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고사 부정하는 동북공정 논리의 오류와 위험성 지적

 

지난 12일 부산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에서 ‘제9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정경희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동아시아의 마고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정경희 교수는 동북공정의  핵심논리가 지닌 오류와 위험성을 지적했다.

정 교수는 “동북공정 논리에 따르면 한국은 은나라의 해외속지(점령지)인 기자조선으로 출발하여, 위만조선, 한사군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한국에는 고유문화가 없고 중국 은나라 예제문화를 전달받아 발전했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비롯한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 정경희 교수는 홍산문화가 배달국문화이며, 유물, 유적을 통해 선도수련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자국 내 소수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만든 정치적 목적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한다. 중국이 그동안 자국문화에서 배제했던 동북 요서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선진 상고문화인 홍산문화가 발굴되자, 이를 통해 자국을 세계 최고의 상고문화를 가진 문화대국으로 역사관을 재정립하는 국책사업으로 진행했다. 중국은 2015년 동북공정을 마무리하였으며, 2016년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많은 연구논문을 쏟아내며 선전공정에 들어갔다.

정경희 교수는 이에 대응하여 홍산문화가 배달국문화이며, 한국의 선도문화임을 입증하여 중국 동북공정의 오류를 바로 잡아가는 논리를 제시했다. 홍산문화 여신묘에서 발굴된 반가부좌 선도수행 형태의 7개의 여신상과 한국 선도사서 <부도지>에 나타난 마고 7여신(마고, 궁희, 소희, 4천녀)의 연계성을 밝혔다. 또한 홍산문화의 각종 유물에서 한민족의 기철학적 세계관인 삼원오행론의 형태를 찾아냈다. 

▲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에 따르면 한민족은 은나라의 해외 속지(점령지)인 기자조선으로 출발하여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의 예제문화를 전수받은 것으로 한국상고사를 부정하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이어 선도 제천문화를 계승한 해운대 장산문화제와 해운대 ‘최치원 유적’에 나타난 선도문화를 조명했다. 정 교수는 최치원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상황과 행적, 기록 등을 다양하게 조명하여 선도의 맥을 이은 선가仙家였음을 밝히고, 천부경과 연관된 기록들을 살폈다. 그리고 후대에 유학자로 채색되어 선도적 면모가 숨겨진 정황을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한 예로 경남 하동 운암영당의 최치원 진영(1793)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최치원 선생 좌우에 쌓인 책들은 본래 동자들이 서 있었다. 유교가 강성하던 시기에는 도교적 또는 선가적 면모를 유학자로 채색한 것이다. 그러다 유교세력이 쇠약해진 1925년 <단전요의>, 1927년 <고운선생문집> 등에는 한국 선도의 최고 경전인 '천부경'과 연계할 기록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정 교수는 “한류 원조로 최치원을 부각한 것은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제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최치원 선생을 도당유학생으로서 당나라에서 도교와 유학을 배운 중국문화 전파자로 알리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 선생은 우리 고유 선도인 풍류를 중심기반으로 유‧불‧도를 수용한 세계주의자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한다.”며 “단지 동상, 기념관만 세우면 중국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시민 스스로 지역 문화유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정 교수는 “선도문화는 동북공정을 대응할 논리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중시하고 모두가 하나라는 조화와 홍익철학으로 세계평화를 이끌 지구인정신의 뿌리”라고 했다. 

[학술대회 기사] 21세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해법, '마고지구인 정신'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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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강나리 기자  heonjukk@naver.com

 

 

*필자/송부웅. 한민족상고역사연구회 연수원장. 역사전문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6/09/08 [16:58] 

동북아시아 최초의 제국(帝國)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 (breaknews.com)

 

동북아시아 최초의 제국(帝國)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

배달국의개천시조(開天始祖)환웅천왕의영정이영정은민족사상이강한어떤화백이일본의오래된신사(神祠)에모셔진환웅천왕의흉상을발견하여모사하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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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開國) 개천(開天)하신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배달국(倍達國)의 존재 증거<18>

 

배달국의 개천시조(開天始祖) 환웅천왕의 영정


이 영정은 민족사상이 강한 어떤 화백이 일본의 오래된 신사(神祠)에 모셔진 환웅천왕의 흉상을 발견하여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하동군 지리산 삼성궁과 홍성군 구항면 대각선원에 모셔진 영정을 모사한 것이다.

 

배달국(倍達國)이 존재한 역사적 근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아서

 

삼국유사는 고려 희종 2년(서기 1,206)에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일연스님(속명: 金景明)이 고려 충열왕 8〜10(서기 1,281〜1,283)년경에 편찬하여 간행된 것으로, 일본이 우리 옛 역사를 말살 내지는 왜곡하려는 정책에 의하여, 원문을 변조시켜 유일하게 남겨둔 옛 역사의 귀한 사료(史料)인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반도식민사학자인 강단사학자들도 인정하는 유일한 우리민족 옛 역사의 사료(史料)인 것이다.


   일본이 변조한 삼국유사 기이 옛 조선 편에
  「고기운 석유환인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古記云 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내수천부인세개 유왕이지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 遺往理之
   웅솔도삼천 강어태백산정 신단수하 위지신시 시위환웅천왕야
   雄率徒三千 降於太白山頂 神檀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장풍백우사운사 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범주인간삼백육십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
   여사 재세이화  餘事 在世理化」라고 기록된 환웅천왕과 신시에 관한 내용이 바로 배달국의 존재에 관한 근거인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고조선 편은 일연스님이 고기(古記)를 보고 우리민족 6만 7천년의 역사를 378자로 요약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강단사학자들은 삼국유사를 일반문장처럼 해석하다 보니 신화(神話)로 풀이하여, 우리의 옛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본의 농간에 지금까지 놀아났던 것이다.


다행이 일본 강점기 때 숨겨놓았던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전해지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이 신화(神話)가 아닌 사실(史實)임이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이 만든 반도식민사관에 세뇌된 강단사학자와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아직도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서(僞書) 운운하면서 부정하고 받아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책은  삼국유사의 신화적인 내용을 재해석하여, 역사적 사실로 현재 우리에게 생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고증하였다.

 

환단고기의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을 보아서


삼성기전 상편은 신라(新羅) 말(末) 승려이신 안함로(安含老)스님이 편찬한 것으로 1911(단기 4244)년 독립운동가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 속에 묶어 후대에 전한 우리민족의 귀한 옛 역사에 관한 사료(史料)인 것이다.    


   삼성기전 상편에
   「후환웅씨계흥봉천신지조강우백산흑수지간롱자정여정어천평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鏧子井女井於天坪
   획정지어청구특천부인주오사재세이화홍익인간입도신시국칭배달
   劃井地於靑邱特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立都神市國稱倍達
    …………전십팔세역일천오백육십오년
    …………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뒤에 환웅씨가 대를 계승하여 일어나 하느님의 소명을 받들고 백산과 흑수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이 정해준 큰 들판에 우물을 파고 구획을 정리하여 정전제를 실시하여 땅을 나누어 주었다. 천부인을 가지고 오사를 주관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었으니, 신시(神市)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 배달국은 18세를 전하였으며, 연수는 1,565년 이었다.」라고 기록된 환웅천왕과 배달국에 관한 내용이 바로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의 존재를 증거 하는 근거인 것이다.

 

환단고기의 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下篇)을 보아서


삼성기전 하편은 신라 말 승려이신 원동중(元董仲) 스님이 편찬한 것으로 역시 서기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 속에 묶어 후대에 전한 우리민족의 귀한 상고사에 관한 사료(史料)인 것이다.
   삼성기전 하편에
   환국(桓國)말기 지위리 환인천제의 조서를 받들고, 환웅이 삼천무리를 인솔하여, 현 중국 서안의 태백산으로 와서 배달국을 세워 18대를 계승해온 내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부를 열거하면,
   「어시환웅솔중삼천강우태백산정신단수하위지신시시위환웅천왕
     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
    야 장풍백우사운사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범주인간삼백육
    也 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
    십여사 재세이화 홍익인간 ………십팔세 왈거불단환웅 혹운 
    十餘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十八世 曰居弗檀桓雄 或云
    단웅 재위사십팔년 수팔십이세
    檀雄 在位四十八年 壽八十二歲」

「이에 환웅께서 삼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에 이르러 태백산에 신단을 수립하고, 그 아래에 신시를 정하니,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환웅천왕께서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오사(五事)와 360여사로 순리를 따라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크게 도와 잘살게 하였다.


