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08-05-24 03:01업데이트 2009-09-25 01:16

“고구려의 핏줄, 자랑스럽다”|동아일보 (donga.com)

고구려 보장왕 아들 약광의 60대손 고마 후미야스씨가 23일 경기 구리시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구리=박영대 기자

 

日서 조상신 모시는 보장왕 61대손 고마 씨

구리시 복제 광개토왕비 쓰다듬으며 감격

“선대로부터 강인한 고구려 정신을 배워왔는데 오늘 광개토대왕비를 한국 땅에서 보게 돼 감격스럽다.”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의 60대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42) 씨. 23일 부인과 함께 경기 구리시 토평동 미관광장에서 열린 광개토대왕비 제막식에 참석한 그는 광개토대왕비에서 좀처럼 손을 떼지 못했다.

그의 성 ‘고마’는 약광이 고구려 패망 후 일본으로 건너온 뒤 그 후손들이 사용한 고구려 왕가의 성 씨로 알려져 있다.

일본 사이타마 현 히타카 시에서 약광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고마(高麗) 신사의 궁사(宮司)인 그는 “신사 주변에 사는 고구려 후손들에게 고구려 역사를 가르치고 일본 관광객들에게 고구려 유물 전시회를 개최해 보여주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마 신사에는 대한제국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심은 나무가 있어 일제강점기 때는 많은 독립투사가 찾아 일제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고구려 역사 기념관 건립에 보태라며 이날 구리시에 금일봉을 전달한 고마 씨는 “고구려가 외세의 침입을 굳게 막아준 덕분에 한국과 일본에서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고구려가 문화의 수호신이라는 점도 알려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구리시는 중국 지린(吉林) 성에 있는 실제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크기(높이 6.39m, 무게 42t)의 복제비를 만들어 4면에 1802자를 새기고 이날 제막식을 열었다.

고마 씨의 방한은 4월 100여 명의 구리시 방문단이 일본에서 고구려 역사를 잇고 있는 고마 씨를 방문한 데 대한 답방이다.

박영순 구리시장은 앞으로 고마 신사와 함께 고구려 역사 조명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구리=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출처; “고구려의 핏줄, 자랑스럽다”|동아일보 (donga.com)

 

 

2011.01.14 21:23

임영주 기자

“중국 먀오족 뿌리는 고구려 유민” - 경향신문 (khan.co.kr)

김인희씨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주름치마를 입은 먀오족 여성들의 모습. 중국 남방 민족들은 주름이 없고 통이 좁은 치마를 입었으나 먀오족은 북방의 고구려와 요나라 사람이 입었던 것처럼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이 중국 소수민족 먀오(苗)족의 뿌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에겐 묘족으로 알려진 먀오족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구이저우(貴州)성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에 800만명이 살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미국·캐나다·프랑스 등지에도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김인희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전임연구원(43)은 최근 출간한 책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푸른역사)에서 먀오족은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돼 현지 민족과의 융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듬해인 669년, 20만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그중 중국 남방으로 끌려갔던 약 10만명의 유민이 먀오족을 형성한 중심 세력이라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헌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의 기록에서 이 같은 주장의 근거를 찾는다. 이 책에는 ‘가뤼’라는 민족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고구려의 국호였던 ‘고려’가 중국 남방 민족 언어의 영향을 받아 ‘가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주변의 다른 소수민족의 경우 모두 송나라 이전 문헌에 등장하지만 먀오족만이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가뤼’라는 민족이 바로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 때 통제를 받다 산속으로 이동해 먀오족을 형성했고 중국의 한족 문인들이 반란을 일삼는 그들을 야만인이라는 뜻에서 먀오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밖에 먀오족이 남방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쌀’ ‘벼’와 같은 도작 용어를 사용하는 점, 고구려 주몽 신화와 마찬가지로 시조가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신화를 갖고 있는 점, 체질 인류학적 특징이 한국인과 흡사한 점 등 총 19가지 증거를 제시하며 고구려 유민이 먀오족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송나라 이전의 남만, 삼묘, 동이로 이어지는 먀오족의 공식적 역사는 먀오족 학자들의 자민족주의와 중국 정부의 묵인 아래 발명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10년간 고문헌 연구와 현지답사 등을 통해 고구려 유민과 먀오족의 관계를 추적해온 김 연구원은 2000년 학술대회 참석 차 들른 중국 먀오족 마을에서 고구려인의 바지인 ‘궁고’를 입은 먀오족을 발견한 후 ‘중국 소수민족이 왜 고구려인의 궁고를 입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 의해 조직적으로 진행된 고구려 유민 이주정책은 현재 중국 정부가 자신의 영토에서 발생한 모든 고대사를 중국사로 환원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은 고구려 유민이 모두 중국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의 애국주의가 거세질수록 고구려는 인화성이 큰 민감한 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김 연구원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현재의 불안감을 회피하게 해주는 판타지가 돼서는 안되며, 동북공정과 같은 외부의 도전에 맞서는 정체성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중국 먀오족 뿌리는 고구려 유민” - 경향신문 (khan.co.kr)

