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6 03:03업데이트 2009-09-26 03:28

“청원 만수리 구석기유적 베이징 原人과 동시대 것”|동아일보 (donga.com)

2005년 충북 청원군 강외면 만수리에서 발견된 석기 3점.

 

日 마쓰후지 교수 “54만∼56만년전 것 추정”

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충북 청원군 강외면 만수리 유적의 연대가 54만∼56만 년 전으로 추정됐다.

25일 도쿄신문 등에 따르면 한양대와 공동으로 연대추정작업을 해 온 일본 도시샤(同志社)대 마쓰후지 가즈토(松藤和人) 교수는 24일 열린 국제세미나에서 이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신문은 중국 베이징(北京) 근교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原人)의 유골이 30만∼6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며 마쓰후지 교수의 연구결과는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도 원인이 진출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2005년 발견된 만수리 유적은 지하 6m 깊이에 3점의 석기가 묻혀 있었다.

마쓰후지 교수 등은 빙하기의 흰 모래 층과 온난한 간빙기(間氷期)의 붉은 지층이 겹겹이 쌓인 점을 토대로 과거 반복됐던 빙하기-간빙기의 연대와 이를 비교해 유적의 연대를 추정했다.

이런 연대 판정법은 고고학계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일본의 지질학자들은 과학적 연대 측정 방법의 하나인 ‘고지자기(古地磁氣)법’ 등을 이용해 그 타당성을 증명했다.

고지자기법은 과거로 올라갈 경우 암석의 자석 성질이 현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 유물과 유적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마쓰후지 교수는 이 같은 방법으로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유적이 30만 년 전 것이라고 측정한 바 있다.

사토 히로유키(佐藤宏之·고고학) 도쿄(東京)대 교수는 “한국과 일본 사이는 30만 년 전까지는 육지로 연결된 시기가 몇 번 있다”면서 “한반도까지 원인이 진출했다면 일본에도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출처; “청원 만수리 구석기유적 베이징 原人과 동시대 것”|동아일보 (donga.com)

 

 

입력 1981.05.06 00:00

"함북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서 구석기·청동기 겹친 유적발견" | 중앙일보 (joongang.co.kr)

북괴 평양방송은 두만강유역인 함북의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 유적지는 구석기·신석기,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이 차례로 겹이어 쌓여 있다고 지난 2일 보도했다.
북괴방송은 이례적으로 서포항 유적지의 현황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는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맨 밑에는 서포문화로 알려진 구석기시대의 문화층이 깔려있었고 그 위에는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남긴 문화층,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이 있었다.
▲구석기시대의 문화층은 2기층으로 나눠진다. 밑에 놓인 1기층은·10여만년전인 구석기시대 중기에 속하며 위에 놓인 기층은 4만 내지 3만년전인 구석기시대 후기에 속한다.
▲신석기시대의 문화층에서는 21개의 집터와 많은 유물이 나왔다. 이 가운데 맨 밑에 놓인 집터와 유물은 기원전 5천년대에 속하며 맨 위층의 것은 기원전 3백년말기의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장방형이거나 방형, 혹은 원형의 움집을 짓고 살았으며 색인무늬의 질그릇을 사용했다.
▲기원전 3천년대의 사람들은 규모가 비교적 짜여진 움집에서 살며 무늬가 발전된 질그릇을 사용했다. 당시의 농업기구는 곡괭이· 칼· 낫· 칼돌 등이었고 농기구의 재료는 조개·짐승의 이빨 등이었다. 【내외】

출처; "함북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서 구석기·청동기 겹친 유적발견"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18.03.02 06:51

국내 最古 유골 흥수아이, 구석기인 아닐 수도 :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가 충북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흥수아이 두개골 원본을 살펴보고 있다. 이 교수는 충치가 많은 치아 상태와 화석화가 안 된 뼈의 상태를 바탕으로 구석기 유골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 사진 제공 윤신영
 

“위아래 어금니 대부분에서 충치가 보입니다. 갈아 만든 음식이나 곡식을 먹는 신석기시대에는 흔하지만, (곡물 농사를 짓기 전인) 구석기시대에는 거의 보기 힘든 특징입니다.”

 

최근 만난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 손에는 유골이 들려 있었다. 이는 30여 년간 ‘한국 최고(最古)의 구석기인 화석’으로 불려온 ‘흥수아이’의 두개골(頭蓋骨). ‘한국 1호 고(古)인류학 박사’인 그가 흥수아이 검증에 나섰다. 흥수아이를 보유한 충북 청주시 충북대 박물관에서 최근 이 교수를 만났다.

 

흥수아이는 사망 당시 나이가 약 4~6세로 추정되는 아이의 유골로 초등학교 사회과부도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1982년 충북 청원군 가덕면에서 발굴됐다. 발굴팀은 인근에서 구석기 유적과 동물이 많이 발굴된다는 점을 근거로 4만 년 전 구석기 인류 화석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발굴에서 중요한 증거인 출토 지층 등의 엄밀한 기록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퇴골 등 긴뼈의 계측치도 누락돼 있었다. 구석기인이 아닐 가능성이 줄곧 제기됐지만,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고고학계 한 원로는 이를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표현했다.

