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준 기자  승인 2024.01.27 11:21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백제의 요서군과 진평군이 어디인지를 앞선 기사에서 짚었다. 두 지역을 짚고 넘어간 이유는 백제와 북위 사이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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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 이야기 ④]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장수들을 왕과 제후로 봉한 백제 동성왕

본지가 그려본 서기 488년 당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지역과 양군의 진격로를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백제의 요서군과 진평군이 어디인지를 앞선 기사에서 짚었다. 두 지역을 짚고 넘어간 이유는 백제와 북위 사이 전쟁이 발생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대략적으로 살피기 위함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진평군은 위치가 너무 남쪽에 있으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아마도 요서군 지역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는 488년에 있었던 백제와 북위 사이의 전쟁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중국 25사 중 하나인 『남제서』에는 좀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그를 통해 백제의 영토가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도 상세하게 나와 있어 주목을 끈다.

이 『남제서』란 책은 남조의 제나라 역사를 다룬 책인데 재미 있는 건 남제란 나라는 479년에 건국되어 502년에 멸망해 백제 동성왕의 재위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려 7명의 황제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남제란 나라가 국력도 허약했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남제서』에 기록된 서기 488년 당시 백제와 북위의 전쟁 상황에 대해서 같이 한 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장수들을 왕과 제후로 봉한 동성왕

『남제서』는 백제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에 국서를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한 내용을 인용하여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물론 해당 사서는 어디까지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찌든 중국인의 시각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실제 동성왕이 쓴 원문과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기록이 너무도 길기 때문에 원문 전체를 다 올리지는 못하지만 기록을 요약해서 보면 이렇다. 서기 488년 당시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자 동성왕은 저근(姐瑾), 부여고(扶餘古), 부여력(扶餘歷), 부여고(扶餘固) 등 4명의 장군들을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논공행상 내용이다. 저근은 본래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이었는데 이 전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으로 봉해졌다. 또 부여고(扶餘古)는 전쟁 전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였다가 전쟁 후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으로 봉해졌다.

그 밖에 전쟁 전 건위장군이었던 부여력은 전쟁 후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으로 봉해졌고 전쟁 전 광무장군(廣武將軍)이었던 부여고(扶餘固)는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로 봉해졌다. 즉, 동성왕이 백제 장군들을 왕과 제후로 봉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이 말은 곧 백제의 임금은 황제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백제가 제국(帝國)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봉왕, 봉후된 4명의 백제 장군들의 영지를 모조리 한반도 안에 있었던 곳으로 왜곡해 놓았다. 먼저 저근의 첫 번째 영지인 면중에 대해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이렇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王, 侯와 관련된 地名으로 보아 武珍州로 比定하는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任那興亡史』) 武珍州는 全羅南道 光州가 되거니와, 文章의 內容으로 보아 地名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것은 百濟의 中央統治制度 및 地方의 行政統制라는 측면에서 거듭 연구를 해야할 問題이다. 한편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의 海外經略說과 관련하여 批判的인 見解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要한다."

면중의 위치는 무진주 즉, 광주라는 것인데 근거는 없다. 그냥 일제 식민사학자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자신의 책인 『임나흥망사』에다 아무 근거 없이 말한 것이 고작이다. 그래놓고 “한편 이러한 류의 지명비정은 백제의 해외경략설과 관련하여 비판적인 견해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요한다.”는 말을 덧붙여 어물쩍 빠져나가고 있다.

만약 백제의 해외경략설을 사실로 보고 있었다면 윤내현 교수 같은 다른 사람 말을 인용했을 것이지 일제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 같은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근의 새 영지인 도한에 대한 주장은 이렇다.

“都漢에 가까운 地名을 『三國史記』「地理志」에서 찾아보면 武州에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다. 하나는 分嵯郡의 屬縣으로 豆肹縣이 있고 또 하나는 發羅郡의 屬縣으로 豆肹縣이 있다. 前者는 全羅南道 高興地方으로 보고 있으며, 後者는 羅州地域으로 잡고 있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221)”

