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0 20:44:29

'동북아 시원문명전시회' 개최 (ybstv.net)

 

[영등포신문] '동북아 시원문명전시회' 개최

[영등포신문=김경진 기자] 일본의 역사 왜곡과 중국이 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고 동북아시원문명인 ‘홍산문명’의 신비와 고조선의 실체를 알리는 사진과 유물 전시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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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신문=김경진 기자] 일본의 역사 왜곡과 중국이 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고 동북아시원문명인 ‘홍산문명’의 신비와 고조선의 실체를 알리는 사진과 유물 전시회가 열린다.

  (사)대한사랑(대표 박성수)은 광복7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각지에서 시민을 위한 ‘동북아 시원 문명전’을 갖는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세계 4대문명보다 1~2천년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 ‘홍산문명’(요하문명)이 사진과 유물을 통해 그 베일을 벗는다.

 대한사랑 관계자에 따르면 홍산문화는 황하 문명보다 1~2천년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으로서 만리장성 밖에서 발굴되어 중국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로서 이 문명은 단군 왕검의 고조선과 그 이전의 상고上古 문화인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배달 문명을 알아야만 그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려 5,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 원형제단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더욱 세계인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문화 때문이다. 여러 적석총에서 5,000년 전의 C자형 옥룡(玉龍),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과 같은 양식의 5,500년 전의 비파형 옥검, 옥으로 만든 도장인 옥인장(玉印章) 등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5,500년 전에 이미 종교를 중심으로 제정일치의 국가조직을 갖춘 상고上古 문명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대한사랑 관계자는 “중국이 야만족이 거주하는 땅으로 멸시하던 만리장성 밖,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더 앞서고 발달한 문화가 발굴되자, 당황한 중국정부는 이것을 ‘요하문명’(홍산문명)이라 부르면서 중국의 고유문화로 둔갑시키기 위해 홍산문명과 직결되는 고조선, 고구려, 대진(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변조하였다.”고 중국의 한민족사 강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서 “우리 역사의 시작은 미개문화가 아니며 식민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4대문명보다 무려 1~2천 년 전에, 재정일치의 훨씬 발달된 옥기문화, 옥기시대로 시작되었다.”며, “이번 순회 전시회를 계기로 우리 역사의 뿌리를 널리 알리고 중국과 일본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르게 알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광복 70주년을 맞아 동북아 시원문명전을 펼치는 취지를 밝혔다. 이번 순회전은 한민족운동단체연합과 독립유공자유족회(회장 김삼열)에서 후원하며 한국홍산문화학술원(원장 박문원)에서 홍산유물을 함께 전시한다.

  전시회는 12월까지 광화문광장, 동대문구청, 신천역갤러리, 마포문화원, 혜화역갤러리, 송파문화원, 성남시청의 순회전시로 이어진다.  (관람은 무료, 문의는 1644-7618)

 

 

 

2014.02.17 09:43

홍산옥기 전문가 박문원 한국홍산문화학술원 원장 인터뷰 | 일요신문 (ilyo.co.kr)

 

홍산옥기 전문가 박문원 한국홍산문화학술원 원장 인터뷰

[일요신문] “역사는 인과다. 따라서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도 없다.” 최근 중국 일본은 역사를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으로 바꾸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동북공정이니 위안부 문제 등이 모

ilyo.co.kr

“한민족 고대사 유물 한국인 관심 절실하다”

출처; 홍산옥기 전문가 박문원 한국홍산문화학술원 원장 인터뷰 | 일요신문 (ilyo.co.kr)

 

 

2015년 04월 15일 (수) 19:40

요하문명 유적·유물에 인류 최고의 문명이 숨쉰다 (brainmedia.co.kr)

 

요하문명 유적·유물에 인류 최고의 문명이 숨쉰다

1980년대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요서지역에서 발전, 변천해온 이 문명을 ‘요하문명’이라고 한다. 요하문명의 발견은 지금껏 황하문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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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요서지역에서 발전, 변천해온 이 문명을 ‘요하문명’이라고 한다. 요하문명의 발견은 지금껏 황하문명이 가장 오래된 세계 4대 문명이라고 주장해온 중국 고고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황하문명보다 시기가 더 앞서고 문화 수준도 더 높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대한출판문화협회 대강당에서 열린 141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홍산학술문화원 박문원 원장은 ‘요하문명 유적·유물과 그 변천’을 주제로 강연했다. 박 원장은 20년 간 요하문명의 유적과 유물을 수집해 온 유물 연구가이다. 지난해 12월 유엔(UN)과 중국정부가 주관하는 2013 UN 중국문화산업엑스포에서 중국 민간 10대 국보(전문가 학자 부문)로 지정되기도 했다.
 
▲ 홍산학술문화원 박문원 원장
이날 박 원장은 직접 수집한 요하문명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그 변천 과정을 설명했다. 요하문명은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 부하문화, 조보구문화, 홍산문화, 소하연문화, 하가점하층문화까지를 총 망라한다. 이 중 홍산문화는 가장 문명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요하문명은 초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적으로 가장 큰 변혁기를 이루어냈던 거대한 문명이었다. 유적이 발견된 시점으로부터 본다면 B.C. 7000년 전 소하서문화를 필두로 한다. 그렇다면 소하서문화 이전에는 요하지역에 사람이 사고 있지 않았을까? 그 전에 특별한 유적과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요하지역에서는 구석기 시대 타제석기들이 발견된다. 사람이 살던 정확한 시점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요하문명의 중기문화인 홍산문화 시기는 제사장이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제정일치 시대였다. 여신상 등의 유적과 유물은 당시 모계사회였음을 입증한다. 이 시기는 묘에 옥기를 부장(副葬, 망자의 묘에 생전에 쓰던 패물을 함께 묻는 일)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옥기는 최고의 권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도구류, 상징류, 장식류, 의식류, 제기류로도 쓰였다.  
 
홍산문화 이후에는 옥기를 부장하지 않았으며, 사용 목적도 주로 부족의 상징이나 의식용품, 장식품 등의 용도로만 사용했다. 이는 문명이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였다는 증거이다. 
 
▲ 박문원 원장이 수집한 홍산문화 옥기 유물
박 원장은 홍산문화 시기 옥기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홍산인들의 옥기에서 인간의 예술적 본능을 엿볼 수 있다. 풍부한 감성과 창조적 능력, 예술적 욕구를 옥기로 표현했다. 옥기는 미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옥기에는 구멍이 뚫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치장하고 과시하는 패용(佩用, 몸에 달거나 참)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기 유물은 묘가 아닌 농지, 야산 등지의 일반 땅에서도 비부장품으로 상당수 발견되었다. 보관상태가 좋은 부장품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많이 되었지만, 비부장품에 관한 연구는 탄소 측정(방사성 탄소-14의 붕괴를 이용하여 물질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의 어려움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옥기유물을 통해 요하지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런 문명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유물로만 보아도 한민족의 역사는 절대 5천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하문명과 우리 한민족과의 밀접한 관계성 역시 앞으로 연구적 과제이다.” 라고 말했다. 
 
142회 국민강좌는 5월 12일 화요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김병기 교수가 ‘천자의 나라 고구려’를 주제로 강연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시민은 누구나 무료로 참석할 수 있다. 
 
국민강좌는 '얼-라인 국학원 문화센터'를 통해 온라인 생중계로도 볼 수 있다. 국학원 후원회원 대상 ‘얼-라인 국학원 문화센터’는 국학원 홈페이지(www.kookhakwon.org)내 <얼-라인 국학아카데미>를 통해 로그인 한 후 <얼-라인 국학 아카데미>방으로 입장하면 된다. 문의 및 강좌 접수는 041-620-6951 로 하면 된다. 
 
▲ 제141회 국민강좌에서 홍산학술문화원 박문원 원장은 ‘요하문명 유적·유물과 그 변천’을 주제로 강연했다.

 

글, 사진. 김보숙 기자 bbosook70@naver.com

 

 

 

등록 2010-02-04 10:08수정 2012-09-24 19:23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 : 한겨레 (hani.co.kr)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

중화문명 뿌리 찾다가 홍산문화 발견…요하가 원류 ‘정설’ 이제 홍산문화로 들어가 보자. 홍산문화는 전기, 후기로 나눠는데 후기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다. 그래서 홍산문화는 요하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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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2)

광개토대왕릉 빼닮아…백제 적석총도 같은 형태
‘성소’ 여신묘에 곰 형상, 단군신화 웅녀족과 ‘끈’
 
중화문명 뿌리 찾다가 홍산문화 발견…요하가 원류 ‘정설’
 
이제 홍산문화로 들어가 보자. 홍산문화는 전기, 후기로 나눠는데 후기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다. 그래서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했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전 세계 고고학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줬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중국은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은 ‘동북공정’에 앞서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이라는 역사 공정도 벌였다. 그런 공정의 시발점이 홍산문화의 발견이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존속 연대를 결정하는 것이 연구의 뼈대다. 이 세 나라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망했는지, 그 연대를 단정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단대(斷代·시대를 나누다)라고 한다. 그래서 하상주의 존속연대를 1년 단위까지 세밀하게 확정하는 작업을 했다. 5년 동안 동북공정처럼 수십억 돈을 쏟아부어 300명의 학자가 연구를 해 결론을 낸 것이다.
 
그 다음 작업을 한 것이 (하상주) 이전의 시기를 보기 위해, 즉 중화문명의 원류를 탐색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0년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공정이라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대충 나온 결론은 중화문명은 요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하가 중화문명의 시발점이라는 거다. 중국학자 몇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본 입장으로 굳어지고 있다.
 
