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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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수와 당의 시조가 모두 만주 선비족 출신이라면?

 

2.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3.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4. 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5. 몽골 원(元)이 한족(漢族)의 명(明)으로 대체됨

 

6.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7. 만주족 청나라의 강역을 물려받은 중화인민공화국

 

8. 한국전쟁 : 양극체제 세계의 변두리에서

 


 

1. 수와 당의 시조가 모두 만주 선비족 출신이라면?

  •  홍원탁
  •  승인 2005.07.25 00:00

Founders of the Sui and Tang Dynasties

 

수 나라 시조 양견은, 명확하게 선비족 출신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만주의 선비족이 세운 북위, 서위, 북주 등을 대대로 섬겨온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양견의 아내인 문헌황후는, (拓跋鮮卑) 북위의 황실 및 대 호족들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온 선비 씨족 출신인 독고신(獨孤信)의 딸이다. 독고신은 우문선비(宇文鮮卑) 씨족의 우문태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서위(후에 북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독고신의 맏딸은 북주의 첫 번째 황제인 (宇文泰의 아들) 명제와 결혼을 했고, 일곱 번째 딸은 수 문제와 결혼을 했고, 넷째 딸은 당 고조 이연(李淵)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다 이씨 가문은 (후에 당 조정이 漢族 명문가의 후예로 조작을 했지만) 선비족 혈통의 씨족 이었다 (Wechsler, 1979: 151) 이연의 할아버지는 북위의 유명한 장수의 후예이며, 우문태가 자립하여 북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워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이연의 모친과 수 양제의 모친은 자매 사이인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수(隋)와 당(唐) 시조(始祖)들의 혈통을 추적

 

수와 당의 시조가 모두 만주 선비족 출신 이라면? 

 
홍원탁 (서울대 교수) 

 
선비족의 언어를 배우는 북중국 한족(漢族)들 
  
북위(北魏, 386-534)는 서위(후에 北周가 됨)와 동위(후에 北齊가 됨)로 갈라 졌다. 변경지역의 한족들 대부분은, 초원 지역에서 왔건 삼림 지역에서 왔건 그 당시에 우세한 종족에 빌붙어서 삶을 영위하였다. 이들 한족들의 전형적인 처신을 확인해주는 중국의 자료들이 있다. 북제 (550-77) 시대에 쓰여진 기록 중, “조정의 사대부(士大夫) 하나가 나에게 어느 날 ‘내게는 이미 17살이 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서신과 공문서 작성을 꽤 잘한다. 나는 지금 그에게 선비족의 언어와 비파 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 아들이 이런 것들을 잘 배워 조정의 공경(公卿)들에게 쓸모가 있게 되면 그들의 덕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아들이 이런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는 기록이 있다. 1 
 
선비(鮮卑)적인 요소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던 서위는 557년에 북주가 되어, 577년에는 북제를 멸하고, 579년에는 진(陳)의 강북 땅을 빼앗아, 잠시 북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隋, 581-618) 왕조는 우문선비 북주의 후계자로서 천하를 통일 한 것이다.  

 

수의 중국 본토 통일과 돌궐 연맹체의 출현 

 

402년, 몽골은 유연(柔然) 카간의 영도 하에 중앙집권적 국가를 세웠으나, 북위는 국경지대에 대규모의 수비대를 주둔시킨 다음, 오히려 몽골을 침략하여 양껏 사람과 가축들을 잡아갔다. 탁발선비 조정은, 494년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완전히 중국화되어 버린 후에야 비로서 유화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여, 몽골의 지배자와 (처음에는 유연의 제후 노릇을 하던) 돌궐족에게 뇌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2 

 

유연의 몽골은 결국 552년에 돌궐에 의해 멸망되었다. 알타이산맥 인근 지역에서 유래하는 이 돌궐 족들은 6세기 말에 이르러 두 개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돌궐은 훗날 카라코룸이 위치하게 되는 오르콘 강 상류에 도읍을 정하고, 카간이라는 황제칭호를 사용하였다. 서돌궐은 그보다 낮은 야브쿠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제국을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페르시아와 카스피해까지 넓혔다. 중국 본토가 수 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어갈 즈음, 북방 전선에는 돌궐 연맹체가 형성되어, 마치 한 나라가 흉노를 대치했던 상황을 연상하게 되었다. 3

 

선비족 왕조를 섬기던 가문 출신으로 선비족 아내를 얻은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 

 

수 나라를 세운 양견은, 선비족의 북위, 서위(535-56), 북주(556-81) 등을 대대로 섬겨온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양견의 아내인 문헌(文獻)황후는, 북위의 황실 및 대 호족들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온 선비 씨족 출신인 독고신(獨孤信)의 딸이다. 독고신은 우문태(宇文泰)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우문태가 (文帝를 옹립하여, 후에 북주가 되는) 서위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독고신의 맏딸은 북주의 첫 번째 황제인 (우문태의 아들) 명제(明帝: 557-60)와 결혼을 했고, 일곱 번째 딸은 수 문제(581-604) 양견과 결혼을 했고, 넷째 딸은 당 고조(高祖, 618-26) 이연(李淵)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다. 4 

 

양견이 581년에 북주를 인수하였을 당시에는 선비족 혹은 선비족과 혼혈관계를 맺고 있는 군(軍) 귀족 씨족들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Twitchett(1979: 81)에 의하면, “북주의 고위 관료 중 65%는 비한족 출신이었다. 수 문제 자신도 이러한 체제하에서 성장하였으며, 그의 친구들과 최 고위 참모들 대부분은 바로 이 비한족 집단 출신이었다.”

 

수 문제는, 589년에 중국 전체를 통일하자, 북위 말기 이래 막대한 양의 비단을 돌궐 카간에게 바쳐오던 관행을 중단시키고, 초원지대에서의 내부적인 반목과 분열을 적극 조장하였다. 중국 본토는 통일이 되었는데, 돌궐족은 내분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5  수 문제는, 단순히 내분을 교묘히 조작하는 방법으로 돌궐 세력을 분열시키면서, 말을 안 듣는 칸들은 제거하고 나머지 칸들은 신속(臣屬)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는, 한나라 때 고조선 모양, 요하 동쪽의 만주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도 차지하고, 수도를 평양에 두었다. 고구려는 먼저 수 나라에 적대행위를 취해, 요하를 건너 공격하였다. 수서(隋書)에 의하면,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에 1만 명의 말갈 기병을 이끌고 영주(榮州, 朝陽)를 공격한 것이다. 6  

 

598년, 문제는 30만 명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막내 아들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원정에서 살아 남아 고국으로 돌아간 수 나라 군대는 20%도 되지 않았다. 605년, 양제(煬帝, 604-18)는 돌궐족 2만 명을 보내 거란족을 쳐부순 다음, 고구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복종하지 않으면 돌궐족을 동원하여 공격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607년에 돌궐족의 지휘본부를 방문했을 때, 양제는 카간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7 양제는 서둘러 항주로부터 북경 근처까지 대 운하를 확장하였다. 611년, 수 양제는 (백만 명이 넘었다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와 막대한 보급물자를 집결시킨 다음, 자신의 불운을 탓하게 된 요동 공격을 개시했다.

 

요하 동안(東岸)을 따라 설치된 고구려 요새들은, 늦여름의 장마가 시작되어 수 나라의 군사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버텨냈다. 수 나라 군대가 요동성(지금의 요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양제는 수 나라 원정군의 1/3인 30만 명을 떼어 내,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수 나라 군대는 을지문덕 장군의 계략에 말려들어 살수(청천강)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왔던 30만 명의 수 나라 군대 중에서 살아 돌아간 숫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양제는 요동성의 포위를 풀고 낙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8 

 

613년에 수 나라 군대는 다시 요하를 건넜으나,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양제는 또다시 철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14년에 양제의 군대가 세 번째로 요하를 건넜으나, 이번에도 고구려 요새들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는 네 번째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 군에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미 전국이 반란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매번 거듭 패할 때 마다, 고구려 정복에 대한 양제의 집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모든 출정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났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전쟁으로 피폐한 제국 자체가 멸망하게 되었다. 9 강력했지만 단명으로 끝난 수 왕조(581-618)는 당 왕조(618-906)로 대체되었다. 

 

▲ Koguryeo An-ak Tomb No. 3

 

 

수 문제의 조카이며, 수 양제의 사촌인, 당 고조 이연(李淵)

 

Wechsler(Twitchett, 1979: 150-1)에 의하면, 이연(당 고조, 618-26)은 선비족 혈통의 이씨 가문 출신이었다. 이연의 모친과 수 양제의 모친은 자매 사이였다.  이연은 수 문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양제의 사촌으로, 당시 가장 세력이 큰 장수들 중의 하나이었다. 이연의 할아버지인 이호(李虎)는, 북위의 유명한 장수의 후예이며, 557년에 북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운 팔주국(八柱國, 우문태가 556년에 죽기 직전에 자립을 시도할 때 가담한 장수들) 중 한 명이 되어, 558년에는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이연은 할아버지 이호의 당국공 칭호를 물려받았다. 그 당시 이씨 씨족들은, 북위가 오늘날 대동(大同)이라 부르는 지역 부근에 설치한 수비대의 주둔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지역은 바로 우문태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문헌황후 언니의 아들인 이연은 일찍부터 남이 따를 수 없는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원(太原) 수비대의 사령관이었던 이연은, 돌궐의 카간과 밀약을 맺은 다음, 큰아들 건성(建成, 후에 황태자로 임명)과 둘째 아들 세민(世民, 후에 형을 죽임)을 데리고 태원에서 군대를 끌고 나와 수 나라의 수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구당서에 의하면, 이연은 동돌궐 카간 시피의 지원을 구할 때 “사람과 영토는 당국공인 나에게 속하지만, 모든 재물, 비단, 금은보화들은 돌궐에 귀속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기록을 보고, Jagchid와 Symons(1989: 69)는 “간단히 말하자면, 시피 카간은 당 나라 시조로부터 중국에 있는 동산(動産)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 낸 것”이라고 말한다. 카간이 이연의 거사에 합류한 목적은 중국 땅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재물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훗날 태종은 무심코 이 비밀을 누설했다: “예전 우리 왕국의 창건 당시, 태상황제(고조)께서 오로지 백성들 때문에 돌궐의 신하가 되었다(稱臣於突厥). 이 (부끄러운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흉노를 섬멸해야 한다. 10 (전계서: 70). ”

 

▲ Tang in 639 Twitchett (1979: 204)

 

 

북중국 귀족 씨족들의 종족적인 뿌리

 

북중국 귀족 씨족들의 종족적인 뿌리는 선비족, 돌궐족과 옛 변방 한족들의 혼합이다. 그들은 상무정신을 강조하였고, 직접 전투와 사냥에 참가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였다. 11 반면, 대부분 북에서 도망을 해 온 집단인 남조의 지배 씨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한족 문화전통의 후계자라고 믿었다.  

 

태종 이세민은 초원지대의 정치게임에 정통하였으며, 초원지대 문화와 전통에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목민들의 전법에도 숙달하였다. Barfield (1989: 141)는 이세민이 “전략적인 후퇴에 능하여, 공격하기 전에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우선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고, 타고 있던 말이 네 마리나 죽었다. 그는 말들의 죽음을 애통이 여겨, 석상(石像)을 만든 다음, 화살을 몇 개나 맞았고 부상이 어떠했는가 뿐만 아니라, 그 말들 하나하나의 신체적 특징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말과 전쟁에 대해 이렇게 세세한 관심을 갖는 것은 유목민 지도자들의 특짹이라고 말한다.  

 

수 나라뿐만 아니라 초기의 당나라 조정도 일찍이 북위 왕조의 지배하에 그 실효성이 증명된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제국을 조직하였다. 당나라 초기의 통치제도는 유목민의 군대-문민 이원제를 답습한 것이었다. Barfield(1989: 140, 142)는 북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야만화(野蠻化)”가 철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태종이 중국본토와 목초지대 모두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당나라 깃발 아래의 돌궐족 

 

돌궐족들은 당나라 통치 아래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서쪽으로 달아났다. 돌궐 군대가 뒷받침 하는 중국식 통치조직은 당나라의 세력을 최고조에 달하게 만들었다. 당나라의 깃발 아래로 들어간 돌궐의 전투전문가들은 중국의 국경을 중앙아시아까지 확장시켰다. 이세민은 중국 땅의 카간인 동시에 중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어, 648년에는 파미르 고원도 당나라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이족과는 전혀 얘기가 달랐다.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 Koguryeo Tomb Painting Yak-su-ri, Kang-seo, Nampo City

 

 

고구려와 전쟁에서의 당나라의 참패

 

645년, 태종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군대가 요동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태종은 요동성 아래의 해자를 메우기 위해 손수 가장 무거운 흙 자루를 날랐으며, 장수 한 명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하자 몸소 상처의 피를 빨아주었다 한다. 그러나 공격군은 안시성에 이르러 진군을 멈추게 되었다. 태종은 장수들을 직접 지휘하며 공격을 독려했다. 당나라 군대는 하루에 6-7번이나 공격을 반복 할 정도로 전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두 달에 걸친 공격도 허사로 끝이 나고,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자 이세민은 철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12

 

647년 초, 태종은 다시 한번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태종은 다음해 648년에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완전히 격파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하지만 자신 생애 단 하나의 참패에 대한 통분의 한을 품고 태종은 다음해에 죽었다. 

 

구당서를 편찬한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수 양제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요동에 군사를 일으켜 드디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도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이 많았다. 태종 자신도 출사(出師)를 후회하였다. 자갈밭인 야만족 땅은 정복하더라도 쓸모가 없으며, 버려두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허영심 때문에 쓸데없이 헛고생만을 했구나! 통역을 거쳐서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13 

 

이세민의 뒤를 이은 고종(649-683)은 심신이 병약하였다. 황후인 무후(則天武后)는 처음에는 (660-683) 고종을 통해 중국을 다스리다가, 고종이 죽자 자신의 어린 아들들을 내세워 다스렸으며(684-690), 막판에는 아예 새로 주(周, 690-705) 왕조를 세워 여황제가 되었다.  

 

북중국의 귀족 씨족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거의 모두 차지하였다. 비록 수 나라 때 과거제도가 도입은 되었지만, 실제 관리 임용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부터, 당 나라는 세습적 귀족 씨족에 의한 지배체제로부터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에 의한 지배 체제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 Koguryeo Tomb Paintings&nbsp; (top) Deok-heung-ri, Nam-po City&nbsp; (bottom) Ji&rsquo;an Tomb No. 12

 

 

당나라의 영광: 역사가들에 만들어 낸 신화

 

고구려와 전쟁에서의 참패가 태종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의 마음속에서는 당나라의 영광이 조금도 손상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민의 사후, 특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무후(661-705)의 통치 이후, 당나라 군사력의 쇠퇴 현상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무적인 귀족 씨족들에 의한 통치는 나약한 관료들에 의한 통치로 전환된 것이었다. 

 

무후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돌궐족의 침입을 회피해 보려고, 공주를 시집 보내고, 선물과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안록산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난(755-63)을 겪은 후, 당 조정의 통치는 유명무실해졌다. Fairbank(1992: 86)는 “중앙정권의 실제 공백기간은 755년의 반란 이후 979년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현대 역사가들이 정성을 들여 창조한 신화와는 반대로, 당 왕조의 정치력과 영광은 그 생명이 매우 짧았었고, 여인의 통치라는 체면 손상도 있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1 (2005. 7. 23)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각주] 

1. 북제 시대의 안지추(顔之推)가 쓴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인용.  
Schreiber(1949-5: 388)는 “정치적 출세를 위해, 보다 좋은 기회를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기초적인 선비족 언어의 지식을 자신의 아들에게 가르친다는 사실은, 지배계층인 탁발 부족이 선비족 언어를 사용했을 경우에만 타당성이 있는 얘기가 된다”고 말한다. Schreiber(ibid: 390-1)는 또, 노래를 부르고 비파 연주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이 선비족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임에 틀림이 없으며, 선비족 노래를 모아 놓은 2권의 노래책은 선비족들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증명 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齊朝有一位士大夫 曾經對我說 我有一個孩子 已經十七歲了 懂得一些書信公文的書寫 我敎他學習鮮卑語和彈琵琶 只要稍稍 掌握一些 就可以用這些本領去 爲公卿們效力了 沒有不受寵的道理 這也是一件很重要的事情 (顔之推: 顔氏家訓) 

 

2. 유연의 지배자들은, 돌궐 전통으로 볼 수 있는 옛 흉노족 칭호인 선우(鮮于) 대신에, 몽골식 칭호인 “칸”과 “카간”을 사용하였다. Barfield (1989: 120-3) 참조.

 

3. Ledyard (1983: 320) 참조. 흉노는 중세 터키족의 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터키어의 초기형태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몽골 언어 속에 들어 있는 수 많은 터키 차용어의 존재는, 언젠가 몽골의 언어적 조상이, 막강한 문화적 정치적 세력을 보유한 돌궐족에 의해 지배를 받았던 시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몽골 언어와는 대조적으로, 만주의 퉁구스어는 터키어와 유사한 어휘가 거의 없다. Janhunen (1996: 172, 183, 186)과 Ostler (2005: 140) 참조. 