도한은 분차군 속현인 두힐현 혹은 발라군의 속현 두힐현으로 전남 고흥군 혹은 나주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물론 없고 그냥 아무렇게나 막 찍은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 역시 일본인 학자인 이노우에 히데오다. 도한이 두힐현이랑 같은 곳이란 근거는 발음이 비슷한(?) 것밖에 없다. 부여고(扶餘古)의 첫 번째 영지인 팔중에 대한 해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末松保和는 武州 發羅郡이 가장 가깝다고 보고 있다. 鮎貝房之進은 이를 半奈夫里縣에 比定하고 있다.(「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 이들을 현 지명과 대비하여 보면 發羅는 지금 全羅南道 羅州이며, 半奈夫里는 羅州郡 潘南面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 大王制下의 ‘王’·‘侯’의 存在와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다. 한편 최근 學界 일각에서 百濟王侯制의 존재를 百濟의 大陸 및 日本列島에로의 海外經略說과 연관, 고찰하는 경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비추어, 종래의 地名 比定 또한 再考되어야 한다.”

즉, 전라남도 나주시라는 것인데 물론 이 역시 근거는 없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와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멋대로 비정한 게 전부다. 그래놓고 역시 어물쩍 백제의 해외경략설을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하며 책임 회피를 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임지인 아착에 대한 주석은 이렇다.

“『三國史記』「地理志」百濟條에는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阿次山郡이 있다. 이곳은 務安郡 押解面으로 비정하고 있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221)”

아착은 백제의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그 위치는 전라남도 무안군 압해면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역시 없다. 오로지 이노우에 히데오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전부일 뿐이다. 부여력의 임지인 매로는 이렇게 비정했다.

“『三國史記』「地理志」百濟條에는 馬西良縣이 있다. 이는 沃溝郡 沃溝邑이다. 이와 비슷한 地名으로는 馬斯良縣이 있으며 이는 寶城郡 會泉面으로 比定되고 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이것을 全南 長興郡 冠山面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221)”

매로는 백제의 마서량현이며 그 위치는 전라북도 옥구군 옥구읍이고 다른 견해로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혹은 장흥군 관산면이라는 견해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 역시 근거는 없다. 오로지 이노우에 히데오가 마음대로 찍은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부여고(扶餘固)의 임지 불사에 대한 주석은 이렇다.

“比自伐에 比定한다면 이것은 全羅北道 全州가 된다. 물론 比自伐은 昌寧의 古名이지만 이것은 해당되지가 않는다. 위의 이름과 유사한 것으로 分嵯郡이 있는 바, 이는 全羅南道 長興郡 冠山面에 비정되고 있다.”

이 역시 발음 비슷한 것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전라도 지역이 크면 얼마나 크다고 이런 곳에 4명의 왕과 제후가 존재한단 말인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광주광역시 면적까지 다 합쳐봤자 북경시보다 약간 더 큰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조그만 곳에 왕과 제후를 4명씩이나 봉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솔직히 말해서 불사와 비사벌이 뭐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발음 비슷한 것으로 지명 짜 맞추면 불사란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브라질을 중국어로 ‘바시(巴西)’라고 하는데 불사를 중국어로 읽으면 ‘푸시’가 된다. 어떤 이가 보기엔 이 두 발음도 비슷해 보이는데 저런 식으로 논증하면 불사는 지금의 브라질이란 주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은 백제는 한반도 호남 지방에 있었던 소국이라고 미리 못을 박아둔 상태에서 『삼국사기』 《지리지》를 뒤적거려 대충 발음 비슷한 지명들을 짝지어서 아무 곳에나 비정한 것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즉,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백제가 공격을 받은 지역은 북경시 일대

그런데 위 내용보다 더 쇼킹한 내용은 동성왕이 보낸 두 번째 표문에 있다. 이 역시 488년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 및 인사 이동 조치에 담긴 것이다. 앞서 언급한 4명의 장수 외에 3명의 장수가 더 언급되는데 아마 이들이 북위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였고 저근을 비롯한 4명의 장수가 야전을 이끈 것으로 판단된다.

