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승인 2019.08.01 09:50 인사이트코리아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co.kr)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 인사이트코리아

한민족 역사와 관련한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나라와 통치자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환국(桓國)’ ‘환인(桓因)’이다. 아직까지 유적이나 유물, 관련 사서들에 의해 나라의 존재 시기나 위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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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배달국 추정 위치.<그래픽=이민자>
 
 

‘박달나라의 임금’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라 불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배달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 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에서 단군은 ‘박달나라의 임금(檀國之君)’을 말하며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또 일각에서는 배달은 밝다는 뜻인 ‘배(밝)’와 땅을 의미하는 ‘달’을 합친 말로 동쪽으로 향해 간 것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BC 24세기에 건국했다는 고조선을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나 고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한민족 국가에 대한 기록들이 엄연히 우리 사서에 남아있다. 배달국의 존재를 나타내는 ‘배달-신시(도읍지)-환웅(임금)-청구(국명 또는 지명)’ 등에 대한 기록은 일연(1206~1289년)의 <삼국유사>, 권람(1416~1465년)의 <응제시주>, 유희령(1480~1552년)의 <표제음주동국사략>, 홍언필(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문해(1534~1591년)의 <대동운부근옥>, 허목(1595~1682년)의 <기언>. 남구만(1629~1711년)의 <약천집>, 홍만종(1643~1725년)의 <해동이적>, 유광익 (1713~1780년)의 <풍암집화>, 이종휘 (1731~1797년)의 <동사>, 홍경모(1774~1851년)의 <관암전서>, 안정복(1778년)의 <동사강목>, 이복휴의 <해동악부> 등이 있다.

앞서 소개한 위서 논쟁이 있는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하>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는 좀 더 상세한 기록들이 있다. <삼성기 상>은 “환웅 씨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서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과 여정을 파고 청구에 정지를 만들었다. 천부인을 가지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이 하늘의 이치에 맞도록 교화되어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도읍을 신시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고 기록한다.

<삼성기 하>는 “이때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며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우사·운사를 시켜 곡식과 임금의 명과 형벌과 질병과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여 세상을 이치에 맞도록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하늘을 열면서 얻은 호칭이다. 도읍한 곳은 신시이며 뒤에 청구로 옮겨 18세를 이어 전하였다. 역년은 1565년이다”라고 한다.

<삼성기 하>는 18세에 걸친 임금(환웅)의 이름과 역년도 소개하고 있다. <태백일사>는 <진역유기> <삼성밀기> <삼한비기> <조대기> 등 고대 사서와 중국 사서를 인용했음을 밝히면서 배달국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첫 임금인 환웅천황의 건국기, 태고문자의 시작, 치우천황의 탁록대전 등을 기록하고 배달국의 시작인 신시의 개천으로부터 18세를 이어 1565년이 지나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일어났다고 한다. 

<삼성기 상·하>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배달국이 존재했고 다수의 임금이 대를 이었으며 도읍지가 처음에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하는 고대국가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랴오닝성과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서 발견된 고조선 이전 문화인 홍산문명은 이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문명과 고대국가에 대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기술하겠다.

한편 배달국 기록과 관련해서 ‘치우천황’을 빼놓을 수 없다. 치우천황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동북아에 존재했던 나라의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에도 기록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대의 사관 사마천(BC 145~BC 86)은 중국 역사 25사의 첫 시작인 <사기> 의 <오제본기>에서 “치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자 황제가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명한 ‘탁록대전’에 대한 내용인데 치우천황과 전쟁했다는 황제 헌원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렸다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이다.