 

4. Twitchett (1979: 63-4, 151) 참조  
魏書 卷一 序紀第一 …國有大鮮卑山…北俗謂土爲托 謂后爲跋 故以爲氏…至成皇帝…立 統國三十六 大姓九十九 

周書 卷十六 列傳第八 獨孤信 …雲中人也 魏氏之初 有三十六部 其先…者爲部落大人 與魏俱起 祖 …和平[北魏, 460-5]中… 父…爲領民酋長… 信…善騎射… 建明[北魏, 530-1]初... 信爲大都督 ...信與 
[北周]太祖[d.556]鄕里 少相友善 相見甚歡..[北]魏孝武[532-4]雅相委任.. [西]魏文帝[535-51]付尙 書議之 ...可轉驃騎大將軍..[北周]太祖令信率..討之... [北周] 孝閔帝[556-7]...進封衛國公... 信長女周明 敬后 第四女 元貞皇后 第七女 隋文獻后 周隋及皇家 三代皆爲外戚 自古以來 未之有也 

隋書 卷三十六 列傳第一 后妃 文獻獨孤皇后 周大司馬河公信之女也 信見高祖有奇表 故以后妻焉.. 后姊爲[北]周明帝[557 -60]后 長女爲[北]周宣帝[578 -80]后

舊唐書 卷一 本紀 第一 高祖 …姓李氏 諱淵..皇祖諱虎…與周文帝及..大司馬獨孤信等以功 參佐命 當時稱爲八柱國家… 周受禪 追封唐國公...廟號太祖 ... 皇考諱昞 [北]周安州總管... 廟號世祖…襲唐國公…追尊元皇帝 廟號世祖…高祖七歲襲唐國公… 文帝獨孤皇后 卽高祖從母也 

 

5. Barfield (1989: 136-38) 

 

6. 隋書 卷八十一 列傳 第四十六 東夷 高麗 開皇十八年 元率靺鞨之衆萬餘騎寇遼西 榮州總管韋沖擊走之 高祖聞而大怒  영주는 만리장성 밖에 위치해 있으며, 570년대 이래 고보녕(高寶寧)이 점거하고 있었다.  

 

7.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八 嬰陽王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隋文帝聞而大怒 命…將水陸三十萬來伐…軍中乏食 復遇疾疫 師還 死者十八九 十八年 初煬帝之幸啓民 帳也 我使者在啓民所..與之見帝….帝…宣旨曰…苟或不朝…往巡彼土 … 啓民突厥可汗也 

 

8. Lee (1984: 47) 

 

9. Twitchett (1979: 143-9) 

 

10. 舊唐書 列傳第七 劉文靜 ...使于始畢可汗 …皇帝….起義軍...願與可汗兵馬同入京師 人衆土地入唐公 財帛金寶入突厥  
 
舊唐書 列傳第十七 李靖 ... 太宗…曰 … 太上皇以百姓之故 稱臣於突厥 朕未嘗 不痛心疾首 志滅匈奴 

 

11. Barfield (1989: 140) 

 

12. Lee (1984: 48) 참조.  629년, 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고비사막으로 보내 동돌궐을 정복하였다, 이세적의 본래 성씨는 서씨(徐氏)였으나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이씨 성을 하사 해 주었다. 이름도 본래 세적(世勣)인데, 태종의 이름 세민(世民)의 ‘세’자를 피하여 그냥 “적”이라 부르게 되었다. 

 

13.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渤海靺鞨 史臣曰 隋煬帝 縱欲無厭 興兵遼左 … 遂亡其國 我太宗文皇帝 親馭戎輅 東征高麗 雖有成功 所損亦甚 …悔於出師… 夷狄之國 猶石田也 得之無益 失之何傷 必務求虛名 以勞有用 但當修文德以來之 被聲敎以服之 擇信以撫之 謹邊備以防之 使重譯來庭  航海入貢 玆庶得其道也 (CCII: 385, 404) 

 

2.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  홍원탁
  •  승인 2005.08.01 00:00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ㅁ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926년에 요(遼)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만주 역사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버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한가지 이유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송나라 대신들 상당수가,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선비(鮮卑) 후예인 거란족의 요(遼) 

 

홍원탁 (서울대 교수)

 

 

당 왕조의 쇠망

 

지중해, 북아프리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300-400년 사이와 800년을 전후해서 두 차례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관개시설에 의존해 농사를 지어오던 지역들 중 많은 곳이 장기간의 가뭄 결과로 유기되었다. 1 당나라의 쇠락과 멸망은 8세기 중엽에 시작된다.

 

현종 (713-55) 치하의 당나라는 웅장한 위엄과 번영을 과시했지만, 당시 위구르의 카간들은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비단과 공물들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2 소그드족과 돌궐족의 피를 반반씩 받은 안록산은 북서쪽 변방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756년에 스스로 대연(大燕)의 황제라 칭하였다. 

 

아버지 현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숙종(肅宗, r.756-62)은,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위구르 돌궐족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땅과 백성은 명목상 나의 소유이지만, 옥과 은, 어린 사내와 여자 아이들은 위구르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3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76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 당나라의 중앙권력은 회복될 수가 없었다 당나라는 위구르의 군사적 지원 덕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4 Barfield(1989: 151)는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보다 야만적인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고 말한다. 당나라와 위구르는 흥망성쇠를 함께한 것이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야율(耶律) 부족의 지도자 아보기(阿保機)는 10개의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만들고, 요서의 초원지대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요하 유역의 몇 개의 도시를 장악 함으로서 요 나라(916-1125)의 기초를 닦았다. 5 거란족 본거지의 핵심은 요서의 초원지대 특히 시라무렌 강 유역에 위치했었다. 거란족은 바로 이 장소에 상경(上京)과 중경(中京)을 세웠고, 요하(遼河)의 강 명칭을 취해 그들 왕조의 이름을 지었다. 6 아보기는 죽기 바로 전 해인 926년에 발해를 정복하였다. 중세 유럽인들이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라는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 나라는 만주, 몽골, 그리고 북중국의 일부를 정복하여, 대동(大同)에는 서경(西京)을, 오늘날 북경이라고 부르는 전방 수비대 주둔 지역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했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遼)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7

 

요 나라도 이원(二元)제도를 유지하여, 한편으로는 과거제도를 통해 문관을 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의 군사를 동원 해 군대의 중추를 구성하였다. 동원된 거란 부족들은 (영어의 "hord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오르도”라 부르는 단위 부대에 복무했다 요나라는 실제로 이원제 국가이었다. 남부의 북경 주변 16개 현(송나라에는 300개의 현)에 살고 있는 3백만 명의 중국인들은 중국식 관료제로 다스리고, 북방에 사는 백만여 명의 거란족들은 전통적인 부족 법으로 다스렸다. 8 

 

몽골 초원지대 혹은 만주로부터 온 정복자들은 이원제를 통해 자기들 자신의 중국화를 방지하려 했다 그들 자신은 부족 전통을 계속 지키면서, 한족은 그들 고유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dyard (1983: 346)는 “926년 발해의 멸망은, 압록강 북쪽의 강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 발해의 멸망을 전환점으로 한국은 오늘날까지 만주 역사에서 제외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9  

 

전연(前燕, 349-70)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요서와 요동 지역만을 점령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한 반면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통일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당 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송(宋)  

 

907년에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에도 당나라는 이미 반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당 멸망 이후 전개된 북 중국에서의 오대(五代, 907-60)와 중부와 남부 중국에서의 십국(十國, 902-79)의 상황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전개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의 상황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특히 317년에 서진이 남쪽으로 달아나고, 439년에 탁발 북위(北魏)에 의해 북 중국이 통일되기 이전까지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10 북 중국에서는 대부분 비 한족 출신의 장군들이 계속 황제 자리를 차지 한데 반해, 남쪽은 한족 제후들이 분할 점거 하였다. Ledyard (1983: 323)는 “그러나 오호십육국 당시에는 온갖 명칭의 (선비족) 연(燕) 나라가 고구려와 힘의 균형을 이루며 대치했었지만, 오대십국 당시의 거란은 재빨리 (926년에) 동부 만주의 경쟁자 발해를 처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사이래 최초로 만주 대륙 전체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북 중국에서는 5개의 왕조가 빠른 속도로 교체되다가, 960년에 와서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총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송 태조(960-76)의 선조들은 오랜 기간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조광윤은 젊은 시절부터 승마와 궁술에 매우 능했다. 

 

거란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거란은 북경과 대동을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11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963년 이후, 난폭한 군 지휘관들이 장악하던 송 나라 지방정부는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개봉(開封)에 수도를 둔 북송(960-1127)의 167년간은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중의 하나였다. 12

 

한반도 

 

Ledyard(1983: 323)에 의하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는 만주에 있는 북방 영토에 대해 자신이 적법한 소유권을 가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고려는 옛 발해의 압록강 이남의 땅만을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993년부터 1018년까지 지속된 고려와 요 사이의 일련의 전쟁들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 영역 다툼이었다” 13 

 

1005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해 송과의 전투가 종료되자, 요는 1010년부터 10년 동안 고려(918-1392)와 전면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10년에는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요 나라 군대가 고려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특별히 얻은 것도 없이 갑자기 철수하였다. 거란은 1018년에 다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고려의 강감찬 장군에 의해 귀주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거란의 고려 침공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으나, 고려 조정은 1020년에 거란에게 더 이상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 이후 양국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요 나라에게 철저하게 굴욕을 당한 북송 (960-1127) 조정은 신생 고려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해, 고려와의 통상과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켰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개입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송나라 조정이 고려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Ledyard (1983: 347)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대부분의 송나라 대신들은 여전히,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후피를 대변자로 하는 다른 그룹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려가 만주 세력에 대항하는 믿을 수 있는 실질적 적대세력이며, 북방의 적들에 대항해 중국적인 문명을 수호하는 한반도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동파 등 주류의 견해가 대세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한족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와 금 나라는 ‘야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요와 금의 외교와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중국 체제이었다. 그들은 왕조를 세워 자신들의 역법을 만들고, 사신을 교환하며 중국에서 유래한 의식과 전례(典禮) 절차를 따랐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2 (2005. 7. 30.)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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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Lamb (1995: 156-69) 

 

2. 630년에 당 태종에 의해 멸망 당한 동 돌궐은, 7세기말에 와, 전통적인 칸 제국을 재건하였다. 서 돌궐도 당나라 조정이 임명한 칸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돌궐족 내부에 내란이 일어나 신복(臣服)하던 부족 하나가 동 돌궐 제국을 장악하고, 같은 오르콘강 상류지역에 위구르 돌궐 (744-840) 제국을 수립했다. 돌궐 제국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돌궐 제국으로 대체된 것을 의미한다  

 

3. 新唐書 卷二百一十七上 列傳 第一百四十二上 回鹘上 肅宗卽位 使者來請助討祿山… 代宗卽位 …請助天子討賊 … 德宗立 … 先帝 … 土地人衆歸我 玉帛子女子回紇

 

4. Barfield (1989: 166) 

 

5. 5세기 중엽부터 거란족들은 오늘날의 열하 인근지역인 요하 서쪽을 점거하였다. 696년, 거란족은 산해관으로 내려와 북경 평야를 공격하였다. 측천무후가 동 돌궐의 카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동 돌궐은 거란족을 철저하게 쳐 부수어 200년 이상 북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6. Janhunen (1996: 145) 참조. 거란족은 반(半) 유목민으로, 어느 정도는 농작물 재배, 특히 수수에 의존하였다. Fairbank and Goldman (1992: 113) 참조. 

 

7. 遼史 地理志一 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上京道 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名曰皇都 
遼史 卷四十九 志第十八 禮志一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8. Fairbank and Goldman (1992: 113) 참조.  Tao Jing-shen (in Rossabi, 1983: 78)은 “후피가 … 거란은 한족의 제도를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한족이 가지지 못한 엄청난 군대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고 말한다. 거란족 조정의 이원제도를 말하는 사료가 된다.

 

9. 고려는 고구려-발해 왕조의 잔존 세력들을 통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전통적으로 지배했던 압록강 남쪽 영토도 확보하였다. Ledyard (1983: 346)는 “고려 사람들은 자신들 왕조의 역사적 성격을 놓고 내부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일부는 고려가 고구려의 전통과 법통을 물려받았다고 믿었으며, 일부는 고려가 신라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믿었다. 시조 왕건이 택한 국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려를 세운 사람들은 명백히 전자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고구려의 역사적 운명은 북쪽의 개경으로 떼를 지어 몰려든 수 많은 신라 관료들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세기 전반에 이들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대립을 계속 하다가 결국 신라의 전통이 승리를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압록강 이불 만주 땅에 남아있던 예맥 퉁구스는 결국에 가서는 여진-만주 퉁구스에 완전히 흡수 동화 되었다. 

 

10. Rossabi(1983: 5-6)는 “남 중국을 지배한 10국의 지배자들은 주로 한족이었고, 북 중국을 통치한 5개 왕조의 지배자들은 대부분 이민족 출신이었다 .. 남 중국의 지배자들은 ‘황제’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않았고, 오로지 북 중국의 국가들만이 중화 제국 전체를 통치하려고 경쟁하였다”고 말한다.  

 

11. Barfield (1989: 174) 참조. 1042년의 조약은 형제관계를 확인 했으며, 매년 바치는 세폐(歲幣)도 은 20만 량과 비단 30만필로 증가하였다. Jagchid 와 Symons(1989: 132)는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송이 순순히 매년 막대한 양의 재화”를 거란과 서하(西夏)에게 바쳤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遼史 卷十九 本紀第十九 興宗二 十一年 [1041] 閏月癸未 … 宋歲增銀絹十萬兩匹 文書稱貢

Tao Jing-shen(1983: 69)은 “양국의 황제들 사이에는 가공적인 혈연관계가 상정되어.... 한쪽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양쪽 조정에서 동시에 장례식을 거행하였다”고 말한다 두 나라는 종종 서로를 “ 북조”와 “남조”로 칭하였다.  

 

12. Fairbank and Goldman (1992: 88) 

 

13. 992년, 소손녕(蕭遜寧)의 지휘아래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다. 하지만 서희(徐熙)의 외교적 활약으로, 고려는 거란군을 설득해 자발적으로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까지 고려 영토에 편입시키는데 동의를 얻어냈다.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이기 때문에 만주에 있는 옛 고구려 땅에 대한 영유권이 있다는 서희의 주장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긴 당시 거란은 북송과 아직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Lee (1984: 125) 참조. 

 

3.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  홍원탁
  •  승인 2005.08.08 00:00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다.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258년의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一然, 李奎報, 李承休, 柳得恭 등의 글은 요동을 포함하는 고구려의 만주 전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동부 만주 삼림족이 서부 만주 유목민을 대체: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서울대 교수 홍원탁 

 

 

금사(金史): 완안부 시조는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다

 

1034-44년이 되자 북동 변방지역에서 발해 유민, 생 여진족, 고려인 등이 합세하여 거사를 한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고, 거란족의 요 조정은 토벌 원정군을 계속 보내야만 했다. 1 거란족은 (발해 주민을 구성했던) 말갈-여진 사람들을 요 나라의 구성원으로 흡수했었다. 그래서 요의 통제를 받게 된 여진족은 '길들여진' 여진족이라 불렀고, 그 밖의 여진족은 '생' 여진족이라 불렀다. 2 동북방에서의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전쟁은 요 나라의 국력을 고갈시켰다. 1125년, 동부 만주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접수했다. 

 

금 나라(1115-1234)를 세운 아골타(阿骨打)는 고려와 접경한 산악지대의 완안 부족(完顔部) 지도자였다. 아골타는 이미 11세기에 다른 생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지배 영역을 확장시켰다. 금사 본기 제1권을 보면, 금의 시조(900년 경의 인물인 완안부의 시조 函普를 의미)는 본래 고려에서 왔다(혹은 고구려 출신이다)고 말한다. 또 태조 아골타가 일찍이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가족이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3 

 

대금국지(大金國志)는 금 나라의 시조(완안부의 시조를 의미)가 본래 신라에서 왔고 성씨가 완안이었다고 말한다. 만주원류고는 금사가 금 시조를 고구려 출신이라고 기록을 했지만, 요사와 금사는 종종 신라와 고구려를 혼동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된 것이며, 김(金)이라는 신라 왕들의 성은 이미 수 십대를 걸쳐 전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세우면서 신라 왕성을 본따 국명을 금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4 

 

동 만주의 삼림족 

 

목초지의 유목민과는 달리 여진족은 사냥과 고기잡이에 못지않게 농업에 의존했다. 여진족은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등의(반 유목, 반 농경) 혼합 경제를 영위했다. 그들은 삼림족이면서도 훌륭한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고유의 부족 조직과 사냥을 통해 숙달된 활 쏘기 말 타기 등은 주변의 유목민에 전혀 손색없는 군사적 전통을 만들어 냈다. 부족 가구들은 세습적 지도자의 휘하에 모여 무리를 지었다.  여진족들은 변변치 않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들에 나가 힘들게 일을 해야 했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전리품을 얻기 위해 마치 가족 내 일인 듯 싸움에 총력을 집중했다.   

 

여진족은, 항복한 한족이나 거란족까지 포함해,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들 본래의 부족장의 지휘 하에 새로운 군대 단위조직을 만들어 흡수했다. 일찍이 (349-410 기간 중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 명칭으로 등장했던) 선비족 연 왕조는 북중국을 통일한 또 다른 선비족인 탁발족 북위(386-534)에게 망한 것이다. 700여 년 후, 거란족의 요 나라는 (북송으로부터 중원을 빼앗아) 북중국 전체를 차지한 또 다른 만주족인 여진족에게 망한 것이다.  

 

2원 통치제도의 답습 
 
여진족 금 나라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의 2원 통치조직을 답습했다. Twitchett and Tietze는 금 나라의 "정부 행정 조직의 기본적 체제는 여진족 고유의 전통과 요 나라로부터 물려 받은 제도와 한족 송 나라 영향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여진족 금 나라의 사회-군사 조직은 만주족 [청 나라] 팔기군 조직의 선구자였다"고 말한다. 5 

 

여진족은 1126년에 송의 수도 개봉을 포함해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양자강 남쪽 항주에 송 나라의 새 수도가 세워졌다. 1141년, 송 조정은 화이강(淮河) 이북의 전 지역을 정식으로 떼어주고 금 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신속(臣屬)하기로 약속했다. 6 북중국을 모두 상실하기 이전의 송을 북송(960-1126)이라 부르고, 남으로 쫓겨난 후의 송을 남송(1127-1279)라고 부른다.

