어라(하), 위례 등이 모두 동일한 표현이며, 이기동(1990)은 위례가 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위례성이나 위나암성은 모두 왕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21  

 

따라서, 호무다의 도읍지 이하레는 백제의 최초 도읍지 위례를 의미하고, 이는 곧 북서의 이발(居拔), 주서의 어라하와 상응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즉, 호무다는 야마도 왕국 세우고 나서, 백제의 첫 도읍지 이름을 본받아 자신의 첫 도읍지를 “이하레” 라고 불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마도 왕국 시조(진무)의 공식 명칭인 카미(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는 「신성한 야마도의 왕」을 뜻하며, 그 속에는 사람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는다. 즉, 호무다 라는 실명을 넣어야만 「신성한 야마도의 왕 호무다」 라는, 새 왕국을 창건한 시조의 완전(complete) 한 명칭(full name)이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호무다 치세 이래로”라는 표현은 가끔 사용하지만, “진무 치세 이래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22 

 

대흥안령 산맥의 동쪽, (서쪽의 선비-거란 지역과 동쪽 말갈-여진족 지역 중간에 위치한) 만주 송화강 유역 평원에서 밭농사를 짓고 있던 (예-맥 계통의) 반 유목국가인 부여국 (북부여 혹은 동부여) 왕실의 특이한 구성원인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 졸본 부여 지역으로 내려와, 장백산맥의 끝자락 압록강 변에, 고구려라는 새 왕국을 세운다. 주몽의 아들 중 온조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당시 마한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정주 농경사회를 영위하고 있었던 한강변에, 백제(남부여)라는 새 왕국을 세운다. 그로부터 4백여 년이 지난 후, 백제 왕족인 호무다는, 백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남쪽 바다를 건너, 일찍이 가야(변한)에서 건너와 (아이누-말라요폴리네시안 선주민들과어울려) 정착을 한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야요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다.  

 

근초고왕 (346-375)과 근구수왕(375-384) 재위 중의 백제는 군사적으로 가장 강성하고 가장 큰 영토적 확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요서에 진출하고, 평양에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 시키고 (371), 마한 전체를 복속시키고, 일본열도로 진출 해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도 모두 이 시대에 이루어 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2 (2005. 4. 16.)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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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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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즉, 대략 375년경을 기준으로 그 이전 시기의 고분에서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혀 발굴되지 않지만, 그 이후 시기의 고분에서는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을 위시해 전혀 다른 성격의 유물들이 출토된다는 고고학적 단절(archeological break) 현상을 근거로,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는 이론을 주장한 것이다. 3세기 말 경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당시 일본열도에는 말이 없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2. Egami (1964: 66) 참조.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東夷傳 …辰王治月支國 . . .弁辰韓合二十四國. .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後漢書 東夷列傳 第七十五  馬韓 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3. Egami (1962: 16) 참조.  
垂仁二年 … 御間城天皇之世. . .意富加羅國王之子. . .是時遇天皇崩 便留之 仕活目天皇逮于三年 天皇問. . .欲歸汝國耶. . .改汝本國名 追負御間城天皇御名 便爲汝國名. .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NI: 257-9)  

 

4. 에가미(1964: 69)는 “가야의 작전 기지로부터 미마나의 왕들에 의한 북큐슈 침공은, 가야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협조를 받았다”거나, “미마나와 큐슈로 구성된 일본-한국 연맹국이 수립되었다”는 말들을 하는가 하면,  “그 연맹국의 왕은 왜왕이라 하며 그들의 수도는 큐슈에 위치했다. … 오오진 천황 때에는 왜군이 한반도 내부 깊숙이 진출 했으며 … 바로 이 대륙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근기(近畿)지역의 정복도 이루어졌다. … 일본의 천황들은 일본-한국 연맹국을 통치하는 왜왕들이었다. 덴지 천황 대에 이르러, 일본의 천황은 일본열도 만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라는 말도 한다. 에가미(1964: 65-66)는 또 “왜왕은 전 남한(南韓)을 통치할 역사적 근거 혹은 내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모든 남한의 국가들 모양 백제 역시 왜의 종속 국가 이었다”라고 말한다. 에가미는 학문적으로 손색이 없는 자신의 기마민족설을 이런 식으로 황당하게 포장을 한 덕분에 (1991년에) 천황으로부터 문화 훈장을 받았다.  

 

5. 神功 攝政卌六年. . .百濟肖古王. . .曰. . .不知道路 有志無從. . .卓淳王末錦旱岐.. .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 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 令朝其貴國 故求道路. . .令通道路 則我王必深德君王. . .曰 本聞東有貴國 然未曾有通 不知其道 唯海遠浪嶮 則乘大船 僅可得通 若雖有路津 何以得達耶 於是 久氐等曰 然卽當今不得通也 不若 更環之備船舶 以後通矣 (NI: 353)  

 

6. 神功 攝政卌九年 . .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 . .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 . . 更復 奉上 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 . . .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 .擊. . .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四邑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 .與百濟王.. . .登辟支山盟之. . .而送之 (NI: 355-357)  

百濟始祖溫祚王 二十六年 . . . 王曰 馬韓漸弱 . . . 冬十月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 . . 二十七年 . . . 馬韓遂滅 (S2: 16)  

 

7. 오오바야시(1977) 참조.  

 

8. 고사기 에서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인 “니니기-진무”와 직접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들에게, 천신의 아들 혹은 일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북 위서(北魏書)에 의하면, 주몽은 자기 자신을 해의 아들(日子)이며 강의 신 하백의 외손자라고 불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무의 할아버지는 천신이고, 어머니는 해신이다. 진무의 형은, 자신이 일신의 아들(日...子) 혹은 일신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9. 曰 將使吾子孫 立於此 汝其避之. . . 解慕漱 . . . 河伯之女. . . 誘. . .於. . . 卽往不返 .. .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 . 因而. . . 有一男兒. . .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 . 行至淹遞水. . .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 .. 魚鼈浮出成橋 (S1: 260-261)

解慕漱 . . .天之子. . .天帝遣太子 降遊扶余王古都. . . 世謂之天王郞 . ..河伯三女美 . . .可有後胤 . . .長女曰柳花. . .河伯曰 王是天帝之子 有何神異 王曰唯在所試 . . .以禮成婚. . .獨出升天 . . .王知慕漱妃 仍以別宮置 懷日生朱蒙 . . . 南行至淹滯. . . 天孫河伯甥 避難至於此. . .魚鼈騈首尾  (東國李相國集 : 33-36)  

三國志 魏書 夫餘傳 魏略曰. . .有高離之國者 其王者. . .婢云有氣如雞子來下 我故有身後生子. . .王疑以爲天子也 . . .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 .魚鼈浮爲橋. . .東明因都王夫餘之地  
廣開土王碑文 始祖鄒牟王. . .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 . . 剖卵降世 . . . 巡行南下 路有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 . .爲我連葭浮龜 . . .造渡   
 [北]魏書 列傳 高句麗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伊奘諾尊 伊奘冉尊. . . 共生日神. . .一書云 天照大神 (NI: 87) 五瀨命. . .日神之御子 (K: 150) 五瀨命. . . 日神子孫 (NI: 193) 
皇祖高皇産靈 . . . 遂欲立皇孫 . . . 以爲葦原中國之主 . . . 而問大己貴神曰 . . . 欲降皇孫 君臨此地 . . . 如意何如當須避不 . . . 使降之 (NI: 139)  
幸行筑紫 . . . 乘龜甲爲釣乍打羽擧來人 遇于 . . . 問汝者知海道乎 答曰能知 (K:148)
See Ōbayashi (1977: 1-23).  

 

10. 長曰沸流 . . . 欲居於海濱 . . .彌鄒忽以居之 溫祖都河南慰禮城. . . 沸流以彌鄒土濕水鹹 . . . 遂慙悔而死 (S2: 15)  

天照大御神. . .詔太子. . .此御子者 御合高木神之女. . .生子. . .次日子. . .邇邇藝. . .隨命以可天降 (K:124-126)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I: 151) 遂生. . .兄. . .自有海幸 弟. . .自有山幸 (NI: 163) 沈之于海. . .至海神之宮. . .有一美人 [海神聞之曰 試以察之. . .乃知是天神之孫 (NI: 183)] 因娶海神女. . .仍留住海宮 (NI: 165) 天孫. . .還上國 (NI: 171) 兄知弟有神德 遂以伏事其弟 (NI: 175) 豐玉姬自馭大龜. . .海來到. . .其兒生之後. . .海俓去 (NI: 178-181) 以其姨. . .爲妃 生彦五瀨命. . .次. . .次. . .次神日本磐余 (NI: 185) 一書曰 先生彦五瀨命 次磐余彦 (NI: 187)  

帶中日子天皇 . . . 又娶息長帶比賣命 生御子 . . . 次. . .品陀和氣命 . . . 故著其御名 是以知坐腹中國也 (K: 226)  

 

11.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보면, 부여의 시조가 바로 동명이고, 고구려 주몽의 건국설화는 바로 부여의 건국 설화를 차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략의 부여 시조에 관한 얘기는 이러하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은 시녀를 죽이려 했는데, 그녀는 “계란과 같은 기운이 내려 와서 그 때문에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은 삼국사기-구삼국사 에서 기록하는 유화의 얘기와 아주 흡사하다.) 그녀 아들의 이름이 바로 “동명”인데,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송화강?)를 건너 부여의 땅에 도읍을 하고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야요이 시대의 주역이 가야 (가락) 사람들 이었기 때문에, 야마도 왕국의 건국 설화 내용에서 가락국 건국설화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천신으로부터 지상왕국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니니기가 큐슈의 「구지」봉우리로 내려오는데, 「구지」는 가락 시조가 내려왔다는 장소의 지명과 동일 한 것이다.  

 

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K: 128)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觸之峯 (NI:149)  
首露. . .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S2: 290)

三國遺事 駕洛國記 . . .所居北龜旨. . .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 . .故降矣 . . . 始現故諱首露 . . .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13.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秋津嶋 (K: 42) 

 

14. 息長帶日賣命 於倭還上之時 因疑人心 一具喪船 御子載其喪船. . .思將待取 進出於. . . 興軍待向之時 . . .爾自其喪船下軍相戰 . . .難波. . .故追退到山代之時 還立 各不退相戰. . .更張追擊 故逃退逢坂 對立亦戰 爾追迫敗於. . .悉斬其軍. . .共被追迫. . . 故. . .率其太子. . .造假宮而坐 (K: 232-234)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 爲皇太子 因以 都於磐余 (NI:  349) 

 

15. 大后歸神 言敎覺詔者 西方有國 . . . 吾今歸賜其國 . . . 凡此國者 坐汝命御腹之御子 所知國者也 . . . 是天照大神之御心者 . . . 今寔思求其國者 . . . 大海以可度 (K: 228-230)

 

16. 亦名神倭伊波禮毘古 (K: 146)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 爲皇太子因以都於磐余 (NI: 349)  

일본서기에서는, 진무가 다카오하리 라는 곳에서 쓰찌구모 무리들을 크게 무찌르자, 그 땅의 이름이 이하레(磐余)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하레 라는 지역은 오늘날의 나라현 사쿠라이 시의 중심부로부터 아스카를 지나 카시하라 시의 동부에 걸쳐있는 (우네비 산 동남쪽의 카시하라 궁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17.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은 한수 북쪽 위례(慰禮)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기원전 5년에 한수 남쪽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 記 第一 百濟始祖 ...溫祚都河南慰禮城 (S2: 16)

 

18.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차돈(異次頓)을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쓰지만, 읽기는 이차돈 이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사례이다.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 二 百濟 ...其都曰居拔城 亦曰 固麻城 

 

19. 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 本記 第一 始祖東眀聖王... 而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琉璃眀王 二十一年...至 國內尉那巖…王若移都 (S1: 261) 二十二年 王遷都於國內 築尉那 巖城 (S1: 262)  

 

20. 周書卷四十九 列傳第四十一 異域上 百濟者…夫餘之別種 ... 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 鞬吉支 …言竝王也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第六 百濟 按古典記 東眀王 第三子 溫祚...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 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 近肖古王 …都漢城 (S2: 233)  

 

21.  “이하레”란 왕 또는 왕성(王城)을 의미하며, “이발,” “어라하,” “위례,” “위나암” 등과 동일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국내 위나암 성”, “하북 위례성”, “하남 위례성” 등의 표현들을 보면, 고구려의 “위나암”성과 백제의 “위례”성이라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도읍지 즉 왕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이 된 것 같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시조라는 진무의 명칭에 “야마도 이하레”라고 “이하레”를 삽입했는데, “야마도의 왕(王)”이라는 뜻 일 것이다.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 와께(譽田 別) 왕자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에 정했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성(城)이라는 글자가 없지만 왕성(王城)을 의미 할 것이다. 당시 야마도 왕국에는 성(城)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22. 繼體 二十三年 任那王己能末多干岐來朝…曰 夫海表諸蕃 自胎中天皇… (NII: 37)

繼體 二十四年 詔曰 自磐余彦之帝 ... (NII: 43)  

 

3. 야마도 지역으로 백제 사람들의 대량 이주

  •  홍원탁
  •  승인 2005.04.18 00:00

Massive Influx of the Paekche People into the Yamato Region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지역으로 대량 이주해 온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동경대의 이시다(石田) 교수는 “사학자들에 의한 상세한 연구는, 야마도 조정에 의해 일본이 통일된 직후에 최대규모의 이민 물결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만일 야마도 조정이 한국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세워졌다고 한다면, 이러한 대규모 이민의 유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말했다. 또,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도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도 조정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815년에 편찬 완료된 신찬성씨록을 보면, 황족 중에서 으뜸가는 마히또(眞人) 씨족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이 모든 기록들은, 4세기 말에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은 백제 사람들이고, 천황족의 뿌리는 백제 왕실이라는 이론과 부합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야마도 지역으로 백제 사람들의 대량 이주 

백제 왕실과 야마도 왕실 사이의 근친관계 
                                                               

홍원탁 (서울대 교수)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수립된 직후에,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지역으로 대량 이주해 온 사실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하고 있다. 1 3세기 말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을 했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말이 공식적으로 일본열도에 도착하는 것을 기록한다. 오오진(應神) 15년인 404년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 편에 두 마리의 순한 말(고사기는 암, 수 한 마리씩이었다고 구체적으로 밝힌다)을 보내왔는데, 아직기가 경전도 읽을 줄 알았으므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오오진이 아직기에게 백제에 자신보다 더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 있느냐고 묻자, 아직기는 왕인(王仁)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왕인은 405년에 백제에서 건너왔으며, 태자는 왕인으로부터 많은 경전을 배웠다. 아직기는 아직사(阿直史)의 시조가 되었으며, 왕인은 서수(書首, 文首)의 시조가 되었다. 고사기는, 백제왕이 대장장이와 의복을 만드는 재단공을 보냈으며, 또 술 담글 줄 아는 사람(仁番, 須須許理)도 보냈는데, 오오진(應神)이 그가 맞잇게 빚은 술을 즐기는 장면을 기록한다. 2  

 

일본서기는, 오오진 7년인 396년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시켜 저수지를 만든 다음 한인지(韓人池)라 불렀다고 기록을 하는데, 고사기를 보면 신라에서 온 사람들을 시켜 저수지를 만들고서 “백제지(百濟池)”라 불렀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왕이 403년에 진모진이라는 재봉사를 보내왔는데 그녀가 바로 구메 재봉사(衣縫)의 시조라고 말 한다. 3

 

일본서기에는, 하다 씨족의 시조가 되는 궁월군(弓月君)이 403년(오오진 14년)에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오오진 20년)에는 야마도 아야(倭漢) 씨족의 시조가 되는 아지사주(阿知使主)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4 삼국사기 399년 조와 광개토대왕 비문(400년 조)의 기록들은, 바로 이 시기에 백제로부터 일본열도로 일련의 대규모 이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게 하는 사료가 된다. 5

 

신찬성씨록은, 하다씨족(秦氏)들이 (오오진의 아들) 닌도쿠(仁德)왕 때에 여러 현에 분산되어 거주 하면서 양잠을 하여 비단을 조정에 바쳤고, 5세기 후반 유라쿠(雄略)왕 때에는 이 하다 씨족의 규모가 총 18,670명에 달해 92개의 베(部)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6 

 

속일본기는, 야마도 왕국의 중심부인 다케치(高市, 타카이치) 지역이 아지사주가 인솔해 온 아야 씨족으로 넘쳐나 다른 씨족은 열에 한 두 명도 안되었다고 말한다. 7 신찬성씨록에는 아지사주가 오오진 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이마끼(今來) 군을 만들었는데, 후에 그 이름이 다케치 군으로 바뀌었으며, 이마끼 지역이 아야 씨족으로 너무 붐비게 되어, 이들을 여러 지방으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하리마 풍토기에는 아야 씨족이 재배치되는 사례만이 아니라, 하다 씨족과 결혼관계를 맺는 것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8 하리마 풍토기는 또, “오오진 때에 백제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자기 나라에서 하던 식으로 (흙을 파, 掘城處) 성을 쌓아 올리고 살았기 때문에 키무레(城牟禮)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어떤 지명의 유래를 밝힌다. 9

 

한국 고어에서는 산을 “모” 또는 “뫼”라 했다. 따라서 “무레”는 산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은 아주 특이하게 성(城)을 키(己, 只)라고 불렀다. (이기문, 1972: 37-38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키무레”는 “성-산”이라는 뜻으로, 백제 사람들이 (몽촌토성 모양) 흙으로 축조하는 “산성”을 말하는 것 같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유략쿠 7년(463)에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각종 기술자들이 또 한차례 대규모로 건너 왔는데, 그 중에는 안장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비단을 짜는 사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이 도착한 기술자들은 오오진 때에 도래한 (야마도 아야 씨족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고 불렀으며, 기존의 야마도 아야(倭漢) 씨족이 관할토록 했다. 10 “이마끼”는 이제 방금 새로 건너왔다는 뜻이다.

백제 사람들의 이와 같은 대규모 이주는, 야마도 왕국의 역사에서 한국이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경대 문화인류학 교수인 이시다(石田英一郞, 1974: 85)는 “사학자들에 의한 상세한 연구는, 야마도 조정에 의해 일본이 통일된 직후에 최대 규모의 이민 물결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만일 야마도 조정이 한국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세워졌다고 한다면, 이러한 대규모 이민의 유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간의 근친 관계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도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도 조정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백제 아신왕(392-405년)의 태자인 전지는, 397년부터 405년까지, 오오진과 함께 야마도에 살았다. 그는 405년에 부왕이 서거하자 백제로 돌아와, 그 뒤를 이어 전지왕(405-20년)이 되었다. 전지왕은 자신의 누이동생 신제도를 야마도에 보내, 오오진을 모시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11

 

오오진의 뒤를 이은 닌토쿠왕 때, 백제 왕자 주(酒)가 야마도 조정에 와서 매를 길들이고 닌토쿠와 함께 매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개로왕(蓋鹵王, 455-75)때에는 백제 조정에서 유랴쿠의 왕비감으로 모니(慕尼)부인의 딸을 보냈는데,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그만 화형을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개로왕은 그의 동생 곤지(昆支)를 야마도 조정에 보내 유략쿠를 돕도록 하였다. 12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은 자신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던 여인을 곤지에게 주어 보내면서, 그녀가 도중에 해산을 하면 아기를 즉시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그 여인은 정말로 큐슈 부근 섬에서 아기를 낳았고, 곤지는 즉시 사마(한국어로 섬 혹은 시엄)라는 이름의 그 아기를 배에 태워 개로왕에게 보냈다. 일본서기는 그 해가 461년이라고 기록을 했다. 그 아기가 후에 무녕왕(武寧王, 501-23)이 되었으며, 무녕왕 능은 1971년에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발굴된 지석에는 무녕왕의 이름이 사마 이었으며,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죽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무녕왕의 관은 남부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만들었다 금송이 자라면 보통 지름이 1.2미터, 높이가 36미터에 달한다. 

 

백제의 삼근왕(477-79)이 479년에 죽자, 곤지의 둘째 아들이 백제로 돌아와 동성왕(479-501)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백제로 떠나는 곤지의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13 백제 무녕왕은 505년에 사아(斯我)라는 왕자를 보내 야마도 조정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597년 에는 위덕왕이 아좌(阿佐)태자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의 아들 풍장(豊章)이 631년에 건너왔다고 기록했다. 14 

 

신찬성씨록은 야마도 왕국의 1,182개 지배씨족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성씨록의 서문에는 마히또(眞人)가 황족 중에서 으뜸가는 씨족이기 때문에, 수도 지역의 마히또 씨족들을 제1권 황별(皇別) 첫머리에 수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기록 내용을 검토해 보면, 모든 마히또 씨족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15 

 

성씨록 제1권 맨 첫머리에 실려 있는 4개의 마히또 황족들은 호무다(오오진) 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5번째는 케이타이(繼體) 왕의 후손, 6번에서 12번까지는 비다쓰(敏達) 왕의 후손, 13번에서 20번까지의 마히또 씨족들은 백제친왕(百濟親王)의 후손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12번째 씨족, 즉 백제 친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씨족들 바로 앞에 기록되어 있는 마히또 황족은, 비다쓰 왕의 후손인 백제왕(敏達孫百濟王)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언하면, (6번부터 12번까지의) “비다쓰 왕의 후손”은 “백제왕의 자손”과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쓰 왕은 케이타이 왕을 계승한 킨메이(欽明) 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케이타이 왕은 또 호무다의 5세손이 된다. 결국 첫 번째에서 20번째까지의 모든 마히또 씨족들이 “백제왕”의 자손들이었다고 신찬성씨록이 기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호무다 계통의 일본 황족이 모두 백제 왕족에서 유래했음을 의미한다. 16  

 

660년, 백제의 수도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야마도에서 귀국한 왕자 풍장은 복신과 함께 주유성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사이메이(655-61년) 여왕과 태자 덴지(662-71년)는, 큐슈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663년, 야마도 조정은 구원병 만 여명을 보냈는데, 이들은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주유성(州柔城, 周留城)은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은 서로들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주유가 함락 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찌 다시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인가?”17  


國文版 부록: 신찬성씨록의 도래인 분류방식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의 기록들은 모두 왕인이 백제에서 건너 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유독 신찬성씨록 만은 왕인이 중국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찬성씨록은,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도 중국(漢)에서 도래한 씨족으로 분류를 해서 현대 일본 사학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그 이유를 캐 본다 
 
신찬성씨록이 편찬되고 있었던 8세기 말과 9세기 초 라는 시대는, 야마도 왕국 전체가 아직도 중국의 문물을 동경하며 열심히 견당사를 파견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반도의 백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중국의 모든 것이 부럽고, 중국과의 역사적 연관성이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할 때였다.  

 

신찬성씨록에서 제번(諸蕃)이라고 부르는 “공식적”인 도래인 씨족들의 기록은, 중국의 한(漢) 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씨족부터 시작을 해서,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순서로 기록을 했다.   한 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씨족들의 출자(出自)는 진 시황제(秦始皇帝), 한 고황제(漢高皇帝), 후한 광무제(光武帝), 령제(靈帝), 헌제(憲帝), 위 무제(魏武帝), 등 엄청난 존재들이다.
 
그런데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수도와 주변 5개 구니의) 1,182개의 지배 씨족들의 조상들을 검토 해 보면, (天孫降臨 원칙에 따라) 문서상으로 완전하게 “토착화”시켜놓은 백제계 지배 씨족들을 제외하고서도, 너무나 백제를 주축으로 하는 한국계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찬성씨록의 편찬자들은, 인위적으로 왜곡을 해서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지사주, 궁월군, 왕인 같이 분명하게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중국(한 나라)에서 온 것으로 억지 재분류 했던 것 같다.   

 

신찬성씨록에 실린 1,182개 씨족 중, 335개가 고오베쓰(皇別), 403개가 신베쓰(神別), 328개가 쇼한(諸蕃), 116개가 기타(未定雜姓) 씨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403개의 신별은, 373개의 천신(天神) 씨족과 30개의 땅의 신(地祇) 씨족으로 나뉘어 있다. 
 
아주 내놓고 도래 씨족이라고 분류를 한 328개의 제번 씨족의 조상은, 104개가 백제, 42개가 고구려, 9개가 신라, 10개가 가야, 163개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도래했다는 씨족 중에는, 왕인, 궁월군, 아지사주 등의 후손을 포함하는 54개의 백제 계통의 씨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바로 잡으면, 제번 중, 백제에서 도래한 씨족이 158개로 증가되고, 중국에서 도래한 씨족은 109개로 감소된다. 116개의 기타 미정잡성 씨족 중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출신이 (각각 18, 7, 8, 1) 모두 해서 34개가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야마도 왕국 초창기에 도래한 백제 왕족의 후손을 고오베쓰(皇別)로 간주하고, 그들과 함께 도래한 비(非)왕족 지배층의 후손을 (하늘에서 나려 왔다는) 천신 씨족의 신베쓰(神別)로 본다면, 신찬성씨록에 실린 1,182개의 지배씨족 중, 한국 도래인과 직접 관계가 없는 씨족은, (토착 세력인) 땅의 신(地祇) 씨족 30개, 중국 출자 제번씨족 109개, 비(非) 한국계 미정잡성씨 82개 등, 모두 합해 전체의 20%도 안 되는 221개 씨족에 불과한 것이다. 

 

신찬성씨록 자체의 기록에 의하면, 5세기 초에 궁월군이 이끌고 건너온 120현 하다 씨족의 수가, 5세기 후반 하쯔세 (유랴쿠, 雄略) 왕 때에 와서는 18,670명에 달했다고 한다. 속일본기는 다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지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18 아지사주가 데리고 온 사람들도 결국은, 셋츠,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배치 된 마을의 촌장은 거의 모두 아야 씨족 사람들이 담당했다. 신찬성씨록의 편찬자들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규모가 큰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의 출자를 백제로 그냥 놓아둘 수가 없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3 (2005. 4. 23.)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야마도”는 기나이(畿內)의 5개 구니(國)중 하나로, 오늘날의 나라현(奈良縣)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그 지역을 倭 혹은 大倭라 쓰고 (대) 야마도라 읽었는데, 737년부터 大和로 고쳐 쓰기 시작했다. 읽기는 전이나 마찬 가지로 야마도라 읽는다. 야마도 평야는 남북으로 30킬로, 동서로 15킬로 정도가 되는 지역이다 

 

2. 亦百濟國主照古王 以牡馬壹疋牝馬壹疋 付阿知吉師以貢上 此阿知吉師者 阿直史等之祖 .  . 又科賜百濟國若有賢人者貢上 故受命以貢上人 名和邇吉師 卽論語十卷 千字文一卷 . . . 此和邇吉師者文首等祖 . . . 又貢 上手人韓鍛名卓素 亦吳服西素二人也 又. . . 及知釀酒人 名仁番亦名須須許理等參渡來也 (K: 248) 

 

3. 應神 十五年 百濟王遣阿直伎 貢良馬二匹. . . 阿直伎亦能讀經典 卽太子. . 師焉 於是天皇問阿直伎曰 如勝汝博士亦有耶 對曰 有王仁者 是秀也 時遣. . 荒田別 .  .於百濟 仍徵王仁也 其阿直伎者 阿直伎史之始祖也 . . 十六年 . . 王仁來之 卽太子. . . 師之 習諸典籍於王仁 莫不通達 所謂王仁者 是書首等之始祖 (NI: 371-373) 

 亦新羅人參渡來 是以. . .命引率 爲役之堤池而 作百濟池 (K:  248)  
應神 七年 高麗人百濟人任那人新羅人 並來朝 時命. . . 領諸韓人等作池 因以 名池號韓人池 (NI: 367) 
應神 十四年 百濟王貢縫衣工女 曰眞毛津 是今來目衣縫之始祖也 (NI: 371)

 

4. 亦百濟國主照古王 . . . 亦貢 . . . 又貢 . . . 又秦造之祖 漢直之祖 . . 等參渡來也 (K: 248)
應神 十四年 弓月君自百濟來歸 . . .領己國之人夫百卄縣 . . . 然因新羅人之拒 皆留加羅國 十六年 . . 乃率弓月之人夫 與襲津彦共來焉. . 卄年. . 倭漢直祖阿知使主. . .並率己之黨類十七縣而來歸焉 (NI: 371- 75) 

 

도중에 (가라 지역에서) 신라인들의 방해로, 궁월군이 인솔해 온 사람들의 실제 야마도 도착 연도는 405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99년에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크게 병마를 징발하니, 많은 백성들이 괴로워 신라쪽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한다. 아마 이 달아난 사람들이 몇 년 후에 궁월군과 아지사주를 따라 야마도로 이주한 백제 사람들인 것 같다. 광개토왕비는 400년에 왜적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즉시 투항했고, 이어 신라성을 공격하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는데, 성안의 대부분 사람들이 왜인을 따라가기를 거부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阿智使主之黨類 自百濟國來歸也 日本三代實錄 (日本六國史 韓國關係 記事原文: 216-217).

일본삼대실록의 세이와(淸和) 죠오간 4년(862년) 조는, 사카우에 라는 씨족이 아지사주의 후예인데, 이 아지사주의 무리들은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백제”로부터 건너왔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은 우다(887-897년) 천황의 명에 의해 편찬된 세이와-요오제이 -고오코오 3대 29년 간(858-887년)의 역사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었는데, 그로부터 389년이 지난 371년에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성(漢城)으로 옮겼다 한다. 위례성이나 한성이나 모두 한산(漢山)과 한수(漢水)의 인근 지역이다. 한성 백제는, 그로부터 105년이 지난 후 (475년에 장수왕이 왕도 한성을 포위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을 때), 문주왕이 웅천으로 천도를 하면서 끝이 났다 5세기 초, “한성”백제에서 건너온 아지사주와 그 백성들을 “漢人(아야 사람)”들 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어째서 “한나라, 물 이름, 은하수” 등을 뜻하는 한(漢)이라는 한자를 써 놓고 “아야”라고 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들 하다(秦)와 야마도 아야(漢) 두 씨족은, 백제의 부(部)제도를 본 따서, 야마도 조정의 재정출납 등 온갖 행정 기능을 맡아보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야마도 조정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5. 阿莘王 八年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減 (S2: 45-46)

廣開土王碑文 十年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 .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  .倭寇大潰 城內十九盡拒隨倭  
城內十九盡拒隨倭  

 

6. 大泊瀨稚武天皇御世 . . . 秦民九十二部一萬八千六百七十人 (SS: 307)

仁德 御世 以百二十七縣秦氏 分置諸郡 卽使養蠶織絹貢之 (SS: 279)

 

7. 阿智使主 . . 率十七縣人夫歸化 詔高市郡檜前村而居焉 凡高市郡內者 檜前忌寸及十七縣人夫 滿地而居 他姓者十而一二焉 (SN4: 380)  

 

8. 阿智王 譽田天皇御世.七姓漢人等歸化 . . .仍賜大和國檜隈郡鄕居之焉 . . . 飛鳥村主. . 錦部村主 . . .鞍作村主 播磨村主 漢人村主 今來村主 . . 等是其後也 爾時阿智王奏 建今來郡 後改號高市郡 而人衆巨多 居地隘狹 更分置諸國 攝津. . .近江播磨. . 等 漢人村主是也 (SS: 358)

신찬성씨록은, 아스까 촌주(村主), 누가다 촌주, 구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모두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少宅里 本名漢部里 所以號漢部者 漢人居之此村 故以爲名所以後改曰少宅者. . 祖父 娶少宅秦公之女 (F: 304)

 

9. 播磨國風土記 神前郡 多駝里 ... 品太天皇 巡行之時 ... 云墓 又云城牟禮山 一云 掘城處者 品太天皇御俗 參度來百濟人等 隨有俗 造城居之 (F: 330)  

도래(度來, 渡來)라는 표현은 고사기(712년), 일본서기(720년), 풍토기(712-20년) 등에 기록된 특이한 표현이다  

 

10. 雄略 七年 西漢才伎歡因知利. . . 取道於百濟 . . 集聚百濟所貢今來才伎 . . 天皇. . . 命東漢直 以新漢陶部. . 鞍部. . 畵部. . 錦部. . 譯語. . .等 遷居于. . . 或本云 吉備臣. . . 還自百濟 獻漢手人部 衣縫部 宏人部 (NI:  475-477) 

[7대왕] 하쯔세 치세 때, 카후치 아야(西漢) 씨족인 콴인치리의 제안에 따라, 백제한테 기술자들을 보내달라고 청했었다. 당시 백제 조정이 새로 보내준 이마끼 기술자(今來才伎)들을 이마끼 아야(新漢) 혹은 아야 기술자(漢手人)라 불렀다. 이들을 처음에는 야마도의 어느 한 지역에 거주하게 했다가, 후에 야마도 아야(東漢) 씨족의 아타히 쓰카 에게 명해, 모모하라와 마카미하라 마을에 옮겨 살게 했다. 모모하라와 마카미하라는 모두 오늘날의 나라현 다케치(다카이치)군 아스카 촌에 위치했다.  

 

11. 應神 八年 百濟記云 . . . 阿花王 . . . 遣王子直支 (NI: 367) 
腆支王 或云直支. .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王薨. . 太子還國. . 國人. . 迎腆支卽位 (S2: 46) 
應神 十六年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應神 三十九年 百濟直支王 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 . . 率七婦女 而來歸焉 (NI: 379)

 

12. 仁德 卌一年 百濟王之族. . 爰酒君來之. . 卌三年 . 捕異鳥. . 百濟俗號此鳥曰俱知 是今時鷹也 乃授酒君令養馴 未幾時而得馴. . 居腕上獻于天皇… 幸. . 遊獵. . 乃放鷹令捕 (NI: 409)
雄略 二年 百濟池津媛 違天皇將幸 婬於. . . 天皇大怒 . . . 以火燒死 百濟新撰云 . . . 蓋鹵王立 . . . 天皇遣 . . . 來索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 貢進於天皇 (NI: 463)  

 

13. 雄略 五年 百濟 . . . 蓋鹵王. . . 告其弟. . . 昆支. .. 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NI: 471)

 雄略卄三年 百濟文斤王薨 天王 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 . . 勅喚內裏 親撫頭面 誠勅慇懃 使王其國 . . . 是爲東城王 (NI: 497-499) 

 

14. 武烈七年 百濟王遣斯我君 . . . 百濟國主之骨族 (NII: 17)  

推古五年 百濟王遣王子阿佐 (NII: 175)  

舒明三年 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 (NII: 229)  

 

15. 枝別之宗 特立之祖 . . . 眞人是皇別之上氏也 幷集京畿以爲一卷 附皇別首 (SS: 146-147) 일본서기는 덴무왕을 “아마 노 누나하라 오끼 노 마히또”라고 부른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소위 텐표(天平) 문화시대라고 부르는 기간(749-57년)이 있다. 당시 주요 씨족들의 계보가 심각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소위 천평승보(天平勝寶) 말기에 와서, 주요 씨족들의 시조(出自)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 저명한 학자들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조정이 어떤 곤란에 처하게 되어, 이들 학자들은 해산되었다. 그 후 799년, 간무의 명령을 받고, 그의 아들 만다(萬多親王, 783-830년)가 주도하는 위원회에서 성씨록의 편찬 작업이 재개되어, 사가(嵯峨, 809-23년) 재위 기간 중인 815년에 드디어 완성이 된 것이다. 
 이 성씨록에는, 경기(京畿) 즉 당시의 수도(京)와 야마도, 셋츠, 카하치, 야마시로, 이즈미 등 기나이(畿內) 지역에 거주하는 1,182개의 주요 씨족의 조상(出自)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1부에는 천황, 황자의 후손이라는 335개 황족들(皇別)의 조상이 기록되어 있다. 제2부에는 천신과 지신의 후예라는 신족들(神別)의 조상이, 그리고 제3부에는 중국과 한국 사람의 조상을 가졌다는 번족들(諸藩)의 조상이 기록되어 있다.

