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목차>

 

1. 만주의 어느 지역을 한족(漢族)이 몇 년 동안이나 직접 통치를 했던가?

 

2. 금(金), 청(淸) 황실이 믿고 있던 그들 조상의 원류

 

3. 백제의 요서(遼西)진출 기록: 백제의 강역(彊域)

 

4. 동아시아 역사 분석의 틀: 만주, 몽골초원, 그리고 중국대륙

 

5. 홍산(紅山)문화의 후예: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6. 앙소(仰韶)문화의 후예: 화하족(華夏族) 역사공동체

 

7. 평화공존: 화친(和親)정책 혹은 조공(朝貢)관계의 실체

 

8.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9. 2원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북위(北魏,) 출현의 예고

 

10. 이원통치체제의 유지: 첫 정복왕조 북위(拓跋鮮卑 北魏)의 출현

 

11. 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연 나라를 통한 철기문화의 전파

 

12. 부여-고구려 예맥(濊貊), 숙신-읍루 퉁구스, 선비 연(燕): 친밀한 역사

 

13.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14. 백제: 마한 지역에 건국을 한 부여-고구려의 분파

 


연재에 앞서

  •  업코리아
  •  승인 2004.12.14 00:00

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에 흥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연구자가 적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적다. 홍원탁 교수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20년 이상 연구해 왔다. 많은 외국 사이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국의 관점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이 연재는 간단한 국문 요약과 함께 영어로 제공된다. 원문은 순영어로만 된 PDF로 제공된다. 이 연재에서 사용된 참고 문헌은 PDF문서 에 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 [인터뷰] 한일고대사..동아시아 역사, 모두 왜곡됐다  

 

[인터뷰] 한일고대사 . . 동아시아 역사, 모두 왜곡됐다

업코리아 webmaster@upkorea.net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일간지에서 나를 인터뷰해서 나온 기사를 보면 ‘경제학자가 한일 고대사를 연구했다’ 이런 식으로만 난다. 내가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지 20년도 넘었는데 아직 그런 식으로 기사가 나온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국제 역사학계에서 내 책을 어떻게 리뷰 했고,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가 초점이 되어야 한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 본질에 대해 너무 모르고 정확한 역사를 알려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역사소설 수준의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 한다고 떠든다. 무었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옆에서 화가 나서 볼 수가 없다. 책을 아무리 쓰고 좀 보라고 해도 안 본다. 일본정부와 합의하에 우리정부도 20억을 들여 우리 쪽 한일관계역사 연구위원회를 만들었다는데 그 위원회에 한일 고대 관계사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뭐 하겠는가.

 

현재 두 가지가 큰 이슈인데 하나는 한일관계 역사 왜곡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역사의 왜곡이다. 일본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역사를 왜곡해왔다면 중국 사람들은 수천 년간 중국 위주로(Sinocentric) 역사를 왜곡해왔다. 내가 고대한일관계에 대해 88년에는 영어로만 책(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Early Period: Paekche and Yamato Wa)을 냈다. 94년에는 영문판(Paekche of Korea and the Origin of Yamato Japan)과 한글판을 함께 냈다(百濟와 大和日本의起源).

 

그런데 그 한글판은 아무도 안 보더라. ‘내가 국문으로 글을 쓰는 스타일이 나빠서 사람들이 많이 읽지 않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작년에 출판된 책(古代韓日關係史: 百濟倭)은 특별히 한글세대를 염두에 두고 썼다. 하지만 교보문고에서 한 달도 안돼 안 팔리는 책이라고 서가에서 빼버리더라. 다시 영어로 써서 외국학자들이나 읽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사람들은 사대사상이 굉장히 강해서 서구 사람이 영어로 한 말이라면 무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방식대로 서구학자들이 내 연구결과를 우선 받아들이도록 해 일본사회에 내 연구결과가 반영되게끔 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계에 반영이 된다는 건 기대할 수 없는 얘기일 것이다.“ (注;이것이 현 역사학계의 현주소이다.)

 

 

중국 한족이 이민족에게 지배 받은 기간은 2천년, 중국 역사의 절반

 

 

- 동아시아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어 있나?

 

20년 넘게 고대 한일관계 자료를 찾다보니까 여러 가지의 역사책들을 들여다보게 됐다. 내 생각으로는 동아시아 역사는 중국 중심으로 이천년 이상 왜곡이 되어 왔다. 객관적인 사실은 중국 한족이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은 기간이 지난 2천년 중국역사의 절반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보아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등 세 지역 간 작용-반작용의 역사다. 만리장성 남쪽의 중국대륙은 한족, 만리장성 북쪽은 투르코-몽골족의 본거지였다.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만주의 서부 초원지역은 선비-거란족의 본거지였고, 중부 평원지역은 예맥족, 동부 산림지역은 숙신-말갈-여진족의 본거지였다.

 

지난 이천년 동안 중국 땅에 다섯 개의 정복왕조를 수립한 이민족들이 있었는데, 그 중 네 개가 만주 출신이었고, 한 개가 몽골고원 출신이었다. 이 다섯 왕조가 천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했다. 5호16국의 혼란기 중 선비족의 전연(349-70년)이 화북의 동쪽지역을 잠시 점령했었다. 하지만 북중국 전체를 점거한 최초의 이민족 왕조는 선비족의 북위(386∼534년)다.

 

그 다음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916-1125년)다. 거란족은 선비족의 후예다. 그 후 금나라(1115-1234년)가 북중국을 지배했다. 금나라는 만주 동부의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여진족은 요를 깨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냈다. 그 다음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1271∼1368)이다. 마지막으로 청나라(1616∼1912년)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라이름을 후금이라 했다. 모두 합치면 이민족 통치가 869년 간이다. 여기에 5호16국(302-439년)과 5대10국(902-960년)의 혼란기를 감안해야 한다.

 

동아시아 역사는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간의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

 

 

 

- 중국 한족이 동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많은 사학자들이 220년에 후한이 멸망한 후 618년에 등장한 당나라를 중국한족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시대로 간주하는데, 사실을 좀 보아야 한다. 당 고종(618-26)이 수나라를 승계하고, 당 태종(626-49년)이 사방을 정복할 때 고구려에게는 크게 패했다. 660년에 정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고종(649-83)을 내세워, 혹은 자신의 아들들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하다가 690년에는 아예 주나라를 세워 710년까지 자신이 직접통치를 했다.

 

그 후 755-63년의 안록산-사사명 난을 전환기로 907년에 완전히 망할 때까지 당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그런 당나라를 온 세상의 사학자들이 얼마나 미화를 했나? 그 이후를 보면, 명나라가 276년간 통치한 것을 빼고 한족이 제대로 중국대륙의 주인노릇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분석의 틀은 나 혼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는 이 비슷한 내용도 없다.

 

 

-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세 지역 사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진시황 이후 한족 중에서도 몇 차례 무력정복의 위업을 세운 황제들이 나오는데 전한 무제(전141-87), 당 태종(626-49), 명 영락제(1402-24) 등이다. 이들 당대에는 북방 이민족들이 꼼짝을 못했다. 그렇지만 잠시 뿐이었다. 이들이 죽고 나면 다시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고 각종물자를 바쳤다. 당나라 때에는 위구르-터키족에게도 온갖 물자를 갖다 바치면서 내란이나 다른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통사정 했다. 안록산의 난 때도 위구르-터키족이 와서 평정을 도와줬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주-중국대륙 관계와 몽골고원-중국대륙 관계의 성격상의 차이다. 몽골고원의 흉노-돌궐 유목민족들은 인구가 조밀한 만리장성 이남의 정주농경지대를 정복하고 통치한다는 것이 체제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단순히 한족을 약탈하고 겁줘서 필요한 물자를 갈취하는 전략을 택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살육-파괴를 하면 한족들이 화친-조공이란 체면치례 하에 매년 비단, 술, 양곡, 돈, 공주까지 바치면서 화해를 했다. 이는 만리장성 국경을 지키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만주족들은 기회만 생기면 중국대륙을 점령하고 직접 통치하려했다. 역사학자들의 이론 전개가 재미있다. 몽골 고원은 농경사회가 아닌 유목사회여서 정주 농경민족을 다스리는 법을 몰랐는데 만주에 사는 민족은 송화강-요하 유역의 농경문화 존재 덕분에 정주농경사회를 통치하는 비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만주 서부 목초지의 선비족이 강성할 때는 요하 유역의 도시와 농촌을 점령해 중국식으로 관료적 통치를 했었다. 군사조직은 유목민족 고유의 시스템을 지키고, 비군사 관료조직은 중국식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선비 모용씨가 요하지역을 다스릴 때 개발하고 모든 만주정복왕조가 애용한 이원체제(Dual System)이다.

 

이와 같은 이원체제를 발전시키니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농경민족을 통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북위가 이 방법으로 북중국을 통치할 때, 몽골고원의 유목민족들은 만리장성 부근에 접근도 못했다. 막강한 북위 기병이 오히려 몽골 유목민들을 계속 핍박 했었다. 북위가 망한 것은 너무 중국화 되어 군조직과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을 때였다. 선비족 후예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웠을 때도 이원체제를 고수했다. 여진족의 금나라,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몽골고원 유목민족 중 예외가 있다면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다. 과거 흉노-돌궐 족이 만리장성 아래 중국한족을 협박하면 겁을 먹고 알아서 온갖 물자를 받쳤는데, 징키스칸이 쳐들어 올 당시에는 만주 출신 금나라가 북중국을 점거하고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동부만주 산림 속에서 보통 독하게 산 족속이 아니었다. 몽골족의 협박에 굴복하기 보다는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 와중에 몽골족은 금나라의 시스템을 배우고 중국을 통치하는 법을 터득했다. 몽골은 당시 중앙아시아를 이미 정복했었는데. 그 곳에서 위구르-터키 족 전문가들을 데려와 중국통치 관료조직에 이용할 수 있었다. 원나라가 중국 전 대륙을 정복한 것도 당시 몽골의 유라시아대륙정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고 나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할 수 있느니 없느니 하는 얘기가 나올 여지가 없다. 중국 한족은 이민족한테 침략과 통치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지금처럼 영토가 커진 것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청나라 건륭, 옹정, 강희 세 만주족 출신 황제들의 활약 덕분이다.

 

 

억지부리는 중국 한족

 

- 말씀을 듣고 보니 중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한족이 만주 전체를 먹은 건 1912년 이후다. 그 이전에 요동 근처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기는 했다. 한 무제가 고조선 치고 한사군을 설치했지만 오래지 않아 대부분 쫓겨났다. 수나라 때도 요하까지는 몇 번 왔었다. 그 다음 당 태종이 시도를 해보았고, 나중에 측천무후가 백제, 고구려를 정복하고 도독부들을 세웠지만 신라에 의해 678년에 한반도로부터 모두 쫓겨났고, 요동은 발해의 땅이 되었다. 안록산의 난 이후에는 당의 영향력이 발해에 밀려 산해관의 만리장성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한족이 요동 근처를 얼쩡댄 게 얼마나 된다는 말이냐. 지난 3천년간 900년도 안된다.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 중국을 점령한 것이지 한족이 만주를 차지한 게 아니다. 청나라 때 만주족들은 중국한족들이 만주에 얼쩡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수 백리에 달하는 도랑을 파고 제방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한족진입을 금지했다. 만주 땅은 만주족들이 말 타고 사냥하면서 상무정신을 키우는 곳이지 한족이 가서 농사를 지으라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는 18세기 말까지 거의 무주공산의 빈터 같이 보였다.

 

청나라가 쇠망하면서 중앙정부 통제력이 사라지니까 한족들이 만주로 대거 진입했다. 그래서 만주 인구의 90% 이상이 한족이 되어버렸다. 옛날에는 100-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땅이었다. 우리나라 중고등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다.

 

 

만주지역의 영향은 현재 중국의 표준어라는 만다린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중국어의 표준말인 만다린어는 원래 요동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중국말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알타이어 계통에 속하고 본래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어들은 중국-티벳트 어족 계통으로 분류된다. 청나라 사람들이 처음 만주족을 동원해 만든 군사조직이 팔기군인데, 후에는 몽골족, 한족의 팔기군도 만들었다. 한족 팔기군은 전체 청나라 병력 중 사분의 삼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한족 팔기군의 핵심은 원래 요하 유역에서 살던 한족들인데 만주 땅에서 만주 민족들과 오래 어울려 살다보니 자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자체도 상당히 알타이어화 됐다.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하고 중국대륙을 통치를 하려고 보니 이들 요동의 한족들이 사용하던 중국어가 가장 귀에 익고 의사소통이 편하기 때문에 청조의 상용어로 쓴 것이다. 즉 청나라가 요동에서 가지고 온 말이 만다린어다.

 

알타이어 특징이 중국어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고 또 어미변화가 굉장히 많다는 것인데, 만디린어 역시 중국방언 중 어미변화가 가장 많다. 그래서 일부 언어학자는 이 만다린어를 중국어가 아니라 만주어로 분류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한다.

 

홍교수는 1981년 오사카대 모리시마 경제학 교수가 쓴 ‘왜 일본은 성공했는가(Why Japan has succeeded)’란 책을 읽다가 일제 때 국민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왔음직한 얘기를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모리시마가 고대에 마치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 같이 서술하는 것을 보고 한일 고대사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왜 관심을 가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또 잘 모르고 있는 고대사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게 할까 하는 고민으로 각종 역사서적을 탐독하며 한일 고대사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은 백제가 세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북아는 한바탕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감정을 앞세워 대응하다가는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왜곡된 논리에 어이없이 당하기 십상이다. 홍교수가 한일 고대사와 동북아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만이 21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구현한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고대 야마토 왕국은 백제가 세웠다

 

- 고대 한일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핵심만 말씀드리겠다. 일본 고분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을 보면 대략 기원 후 375년경을 전후로 해서 그 성격이 확 바뀐다. 예를 들자면, 375년 이전 유물에서는 말뼈, 안장 등 말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375년경 이후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내몽골-북중국의 유목민족을 연구해온 동경대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이렇게 급격하게 유물의 성격이 바뀌는 건 자연발생적 변화가 아니라고 봤다. 그는 아시아 대륙에서 말 탈 줄 아는 어떤 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1948년에 발표된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다.

 

1945년 이전에는 이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학설을 감히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국주의가 종식된 후에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발표를 한 것이다. 에가미는 기마민족설에 관한 책과 논문들을 계속 쓰면서 2003년에 죽을 때까지 줄기차게 이를 주장했다. 하지만 에가미 교수는 그 정복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갈팡질팡했다.

 

그런데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가 에가미가 정복민족에 대해 지나치게 횡설수설한다고 보고 1975년에 자기가 정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레드야드 교수는 346년 경 부여가 선비족한테 공격받아 대판 깨진 뒤 그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또 곧바로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검토해 보면 부여사람들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이라는 주장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여 사람들이 아니라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여러 번 읽어보면 직관적으로 그런 확신이 생기게 되어있다. 물론 주몽이 동부여(혹은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고, 온조가 졸본부여로부터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고,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 남부여라고도 불렀으니 백제사람을 부여사람이라고 부를 만도 하기는 하다. 하지만 347년경에 선비족한테 깨진 부여사람들이 한반도를 무인지경처럼 휩쓸고 또 현해탄을 건너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내가 88년에 영문으로 처음 출판한 한일고대사 책은 고작 5년 정도의 연구 결과물이었다. 어떤 말이던 좀 제대로 된 말을 하려면 최소한 10년은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서 한 5년 정도 더 연구를 하면서 개정판을 썼다. 그런데 내 동생이 국문으로도 번역을 해서 함께 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해서 직접 번역을 하고 자비를 들여 94년에 영문과 국문판을 동시에 출판했다. 영문판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도서관들에 모두 보내 주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국문판을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글을 쓰는 스타일에 문제가 있다고 반성을 하고, 다음번에는 특별히 한글세대를 염두에 두고 책을 써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고대 한일관계사, 백제왜’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을 썼다. 하지만 여러 출판사들이 수지타산에 안 맞는다며 출판을 거절했다. 다행히 일지사 김성재 사장께서 ‘내가 돈을 보고 출판하는 사람이냐’며 2003년에 출판을 해 주었다. 이 책 역시 별로 판매가 안 되었기 때문에 김사장님께 미안한 생각이 든다.

 

 

홍원탁 교수 약력

-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1962년)

-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 경제학 박사 (1966년)

- KDI 수석연구원 (1971-77년)

-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부 교수 (1977년-현재)

 

인터뷰=이병혜 수석편집기획위원

정리, 사진=길준범 기자

 


1. 만주의 어느 지역을 한족(漢族)이 몇 년 동안이나 직접 통치를 했던가?

  •  홍원탁
  •  승인 2004.12.14 00:00

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에 흥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연구자가 적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적다. 홍원탁 교수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20년 이상 연구해 왔다. 많은 외국 사이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국의 관점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 편집자 주 

 

만주의 어느 지역을 한족(漢族)들이 도대체 몇 년 동안이나 직접 통치를 했던가?

 

한 무제(漢武帝)가 기원 전 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하고 난 후, 한족(漢族)들은 요동(遼東)이라 불리는 비옥한 요하(遼河) 유역에 이주해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지난 3000여 년의 기간 중 (BC 1,000-AD 2,000) 800여 년 내외에 걸쳐서 간헐적으로나마 한족 왕조가 직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지역은 만주의 단지 일부분에 불과했다. 한족들이 정착했던 지역은 대부분 요하 유역의 충적지대와 요동반도의 고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만주 서남부의 삼각형 모양의 지역에 국한되었었다. 이 지역은 도랑을 파고 제방을 쌓아 만든 장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요새화 된 관문들도 설치되었다.  

 

▲ 2.1. Ming Boundary&nbsp; Blunden and Elvin (1998: 94)

 

만주족의 청조(淸朝, 1616-1912)는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주요 정책중의 하나로서, 그들의 본고장을 한족의 생활과 문화로부터 격리된 기지로 만들어 유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족들이 요하 유역을 벗어나 만주 여타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668년에는 북만주와 동만주에의 한족의 이주가 법으로 금지되었다.

 

청조 초기에 만주의 서남지역을 가로질러 도랑을 파고 제방을 쌓기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수리를 하고 확장을 했다. 이 도랑과 제방은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심양(瀋陽) 북쪽의 요하를 건넌 다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는 압록강 변에 이르렀다. 도랑과 제방으로 이루어진 이 방책은 한족의 거주가 허용된 만주지역의 한계를 표시한 것이다

 

도랑을 파고 제방에 버드나무를 심어 놓은 장벽이 수백 마일에 이르렀는데 이를 유조변(柳條邊)이라고 불렀다. 청조 때 유조변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1437-42년 사이와 1479-81년 사이에 축조된 명조(明朝)의 방어벽(邊墻)으로 둘러싸인 지역보다 약간 넓었다. 명조의 방어벽은 몽골-선비(鮮卑)족과 여진(女眞)족의 침입으로부터 한족의 거주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이 방어벽은 만주지역에서의 명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했었다  

 

     
▲ 2.2. Qing Willow Palisade  
(Qingdai Liu-tiao-bian 淸代柳條邊 楊樹森, 遼寧省: 人民出版社, 1978)

 

산해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압록강 어귀에 이르는 내유조변(內柳條邊, 老邊)은 북부 만주와 동부 만주로 한족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심양 북쪽의 요하와 길림(吉林) 북쪽의 송화강과 연결된 외유조변(外柳條邊, 新邊)은 몽골-선비족들이 만주 지역으로 넘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20여 개의 초소(카룬)들을 설치한 다음, 만주 팔기 (八旗)와 몽골 팔기를 배치하여 유조변을 순찰토록 하였다. 만주족은 그들의 본고장에 한족들이 이주해 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만주 땅 대부분을 한족의 농업경제에서 격리된, 자신들만의 활 쏘며 사냥을 할 수 있는 터전으로 존속시키고자 하였다. 강, 산림, 사냥터들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만주 지역은 오랫동안 만주족을 위하여 이처럼 보존이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요동의 한족들 상당수를 한인팔기 (漢人八旗)의 형태로 동원하였다.  전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난 후, 청나라 통치자들은 많은 수의 한인팔기를 재분류하여 만주족과 동일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들 자신은 계속 만주어를 사용하면서, 정복된 한족들에게는 상당히 알타이어화된 요동의 중국어를 관화(官話)로 정하여 사용토록 하였다. 요동출신 한인팔기들이 사용했던 중국어가 만주족 지배층의 귀에 친근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3천 년간(BC 1,000–AD 2,000)을 돌아보면, 요동은 겨우 84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만 한족들에 의해 직접 통치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BC 108년에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정복한 이후의 한대 328년의 기간(108 BC-220 AD), 조조(曹操) 위(魏, 220-265)의 45년간, 그 뒤를 이른 서진(西晉, 265-316)의 51년간, 당(唐, 618-907)이 고구려를 정복한 668년부터 안록산의 난(755-57)이 일어날 때까지의 89년간, 명(1368-1644)나라 276년간,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51년(1949-2000) 간이 한족이 만주를 직접통치를 할 수 있었던 기간들의 상한을 이루는 것이다.

 

2. 금(金), 청(淸) 황실이 믿고 있던 그들 조상의 원류

  •  홍원탁
  •  승인 2004.12.15 00:00

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에 흥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연구자가 적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적다. 홍원탁 교수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20년 이상 연구해 왔다. 많은 외국 사이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국의 관점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 편집자 주

 

ⓒ 2005 by Wontack Hong

 

 

금(金), 청(淸) 황실은 그들 조상의 원류(源流)를 어디서 찾았는가? 

 

청(淸)의 건륭제(1736-96)는 삼한(三韓)의 명칭에 대한 중국 기록들의 혼란상에 주목하였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한(韓)"은 분명히 지도자-통치자라는 의미의 칸(汗, Khan)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중국 역사가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건륭제는 “중국대륙 동북방의 만주족과 그들의 선조들은 중국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이런 식의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고 역설했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1636년까지도 그들 자신의 왕조를 후금(後金)이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금(1115-1234) 왕실의 직계 후예라 천명했다. 건륭제는 1777년 9월 20일 자로 유지(諭旨)를 내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편찬토록 했다. (6년 후인 1783년에 완성.) 건륭제는 그 유지에서 만주족의 유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신이 읽은바 금나라 역사(金史)에 의하면, 금 왕실의 선조들은 옛 숙신(肅愼)지역 내에서 말갈연맹의 일원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 지역은 장백산과 흑룡강이 위치한 곳이고, 바로 만주족이 일어선 고토(古土)라는 것이다. 

 

청나라 황족은 자신들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쓴다. 만주어로 아이신(愛新)은 "금(金)"을 뜻하는데, 건륭제 생각에는 바로 이 사실만 해도 청 황실을 여진족 금나라 황실의 직계후손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청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족의 원류를 숙신-말갈-여진 퉁구스족은 물론, 예맥 퉁구스족의 삼한(三韓), 신라, 백제뿐만이 아니라, 범 퉁구스의 발해까지 포함시켜 추적을 하였다. 그들은 이 모든 퉁구스족의 공통점으로서, 뛰어난 말 타고 활 쏘는 솜씨와 싸움 잘하는 능력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선비-거란과 고구려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선비족들은 청조 통치자들이 생각하는 만주족의 원류와 명백히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발해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범 퉁구스적 존재로 팽창했었던 고구려를 만주원류고에서 배제한 이유는 다르다. 예맥 퉁구스인 고구려의 부각은 숙신-말갈-여진 퉁구스가 만주역사를 주도했다는 그들의 이념에 상당한 손상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서구 혹은 한족 전문가들은 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중요 사실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즉, 금사(金史)에는 금 나라의 시조가 고구려로부터 왔다고 기술되어있으나,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금의 시조가 본래 신라에서 왔으며, 그 부족 명칭이 완안(完顔)이라고 기록되어있다는 사실. 또 금(金)은 본래 신라에서 수십 세대를 걸쳐 내려온 왕성(王姓)이기 때문에 금 나라의 국명이 되었다는 만주원류고의 기록. 금 왕조의 창시자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을 만주원류고가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또 만주원류고의 서문 역할을 하는 건륭제의 그 짧은 유지(諭旨)의 1/4이 한반도 사람들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등.  