선비족 정복 왕조의 지배 귀족 씨족 출신인 수와 당 왕조의 창건자들은 팽창정책과 대국의 위세를 천하에 과시할 수 있었다. 당 왕조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송 나라는 당의 잔해를 거두어 나라를 세웠으나, 317년에 진 나라 지배자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듯이, 여진족 금에 의해 중원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송은 달리(大理), 월남 등을 포함한 수많은 남방 영토를, 몽골에게 멸망되기 오래 전에, 상실했다. 7 

 

여진족 조정은 1153년에 수도를 하얼빈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1161년에는 개봉으로 옮겼다. 금 나라 지배자들은 많은 여진족들을 북중국 정복지로 이주시켜 수비대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여진족들은, 금 나라 시대 내내, 만주에 그대로 남아 옛 전통적 생활을 계속했다.

 

여진족 금나라는 유목민 고유의 기병대에 손색없는 기병을 보유하는 전방 수비대들을 유지했다. 세습적인 여진족 군호(軍戶)들은 한족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농토와 노예들을 배정 받았고, 한족들과는 분리되어 정착시켰다. 하지만 여진족 병사들이 영농-수비대 생활방식에 완전히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8 

 

금의 정복을 피해 달아난 일단의 거란 귀족들은 서방으로 계속 이동을 하여 서요 왕조(흑거란, 1124-1211)를 수립했다. 9 다분히 몽골적인 이들 거란족이 몰려와 돌궐 유목민들을 복속시킨 것은, 100여 년 후, 징기스칸의 진짜 몽골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여진족도 자신들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고 수도 개봉에 여진 언어 학교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10 금의 세종(世宗, 1161-89)은 여진족 지배층에게 전쟁과 사냥 훈련을 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수도 개봉을 떠나 내몽골 혹은 만주 땅에 천막을 치고 혹독한 생활로 단련을 하면서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연마토록 강요되었다. Crossley(1997: 23)에 의하면, "세종의 실험은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후에 중국대륙을 통치하게 되는 만주족 황제들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경고도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족에 파묻혀 버린 여진족 이주민들의 중국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고려와 금이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 

 

요와 북송(960-1127)을 정복한 후, 금 나라 지배자들은 고려 조정에 신하-주군 (臣屬) 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영토 보전의 대가로 금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고려는 본래의 영토를 보전하는 동시에 압록강 아래 땅을 추가할 수 있었다. 송 나라가 여진족에게 북중국 전체를 빼앗긴 반면, 고려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여진족의 침략을 회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송 왕조는 (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 계속 남쪽으로 쫓기어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했는데, 놀랍게도 고려 왕조(918-1392)는 거란의 요(916-1125), 여진의 금(1125-1234), 몽골의 원(1206-1368) 등을 모조리 겪으면서 이들 모두보다 더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모두 다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비록 영토는 압록강까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생왕국 명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 창건자는, 왕건 보다는 한 발 늦었지만, 실제로 그 넓은 만주 전 강역을 점령했고, 금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에서 왔다고 (혹은 고구려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일찍이 발해는 일본열도의 야마도 왕국과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자신을 고려라 불렀다. 11 금 나라를 세운 완안 씨족의 국가수립 이념은 생 여진족을, 고구려 사람을 선조로 하는, 발해의 유민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2 

 

1136년, 고려 조정에서는, (묘청의 故土수복 이념-요즘의 평양인 西京이념-으로 대변되는) 고구려 법통을 신봉하는 파가(한반도 지배만으로 만족하는 신라 귀족 후손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신라 후계자임을 신봉하는 유학(儒學)파와의 싸움에서 패했다.13 이 싸움에서 유학파의 승리는 1170년에 무신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문신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고려를 한반도에 한정된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 신라 (677-935) 258년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발해와 신라를 북조와 남조로 설정 

 

일연(一然), 이규보(李奎報), 이승휴(李承休), 유득공(柳得恭) 등의 글은, 고구려의 정신적 후계자들이 김부식의 왜곡을 교정하고 요동을 포함하는 옛 고구려의 만주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14 유득공은 고려 조정이 발해와 신라의 역사를 "북조와 남조의 역사"라는 구도로 편찬을 하지 못한 사실을 개탄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웅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웅거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웅거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들이 삼국을 이루어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들이 남북국을 이루었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발해가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물리치고 이전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 김씨의 땅은 전부 거두었지만, 북쪽 대씨의 땅은 모두 거두지 못했다. 일부는 여진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고, 일부는 거란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 발해가 요 나라에 멸망되었어도 … 발해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 장건상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편찬 했는데, 고려 사람은 어찌 발해 역사를 편찬 할 수 없었단 말인가?" 

 

동아시아 역사 강의: 3-3 (2005. 8. 6.)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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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Barfield (1989: 176-8) 참조. 

 

2. 당 나라 때에는 “야만”의 생 여진족을 흑수 말갈이라 불렀다. 

 

3. 金史 卷一 本紀 第一 世紀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兄…留高麗不肯從…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 涯 … 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금사는 고구려를 고려라 쓰기 때문에 이 기록의 고려도 고구려로 간주할 수 있지만, 函普가 900년경 전후의 인물인 것으로 보면 이 기록의 고려는 고구려가 아니라 신생 고려(918-1392)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주원류고에서는 금사 기록의 고려를 분명히 고구려로 간주한다.

 

4. 欽定滿洲源流考 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金之先出靺鞨氏古肅愼地也…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云 本自新羅來 姓完顔氏 考新羅 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 二國互稱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金史 地理誌 乃云以國有金水源爲名 史家附會之詞未足憑耳  居完顔部  
卷七 部族 完顔 遼 祥符三年 契丹征高麗道由女眞 女眞復與高麗合兵拒之 契丹大敗而還 自天聖後屬契丹世襲節度使兄弟相傳 其帥本新羅人 號完顔氏 女眞服其練事以首領推之自哈富…哈富生… 生…次太祖次太宗 …國號大金 
卷七 部族 元  … 金始祖 本從 新羅來 號完顔氏 所部稱完顔部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出

금사 지리지를 보면 금이라는 국가 명칭은 송화강 하류로 흘러 드는 “아시”라는 강의 여진 명칭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금 조정은 이 외지고 작은 강 유역에 상경을 설치했었다. Janhunen (1996: 155) 참조. 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청 나라 황제들은 명백히 금 나라 시조가 자신들의 직계 선조라고 믿었다. 

欽定滿洲源流考 卷首諭旨 上諭頃閱金史世紀云 金始祖居 完顔部 其地有白山黑水…本朝肇興 ..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愼地…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爲金曰愛新 可爲金源同派之證 

 

5. Franke and Twitchett (1994: 265 and 273) 참조. Twitchett and Tietze는 여진족이 “요 나라와 접촉을 하면서 좀더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정부 형태를 인지하게 되자 전통적인 부족 조직 만으로는 거란족과 겨루어 볼 수가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Franke and Twitchett (1994: 220). Fairbank and Goldman(1992: 115)은 “요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한족과 유목민을 포괄하는 금 제국은 초원의 말과 북중국의 곡물을 통합 하고 송을 공격해 남쪽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6. Jagchid and Symons(1989: 134-5)은 “25만 량의 은과 25만 필의 비단을 매년 바치고, 남송 스스로가 금의 제후라 선언했다”고 말한다. 남송 황제는 여진족 금 나라의 지배자를 숙부 황제라고 불렀다. 

金史 卷六 本紀 第六 世宗上 五年正月 宋…以國書來… 稱『姪宋皇帝』 稱名『再拜奉書于叔大金皇帝』 

 

7. Hsiao (1978: 6-7)에 의하면, “8세기가 시작되면서 징집된 병사들을 대체하기 시작한 용병들은 송 대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100만이 넘는 용병들은 북송, 남송 양 대에 걸쳐 정부 재정의 80% 이상을 이상을 소모시켰으나, 용병의 구성내용을 보면 대부분 굶주린 부랑자, 무위도식 꾼들, 그리고 범죄자들로 채워졌었다. 

 

8. Hsiao(1978: 29)에 의하면, “여진족 병사들은 농경을 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받은 농토를 한족에게 소작을 주다가 마침내는 모두 팔아버렸다.” Hsiao(1978: 9)에 의하면, 1187년 호구조사에 등록된 450만 인구 중 45%가 세습 여진족 군호에 속했다. Fairbank and Goldman(1992: 115)에 의하면, 금 나라 때, [노예를 포함해] 여진족은 600만, 요 나라로부터 존속하는 거란족이 400만, 그리고 정복된 북중국의 한족이 3천500만으로 추계되었다.

 

9. Grousset (1970: 186) 참조. 서요(西遼) 왕조는 발카쉬 호수 남쪽 무슬림 투르케스탄에 위치 했으며, 영토가 하미로부터 아랄 해에 달하여, 카쉬가르, 탈라스, 타쉬켄트 등을 포함했다. 서요는 트랜스-옥시아나와 이란을 지배하고 있던 무슬림 돌궐족의 호와리즘 제국과 서쪽 국경을 이루었다. 몇몇 거란 부족들은 계속 서방으로 이동을 하여, 11세기 중엽, 우랄과 볼가강 지역에 이르러, 당시 러시아 초원을 지배하던 킵챡 돌궐족 지배층에 합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10. Fairbank and Goldman (1992: 115) 참조. Crossley(1997: 21)는 여진족이 거란 문자를 약간 변형시켜 자신들의 말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1.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고구려를 단순히 고려라고 기록한다.  

 

12. Rogers (1983: 159) 참조. 

 

13. Ledyard (1983: 152)는, 신생 고려 왕국의 군 출신 지도자들은, 멸망한 신라의 귀족들이 오랜 기간 체득한 전문적인 국가 경영 기술을 간절하게 필요로 했고, 결과적으로 신라인의 정서가 수도 개성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4. 대략 1281-3년 기간 중에 편찬된 삼국유사, 이규보가 1193년에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東明王) 편, 이승휴(1224-1300)가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 유득공(1748-1807)이 1784년에 완성한 발해고(渤海考) 등을 참조. 

 

15. 柳得恭  渤海考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曰高句麗 夫餘氏居于西南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 是矣 及夫餘氏亡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爲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 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 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 渤海爲遼所滅 ...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其書矣 ... 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4. 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  홍원탁
  •  승인 2005.08.19 00:00

한(漢)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수(隋)-당(唐)나라와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흉노와 위구르 돌궐족은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喝取)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로 주요 정무를 수행하고, 궁전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며, 몽골 고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피나는 내부투쟁을 통해 황제를 선택하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화 현상을 막으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과의 결혼을 억제했으며, 자신도 몽골 여인만을 후궁으로 들였다. 원나라가 망한 후, 몽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군대를 이끌고 몽골고원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1368년, 자신의 본고향으로 도망 온 몽골족은 북원(北元)을 세워, 17세기 초에 만주족 청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북원의 첫 번째 황제가 절반은 한국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몽골족의 원(元)이 여진족의 금(金)을 대체 


홍원탁 (서울대 교수)

 

북중국에서 만주족의 금나라와 대결하게 된 몽골제국

 

 

한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수-당나라와 (위구르-투르크)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1206-27)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징기스칸이 1206년에 몽골 부족들을 모두 통합하기 이전의 몽골족은 초원지대의 약소 부족에 속했으며, 대부분의 몽골 고원은 돌궐족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미 7세기 초에 돌궐족의 일부는 당 태종(626-49)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제 몽골 제국과 만주족 (요와 금) 왕조 등, 양쪽에서 밀어오는 압력 때문에, 대부분의 돌궐족들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방향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몽골족의 유라시아 정복 통로를 미리 개척하고, 범-유라시아 몽골제국 출현을 위해 초원의 고속도로를 깔아준 꼴이 됐다.

 

유목정복자들은 정복을 하러 갈 때, 항상 도중에서 마주치는 온갖 유목민들을 자신들의 깃발 아래로 거둬들이려 노력했다. 바투(1227-55)가 (징기스칸의 유언에 의해 바투에게 특별히 할당된) 단지 4,000명에 지나지 않는 순혈(純血) 몽골군을 이끌고 1236-41년 기간 중 유럽 침공을 성공적으로 수행, 흑해와 코카서스 북쪽의 초원지대를 포함하는 고대 스키타이 지역 전체를 점령하고 러시아 공국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래 전에 이 지역에 이주 정착한 돌궐족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 

 

몽골족은 모두 합해 150만 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족, 한족, 위구르족, 티벳족, 터어키족, 페르시아인 등을 포함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모든 종족들을 되도록이면 전부 다 몽골의 군대와 정부기구에 흡수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예컨대 항복한 송나라의 장수 하나가 몽골족이 하천에서 싸우는 함대를 건조하는 작업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하천과 운하가 많은 남중국 정복을 좀더 빨리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신부군(新附軍, 항복한 송군)이 몽골족 혹은 (거란, 여진, 고려인을 포함하는) 북중국 한족 장교의 지휘를 받는 새로운 부대로 조직되거나 기존의 원나라 군대에 편입됐다. 2 

 

징기스칸은 유동적인 연합체 형태로 뭉쳤던 부족-씨족의 군대를 전면적으로 재편성하여,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춘 군대조직을 창출했다. 병사의 수가 1,000명이 넘은 부족 또는 씨족은 1,000명 단위로 분할을 하여 몇 개의 맹안(猛安)을 조직했다. 1,000명이 안 되는 맹안은 다른 씨족이나 부족에 흩어져 있는 친척들, 심지어는 전쟁포로까지 끌어 모아 채웠다. 15살에서 70살까지의 성인 남자는 모두 전쟁에 필요하면 동원이 될 수 있었다. 각 부대 단위 별로 목초지가 배정됐고, 병사들의 가족은 모두 동일한 지휘체계에 편입됐다. 그러나 세습 지휘관들은 봉건 귀족이라기보다는 장교단을 구성했다. 천인(千人)장들의 수입은 관행적으로 그들이 관할하는 자급자족형의 군인 가족들로부터 징수하는 조세와 전쟁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에 의존했다. 그러나 원나라 수립 이후, 이들 지휘관은 세습적으로 급료를 받는 귀족이 됐다. 3 

 

▲ Mongol Empire&nbsp; Black (1999: 68)

 

 

일찍이 북송의 태조는 정치적 특권계층의 자제를 포함하는 정예군을 (상호 견제를 위해 독립적인 몇 개의 부대로) 조직해 금군(禁軍)으로 삼아 그 절반을 수도에 주둔시키는 방법으로 영향력 있는 집안의 충성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고 지방의 반란과 왕위 찬탈 기도를 억제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은 충성심이 입증된 지휘관들의 어린 동생이나 자제들, 몽골 전역의 귀족가문의 자제들, 또 항복한 나라의 왕들에게서 받아낸 볼모들로 친위대를 구성해 자신의 호위는 물론 황실의 가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이 친위대는 일종의 인질 집단이며, 장래 고위관직에의 임명이 약속된 어린 귀족들을 위한 사관학교이자, 미래의 지배계급을 양성하는 특권적 견습 도제 기관이었다. 또 칸이 귀족들과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고리역할을 하는 동시에 유목 부족장들의 느슨한 연맹체를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로 전환시키는 초기형태의 통치업무 집행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4

 

흉노와 위구르-돌궐은 전통적으로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 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족은 1227년에 서하, 1234년에 금, 1259년에 고려, 1279년에는 남송을 정복하였다 Janhunen(1996: 134)은 “동아시아에서 몽골의 정복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서하와의 전쟁은 20년간(1207-27) 지속되었고, 금과는 24년(1210-34), 고려와는 40년(1219-59), 남송과는 44년간(1235-79) 전투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한족이 선비족의 북위,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과 대치했을 때에는 중국대륙 남쪽에서 그들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족은 한족 왕조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한족 국가의 영역 전체를 완전히 정복해버린 것은 훗날 만주족 청나라에 의해 모방되는 것이다.

 

몽골족은 신속하게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대량학살이라는 공포작전을 채택했다. 그들은 도시를 불사르고 농토를 파괴하여 목초지로 만들었다. 동(東)이란의 경우, 인구의 5분의 4가 학살되었다. 몽골족의 야만성은 정주(定住)의 문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1234년에 금나라를 정복할 즈음, 몽골족은 수많은 문명화된 자문관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미 이민족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던 북중국에 제국을 세워 통치하는 기술도 습득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1260-94)는 남송을 멸망시키기 8년 전인 1271년에 자신을 원나라의 황제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동 투르키스탄의 위구르-돌궐족은 저항없이 곧바로 항복을 했기 때문에, 징기스칸은 위구르 지배자를 자신의 5번째 아들이라고 불렀다. 몽골은 위구르 문자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했다. Ledyard(1983: 348)는 “몽골족의 일상생활에 한족의 습속(習俗)이 침투하기 이전에 이미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았고, 중앙아시아의 행정과 통치 기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흐름이 몽골인의 생활에 침투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역사적인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다양한 서비스와 기술들이 몽골인들에게 이미 제공되었었기 때문에 구태여 한족들로부터 유사한 기술과 서비스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몽골족이 한족 생활 관습에 근접했을 때, 그들이 마주치게 된 높은 수준의 문명이란 것은 한족에게서만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었기에, 한족 문명의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모든 돌궐-몽골족 나라들은 한 개의 제국으로 통합됐다. 만주로부터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대상(隊商)들의 왕래가 방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철권적 규율의 적용됐다 20만 마리의 말들이 역참(驛站)에 배치되어 제국의 우편 왕래 서비스를 수행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황제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모든 제국을 통괄하는 몽골 제국의 칸으로서, 몽골족에 의한 세계평화 체제가 실현된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쇠퇴  

 

쿠빌라이는 1264년에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당시 대도로 불려진) 북경으로 옮기고, 원나라(1206-1368)의 황제가 되었다. 중국대륙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한 최초의 이민족 왕조였다. 주요 거점지역에는 몽골족 수비대가 주둔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터키족, 아랍인 및 중국화된 여진족 등을 행정기관에 사용했다.  만주, 몽골, 투르키스탄, 티베트는 만리장성 아래의 중국본토에서 적용된 것과는 다른 행정조직으로 지배했다. 7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몽골 군호(軍戶)의 전투력은 왕년에 떨쳤던 용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8 몽골 수비대 사회에서 유교를 배우고 중국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흔한 현상이 됐다. 몽골 조정과 귀족들은 분열되어 황제 계승 투쟁에 몰입했으며, 각 경쟁자들은, 로마의 친위대와 유사한 역할을 했던, 황실의 친위대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노력했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로 주요 정무를 수행하고, 궁전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며, 몽골 고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피나는 투쟁을 통해 황제를 선택하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화 현상을 막으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과의 결혼을 억제하였으며 자신도 몽골 여인만을 후궁으로 들였다. 반면 한족에게는 정복자의 관습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원나라가 망한 후, 몽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9 그들은 단순히 군대와 함께 몽골고원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1368년, 자신의 고향으로 도망을 해 온 몽골족은 북원(北元)을 세워, 17세기 초에 만주족 청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북원의 첫 번째 황제가 절반은 한국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왕조의 실체를 보전한 고려  

 

고려에서는 1170년에 불만을 품은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수의 거만한 문관들을 처형한 다음,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100여 년에 걸쳐 무단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들은 귀족 가문과 불교 사찰들의 권력남용과 전횡을 허용한 왕을 질책하였다. 무신 지도자들은 후에 몽골 침입의 여파로 몰락하게 된다. 