단군신화 다시 읽어야…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여신묘 터와 복원도 모습. 여신묘는 십자가 모양으로 중앙에 주실과 남실, 북실 등이 있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자, 그럼 사진을 중심으로 홍산문화를 자세히 알아보자. 홍산문화의 꽃은 ‘우하량’ 유적이다. 그곳에서 거대 적석총과 여신묘가 나왔다. 우하량 지역에서는 많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나온다. 이 시대의 묘장문화가 적석총인데, 가장 큰 것은 한변이 60m가 넘는 거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다. 여신묘(무덤이 아니라 여신의 사당)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일대(적석총과 여신묘가 발굴된 우하량 제2지점 지역)는 홍산문화 당시 성소였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터가 나왔다. 이 지역에서 반경 수십㎞ 이내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성소로 본다.
 
여신묘는 십자형으로 돼 있는데, 주실에서 여신상이 나왔다. 가장 큰 여신은 인간 실물의 3배가량 된다.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눈은 둥근 청옥을 정교하게 갈아 넣었다. 그런데 여신 옆에서 진흙으로 실물 크기로 빚은 곰 형상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5천 년이 지났으니까 다 부숴져서 발 부분과 채색된 아래턱만 남아 있다. 이게 발굴이 되면서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민족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단군신화의 웅녀족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곰 형상과 곰 토템 부족이었음을 인정한다.
여러 파편을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모습. 여신묘의 주실 한 가운데는 실물크기의 3배, 2배, 1배에 달하는 흙으로 만든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이제 단군신화는 다시 읽어야 한다. 단군신화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에 우리들의 사고가 고정이 돼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우리의 단군신화를 보면 처음에 환인이 있었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고 한다. (법륜 스님 역사특강 2강 참조)내려오자마자 단군이 탄생하나? 환웅족이 외부에서 유입되어(하늘에서 내려와) 한참 살다 보니까 곰족과 호랑이족이 와서 “인간을 만들어 달라” 애원하며 공존하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한참을 공존하다가 곰이 여인이 되고 환웅과 결혼을 해서 단군을 낳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기원전 2333년 이전에도 우리 역사가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군신화라는 신화구조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하는 요서에서 (신화를 뒷받침 할) 유적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이것은 1980년 이전에 어떤 역사기록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서양 틀로는 설명 못해…청동기 없이도 국가 형성 가능 보여줘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여신묘에서는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오로지 옥기로만 부장품을 넣어줬다. 이런 옥기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이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봤다. 그랬더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홍산문화 적석총에서는 옥기가 무더기로 발굴된다.
 
이는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다.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7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씨족단계나 부족단계에서 무슨 여신묘를 짓겠나? 또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나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씨족이나 부족 단위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중을 통솔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홍산문화 당시 사회구조가 씨족이나 부족단계를 넘어서서 여신이라는 단일신을 중심으로 통합된 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다.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옥기가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나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기시대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세계사적으로 청동기시대가 되면 여러 가지 문화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신격이 여성신 중심에서 남성신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홍산문하는 초기 국가단계로 넘어갔는데도 신이 여성신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는 서양 역사를 기준으로 한 편년이나 틀에 하나도 안 맞는다. 문자나 청동기가 없는데도 이미 초기 국가단계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홍산문화 시기를 설명하려면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500-1000년 앞서…중원에는 없어
홍산문화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의 먼 거리 사진(왼쪽)과 가까운 거리 사진(오른쪽). 아직 정식 발굴이 되지 않았으나 7층 피라미드 구조의 적석총이다. 밑변이 60m×60m이고 남쪽에는 60m×40m의 제사터가 있다. 우실하 교수 제공

문제의 60m짜리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은 아직도 발굴이 안 된 상태다. 처음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무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변을 파봤더니 돌이 쌓여 있었다. 이것도 혹시 적석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굴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평면도를 그렸다.
거대 적석총 입체도와 평면도. 이형구 교수 제공
 
7층짜리 피라미드식 적석총인데, 한 변의 길이가 60m나 된다. 그 밑에는 가로 세로가 60미터, 40미터인 평평한 돌을 깐 제단까지 나왔다. 이 거대 적석총을 발굴하면 그 안에 뭐가 나올지, 진짜 세계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저 큰 무덤 안에 달랑 옥기 하나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동북아시아 상고사와 고대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다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가 메소포타미아 우르지역에 나오는데, 그게 기원전 2600-2500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이 거대 적석총은 그것보다 500-1000년가량이나 앞선다.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기원전 2500년까지 밖에 안 본다.이런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원에는 안 나온다. 중원 가까운 곳에서는 허베이성 위쪽과 내몽고자치구가 만나는 영하시에 있는 서하왕국의 서하왕릉에서 흙벽돌로 쌓은 피리미드식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는 전부 황토 고원이라 돌이 없으니까 흙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쪽 사람들의 조상 역시 홍산문화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 터 일대 적석총 수천 기 널려 있어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홍산인들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한반도로 적석총 문화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중국 집안시에 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군총 앞에 서면 기가 죽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장군총의 한 변의 길이는 30미터, 31미터다. 그런데 평면도를 보면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구조가 똑같다. 물론 연대와 크기는 홍산문화 거대 적석총에 비교할 수 없지만. 장군총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도 모두 7층, 9층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구조다. 또 집안시의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무덤군’에 아직도 수천 기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 적석총이 널려 있다. 모두 홍산문화 적석총과 연결된다.
중국 집안시 산성한 고분군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우실하 교수 제공

어떤 사람들은 홍산문화 적석총과 고구려 적석총이 연결된다고 하면 ‘고구려 적석총은 빨라야 기원후 3~4세기 이고, 홍산문화 적석총은 기원전 3500년인데, 어떻게 4천 년 가까운 간격을 뛰어 넘어 두 유적을 연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기원전 2500 년에 피라미드를 짓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지은 적이 없다. 또한 마야, 잉카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 이들은 한 번도 그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다시 지은 적이 없다. 그렇게 4천 년 동안 한 번도 안 지었다고 현재의 이집트인들이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우에는 고구려, 백제 시대에 과거의 피라미드를 복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홍산문화 시절엔 한국도, 중국도 없어…후손들 여러 갈래로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닮은 고구려 장군총(위 사진·조현 기자)과 백제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조감도(왼쪽 사진)과 일본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오른쪽 사진). 우실하 교수 제공

백제 적석총을 보면 고구려 장군총에 비해서 규모는 훨씬 소박하다. 그러나 형태는 홍산문화의 것과 거의 똑같다. 돌을 깎거나 다듬어 네모나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석을 크기에 맞춰 축대 쌓는 식으로 가지런히 쌓았다. 일본에서도 3단으로 쌓은 피라미드 무덤이 발견된다. 당연히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등장한 적석총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다. 몽골 초원 지역에도 적석총이 많지만, 중원에는 없다. 서하왕릉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중화문화라고 할 수 없다. 서하는 요나라, 거란 시절에 독립왕국이 있었다. 그들도 어차피 홍산문화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 세력들이 전부 다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홍산문화 시절엔 중국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다. 일부 세력은 옥 귀걸이의 경우처럼 중원으로 남하하기도 하고, 다른 세력은 한반도로 내려오고, 또 한 세력은 몽골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화유형을 보면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주요한 맥이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골에도 돌궐족이나 흉노족들의 무덤이 있다. 그들의 무덤도 전부 적석총이지만, 피라미드는 아니다. 그냥 돌무지무덤이다.(일부 피라미드식 적석총도 동몽골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몽골에서는 ‘돕조’라고 부른다. 몽골학자들과 연대해 연구 중이다.)
 
하가점-하층문화 톡톡 튀어나온 석성의 ‘치’, 고구려 성과 똑같아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발견되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산성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인 중국 적봉시 오한치 삼좌점 석성의 치(왼쪽 사진·우실하 교수 제공)와 중국 랴오닝성 고구려 백암산성의 치. 조현 기자.

요하문명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문화가 하가점-하층문화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청동기 비파형 동검이 나오고, 고구려 석성의 독특한 형태인 ‘치를 갖춘 석성’의 원형이 발견된다. 치가 무엇이냐 하면 석성을 쌓을 때 일정 거리를 두고 톡톡 튀어나오게 한 부분이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대 군사 전략상 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적군이 치에 들어오면 한 방향이 아닌 삼면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에 무척 용이했다. 고구려의 치를 모방해 당나라, 명나라 성에서도 치가 발견되는데, 치가 좀 더 발달한 형태가 옹성(甕城) 구조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 가운데 삼좌점 석성에 아직도 치의 형태가 25개나 원형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다. 4천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깨끗하게 남아 있다. 하가점-하층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나오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성에서만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는 고구려의 발명품으로 알았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고구려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 지도를 바꿔야
현행 교과서의 비파형 동검 분포지도.
 
지도에서 비파형 동검(세형 동검을 포함)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요서, 요동, 한반도 지역에 몰려 있다. 최근에는 산둥반도 주변에서도 한 두 개가 발견되기는 한다. 요서일대에서 이주한 세력이거나 유배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형 동검은 중원에서는 하나도 안 나온다. 만리장성 바깥에, 요동, 요서, 한반도에 쫙 깔려 있다.
 
최근 요하지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무더기로 발굴되는 것을 감안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 지도를 바꿔야 한다. 현재의 교과서 지도로는 어디가 중심지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이 요서 지역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 지역과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발굴되는 것은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적은 고조선,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문화와 밀접하게 맥이 닿아 있다.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우실하 교수는=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 중국 요녕대학 한국학과 교수 역임. 문화사와 사상사, 문화종속론, 문화이론, 동양사회사상 전공. 주요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1997),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 ‘동북공정의 선행 작업과 중국의 국가전략’(2004) ,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 등 7권의 단독 저서와 ‘고대 동북아 연구’(2008),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2008) 등 8권의 공저가 있다.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고, 상고사를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남다르다.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입력 : 2011.06.03 19:00

지난 연재에서 필자는 바넷 뉴먼의 ‘예리코’를 삼각형의 피라미드 형태 안에 마치 부러진 오벨리스크처럼 보이는 수직선으로 관통하는 것처럼 표현된 그림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하면 흔히 ‘이집트’를 떠올립니다. 기자에 있는 3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피라미드 중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말하곤 합니다.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B.C.2600~2480)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00여년이 된 셈이죠.

