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8. 03:00 이선민 선임기자

 

"홍산문화 주역은 예맥족… 고조선의 모태" (chosun.com)

 

"홍산문화 주역은 예맥족… 고조선의 모태"

홍산문화 주역은 예맥족 고조선의 모태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韓 단군신화·웅녀와 일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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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 주역은 예맥족… 고조선의 모태"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韓 "단군신화·웅녀와 일치" 주장

 

 

심백강 교수  | 기사입력 2008/02/28 [23:49]

문헌으로 보는 동방문명의 뿌리 韓族: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문헌으로 보는 동방문명의 뿌리 韓族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는여러‘고기(古記)’들을인용하고있어우리나라고대국가에관한역사서적이적지않이존재했음을말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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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퍉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탏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흲)이다(夷者흲也).” 여기서 이(夷)를 저(흲)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흲)란 과연 무엇인가. 저(흲)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흲)’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흲)·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흲)의 의미를 다시 저지(흲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흲地)의 저(흲)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흲)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퍉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퍉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퍉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출발점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글/심백강 역사학자·민족문화연구원장

●1956년 경기 파주 출생●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월간 ‘한배달’ 편집인●저서 :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기자사료'‘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입력 2020.07.20 18:11수정 2020.08.20 19:41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한대학원 교수)

사마천이 서 지운 삼황의 실체는 동이족 < 쟁점기사 < 기사본문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사마천이 <사기>서 지운 삼황의 실체는 동이족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한대학원 교수) 중국인 사마천이 쓴 의 역사는 황제 헌원에서 시작중국인의 뿌리가 황제라는 것이고 황제는 동이족이 조상중국 삼황의 뿌리는 태호복희, 오

www.koreahiti.com

중국 역사는 동이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배달겨레의 곁가지 역사다.

 

 

윤복현 | 기사입력 2019/03/01 [15:02

중국시조들인 3황5제는 한민족의 후손들이다:국민뉴스 (kookminnews.com)

 

중국시조들인 3황5제는 한민족의 후손들이다

아직도우리스스로를생물학적으로불가능한곰의후손으로생각하고있는가?9천년한민족사의진실을상징적표현으로함축한[단군신화]는우리한민족이지구문

www.kookminnews.com

 

 

 

2014-11-06 11:57:38 수정 : 2014-11-06 15:10:05

“한국사는 상(商)나라와 밀접한 예맥족이 만든 ‘동이사(東夷史)’다” | 세계일보 (segye.com)

 

“한국사는 상(商)나라와 밀접한 예맥족이 만든 ‘동이사(東夷史)’다”

한국의 상고사를 되찾아온 ‘동이 한국사-한국 고대사의 모든 비밀’의 저자 이기훈 교사.“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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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참담한 역사학계에 강력한 이단자가 나타나 돌을 던지고 있다. 이름은 이기훈 교사. 연세대학교와 북경어언(語言)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현재 서울 명덕외국어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북경대 사학과 출신 정룡(程龍) 교수의 지도로 ‘은상문명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하지만 아직 박사학위가 없으니 강단 사학자들이 말하는 정통 사학자는 아니다.

이기훈은 중국에서 고대 한자인 갑골문을 연구하던 중 한국 문화와 갑골문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현대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갑골문 속 문화현상을 오히려 한국에서 쉽게 찾곤 했는데, 이러한 뜻밖의 사실로 우리 한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연구 끝에 갑골문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을 쓰기도 하고, 이번에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민족적 갈등을 풀고자 하는 염원으로 한·중·일의 고대사를 깊게 연구하여 ‘동이 한국사-한국 고대사의 모든 비밀’(책미래)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중국 역대 정사인 ‘24사’ 중 ‘동이전(東夷傳)’을 번역하고 한국 측 사서와 비교해 한국 고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 책이 바로 이기훈이 기존 사학계에 던지는 돌멩이다. 저자는 중원문명의 창시자인 동이와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왜(倭)의 실체, 백제의 중국 중원 점령 배경 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국 고대사의 수많은 미스터리를 실증 자료와 논리를 토대로 명쾌하게 풀어냈다.

