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원 기자  입력 2021.10.25 09:30 

"한국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 고려인 할머니의 눈물 (hankookilbo.com)

 

"한국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 고려인 할머니의 눈물 | 한국일보

"국적이 없는 건 견딜 만해요. 하지만 손주들만큼은 평생 불안에 떨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평범한 한국 사람처럼 사는 게 꿈이에요."(국내 거주 고려인 이아미나씨) 고려인에게 세계 10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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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 없이 지낸 150년, 고려인
빈곤·내전으로 중앙아시아 떠돌던 후손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국적 말소 절차 진행
기대 품고 온 조부모 나라서도 이방인 신세

편집자주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들, 무국적자다. 전 세계 무국적자는 300만 명, 그중 3분의 1은 아이들로 추산된다. 국가에 소속되지 못해 학교에 갈 수도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는 이들의 삶은 깜깜한 절망 그 자체다. 무국적 문제는 보편 인권에 바탕해야 할 인간사회의 심각한 허점이자 명백한 인재(人災)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아미나(55·가명)씨가 경기 안산시 자택에서 손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원 기자

"국적이 없는 건 견딜 만해요. 하지만 손주들만큼은 평생 불안에 떨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평범한 한국 사람처럼 사는 게 꿈이에요."(국내 거주 고려인 이아미나씨)

고려인에게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은 자랑이자 기회의 땅이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시베리아의 동토를 맨손으로 일궜고,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떠밀려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도 옥토로 바꿔낸 이들에게 '코리안 드림'은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니다. 하지만 국적 문제는 억척 같은 이들의 의지마저 앗아가고 있다.

 
 

코리안 드림 안고 온 지 3년, 느닷없는 '무국적' 통보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아미나(55·가명)씨는 2017년 방문취업비자(H2)를 갱신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무국적' 통보를 받았다. 경기 안산시 선부동, 코리안 드림의 꿈을 안고 온 고려인 3,000여 명이 모여 살아 '고려인 동네'로 불리는 땟골에 터를 잡은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당장의 추방 위기는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 등의 도움을 받아 동반비자(F1)를 받는 것으로 넘겼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동반비자로는 일을 할 수도 없다. 지난달 16일 안산에서 만난 이씨는 "손자·손녀가 한국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10년은 더 일해야 한다"며 "추방 걱정 없이 일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자신이 한국에 입국하기 8년 전인 2009년부터 무국적자였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이씨는 "2009년 국적을 상실했다면 최소한 2014년 한국행 비자를 받을 땐 안내가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대사관에 따져 물었지만 딱 부러지는 대답은 듣지 못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엉성한 행정시스템 탓일 거라는 주변의 말에 답답한 마음만 더할 뿐이다.

옆 나라 카자흐스탄에 영주권이 있었던 이씨는 "한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영주권자 자격도 만료됐다"며 "무국적자가 됐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카자흐스탄 국적이라도 취득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한숨지었다.

실종된 오빠... 14년 만에 받은 국적 상실 통보

이씨가 조상들의 출생증명서 등 각종 서류를 보여주고 있다. 이정원 기자

이씨가 국적을 잃어버린 경위는 이렇다. 그는 2003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할 마음에 우즈베키스탄 국적 포기 절차를 밟은 적이 있다. 2002년 카자흐스탄 경찰이던 오빠가 실종된 지 1년 만에 범죄 조직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면서다. 새언니마저 떠나면서 고아가 된 조카 4명을 자신이 거둬야 했다. 입양을 하려면 조카들과 국적이 같아야 했고, 고심 끝에 우즈베키스탄 국적 포기 신청을 하고 카자흐스탄 영주권을 받았다.

하지만 입양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신속히 국적을 정리해주지 않은 탓이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오가며 조카들을 돌봐야 했고, 두 집 살림을 건사하는 삶은 간단치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씨는 결국 2014년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던 도중에 이씨 자신도 모르게 국적이 말소돼 버린 것이다.