그런데 중국에 있는 피라미드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1947년 3월28일자 뉴욕타임스는 ‘미국조종사의 시안 서남쪽 외딴 산의 거대 피라미드 발견’이란 타이틀로 당의 수도였던 장안지역에서 찍은 피라미드 사진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당국은 피라미드 존재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1994년 3월 독일인 하우스도르프는 북중국의 ‘하얀 피라미드’의 존재를 비밀리에 촬영해 보도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집트의 가장 높은 쿠푸왕 피라미드(146.5m)보다 2배가량 되는 300m가 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 왕시핑 교수는 서안 일대에 피라미드를 45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난 2001년 중국 신화통신은 중국 고고학자들이 중국북부 내몽골(만주 북서부) 자치지역에서 무려 5000년 전의 피라미드 고분인 건축물을 발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기사는 중국 고고학자 구오다쉰의 말을 빌려 내몽골의 피라미드를 지금부터 5000년 전 홍산문명시대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내몽골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적어도 1000년 전에 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국 당국은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이 중국의 피라미드라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전 세계에 홍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당국은 장안지역 피라미드들(사진)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2013.12.13 14:31

피라미드 이집트·고구려 등 다양...헤로도토스가 첫 기술 - 머니S (moneys.co.kr)

 

피라미드 이집트·고구려 등 다양...헤로도토스가 첫 기술 - 머니S

'피라미드 구조, 가장 높은 문화재, 고대 세계7대 불가사의'이집트에서 군부 통치 반대 시위가 격화된다는 소식과 함께 이집트의 대표적인 유적인 피라미드에 대한 관심도 올랐다. 이에 '피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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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10 19:18l최종 업데이트 04.10.19 15:57

적석총, 석관묘, 빗살무늬 토기...이 '낯익은 유물'의 주인공은 누구?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적석총, 석관묘, 빗살무늬 토기...이 '낯익은 유물'의 주인공은 누구?

[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③] '反중원중심론' 현장 홍산문화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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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랴오닝성 링원시 우하량에 있는 적석총. 기원전 3500년 께의 유적이다.ⓒ 오마이뉴스 김태경

 

▲ 중국 랴오닝성 커주어의 동산취 유적. 사진 앞쪽의 원형 유적은 제단으로 생각된다.ⓒ 오마이뉴스 김태경

 

"당신들 어디에서 왔소?"
"베이징에서 관광하러 왔는데요."
"여기는 그냥 관람할 수 없소. 저 아래로 50m 쯤 가면 있는 사무실의 왕 선생한테 허락을 받아와요. 왕 선생하고 함께 와야 보여줍니다."

지난 9월 11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링위안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앞. 한참을 보른 다음에야 문을 열고 나온 60대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는 유적지 가운데 관람이 불허되는 곳이 종종 있다. 특히 처음부터 "당신들 어디에서 왔느냐"며 심문하듯 물어보는 곳은 매우 민감한 곳이다. 우하량 유적지는 왜 이렇게 중요할까?
▲ 기원전 3000~4000년 께 중국의 주요 신석기 문화권.


중국 동북방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중요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이 문화는 기원전 3500년 께 요하(遼河) 및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중국 고고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쑤빙치(蘇秉琦)는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의 서광"이라며 "이 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단계를 뛰어넘어 국가 형성의 초기단계에 이르렀다,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우하량 유적지는 도로변에 있지만 철조망이 쳐져있고 코스모스 담장이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기 힘들다. 관리인의 허락을 받지못한 취재팀은 유적지 뒤로 돌아가기로 했다.

높이 6~7m 정도 되는 가파른 언덕을 여러번 오르내리고 위험한 철길을 건넜다. 20분 정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고생한 뒤 우하량 유적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홍산문화가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중국인들의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지난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네이멍구 츠펑시에서 한국을 비롯해 일본, 미국 학자 등 80여명을 불러 홍산문화국제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용 문화의 기원은 어디인가"를 집중적으로 토론했다고 당시 <신화사>는 보도했다.

중국 학자들은 그들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거해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을 이룩하는 주요한 한 구성부분이라고 본다. 홍산문화 유적은 중국 중앙정부가 직접 관여해 발굴작업을 벌이고있다. 또 앞으로 고구려나 발해 유적처럼 앞으로 권역별로 묶어 대규모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한국 학계의 홍산문화에 대한 태도. 일부 학자를 빼놓고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홍산문화를 고구려사 빼앗기에 이용하고 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전욱 고양씨 집단으로 이들이 남만주로 가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바로 홍산문화의 적석총을 이어받은 것이며, 고주몽의 고씨도 전욱 고양씨의 후예여서 붙은 성씨라는 것.

홍산문화가 고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를 중국 문명으로 넘기면 고조선사 역시 통째로 중국사로 넘어가게된다.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이상 앞당긴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지는 길이 160m에 너비 50m 규모로 거대한 적석총 5개와 돌로 쌓은 제단 1개로 이뤄져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 1983~85년 본격적인 발굴을 했으며 탄소측정결과 기원전 3500년 만들어진 것으로 측정됐다.

각 적석총에는 10여개의 석관묘와 함께 옥으로 만든 룡(玉龍. 돼지나 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 토기 등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특히 여신묘는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우하량 적석총 무덤군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신묘는 175m×159m의 대형 유적으로, 진흙으로 만들고 눈에 옥을 박은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이 발견됐다.

대형 제단과 적석총, 여신묘 및 여신상의 존재는 이 문화가 상당 수준의 계급분화가 진행되어 이미 씨족 사회를 넘어섰으며 국가 형성 초기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하량 유적지에서 50㎞쯤 떨어진 커주어(喀左·원 이름은 '객나심좌익몽고족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의 동산취(東山嘴) 유적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기원전 3500년 께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전체 길이 60m, 너비 40m의 크기다. 동산취 유적은 직경 2.5m 가량의 원형 제단터 및 사각형 돌 무덤, 인물 소상, 빗살무늬 토기, 각종 옥 제품 등이 발견됐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궈따쉰(郭大順)은 올해 2월 발간한 <우하량유적지 고고발굴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5000년 문명의 기원이 요하 유역에 있음이 유적으로 확인됐다. 특히 지난해 우하량 적석총 제16지점에서 발견된 옥풍(玉風. 봉황), 옥인(玉人) 등을 비롯해 각종 제단과 묘, 이들의 배치는 베이징의 천단(天壇) 및 명나라 황제를 모신 13릉과 비슷해 '예(禮)'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다"며 "그러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은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은 중국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적석총, 빗살무늬 토기... '낯익은 유물'들
 

▲ 우하량 유적지에서 나온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



홍산문화가 우리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 것은 출토된 유물의 면면 때문이다. 적석총, 석관묘, 돌로 만든 대형 제단, 각종 다양한 옥 제품, 빗살무늬 토기….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던 한국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이곳에서 많이 나왔다. 또 이들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대릉하·요하 유역)에서는 홍산문화 이전에도 뛰어난 문화가 이미 존재했다. 랴요닝성 푸신(阜新) 지역의 사해(査海)문화, 네이멍구의 츠펑(赤峰)지역의 흥륭와(興隆窪)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이는 중원지역 앙소문화의 전 단계인 노관태(老官台)문화의 연대가 7200년 전이고, 앙소문화가 4500~6500년 전인 것과 비교할 때 오히려 시기가 빠르다.
▲ 홍산문화지역에 나온 옥으로 만든 용. '중국 제일룡'으로 불린다.

문화수준도 결코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흥륭와 문화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해자로 둘러싸인 완벽한 형태의 촌락유적지가 발견됐다. 사해문화에서는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길이 19.6m의 용과 용문 도기가 발견됐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용 형상 가운데 가장 이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임과 동시에 "용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용의 형상이 중원이 아닌 요하 및 대릉하 유역에서 가장 빨린 등장했던 것이다. 또 흥륭와와 사해 문화는 중국 문명 가운데 옥기가 가장 빨리 출현한 곳이다. 옥은 "영원 불멸"의 종교적 관념을 상징한다.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로 가면 기원전 24~15세기의 랴오닝성 츠펑시의 하가점(下家店) 하층문화, 기원전 14~7세기의 하가점 상층 문화, 기원전 14세기~서주 무렵의 차오양시(朝陽市)의 위영자(魏營子) 문화 등이 등장했다.

이 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문제는 이 문화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한 재중동포 학자는 "중국 학자들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조선 민족, 구체적으로 예맥족의 문화로 본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 랴오닝대와 지린(吉林)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복기대 박사도 비슷한 견해였다. 기원전 10~4세기 무렵의 능하(凌河)문화라는 새 유형을 주장하고 있는 복 박사는 "개인적으로 하가점 상층 문화는 산융(山戎) 것으로 본다"며 "그러나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대 문화, 하가점 하층 및 위영자 문화는 고조선 시대의 문화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는 70여개의 성이 발견되는 등 완전한 국가형태를 띠고 있으며 발굴된 인골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고동북인(古東北人)에 속한다는 것.

그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하는데 하가점 하층문화는 연대가 일치하고 출토 유물도 단군 신화의 내용과 맞아떨어진다"며 "하나라 문화인 이리두(二理頭) 문화가 기원전 2100년 께인것과 비교하면 시기상으로도 더 앞선다"고 부연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는 적석총과 석관묘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본다, 그러나 홍산문화지역에서는 이보다 2000년 앞서 같은 유물이 나왔다"며 "이는 우리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묘제를 같이 썼다는 것은 문화 및 인류의 동질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화문명 탐원공정은 중원문명 정통론의 부활

일반인들은 중국 문명은 오늘날 산시성(山西省) 남부 및 허난성(河南省) 서부인 이른바 중원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알고있다. 이른바 '중원문명 중심설'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화이관(華夷觀)의 바탕이기도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이런 논리는 깨진지 오래다. 황하 중상류 지역 외에, 요하와 대릉하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 산동성 지역, 양자강 하류 및 타이호(太湖) 유역, 광둥성의 주강(珠江) 삼각지 지역, 후난성의 퉁팅호(洞庭湖) 및 쓰촨성 지역에서도 수준이나 시기에 있어 중원지역과 맞먹거나 오히려 앞선 문화가 있었음이 증명됐다.
 