<사기>에 담긴 치우천황

치우상이 담긴 귀면와.<국립중앙박물관>

이 외에도 중국 사서에 치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사기>를 비롯한 <관자> <태평어람> <산해경> <후한서> 등에서는 ‘치우의 형제가 81명이며 몸은 짐승이나 사람 말을 하였다’ ‘구리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모래와 돌을 먹었다’ ‘칼·창·큰 활 등 병장기를 만들었다’ ‘쇠를 제련하여 창 등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와 치우 무덤의 존재 위치, 제사 관례를 기록함으로써 치우가 실존 인물이며 철제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과 전쟁을 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삼성기 하>는 18대 환웅 중 14번째 환웅인 치우천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신령스러운 용맹이 있어 크게 뛰어났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야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었다. 이에 천하가 크게 두려워했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황이라고 한다. 치우는 천둥 치고 큰비가 내려 산하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이 염제신농이 쇠해 가는 것을 보고 큰 뜻을 품고 자주 서쪽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회대 사이의 땅을 점령하였다. 헌후가 일어나자 즉시 탁록들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뒤에 오장군을 서쪽에 보내어 고신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천하는 셋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탁록의 북쪽에는 대요가 있고 동쪽에는 창힐이 있고 서쪽에는 헌원이 있었다. 서로는 자기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헌원이 치우보다 늦게 참전했기 때문에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창힐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은 <태백일사>에서 밝히는 황제 헌원과의 탁록대전의 내용으로, 중국 사서 내용과 전쟁 결과가 다르다.

“천황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시켜 탁록을 포위하게 하여 멸망시켰으나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천황은 구군에 동원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곧장 헌원과 탁록 유웅들에서 계속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조여 들어가게 하여 베어 죽이기를 수없이 하였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적군은 두려움에 손을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100리 사이에는 적의 병마를 볼 수 없었다.”

“치우천황이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더욱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심지어 우리 신시를 본받아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거를 만들어 백번이나 싸움을 걸어왔다. 이에 천황은 불같이 노하여 형제와 종친에게 싸움준비에 힘쓰도록 하고 위세를 떨쳐 헌원의 군사가 감히 싸울 뜻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한 판 크게 싸워 한 개의 진을 여지없이 무찌른 뒤에야 싸움을 그쳤다.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가 공을 급히 세우려 하다가 불행히 진중에서 죽었다. <사기>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규원사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헌원이란 사람이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 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했다. 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 씨에게 도전했다. 치우 씨는 탁록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치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기> 등에서 ‘구려(九黎)의 임금’ ‘구려임금의 호칭은 치우’라고 하고 있다. 즉 중국과 전쟁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수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역대 단군이 치우를 만고의 무신(武神)으로 우러러 제사를 지냈고 중국조차 산둥성 궐향성에 있는 치우의 능에서 매년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그는 또 귀면와의 도깨비상 주인공은 치우상이며 한국인이 국난이 있을 때마다 우러러 숭상하던 한국인의 장군상이자 병신(兵神)이라고 한다.

중국, 동북공정으로 배달국 역사 삼킨다

치우천황은 탁록대전이 기원전 2600년경의 사건이기 때문에 실존했다면 고조선 이전 인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탁록대전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조선 이전에 동북아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조차 신화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의 기존 역사 인식의 틀에서는 배달국을 실존 역사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역사 시대를 기록이 남아있는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9세기경으로 보다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이제는 하나라의 시작을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했고 치우와 황제가 전쟁을 벌인 탁록대전을 기원제 26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1995년 베이징 인근 탁록현에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에는 치우, 황제, 염제의 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원래 중국인들은 염제, 황제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하여 ‘염·황 후예’라고 해왔다. 중국 하남성 정주시에는 2007년 20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염황 이제(二帝)의 조각상이 세워진 바도 있다.

그러나 역사 공정의 진행 과정에서 동이족의 왕이자 한민족의 조상인 치우천황을 염제·황제와 함께 중화문화의 공동 시조로 영입해 버렸다. 우리가 기원전 24세기에 존재했던 고조선을 신화로 인식하고 있는 사이에 고조선 이전 배달국 시대에 활약했던 동이족 지도자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 공정의 배경은 황하문명 등 중국이 주장해온 그들의 고대 문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꽃피웠던 홍산문화의 유적이 내몽골, 랴오닝 성 일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자명오종홍 기자 입력 2018.07.09 00:00 수정 2018.07.30 16:15

홍산문화지로 알려진 요서 내몽골 우하량은 조이족 땅이었다.