 

3. 백제의 요서(遼西)진출 기록: 백제의 강역(彊域)

  •  홍원탁
  •  승인 2004.12.30 00:00

국내에서는 백제의 요서 진출의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 여러 중국 정사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청조의 건륭제가 황명으로 편찬시킨 "흠정 만주원류고"에는 아주 체계적으로, 구체적으로, 요서의 일부를 포함하는 백제의 강역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 편집자 주  

 

ⓒ 2005 by Wontack Hong

 

 

백제의 요서(遼西)진출 기록: 백제의 강역(彊域)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미천왕(309-331)이 319년에 두개의 선비족(鮮卑族)과 연합을 하여 모용외(慕容廆, ?-333)가 이끄는 선비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慕容煌)은 337년에 스스로를 연왕(燕王)이라 하고, 349년에는 전연(前燕)을 세웠다. 진서(晋書)에는 이 모용황에 맞서 고구려, 백제, 선비족이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송서(宋書)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는데, 백제가 통치한 지역의 이름이 진평군 진평현(晋平郡 晋平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양서(梁書)에는 동진(東晋, 317-420)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을 점령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송대(宋代, 960-1279)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346년에 백제가 녹산(鹿山)에 있는 부여를 공격하였으므로, 부여사람들이 흩어져 서쪽에 있는 연(燕)나라 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연왕 모용황이 황태자와 세명의 장군(모두 모용씨)에게 1만 7천여명의 기병을 주어 이미 방어능력을 상실한 부여사람들을 공격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46년은 백제에서 근초고(346-375)가 왕으로 등극한 원년(元年)이다
 
11세기에 편찬된 자치통감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대 기록에 가까운 남제서(南齊書)에서도 북위(北魏, 386-534)가 10만 여명의 기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4명의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488년에) 패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동성왕(479-501) 10년 조에서도 재확인된다. 또 남제서에는 동성왕이 495년에 사절단을 보내 북위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 백제장수들에게 장군 칭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된 10만이라는 대규모의 북위기병이 북중국으로부터 장수왕 (413-491)이 통치하고 있던 고구려 땅을 온전하게 통과 해, 한반도의 서남부에 있었다는 백제에까지 쳐들어 왔다가 패해 돌아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또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당대의 기록에 누락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과 남제서가 말하는 백제란 분명히 요서에 있는 백제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왕의 요청에 의해 남제(南齊) 조정이 백제 장군들에게 수여한 칭호에 들어있는 광능(廣陵), 청하(淸河), 성양(城陽) 등은 모두 분명히 요서의 지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4세기 중 어느 때인가 요서 일부를 점거하여 100년 이상을 통치하였다고 이해 할 수 있다. 백제는 그 역동적인 선비족의 연(燕)나라와 대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끈임 없이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던 당시의 고구려와 맞서고, 동시에 전성기의 북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요서 땅에 백제군을 유지했다는 말이 된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를 보면 백제의 고토(古土)는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고 적혀있다. 만약 백제의 영토가 요서에 없었다면, 그리고 백제의 강역이 단지 한반도의 서남부에만 국한되었었다면, 발해말갈이 백제의 고토를 분할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가 된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중, 백제의 요서진출 기록만큼 그렇게 다양한 중국 정사(正史)에 그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 재확인된 역사적 사실은 없는 것 같다. 또 이 백제의 요서진출 기록처럼 그렇게 많은 일본 학자들은 (논리적? 분석이라는 미명하에) 그토록 미친 듯이 못 믿겠다며 반박을 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겸손을 최상의 미덕으로 내세우는 한국 사람이라면, 신라의 대학자이며 소위 중화사상에 치우쳤었다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말했다는 “고구려, 백제가 한창 강성할 때는 100만 대군을 보유하였으며, 남쪽의 오(吳), 越(월)과 북쪽의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공격하여 중국의 골칫거리가 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만주원류고의 강역(彊域)편에는 백제의 강역에 대해 놀라운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즉, 백제가 요서의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다음은 만주원류고 기록을 거의 있는 그대로를 번역한 것이다 

 

“백제 강역의 경계는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廣寧)과 금의(錦義, 금주- 의주)에서 시작되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틀어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 지역에 이른다. 백제의 강역은 동서로 보면 상당히 좁으나, 남북으로 보면 굉장히 길다. 유성(柳城)이나 북평(北平)에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남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고, 경상 지역이나 웅진에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백제는 북으로 말갈과 접경한다.

 

백제의 왕성(王城)은 동과 서에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이 두개의 성을 모두 고마(固麻)라고 불렀다. 송서(宋書)는 백제가 점거했던 지역이 진평군 진평현 이었다고 기록한다 통고(通考)에 의하면 이 지역은 당나라 때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 수도 중 하나는 요서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땅에 있었는데, 양 무제(梁武帝, 502-519)때에 와서 백제는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겼다.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하고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를 포함하여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동명도독부라는 명칭에 나오는 동명은 백제 건국시조의 이름이며, 기록에 그가 원래 고리(高離)에서 강을 건너 왔었다고 하니 동명도독부는 고리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요사(遼史)를 보면 고리는 봉주(鳳州)와 한주(韓州)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의 개원(開原) 지역에 위치한다. 따라서 동명도독부는 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당서(唐書)에는 백제의 옛 강역이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소멸되었다고 적혀있다.”  

 

4. 동아시아 역사 분석의 틀: 만주, 몽골초원, 그리고 중국대륙

  •  홍원탁
  •  승인 2005.01.08 00:00

Tripolar Interaction: Mongolian Steppe, Manchuria and Mainland China

 

The Tripolar Framework of Analysis

 

동아시아의 역사를 분석하는 기본 단위로서 (1) 전통적으로한족이 지배해 왔다고 간주되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대륙, (2) 투르코-몽골 계통의 몽골고원, (3)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포함하는 선비-퉁구스 계통의 범 만주권 등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3개의 핵심 역사공동체를 설정하고 이들 3극 간의 상호작용이 동아시아의 고유한 역사 체계를 형성한다고 이해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 편집자 주  

 

 

 

동아시아 역사 분석의 틀: 만주, 몽골초원, 그리고 중국대륙  
- 3극간의 작용과 반작용-
  
                                                    
洪元卓 (서울대 교수) 

Barfield(1989: 12)는 몽골초원, 만주, 그리고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대륙을 하나의 역사적 체계를 이루는 3개의 핵심 구성원으로 보고 분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는, 동아시아의 3대 강역을 본거지로 하는 투르코-몽골족, 선비(鮮卑)-퉁구스족, 한족(漢族)들 상호관계의 부단한 변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3극-분석의 틀은, 유목민족 대 정주농경 한족이라는 단순한 양극 접근법과는 분명히 다르다. 양극-분석의 틀을 가지고 접근하는 역사가들은 흔히, 유목민족들이 정착농경민족인 한족들에게서 공물, 특혜적 국경무역, 혹은 왕실간 혼인을 통한 지참금의 형식으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곡물과 직물 등 생활필수품을 확보할 수 없을 경우에는 중국을 공격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약탈해 갔으나, 한족들이 평화적으로 순순히 이 생필품들을 유목민족에게 제공하면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식으로 얘기를 엮어 간다.1  

 

중국대륙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가 5개가 있는데, 그 중에 원(元, 1206-1368)나라 하나만 몽골초원으로부터 왔고, 나머지 4개는 만주에서 왔다는 아주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즉, 탁발(拓拔)북위(北魏, 386-534)와 거란의 요(遼, 916-1125)는 모두 서부 만주 초원지역 출신인 선비(鮮卑)족이 세운 나라들이고, 금(金, 1115-1234)과 청(淸, 1616-1912)은 모두 동부 만주 산림지역 출신인 여진-만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북위와 요 왕조의 선비족 지배자들의 전통은 몽골 유목민족에 가까운데 반해, 금과 청의 여진-만주족 지배자들의 전통은 아주 퉁구스족의 전형이었다. 중국은 한번도 남쪽으로부터 정복된 적이 없다. 

 

Barfield(1989)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몽골 초원과 (만리장성 아래의) 중국대륙은 자연적, 문화적 환경이 아주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농경-정주(定住)의 한족 왕조와 몽골 유목 왕조의 공존이 가능했고, 또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하지만 소위 만주의 동북평원(東北平原)과 중국의 화북-장강중하류평원(華北-長江中下流平原)을 들여다보면 만주와 중국대륙 사이에는 그렇게 극단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부 만주는 상당히 유목민적이고 동부 만주는 삼림이 울창하지만, 그 사이에 위치한 송화강(松花江)-요하(遼河) 유역에서는 수 천년 전부터 수수와 밀을 재배해왔다. 따라서 만주의 소위 “야만인”들은 중국왕조와 몽골초원의 세력이 동시에 쇠약해질 때마다 중국대륙을 정복해 한족을 직접 지배하려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들을 보면,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의 소위 “야만인”들을 크게 둘로 나누어, 서부 만주 요서(遼西) 초원지역의 오환(烏丸)-선비족들을 동호(東胡)라 하였고, 중부와 동부 만주의 퉁구스족들을 모두 함께 동이(東夷)라 지칭하였다.2 동호의 선비족들은 연(燕)과 북위(北魏)를 세웠으며, 요를 세운 거란족도 선비족의 후예다.3 이들 언어는 알타이어의 몽골계통에 속한다. 동이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 등을 세운 예맥(濊貊) 퉁구스와 숙신-읍루의 후예로서 핵심 만주족의 선조인 말갈-여진 퉁구스로 나뉘며, 이들 “동이족”의 언어는 알타이어의 범-퉁구스 계통에 속한다  

 

만주 종족들 중, 현대 한국사람들의 원류인 예맥-퉁구스만이 중국대륙에 정복왕조를 세워보지 못했다. 지난 2천년을 되돌아 보면, 전반 천년 동안 만주 중부의 예맥-퉁구스족들은 서쪽의 호전적 유목민과 동쪽의 사나운 삼림족들에게 밀려 그들 세력권의 중심이 송화강 유역에서 훈강-압록강 계곡으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쳐, 결국은 일찍부터 한반도에 내려와 정착한 옛 예맥 형제들과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하기는 결과론 적으로 보면, 이것도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애당초부터 한반도에 내려와 정착한, 혹은 후에 합류한 예맥족들은 21세기 현재 독립국가를 이루고 사는데 반해, 한때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선비-여진족들과 만주 땅에 남아 만주족에 동화된 예맥-퉁구스족들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 흡수되어 무수한 한족들 속에 파묻혀 고유의 알타이어 계통 언어를 잊고 티벳-중국어(漢藏語系)를 말하며 살게 된 것이다. 

 

언어학자 Janhunen(1996: vii, 15-6)은 “한국과 일본은, 단지 최근의 역사적 운명으로만이 아니라, 그들의 오래 전 과거와 민족적 원류라는 측면에서도 모두 만주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얀후넨은 동북아시아 민족과 언어에 관한 연구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만주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주요 구성원으로 간주한다. 얀후넨은, 한국인들은 중국 정복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반면, 일본인들은 만주족 노릇을 제법 수행해서 짧은 기간이나마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데려다 만주괴뢰국(滿洲國, 1932-45)을 세웠을 뿐 아니라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한다며 중일전쟁을 벌였다고 좀 냉소적으로 들리는 말을 했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려면 풍신수길(豊臣秀吉, 1536-98)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허풍을 떨었던 사실도 언급을 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분석의 기본 단위로 (1) 전통적으로 한족이 지배 해 왔다고 간주되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대륙, (2) 투르코-몽골 계통의 몽골고원, (3)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포함하는 선비-퉁구스 계통의 “범 만주권” 등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3개의 핵심 역사공동체를 설정하고, 이들 3극간의 상호작용이 동아시아의 고유한 역사 체계를 형성한다는 “분석의 틀”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4 (2005. 1 15)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Jagchid-Symons(1989: 14, 23, 165)에 의하면, 유목민족들이 한족과 명목상의 조공관계를 받아들이는가 혹은 쳐들어가 약탈을 할 것인가는 유목민과 한족간의 상대적인 힘의 크기, 초원지역의 기후변화와 전염병이 그들 가축들에게 미친 영향, 각 조정(朝廷) 내부 세력권의 움직임, 양측의 정치적 심리적 동기, 국경지방의 혼란상, 국경지역에 배치된 중국관료들의 부패상, 등등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2. 건륭제는 만주원류고의 서문에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맹자는 순(舜) 임금도 동이라 지칭했다며, 동이를 비하 표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중국 역사가들이 주변민족들을 부당하게 대접을 해 온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Crossley, 1999: 302) 후한서(後漢書)는 “이(夷)”가 야만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저(), 즉, 우주 만물의 근원을 뜻한다고 말한다. 중국의 모든 새 왕조는, 통치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이전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 항시 적지 안은 지면을 할애하여 주변의 야만인들에 대해 기록을 했다. 중국 왕조의 운명이 흔히 이들 야만인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의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 오환-선비족들이 본래 흉노(匈奴)의 동쪽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동호라 불렸다.

 

5. 홍산(紅山)문화의 후예: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  홍원탁
  •  승인 2005.02.02 00:00

Hongshan Culture and the Proto-Altaic Speech Community of Xianbei and Tungus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 만주『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요서의 신석기 홍산(紅山, 4000-3000 BC)문화를 공유하고,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알타이계통 언어권의 홍산문화는 한장(漢藏) 언어권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은 고대 연(燕, 1027-222 BC)나라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夏家店)하층(下層) 문화(2000-1500 BC)에서 찾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같은 지역의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 출현한 유목문화가 전파되면서, 하층문화가 본격적 청동기인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요하 유역에 이르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융합했고,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역에 청동기시대를 전개했다. 기원전 400년경, 연나라는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파했다. Janhunen은 연나라가 애당초 (漢族의) 중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Di Cosmo는 소위 연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한족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사기(史記)는, 서주의 무왕(武王)이 소공(召公)을 북연(北燕)에 봉해주었다며, 남연(南燕)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걸쳐 등장한 전연(前燕), 후연, 서연, 남연, 북연 중 유독 「북연」만을 한족(漢族 馮氏)이 세웠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용 선비(慕容 鮮卑)족이 세웠다. 홍산-하가점 문화를 이어 받은 연나라는 소공의 북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 연나라의 성격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산문화와 『선비-퉁구스』 원시 알타이 언어 공동체

 

정복왕조의 본고장 만주 


洪 元 卓 (서울대 교수) 

 

흉노족의 본고장인 몽골 초원 

 

몽골초원은, 돌궐(터키)족의 선조이며 아마도 몽골족의 선조일 가능성도 있는 흉노의 본고장이다. Fagan (2004: 201)은 “초원지대는 마치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가 충분히 올 때는 목초와 가축들이 잘 자라 유목민들을 흡수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유목민들을 주변지역이나, 이웃나라로 내몰게 된다. 기원전 9세기경, 초원지대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는데, 몽골고원의 목초지가 제일 먼저 이러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경, 가뭄이 초원지역 유목민들을 중국대륙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한족에게 격퇴되었고, 연쇄반응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나, 일부 기마(騎馬)유목민들은 당시 켈트족 세상이었던 유럽의 동부 변경인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몰려가게 되었다.” 1

 

몽골고원은 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반부를 구성하며, 만주의 서쪽 경계로부터 시작하는 초원은 군데군데 높은 산들에 의해 단절이 되기도 하면서 헝가리 평원에까지 도달한다. 언뜻 보면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이 서로 만나서 유라시아 대초원을 절단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가타이의 이밀강(江) 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초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산산맥의 북쪽 끝자락과 타르바가타이 준령 사이의 중가르 관문은 카자크 초원지대로 통하는 중앙아시아의 최남단 통로이다. 알타이산과 타르바가타이 사이의 이르티쉬 계곡 역시 서쪽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몽골고원의 돌궐-몽골 기병들은, 바이칼호(湖)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콘 강둑에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초원을 거쳐, 헝가리 평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달려갈 수 있었다. 이 초원의 통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가는 천산산맥 남쪽의 실크로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교통로 이었던 것이다.  
 
발카쉬호(湖) 서쪽의 (터어키쉬) 초원지대는 평균 고도가 해수면에 가깝지만, 몽골 초원은 평균 해발 1500미터로, 한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가고 한 겨울에는 영하 42도까지 내려간다. 고비는 건조한 초원지대로, 내몽골과 외몽골을 가른다. 북쪽의 목초지는 바이칼호와 흑룡강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들의 유역과 알타이산맥의 동쪽 경사지로 구성되어있다. 알타이지역은 여름의 한낮에는 섭씨 40도를 상회하며, 일조량이 18시간에 달한다. 바이칼호 주변지역은 몽골 초원지대가 시베리아 삼림지역으로 바뀌는 접경지대에 해당된다. 황하(黃河)에 의해 말편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오르도스 평원에 접하면서, 남쪽의 대마군산(大馬群山), 서쪽의 만주 등을 경계로 하는 내몽골도 수많은 유목민들을 부양하였다. 2 돌궐-몽골 족들은 양고기를 주식으로 했고, 염소, 낙타, 소, 말, 등을 길렀다.  

     
▲ 2. Barnes (1993: 109)

 

선비-퉁구스 족의 본고장인 만주대륙

 

만주는, 북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남으로는 칠노도(七老圖)-연산(燕山) 산맥 등을 경계로, 몽골초원과 분리된다. 샤라무렌강(西拉木倫)-노합하(老哈河) 유역으로부터 서요하(西遼河) 유역에 걸쳐 만주 서부의 목초지대가 펼쳐지는데, 이 지역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기슭과 눌루얼후(努魯兒虎)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여기가 바로 동후(東胡)라 칭하는 선비족의 본고장인데, 문화적으로는 몽골에 가까웠다.

 

송화강 유역의 평원지대는, 동쪽의 울창한 삼림을 보면서 시베리아 끝자락으로부터 한반도 북변 산악지대까지 내려가는 도중, 남서쪽의 요하(遼河)유역 평원과 연결되어, 소위 동북평원을 형성한다. 만주의 중부 평야와 동부 산림지역에 살던 이른바 동이(東夷)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돌궐말로 돼지를 “통구즈”라 부른다는 사실을 근거로 “퉁구스”의 어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Janhunen(1996: 221)에 의하면, 이는 언어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접근방법이다.  

 

홍산문화-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신석기 홍산(紅山)문화(4000-3000 BC)의 유적은 요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3 홍산문화는 황하(黃河)중류-위수(渭水) 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황하 하류 유역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킨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들이 이룩한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유물로는 각종 의례용 도구를 포함하여, 점토로 빚은 인체조형물,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 염료를 칠한 통형관(筒型管) 등이 발견되었고,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전통과 양과 돼지를 포함해 가축들을 길렀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竪穴式) 움집과 함께 저장고, 불을 때는 화로 등도 발견되며, “Z”자 모양의 문양, 빗살 문양, 칼끝으로 판 문양으로 장식된 적색 혹은 회색의 (회전판 위에서 완성된) 사질성(沙質性) 토기와 채색토기 및 토기제조용 가마, 수수를 수확할 때 쓰는 조개로 만든 칼 등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했던 공공건물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사회적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중국본토 문화유적의 조각품들을 보면 다분히 추상적으로 정형화 되었지만, 홍산문화의 조각품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 모양을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즐문(櫛紋)-인각(印刻)문 토기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반지, 칼, 손잡이 등과 같이 소형 동제품을 사용하는 초기 청동기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로 이어진다. 4 Barnes(1993: 109)에 의하면,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 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고, 사슴을 사냥하며 살았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 Nelson, 1995: 148-9)은 옛 연나라 (燕, c. 1027?-222 BC)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찾았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곽대순(1995: 179)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나라 문화를 일으켰고, 일부는 그 자리에 남아 연나라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를 (서주-동주 시대) 연(燕)문화의 전 단계로 이해한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 2. Pottery with Incised Designs  
excavated at Xin-le 新樂

 

 

곽대순(1995: 178)에 의하면, 연나라 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사이에는 과도기적인 연계성이 존재한다. 하가점 하층의 채색토기에 그려진 동물 가면 문양은, 그 출현시점이 매우 이르고, 상당히 발전된 형태이었다. 상(商)나라 도철(饕餮-전설상의 흉악하고 탐식하는 야수) 문양의 근원이 된 이 괴물 문양의 전통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00년경까지, 연나라에 존속 되었었다고 말한다. 곽대순은, 서주(西周, 1122-771 BC)시대의 연나라는, 주나라와는 크게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신탁(神託) 갑골(甲骨)에 이미 연(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시 연나라는 상(商, 1766-1122 BC)나라 때 이미 존재해 있었고, 그 문화적 전통이 서주 시대의 연나라에 이어져 보존되었다고 주장한다.