한국 생활도 고단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며 희망을 키울 수 있어 견딜 만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아들 내외와 손자가 오면서 한국은 모국이 아니라 진짜 내 나라가 돼 갔다. 손녀도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는 이제 모국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한다. 이씨는 "(스탈린 강제이주 당시) 내 조부모는 짐짝처럼 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 땅에 던져졌다"며 "낯선 땅을 떠돌던 역사를 손주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임금 체불에도 말 못해" 불법체류와 다를 바 없는 삶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노안나(40·가명)씨의 출생증명서. 노씨 부모님의 출생지와 민족 등이 함께 적혀 있다. 이정원 기자

무국적 고려인은 국내에서 불법체류자와 다를 바 없는 신세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인 노안나(40·가명)씨는 지난해 200만 원가량의 월급을 떼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마스크 판매가 한창 호황이던 지난해 충남 천안시의 마스크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한 대가였지만, 어디에도 말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만 하고 있다. 무국적 신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추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씨는 강제이주 이후 대물림된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2012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가 여의치 않자 2015년 한국으로 다시 옮겨 왔다. 우즈베키스탄 여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만, 자신이 무국적자라는 사실을 2017년 뒤늦게 알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국적을 상실한 과정은 이아미나씨와 비슷하다. 카자흐스탄에 이주해 영주권을 얻고자 모국 국적 포기 신청을 했고, 하세월이던 국적 말소 절차가 당사자도 모르게 진행돼 버린 것이다.

노씨는 "한국에 와서 공장 일을 하면서 러시아 국적 고려인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면서도 "국적 없는 엄마 밑에서 아이가 고생하게 될까 봐 어떤 것도 쉽게 결정할 수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정원 기자  입력 2021.10.25 04:30

"그림자처럼 산다" 4년째 국적없는 고려인 3세 (hankookilbo.com)

 

24년째 국적 없는 고려인 3세 "그림자처럼 산다" | 한국일보

우즈베키스탄에서도 한인들은 모여 살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상업지구에서 ‘코리아타운’을 볼 수 있다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들녘 한가운데에 ‘고려인 집성촌’이 있다. 수도 타슈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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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 없이 지낸 150년, 고려인
내전 피해 고향 돌아왔지만 국적 못 얻어
빈곤과 무국적 신분의 끊을 수 없는 굴레
뚜렷한 이유 없이 14년간 국적 못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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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들, 무국적자다. 전 세계 무국적자는 300만 명, 그중 3분의 1은 아이들로 추산된다. 국가에 소속되지 못해 학교에 갈 수도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는 이들의 삶은 깜깜한 절망 그 자체다. 무국적 문제는 보편 인권에 바탕해야 할 인간사회의 심각한 허점이자 명백한 인재(人災)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다.

 

황만금과 함께 구소련 시절 최고의 집단농장 책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1세대 고려인 김병화(1905~1974)는 강제이주 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으면서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타슈켄트 외곽에 위치한 김병화박물관 한가운데 그의 초상화와 함께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이정원 기자

우즈베키스탄에서도 한인들은 모여 살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상업지구에서 ‘코리아타운’을 볼 수 있다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들녘 한가운데에 ‘고려인 집성촌’이 있다. 수도 타슈켄트에서 차로 40여 분, 치르치크강 동쪽의 더스트릭 마을. 1937년 강제이주한 고려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해 만들었다는 이곳은 지난해 '황만금 마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구소련(CCCP) 시절 치르치크 집단농장 책임자로 마을을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일궈 사회노동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은 고려인 1세 황만금(1919~1997)을 국가적 위인으로 기리려는 현지 고려인 단체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마을의 모습은 1991년 소련 해체 이전, 그 영화롭던 한때에 멈춘 듯했다. 잘 정돈된 광활한 논밭과 소련 시절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농가주택은 그 시절 마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지금은 쇠락의 징표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림자처럼 산다" 국적 없이 24년째

고려인 3세 장 비탈리(50·가명)씨가 이달 8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황만금 마을에 위치한 자택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원 기자

이달 8일(현지시간) 황만금 마을에서 만난 고려인 3세 장 비탈리(50·가명)씨의 삶도 마을과 함께 과거에 갇혀 있다. 장씨는 있지만 없는, 존재 자체가 불법인 무국적자다. 장씨의 부모는 모두 우즈베키스탄 국적자였지만 장씨 본인은 그 나라 국적을 받지 못했다. 1971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투르크메니스탄 국적도 없다.

장씨는 "소련 해체 후 지금까지 직업도 집도 없이 그림자처럼 살고 있다"며 짐더미 속에서 빨간색 수첩을 꺼내 보였다. 구소련 정부가 강제이주 한인에게 발급한 여권이었다. 앞표지에 'CCCP'란 글자가 박힌 여권에는 '1971년생' '카레이스키(고려인)' 등 장씨의 신상정보가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1988년 발급받은 이 여권으로 그는 병역 의무도 마쳤다.