 

16. 左京皇別 息長眞人 出自譽田天皇 諡應神 . .  路眞人 出自諡敏達皇子…王也 守山眞人 路眞人同祖…親王之後也 甘南 備眞人…路眞人同祖…大原眞人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島根眞人 大原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 . . 淸原眞人 桑田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SS: 149-152)

일본서기에 의하면, 센쿠와 왕은 케이타이 왕의 둘째 아들, 요오메이 왕은 킨메이 왕의 넷째 아들, 죠메이 왕은 비다쓰 왕의 손자, 덴지 왕은 죠메이 왕의 맏아들, 덴무 왕은 덴지 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21번째부터 44번째까지의 나머지 24개 마히또 황족은, 오오진, 케이타이, 센쿠와, 비다쓰, 요오메이, 죠메이, 덴지, 덴무 왕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신찬성씨록 첫머리에 실려 있는 전체 44개 황족들이 모두 마히또(眞人)인 동시에, 백제왕의 자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오오진-케이타이 계통의 핵심적인 일본 황족 전체가 백제 왕족의 후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7. 天智 二年九月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是時 國人相謂之曰 州柔降矣 . .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 (NII:  361)  
이 대목에서 일본서기는, 얼핏 보면 마치 주유성 함락 직후에 백제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은 것같이 기록을 해 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내용은 야마도 사람들이 후에 주유성이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했을 말이다. 

 

18. 신찬성씨록 말대로라면, 야마도 왕국의 핵심 본거지가 중국 사람들로 넘쳐 났었다는 얘기가 된다 

 

4.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 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  홍원탁
  •  승인 2005.04.29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Fall of the Paekche Kingdom and Creating a New History of the Yamato Kingdom

 

백제의 멸망과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 야마도 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극대화시켰다. 계속해서 백제와의 일체성을 내세운다면 일본 열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덴무(天武)는 681년에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명했다. 새로 창조된 역사는, 야마도 왕국이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아주 먼 옛날(기원전 660년)에 세워졌고, 천황족은 백제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토착세력이며, 지배씨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일본 열도로 내려왔고, 한국과 중국 조정들은 모두 야마도 왕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다는 식으로 말한다. 야마도 지배자들은, 백제 왕국과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제거하고, 지배씨족의 유래를 야요이 원주민 못지않게 오래되고 토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야마도 왕국의 위상을 자신들이 만든 문서상으로나마 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칙어구사 勅語舊辭
  

홍원탁 (서울대 교수) 

660~668년: 야마도 왕국의 뉴스 헤드라인  

660년 9월5일 신라가 7월 달에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왕과 대신들은 당나라로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야마도 조정에 전해졌다. 곧 이어, 백제의 대신인 복신(福信)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군대를 재조직하고, 항전 의지를 고취하니, 당군이 감히 복신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660년 10월 복신은 야마도 조정에 사신을 보내 군대와 원조를 요청하면서, 왕자 풍장(豊璋)을 왕으로 모시려 하니 본국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1 사이메이(齊明) 여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적에도 [아마 광개토 대왕 때를 의미하는 것 같다]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 한 경우들이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즉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2  

661년 1월6일 사이메이 여왕은 백제 구원작전을 진두 지휘하기 위하여 큐슈를 향해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7월24일. 북큐슈 아사쿠라에 임시 행궁(行宮)을 설치하고 구원작전을 진두 지휘하던 사이메이 여왕이 돌아갔다. 11월7일 태자 덴지(天智)가 그녀의 유해를 아스카로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 3  

662년 7월 태자는 소복을 하고, 큐슈의 나가쓰 임시 행궁에서 구원작전을 계속 지휘했다. 4

663년 3월 태자 덴지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27,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8월28일 만 명의 야마토 군대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구원하러 갔다가 백촌강(白村江) 어구에서 전멸당했다. 백제 왕자 풍장은 소수의 시종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피신했다. 9월7일 주유성(州柔城)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됐다. 5 

668년 1월3일 그동안 소복을 한 채로 한반도 위기상황에 대처하고 있던 태자 덴지가 왕위에 올랐다. 그해 9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 

당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었을 위의 기록들은 모두 일본서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고대 한일관계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왜곡되고 편파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경우에는 Batten(1986: 212)이 말하는 것처럼 쉽게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비록 순수하게 한반도 내부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일본 열도 자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태였는데, 어째서 일본 조정이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거국적으로 개입을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힘들다. 일본서기가 말하는 대의명분은 아주 고상하게 들리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야마도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야마도 조정이 670년 12월 국호를 왜국에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7 671년 12월3일, 덴지왕이 죽었다. 8 일찍이 덴지의 둘째 딸(훗날의 지토오 여왕)과 결혼했던 덴지의 동생은, 672년 이른바 진신의 난(壬申亂)을 일으켜, 673년 2월27일 왕위에 올라 덴무(天武)가 됐다. 9 

681년 3월17일. 덴무는 6명의 왕자와 6명의 대신들에게 야마도 왕국의 역사를 편찬 하라고 명했다. 10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천적 신라에게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정복당하자, 일본 열도에 세운 자신들 왕국의 운명에 대해 야마도 지배자들이 느꼈던 위기감과 초조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에 달했다. 백제의 멸망과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 야마도 지배자들에게 전례 없는 정체성의 위기감을 야기했다. 자신들이 계속해서 백제와의 일체성을 내세운다면 일본 열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 백제와는 단절된, 토착적인 존재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또 일본 열도에서의 영원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덴무(天武, 673~86)는 681년 야마도 왕조의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명했다.

고사기 서문은 덴무가 옛 상고 역사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를 완전히 꿰뚫고 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덴무가 사망한 686년 이전 어느 날, 마침내 야마도 왕국 새 역사의 윤곽이 확정됐고, 초인간적 암기력을 보유한 28세의 히에다 아레(稗田阿禮)에 의해 암기됐다.

고사기 서문에 인용된 덴무의 말은, 그가 당시에 느끼고 있던 위기감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 창조의 필요성을 그가 얼마나 절감하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러 지배 씨족들 본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은 사실과 너무나도 다르다. 잘못된 기록들을 바로 이 시점에서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왕국과 왕실의 기초가 몇 년 내에 와해될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잘못된 부분은 삭제하고, 틀린 부분은 바르게 고쳐서, 우리 역사의 정확한 내용을 후세에 전해주고자 한다.” 11 

왕명에 의해 편찬된 역사: 칙어구사(勅語舊辭)  

겐메이(元明, 707~715)는 661년에 덴지의 네 번째 딸로 태어나 덴무의 질녀가 되면서 동시에 처제이고 며느리였다. 야마도 왕실의 근친 결혼 관행의 결과이다. 그녀는 710년 수도를 후지와라(藤原京)에서 나라(平城京)로 옮겼다. 711년 9월18일, 겐메이는 (당시 54세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히에다 아레가 암기하고 있는 칙어구사의 새 역사를 야스마로(安萬侶)에게 받아적도록 명했다. 히에다 아레가 구술을 하고, 야스마로는 받아썼다. 넉 달 후인 712년 1월28일, 야스마로는 받아적은 내용을 겐메이 여왕에게 제출했다. 고사기는 연월일(年月日)도 없이, 새로 창조된 역사의 개요만을 기록하고 있다  

야마도 조정은 즉시 도네리(舍人) 왕자와 야스마로를 공동 위원장으로 삼아, 고사기를 바탕으로, 편년체 형식의 사서를 편찬토록 했다. 이 야마도 왕국의 공식 역사서는, 겐메이의 딸인 겐쇼오(元正, 715~724) 여왕 재위 6년 째인 720년 드디어 완성됐다. 697~791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의 공식 명칭이 “속일본기(續日本紀)” 인 것을 보면, “일본서기”라는 명칭은 후세에 사용된 것으로 믿어진다. 야스마로는 723년에 죽었다. 12  

명확한 목적의식 하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  

야마도 지배자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했다. 그들은 백제 왕국과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제거하고, 지배씨족의 유래를 야요이 원주민 못지않게 오래되고 토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야마도 왕국의 위상을 (자신들이 만든 문서 속에서나마) 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위치로 격상시키려 했다. 새로 창조된 역사는, 야마도 왕국이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아주 먼 옛날(기원전 660년)에 세워졌고, 천황족은 백제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토착세력이며, 한국과 중국 조정들은 모두 야마 도왕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아울러 지배씨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일본 열도로 내려왔다고 말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토착세력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 야마도 왕국에게 부여한 것이다  

편년체의 “일본기”는 서문도 없고, 표도 없으며, 중요한 사람에 관한 열전이나, 지리지도 없다.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기록을 서기(書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기”를 항상 일본서기라고 부른다. 하긴, 본기(本紀) 내용은 그런대로 중국의 정사(正史)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출현 이후, 새로운 역사 이념은 야마도 지배층 의식 속에 끊임없이 주입돼, 마침내 일본 열도에서의 반종교적인 천황숭배 형태로 진화하게 됐다. 야마도 지배자들의 칭호는 급기야 (대)왕에서 천황으로 격상됐다. 13 그 결과, (야요이) 농민 출신 무사들이 백제에서 건너온 전통적 지배계급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은 후에도, 이들 새 지배자들은 가난한 귀족들이 교토 지역에서만이라도 체면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은 오늘날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일본 열도의 국가원수로서 계속 군림할 수 있었다. 덴무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기대 이상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진신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른 덴무는, 자수성가의 군주였을 뿐 아니라, 진실로 탁월한 선견지명의 군주였던 것이다.  

일본열도로의 또 한차례 대량 이주 

백제가 663년 멸망한 후, 일본 열도로 백제 유민의 대량 이주가 상당기간 계속됐다. 일본서기는 백제 피난민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하고 있다. “백제 왕자 선광(善光) 일행에게 나니와(오사카 근처)에 거주지를 마련해줬다. 665년 백제에서의 직위를 감안하고 복신을 도운 공적을 참작해 귀실집사에게 소금하(小錦下) 관위를 수여했다. 백제인 남녀 400여 명을 오우미(近江國)의 간자키(神前) 고을에 살게 하고 전답을 줬다. 백제인 남녀 2,000여 명을 동국(東國)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승려와 속인을 구별하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663년부터 3년 동안 관가에서 식량을 지급했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을 포함한 백제 남녀 700여명을 오우미의 가마후(蒲生)로 옮겨 살도록 했다.” 14 

새로 건너온 백제 사람들은 백제에서의 지위에 따라 야마도 지배자들과 같은 특권을 누리거나, 일반 백성들과 같은 혜택을 받았다. 일본서기(N2: 295~296)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실려있다

귤은 자신의 가지에서 각각 자라지만 
구슬 모양 꿸 때에는 
한 개의 끈에 꿰어진다 

아마 백제와 야마도 지배계급이 제각기 다른 나라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전화위복으로 한 군데 모여서 살게 됐다는 뜻인 것 같다.  

신라와 전략적 동맹을 맺어 당나라에 대항  

Batten (1986)은 “백촌강에서 참패를 한 663년부터 당군이 한반도에서 물러가는 676년까지의 13년간은 패배한 일본인들에게 매우 걱정스런 기간이었다. 이들 초조감의 강도는 그 기간 중 정신 없이 방어선을 구축한 데서도 나타난다. 701년까지 계속해서 요새를 축조하고 수리하는 기록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고 말한다. 

7세기 말에는 신라 뿐만 아니라 야마도 조정도 당나라의 팽창정책을 두려워했다. 664년 야마도 조정은 대마도와 이키(壹岐)섬, 북큐슈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봉화대를 설치했다. 또 큐슈의 성채들 주위에 해자(垓字)를 파고 수성(水城)이라 불렀다. 665년 야마도 조정은 백제에서 건너온 장군을 보내 나가토에 성채 한 개를 쌓았고, 큐슈에 두 개의 성채를 쌓았다. 667년에는 야마토, 사누키, 대마도에 각각 한 개씩의 성채가 세워졌다. 일본기의 667년 기록에는 축자(筑紫) 도독부란 표현이 나타난다.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 침략군과 벌려야 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공격 예상 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15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신라와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에 대항하는 전략적 동맹관계를 수립했다. 668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고, 야마도 조정은 김유신에게 선물로 배 한 척을 보냈다. 귀국하는 사신 편에 신라왕에게도 배 한 척을 선물했다. 이는 신라와 야마도 조정 사이의 전략적 동맹의 시작을 상징한다. 16 668~695년 기간 중, 야마도 조정은 신라에 아홉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발해 왕국의 등장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대한 당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을 크게 감소시켰다. 그러자 신라와 야마도 조정 사이의 전통적 적대감이 다시 부상했다. 발해가 755~757년 기간 중에 요동 지역을 점령하자 신라와 야마도 왕국 사이의 전략적 동맹 역시 빠르게 와해됐다. 야마도 조정은 754~778년 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발해에 사신을 보냈지만, 신라에는 단 한 차례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급기야 759년엔 야마도 조정 내에서 신라를 공격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17 

國文版 부록: 백제 지배층의 대량 이주 

671년. 야마도 조정은 백제 좌평 여자신과 법관대보 사택소명에게 다이키무게 관위를 수여하고, 학직두(學職頭) 귀실집사에게 세우키무게 관위를 수여하고, 병법에 능한 달솔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답본춘초, 약(藥)을 지을 줄 아는 본일비자, 찬파라, 금라금수, 귀실집신 등에게 다이센게 관위를 수여하고, 약을 지을 줄 아는 달솔 덕정상과 길대상, 오경에 밝은 허솔모, 음양에 능한 각복모 등에게 세우센지야우 관위를 수여하고, 기타 달솔 등 50여인에게 세우센게 관위를 수여했다.  

백제 지배층의 대량 이주는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첫 번째는 4세기 말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을 창건했을 때를 전후로 한 시기였고, 두 번째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멸망한 직후이었다.

백제 멸망 후, 얼마나 많은 백제 왕족들이 야마도로 건너왔는지는 속일본기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700년, 백제왕 원보(遠寶)를 히타치 수(常陸守)로 삼았다. 703년, 백제왕 양우(良虞)를 이요 수(伊豫守)로 삼았다. 708년, 백제왕 남전(南典)을 키비의 미치쿠치 수(備前守)로 삼았다. 735년, 백제왕 자경(慈敬)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738년, 백제왕 효충(孝忠)을 토호쓰 아후미 수(遠江守)로 삼았다. 740년, 백제왕 전복(全福)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禪廣)의 손자 백제왕 경복(敬福)이, 미치오쿠 수(陸奧守)로 있을 때, 최초로 금광을 발견하여 황금 900냥을 바쳤기에, 750년에 궁내경(宮內卿)으로 삼았다. 751년, 백제왕 원충(元忠)에게 종5위상(從五位上)을 수여했다. 762년, 백제왕 이백(理伯)을 히의 미치시리 수(肥後守)로 삼았다. 763년 백제왕 삼충(三忠)을 이데하 수(出羽守)로 삼았다. 764년, 백제왕 무경(武鏡)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765년, 백제왕 이선(利善), 신상(信上), 문경(文鏡)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읽는 사람한테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이런 기록을 계속 나열할 수가 없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성씨록은 앞서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도래한 백제 지배층을 거의 모두 토착화시켜서 기록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도래한 백제 지배층은, 모두 그 출자(出自)를 백제로 그냥 기록했다. 이들의 출자를 토착화하기엔 시기적으로 너무 근접했고, 그 충격적인 상황이 야마도 사람들 마음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4 (2005. 4. 30.)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齊明 六年九月 己亥朔癸卯 百濟遣 . . 等 來奏曰 或本云 逃來告難 今年七月 新羅. . 引構唐人 傾覆百濟 君臣總俘. . 福 . . 誘聚散卒. . 旣而百濟兵翻銳 唐不敢入. . .冬十月. . .福信遣. . .等. . .乞師請救 幷乞王子余豐璋. . 將爲國主 (NII: 345-347) 

2. 齊明 六年秋九月 詔曰 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絶 著自恒典 百濟國 窮來歸我 . .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NII: 347) Aston의 Nihongi (N2: 268-9) 참조.  

3. 齊明 七年春正月 丁酉朔丙寅 御船西征 始就于海路. . 居于. . 行宮. . 名曰長津 五月. . .遷居于朝倉..宮. . 秋七月甲午朔丁巳 天皇崩于朝倉宮. . 皇太子奉徙天皇喪 還至. . .歸就于海 . 還泊難波 十一月. . 殯于飛鳥 (NII: 348 -351) 

4. 天智 卽位前紀 七年七月. . 皇太子素服稱制. . 遷居于長津宮 稍聽水表之軍政 (NII: 353)

5. 天智 二年三月. . 率二萬七千人 打新羅. . 秋八月. . .率健兒萬餘. . 於白村江. . 戌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 .己酉. . .官軍敗續. . .百濟王豐璋 與數人乘船 逃去高麗 九月辛亥朔丁巳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NII: 357- 358) 

6. 天智 七年春正月 丙戌朔戊 子 皇太子卽天皇位 冬十月大 唐大將軍英公 打滅高麗 (NII: 367-371)

7. 文武王 十年十二月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S1: 128) Nihongi was still reading the Chinese characters Nippon as Yamato.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夜麻登(倭) (K: 162) 

8. 天智 十年十二月 癸亥朔乙丑 天皇崩于近江宮 (NII: 381) 

9. 天武 下 二年二月 丁巳朔癸未. . 卽帝位於飛鳥淨御原宮 (NII: 411) 

10. 天武 下 十年三月 ...丙戌 天皇. . . 以詔. . .令記定帝紀及上古諸事 (NII: 447) 

11. 古事記上卷 幷序  
臣安萬侶言. . 飛鳥淸原大宮御大八州天皇御世. . 潭探上古. . 明觀先代. . 於是天皇詔之 朕聞 諸家之所䝴帝紀及本辭 旣違正實 多加虛僞 當今之時不改其失 未經幾年其旨欲滅 斯乃 邦家之經緯 王化之鴻基焉 故惟 撰錄帝紀 討覈舊辭 削僞定實 欲流後葉 時有舍人 姓稗田名阿禮 年是二十八 爲人聰明 度目誦口 拂耳勒心卽 勅語阿禮 令誦習帝皇日繼及先代舊辭 然運移世異 未行其事矣. . 以和銅四年九月十八日 詔臣安萬侶 撰錄稗田阿禮所誦之勅語舊辭 以獻上者. . 和銅五年正月二十八日 正五位上勳五等太朝臣安萬侶 (K:. 44-46) 

12. 41개의 글자가 동판에 새겨진 비문이 1979년 야스마로의 묘에서 발견됐다. Murayama and Miller(1979)는 “그 묘지(墓誌)에 새겨진 한자들을 보면, 중국어 문법상 접미어인 지(之)를 “죽었다”는 자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하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적인 어법(語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사용법은 중국 사람들에겐 아주 비문법적이지만, 6세기부터 8세기 중엽까지 한자로 쓰여진 한국 비문들에선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의 일반 대중들이 야스마로의 비문에서 발견된 이 놀라운 한국적 어법에 대해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계속 모르고 살게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左京四條四坊從四位下勳五等太 朝臣安萬侶以癸亥年七月六日卒之養老七年十二月五日乙巳

13.  당 고종(唐高宗)이 병약해 657년 하궁(夏宮)으로 물러나 요양하면서 격일로 조회를 열었다. Twitchett(1979: 255)에 의하면, “고종이 660년 10월 심각한 뇌졸중을 당하자, 측천무후의 위상은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됐다. 무후는 고종이 정기적으로 무기력 해 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직접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급기야 660년 말 이후엔 명칭만 아닐 뿐 실질적인 황제가 됐다.” 그녀는 670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후(天后)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고, 고종에겐 천황(天皇)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 거창한 천황 칭호를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舊唐書 卷五 高宗下 乾封五年秋八月 …皇帝稱天皇 皇后稱天后 

14. 天智 四年 ..勘校百濟國官位階級 仍以佐平福臣之功 授鬼室集斯小錦下 其本位達率 復以百 濟百姓男女四百餘人 居于近江 國神前郡..給神前郡百濟人田  
天智 五年 以百濟男女二千餘人 居于東國 凡不擇緇素 起癸亥年 至于三歲 並賜官食 天智 六年 [667] 遷都于近江 (NII: 365-7)  
天智 八年 …又以佐平餘自信 佐平鬼室集斯等 男女七百餘人 遷居近江國蒲生郡 (NII: 373)

덴지는 665년 백제 유민 4백명을 오우미 가마후 고을로 보내 살도록 했고, 666년엔 백제 유민 2천명을 동국으로 보냈다. 667년 덴지는 수도를 오우미로 옮겼다. 669년엔 백제 유민 7백명을 오우미 가마후 고을로 보내 살도록 했다. 덴지는 670년 봄 바로 그 가마후 고을에 가서 왕궁 터를 둘러봤다. 오우미 천도를 전후로, 덴지는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을 계속 그 지역으로 보냈다. 덴지는 백제에서 새로 도래한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다수 모여있는 것이 믿음직스럽고 또 마음도 편했던 것 같다. 

15. 天智 三年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 置防與烽 又於筑紫 築大堤貯水 名曰水城 (NII: 363)

天智 四年 遣達率答炑春初 築城於長門國 遣達率億禮福留 達 率四比福夫於筑紫國 築大野及 椽二城 (NII: 365)

天智 六年 遷都于近江 .. 十一月 百濟鎭將劉仁願 遣熊津都督 府熊山縣令…等 送…等於筑紫 都督府…是月築倭國高安城…屋嶋城 對馬國金田城 (NII: 367) 

天武 八年 [679] 詔曰…檢校親 王諸臣及百寮人之兵及馬 (NII: 439) 十二年 詔諸國習陣法 (NII: 461) 十三年 詔曰 凡政要者軍事也 是以文武官諸人務 習用兵及乘馬…其有馬者爲騎士 無馬者爲步卒 並當試練 (NII: 463)

持統 三年 [689] 詔左右京職及諸國司 築習射所..詔諸國司曰 今冬戶籍可造宜 限九月 糺捉浮浪 其兵士者 每於一國四分而點其一 令習武事 (NII: 499) 七年 [693] 詔 自今年始於親王 下至進位 觀所儲兵... 遣陣法 博士等敎習諸國 (NII: 523) 

16. 天智 七年 [668] 皇太子卽天皇位..新羅遣…金東嚴等進調..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使… 賜新羅王 輸御調船一隻 付東嚴等 (NII: 371) 

天武 四年 [675] 新羅遣王子忠元…爲大使…遣于新羅..詔曰 諸王以下初位以上 每人備兵 (NII: 417-21) 五年 王卿遣京及畿內 校人別兵…爲大使…遣於新羅..新羅遣…請政 (NII: 425-7)  
十年 ...大使...遣新羅國... 新羅遣…(NII: 447-451) 十四年 新羅遣…請政 (NII: 473)  
持統 元年 [687] 新羅遣王子…等 奏請國政 (NII: 491)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의 팽창정책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야마도로 건너온 백제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 쓰시마에서 큐슈 북부, 또 세토 내해를 거쳐 수도에 이르는 (대륙으로부터의 침략 루트가 될 수 있는) 통로에, 총력을 집중해 성을 쌓고, 봉화 체계를 갖추며, 방위선을 구축했다. 당시 신라 자신도 당나라의 팽창정책을 두려워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점령한 다음, 즉시 도독부를 설치해 이들 지역을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세력들과 힘을 합쳐, 676년에 당 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동 아시아의 초강대국인 당나라가, 신라와 야마도 조정에 대해 다 같이 적대적이며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공동의 적을 맞게 되자, 신라와 야마도 조정은 빈번하게 사신들을 교환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의견교환을 하고, 협조관계를 강화했다. 양국 간의 전통적인 적대관계가,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에, 좋든 싫든 협조관계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17. 聖武 天平七年 [735] 新羅使…入京..而新羅國輒改本號曰王城國 因玆 返却其使 (SN2: 286)
九年[737] 遣新羅使 奏新羅國失常禮..或言遣使問其由 或發兵加征伐..以告新羅无禮之狀 (SN2: 310-2) 十五年 [743] 新羅使…大失常禮 (SN2: 418)  

淳仁 天平寶字 三年[759]六月 令大宰府造行軍式 以將伐新羅也 九月 造船五百艘..爲征新羅也 (SN3: 320-8)

발해가 당나라의 동북방을 위협하게 되자, 당나라는 735년 다시금 신라와 화해하는 조치를 취했다 발해라는 완충지대가 형성되고, 또 당과는 외교적으로 화해하게 되자, 신라는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을 더 이상 심각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신라보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야마도 조정은, 8세기 중반에 이르자 신라와의 협조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됐다. 반면, 야마도 조정은 727년 이후 발해에 13회나 사신을 보냈고, 발해는 야마도 조정에 34번이나 사신을 보냈다.

5. 미마나 '임나일본부' 이야기

  •  홍원탁
  •  승인 2005.05.04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바로보기] 
The Mimana 'Imna' Story

일본서기는 한자로 임나(任那)라 써놓고 미마나(彌摩那)라고 읽는데, 때로는 가야연맹 전체를 의미하고, 때로는 임나왕이 다스리는 임나국을 지칭하고, 때로는 임나 안에 야마도의 관리와 군대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미마나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미마나 일본부, 미마나 대신(집사), 미마나의 야마도 관갚 등등의 표현만을 본다면, 임나 혹은 가야연맹 전체가 정말 야마도왕국의 식민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임나왕, 탁순왕, 가라왕, 안라왕, 고차한기, 자타한기, 졸마한기, 사이기한기, 산반하한기 등의 기록도 나타난다. 이러한 칭호들의 존재는 가야연맹의 어느 구성원도, 그 어느 누구의 식민지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컨대, 일본서기는 케이타이(繼體, 507-31) 때, 임나왕 기능말다간기(任那王己能末多干岐)가 야마도 조정에 왔다고 말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편집자 주  


미마나 [임나일본부] 이야기  

百濟-伽倻-倭: 부자/형제/부부 관계
  

홍원탁 (서울대 교수) 

저명한 경제학자 모리시마(1982: 21-30)는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370년경에 일본은 한반도의 남단을 점령하였었다. 이 일본 영토는 미마나라고 불렸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신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 모리시마 얘기는 그가 어렸을 때 배운 명치시대 풍의 역사교과서 내용을 희미한 기억으로 더듬어 적어놓은 것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전형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Kuno, 1937: 193, 234-42): “일본이 한국을 통치 할 권한은 일본이 미마나라는 보호령을 창설할 때부터 생긴 것이다 7세기 이전까지 일본과 한반도 남부 왕국들 사이에 일종의 종주국-조공국의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널리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했을 때, 일본의 『역사와 지리』라는 잡지는 특집을 발행했고, 주필은 권두언에서, ‘이 합병이라는 위업은 일본이 7세기에 잃었던 한반도 지배권의 회복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고대 일본이 4세기 후반 (예컨대, 370년) 이후부터 200년 이상 한반도 남부에 미마나라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본서기 이외의 동아시아 어느 역사책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임나에 관한 종잡기 힘든 기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일본서기는 한자로 임나(任那)라 써놓고 미마나(彌摩那)라고 읽는데, 때로는 가야연맹 전체를 의미하고, 때로는 임나왕이 다스리는 임나국을 지칭하고, 때로는 임나 안에 야마도의 관리와 군대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미마나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동이전에 기록된 12개의 변한 (성읍)국가들 중에는 미오야마(미마?)와 구야(가야?)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변한 성읍국가들이 가야연맹으로 진화하는데, 중국 정사에는 가야연맹 전체가 종종 “임나, 가라”라는 두 개의 대표적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송서(宋書)에는 야마도 지배자들이 말하는 7개국 명단에 “임나, 가라”가 오래 전에 사라진 “마한, 진한”과 더불어 “야마도(倭), 백제, 신라”3개국과 동격으로 나열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뿐만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도 “임나, 가라”가 한 쌍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옛 변한이 임나(소)연맹과 가라(소)연맹으로 발전하고, 이 두 개의 소 연맹이 가야연맹 전체를 구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일본서기는, 대가야의 왕자가 일본열도에 건너왔다가 후에 다시 돌아갈 때, 스이닌(垂仁)이 대가야 왕자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인 미마끼(스진, 崇神)를 따라서 대가야 국명을 바꾸라고 권했기 때문에 대가야가 미마나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에가미(1964)는 「미마」라는 “명칭의 유래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정반대 일 것이다 스진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미마」 는 스진이 큐슈로 건너오기 전에 살았던 미마-나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2 

일본서기(N2: 42-47) 541년 조에는,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旱岐)와 그 일행에게 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긴메이(欽明) 왕은 임나[가야연맹]를 재건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임나[가야연맹]는 신라에게 속았다. 록기탄(㖨己呑)은 신라에게 시달리다 망했으며, 남가라는 너무 작아서 멸망했다. 탁순은 상하가 모두 이중거래를 하다가 멸망했다 이제 나는 신라가 빼앗아 간 지역들을 신라로부터 구해내어 [가야연맹 내의] 제 위치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야마도 고관들은 신라의 국경과 너무 가까운 미마나 땅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임나[가야연맹]에 해독을 끼치고 있다” 3 

일본서기 562년 조는, “임나[가야연맹]가 붕괴되었다. 총칭 임나[가야연맹]는 가라(加羅), 안라(安羅), 사이기(斯二岐), 다라(多羅), 졸마(卒麻), 고차(古嵯), 자타(子他), 산반하(散半下), 걸찬(乞飡), 임예(稔禮) 등 모두 10개국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이 [가야연맹] 명단에, (임나왕이 다스리는 임나국 뿐 아니라) 이미 6세기 초반에 신라한테 먹힌 탁순, 록기탄, 남가라도 포함을 시켜야 할 것이다. 백제와 야마도 왕국의 지배자들은 가야연맹의 재건을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일본서기에는 긴메이(531-71)가 임종 시, 태자에게 임나[가야연맹]를 회복시켜 예전처럼 부부(夫婦)와 같은 관계를 회복하라고 유언을 하는 기록이 있다. 5 일본 역사학자들은 긴메이가 말하는 이 “부부관계”를 “종주국과 식민지 관계”로 해석을 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미마나 일본부, 미마나 대신(국사), 미마나의 야마도 관가 등등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표현들 만을 본다면, 임나 혹은 가야연맹 전체가 야마도왕국의 식민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임나왕, 탁순왕, 가라왕, 안라왕, 고차한기, 자타한기, 졸마한기, 사이기한기, 산반하한기 등의 기록도 나타난다. 이러한 칭호들의 존재는 가야연맹의 어느 국가도, 그 어느 누구의 식민지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컨대, 일본서기는 케이타이(繼體, 507-31) 때, 임나왕 기능말다 간기(任那王 己能末多干岐)가 야마도 조정에 왔다고 말한다. 6 

일본서기(N2: 44-45)는 백제 성명왕(523-54)이 가야 사절단에게 하는 말을 기록한다: “과거, 우리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당시 가야의 한기들과 처음으로 친선관계를 맺었으며, 이제는 형제처럼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네들을 마치 나의 ‘아들이나 동생’처럼 대해주고 자네들도 나를 ‘아버지나 형’처럼 대해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성실하게 이웃들과의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해왔고, 항상 동맹국들을 정직하게 대해왔다” 7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 지역 내에서 야마도의 존재와 임나의 존재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임나 사신이, 임나 사람과 야마도 사람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말을 했다,” “야마도의 고위 관리들이 미마나 땅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임나와 친한 척 가장,”“임나 집사와 야마도 집사를 함께 불렀다,” “일본부 대신과 임나 한기 등에게,”“임나와 일본부가 함께 백제에서 회동,” “임나 지역의 야마도 현읍” 등등이다. 한편, “임나의 하한의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임나 내의 백제 사람들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8

일본서기 오오진 7년(396) 조는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모두 조정에 왔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의 임나는, 식민지적 성격을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동격으로, 가야연맹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 9 

야마도 지배자들은, 전통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반도 남단에 지속적인 “왕래를 위한 항구시설 (津路, 往還路驛) ”들을 계속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10 일본서기를 보면 야마도 관리들과 군대가 거주하는 항구시설이 있었고, 미마나 일본부 대신이라 부르는 야마도 관리가 존재했다. 야마도 지배자들은, 가야 연맹국들의 양해 하에, 야마도 사람들을 거주시키면서,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최단 경로상에 항구 시설들을 운영했던 것 같다. 일본서기(N2: 17-18)에는, 야마도 왕국과의 왕래를 쉽게 할 수 있는 나루터 하나를 백제가 야마도 조정으로부터 인계를 받아 사용하려 했더니, 가라왕이 크게 노했다는 기록이 있다. 11 

야마도 지배자들이 백제를 왕래하기에 편한 항구를 확보하려던 노력은, 19세기말에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200년 이상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이야기로 황당하게 과장되었다. 일본사람들이 미마나 일본부라고 부르는 구역의 위상은 1609-1856년 동안 마치 외국인이 자기들 소유지처럼 사용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조 초기에 한반도 남부 연안에는 왜관(倭館)을 설치한 항구들이 있어, 조선관리의 감시하에 한정된 구역 내에 일본인들의 거주가 허용되었고, 일본의 배와 화물이 출입을 할 수 있었다. 1474년에 와서는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수가 2,000명을 넘었고, 그들은 자주 허용된 구역을 벗어나 불법적으로 경작을 했다. 12  

일본서기 이외의 어떠한 동아시아 역사책에서도 미마나 일본부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고사기에도 이런 표현은 없다. 아오끼(Aoki, 1974: 50)는 “일본의 국수주의적인 역사가들은 변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강변하지만, 사실은 아마 정 반대였을 것이다. 오히려 변한 사람들이 북큐슈나 혼슈의 서쪽 끝 지역을 자신들의 추가적인 영토로 간주했을 것이고, 그 지역 주민들을 자기들의 친족으로 또 교역상대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변한의 해변가에 위치한 무역항에는 사무소와 창고 등이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수의 변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게 되면서, 일본에 정착한 변한 사람들은 변한 땅의 항구들을 자신들의 교역기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임나(미마나)로 불려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일본열도에서 벼를 재배하는 야요이 문화(BC 300-AD 300)는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가야 (변한) 농부들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다. 에가미(Egami)는 고분문화 초기(circa 300-375)를 야요이 문화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國文版 부록: 일본인의 남조선 경영론  

일본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소위 “임나(미마나) 일본부 설,” 혹은 좀더 거창한 “야마도 왕국의 남조선 경영론,” 또는 “야마도 왕국, 6세기 전반에 이르러 조선내의 이권을 상실하다,”라는 자극적인 표현들은, “가야연맹국” 전체가 야마도 조정의 직접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는 인상을 주려 하는 저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사기에는 미마나 일본부라는 기록이 한 군데도 없다. 야마도 조정의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고사기가 편찬 완료된 이후에, 한반도 동남해안 임나 뱃길 출발점에서 (임나 왕과의 양해하에) 항구시설을 돌보던 (얼마간의 병력을 포함하는) 왜인들의 존재를 미마나 일본부라는 거창한 존재로 부각시킬 착상을 하게 된 것 같다. 

