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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출현~1만년전/(구)석기시대

만주와 한반도

대야발 2020. 5. 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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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카페>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 문화일보
  • 입력 2019-05-15 10:39

최후 빙기 때 동아시아 해안선과 구석기인의 이동 방향.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졌고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다. 고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유일한 동해안이었으며,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오다가 바다에 막혀 정착한 종착지였다. 신용하 교수 제공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해 가장 먼저 뜨는 동아시아로
인류 선구자들 대장정끝 정착

옛 한반도 한강·대동강 일대
사람들 모여드는 곳으로 부상

농업 발달·인구밀집·지적집단
세 조건 갖춘 한반도 문명 발생

우리는 학교에서 인류 최초의 독립 문명으로서 ① 수메르 문명(약 5500년 전) ② 이집트 문명(약 5100년 전) ③ 인더스 문명(약 4200년 전) ④ 고중국(황하) 문명(3600년 전)의 4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초기에 독립 문명으로서 이 4대 문명이 주변으로 파급돼 그 후 인류 고대 위성(衛星) 문명들을 형성·발전시켜서 인류가 문명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낡고 너무 부족한 학설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장 동쪽에, 고중국 문명 형성의 기원이 된 것으로, ‘고조선 문명’(약 5000년 전)이라는 거대 문명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가장 먼저 솟는 땅을 찾아 동방 끝으로 이동해 왔다가 정착한 고(古) 한반도 출신 신석기 말기·고대 초기인들이 신석기 시대 ① 한강 문화 ② 대동강 문화 ③ 요하(遼河) 문화를 하나의 인과적 체계로 묶어서 규모가 큰 찬란한 문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사를 바꿔 써야 할 새로운 문명이다. 이것이 ‘고조선 문명’이다. 토인비도 6개의 유산된 초기 문명이 더 있었다고 유보해 뒀었다. 이번 문화일보 연재에서는 이 새 인류 문명을 탐구해 나가기로 한다.

고인류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 종(種)은 약 5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진화하면서 먼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약 250만 년 전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손 쓴 사람(homo habilis)’이 됐으며, 약 170만 년 전에 꼿꼿하게 걷게 된 ‘곧선 사람(homo erectus, 原人)’이 됐고, 약 20만 년 전에 돌을 깨 불을 사용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됐으며, 약 10만 년 전에는 지혜가 더욱 발전한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 新人)’도 출현하게 됐다. 이 ‘슬기슬기 사람’의 두뇌 용량이나 사고 능력은 현대인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와서 각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곧선 사람’ 단계부터다. 그러나 활발한 이동은 ‘슬기 사람’과 ‘슬기슬기 사람’ 단계라고 설명되고 있다. 진화고고학에서는 ‘곧선 사람’부터 이들을 모두 합쳐서 ‘구석기인’이라고 호칭한다. 이 시기는 지구 전체가 더워서 시베리아에서도 아열대 식물 열매가 열리고 매머드와 공룡이 살았다. 어디에서나 식료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인간 무리(bands)를 이뤄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방향으로 분산 이동했다.

구석기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맹수들과 함께 매일 찾아오는 밤의 어둠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용기 있고 호기심 많은 구석기인 무리는 태양이 맨 먼저 솟아올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밝은(光明) 아침이 먼저 찾아오는 해 뜨는 동방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형세를 이루게 됐다. 고한반도와 연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이고 그 동쪽은 깊은 태평양 바다(동해와 오호츠크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해(태양) 뜨는 동쪽을 향해 수만, 수십만 년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해 온 구석기인 무리의 인류사적 대장정이 누적된 ‘종착역’(terminal) 같은 지역이었다.

빙기 때 해안선과 슬기 사람의 주 이동 경로(20만∼5만 년 전).

인류 최초 4대 독립 문명에 고조선 문명(그림의 A 부분)을 첨가했다. B는 수메르 문명 지역.


유라시아 대륙 동단 고한반도와 연해주 지역에 구석기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00만∼70만 년 전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안남도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유적(약 100만∼70만 년 전)과 절골 유적(약 93만 년 전), 충북 단양군 도담리 금굴 유적(약 70만 년 전)이 이미 발굴돼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반도·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굴 보고된 주요 구석기 유적이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약 5만3000년 전 구석기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왔다. 지구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혹한의 ‘최후 빙기’가 닥쳐온 것이다. 태양광선의 95% 이상이 먼지에 가려져 5% 이하만 지구 표면에 닿았다. 이 시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이북 지역은 긴 겨울에는 모두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돼 생물이 생존할 수 없었다. 예컨대 우랄 지역의 1월 평균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수마트라 섬 적도의 평균 온도는 8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 구석기인들은 북위 40도 이남의 생존 가능한, 따뜻한 지역의 동굴을 찾아 이동한 소수 구석기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멸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최후 빙기에 북위 40도 이북 지역에서는 인류가 상주(常住)하지 못했다. 물론 여름에는 사냥감을 뒤쫓아 북위 40도 이북에서 사냥하면서 계절적 일시 거주는 했다. 그러나 북위 40도 이북에 집단 상주지를 형성하고 문명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선은 한반도 신의주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지나간다. 그러므로 고한반도의 압록강 최하류와 고중국의 베이징 이북은 최후 빙기 약 4만 년 넘게 인류가 상주할 수 없는 얼어붙은 동토였다. 그러므로 한국민족이 시베리아 고(古)아시아족에서 기원했다거나, 톈산산맥 또는 바이칼 호수에서 기원해 내려왔다는 학설은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절의 낡은 학설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 이남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혹한을 피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산지가 비교적 많은 고한반도였다. 한반도의 자연 동굴 총수의 90% 이상이 석회암 동굴이다. 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카르스트(Karst) 지형 석회암 지대는 한반도 중부 차령산맥·소백산맥 일대에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이 지역이 고한반도 ‘제1동굴지대’다. 그다음이 멸악산맥 일대의 ‘제2동굴지대’다. 중국에서는 남방 양쯔강 유역과 광시(廣西)성·구이저우(貴州)성·윈난(雲南)성 지역에 가야 석회암 동굴 지대가 나온다. 고한반도는 최후 빙기 겨울철 동토에 연접한 북방한계선의 매우 추운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최대 석회암 동굴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기존 고한반도의 구석기인과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 해안을 따라 남방에서 꾸준히 이동해 올라온 구석기 신인(슬기슬기 사람)이 합쳐져서, 이 기간에도 종착지 고한반도는 세계 인구밀집 지역의 하나가 됐다.