 

13세기 초, 여진족 금나라는 몽골의 거듭되는 침공을 당하고 있었다. 거란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얻고자 하였으나, 금 나라의 수도가 1215년에 함락된 후, 몽골의 압력은 거란족을 고려 땅으로 밀어냈다.10 몽골-고려 연합군은 1219년에 거란족을 쳐 부쉈으나, 이 사건 이후, 몽골은 고려 조정에게 대규모의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고려왕은 몇 차례 조공을 거절하여, 1231년 이후, 일련의 몽골 침략을 초래했다. 고려왕은 농민들에게 산성에 올라가 저항을 계속하라고 명령을 한 다음 강화도로 피신하여, 거의 30년 가까이 몽골에 완강하게 저항을 하다가 1259년, 무신 지배자들을 축출한 문신 정권 하에 항복을 했다.  

 

Ledyard(1983: 325)는 “원나라의 영토가 금 나라와 송 나라를 모두 흡수하게 되자, 만주 전체가 중국 본토와 합쳐져 동일한 통치권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 고려는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 고려의 북방 영토는 몽골이 빼앗아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열도의 가마쿠라 막부를 굴복시키려고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벌인 몽골의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는 수백 척의 배를 건조하였고 보급물자를 제공했다. 두 차례의 침공을 위해 고려는 900척의 배와 1만5,000의 수군, 5,000-1만명의 병사를 제공했지만, 심한 폭풍우로 인해 모두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났다. 11 

 

원나라 조정은 고려에 대해 유화정책을 채택하여, 1274년에 쿠빌라이의 딸을 고려 왕세자에게 시집보냈다. 고집 센 고려 지배자들을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유전자적으로 틀림이 없는 방법으로 정복하려 한 것이다. 그 후, 고려의 왕위 계승자는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야만 했다. 12 원나라의 부마(駙馬)국 형태로 고려 조정은 독립 국가의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 하지만 유전적으로 보면, 고려왕은 빠른 속도로 순혈의 몽골 왕자에 가깝게 되었다. 일종의 보복이라 할까, 고려의 여인이 1340년에 원나라 마지막 황제(順帝, 1333-1368, 1368년에 북경을 떠나 1370년에 몽골에서 사망)의 두 번째 부인인 기황후(奇皇后)가 되었다. Dardess(1994: 580)에 의하면, 그녀의 새로운 지위가 원-고려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몽골 조정 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제2황후 추대를 반대했다. 그녀가 낳은 황자가 1353년에 후계자로 옹립되어 1370년에는 북원의 황제가 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기황후의 형제는,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한 1356년 공민왕(1351-74)에 의해 제거됐다. 기황후는 끈질기게 황태자를 졸라, 1364년에 원정군을 보내 고려왕의 교체를 시도했으나 몽골군은 고려군에게 전멸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의 몽골 영향력은 소멸됐다. 14 

 

1356년, 고려는 함경도 쌍성에 있는 원나라의 군 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당시 지방의 토호이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의 협조는 고려가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368년, 기황후 일족이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원 나라 피난민들을 모아 일족의 몰락을 복수하고자 하였을 때, "공민왕은, 고려가 옛 고구려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만주를 지배할 정당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전통적 주장을 새삼 내세워 최영과 이성계 등 두 명의 뛰어난 장수들을 만주로 보냈다. 이성계(1335-1408)는 함경도에서 3대에 걸쳐 천호(千戶)장을 지낸 군인 집안의 5대손이었다. 이성계가 함흥평야 방면으로 쳐올라 갈 때, 최영은 서쪽의 요동으로 쳐들어가 1371년에 요양을 점령했다. 하지만 요하의 동쪽이 모두 자신의 땅이라고 거듭 주장을 해 오던 고려 조정은 정작 그들이 얻은 것을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을 시켰다. 곧이어 명나라 군대가 요동 지역으로 진주하여 논쟁의 여지를 영구히 제거시켜 버렸다"고 Henthorn(1972: 129)은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4 (2005. 8. 13)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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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카스피해 부근의 볼가강 하류, 정복한 킵챠크 돌궐족 거주지역 한 복판에 수도를 둔 바투의 킵챠크 칸 제국은 역사책에서 골든 호드(알탄 오르도)라 부른다. 유럽의 이들 몽골 지배자들은 동화되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징기스칸의 제국들이 중국, 페르시아, 투르키스탄 등지에서 모두 축출된 다음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해, 1502년까지 유럽 땅에 진을 치고 존속했다. 테머레인 대제(1336-1405)는 자신을 징기스칸과 차카타이의 후손이며 계승자라고 공언하였으나, 사실은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의 돌궐 귀족계급 출신이었다. 그는 1397년에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서 그 위대한 징기스칸 가계의 일원이 된 것이다. 티무르의 장대한 정복 위업은 징기스칸 군대의 규율 속에서 탄생한 돌궐 군사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2. 핵심을 이루는 몽골족 군대에 추가하여, 신부군, 여진군, 거란군, (심양)고려군, 기타의 군대들이 있었다. Hsiao (1978: 15-6, 74, 174) 참조. 

元史 卷九十八 志第四十六 兵一 …其繼得宋兵 號新附軍 叉有遼東之糺軍 契丹軍 女直軍 高麗軍 … 

 

3. Hsiao (1978: 14, 25) 

 

4. Hsiao (1978: 33-39) 

 

5. Jagchid and Symons(1989: 19-20)에 의하면, “징기스칸(1206-1227)은 금 나라와 변경교역 및 조공을 확보하여 중국으로부터 필수품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일단 교역과 조공 확보의 길이 막히자, 징기스칸에게는 전쟁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징기스칸이 1213년에 북중국 평원에 진입하여 중도(中都, 북경)를 에워 쌓을 때, 그의 목표가 영토적 혹은 정치적 지배보다는 물자 확보에 있었다는 것은, 그의 행동을 보면 명백하게 나타난다 당시 금나라 조정으로부터 대규모의 선물을 받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다음에, 징기스칸은 몽골고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징기스칸은 영토를 점령할 생각은 없었고, 단순히 전리품을 얻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려 하였다. ... 그러나 1236년, 몽골 조정의 거란족 출신 고문인 옐루추차이(耶律楚材)와 …간의 대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몽골의 정책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옐루추차이는 오고타이 칸에게, 귀족들이 백성들로부터 멋대로 강탈을 하게 내버려 두지를 말고, 조정이 관료들을 임명하여 매년 직접 세금을 걷어 들이고, 연말에 이를 귀족들에게 분배하도록 권고하였다.”

 

6. Fairbank and Goldman (1992: 122-123) 참조. Hsiao(1978: 3)는 “몽골족은 중국을 전통적인 중국식으로 통치하려 하지 않고, 군사적인 사고방식으로 통치하려 했다”고 말한다.

 

7. Hsiao (1978: 57-60) 참조. 메마른 중앙아시아에 15만 명의 기병대를 유지시켜야 할 필요는 원나라 재정을 고갈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8. 남송 멸망 후, 원나라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사람들은 전쟁을 몰랐으며, 장수들의 후손은 대대로 지휘관직을 세습하였다. Hsiao (1978: 26-7) 참조. 몽골 병사들은 영농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가족은 만성적인 성인남자의 부재와 군 지휘관으로부터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해진 군호와 그들 상급 지휘관 사이의 유대감은 사라졌다. 이전에 북중국에 주둔을 하면서 농토를 배정 받은 금나라 여진족 병사들은, 훗날 청나라의 팔기군들 모양, 비록 힘은 들었지만 영농생활을 하면서 병역의무를 수행하였다. 왜 몽골 병사들은 중국 땅에서 적정 수준의 삶을 전혀 영위할 수 없었을까? Hsiao(1978: 20)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진족과 만주족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소규모이나마 영농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몽골족은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9. Janhunen (1996: 166) 참조. Ledyard (1983: 326)는 “중국지역에 이주 정착했던 대부분의 거란족과 여진족은 그들의 정복 통치가 끝났을 때 한족에 동화되어 흔적이 없어진 데 비해, 몽골족들은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몽골족 그대로 살아 남았다”고 말한다. 

 

10. Lee (1984: 148) 참조. 몽골이 금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209년이고, 수도를 함락시킨 것은 1215년이었으나, 19년이 지난 1234년에 가서야 비로서 금 나라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다. 

 

11. 두 번째 몽골 원정군의 규모는 중국 남부로부터 출발한 3,500척의 배와 100,000만의 병사들, 고려로부터 출발한 900척의 배와 40,000명의 병사들이었다.  

 

12. 훗날 충열왕(1274-1308)이 되는 고려 왕세자와 몽골 공주와의 결혼은 1274년에 이뤄졌다. 이후 100여 년 동안 7명의 몽골 공주가 고려 왕자와 결혼을 하였으며, 그들 자식 중 세 명이 고려 왕위에 올랐다. Henthorn (1972: 123) 참조. 

 

13. 몽골은 고려 왕실의 지손(支孫)을 데려다 요양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상당한 규모에 달하는 그 지역 고려인 사회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훗날 고려의 군주들은 “심왕(瀋王)”이란 명칭으로 요양 지역에 대한 형식상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 Henthorn (1972: 123) 참조.

 

14. 元史 卷一百一十四 后妃一 完者忽都皇后奇氏 高麗人 生皇太子愛猷識理達臘…初…進爲宮女…立爲第二皇后 初奇氏之族在高麗者 怙勢驕橫 高麗王怒 盡殺之 [至正] 二十三年 后謂皇太子曰 汝何不爲復讎耶? 遂立高麗王族人留京師者爲王…用兵一萬…過鴨綠水 伏兵四起 乃大敗 餘十七騎而還 后大慚… 二十五年…皇后崩…后宜正位中宮 帝不答…二十八年 從帝北奔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 至正十三年 [1953] 冊立皇太子…太子奇皇后所出也 奇氏高麗人本微賤…皇后兄子奇轍爲大司徒富貴震一時… 十六年 有密告奇轍潛通 雙城叛民謀逆祺殺之 夷其族… 二十三年 皇太子欲爲奇皇后復仇 乃立德興君…爲國王… 發遼陽行省兵送之…祺聞其事…書曰 世祖皇帝… 釐降帝女於忠烈王 且許以不革國俗 以至於今… 二十四年 [1964]…以大兵一萬圍義州爲崔瑩等所敗 一軍皆沒 

新元史 卷二十六 本紀 惠宗四 至正二十四年 春正月 [1364] 朱元璋自稱吳王 是月 崔帖木兒與 高麗人戰於定州敗績 … 三十年 [1370] 惠宗崩於應昌 皇太子卽皇帝位… 改元宣光… 宣光元年 明太祖洪武四年也 [1371] 遼陽行省…降於高麗 十月 高麗兵陷五老山寨… 二年 [1372] … 大破明…兵於嶺北自是明兵不復渡漠 

 

 

5. 몽골 원(元)이 한족(漢族)의 명(明)으로 대체됨

  •  홍원탁
  •  승인 2005.08.26 00:00

주원장은 몽골 원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압록강 아래의 영토는 모두 확보 하였으나, 명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하 유역을 포기했다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따라 당시의 강자인 한족 명나라에게 신속(臣屬)하면서 조선왕조는 독립을 유지하고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명 영락제(1402-24)는 동몽골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거듭했다 한나라 때, 초원지대의 흉노를 상대로 벌린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오로지 무제의 재위 기간 중뿐이었다. 당 태종 때 일시적으로 초원지대를 지배하였으나, 그의 호전적인 정책은 후계자들에 의해 수동적인 방어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영락제가 죽은 후, 명 조정 역시 유목민족에게 조공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군대를 양성 하거나 장성을 축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방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몽골 원과는 달리,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의 좁은 해안지역 이외의 만주 땅 전체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다.

 

풍신수길은 1590년에 일본열도를 통일하자,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리라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 무사들을 모두 배에 실어 한반도로 보냈다 명나라 원군(援軍) 덕분에 임진왜란으로부터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한반도 사람들은 만주의 그들 친족 어깨너머로 한족의 중화제국을 우러러보는 성향이 한층 심화되었다 명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극치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와 경제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의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가져온 것은 동만주의 여진족이었다 금-청 정복왕조 지배자들은 여진-만주족의 원류(源流)를 숙신-말갈족과 발해 사람들에서 찾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에게서도 찾으려 했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한족 왕조의 복귀

 

몽골 원(元)이 한족(漢族)의 명(明)으로 대체됨
                                                             

홍원탁 (서울대 교수) 

 

주원장(r.1368-98)은 농민 출신으로 절에서 승려에게 글을 배웠다. 양자강 하류지역의 반란군 지도자로 출발하여, 명나라(1368-1644)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제위를 이어받을 후계자 한 명만 수도인 남경에 남겨두고 나머지 아들들은 북방에 봉토를 주어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전방에서의 전투경험도 많고 일반 민중에게 평판도 좋았던 첫째 아들이 조카인 어린 황제를 죽이고 3대 황제(永樂帝, 1402-24)가 되어, 자신의 봉토이었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려에서의 몽골지배는 이미 1356년에 끝이 났었다. 원나라 지배자들은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명나라 군대가 요양지역을 점령하는 1387년까지 요하 유역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고려는 전부터 요하 동쪽의 모든 땅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1388년, 신생 명나라는 원의 총관부(雙城摠管府)의 지배를 받아오던 고려의 (철령 이북) 동북 변경 지대까지도 차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분개한 최영(1388년에 경쟁자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음)은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이성계를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어귀)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아 마침내는 신유교를 신봉하는 지식인 관료들에 의해 새로운 조선(朝鮮, 1392-1910)왕조를 시작하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은 압록강 아래의 영토는 모두 확보하였으나,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하 유역을 포기했다. 1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따라 당시의 강자인 한족 명나라에게 신속(臣屬)하면서 조선왕조는 독립을 유지하고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명은 원나라의 십진법으로 된 군대조직을 답습하고, 2백만 호에 달하는 세습적 군호 제도를 유지하였다. 2 1409년, 영락제는 10만의 군대를 보내 동몽골을 공격하였다. 1410년, 영락제는 손수 50만 군대를 이끌고 동몽골을 괴멸시켰다. 그는 1414년에도 오이라트 몽골 원정군을 조직해, 케룰렌 강변에서 대포를 쏘아 전투에 승리를 거두었다. 3 

 

1422년, 영락제는 동몽골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수행했으며, 1424년에는 5번째로 유목민 정벌전쟁에 나섰는데, 그것이 명나라 마지막의 초원지대 원정이었다. 그는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영락제의 정복업적은 진 시황제, 한 무제, 당 태종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취향이 전혀 달라, 다시는 초원지대에서 전쟁을 하려 하지 않았다. 4

 

한나라 때, 초원지대의 흉노를 상대로 벌린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오로지 무제의 재위 기간 중뿐이었다. 당 태종 때 일시적으로 초원지대를 지배하였으나, 그의 호전적인 정책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수동적인 방어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5 영락제가 죽은 후, 명나라 조정은 또 다시 고정 방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명나라 군대는 군호에게 농토를 배정해 대충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확충하는 부질없는 노력은 명나라 조정의 수세적인 방어심리를 표출하는 것이다.  

 

만주족이나 몽골족 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경은 만주나 몽골 초원지대로부터 부족들의 군대를 쉽게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제국의 수도로서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한족 왕조에게도, 변방의 전투와 부족들의 정치내막을 잘 파악하는 영락제 같은 지도자를 가졌을 때에는 북방에 위치한 수도가 유리한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진 시황제, 한 무제, 당 태종, 혹은 명 영락제가 없는 한족 조정에게는 북경이 아주 불리한 존재가 되었다. 북경은 중국의 자원이 집중되어있는 남쪽과 거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이 최전방의 방어선상에 위치 해 있기 때문에 유목민족의 불의의 급습을 받을 위험이 컸다.  