일본서기가 말하고 있는 미마나 일본부 기록이란, 「가야연맹 국가들 중의 하나인 임나국 안에, 야마도 당국자들이 얼마간의 병력을 보유하며 특정 구역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임나왕”을 비롯해서 수많은 가야연맹 국가들의 왕들을 등장시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눈으로 보면서, 어떻게 일본 사학자들이 당시 야마도 조정이 임나라는 나라 자체를 식민지로 다스렸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가야연맹 국가들을 모두 지배했고, 급기야 한반도 남부 전체를 수백 년 간 식민지로 경영을 했다는 등, 그처럼 황당한 형태의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할 뿐이다. 

일본서기를 조금만 읽어 보면 그 허구성이 금방 드러나는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주장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사회에서 계속되는지, 그 나름대로 사회 병리학적인 분석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독자들이 일본서기의 미마나 일본부 기록을 읽게 될 때, 「임나 땅 안의 “미마나”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 야마도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이해한다면 가장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될 것이다. 야마도 조정은 “미마나 일본부”라는 존재를 야마도 왕국의 내관가(內官家)라고도 불렀다. 야마도 왕실의 근원이 백제 지배층이었고, 백제-가야-야마도 사이에 (부자/형제/부부 관계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한 동맹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관행이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5 (2005. 5. 7)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三國志 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三十 韓傳 韓 在帶方之南..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馬韓在西 有..伯濟國...凡五十餘國…弁辰 亦十二國…彌烏邪馬國…狗邪國 …斯盧國

宋書 卷九十七 列傳 夷蠻 倭國 興死弟武立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 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廣開土王碑文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2. 垂仁 二年 是歲 任那人…欲歸于國… 一云 御間城天皇之世 額有角人乘一船泊于… 意富加羅國王之子..是時 遇天皇崩便 留之仕活目天皇 逮于三年 天皇問…欲歸汝國耶..改汝本國名追 負御間城天皇 御名便爲汝國名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其是之緣也 (NI: 257-259)

3. 欽明 二年 四月 百濟聖明王謂 任那旱岐等言 日本天皇所詔者 全以復建任那 …其㖨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蕞爾狹小 不能卒備 不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二年七月 拔取新羅所折之國南加 羅㖨己呑等 還屬本貫 遷實任那 …又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接新羅之境 新羅情狀 亦是所知 毒害任那 (NII: 69-75) 

4. 欽明 二十三年 春正月 新羅打滅任那官家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 合十國 (NII: 119)

5. 欽明 三十二年 夏四月 天皇寢疾不豫 皇太子向外不在 驛馬召到 引入臥內 執其手詔曰 朕疾甚 以後事屬汝  
以後事屬汝 汝須打新羅 死無恨之 封建任那 更造夫婦 惟如舊日 (NII: 131)

6. 雄略 七年 新羅王...乃使人於任那王曰...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由是任那王勸…往救新羅 (NI: 479) 

欽明 二年 夏四月 安羅次旱岐…加羅上首位…卒麻旱岐…多羅下旱岐…斯二岐旱岐…子他旱岐等與任那 日本部吉備臣往赴百濟 俱聽詔書 (NI: 68-71)  

繼體 二十三年 四月 任那王己能末多干岐 來朝…曰 夫海表諸蕃 自胎中天皇置內官家 不棄本土 因封其地 良有以也 今新羅違元所賜封限 數越境以來侵 請…救助臣國 (NII: 37-41)

7. 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 (NII: 69-71) 

欽明 二年 七月 百濟本記云…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自玆以降 勤修隣好 遂敦與國 (NII: 73-77)

8. 繼體 二十四年 秋九月 任那使奏云…日本人與任那人 頻以兒息諍訟難決 (NII: 43-5)

欽明 二年 秋七月 …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接新羅之境…僞和任那 如斯感激任那日本府者 (NII: 73-7)  
欽明 四年 冬十一月 詔百濟曰…在任那之下韓 百濟郡令城主 宜附日本府…且夫任那者 爲爾國之棟梁 …爾須早建…聖明王曰 是月乃遣施德高分 召任那執事與日本府執事 (NII: 77-79)

欽明 五年 春二月 …又謂日本府卿任那旱岐等曰 夫建任那之國...將出在下韓之百濟郡令城主 唯聞此說 不聞任那與日本府 會於百濟 (NII: 78-83) 
欽明 五年 冬十一月 …今日本府臣及任那國執事宜來聽勅…安羅王 加羅王 俱遣使同奏天皇 (NII: 83-91)  

欽明 十三年 夏五月 詔曰 今百濟王 安羅王 加羅王 與日本府臣等 俱遣使奏… (NII: 101-103)

9. 應神 七年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 並來朝 (NI: 367) 

10. 神功 攝政五十年 久氐等奏曰 …皇太后勅云 善哉汝言是朕懷也 增賜多沙城爲往還路驛 (NI: 357) 
繼體 二十三年 百濟王謂…曰 …請以加羅多沙津 爲臣…津路 (NII: 39)

11. 529년, 백제 성명왕은, 야마도 조정으로 가는“우리 사절은 항상 육지의 돌출부(곶)들을 피해가며 풍랑에 시달린다. 그러니 가라 땅의 다사진을 우리가 뱃길의 나루터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케이타이 왕은 사람을 보내, 다사진을 백제에 넘겨주려 했다. 그러자 가라왕이 야마도 사신에게 ‘이 항구는 우리가 사용하는 항구인데, 어찌 본래 책정된 구획을 위배해서 그리 쉽게 이웃 나라에 주어 버리려 하는 거요?’ 라고 따졌다. 야마도 사신은 내놓고 그 항구를 백제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몰래 서기를 보내 부여(백제)에게 이양했다.” (N2: 17-18) 참조  

繼體 二十三年 三月 百濟王謂…曰 夫朝貢使者 恒避嶋曲 每苦風波…請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 是以…爲請聞奏…是月 遣…等 以津賜百濟王 於是 加羅王謂勅使云 此津從置官家以來 爲臣朝貢津涉 安得輒改賜隣國 違元所封限地 勅使…等 因斯難以面賜…別遣錄史 果賜扶余 (NII: 39-41)

12. 조선 조정은 왜인들에게 제한된 교역 특혜를 주었다. 1443년에, 내이포(제포), 부산포, 염포에 왜인들이 상관과 거주시설을 설치해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허가 해 주었다.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은 1510년에 그들을 감시하는 조선 관리와 충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왜란이 진압된 후, 삼포(웅천, 동래, 울산)에서의 왜인들의 교역특권이 박탈되었다. 조선 조정은 1512년에 다시 유화정책으로 전환하여, 요즘의 부산 동래 지역에 위치한 부산포 (1678년에 草梁으로 이전) 한군데에서만 왜인들이 교역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Lee (1984: 191-2) 참조. 

 

6. 칠지도/광개토왕 비문 : 한반도에서 싸우는 야마도 병사들

  •  홍원탁
  •  승인 2005.05.10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King Kwang-gae-to’s Stele

 

백제는 근초고왕-근구수왕(346-84)의 전성기가 지나고, 고구려는 광개토대왕(391-413)이 등장한다 전장에서의 백제의 처지는 역전되었다. 아신왕은 백제의 생존을 위해, 아직 정복자의 기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생 야마도 왕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397년, 아신왕은 태자 전지(腆支)를 호무다 (오오진) 조정으로 보낸다. 광개토왕 비문을 보면, 고구려 군대가 392년과 396년에는 백제를 초토화시켰으나, 그로부터 수년 후인 400년과 404년에는 용감한 야마도 병사들이 백제 편에서 고구려와 열심히 싸우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왕 비문뿐 아니라 일본서기에서도, 마치 흑수말갈 병사들이 고구려 편에 서서 싸우듯, 야마도 병사들이 자주 백제 편에 서서 고구려-신라와 싸우는 기록들이 나온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한반도 내부 전쟁에 야마도 병사들을 데려다 쓰는 관행은 6세기까지 지속된 것 같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편집자 주

 

 

칠지도/광개토왕 비문  

한반도에서 싸우는 야마도 병사들  
                                                               

홍원탁 (서울대 교수) 


칠지도(七支刀)  

현재 나라현 텐리시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칠지도는, 백제조정이 신공왕후에게 372년 9월에 보내주었다고 일본서기가 기록한 바로 그 칠지도라고 생각된다. 1 일본서기는, 칠지도가 전달될 당시, 신공왕후가 섭정을 하고 호무다(오오진)가 태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서기 366년 조 기록은, 백제조정이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두 해전(364년)에 가야연맹의 일원인 탁순국의 왕에게 탐색반을 보냈다고 말한다. 이 기록 내용을 보면,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 간 것은 366년으로부터 그리 먼 훗날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369-70년 기간 중,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걸쳐 야마도 군대, 백제 장군들, 근초고왕, 태자 근구수 등을 총 동원하는 대규모의 군사활동들을 기록한다. 이 기록을 보면, 호무다(야마도 왕국의 시조, 오오진)와 그 추종자 일행이 일본열도를 향해 한반도를 떠난 것이 바로 369-70년 기간 중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는,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는 호무다의 시도가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백제 왕실의 뜻을 전하는 동시에, 호무다가 세울 미래의 새 왕국과의 연대감을 미리 돈독히 한다는 의례행위의 상징물인 것 같다. 명문을 보면, 칠지도는 369년 5월에 제조되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호무다가 일본열도에 상륙한지 얼마 안 되는] 372년 9월 10일에 전달이 되었다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백제왕실이 호무다를 공식적으로 신생왕국의 왕으로 인증하는 분명한 증표를 주어 보내는 것이, 현지 선주민의 협조를 극대화하고, 정복을 좀더 용이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근초고왕은 375년에 죽고, 태자 근구수가 그 뒤를 이었다.  

 

칼에 새겨진 명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태화 4년(369) 5월 16일 병오 날 정오, 백 번을 두들겨 단단하게 만든 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적군을 섬멸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후왕(侯王)에게 하사한다. □□□□가 제작한 것이다. 예로부터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부왕의 은덕으로 삶을 영위하는 백제 왕세자가 야마도 왕을 위해서 만들었다. 후세에 전해 보여주기 바란다” 2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자신들이 항상 해 오던 습관에 따라, 명문의 후왕이란 바로 백제왕을 지칭하는 것이라 우기면서,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칠지도를 바친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다. 3

 

칠지도에 새겨져 있듯이, 백제 조정은 호무다를 처음에는 신생 제후국의 왕으로 취급한 것 같다 근구수의 아들인 진사왕(辰斯王, 385-392)은 특히 호무다를 아랫사람으로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4 일본서기는 진사왕이 무례한 짓을 했기에 호무다가 392년에 4명의 장군을 백제로 파견하여 엄하게 질책하였다고 말한다. 이 사건이 아마도 광개토왕 비문에 “왜가 391년에 건너왔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5 호무다는 또한 397년(혹은 396년)에도 근구수왕의 손자인 아신왕(阿莘王, 392-405)의 무례를 심하게 꾸짖었다 한다. 6 야마도 왕국을 세운 호무다와 백제의 근구수왕(375-84)은 나이 차이는 있었겠지만 같은 세대에 속했기 때문에, 근구수왕의 아래 세대인 젊은 백제왕들이 보인 무례한 태도를 호무다가 용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진사왕이 장군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 도곤성을 빼앗고, 200명을 포로로 잡는) 390년 9월까지 고구려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광개토대왕(391- 413)이 등장하자 전장에서의 백제의 처지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7 아신왕은 백제의 생존을 위해, 아직 정복자의 기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생 야마도 왕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아신왕은, 양국 조정 사이에 불필요하게 야기된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고 적극적인 군사적 동맹관계로 전환 하기 위해, 태자 전지(腆支)를 397년에 야마도 조정으로 보냈다. 8 광개토왕 비문은 아신왕과 태자 전지의 노력이 성공했음을 알게 해준다. 비문을 보면, 고구려 군대가 392년과 396년에는 백제를 초토화시켰으나, 그로부터 수년 후인 400년과 404년에는 용감한 야마도 병사들이 백제 편에서 고구려와 열심히 싸우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왕 비문: 정확한 해석  

 

이르면 3세기, 늦어도 4세기에는, 일본열도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수립되어 한반도 남부에 미마나라는 식민지를 경영하고, 백제와 신라에 대해 종주국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시기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종잡기 힘든 일화들과 환상적인 얘기를 근거로 했었다 물론 한국측의 역사서는 물론이고, 중국측의 역사서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일본인들 생각에 그들 주장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해 준다는 유물이 1882년에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광개토왕 비문의 신묘년(辛卯, 391) 기사인데, 당시 일본 참모부 소속의 정보장교 사카오 가게노부 중위가 만주로부터 탁본을 떠 온 것이다.

 

일본 사학자들은 신묘년 기사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신묘년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만들었다” 이 번역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일본 사학자들의 “야마도 왕국은 4세기에 이미 통일된 강력한 국가였으며,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통제(혹은 식민지로 통치)했다”는 신조를 뒷받침 하는 “확고부동”한 증거물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9

 

Hatada(1979)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역사교과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일본이 고대 한국을 통제했다고 주장을 하였으나, 전후의 교과서들은 광개토왕 비문을 근거로 똑 같은 주장을 한다. 말인즉, 일본이 한국을 통제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믿기 힘든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부터 믿을 수 있는 비석의 명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비록 전후에 쓰여진 역사 교과서의 내용들이 전전의 내용과는 크게 다르지만, 이 주장만큼은, 광개토왕 비문으로 근거가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한치의 변화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Ledyard(1975)는 “백제는, 390년대부터 400년대에 걸쳐, 북쪽에 있는 그들의 사촌인 고구려로부터 계속 크게 공격을 받아, 심각한 위기에 처했었다. 일본에 있는 그들 형제들의 도움만이 백제를 구원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광개토왕 비문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싸웠다는 기록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한다”라고 말한다 즉, “왜가 백제, 임나, 가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구절은, 고구려가 “왜군에 의존하는 백제”를 멸시하는 감정을 비문에 이런 식으로 나타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 고구려는 매번 왜군에 의존하는 백제에 화가 났을 것이 틀림없으며, 그래서 멸시의 표현으로 백제와 임나, 가라가 왜에게 정복당해 그들의 신민이 되었다고 비문에 새기기로 결정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신묘년 기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조승복(1984: 35-64)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한다. “백제와 신라는 예전에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며,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광개토왕이 황해를 건너 백제, 임나, 가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 조승복은 “바다”를 한반도 서해안의 황해로 이해한다 이는 황해가 한반도의 북서 해안으로부터 한반도 남서 해안과 남해안에 도달하는 가장 편리한 정벌 통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묘년 기사에 바로 이어지는 병신년 기사는 광개토왕이 6년(丙申, 396)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고 말한다 이어 58개의 백제 성들을 빼앗았다고 기록을 하는데, 백제를 정복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무튼 고구려가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을 하는 길은 황해 밖에 없다 396년에 황해를 건넜다면, 그 이전에도 황해를 건너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서도, 마치 흑수말갈 병사들이 고구려 편에 서서 싸우듯, 야마도 병사들이 자주 백제 편에 서서 고구려-신라와 싸우는 기록들이 나온다

 

옛날부터 백제는 야마도 조정으로부터 활과 말을 받아 적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한반도 내부 전쟁에 야마도 병사들을 데려다 쓰는 관행은 6세기까지 지속된 것 같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성명왕이 544년에 킨메이왕에게 임나를 구원하고자 군대를 요청한 기록과, 백제가 어떤 가야 연맹국과 신라 사이의 국경에 6개의 성을 축조하기 위해 3,000명의 야마도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또, 백제가 547년에 야마도 조정에 사신을 보내 원군(救軍)을 요청한 기록과, 548년에 야마도 조정이 370명을 백제로 보내 득이신(得爾辛) 성의 축조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아울러 553년에 “성명 미상의 내신 한 명에게 두 필의 말과 배 두 척, 활 50개와 화살 50세트를 주어 백제조정에 선물로 보내면서 이르기를 ‘왕이 요청한 군대를 우리가 보내주겠다’”는 기록도 있다. 

 

성명왕이 553년에 킨메이왕에게 보내는 서신 내용을 보면, “바다 건너 우리나라는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하여,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천황으로부터 활과 말을 제공받아 강력한 적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왔다. 나는 삼가 야마도 조정이 대량의 활과 말을 우리에게 보내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554년에 “백제는 …를 보내 (성명미상의) 내신에게 이르기를...‘우리가 지금 막 들으니 킨메이왕의 명을 받아 우리에게 보내지는 군대가 북큐슈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하니 더 이상 기쁠 수가 없다. 올해의 전투는 지난번에 비해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군대를 정월 이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러자 내신은‘1,000명의 조군(助軍)과 100필의 말, 40척의 배가 보내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6 (2005. 5. 14)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神功 攝政五十二年 秋九月 丁卯朔丙子 久氐 等...則獻七枝刀一口 (NI: 359)

2. 石上神宮七支刀銘文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 □□□□作 先世以來未有此 刀  百慈王世□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See Hong (1994: 251-4).

3. Ueda Masaaki (Saeki가 인용, 1977)는, 명문에 쓰여있는 후왕이란 표현이 “이 칼을 후세에 전해 보여주라”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명령조의 말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일본 역사학자들 가운데서는 예외적으로, 칠지도를 백제왕이 왜왕(倭)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4. 중국정사 백제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백제는 대왕-소왕 제도를 택해, 많은 왕족들에게 좌현왕, 우현왕 등의 왕위를 부여했었다.  

5. 應神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NI: 365)  

6. 應神 八年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侵…東韓之地 (NI: 367)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百濟新撰)에는 개로왕(蓋鹵王)이 동생 곤지(昆支)를 야마도 조정에 보내 형왕(兄王)으로서의 친선을 돈독히 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雄略 五年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 百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 (NI: 471)  

7.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三 辰斯王 六年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8. 應神 八年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9. 廣開土王碑文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任 羅 加羅 以爲臣民 以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跪王自誓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始 迷之愆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광개토왕비는 414년에 아들인 장수왕(413-91)에 의해서 부왕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10. 신묘년 조의 문장에는 백제와 라(羅)자 사이에 세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일본학자들은 백제 다음에 공백인 세 칸에 멋대로 “임”, “나”, “신” 세 글자를 넣어서 읽는다. 신묘년 기사가 광개토대왕이 396년에 (신라가 아니라) 백제를 공격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것 이라는데 대해 이견을 갖는 사람은 없다. 뒤따르는 기록을 보면, 분명히 고구려와 신라가 친선관계를 유지했고,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신라를 도와 왜군을 격퇴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396년에 백제를 공격한 사유에 신라를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실제로 나중의 400년 조를 살펴보면 광개토대왕이 임나와 가라까지 쳐 내려가 왜군을 격퇴하고 신라를 구원했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임나와 신라” 대신에 “임나와 가라”로 읽으면, 당시 고구려가 신라와는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과 일관성이 있게 된다. “임나, 가라”라는 표현은 송서의 왜왕 관련 기록처럼 중국정사에서도 볼 수 있다.  

11. 廣開土王碑文 九年己亥 百 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而 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 拔新羅城□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殘倭遣逃…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廣開土境 好太王□□□□ 寐 錦□家僕勾請□□□朝貢…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 □石城 □連船□□□  王躬率□討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12. 十四年 春正月 百濟 遣…等 乞軍兵 六月 遣內臣 闕名 使於百濟 仍賜良馬二匹 同船二隻弓五十張箭五十具 勅云 所請軍者 隨王所須… 又復海表諸國  甚乏弓馬 自古迄今 受之天皇 以御强敵 伏願天慈多貺弓馬 (NII: 103-7) 十五年 百濟遣中部木刕施德文次 前部施 德曰佐分屋等於筑紫 諮內臣…等曰 …方聞 奉可畏天皇之詔 來詣筑紫 看送賜軍 聞之歡喜 無能比者 此年之役 甚危於前 願遣賜軍 使逮正月 於是 內臣…答報曰 卽令遣助軍數一千 馬一百匹 船四十隻 (NII: 109)

 

7. 정복의 길 : 고사기-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일본열도 정복과정

  •  홍원탁
  •  승인 2005.05.23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Tracing the Route of Conquest the conquest dynasty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대(神代)에 지상왕국의 시조로 등장하는 니니기는 하늘나라에서 곧장 (近畿의) 야마도(倭)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큐슈로 강림을 한다. 「큐슈로 내려온다」는 것은 야마도(倭)왕국이 토착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고사기-일본서기가 서술하는 인대(人代) 건국시조의 영웅적 동정(東征) 무용담은, 야마도 왕국이 정복왕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의하면, 니니기가 하늘에서 구지(久士布流多氣)봉 정상으로 내려온 직후, “이 곳은 한국을 마주 바라본다(向韓國)”라고 말한다. 에가미는, 건국신화 첫머리에서 한국(韓國)이 거론된다는 사실은 천손(天孫)들의 본향이 한국임을 뜻한다고 말한다. 고사기-일본서기는 倭라 쓰고 야마도라 읽는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정복의 길 

고사기-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일본열도 정복과정 

서울대 교수 홍원탁 (洪 元卓) 


호무다 원정군 일행의 큐슈 상륙: 천손강림(天孫降臨) 
 
호무다-이쯔세 형제가 이끄는 원정군은, [370년] 한반도의 동남 해안 지역을 출발해,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와 이끼섬을 지나, 야요이 원주민들로 붐비는 북큐슈 평야지대가 아니라, 요즘의 시모노세키 시의 감몬(關門)해협을 지나, 미야자키 현의 휴가라는 큐슈의 한적한 동남 해안 지역에 상륙을 한다. 나는 호무다(오오진), 이하레(진무), 니니기를 동일체로 본다.

 

고사기의 천손강림 은유를 본다. 아마데라스(천조대신)와 다카기(고목신)의 [“근초고왕과 진정의”라고 읽을 수 있다] 명을 받고, 니니기[호무다]는 하늘나라를 떠난다.  첩첩 구름을 힘차게 헤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창공을 떠다니는 교량 옆에 위치한 평평한 섬 위에 잠시 섰다가, 드디어 큐슈의 휴가의 다카치호(高千穗)산 구지 봉 정상으로 내려온다. 1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들의 시대(神代)에 지상왕국의 시조로 등장하는 니니기가 하늘나라에서 곧장 (近畿의) 야마도 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큐슈로 강림을 한다. “큐슈로 내려온다”는 것은 야마도 왕국이 토착 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고사기에 의하면, 니니기가 하늘에서 구지 봉 정상으로 내려온 직후, “이 곳은 한국을 마주 바라본다(向韓國); 여기는 카사사 곶을 거쳐 곧장 도달한다.  이 곳은 아침 햇살이 곧바로 비치고, 저녁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땅이다.  이 곳은 참으로 상서로운 곳이다”라고 말한다. 2

 

에가미(1964: 55-6)는, 야마도 왕국 건국신화 첫머리에서 이처럼 눈에 띄게 한국 (韓國)이 거론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천손(天孫)들의 본향을 한국이라고 간주케 한다고 말한다. 1882년에 고사기를 영어로 번역한 첌벌린(1982판: 137-8)은, 에도(江戶) 후기 국학파(國學派)의 거장인 모도오리(本居宣長, 1730-1801)가 고사기를 (가나로) 번역을 하면서 한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모도오리가 내용을 변조하려 한 이유는 오로지 전통적인 신대 설화에서 한국이 적대적이 아닌 형태로 거론된다는 사실을 엄폐 하고 싶다는 분명한 이유에서 이었다. 자신이 논평-해설을 한다는 원문을 그렇게 부정직하게 처리한 행위는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3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미야자키 현의 휴가 시로부터 내륙의 큐우슈우 산맥 쪽으로 40km쯤 들어간 곳에, (다카치호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 남쪽에) 백제 마을(百濟里, 南鄕村) 이라고 부르는 촌락을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이곳 주민 3천여 명의 대부분이, 21세기가 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자신들을 백제사람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 사람들이 사용했던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서(西) 정창원(正倉院) 이라고 부르는 이곳 박물관의 건설비용을 지원했다. 이 박물관은 노송나무를 사용해 나라(奈良)의 정창원을 아주 정밀하게 복제를 한 건물이다. 일본 정부가 이 서쪽의 비황실 소유 정창원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서정창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백제의 설화와 역사를 소개하고, 백제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고대 청동 방울을 보여준다. 24개의 청동 거울, 수많은 마구류, 1,500점이 넘는 경질토기 (스에키) 등이 그 주변에서 발굴되었다. 4 
 
이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진무 편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20여 년에 걸친 호무다의 정복 과정을 요약한다.  

고사기를 본다. 다카치호의 왕궁[임시 거처]에서는, [호무다]가 이쯔세와 의논을 한다: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을까? 나는 동쪽으로 가려 한다.” 그리하여 휴가를 출발해, 북큐슈를 경유, 오늘날 히로시마 현의 아키군(安藝郡)을 지나, 키비(吉備)의 다카시마(오늘날의 오카야마 시)에 닻을 내렸다. 5 그들은 선단을 정비하고, 군수품을 비축했다.

 

건국시조의 영웅적 동정(東征) 무용담 

 

일본서기를 본다. 일행은, 마침내 수많은 선박에 올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나니하 곶을 지나, 오오사카 만을 거쳐, 강물을 곧장 거슬러 올라가, 가와치 지역의 [오늘날 동 오오사카 시의] 쿠사카(日下) 나루터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행은 배를 내려, 대오를 지어 내륙을 향해 행진을 해 갔다. 가면서 보니, 길이 아주 험하고 좁아, 한 줄로 서서 진격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되돌아 와서, 이코마 산을 넘어가는 길을 택해, 또 다시 야마도 내륙 지역으로 접근을 해갔다.  그러자, 토착 세력의 우두머리인 나가스네 라는 자가, 천손들이 [호무다와 이쯔세 일행이] 자신의 땅을 빼앗으러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모조리 이끌고 싸우러 나섰고, 드디어 쿠사카 언덕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전투 중에 이쯔세가 팔꿈치에 화살을 맞았다. [호무다는] “일신의 자손인 우리가, 햇빛을 마주 보면서 싸움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도리를 거슬리는 것이다. 약세인척 잠시 후퇴를 한 다음,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일신의 위세를 등에 업고 햇빛을 따라 적을 무찔러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날 와카야마 시(和歌山市)의 키강(紀川) 하구에 도착했다. 이쯔세는, 배에서 내린 후 첫 번째의 육지전투에서 토착 저항세력의 화살을 맞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6 이제부터는 호무다가 원정군의 유일한 지휘자가 되었다.  
   
[백제의 서울 한성에서는 근초고왕과 진정이 원정군의 근황과 함께 이쯔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걱정을 했다.]  그들은 건어뢰 를 불러 “지금 현지 상황이 우려할만한 혼란 상태이고, 우리 아이들이 모두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라를 평정할 때 쓰던 칼이 여기 있으니 이를 내려 보내라”고 명령했다.  일본서기는 계속한다. [호무다의] 군대는 나구사에 도착해 적을 무찔렀다. 다시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갔을 때 강풍이 급작스럽게 불어왔다. [호무다는] “내 조상은 천신들이고, 내 어머니는 해신이다”라고 외쳤다. [호무다는 오오사카 만으로부터 빠져 나와, 키이 물길(紀伊水道)을 거쳐] 구마노의 아라자카 나루터에 도착했다. 호무다가 [근초고왕이 하사한] 칼을 전해 받은 것은 구마노의 다카쿠라 땅에 도착했을 때였다. 8 구마노 산의 모든 무뢰한들이 제물에 섬멸되었다. [호무다가] 내륙으로 진군을 하려 했으나, 산들이 너무나도 험해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몰라 계속 헤매게 되었다.

 

고사기의 은유를 본다. 다카기는 일행에게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말고, 자기가 지금 내려 보내는 큰 까마귀가 도착하면, 그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진군을 하라고 지시를 했다. 마침내 큰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일행은 요시노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9 
 
구마노에서 요시노강을 향해 꼬불꼬불하고 험한 산길을 따라가는 요즘의 관광객은 산속 마을 교차로에서 까마귀를 그려 넣은 큰 깃발을 볼 수 있다. 10 주위를 둘러 보면, 첩첩 산중. 예전에는, 아주 숙달된 안내자 없이 왔다가는 틀림없이 길을 잃고 헤맸을 것이다. 요시노강은 태평양으로 흘러 드는데, 일본의 세 번째로 긴 강이다.  
 
고사기는, 내가 여기서 “진정” 이라고 쓰는 대목에, “다카기(고목신)”라 쓰고 있다. 근초고왕은 이미 375년 11월에 서거했다. 아마 진정도 그 후 얼마 안 있다 죽었던 것 같다. 11 햇빛을 등에 지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우회한 다음, 강을 따르고 산을 넘어, 처음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고사기에 의하면, 호무다 일행이 오늘날의 (와카야마 현의 태평양 쪽인) 히가시무로 군의 신구우 시에 해당하는 구마노까지 돌아온 것으로 되어있는데, 지도를 놓고 보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와카야마 지역의 키이(紀) 강을 따라 올라가면 요시노강에 훨씬 더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강한 적이 그 지름길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서기는 계속한다. [호무다의] 군대는 (오늘날의 나라현 사쿠라이市) 오사카에 도착해 우다 강에 이르렀다. (야마도 바닥의 토착 세력 우두머리인) 나가스네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으나, 쉽사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앞서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요속일)의 도움을 받아 나가스네를 죽여버릴 수 있었다. 12 

고사기-일본서기가 서술하는 건국시조의 영웅적 동정(東征) 무용담은, 야마도 왕국이 정복왕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388년 어느 날] 호무다는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우리의 동방 원정이 계속된 6년 동안에 사악한 무리들은 모두 소탕되었다.  변경 지방은 아직도 평정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중앙의 [야마도 주변] 지역은 이제 전투가 끝이 났다. 나는 이곳에 장대한 도읍을 건설하려 한다.  이곳 주민들은 미개한 면도 많지만, 본성이 소박하고, 내려오는 습속에 따라 행동을 하기 때문에, 큰 인물이 법과 제도를 확립하면, 정의가 반드시 따를 것이다.  나는 궁궐을 짓고 왕위에 올라,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겠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왕국을 내게 내려 주신 하늘의 덕에 보답할 것이며, 왕실을 길이 하고, 온 누리에 바른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이다. 저 우네비 산의 동남쪽에 위치한 가시하라 땅은 이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도읍을 정하려 한다.”13
 
호무다는 2년 후, [야마도의] 가시하라 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 해가 야마도 조정의 치세 원년으로 간주된다. 일본서기는 호무다의 즉위 년도를 “경인(庚寅)년” 이라고 기록을 하고, 그 해가 270년이라 했다. 나는 호무다의 실제 즉위 년도가, 270년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후인, 390년의 “경인년”이라고 추정을 하는 것이다. 

 

백제의 축하 사절단: 백제-야마도의 교친(交親)은 하늘의 뜻(是天所致, 是天所啓)

 

호무다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수립하자, 백제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일본서기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했다: “야마도 조정의 드넓은 은덕이 이제 멀리 떨어져 있는 백제에까지 도달하여, 우리 임금님[진사왕]께서는 기뻐서 어찌 할 바를 모르셨습니다.  앞으로 천추 만세가 지난들, 어찌 왕래가 없는 해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전해 듣고, [호무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답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백제와의 밀접한 교분관계는, 인간의 뜻이라기보다는, 바로 하늘이 뜻하는 바입니다(朕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由人故). 우리는 신의 뜻에 따라, 처음으로 [남동쪽] 통로를 열었고, [일본 땅으로 오는 길에 마한지역을 평정하여] 이를 백제에 복속 시키는 사업을 거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금 우의의 기반을 한층 돈독히 하여, 이 우정의 결속을 영원토록 지속시킬 것입니다.”14  

 

일본서기를 본다. 야마토 조정에 도착한 백제 사절단은, [호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곡나 땅의 철산으로부터 시작하는 강이 있습니다. 강 하구로부터 철산 까지는 7일도 더 걸리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이 산의 철을 확보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계속 야마도 조정에 철을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아신] 왕께서는 [전지 왕자에게], ‘야마도 왕국이 바다건너 동쪽 땅에 창건되어 우리와 통하게 된 것은, 바로 하늘이 백제를 도우려 열어준 것이다(是天所啓). 이로서 우리 국가의 기반은 영원토록 공고해 졌다. 왕자는 앞으로 철을 비롯해 여러 가지 요긴한 물자들을 야마도 조정에 공급해 주면서 친교를 돈독히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15 신공왕후 52년 9월 조는, 근초고왕(346-375년)이 그의 손자인 침류 왕자(384-385년)에게 이런 충고의 말을 해 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근구수왕(375-384년)의 손자인 아신왕(392-405년)이 자기 아들 전지(405-420년)에게 이런 충고를 해 준 것으로 이해한다.  
 