저자는 한국사가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 중심의 국가사가 아니라 고대 중원 문명의 창시국 상(商)나라와 관련이 있는 예맥족이 만든 역사, 즉 ‘동이 역사’라고 보고 이런 관점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다음은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고대사 상식’이다.

“한국인이 신라의 후손이라면 단군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존재가 증명된 최초의 왕조인 은나라(상나라, BC 16세기~BC 11세기)에서도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는 낙랑의 후손이라 주장했었는데, 낙랑은 요서에서 이주한 기자조선의 후손이고, 기자조선은 중원의 은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은나라(상나라)와 관련이 깊은 맥족과 예(부여, 왜)족, 그리고 중국 동부(산동)의 만이(蠻夷)로 불리던 구이(九夷) 세력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예맥족(해모수 세력)과 구이족(하백 세력)의 연합국이다.

백제는 처음 한반도 주인인 예(왜, 부여, 온조왕백제)에서 한(漢, 대방, 초고왕백제)으로, 다시 동쪽 예(동예, 동부여, 왜, 비류왕백제)로, 북부여(근초고왕백제)로, 또다시 중원의 주인이던 연나라(모용 선비국, 동성왕백제)로 지배층이 바뀌다가 마지막에 모용 선비계(동성왕계)를 벗어나 북부여를 회복하려다 멸망한(성왕백제) 다문화·다국적 국가이다.

왜(예, 일본)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BC 3세기 한반도의 대혼란을 피해 일본 열도로 이주한 한반도계 청동기인들(야요이인)이 세운 나라로, BC 10세기 이후 만주와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세력(예족, 부여족)이 중국 연나라, 제나라, 맥족(기자조선, 낙랑)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려 한반도 남부를 거쳐 정착한 나라이며, 서쪽에서 밀려오는 연나라, 맥족 세력(기자조선, 한군현)에 대항하여 만주, 한반도에서 끝까지 싸우다 결국 일본 열도로 축소된 나라이다.”

 

 

2005.02.14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① - 정책뉴스 | 뉴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①

한민족은 누구인가 즉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인’과 ‘한민족’의 개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규정해야 한다. 한국인은 한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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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9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② - 정책뉴스 | 뉴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②

한민족이 다른 민족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민족 즉 ‘우리들이 어디에서부터 왔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기원설로 집약된다. 첫째는 북방기원설이다. 이 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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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7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③ - 정책뉴스 | 뉴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

 

 

2003.07.1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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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7 17:44업데이트 2009-09-17 15:01

 

 

중앙일보 입력 2001.03.22 00:00

"중국 대문구 문화 일군 동이족=고조선족"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국 대문구 문화 일군 동이족=고조선족" | 중앙일보

"중국 대문구(大汶口) 문화의 주인공은 고조선족이었다. "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64) 교수가 최근 나온 『한국학보』(제102호)에서 이런 주장을 해 주목을 끌고 있다. 신교수는 이 논집의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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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16:17] 김명민 칼럼니스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한민족 기원 알려면 세계사 사조 흐름을 주목하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한민족 기원 알려면 세계사 사조 흐름을 주목하라!

우리는어디서왔는가?한민족의기원에는여러가지설들이있겠으나,우리에게많이알려져있는내용을재고하여살펴본다면우선재야사학의필진들에의해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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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 10:04:58

조성신 기자

한국과 한국인의 역사 집대성한 ‘한민족 성씨의 역사’ 출간 - 매일경제 (mk.co.kr)

 

한국과 한국인의 역사 집대성한 ‘한민족 성씨의 역사’ 출간 - 매일경제

역사를 알고 역사의 비전을 찾는 것은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자 덕목이 된지 오래다. 역사는 기록으로 사고에 보관될 때 역사가 된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과 기술이 바탕이지만 한편으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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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칼럼]