▲ '유화부인의 길'?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랴오닝성 링위안과 커주어의 가로수는 전부 버드나무였다.ⓒ 오마이뉴스 김태경


그러나 중국이 지난 2003년 6월 정식으로 시작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철저하게 중원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점 발굴지역이 허난성 신미시(新密市)의 구청진(古城鎭)과 신짜이촌(新砦村)의 유적, 역시 허난성 덩펑시(登封市)의 왕청강(王城崗) 유적, 산시성(山西省) 린펀시(臨汾市) 샹펀현(襄汾縣) 타오스향(陶寺鄕) 유적 등 모두 중원지역이다.

작업 내용도 중원의 신석기 문화인 용산문화부터 하나라 초기 이리두 문화까지의 취락형태, 야금기술 및 유적 정리, 요·순·우(禹)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 등 화하족(華夏族) 문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국 이는 중원문화 중심론, 중원문화 정통론을 다시 확립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원 이외의 다른 지역 문화는 모두 중원으로 흘러들어와 융합되었다거나 또는 중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며 "일본이 과거 고대사의 연대를 확대하려고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결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실패했던 교훈을 얻으라는 충고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2년 미국 아시아 학회 년회에서 스탠포드 대학 데이비드 니바이슨 교수는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해 '전부 틀렸다'고 비판했다"며 "또 시간적으로 연대 측정이 틀렸을 뿐 아니라 방법적으로 불리한 증거는 택하지 않은 오류가 있었다고 지적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해외 학자들은 이런 연구가 개별 학자들의 결과물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그 폐해가 더 심각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의 설명에 광개토대왕이 통곡한다

현재 집안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앞에는 "장수왕이 그 부친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진(東晋) 의희(義熙) 10년, 즉 서기 414년에 광개토태왕비를 만들었다"라는 설명비가 세워져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내용 가운데는 영락(永樂)이라는 서기 391년부터 412년까지 쓰인 고구려 독자의 연호가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한족(漢族) 왕조인 동진(東晋)의 연호로 비의 건립연대를 표기했다. 이는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더 있다. 당시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선비족 등 소수민족이 북방을 차지하고 한족(漢族)을 남방으로 쫓아낸 시절이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도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은 광개토대왕비의 건설 시기를 선비족에게 밀려 남방으로 도망간 동진의 연호로 표기해놓았다. 동진은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지 불과 6년만인 서기 420년에 멸망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가 세워질 당시 고구려는 최전성기였고 이후 240년을 더 존속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동진의 연호로 광개토대왕비의 건설 시기를 표기한 이유는? 간단하다. 동진이 바로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이기 때문이다.

"중화민족은 56개 민족으로 이뤄졌다"는 중국의 주장은 얼핏보면 한족 중심주의를 폐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독 한족 왕조의 연호로만 광개토왕비의 연대를 표기한 것은 결국 '한족 중심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한편으로는 한족 중심주의을 감추는 위장막에 불과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민족 지역의 땅까지 중국의 영토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근거만들기에 불과하다.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전 세계가 중국 지방정권

중국의 25사를 비롯해 정사에 고구려를 비롯해 이방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는 모두 외국 열전에 기록됐다. 그들 스스로가 만들었던 역사기록도 부정하는 게 현재 중국이 벌이는 각종 공정이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유력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조공-책봉관계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조선까지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더 나가면 1911년 신해혁명 또는 최소한 1840년 아편전쟁 이전에 중국과 외교적 왕래를 했던 나라들도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중국은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는 모든 나라들을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조공-책봉 관계로 생각했다.

한 중국 학자는 "중국이 조공-책봉 관계를 들어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주장하지만, 그 논리대로하면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해 유럽 국가들도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며 "따라서 이 모순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솔직히 이 문제 때문에 내부적으로 논란이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중국은 칭기즈칸을 중화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몽골도 중국 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몽골 사람들이 먼저 현재의 중국 영토를 자기 땅으로 주장할 수 있다. 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불러들여 1932년 만주국을 만들었던 일본도 만주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 베이징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빠다링의 만리장성.ⓒ 오마이뉴스 김태경

 

신해혁명 때 구호는 "만주족 몰아내자!"

중국의 다민족 통일국가론도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 중국은 현 영토안에 살고있는 모든 민족들은 수천년 전 상고시대부터 서로 융합·발전하면서 오늘날의 '중화민족 대가정'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고구려도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도 안된 1911년 신해혁명 때 터져나온 구호는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 정권을 세우자)이었다.

대만의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모두가 떠받드는 쑨원(孫文)이 1894년 만든 흥중회(興中會)나 1905년 결성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는 "구제달로(驅除達魯)·회복중화(恢復中華)"를 구호로 내걸었다. 오랑캐를 제거하고 중화민족 정권을 세우자는 말이다.

달로는 다루가치(達魯花赤), 즉 몽골족의 원나라 때 황제가 지방에 파견한 총독을 이르는 말이다. 달로는 몽골족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야만족, 즉 만주족이나 몽골족 등 한족(漢族)이 아닌 소수민족을 멸시해 지칭한다. 현재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거한다면 쑨원은 민족분열주의자다.

중국 베이징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빠다링(八達嶺)에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만리장성은 진 시황 때의 것이 아니다. 1644년에 멸망한 명나라가 만든 것이다.

이 만리장성이 청나라 이전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자신의 영역과 외부세계를 가르는 국경선이다. 장성 밖은 중국인들의 관념상 그들의 영토가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이 지은 역사책에도 장성 밖의 나라들은 대개 외국 열전에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청나라가 세워지기 1000년 전 만주에 있었던 고구려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넌센스다.

 

오삼계는 통일 영웅인가 반역자인가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모순

▲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하이꽌ⓒ오마이뉴스 김태경

 

지난 9월 12일 산해관(山海關)을 찾았다. 베이징에서 동북쪽 열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산해관의 성벽 위에는 명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많은 재상과 장군들의 동상 100여개가 서있었다. 그러나 오삼계(吳三桂 1612∼1678)의 동상은 없었다.

오삼계는 중국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장군이다. 1644년 명나라 말기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이 수도 베이징에 쳐들어왔다. 명나라는 오삼계를 평서백(平西伯)에 봉하여 수도방위를 맡게했다. 그러나 그는 이자성에게 베이징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산해관으로 돌아가 청나라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남방으로 가 저항했다. 오삼계를 비롯해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 평남왕(平南王) 상지신(尙之信) 등 한족(漢族) 출신 장군들은 앞장서 명나라 잔족 세력을 제거했다. 오삼계는 남명(南明) 정권을 추적해 영력제(永曆帝)를 오늘날의 미얀마에서 살해했다. 그러나 이후 청나라는 이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673년 오삼계는 운남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주(周)를 세우고 경정충, 상지신(尙之信) 등과 함께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켰다가 모두 패배해 살해당했다.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을 민족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시각에서 본다면 오삼계는 중국 통일의 영웅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그 누구도 오삼계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오삼계와 정 반대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정성공은 명나라가 망하자 당왕(唐王) 융무제(隆武帝)를 옹립해 청나라에 대항했다. 그는 국성(國姓)인 주(朱)씨를 하사받아 주성공(朱成功)으로 이름까지 고쳤다.

1661년 정성공은 당시 타이완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격퇴시키고 이곳을 근거지로 청나라에 항거했다. 그러다 1683년 정성공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청나라에 복속됐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그 누구도 정성공을 "조국 통일을 방해한 민족 분열주의자"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박선희 교수  2012/10/03 [09:49]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1>(breaknews.com)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

이글은홍산문화유적에서출토된옥으로만든도장이중국학자들의견해처럼‘중화민족제일인“이아니라고조선문화와관련이있음을밝히는것이목적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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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이 글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도장이 중국학자들의 견해처럼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옥도장이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임을 다음의 내용들을 통해 명확히 밝히게 될 것이다. 글 차례는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2장. 홍산문화 출토 옥인장의 주체 검토  3장. 홍산문화가 지속된 고조선문화(1절.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과 고조선  2절. 채색기법의 성격과 고조선문화  3절. 석경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4장. 옥인장은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으로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옥도장의 주체해명을 통해 그 까닭을 밝히게 될 것이다. 홍산 옥인장의 주체가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환웅천왕 ‘신시’문화의 상징물로 올바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필자 주>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나만기유적에서 두 개의 옥인장이 출토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이 옥인장에 모두 구멍이 뚫려있어 끈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양식에 따라 동물형 옥인장(그림 1)과 쌍두조형 옥인장(그림 2)으로 분류하였다. 이 옥인장에 끈을 꿰어 의복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옥인장이 홍산문화의 특징인 옥으로 만든 용과 새 등의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만들어진 시기를 홍산문화시기(서기전 4500〜서기전 3000)로 추정하며 ‘(中華民族第一印)’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홍산문화유적에서 패대에 사용되었을 다양한 복식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어 중국학자들이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성격을 근거로 옥인장의 주체를 올바르게 해명하는 목적을 가진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는 주로 복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뿐만이 아니라 적석총, 제단, 성곽과 취락유적들이 함께 두드러진 문화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용되었을 악기와 도구 등의 유물에서 보여지는 문화적인 의미와 상징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특히 홍산문화 후기(서기전 3500〜서기전 3000년)의 우하량유적은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발전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 옥인장의 인면&nbsp;&nbsp; &nbsp; &copy;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문화현상들은 중국문화와 확연히 구별되고, 고조선문화와 이후의 여러 나라 시대 문화 특징에 지속적인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해석하는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중화주의에 따른 헛된 집착일 뿐이다.
     