가무 야마도 이하레: 신성한 야마도의 왕 

 

고사기에 의하면 야마도 왕국 시조의 공식 명칭이 가무(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이었다. 레드야드(1975)는 진무의 칭호와 호무다의 도읍지 이름에 나타나는 “이하레”라는 명칭에 주목을 환기 시킨다. 16 일본서기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譽田)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磐余)에 정했다고 말한다. 백제의 최초 수도는 위례성이다. 17 이하레의 세 번째 글자와 위례의 두 번째 글자가 동일 한 것은 둘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레드야드는 이하레의 한국식 표기가 이발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북사(北史), 수서, 통전은, 백제 사람들이 수도를 거발(居拔)이라 한다고 기록을 했다. 그런데 “있을 거”라는 한자의 훈독(訓讀)은 “이”이기 때문에, 백제 사람들은 “거발”이 아니라 “이발”로 읽었을 것이다.  

 

우리는 호무다의 도읍지 명칭인 이하레가 백제의 최초 도읍지인 위례를 의미하고, 이는 또한 북서의 이발에 상응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환언하면,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을 수립한 다음, 백제 최초의 도읍지 이름(위례, 이발, 이파르)을 본 따 자신의 최초 도읍지 이름을 이하레(이파레)라고 불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을 해 왔을 당시에는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비류수 언저리(渾江邊 桓仁)에 적당히 집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왕위를 계승한 유리명왕은 “국내 위나암”을 시찰한 다음, 서기 4년에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尉那巖)성을 쌓았다고 한다.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다 한다. 도수희(1972)는 위나, 어라, 위례가 모두 동일하게 발음이 되며, 이기동(1990)은 주서의 “어라” 마찬가지로 “위례”도 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위례성, 위나(암)성, 이발성(거발성), 등은 모두 왕성을 의한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건국시조라는 진무의 명칭에 “야마도 이하레”라고 “이하레”를 삽입했다. “야마도의 왕”이라는 뜻 일 것이다.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에 정했다고 말했다. 여기서는“왕성”을 의미 할 것이다. 결국 야마도 왕국 시조의 공식 명칭인 가무(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는 모두 수식어일 뿐이고, 그 속에는 사람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는 것이다. 즉, 호무다 라는 실명을 넣어야만, 「신성한 야마도의 왕 호무다」라는, 새 왕국을 창건한 시조의 완전(complete)한 명칭(full name)이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7 (2005. 5. 21.)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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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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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백제의 근초고 왕(346-75)은 처남(혹은 왕후의 친척)인 진정을 347년에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근초고왕과 그 뒤를 이은 왕들은 계속 진씨 집안의 여인을 왕비로 삼았다. 마치 고사기-일본서기에서 아마데라스와 다카기가 사돈관계인 것처럼, 근초고왕과 진정도 사돈관계인 것이다. 고사기-일본서기 건국신화에서는 일본열도 지상왕국의 시조인 니니기가 아마데라스의 친손자이고, 다카기의 외손자인 것이다.  
高皇産靈尊 選當遣於葦原中國者...使降之 皇孫...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NI: 141)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觸之峯 (NI: 149)  
故…瓊瓊杵…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NI: 153-155)  
皇孫…瓊瓊杵…而排披天八重雲 以奉降之...降到之處者 呼曰日向襲之高千穗添山峯矣 (NI: 161)
 故爾詔…日子…邇邇藝…而離天之石位 押分天之八重多那 雲而…於天浮橋…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自久以下六字亦以音 (K: 128)

 於是 詔之 此地者向韓國 眞來通笠沙之御前而 朝日之直刺國 夕日之日照國也 故此地甚吉地 (K: 128)  

2.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기 때문에 한국(韓國)은 “가라 구니”로 부른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 조를 보면, 가야(加耶)의 시조 수로는 서기 42년에, 하늘이 그에게 명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기에, 구지(龜旨) 봉우리에 내려와 가락(駕洛)의 아홉 개 촌을 내려 보고, 그 곳에 나라를 세웠다 한다. 일본열도의 야요이 시대 600년 기간(B.C. 300년-A.D. 300년)이란, 논농사를 짓는 삼한(三韓) 사람들의 이주 정착기간이다. 이주민들이 삼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대부분은 변한, 즉 가락의 9촌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韓)을 “가라”라 부르게 된 것 같다. 이는 바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 건국신화 기록에, 가야의 건국신화 일부가 그 모습을 약간 바꾸어 나타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날의 큐슈 동남부 지도를 놓고 보면, 국견산(國見山) 꼭대기가 해발 1739m, 조모산(祖母山) 꼭대기가 해발 1756m, 구쥬 산꼭대기가 해발 1791m이고, 다카치호 라는 명칭의 장소는 국견산과 조모산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하천의 옆자리를 지칭하고 있다.  

3. 모도오리 노리나가는 소위 국학파의 지도자이었다. 18세기 일본의 국학파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모든 기록을 글자 한자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무조건 적으로 수용 하고, 또 그 의미들을 가장 국수주의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학파이었다. 모도오리는 “글자 한자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라는 원칙을 스스로 위반을 한 셈이다.  

4. 휴가 국철 역전의 버스 터미날에서 출발 해 1시간 10분쯤 가면 남향촌 버스 정거장에 도착한다.  백제촌 주민들이 말하는 전설을 들어 보면, 일본 사회 내에서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고사기-일본서기의 내용과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2004년 2월 23일,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한일지방자치단체간 교류를 주제로 서초구와 미야자키현이 공동으로 국제세미나를 주최했을 때, 무수한 난관을 헤치고 백제촌을 건립한 다바루 마사토(田原正人) 전 촌장(村長)에게 나는 (촌장 발표의 지정 토론자로서) 난고손(南鄕村)이 바로 고사기-일본서기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의 핵심지(核心地)라는 사실을 동시에 홍보하고, 그 주변일대에서 발굴된 일체의 유물을 모두 정리해서 전시하는 동시에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배포하면, 전세계 전문가들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고, 방문객의 성격도 다양하게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 神日本磐余彦天皇...謂諸兄及子等曰 昔我天神高皇産靈尊...擧此 豐葦原瑞穗國而授天祖…瓊瓊杵...是時 運屬鴻荒 時鍾草昧...何不就而都之乎 (NI: 189) 
神倭伊波禮毘古命 與其…兄五瀨命 二柱坐高千穗宮而議云 坐何地者 平聞看天下之政 猶思東行 卽自日向發 幸行筑紫…亦從其國上幸而 於阿岐國… 於吉備之高嶋宮八年坐 (K: 148)
神武 卽位前紀...至安藝國...徙入吉備國 起行館以居之... 積三年間 脩舟檝蓄兵食 (NI: 191)

진무가 동정(東征)의 장도에 올라 출항을 한 바로 그 장소라는 휴가의 미미쓰 해안의 (耳川)강어귀에는 일본해군의 발상지(日本海軍發祥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구 일본제국 해군제독 한 명이 자신의 사비로 건립을 했다고 안내 간판이 소개를 하고 있다.

6. 神武 卽位前紀... 皇師遂東...方到難波之碕 會有奔潮太急 因以名爲浪速國 亦曰浪花 今謂難波訛也...遡流而上 徑至河內國 (NI: 191) 皇師勒兵 步趣龍田 而其路狹嶮 人不得幷行 乃還更欲東踰膽駒山 而入中洲 時長髓彦聞之曰 夫天神子等所以來者 必將奪我國 則盡起屬兵...與之會戰 有流矢中五瀨命肱脛 皇師不能進戰...今我是日神子孫 而向日征虜 此逆天道也 不若 退還示弱 禮祭神祇 背負日神之威 隨影壓躡...時五瀨命矢瘡痛甚 乃...進到于紀國...而五瀨命薨 (NI: 193-195)

故從其國上行之時 經浪速之渡而 泊…津 此時登美…毘古 興軍待向以戰...於是…五瀨命於御手負登美毘古之痛矢串 故爾詔 吾者爲日神之御子 向日而戰不良 故負賤奴之痛手 自今者行廻而背負日以擊期而…到紀國男之水門而詔 負賤奴之手乎死 男建而崩 (K: 150-2) 

7. 故神倭伊波禮毘古命 從其地 廻行 到熊野村之時...熊野之高倉下 賷一橫刀…天照大神 高木神...召建御雷神 而詔…我御子等 不平坐良志 此二字以音 其葦原中國者 專汝所言向之國 故汝建御雷神可降 爾答曰僕雖不降 專平其國之橫刀 可降是刀 此刀者 坐石上神宮也 降此刀狀者 穿高倉下之倉頂 (K: 150-2)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秋津嶋…天劒獲於高倉…大烏導於吉野 列儛攘賊…敬神祇 所以稱賢后 (K: 42) 

8. 軍至名草邑 則誅…遂越狹野…而到熊野神邑…海中卒遇暴風…時…歎曰…吾祖則天神 母則海神…至熊野荒坂津 因誅…者...天照大神…曰 夫葦原中國猶聞喧擾之響焉…而下予平國之劒…登謂高倉曰…獻之天孫…旣 而皇師 欲趣中洲 而山中嶮絶 無復可行之路…天照大神訓于天皇曰 朕今遣頭八咫烏 宜以爲鄕導者 果有頭八咫烏 自空翔降 天皇曰 此烏之來…乃尋鳥所向…遂達于莵田下縣…至吉野 (NI: 195-9) 

9. 於是亦 高木大神之命以覺白之 天神御子 自此於奧方莫使入行 荒神甚多 今自天遣八咫烏 故其八咫烏引道 從其立後應幸行 故隨其敎覺 從其八咫烏之後幸行者 到吉野河 (K: 150-2)

10. 故爾於宇陀 有兄…弟…二人 故先遣八咫烏 (K: 154) 
神武 元年 頭八咫烏 亦入賞禮 其苗裔卽葛野主殿縣主部是也 (NI: 215)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팔지오가 사람이 아니라 까마귀라고 해 놓고서는, 그가 길을 안내한 공적으로 후에 포상을 받았으며, 그 자손들이 현주 노릇을 했다고 기록을 했다.

11. 神武 卽位前紀…時勅道臣命 今以高皇産靈尊 朕親作顯齋 用汝爲齋主 (NI: 203)
일행이 야마도 땅에 도착한 직후, 다카기(고목신)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12. 神武 卽位前紀...皇師遂擊長髓彦 連戰不能取勝...時長髓彦 乃遣行人...曰 嘗有天神之子 乘天磐船 自天降之 號曰…饒速日 是娶吾妹...故吾以饒速日命爲君而奉焉 夫天神之子 豈有兩種乎...天皇曰天神子亦多耳...然而凶器已構 其勢不得中休...饒速日命 本知天神慇懃 唯天孫是與 且見夫長髓彦稟性愎恨 不可敎以天人之際 乃殺之帥其衆而歸順焉 天皇素聞饒速日命 是自天降者 而今果立忠效則褒而寵之 此物部氏之遠祖也 (NI: 209-211) 

13. 神武 卽位前紀 己未年... 我東征 於玆六年矣 賴以皇天之威凶徒就戮 雖邊土未淸 餘妖尙梗 而中洲之地 無復風塵 誠宜恢廓皇都 規摹大壯而今運屬屯蒙 民心朴素 巢棲穴住 習俗惟常 夫大人立制 義必隨時 苟有利民...觀夫…畝傍山東南橿原地者 蓋國之墺區乎 可治之...辛酉年…天皇卽帝位於橿原宮 (NI: 213)  
가시하라(橿原)라는 곳은, 오늘날의 나라현 가시하라市의 동쪽 지역에 있다. 여기가 옛날 이하레 지역에 속한다. 오늘날 나라현의 지도를 보면, 나라市 남쪽에 덴리市가 있고, 그 남쪽에는 사쿠라이(櫻井)시가 있으며, 사쿠라이市 남부의 서쪽에는 (옛 야마도 땅의 중심부인) 다카이치군(高市郡)의 아스카 무라(明日香村)와 가시하라市가 있고, 사쿠라이市의 바로 남쪽에는 (역시 야마도에 속하는) 요시노(吉野)군이 있다.  

14. 神功 攝政五十年 久氐等奏曰 天朝鴻澤 遠及弊邑 吾王歡喜踊躍 不任于心 故因還使 以致至誠 雖逮萬世 何年非朝 (NI: 357) 
攝政五十一年 百濟王亦遣久氐朝貢 於是 皇太后語太子...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由人故 玩好珍物...常來貢獻…如朕存時 敦加恩惠…朕從神所驗 始開道路 平定海西 以賜百濟 今復厚結好 永寵賞之 (NI: 357-9) See Aston (N1: 250). 

15. 神功 攝政五十二年 久氐等... 曰 臣國以西有水源 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國 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NI: 359) See Aston (N1: 251). 

16. 亦名神倭伊波禮毘古 (K: 146)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爲 皇太子因以都於磐余 (NI: 349) 

이하레 라는 명칭의 지역은 오늘날 나라현 사쿠라이市의 중심부로부터 아스카를 지나 가시하라市의 동부에 걸쳐있는 (우네비 산 동남쪽의 가시하라 궁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17.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記 第一 百濟始祖 ...溫祚都河南慰禮城 (S2: 16)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第六 百濟 按古典記 東眀王 第三子 溫祚...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 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 近肖古王…都漢城 (S2: 233)  

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은 한수 북쪽 위례(慰禮)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기원전 5년에 한수 남쪽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국내의 “위나암”성과 백제의 하북 혹은 하남의 “위례”성이라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도읍지 즉 “왕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이 된 것 같다.  

18. 北史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百濟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차돈(異次頓)을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쓰지만, 읽기는 이차돈 이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사례이다. 

 

8. 원 일본인(原日本人)의 형성: 한반도로부터의 야요이 이주(移住) 물결

  •  홍원탁
  •  승인 2005.05.30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Formation of the Proto-Japanese People

 

기원전 300년경, 쌀농사를 하는 한반도 남부의 변한 (주로 가야) 사람들이 북(北)큐슈 평야지대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열도에서 신석기 조몽문화(繩文, 10,000-300 BC)를 이룩한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원주민들과 합류해 600여 년에 걸친(300 BC-300 AD) 쌀농사 야요이(彌生) 문화를 전개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드디어 인종적 가교(假橋)가 형성된 것이다 원 일본어(原日本語)를 공유하는 원 일본인(原日本人)은 오랜 기간에 걸쳐, 비교적 평화스런 유전적 융합과정을 거쳐 바로 이 야요이 시대에 형성됐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모두 알타이어의 범-퉁구스 계통에 속하지만, 어휘나 음운 측면에서 보면 일본어는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대 일본 사람들 유전인자의 65% 정도가 한반도 사람에게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몽 사람들이 야요이 사람으로 진화해 마침내 현대 일본인을 형성했다는 이론은, 1990년대에 들어와, 현대 생물인류학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원 일본인(原日本人)의 형성:  

한반도로부터의 야요이 이주(移住) 물결 

홍원탁 (서울대 교수)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이룩한 신석기 조몽(繩文)문화

 

빙하기 말기에 시베리아로부터 사할린-북해도 지역으로 도보로 건너온 아이누족(族)은 일본열도 전역에 퍼져 (토기사용 이전의) 구석기시대를 전개했다. 또, 빙하기가 끝나기 이전 어느 때인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동남아시아로부터 필리핀-대만-류규군도(琉球群島)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따라 큐슈 지역으로 건너와 정착했고, 그 일부는 혼슈(本州) 서부로 건너갔다.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이누족은 동남아시아 사람들보다 북방 몽골로이드에 가깝다. 1 북해도와 혼슈 북부의 지명에는 아이누 말이 많이 포함돼 있으나, 혼슈 남서부나 큐슈에서는 아이누 말처럼 들리는 지명이 발견되지 않는다. 2 이 사실은 조몽 토기의 전통이 나고야 주변을 경계로 일본의 남서부와 동북쪽이 대조를 이루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신석기 조몽문화(10,000-300 BC)의 전개와 동시에 일본열도 사람들은 작살과 낚시바늘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고, 돌과 뼈로 만든 도구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고, 조몽(繩文, 새끼줄) 문양 토기에 음식을 끓여먹었다. 놀랍게도 조몽시대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전개와 동시에 토기를 제작해 사용했다. 4 기원전 1만년에 손으로 빚어 노지에서 비교적 낮은 온도에 구워낸 죠몽토기는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토기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시대 아이누족과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은 당시 한반도에 살던 예맥 퉁구스족과 거의 접촉이 없었던 것 같다. Nelson(1993: 107)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근본적으로 제각기 자급자족(自給自足)적인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상호간 접촉을 할 필요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쌀을 경작하는 야요이 문화 

 

밭에서 자라는 벼건 논에서 자라는 벼건 간에, 쌀은 일본열도에서 유래한 게 아니다. 신석기 조몽시대엔 어떤 야생 벼의 원시적 변형도 없었다.  

 

대략 기원전 300년경 논에서 벼를 경작하고, 회전 선반을 돌려 토기를 제작한 한반도 남부 사람들이 북큐슈 평야지대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5 그들은 삼한(마한, 진한, 변한) 지역에서 건너왔는데, 주로 변한의 가야 땅에서 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 중 일부는 서부 혼슈로 건너가, 계속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해 갔다. 이들은 일본열도의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원주민들과 합류해 600여 년에 걸친(300 BC-300 AD) 야요이(彌生) 시대를 전개했다. 마침내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인종적 가교(假橋)가 형성된 것이다. 6  

 

중국 본토나 한반도에 비하면, 일본열도에서는 아주 늦게 농업이 시작됐다. 결과적으로, 상당히 발달한 형태의 농업이 급작스레 신석기 일본열도에 전파된 것이다. 한국식 움집(수혈주거)과 저장창고를 포함하는 야요이 쌀농사 문화는 일본열도 전역으로 서서히 확산됐다. 그러나 조몽문화의 전통도, 특히 일본의 동부와 북부 지역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공존했다. Imamura(1996: 149)는, 야요이 시대의 돌을 깎아 만든 석기들의 존재는 분명히 조몽 석기 전통의 계속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야요이 시대가 시작될 무렵, 돌을 깎아 만든 석기의 생산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목이 좁은 저장용 토기 단지와 아가리가 큰 조리용 토기 냄비, 손잡이가 달린 쟁반을 포함하는 초기 야요이 토기들이 조몽 말기의 토기와 함께 북부 큐슈 지역에서 발굴됐는데, 그 형상을 보면 조몽 토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기 야요기 토기들의 대부분은 붉은 색을 띠는 한반도의 무문토기와 거의 구분할 수 없다. 7 

 

청동기와 철기는, 농경과 함께, 신석기 일본열도에 한꺼번에 전파됐다. 8 상당량의 동으로 만든 단검, 도끼 창, 거울, 방울 등이 야요이 유적지에서 출토됐다. 동경이나 청동 방울 뿐 아니라, 청동 단검과 도끼, 창도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보다 주로 종교적 의식의 도구로 만들어졌던 것 같다. Imamura(1996: 171)는 “(한반도에서) 본래 좁고 굵고 형태였던 무기들이 (일본열도에 와서) 실제 무기의 기능을 훼손하면서 얇고 넓은 형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너무 얇아서 무기의 기능을 갖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청동기 유물은 상당히 많은 양이 발굴되는데 비해, 철기로 만든 도구는 야요이 유적지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야요이 사람들은 돌을 갈아 손도끼를 만들었고, 그 돌도끼로 나무를 잘랐다. 그들은 또 나무로 쟁기, 괭이, 칼, 삽과 같은 농기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릇, 신발, 절구 등도 나무로 만들었다. 실제로 발굴된 야요이 시대의 농기구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이런 목제품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철제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기원전 475-221년, 한족들은 이미 거대한 용광로와 주물 공법을 사용해 철제품을 대량 생산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스키타이 유목민처럼, 풀무질을 해 철괴를 뽑고, 불에 달군 쇳덩이를 모루 위에 올려 놓고 두드려서 소규모로 철제품들을 만들었다. Imamura(1996: 169)는 "일본열도의 야요이 유적지에서 철광석을 제련한 흔적이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일본 국내에서 선철(銑鐵)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위서 동이전에는, '변한 사람들이 철을 왜인들에게 (즉, 바다 건너 큐슈에 정착한 가야 친족들에게) 공급해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이전은, 마치 중국 시장에서 동전을 사용한 것처럼, '변한(가야) 시장에서는 거래를 할 때 교환 수단으로 철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가네”라 하면 지금도 돈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철을 의미한다. 9 실제로 한반도 남부 여러 곳에서 당시의 제철 유적지가 발견됐다.  

 

야요이 사람들은 추수할 때 낫을 사용해 벼 줄기의 밑부분을 자른 게 아니고, 반원형 돌칼에 작은 구멍을 내고 끈을 꿰어 (손에 감고) 벼 이삭의 바로 아래를 잘랐다. 그런데 돌칼로 벼 이삭의 바로 밑을 잘라 추수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일본열도 야요이 농부들의 쌀 경작 기술은 당시 한반도 남부 농부들의 쌀농사 기술 수준을 반영했을 것이다.

 

야요이 문화는 전쟁이나 정복의 소산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아이누,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과 서서히 융합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 일본인(原日本人)과 원 일본어(原日本語)  

 

조몽 사람들이 야요이 사람으로 진화해 마침내 현대 일본인을 형성했다는 이론은, 1990년대에 들어와, 현대 생물인류학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Unger(2001: 95)는 “형질인류학과 분자유전학에서 계속 나오는 대량의 자료들은 조몽-아이누-류규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야요이 시대와 현대 혼슈의 사람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Imamura(1996: 209)는 “골격의 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고대 조몽 사람들은 혼슈 사람들보다는 현대의 아이누, 류규 사람들과 유사하며, 혼슈 사람들은 동북아시아 사람들과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일본 학자들은 의당 “한반도”라는 표현을 써야 할 장소에 한사코 “동북아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계통발생론적 분석에 의하면 일본 혼슈 사람과 한국 사람 사이에 가장 유사한 유전적 친근성이 나타나며, 일본 사람들 유전인자의 65% 정도가 한국 사람에게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10

 

조몽인과 야요이 사람의 골격구조는 쉽게 구분된다. 11 Barnes(1993: 171, 176)에 의하면, “현대 일본인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하면, 5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수많은 이주민을 직접 받은 기내(畿內) 지역을 제외하고는, 큐슈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골격 유전인자에 미친 대륙의 영향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Unger(2001: 81, 96)는 “조몽 시대 일본열도에서는 원 일본어(원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원시-한국어-일본어는 야요이 생산기술의 도입과 함께 들어온 것이며, 퉁구스어가(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범-퉁구스어가) 최초로 일본열도에 들어온 시기는 바로 야요이 시대가 시작한 때였다”고 말한다. 

 

원 일본어를 공유하는 원 일본인은 오랜 기간에 걸쳐, 비교적 평화스런 유전적 융합과정을 거쳐 야요이 시대에 형성됐다. 12 한국어와 일본어는 모두 알타이어의 범-퉁구스 계통에 속하지만, 어휘나 음운 측면에서는 일본어가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야요이 이주 물결의 타이밍: 왜 기원전 300년경에 움직였을까?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한반도 북부에서는 기장(조, 수수)을 재배했으며, 남부에서는 쌀을 재배했다. 기원전 1,500-1,000년 중 언젠가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400년경에는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들은 Diamond(1998: 7)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했다: “한국해협 바로 건너편에서 수 천년 동안 이 모든 발전이 이뤄졌는데, 일본열도에서는 여전히 석기를 가지고 계속 수렵-채취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도대체 신석기 조몽 문화가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는가?” 

 

맑게 개인 날, 한반도 남동쪽 부산 지역에서는 육안으로 대마도를 볼 수 있다. 대마도 남쪽 끝에서는 이키섬이 보이고, 이키섬 남쪽 가까운 거리에 큐슈가 있다. 사람들은 다른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배만 부르면) 게으르다 하니 한반도 사람들이 수평선 저쪽을 그저 바라만 봤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기원전 300년경에 그들에게 바라보기를 멈추고 바다를 건너게 했는가? 

 

기원전 400년경 소(小) 빙하기가 시작돼, 비교적 쌀쌀한 날씨가 기원후 300년경까지 계속됐다. 13 갑작스런 소 빙하기의 시작은, 동양에서는 전국시대(403-221 BC)의 시작과 (기원전 356년 한족들 최초의 장성 축조가 증명하는) 유목민 흉노의 발흥과 일치하며, 서양에서는 켈트족의 대이동과 일치한다 기원전 390년, 갈리아족이라고 알려진 사나운 켈트 전사들이 로마 자체를 포위했다. 14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동주(東周)가 와해된 기원전 403년 후 어느 때인가, 지금까지 제후국이었던 (옛) 연나라의 지배자가 왕을 자처하고, (옛) 조선의 제후 역시 자신을 왕이라고 칭했으며, 조선과 연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연과 조선 사이의 무력 충돌은 기원전 300년경에 최고조에 달했다.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내려가고 건조해지는 현상은, 유목세력이 (별안간 안정이 깨진) 정주농경 제국에 우위를 갖게 만들어 야기된, 맬서스 인구론이 말하는 성격의 전쟁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또, 이 같은 급작스런 기후변화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에 살던 가야 사람들에게 보다 따뜻하고 비가 좀 더 많이 오는 땅을 찾아 대한해협을 건너게 했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조건이 편해지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리는 비에 의존하면서, 습지대 혹은 늪지대 인근에서 쌀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쌀농사 기술을 가지고도, 인구는 매 세대마다 두 배로 늘어날 수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쌀을 경작하기 시작한지 1,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인구는 포화상태에 도달했을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갑작스런 가뭄과 기온 저하는 생태학적 균형과 공동체의 안정을 파괴할 것이다. 원시적인 쌀 재배 기술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준 이하로의 기온 및 강수량의 저하는, 갑작스런 변화에 맞춰 즉각적으로 농경기술을 혁신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이들 농부들이 새로운 땅을 찾도록 강요한다. 여기서 한반도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기로 결정한 시점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남쪽 수평선 위에 어렴풋하나마 눈에 익은 모습의 섬들은 곤경에 빠진 농부들 모두의 마음 속에 따뜻하고 비가 많은 '꿈 속의 나라'를 연상케 만들었다 기후 조건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충격은 그들에게 이제까지 오랫동안 그저 바라만 보던 땅을 새삼 주목하게 만든 것이다.  

 

Barnes(1993: 171, 176)에 의하면, 조몽문화에서 야요이 문화로의 변화는 일본열도에서 물질 경제의 전반적인 재구성을 의미하는데, “북큐슈는 야요이 문화 형성에 부화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야요이 문화(300 BC-300 AD)와 초기 고분시대(300-375) 문화  

 

600년에 걸친 야요이 시대를 이어 고분시대(대략 300-650/700)가 전개된다. 초기 고분시대 문화(대략 300-375)는 동검, 동경, 보석 등을 실용성보다 종교적, 의식적 대상으로 받드는 야요이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Egami(1964)는 '야요이 후기 문화와 초기 고분시대 문화가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 기간 중 발생한 변화는 야요이 후기의 사회적 계층화의 심화와 그에 수반하는 사회적 진화에 따라 생긴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15 

 

초기 고분시대의 분묘들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무덤을 흔히 천연의 언덕 위에, 혹은 산등성이에 축조해서 아래로 논을 굽어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력을 동원해도 보기엔 크고 위압적인 인상을 주는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언덕 위에 구덩이를 파고, 안에 목관을 넣은 다음, 관 주위를 돌로 둘러싸고 위에 돌 판을 덮었다.  

 

그러나 후기(대략 375-650/700) 고분은 평지에다 거대한 규모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혹은 원분(圓墳) 형태로 축조했다. 부장품으로 말 장신구와 철제 무기, 금관, 곡옥, 혹은 금동 귀고리, 혁대고리, 철제 농기구, 경질 토기 등을 관 속, 혹은 관 주변에 매장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전에 보지 못하던 말 뼈와 말에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갑자기 출현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8 (2005. 5. 28.)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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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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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북해도에서 발굴된 아이누족 유골은 형태학적으로 북방 몽골로이드와 매우 가깝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에 의하면 아이누족과 오키나와 사람들 사이엔 유전적 친근성이 없다. Hudson(1999: 64-67, 71-72 과 76-78) 참조.  

2. Diamond(1998: 11)  

3. Imamura(1996: 112) 참조.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가깝지 않다. Nei Masatoshi, “The Origins of Human Populations: Genetic, Linguistic, and Archeological Data,”The Origin and Past of Modern Humans as Viewed from DNA, ed. By Sydney Brenner and Kazuro Hanihara, Singapore: World Scientific Publishing, 1995, pp. 71-91; Omoto Keiichi, “Genetic Diversity and the Origins of the Mongoloids,”ibid., pp. 92-109;  Omoto Keiichi and Saitou Naruya, “Genetic Origins of the Japanese: A Partial Support for the Dual Structure Hypothesis, ” American Journal of Physical Anthropology, 102, 1997, pp. 437-446, 등 참조.  

4. Diamond(1998: 5)와 Barnes(1993: 27) 참조. 일본열도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한지 9,7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농업을 도입했다. 중동지역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 농업을 발명하고, 그로부터 1,0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토기가 출현했다. 일반적으로 정착 (농경) 사회에서 토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일본열도는 식량 자원이 아주 풍부했기 때문에 사냥-채집을 하는 사람들이 정착을 하고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일본의 산림지역들은 식용 나무열매가 풍부했고, 강들과 사방을 둘러싼 바다에는 어류, 조개류, 해조류가 넘쳐났다. 조몽 사람들은, 떠돌이들이 아니라, 정착한 사냥-채취인들이었다.  

5. Barnes(1993: 170) 참조. 야요이 토기는 고운 진흙을 가지고 회전선반 위에서 모양을 완성한 다음,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워 만들었다. 외형이 세련되고, 불그스름한 갈색 혹은 누르스름한 백색을 띠었다.  

6. Hudson(1999: 59-81) 참조. 야요이라는 명칭은 이 새로운 형태의 토기가 처음으로 1884년에 발굴된 장소(東京都文京區彌生町)의 이름인 것이다.  

7. Imamura(1996: 164-5)는 한반도 남단에서 발견되는 야요이 토기의 수량에 주의를 환기해, “한국의 늑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중의 8%가 야요이식 토기지만... (부산의) 예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는 94%가 야요이식 토기”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8. 청동을 주조하는 원료를 한반도에서 가져왔는데, 그 양이 적었고 공급원 자체가 불안정했다. 청동을 “가라 가네”라고 불렀는데, 한철(韓鐵)을 의미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국을 “가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건너온 사람들 대부분이 가야(가락)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708년 무사시 지역에서 동광(銅鑛)이 처음 발견되면서, 일본열도에서 소위 와도우(和銅) 시대가 시작된다.  

9.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10. Horai and Omoto(1998) 참조. Ono(1962: 21)는 혈액형 분석결과를 근거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건너온 이주민이 야요이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명백하지만, 이주민들 수가 토착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거나 혹은 원주민들을 완전히 말살시킬 정도로 많은 수가 건너온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가야에서 비교적 적은 수의 농부들이 건너와 정착한 후, 수렵과 채취를 하던 조몽 사람들보다 빠른 속도로 증식한 결과, 마침내 그들보다 수적으로 크게 앞서게 됐다는 것이다. Hudson(1999: 81)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야요이 이주민들이 조몽 사람들 전부를 대체한 것은 아니지만, 조몽 사람들이 현재의 일본인에게 유전적으로 미친 영향은 1/4이 안될 것'이라고 말한다. 

11. Barnes에 의하면, 서부 일본 야요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골격은 분명히 토착 조몽 골격 유전자형과 한반도식 골격 등,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조몽 사람 골격은 작은 키에 긴 팔뚝, 짧은 다리, 넓은 얼굴, 두드러진 안면 굴곡을 보이는데 반해,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 골격은 키가 크고 날씬하며, 긴 얼굴에, 눈들은 모아져 있고, 눈 두덩이 뼈와 코가 크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Hudson(1999: 68)을 참조. 

12. Janhunen(1996: 201, 210)은 '일본어의 알타이어로의 변화는 초기 형태의 한국어로부터 구조적 영향을 받아 유도된 것 같다'고 말한다. Horai and Omoto(1998: 40-42)와 Hudson (1999: 59-81)을 참조 

13. K W. B, ed., "Climate Variations and Change",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1986), Vol. 16, p. 534; P. A. Mayewski and F. White, The Ice Chronicles: the Quest to Understand Global Climate Change (Hanover: University Press of New England, 2002), p. 121; H. H. Lamb, Climate, History and the Modern World (London: Routledge, 1995), p. 150.

14. 서쪽에서는, 극지방 빙하권의 확장이, 관개시설이 잘 된 페르시아 제국(525-330 BC) 멸망과, 그 뒤를 이은 단명의 알렉산더 제국(336-323 BC)의 붕괴 시기와 일치한다.

15.  600년의 야요이 기간 중, 사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분화했다. 초기 고문시대에 들어 한층 두드러진 사회계층화가 이뤄져 비교적 대규모의 고분들이 등장하지만, 그 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여전히 평화스럽고 종교적인 야요이 사람들이었다. 통일국가의 형성은 후기 고분시대가 돼야 이뤄진다.

 

9. 백제 사람들이 전개한 일본열도의 후기 고분시대

  •  홍원탁
  •  승인 2005.06.08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Archeological Break : Event or Process

3세기 말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했다. 말뼈 혹은 말과 관련된 도구들은 초기 고분에서 발굴된 적이 없다. 초기 고분시대(대략 300-375) 문화의 후기 고분시대(대략 375-675) 문화로의 전환은 갑작스런 것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말뼈와 말에 관련된 다양한 도구가 별안간 출현한다는 것이다. 후기 고분시대 문화는 야마도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나는 일본열도가 370-390년 사이에 백제사람들에 의해 정복됐고, 오오진이 야마도 왕국의 시조로서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며, 정복의 시작된 시점부터 정복자들이 거대한 무덤에 마구류와 함께 매장된 시점과의 사이엔 얼마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6세기 후반 사철이 발견되기 이전의 일본열도에서는 철의 생산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이 가야와 백제에 철의 공급을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 사건 혹은 과정 

백제 사람들이 전개한 일본열도의 후기 고분시대 

홍원탁 (서울대 교수) 

후기 고분시대 문화 

전통적으로 일본열도에서의 고분시대는 초기(대략 300-375), 중기(대략 375-475), 후기(대략 475-650 혹은 700)로 구분됐다. Egami(1962, 1964)는 고분시대 중기와 후기의 문화가 본질적으로 유사한 반면에 초기의 문화는 이들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근거로, 중기와 후기를 통합해 전통적인 (초기-중기-후기) 3분법을 (초기-후기) 2분법으로 수정했다. Egami에 의하면, 본질적인 고고학적 분기점은 초기 고분시대의 끝 무렵에 가서 단 한번 발생한다는 것이다.