장씨의 실재를 증명해줄 유일한 서류였던 여권은 그러나 효력을 다한 지 오래다. 사라진 나라의 여권으로는 이제 마을 밖을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대처로 나가려면 치르치크강을 건너야 하지만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다. 장씨는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시킨 뒤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검문소를 세워 통제했다"며 "나는 지금도 스탈린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장씨가 구소련 시절 발급받은 여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원 기자

 

빈곤과 함께 대물림되는 무국적 신분

내전을 피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온 이후 20년 넘게 장씨는 자신의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지난해부터는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간 이웃의 빈집을 빌려 살고 있다. 이정원 기자

장씨는 다섯 살이던 1975년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출생지인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타지키스탄 집단농장으로 옮겨 가 살았다. 소련 붕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터진 내전이 길어지면서 1997년 가까스로 우즈베키스탄으로 피란왔지만, 그를 기다린 건 지금까지 장장 24년째 이어지고 있는 무국적자의 삶이었다.

당연히 우즈베키스탄 국적일 거라 믿었던 장씨는 역사적 격변 속에 잃어버린 신분을 여태 되찾지 못했다. 자신이 무국적자라는 사실을 처음 안 1997년 국적을 취득하려 했지만 거주지 등록 제도에 발목이 잡혔다.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1991년 이후 거주지 등록을 하지 않은 기간을 따져 3개월마다 20달러씩 지불해야 한다"는 담당 경찰의 요구를 들어줄 형편이 못됐다. 지금은 내야 할 벌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최근엔 출생증명서 제출 조건도 생겼다. 이를 위해 투르크메니스탄에 다녀오려면 경비 80달러가 추가로 든다.

한국 정부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위해 중앙아시아 국가와의 외교에 공을 들이면서 고려인 무국적자 문제는 해결의 전기를 맞았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무국적 고려인에게 국적 취득을 허용한 것.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가 소련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온 뒤 줄곧 무국적자 신세였던 김 기나지(61)씨 등 600여 명의 고려인이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장씨는 이 기회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아프가니스탄 등과 국경이 닿아 있어 무국적자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무국적자로 지낸 기간에 거주지 등록을 하지 못해 그간의 이동 경로를 증명할 수 없다. 거주지 등록을 하려면 벌금도 내야 한다. 장씨는 자신에게 부과될 벌금이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정한 벌금 기본값(BRV) 약 20달러에 거주지 비등록 기간 20여 년을 분기별로 곱한 금액으로 알고 있다.

신분 증명을 할 수 없어 그림자 노동을 해야 하는 장씨에겐 감당하기 힘든 돈이다. 한국 정부가 벌금을 대신 내줄 거란 기대는 애초 없었다. 인테리어 기술이 있는 장씨는 "같은 마을 고려인들로부터 가끔 일감을 받아 버는 일당(3달러)으로 생활하는데, 그마저도 최근 한 달간은 일이 없었다"며 "돈을 모아야 거주지 등록을 하고 국적을 얻을 수 있는데, 국적이 없으니 돈도 벌 수 없는 굴레에 빠졌다"고 토로했다.

장씨의 아내와 12세 아들이 집 앞에 서 있다. 이정원 기자

장씨는 무국적자 신분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해야 하는 현실이 더 가슴 아프다. 거주지 등록을 못한 탓에 장씨 자녀들도 사실상 무국적 상태를 앞두고 있다. 장씨는 "아이들이 만 16세가 되면 국적을 받아야 하는데 그 전에 벌금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지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2019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고려인 집성촌을 직접 방문해 무국적자 실태를 파악했다. 당시 집계된 고려인 무국적자 수는 총 843명이었다. 한국 정부는 공식 집계를 한 적이 없기에, 현재로서는 이 정보가 고려인 무국적자 규모와 관련된 유일한 통계다. 그러나 현지 한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치라고 평가한다. 한 관계자는 "중앙아시아 일대 고려인의 무국적자 비율은 10%에 달한다"며 "사망자 등을 감안해 보수적으로 따져도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 가운데 1만여 명은 무국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무국적자가 5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그중 많은 인원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어머니 나라 찾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경제적 형편이 낫다고 해도 무국적자의 삶은 크게 다를 게 없다.