중국학자들은 어떠한 유물을 분석할 때, 대상유물과 동반유물의 기원과 양식 및 문화적 상징성 등에 관한 변천사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유물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내려져야하는 마땅한 수순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아주 단순히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의도적인 경향이 많다. 홍산 옥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은 홍산문화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옥인장을 비롯하여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년∼서기전 5,200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그림 3)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 흥륭와유적출토 옥 귀걸이 &nbsp; &nbsp; &copy;브레이크뉴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그림 4)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의 여러 유적에서는 옥기가 계속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년∼서기전 5,000년)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한민족 특징의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아울러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수공업 생산기술의 교류와 상품 교역이 활발했음도 알 수 있다. 나만기유적에서 출토된 옥인장은 이러한 교역에서 필요한 정치적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장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마련이다. 농업과 함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취락지가 형성된다. 집단취락지의 형성은 정치적 지도자를  출현시키며 통치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와 관련된 구조물과 상징물들이 마련된다. 그 예로 신석기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 보이는 돌무지무덤과 규모가 큰 건축물 및 정교한 옥기의 생산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하량유적은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문 수공업자가 출현했으며 전쟁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권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출토되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사회변화의 요소로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 사용 등을 들었으나, 복식자료로부터 본다면 방직도구와 재봉도구의 급격한 증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의 유적들에서도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발견되었다. 성벽 안에서는 많은 량의 채색 질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질그릇과 옥기, 뼈와 뿔 및 돌로 만든 생산도구와 방직도구, 재봉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성곽유적은 정치적 지도자가 무리를 통치하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자취를 보여주는 정치적 구조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에서 생산한 옥기를 비롯한 수공업품과 농업품 등으로 큰 규모의 교역을 진행하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인장이 쓰여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장은 정치지도자가 직권을 행사하는 상징물이며 공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만기의 여러 유적들에서는 한민족 문화의 특징인 새김무늬와 기하학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옥기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의 주체가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신시’문화였음을 밝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홍산 옥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 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도 함께 해석하고자 한다. <계속>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11/13 [13:35]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 (breaknews.com)<2>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

박선희교수©브레이크뉴스중국인들은만주의고대문화를총칭하여요하문명이라부르고있다.대표적문화로는후기신석기문화인홍산문화와초기청동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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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스타일과 옥 절풍의 고유성

중국인들은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고 있다. 대표적 문화로는 후기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와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이다. 홍산문화는 1930년대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적이 있었고, 1970년대 이후 중국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 초기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가 황하문화로 부터 전파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화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고 규모가 매우 큰 유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에 있어 황하문명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만주지역의 선사문화를 하나의 독립된 성격을 띤 문명권으로 인정하고 이를 총칭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 이러한 명칭을 붙였다고 하여 만주의 고대문화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문명적 요소가 규명될 수 있어야 한다. 

▲ 남인상 &nbsp; &nbsp; &copy;브레이크뉴스

 

요하문명이라는 용어에는 이 지역의 문화들을 황하 유역의 황제문화에 포함시키기 위한 중국인들의 계략이 자리잡고 있다. 요하문명이라는 명칭에는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일본열도 등의 고대문화를 황화문명의 변방 문화로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요하문명의 성격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필자가 연구해 온 홍산문화의 독창적인 복식양식과 장식기법, 염색기법 등이 절제 있게 복합된 복식양식은, 이후 고조선으로 이어져 전통기법을 이루며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홍산문화가 고조선이 출현한 초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발전했고, 다시 고조선 비파형동검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로 발전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황하문명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선사문화는 요하라는 하나의 강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으며, 요하문명을 황제 문명에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요하문명을 황제문화에 포함시킬 수 없는 근거를 홍산문화의 성격을 근거로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복식과 예술에 나타나는 한민족문화의 기원과 정체성을 해석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홍산문화의 복식유물과 종교예술에 동반된 유물들은 종류와 성격에서 다양성을 보이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특히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종래에는 중국과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문화적으로 공통된 요소가 발견되면 그것은 중국에서 전파되어왔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황하유역이 동아시아문명의 발상지였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고고발굴과 그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반도와 만주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왔을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한반도와 만주의 신석기시대 시작 연대는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일찍이 문화가 전개된 것으로 알려진 황하 유역보다 앞섰던 것으로 나타난다. 

▲ 청동마구장식 &nbsp; &nbsp; &copy;브레이크뉴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년∼서기전 5,200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고, 이 시기 남녀모두 귀걸이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압록강에 위치한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에서는 춘천 교동 혈거유적과 김해 옹관이나 김해 무계리의 지석묘 등 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에서 管玉이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중국에서는 곡옥을 비롯한 옥기들이 위의 동북지역보다 약 1,000년 정도 늦게 만들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신석기시대문화는 황하중하류지역, 양자강중하류지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황하중류유역의 서기전 5,000년기의 앙소문화에 속하는 남정현 용강사유적에서 옥제품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문화의 옥기제작기술이 가장 발달한 것은 양자강 하류유역의 양저문화(서기전 3,000〜서기전 2,000년)이다. 양저문화는 이보다 앞선 서기전 3,000년기에 속하는 마가빈문화와 절강성의 하모도 3·4층 문화(서기전 5,000∼서기전 4,000년기)로부터 발달된 것으로 이들 문화층에서는 다양한 옥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근거하면 오히려 옥기 등의 문화가 한반도나 만주지역에서 기원하여 중국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와 같이 동아시아의 모든 문화가 황하유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는 선입관이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흥륭와문화 이후 발굴된 요령성 서부 부신에 위치한 사해문화유적(서기전 5,600년경)에서도 흥륭와문화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양식의 옥귀걸이와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옥기는 옥귀걸이, 옥구슬 등의 장식품과 실용공구인 옥도끼와 옥칼, 화살촉, 새김무늬 질그릇 등이었다. 사해유적은 흥륭와문화가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옥기가 출토된 지역이었다. 이 문화는 홍산문화 보다 앞선 문화로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한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이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년∼서기전 5,000년)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이 유적들에서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이들 유적지에서는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 후기의 요령성 건평현 부근에 위치한 우하량 여신묘유적(서기전 3,500년)에서는 큰규모의 돌무지무덤과 흙으로 만든 신상이 출토되었고, 중앙에 있는 석관묘에서 많은 량의 옥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옥기 가운데 비파형동검을 옥으로 만든 것이 출토되어 고조선문화와의 관계를 입증해준다.  
   
이처럼 한반도와 만주의 전 지역에서는 중국보다 앞서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다양한 옥제품이 생산되었으며 이 옥기들이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양식과 같은 계통의 것으로 고조선 문화로 지속됨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에 근거하면, 오히려 옥기 등의 문화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기원하여 중국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홍산문화의 복식유물과 종교적인 예술활동과 관련된 유물들을 해석하고 이를 고조선문화와 관련해 고찰한 선행연구는 없다.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홍산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를 밝혀보기로 한다. 

▲ 가면 &nbsp; &nbsp; &copy;브레이크뉴스

     
  

첫 번째로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 가운데 속발(束髮)과 관련이 있을 옥 절풍의 고유양식이 고조선 문화와 여러나라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까지 지속되었음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의 우하량 1호 적석총 M4와 M15유적에서 옥고가 한 개씩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옥고의 출토위치가 두개골 아래 혹은 정수리 아래쪽 일 것이라고 밝히며 머리를 틀어 묶고 이를 덮어씌우는 것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옥고는 속이 비스듬히 드러나 보이는 원통형으로 윗부분이 아래 부분보다 약간 넓으며, 아래 부분의 양쪽에는 각기 1개의 작은 둥근 구멍이 있어 머리꽂이를 꽂는 것이 가능하다. 발굴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고 옥고가 이를 덮었을 것인데 무게로 인해 미끄러지므로 머리꽂이로 고정시켰을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이 옥장식이 머리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의 구실도 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머리양식은 틀어 올려 진 상투머리양식이고 맨상투 위에 옥고와 유사한 것을 덮어씌워 매무새를 갖춘 두발 모양이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같은 시대 북방지역 석인상들이 긴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린 것과 구별된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의 유적들에서는 머리를 틀어 올리면서 꽂았을 머리꽂이가 골고루 출토되어진다. 신석기시대의 머리꽂이는 주로 새의 뼈와 뿔 등 가벼운 재료로 만들었고, 옥이나 돌, 토기조각으로도 만들었다. 머리꽂이는 주로 문양이 없이 밋밋한 것이 대부분인데, 간혹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점 또는 선을 누르거나 그어서 문양을 새긴 것들이 있다. 이러한 문양은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문양과 같은 양식으로 이후 고조선으로 지속된다.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과 가깝게 위치한 적봉시 오한기 흥륭구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조소품인 남신상에서도 보인다. 발굴자들은 이 인물상이 서기전 3,300년 무렵에 속하다고 했다.

   
남신상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은 매우 특징적인데, 머리 뒤에서 땋아 세 번 돌리면서 정수리로 올려서 끝자락을 이마 바로 위 머리까지 내려 장식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옥문화가 발달하고 머리 장식이 출토되었던 예로 보아 땋은 머리자락을 마무리한 장식은 옥장식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보아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러한 머리를 덮어씌웠을 옥고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머리를 틀어 올려 위의 인물상처럼 끝부분을 옥장식으로 마무리하거나, 또는 옥고를 씌우는 머리양식이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머리양식은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으로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의 고유한 습속은 남신상의 다리를 접고 앉아있는 자세에서도 찾아진다.
   