 

중국 하북성 근처에 신시시대 한웅흔적 발견

새를 숭배하는 동이족 터전으로 판명

여신묘, 곰발조소, 수행하는 여신상 등

조선(단군)이전 흔적도 보여

 

그러면 우리 국사는 사실상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일연 <삼국유사>를 고조선기를 보면 단군 이전에 한웅의 신시시대가 있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한웅, 천부인 3개 태백산, 신시, 인간360여사를 다루고 있고 풍백, 우사, 운사라는 관직도 나온다. 너무 오래된 역사여서 이렇게 아주 압축해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문헌이 신시시대가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고고학 상으로도 밝혀 낼 수 있을까. 서기2018.06.28.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한뿌리세계모임(한사모, 회장 박계옥)이 주최한 시민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찬구 박사가 이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발표를 했다.

흔히 알려진 홍산문화지역을 중심으로 한웅 신시시대를 조명했다. 중국 내몽골 요서에 위치한 특히 우하량 지역에서 나온 유물과 유적을 집중 분석했다. 그는 먼저 우하량 유적을 남긴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동안 다투어진 주장들을 전했다. 북한에서는 리지린이 맥부족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북한 전대준은 박달족이라고 했다. 남한에서는 한영우가 아사달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은 북적北狄으로 보았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친일사학자, 이병도 학파가 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식민지 통치 보조기관으로 만든 경성제국대학이 있다. 이 대학이 현재 서울대학이다. 식민지 체제 그대로 이어받아 이름만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학으로 바꾼 것뿐이라고 이 분야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병도->김철준->노태돈->송호정 등으로 서울대 국사학파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서울대 국사학파가 우리나라 역사학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친일식민사학자, 이병도 학풍을 이어오고 있다. 이병도는 일제식민사학을 체화한 친일사학자다.

 

이날 이찬구 박사는 중국학자 이민의 견해를 끌어들여 홍산문화 우하량 주인공을 조이족鳥夷族으로 설명해 나갔다. 시기상으로 도 서기전 2천년 이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새가 새겨진 조작유물 특히 부엉이 조각, 옥으로 된 새 조각 등을 근거로 이 지역을 새를 숭배하는 족이 지배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갑골문을 제시하여 이족이 존재했음을 덧붙였다.

 

이어 조이족이 우리 땅 원주민이었을 것이라고 북한학자 리지린의 견해를 소개했다. 또 그는 문헌증거로 <삼국유사> 고조선기, <규원사화> 등을 제시했다. 또한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등장하는 국선소도와 큰 나무를 상징하는 웅상雄常도 하나의 근거로 보았다. <산해경>에 이와 닮은 기록이 있음도 상기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우하량에서 곰발소조와 새 조소품들이 나온 것을 근거로 한웅족과 곰족의 결합을 추정했다. 또 요령지방에서 나온 이른바 금동새조각품을 근거로 한웅시대가 존재했음을 밝혔다. 이 금동새조각품에는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곰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범, 오른쪽 구석에는 이리를 새겨놓고 있다.

 

 

2009/10/05

유네스코는 한반도-만주를 '문명시원지'로 공식화해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유네스코는 한반도-만주를 '문명시원지'로 공식화해야

전제:유네스코는공식적으로현인류문명의시원지을한국으로인정.발표해야한다일본왕실의뿌리는백제인들임을주장하는[KoreanImpactonJapaneseCulture]라는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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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산숭배신앙을 가진 고대 한국인들의 나라 한국과 배달국의 역사활동의 중심지역

 

▲ 한국.배달국.단군조선 발상지 요하지역&nbsp;- 중국의 황하.중동지역의 슈메르 문명의 발원지.


서해 마고지역이 바다가 되면서 마고 대다수는 거리가 가깝고 땅이 비옥한 한반도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한(환)을 의미하는 태양숭배와 모계중심의 마고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정착하였다. 그래서 단군3조선 중에서 한반도지역을 마한.마조선이라고 불리운 것이다.그리고 훗날 부여(고구려.백제),흉노.선비족(신라.가야) 등 기마부대를 통하여 한반도.일본지역의 마한족을 지배하게 되는 북방계 한국인들의 조상이 되는 황궁씨는 북쪽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여 요하를 거쳐 바이칼호수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온화했던 시베리아 지역의 날씨가 추워지자 다시 남하하여 조상인 황궁.유인씨의 터전인 요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모계중심의 마고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던 곰족과 융합하여 배달문명을 낳고 단군조선을 낳은 것이다.