 … 배달국 18세 환웅천왕을 거불단 환웅 혹은 단웅이라고도 하는데, 42년간 재위하셨으며, 수명은 82세였다.」라고 기록한 것을 통하여 배달국과 환웅천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시본기(神市本紀)를 보아서


신시본기는 이조(李朝) 중종 때 찬수관을 지낸 이맥(李陌) 선생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속에 들어있는 역사서이다.


태백일사는 역시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 속에 묶어 후대에 전한 우리민족의 귀한 상고사에 관한 귀중한 사료(史料)인 것이다. 신시본기는 고서(古書)인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와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괄지지(括地志) 진(晋)나라 천문지(天文志)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등을 인용하여 배달국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민족의 조상이요, 개국(開國) 개천(開天)하신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배달국(倍達國)의 존재를 증거 하는 근거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족의식으로 보아


끝으로 우리는 우리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불러 온지가 오래된 것으로 안다. 분명 옛 조선이 우리민족의 출발이었다면 조선족이라는 말만 남았을 것인데, 우리는 배달민족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배달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왜? 우리민족이 배달민족이 되었는지를 일본의 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민족의 뿌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baedalung@hanmail.net

 

 

 

입력 : 2014-05-12 21:56:48 수정 : 2014-05-12 21:56:48

개천 1565년이 단기 1년
단기보다 개천으로 바꿔야 개천절은 왜 10월 3일일까. 왕검이란 단군이 아사달에 고조선을 건국한 날짜가 ‘환단고기’에 음력 10월 3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개천 1565년 10월 3일 왕검이란 사람을 단군으로 추대했다’같이 요약되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위 기록에서 ‘개천 1565년’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이 개천이 아니라 그보다 1564년 전에 환웅이 배달국을 세운 것이 ‘진짜 개천’이라는 뜻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쾌한 서술이다. 즉 개천 1565년이 단기 1년이자 서기 BC 2333년이라는 말이다.

우리 후손들이 개천절 행사 때 ‘진짜 개천’을 기념하지 않기 때문에 배달국의 역사 1565년을 국사에서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있다. 또한 개천절의 주인공이 배달국의 환웅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으로 잘못 인식돼 있다. 그 결과 단군은 캐릭터가 나올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해졌지만 환웅의 모습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낯설다.

개천절은 쇠면서 배달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명확한 모순이다. 배달국 사람으로는 태극기를 만든 태호복희와 민족의 수호신 치우천황이 있다. 배달국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면 5500년이나 된 우리 태극기는 ‘Made in China’가 되고 ‘붉은악마’ 또한 중국 응원단이 되는 것이다.

개천절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인 1911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음력 10월 3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194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개천절을 양력 10월 3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이후 정부는 음력을 버리려고 꾸준히 시도했는데 그 불똥이 개천절에까지 튀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나라가 잘 살려면 서양을 따라가야 한다는 통념에 젖은, ‘잘못된 시대적 분위기’ 탓이었다. 어느 정부 관계자가 이유도 없이 괜히 음력을 없애려고 했겠는가.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식으로 개혁한 일본이 우리를 식민통치했다는 사실에 이를 갈았기 때문이다. 기필코 우리나라를 일본처럼 개혁하고야 말겠다는 애국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이 ‘잘못된 시대적 분위기’가 아직도 ‘서양 사대주의’로 변신해 여기저기 독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리하여 설날을 ‘구정’이라고 불러 ‘신정’으로 대체돼야 한다는 이미지를 심었다. 심지어 공휴일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음력은 국민의 저항으로 없애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음력으로 생일을 쇠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가. 이후 설날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짜리 공휴일이 됐다가 나중에 지금처럼 연휴가 된 것이다.

음력이 지켜진 것은 국민의 뜻, 곧 하늘의 뜻이다. 현재 음력을 양력과 같이 써서 불편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의 경우 음력을 버렸기 때문에 예를 들어 칠월칠석 행사는 양력 7월 7일, 장마철 한복판에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올해 음력 7월 7일은 양력 8월 2일, 휴가철 한복판 ‘황금의 토요일’이다.

음력은 국민이 지켜냈지만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부터 아무런 불편 없이 사용된 단기 연호는 1961년에 사라졌다. 이것 역시 ‘잘못된 시대적 분위기’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단기를 서기와 같이 쓰면 불편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음력을 버린 일본도 연호는 쓰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일왕이 바뀌면 연호도 바뀌어 복잡한데도 말이다. 북한도 ‘주체’ 연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국학원 같은 애국단체들이 단기연호회복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아예 우리나라의 연호를 단기보다 개천으로 바꾸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왜 우리 역사 1565년을 없애는가.
 


서기 BC 1년에서 AD 1년으로 넘어올 때에는 BC 0년이나 AD 0년이 없다. 따라서 서기 2014년은 단순히 2333년을 더해 단기 2333 + 2014 = 4347년이 된다. 하지만 개천 1565년과 단기 1년은 중복되기 때문에 서기 2014년은 개천 1565 + 2333 + 2014 - 1 = 5911년이 된다.

즉 ‘진짜 개천’은 BC 1565 + 2333 - 1 = 3897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서기 2014년, 단기 4347년, 개천 5911년 5월 13일이다. 어느 경우든 ‘반만년 역사’와 상응하지만 단기보다는 개천이 훨씬 낫지 않은가.

‘환단고기’에 의하면 배달국 이전 환국이라는 나라도 있었다. 환국이 우리나라만의 시원이라면 우리는 ‘1만년 역사’를 갖게 된다. 하지만 나는 환국이 아시아 모든 나라의 시원이 된 신화의 나라로 본다. 특히 환국이 우리나라의 개국이념인 개천과 거의 무관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환국은 7명의 환인에 의해 3301년간 통치됐다고 한다. 즉 환기 3301년이 개천 1년이고 이것이 곧 서기 BC 3897년이란 얘기다. 그러니까 첫 환인이 환국을 세운 것은 BC 3301 + 1565 + 2333 - 2 = 7197년이 된다. 그리고 서기 2014년은 환기 3301 + 1565 + 2333 + 2014 - 2 = 9211년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서기 2014년, 단기 4347년, 개천 5911년, 환기 9211년 5월 13일이다.

 

 

2015년 11월 11일 (수) 15:19

오성취각으로 배달국을 증거하다! (brainmedia.co.kr)

박석재 연구위원, 국학원 148회 국민강좌에서 밝혀

 

오성취각으로 배달국을 증거하다!

박 위원은 ‘천문으로 개천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박 위원이 밝힌 ‘천문류초(天文類抄)’는 세종의 명에 의해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옛 기록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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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이전의 역사가 천문기록으로 확인됐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10일 서울시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국학원 주최로 열린 제148회 국민강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배달국”이라며 “배달국의 오성결집 기록이 천문류초에서 발견됐다”라고 말했다.

이날 박 위원은 ‘천문으로 개천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박 위원이 밝힌 ‘천문류초(天文類抄)’는 세종의 명에 의해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옛 기록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한 곳에 모이는 오성결집(五星結集) 기록은 중국 삼황오제의 전욱 고양씨(顓頊 高陽氏, BC 2513 - BC 2436)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갑인년 (BC 2467)
해의 이름이 갑인일 때, 갑자월 초하루 아침인 동짓날 한밤중에 해와 달 및 오성이 자방에 합하였다.