또한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져 고중국 관내와 이어졌고, 대만과 중국 본토와도 이어졌으며,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기 때문에, 고한반도는 전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 유일한 동해안이었다. 최후 빙기에도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꾸준하게 이동해 들어오다가 바다에 막혀 더 동쪽으로 갈 수 없어서 정착하는 종착지가 고한반도였다.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인류는 최후 빙기의 대재난 시대를 견뎌내고 새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지구 주변의 먼지가 걷혀 태양광선이 모두 땅에 닿으면서 기후가 대체로 오늘날처럼 온난해졌다. 지구 기후가 온난화되자 유라시아 대륙의 동토에 인접해 있던 구석기인들은 모두 동굴에서 나와 부근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새로운 용구로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만들어 사냥·어로·식료 채집을 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구석기인이 신석기인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된 것은 신석기인들의 농업경작(agriculture) 시작이었다. 종래 사냥과 채집으로 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수천 에이커의 토지가 필요했던 데 비해, 농경을 시작하면서 약 25에이커의 토지로 충분해졌다. 그러나 농업경작이 어느 곳에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토지, 온난한 기후, 풍부한 물과 함께 야생종(野生種)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고 육성하려는 의지를 가진 현명한 인간 집단이 필요했다. 농업경작은 신석기인을 특정 지역에 장기간 정착시켰다. 인간의 유랑 시대를 정착 시대로 바꾼 것이다. 농경 마을과 읍락이 형성되고 이것은 대대로 전승됐다. 신석기인의 토지에 결부된 농업경작의 장기 정착은 인류 사이 수천 개의 상호 소통되지 않는 언어족을 만들어 냈다.

사회학적으로 신석기 농업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혁명적 사회변동을 가져왔다. 식량 생산 공급의 잉여 증가는 인구 증가를 결과했다.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분배 과정에서 갈등과 투쟁을 자주 발생시켰다.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은 우두머리와 그 집단이 출현했다. 가족들이 집합해 씨족이 형성되고, 씨족들이 통합해 부족이 형성됐다. 부족들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면, 패배한 부족의 포로는 노예가 되고 승리한 부족장과 그의 무장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세습 귀족이 돼, 신분과 계급이 발생했다.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들을 통합해 대부족장 또는 군장(chief)이 되고 준(準)국가인 군장사회(chiefdom)를 형성했다. 강력한 군장은 다른 군장을 통합해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농업에 통합돼 있던 수공업을 분리시켰고,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분화됐다. 수공업의 발전으로 강한 생산용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연동과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를 발명·제조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철기 제조가 시작됐다. 이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바로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와 철기 제조, 고대 국가의 형성, 신앙의 통일, 언어의 통일과 문자 발명, 초기 과학과 문화예술의 성립 발전 등이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말기 신석기인이 거주한 모든 지역에서 균등하게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일찍 농업경작이 성립 발전하고, 인구가 밀집되고, 지적 성능을 활용한 과학적 수공업 기술이 성립되고, 고대 국가가 형성된 특정 지역에서 형성되고 탄생했다. 이 최초의 특정 지역 구심점이 유라시아 대륙의 두 곳에 뚜렷이 출현했다. 그 하나가 동방 고한반도의 한강과 대동강 유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고조선 문명’이다. 다른 하나가 서방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초승달 지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1)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지식카페>3만9000년前 한반도 눈금돌… 10진법으로 발전해 동방에 퍼졌다

  • 문화일보
  • 입력 2020-05-20 10:46

하진리에서 출토된 ‘줄새김 자갈돌’.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6) 10진법 창조·전파

- 한민족 문명학

남한강 유역 하진리서 발견한 줄새김 자갈돌… 고조선 계승해 농경 기념비·별자리 돌판·토기·돌검 제작 활용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 BC 511년 별자리 그린 것… 1년 365일 주기·24절기 정립했고 달력도 만들어

인류사회의 모든 초기 문명은 각각의 셈법 체계를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은 12진법(進法)과 60진법을 만들어 사용했다. 고조선문명은 어떠한 셈법 체계를 형성해 문명을 창조했을까?

문화재청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4년 6월 16일 남한강 유역인 충북 단양군(수양개) 하진리의 남한강변 구석기 유적 발굴작업 도중에 3개 층으로 구성된 구석기 유적의 최하층(제3문화층)에서 ‘줄새김 자갈돌(눈금돌)’을 비롯해 총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줄새김 자갈돌’이 출토된 제3문화층의 연대 측정은 두 기관에서 39,930bp와 39,680bp(CAL)로 측정됐다. 즉 남한강 유역 단양 하진리에서 약 3만9000년 전 옛 한반도 말기 구석기인의 ‘줄새김 자갈돌’이 출토된 것이다.

이 ‘줄새김 자갈돌’에는 21개의 줄이 1개 눈금 평균 4.141±0.326㎜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계측됐다. 이 유물을 발굴한 고고학팀은 이 ‘줄새김돌’을 말기 구석기인들이 분명히 의도적으로 같은 길이를 계산하고 만든 눈금 선이라고 보고, 이 ‘줄새김 자갈돌’을 구석기 말기∼초기 신석기인들이 어떠한 용도로 사용했고, 자갈돌에 새겨진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갈돌에 대한 연구를 학계에 요청했다.

하진리 ‘줄새김 자갈돌’의 눈금 계측.