구한말 러시아 연해주에 터를 잡았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외증조부모로부터 4대를 내려왔건만,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알렌산 카쟈란(30)씨는 국적이 없어 프로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고려인 어머니와 아르메니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카쟈란씨는 아르메니아에서 출생해 7세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뒤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라 자신도 당연히 이 나라 국민이라고 생각했지만, 국적이 부여되는 16세가 됐을 때 그에겐 영주권만 주어졌다. 10년 거주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1년만 기다리면 10년 거주 기한이 채워져 국적이 나올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네 차례 신청 끝에 지난달 국적을 받을 때까지, 14년간 국가는 카쟈란씨의 거듭된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자신이 무국적자여야 하는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담당 경찰은 "대통령 사인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2019년 고려인에 대한 국적 부여가 허용됐을 때도 카쟈란씨는 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영주권이 있으니 그마저도 없는 무국적 고려인보다 형편은 나았지만, 하는 일마다 제약이 따르긴 매한가지였다. 가까스로 우즈베키스탄 프로축구 리그 선수가 됐지만 신분은 번번이 걸림돌이 됐다. 구단들은 내국인 지위가 없어 외국인 급여를 줘야 하는 카쟈란의 영입을 꺼렸다. 해외 원정경기라도 있으면 더 난감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무국적자에게 발급하는 여행문서인 '회색 여권'을 인정하는 나라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입국 때마다 팀 동료들을 먼저 보낸 뒤 환승게이트에 남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번잡한 서류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고려인 4세 알렉산 카쟈란씨가 이달 7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외곽에 있는 자택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던 중 세 살짜리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들은 엄마에게 카쟈란씨의 영주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원 기자

고려인 아내를 만나 세 살, 한 살짜리 두 아이를 둔 카쟈란씨는 축구선수 생활을 접고 영업사원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본인 명의의 집을 살 수도, 마음대로 거주지를 옮길 수도 없었다. 휴대폰은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서 개통했다. 더구나 외국인으로 간주돼 살고 있는 아파트에 대한 세금은 내국인보다 2배가량 더 내야 했다. "무국적자는 차량 번호판 색깔도 다릅니다. 더 많은 의무를 지고 살면서도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카쟈란씨는 2018년 증조부모의 나라를 찾기도 했다. 고려인 지원단체 주최로 고려인 무국적자 문제를 다루는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아서다. 그는 "(콘퍼런스가 열린) 경기 안산시 공무원들도 참석한 자리였고, 사연을 얘기해 달라기에 말했더니 다들 '그렇구나' 고개만 끄덕였다"며 "나를 불쌍하다고만 할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카쟈란씨는 "지난달 경찰에 한국 언론이 무국적자인 나를 취재한다는 사실을 알렸더니 느닷없이 국적이 나왔다"며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이정원 기자 hanako@hankookilbo.com

 

 

 

 

송윤경 기자 입력 2019.05.25. 06:00 

내 이름은 따냐..한반도·연해주·카자흐·우즈벡 유랑한 '고려인'입니다 [커버스토리]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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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할머니는 때때로 마당 아궁이에 큰 가마솥을 올리고 옥수수를 삶았다. 그럴 때면 손자, 손녀들은 마당에 모여 신나게 옥수수를 먹었다. “할머니의 눈에서 ‘사랑’이 보였어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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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 | 2018/03/11 22:08

"이주 조상들 심정 생각하면 눈물"…정의장, 카자흐스탄 고려인 격려 | 연합뉴스 (yna.co.kr)

 

"이주 조상들 심정 생각하면 눈물"…정의장, 카자흐스탄 고려인 격려 | 연합뉴스

(알마티=연합뉴스) 배영경 기자 = 정세균 국회의장이 11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국립고려극장을 찾아 현지 고려인들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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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8.04 21:45 수정 : 2015.08.04 22:06

알마티·우슈토베·타슈켄트·부하라·사마르칸트 | 김여란 기자

광복 70년,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 ‘유라시아의 개척자 카레이스키’의 현재와 과거 - 경향신문 (khan.co.kr)

 

광복 70년,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 ‘유라시아의 개척자 카레이스키’의 현재와 과거

▲ 현지 적응하는 데 주력한 만큼한국 정체성엔 별로 관심 없고한국어 배우려는 이도 드물어 ▲ “모국과 150년 동안 떨어져도끈 유지하려 노력한 게 의미”남북통일의 조율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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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한국문화 몰라… 다 잊혀지는 게 아쉬워”