 

 

2007-08-14 14:29

시안→ 우웨이→ 둔황…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를 좇다 :: 문화일보 munhwa

 

중국 시안(西安), 란저우(蘭州), 우웨이(武威), 둔황(敦煌), 투루판(吐魯蕃), 우루무치(烏魯木齊)….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선지(高仙芝·?~755)의 행적이 남아 있는 곳들이다.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역을 정벌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서기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된 고선지는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선지가 넘은 파미르고원은 해발 4000여m에 이르는 험준한 고개들이 줄잇는 산맥으로, 훗날 나폴레옹이 넘었던 알프스산맥의 두 배 높이에 이른다. 세계 전사(戰史)상 유례없는 업적을 이뤄낸 것이다.

지난 7월31일~8월9일 9박10일간의 일정으로 치러진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의 ‘2007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에 합류, 고선지 장군의 행로를 좇았다. 우선, 당나라의 수도였던 시안은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서기까지 우우림대장군(右羽林大將軍)이라는 신분으로 5년간 살았던 곳. 특히 시안의 개원문은 장안성 외성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문으로, 고대 실크로드가 시작된 곳이다. 지도교수로 답사단에 참가한 김유철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고선지 역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면서 개원문을 통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나라때 황제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수들을 직접 맞이했던 시안 성벽 서대문 역시 고선지와 떼놓을 수 없는 유적. 길이 13.6㎞, 높이 12m, 폭 15m의 시안성벽은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전한 고성 중의 하나다. 현재 남아 있는 시안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에 걸쳐 건설된 것으로, 600여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실크로드의 교통요지인 란저우에서 북서쪽으로 240㎞ 지점에 위치한 우웨이는 고선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장으로 추정된다. 구당서(舊唐書)에는 “평양에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이 당에 의해 베이징(北京)과 시안 사이의 병주, 양자강 아래인 강회 이남과 산남지방, 그리고 고비사막이 펼쳐진 랑저우(凉州)의 서쪽 등지로 분산배치됐다”고 적혀 있다. 고선지 일가를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을 따라 서쪽으로 끌려갔다. 하서회랑 지역 가운데 고구려인들이 마지막으로 보내진 곳은 랑저우, 곧 오늘날의 우웨이 일대다. 우웨이는 당나라가 변방을 다스렸던 다섯 도호부 가운데 하서도호부의 치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우웨이는 고사계가 자리잡은 곳으로 고선지가 어렸을 때 자란 곳”이라면서 “군 주둔지였던 이곳의 스산한 분위기에서 자란 고선지가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성격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짐작했다. 특히 하서군 진영이 있었던 우웨이의 종루(鐘樓)는 대표적인 당대 유적으로 고선지가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우루무치와 예멘 사이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인 둔황은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왕래가 활발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둔황에서 남서쪽으로 70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관(陽關)은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한나라 때 만들어졌다. 양관은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어 현재는 붉은 모래산 위에 양관의 눈과 귀의 역할을 했던 봉화대만 남아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새로 지은 양관 관문이 황량한 들판에 자리잡아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고선지 역시 양관을 거쳐 서역 정벌에 나섰을 것이다.