필자는 이를 검토 분석해 고조선문명 형성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의 ‘10진법 척도(尺度, 자)’라고 판단했다. 일부에서는 구석기 말기에 어떻게 숫자의 개념이 정립되고 길이 측정의 척도까지 만들 수 있었겠는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와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르봄보(Lebombo)산에서 약 4만4200년 전∼4만3000년 전의 원숭이 종아리뼈에 29개의 줄을 새긴 ‘르봄보 뼈(Lebombo Bone)’가 호주 고고학자 보몽(Peter Beaumont)에 의해 1970년대에 발견됐다. 학계에서 이 눈금돌을 길이의 척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지방 베스트니츠 마을에서 발견된 약 3만 년 전의 7㎝ 크기 어린 늑대 정강이뼈에 새겨진 55개의 눈금은 5개씩 무리 지어 배열되어 있어서 구석기인들이 약 3만 년 전에 셈법의 개념을 정립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아프리카 나일강 상수원의 하나인 에드워드 호숫가의 이샹고(Ishango)에서 1960년 벨기에 브뤼셀대 교수인 지질학자 하인젤린(1920∼1998)에 의해 발견된 약 1만9500년 전의 짐승 뼈인 ‘이샹고 뼈(Ishango Bone)’에 그려진 세 개의 행에 새겨진 눈금을 두고 세계 학계가 아프리카의 말기 구석기인의 숫자 개념 형성과 후일 이집트문명의 ‘10진법(decimal system)’ 형성의 기원까지 논하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옛 한반도 남한강 유역 하진리 ‘줄새김돌’이 ‘길이의 척도’임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된다.

첫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21개 줄의 ‘눈금’ ‘사이 길이’가 평균 0.4141㎝로 균일하다.

둘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자갈돌 전체 길이는 20.6㎝인데, 중앙에 새겨진 눈금칸 20개의 총 길이는 8.2816㎝에 불과하고, 좌우(또는 상하)에 10㎝ 이상의 긴 여백이 남아 있다. 이것은 눈금을 30개 이상 새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0개 눈금칸만을 새긴 것으로서, ‘20개 눈금칸’을 1단위로 한 8.2816㎝의 자 ‘척(尺)’(즉 1尺)을 사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수양개 6지구 하진리 ‘줄새김돌’은 이 지역 구석기인들이 ‘표준척’을 채택해 사용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셈법 언어(수사·數詞)의 구조는 잘 변하지 않는 것인데,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셈법 언어는 당시 용어로는 알 수 없고, 고대·중세 및 현대 한국어에 그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다. 즉 한국어(고대·중세·근대·현대 포함)의 셈법은 정확하게 ‘10진법’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1부터 10까지는 각각 숫자의 독립된 명칭을 갖고 있고, 11부터는 ‘위치’를 한 단계 격상해 옮겨서 1단계의 끝자리의 명칭에 다시 1∼9까지의 명칭을 붙여, 20이 되면 새로 독립된 명칭을 만든 후 또 위치를 한 단계 격상해 옮겨서 1∼9까지의 명칭을 붙이는, 매우 정확하고 기계적인 ‘위치적 10진법(positional decimal system)’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의 정확한 ‘위치적 10진법’의 셈법 표시는 백(온, 百)·천(즈믄, 千)·만(만, 萬)을 넘어서 무한대로까지 10진법을 적용하는 과학적, 기계적, 논리적 체계를 갖고 있다.

남한강 유역 말기 구석기인의 10진법은 그 후 1만2000년 전 지구가 온난화되어 구석기인들이 동굴에서 나와 신석기문화를 만들면서 신석기인으로 진화하자, 이 지역 신석기인의 ‘10진법’으로 계승·확산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이 시작되어 옛 한반도 전체와 북위 40도선 이북의 새 개척지에도 전파되었으므로, 남한강 유역의 ‘10진법’은 옛 한반도 신석기인 문화유형의 이동과 확산에 동반해 전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을 것임을 논의하는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옛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10진법’이 ‘고조선문명의 10진법’으로 발전될 수 있음은 당연한 문화 전승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문명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에서 수양개 ‘눈금돌’ 척도를 계승한 10진법의 ‘척도’를 계속 사용했다는 증거는 한강문화 고고유물에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충북 옥천군 남곡리에는 신석기시대 농업경작의 업적을 기린 기념선돌이 남아 있다. 남곡리 1호 선돌(남곡리 개미재 선돌)은 기념하는 업적 내용을 선돌 표면에 논밭 고랑 45개를 등간격의 줄로 새기어 표시했다. 위의 직삼각형 부분을 제외하면 고랑줄의 길이는 약 41㎝이고, 줄의 간격은 3∼4㎝이며, 줄의 깊이는 최대 1㎝로서 모두 끌(돌끌)로 쪼아서 새긴 것이었다. 농경생활 건축물 제작에 사용한 것이다.

또 충북 청주시 청원의 아득이 고인돌 유적 가운데, 사암을 손질해 편평한 네모꼴(32.4×25×5㎝)로 돌판을 만들고 그 위에 크고 작은 금을 파서 북두칠성·용자리·곰자리 등의 별자리를 새긴 돌판이 발굴됐다. 한강문화 지역에서는 중요한 토기(예: 의례용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제작에서는 하진리 ‘눈금돌 척도’와 같은 길이의 척도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고조선문명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에서는 돌검 등 무기의 제작에서도 남한강 유역 수양개 하진리 출토 ‘눈금돌 척도’와 동일한 ‘길이 척도’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 ‘한’족의 한강문화·대동강문화와 ‘맥’족의 홍산문화, ‘예’족의 신석기문화가 BC 30세기∼BC 24세기 고조선 국가의 건국을 계기로 합류하고 통합되어 인류 최초 5대 독립문명의 하나인 ‘고조선문명’을 창조하는 단계에 들어서자, 고조선문명은 당연히 한강문화의 ‘10진법’을 계승, 채용해 한 단계 더 높은 문명을 창조했다.

자(尺)를 들고 있는 고조선 이주민 족장 복희의 상징 초상.