 

흥수아이 유골을 조사 중인 이상희 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 - 사진 제공 윤신영
 

이 교수가 ‘총대’를 멨다. 올해 1월 충북대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흥수아이를 구석기 화석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며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물관에 보관된 인골 원본의 대퇴골 길이나 치아 상태 등 인골  특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기초 조사에서 구석기인으로 보기 힘든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뼈의 화석화(무기질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통상 1만 년을 기준으로 화석 여부가 갈린다는 점에서 4만 년 전 뼈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해석이다. 또 구석기 때는 매장이 매우 특수한 계층에서 이뤄져 부장품이 같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의문으로 지적됐다. 신석기 인류 고질병인 충치도 다수 확인됐다.

 

이 교수는 현재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고고학계도 그에게 힘을 싣는 분위기다. 흥수아이를 보유한 충북대 박물관도 나섰다. 충북대 박물관 기획부장인 김범철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이 교수와 함께 신체 측정 등 조사에 착수했다. 이선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동료평가(peer review)라는 학술체계를 거치지 않은 주장이 일방적으로 퍼져 지금에 이르렀다”며 “과학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법의인류학자인 진주현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및실종자확인기관 박사는 “흥수아이는 (학술체계를 거치지 않은 탓에) 국제 인류학계에서 아무런 위치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연구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비판하는 쪽에서도 확실한 반증을 내놓을 수 없다 보니 논란이 오래 이어져 왔다”며 “이번에 학문적으로 논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1982년 흥수아이 발굴을 이끌었던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비판에 답할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희 교수와 김범철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인골을 놓고 토론하고 있다. - 사진 제공 윤신영

출처; 국내 最古 유골 흥수아이, 구석기인 아닐 수도 :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

 

 

 

10.01.20 19:22l최종 업데이트 10.01.20 19:22

흔적 없이 사라진 '두루봉동굴유적지'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1월 17일은 청주삼백리 회원들이 대청호반을 답사하는 날이다. 흥덕구청을 출발해 문의면 산덕리 고갯길에 차를 주차시키고 청남대 뒷산인 곰실봉에 올랐다. 대청호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지만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가리고 있어 아쉬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답사 코스가 짧아 산에서 내려오니 이른 시간이다.

송태호 대표가 인근에 있는 두루봉동굴을 들르자는 의견을 내놨다. 마침 두루봉동굴의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홍순두 선생님이 같이 답사를 하고 있어 모두가 환영했다. 사실 두루봉동굴은 내가 여러 번 답사를 계획했던 곳이다. 하지만 인근의 마을 사람들도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동굴이 없어졌다고 말해 실천할 수 없었다.

 

괴곡리 마근이마을 뒤편으로 홍 선생님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니 두루봉동굴유적지에 도착한다. 큰길에서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고, 관계자의 허가 없이는 출입을 금하는 통제구역이라 놀랐다. 더구나 몇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자 두루봉동굴은 어디로 사라지고 인공 빙벽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 수십m 깊이의 거대한 채석장이 자리 잡고 있다. 회원들은 동물과 식물은 물론 구석기 유적, 미라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발굴된 두루봉동굴유적지가 채석장으로 변해 괴물처럼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홍 선생님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굴의 형태가 일부 남아있는 입구의 석회석 벽이 흥수굴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이날 중요한 유적지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홍 선생님에게 두루봉동굴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홍 선생님에 의하면 산의 모양이나 형국이 덕이 있게 생긴 '산덕리', 10집이 망해서 동네를 떠난 '열망골', 한 집안에서 선비가 9명이 나온 '구사리' 등 인근 부락의 이름에 뜻이 담겨있다. 두루봉동굴이 있는 두루봉도 두루뭉실(두루뭉술)하게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산의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홍 선생님과 청주삼백리 회원들은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얘기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마존의 밀림에서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신식 문명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발가벗고 사는 아마존의 원주민이 자기들의 기호식품인 원숭이 한 마리와 문명의 이기인 티셔츠 한 장을 교환하듯 구석기인들의 삶도 당시로서는 느리지만 그렇게 변화했을 것이다. 

두루봉동굴은 1976년부터 83년까지 11차례나 발굴을 했지만 사유지라 발굴 후에도 계속 채석작업이 진행되었고, 보존에 대한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 역사적인 가치가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두루봉동굴에는 의식집행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처녀굴, 쌍코뿔소ㆍ동굴곰 등의 화석이 나온 2굴, 두루봉 정상에서 새로 발굴된 새굴, 완전한 사람뼈가 발굴된 흥수굴, 집터가 발견된 15굴 등 여러 굴이 있었다.

특히 홍수굴은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 동물화석이 발굴된 구석기 유적지다. 이 굴에서 발견된 홍수아이는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매장흔적과 가슴뼈 부분에서 나온 국화과 꽃가루 때문에 구석기인의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흔적이었다.

약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흥수아이의 이름을 발견자이자 광업소 현장소장인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라가 발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지대가 알카리성의 석회암 지대라 가능했다.