이러한 사실로 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머리꽂이를 사용해 일정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머리꽂이는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틀어 올린 머리를 덮는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널리 사용된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홍산문화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는 작은 크기의 절풍 모양 옥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이 옥 장식품이 절풍을 조각한 것이라면, 절풍은 고조선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고는 고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절풍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조선시대의 틀어 올린 머리와 관모양식이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되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로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및 󰡔진서(晋書)󰡕 등에는 고대 한민족이 머리를 틀어 올렸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한(韓)에 관한 것이지만, 이러한 머리양식은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졌을 것이다.  
  초보산유적출토 남인상

고조선시대에는 머리꽂이를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춘추후기에 속하는 요령성 금서 사과둔유적에서는 금으로 만든 18쎈티미터 길이의 머리꽂이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처럼 서열이 높은 금속인 금으로 머리꽂이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은 당시 틀어 올린 머리양식이 복식양식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같은 춘추시대에 속하는 고조선의 유적인 오한기 초보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남자상은 머리를 정수리 위에 틀어 올리고 그 위에 절풍과 같은 상투만을 덮는 모자를 쓴 모양이다.
 
중국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머리꽂이가 출토되지만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처럼 모든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머리꽂이는 주로 황하중류 유역에서 출토되어진다. 하북성 자산유적에서 뼈로 만든 머리꽂이가 출토되었고, 서안 반파유적에서 돌과 뼈등으로 만든 머리꽂이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같이 황하중류유역에서 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것은 그 지역의 머리양식으로부터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예로 감숙성 태안대지만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양식은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이다. 감숙성 임조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머리모양은 정수리에서부터 S자모양으로 땋아 내려뜨린 모양이다. 청해성 대통현 상손가색에서 출토된 채색질그릇에 보이는 그림의 사람들은 모두 짧은 묶은 머리를 하였다. 이처럼 이마를 덮은 단발머리와 땋은 머리모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황하중류유역에 위치했던 상왕조의 유적인 안양 은허 5호무덤에서는 묘주인 부호의 옥으로 만든 머리꽂이 20여개와 뼈로 만든 머리꽂이 490여개가 출토되어 머리양식이 무척 호화로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고학의 출토자료로 보면, 상왕조시대의 남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짧게 땋아 내려뜨리거나 머리 전체를 말아 올렸는데, 그 실제모습이 부호묘에서 출토된 옥과 돌로 만든 사람 조소품에서 보인다. 돌로 만든 사람의 머리양식은 모자 안으로 머리를 말아 올려야 하므로 머리꽂이를 여러 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머리꽂이의 사용방식은 한민족의 머리양식처럼 상투를 찌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틀어 올리는 머리양식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의 선사유적에서 머리꽂이가 출토되는 것과 달리 중국의 선사시대유적에서는 주로 황하중류유역을 중심으로 머리꽂이가 출토되어지는 요인이 될 것이다. 
  
고조선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변이나 절풍과 같이 상투머리만을 덮는 폭이 좁고 높이가 있는 모자를 썼던 것은 홍산문화시대로부터 형성되어져 널리 정형화된 머리양식이다.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시대와 삼국시대로 오면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에서 상투머리에 변이나 절풍을 많이 썼음이 고분벽화에 보이는 관모와 출토되어진 유물들로부터 확인 된다. 실제로 부여사람들의 틀어 올린 머리양식에서 지속성을 보이는데, 길림시 모아산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이 같은 머리양식은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개껍질로 만든 인형의 것과 유사하다.  
    
같은 머리양식이 유금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와 고구려의 가면에서도 보인다. 길림시 동단산에서 출토된 유금으로 만들어진 입체감 있게 만들어진 가면은 머리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발굴자들이 정수리부분을 그림에서와 같이 점선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면 상투머리 양식이다. 또한 고구려의 유금으로 만든 가면 역시 윗부분이 손상되었으나 정수리부분이 올라간 같은 양식이다.
고구려의 금으로 만든 가면
     
신라초기 토우들의 머리모양도 모두 크고 작은 머리꽂이를 사용하여 틀어 올린 맨머리를 변이나 절풍으로 씌워 아름답게 꾸몄다. 경주 황남리에서 출토된 남자 토우들이 대부분 고깔 모습을 한 관을 쓰고 있어 고조선을 이어 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도 변을 사용했음이 부여에서 출토된 토기편에 보이는 변의 모습에서 확인되는데 양쪽에서 纓을 내려 턱밑에서 묶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백성들은 변을 많이 썼는데, 그 실제 모습이 집안에 위치한 우산 2110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인형에서 보인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고조선 이전시기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머리꽂이를 사용해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하였고, 홍산문화시기에는 상투위에 옥고 등을 씌워 우아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조선시기로 오면 일반적으로 옥고 대신 상투머리를 덮을 수 있도록 폭이 넓지 않고 높이가 있는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가 발달하게 되었다. 변이나 절풍은 주로 가죽과 자작나무껍질 또는 누에 천을 사용했으나, 이후 금과 은, 금동 등으로 만들어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썼던 관 전체를 금으로 만든 금관의 한부분인 금절풍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 만들어진 금관과 금동관 등도 모두 고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상투머리와 그 위에 썼던 절풍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관의 기본양식은 홍산문화로 부터 비롯된 고조선문화의 전통에서 그 실체와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다.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박선희교수 | 기사입력 2012/11/15 [09:49]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breaknews.com)<3>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홍산문화후기의우하량유적에서는정교하게만들어진장식품으로사용되었을옥기가다량출토되었다.출토된옥기는주로달개장식으로쓰였을장식품과치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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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단추와 달개장식의 다양성

홍산문화 후기의 우하량유적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옥기는 주로 달개장식으로 쓰였을 장식품과 치레거리들이 많다. 즉 비실용성 생산공구류와 인물, 동물, 식물, 곤충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 또는 추상적인 동물형상을 조각한 것, 신발의 모양을 나타낸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한데, 대부분 구멍이 뚫려있어 의복에 달거나 걸어 장식했을 것이다. 신발모양의 장식품은 지금의 버선형태와 유사하다. 
 

요령성 심양의 북쪽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유적인 신락문화유적(서기전 6,000년대 후기)에서도 새김무늬 질그릇과 함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일부 장식물을 옥단추로
구분했다. 이처럼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 옥으로 만든 복식 장식품이 출토되어지는 것으로 보아 전문 수공업자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러한 경제력의 발전은 복식분야에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양식을 보다 다양하게 정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실제로 장식단추의 발전양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보편적으로 나타나 직물생산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장식기법의 복식문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 같은 발전양상은 중국 황하유역의 신석기문화유적들에서 장식단추가 드물게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초기유적인 궁산유적(서기전 6,000년~서기전 5,000년)에서는 뼈구슬과 둥근모양의 토기단추가 출토되어 실제로 바늘과 실을 사용해 의복에  단추와 구슬을 달거나 꿰어 걸었던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신석기중기의 후와유적(서기전 4,000년)에서는 둥근모양의 돌단추와 함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곽가촌유적(서기전 3,780∼서기전 3,530년)에서는 뼈북과 함께 둥근모양의 토기단추와 가락바퀴 등의 방직과 재봉에 사용된 도구들이 돌과 뼈로 만든 구슬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후 신석기후기의 좌가산유적과 서포항유적 4기층(서기전 3,000년)에서는 곡옥과 뼈, 돌로 만든 나뭇잎모양의 달개장식과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팔찌 등이 많이 출토되어 의복장식이 이전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조형미를 추구해나간 모습이다.
  
신석기중기부터 장식구슬의 출토량이 증가한 것은 전문 기능인 수공업자의 출현과 함께 달개장식품의 생산 규모가 커졌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의복에 장식단추를 사용하고 구슬로 장식하거나 달개장식을 달아 복식에서 공간을 꾸몄던 조형적 전통기법이 정착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만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지역에서는 서기전 4,000년경에 속하는 심양 신락유적의 하층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특징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최근에 만든 것처럼 검은색 광택이 나는 흑옥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같은 흑옥 장식품이 중국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어 신락유적의 것이 가장 이르다고 분석하며 보기 드문 진귀품으로 평가했다. 
   
요령성 매전지질감탐공사 과학기술소에서 감정한 내용에 의하면, 이 흑옥의 원료는 무순 매전 서부 본층의 것으로 밝혀졌다. 심양에서 무순까지는 약 100리의 거리인데 당시 교통수단으로 신락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매정을 가져다 정교한 장식품을 만들었다고 하겠다. 신락유적에서 출토된 흑옥 장식품은 전체 유물의 10분의 1이나 차지한다. 발굴자들은 유물이 차지하는 큰 비중으로 부터 흑옥 장식품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허리띠를 장식했을 네모난 크고 작은 옥장식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가죽허리띠에 달아 옥대를 만들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 옥대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의 허리띠는 중국보다 앞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의 초기유적에서 보여지며 삼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만주의 신석기시대 여러 지역에서는 지역마다 특색을 달리하는 재료를 융통성 있게 사용해 단추와 달개장식 및 장신구를 만들어 의복위에 자유로운 조합의지와 다양성을 추구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이처럼 신석기초기부터 시작된 장식단추와 달개장식의 복식기법은 홍산문화에서 옥을 재료로 독창적이고 입체적인 양식들을 표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의복에 장식하던 토기단추와 돌단추, 뼈와 뿔,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 옥장식 등은 홍산문화를 지나 고조선시대로 오면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한 것들로 적극 대체되어 보다 화려해졌다.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위에 달아 여밈새를 처리하거나 달개장식으로 사용되어 다시 고조선문화로 이어져 한층 화려하고 현대적인 조형미의 지속성을 보인다.
    
고조선시대에 오면 직물의 발달과 함께 장식양식이 보다 화려해져, 뼈나 뿔, 조개껍질 등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옥과 청동, 철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뼈와 뿔, 조개껍질, 옥은 다양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고, 청동과 철은 주로 둥근 모양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로 만들어져 의복 위에 달아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직물 발달은 의복에 다는 장식단추와 장식품의 사용도 직물의 성격과 아울리게 변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자연히 종래의 장식단추에 새로운 장식기법이 더해져 대담하고 역동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직물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옷 만드는 일이 많아지면서 장식단추의 사용량도 크게 늘어난다. 고조선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장식단추는 그 양식이 주로 원형과 나뭇잎모양으로 나타난다. 그 형태는 윗면이 도드라진 원형인 것과 편편한
      

▲청동장식단추&nbsp;&nbsp;&nbsp; &copy;브레이크뉴스



원형으로 꼭지가 달린 것, 도드라진 원형으로 단추구멍이 있는 것, 가운데 구멍이 있는 구슬모양의 것, 단추 구멍 2개가 나란히 있는 것, 정사각형 가운데 원형의 구멍이 있고 4변 주위에 문양이 있으며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원형으로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뒷면에 단추꼭지가 있는 것, 반원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또한 청동장식단추는 표면에 문양을 나타내는 경우와 문양이 없는 소면 상태의 두 종류로 크게 구분된다. 표현된 문양은 대부분 신석기시대의 문양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김무늬질그릇이나 가락바퀴 등에 보이는 양식과 같다.
 