또한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은 옛 한반도에서 건국된 고조선 국가의 영역이 만주의 요동·요서 지역으로 확대되고, 그 이후 더욱 영역이 확대되는 데 비례해 고조선문명권(圈)의 보편적 셈법으로 전파 확산됐다고 해석된다. 고조선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사이의 옛 중국 동해안에 이주해 정착하고, 일본 열도의 규슈(九州) 지방 등에 이주해 정착하자,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은 이 지역에도 고조선 이주민들과 함께 전파·확산되었음을 추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고대학자들이 약 6000∼5800년 전에 동방 진(震·辰)국으로부터 황하 유역으로 이주해 와서 문명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한 고조선 이주민 태호(太호)의 족장 부부의 문장으로 태양 아래 족장 머리 위에는 ‘자(尺)’를, 족장 부인의 머리 위에는 ‘가위’를 그렸다. 태호족 족장이 고(古)한반도 고조선 진(辰)국 지역에서 갖고 이주한 상징 그림 머리 위의 ‘자(尺)’가 고한반도 수양개 하진리 출토 10진법 ‘눈금돌 자’의 연속선상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산동지역에 처음 고조선 이주민들이 세운 고대국가 가운데 박(밝)국은 점차 발전해 상(商)국이 되었고, 상국은 ‘10진법’을 사용했다. 상의 ‘10진법’은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 전파된 것이다. 필자는 고중국 황하문명의 10진법, 12진법, 60진법 혼용 가운데서 10진법은 고한반도 고조선 이주민인 태호족과 상의 건국 세력이 고조선문명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본다.

옛 한반도에서는 이미 3만9000년 전에 ‘10진법’의 길이 ‘표준척’이 고안되었으며, 이를 계승한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와 뒤이은 고조선문명에서는 이집트문명과는 다른 별도 고한반도 기원에서 그 이전에 ‘10진법’이 사용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집트문명의 10진법에는 1만9500년 전의 이샹고 뼈의 10진법 유물이 배경에 관련되어 있다. 고조선문명의 10진법 배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3만9000년 전의 하진리 ‘눈금돌’ 10진법 척도가 출토되어 있다. 고중국문명의 10진법은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 태호족·소호족과 상의 건국 세력을 통해서 전파된 것이다.

현재 세계 학계의 인류문명사 연구는 10진법이 이집트문명에서 형성되어 세계에 전파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문명의 최저변의 과학적 기초가 된 10진법은 2개의 기원을 갖고 있음이 판명됐다. 그 하나는 동방에서 고한반도에서 탄생한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다. 동방의 10진법은 고중국문명을 포함해 모두 고조선문명에서 전파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집트문명의 10진법이다. 서양의 10진법은 이집트문명의 10진법이 전파된 것이다.

인류문명 진보의 3단계 법칙을 일찍이 정립했던 오귀스트 콩트는 인류의 문명 창조 지식이 수학·천문학·물리학·생물학·사회과학의 순서로 체계화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조선문명에서도 이 체계적 진화가 뚜렷하게 보인다. 고조선문명은 10진법과 햇빛살, 돌 건축물을 기하학적으로 도안·설계하는 놀라운 기하학적 지식, 고인돌 판에 새긴 해·달·별들의 그림, 광물의 여러 가지 합금 기술에서 매우 우수하고 독특한 문명의 시작을 유형화해 나가고 있다.

대한민국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고구려의 석각 탁본을 이성계의 명으로 돌에 새긴 전통시대 세계 최고의 정밀한 성좌도이다. 이 유물은 1467개의 별을 북극성을 중심으로 3개의 원 울타리와 28개의 분야로 구획해 별자리를 정확히 그린 별자리 지도이다. 현대 천문학은 북극성으로부터의 거리와 각도만 있으면 별자리의 연대를 정확히 알아내는 ‘공식’을 정립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이 공식에 그대로 대입해본 결과, 이 별자리는 BC 511년의 하늘을 그린 것이었다. 즉 고조선 시대 고인돌 뚜껑 등 돌에 새긴 별자리를 고구려가 탁본 뜬 것을 이성계가 다시 비석에 새긴 것이었다. 서양 고대의 별자리 관찰은 점성술로 정립되었는데 고조선의 천문학은 해와 달, 별자리 운행의 규칙성을 장기간 관찰해 1년 365일 주기와 24절기를 정립하고 ‘달력’을 작성해 농업 등 과학적 생활에 응용하는 과학으로 크게 발전했다. 강화도 마니산의 고조선 유적 참성단은 제천과 함께 해·달·별을 관측하는 천문대 유적이었다. 고중국에서 ‘은역(殷曆)’ ‘상역(商曆)’이라고 말하던 달력이 ‘고조선 달력’이었다. 중국 고문헌 ‘삼국지’ 예(濊)전은 “(예족은) 별자리 움직임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예견했다”고 기록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정밀하게 밝혀내겠지만, 고조선문명은 10진법과 과학·기술에 기초해 성립된 인류 5대 문명의 세 번째 탄생한 최초 독립문명이었다.(문화일보 4월 22일자 14면 15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천상열차분야지도 : 조선 태조 4년(1395) 음력 12월 석판에 새겨 만든 천문도(天文圖).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중 하나로 문신 권근, 천문학자 류방택과 서운관 직원 등 모두 12명이 만들었다. 이는 하늘의 모습을 12차(12次·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와 분야(分野·역대 왕조에 대응하는 땅의 영역)로 배열해 놓은 그림이다. 천문도에는 성도(星圖)와 함께 24절기에 따른 혼효중성(昏曉中星·초저녁과 새벽에 남중하는 별), 해와 달, 동양의 우주구조론, 천문도 제작 경위, 제작자에 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2)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1978년 미군 병사가 주운 돌, 세계 고고학계 발칵 뒤집어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5월 12일 13시 56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8회>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 배기동 교수

배기동 한양대 교수가 4일 경기 연천군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등 출토 유물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1978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연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4일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곳곳에 화려한 전시물과 행사용 텐트가 들어서 보통의 유적지와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날 열릴 연천군의 ‘전곡리 구석기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올해로 24년째를 맞는 이 축제는 발굴로 불편을 겪는 전곡리 주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64)가 처음 만들었다. 올해는 나흘 동안 관람객 60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행사장을 둘러보던 배기동은 “한때 개발제한 때문에 주민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구석기 축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나무로 둘러싸인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한국 고고학의 대부 삼불 김원룡 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1922∼1993)의 추모비가 있다. 내년 정년퇴임을 앞둔 반백의 노(老) 교수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입을 뗐다. “삼불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삼국시대 마구(馬具)를 전공하려고 한 그에게 삼불은 구석기 연구를 권했다. 이를 계기로 배기동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을 25년에 걸쳐 발굴하게 됐다.