“한국아마추어학회에서 오성결집현상을 30개 이상 발견했다고 합니다. 4500년 전의 천문기록을 제가 맞춰보는거에요. 천문소프트웨어를 돌리려니 제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 제148회 국민강좌가 열리는 가운데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이 강연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BC 2467년보다 3년 전인 BC 2470년 9월 새벽 ‘오성취각(五星聚角)’이 있었다. 오성이 28수 각(角) 별자리 주위에 모여서 취각이라고 한 것. 오천년 전의 기록에서 3년의 오차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오성취각의 발견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박 위원은 삼황오제의 시대가 전설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천문기록을 통해 관측하는 천문대가 있었고 이를 통치하는 국가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배달국의 역사 또한 허구가 아니라는 점으로 연결된다.

박 위원은 중국에서 발견한 동이족 유적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요하문명의 우하량 유적의 적석총, 상투를 튼 고대인의 무덤, 곰토템 여신상 등이다. 특히 옥으로 상투를 틀었다는 점에서 동이족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는 배달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헌은 잇는가? 현재는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모은 책이다. 일부 학자들의 위서론에 대해서도 박 위원은 “환단고기도 가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필이 없는 역사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조선왕조는 명을 큰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니 작은집에서 제사(천제)를 지낼 수가 없었죠. 대륙을 통치한 단군의 역사서도 수거했습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가 대표적이다. 이는 <환단고기>에 담긴 책명과 같다. 이는 조선왕조의 수거령에 불구하고 단군사서가 후대로 전승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군세기> 오성취루 현상은 1993년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의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논문으로 밝혀졌다.

 
 

 

박 위원은 오성취루 현상보다 앞선 오성취각의 발견으로 배달국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5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첫번째는 개천이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BC 3,897 거발환 환웅이 태백산 신시에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배달국을 세운 것이 개천이라고 했다. 이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인은 환국의 장자국을 상징한다. 환국에 대해서는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에서 환국을 환인으로 변조한 사례를 들었다. 환국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 조선 이전부터 구전된 민족의 경전인 천부경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론이라며 현대의 CC (Continuous Creation) 우주론, 정상우주론 (定常宇宙論)과 같은 개념과 비슷하다고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붉은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황은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이고 태호복희는 배달국 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 아들이다.

박 위원은 직접 작사한 개천가라는 노래를 들려주면서 “대한민국은 개천사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내달 국민강좌는 8일 조성제 무천문화연구소장이 ‘상고사 속의 무속문화’를 주제로 강연한다.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입력 : 2015-05-18 21:21:50 수정 : 2015-05-18 21:21:50

[박석재의천기누설] 오성이 밝혀주는 우리 역사 | 세계일보 (segye.com)

 

[박석재의천기누설] 오성이 밝혀주는 우리 역사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는 황보 승 회원이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한 곳에 모이는 오성결집(五星結集) 기록을 배달국, 고구려, 고려 역사에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독자는 이게 얼마나

www.segye.com

 

 

입력 : 2014-10-20 21:12:31 수정 : 2014-10-20 21:20:06

[박석재의천기누설] ‘환단공정’에 대비하자 | 세계일보 (segye.com)

 

[박석재의천기누설] ‘환단공정’에 대비하자

홍산문명(紅山文明) 유적 발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유적은 지난 세기 중국 요령성 조양시 지역에서 발견됐는데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1000∼2000년 앞섰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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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홍산문명은 배달국의 유적
우리가 ‘환단고기’ 부정해선 안돼

 

입력 : 2014-06-09 22:45:57 수정 : 2014-06-09 22:45:57

[박석재의천기누설] 붉은악마가 일깨워주는 역사 | 세계일보 (segye.com)

대륙을 정벌한 치우천황
태극기를 만든 태호복희

 

입력 : 2014-05-26 20:57:10 수정 : 2014-05-26 21:04:50

[박석재의천기누설] 개천, 홍익, 천손 민족의 대서사시 | 세계일보 (segye.com)

천손이 지손을 교화하는 홍익
우리는 ‘가장 못난 후손’

 

 

 

2008/03/17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

고대우리민족사에대한관심이날로증폭되어가고있다.그것은중국의동북공정과함께일본이조선침략후역사적인열등감을감추기위해36년간반도사관으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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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7199년 안파견(安巴堅) 한인께서 세우신 한국(桓國)이 3301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뒤를 이어서 거발한 한웅(居發桓 桓雄)의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이 건국되었으며 지명(地名)의 이름이 같아도 그 위치가 달라졌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한국(桓國)과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을 분리하지않고 하나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위리 한인(智爲利 桓因)의 뒤를 이어 거발한 한웅께서 건국한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이므로 같은 역사라고 인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桓國)은 한인께서 천산에 거주하시면서 파내류산 아래 천해의 동쪽땅에 세우신 나라이고 신시 배달국은 거발한 한웅께서는 한국(桓國)의 뒤를 이어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地域)에 건국하신 나라이니 현재의 지도상 위치로 보면 한국(桓國)과 신시 배달국(培達國)은 약 4,000km 정도의 거리 차이가 있다.
 
즉 한국(桓國)으로 부터 동쪽으로 4,000km 정도 떨어져서 신시배달국(神市 培達國)이 세워진 것이다.



[자료]'한단고기'가 증언하는 12환국과 신시배달국
 

한국(桓國)과 한국의 12 연방국(聯邦國) 실체 ㅡ 위치 2편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에서 전한다.

日降童女童男八百  於黑水白山之地  謂之桓國
일강동녀동남팔백  어흑수백산지지  위지한국
 
해설:"어느날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이를 한국이라고 한다."
 
後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후한웅씨계흥  봉천신지고  강우백산흑수지간
 
해설:"뒤에 한웅씨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천신의 뜻을 받을어 백산과 흑수의 사이에 내려왔다."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국시대(桓國 時代)때의 기록과 더불어 한웅(桓雄)의 신시 배달국의 기록에도 같은 지명(地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桓國)시대 때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 때와 비교하면 지명은 같으나 위치(位置)는 전혀 다른 곳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과 신시 배달국의 역사를 후손들이 동일(同一)한 한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흑수와 백산을 같은 지역으로 당연하게 생각한 오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흑수(黑水)는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 강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또한 백산(白山)은 현재의 백두산 또는 강원도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혹은 북경 서남쪽 섬서성(陝西城) 서안(西安 고대의 장안長安)의 서쪽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는 등 여러 갈래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러 사서(史西)들의 기록에 나오는 한국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웅시대 즉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의 흑수(黑水) 백산(白山)과는 전혀 다른 곳임을 알아야한다.
 
앞서 수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桓國)은 파나류산(派奈留山) 아래에 즉 현재의 천산산맥과 발하슈 호수를 포함한 지역이고, 한웅의 신시 배달국은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으로 바이칼 호수와 흑룡강 그리고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장백산맥으로 포함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과 신시 배달국은 서로 전혀 다른 지역에서 건국한 각각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桓國) 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와 감숙성 동부 지역에 있는 위치한 고원(固原)의 북쪽에 있는 강이다. 또한 감숙성 북서부 지역인 장액(張掖)의 부근에는 약수(弱水)도 있다.

사기(史記)에서 전(傳)하기를 고원(固原)의 북쪽에 흑수(黑水)가 있으며, 북쪽으로 흘러가 대하(大河)에 유입한다고 하였다. (又北有黑水 北流入於大河) 즉 흑수는 고원을 지나 황하(黃河)로 흘러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Kyrgyzstan)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族自治區)지역 사이에 위치하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수 많은 봉우리 중 한 봉우리 또는 천산산맥에 속하며 항시 눈이 덮여있는 봉우리 전체일 것임에 틀림없다.

백산(白山)은 말 그대로 하얀 설산(雪山)을 일컫는 말로, 빙하(氷河 Glacier)가 덮여있으므로써 연중 어느 시기에 보아도 하얀 모습을 드러내는 산이므로 빙하가 생성되는 최소 3,000m 이상의 고봉(高峰)일 것이다. 현재 천산산맥의 최고봉은 포베다산(7,439m)이며, 평균고도 3,000m~4,000m 이상의 고봉들로 이루어져있다.