대형 트럭들이 오갈만큼 넓은 차도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석회채굴을 위한 굴들이 곳곳에 있는 것으로 봐 지금도 석회석을 채굴하고 있는 것 같다. 자연동굴은 사라지고 인위적으로 뚫은 작은 굴속에 고드름들이 잔뜩 매달려 있다.

채석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된 유적지라 발굴 당시에도 훼손이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되돌릴 수 없는 게 역사이듯 훼손된 유적지를 복구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이곳이 두루봉동굴 유적지라는 안내판 하나쯤 세워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두루봉동굴의 문화적 가치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제 두루봉동굴 현장은 사라지고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박물관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석기발달과 구석기학문의 체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루봉동굴에서 출토된 유물이 충북대학교박물관(http://museum.chungbuk.ac.kr)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제1전시실에 가면 청원 두루봉동굴유적, 흥수아이 인골 및 복원 흉상, 흥수아이 복원 전신상, 동굴곰, 코뿔이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출처; 흔적 없이 사라진 '두루봉동굴유적지'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차병섭입력 2021. 3. 24. 14:06

● 中 백두산 인근 북중 접경서 2만년 전 구석기 유물 발견 (daum.net)

"중국서 발견된 가장 큰 돌날 몸돌..세계적으로 드문 예"

백두산 인근에서 발견된 2만년 전 '돌날 몸돌' [신화통신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선양=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중국 당국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백두산 인근에서 약 2만년 전 구석기 시대 유물을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24일 중국신문망 등 중국매체에 따르면 최근 지린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허룽(和龍)시 난핑(南坪)의 두만강 기슭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대형 '돌날(Blade) 몸돌'이 발견됐다.

난핑은 북한 함경북도 무산과 도로 통상구(口岸)를 통해 연결되는 곳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몸돌에서 나뭇잎 모양으로 돌을 떼어내 돌날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에 발견된 돌날 몸돌은 길이 53㎝, 무게 16.3㎏인 원뿔 형태의 대형 흑요석으로, 돌조각을 떼어낸 자국도 14군데 있다.

지린성 문물고고학연구소 업무판공실 쉬팅(徐廷) 부주임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큰 돌날 몸돌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예"라면서 "구석기 시대 백두산 일대 인류의 석기 제조방법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당국은 석기 발견지점 주변 조사를 통해 30여 곳의 유물 채집지점을 발견했으며, 이 주변 1㎢에 고대 인류가 활동한 유적이 있고 여러 시기에 걸친 유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시급히 고고학 발굴을 통해 유적의 연대와 성격을 추가로 확인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싼싱두이(三星堆) 유적지에서 발견된 3천년 전 황금가면 [쓰촨성 싼싱두이박물관 웨이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한편 중국 정부가 최근 고고학 유물·유적을 통해 중화 민족주의를 강화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중국 곳곳에서 수천년 전 유물 발굴 소식이 공개되고 있다.

중국 문명 발원지인 '중원'과 멀리 떨어진 남서부 쓰촨성 광한(廣漢)의 싼싱두이(三星堆) 유적지에서는 3천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 가면 등이 출토됐다고 20일 공개됐다.

이곳에서는 황금 가면뿐만 아니라 청동기, 옥기, 상아 장식품 등 유물 500여점이 나왔다.

홍콩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를 두고 "중화 문명이 여러 민족에 의해 이뤄진 뿌리를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중부 허난성 양사오(仰韶)촌 유적지에서는 최근 5천여년 전 시멘트 콘크리트로 추정되는 건축자재가 발견됐으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콘크리트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은 지난해 9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고고학 관련 집단학습에서 "고고학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정신적 힘"이라면서 "중화민족의 역사와 중화문명의 보물을 전시하고 구축하는 중요한 사업"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시 주석은 당시 "고고학 성과에 대한 발굴·정리·해석사업을 잘해야 한다"면서 '중화문명 근원탐구 공정', '고고학 중국' 등의 프로젝트를 잘 시행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출처; 中 백두산 인근 북중 접경서 2만년 전 구석기 유물 발견 (daum.net)

 

 

● [단독] 연천군에서 새로운 구석기 유적 발견 - 천지일보 (newscj.com)

경기도 연천군 호로고루성 유적지 인근 경작지에서 발견한 구석기. (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 2019.8.13

 

전곡리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

연천, 구석기 유적의 보고(寶庫)

세계문화유산등재에 서둘러야

“호로고루성 학술조사 돼야”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와 견줄 수 있는 또 다른 유적이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호로고루성의 유적지에서 찾아졌다.

13일 이재준 전 충청북도 문화재위원(역사연구가)에 따르면 최근 호로고루성 인근 경작지 일대에서 다수의 구석기 유물을 발견·확인하고 이를 한국선사학계에 긴급 보고했다.

이 전 위원이 확인한 구석기 유물은 주먹도끼(크기 13X18X12㎝), 긁개(8X11X3㎝), 화살촉(3.5X8X1.5㎝) 등이며 이는 전곡리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보다 시대가 앞서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 중 주먹도끼는 붉은 색의 개차돌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전곡리 출토 아슐리안 형 석기와 비교되며 양날을 떼어 만든 것이다.