고조선 사람들은 장식단추를 의복뿐만 아니라 모자나 신발 또는 활집 등 복식의 여러 부분에 자유롭게 사용했다. 한민족의 여러나라에서는 모자에 새깃을 꽂는 것 이외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금과 은, 옥 등으로 모자를 장식했다. 이러한 고급 장식재료는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화려하고 높은 수준의 관모 양식을 이루게 만들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장식단추를 일반 복식에서 뿐만 아니라 특수복식인 갑옷과 영성필사영자유적출토 고조선 청동투구 청동투구에도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일반인들이 평상복에서 청동으로 화려한 장식을 했기 때문에 청동장식단추가 자연스럽게 갑옷에 응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동을 사용하면서부터 종래의 돌이나 뼈 등으로 만들던 공구나 무기를 청동으로 만들어나갔기 때문에 가죽이나 뼈로 만들던 갑옷재료도 청동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고조선사람들이 의복에 장식했던 장식단추의 양식은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여러나라시대로 이어져 나라마다 조금씩 특색을 달리하여 발전해 나간다. 예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입는 곡령에 약 5센티미터 이상 되는 은화를 꿰매어 장식했다. 부여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썼다. 

▲&nbsp;&nbsp;백제사신의 옷&nbsp; &copy;브레이크뉴스


 

원태자촌출토 금관식
               
와 고구려 사람들도 청동장식단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한 사람들은 북방지역에서 청동장식단추를 많이 사용한 것과 달리 의복에 주로 구슬을 장식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인의 의복에서도 화려한 장식이 가능했던 한민족 복식의 특징으   고구려사신의 옷   로 중국이나 북방지역과의 차이점이다. 고구려 사      람들은 금(錦)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 했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으므로 이러한 고구려의 풍속도 예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것을 이었을 것인데 그 실제 모습이 안악3호 고분벽화와 왕회도, 마조총 수렵도 등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에서는 의복뿐만 아니라 금관과 관장식에 일정하게 장식단추모양의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단추를 달아 만든 보다 발달 된 고구려 관식과 장식품이 서기 3세기∼서기 4세기에 걸쳐 고구려 영역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은 원태자 무덤과 북표현 방신촌 진무  덤, 조양현 왕자분산무덤이다.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동관과 금관 등에서 보이는 관식과 절풍, 원형과 나뭇잎모양의 장식 등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금관양식의 영향이었다. 이 같은 고구려의 금관식은 신라와 백제, 가야뿐만 아니라 주변민족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요녕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식과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관식이다. 
  
이처럼 장식단추의 양식은 홍산문화로부터 시작되어 고조선 이전시기부터 복식에 장식물로서 다양하게 사용되어져 고조선 붕괴 이후 여러나라로 이어지고 다시 삼국시대로 이어져 한민족의 중요한 장식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한민족 복식에 보이는 장식단추에 대한 비교 분석과 통시적 전승을 검토한 결과, 한민족 복식의 원형을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으로부터 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종래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원형과 나뭇잎모 양의 장식단추는 생명력 있는 조형의지와 역동적이며 생동하는 한민족의 정서를 줄곧 표현해 온 고유한 문화 인소로서 그 정체성이 올바르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아울러 홍산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복식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로 부터도 우리는 홍산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11/15 [14:01]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breaknews.com)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박선희©브레이크뉴스한반도와만주지역에서는장식기법뿐만아니라염색기법에서도과학적인수준을이루었다.신석기시대부터풀,꽃,흙,열매,뿌리,곤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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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 채색기법의 성격과 발달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장식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과학적인 수준을 이루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풀, 꽃, 흙, 열매, 뿌리, 곤충, 돌 등의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하였다. 그 실제 예들이 암화와 벽화, 채회도, 채도, 칠기 등에서 보인다.
 
신석기시대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적봉시 오한기에 위치한 조보구유적(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에서 출토된 그림이 그려진 채색질그릇에서 처음 보인다.

 
황하유역의 앙소문화(서기전 4512〜서기전 2460년)에서 보이는 채색질그릇보다 이른 시기이다.
 
요령성 심양 부근의 신락유적(서기전 5000년경)에서는 채색질그릇과 함께 붉은색과 검은색 염료가 출토되었다. 붉은색 철광석과 석묵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연마기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이 연마기를 사용해 염색재료를 만들었음을 알게 한다.
 
흑룡강성 목단강 해림현에 있는 자하향암화에는 적색과 자색의 광물성 안료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보구유적출토채색질그릇&nbsp;&copy;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서기전 3500년경) 여신묘 벽화에는 붉은색과 황백색이 채색된 화려한 기하학문양이 보인다. 벽면에는 적색과 홍색사이에 황백색을 교차하여 삼각문양으로 채색한 기하문양을 표현했고, 소하연문화에서는 흰옷위에 흑색과 홍색 등을 사용했다.  이 두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을 그렸지만  소하연 채도의 부호문양과 여러 종류의 색채가 함께 장식된 특징으로 본다면 연원이 같은 공통의 요소를 가진다. 여신묘 벽면에 보이는 적홍색 기하문양과 소하연문화의 뢰문 또는 기회자형으로 불리우는 문양과 유사하다.
 
소조달맹의 석붕산유적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에서도 같은 문양이 나타난다. 이 문양은 질그 릇에 연결되어 문양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른 부호와 함께 연속하거나 단독으로 그려져 원시글자 혹은 도화자로 인식되며 ‘뢰’ 혹은 ‘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로 홍산문화의 제사유적들에서 이 부호가 나타나고 있어 제사와 관련된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나타나는 피리와 같은 관악기 등 어떠한 악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객좌 동산취유적과 우하량유적, 릉원 삼관전자유적, 부신 호두구유적에서는 모두 밑바닥이 없는 채색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처럼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을 당시 사람들이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우하량유적 제16지점 하층 

적석총에서 출토된 통형 채색질그릇의 입구 부분에 테둘레가 있어 북면의 가죽을 편리하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채색질그릇은 주로 큰무덤과 주무덤의 외부를 둘러싸며 세워져 있어 특정한 제사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아울러 제사의식과 채색은 연관성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우하량유적출토 통형질그릇&nbsp;&copy;브레이크뉴스

 

여신묘벽화의 채색은 소하연문화(서기전 3000〜서기전 2000년)의 흑색과 홍색 등의 채색 문양으로 계승되어지고 다시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000〜서기전 1500년)로 이어진다. 이러한 염료의 사용은 화려한 흑색 바탕위에 홍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채색질그릇을 만들어낸 오한기에 위치한 대전자유적에서 잘 나타난다. 
  
대전자유적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의 질그릇과 함께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붉은색 안료가 담긴 돌그릇과 채색질그릇 부분 붉은색 안료가 담긴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그릇이 출토되어 채색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다. 그 외에 고형의 칠기도 출토되어 칠기의 역사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음과 다양한 채색기법이 발전해갔음을 알게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 한 모습은 고조선시기로 오면 보다 과학적인 발달을 이룬다.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에서 장식기법과 직조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독창성을 보인다.
 
󰡔삼국지󰡕의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에서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옷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로 만든 큰 소매의 겉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했다. 동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였으므로 그들의 복식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로 아래 폭이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겉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부여에서 입었던 큰 소매 달린 겉옷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부여의 넓은 폭과 긴 길이의 겉옷을 입었던 모습은 길림시 모아산에서 출토된 도용에서 확인된다. 위의 󰡔삼국지󰡕 동부여에 관한 서술내용에서 ‘尙白’과 ‘白布’가 보인다. 白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번역하여, 부여사람들이 흰색 천을 숭상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고조선시대부터 줄곧 많은 생산량을 가지며 복식재료로 즐겨 쓰여 졌던 실크의 경우 색상과 문양이 화려한 상태로 출토되어진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고조선과 최리 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량의 다양한 종류의 사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천들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바탕색과 다른 색으로 문양을 직조하여 넣은 것도 있으며, 일부러 색상을 내기위해 탈색 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이처럼 염색과 탈색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면 부여에서 겉옷을 만들었던 천들은 염색을 통해 문양이 두드러지지 않게 단아한 색감을 냈을 것이다. 
 