▲ 현지 적응하는 데 주력한 만큼
한국 정체성엔 별로 관심 없고
한국어 배우려는 이도 드물어

▲ “모국과 150년 동안 떨어져도
끈 유지하려 노력한 게 의미”
남북통일의 조율 역할 기대도

“조선에도 순금이란 이름이 있소?” 1937년 7살 때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 1세대 노인은 자기와 같은 이름이 한국에도 있는지 물었다. 고려인 4세대 여대생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본 뒤 그 전에는 관심 없던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레이스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살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이역만리에 내던져진 우리 동포 고려인을 중앙아시아 현지인들이 부르는 말이다. 광복 70주년인 올해 ‘운명을 극복한 사람들, 유라시아의 개척자 카레이스키’를 주제로 대학생 100명이 카레이스키의 현재와 과거를 만나고 돌아왔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 7월24일~8월1일 펼쳐진 대산문화재단과 교보생명 공동 주최의 ‘2015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이다.

동북아 대장정 대원들이 지난달 27일 타슈켄트의 아리랑요양원에서 고려인 1세대 독거 노인들을 만나고 있다.

첫 방문지는 고려인들이 가장 먼저 버려진 곳,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서 버스로 6시간 떨어진 우슈토베 역이다. 스텝 기후의 메마른 초원이 펼쳐지다 우슈토베 경계에 들어서자 갑자기 들판이 푸르렀다. 작물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 고려인들은 고향에서처럼 농사를 지으려 수로를 파 물을 대고, 땅을 일군 것이다. 우슈토베 역에서 고려인들이 처음 둥지를 틀었던 바슈토베 언덕까지 7㎞ 남짓한 길을 78년 전 고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따라 걸었다. 언덕에서 만난 고려인 1세대 천 미하엘 다일로비치(91)는 12살에 이곳에 왔다. 허허벌판에 토굴을 파고 갈대를 베 불을 피우고 온돌을 깔아 목숨을 부지했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박 루바(85)의 정착 과정도 비슷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다가 강제이주당하기 한 달 전, 식구들은 러시아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한 달 먹을 식량을 장만하려고 소와 돼지를 잡고, 콩과 배추 등 각종 작물 씨앗을 챙겼다. 약속한 집도, 먹을 것도 하나 없는 땅에 물을 대 가져온 씨앗을 심었다. 땅굴에서 10년을 살았다. 아이들은 많이 굶어 죽었다. “바삐 살았지. 좋은 일이 별로 없었어. 그때 궁리하면 아니 좋아요. 그래도 그땐 사람들이 서로 가까웠어.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벼 베어놨으면 우리한테 나눠주고 다 친척처럼 살았어, 이제는 안 그래.”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정부 간 협의로 2010년 설립된 아리랑요양원에는 현재 고려인 1세대 독거노인 37명이 지내고 있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이 직접 운영한다.

강제이주로부터 78년이 지난 현재 두 나라에는 고려인 4세대까지 있다. 당시 대략 카자흐스탄에 9만명, 우즈베키스탄에 8만명이 이주했고 현재는 각각 10만명, 20만명으로 추산한다. 현재 고려인들 중에는 1세대처럼 한국어를 아는 이도, 배우려는 이도 드물다. 알마티와 타슈켄트에는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 한국어 교육을 위해 설치한 교육원이 있지만 대다수 학생은 현지인이다. 김종일 알마티 한국교육원장은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현지에 적응하는 데 주력한 만큼 한국과 관련된 정체성에 관심이 없는 이가 대부분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에는 러시아, 한국으로 젊은 고려인들이 많이 나갔기 때문에 현지에는 많지 않다. 한민족으로서의 고려인 정체성은 음식문화 정도 외에는 희박하다”고 말했다. 알마티 한국교육원에는 연간 2000여명이 한국어를 배우러 오지만 고려인은 3%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인 4세대 김예카체리나(20)는 3년 전부터 타슈켄트 한국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현재 사범대에서 한국어문화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한국 드라마와 K팝에 관심이 생기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 중엔 여자들 비중이 높고, 고려인보다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고려인 2세대인 부하라 고려인회장 비탈리 콘스탄티노비치(77)도 “애들이 한국으로 돈을 벌러는 가지만 한국말과 문화는 모른다. 전체적으로 고려인 문화가 다 잊혀지는 게 아쉽다”고 밝혔다.