 

영락제가 죽은 후에는 초원지대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지 못했고, 북동쪽 혹은 북서쪽 변방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명나라는 유목민족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였다. 6 Barfield(1989: 246-49)에 의하면, 그 이유는, 명나라 지배자들이 보기에 송나라 조정이 거란, 여진, 몽골 등에 엄청난 물자를 바쳤음에도 북중국을 상실했고, 마침내는 송나라가 완전히 몽골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지배자들은 조공물자의 제공이란 것이 단지 유목민족의 힘을 길러주어 결국 송 왕조를 멸망시키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 역시 유목민족에게 조공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군대를 양성하거나 장성을 축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방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1449년에 명나라 영종이 오이라트 몽골에게 생포되는 수난(토목보의 변)은, 한 고조가 기원전 200년에 흉노족에게 포위되었던 사건을 상기시켰다. 명나라는 마침내 몽골 부족장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조공물자의 제공, 변경교역의 허용, 부족장들에 직함 수여 등을 통해 몽골 초원지대의 분열된 정치 체제를 고착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7 

 

원나라와는 달리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의 좁은 해안지역 이외의 만주 땅 전체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다. 명 조정은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해 고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200여 개의 소규모 여진 부족장들에게 명예 직함을 내려주고 조공 혜택을 주었다. 8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에 일본열도를 통일하자,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리라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 무사들을 모두 배에 실어 1592년에 한반도로 보냈다. Spence(1990: 18-19)는 “명나라는 조선을,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지켜주어야 할 충성스럽고 종속적인 동맹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기에 몰린 조선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 내부에서의 혼란상태와 조선 해군에 의한 효과적인 보급로 차단 때문에 왜군은 1598년에 조선으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이 계속되어 세 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명나라 원군 덕분에 임진왜란으로부터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한반도 사람들은 만주의 그들 친족 어깨너머로 한족의 중화제국을 우러러보는 성향이 한층 심화되었다.

 

명 왕조 멸망 직전인 1600년경, 명나라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세련된 국가이었고, 인구는 유럽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1억 2천만 명에 달했다. 관료와 무관의 직위는 수도와 전국 방방 곡곡에서 치러지는 각종 과거시험에 합격을 해서 획득되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극치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와 경제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의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가져온 사람들은 동만주의 여진족이었다.

 

돌아온 여진족 

 

청나라(1616-1912) 시조 누르하치(1559-1626)는 건주(建州) 부족장의 아들로 훈룬 부족과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9 1596년 음력 설날, 조선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 신정일에게 누르하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두 나라는 하나가 될 것이고, 우리의 두 왕실은 하나가 되어, 자자손손 영원히 뭉쳐서 우호적으로 살 것이다” 누르하치는 조선 조정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귀국과 우리 여진족 국가는 앞으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계속 두텁게 해 갈 것이고, 우리 두 나라의 백성들은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0

 

1616년, 누르하치는 자신이 후금(後金)의 칸이라고 선언하였다. 16세기의 만주에서는 단지 심양(오늘날의 목단)의 최남단 지역에서만 중국식의 집약적인 농경이 이루어졌다. 명나라 지배자들은 요하 유역에 자국 장군들의 지휘를 받는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요동에 주둔하는 명나라 군대 모병에 여진족과 조선족들이 적극 응했다. 11 Crossley(1999: 47)는 Owen Lattimore의 견해를 인용하여, 명-청 교체 이전의 요동-길림 지역은 중국, 몽골, 한국, 그리고 토착 문화의 유동적 요인들이 정치-경제 흐름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저수지”이었고, 여진-만주족은 변경(邊境)족 혹은 “크리올 (현지출생 이민족)” 모양, 시류에 따라 몽골족, 한족, 혹은 조선족과 어울리는 문화적 “카멜레온”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몽골-한-조선) 목록에 “선비-거란족”도 포함했어야 한다.

 

1621년, 심양과 요양은 여진족 군대에 함락되었다. 1625년, 누르하치는 심양을 후금의 수도로 정했다. 1636년, 누르하치 후손은 만주 청나라를 수립했다. 

 

▲ Manchu Indoor Boots&nbsp;&nbsp; Crossley (1997: 16)

 

 

선조가 본래 고구려 혹은 신라에서 왔다고 믿었던 금과 청나라의 지배자들

 

만주원류고의 서문에서 건륭제(1736-96)는 금나라 황실의 선조가 말갈연맹의 일원으로 옛 숙신(肅愼) 땅인 장백산(長白山)-흑수(黑水) 지역에서 살았는데, 그 땅이 바로 후에 (숙신의 變音으로) 만주족이라고 불리게 된 여진족이 흥기한 장소이었다고 말한다. 청나라 지배자들은 여진족 금 왕조의 창건자들이 자신들의 직계조상이라고 굳게 믿어, 자신들의 나라를 1636년까지 후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2 

 

만주원류고는 만주족의 원류(源流)를 말갈-여진족과 발해 사람들에서 찾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에게서도 찾고 있다. 부족(部族)편 7권의 완안(完顔)절에 보면, 비록 금사(金史)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본래 고구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서는 그가 원래 신라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고 말한다. 당서(唐書)는 흑수말갈족을 화살촉에 독을 묻히는 무섭고 사나운 야만족으로 기술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족의 뿌리가 이 같이 호전적인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옛 왕국 사람들에게도 그 뿌리가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13

 

동아시아 역사 강의: 3-5 (2005. 8. 20)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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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Crossley(1999: 87)는, 많은 여진족들이 조선이 압록강 주변에 설치한 수비대에 가담하였으며, 다른여진족들은 흔히 한국 성을 쓰면서 교역에 종사했다고 말한다.

 

2. Hsiao (1978: 4) 

 

3. 영락제는 이슬람 돌궐족 출신인 정화(鄭和)로 하여금 1405년부터 142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30여 개국을 순방하도록 하였는데, 첫 항해에 26,800명이 동원되었다. 남경의 조선소에서 2,000여 척의 배를 건조했는데, 그 중 100척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형 보선(寶船)이었다: 길이가 370-440 피트, 폭이 150-180 피트, 무계가 3,000톤, 90 피트에 달하는 4-9개의 돛대, 16개의 방수 칸막이 방, 거대한 선미(船尾)의 방향타 등 영락제 이후의 황제들은 유교로 훈련을 받은 관료들에 설득되어 외국과의 접촉과 통상을 전면 금지했다. 정화의 함대를 항구에서 썩게 하면서 유럽인들만이 전 세계를 탐험하고 개척하도록 한 것이다. Fairbank and Goldman (1992: 137-8) 참조.  

 

4. Barfield (1989: 236-237) 

 

5. Barfield (1989: 235) 

 

6. Jagchid and Symons(1989: 139-40)는 “일찍이 한나라 때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가 받아내던 세폐(歲幣)가 전례가 되어, 북송과 남송은 거란의 요, 탕구트의 서하, 여진의 금에게 막대한 규모의 세폐를 매년 바쳤다. 이 모든 기간 중, 선물도 보내졌다. 선물 규모는 해당 시기의 농경국가과 유목국가간의 상대적 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었다. 비록 선물과 매년 바치는 세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한족 왕조가 주변 유목국가들과의 위험한 전쟁을 벌리는 것과 비교를 해보면 훨씬 저렴한 방책이 되었다”고 말한다. 

 

7. 영락제가 죽고 난 후 1454년에 에센이 멸망할 때까지, 명나라는 몽골에게 계속해서 조공을 바쳤다. Jagchid and Symons(1989: 138)는 명사략(明史略)을 인용한다. “ 그들의 욕심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야만족 부족장들은 매년 요구량을 늘렸다. 때로는 우리도 가지고 있지 않는 온갖 사치스럽고 비싼 물품들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조정은 가능한 한 그들이 요구하는 물건들을 모두 구해 주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야만 부족장들은 그들이 요구한 것보다 적게 주면 항상 크게 화를 냈다.” 

 

8. Barfield (1989: 235-6 and 251) 참조 Spence (1990: 26)에 의하면, “명나라의 정책은 공식적으로 여진족의 영역을 중국 국경 방어선의 일부로서 획정을 해놓고, 여진 부족장들에게 명예 직함과 변경 교역권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통제를 하는 것이다” 

 

9. 여진족은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건주 부족은 (한국 국경 북변을 따라) 두만강 북쪽의 장백산맥 지역에서 사냥과 농경을 하였으며, 부족생활을 하지 않는 (길들여진) 훈룬족은 (옛 금나라의 중심지인) 요하 동쪽과 심양 북쪽 땅에서 농경과 교역을 하며 “니칸”이라 불렸던 한족 이주정착민들과 어울려 살았다. 반면, 수렵과 사냥, 채집과 원시적 농경에 종사하던 생여진(生女眞)족은 보다 북쪽인 목단강 동쪽에서 (송화강 하류, 흑룡강 중류, 우수리지역에 이르기 까지) 살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계획적인 종족 이주정착 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생여진족들은 재배치되어 건주 부족과 통합되었다 Janhunen (1996: 101-6, 157) 참조. 

 

10.  1595-6년의 겨울에 Fe Ala에 있는 누르하치의 지휘 본부를 방문했던 신정일이 자세하게 기록한 회고록을 Crossley(1997: 57, 59)가 번역한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Crossley(1997: 60)는 신정일 사절단의 임무가, 건주 여진족에게 조선의 북방경계선을 준수할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누르하치와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11. Crossley (1999: 85) 참조. 

 

12. Crossley (1997: 124, 301) 참조. 건륭제는 “숙신(肅愼)”에서 “주신(珠愼)”이, 주신에서 “만주(滿珠)”가, 또 만주에서 “만주(滿洲)”가 나왔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청나라 황실의 혈통은 애신각라(愛新覺羅)로 불린다. 아이신은 “금(金)”을 의미하고, 이것은 건륭제가 청나라 황족이 본래 금나라 여진족의 분파임을 확신하게 하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13. Crossley (1997: 122-5) 참조 

 

 

6.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  홍원탁
  •  승인 2005.08.29 00:00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팔기제도를 편성 완료했다. 1621년에 심양과 요양을 점령한 이후,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二元)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1635년, 몽골족 팔기군(八旗軍)을 편성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중립외교 정책을 택했던 광해군을 좋아 낸 인조가 친명정책으로 선회하자, 홍타이지(皇太極)는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여 신복(臣服)시켰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조선 사람들에 의한 후고(後顧)의 걱정거리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1642년,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을 동원해 한군(漢軍)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1644년,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으로 구성된 청 군은 항복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진군해 북경에 입성했다. 홍타이지의 어린 아들은 순치제(順治帝)라는 칭호로 제위에 올랐다. 청나라 황제들은 상무전통을 고취하면서 제국을 통치했고, 중국화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만주, 몽골, 신강, 티벹, 대만 등은 중국본토라고 불리는 내지와 달리, 비 한족관료 관할 하에 별도로 다스려 졌다. 만주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흥했고 또 망했다. 만주족은 중국의 강역을 2배 이상으로 확장했으나, 자신들의 본고장인 만주를 포함해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모두 물려준 꼴이 되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Text In PDF.../ 편집자 주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만주 호랑이의 귀환(歸還)

 

홍원탁 (서울대 교수) 

 
전통적 2원(二元)제도의 개선: 농병일치(農兵一致) 팔기제도(八旗制度) 

 

누르하치(奴爾哈赤, 1559-1626)는 자신의 여진족 군대와 그 가족들을 몇 개 집단의 기병(旗兵)으로 조직했다. 1601년, 황(黃), 홍(紅), 백(白), 남(藍)의 깃발로 구별된 네 개의 기병 군단을 편성해, 자신의 친족 네 명을 이들 기병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누르하치가 스스로 후금(後金)의 칸(汗)이라 칭한 1616년, 이들 네 개의 기병 군단을 각각 양분한 다음, 황기, 백기, 남기에는 홍색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홍기에는 흰색 선을 둘러, 처음 네 개와 함께 모두 여덟 가지 깃발을 만들어 구별했다. 이들 깃발은 전투 시 병사들의 인식표지 역할을 하여 소속 식별을 용이하게 했고, 특정 팔기병(八旗兵)의 구성원 신분은 평상시 주민등록의 근거가 되었다. 1  

 

팔기제도의 수립과 동시에 누르하치는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교육받은 한족들은, 항복을 하면, 급속히 팽창해가는 여진족 관료조직에 가담 해 봉사를 할 기회를 얻었다.  누르하치 편으로 넘어 온 고위 한족 관리들은 누르하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명예 칭호를 받아,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한족 관료들은 만주부족들의 팔기군 군사활동에 일체 간여하지 않고, 요하 주변의 한족 정착민들을 통치하는 정부행정 만을 전담했다. 2 

 

▲ The Manchu Expansion&nbsp; Crossley (1999: 131)

 

 

조선 조정의 사대주의 전략

 

한반도에서는 선조(1567-1608)를 승계한 광해군(1608-23)이 노련한 솜씨로 외교정책을 수행하여 조선이 여진족과 명나라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했다. 광해군은 수비 요충지들을 수리하고, 무기체계를 개량하고,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새로 도입하는 등, 조선의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광해군은 인조(1623-49)에 의해 쫓겨났다. 3 인조는 반 여진 친 명 정책으로 선회했다. 이기백(1984: 215)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만주족은 명과의 싸움을 벌리기 전에 조선조정의 정책전환에 의해 야기된 후방의 위협을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 太宗, 1627-43)는 한족 자문관들의 도움을 받아 집권을 했다. 1635년, 내몽골 부족들이 만주족 국가에 흡수편입 되었다. 4 북방 정벌로 흑룡강 유역 생여진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1635년, 홍타이지는 공식적으로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개명하고, 다음해 1636년에는 자신을 청나라 황제라고 선언했다. 

 

▲ Beijing under the Manchus was divided into eight sectors, each sector serving as the residential zone for one of the Eight Banners. Each zone was further divided into Manchu, Mongol, and Chinese banner neighborhoods.Elliott (2001: 103)

 

국명을 청이라고 바꾸기 전인 162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고, 조선 조정으로부터 후금을 형님으로 모신다는 형제의 맹약(兄弟之盟約)을 받아 낸 다음 철군을 했다. 자신을 황제라 칭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꾼 1636년, 홍타이지는 조선 조정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만주, 몽골, 요동한족 병사들로 편성된) 1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1637년,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명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조를 모시며, 명나라 원정을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고, 두 왕자를 인질로 보내겠다는 등의 서약을 했다.

 

청의 한반도 침략은 단기간에 끝장이 난 것이지만, 당시 청나라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서북지역은 황폐화 되었다. 한반도 사람들이 거란족이던, 여진족이던, 몽골족이던, 한족이던 간에 강자에 신복(臣服)하고 기민하게 사대주의 외교를 실천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세판단을 잘 못하고 강자에 대항했을 경우에는, 자발적이던 비자발적이던, 자세를 전환할 때까지 전국이 전화로 파괴되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특히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한반도 사람들에 의한 후방의 위협[後顧의 걱정거리]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주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 요동한족 팔기군: 몽골족을 작은 동업자로 동원

 

만주족은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 몽골족들을 종속적인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1635년,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동일한 형태로 [거란족을 포함하는] 몽골족의 팔기군을 편성했다. 5 만주 국경으로부터 감숙성에 이르는 지역의 모든 몽골족은 팔기제도에 흡수편입 된 것이다.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들은 자신의 부족을 지휘하면서 청나라 조정의 직위를 수여 받았다. 청조 지배자들은 각 몽골부족에게 지정된 목초지를 고정적으로 배정해 주고, 각각 별개의 동맹자로 관리하는 방법으로, 몽골족을 효과적으로 분열시키는 동시에 기동성을 제거했다. 6 청 왕조는 내륙 아시아의 변경지역을 지키기 위해 몽골 팔기군에 크게 의존했다. 여진족이 몽골 동맹군과의 동류의식이 강했던 것은 그들의 문화전통이 대체로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7

 

Ledyard(1983: 328)는 “만주족의 몽골족에 대한 태도나 정책은 다른 종족에 비해 훨씬 더 우호적이었다. 만주족은 몽골족을 자신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또 동료로서 협력을 구했다”고 말한다. Purdue(2005: 124)에 의하면, 만주족이 “몽골 귀족가문과 적극적인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두 종족간의 동맹관계는 한층 공고하게 되었다. 1612-15년 기간 중,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6명의 몽골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홍타이지는 12명의 딸들을 몽골 부족장들에게 시집을 보내, 결혼동맹 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163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漢族)을 동원해 2개의 한군기병(漢軍旗兵)집단을 만들었고, 1639년에는 4개로, 1642년에는 8개로 확장해, 그로부터 2년 후의 중국대륙 정복 개시를 위한 한족 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한족들은 대포를 주조하고 사용할 줄 알았으며, 소총사용의 경험도 있었다. 8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후, 많은 수의 한족들이 비옥한 요하 유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정착민들의 후예가 청나라 군대조직에 가담하여 한족 팔기군의 핵심을 구성했고, 여진족 청나라 지배자들이 전 중국을 정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9 고대 요동지역의 한족 정착민 후예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즉 요동한족 팔기군의 언어가 만주족 지배자들에 의해 북경으로 도입되어 후에 소위 만다린이라는 명칭으로 오늘날 중국의 공식상용어가 된 것이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1640년대 초까지, 병사들이 돌아가며 현역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등록을 하여 가족을 보호하며, 농토의 경작을 감독할 수 있는 세습적 사회-군사 조직을 제도적으로 완성했다. 팔기군 단위부대들은 전통적인 부족 단위로 조직이 되었지만 모두 개별적으로 황제 휘하에 소속되었다. 팔기병(八旗兵) 요원들은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의 세습적 계층으로부터 선발되어, 정복과 점령 목적을 위해 군사와 행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10 팔기병들은 전쟁 노획물을 분배 받았고, 평화시에는 쌀과 녹봉을 지급 받았으며, 팔기병 집단은 구성원 개인이 관료로 선발될 기회가 부여 된 인재 풀을 형성했다. 11 전형적인 팔기병을 군인-서기-관료 등 범 국가기능 요원으로 간주하는 정복 이전 시기의 이상(理想)은 정복 후에도 계속 청나라 교육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12 Elliott(2001: 348)은, 황제 한 명 만을 제외하고, 만주족 남녀노소 전원이 팔기조직에 속했다고 말한다. 13 팔기제도란 고도로 군대화 한 병민일체(兵民一體, 農兵一致)의 사회조직인 것이다. 