석기가 많이 분포된 지역은 성내 호로고루 홍보관에서 성벽으로 통하는 수 만평의 경작지로, 수로를 파 놓은 일대이다. 이 수로에는 삼국시대 각종 토기와 고구려 와편도 엉긴 상태에서 노출되고 있었다. 이 수로에서 확인한 것은 찌르개, 사냥돌, 밀개, 격지, 몸돌 등이며 전곡리 유적처럼 많은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유적으로 추정했다.

앞서 이 전 위원은 지난 1991년 대전 둔산 지역 선사유적과 미호천 일대에서 다수의 구석기 유적을 새로 찾은 경력이 있다. 그는 “연천군은 전곡리 유적 외에 당포성 유적에서도 석기가 찾아진 바 있으며 이번 호로고루성 유적지에서 구석기가 대량 확인한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보고로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시급하다”면서 “호로고루성 일대에서도 구석기 유적 학술조사가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호로고루성에서 구석기 유물이 확인된 것을 보고받은 한국선사고고학계의 원로 이융조 박사(재단법인 한국서사문화연구원 이사장)는 “사진으로 본 석기는 돌려서 뗀 흔적이 분명하다”며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전곡리 선사박물관에 이를 알려 조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은 연천군청 문화체육과를 방문해 김석표 문화재팀장에게도 호로고루성 유적 안에서의 구석기 발견 사실을 알려주고 연천 구석기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 관한 현황을 듣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군 호로고루성 유적지에서 발견한 구석기. (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 2019.8.13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란

한편 전곡리 구석기 유적은 사적 제268호로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의 한탄강변에 있으며 중부 홍적세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8년 미군 병사 보웬이 처음 확인한 이후 10차례 발굴 조사된바 있다.

지표에서도 채집된 석기가 많으며 4000여 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됐다. 석기는 석영암(石英岩)과 규암(硅岩)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며, 현무암과 편마암도 약간 섞여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는 아슐리안형의 주먹 도끼류다. 평면이 첨두형인 것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주먹도끼류와 한 면이 가공된 주먹도끼(handaxe)·가로날도끼(cleaver)·뾰족끝찍개(pick) 등이 포함돼 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의 석기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세계 전기구석기문화가 유럽·아프리카의 아슐리안 문화전통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전통으로 나누어진다는 기존의 H.모비우스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단독] 연천군에서 새로운 구석기 유적 발견 < 천지단독 < 단독 < 문화 < 기사본문 - 천지일보 (newscj.com)

 

 

2019-07-31 04:56:09

● [탐사]호남 구석기 시대 유물도 '방치·훼손' (ikbc.co.kr)

【 앵커멘트 】
일본에 가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영산강 유역 고분의 실태와 문제점, 연속보도해드리고 있는데요.

호남지역 구석기 유적도 마찬가집니다.. 관리가 안된 채 훼손되고 있는 사이, 오히려 일본에서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하며 적극적인 연구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준호 기자입니다.

【 기자 】
수천 기의 태양광 패널 뼈대가 하천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이곳은 순천 평지들유적입니다.

지난해부터 태양광 설치 공사가 진행되면서 높이 2m가 훌쩍 넘는 고인돌과, 후기구석기 유물이 모두 제자리를 떠났습니다.

▶ 인터뷰 : 김순옥 / 순천시 외서면
- "저렇게 인위적으로 훼손해서 태양광을 만들면 유적 (보존과) 반대되는 일 아닙니까"

이번엔 지난 2004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순천 월평유적을 가봤습니다.

구석기 유물이 다수 포함된 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습니다.

구석기 유물이 재료로 쓰인 것으로 밝혀져,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은 70여 년 된 가옥이 지난 2017년에 철거됐습니다.

당시 붕괴 위험이 있고 석면이 노출됐다며 관할 자치단체가 철거한건데 이 과정에서 유물 다수가 파손됐습니다.

▶ 인터뷰 : 박종기 / 순천월평유적보존회장
- "보존회에서 수차례 이야기했는데 저지할 방법이 없었고 우리가 안 좋은 생각이 드는 건 관광객들이 왔을 때 그분들이 좀 (좋지 않게 볼까봐..)"

호남 구석기 유적은 관리 소홀뿐 아니라,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도 언급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석기를 다룬 국내 중·고교 교과서 9종 중, 호남지역 유적을 지도에 표기한 경우는 4종으로 절반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남 지역 구석기를 주목하고 있는 건, 일본 학자들입니다.

동북아시아의 후기 구석기 역사를 이해하는 주요 유물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당시 석기 재료로 쓰인 '흑요석'입니다.

백두산과 일본에서 온 재료가 동시에 발견되는 지역은 오직 호남 구석기 유적 뿐입니다.