 

     
▲ 3. Sherds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from the Han River Basin Area (Am-sa-dong)

 

유목민 생활 형태는 기원전 1000년경 알타이와 천산 산맥 주변지역에서 출현하여 소위 알타익-스키타이 시대를 전개했다. 스키토-사이베리안 사람들의 초기 유목문화는, 특히 기원전 6세기 이후에는, 장례 때 매장된 청동과 철제 무기류, 기마용 도구, 동물 형상의 공예품, 금과 보석 등 부장품의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몽골고원 초원지대로부터 새로운 유목문화의 도래는, 기원전 3세기경,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스키토-사이베리안과 전혀 다른 집단인 흉노제국의 팽창과 함께 일어난다. 5

 

Barnes(1993: 157-8)는, 하가점 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려 넣은 동제품이 (비록 기마전투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기마전통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말한다. 6 Barnes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시기를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를 상층문화(1100-300 BC)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 3. Sherds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from the Han River Basin Area (Am-sa-dong)

 

Barnes(1993: 153)는, 홍산문화 시대에 이미 그 흔적을 보인 청동기는, 같은 지역의 하가점 상층문화 시기에 와서 아주 본격적으로 다양한 품목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문양의 청동제품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라시안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 상층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기원전 700년경부터 한반도에 본격적 청동기시대를 연 것으로 보았다. Barnes는 또, 고대 연나라가 남부만주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문화적으로 융합했고,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에 철기시대를 전개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북방형-남방형 고인돌 

 

기원전 1300년경 까지는 요동과 요서 지역의 청동검들이 칼날과 손잡이가 분명하게 분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7 그러나 하가점 상층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동검과 달리,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었다. 한반도의 비파형 동검은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유래하며, 후에 세형동검으로 바뀌어 철기시대 초까지 사용된다. 하가점 상층에서는 하층과 달리 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 8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의 여타 지역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는데, 하가점 상층문화는 뒤늦게 (곽대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하 유역방향으로부터 민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9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체를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특이한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길림성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밀집된 형태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한반도이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시대 말기쯤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말기쯤 나타난 것 같으나, 이 두 형태의 고인돌은 그 분포지역이 상당히 중복된다. 고인돌의 축조는 기원전 300년경에 중단된 것으로 생각된다.10 

 

돌을 사용하는 매장 방법, 토기의 형태, 청동제품 등의 유사성은 만주를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으로 연결시킨다. Di Cosmo(2002: 67)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으로부터 상층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실상은 하가점 상층문화와 북쪽의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 사이의 연관성이 완전히 구명될 때까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흑룡강, 눈(嫩)강, 송화강, 요하 등을 연결하는 만주대륙의 물길(水路)이 이들 전 지역에 철 제조 확산 과정을 포함하는 천연의 교통로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lson(1995: 252, 14)에 의하면, 동북지역에서 청동 제품이 상당히 일찍 발견되는데, 특히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 제품들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상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차도 동북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의 어설프고 야만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Nelson은 홍산문화는 중원의 문화와 분명히 다르며, 단지 그들이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소공(召公)의 북연(北燕, 1027 BC), 한족(漢族 馮氏)의 북연(409-36), 선비족(慕容 鮮卑)의 남연(南燕)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武王)은 소공에게 북연(北燕)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봉해주었고 (c. 1027-1025 BC), 그가 연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각주(註)에는, 이 봉토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연나라, 즉, 남연(南燕)이 존재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소공의 연나라 수도는 오늘날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연나라가 진시황제에게 멸망되기 90년 전인 기원전 311년, 연은 진개(秦開)를 시켜 동호(東胡=鮮卑)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혔다 한다. 12 한 고조(r. 206-195 BC)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후에 흉노한테 도피를 했고, 흉노는 그를 동호왕으로 임명했다. 연나라에 관한 기록에 “동호”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기 각주에 나타난 남연이라는 존재, 후세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 한족들한테는 모반을 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사실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Janhunen(1996: 224)은, 고대의 연나라는 애당초 중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원시 투르코-몽골족이 바로 초창기의 연나라를 구성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구사하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모두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옛 전통을 공유하며 홍산문화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한족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말 한다면, 선비-퉁구스족은 홍산문화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3 중국대륙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른, 요서의 신석기 홍산문화 유산의 상속-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범“선비-퉁구스” 계통의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5 (2005. 1. 22.)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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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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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ontackHong.pe.kr 

 

[각주] 

1. Lamb(1995: 150)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대략 기원전 1,100-800년 기간 중, 빙하기 이후 가장 온화했던 기후가 끝나는 동시에, 가뭄도 왔다. Huntington의 기후-맥박율동 이론(1907)에 따르면, 기후 조건의 변화가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활동을 야기하는데, 건조 주기가 심화되어 목초지가 말라버리면 유목민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다니다가 다른 유목민과 싸우게 되고, 결국은 이웃한 정착 농경민족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Lattimore (1961: 331) 참조. Toynbee(1947: Vol. I-VI, 170)에 의하면, 주기적으로 건기와 습기가 반복되는데, 유목민들이 기르는 가축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으로 건조하게 되면, 유목민들은 주변의 문명사회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접근 방법에 반발하는 Di Cosmo(2002: 67)는 각 지역 특유의 발전과정을 무시하는, 기후변화라든지 한족(漢族)의 영향이라는, 백해무익한 기계적 설명을 삼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바이칼호 주변지역으로부터 퍼져나간 종족들의 강인한 유전적 특성은, 혹한의 긴 겨울과 혹서의 짧은 여름, 강풍이 불어대는 최악의 기후조건에서 목축과, 수렵, 그리고 원시적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해 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진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몽골고원 토종 말들 또한, 자연도태-적자생존 원칙의 결과, 짧고 굵은 다리와 조밀한 털로 덥힌 작으면서도 강인한 몸집에, 인내력과 생존능력이 뛰어난 유전적 유사성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영역은, 북으로는 샤랴무렌강을 넘어 몽골고원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요하의 하류, 그리고 남으로는 발해만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연산산맥을 넘어간다. 홍산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지는 주로 노합하(老哈河) 주변, 적봉(赤峯)시 교외의 영금(英金)강 계곡, 샤라무렌강 유역 등에 위치한다. 앙소문화 유적지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인 여자의 입상과 전신(全身)조각상, 제사의식을 행하던 공동신전(共同神殿)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 Nelson (1995: 14, 25) 참조.  

 

4.  Nelson(1995: 148-9)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는 바로 그 지역의 홍산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하가점 상층문화로 이어진다.  

 

5. Di Cosmo (2002: 32-43) 참조. 

 

6. Di Cosmo (2002: 64) 참조. 

 

7. Nelson (1995: 198-9) 참조. 

 

8. Barnes (1993: 162) 과 Nelson (1993: 133) 참조. 

 

9. Nelson (1995: 175-7) 참조. 한반도 최초의 무문 토기는 기원전 2000년경에 나타났다. Nelson (1993: 113-6) 과 Barnes (1993: 160-1) 참조. 하가점 상층 문화는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약 8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Di Cosmo (2002: 62) 참조. 

 

10. Nelson (1995: 16, 147) 와 Barnes (1993: 166-7) 참조. 

 

11. 史記 卷三十四  燕召公世家第四 周武王之滅紂 封召公於北燕  宋忠曰 有南燕 故云北燕  
其在成王時… 自陝以西 召公主之 自陝以東 周公主之 … 孝王二十七年 燕見秦 且滅六國… 燕王亡 徙居遼東…秦拔遼東…太史公曰… 燕迫蠻貉 內措齊晉 崎嶇彊國之閒 最爲弱小  

史記 卷九十三 韓信盧綰列傳 第三十三 …盧綰親與高祖 … 漢五年 …迺立盧綰爲燕王…故燕王臧荼子衍出亡在胡 … 高祖崩 盧綰遂將其衆亡入匈奴 匈奴以爲東胡盧王 … 孝景中六年 盧綰孫他之 以東胡王降… 爲東胡王來降也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 五十 …燕北有東胡山戎 … 臨胡貉 … 燕有  賢將秦開 爲質於胡…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 置 … 遼西遼東郡而拒胡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閒 …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地踔遠人民希 …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貊]朝鮮…之利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c. BC 403] 燕自尊爲王 [323 BC] 欲東略之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오늘날의 북경 서쪽 방산(房山)에서 연후(燕侯)라는 글자가 새겨진 몇 개의 청동제품이 발굴되었다. 연후라는 명칭이 새겨진 청동제품은 오늘날의 요녕성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다. Loewe and Shaughnessy(1999: 410)는 연나라의 영향력이 요녕성에 이르렀거나, 아니면 북경 부근의 청동제품들이 노획되어 요녕성 지역으로 운반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걸쳐 등장한 전연(前燕, 349-70), 후연(後燕, 384-408), 서연(西燕, 385-94), 남연(南燕, 398-410), 북연(北燕, 409-36) 중 유독 「북연」만을 한족(漢族 馮氏)이 세웠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용 선비(慕容 鮮卑)족이 세웠다. 어째서 한족 풍씨는 북연이라는 명칭을 택했을까? 

 

12. 무왕이 소공을 북연에 봉해 주었다는 기록 이후, 기원전 334년까지 북연에 대한 의미 있는 기록은 사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027-334 BC 기간을 북연 역사의 공백기로 간주할 수 있다. 

 

13. Janhunen (1996: 224, 238) 참조. 

 

6. 앙소(仰韶)문화의 후예: 화하족(華夏族) 역사공동체

  •  홍원탁
  •  승인 2005.02.08 00:00

Yangshao Culture and the Tibet-Chinese Speech Community of Hua-Xia-People

 

만리장성 아래 “번영하는 혹은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중원(中原)사람을 뜻한다는 소위 화하족은, 신석기 앙소문화(c.5000-3000 BC) 원시사회로부터 시작하여 은대(殷= 商代,1766-1122 BC) 중반까지, 혹은 하(夏), 은, 서주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2200-771 BC 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시노-티베탄(漢藏語系)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화하족을 주체로 진(秦), 한(漢) 등의 통일국가들이 연이어 형성되면서, 한족(漢族)이라는 명칭이 화하족을 대신하게 되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앙소(仰韶)문화의 후예: 화하족(華夏族) 역사공동체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대륙 

洪 元 卓 (서울대 교수)
  

밀과 수수를 재배하는 비옥한 퇴적층의 황하 하류유역은 대마군산에 의해 몽골고원과 분리되어 있다. 황하를 따라 정주(鄭州) 서쪽으로 들어가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쥐구멍 모양의 긴 회랑이 펼쳐진다. 낙양(洛陽)을 지나 황하가 북쪽을 향해 급격하게 꺾이어 말편자 모양으로 오르도스 초원을 품게 되는 분기점을 통과하면 위수(渭水) 계곡과 장안(長安, 오늘날의 西安)이 나타난다. 천험(天險)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이 지역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적합하여, 서주(西周)와 진(秦), 전한(前漢)과 당(唐)왕조 들의 수도가 위치하게 되었다. 간혹 중국 한족(漢族) 조정이 야만족 침입의 공포감을 덜 느낄 때에는, 수도를 약간 동쪽으로 옮겨 낙양까지 나왔다. 1

중앙아시아로 이어진 건조한 하서주랑(河西走廊, 만리장성 안쪽으로 감숙성의 난주와 돈황을 지나는 회랑)은 중국본토 서북지역을 티벳고원, 투르키스탄 초원, 서아시아 등으로 연결 해 준다. 회하(淮河) 남쪽의 양자강 유역은, 쌀을 수경재배 2모작 하는 지역으로, 자고로 수전(水戰)에 익숙지 못한 유목민 기병들이 쳐들어 왔다가 진흙탕에 빠져 엄청 고생을 겪곤 했다. 몽골 원나라 이전의 이민족 정복왕조들이 북부 중국만을 차지하고 만족했던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된 채색토기가 특징인 앙소문화는, 감숙, 섬서, 하남성 서북지역을 포함하는 위수-황하 유역을 따라, 대략 기원전 5000년경에 출현하여 2,0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 앙소문화는, 서부 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산맥을 가로질러, 하서주랑을 통과 해 중국대륙에 도달 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앙소문화 지역에서 사용되던 원시 한장어(漢藏語) 계통 언어가 마침내는 전 중국대륙의 모든 언어를 대체하게 끔 되었다. 만다린(普通話)은 비록 구조적으로 상당히 알타이어화가 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장어 계통 언어인 것이다.

회전판 위에서 윤기가 나는 얇은 두께의 흑색토기를 만들던, 황하 하류의 용산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에 나타나, 2200년경까지 지속된다. 신석기시대의 중원(中原) 사람들은 곡식을 토기에 저장하고, 활로 사냥을 하고, 돼지와 개를 기르며, 삼으로 천을 짜고, 비단을 생산하였다.

신석기 문화는 마침내 청동기문화(BC 2200-500)를 꽃피워, 하(夏, 수도는 洛陽 부근, BC 2200-1766), 상(商, 鄭州에 도읍, BC 1766-1122), 주(周, 초기 수도는 西安, BC 1122 년 혹은 1027년부터 256년 까지) 시대를 전개한다. 구리와 주석으로 청동기를 만들고, 나무틀을 사용하여 점토를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찍어내어 왕궁을 건설했으며, 의식과 제례도 지냈고, 군대는 (단순히 나무를 휘어 만든 것이 아니라, 목재와 동물의 힘줄로 등을 댄 뿔이나 뼈로 조립한) 복합식 활, 청동으로 날을 세운 창, 미늘-창, 청동 투구 등으로 무장을 하고 싸웠다. 청동기 초기의 유적지는 황하 부근의 하남성에서 발견된다. 상 나라의 청동 제기(祭器)는 인류가 만든 가장 뛰어난 예술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말이 끄는 수레는 서 아시아에서 기원전 15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기원전 1200년경쯤 상 나라에 전해졌다. 청동기와 철기의 사용 역시, 서 아시아가 시기적으로 앞섰다. 2  

양자강 유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5000년경에 쌀이 재배되었고, 개와 돼지도 사육되었으며, 기원전 3000년경이 되면 물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쌀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하였고, 당시 (苗族을 포함하는) 남부 중국인들은 유전적으로 남 몽골로이드 계통 인종에 속했으며, 오스트릭(남방)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   

소수였던 주(周)부족은 북방 유목민과의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으며, 후에 위수 계곡에 정착하면서 상나라를 받들게 되었다.4 곽대순(1995: 178)은 당시 화북평원의 상나라 문화의 기원을 하가점 하층과 연나라의 문화에서 찾았다. 기원전 1122(1027?)년경, 강력한 힘을 확보한 주 부족은 드디어 상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5 

안장과 재갈을 사용해 말을 타는 기술은 대략 기원전 900년경에 개발되었으며, 기원전 800년경이 되면서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유라시아대륙 전역에 걸쳐 주변 정주-농경민족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00년경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유목민들이 중국 사서에 호족(胡族)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의 북방 변경지대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 등장한 유목전사들로부터 말 타며 활 쏘는 기법을 배워야 했다. 기마전에 대비 해, 말들을 확보하고, 안장뿐 아니라 후에는 등자도 사용하게 되었으며, 혁대를 매고, 발목에 바지를 동여매게 되었다. 연(燕)과 조(趙)는 기원전 311-279년 사이에 몽골고원 남부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6  

사기는 연나라 지배자들이 주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기록을 했다. 그러나 Barnes(1993: 135-6)에 의하면, 연나라의 하부기반을 구성하고 있던 백성들의 일상적 생활문화는 원시 홍산-하가점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며, 연 조정 역시 주나라 중앙 조정의 정치판 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고유한 지역 문화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홀로 추구했었다는 것이다.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209-195년 기간 중에 연나라에서 피난을 온 위만(衛滿)이란 자가 후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 한다.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동이전의 예전(濊傳)에는, 위만이란 자가 상투를 틀고, 야만인의 옷을 입고 왔다고 기록되어있으며, 한전(韓傳)에는 이 연나라 사람이 흉노 혹은 선비족의 옷(胡服)을 입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동이전 기록들은 연나라가 몽골-선비 계통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7  

중국 본토에서는 기원전 600-500년경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는데, 전국시대에는 철제 도구와 칼들이 (鍛造 공법이 아니라) 주물형틀(거푸집)을 사용해서 주조되었다. 철제 도구와 무기의 사용은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철제무기로 무장된 대규모 보병의 등장을 의미 했고, 마침내는 진시황(秦始皇, BC 247-210)의 천하통일을 가능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징집된 농민병사들은 새로이 개발된 석궁(石弓)으로 무장되었다. 진나라는 주나라 제후국들 중 가장 서쪽 구석에서 출발했는데, 이 장소는 오늘날 섬서성의 위수 유역이며, 일찍이 주나라가 발흥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진은 주 왕실을 위해 말을 기르고 유목민의 침탈을 막는 임무를 수행했었다. 옛 서주(西周)와 새로 등장한 진(秦)나라의 상무적인 기상은 중국대륙 서북방 끝자락에서 끊임없이 북방 유목민들과의 접촉을 하고 결혼관계 맺어 온 전통에서 유래한 것 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8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진시황에게 정복 당했다. 진시황은 기원전 213년에 오르도스 초원지대로부터 흉노를 바이칼호 주변의 그들 본고장으로 쫓아 냈다. 그러나 진나라 군대가 황하를 건너지는 못했고, 진이 망하자 마자 흉노는 다시 이 지역을 점령했다. 단명의 강대국 진(秦, BC 250-207)나라의 뒤를 이어 한(漢, BC 206-AD 220, 王莽의 新에 의한 AD 8-23년간의 단절기간 포함) 제국이 등장한다. 많은 한족 경세가들은, 진시황이 흉노와 싸움을 벌린 것이, 바로 진 제국의 쇠망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6 (2005. 1. 29.)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지금부터 대략 67,000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여, 사냥-수렵-채취 생활을 하던 전기 구석기시대의 (불을 사용해 동굴을 밝힌 北京原人을 포함한) 호모-에렉투스를 대체하고, 중국대륙에 중기 구석기시대를 전개했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대략 50,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12,000년경에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며, 기원전 8,000년경에는 농업이 시작된다. 중동에 정착한 사람들은 최초에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한 반면, 북부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수수, 남부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2. 곽대순에 의하면, 기원전 3,500년경에 이미 청동의 주형제품이 존재했었으며, 홍산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수공업이 바로 청동 제품의 주조였다고 말한다. 즉, 산업이란 측면에서 보면, 청동 주물을 만들고, 토기를 만들고, 옥을 깎아 장신구를 만드는 것이 홍산문화의 3대 업적이었다고 말한다. (Nelson, 1995: 41-43) 참조 

 

3. 티벳족은, 인종적으로는 북 몽골로이드 계통에 속하지만, 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스트릭(남방) 계통도 아니고 알타이 계통도 아닌, 한장어(Tibeto-Chinese)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Cavalli-Sforza (2000: 146-8) 참조. 

 

4. Fairbank 와 Goldman(1998: 39) 참조. 

 

5. 주 나라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여, 50명도 넘는 왕족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었다. 기원전 771년에 주 왕실이 수도를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면서 동주(東周, BC 771-256)시대가 시작된다. 춘추시대(春秋, BC 722-481)에는 약 170여 개의 귀족 가문이 소규모의 독립국가 형태를 유지하였다. 소빙하기(小氷河期, BC 400-AD 300)의 시작과 함께, 7웅(혹은 7개의 覇者들)이 활약하는 전국시대(戰國, BC 403-221)가 시작된다. 

 

6. Barnes(1993: 147) 참조 사기(史記)는 연(燕) 나라에 의해 축조되고, 진 나라에 의해 확장, 보수된 (만리)장성이 요동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러나 1194년 이전에 작성된 지리도(Di Li Tu)에 나타나듯이, 예전에는 오늘날의 난하(灤河)를 요수(遼水)라 불렀으며, 오늘날의 요하(遼河)는 소요수(小遼水)라 불렀다. 따라서, 사기에 적혀있는 요동은 난하의 동쪽을 지칭하는 것이다.

史記 匈奴列傳 第五十 燕亦築長城…至襄平 韋昭云今遼東所理也 
史記 卷八十八 蒙恬列傳第二十八 始皇 … 築長城 … 至遼東 

 

7.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 … 燕人衛滿 魋結夷服 復來王之      韓傳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史記 卷第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 夫燕亦勃碣之閒 一都會也 南通齊趙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地踔遠 人民希 … 有漁鹽棗栗之饒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8.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에 천하를 통일 하자마자 전국시대에 북방 제후국들이 축조한 성곽들을 확장-보수-연결하여 소위 만리장성을 만들었다. 만리장성은 16세기에 와서 명 조정에 의해 대대적으로 복구-확장되었다.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부터 시작해 서쪽의 중앙아시아 가욕관(嘉峪關)에 이르기까지 장장 2,400Km를 달리는데, 전통적으로 중화문명의 북방 한계선을 나타내며 소위 “야만인”들의 강역이 시작되는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진시황은 법을 초월한 전제군주로서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7. 평화공존: 화친(和親)정책 혹은 조공(朝貢)관계의 실체

  •  홍원탁
  •  승인 2005.02.15 00:00

Extortions in the Name of Heqin (Peace and Kinship) or Tributes Peaceful Coexistence

 

한족(漢族) 조정에 대한 흉노-선비(匈奴, 鮮卑) 등 이민족의 갈취(喝取) 행위는 화친(和親)정책 혹은 조공(朝貢)관계 등과 같은 완곡한 표현으로 포장이 되었었다. 소위 “야만족”을 정벌한다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칭호의 수여, 다양한 공물(貢物)의 제공, 보조금 성격의 국경무역, 등을 대가로 하는 평화조약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중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한족 지배자들은 복속(服屬), 신종(臣從)의 예(禮), 조공 등의 표현을 구사해서 외형상으로 이민족 사절을 마치 속국에서 온 조공사인 것처럼 취급하면서, 이념상의 자기만족을 하고, 중국 중심의 허구적 중화세계관을 내세울 수 있었다. 본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평화공존: 화친(和親)정책 혹은 조공(朝貢)관계의 실체  

洪元卓 (서울대 교수)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우기 3년 전인 BC 209년, 흉노족 중에 매우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났다. 묵특(冒頓, r. BC 209 - 174)의 영도 하에 흉노족은 유목 부족들을 통합하여 단일 세력으로 조직했고, 느슨한 부족연맹체를 유목제국으로 만들었다.1 묵특이 처음으로 선우가 되었을 당시에는 동호(東胡)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었기 때문에, 동호들은 자주 흉노의 땅을 침범하였다. 하지만 묵특의 등장으로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묵특은 기습공격을 하여 동호를 정복하고 복속시켰다.2  

당시, 목축과 사냥을 주로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민간생활이나 군인생활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말타고 활쏘는 것은 일상 생활이고, 계절에 따라 천막을 걷고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또 전 부족이 참여하는 사냥을 통해 단체의 일원으로, 조직적으로 행동을 통일하고 협조-조정하는 습관을 훈련 받고 몸에 익힌다. 장기간에 걸친 원정을 떠날 때는 가축들을 함께 데리고 가기 때문에 생산활동이 중단되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오히려 군사행동 자체가 수익성 높은 모험사업이었다. 전장에서 각 부족은 자신들의 부족장의 직접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 전투작전을 수행했다 세습적 귀족제도를 기반으로 조직된 유목민 군대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부족 내 충성심으로 백인장(百人長), 천인장(千人長), 만인장(萬人長)들 간의 유대를 공고히 했다. 유목국가는 전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총동원되는 개병제(皆兵制)를 효과적으로 유지했다. 3  

흉노의 신앙은 하늘을 받들고, 특정한 산을 신성시 하여 모시는 샤머니즘이었다. 그들은 무당이 하늘의 심령과 의사소통을 하여 병을 고치고, 적을 저주하며,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원시 투르코-몽골족들에게 공통된 영적 문화는 샤머니즘의 이었으며, 이는 북몽골로이드 인종 전체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공통성은 남자보다 여자 무당을 선호하는 샤머니즘의 지역적 변형의 특색이다 일본 열도의 아이누족 또한 시베리안 샤머니즘과 북유라시아 곰 숭배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Janhunen, 1996, p. 175 참조)

BC 200년, 한 고조(漢高祖, BC 206-195) 역시 진시황과 같은 실수를 범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묵특의 군대는 평성(平城, 현 산서성 大同)에서 고조의 군대를 완전 포위했으나, 묵특은 자신이 호의를 베풀면 그 대가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고조가 달아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한나라 조정은 흉노와 형제지간 임을 선언하면서, 선우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고, 온갖 호화사치품을 선물로 주고, 현금, 명주솜, 비단, 술, 쌀과 기타 식료품 등 막대한 량의 공물을 제공하고, 또 보조금 성격의 국경무역을 한다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和親)관계를 맺었다. 4  만리장성이 양 제국간의 국경으로 인정됐다  

흉노의 지배자는 자신 휘하의 모든 부족장들에게 충성의 대가를 정기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막대한 규모의 수입과 사치품들을 확보했고, 일반 유목민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으로 교역을 할 수 있는 국경무역 기회를 제공했다 흉노가 획득한 엄청난 양의 비단은 소그드족과 파르티안, 인도상인 등등의 중개상을 통해 당시 로마에까지 도달하였다. 대략 5천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졌던 것으로 추산되는 진-한(秦漢)제국은, 백만명 내외의 유목민 흉노제국과 힘의 균형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대치(對峙)했다. 5  

아리안 계통 유목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월지국(月氏國) 사람들은 묵특에 의해 감숙성(甘肅省)에서 내몰려, BC 160년경에 박트리아(옛 그리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세운 왕국)와 접경한 페르가나 지역으로까지 달아날 수 밖에 없었으나, 1세기경에 와서는 아프카니스탄의 카불과 인도 북서부를 포함하는 쿠샨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이 사례는, 초원의 한쪽 끝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밀리게 되면, 그 결과 예기치 않은 연쇄반응이 어디까지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BC 141-87)는 BC 111년에 중국대륙 남부연안의 절강, 복건, 광동 지역 등을 정복하고, 광서와 베트남의 북쪽지역까지 진출하여, 대대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한나라 군대는, 투르키스탄의 도시국가들로부터 흉노가 징수하는 수입원을 차단해 흉노의 오른팔을 자르기 위해, 타림분지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였다. 6    

한 무제는 화친정책이 유발한 막대한 비용과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BC 133년에 유화정책을 폐기하고, BC 117년에는 흉노를 공격하여 몽골초원 북부로 내쫓았다. 무제는 또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린다며, BC 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하고, 요하 하류 유역과 한반도 서북쪽 해안지대에 한 사군을 설치하였다. Janhunen(1996: 194)에 의하면, 중국 정권을 대표 해 한반도와 만주로 이주해 온 한족 관료, 군인, 상인들은 그 불안정적 특성 때문에, 결국에는 모국으로의 귀환이 강요되거나, 아니면 주변 야만인들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7  

처음에는 흉노와의 싸움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얼마 못 가 형세는 역전되고, 한 무제 말기에는 수세로 전환되었다. 후세 사가들은 한 무제가 순간적인 영광을 쫓느라 조정의 재정을 파탄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무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먹여 살리고,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고, 또 전승한 장군들을 승진시켜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광활한 초원지역에서 유목민 병사를 추적하는 한족 군대에 식량과 기타 군수품을 보급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지출을 의미 하였다. 사마천은 한나라 경제가 몰락하고, 관료의 부패가 만연하게 된 것은 모두가 무제의 군사활동 탓이라고 말했다 (Jagchid and Symons, 1989, pp. 62-3을 참조) 

무제의 공격적인 정책이 폐기되고 한참 후인 BC 54년에 흉노는 한족의 의례적인 조공관계를 --단지 이름뿐인 상징적 복속으로,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화친과 그 내용이 동일한 관계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복속, 신종(臣從)의 예, 조공 등과 같은 완곡한 어구로 포장된 갈취였다. 한 나라 지배자들은 외형상으로 흉노 사절을 마치 속국의 온 조공사인 것처럼 취급하면서, 이념상의 자기만족을 하고, 중국 중심의 허구적 중화세계관을 내세울 수 있었다. 8  

Jagchid and Symons(1998: 116)에 의하면, “신중히 선택된 용어와 조공 이라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포장을 하여 유목국가에 대한 보상을 숨겼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한족 왕조가 무력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유목세력에게 조공을 바친 것이었다. 정착-농경 국가는 평화공존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군가적 해결책 보다는 공물을 바치고 국경무역을 제공하는 편이 훨씬 비용이 싼 셈이었다” 

BC 33년에 한 조정은 궁녀들 중 5명의 여인을 뽑아 흉노 선우에게 선사 했다. 그들 중 한명인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공주인 것처럼 하여, 선우의 두 아들을 낳았다. 선우는 BC 31년에 죽었고, 그녀는 흉노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지배자의 아내가 되어 다시 두 명의 딸을 낳았다. 그녀는 중국 민속의 가장 유명한 미인이 되었으며, 중국문학의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흉노는 그들 군대의 숫자가 야만적 약탈을 자행 해 한나라 조정을 겁주기에는 충분하지만, 중국 전역을 정복하여 통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중국대륙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다. 흉노는 정주농경 지대를 점령하고 통치를 할 관료조직도 없었다. 흉노는 수적인 면에서의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또 기동성을 잃지 않으면서, 중국을 착취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막대한 공물을 빼앗아 내고, 한족의 저항 의지를 제거하는 최상의 도구가 바로 한족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이라 믿었다. 평화협정의 잦은 파기는 받아내는 물자의 량을 늘리려는 방책이었다. 9  중국 주변의 정주농경 국가들은 중국문화를 모방하려 애를 썼지만, 말 타는 유목민들은 항상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천막을 치고 우유와 고기를 먹는 목축생활을 선호하였다.  