 

단군조선이전에 배달문명이 자리한 요하지역를 역사의 중심무대로 삼고 있었던 배달국과 한국의 중심산은 요하지역의 천산.태백산이었지 백두산은 아니였다.
 
한인씨가 살고 있던 파나루산은 천산(하늘산)으로 지금의 요하지역의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선비족의 동족인 오한족의 근거지가 되는 오한산(烏桓山)이라고도 했다. 서한산의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泓池水)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홍지수가 홍익인간의 뿌리라는 의미일까?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기원전 200년의 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요하지역(흑수.백산)으로 이주해 온 한인씨.한웅씨
 
[한단고기]에 보면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지금의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의 요지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한인씨가 흑수 백산의 땅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단고기]는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 한국이 있는데, 모두 12나라며, 동서 2만리 남북5만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바이칼 호수 동쪽에 위치한 한국의 중심지는 파나루산(하늘산=한산)아래 요하지역에 위치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인씨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기후변화로 인하여 남하하여 요하지역에 중심지을 정하여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문명을 일으켰으며 유라시아-아메리카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nbsp;한인.한웅족이 시베리아.바이칼호수에서 남하하여&nbsp;터전을 삼은 역사활동의 중심지 요하지역


계속해서 한웅씨의 이주와 배달국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자."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한인=광명신을 받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내용을 보면 한웅씨족은 한인씨족임을 알 수 있고 교통의 중심지를 천평으로 정하니 천평이 바로 청구라는 것이며, 신시를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달민족이라고 할 때는 한웅의 배달국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며 단군민족이라고 할 때는 단군한국조선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니 한인의 한국민족이나 한웅의 배달민족이나 단군의 단군민족이나 조선민족이나 모두 동일한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한겨레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인씨의 터전은 바이칼 호수와 몽골초원을 통하여 완만한 홍안령 산맥을 넘어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오기 전까지는 기후가 온화해서 유목생활하기가 좋았던 시베리아 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고, 기후가 추워지자 따뜻한 남쪽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종족이 바로 한인씨의 후예 한웅족임을 알 수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중국 황하문명의 근원이며, 이집트.아즈텍 피라미드 연대보다 1천년이 훨씬 넘는 초기 석석총들이 널려 있고,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문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하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요하지역이 한웅족이 정착한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닌 요하지역의 태백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산지역은 서해지역에 위치한 마고성이 점점 바다가 되면서 마고족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질 때에서 마고의 율려를 반드시 회복하겠다며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이주하여 도를 닦았다는 황궁씨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양심의 자유율법(율려)이 통했던 마고시대의 도맥을 계승한 황궁씨는 유인씨의 조상이고 유인씨는 한인씨의 조상이다. 율려국가란 예컨대 주인없는 가게라도 양심적으로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 가는 사람들의 나라를 의미한다.
 
3.고고학적 사료(위서로 취급받는 '한단고기'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한인씨의 한국의 중심지역과 관련한 파나루산이 있던 부하진은 인류 최초의 복골(卜骨)이 출현한 유적지가 있다. bc3300년의 유적이라고 밝혀졌으니 은나라의 복골은 이보다 1000년 뒤의 것이다. 또한 주변 고성터의 흔적을 보면 bc3300년 이전의 유물과 유적 발견도 기대된다. 뒤에 흉노에 패망한 동호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환산, 혹은 선비산이라고도 하였다. 선비족이 터전으로 삼은 오환산주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한인씨가 한국의 중심지로 삼았을 지역의 실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8/03/17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

고대우리민족사에대한관심이날로증폭되어가고있다.그것은중국의동북공정과함께일본이조선침략후역사적인열등감을감추기위해36년간반도사관으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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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7199년 안파견(安巴堅) 한인께서 세우신 한국(桓國)이 3301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뒤를 이어서 거발한 한웅(居發桓 桓雄)의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이 건국되었으며 지명(地名)의 이름이 같아도 그 위치가 달라졌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한국(桓國)과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을 분리하지않고 하나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위리 한인(智爲利 桓因)의 뒤를 이어 거발한 한웅께서 건국한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이므로 같은 역사라고 인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桓國)은 한인께서 천산에 거주하시면서 파내류산 아래 천해의 동쪽땅에 세우신 나라이고 신시 배달국은 거발한 한웅께서는 한국(桓國)의 뒤를 이어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地域)에 건국하신 나라이니 현재의 지도상 위치로 보면 한국(桓國)과 신시 배달국(培達國)은 약 4,000km 정도의 거리 차이가 있다.
 