▶ 인터뷰 : 암비루 마사오 / 일본 메이지대 고고학과 명예교수
-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서만 사람과 물건이 움직였다기보다는, 넓게 동아시아 전체에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은 선진 구석기 문화를 일본에 전파한 주요 통로로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사토 히로유키 / 일본 동경대 고고학과 교수
- "3만여 년 전 일본 큐슈에 석기문화를 전수해주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슴베찌르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어옵니다)"

일본이 호남구석기 연구에 집중하는 동안 정작 우리는 유적 관리조차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2019.07.29 15:00:43

● 北 통신 "예성강 유역 구석기시대 후기 유적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자연동굴 석기·화석 등 유물 찾아내"

"선조들, 넓은 지역 살며 문화 창조"

【서울=뉴시스】사진공동취재단 = 개성 만월대에서 북한 관계자들이 출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2015.10.1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지훈 기자 = 북한은 최근 중부지역 예성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 후기 유적을 새로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원·연구사들이 예성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 자연동굴을 발굴한 데 기초하여 연구를 심화시켜 유적의 면모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보존유적으로 등록하였다"며 이같이 밝혔다.

중앙통신은 "예성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기는 처음"이라고 강조하며 "3종에 5점의 석기와 3점의 골기, 17종에 732점의 포유동물화석을 비롯한 많은 구석기시대 유물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중앙통신은 이어 포유동물화석이 땅쥐, 족제비, 노루, 곰 등의 것이라고 밝히며 "이 일대에 산림이 우거지고 초원과 구릉성 산지, 습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기후는 현재와 비슷한 온대기후였다"고 분석했다.

중앙통신은 그러면서 "사정리에서 자연동굴유적이 새로 발굴됨으로써 우리 선조들이 구석기시대 대동강 유역뿐 아니라 예성강 유역을 포함한 넓은 지역에 살면서 인류문화를 창조하여왔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선전했다.

北 통신 "예성강 유역 구석기시대 후기 유적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북 "신풍리 인근서 구석기 후기 유적 발굴" - 파이낸셜뉴스 (fnnews.com)

사냥터-석기제적터 유적 발굴
"1만5700여년전 유물로 확인"
 

북한이 서해안 벌방지대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시대 후기(5만년전~1만5000년전) 유적인 사냥터와 석기제작터유적을 새로 발굴했다고 밝혔다.

5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이 유적은 평안남도 숙천군 신풍리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2㎞ 떨어져 있는 논벌에서 발굴됐다.

 

유적에서는 460여점의 짐승뼈화석,10여점의 골기(짐승의 뼈로 만든 로동도구), 20여점의 석기, 1200여점의 석기반제품, 920여개의 포분화석들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중앙통신은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ESR)을 비롯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유물들에 대한 분석과 감정을 진행했다"면서 "그 형성년대가 1만 5700여년전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신풍리유적이 조선의 벌방지대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구석기시대 후기유적이라는것을 확증했다"고 전했다.

또 "조선에서 구석기시대문화에 연원을 둔 신석기시대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했다는것을 논증하는데서 학술적의의가 대단히 크다"고 강조했다.

 

 

출처; 북 "신풍리 인근서 구석기 후기 유적 발굴" - 파이낸셜뉴스 (fnnews.com)

 

 

입력 2007. 4. 20. 19:59수정 2007. 4. 20. 19:59

경북 안동,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출토 (daum.net)

 

2019.05.24 14:14

● “2만년 전 선사시대로!”···대구 달서구서 25일 선사문화체험축제 - 경향신문 (khan.co.kr)

지난해 대구 달서구 한샘공원에서 열린 축제 모습. 달서구청 제공

 

올해 5회째인 이번 축제는 ‘2만년 전 달서로 떠나는 선사시대로 여행’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달서구 지역의 선사유적을 연구하고 알리는 주민협의체 ‘달서선사유적사람들’ 측은 행사를 주관하며 “빽빽한 아파트와 빌딩으로 가득한 도심 속에서 공존하는 2만년 전 과거를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풀어내, 지역 선사유적의 소중한 가치를 주민과 함께 나누기 위해 축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낮 12시30분부터 원시인 복장을 한 주민 130여명은 진천동 선사유적공원(국가사적 411호)을 출발해 도시철도 1호선 진천역을 거쳐 한샘공원까지 도심 행진을 벌이는 ‘선사인(先史人) 거리 퍼레이드’를 통해 축제의 시작을 알릴 예정이다.

지난해 열린 축제에서 관람객과 문화관광해설사가 선사유적을 둘러보고 있다. 달서구청 제공

 

한샘공원에서는 어로 및 사냥체험, 반달돌칼 만들기 등 원시인의 생활을 체험하는 ‘선사테마체험’ 행사를 선보인다. 또 원시인 복장을 한 주민이 프리마켓에서 선사시대 관련 물품을 판매하는 ‘바리바리 돌장’, 이벤트 버스(달리는 돌돌버스)를 타고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선사유적을 둘러볼 수 있는 ‘선사문화유적탐방’, ‘선사인 무용제’, ‘도심 속 선사음악회’ 등이 마련된다.