여진족 한민족이라는 민족사관으로는 안된다. 족보사관이어야 한다

지나역사는 한족의 역사로 알고 있는데 정리된 것을 보면 한족역사만이 아니다. 지나25사를 보면 한족이 아닌 주변의 역사도 모두 지나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송나라이전 짧은 건국과 패망으로 반복된 역사를 통하여 항상 통합의 역사를 위하여 노력한 사관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건국과 패망의 순환이 오백년에서 천년사이의 오랜 기간의 역사를 이어 오다보니 통합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高麗이후 국가사관에 빠지기 쉬순 상태에서 신채호의 ‘我와 非我’의 분류에서 삼국후예가 조선민족과 여진족으로 분리됨으로서 씻을수 없는 왜곡의 민족사관이 만들어지고 현재의 국가사관에 충실하려다 보니 유구한 역사를 포기하는 듯 비쳐지게 되고 스스로 사서를 부정적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는 아주 나뿐 버릇으로 채워져도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있다.

  삼국후예가 하나되지 못하는 신라통일사관이 판을 치고 여진족과 한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역사를 오도하게 되어 스스로 고구려 발해를 포기하는 듯 보여지게 된 것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라는 말은 19세기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지므로서 시작된 것인데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스스로 왕정시대를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간 민족사관이 아니라 족보사관 즉 최초의 후예는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식으로 삼국후예인 만주인을 여진족이라 하고 高句麗(고구리) 발해 후예이지만 여진족이라며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시각으로는 우리역사를 바로 할 수가 없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사기에서 나타내듯 삼국인이 전통의 기준으로 했던 전전국가 九黎(구리)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족보사관에서 우리역사의 전통을 정립해야 한다.

남북이 싸웠어도 하나로 보듯 병자전쟁(병자호란)도 역시 하나로 보고, 원나라와 고리전쟁도 하나로 보고, 요나라와 고리도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우리역사를 정립할때야 비로소 삼국사기의 후예들은 하나로 될 것이다. 秦漢이전의 역사도 한무제 이전은 우리역사였다. 한무제가 독립하겠다고 정리하였지만 동이에서 분리된 것은 틀림이 없다. 삼국이 전통계승의 모델로 했던 九黎(구리)의 후예는 하나의 역사로 정립해야 한다.

출처;우리역사의 진실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hanou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9

 

 

 

 

한국·터어키 고구려국제학술대회,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과 칭기즈칸은 고구려 왕족의 혈통"

 

왜는 고구리의 식민지, 아시아의 지배자 고구려는 고구리로 불러야

 

기사입력: 2015/11/10 [11:11]  최종편집: ⓒ greatcorea.kr

 


  고구려의 기상이 시정구호인 구리시가 후원하고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이사장 김진만)과 이스탄불문화원, (사)한배달이 공동주최한 제2회 한국·터키 高句麗국제학술대회가 11월 7일(토) 오후에 성황리에 열렸다. 많은 시민·학생들과 역사메니아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열린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준비된 초록집과 기념품이 조기에 동나고 좌석이 모자라 상당수가 서서 경청할 정도로 붐볐다.

▲   250석 좌석이 모자라 서서 경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룬 한국.터키 고구려국제학술대회                      © 편집부

구리시의회 신동화 의장은 축사에서 터키의 6.25 참전과 2002년 월드컵 3·4위전의 감동을 회상하며 향후 한국·터어키 간에 우호친선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서, 본인도 돌궐(터키)와 고구려가 어떤 관계였는지 배우고 싶다면서 학생들과 함께 늦게까지 강연을 경청하기도 했다. 

윤호중 국회의원은 고구리는 고씨의 구리라고 운을 떼고는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몽구리 인도의 무굴제국은 무구리라고 하면서, ~~스탄이 들어간 중앙아시아 민족은 모두 단군의 후예이며 고구리와는 형제였던 투르크족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상호 존중과 융화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박창식 국회의원은 주몽과 태왕사신기와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역사가 책보다 훨씬 파급력이 크다고 전제하고는,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도 스토리텔링을 잘하면 동북공정에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역사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먼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세계 속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초점은 우리와 서쪽으로 12,000km나 멀리 떨어져있는 터키와 한국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인연 때문에 서로 형제국이라고 하는 지에 있었다. 