투루판의 교하고성(交河故城)은 서기 640~658년 사이 안서도호부가 있던 자리로, 고선지가 활동했던 시기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하지만 이곳을 통해 안서도호부가 쿠차(龜玆)에 있던 당시 안서절도사를 지냈던 고선지의 활동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상현(인하대 4년)씨는 “이번 여행 중 투르판 교하고성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면서 “고선지 장군의 열정을 이어받아 동북아 시대를 열어가는 일꾼으로 커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사진 =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출처; 시안→ 우웨이→ 둔황…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를 좇다 :: 문화일보 munhwa

 

 

입력 2007-08-14 14:27

“고선지 장군의 업적은 나폴레옹과 견줄만 해” :: 문화일보 munhwa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진 중국 작가 모옌(莫言)은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의 후예로 남다른 군사적 업적을 이뤘으며, 세계적으로 나폴레옹과 어깨를 겨루는 장군”이라고 극찬했다.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2007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의 마지막 일정으로, 지난 8일 베이징(北京) 칭화(淸華)대에서 강연한 모옌은 “고선지 장군이 감행한 장거리 행군 이후의 기습작전은 오늘날에 와서도 학자들이 연구 중인 과제”라면서 “파미르 고원을 넘나든 고선지 군대가 넘은 해발 고도는 어떤 군대도 넘지 못했던 높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동북아의 미래는 젊은이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면서 “그런 점에서 이번 답사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모옌은 “동북아 시대의 주역으로서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류애 또한 가져야 한다”면서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야 같이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선지 장군의 행적을 좇는 이번 답사가 민족주의라는 좁은 틀 안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충고였다.

그는 이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자신의 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문화를 익혀야 한다”면서 “외래 문화를 정화, 습득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당나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의 지구촌을 ‘진보와 후퇴, 문명과 야만이 싸우는 시기’라고 규정한 모옌은 “동북아의 주인공들은 넓은 시야와 마음을 가져야 이 험난한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한·중·일 관계와 관련, 모옌은 “역사 문제는 과학적 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특히 일본은 실사구시의 자세로 역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21세기 동북아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선 한국인과 중국인이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 과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하지만, 일본 역시 역사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충고였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출처; “고선지 장군의 업적은 나폴레옹과 견줄만 해” :: 문화일보 munhwa

 

 

입력 2008-01-19 03:04업데이트 2009-09-25 20:04

[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고선지 장군 기록 발견|동아일보 (donga.com)

8세기 실크로드를 지배했던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1978년 1월 19일 대한민국 땅에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다.

 

대만을 방문 중이던 한 국회의원이 그곳의 고궁박물관에서 고선지 장군이 에베레스트를 넘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다음 날(20일자) 일부 신문은 ‘에베레스트의 첫 정복자는 고구려인’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박물관에 있던 ‘당서열전(唐書列傳)’ 제54장에는 당 현종 때 고선지 장군이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 중 군인들이 높은 성모산(聖母山) 때문에 진군을 기피하는 것을 보고 직접 선발대를 이끌고 성모산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성모산은 에베레스트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들 신문은 밝혔다.

그러나 고선지 장군이 넘은 곳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파미르 고원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중국 대륙을 활개치고 다닌 ‘대륙의 별’이었다.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는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멸망하고 고구려인 20만 명은 중국으로 끌려간다. 그들의 후손이었던 고선지가 세계 제국이던 당의 장수가 돼 실크로드의 지배자로 등극한 것이다.