달서구 지역에서는 구석기~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선사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1998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진천동 입석에는 석축기단을 가진 청동기 시대 입석 표면에 성혈과 태양을 상징하는 동심원 등이 새겨져 있다. 또 입석 주변에 5기의 석관묘가 확인되는 등 청동기 시대의 원시신앙과 제의 매장행위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2006년 대구 월성동 아파트 건설부지에서 출토된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의 모습. 달서구청 제공

 

2006년 월성동 아파트 건설부지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물이 다량 출토돼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백두산을 원산지로 하는 흑요석으로 된 좀돌날, 긁개, 찌르개 등과 석기 제작과정의 석재 등 1만3184점의 유물이 나왔다.

같은 해 대천동 일대를 개발하면서 발굴된 대천동 선사유적은 지석묘와 석관묘 등 매장 유구가 집중된 곳으로 청동기 시대 장례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다. 이 곳에서는 청동기 시대 방형, 원형, 장방형의 주거지 16동을 비롯해 석곽묘 68기, 수혈 7기 등이 확인됐다. 또 각종 무문토기와 지석, 석검, 석촉, 적색마연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바있다.

달서구는 출토된 유물과 유적을 이전 및 복원하면서 2009년 한샘공원을 조성했다. 또 2014년도부터 선사유적탐방사업을 시작해 진천동 선사유적공원 입석에서 고인돌까지를 잇는 ‘고인돌코스’, 대천동 청동기 유적과 월성동 구석기 유적을 잇는 ‘선돌코스’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지금까지 3만여명의 탐방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이태훈 달서구청장은 “이번 축제를 통해 지역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주민의 공감과 관심을 끌어올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 구석기 시대 제주도 선사인, 의.식.주 해결방법은? - 헤드라인제주 (headlinejeju.co.kr)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4) 선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인류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의·식·주의 해결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사냥으로 얻은 가죽을 단순 가공하여 신체를 둘렀을 것이고 풍부한 야생의 먹거리, 이동 생활로 인해 정착생활의 필요성은 없었으며 이동생활을 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동굴에서 생활을 하였다. 

먹거리에 있어서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야생동물들을 수렵, 어획의 방법으로 획득하였고 자생 식물의 뿌리, 잎, 종자, 과실 등을 채취하여 먹거리를 이용하였으며, 계절에 따라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만년 전 까지 올려보고 있으며, 지역적으로 차이는 있으나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는 1만년 전 까지 영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인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 거주하면서 뗀석기를 사용하였으며 수렵, 어로, 채집 생활을 하였다. 제주 지역의 경우에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제주시 애월읍 빌레못 동굴과 서귀포시 천지연 유적 등이 구석기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의 구석기 문화는 한반도 지역과 연륙되어 있던 빙하기에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은 서귀포시 생수궤 구석기 바위 그늘 유적이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야생의 풍부한 먹거리가 많아 정착생활의 필요성을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제주에서는 화산 활동 등 계속되는 지질과 지형의 변화로 인해 당시 수렵인들에게는 다른 곳보다 불리한 생존 조건을 구비했다. 그렇기 때문에 30만 년 전 이전의 전기 구석기 유물이 확인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의 구석기 유적은 극히 짧은 기간에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계속되는 지질과 지형 변화로 인해 제주도의 대지는 당시 수렵인들에게는 다른 곳보다 불리한 생존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인공위성에서 본 한반도(왼쪽), 구석기 해안선 변화(오른쪽)


50만 년 전에서 30만 년 전까지 제주도 화산이 최성기였으며, 중기 구석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시기인 10만년에서 2만5천년에 기생 화산군이 제주도 전역에 걸쳐 만들어진다. 한편 제주는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가치는 동안 한때 중국대륙,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어 당시의 사람과 동물들이 육로를 통해 제주로 이동하기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 빌레못 동굴 입구(왼쪽), 천지연 생수궤 유적지(오른쪽)


제주도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현재의 국사교과서에는 수록되고 있지 않지만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동굴 유적과 서귀포시 천지연 유적이 있다.

제주시 애월읍 빌레못 동굴에서는 기원전 10만년∼4만년 전에 살았던 갈색곰, 대륙사슴, 큰 노루 등 추운 기후에 살았던 동물뼈가 출토되어 그동안 제주도의, 더 나아가 대한 한국의 대표적 구석기유적지로 알려져 왔으며 그 유적은 6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 유적으로 보고 된 적이 있다. 

이 시기의 제주도는 화산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제주의 수많은 오름들은 대부분 10만년∼2만 5천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화산활동이 격심하여 제주의 지표면 전체가 들썩거리던 시기이다. 따라서 빌레못 동굴 유적에 대한 신빙성은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화산활동이 줄어드는 시기에 구석기인들이 제주에 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 된다. 

제주에서 발굴되었던 구석기 시대 유적을 토대로 제주에서의 구석기인들의 생활에 대해서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제주로 이주한 구석기인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 거주하며 사냥과 채집 생활을 영위하였다. 구석기인들은 각 종 뗀석기와 돌날, 좀돌칼 등을 이용한 석기를 생업도구로 사용하였다. 