1980년대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 발굴 당시 모습(위 사진). 여기서 출토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아래 사진)는 양쪽 면을 갈아 두 손을 모은 듯한 모양이다. 배기동 교수 제공1981년 11월 1일 오전 10시 전곡리 발굴현장. 한탄강변의 질퍽한 모래흙을 2m가량 파내려갔을 때 서울대 화학과 학부생 한 명이 “무언가 나온 것 같다”며 배기동을 찾았다. 타원형의 돌이 흙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꽃삽과 붓으로 조심스레 돌을 노출시키던 배기동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 흔적이 뚜렷한 옆면이 나타난 것. “처음에는 자연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파보니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어요. 그때까지 발견된 주먹도끼들 가운데 가장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양쪽 면을 갈아 타원형 모양인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다. 프랑스의 생아슐 지방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10만 년 전까지 사용됐다. 고고학계가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찍개 등에 비해 복잡한 가공작업을 거쳐야 해 고(古)인류의 진화 과정을 풀 열쇠로 보기 때문이다. 학계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쓰임새가 많다는 이유로 ‘구석기의 맥가이버 칼’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할 뿐 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에 의해 발견됐다. 모비우스의 학설이 무너지고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보웬이 삼불에게 주먹도끼를 보여준 이듬해부터 시작된 전곡리 발굴에 참여할 당시 배기동은 27세 청년이었다.

그때 발굴단에서 함께 땀을 흘린 후배들은 현재 고고학계 중진이 됐다. 최성락(목포대 교수) 임영진(전남대 교수) 이영훈(국립중앙박물관장) 박순발(충남대 교수) 김승옥(전북대 교수) 등은 주말마다 현장을 찾아와 작업을 거들었다. 당시 배기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현장에 지은 유물전시관에서 아내와 기거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그는 “버스를 타고 오지까지 와서 주말을 희생한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발굴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1983년에 서울 용산의 우물업자들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토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2m 높이의 흙을 한꺼번에 퍼내야 했는데, 당시엔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우물 파는 기술을 응용해 긴 관으로 토층 샘플을 담는 데 겨우 성공했다. 1986년 발굴 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굴착기로 땅을 파면서 6·25전쟁 때 매설된 지뢰들이 드러난 것. 만약 삽으로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고고학계는 전곡리 유적의 연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전곡리가 한국 선사고고학의 개척지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지질학 등 자연과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한 첫 사례로 학제 간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4만∼5만 년 전과 30만∼40만 년 전으로 엇갈린 연대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연구방법을 지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3)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남한 최초 발굴된 구석기시대 집자리… 日 식민사관 잠재우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1월 25일 09시 43분 
 
 

<25>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깃발이 꽂힌 장소가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로 1964년 1호 구덩이가 있던 곳이다. 공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달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 나뭇가지로 엮은 막집 뒤로 수려한 능선과 강줄기가 뻗어 있다. 멀리 강가 공터에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남한 최초 구석기 유적(1964년 발굴)으로 국사 교과서와 공무원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석장리 유적이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시리즈 기획취지에 따른다면 석장리 발굴을 주도한 파른 손보기 선생(1922∼2010)을 인터뷰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됐다. 그 대신 파른의 제자로 1969년(당시 연세대 3년생)부터 5년 동안 발굴에 참여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와 현장을 찾았다.

 48년 전을 회상하던 그가 강가 나루터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번듯한 박물관까지 들어섰지만 그땐 도로조차 없어서 발굴 장비랑 식자재를 매일 배로 실어 날랐어요.”

○ 3만 년 전 구석기 집자리 발굴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파른 손보기 선생의 생전 모습(위 사진). 아래는 이곳에서 1968년 남한 최초로 출토된 주먹도끼. 석장리박물관 제공 1970년 4월 석장리 발굴현장 1지구 51번 구덩이. 삽으로 흙을 파내려 가던 연세대 박물관 발굴팀이 갑자기 긴장했다. 주변 흙과 색깔이 다른 토층이 발견된 것. 변색된 흙은 범상치 않은 동그란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기둥자리 흔적이었다. 현장을 지키던 파른의 지휘 아래 박희현 등 조사원들이 달라붙어 주변을 파자 총 5개의 기둥자리가 드러났다. 불을 뗀 자리도 같이 나왔다. 남한에서 구석기시대 집자리(막집)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막집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긁개와 밀개, 새기개 등도 한꺼번에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이보다 1년 앞서 굴포리 유적에서 구석기 집자리가 발견됐다.

 집자리는 수렵 이동생활을 영위한 구석기인들이 머문 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석기만 발견되는 것보다 의미가 크다. 집자리 위치와 내부 유물의 출토 양상을 통해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장리 1호 집자리 안에서 발견된 오리나무 재질 ‘숯 조각(목탄·木炭)’이 특히 중요했다. 파른은 국내 고고학계에서 처음으로 목탄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실시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측정 결과, 후기구석기에 해당하는 ‘3만690년 전’ 유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0년대 석장리가 구석기 유적이 맞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일단락됐다.

 앞서 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고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인 1962∼1963년 이곳을 답사한 앨버트 모어 부부였다. 이들은 마침 홍수로 무너진 금강 주변토층에서 뗀석기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연세대 방문교수였던 앨버트 모어는 1964년 봄 파른과 함께 석장리를 답사했다.

○ 식민사관 극복한 ‘한국 고고학 선구자’

 “일본인의 식민사관에 의한 선사(先史) 편년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연세춘추 1964년 12월 7일자 기고문)

 파른은 1964년 석장리 1차 발굴을 마친 직후 연세대 학보에 실은 기고문에서 식민사학 극복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일제강점기 대학교육을 받은 파른은 민족의식이 강한 역사학자였다. ‘한반도엔 구석기시대가 없다’는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 1934년 함북 종성군 동관진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흑요석 석기, 동물 뼈)이 발견돼 1941년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논문까지 발표했지만, 일본 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선사시대 역사 왜곡은 비단 1930, 40년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전모가 드러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의 구석기 유물 조작사건이 대표적이다. 후지무라는 1981년 미야기(宮城) 현에서 4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지만 거짓으로 밝혀졌다.