추가로 언급된 3명의 장수는 건위장군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장사(長史) 직의 고달(高達)과 건위장군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 양무(楊茂), 선위장군(宣威將軍) 겸 참군(參軍) 회매(會邁)라는 인물이다. 이들이 언급된 것으로 볼 때 서기 488년 당시 북위가 쳐들어간 곳은 백제의 광양군과 조선군으로 추정된다. 그럼 이 2곳의 위치를 알면 전쟁이 발생한 지역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광양군의 경우 이 지명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등장하지 않는 지명이다. 전라남도 광양시는 한자가 다르다. 이로 볼 때 고달이 태수를 지냈던 광양군은 한반도의 지명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광양군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① 한나라 때 광양국(廣陽國)을 설치했고 후한 때 군으로 삼았으며 삼국의 위나라가 연국(燕國)으로 삼았다. 옛 치소는 지금의 북경시 대흥현(大興縣) 서남쪽에 있었다. ② 북위가 설치했고 북제가 폐지했다. 옛 치소는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동북쪽에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북경시 일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절은 북위가 있었던 시절이므로 아마도 두 번째 기록이 좀 더 사실에 부합하리라 본다. 그 밖에 오늘날 북경시와 천진시 사이에 위치한 하북성 낭방(廊坊)시에도 광양구가 존재한다. 가만히 보면 앞서 살펴본 백제 요서군 지역과 거의 비슷한데 이로 볼 때 북위가 공격한 지역이 백제 요서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현대의 이병도는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현재의 평양에다 처박아 놓고 한사군 전쟁이 거기서 일어났으며 그 일대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거짓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엄연히 사서에 하북성 창려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다음은 조선군의 위치를 찾아보도록 하자. 조선군의 경우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선 찾아볼 수는 없다. 이는 진평군과 마찬가지로 중국 왕조와는 관계가 없는 순수한 백제의 지명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현의 기록은 있는데 이 역시 진평군과 마찬가지로 백제가 조선현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현의 기록은 이렇다.

“① 한나라가 설치했고 후한과 진나라까지 이어졌다. 『괄지지(括地志)』에 ‘고구려 왕험성이다. 즉, 고조선 왕험성이다.’고 하였다. 곧 지금의 평양이다. ② 북위가 조선 백성을 이곳으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했고 북제가 폐지했다. 옛 성이 지금의 직예성 노룡현 동쪽에 있다.”

본래 조선현이란 곳은 낙랑군의 속현이었는데 아무래도 낙랑군 조선현이었던 곳이 후에 북위 시절에 백제의 조선군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①의 기록은 고의적인 역사 왜곡인데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사기집해》에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창려가 험독현이고 그곳에 왕검성이 있었단 뜻이다. 《사기색은》에는 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험독은 옛 도읍의 이름이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지리지의 주(注)에서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 하였고,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즉, 조선왕의 도읍인 왕검성이 험독현에 있으며 현재 창려에 있다는 뜻이다. 이 창려현이란 곳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험독이란 말의 뜻은 물길이 험하다는 뜻인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왕검성을 왕험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②의 기록을 보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동쪽에 조선현이 있다고 했는데 창려현은 노룡현의 동남쪽에 있다. 이로 볼 때 위만조선의 왕검성에서 유래한 낙랑군 조선현과 북위의 조선현은 서로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양무가 태수를 지냈던 조선군은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로 추정된다.

위치를 볼 때 서기 488년에 북위가 공격한 지역은 고달이 태수로 있었던 광양군이었고 조선태수 양무는 인근에서 고달을 지원한 사람이며 저근을 비롯한 4인의 장수는 백제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병력을 이끌고 북위군을 섬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회매라는 인물은 참군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저근을 비롯한 4인의 장수를 도와 작전 수립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북경에서 상해까지 이른 백제의 영토

이후 이들은 논공행상을 거쳐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번엔 그들이 발령을 받아 떠난 곳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회매가 태수로 부임하게 된 청하군의 경우 이 역시도 한반도에는 없었던 지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청하군의 위치를 찾으면 이렇다.

“① 한나라가 설치했고 지금의 직예성 청하(清河), 고성(故城), 조강(棗強), 남궁(南宮), 산동성 청평(清平), 은현(恩縣), 관현(冠縣), 고당(高唐), 임청(臨清), 무성(武城)의 땅이다. 치소는 청양(清陽)이다. 후한이 청하국으로 삼았으나 북위가 다시 군으로 삼았다. 옛 치소는 지금의 직예성 청하현 동쪽이다. 수나라가 폐지했으나 얼마 후 다시 설치했고 치소를 청하로 삼으니 지금의 청하현 북쪽 10리에 있다. 원나라가 폐지했다. ② 남조 송나라가 설치했다. 치소는 반양성(般陽城)이며 북위가 동청하군(東清河郡)으로 고쳤고 북제가 폐지했다. 즉, 지금의 산동성 치천현(淄川縣)의 치소이다. ③ 북위가 설치했고 아울러 현을 설치했다. 옛 치소는 지금의 하남성 상성현(商城縣) 동쪽이다.”