1937년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지역의 바슈토베 언덕. | 대산문화재단 제공

이제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 고려인과 한국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대장정 자문역을 맡은 김상철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한민족이라면서 왜 한국어를 못할까라는 인식보다 150년 동안 의지와 상관없이 모국과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끈을 유지하려 노력해온 이들로 바라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 기원으로 고려인들의 고향은 북한이고, 현재는 남한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그런 만큼 고려인들은 통일이나 남북 갈등 문제를 조율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중요한 존재들”이라고 강조했다.

1850년대 연해주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은 근대시기 해외에 가장 먼저 진출한 한민족 집단이다. 경제적 이유가 대다수지만 고려인들의 이주는 지금도 활발하다. 밖으로 열린 사람들, 그 고려인들이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유목민족 특유의 개방성이 유지돼온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것은 뜻깊은 우연이다.

고려인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인들은 수십개 민족이 뒤섞여 살지만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존중하며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그들 삶의 태도가 현재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다문화에 대한 관용,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세 확립에 울림을 던진다.

 

 

입력 2014. 6. 10. 14:02수정 2014. 6. 10. 14:13

<고려인> ② 같은 뿌리, 그러나 다른 삶 (daum.net)

 

<고려인> ② 같은 뿌리, 그러나 다른 삶

게오르기·니콜라이·빅토르 vs 까샤·두샤·안나"한국도 어려울때 파독광부 덕 보지 않았나. 고려인 한국行도 마찬가지""주관적 민족 정체성 시각서 벗어나 독립적 한인으로 존중하는 자세 필요"

v.daum.net

 

 

중앙일보 2008.6.4
“고려인들의 가장 큰 소망 죽기 전에 고국땅 밟는 것” - 중앙일보 (joins.com)

 

“고려인들의 가장 큰 소망 죽기 전에 고국땅 밟는 것”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블라디보스톡·우스리스크·아르좀 등에 사는 고려인 125명이 8일 배편으로 모국을 찾는다. 강원도 속초항으로 들어온 이들은 4

news.joins.com

 

 

한겨레 2007.11.14

[기고] 30만 고려인의 나라 중앙아시아와 한국 / 임영상 (hani.co.kr)

 

[기고] 30만 고려인의 나라 중앙아시아와 한국 / 임영상

기고

www.hani.co.kr

 

 

동아일보 2007.11.10

김블라디미르 원장 “모국어 잊어가는 고려인 3, 4세 안타까워”|동아일보 (donga.com)

 

김블라디미르 원장 “모국어 잊어가는 고려인 3, 4세 안타까워”

“미국에나 최고급 건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와 본 조국의 서울이 이렇게 발전한 줄은 몰랐습니다. 고려인으로

www.donga.com

 

 

한겨레신문 2007.11.5

“하루라도 우리말 외지 않으면 잠 안 잤다” (hani.co.kr)

 

“하루라도 우리말 외지 않으면 잠 안 잤다”

엠넬리 교장, 모스크바 민족학교 세워 ‘명문고’로 발돋움

www.hani.co.kr

 

 

송고시간2007-10-25 16:26 

<할아버지가 지킨 조국 발전..기쁘고 감사> | 연합뉴스 (yna.co.kr)

 

<할아버지가 지킨 조국 발전..기쁘고 감사> | 연합뉴스

연해주 고려인 후손들 70년 만에 조국 찾아

www.yna.co.kr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07-10-22

“한글·한국무용·사물놀이로 고려인에 정체성 일깨웠죠” :: 문화일보 munhwa

 

“한글·한국무용·사물놀이로 고려인에 정체성 일깨웠죠”

지난 20일 서울 신촌의 연세대 100주년 기념회관에서는 국내의 1급 예인들과 고려인 3, 4세가 참여하는 이색..

www.munhwa.com

러시아 한국청소년문화센터 대표 이 나탈리아씨

 

 

 

입력 : 2007.08.12 17:34

강제이주 70년…고려인의 어제와 오늘 - 경향신문 (khan.co.kr)

 

강제이주 70년…고려인의 어제와 오늘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70년을 맞아 고려인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의 프로그램 2편이 방송된다. KBS 2TV ‘추적 60분’은 15일 오후 11시5분 방송되는 ‘우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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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2.27 18:03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上. 연해주지역의 개척자들 - 경향신문 (khan.co.kr)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上. 연해주지역의 개척자들