 일본식 학술용어에서 벗어나 뗀석기 용어들을 한글화한 것도 파른의 공이다.

 “발굴 기간 내내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조사에 몰두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1974년 석장리 발굴에 참여한 한창균 연세대 교수가 기억하는 파른이다. 파른은 본래 조선사를 전공했지만 석장리와 인연을 맺고 나서 선사 고고학자로 거듭났다.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파른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해외 고고학 원서들을 섭렵했다. 목탄 수종(樹種) 분석과 꽃가루 분석, 토양 산도 측정,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 다양한 자연과학 분석을 국내 발굴 현장에 최초로 적용한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4)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②구석기시대 문명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8-12-14 06:01
샤먼(주술사)이 새겨진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사진 강인욱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미개한 원시인이 돌을 깨 돌칼이나 돌망치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린다. 문명은 토기를 사용하며 마을을 일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해, 5000년 전 거대한 신전과 도시를 세우고 글자를 사용한 4대 문명에서 꽃을 피운 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이런 선입견을 깨부수는 여러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이다. 구석기시대에서 나왔다고는 선뜻 믿기 어려운 유적이 계속 발견되면서 이제 고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극적인 변화를 유도한 대표적인 유적은 1994년부터 지난 20여년간 조사된 괴베클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인공적으로 쌓은 높이 15m에 너비 300m 정도의 넓은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을 발굴해보니 200여개 돌기둥과 돌담으로 만든 원형 제단을 발견했다.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괴베클리 유적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연대측정을 한 결과 1만3000년~1만년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의 5% 정도만 조사되었으니 대체로 구석기시대 후기인 1만5000년 전부터 이미 사용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는 금속도 몰랐고 바퀴 같은 운송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마을도 없었던 시절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상식을 깬 발견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괴베클리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연구로 다양한 인물 조각상과 해골들이 발견되었고, 그 연대도 확인됐다. 명실상부한 인류 최초의 구석기시대 신전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괴베클리 유적의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괴베클리가 나올 때 동아시아에서는 세계에서 최초로 토기를 사용했다. 토기는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토기가 1960년대 일본 열도를 필두로 1990년대 러시아 극동지역, 2000년대 중국 송화강 중류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 고고학자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토기는 신석기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식이었다. 심지어 토기가 발견된 곳은 세계 문명사에서 변방으로 꼽히던 동아시아지역이었다. 러시아에서 구석기시대의 토기를 처음 보고한 메드베데프 교수는 1980년대 하바롭스크 근처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가샤를 발굴할 때 구석기 유적과 함께 자꾸 토기가 출토되어서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그 결과를 발표하자 바이칼 일대에서 발굴을 한 다른 고고학자도 구석기시대 발굴을 하다 토기를 발견했는데, 본인이 실수를 한 줄 알고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1990년대 러시아가 개방되어 그 연구가 알려졌고, 급기야 2012년에는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2만년 전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렸다. 이제 후기 구석기시대 토기는 상식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지층에서 토기가 발견된 확실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제주도 고산리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가 출토된 바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우

공동체로 빙하기 극복한 구석기인

도대체 빙하기가 끝나지도 않은 구석기시대에 이런 문명의 여러 요소가 발달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3만년 전에 번성했던 현생인류에 있다. 3만년을 기점으로 그 전에 번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이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현대인과 큰 차이가 없고 신체 구조도 비슷해서 현대인의 옷을 입히면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현생인류는 인간들끼리 서로 접촉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사회적인 진화를 이룩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버트 던바 교수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스토리텔링), 종교(샤머니즘)를 꼽았다. 괴베클리 신전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렵민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신전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괴베클리의 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여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 근친혼의 위험이 없이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적어도 500여명의 사람이 한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이외에도 2~3만년 전 프랑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5천개의 장식이 발견된 러시아 순기리 무덤 유적 등은 구석기 사람들의 종교 및 축제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1만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가며 기후가 급변할 때에 사람들은 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빠르게 환경에 대처했다. 반면, 변화에 뒤처지고 소통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구석기시대의 토기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단합을 한 증거이다. 다른 어떤 그릇보다 토기는 조리에 유리하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불을 사용하여 토기로 음식을 만들어 잔치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메드베데프 교수가 발굴한 토기가 발견된 가샤 유적 바로 앞에는 사카치-알리안이라는 암각화가 있다. 이 암각화엔 다양한 샤먼(주술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종교와 문화는 1만5000년을 전후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간 현생인류와 함께 건너갔다. 사실, 1950년대 이래로 중국과 신대륙 마야문명의 종교와 문화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고 지적됐는데, 그 유사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 등이 새겨졌는데

4대 문명론은 제국주의의 발명품이다

완전히 빙하기가 끝난 1만년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따뜻한 날씨가 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초기 농사는 우리 생각과 달리 위험한 모험이었다. 초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체구도 훨씬 작아졌고, 영양 상태도 불량했다. 식량 대부분을 일부 곡식에만 의존했고 흉년에 쉽게 대처할 정도의 농사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각자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으니 전에 없었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아파트에 모여 사는 셈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소통과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해나갔다. 괴베클리 이후인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가 그 상황을 보여준다.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출처 위키피디아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4대 문명만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4대 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4대 문명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자기 앞마당처럼 마음대로 조사하던 지역이었다. 문명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미개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사실 일부 발달한 선진국이 다른 후진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다양한 연구로 고대 문명은 구석기시대를 거쳐서 빙하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현생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변방으로만 치부되었던 세계 곳곳에서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쓸 자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5)

강인욱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세계최초 후기구석기 그물추 나온 정선 동굴서 또 뼈연모 등 유물 대거 출토

서혜림 기자2019. 12. 20. 18:09

 

연세대 박물관, 물고기 뼈 등 어로 확인 증거 발견

정선 매둔 동굴 유적 중 동물 화석 부분 (연세대 제공) © 뉴스1

(서울=뉴스1) 서혜림 기자 = 20일 연세대학교 박물관(관장 조태섭)은 강원 정선군 소재 매둔동굴에서 후기구석기 시대의 이른 시기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층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작년에 조사팀이 그물추를 발견해 어로(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확인한 후 동물뼈 등 좀 더 세부적인 증거를 발견한 셈이다.