초기 고분시대 문화의 후기 고분시대(대략 375-675) 문화로의 전환은 갑작스런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말뼈와 말에 관련된 다양한 도구가 별안간 출현한다는 것이다. 3세기 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했다. 1 말뼈 혹은 말과 관련된 도구들은 초기 고분에서 발굴된 적이 전혀 없다. 2 반면 한반도에서는, 414년 세워진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407년 5만의 보병과 기병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일본서기는 백제로부터 말의 공식적 도래를 오오진 15년(404)조에 기록하고 있다. 4 

Egami에 의하면, 후기 고분시대의 문화는 호전적인 지배계층의 세속적인 취향을 보여주며, 북아시아 기마민족의 실용적, 전투적, 귀족적 성격을 시사한다. 무기들은 더 이상 값 비싼 혹은 샤머니즘적인 물건들이 아니었고, 일상 사용되던 것들을 부장품으로 묻었다. 후기 고분들에서는, 철제 말 재갈, 목제 혹은 철제 등자, 안장, 마구에 부착하는 청동 방울, 말 투구, 말 갑옷 등의 유물을 포함해서, 말을 타는 사람들의 물품이 대량 출토됐다. 이들 고분엔 대량의 철제 무기(칼, 창, 갑옷, 화살촉, 투구 등)와 금동관, 회색의 경질토기, (사슬 달린) 금 귀고리, 세련된 금동제 관, 혁대고리, 노리개, 신발, 잎 모양 등을 한 작은 금제품들, 옥 귀걸이, 동경, 구슬 등과 같은 개인 장신구, 식기류, 그 외에 사후 저 세상에서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 다양한 물품들이 묻혀있었다. 그들은 또, 철제 농기구와 (화살 통, 말 안장, 배, 전사, 짐승, 남자와 여자, 의복, 두건 등 형상의) 점토로 만든 하니와(토용, 埴輪) 등을 분묘 내부와 주변에 묻었다. 5 

Egami(1964: 52)는 이 모든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쌀 농사를 짓던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토착적 발전과정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야요이 사회 스스로, 자신들 전통 문화의 기본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정도로 외부 문화를 의도적으로 수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전환은,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했음을 반영하는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후기 고분시대 문화(대략 375-675)는 야마도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난 백제사람들이 370-390년 사이에 일본열도를 정복했고, 오오진이 야마도 왕국 시조로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며, 정복이 시작된 시점과 정복자들이 거대한 무덤에 마구류와 함께 매장된 시점과의 사이엔 얼마 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후기 고분시대의 개시는 오오진과 그 아들 닌토쿠의 거대한 무덤으로 상징된다.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서 평지에다 흙을 쌓아올려 거대한 분묘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전방후원형, 혹은 원형이었고, 분묘 주위는 둑을 쌓고 해자로 둘러쌓다. Barnes(1993: 227)는 “횡혈석실분은 백제 지배층이 5세기 초 일본열도에 도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Kidder(1985: 121)는 “5세기 중반 이전의 모든 마구류는 외국에서, 즉 한반도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Farris(1998: 78-79)는 “초기의 마구류는 간단한 투-피스 말 재갈과 철과 나무로 만든 말 등자 등인데, 이들 모두 북큐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건너왔음을 시사한다. 5세기 전반엔 몇 개의 말 안장 조각들과 함께 원시적인 마구류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데, 이들 대다수는 아마도 한반도에서 만든 제품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Mizuno에 의하면, [후기 고분시대에] 이런 거대 분묘들의 출현은, 수많은 전통적 공동체들이 하나의 강력한 지배자 아래 통일됐음을 의미하며, 또 새 지배자가 피정복자들 마음 속에 경외감을 심어, 신생국가의 절대적 지배자로서 피정복자의 복종을 받기 위해 그처럼 거대한 분묘를 세웠음을 의미한다. 6 Barnes(1988: 16)는 “팔찌와 청동 거울 같은 의례적인 품목들이, 보다 실용적인 도구와 무기로 바뀐다는 것은, 5세기 지배층의 위상과 세력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일본열도의 고분 발굴물을 분석해 보면, 각종 철제품, 철 덩이, 대장간 도구들을 위시해, 경첩과 대갈못을 사용하는 새로운 철공법, 어려운 모양을 단조하는 능력을 시사하는 물증 등이 5세기가 시작되면서 극적으로 늘어난다. Barnes에 의하면, 아리야마 고분(오오진 능의 부속묘) 한 개에서만, 철로 만든 검과 각종 철제 도구가 3,000점 이상 나왔다. 7  

새끼줄 문양의 조몽토기와 민무늬의 야요이 토기가 각기 전 단계의 시대들을 대표하듯, 경질의 스에키 토기는 후기 고분시대를 대표한다. Kidder(1985: 103-4)는, 스에키가 애초에 한국 제품이었고, 이 경질토기가 일본열도에 등장하는 것은 마구류가 고분에서 출현하는 시점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일본열도에서 가장 오래된 스에키가 굽는 가마와 함께 큐슈의 후쿠오카현(縣)에서 발굴됐는데, 이들은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Barnes에 의하면, 스에키는 옛부터 조선-토기라고 계속 불러왔는데, 바로 얼마 전인 1950년대에 와서 일본사람들이 새삼 8세기 만요슈(萬葉集)에서 그릇을 지칭하는 스에라는 표현을 택해 스에키라 부르기 시작했다. 8 후기 고분시대 300년을 대표하는 유물을 계속 "조선 토기"라 부른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9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 급작스런 사건에 의한 것인가 혹은 점진적 진화 과정의 산물인가?

Egami의 기마민족설을 증오하는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Edwards(1983)가 쓴 논문 한 개를, Egami는 물론 Kidder와 같이 훌륭한 고고학자의 연구결과를 모두 불신해 버리기에 충분한 근거로 간주한다. Edwards는 마구류 존재의 고고학적 증거가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보다 “5세기 말”에 실제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는 절대로 급작스레 발생한 게 아니라, 아주 점진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오히려 Egami가 초기와 후기의 유물 사이에 무슨 커다란 단절이나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야기했다고 비난했다. 1983년 Edwards의 논문이 나타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주장은 아주 몰비판적으로 수용되고, 그의 말은 열광적으로 되풀이됐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Farris(1998: 78-9)는 “마구류는 4세기 중엽, 혹은 말엽의 정복이라는 사건과 관련시키기엔 너무나 늦게 나타날 뿐 아니라, 일본열도에서의 마구류 확산은 매우 점진적이었다”고 주장한다. 10 이제, 많은 학자들이 몰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그 Edwards 논문의 핵심 내용을 검토해 본다. 

Edwards(1983)는 Egami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137개 고분의 고고학적 자료를 표로 만들어 제시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Edwards가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연출한 자료 표를 나 같은 사람이 보면, 오히려 Egami의 2분법을 정당화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Edwards는 Egami와 정반대로, 중기 고분시대(대략 375-475)는 초기(대략 300-375)와 합쳐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기의 그 거대 고분들이 상징하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기마민족의 정복이라는 “사건”에서 파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Egami를 반박했다.  

Edwards 자신이 직접 정리해서 제시한 고고학적 자료 자체를 검토해 보면, 대략 “5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대륙적”(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일본식 표현) 유물이 발굴된 여러 개 고분들이 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dwards는, 고분 부장품들이 “현저하게” 대륙적 성격을 띠는 것은 “5세기 중반 이후”며, 따라서 오오진의 능이나 닌토쿠의 능은 기마민족의 능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Edwards는 자신이 5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 대륙적 문물의 유입이 실제로는 4세기 중에 발생했을 수도 있고, 따라서 4세기 역사의 틀에 연관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Edwards는, 어찌되든 간에 오오진과 닌토쿠의 능을 포함하는 모든 전통적인 중기 고분들은 대륙적인 문물 유입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중기 고분들은 기마민족의 성격을 띤 마구류나 어떤 다른 두드러진 대륙적인 요소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11  

그러나 전통적 중기(대략 375-475) 고분들의 기마민족적인 성격과, Egami가 말하는 초기(대략 300-375)와 후기(대략 375-675) 고분들 사이의 단절 현상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난 일본서기와, Barnes, Kidder, 그리고 Farris의 연구 결과에서 그 증거들을 찾는다.

첫째, 일본서기의 유랴쿠(雄略)조에는 오오진 능에 말 모양의 하니와가 있었다는 얘기가 적혀있다. 즉, 햐쿠손이라는 사람이 출산한 딸 집에 갔다가 말을 타고 밤에 귀가하던 중, 오오진 능을 통과할 무렵, 붉은 색 말을 타고 자신의 점박이 말을 따라잡아 쏜살같이 앞서 가던 사람이 되돌아와, 말을 교환하자고 말했다. 햐쿠손은 기쁜 마음으로 말을 교환했다. 그는 집에 돌아와 그 준마를 마구간에 넣고 잠이 들었다. 그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놀랍게도 그 붉은 색 말은 흙으로 빚은 하니와로 변해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니, 자신의 점박이 말이 오오진 능의 (말 모양) 하니와들 사이에 매여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12 

두 번째, Barnes에 의하면, 1872년 닌토쿠 능의 한 귀퉁이가 흙 사태로 무너져내려, 수혈식 석실의 일부가 드러났다. 그 닌토쿠 능에서 출토됐다는 철제 갑옷과 무기류, 청동 장신구, 청동 거울, 원형 고리 칼, 말방울 등이 보스턴의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13 Kidder(1985: 102-3)는, 천황 능의 발굴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 유물의 보존은 정말 뜻밖의 행운이라면서, 닌투쿠 능에서 나왔다는 조그만 말방울과 말 머리 모양의 하니와는 바로 기마민족적 특성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고 말한다. 

세 번째, Kidder(1985)는 기마민족적 성격을 가진 고고학적 물증만을 특별히 한데 모아 그 목록을 작성했는데, 이들은 모두 “5세기 초” 야마도 왕국의 오오진-닌토쿠 시대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고분들에서 발굴됐다. 마루야마 고분(오오진능의 부속능)에서 발굴된 금동 장식 안장, 닌토쿠 능에서 발굴된 청동 말방울과 말 머리 모양 하니와, 료오난 유적지에서 발굴된 2개의 목제 안장과 땅딸막한 말 모양 하니와, 그리고 리츄(履中) 능의 부속능에서 발굴된 안장, 재갈, 등자, 청동 고리 등이 목록에 들어있다. 14 금은 8세기가 될 때까지 일본열도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철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로부터의 공급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6세기 후반까지 일본열도에서는 철의 생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Farris(1998: 71-73)는, 일본에 있는 모든 유형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철의 양이 5세기 초에 극적으로 늘며, 6세기 사철(砂鐵)이 발견될 때까지는 이들 철 거의 대부분의 공급원이 한국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6세기 후반 사철이 발견되기 이전 일본열도에서는 철의 생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철은 가야 혹은 백제로부터 덩어리 형태로 수입한 것이다. 15 Farris는 “초기 일본사회가 철, 철제 무기, 각종 철제 도구, 철을 만드는 기술자 등을 한반도 남부 국가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사실엔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Edwards 자신도, 대륙의(즉, 한반도의) 선진적 측량술과 건축술이 없었다면 중기의 거대 고분들은 축조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Kobayashi(1955)의 주장 뿐 아니라, 중기 고분들에서부터 철제 유물의 숫자가 극적으로 늘었음을 지적한 Mori(1965)의 주장을 인용한다. 16 그러나 놀랍게도, Edwards는 기내(畿內)지역에서 출현한 토착세력이 먼저 한반도를 침입해 철을 얻어가고 돌아와서, 그 철로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일본을 통일했다는 Inoue(1960)의 주장을 인용하고 만다. 17

Egami(1964: 51)는 “(정복활동을 수행할 만한 군사적 요소가 없는) 초기 고분시대 일본열도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무장이 훨씬 잘 된 그곳 사람들을 정복하는데 성공하고, 거기서 기마민족 문화를 배양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통일을 했다는 발상은, 역사의 일반적 법칙에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9 (2005. 6. 4.) 
정리: 강현사 박사  

 

10. 후기 고분시대를 전개한 백제사람들 이주 물결의 '타이밍'

  •  홍원탁
  •  승인 2005.06.10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Timing of the Kofun Wave from Paekche

 

소(小)빙하기의 종결과 더불어 장기간 발생한 극심한 한발로, 4세기 초, 한반도 남부 사람들은 새삼 일본열도의 그들 먼 친척과 합류하려 했을 수 있다. 가야 사람들의 새로운 이주 시도는 초기(300-375) 고분문화의 전개와 일치한다. 다른 한편, 한강 유역의 백제 사람들은, 남서쪽의 마한을 정복하고(369년), 그 일부는 4세기 말경 일본열도로 건너가 후기(375-675) 고분문화를 전개했다. 대규모 인공 저수지와 U자형 철날을 둘러씌운 나무 쟁기, 삽 등을 사용하는 백제의 선진 농경기법 덕분에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대량의 노동력이 전통적인 논 농사로부터 방출돼 거대 분묘를 건설하는데 동원될 수 있었다. 타타라-부키 초기 형태의 철 생산 방법은 일본열도에서 6세기 후반 사철(砂鐵)이 최초로 발견됐을 때 도입된 백제(石帳里식) 제철공법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후기 고분시대를 전개한 백제사람들 이주 물결의 “타이밍” 

왜 4세기 말인가? 

홍원탁(서울대 교수)

백제로부터의 고분시대 이주(移住) 물결의 타이밍  

 

난 대략 기원전 400년경 갑작스레 출현한 소(小)빙하기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변한(가야)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좀 더 비가 내리는 땅을 찾아 바다를 건너가도록 했다고 한반도로부터의 “야요이 이주 물결”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일본열도에 (후기) 고분시대를 전개한 백제 사람들 이주 물결의 “타이밍”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4세기 말 백제 사람들이 갑작스레 대한해협을 건널 생각을 했는가? 근초고왕이나 호무다 같은 정복자의 출현이 순전히 역사적 우연인가 혹은 어떤 환경변화의 산물인가? Ledyard(1975)의 주장보다 좀 더 한국 역사와 일관성이 있는 인과관계를 설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검증해 볼 수 있는 가설은 아니지만, 난 백제 사람들 이주 물결의 타이밍에 대해 일종의 동기를 제시하고자 한다.  

 

소 빙하기의 여파로 전염병의 만연, 혹은 극심한 가뭄 같은 재앙의 원인이 되는 기상조건의 불규칙성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1 Lamb(1995: 168)에 의하면, 지중해 연안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AD 300-400년 사이와 AD 800년경 전후 시기 등, 2차례에 걸쳐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고, 그 극심한 가뭄은 정교한 수리시설을 이용해 농사 짓던 농경지대를 황폐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또 이 같이 급격한 기후 변화는 한강 유역의 백제 농부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줬을 수 있다. 2  

 

다음은 백제에서 발생한 한발과 기근에 관한 삼국사기 기록이다. 3 316년 봄, 한해가 있었다. 321년 7월, 사막의 메뚜기 떼가 날아와 농작물에 피해를 줬다. 331년 봄과 여름, 한발이 너무 심해 강이 말랐고, 흉작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380년, 전염병이 창궐했다. 382년,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봄에 혹독한 한발이 있었고, 굶주린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팔았다. 386년 7월, 서리가 내려 농작물에 피해를 줬다. 402년 여름, 혹독한 한발로 벼가 말라 죽자 백제 왕이 기우제를 지냈다. 신라본기도 302년, 313년, 317년, 372년, 381년, 397년과 401년에 한발과 기근이 있었고, 또 389년 7월과 399년엔 사막의 메뚜기 떼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소 빙하기 종결과 더불어 장기간 발생한 극심한 한발로 인해, 4세기 초, 한반도 남부 해안의 가야 농부들은 새삼 일본열도의는 그들 먼 친척과 합류하려는 이주 시도를 했을 수 있다. 이 가야 사람들의 새로운 이주 시도가 (대략 300-375년간의) 초기 고분문화의 전개와 일치했을 수 있다. 다른 한편, 전투적인 백제 지배자들 영도 하에 보다 혁신적 한강 유역 농부들은, 한반도 남서쪽의 마한을 정복하고(369년), 일부는 4세기 말경 일본열도로 건너가 (대략 375-675년의 300년 간) 후기 고분문화를 전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진 농경기술이 한반도 남부에서 보다 높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고, 특히 따뜻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일본열도에서는 훨씬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정확히 예상했을 수 있다 

 

거대한 분묘의 조성: 후기 고분 문화  

 

일찍이 한반도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들어간 변한(가야) 사람들은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원주민들과 함께 쌀을 재배하는 야요이 시대(BC 300-AD 300)를 전개했다. 4세기 초, 가야 사람들의 새로운 유입과 동시에 야요이 사람들은 최신식의 가야 고분을 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만들기 시작해, 초기 고분시대를 전개했다. 4세기 말, 일본열도에 건너온 백제의 정복자들은 원주민들 매장 풍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로운 지배자들은 평지에다 극적으로 과장된 거대 분묘를 조성해, 주위에 해자를 파고 흙으로 둑을 쌓아 둘렀고, 작은 부장 묘들을 만들어 제사용 부장품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 어떻게 그리 거대한 규모의 분묘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기원전 400년경 시작한 소 빙하기는, 급기야 가야 사람들이 보다 따뜻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을 찾아 바다를 건너도록 유도했다. 한반도 남부에서 쌀 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남쪽 큐슈로 이주하는 방식으로, 갑작스런 기후조건의 변화로 야기된 생존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반면, 기장-보리 경작지대 경계선 바로 아래인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에서 쌀을 재배하던 농부들은 (눈 앞에 남쪽 나라 큐슈를 그저 쳐다만 보며 1,000년 이상 살아온 가야 사람들과 달리) 시간이 걸리지만 새로운 기상조건에 적합한 종자를 개량한다거나,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길고 깊게 파서 강물을 끌어들이며, 나무 쟁기나 가래 끝에 U자형 철날을 둘러 씌워 (늪지나 강물에서 멀리 떨어진 고지대의) 단단한 땅을 새로 개간해, 한발이라는 기후조건 변화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일본열도의 야요이 농부들은, 한반도의 가야 친족들처럼, 천연 늪지에 배수로를 만들어 논농사를 짓거나, 혹은 늪지대 주위 저지대의 마른 땅에다 (비로 인해 1년 내내 물에 잠겨있는) 천연 늪지대의 물을 끌어들여 쌀을 재배했다. 4 그러나 백제 농부들은 대규모 인공 저수지와 깊은 수로를 체계적으로 만들어 이용하고, 날카로운 철제 낫이나, U자형 철 덮개를 씌운 나무 쟁기, 가래, 괭이 등을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선진 농경 기법을 일본열도로 갖고 왔다. 5

 

기원전 400년경 철기시대가 시작하면서, 요동지역 전체와 한반도의 청천강 이북에서는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에서는 기원전 1세기까지 대부분 목제 농기구를 사용했고, 철제 낫은 AD 1세기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6 

 

목제의 가래, 괭이 끝 부분에 U자형 철날을 둘러 씌우는 기법은 춘추시대(기원전 722-481) 말 초나라에서 출현해, 중국 북부로 퍼져나가 결국 한반도로 들어왔다. 1세기 초 U자형의 쇠날이 한반도 북부에 출현했, 3세기에 와 남부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한반도 중부 백제 지역에서 나타났고, 마침내 보다 남쪽인 신라와 가야지역으로 퍼졌다. 한반도 중부의 농부들이 다양한 새로운 철제 농기구와 관개용 저수지를 이용하기 시작하는 등, 농경 기술의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은 3-4세기 기간 중 이다. 한강 유역에서는 농기구 형태의 토착적 혁신이 있었다. U자형 쇳날을 붙인 삽 또는 쟁기가 4세기 백제 유적지에서 발굴된다. 7 신라는 쟁기의 사용이 약간 늦은 편 이다. 8 

 

일본열도에서는 U자형 쇳날을 둘러 씌운 삽과 괭이가 후기 고분시대(5-8세기) 유적지에서만 발견되고, 야요이 혹은 초기고분 시대 유적지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9 목제 농기구에 쇠날을 부착해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일본열도에 들여온 것은 “4세기” 백제 사람들이다. 목제의 삽이나 괭이에 U자형 쇳날을 부착하면, 깊이 삽질할 수 있기 때문에, 관개용 저수지 및 도랑들을 보다 깊게 팔 수 있고, 댐을 쌓기 위해 좀 더 많은 흙을 퍼올릴 수 있으며, 굳은 땅의 토지도 쉽게 개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천연 늪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땅들도 논 농사에 활용할 수 있다. 한편, 대규모의 관개용 저수지는 고지대의 비옥한 땅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유난히 호무다와 그 아들 닌토쿠 치세 때, 둑과 저수지, 관개 용수로가 대대적으로 축조된 사실을 기록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오오진(호무다)이 (396년경)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관개용 저수지를 건설토록 한 다음, (고사기에 의하면) “백제지(百濟池)”라고 이름지었다. 일본서기는 오오진 11년(400년경)에 4개의 저수지를 더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닌토쿠 11년 엄청난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고, 광범위한 수로 시설과 함께 마무타라는 거대 제방을 축조했다고 말한다. 고사기에 의하면, 닌토쿠는 백제에서 건너온 하다 씨족을 시켜 또 다른 수로와 저수지 2개를 추가로 건설케 했다. 10 

 

Farris(1998: 82)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보면, 5세기 초~중엽 사이에 일본열도 주민들이 이 모든 아이디어들을 자신들 환경에 응용키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철제 호미와 삽들은 대부분 북(北)큐슈, 오카야마, 그리고 특히 키나이(畿內)의 고분들에서 발견됐고, 이들은 한반도의 원형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Farris는 또, “학자들은 오사카 후루이치 지역에서, 야요이 농부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수로를 판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백제의 선진 농경기술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대량 노동력이 전통적 논 농사로부터 방출돼 거대 분묘를 건설하는데 동원될 수 있었다. 11 저수지와 수로를 깊이 파고, 대량의 흙을 퍼올려 제방을 쌓으면서 축적한 기술은 곧바로 거대 분묘를 만들고 해자를 두르는데 적용됐다. 새로운 영농 기술은 많은 수의 새로운 지배층과 관료들, 군인들, 기술자들, 땅 파는 인부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잉여 농산물을 생산했고, 이들 모두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고분 문화”라 부른다. 

 

백제에서 전래된 제철기술 
 
야요이 시대에도 철덩이를 한반도 변한 지역에서 수입해 철제품을 만들어 사용했지만, 각종 철제 기구와 무기들을 본격적으로 대량 사용하는 것은 4세기 말 이후다. 그러나, Peter Bleed(KEJ, 1983: 3.332)는, 일본열도에서 철 생산 자체가 6세기까지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초기 형태의 타타라-부키 제철기술은 일본열도에서 6세기 후반 사철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 도입한 제철공법이다. 12 일본열도에는 철광은 아주 희소하지만, 사철은 풍부하게 발견된다. 6세기 말 이전엔 철괴가 백제와 가야에서 수입됐다. Leonard Lynn(KEJ, 1983: 7.348)은, 제철 공정에서 손-풀무를 사용한다는 발상은 한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말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鎭川郡 德山面 石帳里)에서 3-4세기 경에 해당하는 제철과 관련된 유물과 유구가 7개 장소에서 발굴됐다. 제련로(製鍊爐), 정련(精鍊)로, 용해(鎔解)로, 단야(鍛冶)로 등이 석장리 일대에서 발견된 사실은, 제련-정련-단야 등 일련의 종합 철생산 공정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백제에서는 제철과 철가공이 이미 3-4세기경에 확립됐음을 의미한다. 13 이 유물들을 보면, 6세기 말 이후 일본열도에서 사용된 제철 공법이 (“일본 고유”의 방법이 아니라) 석장리에서 발견된 옛 백제 공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일본열도의 제철공법은 (일본 학자들의 가장 즐겨 쓰는 어법인) “중국으로부터-한국을 거쳐” 전해진 게 아니라, 백제에서 전래된 것이다.  

 

일본열도에서는 698년 혹은 701년 이전엔 금의 생산이 없었고, 697년 혹은 708년 이전엔 동(銅)의 생산이 없었고, 6세기 후반 이전엔 철의 생산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의 제련은 속일본기 698년 조에 나오는데, 대마도에서 금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다이호(大寶) 원년은 701년이다. 동의 생산은 속일본기 697년 조에 처음 나오는데, 무사시에서 동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와도(和銅) 원년은 708년이다. 사철은 6세기 말에야 발견 되는데, 일본서기 642년 조를 보면 소가 대신이 백제 왕자에게 철괴 20개를 선사한 기록이 나온다. Farris(1998: 73)가 철과 관련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처럼, 야요이와 고분시대에 걸쳐 일본열도가 금, 동, 철 모두를 가야와 백제에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의 의미는 정말로 심오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0 (2005. 6. 11)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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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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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ontackHong.pe.kr  

 

[각주] 

1. 지구학자 Ruddiman(2003)은 소 빙하기가 끝난 직후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고 말한다.

2. Lamb(1995: 159)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생존의 터전인 목초지가 말라버리자 야만족들과 새삼 떠돌이 신세가 된 종족들이 연쇄반응을 불러일으켜 이들을 서쪽 유럽으로 향해 이동케 만들었고, 결국 로마제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Huntington의 견해를 인용한다. 400BC- 300AD 에 걸친 소 빙하기의 종결은, 동방에서는 한족 제국들이 멸망하고 5호16국 시대(304-439)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며, 서방에서는 초원지대에서 야기된 연쇄반응이 훈족의 침입(375)으로 이어져 로마제국이 양분(395)되고, 급기야 서로마제국의 몰락(476)으로 이어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소 빙하기가 끝나자, 북반구 북위 35° 아래 대부분 지역이 따뜻해졌으나, 적도 부근에서 형성된 비구름의 북방 이동이 미약해져, 극심한 한발에 시달렸다. 이 시기는 중남미에서 마야문명이 번성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즉 한쪽 사람들에 대한 저주는 다른 쪽 사람들에겐 축복이었다.

3. 삼국사기는, 대략 293-342년 기간 중, 모용 선비와 퉁구스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쟁을 기록한다. 그래서 Farris(1998: 77)는 “말을 전투에 처음 사용한 한국 사람은 선비와 싸웠던 고구려 군사들”이었고, 이 과정에서 말등자를 사용하는 새로운 기술이 보급됐다고 말한다.

4. Imamura(1996: 134-5) 

5. “낫”은 옛 한국말로 “나스”였는데, 여기서 옛 일본어인 “나타”가 유래된 것 같다. 하리마 풍토기엔 백제로부터 도래한 아야씨족 사람들이 이주해 와 아야베라는 마을을 만들어 정착하고, 이 지방 사람들에게 최초로 풀이나 곡식을 벨 때 쇠로 날을 만든 낫의 사용법을 가르쳐줬다는 내용의 기록이 나온다. 

漢部里... 漢人等 到來居於此處 故號漢部... 伊和里  所以號手刈丘者... 韓人等始來之時 不識用鎌但以手刈稻 故云手刈村(F: 268-70)  

당시엔 쇠붙이를 다루는 대장간 일을 한반도를 지칭하는 가라(韓)의 가누치(鍛)라고 불렀다.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에 의해 철제 무기와 각종 철제 농사기구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후기 고분시대가 전개됐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6.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NRICP, 2001: 226-7)는 한국 농업사 전문가들의 최근 연구 성과를 요약했다.(J. H. Kim, 2000; H. H. Lee, 1998; K. E. Kim, 1987; and K. K. Chee and S. M. Ahn, 1983).

7. Farris(1998: 81-82) 참조. 

8. U자형 쇳날을 둘러 씌운 삽과 괭이와 개량된 다른 농기구들이 통일신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 20세기 중반까지 한국 농부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9. Barnes(1993: 187) 참조. 

10. 亦新羅人參渡來 是以... 命引 率 爲役之堤而作百濟池(K:248)  
應神七年 高麗人百濟人任那人 新羅人並來朝 時命… 領諸韓人等作池 因以名池號韓人池(NI: 367)
應神十一年 作劒池 輕池 鹿垣池 廐坂池(NI:369) 
仁德十一年 掘宮北之郊原引南 水以入西海 因以號其水曰堀江 又將防北河之澇 以築茨田堤 是時 有兩處之築而乃壞之難塞時 天皇夢有神誨之曰… 二人以祭於河伯 必獲塞則筧二人而得之 因以禱于河神(NI: 395)  
又役秦人作茨田堤及… 又作丸邇池 依網池 又掘難波之堀江而通 海 又掘小椅江…(K: 266)

당시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판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신라 사람들이 영천(永川)의 저수지를 수리하고 난 다음 세운 청제비(菁堤碑)를 보면 이런 관개시설 공사가 얼마나 거창한 사업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신라 제방은 536년 건설돼, 798년 수리됐다. 수리 작업은 2월12일부터 4월13일까지였는데, 그 기간 중, 도끼질 하는 기술자 136명, 법공부(法功夫, 촌락을 기반으로 해 조직된 法幢 소속 군인) 14,140명, 그리고 주변의 절화(切火, 영천)군과 압량(押梁, 경산)군에서 잡역부 [...] 여명 등을 동원했다 

永川 菁堤碑 貞元十四年… 堤傷故… 了治內之 都合斧尺 百卅六 法功夫 万四千百卌人 此中 典... 角助役 切火[永川]押 [梁]二郡 各□人尒起使內之節...(韓國古代金石文二: 30-31)

11. 쌀 생산의 급속한 증대는 인구의 빠른 증가를 의미한다  

12. “타타라”는 발-풀무(踏鞴, ふみ-ふいご), 부키(후키)는 바람을 불어 넣는다(吹き)는 뜻이다. 타타라라고 부르는 노(爐) 내부에 사철(砂鐵)과 숯을 넣고 풀무로 바람을 불어넣어 가열한다. 노의 바닥에 쌓아놓은 숯으로부터 불이 타오른다. 노 안으로 불어 넣는 바람으로 내부 온도가 올라 사철이 스펀지 모양의 단단한 철 혹은 연철(鍊鐵)로 전환된다. 이따금 하부에 설치된 관으로 쇠찌꺼기가 배출된다. 마지막으로 노를 깨, 바닥에 고인 철을 꺼낸다. 소위 타타라 공법의 변형은 일본열도에서 19세기 말까지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Makino Noboru(KEJ, 1983: 3.332-3) 참조. 

13. 석장리 유물을 보면, 좌우 6.4x6.0미터(m) 크기의 구덩이를 판 다음, 바닥에 점토와 목탄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2개의 장방형(相形) 노를 설치했다. 2개의 노 중 큰 것은 제철로고, 작은 것은 제철 다음 단계의 공정을 위한 노다. 석장리 원형로의 지름은 1.0m 정도며, 점토로 노 벽을 만들고, 경사면 아래쪽으로 철찌꺼기를 배출하는 관을 부착했다. 철광석과 사철 모두 원료로 사용했고, 제련시 용융점을 떨어뜨리고, 탄소 함량을 낮추기 위해 석회석을(조개 껍질, 짐승 뼈 등 석회 물질 등도)사용했다. 용해로에서는 쇠도끼 머리 거푸집 조각(鐵斧范芯片)이 발견되거나, 슬래그가 극소량만 발견됐다. 단야로에서는 단조 철조각(鍛造剝片)이 발견됐다. NRICP(2001: 641-2) 참조.

 

 

11. 소가 대신을 포함해 모두들 백제 옷을 입고…

  •  홍원탁
  •  승인 2005.06.14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They, Including Minister Soga, Appeared Wearing Paekche Clothes

 

Kidder는 다카마쓰즈카(高松塚)의 벽화를 보고 “입고 있는 옷을 보면 명백히 한국 여자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부상략기(扶桑略記)에 의하면, 593년 1월15일, 법흥사(法興寺) 사탑 초석에 사리를 안치하는 행사를 할 때, 소가(蘇我) 대신을 비롯해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나, 보는 이들을 매우 즐겁게 해줬다. Kidder는 스슌(崇峻) 천황의 능으로 추정되는 후지노키 고분에서 나온 유물들이 백제 유물, 특히 무령왕릉에서 나온 부장품들과 매우 유사하며, 그 유물 대부분이 실제로 백제에서 왔을 것이라고 믿는다. Farris는 고분시대 전반에 걸쳐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 유입된 각종 도구와 물자, 생산 기술, 종교, 통치조직 등을 요약하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고분 문화를 형성하는데 원천적인 씨앗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Kiley는 우지-가바네(氏姓)와 베(部)제도가 모두 백제로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말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소가 대신을 포함해 모두들 백제 옷을 입고…  

백제 사람들이 이룩한 후기 고분시대 문화  

 

홍원탁(서울대 교수) 

 

가야(가락)와 백제: 두 개의 다른 이주 물결의 주역들 

 

김기웅(1986)은, 언덕 위에 위치한 수혈식 석실의 초기 고분들은 3세기 혹은 4세기의 가야 고분과 일치하지만, 평지에 위치한 횡혈식 석실의 후기 고분들은 백제 고분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초기 고분에서 발굴된 장식품들은 가야 고분에서 발견되는 부장품들과 유사하지만, 후기 고분에서 발굴된 장식품들은 백제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또,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철제 등자는 3-4세기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본열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등자는 대부분 5-6세기 것이라 한다. 1 

 

Oka Masao에 의하면, 알타이어 계통의 친족을 의미하는 (퉁구스 방언의 친족 무리를 의미하는 “샤라”에 어원을 두고 있는) “카라”라는 낱말은 야요이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열도에 도입됐고, (한국어의 “친족 무리”를 뜻하는 “울,” 퉁구스어의 “자손”을 뜻하는 “우루”를 의미하는) 또 다른 낱말인 “우지”는 4세기 알타이 왕족문화와 함께 도입됐다. Masao는 한반도로부터 명백히 다른 2개의 이주 물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2  

 

3세기 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변한 12개 나라 남녀들이 왜인들과 매우 가깝게 지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문신을 한다고 말한다.3 그러나 7세기 초 편찬된 양서(梁書)는 백제가 야마도와 가깝기 때문에 많은 백제 사람들이 문신을 한다고 말한다. 4 일본열도에 600년 야요이 시대를 전개한 게 변한(가야)사람들이고, 야마도 왕국을 세워 300년 후기 고분시대를 전개한 게 백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중국 사서에서 이렇듯 미묘한 표현상의 차이를 보여준다.