최근 조사된 천지연 폭포 생수궤 유적에서는 돌날을 이용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음이 밝혀졌으며 제주시 삼화지구 유적과 외도운동장 부지 유적에서도 토양쐐기와 함께 구석기 제작 전통을 지닌 뗀석기들이 발견되었다. 구석기 문화는 한반도 지역이 가장 추웠던 2만8천년∼1만 8천년전 한반도에서 제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빌레못 동굴 유적 갈색곰뼈(왼쪽), 천지연 유적 돌날, 몸돌(오른쪽)

 

제주에서 발굴되는 구석기 유적으로 보아 당시에도 제주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화산활동이 심하고 빙하기로 대륙과 연결된 당시의 지형조건들, 이동생활을 했던 당시의 생활상들을 고려했을 때 구석기 시대의 선사인들을 제주의 선주민들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쉽지만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인류가 사회를 형성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정착생활이다. 다음 차에는 육지와 분리된 제주에서 우리 제주의 선주민일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시대의 제주의 선사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를 하도자 한다.
출처 : 헤드라인제주(http://www.headlinejeju.co.kr)

출처; 구석기 시대 제주도 선사인, 의.식.주 해결방법은? - 헤드라인제주 (headlinejeju.co.kr)

 

 

2016-12-16 15:52

● "백록담 분화구, 1만9천년전 후기구석기 시대에 형성"(종합2보) | 연합뉴스 (yna.co.kr)

 

● 예천 삼강리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 160점 발굴 (daum.net)

 

 

[제주 사람 발자국]

2015-10-05 18:10

"제주 사람발자국은 '화석' 아니다" 국제학술지 게재 | 연합뉴스 (yna.co.kr)

손영관 경상대 교수 연구팀 논문 발표…"3천700년 전 이후 생성"

서귀포 해안의 사람 발자국 화석

<<연합 DB>>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천연기념물 464호로 지정된 제주 사람발자국 화석의 생성 연대가 기존에 알려진 1만5천년 전이 아니라 3천700년 전 이후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손영관 경상대 교수 연구팀은 이 같은 연구결과를 담은 '2015 사람 발자국 퇴적층 하부의 테프라 유리 조성 연구'란 논문을 고고학 관련 국제학술지인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 10월호에 게재했다고 5일 밝혔다.

연구팀은 송악산 화산쇄설층 아랫부분에서 채취한 조개편의 연대가 3천700년 전이므로 사람발자국 흔적의 형성시기도 3천700년 전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하모리층의 사람발자국은 신석기 후기 또는 그 이후 사람의 발자국으로 봐야 하며, 1만년이 넘어야 화석으로 부를 수 있으므로 사람발자국을 화석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정창식 박사 연구팀의 우라늄 비평형 연대측정법을 통해서도 사람발자국이 있는 하모리층의 퇴적 연대가 3천∼4천년 전임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앞서 문화재청의 의뢰로 하모리층 사람발자국 화석의 연대를 측정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약 7천년 전으로 결론 내렸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하모리층의 패각에 대해 탄소14 연대측정법을 통해 3천∼4천년의 연대를, 광여기발광법(OSL) 측정을 통해 7천년 내외의 연대를, 토양유기물의 탄소연대 측정을 통해 7천에서 1만5천년 사이의 연대를 각각 얻었다. 하지만 토양유기물 탄소연대 측정치는 연대 범위가 넓고 시대가 역전되어 나타나는 등 연대자료의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문화재청은 2004년 한국교원대학교 김정률 교수 연구팀이 제주 남서부(사계리) 해안에서 약 5만년 전 사람발자국과 기타 동물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서귀포 해안의 사람 발자국 화석

<<연합 DB>>

 

그러나 문화재청 발표 직후 5만년의 연대가 사람발자국 지층에서 얻어진 연대가 아니라 인근에 있는 송악산 용암의 K-Ar 연대로부터 추정한 연대임이 밝혀졌으며, 그보다 2년 전인 2002년 발표된 한 연구에서 하모리층의 나이가 약 4천년 전으로 확인됨에 따라 사람발자국은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반면, 김 교수 연구팀은 현재도 사람발자국이 구석기인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 교수 연구팀은 2010년 사람발자국 산출지 인접 지역에서 시굴(trench) 조사를 하고 나서 고고학회지에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토양유기물 연대에 기초해 사람발자국의 연대가 약 1만9천년에서 2만5천년 사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손 교수 연구팀은 사람발자국을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토양유기물의 탄소연대이나 이는 하모리층 유기물이 당시 바닷가에 살던 해양생물에서 기원한 유기물이 아니라 육지에서 유래한 유기물임을 간과한 것으로 하모리층의 퇴적연대 해석에 이용하기에 매우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 연구팀이 시굴조사 당시 토양유기물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은 연대를 얻을 수 있는 다량의 패각을 발견했으나 이를 지층 아래쪽으로 흘러들어 간 '현생(modern) 패각'으로 간주하고 연대 분석 자료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손 교수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송악산-사계리 일대에 약 20만년 전의 광해악현무암과 약 4천년 전의 송악산 응회암, 약 3천∼4천년 전의 하모리층은 있으나 김 교수 연구팀이 주장하는 1만∼2만년 내외의 지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 교수 연구팀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석기의 연대를 지닌 '명명되지 않은 지층'(unnamed formation)이 존재한다고 했으나 이는 송악산 응회암과 같은 지층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논문 발표로 그동안 이어진 연대 논란이 일단락될지, 김 교수 연구팀이 또 다른 증거를 내놓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람발자국 화석의 천연기념물 464호의 지위가 그대로 유지될지도 관심거리다.