한웅의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에서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강이며,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오호츠크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현재 흑룡강성의 하얼빈 동쪽 통하(通河)의 북쪽에 있는 평정산(平頂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태백산(太百山)인데 후에 백산(白山)으로 산명(山名)이 바뀌었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정산(平頂山)으로 불리우는 산이다.

 

 

심제(心濟)  | 기사입력 2008/08/07 [16:52]

내몽고 적봉시에 있는 배달국의 유적: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내몽고 적봉시에 있는 배달국의 유적

내몽고적봉시에서발굴된대규모석성은어느나라의유물인가?사진은상해원동출판사刊중국역사대계에있는내용이다.그림은상해원동출판사刊중국역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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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nbsp;내몽고 적봉시에서 발굴된 대규모 석성은 어느 나라의 유물인가?

 

▲&nbsp;&nbsp;&nbsp;&nbsp; 사진은&nbsp;상해원동출판사刊 중국역사대계에 있는 내용이다.

 

▲&nbsp;&nbsp;&nbsp;그림은 상해원동출판사刊 중국역사대계에 있는 내용 이다


흥륭와 문화는 바로 배달국의 神市문명 이다. 즉 기원전 B.C 6,200~5,400년의 유적이다. 적봉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고조선은 상(商)나라와 은(殷)나라의 유적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여 및 고구려는 이를 기반으로 하는 거란, 몽고유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발굴됨을 안타깝게 여긴다.

이미 10년 전에 중국사학자들은 유적을 발굴하고 도상도까지 만들어 냈다. 결론은 ...?商나라 보다 더 윗대에 있었던 古王國 이다.... 그렇다면 ..?


고사서(古史書)에 환국 배달국 고조선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고 한민족의 역사가 없다고 하는 역사학자는 직무유기이며, 독특한 문화사적 아이콘이 무엇이었던가 직시하여 유골에서 유전자 검사하고 ,방사성 동이원소 검사, 탄소동이체 검사를 하는 등 ..과학의 신기술을 총동원해서라도 한반도 한민족과 연원성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끊어진 역사를 연결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을 이용하는 역사학자의 책무다.

▲&nbsp;&nbsp;&nbsp; 그림은 상해원동출판사刊 중국역사대계에 있는 내용 이다.

 

▲&nbsp;&nbsp;&nbsp;&nbsp;그림은 상해원동출판사刊 중국역사대계에 있는 내용이다.

 
<한단고기 삼성기 신시역대기>에 기록되어 있기를, 배달 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神市)라고 한다. 뒤에 청구국(산동성)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1세를 한웅(桓雄)천황 또는 거발한(居發桓)이라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 사셨다.

2세는 거불리(居佛理) 한웅이니 재위 86년에 102세까지 사셨다. 

3세는 우야고(右耶古) 한웅이니 재위 99년에 135세까지 사셨다.

4세는 모사라(慕士羅) 한웅이니 재위 107년에 129년까지 사셨다.

5세는 태우의(太虞儀) 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6세는 다의발(多儀發) 한웅이니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7세는 거련(居連) 한웅이니 재위 81년에 140세까지 사셨다.

8세는 안부련(安夫連) 한웅이니 재위 73년에 94세까지 사셨다.

9세는 양운(養雲) 한웅이니 재위 96년에 139세까지 사셨다.

10세는 갈고(葛古) 한웅 또는 독로한(瀆盧韓)이라 하니 재위 100년에 125세까지 사셨다.

11세는 거야발(居耶發) 한웅이니 재위 92년에 149세까지 사셨다.

12세는 주무신(州武愼) 한웅이니 재위 105년에 123세까지 사셨다.

13세는 사와라(斯瓦羅) 한웅이니 재위 67년에 100세까지 사셨다.

14세는 자오지(慈烏支) 한웅으로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15세는 치액특(蚩額特) 한웅이니 재위 89년에 118세까지 사셨다.

16세는 축다리(祝多利) 한웅이니 재위 56년에 99세까지 사셨다.

17세는 혁다세(赫多世) 한웅이니 재위 72년에 97세까지 사셨다.

18세는 거불단(居佛檀) 한웅 또는 단웅(檀雄)이라 하니 재위 48년에 82세까지 사셨다.

* 참고로 5세 태우의한웅의 막내 아들이 삼황오제의 첫째인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이며, 18세 거불단한웅이 단군왕검의 부친이다.

▲&nbsp;&nbsp;&nbsp;이유립선생이 그린 배달국 지도

 

▲&nbsp;&nbsp;&nbsp;이유립선생의 배달국 연표-1
▲&nbsp;&nbsp;&nbsp;이유립선생의 배달국 연표-2

 

 

 

입력 2006. 8. 18. 19:22수정 2006. 8. 18. 19:22

 

"고대 우리 조상은 이란 지역 종교 엘리트였다"

민족의 기원에 대해 우리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신화를 인용한다. 사람이 되고 싶어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로 환생하여 환웅과 결혼해 단군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v.daum.net

민족의 기원에 대해 우리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신화를 인용한다. 사람이 되고 싶어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로 환생하여 환웅과 결혼해 단군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흥미로운 신화였다. 그렇다면 환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한국 고대사와 고대 종교문화를 연구하는 정형진씨는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한민족의 혈맥을 찾아서'를 통해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환웅족이 이주세력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알타이산과 바이칼호 지역에서 환웅족이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하는 반면 저자는 환웅이 수행한 직능 중 농사가 우선이라는 점 등에서 볼 때 환웅족은 보다 선진 농업 기술을 가진 곳에서 이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지적한 곳은 바로 황하 유역인 중원이다.

 

한편 중국 전설 시대의 오제가 중원을 차지할 때 거치적거리던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요임금 말기에 유주로 추방됐으며, 중국 문헌에는 이들이 '공공족'이라고 기록돼 있다. 신라의 고승 자장이 신라 김씨 왕족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면서 김씨 왕족 이전의 사람들을 '동이공공(東夷共工)'이라고 규정한 바로 그 공공족이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요임금 50년의 비밀은 이러한 점에서 풀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환웅족, 즉 공공족은 중원에서 밀려온 민족의 기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저자의 이런 추정에는 유전자 분석을 통한 과학적 분석도 한몫 한다.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가 한국인 유전자를 분석해 기원을 추정한 결과 우리 조상의 주류는 기마민족이 아니라 농경민족이라는 주장을 새롭게 제기한 것.

저자가 밝히는 기원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는 고깔모자와 편두(평평한 머리) 등 서남아시아에서 한국까지 이어지는 공통적인 현상을 근거로 공공족이 이란 서남부 평원에 있는 수시아나에서 넘어왔다고 설명한다. 고깔모자가 최초로 나타난 곳은 수시아나로, 이후 고깔모자는 이집트 왕의 왕관은 물론 프리기아인들이 쓰던 모자로도 사용됐다. 수시아나의 종교 엘리트들은 엘람인들을 피해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저자는 이들이 바로 환웅족이라고 주장한다.

한국민이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말하는 등 일반인의 상식을 뒤흔드는 부분은 익숙지 않아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신화와 매장 문화, 의학적인 방법까지 동원한 이 연구는 상당히 오밀조밀해 상고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넓힌 것만은 분명하다.

정진수 기자 yamyam1980@segye.com

 

 

기자명민족NGO편집장 기사입력 2014.09.13 04:24

홍익인간 ‘널리 인간 이롭게 한다’ 뜻 아니다!