 

키다바다케 치카후사(1293-1354)는, 이른바 야마도 왕국 남북조시대 때(1331-1392) 남조의 정치적.사상적 지도자였다. 그는 1343년 역사책을 한 권 저술했는데, 오오진(應神) 조를 보면, “옛날 일본 사람들은 삼한 사람들과 같았다”고 주장한 책들은 모두 간무(桓武, 781-806)때 소각됐다고 기록했다. 5  

 

현대 역사가들은 키다바다케가 이런 얘기를 왜 특별히 오오진 조에서 말했을까 관심을 갖고, 또 스스로 왜 그랬을까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마땅할 것이다. 

 

복식의 급격한 변화 

 

후기 고분시대에 들어와, 복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일본서기에 묘사된 아마데라스와 삼국사기에 묘사된 고이왕처럼, 상당히 많은 수의 (남자 형상) 하니와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다. 6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오오진 치세 때 백제로부터 재단사가 도래했다고 기록한다. 7 이춘계(1991: 741)는 중국 역사책들이 초기(야요이 때)엔 한반도와 일본열도 복식의 상이점을 기록하고, 후기(고분시대)엔 양자의 유사성을 기록한 사실에 주목했다.

 

북사(北史)는 [후기 고분시대에] 일본열도의 남녀가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는데, 남자 저고리의 소매가 매우 작고, 여자 치마는 가장자리로 (주름) 선이 둘려져 있다고 말한다. 8 여기서 북서는 “예전엔” 바느질을 하지 않은 가로 폭의 천을 그대로 연결해 입었다고 특별히 언급했다. 정말 위서 동이전은 [야요이] 왜인들이, 남자는 바느질도 안한 가로 폭의 천을 단순히 묶어 연결시킨 옷을 입고, 여자는 (홑이불 모양) 넓은 천 한복판에 구멍을 뚫고 머리를 넣어 입었다고 기록했다. 9

 

다카마쓰즈카(高松塚)고분 벽화를 보면, 여자들이 길고 테 두른 저고리와 주름 잡은 치마를 입고 있다. Kidder(1972)는 “이 여자들이 입은 옷을 보면 명백히 한국 여자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북사, 주서(周書), 수서(隋書)에 의하면, 백제 남자들 복장은 고구려 남자들 복장과 흡사해, 모두 양쪽에 새털을 꽂아 올린 모자를 쓰고 있고, 백제 여자들은 치마 위에 넓은 소매가 달린 웃 저고리를 입었다. 

 

주서는 백제 처녀들은 뒤로 머리를 땋아 묶어 올리는데 한 다발은 장식으로 늘어뜨렸으나, 부인들은 2개의 다발로 묶어 올렸다고 말한다. 북서도 백제 처녀들은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렸으나, 부인들은 2갈래로 머리를 엮어 틀어 올렸다고 말한다. 수서에서도 유사하게 기록해, 백제 처녀들은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렸으며, 부인들은 머리를 2갈래로 나눠 위로 틀어 올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북사나 수서나 고구려 여인들이 머리를 땋아 늘어뜨렸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북사에 “뒤로 늘어뜨렸다”는 서술은 특이하게 백제 여인들에게만 쓰였다. 우리가 다카마쓰즈카 고분 벽화에 나온 여인들 머리 모양을 보면, 그녀들이 수서와 주서에 묘사돼 있는 백제 여인들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음이 명백한 것이다. 그녀들 머리 모양은 5세기 고구려 고분에 나타나 있는 시녀들 머리 모양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10 

 

일본서기에 의하면, 593년 1월15일, 법흥사(法興寺) 사탑 초석 속에 부처님 사리를 안치했다. 부상략기(扶桑略記)의 스이코(推古) 조에는 당시 소가 우마코(蘇我馬子) 대신을 비롯해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나, 보는 이들이 매우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11 쇼소인(正倉院) 연구부장 세키네 신류는 옛날 복식 60벌을 분석하고 나서 고대 한국과 일본의 복식은 똑같다(渾然一體)고 말했다. 12  

 

후지노키(藤ノ木) 석관 

 

후지노키 고분의 석관은 1985년 말~1986년 초 사이에 발굴됐는데, 개봉은 1988년 말에야 이뤄졌다. 사체는 20-30대로 보이는 (이장을 한) 남자 1명과 (연령 미상) 여자 1명으로 확인됐다. (구슬들은 덩어리로 세어서) 약 10,000여 점의 유물들이 나왔는데, 금동관, 물고기 모양의 장식물이 달린 2쌍의 금동 신발, 2쌍의 두텁게 도금한 동 귀걸이, 2개의 은장도가 안에 부착된 청동 혁대, 416개의 금 펜던트, 반 원통형으로 된 한 쌍의 금동 발 보호대, 4개의 동경, 5개의 칼, 회갈색을 띤 47개의 의례용 경질 토기 등이 포함돼 있었다. 아울러 상당히 많은 양의 마구류가 석관 뒤의 석실바닥에 쌓여있었다. 또 1000개 정도의 철갑 조각과 철 화살, 화살촉이 나왔다. 13

 

청동 거울 한 개엔 “동경 소유자의 후손이 번성하기를”이라는 의미의 3개 글자(宜子孫)가 새겨져 있는데, (523년 사망한)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동경과 똑같다. Kidder는, “일본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금동관은 한반도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Kidder는 후지노키 고분에서 나온 유물들이 백제 유물, 특히 무령왕릉에서 나온 부장품들과 매우 유사한데, 그들 유물 대부분이 실제로 백제에서 왔을 것이라고 믿는다.  

 

Kidder(1989)는 후지노키 고분이, (626년 사망한) 소가 우마코에게 암살당한 성덕태자의 삼촌인 스슌(崇峻, 587-92)의 능인데, 도쿠가와 혹은 명치시대 때 천황릉이 아닌 것으로 분류를 잘못해 본의 아니게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라고 말한다. 호류지(法隆寺)의 부속사찰 소겐지(宗源寺)의 오래된 나무함 속에서 엔포 7년(延寶, 1679)의 문서가 발견됐는데, 이 둔덕을 스슌 천황의 능산(陵山)이라고 명확히 언급했다. Kidder는 그 둔덕이 스슌의 능이라고 말하는 문서들이 1872년까지 발견됐으며, 어릉(御陵)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초까지 쓰였다고 말한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문물의 항목들 

 

Farris(1998:68-70)는 고분시대 전반에 걸쳐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 유입된 각종 도구와 물자, 생산 기술, 종교, 정치제도 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본래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원형 그대로 일본열도에 유입된 것으로, 철괴, 철제품을 만드는 기술, 갑주, 철제 화덕, 청동 방울, 조정에서 사용하는 각종 칭호와 성씨들, 지방제도, 농경지 측량법, 산성(山城) 축조 기술 등이 있다. 

두 번째로,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한반도에서 변형됐거나 개량돼 일본열도로 건너온 것으로, 환두대도(둥근 고리가 손잡이 끝에 달린 칼), U자형 쇳날을 둘러 씌운 농기구, 저수지와 수로를 파는 기술, 경질 토기, 비단 짜는 법, 생산-서비스 단위(部, 베), 법률 제도, 문자 등이 있다. 14  

 

세 번째는, 거의 변형되지 않은 채 중국 원형 그대로 한반도를 통해 일본열도에 유입된 것으로, 비늘 모양의 철편 갑옷, 마구류, 돌을 깎아 맞추는 방법, 분묘 만드는 방법, 금은 보석, 불교, 쇠뇌 등이 있다.  

 

Farris (1998-70)는 “이상 3가지의 이전 형태를 모두 합쳐보면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열도의 고분 문화를 형성하는데 원천적인 씨앗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부록: 우지-가바네(氏姓) 제도와 베(部) 조직  

 

주서 이역전의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조정은 궁중 내부 업무를 보는 내관 12개 부와 조정의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외관 10개 부를 갖고 있었다.  

 

내관 12개 부는, 왕의 명령을 받아 출납을 관장하는 전내부, 곡식을 관장하는 곡부, 육류를 다루는 육부, 궁내의 창고 업무를 담당하는 내략부, 궁 밖의 창고를 관리하는 외략부, 왕실의 말을 관리하는 마부, 칼 등 무기를 제조하는 도부, 불교 사찰을 관리하는 공덕부, 약을 만들고 치료를 담당하는 약부, 토목 공사를 관장하는 목부, 예의와 의전 관계를 담당하는 법부, 후궁들을 뒷바라지하는 후궁부 등이다.  

 

외관 10개 부는,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사군부, 교육과 의전 관계를 담당하는 사도부, 토목과 재정 경제를 담당하는 사공부, 형벌 관계를 담당하는 사구부, 호구를 파악하는 점구부, 외교를 담당하는 객부, 관리의 인사 행정을 관장하는 외사부, 직물을 제조하는 주부, 천문과 점술을 담당하는 일관부, 상공업을 관장하는 도시부 등이다.15 
          
야마도 왕국은 우지-가바네(氏姓)라는 정치-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야마도 지배 씨족들은, 확대된 유사-씨족 단위로 많은 수의 “우지(氏)”라고 부르는 집단들을 이룩했다. 그들 각 씨족의 거주지 혹은 직종을 지칭하는 명칭 자체가 각 씨족의 명칭이 됐다.

 

“베”는 가바네(姓) 칭호를 부여받은 우지 우두머리 지휘 아래 야마도 조정에 봉사하는 세습적 직업 집단이다. 가바네 칭호는 각 씨족 수장의 야마토 조정 내 세습적 지위를 나타낸다. 우지나 베나 모두 순수한 혈연관계만으로 뭉친 집단은 아니다. 혈연관계가 없는 구성원도 포함해서 실용적으로 구성된 기능적 집단으로, 확대된 의미의 “집안” 같은 인간적 울타리를 뜻한다.

 

우지가미(氏上)라고 부르는 가바네 칭호를 가진 씨족의 수장들은, 베 구성원의 통솔을 위임받아, 신생 왕국의 통치자를 위해, 국가 운영을 위한 온갖 생산과 행정 활동을 수행하며 조정에 물자와 서비스를 제공했다. 

 

베(部)라는 집단은, 농사를 짓고, 관개-수리 사업을 통해 농경지를 확장하고, 물고기를 잡고, 직물을 짜고, 각종 토기를 만들고, 점을 치고, 수공예품을 만들고, 철제 무기를 만들었다. 각 우지는 상이한 역할과 임무를 부여받았다. 16 

 

Inoue(1977)는, “우지”라는 낱말은 부계 집단을 뜻하는, 한국어의 “울,” 몽골어의 “우룩”에서 유래했고, “부(部)”라는 한자의 사용은 백제 조정 12개 부 제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17  

 

Kiley(1983)은 좀 더 구체적이다: “정치적 관할을 베로 나눈 것이나 마찬가지로, 가바네 칭호의 사용도 백제로부터 전해져 채택된 것이다. 베라는 조직 자체가 우지라는 제도의 출발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이카(大化) 가이신(改新) 이전 시기에 백성을 통제하는 근본적 수단은 베 조직이었다. 베의 발전은 백제의 베 제도에 자극과 격려를 받은 것이다. 베 제도는 국왕의 가사를 관장하는 내관과 조정의 일반 국사를 관장하는 외관으로 구분돼 각기 창고-회계 등 재정부서가 있었다. 이 구분은 또 하나의 백제 제도의 모방이었다. 내관과 외관을 구분함으로써, 국정 운영을 위한 순수한 정치 부서의 발전 여지를 제공했다.”18   

 

베는 백제의 부 제도를 본받아, 백제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이 최초로 조직하기 시작한 서비스 집단이었다. 베는 일부 왕실에 소속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각 우지에 소속돼 있었다. 베를 관할하는 우지 수장들은 야마도 조정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 우지라는 존재는 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키 위한 수단이었다. 우지의 저변을 이루는 베는, 야마도 왕조가 이름만의 최고 지배자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조직이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유랴쿠는 모든 하다 씨족을 취합해 하다의 주공(秦酒公)에게 줬다. 주공은 얼마 지나지 안아, 180여 종의 뛰어난 베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고급 비단을 대궐 마당을 다 채울 정도로 만들어 쌓아놨다. 유랴쿠는 하다 씨족을 전국 각 지역에 분산 배치해 세금으로 각종 물자를 생산, 바치게 했다. 19  

 

하다 씨족과 아야 씨족은, 시조 오오진 치세 때, 백제로부터 엄청난 수가 한꺼번에 떼를 지어 건너온 양대 씨족이다. 하다와 아야 씨족은, 양잠, 직조, 철 제품 생산, 농지 개간 뿐 아니라, 각종 행정 업무, 대외적 외교 활동, 정부 창고 관리, 회계장부 처리, 세금 징수, 정부 지출 등등 업무를 부여받아 수행했다. 이 두 씨족의 활약은 야마도 조정이 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하츠세는 사냥을 상당히 즐겼던 것 같다. [463년 어느 날] 하츠세는 요시노궁(宮)으로 행차해, 그 인근 지역에서 수렵을 즐겼다. 그날도 여러 개의 산을 오르고, 넓은 들을 달리며 수많은 새와 짐승들을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소 쉬면서 군신들에게, “사냥의 즐거움은 조리사가 육회를 만들게 하는데 있다. 누가 한번 스스로 회를 떠보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군신들은 머뭇거리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하츠세는 크게 노해 마부를 베어 죽였다. 이 사건을 일어나자, 왕후는 주방에서 육회를 잘 만드는 자신의 조리인 3인을 왕에게 바쳐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조리하는 시시히토(肉人) 베를 만들도록 했다. 그후, 오호야마도(大倭) 국조 아고코가 사람 하나를 보내 시시히토 베에 추가시켰다. 20 그러자 전국의 오미, 무라지, 반조, 국조 들 역시 사람들을 보내 추가시켰다. 

 

이 기록을 보면, (왕실 직속의) 베라는 것이 단 3명의 사람을 데리고도 만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야마도 왕국의 베(部) 제도는, 백제의 부(部) 제도를,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임기응변적으로, 아주 융통성 있고 유연한 형태로 모방한 것이다. 관료화된 백제의 부 조직에 비교해보면, 거의 전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신축성 있게 그때그때 발생하는 필요에 따라 조직돼, 부여받은 특정 활동에 종사했다. 상당히 중요한 사실의 기록이다. 21 

 

Ōbayashi(1985)는, “베 제도 성숙의 중요한 요인은, 알타이 초원 문화에서 유래한 새로운 친족 개념의 일본열도 유입이었다. 이 과정은 부여-고구려 문화의 한반도 남부 진입과 함께 진행된 것이다. 5세기 고분들에서 발굴된 번쩍이는 금 장식들은 한반도를 통한 알타이 초원 왕족문화의 (일본열도) 상륙을 시사한다. 고구려-백제와 유사한 고대 일본의 왕실 중심 설화와 의식들은, 동일한 연결고리의 다른 하나의 연결점을 구성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중앙집권화> 

 

일단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야마도 왕조의 권위가 공고해지고, 중앙과 지방의 토착세력이 왕권에 도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자, 베를 소유하며 관리하는 씨족의 수장이라는 특정 세습권력이, 중앙집권의 강화를 저해하는, 가장 눈에 거슬리는 장애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관료적 중앙집권화를 추구한 중앙 정부의 핵심 지배층은, 645년 실시된 다이카(大化) 대변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가이신(改新)은, 대부분의 베와 사유민을, 국가의 백성 즉 공민(公民)의 존재로 만들려고 했다. 정부 행정을 중앙집권적으로 재정비하고, 대규모 씨족의 수장이 장악해 온 농민과 부민들을, 조정의 직접 관할 아래 두려고 했다. 우지 집단은 점차로, 씨족 수장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관료제도 하의 높은 관직을 가진 수장 밑에, 확대된 인간적 울타리 속에 한 개의 가족을 이루는 형태로 그 존재를 유지케 됐다.  

 

647년, 7색(色) 13계(階)의 관위(冠位)제도를 제정했다. 조정 내 지위를 나타내는 세습적인 가바네 칭호는 처음부터 씨족과 연계돼 있었다. 하지만 관위는 개개인에게 줘 관료적 귀족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제정된 관위는 가바네를 대체하지 못하고, 추가적으로 병행됐다. 관위 제도는 일찌기 스이코 여왕 재위 때 처음 도입됐고, 후에 덴지 왕 재위 기간 중 본격적으로 확대 수정됐다. 그러나 이 관위제도를 진정한 의미의 율령제라고 볼 수는 없고, 그저 고구려와 백제의 계급제도를 모방한 제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1 (2005. 6. 18)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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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http://www.EastAsianHistory.pe.kr 
http://www.WontackHong.pe.kr  

 

[각주] 

1. 김기웅(1986: 76, 88-9, 96-97, 99-101, 105-106, 112, 120-1, 129) 참조.

2. Ōbayash (1985: 13-14)  

3.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弁辰傳... 男女近倭 亦文身  

4. 梁書 列傳 東夷 百濟... 其國近倭 頗有文身者  

5. 應神... 昔日本ハ三韓ト同種ナリト云事ノアリシカノ書ヲ桓武ノ御代ニヤキステラレシナリ 六地藏寺本, 北畠親房 神皇正統記(Tokyo: Kyuko), p. 28.  

6. 天照大神... 縛裳爲袴(NI: 105) 古尓王... 王服紫大袖袍 靑錦袴 金花飾烏羅冠(S2: 29-30)

7. 應神 十四年 百濟王貢縫衣工 女... 是今來目衣縫之始祖也(NI: 371) 衣縫猪手漢人刀良等祖 將居此處(F: 290) 又貢 上手人韓鍛名卓素 亦吳服西素(K: 248)  

8.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二 倭國... 無城郭... 其服飾 男子衣裙襦 其袖微小 履如屨形 漆其上 繫之脚... 婦人 束髮於後 亦衣裙襦 裳皆有襈… 故時 衣橫幅 結束相連而無縫

9. 三國志 魏書 東夷傳 倭... 其衣橫幅 但結束相連 略無縫 婦人被髮屈紒 作衣如單被 窄其中央 貫頭衣之  

이시야마 아키라(KEJ: 1.329)는 “지금의 가가와 현(縣)에서 발굴된 야요이 시대 도타쿠(청동 방울 형태 의례용 물건)에 나타난 사람 형상 판화엔 일종의 판초 모양의 옷을 입은 남자들이 묘사돼 있다”고 말한다. 판초는 남미 원주민들이 입는 한 장의 천으로 된 외투를 말한다.

10. 周書 卷四十九 列傳 第四十一 異域上 百濟… 其衣服 男子 畧同於高麗… 其冠兩廂加翅… 婦人衣似袍 而袖微大 在室者 編髮盤於首 後垂一道爲飾 出嫁者 乃分爲兩道焉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二 百濟… 其飮食衣服 與高麗略同… 女辮髮垂後 已出嫁 則分爲兩道 盤於頭上  

隋書 卷八十一 列傳 第四十六 東夷 百濟… 其衣服與高麗略同… 女辮髮垂後 已出嫁則分爲兩道 盤於頭上  

11. 推古 元年春正月 以佛舍利 置 于法興寺刹柱礎中... 建刹柱(NII: 173 )

扶桑略記 推古天皇 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嶋大臣幷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13세기 초 延曆寺 皇圓 편찬)  

12. 이춘계(1991: 742-5)  

13. Kidder(1989) 참조.  

14. Farris(1998: 82)에 의하면, 중국 대륙에서는 논 농사를 위한 인공 저수지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강물만 끌어들여서도 1년 내내 기장(조, 수수) 밭과 쌀 논에 물을 충분히 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 周書 卷四十九 列傳 第四十一 異域上 百濟 官無常員 各有部司 分掌衆務 內官有前內部 穀部 肉部 內掠部 外掠部 馬部 刀部 功德部 藥部 木部 法部 後官部 外官有司軍部 司徒部 司空部 司寇部 點口部 客部 外舍部 綢部 日官部 都市部 都下有萬家 分爲五部 曰上部 前部 中部 下部 後部 統兵五百人 五方各有方領一人 以達率爲之  

Hsiao(1978, 38)에 의하면, 중국의 관료적 중앙집권 제국을 대표하는 진-한 조정의 여러 고위 관직들은 애초에 궁중의 필요에서 형성된 것이다. 재상이란 지위도 왕족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우두머리 자리에서 유래한 것이며, 소위 9대신들이라는 존재도 왕족의 가사를 돌보던 요원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16 베는 중앙과 지방정부의 출납.회계처리 같은 특수 행정 서비스를 야마도 조정에 제공했다. Hirano (1977)에 의하면, “일본의 통일국가는 ‘베’라는 공동체 조직을 바탕으로 5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이다. 베 조직은 원시 일본 국가의 기본적 사회-정치 구조를 대표한다. 정상엔, 강력한 씨족 수장들의 지지와 충성을 확보한, 야마도 최고 통치자가 군림하고, 그 하부에서는 수많은 베 서비스 집단이 노동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6세기에 들어와 전통적 지방 씨족의 베를 환수해 왕실 직속의 농업 베가 만들어졌다. 왕실에 예속된 반조(伴造)나 우지가미는 모두 우지비도(氏人)와 베민(部民, 部曲)들을 이끌고 생산 활동을 했다. 반조는, 조정의 관리로서, 도모(伴)라고 하는 세습적 집단과 도모베(品部)라는 직업 베민을 거느리고, 제사 등 특정임무를 수행했다. 지방에서는, 토착 세력가 혹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람이 국조(國造)가 돼 우지를 구성했다

17 Farris (1998, 101)는, 츠다 소키치가 이미 “베”라는 낱말은 백제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말한다. 언어학적으로 어원을 따져 생각한다면, 인간적인 “울(욼)” 혹은 “우리” 속에 “무리(衆)”를 지어 함께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我)”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집단이 바로 “우지” 혹은 “우디”인 것이다. 

18 가바네는 흔히 씨족 성의 끝부분을 구성한다. (가바네가 없는 씨족의 성도 있다.) Barnes(1988, 29) 는, “몇 개의 대표적 가바네 명칭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들은 아마 조직적으로 위계를 정하는 가바네 발상을 비롯한 다른 여러 혁신적 발상이 도입된 5세기 초 전파됐을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가바네 지위를 보유한 우지 수장들 자신이 한국 사람 후손인 것이다.”  Aoki (1974, 41)에 의하면, “호무다(오오진)는 자신의 부하들을 날로 커가는 삼각주의 촌장들 가운데서 뽑았는데, 호무다는 그들에게 한국 말로 촌장을 의미하는 분명한 한국어원을 가진 무라지(連)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무라지 지위는 주요 비(非)왕족 우지 우두머리를 위해 만든 것이고, 그들 직종의 명칭을 사용했다. 오미 지위는 왕족 중 좀 낮은 위치의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주로 해당 지역 명칭을 사용한다. 대신(大臣)-대련(大連) 등은 최고위 대신직이었다.

19. 雄略 十五年 秦民分散臣連等 各隨欲駈使 勿委秦造 由是 秦造酒甚以爲憂 而仕於天皇 天皇愛寵之 詔聚秦民 賜於秦酒公 公仍領率百八十種勝 奉獻庸調絹縑 充積朝庭 因賜姓曰禹豆麻佐 一云 禹豆母利麻佐 皆盈積之貌也 雄略 十六年 秋七月 詔 宜桑國縣殖桑 又散遷秦民 使獻庸調 上495

20. 雄略 二年... 命虞人縱獵...  獮什七八 每獵大獲 鳥獸將盡 遂旋憩乎林泉... 問群臣曰 獵場之樂 使膳夫割鮮 何與自割 群臣忽莫能對 於是 天皇大怒 拔刀斬御者大津馬飼 是日 車駕至自吉野宮 國內居民 咸皆振怖 由是... 皇太后知斯詔情 奉慰天皇曰 群臣不悟陛下因遊獵場 置肉人部... 以我爲初 膳臣長野 能作肉膾 願以此貢... 皇太后觀天皇悅... 曰 我之廚人... 以此二人 請將加貢 爲肉人部 自玆以後 大倭國造吾子籠宿禰 貢狹穗子島別 爲肉人部 臣連伴造國造又隨續貢 上463-465

21. 此之御世 定賜海部 山部 山守部 伊勢部也 亦作劒池 古248  
應神 五年 秋八月 令諸國 定海人及山守部 上365 

394년 가을 8월, 호무다는 영을 내려, 아마 베, 야마 베(山部), 야마모리 베, 이세 베(伊勢部)를 정해서 만들도록 했다. 특히, 모든 고을마다, 고기잡이를 담당하는 아마(海人) 베와 사냥과 채취를 담당하는 야마모리(山守) 베를 만들도록 명했다.  

雄略 二年 是月 置史戶 河上舍人部 上465 

[463년] 후미히토(史戶) 베와 카하카미의 토네리(舍人) 베를 설치했다.
See Hirano Kunio(KEJ, 1983: 147).  

 

12.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

  •  홍원탁
  •  승인 2005.06.28 00:00

Coming Across the Emotive Records in Kojiki and Nihongi revelation of close kinship

 

일본서기는 백제의 지배층과 야마도 왕족 사이가 상당히 가까운 친족관계였음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수많은 감동적 일화들을 기록하고 있다. 양측이 모두, 백제와 야마도 왕국과의 관계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639년, 죠메이(舒明)왕은 구다라 강(百濟川)변에 대규모의 궁전을 지었다.  641년, 죠메이왕은 구다라 궁(百濟宮)에서 서거했다. 입관한 후 장사를 지낼 때까지 궁 북쪽에 안치를 했는데, 이를 구다라 대빈(百濟大殯)이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고구려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에, 바로 이어 백제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시종일관 그냥 “왔다”고 올래(來) 자를 썼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 

왕실간 친족관계를 느끼게 해 주는 기록들 

 

홍원탁 (서울대 교수)


가슴에 와 닿는 기록들   

 

일본서기는 백제의 지배층과 야마도 왕족 사이가 상당히 가까운 친족관계였음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수많은 감동적 일화들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과 신라- 고구려와의 관계 역시 기록을 하지만, 그런 기록들은 눈에 띄게 친밀감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서기(Aston 번역: 250-1)에 의하면, 신공왕후는 그녀의 아들 호무다에게 “우리가 한국[정직한 번역은 백제]과 친교를 맺고 있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생존 시와 마찬가지로 우의를 한층 더 돈독히 하여 이 우정의 결속을 영원토록 지속시켜야 한다”고 당부를 한다. 다른 한편, 백제의 근초고왕(346-75)은 그의 손자인 침류왕(384-5)에게 “지금 우리가 통교를 하는 바다 건너 동쪽의 나라는 하늘이 우리에게 열어준 것이다. 하늘의 은덕으로 우리나라의 기초가 영원토록 확고 해졌으니, 너는 우리 토산물들을 그 나라에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우의를 계속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당부를 한다. 1 

 

백제 아신왕(阿莘王, 392-405)은 397년에 태자 전지(腆支)를 야마도 왕국으로 보냈다. 2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은 402년에 사신을 야마도 왕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고, 403년에 야마도 왕국에서 사자가 오니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3 일본서기는 오오진 (호무다) 16년 조에, “백제 아신왕이 죽었다. 천황은 태자 전지를 불러 ‘왕자는 즉시 귀국해서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 하면서, 한국 동쪽 땅을 하사하였다”고 말한다. 한반도로부터 건너와, 이미 야마도 왕국의 지배자가 된 오오진(호무다)이 정식으로 백제의 강역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사 표시인 것 같다. 4 

 

삼국사기에 의하면, 야마도 조정이 409년에 사신을 보내면서 야광주를 전하니 전지왕(405-20)은 그 사신을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5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전지왕이 자신의 여동생을 보내 호무다를 모시도록 했다. 신제도(新齊都)는 7명의 시녀들을 거느리고 왔다.”6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지왕은 418년에 사신을 야마도 조정에 보내면서 비단 10필을 전했다. 7

 

일본서기(N1: 293-4)에 의하면, “백제왕의 손자인 주군(酒君)”이 야마도 조정에 와서 고로시의 집에 머무르며 매를 길들여 닌토쿠(仁德)과 함께 사냥을 나간다: “… 낯설게 보이는 새 한 마리를 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주군을 불러서 그게 무슨 새인지 물었다. 주군은 ‘이런 새는 백제에 아주 많으며, 길을 들일 수 있는데, 백제 사람들은 흔히 이 새를 구치(매)라 부른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 매를 주군에게 주어 먹이를 주고 훈련을 시키도록 했다. 주군은 얼마 안 있어 그 매를 훈련시켜, 발에는 부드러운 가죽 끈을 매고, 꽁지에는 작은 방울을 매달았다. 주군은 매를 자기 팔뚝 위에 앉혀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날로 왕과 주군은 모즈의 들판으로 나가 함께 매 사냥을 했다.”8 모즈는 후에 닌토쿠가 묻힌 곳이다. 삼국사기는 428년에 야마도 왕국 사신이 50명의 종자들과 함께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9 

 

일본서기(N1: 345-6)는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인용한다: “개로(45-75)가 왕위에 올랐다. 유랴쿠(雄略)는 아레토쿠를 보내 여랑 하나를 골라서 보내 줄 것을 청했다. 백제는 모니 부인의 딸인 적계 여랑을 간택해서 왕에게 보냈다. 왕은 그녀와 결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경솔하게도 다데라는 자와 정을 통했다. 왕은 크게 노해 그녀를 불 태워 죽여버렸다. 흉보를 전해 듣고, (461년) 개로왕은 그의 동생 곤지를 야마도에 보내 천왕(天王)을 모시고 옛 왕들의 우의를 돈독히 하도록 했다(以脩兄王之好).”10 Aston은 끝 문장을 “형 왕(兄王)으로서의 우호관계가 한층 돈독해 지도록 했다”고 번역을 했어야 했다. 일본 학자들이나, 서구 학자들이나 의도적으로 묘하게 틀린 번역을 하는 관행이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백제 삼근왕(477-9)이 죽었을 때, 유랴쿠가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며, 나이는 어렸지만 매우 똑똑했던 말다(末多) 왕자를 궁으로 불렀다. 유랴쿠는 친히 말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라 했다. 그가 동성왕(東城王, 479-501)이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11 

 

성왕은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을 찬양하면서 긴메이 왕에게 불상을 보낸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明王, 523-54)과 야마도 왕국의 긴메이왕은 마치 오늘날 친한 친구들이 이-메일을 주고 받듯이 빈번하게 서신왕래를 하였다. 545년, “백제는 높이가 6장이나 되는 불상을 만든 다음, ‘6장 높이의 불상을 만든다는 것은 큰 공덕을 쌓는 것이다. 이제 삼가 만들었으니, 이 공덕의 힘으로 원컨대 긴메이왕께서 높은 덕을 얻고, 왕께서 소유한 땅에 축복이 내리고, 천하의 모든 중생이 모두 해탈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의 원문을 써 넣었다. 552년, “성명왕은 석가불 금동상 한 개, 몇 개의 사찰 깃발과 덮개, 몇 권의 경론 등을 전하면서 예배의 공덕을 크게 찬양하였다: 이 불법은 모든 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법 입니다. 이 법은 선행에 대한 인과응보로서 능히 무한한 복과 두터운 덕을 줄 수 있고, 수행의 결과로 우리 인간들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의 정각의 지혜를 깨닫게 해줍니다.”긴메이는 이 말을 듣고 나자 크게 기뻐 벌떡 일어나며 신하들의 견해를 물었다. 소가 이나메 대신이 대답했다: “서쪽 나라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들 모시고 있습니다. 유독 우리 야마도 만 모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12
 
554년, 성왕이 신라 병사들 손에 죽었다. 그의 아들 여창(위덕왕, 554-98)은 샛길로 겨우 전쟁터를 빠져 나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신라 장수들은 백제가 기진맥진한 것을 알고, 아예 완전히 없애버릴 생각을 했다. 그러자, 한 장수가 말했다: “야마도 왕은 가야[연맹] 문제를 가지고도 우리나라를 여러 번 질책을 했는데, 이제 백제 관가(官家)를 아주 멸해 버린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획은 취소되었다. 13   

 

계속해서 일본서기를 본다: “여창은 ... 왕자 혜[威德王의 동생, 후에 惠王, 598-99]를 보내 성왕이 적에게 살해되었다는 비보를 전했다. 긴메이는 이 비보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사자[소가 대신]를 나루터에 보내 왕자 혜를 맞아 위문케 했다. 소가 대신이 왕자 혜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이렇게도 슬픔이 간절합니까? 인간의 정을 가진 사람치고 왕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가 대신은 계속 말한다: “옛날, 유략쿠왕 때[463-79], 당신 나라는 고구려[장수왕]에 의해 핍박을 당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유랴쿠왕은 가무 쓰카사 가미(神祇伯)에게, 신(神祇)으로부터 계책을 받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하후리(祝者)가 신의 말씀을 전(託神語)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신(建邦之神)에게, 멸망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임금한테 가서 구원을 해 달라고 경건하게 청하면, 그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시조 호무다] 신께 [백제에 가서] 구원을 해줄 것을 청했더니, [백제] 왕조의 기초가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야마도 땅에] 나라를 창건한 신(建邦神)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초목이 서로 말을 할 때, 하늘[백제]로부터 내려와 나라를 세운 신입니다. 제가 듣기에 당신 나라에서는 그 [호무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제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하고, 신궁을 수리하여 신령께 제사를 올리면 나라가 융성할 것입니다.’”14

 

구다라 강변에 왕궁을 짓고, 구다라 궁에서 서거를 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쓰왕은 572년에 야마도 지역의 구다라 오오이(百濟 大井)라는 곳에 왕궁을 지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자로 백제라 쓰고 모두 “구다라”라고 읽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죠메이(舒明)왕은 639년에 대규모의 궁전과 사찰을 축조하도록 명했다. 궁전은 구다라 강(百濟川) 가에 자리를 잡았고, 구다라 강변에는 구중탑이 세워졌다. 641년, 죠메이왕은 구다라 궁(百濟宮)에서 서거했다. 입관한 후 장사를 지낼 때까지 궁 북쪽에 안치를 했는데, 이를 구다라 대빈(百濟大殯)이라 불렀다. 15 

 

도래(到來)와 귀화(歸化)  

 