 

1643년, 청 태조는 동생 도르곤 친왕을 자신의 5살 난 (9번째) 아들의 섭정으로 세워놓고 급작스럽게 죽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은 북경을 포위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명장 오삼계(吳三桂)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으로 진군했다.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으로 구성된 청 군은 항복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해안을 따라 진군해 북경에 입성했다. 어린 황제는 순치제(福臨, 世祖 順治帝, 1643-61)라는 칭호로 제위에 올랐다. 순치제의 모친은 징기스칸의 후손이었고, 강희제(康熙帝, 1661-1722)의 할머니가 된다. 14 명 황족과 그 지지자들을 모조리 색출 처단하는 데는 그로부터 18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1662년, 명나라 후계자를 자칭하는 잔당이 운남에서 모조리 처형되었다. 

 

만주족은, 중국본토로 진입하기 10여 년 전에, 심양에 명 조정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주족, 몽골족, 한족 관리로 충원된 육부(六部) 설치했었고,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도도 도입했었다. 따라서 만주족이 북중국에 진입했을 당시, 만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식으로 통치를 할 준비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1648년 당시, 총 팔기군 중 만주족 팔기가 겨우 16% (1723년에는 23%), 몽골족 팔기가 8%, 그리고 나머지 4분지3은 모두 한족 팔기였다. 15 대다수의 한군(漢軍)팔기병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모두 구사했다. 요동한족 팔기군이 없었다면 명 제국을 정복한다는 것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16 

 

4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이 한족의 명 제국을 정복하고, 북경과 18개의 전략적 지방 요충지에 (소위 만주족 도시라는) 팔기 수비대를 설치하여, 팔기병들이 해당지역의 한족주민과 격리되어 가족과 함께 성안에 살수 있도록 주거지가 배정되었다. 17 Elliott (2001: 363)에 의하면, 정복 당시 (노비를 제외하고 정규 중대 만을 계산하여) 만주족 총인구는 대략 20.6만-39만 명 사이였고, 이들이 1억2천만 명의 한족 중국을 정복한 것이다.

 

만주족은 한족 모양 천치이던 불량배이던 장남이면 제위를 승계한다는 전통이 없었다. Elliott(2001: 356)에 의하면, 만주족은 “알타이 습속에 따라 가장 유능한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133년이라는 기간 동안,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2-36), 건륭제 (1736-96) 등, 세 명의 유능하고 근면한 황제들이 유교의 덕치를 내세워 신생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강희제는 몸소 유목민 원정을 지휘하며 전쟁터의 흥분을 즐겼다. 18 

 

▲ Hang-zhou

 

일찍이 몽골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오아시스 국가들과 달리(大理)를 정복하고, 티벹을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버마에 이르렀고, 베트남과 참파의 정복을 시도했었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몽골 정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과거 한(漢) 왕조와 당 왕조가 성취했던 것 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적 통일을 달성해 현대 중국에게 넘겨준 것이다. 1770년대 중반, 건륭제는 (타르바가타이 동쪽, 알타이산맥 서쪽의) 중가리아와 (천산산맥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신강 지역을 포함하는 중앙아시아의 정복을 완료했고, 이 모든 지역을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속 

 

▲ Jing-zhou (bottom) Elliott (2001: 109, 112)

 

받았다. 19 만주 땅 전체가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함된 것은 만주족에 의한 중국대륙 통치의 산물인 것이다.

1779년, 북경을 제외한 모든 만주족 수비대 도시에서 한족 팔기병이 모두 제거되었다. 20 오랜 기간에 걸친 한족 팔기병 제거 과정을 거쳐, 모든 팔기병은 마침내 만주족(혹은 몽골족)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Fairbank and Goldman(1992: 148-9)에 의하면, “공인된 존재로서의 한족 군대는 공격훈련을 받지 않고, 단지 우편물 배달 통로를 지키고 도적을 잡는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지방 군대(綠旗軍)뿐이었다.” 

 

만주족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6부(六部)는 만주족과 한족 등 2명의 장을 가지고 있었고, 각 지방에는 한족 지사들과 만주족 총독들이 있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유능한 한족관리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충성스런 만주족들이 감시를 하는 제도인 것이다. 21 Fairbank and Goldman(1992: 143 and 151)에 의하면, “만주족 지배자들은 통치제도의 일부로 만주어를 보존시키면서, 거란, 여진, 몽골족들의 관행을 답습 해, 한족이 볼 수 없는 만주어 서류를 작성했다.” 즉, 중요한 내용의 서류는 만주어로만 작성이 된 것이다. 만주족을 혼혈을 금지하고 한족과 만주족의 상이한 관습을 보호 해, 자신들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다. 만주족은 그들 자신 만의 고유한 종교적 관행을 유지했고, 사찰 내에서 무속인들이 제례를 지낼 때 한족의 참관을 금했다. 22 사냥과 말 타고 활 쏘는 훈련을 통해 무술의 우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만주 글과 말을 사용하여 문화적 차별성을 강조했다. 만주족 여인들은 발을 묵지 (纏足) 않았다. 만주족 황제들은 내몽골(承德=熱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사냥과 말 타고 활 쏘기를 통해 신체를 단련 했다. 23 

 

건륭제는 팔기병 에게 만주어와 군사기술을 철저하게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는 옛 만주족의 전통을, 말 타고 활 쏘는 무술 연마에 진력, 만주어를 말하고 쓰기, 샤머니즘, 근검절약, 조상숭배 등으로 정형화 했다. 건륭제는 “너희들이 사서삼경 고전을 배웠건 안 배웠건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24 여진족 금 왕조가 12세기에 송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건륭제 조정이 경축하며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만주족이 여진족 금나라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25 

 

청조 지배자들은, 온갖 노력에도 불고하고, 만주족이 중국화되는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국대륙을 정복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중국화와 민족 자멸을 의미했다. 19세기 말 이후, 전 만주대륙은 한족들의 대량 유입으로 매몰되었다. 오늘날 만주 총인구의 90% 정도가 한족이다. 26 중국대륙-몽골고원-만주라는 삼각지형에서의 진화과정은 외몽골과 한반도 만이 21세기 현재 동아시아 대륙에서의 독립적인 존재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청나라 역사를 포함한 전 중국역사를 오로지 한족(漢族)의 관점에서만 기술하는 관행

아주 전형적인 한족 중심의 중국역사 서술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청 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정치적 문화적 외형(外形)의 일부가 형성되었다; 청 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규제를 받았다; 청나라는 만주족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청 지배자들은 확립된 한족 가치관에 조화를 이루도록 조정을 개조했다; 청조의 황금시대는 청나라 지배자들 중 가장 유교적이고 가장 중국화된 건륭제의 치세이었다.”Crossley(1999: 3)에 의하면, 이러한 서술이 청나라 역사를 전공한다는 학자들 모두가 수용하는 기초적 상식이라는 것이다.  

 

명나라 황제들은 관료들에 대항 해 통치권을 장악하는 투쟁을 계속 했어야만 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했다. 만주족은 제국의 영토를 2배 이상으로 확장했다.  명나라의 13개 지역단위와 2개의 수도권역은 청나라 때 18개의 지역단위로 개편되어 “중국 본토”라고 불리는 내지를 구성했다. 만주, 몽골, 신강, 티벹, 대만 등은 비 한족관리 관할 하에 별도로 다스려 졌다. 정복 지배층은 상무전통을 고취하면서 제국을 통치했고, 중국화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흥했고 또 망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6 (2005. 8. 27.)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각주] 

1. Spence (1990: 27), Crossley (1997: 207), Barfield (1989: 253) 참조. 대략 150가구가 화살(矢)이라 부르는 중대로 조직되었고, 50개의 중대가 다섯 개의 연대, 즉 [7500 가구 규모의] 한 개의 기(旗)를 이루었다. 누르하치는 항복하거나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이 직할하는 세습적 초(超)부족 시기(矢旗) 군사계급으로 흡수 편입시켰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현(縣)과 향(鄕)으로 편성되어있다. 그러나 내몽골 자치구는 아직도 현을 깃발이라고 부르고 향을 화살이라고 부른다.

 

2. Spense (1990: 28) 참조. 

 

3. 이기백 (1984: 215) 

 

4. 홍타이지가 1935년에 막남(漠南) 몽골 찰합이부(察哈爾部)를 정복하고 전국옥새(傳國玉璽)를 획득하자 몽골 부족장들이 심양(瀋陽, 盛京)에 모여 홍타이지에게 몽골가한(蒙古可汗)의 칭호를 올렸다. 

 

5. Spence (1990: 30-31) 

 

6. Barfield(1989: 6)에 의하면, 몽골족 팔기군을 지휘하는 몽골 왕자들은 지정된 목초지를 이탈할 수 없는 일반 부족민들과 분리되었다. Jagchid and Symons(1989: 21)에 의하면, 청나라 지배자는 몽골 지배층에게, 귀족으로서의 신분, 세습적 권위, 청조에 대한 충성도 등을 기준으로 직위와 봉토를 하사해 주는 준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만주족은 봉토를 인위적으로 구획하는 정책을 통해, 초원지대를 작은 조각들로 분해시켰다. 봉토의 구획이 엄수되자 유목민의 강점인 기동성이 소멸되었다. 몽골 지배층은 청조로부터 좀더 큰 영향력과 보상을 얻어내기 위해 서로 경쟁을 했다.

 

7. Elliot (2001: 75)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21)에 의하면, 만주족은 전 중국의 통치를 공고히 해 가면서 자신의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몽골 지원군에 크게 의존했다. Purdue(2005: 126)에 의하면, 정복 진행 초기에 동부-남부 몽골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흡수편입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만주족이 후에 훨씬 서쪽에 떨어져서 독립을 유지해 온 적대적 몽골 부족들을 상대로 할 때 크게 도움을 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8. Elliot (2001: 77) 

 

9. Crossley(1999: 56)에 의하면, (옛부터 요하 주변에 정착해 살던 한족을 지칭하는) 니칸들은 청 제국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본래부터 만리장성 아래에 살던 한족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다. 1741년 이후, 청 조정은 니칸 출신의 한족 팔기군 병사들 대부분을 만주족 팔기군으로 전속시켰고, 그 이후의 한족 팔기군은 더 이상 한족 평민들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10. Crossley (1999: 287) 참조. 간부후보생들은 말 타고 활 쏘기에 능숙해야 할 뿐 아니라, 만주어나 몽골어로 시험 논문을 작성해 제출해야만 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한족 팔기병들은 점차 관리로 전환되었다. Crossley (1999: 288-9) 참조.  

 

11. Fairbank (1992: 146-7) 

 

12. Crossley (1997: 127) 

 

13. 하지만 팔기병의 지위를 포기하면 상업이나 육체 노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14. Crossley (1997: 76) 

 

15. Fairbank and Goldman (1992: 146) 참조. Elliott(2110: 364)에 의하면, 1648-1720년 기간에 전체팔기군 중 한족 남자가 13만3천에서 60만으로 증가한 반면, 만주족 남자의 수는 대략 16만에서 45만으로, 몽골족 남자는 8만4천에서 18만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계된다. 여성과 노비를 포함하면, 팔기의 총인구는 1648년의 1백90만 명에서 1720년의 3백70만 명으로 증가한다.

 

16. Spence (1990: 41) 

 

17. Elliott (2001: 348, 364) 참조. 

 

18. Fairbank and Goldman (1992: 147-8), Purdue (2005: 188), Barfield (1987: 285) 참조.

 

19. 동쪽의 몽골족들은 만주족에 협력하면서 하나의 국민으로 그 존재를 유지 해, 20세기에는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서쪽 몽골족들은 사납고 용맹하게 청나라에 저항을 하다가 인종 말살의 비운을 맞았다. 중가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Purdue (2005: 286) 참조.

 

20. Elliott (2001: 351) 참조. 

 

21. Fairbank and Goldman (1992: 148-149) 참조. 

 

22. Spence (1990: 41) 

 

23. 청 조정은 티벹 불교의 일파인 황색 라마교가 몽골족 사이에 유포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Jagchid and Symons(1989: 21)에 의하면, 청나라 후기에 들어서면 만주족의 몽골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되기 때문에, 군복무를 위한 몽골족 주민등록이나, 티벹 불교 사원에 대한 정부 정책이 완화되었다. 완화되었다. 불교의 유행으로 몽골 남자들의 절반 가량이 속세를 떠나 라마가 되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갔다. 유목생활로부터 몽골족의 이와 같은 대량 이탈은, 후손을 없애고 군사적 경험을 없앴기 때문에 중국본토에 대한 몽골군 위협의 부활 위험을 크게 감소시켰다.

 

24. Crossley (1999: 307-9) 

 

25. Elliott (2001: 355) 

 

26. 만주 총 인구는1891년에 2천2백60만 명, 1942년에 4천6백80만 명으로 추계된다. Gottschang and Lary (2000: 172-3) 참조. 1990년에 와서는 만주 총인구가 1억을 초과 했고, 내몽골 북변에도 1천만 명이 살고 있다. 1990년 현재 만주족으로 등록된 주민은 1천만 명 정도에 불과하고, 조선족으로 등록된 주민은 2백만 정도가 된다, Janhunen (1996: 39, 43. 47) 참조.

 

 

7. 만주족 청나라의 강역을 물려받은 중화인민공화국

  •  홍원탁
  •  승인 2005.09.07 00:00

 

손문은 「만주족과 한족(漢族)은 한 가족」이라는 청 왕조의 구호로부터 영감을 받아 「5족 한 가족」(五族 共和)을 제안했던 것 같다. 손문은「국가적 통일이란 한족, 만주족, 몽골족, 이슬람족, 티벳족들이 사는 지역이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이들 5족이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5족이란 건륭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鑒)의 5개 언어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만주족 본고장을 비롯해 청 나라가 정복하고 지배 했던 모든 영토와 종족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다음, 「많은 민족들이 함께 뭉친 국갯라 천명을 하고, 55개의 모든 소수민족들을 평등하게 대해줄 것을 약속하면서, 통일다민족국가(統一多民族國家)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청 왕조는, 만주족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국가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중국 인민, 중국 국가, 중국의 영토 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 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궁극적으로 모두가 중국화될 것을 확신하면서, 한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가족 개념의 새로운 정의를 시도했다. 현대 중국이 중화(中華)라는 이름 아래, 많은 지역과 많은 인종들이 화합하여 통합된 국가라는 신화(神話)의 기초는 268년에 걸친 만주족 정복왕조의 통치가 남긴 영토와 인종적인 유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요하 유역에 정착한 한족들이 사용하던 중국어 방언이 귀에 익은 청 지배자들에 의해 북경관화(北京官話) 역할을 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표준 중국어(普通話)가 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에 괴뢰 만주국을 세웠고, 1934년 에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만주국 황제로 앉혔었다. 현대 일본 역사가들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벌린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일본이 (1644년의) 만주족 정복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행위로 간주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만주족 청나라의 강역을 물려받은 중화인민공화국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하나의 가족 
                                                              
 

홍원탁 (서울대 명예교수) 

3극 분석 틀의 끝  

 

청 왕조는, 1839-42년의 영국을 상대로 한 아편전쟁으로부터 1846-8년의 홍수와 기근에 뒤따른 1851-64년의 태평천국(太平天國) 봉기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한족 농민 반란과 밖으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외세의 침탈에 압도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청은, 외세의 도움뿐 아니라, 관군을 도우면서 자신과 주변 백성들의 가정과 전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한족 신사(紳士)계급이 조직한 향용(鄕勇, 團練)이라는 민병대 덕분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1 내우외환의 와중에서 소위 천하무적이라는 만주 팔기군의 명성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국가보위를 담당하던 팔기군 뿐만이 아니라 치안을 담당하던 한족 녹기군도 제대로 대처를 할 능력이 없었다.

 

젊은 서태후(西太后) 섭정 치하 북경의 만주족-한족 새 지도층은 서구열강과의 다분히 치외법권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체제(條約體制)를 수용하고, 지방의 보수적인 한족 신사-장군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택해,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청 왕조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현대식 무장을 갖춘 각 지방의 신식군대 존재는, 더 이상 농민반란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명치유신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무지하고 반계몽주의적인 서태후는 서구의 기술과 제도의 도입을 방해하였다. 청 조정은 근대적인 중앙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서구화는 한족 세력이 지배하는 지방정부 손에 맡겨진 셈이 되어, 만주족 조정을 수세에 몰리도록 만들었다. 3 결국은 청의 지배자들이 국가 통제력을 상실했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찢겨져 나갔다.  

 

1894-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중국 본토와 한반도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청 조정은 일본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를 만주로 끌어들였으나, 일본은 1905년에 노일전쟁에서 승리했고, 남만주와 한반도를 모두 점거하게 되었다. 

