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신시배달국 (2) 태호족의 중원 진출 본문
<신용하의 지식카페>고조선 이주민, 5800년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 한민족 문명학
해수면 낮아져 생긴 동쪽 해안 간척지에 정착… 東에서 온 큰 활 가진 ‘동이’족이라 불려
결혼·화식·선진농경법 등 가르쳐… 고조선 상징 ‘아사달 문양’ 토기도 곳곳서 출토
고조선 첫 이주민 태호족의 족장(왕) 복희와 여와의 상징 벽화.
<그림 1>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 변화(기원전(BC) 5500~BC 1300). 황색은 후에 간척지. BC 5500년경 산동반도가 2개의 섬으로 돼 있다가 BC 1300년경 연륙이 끝나 간척지가 만들어지고, 현재(완신세·完新世)의 지형이 됐다.
중국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하류 유역 등 중국 동해안에는 약 5800년 전부터 2400년 전까지 고조선 이주민들과 그 후예들이 들어가 세운 다수의 자치적 소분국(小分國)들이 형성돼 고조선 문명권의 서남부 일대를 이루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고조선 ‘식민지’라고 표현했는데, 필자는 ‘分國’이라고 바꾼다.
고조선 사람들의 이 시기 이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지역의 환경변화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장광직 교수가 1986년경부터 아날학파의 방법론을 적용해 그린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적 환경 변화를 보면, 고조선 사람들의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에의 연속적 대폭 이주 정착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빙기가 끝나고 지구온난화가 진행돼, 약 1만 2000년 전의 지구 기후가 대략 오늘날처럼 된 후, 온난화가 최고로 진전된 약 7500년에는 해수면이 올라가서 (그림 1-1)과 같이 산동반도는 대륙에서 분리된 ‘2개의 섬’이 돼 있었다.
후에 고조선 이주민이 이주해 들어가 거주한 박(박)·상구(商邱)·개봉(開封) 지역은 바닷물에 잠겨 있는 해수면 아래의 대륙붕이었다. (그림 1-2)와 같이, 약 3300년 전에는 해수면이 다시 내려가서 산동의 2개 섬은 대륙과 연륙돼 산동반도가 됐다.
그 결과 이전 바닷물에 잠겼던 지대는 새로운 저지대 간척지가 됐다. 산동과 황하 하류 늪지대도 완전히 평원이 돼 오늘날과 같은 지형이 됐다. 중국 동해안에도 해수면이 내려가서 긴 줄의 간척지가 자연적으로 조성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동반도와 황하 하류에서 회수유역 및 양자강 하류유역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의 새로 조성된 직선 띠는 새로운 해안 ‘간척지’로서 토착인의 연고 점유권과 소유권이 없는 주인 없는 개척 가능한 새 땅이었다는 사실이다(그림 1-3 참조).
필자는 상대적 과잉인구에 시달리던 고(古)한반도 ‘밝’족과 ‘한’족, 그리고 한발을 만나 남하하던 ‘맥’족 일부와 고조선 건국 후 고조선 이주민들은 이 주인 없는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주인 없는 새 간척지를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마을공동체들’을 형성했고, 이들이 결합해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했다고 본다.
산동반도 및 중국 동해안의 간척지 분포와 고조선 이주민의 정착지 및 분국의 분포는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이주할 때 ‘큰 활’을 갖고 들어왔으며, 토착인들은 이 특징을 보고 후에 고조선 이주민들은 ‘동이’(東夷: 동쪽에서 온 큰 활을 가진 사람들)족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고조선 계통 이주민 중에서 가장 먼저 이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씨족은 고조선의 ‘태호’(太호)족이었다. 이들은 古한반도의 ‘밝’족의 한 씨족이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예기정의’(禮記正義)에 인용된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태호’는 동방(東方)의 ‘진’(震)에서 나왔고 밝은 태양을 상징으로 삼기 때문에 태호(太호)라 한다고 기록했다.
호(호)자는 좌변과 상단에 ‘白’(‘밝’의 뜻)자를 2개나 쓰고 하단에 ‘本’자를 붙여 그들이 ‘본래 밝족’임을 표시했다. 太(태)자는 맨 처음의 뜻이다.