올해는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20만명이 스탈린의 탄압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1937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역만리 중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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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2.28 18:06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中.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 경향신문 (khan.co.kr)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中.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1937년 당시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20여 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대 첫 이주 이래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마을을 이루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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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3.01 16:58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下. 역경을 딛고선 고려인물 - 경향신문 (khan.co.kr)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下. 역경을 딛고선 고려인물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극동을 떠나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졌다. 화물열차에 실린 지 한 달 만에 고려인들은 새로운 땅에 도달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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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입력: 2007년 07월 30일 18:12:36

강제 이주 ‘재소 고려인 노래’ 채록 김병학씨 - 경향신문 (khan.co.kr)

 

강제 이주 ‘재소 고려인 노래’ 채록 김병학씨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과 후손에게 모국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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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불러보는 이름 ‘까레이스키’-그림으로 만난다

헤럴드경제 2007년6월 29일

 

까레이스키. 가만히 그 이름을 되뇌어본다.

러시아를 비롯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 까레이스키.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란 뜻이다.

 

‘까레이스키’라는 이름 아래 서울에서 뜻 깊은 전시가 열린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이주됐던 고려인 화가의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유럽인들 사이에 ‘아시아의 피카소’라 불렸던 고 신순남(1928-2006ㆍ신니콜라이)화백을 비롯,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 7명의 작품 120점이 서울에 왔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공동대표 노준의,이명옥)는 문화관광부 지원 아래 7월3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서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70주년을 기념하는 ‘까레이스키’전(展)을 연다.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은 1937년 러시아 정부의 갑작스런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쫓겨졌다. 낯선 불모의 땅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같은 노력은 예술에도 오롯이 스며들었다.

 

고려인의 애환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고 신순남 화백의 대작들이 나온다. 8살 때 강제이주를 겪은 그는 타계 직전까지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를 접목시키며 고려인의 유민사를 그렸다. 신화백의 대작 ‘진혼제, 소리없는 절규, 페스트’(가로 12m,1990년)는 장엄한 구도로 고려인 강제이주를 증언한 대표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또 최초로 공개되는 ‘승리’는 가로 22m의 화면에 유민의 고통과 새로운 희망을 파노라마처럼 장대하게 펼쳐보인 역작이다. 신화백과 동시대 작가인 안일(78ㆍ안블라디미르)화백은 독립운동가와 성공한 고려인들의 모습을 초상화 속에 담아냈다.

 

한편 신순남 화백의 큰 며느리인 신이스크라와 손녀 신스베틀라나는 환상적인 꽃그림을, 동명이인 화가인 2명의 김블라디미르, 박니콜라이는 추상적이면서도 장식적인 회화를 선보인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방송PD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물과 한인 이민의 역사를 담은 사진 50여점도 함께 전시된다. 7월5일에는 한국외국어대 임영상 교수 등의 주도 아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세미나도 개최된다.

 

임영상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선조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작품을 통해서나마 그들의 애환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7월19일까지. 무료관람. 02-735-4032

 

▶까레이스키는?=러시아어(語)로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을 가리킨다. 러시아 외에 우크라이나ㆍ벨로루시ㆍ몰도바ㆍ카자흐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ㆍ 키르기즈스탄ㆍ아르메니아ㆍ아제르바이잔ㆍ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년). 불과 13세대의 농민이 한겨울밤에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며 이주사는 시작된다. 이어 1865년(고종 2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으로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명의 한인이 이주했다. 이후에도 이주는 계속됐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연해주지역 한인들은 유대인ㆍ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ㆍ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팽개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5000여명이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중 가장 잘 사는 민족으로 뿌리내렸다.

 

그러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또다시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돼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다시 연해지방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연해지방 거주 한인들을 중심으로 자치회가 형성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에 사는 고려인은 총 46만여명. 국가별로는 러시아에 10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22만명, 키르키즈스탄에 2만명 등이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출처;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7/06/29/200706290021.asp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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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1>고려인 첫 정착촌 우슈토베

입력 2007-01-01 03:00수정 2009-09-28 04:52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한인들의 첫 정착지인 우슈토베 마을 인근의 부슈토베 언덕.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숨진 사람을 하나둘 묻으면서 무덤이 늘기 시작해 지금은 아예 한인 공동묘지처럼 바뀌었다. 우슈토베=김기현 기자

 

 

한인들을 화물차에 싣고 온 기찻길과 처음 내린 우슈토베역.