 

장개석(蔣介石)은 청 왕조를 몰락시킨 1911년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4 원세개(袁世凱, r.1912-16)는 1911년에 청 황제의 퇴위를 혁명세력과 협상 하면서 초대 총통으로 등장한다. 5 장개석은 제위에 오르려는 원세개를 축출하기 위한 3차 혁명에도 참여하였다. 6 원세개는 1916년에 망명을 준비하던 중, 만성 피로와 요독증(尿毒症)으로 사망했다

 

“만주족과 한족은 한 가족”이라는 청 조정의 구호(口號)  

 

손문은 1912년부터 다민족의 국가적 통합을 주창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족과 한족은 한 가족”이라는 청 왕조의 구호로부터 영감을 받아 손문이 “5족 한 가족”(五族 共和)을 제안했었을 수도 있다. 손문은 “국가의 뿌리는 국민이며, 국가적 통일이란 한족, 만주족, 몽골족, 이슬람족, 티벳족들이 사는 지역이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이들 5족이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7 

 

Elliott(2001: 359-60)에 의하면, “5족 공화”는 청조가 자기들이 세운 제국을 정의한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 한 것이며, 여기서 5족이란 건륭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鑒)의 (만주어, 티벳어, 몽골어, 위구르어, 한어) 5개 언어에 상응하는 것이다. 후에 장개석은 아예 “5개 종족”의 존재를 부인하고 “다섯 인민”이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1918년에 손문의 국민당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손문의 주된 관심사는 군벌들이 분할 점거한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있었다. 손문은 당시 장군 계급을 가진 장개석을 1923년에 모스크바로 보내 적군(赤軍)을 연구하도록 했다 장개석은 레닌과 스탈린을 만나보지 못했으나, 트로츠키를 만났고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장개석은 귀국하자, 광주에 소비에트 방식을 모방해 설립된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당 군대를 조직하였다. 스탈린은 이 학교의 운영자금을 지원하고, 적군 장성들을 군사 고문관으로 파견하였으며, 장개석이 혁명군 총사령관의 지위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고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하는 1927년까지 장개석을 지원하였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국민당을 지원하여, 또 나중에는 공산당을 지원하여 사회혁명을 실현하고자 했다. 군벌 타도를 위해 장개석이 벌린 대대적 전쟁은 군벌시대(1916-27)를 종식시켰다. 1928년, 장개석은 남경에 수립된 신생 중앙정부의 총통이 되었다. 8 

 

1925년에 손문이 죽자, 장개석은 국민당 당수로서 그를 계승하였고, 곧이어 공산당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농촌 지역으로 물러가 홍군(中國工農紅軍)과 소비에트 정부를 조직하였다. 1931년, 장시(江西)에 모택동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당 소비에트 지구가 수립되었다. 장개석은 공산당에 대해 전면적인 토벌전쟁을 재개하려 했으나, 1932년의 일본군 만주 침략(만주사변)은 모택동에게 숨쉴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9 

 

일본에 의해 세워진 만주 괴뢰국 

 

일본은 노일전쟁에 이기고 나서 제정 러시아로부터 남만주철도의 운영권과 요동반도의 조차지를 넘겨받았다. 일본 관동군의 참모 장교들이 심양에 있는 중국군 수비대를 공격할 계략을 꾸며, 1931년 9월에 습격을 감행했다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점령하고, 1932년에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1933년에는 열하성(熱河省)을 합병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 r.1909-12)를 만주국 황제로 앉혔다. 10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으나, 장개석은 공산당과 먼저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장개석과의 계속된 전쟁에서 패하자, 모택동은 1934년 10월에 20만 명의 군대와 함께 중국의 남동부를 탈출하여, 소위 1934-5년의 대 장정(長征)에 올라, 북서쪽 산악지대에 위치한 연안(延安)으로 퇴각했다. 공산당 군대는 남중국에서 산시성(陝西省) 북부까지 6천 마일을 이동했던 것이다. 11

 

일본 역사가들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벌린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일본이 (1644년의) 만주족 정복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행위로 간주한다. 12

 

청나라의 유산: 다 인종 통합국가로서의 중화인민공화국 

 

대장정 이후, 공산당은 농촌지역의 농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공산주의 운동의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로 등장했다. 모택동은 무산계급보다는 농민을 혁명의 전위대로 내세웠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 군대는 장개석의 군대와 협력하여 함께 싸웠으나,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장개석의 지휘를 거부하였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내전이 벌어졌다. 1949년 4월, 모택동은 남경의 국민당 정권을 축출했고, 장개석 군대는 대만으로 달아났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만주족 본고장을 비롯해 청나라 지배자들이 정복한 모든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고, 티벳은 자신의 정복노력으로 보존하게 되었다. 13 중화인민공화국은 “많은 민족들이 함께 뭉친 국갚라고 천명하고, 55개의 모든 소수민족들을 평등하게 대해줄 것을 약속하면서, 통일다민족국가(統一多民族國家)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14

 

청 왕조는, 만주족 자신들이 분명하게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국가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중국 인민, 중국 국가, 중국의 영토 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 했었다. 청나라가 지배하던 바로 그 인민들이 오늘날의 중국 인민들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궁극적으로 모두가 중국화될 것을 확신하면서, 한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중국 인민, 현대의 중국이라는 국가, 중국의 영토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했다. 

 

Elliott(2001: 361)에 의하면, 현대 중국의 국가적 신화(神話)는 중국이 “중화라는 이름 아래, 많은 지역과 많은 인종들이 크게 화합하여 통합된” 국가라는 것이고, 이 신화의 기초는 “300년 가까운 만주족 정복왕조의 통치가 남긴 영토와 인종적인 유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 

 

[표준 중국어, 보통화] 만다린은 만주어로도 간주될 수 있다!  

 

중국어의 초기형태는 한장어(漢藏語) 계통에 속하는데, 단음절 형태소 구조, 성조(聲調)의 구별, 어형변화 부재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 반면, 알타이 계통 언어는 다음절 형태소, 성조의 부재, 고도로 발달한 어미변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15 그러나 청조 268년(1644-1912)간의 중국 본토 지배는, 만주어의 중국화를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어의 알타이어화 역시 촉진했다.  

 

 “만다린, 만주족의 언어: 얼마나 알타이적이냐?”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논문에서 오카다는 “청(淸)대의 북경 만다린 방언은 고도로 알타이어화 된 중국어”라고 주장한다. 16

 

알타이어 유형을 가진 북중국 방언의 존재는 명나라(1368-1644) 훨씬 이전 시대에도 발견된다. 청조는 요하 유역에서 사용되던 북중국 방언을 북경으로 가지고 와 북경관화(北京官話) 역할을 하게 했다. 만다린은 만주족과 한족 팔기병들이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언어 매체였다. 17  북중국 만다린 방언은 명백히 알타이어의 형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상이한 종족들을 융합하는 팔기제도를 통해 세련된 언어 형태가 된 것이다. 만다린은 알타이어의 기층 위에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다린은 오늘날의 한장어(漢藏語) 중에서 음절 안에서의 소리 높이 차이가 가장 적고, 다음절의 단어가 가장 많으며, 어미변화와 알타이적 문장구조를 가진 언어다. 18 이러한 구조적인 전환을 중국어의 알타이어화라고 말한다. Janhunen (1996: 164-8)은, 약간 과장을 한다면, 만다린을 만주어로 간주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7 (2005. 9. 3)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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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1862-74년 기간을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칭함. 청대 지배계급 중 신사(紳士)는 퇴직 관료, 과거(科擧) 혹은 학교를 통해 학위를 얻어 부와 명예를 소유한 향촌(鄕村) 사회의 특수 구성원을 지칭한다.  

 

2. Fairbank and Goldman (1992: 213) 참조. 

 

3. 전계서 (1992: 213) 참조. 

 

4. 장개석은 1887년에 절강성 염상(鹽商)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6년에 화북에 있는 (원세개가 지원 하는) 보정(保定)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에 일본 동경에 위치한 사관학교에 (청 정부가 중국학생의 학비를 부담해 준 덕분에) 유학을 하였다. 1909-11년 기간 중 일본 북부의 일본군 야포 연대에 근무했었다. 1911년, 부대를 이탈하고 배편으로 상해에 돌아와 혁명에 참여하였다. 

 

5. 원세개는 1859년에 하남성(河南省) 군인 지주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직예총독(總督, 수도 지역 2-3개의 省을 관할)과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된 최초의 한인이다. 그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어떠한 학위(學位)도 없었으나, 서태후가 죽는 1908년까지 그녀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다. 원세개는 이홍장(李鴻章)의 휘하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부대는 1882년에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되었었다. 원세개는 1885년에 한성의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되었고, 그의 활동은 청일전쟁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원세개는 귀국 후 새로이 설립된 신군(新軍)의 훈련을 맡았다. 

 

6. 신해(辛亥)혁명을 1차 혁명, 송교인(宋敎仁) 암살과 대차관(大借款) 응징을 2차 혁명, 반제제(反帝制) 운동을 3차 혁명이라 부른다 

 

7. Elliott (2001: 359) 참조. 

 

8. 1927년 12월, 장개석은 상해의 재벌인 송가수(宋嘉樹, 세레명은 Charlie Soong)의 셋째 딸 미령과 결혼하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미령(宋美齡)은 1899년에 상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작은 언니는 손문의 부인 경령(慶齡)이었다.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은 군권, 정치권, 금권의 결합이었다. 송미령은 웰슬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영어에 능통하여, 서방 세계에 장개석의 정치적 신조를 홍보하는 글을 많이 썼다. 그녀는 중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리고 여자로서는 두 번째로, 1943년에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였다. 송미령은 그 후 20여 년간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10명의 여성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9. 모택동은 1893년에 호남성의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에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군에 가담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 교사와 북경대학 도서관의 조수로서 일했다. 모택동은 1924-25년 기간 중 공산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0. 1940년대 초 만주국의 인구는 4천 3백만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그 중에는 (1920년대 말의 80만 명으로부터 크게 증가한) 약 2백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11. 고려공산당은 화북의 중국공산당 운동에서 동맹상대를 찾았으나,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3000명 규모의 광복군을 가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협조하였다. 일본은 1944년까지 한국인의 16%(약 4백만 명)를 한반도 밖으로 내 보내 일본의 전쟁 수행 목적에 동원했다.  Eckert, et al. (1990: 322) 참조 

 

12. Fairbank and Goldman (1992: 312)  

 

13.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마자, 티벳인들은 그들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20여년에 걸친 독립투쟁은 1969년에야 인민해방군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던 것이다.

 

14. Elliott (2001: 160) 참조. 

 

15. Ostler(2005: 138)에 의하면, 알타이 계통 언어의 어휘는, “최소한 명사와 동사들은, 짧은 음절들이 연결되어 만들어 지는데, 모음조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 어미의 모음은 어근의 모음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어순을 보면, 동사가 문장의 맨 끝에 온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단음절에 성조를 가지고, 단어를 구성할 때 음절을 모으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동사가 문장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는 어순을 가진 중국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16. Okada Hidehiro, Aetas Manjurica 3 (1992), pp. 165-87. Elliott (2001: 101 and 414)와 Mantarō Hashimoto, "The Altaicization of Northern Chinese," in J. McCoy and T. Light, eds., Contributions to Sino-Tibentan Studies (Leiden: E. J. Brill, 1986), pp. 76-97을 참조. 

 

17. Janhunen(1996: 167)에 의하면, 만다린은 어느 정도 혼합된 유형의 혼성언어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다린의 초기 역사를 보면, 사용자들 대부분이 실제로 한족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만주족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제 2 외국어로서 만다린은 북방 유목민족과 한족간의 의사소통에 쓰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에 거주하는 거란족, 몽골족 등 다른 종족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다. 종족간에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만다린이 필요 했던 첫 번째 지역 중에 하나는 요동반도였다. 그 지역의 조선어, 여진어, 거란어, 몽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중국어 이외에는 다른 공통 언어가 없었다. 청 왕조의 확장과 더불어 요동지역의 만다린 방언이 북경지역으로 옮겨 온 것이다. 

 

 18. Ostler(2005: 145)는 “만다린은 몽골어와 만주어처럼 워먼(我们, 너를 제외한 우리)과 쟌먼(咱们, 너를 포함한 우리)을 구별할 수 있으며, 자음이 연속해서 나오는 현상이 없다. 알타이어 역시 음절을 시작할 때 자음을 한 개 이상 가질 수 없으며, 단독적으로 작용하는 단음절들이 뭉쳐져서 긴 단어를 만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Ostler(2005: 146)는 또, 만다린에서는 “직접 목적어가 동사 앞에 오는 경향이 있으며, 비교형용사 앞에 「~~보다」 라는 구절이 오는데, 이것도 알타이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8. 한국전쟁 : 양극체제 세계의 변두리에서

  •  홍원탁
  •  승인 2005.09.12 00:00

 

김일성이 남침결정을 하게 만든 요인(要因)은 1949년 6월의 미군철수, 중국본토에서 공산당의 승리, 한국이 미국 방어선 밖에 있다는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의 성명 등이라 한다. 박헌영은 남침개시 즉시 자신의 추종자 20만여 명이 봉기를 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김일성 역시 일단 철수한 미군이 한반도로 되돌아올 시간여유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빨리 끝나리라고 믿었다 한다.

 

김일성은 이승만 정부 요인(要人)들의 식민지 시절 친일 성향을 강조해 남한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미 제국주의자에 의한 식민지 노예화 위험성과 민족지상주의를 선전하여 미국과 미군을 남한 국민들 마음속으로부터 격리시키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당시 남한의 언론, 영상매체, 교육현장 등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친일파 실태를 철저히 파악해 홍보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또, 미국 내에 혐한(嫌韓) 감정을 확산시킬 수단도 없었고, 남한 정부가 반미 정권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군의 참전을 저지할 내부적 수단도 없었다.]) 

 

김일성은 일찍이 1949년 3월에 스탈린에게 남침 가능성을 타진했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택동의 승인을 얻으라는 단서를 달아 남침을 승인했다. 김일성은 남침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까지 평화적 통일을 제안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 하다고 믿었지만, 유럽이야말로 결정타를 날리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믿고 있었다. 7월 1일에 미군이 상륙하자, 스탈린은 7월 4일자로 김일성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소련의 직접적 연관 흔적을 제거했다. 그 날부터 김일성이 UN군과의 전투를 책임지다가, 북한군은 괴멸되었고, 10월 24일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지휘권을 이양한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진행을 조심스럽게 조작해서, 모택동이 미국으로 하여금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병력을 이동시키게 만드는 부담을 혼자 지도록 하는 동시에, 모택동을 서방과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모조리 태워버리려 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한국전쟁: 양극체제 세계의 변두리에서 


서울대 명예교수 홍원탁 

 

일시적인 다극(多極)의 세계 

 

1853년, 미국 해군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일본 해안에 진입해,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게 개국을 강요했다. 일본국민은 쇼군(將軍)을 쫓아내고 새삼 황실의 권위 아래 단결하여 명치유신(1868-1912)이란 이름으로 서구화-공업화를 시작했고, 서구열강의 식민지 제국주의를 모방하면서 청일전쟁(1894-5)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3년, 제정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반도 39도선 이남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인정 해 줄 테니 39도선 이북은 중립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제안을 거절한 다음 러일전쟁(1904-5)에 승리하여 조선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유사이래 정복왕조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은 1910년에 일본에 병탄합병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 지역에서 일본인 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1943년 12월 1일,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이 적절한 단계를 거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양극(兩極) 세계의 변두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8월 초,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양국 군대의 한반도 점령지역 경계선으로 설정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UN 주관 하에 선거가 시행되었다.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73세의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 스탈린은 같은 해 9월 9일에 33세의 김일성을 수반으로 북한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2

 

1949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 가능성을 타진했다. 김일성은 공격이 시작되면 (남조선 공산조직의 지도자 박헌영이 말 해준대로) 즉시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며 스탈린을 설득하려 했다. 1949년 4월, NATO가 결성되었다. 스탈린은 원칙적으로 김일성의 발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미군이 6월에 남한에서 철수를 한 후에도 계속 김일성에게 게릴라 전을 전개하라고 종용했다. 3 6월과 9월 사이, 김일성은 남한에서 진행 중인 게릴라 전을 강화하기 위해 특수 훈련을 받은 1,200명의 전투요원을 내려 보냈으나, 대부분의 게릴라 조직은 남한 군대에 의해 소탕되었다. 4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생각이 아니라 김일성의 생각" 

 

후루시초프는 그의 회고록(1971: 400-1)에서 말한다. 

"1949년 말, 김일성은 스탈린과 협의를 하기 위해 수행원 일단과 함께 도착했다. 북한인들은 남한을 총칼로 찌를 것을 원했다. 김일성은 한번만 찌르면 남한이 내부적으로 폭발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의 발상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시 한번 잘 검토를 하고 계산을 좀 해 본 다음에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오도록 설득했다" 5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널 신문기자 클럽에서 미국은 군사적 공격이 있을 경우 일본-오키나와-필리핀 이외 지역에 대해서는 보증을 하지 않을 것이란 연설을 통해 한국이 미국 방어선 밖에 있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4월 중, 김일성은 남한 공산조직의 지도자였던  (1946년에 월북 후 북한 副首相 겸 外相) 박헌영과 함께 또 다시 모스크바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스탈린이 모택동의 승인을 얻으라는 단서를 달아 남한 침공을 승인했다. 6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1-2)에서 말한다.  

"김일성은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계획을 완전히 수립한 다음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스탈린이 그렇게 분명하게 확신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탈린은 미국이 뛰어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김일성은 전쟁이 재빨리 승리로 끝난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김일성의 제안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모택동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제안을 승인하면서, 이번 전쟁은 국내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소련은 이미 상당기간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필요한 양의 탱크, 대포, 소총, 기관총, 공병장비, 대공포 등을 제공받을 것이 분명했다" 

 

서대숙(1988: 112, 121)에 의하면, 김일성이 남침 결정을 하게 만든 핵심 요인들은 △미군철수 △중국본토에서의 공산당의 승리 △애치슨의 아시아 미 방위선에 대한 성명 등이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 개시 즉시 자신의 추종자 20만여 명이 봉기를 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김일성 역시 일단 철수한 미군이 한반도로 되돌아올 시간여유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빨리 끝나리라고 믿었다. 