중국 고문헌은 태호족을 ‘복희’(伏羲)씨 또는 ‘포희’(포犧)씨라고도 기록했는데, ‘伏’ ‘포’는 모두 ‘밝’의 한자 차음표기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또한 여기서 震(진)은 방향과 지역을 모두 가리키는데, 중국 고문헌이 쓰인 시기의 관용대로 古한반도 진국(震國, 辰國)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태호족이 동이족의 선두로서 중국에 들어온 시기를 5800년 전~48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건국 무렵에 고(古)한반도에서 밝족(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의 한 씨족이 선진 농경문화를 갖고 산동반도 지역에 이주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태호족은 농경에 적합한 진(陳·지금의 하남성 회양현) 지역에 정착해 농경생활에 들어갔다.
고조선 건국과 고조선 문명 형성기에 이주한 태호족은 선진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에 전수해 줬다. 필자의 설명보다 근대 중국 석학 부사년(傅斯年)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지적한 태호족이 당시 고중국에 전수한 다음의 선진문명 항목을 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태호족이
△결혼(가취·嫁娶)제도
△화식(火食) 방법
△태호족 신농(神農)씨는 보습과 가래를 만들고 농경(農耕)을 가르침
△태호족 포희씨는 새끼의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법(결승·結繩)과 그물 짜는 법을 만들어 가르침
△포희씨는 비파(거문고의 일종) 36줄을 만듦
△포희씨는 역(易)의 8괘(卦)를 만들어 만물의 이치를 알게 했고, 신농(神農)이 이를 제곱해 64괘(卦)를 만듦 등이 기록돼 있다.
<그림 3> 고조선 두 번째 이주민 소호족의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아사달’ 문양의 토기. <그림 5> 양저문화 유적 출토 옥기에 새겨진 ‘아사달’ 문양과 소호족 상징인 ‘새’.
신농씨는 고대부터 중국인들이 염제(炎帝), 적제(赤帝)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 사마천이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서 3황의 하나로 넣었던 씨족이었다.
사마천은 신농씨가 “나무를 쪼개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서 보습자루를 만들어, 보습과 가래의 사용법을 만민에게 보여서 비로소 농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신농씨라 했다”고 기록했다.
즉 고대 중국에 농경을 전파한 부족을 고대 중국에서는 고조선(동이족) 신농씨로 보아온 것이다. 선진 농경뿐만 아니라 악기 ‘비파’와 주역 8괘, 그리고 현재도 중국인들이 토템으로 사용하는 ‘용’(龍)도 고조선의 ‘태호’족이 중국에 가져가 전파한 태호족의 토템이었다. 즉 태호족이 이주할 때 갖고 간 선진 고조선 문명의 전수가 고중국 문명의 기원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태호족에 뒤이어 약 5000년 전~4000년 전에 산동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은 ‘소호’(少호, 少昊)족이었다. 그들도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
소호족의 산동반도 대문구(大文口)문화 유적 상층에서는 약 5000년 전~4400년 전의 고조선족임을 밝혀 ‘아사달 문양’을 새긴 고조선식 뾰족밑 팽이형 토기 술잔이 11개(파손품 포함)나 출토됐다.
태호족과 소호족의 이주 이후 연달아 고조선 이주민들이 산동 반도와 중국 동해안에 정착해 간척지를 새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에서 간직해 온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지에 자치적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가, 마을공동체들이 연합해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하고, 고조선어를 사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갖고 생활했다.