실크는 정련공정에서 약간의 세리신을 남겨두는 것이 탄성을 부여하는데 더 좋으며, 세리신이 섬유표면에 0.5퍼센트 남아있는 경우에 완전히 정련된 경우에 비하여 염색이 최고 1.6배나 진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천들이 성분분석 결과 이 같은 과학적인 염색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점이다.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실크들은 모두 염색을 거친 직물로서 주로 밤색과 자주색을 띠며 문양이 없는 것과 문양이 있는 것, 또는 넝쿨문양을 수놓은 것, 붓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 다양한 기법을 표현한 염색직물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되어진 천연염료의 생산과 발달은 고조선시대에 오면 복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의복에 문양을 그려 넣거나 실이나 천을 염색하여 문양을 직조하여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더하는 등 고유한 기법으로 화려한 복식문화의 갖춤새를 정형화 시킨다.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 복식에도 고분벽화 등에는 흰색의 옷은 보이지 않고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이 있는 의복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는 금(錦)으로 상징될 만큼 금(錦)을 즐겨 입었다. 금(錦)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고 이를 섞어 화려한 문양으로 짠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등에서 이야기하는 ‘白衣’는 흰옷을 의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의’는 단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늬가 같은 계통의 색상으로 표현되어 옷의 바탕색과 무늬가 서로 크게 이색지지 않고 단아한 조화를 이룬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의 복식은 고구려로 오면서 색실로 짜 넣는 직조기술과 염색기술에서 더욱 발전양상을 보이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에는 특히 기하학문양이 많이 표현되었다. 문양은 주로 둥근 문양과 네모문양, 마름모문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문양도 있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이 복식에서 나타낸 문양들은 주로 염색기법과 직조기법, 자수기법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복식에 나타나는 색상은 고조선의 염색기술을 이어 색실로 직조한 것이거나,

▲동암리고분벽화의&nbsp;고구려사람들&nbsp;&copy;브레이크뉴스

   
직조한 직물을 침염법으로 염색한 것으로 기하학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에는 홀치기염과 납힐기법, 채회기법, 협힐기법 등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염색기법과 자수기법을 혼용하면서도 그 위에 장식기법을 더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복식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장식기법은 기학학문양의 또 다른 표현 양식으로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것이 지속된 것이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같은 양식의 문양이라도 크기와 양식의 차이 및 기하학적인 선의 방향을 달리하여 개성 있는 복식문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색상과 문양을 나타내는 복식기법은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채색기법 위에 고조선의 전통기법을 발전적으로 지속해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11/15 [14:14]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breaknews.com)<5>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박선희©브레이크뉴스환웅의신시시대는마을연맹체를형성하여정치권이형성된시기로유적과유물들은종교의식을반영한것들이대부분이다.이것은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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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의 기원과 고조선

환웅의 신시시대는 마을 연맹체를 형성하여 정치권이 형성된 시기로 유적과 유물들은 종교의식을 반영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고대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 종교와 무력이었지만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어 사회를 지배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홍산문화의 우하량유적으로 신상과 거대한 제단유적이다. 이 제단은 원형과 방형의 적석제단이고 제단의 돌돌림 울타리는 3중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은 이 시기에 종교가 일정한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하량유적 이외에도 요령성 서부와 내몽골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홍산문화 유적인 요령성 객좌현 동산취유적, 부신현 호두구유적에서는 제단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원형의 돌무지를 비롯해 제사를 지냈던 건물터, 돌무지 안에 돌널무덤이 있는 유구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특징의 제단 유적들은 중국이나 북방 유목문화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반면 한반도의 북한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방형과 원형의 돌돌림 제단유적이 2곳에서 모두 5기가 발견되었다. 황북 연탄군 오덕리의 송신동유적과 평양시 용성구역 화성동의 당모루유적이 대표적이다. 이 유적들은 고조선시기에 고인돌을 축조하면서 제의를 행하였던 제단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그 기원은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제단시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홍산문화의 제단 규모와 양식, 유물 등을 환웅시대의 신시문화 유적으로 해석하게 하며, 이곳에서 형성된 제단유적이 고조선시기에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널리 전승되었다고 하겠다. 
  

▲요령성 평강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초기 금장식&nbsp;&nbsp; &copy;브레이크뉴스

 

환웅천왕의 신시문화에 이어 고조선시대의 이러한 종교 유적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단군사화에 보이는 종교의식의 반영으로부터 볼 수 있다.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환웅과 곰, 호랑이의 상징성이 바로 고대인들의 종교의식으로 반영된 것이다. 고조선은 하느님을 수호신으로 했던 환웅족과 곰을 수호신으로 했던 곰족,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했던 호랑이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의 단군은 바로 이 여러 종족들을 다스리는 종교적 통치자인 동시에 정치적 통치자였다.
   
이러한 고조선시기의 종교의식을 담은 상징적 유물들은 삼국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양한 양식을 나타내며 발전되어갔다. 좋은 예로 요령성 평강지구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초기의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에는 단군사화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고조선의 단군이 정치적 통치자이고 종교지도자였음을 다음의 기록으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후한서』의 「한전」에는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으로써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도록 하였는데, 이름 하여 천군(天君)이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단군은 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그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하느님 또는 天君으로서 종교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호칭이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한에서는 국읍에서 하늘에 제사를 주재하는 종교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를 천군이라 불렀던 것이다. 고조선에 속해있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조선시기 요서지역에 위치했던 것과 달리 한은 원래부터 한반도에 위치해 있어 그 통치체제나 통치조직에서 고조선의 것을 큰 변화 없이 계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韓)은 고조선을 그대로 이어 종교를 주관하는 종교지도자와 종교 성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는 “또 소도를 만들고, 그곳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고 하여 한나라에는 종교지도자인 천군 뿐만이 아니라 소도라는 종교적 성지인 별읍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nbsp;&nbsp;홍산문화유적 출토 석경&nbsp;&copy;브레이크뉴스


 

     
소도의 나무에 매달았던 방울은 고조선의 대부분의 유적에서 고루 출토되어진다. 청동방울은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 가운데 하나로 가지방울과 팔수형방울을 비롯하여 다양한 양식의 것들이 만들어졌다. 고조선시대의 북은 아직 출토된 것이 없지만 홍산문화의 여러 유적에서 질그릇에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이 다수 출토되었다. 고조선에서는 악기가 크게 발달하여 관악기와 타악기, 현악기가 모두 사용되었다.
        
홍산문화시기에서는 종교의식에 사용되었을 타악기의 한 종류인 석경이 출토되어지며, 만주의 여러 유적에서도 발전된 모습의 석경들이 나타나고 이후 고조선문화로 지속되어진다. 중국에서 석경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이리두문화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리두 문화시기는 21세기 무렵에서 17세기 무렵으로,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석경 보다 2,000년에서 1,800년 정도 늦게 나타나기 때문에 석경의 발달사에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문화였음이 밝혀진다. 석경의 대하여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홍산문화유적에서는 두 개의 석경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44쎈티미터, 넓이 26쎈티미터, 두께 5쎈티미터이다. 다른 하나는 길이 58쎈티미터, 넓이 20쎈티미터, 두께 2쎈티미터이다. 중국학자들은 앞에 설명한 석경은 낮고 묵직한 음이 나며, 또 다른 하나는 청동종의 소리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水泉유적출토&nbsp;&nbsp;&nbsp;&nbsp; &copy;브레이크뉴스



고조선시대의 석경으로 요령성 조양 수천유적 하가점하층문화층에서 온전한 모습의 석경이 출토되었다. 요령성 건평현의 이도만자 동남구유적에서도 석경이 발견되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하면 대략 1미터 정도의 큰 석경이다. 석경의 몸체 윗부분에 직경 0.6쎈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어 끈으로 매달도록 했다. 대략 서기전 2,000년 무렵의 것이다. 
 
요령성 부신시 고대산유형의 물관지유적에서과 요령성 건평현 동북부에 위치한 객라심 하동유적에서도 석경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들의 연대는 서기전 2,100년경으로 고조선 초기에 해당된다. 
 
   
중국 중원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석경으로는 이리두 문화유적인 산서성 양분현 도사유적과 하현 동하풍유적에서 출토된 석경이다. 이리두 문화시기는 대개 서기전 1,900년 내지 1,600년무렵으로, 만주지역의 석경 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기전 14세기 무렵에 해당하는 은나라 무정의 왕비무덤인 부호묘에서 출토된 석   경은 다듬어지기 이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외에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11세기 무렵에 속하는 중국 하남성 안양시 무관촌 은나라의 대묘에서 출토된 석경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중국의 석경은 고조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악기들은 종교의식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후한서』「동이열전」부여전에, ‘행인들은 밤낮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며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고,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전에는 “밤에는 남녀가 떼지어 노래를 부른다”하였으며, 『후한서』「동이열전」한전에도,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북치고 비파 뜯기를 좋아한다” 고 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에도 보인다. 이 기록들은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지역 거주민들이 음악과 춤을 매우 즐겼음을 알게 해 주는데, 이러한 풍속은 고조선으로부터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중국의 이리두 문화시기에 만들어진 석경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것 보다 2000년에서 1800년 정도 늦은 것을 알 수 있다. 홍산문화시기에서 이미 타악기의 한 종류인 석경이 보이고 이후 고조선의 여러 유적에서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형태의 석경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석경의 발달사에서도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문화였음이 밝혀진다.
   
이처럼 홍산문화의 종교적인 예술품들에 관한 연구는 홍산문화의 성격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홍산문화의 성격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크게 구별되고, 고조선과 여러나라시대 문화에 그 특징적 요소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밝히게 되어 그 실체와 정체를 한민족 문화의 원형으로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홍산문화의 모든 내용들이 고조선문화의 원형임을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중국에서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이 문화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는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shpark@smu.ac.kr
출처; 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 (breaknews.com)

 

 

 

[이덕일의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 답사 #1 제남시 용산문화박물관 중국의 고고학자 양사영이 밝힌 삼첩층 문화는 용산문화 - 앙소문화 - 은나라문화로 동이족 문화이다

2020. 3. 15.

https://youtu.be/38pq39LH1Ao?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이덕일의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 답사 #2 제남시 용산문화박물관 관람 1921년 스웨덴 학자가 발견한 앙소문화(신석기시대) 양사영의 삼첩층 학설로 "서래설" 사라짐

2020. 3. 16.

https://youtu.be/JuHY2_H_fEc?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박물관 답사 #3

2020. 3. 31.

https://youtu.be/6nTUWTNlstM?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현장답사] 산동성 동이문화박물관 답사 #4

2020. 4. 4.

https://youtu.be/CpEANlbF618?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현장답사] 중국의 최초 문화로 인정한 동이문화 일대 산동성,하남성,강소성 / 동이문화박물관 답사후 버스 강의

2020. 4. 13.

https://youtu.be/40aVFxd2QlY?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신주사기] 조나라 진나라 모두 동이족 장평대전이 없었다면 | 중화문명의 정수 용산문화도 동이문화 인정

2020. 6. 29.

https://youtu.be/RcRpioiX3x4?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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