 

김일성은 이승만 정부 요인들의 식민지 시절 친일 성향을 강조해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지 노예화 위험성과 민족지상주의를 선전하여 미국과 미군을 남한 국민들 마음 속으로부터 격리시키려 노력했다. 미군은 1949년 6월 29일에 철수를 완료했었다. 김일성은 1949년 6월부터 남침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까지 평화적 통일을 제안하고 있었다. 7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비행기, 중형 대포와 전차 등을 제공해 왔고, 모택동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되어 있던 약 4만 명의 고참 한국인 병사들을 김일성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8 1950년 5월, 스탈린은 세부적 침공계획을 수립하고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새로운 팀의 소련군 장교단을 파견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중무장을 한 20만 명의 북한군은 가볍게 무장을 한 10만 명의 남한 군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1-2)에서 말한다. 

"나는 그 전쟁이 스탈린의 생각이 아니라 김일성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김일성이 벌린 것이다. 물론 스탈린은 김일성의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부추긴 것을 책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김일성의 성공을 바랐고, 투쟁에 승리할 날을 고대하며 북한 지도자들에게 축배를 들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1964: 328, 330)에서 말한다. 

"남한은 38도선을 따라 4개의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남한 군대는 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군대로서가 아니라, 치안유지 병력으로 조직되고 장비되어 있었다. 그러한 결정은 미국 국무성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말인즉, 남한이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다" 9 

 

1949년 8월, 소련의 원폭장치 폭발은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에 종말을 고했다. 곧이어 장개석이 중국본토에서 축출되었고, 프랑스가 베트남과의 전투에서 밀리고 있는 인도차이나 국경지대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호치민 정권을 인정하라고 설득했다. 10 영령 말라야와 친미 필리핀에서는 공산 반군들이 압력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옴으로 한반도는 전세계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2-3)에서 말한다. 

"김일성이 진군을 준비할 때, 스탈린은 북한군 사단과 연대에 배치되어있던 소련군 고문단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내가 스탈린에게 그 이유를 묻자, 스탈린은 내게 화를 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우리 고문단을 거기 놓아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 줄 아느냐? 포로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이 일에 개입되었다고 추궁 받을 증거가 생기면 안 된다. 이 전쟁은 김일성의 사업인 것이다' … 정해진 시간이 왔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침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북한군은 재빨리 남쪽으로 쓸어내려 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첫째 번 총성과 동시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실각될 것이라는 김일성의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11 

 

미 8군 휘하 제24사단의 스미스 중대가 7월 1일 선발대로 부산에 상륙을 했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싸우기를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에, 7월 4일자로 김일성을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과 소련의 직접적 연관 흔적을 제거했다. 6월 25일에 남침을 개시한지 10일이 지난 7월 4일에 비로서 최고사령부가 조직되고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최용건이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날부터 110일간 김일성은 UN군과의 전투를 책임지다가, 북한군은 괴멸되고, 10월 24일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다. 

 

트루만은 유화정책이 공산침략을 조장할 뿐이라고 믿었다 

트루만은 재빨리 행동했다. 미군의 파견을 승인하고, 6월 28일 자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의 유엔군 파병 결의안을 얻어냈다. 12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에 한강 전선을 시찰했고, 7월 1일에는 미군의 첫 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7월 14일,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군과 미군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다. 장개석은 대만의 정부군을 유엔군에 참여시키라는 제안을 했다. 세계는 아시아판 Dunkirk 대규모 철수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23일, 맥아더(1964: 346)는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냈다. 

"9월 중순, 적 후방에 2개 사단 병력으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다. 남쪽으로부터 8군의 공격과 연계하여 적군을 포위 섬멸할 목적이다. 나는 초기 단계에서 강력하게 적 후방을 공격하여 주 보급로를 차단시키면 적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철퇴를 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 방법을 택하지 않고 정면 공격을 택한다면, 전투가 길어지고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9월 15일, 맥아더의 천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전세를 역전시켰고, UN군은 북으로 진격했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꿈을 완전히 무산시킨 인천상륙 작전과 맥아더에게 천추 유한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중공군에게 공군의 엄호를 제공하고, 중공군이 패하게 되면 소련이 직접 개입한다고 약속을 하면서 모택동에게 김일성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13

 

흐루시초프는 회고록(1971: 405)에서 말한다.  

"주은래가 모택동의 지침을 받고 스탈린을 보러 날아왔다. 당시 북한군은 거의 괴멸되었다. 주은래는 미군과 한국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을 북한 땅으로 진입시켜야 하는가를 스탈린에게 물었다. 그들은 중국이 북한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 합의를 했다. 인민해방군은 이미 국경지대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스탈린과 주은래는 이정도 병력이면 사태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주은래는 다시 북경으로 날아갔다"

 

공산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전쟁 

 

스탈린은 공산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에 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 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마지막 결전의 때와 장소를 자신이 결정하기를 원했다. 김일성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일본을 침공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지만,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소련과 미국 사이의 주 전장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스탈린은 유럽이 10년-20년 이내에 세계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결정타를 날리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믿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진행을 조심스럽게 조작해서 모택동이 미국으로 하여금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병력을 이동시키게 만드는 부담의 대부분을 혼자 지도록 하는 동시에, 모택동을 서방과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모조리 태워버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4 

 

1950년 10월 19일, 약 20만 명의 '인민 의용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15 11월 25일, 모택동의 장남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11월 29일, 맥아더는 빠른 시일 내에 장개석의 군대를 UN군 사령부 산하로 편입시킬 것을 제안하는 전문을 보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을 또 다시 빼앗겼다. 소련 공군은 1951년 1월 10일 이후에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16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받았다.  

"앞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한국 밖으로 쫓아 내보낼 수 있을 충분한 규모로 전선에 대규모의 군대를 집결시킨다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조건 하에서는 귀관에게 일본으로 철수를 시작할 것을 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시 모택동은 한국군을 섬멸하고, UN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다음, 그 후임으로 1950년 12월 26일 자로 8군의 지휘를 맡은 리지웨이 장군은 방어선을 안정화 시키고 제한적인 규모나마 공격을 시작했다. 17 1951년 4월부터 6월까지 70만 명을 동원한 제5차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모택동은 한국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탈린은 12개 항공사단을 번갈아 가며 만주에 주둔시켰다. 전쟁 후, 소련 공군 사령관은 한국전쟁 중, 단 345대의 소련 전투기 손실로 1,300대의 미군 비행기를 격추시켰다고 자랑을 했다. 18 

 

후르시초프는 회고록(1971: 406)에서 말한다.  

"중국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그냥 의용군을 한반도로 보냈다. 이들 군대는 모택동이 가장 중히 여기는 팽덕회가 지휘를 맡았다. 팽덕회는 상황보고에서, 적군을 포위와 치명적인 측면 공격으로 아주 끝장을 내버릴 수 있다고 단언했다. 불행히도 말처럼 그렇게 빨리 끝이 나지 않았다. 중공군은 여러 차례 대규모의 패배를 당했다. 전쟁은 질질 끌어가기 시작했다. 양측이 참호를 파고 들어 앉아버리자, 전장에서는 점점 더 사상자 수가 커지기 시작했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 같았다" 

 

맥아더는 회고록(1964: 384)에서 말한다.  

"나는 중공군을 한국에서 섬멸할 장기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 결정적 목표물은 그들의 보급로이다. 나는 적의 주요 보급로 전역에 걸쳐 방사능 폐기물을 뿌려 한국을 만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다. 지금 오고 있는 미국의 증원군과, 대만의 국민당 군대로 보강을 한 다음, 북한의 북쪽 끝 양쪽 해안으로 상륙과 공중낙하를 동시에 실시할 것이다" 

 

1951년 3월 중순, 유엔군은 38도선에 도달했다. 맥아더는 냉전이 한국전쟁에서 이기든지 지든지 결판이 나리라고 믿었다. 그는 만주를 폭격하기를 원했고,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한국에서 사용할 것을 원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가 (영국의 처칠 수상이 반대하는) 전쟁확대를 계속 고집한다는 이유로 유엔군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시켰다.

 

1951년 6월 10일에 시작된 휴전협상은 질질 끌기 시작했다. 1952년 9월 8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독립을 회복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휴전협상에서 마치 승전국인 양 행동을 했고, 소모적 전쟁은 계속되었다. 19 

 

휴전협상을 촉진키 위한 핵전쟁 위협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찍이 맥아더의 부관 노릇을 했었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버린 한국전쟁을 가능한 한 최단 시일 내에 종결시킨다는 암묵적인 공약을 하고 195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아들 잔은 당시 한국전에서 중위로 싸우고 있었다. 1월 달에 취임한 후 한달 도 채 안되어, 아이젠하워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핵폭탄 사용 선택권을 거론했다. 당시 미국은, 필요하다면 3차 대전을 치러도 충분하다고 판정되는 수량인 1,161개의 핵폭탄을 제조, 보유하고 있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조속히 종결시키도록 유도하기 위해, 인도의 네루 수상을 통해 모택동에게 핵폭탄 사용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북쪽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2만 6,930명의 반공 포로들을 1953년 6월 18일 날 석방해, 휴전협상을 방해했다. 20 1952년 5월에 릿지웨이 후임으로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클라크 장군은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테타 계획을 세웠다. 1953년 7월 4일, 공산측 협상 대표들은, 포로들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을 한다는 방침에 동의했다.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 등을 포함한 미국측의 주요 양보 제안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휴전협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은 조인되고 즉시 이행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8 (2005. 9. 10.)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받았고, 1894년에 서울의 메소디스트 계통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를 배웠다. 1896년, 왕정을 개혁하고 일본의 식민지 야욕을 추방하려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다가 (일반 선거로 의회를 구성한다는) 정부 전복 죄목으로 1898년에 투옥되었다. 1904년에 출옥하자,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George Washington 대학에서 인문사회 계통의 공부를 하여 1907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Harvard 대학에서는 국제관계와 역사 공부를 하여 1908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Princeton 대학의 정치학과에서는 국제법을 전공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Woodrow Wilson 대통령 집안과는 Princeton대학 총장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1910년에 귀국하여 잠시 YMCA의 일을 보고, 중학교 교장 노릇을 했다. 1912년, 일제 식민지 당국의 체포 위협 때문에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스승이었으며,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Woodrow Wilson을 보고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청했지만, Wilson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국제적 간섭이 부적절하다는 말을 들었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고, 1920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Burton I. Kaufman (1999: 101) 참조. 


2. 스탈린은 1879년에 조지아에서 태어나, 레닌 사망 후, 1924년에 집권을 했다. 김일성은 1912년에 태어났고, 1919년에 가족 모두가 만주로 이주를 했다. 1932년에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김일성은 항일 게릴라 운동에 가담했다. 후에 일제가 게릴라 박멸 작전을 전개하자, 1939년(혹은 1940년)에 소련의 극동지역으로 건너가 소련군 대위로 한국인 부대를 지휘했다. Goncharov, Lewis, and Lita ( 1993: 131) 참조. 
      
3. 소련 정부가 1949. 9. 24일 자로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훈령: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하는 현 시점의 임무는, 첫째로 빨치산 운동을 개발하고, 해방 지구를 만들어 내고, 반동 정권을 쫓아내 한국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전반적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둘째로, 인민군을 모든 면에서 좀더 강화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 할 것이 요구된다.” Kaufman (1999: 119) 


4. Stueck (1995: 30-31) 참조. 서대숙(1988: 121)에 의하면 1949년 9월부터 1950년 3월까지 3,000명 이상의 게릴라들이 남파되었다. 


5. Nikita Khrushchev, Khrushchev Remembers, commentary by Edward Crankshow, and translated by Strobe Talbott (Little Brown, 1970; Bantam, 1971). Stueck (2002: 2-3)은 일부 서클에서 이 회고록의 합법성-정확성을 의심한다고 말한다.  


6. Goncharov, Lewis, and Lita ( 1993: 213-4, 136-7, 138-54) 참조. 
북한주재 소련 대사 Shtykov가 1950. 1. 19일 자로 Vishinsky에게 보낸 전문 해독: "김일성은 자신이 모스크바에 갔을 때 스탈린 동무가 자기에게 이승만 군대가 북쪽을 공격하면 남한으로 반격을 해 내려가도 좋다고 말했는데, 이승만이 아직 공격 할 생각을 안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한다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시 스탈린 동무를 찾아보고, 남한 국민을 해방하기 위해 인민군이 공격을 해도 좋다는 허가와 명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일성은, 자신은 공산주의자이며, 규율을 존중하는 사람이고, 또 자신에게는 스탈린 동무의 명령이 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공격을 시작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Kaufman (1999: 120) 
Stalin이 1950. 1. 30일 자로 Shtykov에게 보낸 전문 해독: "김일성은 그렇게 큰 사업을 벌리려면 대대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너무 큰 위험부담이 없도록 사업이 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Kaufman (1999: 121) 


7. 서대숙 (1988: 105, 113, 120) 참조. 하지만 김일성이 당시 남한의 언론, 영상매체, 교육현장 등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친일파 실태를 철저히 파악해 홍보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또, 미국 내에 혐한(嫌韓) 감정을 확산시킬 수단도 없었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가 반미 정권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군의 참전을 저지할 내부적 수단도 없었다. 


8. Stueck (1995: 62) 참조. 이들 고참 병사들 중 1만 명은 중공군 166사단 출신으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1군단의 제6사단으로 개편되어 방호산(方虎山)의 지휘를 받았다. 6사단은 남침 1개월 만인 7월 25일에 순천에 도달했다. 중공군 20사단 출신 병사들은 중부전선 춘천지역을 공격한 북한군 2군단의 제7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중공군 164사단 출신은 김창덕 지휘 아래 동해안 간선도로에 투입된 북한군 제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노병천 (2000: 411), 한국전쟁사 1 (1992: 118) 참조.  


9.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1964) 참조. 


10. 청프전쟁(1883-5)의 결과로 청조의 안남 지배는 프랑스 식민통치로 대체되었다. 호지명은 1890년에 가난한 시골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온갖 잡일을 하며 온 세상을 떠돌다가 골수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30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수립했고, 혁명을 수행하는데 있어, 억압 받는 농민들 역할의 중요성을 신봉했다. 1938년, 모택동과 연안에서 몇 달을 함께 지냈다. 


11.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창건했고) 남한 공산당의 지도자이었던 박헌영은, 자신의 남한에서의 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적 침공 보다는 민중봉기를 선호했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과 지하 조직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자, 박헌영은 군사 행동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일단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하면 20만 여명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 봉기하여 남한 정권을 전복시킬 것 이라고 말했다 한다. 1963년 2월 8일(인민군 창설 15주년 기념일), 김일성은 박헌영이 거짓말장이었고, 추종자가 20만은 고사하고 1,000명도 안되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서대숙 (1988: 121) 


12. 트루만은 1884년에 미조리 주에서 태어나, 1921년까지 가족 농장을 경영하다가 상점을 운영하며 살았다. 1934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루스벨트에 의해 부통령으로 발탁되어 1945년에 루스벨트가 죽자 대통령 직위를 승계했다. 트루만은 1945년 일본에 원폭투하 결정을 내렸고, 1947년에 마샬 플랜을 시행했고, 1948년에 대규모 공수를 단행하여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극복했고, 1950년 1월에는 수소폭탄 생산을 결정했다. 트루만은 (1938년의 뮌헨式) 유화정책은 오직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조장할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미국의 한국 파병을 신속하게 결정했던 것이다. 1950년 12월 1일 (New York Times), 트루만은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성명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원자폭탄을 (3차대전이 일어날 경우 충분하게 대응하기에 크게 부족한) 298개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원자폭탄 숫자는 노병천 (2000: 400) 참조. 


13.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and Xue Litai (1993: 216) 참조. 


14. 전계서 (1993: 207, 210, 212) 참조. 


15. "김일성으로서는 중국 의용군이 전투를 넘겨 받은 1950년 10월에 전쟁이 끝난 셈이다. 그들은 김일성에게 전쟁 운영에 일체 간섭을 말라고 요구했다. 팽덕회는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은 자신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싸움이니까 김일성은 아무 역할도 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서대숙 (1988: 137) 


16. Chen (1994: 289) 참조. 


17. Chen(2001: 85)에 의하면, "1950년 10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때, 모택동과 북경 지도자들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냄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달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나 보니 전투의 잔인한 현실은 북경 지도자들로 하여금 목표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8. 당시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은 약 120대 규모의 전투기로 구성되었다. 한국전쟁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약 5만 4,000명, 부상자는 10만명, 전비 총액은 540억불로 추산되었다. Noh (2000: 175, 401) 참조.


19. Chen(1994: 220-3)에 의하면: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여로 수많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었고, 경제 재건에 쓸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만 점령 기회도 상실했다. 하지만 모택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은 얻은 것이 상당히 많았다. 신생국가 초기단계에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혁명이 고취된 것이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자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된 3년 동안, 중국 공산당은 중국사회 전반에 걸쳐 조직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강화했고, 중국 인민들 마음 속 깊이 당의 권위를 극적으로 인각시켜 주었다. 결과적으로 모택동은 중국을 변혁할 일련의 새로운 조치를 취할 확신과 의욕이 생겼고, 집단농장화, 산업국유화, 반-우익 캠페인, 대약진운동 등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또 국제무대에서 중국이 각광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열강에 대항해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스탈린이 배반을 하여, 소련 공군의 엄호를 받지 못하고 전투를 시작해야 했던 (1950년 10월 19일-1951년 1월 10일 기간 중)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모택동을 위시한 북경 지도자들은 자립을 강조하게 되었고 … 이는 장래 중-소 결별의 전주가 되었다" 


20. Stueck(2002: 172-4)에 의하면, "주은래가 포로 문제에 양보 가능성을 타진하자, 스탈린은 강경자세를 권했고, 모택동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휴전회담에서 강경자세를 견지하라고 계속 권했다. 하지만 스탈린 자신은 한국 문제로 미국과 대결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스탈린 사후에 그 후계자들이 전쟁 종식을 위해 재빨리 움직였고, 중국도 이에 따랐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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