연세대 박물관은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강원 정선군 남면 낙동리에 자리한 석회암동굴을 조사했다. 작년에는 동굴 입구 쪽에 위치한 지점을 조사했던 반면 올해는 동굴 안쪽을 조사했다.

 

조사를 통해 땅 밑에서 사슴과 노루 등 식육류 동물화석과 갈밭쥐와 박쥐 등 소형동물의 화석이 발견됐다. 또 참마자, 피라미 등 작은 물고기 종류의 등뼈도 수백 점 출토됐다.

석회암을 돌감으로 이용해 제작한 뗀석기와 짐승뼈를 가공해 만든 뼈연모도 발굴됐다. 작년 발굴에 이어 모루망치떼기(양극타법) 수법으로 제작된 작은 그물추도 출토됐다.

조사단은 추출한 시료를 방사성탄소연대를 통해 분석한 결과, 약 3만7000년 전의 유물인 것으로 확인했다. 해당 연대는 후기구석기의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지난해 발굴에서 연세대 조사단은 세계 최초로 후기구석기의 이른 시기에서 어로활동을 증명하는 그물추를 발견했었다.

연세대 조태섭 박물관장은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구석기시대의 생활환경과 다양한 생업활동을 복원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예정"이라며 "앞으로 관계 기관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구석기시대 문화층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6)

 
 

단양 수양개유적서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발견

2015. 11. 2. 09:53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높은 예술성과 자의식 표현"

단양 수양개 6지구에서 나온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단양 수양개 6지구에서 나온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높은 예술성과 자의식 표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인 충북 단양의 수양개유적에서 사람 얼굴을 새긴 것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돌조각이 확인됐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남한강가에 있는 수양개 6지구에서 지난해 발굴한 유물을 확인하던 중 '얼굴 모양 돌조각'을 찾아냈다고 2일 밝혔다.

성인의 엄지손톱 크기인 이 돌조각은 가로 2.29㎝, 세로 1.57㎝이며, 약 3만5천년 전의 문화층에서 출토됐다. 연구원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등 4개 기관에 이 토층의 시료를 보내 연대를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이경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원은 "구석기 사람들이 얼굴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선을 그은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돌에 새겨진 선들을 얼굴 모양으로 추정하는 이유에 대해 "현미경으로 유물을 살피면 입 부분의 가운데를 살짝 아래쪽으로 그려 인중을 나타냈고, 돌의 전반적인 형태가 이마와 턱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이어 "3만년에서 3만5천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은 선을 그은 것만으로도 예술품으로 간주된다"면서 "얼굴 모양을 새긴 돌조각은 동시대 유물 중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예술성과 자의식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이 돌조각에 대한 연구 결과를 2∼3일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개최되는 제20회 수양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는 관련 유물을 사진으로만 접했다고 전제한 뒤 "인공적으로 조각하듯이 판 것은 틀림없다"면서 "큰 돌의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이라 전체 모습을 본다면 얼굴 조각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얼굴로 보이지만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시대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한쪽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수양개유적은 충북대 박물관이 1980년 충주댐 수몰지역을 조사하면서 발견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는 얼굴 모양 돌조각이 나온 문화층과 동일한 지층에서 '눈금 새김 돌'이 발굴된 바 있다. 이 돌은 길이 20.6㎝의 규질사암 자갈돌에 0.4㎝ 간격으로 눈금 22개를 새긴 것으로, 연구원은 수나 단위 등을 기호화한 측량 도구로 보고 있다.(7)

 

 

 

구석기인들의 눈금자?… 충북 단양서 눈금 새겨진 돌 발굴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4년 6월 17일 09시 52분 
 

0.4cm 간격 22개… 동아시아 최초
1만8000년전 길이-넓이 측정 추정

5월 중순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남한강 유역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눈금(점선 안)이 새겨진 돌. 일정한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져 있는 이 돌은 다른 돌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길이는 20.6cm로 아래쪽 10cm 길이의 자보다 배 이상 길다. 문화재청 제공구석기인들이 ‘눈금자’를 사용했다?

5월 중순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의 남한강가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 작업을 하던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진은 깜짝 놀랐다. 약 1만8000년 전에 제작된 여러 석기를 발굴하던 중 마치 자처럼 일정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진 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구석기인이 포획 동물 수를 뼈에 새겨 넣는 등 수(數) 개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기존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구석기인들이 수를 이용해 크기, 넓이를 계산하는 측정 도구를 사용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었다. 눈금이 새겨진 돌을 보고 놀란 이유다.

 
16일 문화재청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1년부터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단양 수중보 건설지역에서 진행된 후기 구석기 유적(수양개 6지구) 발굴조사를 통해 눈금을 새긴 돌제품 등 총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함께 발굴된 밀개. 동물 가죽을 밀어 기름을 제거할 때 사용됐다. 문화재청 제공연구원에 따르면 이 유적지(830m²)에서는 총 3개의 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발견됐다. 문화층이란 집터, 석기 제작터 등 인류 행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출토된 석기는 몸돌, 격지, 조각, 망치 등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다. 이 일대에서 석기 제작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눈금이 새겨진 돌은 가장 아래층인 3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0.6cm, 너비 8.1cm, 두께 4.2cm의 길쭉한 규질사암 자갈돌에 0.4cm 간격으로 눈금 22개가 새겨져 있다. 손으로 들고 다른 돌의 길이를 잴 수 있는 크기로 망치 등을 제작할 때 쓰였을 수도 있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중간층인 2문화층의 숯 연대를 측정한 결과 약 1만8000년 전후였다. 우종윤 선사문화연구원장은 “눈금 돌이 발견된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처음”이라며 “구석기인들이 단순히 숫자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넘어 각종 사물을 측정하는 용도로까지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눈금 돌이 측정용으로 사용됐는지를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낼 계획이다.(8)

 
 
 

후기구석기유적서 간돌 첫 출토

업데이트 입력 2004-05-13 18:52

 

우리나라의 전형적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마제석기)이 여러 점 출토돼 마제석기의 최초 사용 시기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李起吉)은 13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만8500년 전∼2만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이 출토됐다고 발표했다.