일본서기는 고구려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에 바로 이어 백제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시종일관 그냥 왔다고 올래(來) 자를 썼다. 595년에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가 야마도로 귀화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같은 해에 백제 승려 혜총(慧聰)이 왔다. 이 두 승려는 불법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모두 3보(佛法僧)의 동량이 되었다.” 602년에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 와서 역법, 천문지리 및 둔갑술에 관한 책을 바쳤다. ... 승륭과 운총 등, 두 명의 고구려 승려가 함께 귀화하였다.”16 

 

중국 유학생으로 선발된 아야 씨족 사람들 (漢人)  

 

608년, 야마도 조정은 7명의 학생과 1명의 통역을, 귀국하는 수 나라 사신 일행에 딸려, 수 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Sansom(1931: 37-38)은 “성덕(聖德) 태자가 선발한 몇 명의 학자들이 해외 유학을 하기 위해 수 나라로 갔다. 그들은 모두 귀국해서 중요한 임무의 선구자가 되었고, 특히 일부는 대화개신(大化改新, 645-50)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모두 한번 써 본다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서기는 그들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학생 야마도 아야(倭漢直) 씨족의 아타헤 후쿠인, 나라 씨족의 오사(譯語, 통역) 에묘우, 다까무꾸 아야(漢人) 씨족의 구로마로, 이마끼 아야(新漢) 씨족의 오오쿠니, 학문승 이마끼 아야 씨족의 히후미, 미나부찌 아야 씨족의 쇼우안, 시가 아야 씨족의 에온, 이마끼 아야 씨족의 고사이” 등 8명이었다. Sansom(1931: 38)은 “이름과 칭호를 보건대, 그들은 모두 귀화한 한국인, 중국인, 혹은 그들의 후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Sansom은 “그들은 모두 백제에서 건너온 아야 씨족의 후손들이었다”라고 말 했어야 했다. 17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2 (2005. 6. 25.)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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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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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神功 攝政五十一年 百濟王亦 遣久氐…於是皇太后語太子...曰 朕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 由人故...如朕存時 敦加恩惠… 今復厚結好 永寵賞之(NI: 357-9) 
神功 攝政五十二年 久氐等 ... 曰…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垂天恩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NI: 359)  

 

2.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S2: 45)
應神八年 百濟記云 遣王子直支 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3.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十 一年 遣使倭國求大珠 十二年 倭國使者至 王迎勞之特厚 (S2: 46)

 

4.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或云直支 梁書名映… 腆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 送旣至國界…國人殺碟禮 迎腆支卽位 (S2: 46)  

應神 十六年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 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NI: 373)

 

5.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五年 倭國遣使送夜明珠 王優禮待之 (S2: 46)

 

6. 應神 三十九年 百濟直支王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新齊都媛率七婦女 而來歸焉 (NI: 379)

 

7.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十四年 遣使倭國 送白綿十匹 (S2: 46)

 

8. 仁德 四十一年 遣…於百濟 …是時…爰酒君來之…四十三年...捕異鳥…天皇召酒君...酒君對曰 此鳥之類 多在百濟 得馴而從人 亦捷飛之掠諸鳥 百濟俗號此鳥曰俱知 是今時鷲也 乃授酒君令養馴 未幾時而得馴 酒君則以韋 緡著其足 以小鈴著 其尾居腕上 獻于天皇 是日幸百 舌鳥野而 遊獵 時雌雉多起 乃放鷲令捕 忽獲數十雉 (NI: 409) 仁德 六十七年 幸河內石津原以 定陵地 始築陵...故號其處曰百 舌鳥耳原者 (NI: 415)  

 

9. 三國史記 百濟本紀 毗有王 二年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S2: 46) 

 

10. 雄略 二年 百濟池津媛 違天皇將幸 淫於石川楯 天皇大怒… 置假庪上 以火燒死 百濟新撰云 己巳年 蓋鹵王立 天皇遣…來索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曰適稽女郞 貢進於天皇 (NI: 463)

雄略 五年 百濟加須利君 蓋鹵王也 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 女郞也 而籌議曰… 乃告其弟軍 君 昆支也 曰汝宜往日本 以事 天皇…軍君入京 旣而有五子 百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 (NI: 471) 

 

11. 雄略 二十三年 百濟文斤王薨 天王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NI: 499-501)

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東城王…昆支之子 (S2: 60)  

 

12. 欽明 六年 遣…使于百濟…百濟造丈六佛像 製願文曰 蓋聞 造丈六佛 功德甚大 今敬造 以此功德 願天皇獲勝善之德 天皇所用彌移居國 俱蒙福祐 又願普天之下一切衆生 皆蒙解脫 故造之矣 (NII: 93-95) 

十三年 百濟聖明王 更名聖王 遣…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 幡蓋若干 經論若干卷 別表讚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 諸法中 最爲殊勝…此法能生無量…天皇聞已 歡喜踊躍 詔使者云 朕從昔來未曾得聞如 是微妙之法…蘇我大臣稻目宿禰奏曰 西蕃諸 國一皆禮之 豐秋日本 豈獨背也 (NII: 101-103)

 

13. 欽明 十五年 餘昌謀伐新羅... 築…塞 其父明王憂慮餘昌長苦行陣 久廢眠食... 乃自往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斷道擊破...斬首而殺…餘昌遂見圍繞… 餘昌及諸將等 得從間道逃歸… 於是 新羅將等 俱知百濟疲盡 遂欲謀滅無餘 有一將云 不可 日本天皇以任那事屢責吾國 況復謀滅 百濟官家 必招後患 故止之 (NII: 111-3) 

 

14. Aston(N2: 77)은 “쯔쇼우 주석자가 이 대목에서 세이토키라는 책으로부터 ‘간무(桓武, 781-806) 치세 때 우리와 한국[백제?]은 표기법[기록?]이 동일했다. 왕은 이 말을 싫어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라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하나 인용했다”는 사실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 시킨다. 기다바다케 치카후사(北畠親房, 1293-1354)는 자신이 1343년에 쓴 역사서(神皇正統記)의 오오진 조에다 “옛날 일본 사람들은 삼한 사람들과 같았다”라고 말을 한 책들은 모두 간무 때 불태워졌다”고 기록을 했다. 

應神 . . .昔日本ハ三韓ト同種ナリト云事ノアリシカノ書ヲ桓武ノ御代ニヤキステラレシナリ. 六地藏寺本 神皇正統記 (Tokyo: Kyuko), p. 28. 

欽明 十六年 百濟王子餘昌 遣王子惠 …曰聖明王爲賊見殺 天皇聞而 傷恨迺 遣遣使者 迎津慰問 於是... 俄而蘇我臣問訊曰…何痛之酷何悲之哀 凡在含情 誰不傷悼...蘇我卿曰 昔在天皇大泊瀨之世 汝國爲高麗所逼 危甚累卵 於是 天皇命神祇伯 敬受策於 神祇祝 者迺託神語報曰 屈請建邦之神 往救將亡之主 必當國家 謐靖人 物乂安 由是 請神往救 所以社稷安寧 原夫建邦神者 天地割 判之代 草木言語之時 自天降來 造立國家之神也 頃聞 汝國輟 而不祀 方今悛悔前過 修理神宮 奉祭神靈 國可昌盛 汝當莫忘 (NII: 115-7) 

 

15. 敏達元年 宮于百濟大井 (NII: 133) 
舒明 十一年 詔曰 今年造作大 宮及大寺 則以百濟川側爲宮處 …於百濟川側 建九重塔 十二年 徙於百濟宮 十三年 天皇崩于百 濟宮...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NII: 233-5)

 

16. 推古 三年 高麗僧慧慈歸化則 皇太子師之 是歲 百濟僧慧聰來 之 此兩僧 弘演佛敎 並爲三寶 之棟梁 (NII: 175) 
 
推古 十年 百濟僧觀勒來之 仍 貢曆本及天文地理書 幷遁甲方 術之書也 潤十月 高麗僧僧隆 雲聰 共來歸 (NII: 179)  

 

17. 推古 十六年 以小野臣…爲大 使…福利爲通事 副于唐客而遣 之... 是時 遣於唐國 學生倭漢 直福因 奈羅譯語惠明 高向漢人 玄理 新漢人大國 學問僧新漢 人日文 南淵漢人請安 志賀漢人 惠隱 新漢人廣濟等 幷八人也 (NII: 189-193) 

 

13. 왜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

  •  홍원탁
  •  승인 2005.07.04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Korean Language and Japanese Language

 

야요이 시대 600년 기간 중,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죠몽 원주민과 (예맥 퉁구스 계통의) 가야 사람들이 어울려서 원 일본인을 형성했다. 후기 고분시대에 이들 원 일본인과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이 합쳐져서 한반도 사람들과의 유전적 유사성이 훨씬 커졌다 야요이 시대의 원 일본어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방언에 가까웠으나, 고분 시대 일본어는 부여-고구려-백제 방언에 가깝게 되었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의 음운적, 어휘적 차이는, 한국어가 죠오몽 기층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학적인 면에서 죠오몽 원주민이 일본어 형성에 기여한 바는,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서 그들이 끼친 유전적인 기여도[35% 미만]에 필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계통이 다른 언어들의) 문법을 섞어서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의 언어학적인 영향은 어휘와 음운적 요소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어휘와 음운 만을 본다면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 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왜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

형태적-구문적 유사성과 어휘적-음운적 상이성 


홍원탁 (서울대 교수) 

왜인 대 야마도인 

 

Janhunen(1996: 231)은 “일본어의 궁극적인 고향은 한국, 보다 정확하게는 한반도의 남부(가야), 서부(백제), 중부(고구려)다”라고 말한다 원 일본어(原日本語)를 사용하는 원 일본인(原日本人)이 죠몽시대가 아니라 야요이 600년(300 BC-300 AD) 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비록 원 일본어가 어휘나 음운적으로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기는 했지만, 한국어의 가야 방언이 원 일본어의 근간이 되었다. 4세기 말, 백제 정복자들이 일본열도에 도착했을 때, 야요이 원주민들과 큰 불편함이 없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상당히 많은 수의 어휘를 공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Diamond(1998)에 의하면 “야요이 시대 사람들 골격 중에는 여전히 죠몽 사람들과 유사한 형태가 발견되지만, 고분시대에 와서는 아이누를 제외하고는 모든 일본인의 골격이 현대 일본인-한국인과 유사한 형태로 단일화되었다” 1 

야요이 600년 기간 중에 아이누, 말라요-폴리네시안, 가야 사람들이 어울려서 형성한 원 일본인을 왜인(倭人)이라 부른다면, 후기 고분시대에 이들 원 일본인과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이 합쳐져서 형성된 사람들을 “야마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 야마도 사람들은 야요이 원 일본인보다 한반도 사람들과의 유전적 유사성이 보다 훨씬 커졌고, 그들이 바로 현대 일본인의 선조인 것이다 

 

Unger(2001)에 의하면, 정복에 의했건, 폭 넓은 접촉에 의했건 간에,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시대로의 전환”은 일본 말의 중요한 언어학적 변화를 초래했다. 즉, 일본어의 퉁구스어[고구려-백제를 의미]와의 유사성이 커지는 것이다. Unger에 의하면, “소수의 흔히 쓰이지 않는, 혹은 어의적으로 좁은 뜻의 일본말 어휘들은 한국어[가야를 의미] 어근(語根)들을 갖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광범한 의미로 쓰이는 유의어(類義語)들은 흔히 고구려, 백제 또는 퉁구스어 어근을 가지고 있다” 2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 언어가 부여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3 양서(梁書)는 백제 언어가 고구려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누가 보아도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병렬(竝列)성, 유사성을 오로지 어휘의 대량 차용 현상만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모두 알타이 계통 언어들이며, 옛 일본어와 부여-고구려-백제 언어 사이에는 명백한 계통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4

 

이기문(1972, 35-6)에 의하면, 알타이계통 언어들은 수사(數詞)를 공유하는 경우가 드문데도 불구하고 유독 고구려어와 옛 일본어는 놀랍게도 많은 양의 수사를 공유한다. 즉, 고구려 말의 밀(3), 우차(5), 난은(7), 덕(10) 등은 일본어의 미(3), 이쯔(5), 나나(7), 도오(10) 등과 일치한다. 이기문은 고구려 언어가 옛 일본어와 계통적으로 상당히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이 두 언어의 분리는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5  

 

왜 한국인와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

 

Diamond(1998)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일본인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한국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면, 왜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어와 일본어는 상당히 최근에 갈라졌다. 유전적인 유사성이 언어적인 거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에서 발견되는 명백한 어휘적, 음운적인 차이를 설명해야만 한다. 언어적 거리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쉽고 가능한 해답을, 부여-고구려-백제, 마한, 진한(신라), 변한(가야) 방언들이 어휘적으로 현저하게 달랐을 가능성에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한반도 내의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단 한군데도 없다. 통역은 중국인을 상대할 경우에만 필요했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사람들 사이에 어떤 형태이건 언어적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일본열도에 야요이 시대를 전개한 가야 사람들의 방언과, 마한 지역을 정복하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백제 사람들의 방언과, 또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 신라 사람들의 방언이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 달랐다고 구태여 가정을 해서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의 어휘적, 음운적인 차이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6 

 

일본서기에는 야마도 왕국의 지배자들이 백제, 심지어는 신라나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을 대면했을 때에도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단 한군데도 없다 일본서기에는 인교오(允恭)가 죽었을 때 (5세기 중엽), 신라왕이 조문단을 보냈는데, 그들이 야마도 사람들 “풍속언어에 익숙하지 않아(未習風俗之言語)” 오해가 발생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풍속 언어에 익숙하기만 하면” 신라와 야마도 사람들이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7 반면, 중국 조정에 사신을 보낼 때에는 통역(譯語)이 수행한 사실을 대부분 경우 일본서기가 분명하게 기록을 한다 

 

Ono(1962)에 의하면, 일본어에 대한 말라요-폴리네시안의 언어학적인 영향으로 신체 각 부분 명칭에 남방적 어휘가 남아있고, 모음조화 현상이 계속 쇠퇴 해 9세기에 와서 사라져 버렸고, 또 일본어의 어휘들이 개구(開口) 음절로 끝을 맺게 되었다 아이누 언어, 특히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어휘적, 음운적 영향은 일본어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Unger(2001)는,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음운적, 어휘적 차이는 “한국어가 죠오몽 기층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어학적인 면에서 죠오몽 원주민이 현대 일본어 형성에 기여한 정도는, 그들이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 끼친 유전적인 기여도[35% 미만]와 필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계통이 다른 언어들의) 문법을 섞어서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의 언어학적인 영향은 어휘와 음운적 요소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고분시대(대략 375-675) 전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어휘의 발음을 모두 한자로 표기했었다 1443년에 창제된 한글은, 많은 언어학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체계라고 말한다. 8 모음 10개로 8,778개의 발음을 표기해 낼 수 있으며, 음절과 발성 사이에 엄격한 1:1 대응관계를 유지한다. 9 반면, 일본어 음절 표기법은 9세기경에 야마도 지역의 여성들 사회에 나타나 사용되었던 비과학적 표기 방법을 답습하고 있다.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의 특징인 최소 발성 전통에 따라 5개의 모음을 가지고 201개의 발음을 만들어 낸다 (폴리네시안 언어는 단지 3개의 모음--a, i, u--만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각기 채택한 표기방식의 음운론적 차이는 어휘들의 발음을 빠른 속도로 이질화 시켰을 것이다. 일본어 표기의 발성의 빈곤성은 (대부분의 어휘에서 나타나는) 모음의 발음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현대 일본말은 1,600여 년 전의 야마도 사람들이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완벽한 음운(音韻)이론에 입각해서 한글이 창제된 반면, 일본은 비과학적으로 한자를 차용한 가나(假名)를 가지고 계속해서 음절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 표기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경우에 그 어원을 쉽사리 추적하지 못할 정도로) 어휘의 상이성이 두드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야요이 시대의 원 일본어는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야 방언에 가까웠으나, 고분 시대 일본어는 부여-고구려-백제 방언에 가깝게 되었다. “야마도인”의 언어는 현대 일본어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10  

 

현대 한국어는 본래 신라 방언인 중세 한국말에서 나온 것이다. 방언은 초기의 언어에서 파생되어 변형된 것으로 정의된다. 11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언어에는 엄청난 음운적, 의미적(語義的) 변화가 발생하며, 언어들은 빠른 속도로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12 하지만 문법이라는 것은 아주 완만한 속도로 변화를 하기 때문에, 문법의 연구를 통해 고대의 언어학적인 연관관계를 구명할 수 있다. (낱말) 어휘론이나 (소리) 음운론적으로는 아니지만, (글의 짜임) 구문론적으로나, (낱말의 생김) 형태론적으로 보면, 현대 한국말과 현대 일본어는 지구상의 다른 어떤 언어와 보다 도 유사하며, 어휘-대-어휘 그대로 번역이 가능하다. 만약 신라 말과 부여-고구려-백제 말이 완전히 달랐다면, 이런 현상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열도 사람들은 처음 선사시대에 미지의 원주민 언어로부터 켈트 언어로의 전환을 경험했고, 유사(有史)시대 초기에 다시 켈트어에서 게르만어로 언어적 전환을 경험했다. 앵글로-색슨 영어는 유사시대에 일어난 로맨스 언어의 정복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노어만 족(프랑스화한 대니쉬 바이킹)이 앵글로-색슨의 영국을 정복한 것과는 달리, 원 일본어를 사용하는 원 일본인을 정복한 것은, 똑같은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백제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는 로맨스 언어의 맹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게르만계통 언어의 경우와 매우 달랐다. 일본열도의 언어 무대에 등장한 것은 동일한 알타이계통 언어 형태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알타이 원 일본어 위에 새로운 알타이 언어 층이 다시 한번 덮어 씌어진 것이다. (알타이계통 언어라는 표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알타이”란 표현을 “퉁구스”로 바꾸어도 된다.) 이 사실은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에서, 현대 영어와 현대 독일어 사이에서 볼 수 없는, 어휘-대-어휘 그대로 번역이 가능한 현상을 설명해준다 

 

일본인은 한반도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이주 물결을 흡수한 후에야 비로서 오늘날의 신체적, 언어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찍이 일본 열도로 건너간 범 퉁구스 언어의 초기 분파(신라-가야 변종의 남퉁구스 언어)는 죠오몽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범 퉁구스 언어의 후기 분파(부여-고구려-백제 변종의 북퉁구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복으로 야요이-고분 언어적 전환을 겪은 이후에야 비로서 현대 일본어로의 본격적 진화과정에 진입하게 되었다. 13 반면,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백제-가야를 정복하여, 신라 변종의 남퉁구스어가 언어적 통일을 이룩하고, 현대 한국어로의 본격적 진화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에는 많은 어휘적, 음운적인 차이가 발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언어적 방황을 겪은 이 두 언어가 아직도 어휘-대-어휘 번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국문판 부록> 
          
터어키어, 몽골어, 만주어 등을 포함하는 알타이 계통 언어들은, 아득한 옛날에 한 개의 공통 조어(祖語)로부터 분리되어 서로 다르게 변화를 해 온, 친족관계의 언어들이라고 믿어진다. 알타이 어족 사이에는 아주 두드러진 구조적 공통점이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을 들라면, 모음조화와 문법적 교착성(膠着性)이다. 즉, 한 단어 안의 모음이 동화 현상을 보인다. 또 모든 단어의 파생과 되틀림은 각기 단일 기능을 가진 접미사에 의하여 규칙적으로 이루어진다. 알타이 조어에서는 모든 문장이 동명사를 포함한 명사들로만 이루어 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인도-유러피안 어족에서는 모음 교체나, 자음 교체가 문법적 기능을 가진다. 인도-유러피안 어족에서는 보통 두 개의 동사가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알타이 어족에서는 (관계대명사라는 것도 없고) 앞선 동사가 (예컨대 “먹으러”같이 “러”를 붙여서) 부동사형을 취하며 뒤에 오는 동사와 연결이 된다. 이기문 (1972: 12-15, 21) 참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논농사를 지으며 야요이 시대를 전개한 (변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반도(변한 땅)에 남아서 계속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상당수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열도의 종족 구성과 (종족간의 충돌과 혼혈을 수반하는) 거주지 이동 측면을 살펴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구사하는 어휘와 음운(音韻)규칙은, 당연히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와 음운체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운이라는 것은 소리를 내고, 또 그 소리를 낼 때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 즉, 언어의 외형을 구성하는, 높고 낮은 목소리와 억양-울림 등을 배합하는 현상이다.)  

 

 4세기 말,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지역으로 건너 왔을 때, 통역이 있어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제 땅 자체에서도, 부여-고구려 계통의 백제 지배층은 왕을 “어라하”라 불렀고, 토착 마한 피지배층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한군데도 없다 

 

 국립 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 국어대사전에 실린 현대 한국어 단어는 30여 만 개나 된다. 하지만, 지구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사용빈도 상위 1,000개의 단어를 아는 것만으로 한국어의 75%를 이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金興圭, 姜汎模 (2000) 참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의 대화가 드물고, 단순한 일상생활이 대화의 주 내용이라면, 사람들은 그저 1천 개 미만의 기초 단어(특히 명사와 동명사)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문법 형태를 공유하는 어느 두 지역의 사람들이, 그 1천여 개 내외의 기초 단어 중, 절반 정도만이라도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다면, 서로 만나 의사소통을 하는데 아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표정의 변화와 손짓 발짓으로 나머지 절반 정도의 의사소통은 언제나 가능할 것이다.

 

4세기 말 이후,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왕국을 세우고, 일본어가 한국어의 문장구조를 포함한 전반적인 문법체계를 좀더 조직적으로 완전하게 수용을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어휘들을 대량으로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법이라는 것은 아주 보수적이기 때문에 “차용”현상이 거의 없다.  

 

야마토 왕국 지배계급의 공식 언어는 고구려-백제계 한국어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어의 미에(水), 나(國), 탄(谷)과 나머르(鉛)는 각각 고대 일본어의 “미두,” “나,” “타니”와 “나마리”이다. 백제어의 고마(熊)와 키(城)는 고대 일본어의 “쿠마”와 “키”이다. 고대 일본어의 “나”가 1인칭 혹은 2인칭 대명사로 쓰였는데, 이것은 한국어의 “나” 혹은 “너”에 비교될 수 있다. 고대 일본어의 시마(島), 나타(鉈), 파타(田), 와타(海) 등은 각각 고대 한국어의 셤, 낟(鎌), 밭, 바닿 등에 해당한다. 이기문 (1972: 23, 25, 34-38) 참조.  

 

일본후기(日本後紀)에 의하면, 812년에 신라선 한 척이 대마도에 정박을 했고, 그 배에는 1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言語不通) 무슨 사정인지 알기가 힘이 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해적선(賊船)인 것 같아, 야마도 조정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신라어 통역(新羅譯語)을 뽑아 보냈다 한다. 815년에는 아예 대마도에 신라 말 통역을 두었다(置新羅譯語)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들을 보면, 아무리 늦게 잡아도 9세기 초에 들어 와서는 한반도 사람과 일본열도 사람이 서로의 말을 못 알아듣게 된 것 같다. 드디어 통역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풍속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어가 불통”인 것이다.  

 

잉글랜드의 경우를 보자. 기원전 2-3세기경에 켈트족이 몰려오고, 기원 전후로 로오만의 침공을 받아 그 식민지가 되고, 5세기말에 앵글-쌕슨 족에게 점령을 당하고, 11세기에 노어만 프렌취에게 정복을 당하고, 스캔디내비안 바이킹들은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약탈을 하고 ... 잉글리쉬 단어들을 보면, 대충 스캔디내비안 계통, 져어만 계통, 프렌취 계통, 이탤리안 라틴 계통 단어들이 뒤섞여 있다. 오히려 고대 져어먼 어휘에 그 근원을 추적 할 수 있는 단어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별로 많지가 않다. 물론 크게 보면 이들 모두가 다 인도-유로피안 계통의 단어들이지만, 좀더 분류를 해 본다면 북부 져어머닉 계통과 남부 로맨스 계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라틴어가 프렌취, 스패니쉬, 포오츄기이스, 이탤리안으로 나뉘면서 로맨스 언어를 구성한다.) 그런데 잉글리쉬의 문법체계의 본질은, 아주 단순하게 변형된 져어먼 문법이다. 정복자의 노어만 프렌취가 공용어로 사용된 300여 년 간, 잉글리쉬는 무식한 앵글로-쌕슨 농민들만 주로 사용을 했기 때문에, 그 복잡한 져어먼 문법체계가 아주 무식하게 단순화 된 것 같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구조(語順)가 거의 똑 같은데 비해, 현대 져어먼과 현대 앵글로-쌕슨 잉글리쉬의 문장구조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야요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한반도 변한(가야) 사람들을 4세기 말에 정복한 것이 바로 한반도의 백제 사람들인데 비해, 5세기에 잉글랜드에 정착한 앵글로-쌕슨 져어먼 족을 11세기에 정복한 것이, 당시의 져어먼 족이 아니라, 로맨스 계통의 언어를 구사하는 노어만 프렌취 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정복자 윌리엄이 당시의 져어먼 이었다면, 현대 져어먼과 현대 앵글로-쌕슨 잉글리쉬의 문장구조가 똑같았을 것이다.  

 

1066년에 영국을 정복한 노어만들은, 1204년 좐 왕 때 이르러, 자신들의 본거지인 노어만디를 파리의 필립 왕에게 빼앗기었다. 1236년에 헨리 왕이 프랑스 왕실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된 시기를 전후로, 새삼 프랑스어의 영향이 일시적으로 커졌으나, 결국은 백년전쟁(1337-1453년)이 시작되기도 전에 프랑스와의 적대관계가 심화되었다.  

 

중세 프랑스어는 4개의 주요 방언이 있었다. 즉, 중부의 파리 프렌취, 동부의 버어건디 프렌취, 북동부의 피카아드 프렌취, 그리고 노어만 프렌취 등이었다. 13세기경, 파리에 본거지를 둔 프랑스가 강대해지자, 중부의 파리 프렌취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한반도의 서라벌 말과 이탤리안 반도의 Latium 말이 지배적인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 비교 해 볼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휘나 억양에서, 잉글리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노어만 프렌취는, 프랑스 땅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부끄럽게 생각한 일부 노어만 귀족들은, 촌사람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파리에 보내 “표준” 프렌취를 배우게 했다.  

 

노어만디의 본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후, 자신들의 운명을 잉글랜드와 함께 할 수밖에 없게 된 노어만 정복자들은 잉글리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잉글리쉬가 1362년 경에 공용어가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쵸오서(1340?- 1400년)와 쉐익스피어(1564-1616년) 등이 나타나서, 이미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잉글리쉬의 품격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5세기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사용되었던 잉글리쉬를, 쵸오서 이후, 혹은 쉐익스피어 이후의 잉글리쉬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캔디내비안 바이킹, 져어먼, 프렌취, 이탤리안 라틴 등 다양한 문화의 풍부한 어휘가, 단순화된 문법체계와 어울려 영문학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고, 급기야 21세기 전 인류의 공통어로서의 역할을 논하게까지 되었다.

 

고대 한국어는 4가지의 주요 방언이 있었던 것 같다. 즉, 경북 지방의 신라 방언, 경남 지방의 가야 방언, 북한 지방의 고구려 방언, 그리고 경기-충청-호남 지방의 백제 방언이다. 하지만 후자는 경기-충청의 초기 백제 방언과 호남 지방의 마한 방언으로 세분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7세기 후반,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고대 신라 방언이 현대 한국어의 근간이 되었다.

 

B.C. 300년 경부터 변한(가야)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가지고 온 어휘들 자체도, 일본 땅에서 야요이 600년 간 논농사를 지으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상당수의 아이누, 말라요-폴리네시안 단어들이 차용되고, 음운규칙과 억양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4세기 후반에 야마도 땅에 건너 왔을 때,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그 어느 한곳에도 없다. 그래도 야마도 왕국의 초기 단계인 5세기 중반 경, 이미 신라 사람들이 소위 “풍속 언어”에 미숙하여 봉변을 당할 정도로, 양쪽 어휘와 억양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백제 멸망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9세기 초, 특히 농민출신의 사무라이들이 지배계급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는 10-11세기 무렵,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어휘들은 이미 통역이 없이는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다시 1천여 년이 경과한 21세기에 어떻게 될 것인가는, 현재 우리가 보는바 그대로이다.  

 

어느 사회가 특정 시점에서, 주어진 어휘와 음운체계를 가지고 출발을 해도, 세월이 천년, 2천년 흐르고, 생활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음운체계와 어휘도 조직적으로 변화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당초 사용하던 어휘들의 본래의 형체와 사용법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어가 사용하는 어휘들을 5세기 전후에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들과 비교를 해 본다면, 그 자체로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아예 한자로 대체되어 사라져버린 순수 한국말 어휘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일본어가 사용하는 어휘들을 5세기 전후에 일본열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들과 비교를 해 본다면, 그 역시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신라어 자료의 핵심이며, 남아있는 신라 문학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향가(鄕歌)는, 삼국유사에 14개, 균여전에 11개가 실려 있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이 향가들은, 한자를 이용해서 자기 말을 표기해 보려는 노력의 집대성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 음절은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야 제대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한자를 가지고 그저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려 해도, 그 표기 방법이 아주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요즘 아무도 아주 자신 있게 향가 내용을 현대 한국말로 번역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음절구조를 비교적 단순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일본의 경우도,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시나 노래뿐만 아니라, 759년 이전의 장가, 단가를 모아놓은 만요오슈우(萬葉集) 역시, 아무도 자신 있게 번역을 하지 못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모두 똑같은 단어들을 가지고 출발을 해도, 세월이 천년, 2천년 지나면, 엄청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하물며 한 쪽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차용어휘를 가지고 출발을 했다면, 더욱 큰 상이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구문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 한국말과 현대 일본말의 문장구조(語順)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 외의 일반적인 문법형태도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 고대 일본어에는 모음조화도 있었다. 아마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의 사이도, 이들보다 더 유사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 방언을 근간으로 형성된 중세 국어가 진화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신라계 “한국어” 이건, 부여-고구려-백제계의 “일본어” 이건, 일반적인 문법체계는 필연적으로 모두 나름대로의 상이한 역사적 발전 환경을 반영하면서, 각자 독특한 “간소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문장 구조(語順)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변함없이 양쪽이 완벽하게 일치한 상태를 2천여 년 가까이 지속했다. 즉, 양쪽의 문장구조에 변화가 있었다면, 아주 똑같은 방식의 변화만 있었다는 얘기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구조(語順)가 21세기라는 현재 시점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언어학적으로 보아, 기적에 가까운 현상인 것 같다.  

 

반면, 현대 잉글리쉬와 현대 져어먼의 문장 구조는 상이한 점이 적지 않다.  앵글로-쌕슨 잉글랜드가 져어먼이 아니라 노어만 프렌취에 의해 정복 된데 반해, 야요이 일본열도는 백제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3 (2005. 7. 2.)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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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http://www.EastAsianHistory.pe.kr 
http://www.WontackHong.pe.kr  

 

[각주] 

1. Kazumichi (2001: 24)는 “현대 일본인의 골격형태는 이미 고분시대에 형성이 되어있었다. 고분시대이후에는 일본인의 유전자 구조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2. Unger(2001)는 原(원)한국-일본어를 초기 남부 퉁구스어로 정의하고, 이로부터 진한-변한 방언과 야요이 일본 방언이 분리된다고 말한다. Unger는 야요이 시대의 원 한국-일본어(진한-변한어)는 범(凡)퉁구스어로부터 아주 이른 시기에 떨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분시대 초기에 이르면, 범 퉁구스어로부터 뒤늦게 떨어져 나온 부여-고구려-백제 언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어쩐 셈인지 Unger는 가야-신라(변한-진한) 사람들만을 “한국인”으로 정의를 하고, 고구려-백제인은 (부여) 퉁구스인으로 정의한다. 한국인을 한반도 남부의 삼한 사람들로 한정시키려는 일본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 것 같다. 

 

3.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傳 . . .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多與夫餘同 . . . 挹婁傳 挹婁古肅愼之國也 . . . 其人形似夫餘言語不與夫餘句麗同  

梁書 列傳 諸夷 百濟 . . . 今言語服章略與高麗同  

 

4. Miller (1979)와 Levin (1981) 참조. Unger (2001)의 참고문헌들도 참조. Levin (1976)은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학자들이 일본어를 한국어의 지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5.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어떤 어휘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변하기 때문에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오래된 과거의 계통적 근친관계를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천년 이상을 떨어져서 제각기 진화를 하게 되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형태의 어휘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4개의 고구려 수사, 三(密), 五(于次), 七(難隱), 十(德) 등이 현대 일본어의 해당 수사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 일이다. 대한해협 건너 일본열도에서는 이 4개의 수사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비대칭적인 변화 속도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사용했던 어휘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Levin(1976)은 “일본말은 고구려 말에 상당히 가까웠을 것이며, 그 핵심은 부여 어군(語群)에 속했거나, 최소한 부여어에 상당히 가까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6. 아이누 말에는 호카이도, 사할린, 쿠릴 등 세가지 주요 방언이 있는데, 상호간 소통이 안 된다. Hudson (1999: 99) 참조. (제주도 방언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한반도 내 방언들 중 상호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 경우를 기록한 사례는 전혀 없다. 

 

7. 允恭 四十二年 天皇崩 於是 新羅王聞天皇旣崩…遂參會於殯宮也 冬十一月 新羅弔使等 喪禮旣闋而還之 爰新羅人恒愛京城傍耳成山畝傍山 則到琴引坂顧之曰 宇泥咩巴椰彌彌巴椰 是未習風俗之言語 故訛畝傍山謂宇泥咩 訛耳成山謂彌彌耳 (NI:449) 

 

8. Crossley(1997: 37)는 “한글은 (음운론에 충실한) 진정한 의미의 표음문자이며, 적은 수의 추상적 기호를 사용하여 한국말의 발음을 표기한다. 한글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창적인 표음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로 한글은 서아시아 셈족의 시리아 문자에서 나온 위구르 문자를 원형으로 하는 거란의 표기법을 본떠서 만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9. 4만여 개의 한자는 단지 427개의 소리만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거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4성을 사용해야만 한다. 평균적으로 23개의 문자가 똑같은 음을 낸다. 음운학자들에게 악몽과 같은 영어는 애당초 음절과 발성 사이에 1:1 대응관계 자체를 거론할 처지가 아니다. Park (1995) 참조. 