 
[한국NGO신문] 민족NGO = 우리 교육기본법 제2조에 우리나라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이라 했고, 교육부의 교육과정에서도 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으나(3쪽),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다. 반면,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사회 5-1에서는 “환웅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땅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였다.”(21쪽)고 서술하고 있다(비상교육 편)

또한'중학교 역사1'에서는 “고조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다.”(39쪽),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아버지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므로[홍익인간(弘益人間)]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라고 하여 ‘홍익인간’의 의미를 공통적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어사전, 백과사전 등도 모두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 국민 대부분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한문 및 관련 분야 학자들이 이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 弘益의 한일 간 어의 비교(박찬희 책 127쪽) © 국사찾기협의회

먼저 한문학자들은,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한자 자전을 찾아보면, 홍(弘)자는 ‘넓다, 널리’라는 의미보다는 ‘크다’는 의미가 더 먼저 나오고, 익(益)자는 ‘이롭다’는 의미보다 ‘더하다’, ‘돕다’는 의미가 앞에 나오므로 더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한문에서 사람을 지칭할 때는 ‘人’이라 하지 ‘人間’이라 하지 않으므로 ‘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나 관계 또는 그런 관계로 이루어지는 인간세상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번역은 한문의 기본 용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홍익인간에 대해 조소앙, 안재홍, 정영훈 등은 ‘대중공생 만민공동의 균등사회 이상’이라고 보았고, 박상림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서로 다툼이 없는 어울림을 통해 모두 하나 되는 이념으로 바로 화백제도가 그 실천’이라고 주장했으며, 류탁영은 ‘남을 해치지 않고 크게 돕는 사람’으로 해석했고, 최민홍은 사익(私益), 공익(公益)과 비교하여 ‘홍익(弘益)은 우리의 이익을 말한다’고 했다.

박정학은 한자의 뜻에 충실하게 ‘사람과 사람의 사이(관계)를 크게 더(두텁게)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구체적으로는 잔치, 음주가무 등을 통해 백성들 간에 ‘질적으로 친하게 어우러지라’는 것과 ‘양적으로 주변의 더 많은 사람들과 한 덩어리가 되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았다.

특히 박찬희는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홍익인간사상. 1』에서 ‘홍익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번역하는 것은 우리말 어의가 아니라 일본어 어의를 따른 것’이라고 했으며, 설종환은 『다시 읽는 단군신화』에서 “사학자 이병도 교수의 번역을 따라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다'라는 뜻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홍익인간’이란 단어는 ‘환인이 삼위태백이 홍익인간 할 만한 곳이라고 보아 무리 3,000과 함께 그곳으로 내려 보냈다’고 하는 『삼국유사』기이편 기록에서 비롯된다. 당시에는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식량문제로 사람 사이에 갈등이 커지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그곳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을 만큼 땅이 넓고 비옥하여 식량다툼이 적을 곳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부모로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새 천지를 개척하러 떠나는 아들에게 했을 법한 내용이어야 하고, 제천행사의 음주가무와 화백회의, 두레와 품앗이 등의 실천문화와 연결되어야 한다면 앞에 소개한 새로운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특히 삼국유사를 처음으로 주해한 사람이 일본인 또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일본식 해석’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 겨레의 천지인(天地人) 삼재론에서 중간자인 人(사람)을 중시하는 면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물질적인 자유나 평등을 넘어 그것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의 마음, 즉 ‘어우러지는 인성’을 중시하는 사람 중심의 이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서 본다면 인구증가에 따른 갈등을 줄이기 위해 지도자가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사는 기본 정신자세’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멕시코의 아즈텍 전설에서 우리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케찰코아틀이 바다를 건너 와서 ‘서로 화목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내용과도 상통한다.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표현은 다르지만 기독교에서는 사랑, 공자는 인(仁), 석가모니는 자비(慈悲)를 강조한 것도 인간사회의 기본원칙인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살아가기 위한 덕목’들이다. 그것을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이라고 했다면 이를 민족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잘못된 해석에 매달리지 말고 새로운 우리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민족정신을 새롭게 조명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바로잡는 조치를 취해주기 바란다.
  •  
 

by하부건Oct 03. 2016

개천절 소자출 (brunch.co.kr)

 

개천절 소자출

환웅천황의 신시배달 건국일 | 개천절開天節이 고조선 건국일이라고? 잘못된 국사 상식 중 하나다. 홍익인간弘益人間도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이 아니다. 환웅천황께서 홍익인간, 제세이화濟世

brunch.co.kr

환웅천황의 신시배달 건국일

 

 

개천절開天節이 고조선 건국일이라고? 잘못된 국사 상식 중 하나다. 홍익인간弘益人間도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이 아니다. 환웅천황께서 홍익인간, 제세이화濟世理化의 정신으로 백두산에 신시배달神市倍達을 세우신 날이 소위 개천절이다. 하여 우리가 '배달의 민족'이 됐다. 사찰의 대웅전大雄殿도 본래 환웅전이었다.

 

페이스북은 이러고 있다.
두산백과사전은 그나마 낫다.
진실은 이렇다.
알고 누리자.
배달은 밝은 땅, 우리는 광명 민족!

밥 한 끼 얻어먹어도 누가 얼마짜리 쐈는지 따지는 세상이다. 하물며, 하루씩이나 쉬는데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 덕분에 우리가 이 여유를 누리는지.

 
 

 

이형섭 기자 | 승인 2010.06.28 15:25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 뉴스에이 (newsa.co.kr)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 뉴스에이

한국 항공대 우실하교수 강의 요약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www.newsa.co.kr

한국 항공대 우실하교수 강의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는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문명이다.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이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가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요서지방의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옆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7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4,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기존의 모든 사서들은 중원(中原)의 화하족(華夏族)을 중심으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술했었다.
 

중국의 한족(漢族), 화하족(華夏族)이 가운데 있고 나머지 동서남북에 오랑캐, 야만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중국의 정통적인 역사관인 화이관(華夷觀)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화이관을 깬 것이 요하문명의 발견이었다.

중원문명보다 앞서 있고,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었는데 여전히 그들을 야만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사를 이끈 집단을 다시 재편했다. 이 3대 집단이란,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둥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재편한 것이다. 기존의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을 모두 중화민족에 넣은 것이다.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 중국은 최초의 원시촌락사회를 ‘앙소문화의 반파유적’으로 보았고, 문명의 서광을 장강유역의 하모도문화로 보았다.

중국이 벌이는 역사 공정은 기본적으로 현재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신화시절부터 중화민족이고,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라는 것이다.

그럼 진짜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명확한 것은 요서와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중원과 전혀 다른 문명권이었다는 사실이다.

요하문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 가운데 중원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있다. 빗살무늬토기, 피라미드식 적석총,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동검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요하문명을 주도한 세력이 중원 세력과 다른 집단이며, 주맥이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화권은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4대 문화인 빗살무늬토기문화, 거석문화, 채도문화, 세석기문화를 모두 융합되어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이 지역이 유일하다. 출처: 한국 항공대 우실하교수

이형섭 기자  070@newsa.co.kr

 

 

 

기자명이덕일 입력 2020.07.20 18:11 수정 2020.08.20 19:41

 

사마천이 <사기>서 지운 삼황의 실체는 동이족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한대학원 교수) 중국인 사마천이 쓴 의 역사는 황제 헌원에서 시작중국인의 뿌리가 황제라는 것이고 황제는 동이족이 조상중국 삼황의 뿌리는 태호복희, 오

www.koreahiti.com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한대학원 교수)

 

중국인 사마천이 쓴 <사기>의 역사는 황제 헌원에서 시작

중국인의 뿌리가 황제라는 것이고 황제는 동이족이 조상

중국 삼황의 뿌리는 태호복희, 오제의 뿌리는 소호금천씨

신라김씨 왕조와 가야 김수로 왕조의 조상은 소호금천씨

 

▲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 동양역사학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전체 역사서술의 시조다. 본기와 열전으로 나눠 서술하는 체제다. 우리나라 <삼국사기>가 이 서술형태를 띠고 있다. 자료: 위키백과

 

중국사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중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난제는 중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민족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중국민족은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따서 한족(漢族)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禹)임금의 하나라에서 ‘하(夏)’ 자를 따고 섬서성 화산에서 ‘화(華)’ 자를 따서 하화족(夏華族)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문제는 한족, 즉 하화족 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냐는 것인데, 사마천은 황제(黃帝)부터 시작하는 〈오제본기〉로 중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이런 설정에 의문을 품은 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제 전에 삼황(三皇)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색은》의 편찬자 사마정은 사마천이 삼황을 삭제한데 불만을 품고 복희, 신농, 여와씨를 수록한 〈삼황본기〉를 따로 편찬했을 정도로 사마천의 계보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사마천은 오제의 시작을 황제로 설정했지만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215~282)은 《제왕세기》에서 삼황도 수록하고 황제가 아니라 소호(少昊)를 오제의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사마천이 황제부터 중국사를 시작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마천이 숨긴 역사, 사라진 동이족 군주들

그런데 사마정과 황보밀 등은 사마천이 삼황과 오제를 삭제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최근 산동성(山東省) 남부 임기(臨沂:린이)시에 거대한 동이문화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여기에 4명의 동이족 군주를 전시해놨는데, 태호 복희씨, 소호 김천씨, 치우, 순임금이 그들입니다.