후세인 이지트 이스탄불문화원장의 터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소개 후 터키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터어키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것이 ‘피끌림’이라고 하면서, 예전부터 터키 국민들은 한국인을 아주 가까운 형제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터키의 짝사랑에 화답할 때라고 말하면서, 이번 국제학술대회가 자칫하면 잊고 잃어버릴 뻔 했던 지구상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역설했다.

 


주몽이 세운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로 불러야
학술계의 노벨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흄볼트상을 4번이나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이스탄불대학교의 오스만 세르트카야 교수는 서울대 이용성 교수의 통역을 통해 한국어와 터키어는 친척이라고 설명하면서, 돌궐비문에 뵉클리(bök li)로 새겨진 나라는 ‘맥고리(貊高麗=맥족들이 사는 고구리)’로 지금의 한반도보다 10배 이상 넓은 초원과 사막지대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면서, 당시 돌궐은 황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성헌식 학술위원장은 “주몽이 세운 나라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닌 고구리로 불렸다는 중요하고도 확실한 단서”라고 하면서, “나라이름 高句麗를 고구리로 올바르게 불러야 역사가 바로 설수 있다. 구리시가 고구리의 도시를 표방한 것도 이러한 인연 때문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과 칭기즈칸은 고구려 왕족의 혈통
얼마 전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라는 책을 출간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고 20여개국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전원철 박사는 족보 연구를 통해 예전부터 터키가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한 이유를 확실하게 밝혔다.


전 박사는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은 대진국(발해)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4대조가 되며, 또한 대야발의 19대손이 바로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 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아울러 과거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뿐만이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오히려 왜고구려부일 가능성 크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사)한배달 박정학 회장은 올해 광복 70주년이라는 주제에 맞게 일제가 호태왕 비문을 조작해 만든 임나일본부(가야=임나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설은 한마디로 허구라고 하면서, 일제의 소행으로 보이는 글자가 깨어지고 없어진 부분을 복원해보면 “호태왕이 기마병 5만을 보내 왜를 유린하자 왜국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는 高句麗의 식민지가 되었다.”라고 해설했다. 

즉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오히려 ‘왜고구리부(왜가 고구리의 식민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 이유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 당시 왜왕이 인덕으로 교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김진만 이사장은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우리의 역사 고구려에 대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발표되었고, 터키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되어 향후 한국·터키간의 우호증진 및 학술교류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덕일의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 답사 #1

2020. 3. 15.

https://youtu.be/38pq39LH1Ao?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이덕일의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 답사 #2 

2020. 3. 16.

https://youtu.be/JuHY2_H_fEc?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박물관 답사 #3

2020. 3. 31.

https://youtu.be/6nTUWTNlstM?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박물관 답사 #4

2020. 4. 4.

https://youtu.be/CpEANlbF618?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이덕일의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 답사 #4-1

2020. 4. 13.

https://youtu.be/40aVFxd2QlY?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신주사기] 조나라 진나라 모두 동이족 장평대전이 없었다면 | 중화문명의 정수 용산문화도 동이문화 인정

2020. 6. 29.

https://youtu.be/RcRpioiX3x4?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참고자료>

 

한민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Koreans - Wikipedia

 

예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Mongoloid - Wikipedia

 

한국고대사 | 천자(天子)는 원래 동이족(한민족)이 쓰던 말 - Daum 카페

 

한국고대사 | 고대 동방(東方)에 백민(白民)이 살았다. - Daum 카페

 

한국고대사 | 고대에 왜 [황해평원]에 사람들이 몰려왔을까. - Daum 카페

 

한국고대사 | 고대 황하중류로 전해져서 새(鳥)로 둔갑한 고대한국의 아사달문양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예(濊)와 맥(貊), 그리고 예맥에 대한 중국 고대 사서의 기록(증보)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융[戎]..호[胡]..맥[貊]...토템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일본..한[韓]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한강유역.. 예족[濊] 한족[韓]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한[韓] 예[濊] 왜[倭]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왜[倭]...어디서 왔는가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동예[東濊]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채도문화 대문구 하플 - Daum 카페

 

자유게시판 - "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오는 韓民族"…고대 아즈텍어 우리 고어와 일치 (siddha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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