 

풍채가 늠름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20세에 장군이 돼 그 전에 당나라가 세 차례나 실패한 서역 정벌의 임무를 맡는다. 그는 네 차례의 서역 정벌(740∼750년)에 성공해 당나라와 지중해를 잇는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70개국 이상을 정복한다. 원정 길 중 가장 높은 고도는 4600m나 되었다. 유럽의 역사가들이 18세기 나폴레옹의 알프스 등정보다 더 위대한 전사(戰史)로 평가하는 업적이다.

 

그는 세계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다. 751년에 7만 명의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아바스 왕조를 주축으로 한 사라센 연합군 30만 명과 벌인 탈라스 전투에서는 패하는데 당시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사들이 제지술, 화약 제조술, 나침반 등을 서역에 전하게 된다.

 

고선지는 755년 안녹산의 난 때 장안(長安)을 수비하다 조정의 참소(讒訴)로 진중에서 처형된다.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긴 부하들의 “원통하다”는 외침이 천지를 진동했다.

 

“고선지는 한민족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고선지 평전’을 쓴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의 말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출처; [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고선지 장군 기록 발견|동아일보 (donga.com)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8-03-12 14:00:00

고선지는 유럽 문명의 아버지|주간동아 (donga.com)

 

고선지가 넘은 힌두쿠시 산맥. 나폴레옹이 통과한 알프스 지점은 해발 2500m였지만 고선지가 지나갔던 탄구령은 무려 4600m가 넘는 지역이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공통점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해 세계전쟁사의 영웅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둔황(敦煌) 문서를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은 고선지(高仙芝·?~755년)가 한니발과 나폴레옹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 고선지는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횡단(해발 2500m)했던 것보다 더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통과(해발 4600여 m)했기 때문이다.

고선지는 747년 기병 1만명을 이끌고 4개월간의 대장정 끝에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횡단했다. 그리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북부로 들어섰다. 힌두쿠시 산맥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봉을 비롯해 8000m를 넘는 산 다섯 봉우리가 버티고 있는 곳이다. 게다가 고선지는 이 산맥을 왕복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공격할 때만 알프스 산맥을 지나갔을 뿐, 회군 때는 지중해 연안으로 돌아갔다.

중앙아시아 역사학의 권위자인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크리스토퍼 교수 역시 동서교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고선지를 꼽는다.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래된 계기가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아랍 대 중국’ 전쟁인 탈라스(카자흐스탄) 전투(751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고선지가 동원한 북방 종족이 아랍과 내통해 그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패권은 당나라에서 이슬람 문명인 사라센제국의 손에 떨어졌고, 중앙아시아는 무슬림화했다.

탈라스 전투 때 서방에 종이 만드는 기술 전파

중국 후한(後漢) 4대 황제 원년(105년), 환관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다. 같은 시대 로마에서는 파피루스나 목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문자를 기록하는 수단에서 동양보다 크게 뒤졌던 것이다. 제지술이 전파되기 전까지 유럽은 문자 기록의 수단으로 양피지를 사용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수백 마리의 양이 도살됐다. 하지만 탈라스 전투 이후 서방은 비로소 종이문명을 접하게 된다.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에 포로가 된 2만명의 당나라군 가운데는 제지기술자도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제지술은 이들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전해진 뒤 점차 바그다드(이라크), 다마스쿠스(시리아)를 비롯한 이슬람세계 각지에 퍼졌다. 스페인에 이슬람 세력권인 그라나다 왕국(1238~1492)이 세워지자 그곳에도 자연스럽게 제지술이 전파됐다. 그 후 제지술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시칠리아(이탈리아)로, 또 콘스탄티노플(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다시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필라델피아에까지 이르렀다.