삼황의 시작이 태호 복희씨이기 때문에 삼황부터 《사기》를 기술하면 한족의 중국사가 아니라 동이족의 중국사가 되기 때문에 삼황을 삭제한 것입니다.

또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혈통에 대해 “헌원(황제)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다”라면서 “남가야 시조 김수로왕은 신라와 같은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700만에 달하는 가락종친들이 모두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소호는 동이족임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사마천은 소호도 지웠습니다. 즉, 삼황의 시작이 태호 복희씨고, 오제의 시작이 소호 김천씨인데, 태호나 소호부터 시작하면 한족의 중국사가 아니라 동이족의 중국사가 되기에 사마천은 태호와 소호를 지우고 황제부터 시작하는 중국인의 《사기》를 작성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동이족의 역사를 지우고 한족, 즉 하화족의 중국사를 서술했습니다. 얼핏 봐도 중국 남방사람들과 북방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름에도 모두 한족이라는 개념은 사마천의 《사기》 이후 만들어진 것입니다.

《신주사기》는 때로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그 근거를 찾고, 때로는 고대의 여러 학자들은 물론 청나라 고증학파와 민국시대(民國時代:1912~1949) 고사변학파들의 주석까지 집중적으로 연구해 중국사의 계통을 바로잡으면서 동이족의 고대사를 복원해 냈습니다.

 

1권 오제본기의 ‘사마천이 설정한 오제 및 하은주 시조계보도(109쪽)’는 전 세계에서 최초로 작성한 계보도입니다.

이를 통해 ①황제, ②전욱, ③곡, ④요, ⑤순의 오제는 물론 하·은·주(夏殷周) 3대의 시조가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출처; 《신주사기》1권 <오제본기>

《신주사기》는 사마천이 숨긴 중국고대사를 복원해 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기'를 번역, 풀이한 책입니다.

단순한 중국사가 아니라 하화족의 역사 속에 숨겨진 동이족의 역사를 찾는 재미를 함께 느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덕일 mukto@naver.com 

 

 

기고=(사)자살예방전국학교연합회 김하경 중앙회장  뉴민주신문 | 기사입력 2018/07/16 [08:59]

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1) : 오행의 근원은 배달국:先進정치 남북通一, 뉴민주신문 (newminjoonews.com)

 

≪뉴민주신문≫ 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1) : 오행의 근원은 배달국

진정한음양오행의시초는바로배달국,결국대한민국이었다는것이다.  ©위키백과 오행으로사람들이궁합을많이봅니다.세상에서토정비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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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이 만들어진 것은 보통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오행의 뿌리는 그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약 9,200년 전 환국에서 오가부족이 나오는데, 오가부족들이 연합하여 환인천제를 추대하였습니다. 허나 환국이 망한 이후 오가부족도 사라지고 환인천제들도 없어지고 환국의 12개의 나라도 다 없어지고…

 

나라의 맥이 끊어진 이후 거발한 초대 환웅을 통하여 배달국이 건국됩니다. 배달국 에서는 환국의 오가부족이 오령오제로 나타납니다. 하늘에는 오제가 있고 땅에는 오령이 있는데, 오제가 오령을 주관하고 오령은 땅을 다스리면서 백성들을 지켜주고 있음으로 여겨왔습니다. 

 

여기서 오령의 신성들이 불과 물, 나무와 금, 그리고 흙에 깃들었다고 믿었던 것으로 유추가 되는바… 

이른바 배달국의 민족들은 이러한 가운데에서 해와 달 그리고 ‘불, 물, 나무, 금, 토’에 신성이 있다고 믿고 매일 제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칠회제신력’으로서 곧 음양오행의 시초가 됨을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오제는 ‘임금 제(帝)’자를 써서 ‘하늘 임금’이라는 뜻이고, 오령은 만물에 깃든 다섯의 영으로 여겨집니다. 오제와 오령은 서로 하나가 되어서 마을을 지켜준다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토템문화의 시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대 배달국의 오제와 오령의 모습은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오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살펴본바 환국의 오가부족은 배달국의 오제 오령으로 나타나고, 배달국의 오제 오령은 당시 칠회제신력 즉 ‘해, 달, 불, 물, 나무, 금, 흙’에 각각 매일 제를 올리던 일들로 나타나며, 배달국의 유민들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하, 상, 은, 주나라 등을 세우면서 오행으로 발현됨을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음(달)과 양(해)을 주축으로 하는 오행의 시초는 중국이 아니라 배달국, 즉 대한민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 진정한 음양오행의 시초는 바로 배달국, 결국 대한민국이었다는 것이다. &nbsp; &nbsp; &copy; 위키백과

 

 

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2) : 도용하는 중국, 그리고 왜곡:先進정치 남북通一, 뉴민주신문 (newminjoonews.com)

 

 

≪뉴민주신문≫ 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2) : 도용하는 중국, 그리고 왜곡

 중국의역사는자체의역사가아니라배달국의역사를빼간후자기들의입맛에맞게만들어서대한민국으로다시넘어왔다는사실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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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3) : 오행의 상생과 상극, 그리고 응용:先進정치 남북通一, 뉴민주신문 (newminjoonews.com)

 

≪뉴민주신문≫ 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3) : 오행의 상생과 상극, 그리고 응용

오행의상생과상극의이치 상생의‘생(生)’은말그대로낳는다,도와준다는의미이고상극의‘극(剋)’은‘자극하다,억누른다’는의미입니다.오행은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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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4) : 상생과 상극의 영적인 이치:先進정치 남북通一, 뉴민주신문 (newminjoonews.com)

 

≪뉴민주신문≫ 중국의 상극, 우리의 상생(4) : 상생과 상극의 영적인 이치

 중국의오행사상,그리고상생과상극.하지만상극으로보이는관계속더본질적인상생의가치가담겨있음을중국은발견하지못했고그것을지금도답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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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0 00:00 이종호 과학저술가

중국에서 발견되는 동이족 – Sciencetimes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붉은악마와 치우천황(3)

 
<치우의 후예들>



동이와 묘족의 시조인 치우가 헌원과 탁록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족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헌원이 중국을 차지하자 치우의 일부 일파는 중국에 동화되고 나머지 일파는 동이로 계속 활동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므로 치우는 우리 조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조상도 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동이와 묘족이 어떤 관계이기에 이러한 주장이 나오며 이들이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정확한 기록이 없는 시대의 역사를 정확하게 구성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나라의 일부 역사가 왜곡된 곳이 많다고 지적되는 것도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원은 KBS-TV 이동식 기자가 쓴 『길이 멀어 못갈 곳 없네』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강은 양자강과 황하이다. 양자강 남부를 고대 중국인들은 월(越)이라 부르면서 자신들과는 다른 민족이 사는 땅으로 간주했다.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발상지는 황하이므로 일반적으로 염황족 또는 화하족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양자강 남쪽의 오늘날 절강성 일대는 화하족의 손이 미치지 않는 땅이므로 ‘백월(百越)’ 또는 ‘백오(百奧)’라고도 불렀다. 이는 중국 중원에서 볼 때 너무 멀고 외지라는 뜻이다.