 

10. 그러므로 부여 말, 고구려 말, 백제 말, 가야 말과 신라 말을 포함하는 모든 한국어와 옛 일본어 사이에 상당히 밀접한 근친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국어의 양대 방언을 구성하는) 신라-가야 말과 부여-고구려-백제 말 뿐만 아니라, 야요이-고분 시대의 일본어도 모두 공통의 (알타이) 어족인 범 퉁구스 언어의 분파로 간주될 수 있다. 

 

11. Miller (1996: 217) 참조. 

 

12. 구문론적으로, 또 형태론적으로 볼 때, 한국어와 일본어의 동질성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어휘적, 어의적, 음운론적 차이가 커짐에 따라 한반도 사람들과 일본열도 사람들은 급기야 통역이 없이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문법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해도, 음운-어의(語義) 상의 변화는 빠른 속도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단 몇 세기 동안만 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헤어지기 이전의 말을 하는 사람과 의사소통이 안될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한반도에서 백제가 멸망한지 18년 밖에 지나지 않은 681년에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야마도 말을 익히기 위해 (習言者) 세 사람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740년에 신라에서 말을 배우기 위해 (新羅學語) 한 사람이 왔으며, 760년에는 신라 조정이 “야마도 조정에서 사용하는 풍속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無知聖朝風俗言語者)” 말을 배우라고 (學語) 두 사람을 보냈다. 일본고기의 812년 기록은, 통역이 없이는 신라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늦어도 9세기 초에 이르면 한반도 사람과 일본 열도의 사람은 통역이 없이 서로 직접적인 대화를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상의 문제가 생기면 그 상황이 공식적으로 기록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13. 원 일본어는 일본열도의 모든 방언이 파생되어 나온 공통언어로 정의된다. 후에, 교토 방언으로 대표되는 야마도 지역의 말이 일본 사회에서 가장 권위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열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야요이 방언의 흔적은 큐슈와 동북지역에서 발견된다. Hudson (1999: 94-95) 참조

14. 백제 정복자들 : 일본열도 정복자들에 관한 몇 가지 추측

  •  홍원탁
  •  승인 2005.07.08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The Paekche Conquerors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尔)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다. 고이 계열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첫째 부인에게서 유리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유리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마한 지역으로 내려와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이 기록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실패한 비류 계열 일 것이라는 추측뿐 아니라, 바로 이 비류-고이 계열이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를 떠나 신세계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도록 설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고이 계열의 지도자가 바로 390년경에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호무다라고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백제 정복자들 

일본열도 정복자들에 관한 몇 가지 추측  
                                                               
홍원탁 (서울대 교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정복자들이 어떻게 정복 계획을 세웠고, 누가 지도자이었고, 그 정복자 일행이 언제, 어떻게 바다를 건넜고, 어느 장소에 상륙을 했고, 어떤 식으로 전투를 하고, 어떻게 역사(役事)를 했는지, 등등 정복자들 “실제” 생애 이야기를 재구성 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암시적 기록들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정복자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몇몇 암시적 기록들이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는 (이쯔세 식으로) 실패한 형 비류와 (이하레 식으로) 성공한 동생 온조가 등장한다. 1 실제로 백제의 왕위는 상당 기간 동안 소위 4대 개루왕(蓋婁, 128-66)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尔)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375-84)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다. 166-346년 동안, 이 두 계열은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였다. 초고(肖古, 166-214)-구수(仇首, 214-34)-사반(沙伴, 234)-비류(比流, 304-44)가 초고 계열 왕들이고, 고이(古尔, 234-86)-책계(責稽, 286-98)-분서(汾西, 298-304)-계(契, 344-46)가 고이 계열 왕들이다. 고이 계열의 마지막 왕인 계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부 한국 역사학자들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실패한) 비류 계열에 속한다고 믿는다. 2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첫째 부인에게서 유리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유리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마한 지역으로 내려와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이 기록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실패한 비류 계열 일 것이라는 추측뿐 아니라, 바로 이 비류 계열이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를 떠나 신세계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도록 설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백제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추종자들과 함께 한성을 떠나는 고이 계열의 지도자는 바로 390년경에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호무다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364년에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가야연맹의 일원인) 탁순에 정찰대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3 탁순은 낙동강 상류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에서 지금의 부산지역을 향해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은 (한성) 백제에서 (문경, 새재를 넘어)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최단 지름길이었다. 당시 백제 조정은 호무다가 이끄는 원정대를 보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원정대와 연합하여,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도 정복할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호무다 일행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은 369년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그 해 백제는 마한 전체를 정복하였다. 4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 369년에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호무다의 모친이라는 가공의 존재) 신공왕후이다. 야마도 군대는 목라근자(木羅斤資)라는 백제장(百濟將)의 인솔 하에 탁순국에 도착한다 그들은 신라를 공격하며, 탁순과 다른 6개국을 평정한다. 그들은 또다시 곧바로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남부의 야만족들을 평정하고, 그 땅을 백제에게 하사(以賜百濟)한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肖古及王子貴須)가 그들과 합류하며, 그 사품에 주변 네 개의 읍이 저절로 항복을 한다. 백제왕과 태자는 목라근자 일행과 의류촌(意流村)에서 만나 전공을 축하하고 정중하게 떠나 보낸다. 작별하기 전에 백제왕과 야마도 장수들은 피지(辟支)산에 올라 엄숙히 선서를 한다. 또, 일행과 고사산에 올라 바위 위에 앉아 백제왕은 “우리의 동맹관계는 영원히 변치 않고 유지될 것이며 항상 공물을 보내 줄 것이다”라고 맹서를 한다 근초고왕은 구저(久氐) 등을 시켜 야마도 군사를 환송하게 한다. 5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를 하면서 Ledyard(1975)는 일본서기 369년 조에 기록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백제의 군대가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한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일본열도로 떠나는 “야마도 장군들”이 영원한 우의를 맹서하고 헤어지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우리가 여기서 떠나가는 “야마도 군사”를 백제의 왕자인 호무다가 이끄는 백제 전사들로 본다면, 일본서기 이야기 전체가 일관성을 갖게 된다. 

 

백제의 진(眞)씨 왕비들과 야마도 왕족의 마히또(眞人) 씨족 

 

근초고왕은 347년에 그의 처남인 진정(眞淨)을 조정 좌평(佐平)으로 임명했다. 6 백제 왕위의 승계는 초고 계열과 고이 계열 사이를 오가다가, 근초고왕(346-75)때에 와 비로서 초고 계열에 정착되고, 부자승계 관행이 굳어진다. 근초고는 진(眞) 씨족에서 왕비를 데려왔다. “진씨 왕비”의 관행은 근초고왕 이후에도 이어져,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진 씨족에서 왕비를 취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이왕(234-86)은 240년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아 내외 병마사 일체를 맡겼으며, 247년에는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임명하였다. 7 고이왕은 262년에 진가(眞可)를 재무를 관장하는 내두(內頭)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진 씨족은 초고 계열만이 아니라, 근초고왕 훨씬 이전에 이미 고이 계열에게도 왕비를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찬성씨록의 서문은 마히또(眞人)가 야마도 왕족 중에서 으뜸이라고 기록한다. 백제의 왕비들의 친가이었던 진(眞) 씨족과 야마도 왕족의 진인(마히또) 씨족 사이에 어떠한 연고(緣故)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근초고왕 치세 이후 고이 계열은 한반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고이 계열의 마지막 지도자인 호무다가 일본열도에서 새로운 왕국의 시조로 재등장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끔 만든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등장하는 아마데라스와 다카기 사이와 마찬가지로, 근초고왕과 진정은 사돈 간이다. 야마도 건국신화에서 니니기는 아마데라스의 친손자이고, 다카기의 외손자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열도에 지상왕국을 세워 니니기를 지배자로 앉히는데 아마데라스 보다 다카기가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8 아마도 백제의 진씨 일족은 초고 계열뿐만이 아니라 왕위계승 경쟁에서 패배한 고이 계열과도 사돈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런 연유로 호무다의 건국 시도에 강한 모성적 동정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정으로 대표되는) 진 씨족은 (초고 계열뿐 아니라) 고이 계열에게도 (왕비를 공급하는) 처가이면서, 동시에 (니니기의 외조부가 다카기인 식으로)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의 외가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는 주몽의 조정에서 벌어진 왕위계승 경쟁에서 한쪽이 패배한 후에 탄생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후에, 백제의 지배자들은 주몽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고, 오히려 매년 그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시조의 모친인 소서노(召西奴)는 일본서기에 묘사된 호무다의 모친(신공황후)에 견줄만한 역할을 한다. 9 호무다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비류-온조의) 개척정신을 물려받았을 것이며, 야마도 왕족의 으뜸가는 씨족이 바로 진인(마히또)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것은 호무다 자신이 (진정으로 대표되는 백제 진씨) 외가의 신세를 많이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은유: “이 땅은 우리 하늘나라의 강역을 넓히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 될 것이다.” 
 
일본서기의 은유를 본다: [어느 날, 한성 백제 조정에서 좌평 진정이 호무다와 그의 형 이쓰세 왕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바다를 잘 아는 노인들에게 들으니, 동쪽으로 가면 사방이 청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외진 땅은 아직 왕의 통치를 받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모든 읍과 촌락에 제각기 우두머리들이 있어 서로들 싸움질만 하고 있다 한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은 틀림없이 우리 하늘나라의 강역을 넓히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영광이 온 누리에 퍼지게 해야 한다. 이곳은 확실히 지상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 그곳에 내려가서 도읍을 세우지 않겠느냐?” “왕자들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우리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우리가 그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해가 바로 갑인[甲寅, 354]년이었다.” 10 

 

고사기의 은유를 본다: “다카기와 아마데라스는 800만 신을 [한강] 강변에 집합시켜놓고, ‘중부의 갈대밭 평원은 우리 아이가 다스리라고 내려준 땅이다’라고 말한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알아오도록 두 명의 천신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얼마 후 돌아와 보고를 하였다. 그러자 다키기와 아마데라스는 니니기에게 지상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하였다.” 11

 

일본열도 원정 길에 오르다 

 

고사기의 은유를 본다: 호무다가 바다를 건너갈 때 “그는 해협에서 거북이 등을 타고 오는 사람을 만났다. [호무다가]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그 사람은 ‘나는 땅의 (토착)신이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호무다가] ‘그대는 바닷길을 잘 아는가?’라고 물으니, 그는‘아주 잘 안다’고 대답했다 이에 다시 [호무다는] ‘당신은 내 시종이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12 

일본서기의 은유를 본다: “그 해 겨울 10월 5일에 [호무다가] 왕자들과 수군을 이끌고 [일본열도] 원정 길에 올랐다 그가 막 출발하려 할 때, 배를 타고 오는 어부를 만났다. [호무다가] ‘그대는 나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리하여 그 어부는 바다 길 잡이가 되었다.” 13

 

위에서 보았듯이 고사기,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을 읽어보면, 정복자들이 어떻게 정복 계획을 세웠고, 누가 지도자며, 그 정복자 일행이 언제, 어떻게 바다를 건넜고, 어느 장소에 상륙을 했고, 어떤 식으로 전투를 하고, 어떻게 역사(役事)를 했는지, 등등 정복자들 이야기를 재구성 해 볼 수 있는 온갖 암시적 기록들을 발견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4 (2005. 7. 9.)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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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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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百濟 始祖溫祚王...沸流溫祚…遂與…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沸流欲居於海濱…分其民歸 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沸流以彌鄒土濕水…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改號百濟 (S2: 15) 

 

2.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肖古王 蓋婁王之子...  百濟本紀 第二 仇首王 或云貴須 肖古王之長子... 古尔王 蓋婁王之第二子也 仇首王..薨 長子沙伴嗣位而 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尔卽位... 責稽王 古尒王子..汾西王 責稽王長子.. 比流王仇首王第二子... 契王汾西王之長子也... 近肖古王比流王第二子也... 近仇首王近肖古王之子 枕流王近仇首王之元子... 辰斯王近仇首王之仲子 阿莘王枕流王之元子... 賟支王 阿莘之元子 (S2: 18, 29-32) 이기동 (1996: 132, 143) 참조. 초고-구수 계열이 근초고-근구수 대에 와서 왕위승계권을 확실하게 차지했기 때문에 근(近)이라는 칭호가 부쳐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3. 神功 攝政卌六年 . . 百濟肖古王. . 曰. . 不知道路 有志無從. . . 卓淳王末錦旱岐. . .曰 甲子年…百濟人…三人到於我土曰 百濟王聞東方有日本貴國 而遣臣等令朝其貴國 故求道路 (NI: 353)

고사기에 의하면, 아마데라스와 다카기가 “중부의 갈대밭 평원은 우리 아이에게 주어 다스리라고 한 땅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두 명의 천신을 파견하여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조사시켰으며, 얼마 후 그 두 명의 천신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한다. 

爾高御産巢日神[高木神] 天照大御神之命以 於天安河之河原 神集八百萬神集而… 詔 此葦原中國者 我御子之所知國…爾…神 副…神而遣 是以此二神降到… 故…返參上 復奏言…之狀 (K: 112, 118, 120, 124)  

 

4.삼국사기는 백제의 마한 정복을 AD 9년으로 기록하였다. Ledyard (1975)는, 삼국사기가 백제의 마한 정복을 오래된 일로 만들기 위해 6주갑(周甲)을 앞당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병도 (S2: 34n) 역시 동일한 해석을 하였다. 모두 일본서기 369년 조 기록을 읽어보고 그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된 것 같다.  

 

5. 神功 攝政卌九年. .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 .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 擊. . 而破之 因以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四邑自然降服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 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 與百濟王. . 登辟支山盟之. .  磐石上…而盟者… 無絶無窮…而送之 (NI: 355-57)  
Aston (N1: 248-9) 참조.  

三國史記 百濟本紀 百濟始祖溫祚王 二十六年. . 王曰馬韓漸弱. .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二十七年. . . 

馬韓遂滅 (S2: 16) 

 

6.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近肖古王二年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S2: 32)
近仇首王 二年 以王舅眞高道爲 內臣佐平 委以政事 (S2: 32)  
阿莘王 二年 拜眞武爲左將 委 兵馬事 武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S2: 45)

 

7.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二 古尒 王 七年 拜眞忠爲左將 委以內外兵馬事 十三年 魏幽州刺史毌 丘儉與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 弓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十四年 拜眞忠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二十八年 拜眞可爲內頭佐平 (S2: 29-31) 

 

8. 天照大神之子..娶高皇産靈尊之女..生…瓊瓊杵…故皇祖高皇産靈尊 特鍾憐愛 以崇養焉 遂欲立皇孫..以爲葦原中國之主 然彼地多有螢火光神 及蠅聲邪神...故高皇産靈尊 召集八十諸神 而問之曰 吾欲令撥平葦原中國之邪鬼 當遣誰者宜也 (NI: 135)  
高皇産靈尊 選當遣於葦原中國者..高皇産靈尊 以眞床追衾覆於皇孫..使降之 皇孫乃離天磐座.. 天降於 日向襲之高千穗峯矣 (NI: 139-141)  

神武天皇 卽位前紀 神日本磐余彦天皇..曰...昔我天神 高皇産靈尊…尊 擧此豐葦原瑞穗國 而授我天祖 彦火瓊瓊杵 (NI: 189) 

 

9. 진정은 다카기의 역할을 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니니기가 하늘나라를 떠나야 한다면, 다카기는 자신의 그 외손주를 지상왕국의 지배자로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이 계열의 마지막 후손이 한반도를 떠나야 한다면, 진정은 호무다를 일본열도에 이룩할 새로운 왕국의 시조로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는 (외가로서의 모성적) 사명감을 가졌을 것이다.

 

10. 본문 중 인용문들은, 각진 괄호 [ ] 부분을 제외하고, Aston이 번역한 일본서기와 Philippi가 번역한 고사기에서 인용을 한 것이다. 

神武 卽位前紀 ... 而遼邈之地 猶未霑於王澤 遂使邑有君村有長 各自分疆 用相凌躒..抑又聞於鹽土老翁曰 東有美地 靑山四周…必當足以恢弘大業...蓋六合之中心乎…何不就而都之乎 諸皇子對曰 理實灼然 我亦恒以爲念 宜早行之 是年也 太歲甲寅 (NI: 189-191)  倭之靑垣東山 (K: 108)

臣安萬侶言..懸鏡吐珠而百王相續…以萬神蕃息與 議議安河而平天下 論小濱而淸國土 是以 番仁岐命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所以稱賢后 望烟而撫黎元 (K: 42)
旣而天照大神..令降之於葦原中國 是時..彼地未平矣 不須也頗傾凶目杵之國歟 (NI: 147)

 

11. 爾高御産巢日神[高木神] 天照大御神之命以於天安河之河原 神集八百萬神集而…爾…神 副…神而遣 是以此二神 降到… 故…返參上 復奏言…之狀 爾天照大御神 高木神之命以 詔太子..爾其太子..將降裝束之間 子出生…此御子者 御合高木神之女..生子…次日子…邇邇藝… 科詔…邇邇藝…此豐葦原水穗國者 汝將知國言依賜 故隨命以可天降  (K: 112, 120, 124-126) 

 

12. 幸行筑紫…故從其國上幸之時 乘龜甲爲釣乍打羽擧來人 遇于速吸門..問汝者知海道乎 答曰能知 (K: 148) 

 

13. 神武天皇 卽位前紀..天皇親帥諸皇子舟師東征 至速吸之門時有一漁人 乘艇而至..又問之曰 汝能爲我導耶 對曰導之矣...爲海導者…行至筑紫國 (NI: 191) 

 

15.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 왕조의 멸망

  •  홍원탁
  •  승인 2005.07.15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바로보기]

 

9세기, 야마도 왕국의 귀족 씨족들과 거대한 사찰들은 장원(莊園)을 만들기 시작했고, 10세기에 와서는 국가 토지소유제와 함께 중앙정부의 권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했고,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농민들은 귀족 부재지주보다는, 귀족 출신을 자처하는 지방 토착의 실력자를 선호하였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전문 싸움꾼으로 진화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적 무사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는 중세 일본의 새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왕족 후손인 미나모도(源) 씨족과 다이라(平) 씨족은 농민 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두 개의 집결지가 되었다. 왕족출신 지도자들은 농민출신 싸움꾼들의 무력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일본 열도를 점령하여 야요이-고분 시대의 쌀농사 농민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백제 사람들은, 농민출신의 무사계급에게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천황이란 존재가 지금까지도 상징적으로나마 지배자로 군림 할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은, 800년경을 전후로 전세계적 한발의 시작과 일치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신라와 야마도 왕국의 쇠망(衰亡) - 왕조의 멸망 
                                                               

홍원탁 (서울대 교수) 

 

새로운 지배 계급의 등장: 사무라이   

 

소가 씨족이 제거되고, 645년의 다이카 가이신(大化改新)이 얼마 지나지 않아, 663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야마도 조정은 예상되는 당나라의 침입 통로를 황급히 요새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전국적인 군사적 동원체제를 갖추기 위해 율령제를 강화하였다. 1 701년에 다이호(大寶) 율령이 포고되면서, 모든 국민은 중앙집권화된 관료적 정부와 당나라 식의 국가 율령(律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모든 토지는 국가에 귀속 되고, 농민은 토지를 분배 받아 세금을 내고 부역을 바치게 되었다. 

 

가바네(姓)를 가진 우지(氏) 지도자들이 관장하던 베민(部民)들은 자유인(公民)이 되어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지배 씨족들은, 군대를 보유하면서 야마도 군주를 호위하거나 전쟁에 나가던 전통적인 권리를 빼앗겼지만, 고위 관직 혹은 지방정부의 관리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2 (國造와 같은) 하급 지배층은 지방관청의 관리가 되었다. 정부 관료들은 신분과 지위, 공적에 따라 식읍을 받았다.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 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해 본적이 없으며, 세습적인 귀족사회를 유지했다. 

 

하지만 수입을 해 온 율령제는 씨족제도에 바탕을 둔 일본 사회에 맞지가 않았다. 특히 안록산의 난(755-63)의 여파로 당나라 팽창정책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자, 야마도 지배자들은 율령제를 집행할 열의를 잃었다. 기울어가는 당나라 조정과의 외교적인 접촉도 838년 이후에는 단절되었다.3 

 

헤이안 시대(794-1192) 기간 중, 일찍이 대화개신을 실행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후지와라 (이전의 나카토미) 씨족은, 왕실과의 외척관계를 강화시키고, 858년에는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최초로 섭정에 올라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하였다. 중앙의 중하위와 지방정부의 직위는 다른 중소 귀족들이 세습적으로 차지하였다.

 

9세기 중, 수도와 지방에서 귀족 씨족들과 거대한 사찰들은 장원(莊園)을 만들기 시작했고, 10세기에 와서는 국가 토지소유제와 함께 중앙정부의 권위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4 장원의 소유자와 강력한 귀족 및 중요한 사찰의 승려들은 지방의 유력한 가문의 사람들과 농민들을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5 

 

사유토지의 확산은 국가의 세수를 격감시켜, 왕실은 직할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에만 의존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법질서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혼란과 폭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백성들이 자위를 위해 무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10세기 초가 되면, 중소 규모의 농민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그들 주변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7  

 

농민들은 귀족 부재지주보다는, 귀족 출신을 자처하는 지방 토착의 실력자를 선호하였다. 한편,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Friday(1992: 174-5, 139)에 의하면, “9세기 말에는 정부의 이름을 빙자한 사적인 세력들의 지휘를 받은 사병(私兵)들에 의해서 국가의 병역의무 대부분이 수행되었고, 또 914년경에 와서는, 게이비시(지방 경찰관)의 직책도 모두 지방의 농민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Sansom (1963: 239)은 “특히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거의 모든 농부 하나하나가 무사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라고 말한다.  

 

싸움에 동원된 농민들은 일단 싸움이 끝나면 그들의 농토로 돌아왔었다. 8 그러나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전문 싸움꾼으로 진화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적 무사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는 중세 일본의 지배자가 될 운명이었다. 유교적인 과거제도 대신에, 무술에 바탕을 둔 능력주의 사회로 진화된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비천한 계층의 출신이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출신이 애매모호한 사람도, (개개인의 두뇌와 칼 솜씨 앞에 평등한) 싸움꾼이라는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을 했다. 불가사의 하다면, 이 농민 출신 무사들이 자신의 절대적 힘을 인식하는데 왜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하는 점뿐이다

 

중앙정부에서 고위직을 얻지 못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된 지방의 강력한 씨족들은 농민 무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마병력을 유지했고, 농민들을 칼잡이와 활잡이로 썼다. 왕족 후손인 미나모도(源) 씨족과 다이라(平) 씨족은 농민 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두 개의 집결지가 되었다. 9 왕족 출신 지도자들은 농민출신 싸움꾼들의 무력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그래도 12세기 말까지는, 무사들이 국가와 조정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사무라이(侍)”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武士가 아니라)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농민 무사들의 우두머리들은 정치적으로 순진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권력구조 밖에 있었다. Farris(1992: 176)에 의하면, 조정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저택을 사병을 가지고 지켰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무사들을 이간질해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방법으로 조종을 하였다. 

 

처음엔 다이라 씨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1156-60)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모두 독점하였으나, 곧이어 1185년에 미나모도 씨족에 의해 축출되었다. 미나모도 요리토모는 동쪽 해안가에 가마쿠라 막부(1192-1333)를 창설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도 계속 지방관리를 임명하고, 장원의 소유자들도 그 지역 관리들을 임명하고, 쇼군(將軍)도 자신의 가신들은 지방의 관리로 임명을 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지 짝이 없는 봉건제도가 출현한 것이다. 10 

 

왕족 출신이라는 사무라이 지도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1333-1573)를 세우고, 봉건 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각 지방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들은 자치적 지방조직을 만들었고, 다이묘들은 이들 다양한 자치 조직들을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흡수하고, 지역 무사들을 주군-봉신(封臣) 관계에 기초한 군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1

 

일본 열도를 점령하여 야요이-고분 시대의 쌀농사 농민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백제 사람들은 마침내 농민 출신의 무사계급에게 지배력을 상실한 것이다.  

 

신라 왕조의 멸망 

 

한반도의 3국은 초기의 다원적 조직체로부터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로 진화했다. 이전의 부족 혹은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계급적인 관료체제 내에서 적절한 직위를 얻게 되었다. 군대는 최고 사령관인 왕의 지휘 아래로 이전되었고, 왕이 손수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 중대사의 대부분은 고위 귀족들의 협의회에서 결정되었다. 각 지방에 성채를 세웠으며, 성주들은 지방장관인 동시에 군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부 관직과 군 지휘권을 보유하는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포로-노예들을 보상으로 받았다.

 

신라는 당나라 식의 과거제도를 채택한 적이 없었고, 시종 세습적인 귀족사회였다. 성골과 진골이 왕위와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12 각 지역에는 (옷깃의 색깔로 식별하는) 정(停) 혹은 당(幢)이라는 명칭의 군 부대가 조직되어, 진골 장수의 지휘를 받았다. 지방에는 자신들 지휘관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서당(誓幢)도 있었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문화와 예술은 그 절정기에 달한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이면에서는 지배 귀족과 왕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어 왕국은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한반도가 몇 개의 왕국으로 갈라져 끊임없이 정복이나 생존을 위해 서로 싸울 때에는, 각 나라의 지배자들은 즉각적인 전국적 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전제적 권력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농민들의 애국적 충성심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제도적인 장치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통일이 달성되자, 중앙집권적 귀족체제는 바로 농민을 착취하는 잔혹한 수단으로 퇴화하기 시작했다. 

 

야심적인 귀족들은 노예를 무장시키고 유랑 농민을 모아 들여, 자기 개인의 군대를 만들었다. 공개적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신라의 마지막 155년(780-935) 기간 중에는 무려 20명의 왕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왕위 경쟁자들은 종종 지역의 우두머리들과 연합을 했다. 지방 성주들 일부는 중앙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신라 말기에 와서는 지방 토착의 우두머리들이 수도에서 파견한 지방 관리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성주가 되었다. 13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889년에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반란이 이어졌다. 가난한 농민 출신의 지도자 한 명과, 왕궁에서 쫓겨난 왕자 한 명이 마침내 농민 반란 세력들을 규합하여 892년에는 후백제를, 901년에는 후고구려를 각각 세웠다. 한반도의 후삼국 시대(892-936)는 중국 본토에서의 5대10국 시대(907-60)와 대충 일치한다. 

 

왕건은 개성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해상무역에 종사해왔던 강력한 토착세력 출신이었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장수로 시작을 해서, 주변 장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 왕조(918-1392)를 창건했다. 935년에는 신라왕의 항복을 받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14 고려는 젊고 강건한 농민들을 선별하여 세습적인 병호(兵戶)를 구성하고, 농지뿐 아니라, 2개의 가구를 부속시켜 주어 병호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왕건은 골품제도를 해체하고, 다양한 씨족들로부터 세습적 귀족계급을 구성했다. 15 고려 왕조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관리들을 선발하기 위해 중국식의 과거제도를 도입했으며, 정교한 중국식 정부조직을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귀족 혈통이 계속 정치권력을 결정했다. 그들은 정부의 고위관직을 독점하였고, 그들의 딸들을 왕과 결혼시켰으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교육기관을 지배하였다. 비록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이 고려 왕조 말기에 와서 전통적 귀족계급을 견제하는 적극적 역할을 하게 되지만, 고려 역시 본질적으로는 세습적 귀족 사회였다.

 

왕건은 자기 자신을 고구려 왕조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여, 발해가 926년에 거란(916-1125)에게 망하자, 발해의 마지막 태자와 지배계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5만 명 이상의 발해 귀족들이 고려로 피신하였으며, 왕건은 발해 태자를 공식적으로 고려 왕족에 포함시켰다. 관리, 기술자, 농민들을 포함하는 발해 피난민들의 물결은 1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발해의 지배를 받아왔던 대부분의 여진족은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고려를 그들의 종주국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6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5 (2005. 7. 16.)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각주] 

1. 645년, 나카노 오오에(천지, r.661-71) 왕자가 나카토미 가마다리(中臣鎌足, 614-69)의 도움을 받아 소가 씨족을 제거하였다. 가마다리의 아들 후지와라 후비토(659-720)는 다이카 가이신을 실행하고자 노력했으며, 날로 늘어가는 관료 조직을 수용하기 위해 개국이래 최초로 영구적 수도를 세울 생각을 했다. 지토오(持統, r.686-97)는 694년에 후지와라교(藤原京)로 옮길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구적 수도”로 옮긴지 불과 16년 만에, 후비토는 다시 수도를 후지와라교에서 북쪽으로 16킬로 떨어진 헤이죠교(平城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710년 이전까지 야마도 왕국은 영구적인 성격의 수도가 없이, 새로 왕이 즉위 할 때 마다, 마치 유목민들이 천막을 접고 이동하듯, 아스카 지역 내 다른 장소에 왕궁을 새로 짓고 도읍을 옮겼다. 이런 식으로 옮겨 다니니, 왕궁이나 도읍의 규모가 클 수가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야마도 왕국 고유의 특징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바로 징집되어 (3년간) 자기 고향 땅에서 지방 관리의 지휘를 받거나, 수도, 전방, 혹은 (조정에서 일시적으로 군사적 임무를 부여 받은 귀족들의 지휘를 받으며) 주요 전쟁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전에는 모노노베와 오오토모 씨족이 왕의 군대를 직접 지휘했으나, 군사적인 권력과 비군사적인 권력은 마침내 지방행정 단위에서부터 분리가 되었다.

 

3. 784년에는 헤이죠교에서 나가오카교(長岡京)로 수도를 옮겼고, 794년에 다시 헤이안교(平安京)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 천도들은 800년경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한발이 시작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4. 조정의 귀족들은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빌어 면세혜택을 받도록 해 주고, 그 대가로 생산물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후지와라 씨족은 가장 큰 규모로 장원 소유 권한을 보유했었다. 결과적으로, 호구의 등록과 농지의 배분이 중단되고, 국유지는 모두 개인 소유지로 흡수되었다. 

 

5. Tsunoda (1958: 109)에 의하면, “중앙에 의한 지방의 통제라는 것은 애초부터 미약했던 것이었지만, 9세기와 10세기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토지-조세 제도를 조롱거리로 만든 호족들에게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중세 (12-16세기) 일본의 봉건적 특징은 헤이안 시대(794-1192)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6. Sansom (1963: 236) 참조. 일찍이 792년에 야마도 조정은 이미 전국적으로 농민을 징집하는 정책을 포기하였고, 지방단위의 관리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각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고통 받는 백성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10세기경, 비참의 정도가 극에 달한 백성들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불교 지도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7. Friday (1992: 4) 참조. 

 

8. Farris (1992: 150-2, 375)에 의하면, “10세기 일본의 농민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움직였기 때문에 농민 우두머리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으며, 무사들은 제 좋은 대로 오고 갈 자유가 있었다” 농민 병사들은 약간의 땅을 경작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도둑질과 약탈에 의존하여 삶을 유지하였다. 

 

9. 5-6세대가 지나면서도 왕을 배출하지 못한 왕족의 후손들은 왕실로부터 분가되어 다른 귀족들처럼 성(姓)을 하사 받았다. 왕실은 성이 없었다. 814년, 사가(嵯峨, 809-23)왕은 자식들 50명 중 33명을 분가(分家)시켜 미나모도(源)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본래의 사가겐지(源氏)이외에도 세이와(淸和, 858-76), 우다(宇多, 887-97)왕 등을 원조로 하는 미나모도 씨족들이 있다.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세운 미나모도 요리토모(源賴朝)와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도 세이와 겐지의 분파(分派)이다. 825년, 간무(桓武)왕은 손자에게 다이라(平)라는 성을 하사해 분가 시켰다. 그 후, 왕실로부터 분가한 왕족들의 성씨는 모두 미나모도 아니면 다이라 이었다 간무의 증손자도 다이라 성을 하사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무사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미나모도 요리토모 사후에 막부(幕府)를 장악했던 호조 가문도 다이라 출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그들의 선조를 미나모도 계열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10. 비록 조정의 귀족들은 계속 사무라이들과 권력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을 했지만, 가마쿠라에 군사정권 수립으로 야마도 조정에 의한 실질적 통치는 사실상 끝이 난 것이었다. 세습 귀족적 야마도 조정의 몰락으로 새로운 지배층이 무대에 등장하였으며, 국가 운영에 지방민의 참여가 한층 커졌다. 군사정권은 그 형태만 약간씩 바뀌면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Tsunoda, et al. (1958: 181) 참조. 

 

11. 봉건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는 1572년에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했으나, 그 자신도 1582년에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살해당하였다. 1590년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조선 침략(1592-8)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도입한 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에도(江戶)에 근거지를 둔 다이묘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1603-1868)는, 일본 열도에 264년에 걸친 (무사계급이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을 지배하는) 안정적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 진골 왕족의 바로 아래 위치한 6두품(頭品)은 왕족들에 의해 관직에서의 승진을 제한 받았다. 6품에서 4품까지의 귀족은 하위직만을 차지할 수 있었다. 3품에서 1품은 평민을 가리킨다. 골품제도는 사용할 수 있는 의복, 수레, 일상 집기의 종류와 식솔의 숫자까지 규제를 하였다. 진골 협의회는 왕위 계승과 전쟁선포 등을 결정하였다. 

 

13. 그들은 지방 백성들과 농토가 없어 떠도는 유랑자들을 모집하여 자신들 개인의 군대를 만들어 지휘를 하고, 농민들로부터 세금과 노역을 징수했다. 결국에 가서는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기의 시작은, 800년경을 전후로 하는 전세계적 한발의 시작과 일치한다. 

 

14. 왕건과 그의 뒤를 바로 이은 후계자들은, 사회 전체를 제도적으로 재조직하여, 보다 공평한 토지-조세 제도를 도입하고, 많은 수의 노예를 해방시켜, 평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시켜 주었다.

 

15. 왕건은 강력한 성주들에게 왕의 성(王姓)을 하사해 주고, 수많은 지방 씨족의 지도자들과 혼인을 통한 연맹을 형성 해, 6명의 왕비와 23명의 처를 두었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과도 각자의 딸과 서로 혼인을 함으로서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16. Henthorn (1971: 96) 참조. 발해의 말갈-여진족의 일부는 한반도 동북쪽의 함흥 평원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압록강 주변으로 이주하였다. 이기백(1984: 126)에 의하면, “말과 모피를 받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곡식, 의복, 철제농구, 철제무기 등을 제공한 것은 고려였다. 그들 일부는 고려 영토 안으로 이주를 했지만, 원래 거주하던 곳에 남아 있던 많은 여진족도 고려를 신뢰했다. 고려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농지와 주택을 주고,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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