몇 년 전 미국의 ‘라이프’지는 지난 밀레니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을 꼽았다. 탈라스 전투 때 전파된 중국의 제지술은 아랍인을 통해 유럽 각지에 전달돼 마침내 밀레니엄 최고의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1456년 최초의 인쇄물인 성서가 출간됐다. 이는 성서의 민간 보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양문명의 핵심인 기독교의 빠른 전파에 일조했다. 그 영향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는 인류문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나침반도 탈라스 전투 이후 전파된 문물 중 하나다. 이슬람인들은 종교의례(성지 메카를 향해 절할 때 방향을 찾는 데 활용)와 항해에 나침반을 사용했다. 유럽으로 전해진 나침반 덕분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은 희망봉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고선지 평전’(청아출판사)에서 제지술 전파의 촉매 구실을 한 고선지를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르네 크루세 등 중앙아시아 관련 분야의 권위 있는 서양학자들도 고선지를 동서교류사의 획기적인 인물로 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고구려인인 고선지는 어떻게 오늘날까지 중국인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것일까. 북송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는 20만명의 포로를 강제 이송하고 평양에는 노약자만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고구려인들은 나라가 망했어도 끝까지 당나라에 대항했고, 이를 막기 위해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고구려 유민의 후예’ 고선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곳은 중국 서부 간쑤(甘肅)성이다. 사막 사이 길게 오아시스가 있는 이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장군은 이곳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고선지도 스무 살에 중국 신장(新疆)에서 군인이 됐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안서(安西)도호부 절도사에까지 이르게 됐다. 탈라스 전투 패배 후 뚜렷한 관직이 없던 고선지는 안록산의 반란(755년)을 진압하며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러나 고구려인 고선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당나라 현종과 환관들은 고선지를 없애기로 한다. 결국 고선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누명을 썼을 당시 고선지는 본인이 원했다면 부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패망한 고구려인으로 더는 어떤 모욕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고선지는 멸망한 조국에서 강제로 끌려간 포로의 후손이었을 뿐이었다. ‘구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선지의 선임 안서절도사가 고선지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놈’이라 욕했고 고선지가 안서절도사가 된 뒤에도 당나라 벼슬아치들이 그를 헐뜯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의 당나라인들은 고선지를 중국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사실이고, 고선지 장군으로 인해 세계 문명교류사가 한 단계 진전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중세 동서교류사에 일대 전기

문명교류사 연구의 권위자 정수일 교수는 그래서 ‘한국 속의 세계’(창작과비평)에서 고선지를 ‘겨레사를 빛낸 유민의 원형’이자 ‘세계 문명교류사에 기여한 사건 창조형 인물’로 정의한다. 우선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중세 동서관계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4차에 걸친 서역 원정은 승승장구하는 이슬람의 중앙아시아와 중국 동진에 제동을 걸었는가 하면, 그의 최후 일전인 탈라스 전투의 패배는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탈라스 전투 결과,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양대 강국인 이슬람제국과 당 제국이 동서에 병립하는 새 국제질서가 확립됐다. 일단 승패가 갈라진 뒤에는 동서교류가 활발히 전개됐다. 이슬람은 당에 사절을 파견하고, 슬슬(瑟瑟·보석)이나 한혈마(汗血馬) 같은 서역문물이 중국에 들어왔으며 이 문물들은 신라에까지 알려졌다. 이슬람 문명이나 유럽 문명의 발달은 제지술의 도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것은 고선지의 서역 원정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고선지가 갖는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실로 크다는 것이 문명교류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렇다면 서양에 제지술을 전파해 인류문명을 크게 발전시킨 고선지의 업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과연 중국사인가, 한국사인가, 제3의 동아시아사인가. 여기에서도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또는 제3의 역사론 간의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

 

 

서양에서 먼저 연구한 ‘1350년 전의 한류’

영·미 역사학자들, 20세기 초부터 고구려·4백제 유민사에 주목… 고선지·흑치상지·이정기 등 활약상 연구

 

위클리조선 | 기사입력 2007.04.10 14:57 | 최종수정 2007.04.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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