이주 초창기 고려인 마을 모습.

소련 시절 집단농장 모습.

아리랑 공연이 열렸던 모스크바 소브리멘니크 극장.

 

출처;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70101/8391054/1

 

[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고려인 첫 정착촌 우슈토베

《‘글로벌 코리안.’ 21세기 한국인의 현주소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하지만 한국인

www.donga.com

 

[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2>카자흐 고려인 성공신화

입력 2007-01-01 03:00수정 2009-09-28 04:52

카자흐스탄의 새 수도인 아스타나의 건설 현장. 신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건설 붐’이 일어나 쿠아트 같은 고려인 건설업체들이 급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사진 제공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2005년 10월 런던증권거래소(LSE)에서 카작무스의 상장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인들이 대주주로 있는 카작무스는 중앙아시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LSE에 상장돼 ‘글로벌 기업’이 됐다. 사진 제공 카작무스

 

 

출처;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70102/8391357/1

 

[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카자흐 고려인 성공신화

《“한인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어느 한국 대기업 지사장이 만

www.donga.com

 

 

<알마티 리포트> ④ 강제이주 70주년 맞는 고려인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6.12.18 10:02

<알마티 리포트> ④ 강제이주 70주년 맞는 고려인 (daum.net)

 

<알마티 리포트> ④ 강제이주 70주년 맞는 고려인

(알마티=연합뉴스) 유창엽 특파원 = 내년은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이다.옛 소련 스탈린 시절인 1937년 9월21일부터 11월15일까지 연해주에 정착하며 때론 독립운동도 벌였던 고려인들은 카자흐스

news.v.daum.net

 

 

 

<김석원 교수의 키예프 통신-16>

 

문화일보 2005-08-26


고려인 교육열 100여 소수민족중 최고

 

우크라이나에는 약 2만명 이상의 한인 교포들이 있는데 보통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1989년 통계에 의하면 8900명의 고려인 교포들이 있는데 그후 소련의 해체와 중앙아시아의 정정 불안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유입됐다. 정확한 통계는 아직 없지만 한국외국어대 임영상 교수와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약 1만5000명에서 3만명의 고려인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구소련여권을 소지한 사람이나 중앙 아시아에서 1990년대 이후에 와서 주거지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많고 혼혈되어 한국피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우크라이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 등도 있지만 1989년 이후 인구 통계가 없어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우크라이나의 웬만한 소도시에도 우리 고려인 교포들이 살고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초근목피의 조국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 고려인들은 러시아 극동지방에 집단주거지를 이루며 살았다. 1910년대에 이미 그 수가 10만명을 넘어섰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약 18만명이 죄인같이 기차 짐칸에 태워져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허허벌판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공민권이 회복되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과 근면을 무기로 좋은 교육 환경과 직장을 찾아 모스크바, 페체르브르그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하리코프 등지로 소수의 젊은이들이 왔다. 그들이나 그들의 후손 중에는 아나톨리 김(작가), 율리 김 (음유 시인), 빅토르 쵸이(가수), 미하일 박(역사학자), 블라지미르 신(권투선수), 렐리 리(성악가)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1950∼60년대에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분들이 고려인 1세대로 이제는 60∼70세가 넘었다. 1970∼80년대에도 학업, 직장, 결혼 등의 이유로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명의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왔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발틱 3국을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가 가장 살기 좋았다. 특히 농작물 재배에 남다른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드넓은 우크라이나 대평원의 농경지는 희망의 땅이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가수 빅토르 쵸이(최)가 인기 절정이던 80년대 초에는 전소련의 고려인 교포 사이에 우크라이나로 가자는 붐이 일기도 했다. 현재는 불법체류자도 있지만 상업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신흥부자가 된 사람도 많으며 학자, 의사, 정치인, 사업가 등 우크라이나의 상류층으로 발돋움한 사람도 많다. 고려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우크라이나의 100여 소수민족보다 교육 수준이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다. 키예프에서 필자가 만나 60세 넘으신 분들은 거의 모두 초급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식들은 무조건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키예프한인회장 나탈리야 남 여사는 “고려인이 교육면에서 유대인보다 앞선다”고 얘기한다.

키예프대 교수 kiev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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