중국과 다르다고 중국인조차 인정한 월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조차 이견이 많은데 가장 근접한 대답은 월족이 워낙 다양하므로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월족은 중국인들로부터 물 위에서 잘 다니고 금속 제련기술이 뛰어났으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풍습은 중국의 화하족과는 생활습관이나 언어, 문화 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월족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태평양 인종이 해안을 타고 올라왔다는 설, 남방족의 일족인 삼묘족(三苗族)의 후예, 본래부터 그 땅에 살아왔을 것이라는 토착설이 있고 이들이 모두 합쳐진 혼합설 등이다.


그런데 월족의 조상으로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는 우(禹)의 후손이라는 설명이 사마천이 쓴 『월왕구천세가』에 나온다.


‘월왕 구천의 조상은 우의 후예이며 하왕조의 후제 소강의 아들로서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의 사당을 지켜왔다.’


절강성의 소흥 남쪽에 회계산(會稽山, 주 봉우리는 1,195미터의 동백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지금도 우임금이 중국의 홍수를 다스렸고 제후들에게 논공행상을 했으며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요, 순, 우가 다스리던 그 시대에 홍수가 문제가 된 곳은 양자강이 아니라 황하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일대이다. 반면에 우의 사당이 있다는 소흥과 회계산은 모두 양자강 남쪽이다.


학자들이 위의 설명에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시의 교통 여건 등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황하에서 수천 리 남쪽인 양자강 남쪽까지 우가 내려와 제후들을 다독거리고 이곳에 묻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 시대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論衡)』에서 왕충은 우임금이 회계에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고 중국인 임화동 박사는 『관자』와 『사기』에서 ‘우는 태산에서 제후를 봉하고 회계에서 왕위를 물려주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초기의 회계산은 산동 태산 근처에 있었으며 소흥의 회계산은 산동에서부터 그 이름이 옮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의 『사기』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사마천이 그렇게 적은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을 중국의 양쇠도(梁釗謟)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 월족은 산동성과 절강성 일대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우가 건국할 때에 동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월족이 화하민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 하나라를 건설했으므로 동이월족의 전설 중에 그들이 하의 후예라는 얘기가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문자로 기록할 때에 월왕 구천의 조상이 우의 후손이라고 쓰게 된 것이다.’


양쇠도의 설명은 동이족과 월족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치우천황이 헌원과 전투할 때 동이에 월족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요ㆍ순이 원래 동이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점도 있다. 즉 하나라 때의 회계산은 지금의 절강성 소흥 근처가 아니라 산동성 태산 부근이라는 설명이다. 회계산은 산동에 있으면서 동이월족이 숭배하던 곳인데 후에 산동지구가 화하족에 융합되어 더 이상 월인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고 동이지역에서 절강지역으로 내려 간 월족이 그들의 조상을 생각해서 절강지역에 회계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에서 발견되는 동이족의 풍습>


이동식 기자는 위와 같은 설명이라면 중국 남방 지역의 월족과 한국인이 같은 부류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고인돌이 한국인과 월족과의 유대 관계를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은 세계의 3분의 2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특히 동이족의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대형 고인돌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소형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자들은 고인돌 1톤을 옮기는 데 약 10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계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판만 해도 200톤이 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세울 당시에 2천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 2천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한 마을의 거주 인원을 150여 명 정도로 간주하므로 장정 2천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적어도 40여 개 마을이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 마을에서 50여 명의 장정이 동원된다는 것으로 가정).


고인돌을 고고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인돌에 부장품이 없더라고 청동기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학자들은 청동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국가라는 구조 형태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장정 2천명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위계질서나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의 건립 상한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 전역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5∼6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자강 남쪽의 절강성에서 2004년까지 50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고 중국학자 소석(昭晰)은 발표했다.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온주(溫州) 서안시(瑞安市) 강변의 구릉과 산중턱 해발 90∼120m의 높은 대지에 분포하고 있다. 절강성의 고인돌은 덮개돌의 한쪽 면 밑으로만 지석이 받치고 있거나, 묘문(墓門)이 마련되어 있는 등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는 색다른 모습도 있지만 형태상 우리나라의 남방식과 유사하다. 이들의 연대는 우리나라 고인돌의 초창기 연대보다는 다소 늦은 서주(西周, 기원전 1046~771년) 초기부터 춘추시대 말기로 추정한다.


지역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유형의 고인돌 문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같은 생각과 풍습을 갖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인 사자를 매장하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쉽사리 도입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풍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같은 형태의 고인돌이 절강성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오히려 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한반도에서 절강성으로 가려면 과거에 동이지역이라고 간주되는 산동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들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동성에서 동이족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산동성을 동이족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에도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자들이 산동성에서 분명히 고인돌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애태우던 차에 1993년 신화통신은 산동성 문등시 고촌진에서 2미터 크기의 고인돌이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이 발견은 우리나라부터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 남쪽으로의 고인돌까지 연계될 수 있다는 자연스런 설명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더욱 큰 중요성이 있다. 중국의 원리(苑利) 교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한반도와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관계 비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황하 중심의 염황족에 밀려난 묘족(苗族)의 선조다. 이 묘족은 4000년 전 발해 북쪽 연안에 살다가 남쪽 하북성 삼하현으로 쫓겨간 민족으로 오늘날 중국 남쪽의 5개 성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예맥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중략) 이들은 한반도 일대의 북맥(北貊)과 회하(淮河, 지금의 강소성 일대) 지방에 살던 남맥(南貊)으로 북맥은 3500여 년 전에 한반도로 건너갔다. 반면에 남맥은 진나라가 망하면서 그 유민들 중 한 부류는 한반도로 건너갔으며 또 한 부류는 운귀고원(雲貴高原, 오늘날의 운남성과 귀주성 일대의 고원)으로 쫒겨가 백족(白族)이 되었다. 이 민족을 중국에서 백월민(白越民) 또는 월족(越族)이라 부른다.’


윈리 교수의 설명은 중국에서 백이(白夷)라고 부르는 일족이 맥족인데 북맥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했고 회하와 양자강 일대에 살던 남맥은 일부가 한반도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운남성으로 들어가 이들이 백족 또는 월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양자강 일대에 살다가 운남성으로 들어간 백족과 우리나라로 들어간 북맥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토템도 달라>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경우 민족의 기원을 찾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들의 토템(totem)이 무엇이냐도 중요한 관건이다. 고대 사회에서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한 것을 토템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하족인 중국민족은 용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지금도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으며 용은 곧 중국인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간주한다(이형구 박사는 가장 오래된 용의 형상이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동식은 과거에는 월족이 뱀을 토템으로 하고 있었지만 근래에는 월족의 토템도 새라고 발표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중국의 임화동 박사는 월나라 하모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 등 여러 자료를 근거로 월족의 토템은 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월의 땅 심산에는 새가 있는데 비둘기와 같고 푸른색으로서 아조라고 부른다. (중략) 월나라 사람들은 이 새를 월축의 조상이라고 한다.’


월족이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절강성 여향현 양저에서 발견된 양저유적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연대는 기원전 3300~2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곳에서 벼농사를 위주로 했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삼베옷은 물론 누에로 만든 옷도 나왔다.


그런데 이들 문화유적 중에서도 동이족 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는 유물들이 발견됐다. 종(琮)과 벽(壁)이라는 옥기이다. 벽은 옥을 편편하고 둥글게 깎은 것이고 종은 가운데 동그란 구명을 뚫고 측면을 사각형인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벽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고 종은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사용된다고 『주례』에도 적혀 있다.