한나라 조정은, 비록 매년 세수의 10% 이상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흉노를 매수하는 것이 야만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값싸다고 믿었다. 한 무제 방식으로 초원지대를 정벌한다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상당히 위험한 도박인 것이었다 평화조약은 그럴 듯 하게 들리는 칭호의 수여, 다양한 공물의 제공, 보조금적 국경무역을 대가로 안전한 국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비용은 국경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적었다. 중앙집권화된 유목국가에서 작은 부족장들은 중국 조정과 직접적으로 협상을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고, 최고통치자가 조공제도를 홀로 장악하였다. 대선우는 매년 증가하는 한족으로부터의 조공 수입을 부하 부족장들에게 분배해 주면서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확보했다. Barfield (1989: 248)는, 한족 조정이 현상유지를 원하는 유목제국으로부터 종종 군사적 도움을 받아 내부 반란을 진압하거나 혹은 다른 외적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7 (2005. 2. 5.)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묵특은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을 거느린 “당리고도”선우(撐犁孤塗單于; 거룩한 하늘의 아들을 상징)가 되었다. “당리”는 돌궐-몽골 말로 하늘을 뜻한다. Barfield(1989: 36, 41-2)에 의하면, 흉노제국은 대외관계나 군사적인 문제를 처리할 경우에는 하나의 전제국가로서 행동을 했지만, 내정은 부족들간에 협의와 협조를 바탕으로 처리하는 연방체제이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부족장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흉노의 왕위는 대체로 형제승계의 관행을 따라, 맏형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왕위가 횡적으로 이어졌다. 이들 유목민은 확증이 안된 젊은 지도자 보다는 분명하게 증명된 성숙된 지도자를 선호하였다. 이론상, 맏형의 맏아들은 모든 삼촌들의 승계가 끝난 다음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막내 삼촌인 현(現) 선우의 아들은 종종 부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 해 왕위를 차지하려고 사촌들과 싸움을 벌렸다. 이런 관행은 유목제국에 주기적 정치불안정과 내전을 야기했다 

2. Twitchett and Loewe (1986: 436) 논문집에 여영시(余英時)가 쓴 “한(漢)의 대외관계”를 참조. 묵특의 부친 두만(頭曼)은 오르도스 초원으로부터 진시황의 군대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달아났었는데, 묵특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다. Lattimore (1961: 334)를 참조.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 … 當是之時 東胡疆而月氏盛 匈奴單于曰頭曼 頭曼不勝秦 北徙 …單于有太子冒頓… 冒頓旣立 是時東胡疆盛 聞冒頓殺父自立 … 冒頓 … 遂東襲擊東胡 … 大破滅東胡王 而虜其民人及畜産 … 遂侵燕 

3. 진과 한나라는 전국의 모든 건장한 남자들을 2년간 군대에 징집했었다. 수(隋, 581-618)와 당나라 초기에는, 정해진 군호(軍戶)에서 징집된 사람들이, 세금을 탕감 받고, 자신이 사용할 장비와 먹을 양식을 할당 받은 토지에서 직접 조달하면서, 은퇴할 연령이 될 때까지 매년 일정기간 동안 군인으로 복역하였다. 그러나 징집으로 동원된 농민들이 전문 전투기술을 습득하기에는 훈련기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전문 용병을 써야만 했다.

4. 사기 유경열전(劉敬列傳)에 의하면, 고조가 딸을 묵특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해 듣자, 여황후(呂皇后)는 밤낮으로 울면서 “제게는 태자와 외동딸 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공주를 흉노에게 보낼 수 있습니까?”라고 외쳐댔다. 고조는 이를 측은히 여겨, 황족 중 다른 공주를 택해 자신의 맏딸로 입양을 한 다음 묵특에게 시집을 보냈다 (Jagchid and Symons, 1989, p. 142를 참조)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高帝乃使…奉宗室女公主爲單于閼氏 歲奉匈奴 絮繒酒米食物各有數 約爲昆弟以和親 

5. Barfield(1989: 49)와 Janhunen(1996: 180)을 참조. Barfield(1989: 28)에 의하면,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들이 700여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단일혈통의 터키왕조가 오토만제국을 600여년 동안 지배했던 것처럼, 묵특의 직계 후손들은 다양한 크기의 역량과 지위를 가지고 600여년에 걸쳐 유라시아 목초지대를 지배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군사기술의 일대 혁명이 일어나자, 모든 유목민들은, 제정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대의 운명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정주-농경 제국에 흡수, 예속되었다. 

6. Barfield(1989: 54)를 참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맥의 2만 피트가 넘는 고지에서, 눈이 녹아 타클라마칸 분지로 흘러내린 강물은 관개수로를 통해 오아시스들을 형성한다. 여름에는 더 많은 눈이 녹기 때문에 농사에 충분한 물이 공급된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는 모두 배후에 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종 광물을 채굴할 수 있으며, 알파인 목초지에서 가축도 기를 수 있었다. (Lattimore, 1944, pp. 47-48를 참조.)  

7. 요동 땅은 한족과 토착 문화의 유동적인 요소가 정치적 경제적 흐름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저수지”였다. 중국 본토에서 동쪽으로 이주한 한족은, 문화적인 카멜레온이 되어, 그때 그때의 형세에 따라 유리한대로 여진, 선비, 몽골, 혹은 한국인으로 융화되었다. Crossley (1999: 46-49) 참조

8. Barfield (1989: 248) 참조. 한서(漢書)를 보면 가의(賈誼)가 한나라 문제(文帝, BC 180-157)에게 “지금 흉노는 교만을 떨며 쳐들어와 노략질을 합니다. 흉노의 모욕적 행위는 극치에 달합니다. 그러나 조정은 매년 금, 비단, 자수직물, 공단 등을 그들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랑캐가 명령을 하며 윗자리에 앉아 주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반대로 천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어 공물을 바치고 있는 꼴 입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Jagchid and Symons,1989: 55) 금사(金史)를 보면 흉노들은 한나라를 아우의 나라라고 불렀고, 요와 금 조정은 송 황제를 조카라 불렀다. 명대(明代)의 몽골들은 주종관계로 군림했다. (Jagchid and Symons, 1989: 15)  

漢書卷四十八 賈誼傳 …今匈奴…侵掠… 而漢歲致金絮采繒以奉之 夷狄徵令 是主上之操也 天子共貢 是臣下之禮也 
金史 卷六 本紀第六 世宗上 五年 宋…以國書來… 稱姪宋皇帝 稱名 再拜奉書于叔 大金皇帝

9. Barfield (1989: 91).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8.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  홍원탁
  •  승인 2005.02.17 00:00

Fall of Xiong-nu and Rise of Manchurian Nomad Xianbei Replacing Xiong-nu

화평을 미끼로 한족들로부터 온갖 재화를 갈취 해 오던 몽골고원의 흉노족이 내분으로 몰락하고, 요서 초원의 소위 동호(東胡)라는 선비(鮮卑)족이 대체세력으로 나타나,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이민족 정복왕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洪元卓 (서울대 교수)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2

드디어 화제(和帝, 88-105) 즉위 직후인 89-93년 기간 중, 선비-남흉노-후한의 연합군이 오르콘 지역의 북흉노를 섬멸했다 살아남은 흉노 중 일부는, 몽골고원으로부터 계속 서쪽으로 달아나 발카하쉬와 아랄 초원지대를 경유해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 까지 이르렀다. 이들 서방으로 달아난 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그 후손들이 “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374년경에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로마제국을 침공했다 441년부터 아틸라의 지휘를 받아 유럽대륙을 유린 하다가, 아틸라가 453년에 죽자, 훈족은 러시아 초원지대로 철수했다.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와 이란에 정착했던 아리안족은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계곡으로 내려와 모헨조다로의 드라비다 문명을 파괴해 버렸다 그 잔혹상은 옛 인도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선명하게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7세기-3세기 기간 중에는 스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 이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남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서부의 목초지대를 점거하였다. 흉노족부터 시작해 후대에 몽골고원의 투르크와 몽골족들이 계속 서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리안족과의 혼혈이 심화되었다. 난폭한 관행 탓에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유전적 유동성이 훨씬 높았다. 3  기하학적 형상으로 정형화된 스키타이 동물 예술품은, 동물형상을 주제로 정형화된 오르도스 흉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모두 신변장식용이었다 스키타이족과 흉노족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고기만을 먹고, 천막 속의 모피 위에서 잠을 자며, 술잔으로 쓰기 위해 적의 두개골을 사냥했다.  

만주 서부의 선비족들은 흉노족의 내란 덕분에 독립을 되찾고, 잔존 북흉노족의 대다수와 그들 영토를 흡수 병합하였다. 퉁구스족에 비해 선비족의 문화가 몽골(혹은 투르크)적인 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비족의 전통은 흉노족과는 달리 선출된 지도자가 제한된 지휘권만을 갖는 약한 부족연맹체였다. 크고 적은 부족장들은 이따금 개성이 강한 지도자의 영도 하에 단합을 하기도 하지만, 흔히 이들 작은 부족들은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제가끔 중국 왕조의 조공체제에 개별적으로 가입했다. 통치권이 세습되고 중앙집권화된 흉노족의 체제와는 달리, 선비족은 세습보다는 평등적 정치체제를 강조하였다. 북흉노의 쇠망이 묵특에게 정복당했던 선비 세력의 재기를 가능케 한 것이다. 4

후한 조정은 중소 선비 부족장들과 기꺼이 직접 거래를 했다. 많은 부족장들에게 그럴듯한 칭호를 수여하고, 각종 물자를 제공 함으로서, 유목민 부족들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 변경지역의 한족 관리들은 중소 부족장들에게 지위에 걸맞은 칭호와 선물은 물론, 교역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면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조공체제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질투심이 강한 수많은 부족장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조정의 보조금을 얻을 수 있도록 개별적인 거래를 하는 전략을 구사 해, 선비족 중소 부족장들 스스로가 초원지대의 단결과 중앙집권화를 반대하게끔 유도했던 것이다. 5 

Barfield (1989: 85)에 의하면, 후한 시대인 AD 108년 당시, 선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중소 부족들은 120 개에 달했으나, 흉노의 이름으로 기록된 부족들의 수는 초원지역 전체를 통해 2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출된 선비족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 부족이 통합된 군사작전을 벌려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부족간의 단합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시 선비족이 채택한 전략은, 흉노와 마찬가지로, 중국본토를 야만적으로 습격해서 약탈을 한 다음 초원지대로 퇴각을 하는 것이다 보상금 혹은 교역량을 크게 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고, 수적인 열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국본토를 점령하지 않았다.

공세적인 군사전략은 무관과 상인들의 출세 기회를 확대했기 때문에, 유교전통으로 훈련된 중국 조정의 문관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Jagchid and Symons, 1989, p. 54). 문신들은 진시황과 한무제가, 쉽게 평정 할 수도 없고, 중국에 편입시킬 수도 없는 땅을 놓고 흉노와 벌인 전쟁을 아주 졸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조공 형식으로 포장한 유화정책을 통해 화평과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문관들은,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싸우기 보다는 그들에게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좋은 전략이라고 믿었다. 6  그러나 AD 300년 이후에 북중국을 정복한 만주 출신 정복왕조들이 채택한 전략은, 한족 조정의 전략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몽골고원의 투르코-몽골 유목민들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한족 왕조들이 흉노에 이어 선비 등 유목민들과 대치한 시기(BC 206-AD 316)는 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와 대충 일치했다(BC 272-AD 395). 실크로드로부터 물자를 갈취하는 흉노를 좇아내기 위해, 후한(後漢) 조정은 반초(班超)와 그의 아들 반용(班勇)을 파견하여 94-127년 기간 중 타림분지 전체를 정복했다. 그 결과, 서역으로 가는 길이 열려 불교와 그레코-헬레니즘 양식의 간다라 예술이 전파되었고, 유라시안 대륙의 서쪽 끝과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로마제국은 소빙하기 (小氷河期, BC 400-AD 300) 전반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으나, 4세기, 지구 온난화 회복시작에 동반된 가뭄은 온갖 종류의 북방 야만족들이 준동하게 만들었다. 4세기는 북중국에서 5호16국시대(304-439)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며, 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374-453)과 일치한다. 로마 사람들한테 흉노 노릇을 하고 있던 게르만족들은, 4세기 초, 라인강으로부터 흑해에 걸쳐 전 로마제국 북방 국경선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374년 이후의 훈족 침입은 연쇄반응을 촉발했다 미친 듯이 쫓는 훈족과 정신 없이 쫓기는 게르만족들에 의해 유럽전체가 황폐화 되었다.

Lamb(1995: 160-1)은 “우리가 카스피해 수면 높이의 변화와, 간헐적 강과 호수, 그리고 신강과 중앙아시아의 유기되어 버려진 거주지들에 대한 연구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4세기에 들어 한발이 극에 달해 실크로드 통행은 정지 상태에 빠졌었다 이러한 증거에 비추어 보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생활터전인 목초지대를 휩쓴 가뭄이, 야만 유목민족들과 그들에 쫓겨 떠돌이 신세가 된 종족들로 하여금, 서쪽 유럽대륙으로 밀려가는 연쇄반응을 촉발 해, 마침내는 로마제국을 쇠퇴시켰다는 Huntington의 (1907년)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8 (2005. 2. 12.)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Jagchid and Symons (1989: 63) 참조.  

後漢書 卷十八 列傳第八 … 後匈奴飢疫 自相分爭… 建武 二十七年 宮…上書曰 … 諭告高句麗烏桓鮮卑攻其左 發河西四郡 … 如此 北虜之滅 

2. Twitchet and Loewe (1986: 443)을 참조. 이 모든 비용은 산동과 강소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Jagchid and Symons (1989: 33)을 참조.

3.  Cavalli-Sforza (2000: 82)  

4. Barfield (1989: 86-87) 참조. 후한서(後漢書)는 AD 177년에 올려진 상소문의, “(북)흉노가 달아 난 이후, 선비 무리는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점거하고, 1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데, 정제된 금속과 연철(鍊鐵)도 이 선비 반도들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족 이탈자들은 선비의 땅으로 달아나 그들의 참모 노릇을 합니다. 선비족의 무기는 옛 흉노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말들은 더욱 빨라졌습니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5) 참조. 후한서 185년 조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선비족들이 걸핏하면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평화스럽게 지내는 해가 거의 없다. 그자들은 중국의 힘을 존경하거나, 중국의 관용을 고맙게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경시장에서 교역을 할 때만 진귀한 중국 재화들을 값싸게 얻기 위해 복종을 하는 체 하며 나타난다 그들은 교역으로부터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손에 넣자마자 본성을 나타내 해를 끼친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6) 참조.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第八十 … 自匈奴遁逃 鮮卑强盛 據其故地 稱兵十萬 … 精金良鐵 皆爲賊有 漢人逋逃 爲之謀主 兵利馬疾 過於匈奴 
後漢書 卷四十八 列傳第三十八 鮮卑隔在漠北 …故數犯障塞… 唯至互市 乃來靡服 苟欲中國珍貨… 計獲事足 旋踵爲害 

5.  Barfield (1989: 246-249)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24-51)에 의하면, 한족 조정은 때로는 이간질을 하여 선비 부족장들 사이에 싸움을 부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유목민 지도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국경에 교역시장을 제공해 평화를 샀다.

漢書 卷九十四下 匈奴傳第六 十四下 莽將嚴尤諫曰 …中國罷耗…而天下稱武 是爲下


6. Barfield (1989: 246-249)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9. 2원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북위(北魏,) 출현의 예고

  •  홍원탁
  •  승인 2005.02.24 00:00

Commencing the Dual System: the Yan Kingdom of Mu-rong Xianbei

 

4세기 5호16국 시대에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주 (漢族) 농민을 다스리는 관료적 행정조직과 (鮮卑族) 유목민을 다스리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二元的) 통치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웠다.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하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으로 문관이 다스리는 2원제도를 운용했다 북위, 요, 금, 원, 청 등 후대의 모든 이민족 정복왕조들은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창안한 2원제도를 개선 발전시켜 중국 대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모용선비 전연은, 359년에 중원을 점령한 후, 특이하게 빠른 속도로 중국화 되었다. 360년, 150만 명의 한족(漢族) 오합지졸을 징집해 남쪽의 동진(東晉)과 서쪽의 전진(前秦)을 정복하려 했다 370년, 전연은 부견(符堅)에 의해 멸망되었다. 하지만 전연은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고, 단기간이나마 북중국 일대를 점령하여, 본격적 정복왕조인 북위(北魏, 386-534) 출현의 전조가 되었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삼림족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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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원(二元)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정복왕조(北魏,) 출현의 예고 

 

홍원탁(서울대 교수) 

 

홍산문화 (紅山, 4,000-3,000 BC) 이후의 남만주 문화의 발전과정은, 특히 상나라에 앞섰던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 2,000-1,500 BC)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분명한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소위 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기원전 1027년에 봉해주었다는 북연(北燕)은 전국시대(403-221 BC)에 와서야 비로서 중국왕조 역사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민족, 언어, 문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북)연이 기원전 311년경에 정복을 했다는 란하(灤河), 대능하 (大凌河) 주변의 요서지역은 원래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목민적 성격이 강한 청동기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하북지역의 연 왕국(1027-222 BC)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홍산문화를 공유하면서 알타이 계통 언어를 사용했던 원시 선비-예맥족들이 바로 요서지역 전체의 주 구성원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연은 기원전 222년에 진 시황제에게 정복되었다. 그런데 사기를 보면, 묵돌이 기원전 209년경 흉노부족을 통일하고 선우가 될 무렵, 선비족의 세력이 전성기에 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비족은 바로 이 신흥 흉노 제국에 복속되고 만다.

 

선비족들은 2세기 중, 단석괴(檀石槐, 156-81)의 영도 하에, 짧은 기간이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이 단명의 선비제국은 몽골고원의 흉노 세력을 일시적으로 대체했었다 그 후, 한 동안 약세 이었다가, 한족 왕조들이 쇠퇴함에 따라, 4세기에 모용선비 연(前燕, 349-70; 後燕, 384-408; 西燕, 385-94; 南燕, 398-410) 왕국들을 세울 수 있었고, 5세기에 와서는 최초의 북중국 정복왕조인 탁발선비 북위(386-534)를 세우게 되었다.

 

     
▲ Xianbei Tomb Painting excavated at the Zhao-yang area

 

 

후한의 쇠망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다 188년에 영제(靈帝)가 죽은 후, 한의 통치자들은 지방 군벌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요동은 190년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公孫度, 公孫康)에 의해 점거되었는데, 이들은 196-220년 기간 중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연(燕)왕이라 자칭하던 공손연(公孫淵)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원정군에 의해 239년에 살해당하였다. 중국의 삼국시대(三國, 220-265) 기간 중에는 선비의 작은 부족장들이 위 조정과 개별적으로 흥정을 하면서 변경의 많은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위 조정은 국경 밖의 유목민에게는 후한 보조금을 주면서 국경무역을 허락하였고, 국경 안의 부족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정책을 유지하였다. 단명의 서진(西晉, 265-316) 역시 위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285년에 모용선비 부족장이 된 모용외(慕容廆, r.285-333)는 곧바로 부여를 공격했다. 286년에는 (기원전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 한 이래 한족들이 정착한) 요하 유역의 농경지대를 공격했다. 요하 유역은 중국이 통일되면 한족 제국에 흡수 통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는 제일 먼저 중원의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역이었다. 2 하긴 중국대륙의 한족 통치자들 역시 동북 변경지대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었다.  

 

291-305년 기간 중, 중국대륙 전역에 내란이 일어났다. 위와 서진의 볼모정책 덕분에 중국 황실 내에서 성장하고 중국화된 새로운 유형의 흉노족 지도자가 선우가 되어, 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사로잡아 서진을 유린했다. 3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자 진 황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달아나, 317년에 양자강을 장벽으로 삼아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5세기에 게르만족에 의해 황폐화된 로마를 콘스탄티노플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남경은 589년까지 장안과 낙양의 역할을 대신했다.   

 

 

     
▲ Former Yan Art Objects from the Zhaoyang-Beipiao area: (top) gilt-bronze saddle plates; (second) gold hat ornaments with disk pendants; (third) gilt-bronze horse ornament; and (bottom) bronze deer-shaped object Watt, et al. (2004: 124, 130)

 

 

Ledyard(1983: 331)는 “317년”을 중국 역사상,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하나의 분기점으로 이해한다. 중국 대륙의 주요 부분이, 아니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점령된 역사적 전환점이 바로 317년 이라고 생각한다.

 

흉노족이 북중국에 처음으로 세운 전조(前趙, 304-329)는 너무 중국식이었기 때문에 몽골 초원지대의 토박이 흉노 부족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고 내분의 씨앗을 키웠다. 반대로, 두 번째 조나라(319-349)는 지나치게 흉노식이였기 때문에 중국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마지막 흉노왕의 아들은 후궁 하나를 식탁에서 구울 정도로 극악무도했다 한다. 4

 

당시 만주의 선비족은 더 이상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기간 요하 유역을 점령하여 농민과 도시민을 지배해왔었다. 선비족은,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해 다스리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 문민 관료제도로 다스리는 2원(二元)적 통치조직을 운용했다 문민 관료는 절대로 부족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 못하였다. Barfield(1989: 97-99, 106)에 의하면, 모용 선비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5호16국 시대(304-439)에 (정주 농경지역에 대한) 관료적 행정조직과 (목초지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 통치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운 것이다.