발굴된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점,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 자귀 2점,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이 나온 가장 오래된 유적은 1만20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다. 따라서 이보다 최대 1만년 앞선 신북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다.

국내에선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가 출토됐지만 마제석기의 제작도구까지 함께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대 박물관 이기길 관장은 “이번 발굴로 신석기시대 이전에도 마제석기가 사용됐음이 확실해졌다”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함께 발굴된 경우는 일본 나가노현 간노키 유적과 히비야 유적 정도다.(9)

 

 

 

<주>

 

 

(1) <지식카페>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 문화일보 munhwa

 

 

 

(2) <신용하의 지식카페>3만9000년前 한반도 눈금돌… 10진법으로 발전해 동방에 퍼졌다 :: 문화일보 munhwa

 

 

 

(3) 1978년 미군 병사가 주운 돌, 세계 고고학계 발칵 뒤집어|동아일보 (donga.com)

 

 

 

(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남한 최초 발굴된 구석기시대 집자리… 日 식민사관 잠재우다|동아일보 (donga.com)

 

 

 

(5)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hani.co.kr)

 

 

 

(6) 세계최초 후기구석기 그물추 나온 정선 동굴서 또 뼈연모 등 유물 대거 출토 (daum.net)서혜림 기자입력 2019. 12. 20.

 

 

 

(7) 단양 수양개유적서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발견 (daum.net)2015. 11. 2. 09:53

 

 

 

(8) 구석기인들의 눈금자?… 충북 단양서 눈금 새겨진 돌 발굴|동아일보 (donga.com)입력 2014-06-17 03:00업데이트 2014-06-17 09:52

 

 

 

(9) 후기구석기 유적서 간돌 첫 출토|동아일보 (donga.com)입력 2004-05-13 18:52업데이트 2009-10-04 17:47

 

 

 

 

 

<참고자료>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한국의 선사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의 구석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후기 구석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승리산 동굴 유적(勝利山 洞窟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덕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평양 용곡리 유적(平壤 龍谷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평양 만달리 유적(平壤 晩疸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평양역포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평양대현동동굴유적

 

 

두루봉동굴 유적(두루峯洞窟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흑룡강성 옌자강유적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길림성 유수시 주가유방유적, 유수인(위슈인, 楡樹人)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길림성 안도현 석문산유적, 안도인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랴오닝성 셴런둥유적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먀오허우산유적

 

 

요령 금우산 유적(遼寧 金牛山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구석기시대편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 진뉴산유적

 

 

상시인(上詩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점말 유적(점말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유적별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

 

 

단양 수양개 유적(丹陽 垂楊介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관진 유적(潼關鎭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검은모루동굴 유적(검은모루洞窟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연천 전곡리 유적(漣川 全谷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진천 송두리 유적(鎭川 松斗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공주 석장리 유적(公州 石莊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빌레못동굴 유적(빌레못洞窟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中 백두산 인근 북중 접경서 2만년 전 구석기 유물 발견 (daum.net)차병섭입력 2021. 3. 24. 14:06

 

 

[단독] 연천군에서 새로운 구석기 유적 발견 - 천지일보 (newscj.com)

 

 

[탐사]호남 구석기 시대 유물도 '방치·훼손' (ikbc.co.kr)2019-07-31 04:56:09

 

 

北 통신 "예성강 유역 구석기시대 후기 유적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2019.07.29 15:00:43

 


“2만년 전 선사시대로!”···대구 달서구서 25일 선사문화체험축제 - 경향신문 (khan.co.kr)2019.05.24 14:14

 

 

 

정선 매둔동굴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또 대거 출토 (daum.net) 입력 2019. 12. 20. 15:54

 

 

 

강원정선 후기구석기 그물추 확인, 인류 물고기잡이 最古?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등록 2018.08.07 12:03:03

 

 

강원도 정선 매둔동굴서 2만9000년전 구석기 그물추·손가락 뼈 발굴 - 파이낸셜뉴스 (fnnews.com) 입력 2018.08.07 09:12수정 2018.08.07 09:12

 

 

Cast from the past: World's oldest fishing net sinkers found in South Korea (phys.org)AUGUST 7, 2018

 

 

 

국내 最古 유골 흥수아이, 구석기인 아닐 수도 :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2018.03.02 06:51

 

 

구석기 시대 제주도 선사인, 의.식.주 해결방법은? - 헤드라인제주 (headlineje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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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발자국은 '화석' 아니다" 국제학술지 게재 | 연합뉴스 (yna.co.kr)2015-10-05

 

 


단양의 후기구석기 유물 '밀개' (daum.net)김양수입력 2014. 6. 16. 10:54수정 2014. 6. 16. 10:54

 

 

 

단양 적성면 하진리에서 후기 구석기 유물 쏟아져 - 보도자료 | 브리핑룸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2014.06.16

 

 

 

 

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 생성 시기 규명했다 (dailian.co.kr)2010.11.24

 

 

제주 사람발자국 화석 옮겨 보존 : 전국일반 : 전국 : 뉴스 : 한겨레 (hani.co.kr)2010-11-25

 
 

 

 

북 "신풍리 인근서 구석기 후기 유적 발굴" - 파이낸셜뉴스 (fnnews.com)

 

 

경북 안동,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출토 (daum.net)입력 2007. 4. 20. 19:59

 

 


국내 최대 후기구석기 유적 발굴 (daum.net)입력 2003. 11. 17. 05:27수정 2003. 11. 17. 05:27

 

 

장흥 구석기시대 유적서 간석기 확인 (daum.net)

 

 

 

"함북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서 구석기·청동기 겹친 유적발견" | 중앙일보 (joongang.co.kr)입력 1981.05.06 00:00

 

 

종합고찰 - 1(구석기시대문화)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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