3곳 모두 북위와 조금씩 관련이 있는데 ②의 경우는 북위 때엔 청하군이 아니라 ‘동청하군’이었으므로 후보에서 제외된다. ③의 경우는 위치가 하남성 신양시 상성현이라고 했는데 뒤에서 살펴볼 북위 광릉군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①의 경우는 지금의 하북성 형태시 청하현을 말하는데 광양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곳이다. ①이 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음으로 조선태수 양무가 발령을 받아 새로이 태수로 부임하게 된 광릉군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자. 광릉군 역시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지명으로 한반도에 없었던 지명이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광릉군의 위치를 찾으면 이렇다.

“① 한나라의 광릉국(廣陵國)이었고 후한 때 군으로 고쳤다. 치소는 광릉으로 옛 성이 지금의 강소성 강도현(江都縣) 동북쪽에 있었다. 진나라 초기에 치소를 회음(淮陰)으로 옮기니 강소성 회음현 동남쪽 50리에 있었다. 동진 때 다시 지금의 강도현으로 치소를 옮겼다. 수나라가 양주(揚州)를 설치했고 또 강도군으로 고쳤다. 당나라가 다시 양주를 설치했다가 광릉군으로 고쳤고 또 양주로 고쳤다. 송나라는 양주 광릉군이라 했다가 후에 폐지했다. ② 북위에서 설치한 곳으로 광릉성 항목을 참조하라.”

역시 북위 때의 기록이므로 ②의 기록이 시키는 대로 광릉성 항목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릉성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직예성 문안현(文安縣) 서북쪽 20리에 있었고 신진현(新鎭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송나라 때 이곳에 군량을 모았고 익진관(益津關)이 지키게 했다. ② 지금의 하남성 식현(息縣)의 치소이다. 본래 한나라 신식현(新息縣)의 땅이다. 북위가 광릉군을 설치했으나 양나라가 이기고 이내 군으로 삼았다. 그 후로 항상 땅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북주가 광릉을 빼앗고 마침내 신식현을 이곳으로 옮겼고 식주(息州)를 설치하고 군을 폐지했다.”

즉, 광릉군은 오늘날 강소성 양주(揚州)시 강도구와 하남성 신양(信陽)시 식현 2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곳이 합당할까? 우선 전자의 기록을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자의 기록을 보면 전한 → 후한 → 서진 → 동진까지는 변천 양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동진∼수나라 때까지의 변천 양상은 전혀 기록이 없다.

동진이란 나라는 317년에 건국되어 420년에 멸망한 나라이고 수나라는 581년에 건국되어 618년에 멸망한 나라이다. 즉, 160∼300년간의 기록이 뻥 비어있는 셈이다. 이것을 단순히 그 200∼300년 동안 어떠한 행정구역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 마침 동성왕이 재위한 기간이 그 사이 기간에 해당한다.

그리고 북위란 나라는 386년에 건국되어 534년에 멸망한 나라인데 꼭 동진과 수나라 사이에 존속했던 나라였다. 그 북위가 설치한 광릉군이 하남성 신양시 식현에 있었다고 한다. 혹 동진∼수나라 사이에 강소성에 있었던 광릉군이 중국 왕조의 영토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속해 있었고 그 때문에 북위가 하남성 신양시에 제 2의 광릉군을 설치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로 볼 때 광릉군은 오늘날 강소성 양주시에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과연 현재도 중국 지도를 보면 과거 강도현이었던 곳은 현재 강도구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강도구 바로 서남쪽에 지금도 광릉구가 있다. 이로 볼 때 과거 강도현이란 곳은 지금의 양주시 강도구와 광릉구 두 곳을 모두 포함하고 있던 곳이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둘로 나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광릉군은 중국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상해에서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231km 지점에 있다. 백제 동성왕이 이곳에도 태수를 임명했다는 것은 결국 오늘날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백제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륙백제의 영토가 얼마나 넓었는지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양태수 고달이 발령을 받아 새로 부임하게 된 대방군의 위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선 오늘날 황해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로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에 있었던 군이었을까? 그 점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방군은 후한 말 요동 군벌 공손강이 설치