그 결과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이전 간척지대는 양자강 하류 남안까지 이주해 들어온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의 크고 작은 ‘분국들’의 생활 터전이 됐고 고조선 문명권의 일부가 됐다. 중국인들이 후에 관내의 동이(東夷)라고 부른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동이(先秦東夷)는 바로 고조선 이주민들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북(河北) 발해안, 하남(河南)성 동부, 강소(江蘇)성 북부, 안휘(安徽)성 동북각 지방의 이른바 동이족은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보았으며, 기원전(BC) 1000~BC 600년경까지 고조선족이 매우 강성했음을 지적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독립된 장으로, 서국을 고조선 이주민의 식민부락 가운데 하나인 소국으로 출발해 한 시기 주(周)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주나라에 매우 관대했던 고조선 식민지 국가였다가, 주의 선왕(宣王)의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고 설명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 지역 동이족의 기원이 고조선 이주민인가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 청동기 유물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조선 이주민들의 무덤인 ‘고인돌’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운반불능인 고인돌 무덤이 이주민의 사실을 명료히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산동성 등주(登州)의 치박(淄博)에는 1930년대까지 대형 개석식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었다. 산동반도와 회수 유역의 ‘동이’지역에는 이 밖에도 다수의 고인돌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적으로 보존돼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중국 산동성 치박(淄博)에 남아 있는 탁자식 고인돌 사진.(캐나다 고고학자 하가 시메이즈, 1936년 촬영)
그러나 고조선식 고인돌의 중국 호칭인 석붕(石棚) 이름을 가진 지명은 아직도 다수 남아 있어서 고조선 이주민 공동체 분국들과 고인돌 무덤이 존재했던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동이족의 하나인 우족(우族)이 고조선으로부터 청동기를 처음으로 고중국 지역에 가져와 전파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양자강 하류 북안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양저문화(良渚文化) 유적이라고 호칭하는 고대 유적이 있는데, 그 상층유적(BC 2300년경)은 ‘동이문화’ 유적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양저문화 상층유적 출토 옥기들 가운데 고조선의 상징인 ‘아사달’ 문양과 그 문양 위에 고조선 이주민 ‘소호’족의 상징인 ‘새’를 새긴 (그림 5)와 같은 옥기가 출토됐다.
또한 양자강 하류 절강성 일대에는 고조선 이주민 무덤인 고조선식 고인돌이 지금도 50여 기가 남아 있다. 이들 고인돌의 축성 연대는 청동기 시대인 BC 11세기~BC 400년경(중국 편년 상말 주초~춘추 말기)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주목할 것은 중국 양자강 하류 남안의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가 고조선·진국 지역(전라남도 지역)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산동반도 등에 이주한 고조선 사람들은 회수 유역부터 산동반도 이북 해안 지역에 걸쳐서 자치적 소분국을 세워 활동했다. 그들은 고조선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았고, 또한 물론 고중국 계열 어느 소왕국의 통치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주할 때 가지고 간 고조선 문화 양식을 변용·발전시키면서 자치생활을 했다. 중국인 학자 장광직(張光直) 교수가 상(商)시대 중국에 대한 정밀한 연구 끝에 동이족의 분포 지역을 지도로 그린 것이 있는데, 동이족의 영역을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고조선 이주민 분국들은 진시황이 BC 221년경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수축해 고조선 기마부대와 고조선 이주민의 월경을 차단하고, 동으로는 ‘동이족’을 고중국인들과 섞여 살도록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해 급속히 해체돼갔다.
그러나 고조선 이주민이 갖고 들어간 선진 고조선 문명이 그 후 고중국 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끼친 영향과 도움은 실로 막대했다. 중국 상(商)나라도 고조선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으며, 고중국 문명의 중핵인 상(商)문명도 바로 선행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 지역에서 계승한 문명이었다.
문화일보(문화일보 11월 6일자 15면 9 회 참조).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교수. 2019-12-04 (1)
<자료출처>
(1) <신용하의 지식카페>고조선 이주민, 5800년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 문화일보 munhwa
<참고자료>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신동아 (donga.com)박정학,2003-10-28
유네스코는 한반도-만주를 '문명시원지'로 공식화해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10/05
반란·수난의 민족…‘치우’ 조상설로 무모한 역사 리모델링 | 중앙일보 (joongang.co.kr)2020.12.05.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hani.co.kr) 2019-10-20
배달국 치우천황의 ‘청동검’이 ‘본국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가, 중국-일본무술의 복사판인가-(1편):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2/11/15
동이족의 적자는 한국인 – Sciencetimes2006.07.17 이종호 과학저술가
치우천황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 Sciencetimes 2006.06.26 00:00 이종호 과학저술가
치우천황은 한국인일까 중국인일까? – Sciencetimes 2006.07.03 00:00 이종호 과학저술가
치우와 자오지 (daum.net) 2005. 7. 14.
'단오절'은 치우천왕과 고주몽의 탄신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성훈, 2008/06/07
'신시배달국시대 > 신시배달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신시배달국의 강역 (1) | 2023.11.18 |
---|---|
1. 신시배달국 (1)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1) | 2020.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