서귀포시는 현재 김 교수팀의 연구를 바탕으로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 연대 측정 자료에 의하면 약 1만5천년 전에 형성됐다"고 쓴 안내판을 사람발자국 화석 산지에 설치해놓았다.

khc@yna.co.kr

출처; "제주 사람발자국은 '화석' 아니다" 국제학술지 게재 | 연합뉴스 (yna.co.kr)

 

 

2010.11.24 21:39 수정      

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 생성 시기 규명했다 (dailian.co.kr)

순천대 김정빈 교수외 공동 연구자들 화석생성 시기 규명

제주도 사계리에서 발견된 사람발자국 화석(a)과 장비류발자국 화석(b) 사진제공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순천대학교( 물리교육과 김정빈 교수, 극지연구소 임현수 박사, 한국교원대학교 김정률 교수와 진주교육대학교 김경수 교수가 공동으로 연구한, 남제주 해안 사람발자국 화석의 생성 연대에 관한 연구 논문이 국제전문학술지인 고고과학저널(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에 <제주도에서 발견된 사람발자국에 대한 새로운 지질연대>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김 교수팀은 사람발자국 화석이 산출되는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지역의 퇴적층을 수직으로 절개하여 층서를 확인하고 11개의 시료에 대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수행했다.

연대 측정 결과와 멸종된 장비류(털 매머드)의 발자국의 형성 시기를 근거로 제주도의 사람 발자국 화석이 플라이스토세 말기 (약 1만9000~2만5000년전)에 형성됐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플라이스토세의 사람발자국 화석은 아시아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 발견이지만 제주도에서와 같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남제주 해안에 분포하는 100여점의 구석기 사람발자국 화석은 2003년 10월 한국교원대학교 김정률 교수와 진주교육대학교 김경수 교수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이 지역에서는 사람발자국 화석을 포함하여 장비류, 우제류 등 다양한 동물 발자국 화석과 식물화석들이 발견되어 구석기 후기의 고고학, 고인류학, 고생물학 및 고생태학 분야의 연구에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464호로 지정됐지만 지금까지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순천대 김정빈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는 논란이 많았던 사람발자국 화석의 형성시기를 새롭게 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동북아 지역의 고고학, 고인류학, 고생물학 및 고생태학 연구 분야에 중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후기 구석기 인류의 이동 경로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고고지질학 분야의 국제전문저널인 고고과학저널(Journal of Archeaological Science) 12월호에 발간될 예정이다.

위 사진은 남제주군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사람발자국 화석과 털 매머드로 추정되는 장비류의 발자국 화석이다.

출처; 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 생성 시기 규명했다 (dailian.co.kr)

 

2010-11-25 21:21

● 제주 사람발자국 화석 옮겨 보존 : 전국일반 : 전국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입력 2007. 10. 26. 10:10수정 2007. 10. 26. 10:10

[쿠키 사회] 일반인의 발보다 큰 발자국 화석에는 엄지발가락과 뒤꿈치의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포항에서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수석 수집가 변창도씨(48)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앞바다에서 발견한 길이 34㎝, 폭 14㎝ 크기의 사람 왼쪽 발자국 형태가 찍힌 화성암을 25일 언론에 공개했다.

일반인의 발보다 1.5배가량 큰 발자국 화석은 엄지발가락을 비롯해 5개 발가락은 물론 뒤꿈치까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변씨는 "1986년 이 화석을처음 발견하고 모 대학에 화석의 정체에 대해 자문을 구했지만 4만년 전 용암이 식으면서 생성된 화성암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며 "사람의 발자국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얻지 못했고 추가적인 연구는 없었다"고 말했다.

향토 사학자 황인씨(55)는 "포항지역은 주상절리 등 화산활동에서 나타나는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면서 "따라서 화산활동 당시 인류의 발자국이 아닌지,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포항=영남일보 공용진기자 kongyj@yeongnam.com

포항서 4만년전 사람 발자국 화석 (daum.net)

 

<참고자료>

 

우리역사넷 (history.go.kr)

 

●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한국의 선사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한국의 구석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후기 구석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종합고찰 - 1(구석기시대문화)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co.kr)

 

● 한국고대사 | 제주에서 발견된 2만년전 사람과 코끼리(매머드)와 커다란 새 발자국 - Daum 카페

 

승리산 동굴 유적(勝利山 洞窟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덕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평양 용곡리 유적(平壤 龍谷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평양 만달리 유적(平壤 晩疸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평양역포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평양대현동동굴유적

 

두루봉동굴 유적(두루峯洞窟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흑룡강성 옌자강유적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길림성 유수시 주가유방유적, 유수인(위슈인, 楡樹人)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길림성 안도현 석문산유적, 안도인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랴오닝성 셴런둥유적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먀오허우산유적

 

요령 금우산 유적(遼寧 金牛山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진뉴산유적

 

상시인(上詩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점말 유적(점말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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