즉 한국(桓國)으로 부터 동쪽으로 4,000km 정도 떨어져서 신시배달국(神市 培達國)이 세워진 것이다.



[자료]'한단고기'가 증언하는 12환국과 신시배달국
 

한국(桓國)과 한국의 12 연방국(聯邦國) 실체 ㅡ 위치 2편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에서 전한다.

日降童女童男八百  於黑水白山之地  謂之桓國
일강동녀동남팔백  어흑수백산지지  위지한국
 
해설:"어느날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이를 한국이라고 한다."
 
後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후한웅씨계흥  봉천신지고  강우백산흑수지간
 
해설:"뒤에 한웅씨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천신의 뜻을 받을어 백산과 흑수의 사이에 내려왔다."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국시대(桓國 時代)때의 기록과 더불어 한웅(桓雄)의 신시 배달국의 기록에도 같은 지명(地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桓國)시대 때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 때와 비교하면 지명은 같으나 위치(位置)는 전혀 다른 곳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과 신시 배달국의 역사를 후손들이 동일(同一)한 한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흑수와 백산을 같은 지역으로 당연하게 생각한 오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흑수(黑水)는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 강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또한 백산(白山)은 현재의 백두산 또는 강원도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혹은 북경 서남쪽 섬서성(陝西城) 서안(西安 고대의 장안長安)의 서쪽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는 등 여러 갈래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러 사서(史西)들의 기록에 나오는 한국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웅시대 즉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의 흑수(黑水) 백산(白山)과는 전혀 다른 곳임을 알아야한다.
 
앞서 수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桓國)은 파나류산(派奈留山) 아래에 즉 현재의 천산산맥과 발하슈 호수를 포함한 지역이고, 한웅의 신시 배달국은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으로 바이칼 호수와 흑룡강 그리고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장백산맥으로 포함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과 신시 배달국은 서로 전혀 다른 지역에서 건국한 각각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桓國) 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와 감숙성 동부 지역에 있는 위치한 고원(固原)의 북쪽에 있는 강이다. 또한 감숙성 북서부 지역인 장액(張掖)의 부근에는 약수(弱水)도 있다.

사기(史記)에서 전(傳)하기를 고원(固原)의 북쪽에 흑수(黑水)가 있으며, 북쪽으로 흘러가 대하(大河)에 유입한다고 하였다. (又北有黑水 北流入於大河) 즉 흑수는 고원을 지나 황하(黃河)로 흘러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Kyrgyzstan)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族自治區)지역 사이에 위치하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수 많은 봉우리 중 한 봉우리 또는 천산산맥에 속하며 항시 눈이 덮여있는 봉우리 전체일 것임에 틀림없다.

백산(白山)은 말 그대로 하얀 설산(雪山)을 일컫는 말로, 빙하(氷河 Glacier)가 덮여있으므로써 연중 어느 시기에 보아도 하얀 모습을 드러내는 산이므로 빙하가 생성되는 최소 3,000m 이상의 고봉(高峰)일 것이다. 현재 천산산맥의 최고봉은 포베다산(7,439m)이며, 평균고도 3,000m~4,000m 이상의 고봉들로 이루어져있다.


한웅의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에서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강이며,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오호츠크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현재 흑룡강성의 하얼빈 동쪽 통하(通河)의 북쪽에 있는 평정산(平頂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태백산(太百山)인데 후에 백산(白山)으로 산명(山名)이 바뀌었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정산(平頂山)으로 불리우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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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태백(三危太伯)과 태백산(太白山)에 대한 간략정리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 삼국유사에 [환웅(桓雄)임금]이 삼위태백(三危太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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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서쪽 제천 유적의 발견 통화 만발발자 유적ㅣ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온 기록과 일치ㅣ정경희 교수의 놀라운 연구

https://youtu.be/VJT_4OVxFS0?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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