 

모용 선비족은 그들 자신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이전에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 국경 안에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살았었다. 모용외는 국가를 세워 기초를 다질 때, (모용씨의 국가를 한 개의 중화제국으로 발전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진) 수많은 중국 관리들과 학자들의 조언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한족 자신의 사마씨 황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흉노의 지배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수 많은 중국 관료들이, 당시와 같은 정치적인 혼란기에, 요동 땅의 작은 나라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모용씨 측에 가담했다. 그들은, 중국식으로 교육을 받은 모용선비 지배자를 통치자로 모시면서, 이상적인 중국식 조정을 조직하고, 모용씨의 국가를 점차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확장 해 나가도록 도왔다. 5 모용외는, 중국식 행정규율과 정부 운영 조직을 도입하고, 자신의 군대에 훌륭한 무기와 갑옷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6

 

Fairbank(1992: 111-2)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목민적인 2원제도는 4세기부터 남만주 지역에서 출현하는데, 후대 몽골족과 만주족 정복왕조를 거치면서 거대한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 지키는 통치체제로 완성되었다. 덕으로 다스린다는 유교적 신화가 있지만, 왕조의 출발 자체가 바로 군사력에 의한 것이고, 황제 중심의 전제적 체제는 지배자가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가졌을 때만 존속이 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조가 확립되면 관료체제는 결국 문관에 의해 운영되게 마련이다. 유교 전통으로 훈련 받은 문관이 군사전문가로 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개중에는 유능한 무관이 나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사기술은 유목 정복자들의 주 특기였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식 국가조직은 왕의 형제들을 봉토를 받는 친왕(親王)의 신분으로 만들어, 높은 지위를 즐기며 살게 한다. 실제로 중국 왕조의 친왕들이 흔히 봉토의 수입을 가지고 한가롭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으나, 모용씨 왕의 형제나 아들들은 정부 내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부여 받았고, 모두가 다 군대의 장군으로 봉직했다. 전연(前燕)이 성취한 정복들의 거의 대부분이 왕의 형제나 삼촌들의 탁월한 전략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7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느슨한 연맹체 형태의 부족 집단을 이원적 통치체제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15세에 족장이 된 모용외는 일직이 농업과 관료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 r.333-49)은 337년에 스스로 연(燕)왕이라 칭하면서,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를 지배하였다. 8 연은 전국시대에 중국대륙 동북방에 있었던 왕조의 이름이었다. 모용 선비는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하는 하북성의 북부지역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Schreiber(1949-55: 378)에 의하면, 모용 선비족이 최초에 점거한 지역이 고대 연나라 영토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연이라는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모용선비가 352년에 중원을 정복하자, 모용씨 조정의 한족 관료들이 제일 먼저 모용준(r.349-60)에게 황제라 칭할 것을 권했다 황제의 조정 형태가 되면 한족 관리들 자신이 좀더 높은 칭호의 직위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권유를 한 것이다. 9 모용준이 360년에 죽자, 유능한 동생인 각(恪) 대신에 11세의 어린애인 위(暐, 360-70)가 제위에 올랐다. 중국화 현상이 너무 빨랐고, 결과적으로 전연 역시 빠르게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 [후대의 정복왕조들이 중국화를 경계하게 된 반면교사 역할을 한 것이다.] 

 

일찍이 모용준은 서부와 남부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남쪽의 한족왕조 진(東晉)과 서쪽 부견의 진(前秦)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359년 초, 모용준은 자신이 당시에 정복한 모든 주와 군에 명을 내려 군 복무가 가능한 한족(漢族) 장정에 대한 현황을 조사한 다음, 각 가구에 남자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은 모두 징집하도록 명령했다. 모용준은 150만 명의 보병 대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확보할 계획이었다. 10 

 

당시 전연 정부의 부패상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는 대신 신소(申紹)의 상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상소문의 일부는 새로 징집된 군대에 관련된 내용이다: “과거 우리 궁사와 기병들의 용맹은 진(秦)과 진(晉)나라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었다. 우리 (鮮卑) 병사들은 언제나 구름같이 몰려들고 질풍같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징집된 漢族) 병사들은 약속된 시간에 모이지도 않고, 전투에는 쓸모가 없는 것일까? 지방 관리들이 가난하고 약한자들에게 제일 먼저 군역과 조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전장과 노역에 끌려 나가는 자나 집에 남아있는 자나 모두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고통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모두 도망을 치고, 농사와 양잠을 돌보는 자가 없게 된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의지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병사가 전투에 실제 참가하지 안을 때에는 평상시의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허용되어야 한다” 11 

 

섭정 모용각은 367년에 죽었다. 어린 황제는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 모용선비는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으나, 370년에 부견에게 정복된다. 진서 편찬자들에 의하면, 연나라 말기에 병사들이 부패한 조정에 너무나도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모용평(慕容評)이 [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었더라도] 죽기로 공격을 해오는 부견의 군대를 격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12

 

Schreiber (1956: 125)는, “모용씨가 중국화 되자 한족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남조(南朝)까지 모용씨를 존경을 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비꼬는 찬사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중국: 황금시대의 여명 - 200년부터 750년까지”라는 주제로 (2004. 10. 12. - 2005. 1. 23.) 전시회를 열었는데, 오늘날 요녕성의 서부에 위치한 조양(朝陽)과 북표(北票) 지역에서 발굴되고 모용 선비 고유의 유물로 확인된 상당수의 청동기와 금동제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내용을 책자로 펴낸 Watt(2004: XIX)등은 모용 선비의 예술품에 나타난 전형적인 도안 형태들을 얼마 후에 중국대륙의 북위와 한반도의 신라 예술품에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Farming unearthed at the (top) Zhao-yang area; (middle) Jiayu-guan 酒泉嘉峪關 area, Gan-su; and (bottom) 高台酪駝城 area, Gan-su.

 

 

조양에서 발굴된 한 쌍의 말 안장에 새겨진 (새와 다른 동물들을 품은 6각형들의) 투과형 문양은 모용 선비 고유의 기법인데, 후에 북위로 전파된다. Watt(2004: 125)등은, 이 문양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왕국의 한국사람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사실 이런 문양들은 신라에서만 채택된 것이 아니라, 가야에서도, 또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열도의 야마토 왕국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양식과 문양에 아주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유물들이 선비족의 유적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370년, 선비족의 연나라는 부견(苻堅)의 전진(前秦, 351-394)에 의해 정복된다 부견을 흔히 탕구트(티벳)족 출신이라 하지만, 돌궐-몽골 계통의 지배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중국 전체의 새로운 주인이 된 부견은, 동진(東晋, 317-420)을 정복하려고 남쪽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였지만, 383년의 비수(肥水)전투 패배로, 전진 왕조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탁발이란 이름의 선비족은 그들 본거지인 성락(盛樂)으로부터 병주(幷州)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拓拔珪)는 398년에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쪽으로 쳐들어와 평성(平城, 오늘날의 大同)에 수도를 정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9 (2005. 2. 19)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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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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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Guo (1995b: 148-9, 179) 참조. 

 

2. Barfield (1989: 105)  

 

3. Barfield (1989: 99) 

 

4. Grousset (1970: 58) 

 

5. Schreiber (1949-55: 374-5, 424) 참조. 모용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가령(家令)들을 제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므로 농업의 진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晉書 卷一百八 載記 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 廆…言曰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6. Schreiber (1949-55: 401) 참조. 

 

7. Schreiber (1956: 121-2) 참조. 모용황은 자신의 부친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대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대했다. 그는 황태자를 앞장 세우지 않았고, 유능한 왕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어느 왕자이든 높이 존경했다. 모용황은, 한족 관료들이 맹렬히 반대를 안 했다면, 태자 준(儁)을 제쳐놓고 수(垂)에게 제위를 승계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모용준은 42세에 제위를 승계했다 

 

8. Barfield (1989: 109-111) 와 Gerhardt Schreiber, “The history of former Yen dynasty,” Monumenta Serica, Vol. 14 (1949-55: 374-480) and Vol.15 (1956: 1-141) 참조. 모용외가 아들에게 훌륭한 중국식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모용황은 중국 고전에 능통했고, 중국의 전통적 교육방법을 존중하게 되었다. Schreiber가 李昉 (925-96)의 太平御覽에서 인용.  

 

晉書 卷一百八 載記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晉書 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皝 … 尙經學魏書 列傳 慕容廆 ..父涉歸..遷邑遼東…死 廆代領部落 ..死 子元眞代痲自稱燕王 置官如魏武輔漢故事 …征高麗[341] 大破之…子儁統任…建國十五年[352] ..置百官  

 

9. 그러자 모용준은 한족 관습을 흉내 내, “우리 본향이 사막과 목초지이며 우리는 본래 야만인이었다”고 말하며 한족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다가, 353년 1월에 “나는 중국 백성들의 권유로 부덕하나마 제위에 오른다”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Schreiber (1956: 31-35) 참조. 

 

10. Schreiber (1956: 54-5) 참조. 360년 정월, 모용준이 병석에 누어있을 당시, 359년 겨울까지 지연되었던 새로운 군대의 징집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모든 주와 군으로부터 징집된 장정들이 수도로 집결하면서, 작당한 도둑떼가 들끓었고, 산적들이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습격을 하여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晉書 卷一百十 載記第十 慕容儁 儁于是復圖入寇 兼欲經略 關西 乃令州郡校閱見丁 精覆隱 漏率戶留一丁 餘悉發之欲使步 卒一百五十萬 期明年大集 將進 臨洛陽 爲三方節度 武邑劉貴 上書極諫 陳百姓凋弊 召兵非法 恐 人不堪命 有土崩之禍... 乃 改爲三五占兵… 是時兵集 鄴城 盜賊互起 每夜攻劫 晨昏 斷行 

 

11. 晉書 卷一百十一 載記第十 慕容暐 其尙書左丞申紹上疏曰 …弓馬之勁 秦晉所憚 雲騎風馳 國之常也 而比赴敵後機 兵不速 濟者何也 … 遂致奔亡 ... 退離 蠶農之要 兵豈在多 貴於用命 宜嚴制軍科 務先饒復 習兵敎戰 使偏伍有常 從戎之外 足營私業 Schreiber (1956: 82-6) 참조

 

12. Schreiber (1956: 128) 참조 

 

10. 이원통치체제의 유지: 첫 정복왕조 북위(拓跋鮮卑 北魏)의 출현

  •  홍원탁
  •  승인 2005.02.27 00:00

Maintaining the Dual System: Northern Wei of Tuoba Xianbei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통치 체제를 답습해,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탈발규(r.386-409)는 모용선비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했고, 모용 선비족 지배층은 북위조정 내에 지배 귀족층을 구성하는 주요 씨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북위의 문민 관료제도는 한족들 또한 탁발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침략해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후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몽골족의 원(元)을 제외한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선비족 예술의 특유한 양식은 북위의 평성(平城)시대 전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섬서와 녕하성에 자리잡았던 북주시대 까지도 존속하였다. 탁발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사람이 만든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탁발선비 북위(拓跋鮮卑 北魏)의 이원통치체제 유지  

 

첫 정복왕조의 출현 
                                                              
 

홍원탁 (서울대 교수) 

 

모용선비족 보다 더 후진적이었다는 탁발선비족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통치 체제를 답습 해,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탁발선비 왕국은 처음에 대(代)라 칭했다. 341년, 대의 지배자 시이지안(r.338-76)은 모용황(r.333-49)의 누이동생인 자신의 처가 죽자 황(皝)에게 또 다른 공주를 처로 삼도록 보내달라고 청했다. 모용황은 그 대가로 말 1천 필을 요구했다. 그러자 시이지안은 아주 무례한 태도로 거절을 했다. 343년, 모용황이 태자 준(r.349-60)과 평(評)에게 군사를 주어 탁발선비족을 공격하게 하자 시이지안은 부족을 이끌고 산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344년, 시이지안은 모용황의 딸을 신부로 맞이해 오도록 동생 질(秩)을 연나라에 보냈다. 몇 달 후, 모용황은 사신을 보내 자기한테도 공주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시이지안은 자신의 누이 동생을 황에게 시집 보냈다. 1 376년에 부견이 군대를 보내 대를 공격했을 때 시이지안은 무리를 이끌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 있다가 죽었다.

시이지안의 손자인 탈발규(r.386-409)는 396년에 북위(386-534) 황제라 선포하고 모용선비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했다. 2 모용 선비족 지배층은 탁발 북위(386- 534) 조정 내에 지배 귀족층을 구성하는 주요 씨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북위의 문민 관료제도는 한족들 또한 탁발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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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어와 선비어는 동일한 언어이었다. 북위는 후에 서위와 동위로 양분되고, 동위는 북제(550-77)가 된다. 북제(北齊) 때 쓰여진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보면, 북제 조정에 봉직하는 한족 관리가 선비 고관들의 눈에 들어 출세길이 열리도록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선비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나온다. 3 탁발선비 지배층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자신들 군대를 지휘할 때 계속 선비 언어를 사용했다. 4 하지만 후에 탁발 북위가 중국화 하자, 이들 군사 명령어(鮮卑號令) 중 많은 부분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 5

 

이원제도의 유지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조직 덕분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이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 6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 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후대 정복왕조들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 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Ox Wagons excavated at the Zhao-yang area

 

 

한족 왕조들은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거나, 엄청난 선물과 교역특혜를 제공하거나, 대규모 공격을 반복하는 정책 중 하나를 택했었다. 그러나 북중국을 점령한 만주족 왕조들의 전략은, 적대적인 유목민 부족장들을 혼인정책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어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적대적인 부족들이 합심하여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부족장들을 지원하거나, 성장 가능한 부족세력을 초장에 깨 버리는 방식이었다. 만주족 지배자들과 군대는 초원의 실상을 완전히 파악하기 때문에, 초원지대의 사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주족은 단순히 초원의 적을 패배시키기보다는, 주민과 가축들을 한꺼번에 모두 빼앗아 감으로서 유목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려 했다. 7

 

439년에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태무제(太武帝, 423-52)는, 일찍이 429년에 오르콘강 유역의 유연(柔然) 몽골을 정벌할 때, “한족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망아지나 암소 떼들이 호랑이나 늑대 무리를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유연 몽골은 여름철에는 북쪽에서 방목을 하고, 가을에는 남쪽으로 내려오며, 겨울이 되면 우리 국경을 침범한다. 우리는 그들이 여름철에 목초지에서 방목을 하고 있을 때 공격을 하면 된다. 숫말들은 암말을 쫓아다니고, 암말은 새끼들 돌보기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들은 모두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덮쳐서 그들을 목초지와 물가에서 쫓아내면, 며칠도 안돼서 모두 포로가 되거나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8

 

중국화 되고, 불교의 영향으로 무기력하게 되고 

 

북위 조정이 마침내 중국화되고, 불교의 영향으로 무기력해지자, 국경정책도 옛 한족왕조들 모양으로 성벽을 쌓고 지키거나 유목민들에게 화평의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 되었다. 9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471-499)는 중국식으로 황제중심의 전제체제를 확립한다며 정부 관직을 온통 한족으로 채우기 시작했고, 494년에는 수도를 선비족 고향에 가까운 평성(平城, 현재의 大同)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는 심지어 조정 내에서 선비 언어의 사용을 금지해버렸다. 

 

     
▲ Xianbei Tomb Paintings(of Former Yan) excavated in 1982 at the Zhao-yang 袁台子 朝陽 area, across the Daling River, Liao-xi

 

 

효문제의 아버지는 수도승이 되기 위해 왕위를 버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북위의 지배자들은 애당초 유교적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불교를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식 간다라 불교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그토록 신비한 모습의 거대한 (불상) 조각작품들을 만들었다. Grousset(1970: 66)은 “포악한 전사들도 일단 보살의 자비심에 감화를 받게 되면, 인도주의적인 계율을 받아들여, 본래의 호전성을 잊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아예 자기방어 조차도 소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목민 정복자들이 중국화 되어, 새로 나타난 유목민족에게 망하던지, 아니면 한족에게 쫓겨나게 되는 순간이 항상 찾아온다. Twitchett(1979: 97)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때 북위의 국경선을 지키던 군 부대들은, 한족들이 하던 식으로, 범죄자들을 내다버리는 쓰레기장이 되었고, 관료들의 착취 대상이 되어,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한 반항집단으로 변했다. 마침내 524년에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던 선비족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선비 예술의 특유한 형태 

 

중국대륙 북부의 탁발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0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사람이 만든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 (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선비족 예술의 특유한 양식은 북위의 평성(平城)시대 전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섬서와 녕하성에 자리잡았던 북주시대 까지도 존속하였다. 11 

 

534년에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다. 이민족적인 요소가 훨씬 강했던 서위는 557년에 북주(北周, 557-81)가 되어, 577년에 북제를 정복하고 579년에 진(陳)의 강북 땅을 차지해,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북중국을 재통일할 수 있었다. 수(隋, 581-618) 나라는 선비족 북주의 후계자로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0 (2005. 2. 26.)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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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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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魏書 卷一 序紀 第一 
昭成皇帝諱什翼犍痲烈帝臨崩... 建國二年 [339] … 慕容元眞妹爲皇后…四年 [341]…皇后慕容氏崩… 七年 [344] 遣大人長孫秩迎后慕容氏元眞之女於境 … 慕容元眞… 求交婚…以烈帝女妻之
魏書 卷二 太祖紀 第二 
太祖道武皇帝 諱珪 昭成皇帝之嫡孫 獻明皇帝之子 … 年六歲昭成崩 …苻堅遣將…國衆離散

資治通鑑 卷九十七 晉紀十九 
建元元年 [343] … 代王什翼犍復求婚於燕 燕王皝使納馬千匹爲禮 什翼犍不與又倨慢無子壻禮 … 皝遣世子儁 帥前軍師評等 擊代 什翼犍帥衆避去 燕人無所見而還  

Schreiber (1949-55: 473) 참조. 

 

2. Barfield (1989: 106)  

 

3. Schreiber (1949-55: 388) 참조.  
齊朝有一位士大夫 曾經對我說 我有一個孩子 已經十七歲了 懂得一些書信 公文的書寫 我敎他學習鮮卑語和彈琵琶 只要稍稍掌握一些 就可以用這些本領去 爲公卿們效力了 沒有不受寵的道理 這也是一件很重要的事情 

 

4. 隋書經籍志의 鮮卑號令을 인용. Schreiber (1949-55: 387-8) 참조.

 

5. Janhunen (1996: 190-191)  

 

6. Barfield (1989: 118-119)  

 

7. Barfield (1989: 112, 124)  
 
8. Grousset (1970: 62-63) 참조. 

 

9. Barfield (1989: 124)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145)에 의하면, 북위의 탁발선비족 지배자들은 다른 유목국가 혹은 한족과의 결혼에 의한 동맹관계 수립을 꺼려하였다. 그들의 혼인 정책은 주로 유목민 혹은 다른 독립국가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북위 사회 안으로 흡수융합 시키기 위한 결혼에 국한되었었다. 북위가 국경무역과 공물(貢物)교환이란 한족 방식의 방어정책을 계속 기피하다가 마침내 그 방침을 변경한 것은 경종(敬宗, 528-530)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었는데, 이는 북위가 534년에 몰락하기 겨우 6년 전 이었다.  

 

10. Watt, et al. (2004: XIX)  
 
 11. Watt, et al. (2004: XIX)  

 

11. 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연 나라를 통한 철기문화의 전파

  •  홍원탁
  •  승인 2005.03.20 00:00

The Ancient Yan and the Ye-maek Chosun

 

사기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r.1049-43 BC)이 소공을 북연(北燕)의 통치자로 봉했고, 또 기자를 그 이웃인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 사마천(145-90 BC)은 붓으로 몇 글자 적어, 고대 한족 왕실 종친들을 선비족과 예맥-퉁구스의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시조로 만든 것이다. 한긴, 북연 말고 남연 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사기는 주석을 달았다. 연나라는 7패(七覇) 중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는데, 소왕(昭王, 311-279 BC) 때에 와서 동북방향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군사력이 최고에 달했다는 바로 이시기에, 소왕은 수도를 계성(薊城)의 남서쪽에 위치한 [즉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동북방향과는 정반대 쪽인] 무양(武陽)으로 옮겼다. 소위 「연 장성」이었다는 요서의 유적지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유물들을 보면, 모두 한족(漢族) 문화와는 관련이 없고, 하가점상층과 오르도스 청동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이들을 동호(선비)족의 유적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사기에 기록된 「장성」이란 두 글자를 근거로, 흙벽돌과 돌로 만든 방벽, 초소, 봉화대, 협곡을 가로막는 돌담과 웅덩이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 형태의 유적을 보고 사학자들이 (BC 299년 이전에 축조된) 「연 장성」의 흔적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유적도 없는 동과 서로 장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하며 멋대로 장성의 위치를 그려댄다. BC 400년경에 연나라를 통해 중국의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졌다.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과 연나라 사이의 충돌 기록과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은」위만이라는 연나라 사람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보면 예맥-퉁구스족과 선비-동호족 간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원탁 (서울대 교수) 

 

만주의 원시 선비-퉁구스 종족: 선비계, 예맥계, 말갈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했던 원시 투르코-몽골족의 일부가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만주 땅에 들어와 원시 선비-퉁구스가 되었고, 또 그들 중 일부는 좀더 따뜻하고 습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한반도는 만주의 중심부가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형상으로,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들이 줄이어 서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들이 이어져 있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만주 권역(圈域)은, 유사한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며 밀접한 역사를 함께한 “선비-퉁구스”계통 종족들의 민족사학적 범주로서, 동아시아 역사체계 안에서 3대 핵심 권역의 하나를 구성해 왔다. 1 원시 알타이 계통 언어들을 사용하는 선비-퉁구스 역사공동체는 신석기 홍산문화와, 고인돌, 비파형-세형 동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한반도는 민족사학적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실제 지정학적 현실로도 만주대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부 만주의 요서(遼西) 초원지대는, 선비와 그 후예인 거란족을 포함하는 소위 옛 동호(東胡)의 본고장이다. 흔히 “목초지대의 늑대들”로 불리는 이들 선비계(鮮卑系) 집단은 몽골고원 유목민과 유사한 생활을 하였다. 소흥안령 산맥으로부터 장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는, 숙신-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의 핵심이 되는 말갈-여진 퉁구스의 본향이다. 흔히 “삼림의 호랑이”로 불리는 이들 말갈계(靺鞨系) 집단은 사냥과 채집에 크게 의존하면서 작은 밭 조각들을 모아 농사를 지었다.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佟佳江)-압록강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이다. 이들은 주로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면서, 강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단백질을 보충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에 의하면 요동의 신락(新樂)유적지에서 발견된 수수는 기원전 5000년 경의 것이다. 2 한반도 남부는 쌀 농사를 짓는 예맥계 분파 집단의 본고장이었으며, 이들은 중국의 사서에서 총괄적으로 진(辰), 한(韓), 혹은 삼한으로 불렸던 원시 정치적 실체를 구성했다. 영어로 “Korea Proper”라는 표현은 중부만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을 지칭하는 민족사학적 범주로서의 한국을 의미한다. 소위 만주유역(Manchurian Basin)과 한반도를 합친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홍산문화의 후예: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고인돌 등의 전통 

 

중부만주-한반도 지역에서의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다.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 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형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Barnes(1993: 109)는 말한다. 후기 신석기를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의 민 무늬 토기는 기원전 2000년경에 중부만주-한반도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요녕성과 흑룡강성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기타 만주지역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민 무늬토기와 유사하다. 3 신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만주유역과 한반도 사이의 유사성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도 민 무늬토기, 고인돌, 청동검 등의 형태로 지속된다. 4 고인돌은 예맥 지배층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만주유역과 한반도의 “동이”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인돌 축조 관행은 기원전 300년경에 사라졌다. 5

 

만주 유역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된다. 6 Barnes(1993: 162)는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 그 자체는 만주 유역으로부터 요녕식 (비파형) 동검이 진입해 오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요녕식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 Nelson(1993: 133)은 “요녕식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청동으로 단검, 화살촉, 거울(銅鏡), 낚시 고리, 도끼 등을 만들던 거푸집과 종, (동물형상) 혁대고리, 단추, 마구류(馬具類), 마차의 장식품 등 기타 청동제품들이 한반도 전역의 민무늬토기 유적지에서 출토된다. 7 한반도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동검과 동경의 유래는 하가점 상층 문화(1100-300 BC)로 추적된다. 8

 

한반도 서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쌀은 기원전 2400-2100년경의 것으로 측정된다. 9 중국 남부에서 쌀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남부에서 생태학적으로 비슷한 틈새를 발견하고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름철에 북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타면, 양자강 하구로부터 한반도의 남서부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다. 10 

 

 

 

 

사기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r.1049-43)이 자신의 이복 동생인 소공을 (북)연의 통치자로 봉했고, 또 (상나라 마지막 왕의 친척인) 기자를 연나라 이웃인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 사마천은 붓으로 몇 글자 적어, 고대 한족 왕실 종친들을 전통적으로 동호와 예맥-퉁구스의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시조로 만든 것이다. 사기에는 성왕(成王, 1042-36 BC) 때, 소공이 섬서(陝과 그 서쪽, 혹은 섬의 서쪽)를 다스리고, 주공이 그 동쪽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기는 또, 소공에게 봉해주었다는 북연(燕) 말고 남연 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11 

 

전국시대에 편찬된 관자(管子)를 보면, 제(齊)의 환공(桓公 685-43 BC)에 대한 기록에서 조선이 등장하며, 전한(前漢)때 쓰여진 사마천(145-90 BC)의 사기에는 연 나라에 대한 기록 속에 부여와 고조선이 함께 나타난다. 후한서(後漢書)는 예(濊),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말한다. 12  

 

주(周, 1122 혹은 1027-256 BC) 조정이 쇠망의 길로 접어들어 기원전 403년경부터는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위략(魏略, 東夷傳 三韓전에 인용)에 의하면, 주 왕실이 쇠약해지자 연의 지배자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자 기자의 후손인 조선의 지배자도 스스로 왕이라 칭했고, 이들 두 나라는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다. 결국 기원전 300년경에 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연은 진개(秦開, BC 311-297년에 활약)를 시켜 조선을 공격했다. 13 

 

사기 흉노전을 보면 진개라는 이름의 장수가 동호에 인질로 잡혀가 있을 때 동호족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으나, 연나라로 돌아온 후, 동호를 급습하여 1천리 밖으로 쫓아냈다 한다. 사기는 이어, 당시 연이 영토를 크게 넓혀 오늘날의 난하(灤河) 주변에 요서와 요동군을 포함하여 5개의 군을 설치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말한다. 14 

 

사기에 의하면 처음에 연나라가 쌓고, 후에 진나라가 다시 쌓은 장성이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하지만 12세기에 제작된 지리도를 보면 오늘날의 난하를 옛날에는 요수(遼水)라 불렀고, 오늘날의 요하는 소요수라 불렀다. 따라서 사기의 요동은 난하의 동쪽을 의미했었을 것이다. 15 즉, 연이 설치했다는 요동군과 요서군은 오늘날의 난하 좌우에 위치했고, 상곡, 어양, 우북평 군들은 오늘날의 하북성에 위치했을 것이다. 