대방군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백제가 건국된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 25사 중 『주서』와 『북사』, 『수서』 등 여러 사서엔 공통적으로 구태(仇台)라는 인물이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방군이란 행정구역은 후한 말 요동 지역의 군벌이었던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에 따르면 후한 말 때 요동 지역의 군벌이었던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거친 땅을 분할하여 신설한 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사학계에선 낙랑군의 위치를 지금 북한의 평양 일대라 하고 대방군은 그 남쪽의 황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덕분에 국내에 시판되는 『삼국지』를 보면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 서북부까지도 위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유주(幽州)의 속군(屬郡)들을 표기한 지도.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뺀 나머지 7개 군, 국의 위치는 모두 지금의 북경시 주변에 있었다. 그런데 과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이 기존 사학계에서 주장한 위치에 있었을까?(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하지만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던 행정구역이 아니다. 이는 추후 기회가 될 때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여기서 간략하게 짚어보도록 하자. 먼저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이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유주에 속한 군으로는 탁군(涿郡), 발해군(渤海郡), 대군(代郡),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현도군(玄菟郡), 낙랑군(樂浪郡)이고 후국으로 광양국(廣陽國)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유주라는 행정구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유주에 속했다는 군국들 중 낙랑군, 현도군, 요서군, 요동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국들은 모두 지금의 북경시 주변에 있는 것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낙랑군, 현도군, 요서군, 요동군 이 4개 군만 따로따로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공손강은 앞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의 군벌이었는데 낙랑군이 그의 세력권 안에 있었기에 그가 마음대로 대방군을 신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낙랑군은 요동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기 30년에 발생한 왕조(王調)의 난 당시 『후한서』《광무제본기》에는 주석으로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고 했다.

그러니 공손강이 낙랑군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고 대방군을 신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낙랑군에는 패수(浿水)라는 강이 흐르는데 『수경』에 기록된 패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패수는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경계를 이룬 곳이자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곳이다.

“패수는 낙랑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즉, 패수란 강은 낙랑군 누방현 일대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적힌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전쟁을 보면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荀彘)가 패수 서쪽에서 위만조선의 군대와 만나 전투를 치른 후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고 수군사령관 양복(楊僕)이 왕검성의 남쪽을 포위했다고 한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당시 한나라 육군사령관 순체는 패수 서쪽이자 상류에 주둔했던 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한다. 왕검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므로 패수를 조백하에 두고 볼 경우 보다 진로가 자연스럽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중요한 것은 순체가 전투를 벌인 지역이 패수 ‘상류’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패수란 강은 왕검성의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어야 하는 셈이고 『수경』의 기록대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인 셈이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라 했으니 패수 또한 그 인근에 있는 강이어야 한다.

아마도 조백하(潮白河)가 낙랑군과 관계 있는 패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백하의 상류는 현재 북경시 밀운구의 밀운수고(密雲水庫) 일대인데 그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왕검성이 있었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의 서북쪽에 닿게 되니 진로가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서기 488년 1차 백제-북위 전쟁이 끝난 후 동성왕이 단행한 논공행상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백제의 영토는 오늘날 중국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애초에 대방군을 신설한 공손강의 근거지였던 요동군이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인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낙랑군과 대방군 역시 그 일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로 볼 때 본래 낙랑군은 조백하 동쪽에 위치했고 대방군은 그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현재 하북성 당산시와 천진시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488년 당시 전황을 정리해 보면 북위는 당시 수도였던 평성(平城, 오늘날 중국 산서성 대동시)에서 태행산맥을 넘어 오늘날 북경시 밀운구 동북쪽의 백제 광양군을 공격했다. 이에 인근에 있던 조선태수 양무가 급하게 구원을 왔고 백제 중앙정부도 저근, 부여고(扶餘古), 부여력, 부여고(扶餘固) 등 4인의 장수에게 구원병을 이끌고 휘하 참모로 회매(會邁)를 대동해 방어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백제가 북위를 상대로 크게 승리했고 중앙군을 이끌었던 저근 등 4인의 장수는 모두 왕과 제후로 봉해졌으며 광양태수 고달은 대방태수로 또 조선태수 양무는 광릉태수로 발령을 받고 참모 회매는 청하태수로 임명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입력 2004-09-23 14:54:00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3/200409230500060/200409230500060_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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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의 영토 알려주는 '흑치상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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