 

Karachin Banner로부터 Fu-xin에 이르기까지, 흙벽돌과 돌로 만든 방벽, 초소, 크고 작은 요새, 봉화대, 협곡을 가로막는 돌담, 웅덩이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 형태의 유적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연 장성”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별로 남아있는 유적도 없는 동과 서로 “연 장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하며 장성의 위치를 멋대로 그려댄다. 이제 Di Cosmo (2002: 148-50, 157)가 요약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그 자신의 해석을 빼고) 소개한다.

 

소위 “연 장성”을 따라가며, 높은 지대에 돌로 지어진 몇 개의 요새와 원형 거주지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이 하가점 상층문화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 요새화된 방어선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모두 한족 문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고고학자들은 그곳 거주자가 동호족이었다고 믿는다. 적봉 부근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모두 하가점 상층과 오르도스 청동문화에 속한다. 16  이들 주변 전 지역의 거주자들은 모두 한족이 아니라 유목민들 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위 장성(長城)이라는 존재는, 유목민과 농민을 분리시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 자체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킬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장벽들은 대부분 비(非)농경지역을 방위하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외계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하던 지역 속에, 새삼스럽게 살게 된 한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장벽들이 만들어 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그 장벽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실제로 보호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과 유사한 이 유적들을 보고 (기원전 299년 이전에 축조된) “연 장성”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순전히 사기에 기록된 “장성”이란 두 글자뿐이다. 

 

동이전의 예전(濊傳)을 보면, 진나라 말기에 전국이 반란에 의해 혼란에 빠졌을 때(209 BC), 중국 동북부의 제, 조, 연 나라 사람들 수 만 명이 조선 땅으로 피난을 했는데,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은” 위만이라는 연나라 사람(206-195 BC)도 왔다고 말한다. 위만은 서쪽 변경에서 피난민들을 관장하는 업무를 위임 받고 있었는데 마침내는 조선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말한다. 동이전의 한전(韓傳)은, 위만에 의해 쫓겨난 조선왕이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 지역에 정착해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17 

 

사기에 의하면, 옛 연나라는 7패(七覇) 중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는데, 소왕(昭王, 311-279 BC) 때에 와서 동북방향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소위 연나라의 무력이 최고에 달했다는 바로 이시기에, 소왕은 연 조정을 옛 수도 계성(薊城)의 “남서”쪽에 위치한 [즉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동북방향과는 정반대 쪽인] 이현(易縣) 부근의 무양(武陽)으로 옮겼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온갖 의구심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예컨대, (1) 사기에서 말하는 (北)연의 영토가 과연 오늘날의 하북성 이외 지역으로 확대된 적이 있었나? (2) 소위 연 장성이란 존재가 한족 연나라와 정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3) 사기에서 말하는 연 장성이라는 것이 진 시황제가 후에 축조한 만리장성과 똑 같은 장소에 위치해, 시황제가 장성을 쉽게 축조할 수 있게 해준 기반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닌가? (4) 한족 (北)연과 함께 동호족의 (南)연이 존재하지 안았을까? (5) 기원전 311년 진개의 정복활동 이전에 난하 주변의 요서 지역을 과연 누가 점거하고 있었는가? (6) 진개의 정복활동 이후에 오늘날의 요녕성 대능하 주변의 지역을 누가 점거 했나? (7) 기원전 206-195년 기간 중에 등장하는 위만이라는 이름의 연나라 사람이 어째서 상투를 틀고 동호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가? 18  

 

선비-동호족과 예맥-퉁구스족 

 

중국에서는 두드려서 만든 저탄소 연철과, 주조된 고탄소 철이 모두 기원전 500년경부터 사용되었고, 중급의 탄소를 함유한 강철도 기원전 300년경 이후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철기문화는 철제 무기, 말 장식품, 말 재갈, 차축의 마개, 괭이, 보습, 낫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기원전 400년경에 옛 연나라를 통해 이들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9 만주평원과 한반도에서 철제 도구와 함께 발견되는 유물들을 보면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칼날이 칼자루와 분리되어 주조된) 세형 동검과 스키토-사이베리안 양식의 짐승 모양을 한 혁대고리가 발견된다.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과 옛 연나라 사이의 충돌 기록은, 몽골 유목민적인 선비-동호족과 중부만주-한반도의 예맥-퉁구스족 간에 매우 친밀한 관계, 즉 사이가 좋다는 이웃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싸우는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Barnes(1993: 152)는, 연나라가 비록 주나라 말기 전국 7웅(雄)들 중에서 가장 약하였지만, 발굴된 여러 개의 철 제조 유적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당시 가장 강했던 진(秦) 나라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철제품들을 생산했고, 동아시아 최초의 철 갑옷 또한 연나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연나라가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본토에 철기문화가 시작 된지 100년도 안되어 한반도에 철이 전파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20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은 전한(前漢) 조정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진(辰, 후에 三韓) 나라 땅의 조그만 성읍국가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배영역과 세력이 커 있었다. 21 기원전 109년에 고조선의 왕은 (난하 동쪽의) 요동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관료를 살해하였다. 당시, 고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을까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던 한 무제(漢武帝, BC 141-87)는 그 해 가을에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일년 가까운 전투 끝에 고조선의 왕은 108년에 살해되었고, 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하여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22 그로부터 30년이 못되어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지거나, 다른 위치로 멀리 밀려났다. 313년경, 한족들은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과 (204-220년 기간 중에) 공손씨가 설치한 대방군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 1. Ebrey (1996: 87)

 

 

기원전 108년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족이 처음으로 요하 하류와 한반도의 서북부 연안에 진출한,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316년에 서진(西晋)이 망한 후, 요하 유역에 고립되어 있던 한족들은, 시세 변화에 따라, 선비족 혹은 퉁구스 족에 붙어 협력을 했다. 한족에 의한 요동의 지배는 352년이 지난 668-755년 기간 중에 당나라에 의해 재현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요동 땅은 선비-거란과 예맥-여진 퉁구스족의 각축장 이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1 (2005. 3. 5.)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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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민족사학(民族史學)은 인류학의 한 분파로, 언어-문화적 집단으로서의 각 민족의 기원, 분포, 특징, 등을 분석하며, 특히 고고학적 유물의 분석을 통한 문화발전 연구에 치중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동아시아의 민족사학은 연구자 각 개인이 처한 정치환경 현실에 지배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특정 연구자의 민족사학을 추구하는 방법자체가 명백하게 묘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사학”은 “민족주의 역사관”의 약자가 아니며, 필자가 동아시아 역사를 민족사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2. 이 지역은 심양 주변과 그 북쪽 지역을 포함한다. Nelson (1993: 108)을 참조.  

 

3. Nelson(1993: 113-6, 158, 161)을 참조. Xu Yu-lin(Nelson, 1995: 66, 79)은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가 요동의 음각 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Nelson(1995: 10)에 의하면, 이와 유사한 토기들이 시베리아 연안과 한반도, 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제조-장식 기법이 만리장성 아래 중국 본토에서 발굴되는 토기와는 전혀 다르다.

 

4. 아시아에서 고인돌은 인도로부터 만주에 걸쳐 발견되는데, 만주유역-한반도 지역에서 10만개가 넘는 최고의 밀도를 보인다. Nelson(1993: 159, 163)은,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숫자는 고인돌의 원산지가 한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하고 또, “영국 열도에서처럼, 예맥의 지배층들은 그들의 매장지를 가지고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 말기에 출현했다. 거대한 돌기둥 위에 최고 300톤에 달하는 관석(冠石)을 올려놓아, 지상에 석관 모양의 방을 만들었다.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후반에 출현했는데, 마치 바둑판 모양 몇 개의 돌 위에 거대한 관석을 덮고, 지하에 석관이나 옹관을 묻었다. 매장품으로는 옥관 목걸이와 곡옥(曲玉) 등이 발굴된다.  Nelson(1995: 16)은, 만주평원과 요동반도의 고인돌들이 그 축조방법과 발굴물의 내용 면에서 한반도의 고인돌과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고 말한다. Xu Yu-lin(Nelson, 1995: 80)은 신석기시대의 요동반도, 산동반도, 한반도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한다. 산동반도 지역에서 고인돌을 만들던 동이족들은 한족에 의해 흡수 동화되었거나, 만주유역으로 밀려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5. Barnes (1993: 166) 참조. 

 

6. Barnes (1993: 160-1) 참조. 

 

7. Nelson (1993: 137-8) 참조.  

 

8. Pai (2000: 200,203) 참조. 

 

9. Nelson (1993: 147) 참조. 

 

10.  Kim (1986: 121) 참조.  

 

11. 史記 卷三十四 燕召公世家第四 周武王之滅紂[1027 BC]封召公於北燕  宋忠曰 有南燕 故云北燕 其在成王時 召公爲三公 自陝以西 召公主之 自陝以東 周公主之

史記 卷三十八 宋微子世家第八 箕子者 紂親戚也 … 周武王伐紂克殷 …訪問箕子 …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사기를 보면, 주나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상나라 마지막 왕에 의해 투옥된 기자(箕子)를 석방 해 주라고 명한다. 史記 卷四 周本紀第四 武王… 命召公釋箕子之囚

 

12. 管子 卷二十三 輕重甲 第八十 桓公曰 四夷不服 … 管子對曰 …朝鮮不朝 ... [管仲, ?...645 BC]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閒…東北邊胡 上谷至遼東…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貊]朝鮮…之利  

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 濊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遼史 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 朝鮮之地 

 

13. 위략은 280-289년 사이에 편찬되었는데, 280-297년 기간 중에 편찬된 동이전 내용의 약 40%가 위략을 인용 한 것이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요하에서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했던 고조선의 기원은 적어도 옛 연나라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14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BC 403?] 燕自尊爲王 [323 BC] 欲東略之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BC 311-297]…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BC 209-8]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 朝鮮與燕界於浿水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  燕有賢將秦開 … 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而拒胡 

 

15. 윤내현 (1986: 43-58) 참조.  

史記 匈奴列傳 第五十 燕亦築長城…至襄平 韋昭云今遼東所理也 
史記 卷八十八 蒙恬列傳第二十八 始皇 … 築長城 … 至遼東 

 

조선과 연의 국경이라는 패수(浿水)는 난하, 대능하, 요하, 훈강,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중 하나로 추측된다. 심재훈(2002: 302)은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의 사람들도 대부분 난하와 대능하 계곡들을 조선의 영토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심재훈은 기원전 2세기에 편찬된 회남자(淮南子)의 “한(漢) 나라의 동쪽 끝인 갈석(碣石)산을 지나 조선을 통과한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또 기원전 1세기에 편찬된 염철론(鹽鐵論)의 “연나라는 갈석산으로 막혀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갈석산은 난하 하류 동쪽 창려현에 위치한다.

 

16. 고리형 손잡이가 있는 동검, 말 혹은 새를 주제로 하는 장식품, (방울)종 장식품, 단추, 귀걸이, 혁대 고리 등과 같은 청동제품들이 대량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중국본토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7.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結夷服 復來王之  
韓傳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詣準降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 … 令守西邊 … 遂還攻準 準…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18. 곽대순(1995b: 178)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에 속하는 매장 유적이 북경의 류리허(琉璃河) 지역에서, 서주 초창기에 소공의 연나라 수도가 되었다는 장소에 해당하는 층 아래의, 상나라 보다 도 더 이른 층에서 발견되었다. 연이라는 글자는 당시에 이미 신탁 갑골에 새겨져 있었다. 사마천(c.145-86 BC)은 주 무왕(r.1049-43 BC)이 소공을 북연의 지배자로 봉해주었다고 기록했다. 사기는 당시에 남연 같은 존재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기원후 336-436 기간 중, 전연(337-70), 후연(384-408), 서연(384-94), 남연(398-410), 북연(409-36) 등 네 개의 연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나타났었다. 그런데, 요서에 위치한 북연의 지배자는 놀랍게도 한족이었고, 산동반도에 위치한 남연을 포함해서 나머지 3개의 연나라 지배자들은 모두 모용 선비족이었다. 

 

19. Barnes (1993: 150) 참조. 여영시(余英時)는, 연나라와 고조선의 주민들 사이에 활발한 상업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연나라에서 주조한 화폐들이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Twitchet and Loewe (1986: 447) 참조. 

 

20. Barnes (2001: 83-4) 참조.  Nelson (1993: 174)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것으로 보이는 소규모 용광로에서 생산된 철제품들이 북한강 유역의 철광석 매장지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또 남해안의 옛 가야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1-2 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원시적 형태의 제철 가마들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21. 이기백 (1984: 17) 참조. 

 

22. 漢書 卷六 武帝紀 第六 元封二年…朝鮮王攻殺遼東都尉 乃募天下死罪擊朝鮮 六月…秋 …遣樓船將軍…將應募罪人擊朝 鮮 三年…夏..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道眞番郡

漢書 卷七十三 韋賢傳 第四 十三 孝武皇帝愍中國罷勞 無安 寧之時...北攘凶奴降昆邪十萬之 衆 置五屬國 起朔方以奪其肥饒 之地 東伐朝鮮 起玄菟樂浪以斷 凶奴之左臂

 

12. 부여-고구려 예맥(濊貊), 숙신-읍루 퉁구스, 선비 연(燕): 친밀한 역사

  •  홍원탁
  •  승인 2005.03.26 00:00

The Puyeo-Koguryeo Ye-maek the Sushen-Yilou Tungus, and the Xianbei Yan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말갈-여진의 선조이며 숙신의 후예인 읍루가 한(漢)나라 때부터 220~226년경까지 부여에 예속(臣屬)돼왔다고 말한다 3세기 말경에 모용선비가 본격적으로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몽골적인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친밀한 관계(즉, 전쟁관계)가 재연된다. 예맥 쪽의 명칭은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뀌었는데, 선비 쪽은 여전히 연(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기원전 400년경에 고조선과 옛 연 나라간의 충돌을 통해서 철기제조 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졌고, 말등자의 사용법은 모용선비와 고구려가 끊임 없이 싸우는 와중에 전해진 것 같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부여-고구려 예맥(濊貊), 숙신-읍루 퉁구스, 선비 연(燕): 친밀한 역사

홍원탁 (서울대 교수) 

단명했던 왕망의 신(新, AD 8-23) 왕조는 부여를, 흉노, 고구려와 함께,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부여 왕이 후한 조정에 사신을 보낸 최초의 기록은 AD 49년이다.1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3세기 말을 기준으로, 부여에 대해 930자 분량의 기록을 했다. 이는 중국 정사에 나타난 부여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이다. 다음은 그 주요부분의 요약이다. 

부여의 서쪽에는 선비가 있고, 동쪽에는 읍루가 있으며, 남쪽에는 고구려가 있고, 북으로는 눈강(嫩江)이 있다. 동이(東夷)들 중에서 부여만이 광활한 평원을 차지하여 곡식을 심고 가축을 길렀다. 노인네들은 그들 선조가 오래 전에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리에서) 예맥 땅으로 피난을 왔다고 말한다. 부여의 왕실 창고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옥으로 만든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홍산문화의 옥 전통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관직의 명칭은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가축의 이름들을 사용한다. 하위직은 몇 백의 호구를 거느리고, 고위직은 몇 천의 호구를 거느린다.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술잔을 깨끗이 닦아 상대방에게 권한다. 길을 다닐 때는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노래 소리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요즘의 가라오케-노래방을 분명히 즐겼을 것이다.]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숭상하고, 금과 은으로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흰 베로 만든 큰소매의 위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흉노 모양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갑옷과 무기를 각자의 집에 보관을 하며, 귀족(諸加)들 자신이 전투에 나가는 반면, 하층민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 여명에 달한다. 후한 말기에 선비와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공손씨는 [부여와 동맹을 맺으려고] 자기 문중의 딸을 부여왕에게 시집 보냈다.2  

동이전은 읍루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을 하고 있다. 읍루는 [말갈-여진의 선조인] 숙신의 후예로, 부여 동북방의 삼림이 우거진 산악지역에 위치하며, 동해안에 이른다.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나,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다르다. 곡식과 삼베를 재배하고 소와 말을 기른다.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다. 왕은 없지만, 각 마을마다 우두머리가 있다. 항상 삼림 속에 토굴을 지어 살면서 부여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기후를 견뎌낸다. 식용으로 돼지를 기르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돼지기름을 몸에 두텁게 바른다. 그들 활의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청석(靑石)으로 만든 화살촉에 독을 발라 백발백중 정확하게 활을 쏜다. 읍루 사람들은 한(漢)나라 때부터 부여에 예속되어왔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220-226년 기간 중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는 읍루에 여러 번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비록 읍루 사람들이 그 수는 적지만, 아주 험준한 산 속에 살았기 때문에, 우거진 삼림을 뚫고 들어가 모두 무서워하는 독화살을 무릅쓰고 그들을 복속시킨다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3  

위의 기록들은 고대 예맥계 퉁구스와 말갈-여진계 퉁구스가 어떠한 관계를 유지했는가를 아주 간단 명료하게 보여준다. 동이전은, 부여와 고구려의 언어는 동일하지만, 숙신-읍루의 언어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중부 만주의 예맥 퉁구스 언어는 동부 만주의 말갈-여진 퉁구스 언어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285년에 모용외는 부여를 공격해 부여왕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346년에는 아들인 모용황이 또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을 비롯해 5만 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선비의 전연(前燕)이 370년에 멸망한 후, 부여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어 말갈의 강성해지자 부여 왕실은 그들의 본고장에서 밀려나, 결국 494년에 고구려에 의탁을 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송화강과 눈강이 합류하는 지역은 만주 최상의 농경지이며, 요하 지역과는 나지막한 구릉들을 사이에 두고 연결이 되어 광활한 동북평원을 이루고 있다. 기원전 9세기경의 유물로 측정되는 철제 칼, 단검, 갑옷 등이 흑룡강 유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눈강-송화강-요하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만주의 삼림을 관통하는 고대 교통로를 이용해 바이칼 주변지역과 중국의 이 동북지역 사이에 옛날부터 통교(通交)가 있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4

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간단히 서술을 하고 있다. 고구려는 험준한 계곡에 위치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을 즐겼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와 관습은 부여와 유사하였으나, 복장이나 기질은 약간 달랐다. 왕은 다섯 개의 씨족들 중에서 나왔으며, 왕비는 항상 특정한 씨족에서 택해졌다. 지배 씨족들은 결코 들에서 농사일을 하지 않았고 하층민이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 매일 밤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데 막대한 재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능하며, 좋은 활을 만들어 주변의 예맥족들을 모두 정복했다. 말들은 작지만 산악을 오르는데 적합하였다. 왕망이 고구려의 군사를 동원해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의 병사들은 그저 주변지역을 약탈했을 뿐이었다. 2세기(AD 125-67)에 들어와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침범했다. 동이전은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 않고, 고구려군이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대방군의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의 처자들을 생포해 왔다고 말한다. 242년에 동천왕(東川王, 227-48)은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서안평은 요나라가 상경(上京)을 세웠던 곳의 이름이기도 하다. 5  

요동에서 세력을 공고히 한 공손씨는 204년에 낙랑군을 손에 넣었으며, 204-220년 기간 중에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했다. 6  고구려는 독립한 공손씨와 싸움을 계속했다. 공손씨는 237년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했다. 동이전에 의하면, 조조의 위 나라가 238년에 공손씨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왕은 수 천명의 군대를 보내 위군(魏軍)을 도왔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魏, 220-265)와 서진(西晋, 265-316)에 의해 계속 점령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선비족 모양, 주요 부족들 가운데서 돌아가면서 선출형식으로 왕을 뽑았었다 (신라에서도 유사한 관행을 볼 수 있었다.) 특정 씨족에 왕위 승계권이 정착된 후에도 종종 형제계승 현상이 나타났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137년에 죽자 그의 동생은 형수와 결혼을 하고 산상왕(山上王, 197-227)이 되었다. 형수와의 결혼은 부여와 흉노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여에서 부자승계로 바뀌는 것은, 의려왕(依慮王, ?-285 AD)이 6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은 때부터 인것 같다. 고구려는 산상왕 때부터 부자승계 기록이 나타난다. 하지만 왕비는 항상 왕족이 아닌 중요 씨족에서 나왔다. 흔히, 왕실의 장로들이나 왕비를 배출한 귀족씨족이 정치적 권위를 누렸다. 부여, 고구려 사람들은 유목민은 아니었지만 유목민처럼 전투직인 사회조직을 존속시켰고, 전쟁을 주 업으로 하는 귀족계급을 유지했다. 7 

3세기에 들어와서도 고구려는 계속 훈강-압록강 계곡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3세기 말경에 선비족 모용외가 요하 유역으로 내려와 낙랑군을 서진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삼국사기는 293-296년 기간 중 고구려와 모용선비 간의 잦은 충돌을 기록한다.  

진서(晉書)는, 모용외(慕容廆)의 조상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북방 야만인들 사이에서 살았으며, 동호라 불리었다고 말한다. 위 왕조(220-65) 초기에 모용외의 증조부는 휘하 부족민들을 거느리고 요서로 이주해 정착을 했다. 그 후, 모용외의 부친이 왜 요서를 떠나 요동 북부로 이주하기로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283년에 죽자, 동생이 모용 선비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285년에 부하에게 살해 되었고, 모용외가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 8  모용외는 바로 그 해에 부여를 공격해 부여 왕이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311년에 흉노가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약탈하자, 고구려는 313년에 낙랑군을 차지하고, 319년에는 2개의 선비부족(宇文, 殷)과 연합하여 모용외(285-333)를 공격하였으나 모용외와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 333-349)이 이끄는 군대에 패하였다. 모용황은 모용외의 둘째 아들이며, (殷부족장의 딸인) 정실 부인의 첫째 아들이다.  모용외는 다른 아들에게 요동의 방어를 맡겼다. 고구려 군은 320년에도 요동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모용선비 연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은 339-343년 기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자치통감을 보면,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를 한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고구려는 항상 우리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문부족을 섬멸하고 나면, 자신들을 공격할 것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문 무리를 공격하러 떠나면, 그 빈 틈을 타서 틀림없이 우리나라를 공격 할 것입니다. 우리가 소수의 군대 만을 남겨 놓고 원정을 떠나면, 고구려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 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군대를 남겨놓고 가면, 우문부족을 정복하기에 원정군의 수가 너무나 부족해 질 것입니다. 그러니 고구려를 우선적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모용황은 342-3년 기간 중, 4만명의 정예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점령했다. 당시 모용황은 또 다른 장수로부터 충고를 받았다. “고구려 땅이란 우리가 계속 점령해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제 그 왕은 달아 났고, 백성들은 흩어져 산속에 숨어있습니다. 우리 군대가 떠나면 다시 나타나 뭉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고구려 왕의 모친을 포로로 잡고, 애비의 시신을 파가지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 왕은 자신의 부모를 돌려달라고 우리에게 간청을 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 애비의 시신을 돌려주면서, 고구려 왕을 따듯하게 대해주고 믿어 주는 것이 고구려를 다루는 최상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모용황은 그의 말을 따랐다. 10

우리는 몽골적인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친밀한 관계(즉, 전쟁관계)가 다시 재연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11  예맥 쪽의 명칭은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뀌었는데 선비 쪽은 여전히 연(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Farris (1998: 77)는, 선비족이 말등자의 사용법(처음에는 왼쪽만을 사용)을 배운 것은 대략 300년경이었는데, “최초로 말을 타고 전투에 임했던 한국 사람은, 바로 선비족과 싸운 고구려 병사들이었다”라고 말한다. 등자의 사용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선비족과 고구려가 끊임 없이 싸운 덕분일 것 같다. 기원전 400년경에 고조선과 옛 연 나라간의 충돌을 통해서 철기제조 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졌던 사실을 상기하면 흥미가 배가될 것이다 

몽골적인 선비와 예맥 퉁구스간의 끊임없는 전쟁은, 급기야 요사(遼史)에서 (선비의 후손인 거란족의) “요 나라가 고조선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의 팔조금법(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두 민족 사이에 강한 문화적 동화 현상을 야기했던 것 같다. 12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2 (2005. 3. 12.)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Lee (1984: 21-22) 참조  

2.「부여」는 부리아트 방언의 수컷 수달을 뜻하는 「부이르」와 유사하다. 부여 사람들 조상이 고리에서 왔다고 말하는데, 고리는 부리아트 방언의 순록과 유사하며, 바이칼, 후룬, 부이르 호수들 사이에서 고리라는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夫餘傳 …於東夷地域最平敞… 連日飮食歌舞…衣尙白…兄死妻嫂 與匈奴同俗…家家自有鎧仗… 行道晝夜無老幼皆歌…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今夫餘庫有玉 壁珪瓚數代物…蓋本濊貊之地

3.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挹婁傳 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處山林之間 其俗好養豬 …其弓長四尺 力如弩 …古之肅愼氏之國也 …善射 射人皆入目…自漢以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220-26]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鄰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4. Di Cosmo (2002: 72) 참조 

5. 고구려에서는 전쟁을 전담하는 세습적인 귀족계급이 있었는데, 이들은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지 않고 전투 훈련에만 전념했다. 산악지역에 위치한 자국 내에서 얻을 수 있는 한정된 자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이웃을 침략하고 공물을 빼앗아 왔다. 고구려는 정복한 부족 지배자들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면서 그들을 통해 공물을 거두었다. 정복된 옥저 사람들은 옷감과 물고기, 소금, 지방 특산물을 등에 지고 천여리에 달하는 길을 걸어가 고구려에 바쳤다 한다. Lee (1984: 24) 참조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其人性凶急喜寇鈔…言語諸事 多與夫餘同…本有五族…本涓奴部爲王…今桂婁部代之…絶奴部世與王婚…坐食 者萬餘口…其民喜歌舞…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其馬皆小 便登山 國人有氣力 習戰鬪 沃沮東濊皆屬焉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王莽初發 高句麗兵以伐胡[匈奴] …爲寇盜 …王莽…布告天下 更名 高句麗爲下句麗…順桓之間 復犯遼東…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 樂浪太守妻子 …景初二年…司馬宣…討公孫淵 宮遣..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遼史 地理志一 上京 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 又有 … 黑河 … 天險足 以爲固 地沃宜耕植 水草便畜牧 


6. AD 106년에 고구려 왕은 중국 관리들과 시설들을 공격을 해, 한족을 요동군 부근의 서쪽 지역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175년에 공손도(公孫度)가 독자적 지방정권을 세웠는데, 그 세력과 독립의 정도가 고구려 왕뿐 아니라 부여의 지배자들로부터도 공인을 요구할 정도에 달했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50)에서 인용.  

7. Di Cosmo (2002: 43) 참조. 

8. Schreiber (1949-55: 393-5) 참조. 

9. Schreiber (1949-55: 425) 참조. 

10. See Schreiber (1949-55: 466-8). 

資治通鑑 卷第九十七 晉紀十九 成帝 ..翰言於皝曰 宇文彊盛日久 ..今若擊之 百擧百克 然高句麗 去國密邇常有闚覦之志 彼知宇文亡禍將及己 必乘虛深入 掩吾不備 若少留兵則不足 以守多留兵 則不足以行 此心腹之患也 宜先除之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民散潛伏山谷 大軍旣去必復鳩聚 收其餘燼...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皩從之

11. 모용황 생전 최후의 정벌활동은 부여를 향한 것이었다. 록산 지역에 위치했던 부여는 「백제」의 침공을 받고 서쪽 모용황 영역으로 흩어져 갔는데, 346년에 모용황은 태자 준(儁), 모용군(軍), 모용각 (恪), 모여근(慕輿根) 등에 1만7천명의 기병을 주어 자위력을 상실한 부여를 공격 하도록 했다. 부여는 패했고, 왕과 5만여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왔다. Schreiber (1949-55: 473-4) 참조. 

12. 동이전의 예전(濊傳)을 보면, 조선의 기자는 팔조금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교화했다 한다. 예전은 연의 지배자가 [BC 323년에] 왕이라 칭할 때에, “기자(箕子)의 40대 손인” 준(准)도 스스로 조선의 왕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遼史 卷四十九 志第十八 禮志一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 以敎之 無門戶之閉而 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候准僭號稱王  

 

13.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  홍원탁
  •  승인 2005.03.30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The Union of the Ye-mack Tungus and the Mohe-Ruzhen Tungus
광개토왕대왕 이후, 고구려는 250여년간 흑수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나타난다.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하여 200년 이상 만주 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게 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홍원탁 (서울대 교수)  

5세기가 시작될 무렵,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은 백제 수도 한성을 (396년에) 포위공격하고, 요동을 정복한 후, 만주 동북쪽의 숙신(肅愼)마저 굴복시켰다.1 광개토왕 생전에 이룩한 군사적 위업을 계기로, 고구려는 그 후 250여년간 흑수 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전쟁에 동원된 기록이 여섯 번 나타난다. 장수왕(長壽王, 413-491)이 만명의 말갈 병사들을 몸소 거느리고 468년에 신라의 주(州) 하나를 공격 해 빼앗았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이 507년에 고노(高老)장군과 말갈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영양왕(嬰陽王)이 598년에 직접 만명의 말갈 병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고; 보장왕(寶藏王)은 645년에 안시성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함께 말갈 병사 15만명을 파견했다. 고구려군은 말갈군, 백제군과 함께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보장왕은 661년에 어느 장군에게 말갈 병사를 인솔하고 신라의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2 

금사(金史)에는 15만명의 흑수말갈 병사들이 645년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위해 당태종의 군대와 싸웠다고 적혀있고, 구당서(舊唐書) 역시 15만의 말갈군이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당태종이 사로잡은 말갈 병사 3,300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3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436년에,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北燕, 409-36)의 왕과 그 가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으며, 494년에는 숙신-말갈에 의해 쫓겨난 부여왕 일족을 받아들여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말한다. 위서(魏書)는,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가 몸소 흰 두건에 베옷을 입고 대동(大同)의 동쪽 교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4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여러 차례 패한 곳은 바로 요하 유역과 산악 지형의 요동반도 이었다. 요동지역은 마침내 668년에 당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관할하게 되었다. 당 조정은 요동의 옛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677년에)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귀양을 보냈다.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동무가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동무의 직계 후손들이 태수직위를 세습하면서 역사가들이 요동을 소고구려(小高句麗)라 부르게 되었다. 5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땅에 발해(689-926)를 세웠다. 발해의 시조는 옛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689-719)이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포로로 잡혀 영주(營州, 오늘날 朝陽)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거란족의 폭동이 발생하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 진(震)을 건국하고,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기록을 보면 대(大)씨족과 조영은 고구려 왕족 중 핵심 부족인 계루(桂樓)부에 속했거나, 아니면 고구려에 귀화한 말갈족이었던 것 같다. 6   

732년에 발해의 무왕(大武藝, 719-737)은 바다건너로 군대를 보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오늘날의 봉래)를 공격하였다. 733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아래위로 동시에 공격했다. 통일신라와 발해 왕국의 출현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정복하겠다는 당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발해가 처음으로 야마토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던 것은 727년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옛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여 부여의 옛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며, 발해가 바로 옛 고구려임을 천명했다. 발해왕은 798년에 야마토 왕에게 국서를 보내, 발해가 고구려(또는 고씨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7 

금사(金史)는,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흑수말갈족을 포함한 동부 만주의 모든 말갈부족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8  후에 거란족이 발해를 정복한 후, 요(遼)에 편입된 흑수 말갈족은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고, 요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흑수말갈족은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생여진족들은 이른바 백산-흑수 (장백산맥과 흑룡강 주변) 지역에서 살았다.

발해는 안녹산의 난(755-7)을 틈타 요동을 점령하고 소고구려를 흡수하였다. 9 742년 당시의 당나라 지도는 요하 서쪽의 요서 연안이 당나라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10 그런데 763년의 지도에는 당나라 국경이 만리장성 뒤로 물러갔음을 보여준다. Ledyard (1983: 341)는 “676년에 요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던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는 단지 8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한 후, 756년에 철폐되었다”라고 구당서(39志19地理2)를 인용한다.

당나라는 717년에 평로군사(平盧軍使)를 영주에 설치하였고, 765년부터는 평로군사가 신라와 발해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11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발해가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해 남해부를 설치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요사(遼史)는 발해가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뿐만이 아니라, 요서 지역에도 여러 곳에 주(州)를 설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2 발해왕은 796년에 야마토 왕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들이 이제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며, 발해왕의 권위가 요하의 서쪽에까지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 13  발해는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은, 발해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이며,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를 포함한 6개의 주(州)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4 요사(遼史)에 의하면 현주를 포함한 6주가 모두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과 서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신당서 지리지(地理誌)는, 안록산의 난(755-7)이 발생하기 이전인 건국초기의 발해 강역을 기술하면서, “현주”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 하나가 장백산맥 깊숙이 위치해 있다고 기록을 했다. 15  이 신당서 기록을 근거로, 현대 중국, 일본 역사가들은 발해의 “현덕부” 전체가 장백산맥 일대에 위치했었다고 단정을 하고, 당이 멸망하는 907년까지, 당나라 강역이 요동 전체를 포함하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요사는 몽골 원나라 말기인 1343-4년 기간 중, 11개월 이라는 단기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들도 많이 발견된다. 금사(金史) 역시 원 조정이 1343년 4월부터 20개월 만에 편찬을 완료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당서는,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는 북송(北宋) 조정이 1044년부터 1060년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을 투입 해, 중화사상 이념을 바탕으로, 아주 치밀하게 편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동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이 덜 왜곡된 역사 기록인지 자명할 것이다.

거의 500여년간 지속된 고구려-말갈족의 연합국가는 직접적 상호작용과 언어적 동화 과정을 통해, 양측 언어에 어휘적-구문적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여-고구려-신라어에서 유래하는 한국어와 숙신-말갈-여진어에서 유래하는 만주어는 모두 모음회전과 조직적인 모음전이 현상이 나타나, 모음 역할의 성격이 재구성되었고, 모음조화에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16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후, 중부만주의 예맥-퉁구스는 서부만주의 선비족과 동부만주의 말갈족에게 밀려, 오래 전에 한반도로 내려와 쌀 재배를 하며 살아 온 예맥 친족들과 합쳐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해 만주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200년 이상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와는 달리, 말갈-여진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발해왕국의 말갈-여진족 지배층이라는 존재도 대부분 한때에는 고구려의 구성원이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enthorn (1971: 54)이 “발해는 고구려가 용접을 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맥-말갈 연합의 전반부는 분명히 예맥-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후반부는 말갈-여진 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을 수도 있다. 급기야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예맥-퉁구스의 역사는 바이킹 왕국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덴마크 사람들이 지배하던 바이킹 제국(1397-1523)은 스웨디쉬 바이킹의 반란으로 해체되었고, 대니쉬 바이킹은 1658년에 스웨덴 남부의 룬트(Lund)지역 마저 상실했다. 1814년에는 스웨디쉬 바이킹이 주도하는 스칸디나비아가 등장 하여, 스웨덴 왕이 군림하는 스웨도-노르웨이 연합왕국의 형태로 1905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대니쉬 바이킹의 존재는 유틀란트 반도와 2개의 섬에 한정되게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3 (2005. 3. 19.)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광개토왕 비문에는 398년 이후 어느 때인가 흑수 말갈이 굴복된 것으로 되어있다.

廣開土大王碑文 八年 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俗 … 自此以來 朝貢論事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 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2.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말갈군과 32번이나 싸운 기록이 있으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말갈군과 23번 싸운 기록이 있다.  

3.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五十六年(468)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上 高麗 … 靺鞨之衆十五萬來援 安市城…太宗…收靺鞨 三千三百 盡坑之 

4.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二十三年 秋 魏人數伐燕 … 燕王馮弘曰 若事急且 東依高句麗 二十四年 五月(436) 燕王率龍 城見戶東徙… 魏主…令送燕王 …以王違詔議擊之 …乃止 七十九年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魏書 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5. 舊唐書 卷 一百九十九 上 列傳 東夷 高麗. Lee (1984: 71-73) 참조

6. 舊唐書 卷一百九十九下 列傳 北狄 渤海靺鞨 …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 則天命… 先破斬乞四比羽 …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靺鞨之衆及高麗餘燼…自立爲振[震]國王 … 風俗與高麗及契丹同 … 開元七年 祚榮死 …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 大武藝襲父爲  

新五代史 四夷附錄 第三 渤海 …唐高宗滅高麗 徙其人散處中國…高麗別種大乞乞仲象…子祚榮痲中宗時置忽汗州…封渤海郡王 … 其國土産物與高麗同  

欽定 滿洲源流考 卷八 疆域一 …渤海 …遼史言 渤海大氏始…東牟山 … 舊唐書作桂婁之東牟山 桂婁爲高麗部名 高麗五部 西漢以還桂婁部爲王 三國志 魏書東夷傳 高句麗傳 …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7. 聖武 神龜四年 九月 渤海郡王使首領. . . 來着 . . . 十二月 渤海郡者 舊高麗國也 五年 正月 . . . 上其王書. . . 曰 . . .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續日本紀 二: 182, 186, 188)

渤海康王與日本國桓武書[796] … 可尋踨於高氏 … 日本逸史 卷七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柳得恭, 渤海考 國書 考三, 1779-84 편찬, 참조.) 

8.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朝貢遂絶 五代時 契丹盡取渤海地 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 其在南者籍契丹 號熟女直 其在北者 不在契丹籍 號生女直 生女直地有 … 長白山 … 黑龍江  

9. Lee (1984: 71-73)  

10. Twitchett (1979: 403, 488) 참조  

11. Kim (2004: 385-6) 참조.  

12. 欽定滿洲源流考 卷十 疆域三 渤海國境 遼史 東京海州南海軍…渤海號南京南海府…舊五代史 自鐵州行七八日至南海府 元一統志 澄州本海州南海府…高麗時卑沙城…卽此渤海爲南海府 隋大業十年 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敗高麗兵…明一統志 海州…高麗爲沙卑城 渤海國爲南海府 

遼史 東京遼州 本…渤海爲東平府 唐太宗親征高麗 李世勣拔遼城 高宗詔程名振蘇定方討高麗至新城大破之 皆此地也 …遼州有遼河  

遼史 東京巖州白巖軍 本渤海白巖城 太宗撥屬瀋州白巖縣 渤海置州 按唐太宗貞觀十九年 伐高麗 旣得遼州 進軍白巖城 克之置巖州 …  

遼史 鐵州 … 本漢安市縣地 高麗爲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卽此渤海置州 蓋州 遼史辰州 本高麗蓋牟城 … 渤海改爲蓋州 
金史 地理上 咸平府 本高麗銅山縣地 遼爲咸州 … 南有柴河 北有淸河 西有遼河

遼史 地理志二 咸州 … 本高麗銅山縣地 渤海置銅山郡… 唐 安東都護治永平二州間卽此

遼史 瀋州本挹婁國地 渤海建瀋州 遼東行部誌 瀋州在唐時 爲高麗侵據

遼史 銀州 … 本渤海富州 韓州 金史 … 本渤海鄚頡府 

遼史 東京信州 本…渤海置懷府 穆州 遼史 … 本渤海會農郡 

欽定 滿洲源流考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遼史 顯州…本渤海 顯德府地 … 以奉顯陵 … 本漢無盧縣 卽醫巫閭 … 自錦州八十里至…自…一百里 至顯州 … 遼西州…本漢遼西郡地 世宗置州屬顯州 … 遼東行部誌 廣甯本陽羅郡渤海顯德府 遼世宗改顯州 … 乾州 …本漢無慮縣 …本渤海…縣 元一統志 乾州故城在 廣甯府西南七里 

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顯州 本渤海顯德府地…以奉顯陵… 置醫巫閭山絶頂築堂曰望海…穆宗葬世宗於顯陵西山 … 有十三山  

金史 地理上 廣寧府本遼顯州… 廣寧有遼世宗顯陵 閭陽遼乾州 廣德軍 …有凌河 有遼景宗乾陵 

13. 渤海 康王與日本國桓武書 [796] … 土統舊封 …金印紫綬 遼外光耀 … 日本後紀 卷五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柳得恭, 渤海考 國書考二 참조. 

14. 新唐書 列傳 北狄渤海…中京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15. 新唐書 志第三十三下 地理七下 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 …東北三十里…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 至丸都縣城 …又東北泝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742-756]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16. Janhunen (1996: 153)

 

한반도 남부의 예맥 친족: 백제, 신라, 가야

  •  홍원탁
  •  승인 2005.04.03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The Yemaek Cousins in the Southern Peninsula: Paekche, Silla and Kaya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낙랑과 대방군에 주둔하고 있던 변경지역 한족 관리들은 한반도의 수많은 성읍국가 부족장들에게 개별적으로 관직과 관인(官印), 예복과 중국에서 생산되는 값진 물건 등을 선물로 줬다. 한족 조정은, 이 같은 군사적인 전초기지를 통해, 독립심이 강한 수많은 “야만인” 부족장들에게, 명목상으로라도 개별적으로 신속(臣屬)을 하면 귀중한 재물과 함께 (상징적) 권위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한족이 소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이민족의 소(小)부족장들이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과거에 묵돌 흉노가 한 것처럼) 통일 국가를 이룩한 다음 한족에게 피해를 줄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족 조정이 흉노, 선비 등 모든 “야만족”들을 상대로 수백 년간 행해 온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한반도 남부의 예맥 친족: 백제, 신라, 가야  

홍원탁 (서울대 교수) 

예맥-퉁구스 국가들은 씨족-부족장들의 연맹 형태로 시작했다. 부여와 고구려는 5개 부족의 연합으로 시작되었고, 신라와 가야는 6개 부족의 연맹체로 시작되었다. 백제에는 8대 씨족이 있었다. 이 느슨한 씨족-부족 연맹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왕권이 세습되는 중앙집권적 군주제로 진화하였다. 하지만 부족 연맹체의 전통은 세습적인 관직 계급의 위계 질서를 형성했고, 국가 중대사를 심의하는 귀족들의 협의회 제도를 낳았다.  

예맥 사람들 역시 북(北)몽골로이드 특징인 샤머니즘을 믿었다. 신라에서 한때 왕을 차차웅(次次雄, 우두머리 샤먼)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샤머니즘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  불교가 372년경 고구려에, 384년경 백제에, 527년경 신라에 각각 전파됐으나, 그 대중화 과정에서 토속 신앙인 샤머니즘을 상당히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한반도 삼한 지역(옛 진국)에 78개의 (城邑) 국가들이 있었는데, 이들 나라 사람들은 말도 기르고, 양잠을 하며, 술과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기록돼 있다. 그들은 5월에 파종을 끝내고 나서, 그리고 또 10월에 추수를 끝내고 나서, 하늘의 신과 산천의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고 한다. 춤을 출 때에는, 수십 명이 한 줄로 서서,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고, 땅에 발을 구르면서 손과 발을 리듬에 맞춰 흔든다고 기록했다. 기록된 국가 명칭들을 훑어 보면, 마한 지역에는 백제를, 진한 지역에는 사로(신라)를, 그리고 변한 지역에는 구야(가야)를 발견할 수 있다. 동이전은, 진한은 옛 진나라이며, 변한 사람들은 보병전을 잘하고, 변한 지역의 12개 국가들 “역시” 모두 다 왕(王)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데 어찌된 셈인지, 동이전은 진한과 변한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타는데, 마한 사람들만은 말을 탈줄 모르기 때문에, 말을 오로지 제사 때 제물로만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동이전은 부여 사람들이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데, 모두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대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했고, 또 고구려 사람들도 매일 밤에 노래와 춤을 즐긴다고 말했는데, 이제 삼한 사람들 역시 밤낮으로 술과 노래와 춤을 즐긴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낙랑과 대방군에 주둔하고 있던 변경 지역 한족 관리들은 한반도의 수많은 성읍 국가 부족장들에게 개별적으로 관직과 관인(官印), 예복과 중국에서 생산되는 값진 물건, 등을 선물로 줬다. 한족 조정은, 이 같은 군사적인 전초기지를 통해, 독립심이 강한 수많은 “야만인” 부족장들에게, 명목상으로라도 개별적으로 신속(臣屬)을 하면 귀중한 재물과 함께 (상징적) 권위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소위 “야만인” 소(小)부족장들이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과거에 묵돌 흉노가 한 것처럼) 통일 국가를 이룩한 다음 한족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족 조정이 흉노, 선비 등 모든 “야만족”들을 상대로 수백 년간 행해 온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동이전은, 2세기 후반(146-89)에 (예 혹은 예맥의) 한(韓)이 너무 강성하여 낙랑군이 효과적으로 통제를 하지 못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도망을 갔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백제 초고왕(肖古王, 166-214)의 재위기간과 중복된다  

진한의 사로(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6개 부족의 연합체로 시작됐다. 가야(가락) 연맹은 변한의 12개 성읍 국가를 구성원으로 해서 출발했으나, 신라나 백제처럼 영토를 확장하고 중앙집권화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가야연맹이 출현하기 이전의 변한 부족장들의 명칭은 칸(干)이었던 것 같다. 신라 조정 또한 각간(角干)이라는 몽골식 명칭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은 대각간이었다. 

만주원류고 첫머리의 유지(諭旨)에서 청의 건륭제는 한족(漢族)들이 편찬한 역사책들의 기록이 삼한의 명칭에 대해 모두 혼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족 역사가들은 한(韓)이 지도자를 의미하는 「칸」을 지칭하고 있음을 몰랐다. 그들은 늘 그러 듯, 아무렇게나 추측을 하여, 「한」이 부족-종족을 의미한다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결론을 지었다. 이렇게 조잡한 서술도, 일단 정사의 형태로 뿌리를 내리게 되면 바로잡기가 매우 힘들게 된다.  

 

건륭제는 이 같이 치졸한 서술의 사례를 또 하나 제시했다. 3 후한서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 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말한다. [동이전 역시 진한 사람들이 갓난 아기들의 두개골을 편편하게 만들기 위해 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한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납작하다고 말한다.] 건륭제는 이 같은 서술이 아주 몰상식하게 웃기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며칠 안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자연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며,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이라고 건륭제는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관습에 대해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자신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됐고, 이 사품에 한족 역사가들이 근거 없는 추측을 남발 해, 몰상식한 이야기들을 지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동북방의 만주족과 그 선조들 모두가, 항상 한족들이 편찬한 중국 역사책 속에서 이렇듯 부당한 대접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건륭제는 강조했다. 특히 명나라 때에는 선동-날조의 수준이 추문에 가까워서, 한족 역사가들이 기록하는 글자 하나, 문장 하나, 모조리 [한족들이 소위 “야만인”이라고 불러대는 이민족들을] 모욕하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의 사학자들이란 주인을 위해 짖어대는 개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4 지금도 그 유지를 읽어보면 건륭제의 격앙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청나라의 지배자들은, 청나라 애신각라(愛新覺羅) 황족이 바로 여진족 금(金)나라 황실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금나라 시조 자신이 본래 신라에서 왔으며, 신라 왕실의 성씨인 금(金)이 왕조의 이름이 됐다고 믿었다  

경주 지역에서는, AD 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철제 방패, 무기와 농기구, 전한 시대의 거울, 옻칠한 칼집, 청동 제품 등 유물이 발굴됐다. 5 하지만 초기의 백제와 신라는, 지배 계급의 문화를 좀 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예컨대, 대형 고분과 강력한 권위의 상징인 부장품)도 없고, 또한 중국 사서에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도 없기 때문에, 많은 사학자들이 3세기를, 백제와 신라가 성읍 국가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한 진정한 의미의 (예컨대 고구려와 같은) 국가 형태를 아직 형성을 하지 못하고, 완전한 국가 형태를 향해 나가고 있었던 전환기라고 생각한다. 6  역사가들은 흔히 한반도의 AD 300년 이전을 원삼국(原三國) 시대로 간주하고 있다.

한반도의 동남부는 비옥한 토지와 함께 철광의 매장이 풍부하며, 벼농사를 짓기에 충분한 강수량을 갖고 있다. 변한 사람들은 2천 년 가까이 벼를 재배하면서 무문토기(후에는 陶質토기)에 밥을 지어먹고, 급기야 기원전 300년경에는 바다를 건너가 일본 열도에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동이전에 의하면, 변한 사람들은 왜인(倭人, 변한인의 야요이 친족)들에게 철을 공급해 주었다. 일본 열도에 야요이 시대(300 BC-300 AD)가 전개 되면서, 낙동강 유역의 변한 사람들과 큐슈 북부평야에서 논농사를 짓게 된 그들의 친족들 사이에는 빈번한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 연안지대에서 지배 귀족과 하층 서민이 구분되는 사회 계층의 분화는 산등성이에 위치한 대형 무덤의 축조, (사람과 말의) 순장, 수혈식 석곽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 환두대도(環頭大刀), 귀걸이, 또 부속 석실에서 출토되는 철 갑옷, 등등 권위의 상징물 형태로 나타난다. 고령의 가야 고분은 지름이 32미터나 된다. 비록 가야 연맹 전체가 6세기 중엽까지 모두 신라에게 차례로 정복을 당했지만, 가야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되는 (등자와 재갈, 못을 박아 철 조각을 연결한 철모와 갑옷, 말 갑옷, 철 덩어리와 철제 농기구, 도기질 토기, 칼과 화살촉, 귀고리 등) 다양한 유물로 보아, 가야 성읍 국가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 특히 동아시아 최초의 철 갑옷의 발견은, 역사가들로 하여금 가야 제국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일본 사학자들은 대부분, 1세기 중엽에 가야연맹체가 시작된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을 믿지 않으려 한다. 흔히 “여기가 바로 가야 땅”이라고 분명하게 밝히는, 그 시기에 세워진 비문 같은 것이 아 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아울러, 왕으로 간주될 만한 지배층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이 가야 지역에서 출토는 되었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 유물들을 모두 3세기 말 이후의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판정한다. 7 하지만 일단 자신들의 일본 열도로 눈을 돌리면, 가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하다며 그들이 내세우는 그 까다로운 요구 조건들을 모두 접어두고, 뚜렷한 물적 증거도 없이, 일본 열도에는 AD 400년, 심지어는 300년 이전에도, 강력한 야마토 왕국이 존재했다고 주장을 한다.  

일본 열도의 고분 시대 초기(300-375 AD) 유적에서 가죽 끈으로 철편들을 수직으로 연결한 투구와 갑옷이 몇 개 발견됐다고 하며, 그 이후에 수평으로 철편들을 꿰맨 갑옷(판금 갑옷)이 출현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철편에 못을 박아 갑옷이나 철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425년경 이후이며, 그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챙이 달린 철모(面甲)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Farris(1998: 75-6)는 비늘 모양의 갑옷, 챙이 달린 철모, 철편에 못을 박는 제작 기법 등이 모두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고 말한다. Barnes(2001: 142)는, 부산 복천동 46호 고분에서 출토된, 못을 박아 수직으로 철편을 연결한 갑옷은 4세기 제품으로 추정되며, 만일 이것이 정확하다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철제 갑주 라고 말한다. 9하지만, 일본 사학자들은, 일본 열도의 5세기 고분에서 발굴되는 철 갑옷과 철모 등을 근거로, 3세기 동이전 기록에 나오는 여왕 비미호의 귀신이 신공황후라는 이름으로, 맨머리, 맨몸의 섬나라 전사들을 지휘해 당시 철제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4세기 한반도의 전사들을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를 수백 년간 식민지로 경영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10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4 (2005. 3. 26.)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Lee and deBary (1997: 29) 참조. 

2. 三國志 卷三十 魏書 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韓傳 韓在帶方之南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伯濟國…桓靈之末(146-89)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 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景初中(237-9)明帝…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自服印綬衣幘 

千有餘人…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 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 相應…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辰韓傳 … 其言語不與馬韓同…始有六國…  

弁辰傳 … 狗邪國… 斯盧國 …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 乘駕牛馬 … 俗喜飮酒歌舞 有瑟 …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十二國亦有王  

3. 欽定 滿洲源流考 卷首諭旨 後漢書三韓傳謂辰韓人兒生欲令頭匾押之以石夫兒初墮地豈堪以石押頭奇說甚悖於理 國朝舊俗兒生數日置臥具令兒仰寢其中久而腦骨自平頭形似匾斯乃習以自然無足爲異辰韓或亦類 …曲爲之解甚矣其妄也若夫三韓 命名第列辰韓馬韓弁韓而不詳其意義 當時三國必有三汗各統其一 史家不知汗爲君長之稱 遂以音詞誤譯 而庸鄙者甚至訛韓爲族姓…有三韓 訂謬之作惜未令 人盡讀之而共喩耳若  
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金之先出靺鞨氏古肅愼地也…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云 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史家附會之詞未足憑耳 居完顔部  
三國志 魏書卷三十 烏丸鮮卑東夷傳 弁辰傳 兒生便以石壓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

Crossley(1997: 20)는, 매달아 쓰는 구부러진 형태의 만주족 요람은 유아의 머리 뒷부분을 종종 편편하게 만드는데, 마치 머리가 편편하다는 것이 만주족의 유전적 특징인 것처럼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4. Crossley(1999: 301-2) 참조. Crossley(1997: 124)는 건륭제의 유지를 비교적 충실하게 번역을 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건륭제가 분명히 진한(辰韓)을 지칭한 사실을 숨기고, 마치 건륭제가 숙신(肅愼)이라고 말을 한 것처럼 (분명히 의도적으로) 오역을 했다. 그녀는, 고대 진한 사람들의 두개골이 편편한 것은 그들이, 만주 사람들을 비롯한 동일계통의 문화적 친족들의 전통을 따라, 모두 비슷한 형태의 요람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5. Barnes(2001: 86)  

6. 여기서 영어로 Nation State라는 표현은 민족 국가를 의미하기 보다는, 성읍(城邑) 국가에 대칭적인 영토적 의미의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뜻한다. 

7. Barnes(2002: 186) 참조. 

8. 500년경부터는 전체를 가죽 조각으로 이어 만든 가벼운 갑옷이 모든 형태의 철제 투구와 갑옷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9. 부산의 복천동(福泉洞)과 김해의 양동리(良洞里) 유적지에서 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말의) 철제 갑옷과 철모가 출토됐으며, 김해의 칠산동(七山洞), 합천의 옥전(玉田), 함안의 도항리(道項里) 등에서도 350-450년경으로 추정되는 철제 갑주들이 출토되었다 NRICP(2001) 참조.  

10. Barnes(2001: 134-44, 196) 참조

 

14. 백제: 마한 지역에 건국을 한 부여-고구려의 분파

  •  홍원탁
  •  승인 2005.04.05 00:00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Paekche: An Offshoot of the Puyeo-Koguryeo in Ma-han Land

거의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토 왕국이 4세기 중 어느 때인가 일본열도에 수립되었다는 설을 받아드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그 전제 하에 자신들이 즐기는 얘기를 전개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 역시 4세기 중에 수립되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하지만 야마토 조정이 797년과 815년에 편찬 완료한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의 기록들은, 백제가 4세기 중에 세워졌다는 현대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과는 명백하게 상치한다. 4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을 모조리 못 믿겠다는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어째서 이런 사료가 거론이 안 되는지 불가사의 한 세상인 것 같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백제: 마한 지역에 건국을 한 부여-고구려의 분파  

홍원탁 (서울대 교수) 

삼국사기는 주몽이 북부여(北夫餘)로부터 훈강-압록강 계곡 주변의 졸본부여(卒本夫餘) 땅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는데, 주몽의 둘째, 셋째 아들과 그 추종자들이 한강 유역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 왕국 백성들의 대다수는 워낙 그곳에 살고 있던 마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백제의 지배자는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으며, (부여와 고구려 모두의 시조인) 동명 사당에도 제사를 지냈다. 1 백제는 그후, 538년에 금강 유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잠시나마 국호를 남부여라 불렀다.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AD 17-19년 기간 중, 상당히 많은 한족들이 삼한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혔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는 바로 백제 시조 온조(溫祚, BC 18-AD 28)의 재위 기간 중이었다 동이전은 또, 위(220-65) 나라가 접수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연합군이 246년경에 한강 유역을 대규모로 공격하였다고 말한다. 그 전투에서 대방군 태수가 전사했다. 2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기반을 다지며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던 시기는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234-86)의 재위 기간인 것으로 보인다. 낙랑-대방 연합군의 공격은, 백제의 주도로 주변 부족들이 통합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3 그런데 동이전은, 백제를 당시 삼한 지역의 마한에 속해 있던 수많은 국가들 중의 하나로만 기록을 하고 있다. 

260년, 고이왕은 정해진 업무를 분장하는 6부의 대신을 임명하고, 16품계의 관위를 만들고, 직위에 따라 관복의 색깔을 지정하였다. 고이왕은 이어 262년에,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상대로 갈취를 한 관리들을, 세 배의 벌과금을 징수한 다음, 파면토록 했다. 왕은 장엄한 의상을 입고 신하들을 접견했다.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고이왕의 이 같은 인상적 행동은, 낙랑-대방 연합군에 대한 군사적인 업적과 결부되어, 주서(周書)로 하여금 고이왕을 “대방지역에서 백제를 세운 시조”라고 기록하게 만든 것 같다. 4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군을 정복하자, 백제는 대방군을 점령하였다. 317년, (서)진이 망해 남쪽으로 도망을 치면서 한족들은 그로부터 250년 이상 북중국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근초고(近肖古)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近仇首)왕의 재위기간(346-84) 중, 백제는 그 역사상 가장 큰 영토 확장을 이룩했다. 우리는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과 태자 구수」라는 표현을 여러 번 보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그런 특이한 표현을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369년에 태자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습격하도록 해, 5천 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해 11월, 왕은 한강 남쪽에서 (마치 중국의 황제처럼) 황색기를 날리며 웅장하게 사열식을 거행했다. 곧이어 마한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 371년,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고,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331-71)은 평양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377년에도 근구수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공격했다. 5 391년에 광개토대왕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계속 백제에 의해 깨진 것 이었다. 

진서의 연대기는 백제 사신이 372년에 동진(東晋) 조정에 도착했고, 진 조정은 백제 조정에 사신을 보내 근초고왕에게 진동(鎭東) 장군 낙랑태수의 칭호를 수여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6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373년에 또 동진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을 했고, 진서에는 백제의 사신이 384년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서는 386년에 또 침류왕(枕流王)에게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수여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7  

이상은 중국 정사에 정식으로 기록된, 백제와 중국 왕조 사이에 오고 간 최초의 외교적인 접촉이 된다. 8 건국 초부터 중국 본토와 경계를 맞대며 밀접한 관계(즉, 잦은 무력충돌)를 지속한 고구려와는 달리, 진서의 기록 이전에 백제(혹은 신라)에 대해 자세히 기술을 한 중국 왕조의 정사는 하나도 없다. 하긴 진서의 백제에 관한 기록도 단지 연대기에만 있을 뿐이다. 위서 동이전을 무성의하게 베껴 놓은 진서 열전(제67)은, 마치 한반도에 백제(혹은 신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한-진한 얘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목상으로 조공을 보내고, 그 답으로 거창한 칭호를 수여하는 의식적 관행은 백제와 중국 본토 왕조의 위신을 모두 높여 주고, 각자의 자존심과 정통성 주장을 상징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9 

5세기가 될 무렵(396년),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다.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 413-91)은 427년에 수도를 비좁은 압록강 계곡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옮겼다.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을 죽여버렸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수도를 남쪽 웅진으로 옮겨야 했다. 백제는 무녕왕(武寧王, 501-23)대에 이르러, 475년의 참패에 따른 재앙으로부터 완전히 회복을 했다. 하지만 신라가 553년에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중국으로의 뱃길을 열었다. 신라는 562년의 대가야 정복으로, 가야 연맹을 모두 합병하게 되었고, 백제의 모든 국경을 신라가 둘러싸게 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이후, 신라는 백제의 주적이 되었다.

백제 무왕(武王, 600-41)이 죽었을 때, 당 태종이 몸소 소복을 하고 수도 장안의 북쪽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했다고(곡을 했다고) 구당서는 기록을 하고 있다. 10 642년에 백제 의자왕(義慈王, 641-60)은 신라의 성들을 40여 개나 빼앗고, 신라의 황해 출구를 제거하려고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맺어 643년에는 한강 어귀의 당항성(黨項城)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자 (신라 여왕 세명 중 첫 번째인) 선덕(善德, 632-47)여왕은 당 조정에 필사적인 탄원서를 보냈다. 책부원귀(冊府元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 있다: “당 태종은 백제-고구려의 침략을 저지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겠노라고 약속을 하면서, 사신에게, 신라의 재난은 나라를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이웃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해 야기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덧붙였다.” 11 바로 얼마 후에 전개되는 측천무후(則天武后) 치하의 당나라 운명을 앞두고 당 태종이 얼마나 기묘한 예언을 한 셈인가?

백제 왕국의 창건 년도  

거의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토 왕국이 4세기 중 어느 때인가 일본열도에 수립되었다는 설을 받아드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그 전제 하에 자신들이 즐기는 얘기를 전개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 역시 4세기 중에 한반도에 수립되었다고 주장을 하며 믿으려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는 야마토 조정에 의해 797년에 편찬 완료되었다. 이는 697-791년 기간 중 야마토 왕국 역사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간무(桓武, 781-806) 9년 조를 보면, 간무의 모친은 백제 무녕왕의 후손이고, (고구려의 시조이며 백제 시조 온조의 부친인) 주몽은 하백(河伯)의 딸에게서 태어났고, 간무의 어머니는 바로 주몽의 후예라고 말한다. 속일본기의 그 다음해 기록을 보면, 근구수왕이 백제 원조(遠祖, 大祖) 주몽으로부터 헤아려서 16대 왕이라고 말한다. 12 속일본기는 주몽을 백제의 상징적인 시조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를 백제의 공식적인 시조로 간주하며, 근구수왕을 온조로부터 헤아려서 14대 왕으로 기록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구수왕을 주몽으로부터 세어 본다면 “15대” 왕이 된다. 그런데 1287년에 편찬된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의하면, (주몽의 둘째 아들인) 온조의 형이 백제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즉위한지 다섯 달 만에 죽었다. 그렇다면 (백제의 상징적인 시조) 주몽과 그의 셋째 아들인 온조 사이에 단명한 왕이 하나 있었고, 그가 바로 백제의 공식적 시조로 기록되었어야 한다. 삼국사기의 각주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을 기록하고 있다. 제왕운기를 따른다면, 삼국사기는 단지 각주에다 한 개의 이설로 기록을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본문에 온조를 백제의 2대 왕으로, 또 그의 형을 백제의 공식적인 시조로 기록을 해야 한다. 13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사가(嵯峨, 809-23)의 후원 하에, 야마토 조정에 의해 815년에 편찬 완료되었다. 신찬성씨록은 문주왕(文周王, 475-77)이 주몽부터 헤아려서 “24대” 왕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주왕이 (백제의 공식적 시조) 온조로부터 헤아려 22대 왕이다. 14 삼국사기의 전통과는 달리, 야마토 조정이 편찬한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의 전통은 주몽을 백제의 상징적인 시조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모두 온조를 백제의 시조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왕운기식으로, 온조를 주몽부터 세어 백제의 3대 왕으로 간주한 것 같다. 15 온조가 주몽으로부터 세어 2대 왕이건 3대 왕이건 간에, 야마토 조정이 편찬한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의 기록들은, 백제가 4세기에 세워졌다는 현대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과는 명백하게 상치하는 것이다.  

4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을 모조리 못 믿겠다는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어째서 이런 사료가 거론이 안 되는지 불가사의 한 세상인 것 같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5 (2005. 4 2)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삼국사기는 (백제의 공식적 시조 온조의 부친인) 주몽을 동명으로 간주하고 있다.

2.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傳 魏略曰 王莽地皇時(20-22) …我等漢人…爲韓所擊得…皆斷髮爲奴 積三年矣…景初中(237-9) 明帝…越海定二郡…臣智激韓忿 攻帶方郡…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3. Lee (1984: 36-37) 참조 

4. (CCI: 618) 참조. 진서의 지(志)에는 마한의 어떤 왕이 277년, 280년, 그리고 281년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아마도 고이왕 이었을 것이다 晉書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 馬韓 武帝太康元年 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八年 十年 又頻至... 咸寧三年復來


5. 近肖古王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攻平壤城 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S2: 31) 
神功 攝政卌九年 …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 四邑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NII: 357) 
近仇首王 三年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S2: 32) 
辰斯王 六年 九月 王命達率眞嘉謨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S2: 45)

6. 한강 남쪽 석촌동(石村洞)에서 발굴된 5개의 적석고분(積石古墳) 중 가장 큰 3호 분은 근초고왕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고분은, 광개토왕의 것으로 믿어지는 고분을 포함하여, 통구(通溝) 지역의 고구려 고분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Best (2002: 183-89) 참조

晉書 卷九 簡文帝 二年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7. 晉書 卷九 孝武帝 十一年 以百濟王世子餘暉爲使持節 都督 鎭東將軍 百濟王

8. Best (1979: 128) 와 (1982: 453) 참조.  

9. 북위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부추기려고 472년에 북위로 단 한번 사절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사신의 교환은 567년까지 전적으로 남쪽의 왕조들하고만 이루어졌다. 아마도 요서에 위치한 백제 식민지의 존재가 백제와 북중국 왕조 사이에 우호관계의 발전을 저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372-652년 기간 중 여러 중국 조정에 63번 이나 사절을 보냈다. Best (1982: 452) 참조

10. Best (1982: 480) 참조.  

舊唐書 東夷列傳 百濟 武德十五年 璋卒 …太宗素服哭之 新唐書 帝爲擧哀玄武門

11. Best(1982: 482) 참조. 

12. 續日本紀 桓武天皇 延曆 八年 . . .皇太后 姓和氏諱新笠 . . .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 . .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 感日精而所生 皇大后 卽其後也 . . 延曆九年七月 . . . 貴須王者 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夫 百濟大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 . . 諸韓而偁王 (NS 5: 448-52, 468-72) 

13. 帝王韻紀 百濟始祖名溫祚 . . . 與母兄殷祚南奔立國 殷祚立五月而卒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一云 始祖沸流王 . .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 女..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 祚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 餘..南奔至卒本 立都 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及朱蒙在扶餘所 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於是沸流謂弟溫祚曰. . 我母氏傾 家財助成邦業..不如奉母氏南遊 卜地 別立國都 與弟率黨類 . . 至彌鄒忽以居之 (S2: 15)

14. 삼국사기가 혜왕(惠王)을 온조로부터 세어 28대 왕으로 기록을 한데 반해, 신찬성씨록은 혜왕이 주몽부터 세어 백제의 30대 왕으로 기록하였다.  

新撰姓氏錄 第三帙 左京諸蕃下 百濟朝臣 出自百濟國都慕王三十世孫惠王也 百濟公 出自百濟國都慕王二十四世孫汶淵王也 石野連 出自百濟國人近速王孫憶賴福留也 (SS: 286-287)

15. 야마토 왕국의 지배씨족들의 조상을 기록하는 신찬성씨록을 보면, 백제의 7대 왕인 사반왕(沙伴王, 234)을 선조하는 씨족이 있다. 또, 백제 11대 왕인 비류왕(比流王, 304-44)을 시조로 하는 두 개의 씨족을 기록하면서, 비류왕이 5대 왕인 초고왕(肖古王, 166-214)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13대 왕인 근초고왕이 조상인 씨족도 있다. 삼국사기가 166-214기간 중 왕위에 있었다는 초고왕과, 234년에 왕위에 있었다는 사반왕을 선조로 하는 지배씨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찬성씨록은 11대 왕인 비류왕이 초고왕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함으로서 13대 왕인 근초고왕과 5대 왕인 초고왕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4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 불신론을 전개 하기 위해 이런 기록들을 모두 모르는 체 하는 것이다 

新撰姓氏錄 第三帙 右京諸蕃下 春野連 出自百濟速古王孫比流王也 汶斯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比流王之後也 半毗氏 百濟國沙半王之後也 (SS: 301, 304)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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