그런데 옥으로 만든 종의 상부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 형상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있는 솟대와 꼭 같은 그림이다. 산동성의 용산문화에서도 새가 발견되는데 용산문화는 곧 동이족의 문화이다. 동이족의 풍습으로 간주하는 솟대가 양저문화의 유적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양저문화에서 나온 옥은 2004년까지 중국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이다. 옥은 양저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산동지방에서 발달했던 동이족의 이른바 대문구문화유적에서도 발견됐고 추후에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진 은나라 유적에서도 나왔지만 선사시대에는 양저문화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영험스런 새로 인식하는 봉황에 대해서도 『설문해자(說文垓字)』에서 ‘봉(鳳)은 신조(神鳥)로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서 나왔다’고 적혀 있다. 동방의 나라란 동이족을 뜻한다. 봉황은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수컷을 봉(鳳)이라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는 암수를 구분하지 않고 ‘鳳’자만을 사용하였다.


양저문화보다 최소한 2000년 앞선 하모도문화에서도 새가 나온다. 하모도문화도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이는 절강성 북부를 대표하는 두 고대문화가 모두 새를 토템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신석기시대의 양자강에서도 동이족의 토템을 지키는 부족이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큰 틀에서 동이족 전체가 토템으로 새만 신봉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계속)
 
 
 
 
2006.07.17 00:00 이종호 과학저술가

동이족의 적자는 한국인 – Sciencetimes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붉은악마와 치우천황(4)

<동이족의 순장(殉葬)과 사각형 제단>

양저문화와 한 계통인 상해의 복천산(福泉山) 145호 묘는 양저문화가 동이족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순장 제도인데 동양에서 이 제도는 중국인과는 달리 동이족의 풍습으로 인식한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행동은 살인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살인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을 엄밀한 의미에서 살인으로 간주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일단 태어난 생명은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들의 상식적인 생각이 과거에도 통용된 것은 아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무덤에 묻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순장 풍습을 지역에 따라 아름다운 미풍 양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앞에서 설명한 결초보은이나 미망인이란 말은 사람을 죽여 무덤에 묻는 것을 당연시하는 순장의 풍습을 다소 미화시킨 에피소드라고 볼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사람을 함께 매장한다는 것은 죽은 뒤에도 피장자(被葬者)의 평상시 생활이 재현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고대 세계에서는 매우 익숙한 풍습이다.

순장의 원래 발상지는 고대 오리엔트로 추정한다.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7000년경의 예리코(Jericho) 유적에서 발견된 남자 시체가 순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추정한다. 예를 들어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우르(Ur) 유적의 왕묘에서는 59인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6인은 완전무장한 병사, 9인은 화려한 장신구를 가진 여자였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조세르 왕묘 주변에서 궁녀 273인, 신하 43인을 순장한 묘가 발견되었다.

오리엔트의 고대문명은 다른 지역으로도 파급되었는데 유럽에서는 고대 갈리아(현 프랑스)·아일랜드인·불가리아인·슬라브인들에게서도 순장 또는 순사(자원하여 묻히는 것)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순장제도가 지도자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순장이 성행한 시기는 동이족이 건설한 것으로 인식하는 은나라로 보통 한 무덤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순장됐는데 순장자의 수만큼이나 묻힌 방법이 다양하다. 두개골만 매장된 구덩이가 있는가 하면 꿇어앉은 채 살해된 순장자들도 있다. 한 구덩이 안에서 수십 명씩 포개져 매장된 순장자도 발견된다.

순장 풍습은 은나라를 대치한 화하족의 서주(西周) 이후 급격히 감소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진(秦)나라 무공 20년(기원전 698∼678) 66명을 순장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학자들에 따라 이 기록을 순장 기록의 시초라고 간주하지만 중국의 하건민(何健民) 박사는 서주 선왕(宣王, 기원전 827∼781) 대에도 순장의 기록이 있다고 적었다.

진나라 목공이 사망한 기원전 621년에도 177명이 순장됐는데 그 가운데는 엄식, 중항, 침호 등 충신들이 포함돼 있었다. 순장제도는 진 헌공 원년인 기원전 385년에 폐지됐는데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즉위한 2세 황제 호해 때 다시 등장했다.

그 후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는 순장제가 사라졌는데 명대에 부활한다. 명나라 태조 때 많은 궁인들이 순사했고 성조ㆍ인종ㆍ선종 때도 순장했고 청나라 때도 세조가 사망하자 후궁 30명이 순장되었고 성조(聖祖) 때도 40명의 궁녀를 순장하려다 성조가 심히 싫어하여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순장이 성행했다. 『고사기』에 죽은 사람이 능묘 주위에 담 구실을 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일본서기』에는 순사자들을 생매장하였는데 이를 고풍(古風)이라고 적었다. 순장이 일본에 매우 성행했다는 뜻이다.

한국의 순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순장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다. 가야지역인 양산군 양산읍 북정리 부부총, 1982년 우연하게 발견된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의성 탑리, 창녕 계성리, 순흥 읍내리 등에서 순장의 증거가 발견된다.

유명한 경주의 황남대총의 경우 고분의 구조상 적석목곽분은 추가장이 불가능한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150센티미터 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다. 반면에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다. 그것은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다.

여하튼 동이족의 풍습으로 알려진 순장이 양저문화에서 발견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배장제도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절강성 여항현 요산(瑤山)에서 서로 다른 흙을 사용하여 둘레를 자갈과 잘게 자른 돌을 두른 3층의 제단 유적이 발견됐다. 길이는 약 20미터, 면적 400제곱미터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유적으로 보이는데 부장품을 고려할 때 순장의 흔적도 보인다. 즉 사각형 제단이 있고 그 제단 주위에 순장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중국에서 피라미드식으로 된 4각형의 제단이나 무덤은 모두 중국민족의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했다. 그는 절강성의 요산을 포함하여 4각형으로 된 구조물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김천씨의 능과 만주 길림성 집안현의 장군총, 서하왕국(당항족이 세운 유목국가)의 왕릉, 북방식 신석기문화유적인 요령성 건평현에 있는 우하량(牛河梁) 유적 등에서 발견된다고 적었다.

소호김천씨는 가야의 김수로와 신라 김알지의 선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산동성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지만 공자 이전에는 산동성 동이족의 중심지이다.

장군총은 큰 돌을 잘라서 4각형 피라미드 형식으로 쌓은 것으로 동이족 문화의 큰 특징으로 분류되는 고분형식이다. 그 무덤이 백제를 따라 한강까지 내려와 석촌동에 고분군을 만들기도 했다.

우하량 제단 유적은 만주지방의 신석기시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제단양식으로 ‘홍산문화’로 불리는 문화 중 하나이다. 홍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등을 사용한 대표적인 북방인들의 문화이다.

결론적으로 사각형 피라미드식의 유적은 모두 중화민족의 것이 아닌데 절강성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중국인인 화화족(염황족)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절강성에 살았던 사람이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되면 그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한다. 가장 비근한 예가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벼농사이다. 벼농사가 남방에 적합하며 동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이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남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된다고 그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외부지역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절강성의 고인돌 같은 경우 약 3천여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동이 지역의 고인돌은 5∼6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윤내현 박사는 오히려 동이 지역에서 고인돌 풍습이 중국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기원전 3천여 년 전에 동이족이 주나라의 공격에 패배한 후 분지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동이족의 대이동>

근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에 대해 설명하는 요지는 분명하다. 고대 중원지방에 살던 동이족이 치우천황 때는 물론 주나라와 보다 후대인 진시황에 밀려 남ㆍ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북쪽으로 간 부류는 부여인 등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운남성이나 귀주로 가서 오늘날 묘족(苗族) 또는 요족(瑤族)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으로 절강성의 월족들이 이루어 놓은 양저문화와 하모도문화가 동이문화와 유사한 문신 등의 풍습들을 갖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게 설명된다. 이동식은 월족 즉 절강성의 고대인들이 산동성의 동이족과 본질적으로 같은 계통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송편과 월병도 한 예로 들었다.

한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송편으로 일반적으로 달의 모양을 흉내 낸 것이라고 설명된다. 반면에 중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월병으로 달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일종의 떡이자 과자이다. 한국의 송편은 상현달을 본뜬 것이며 중국의 월병은 보름달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월병은 고대 월국의 중심지인 항주이다. 강남에 살고 있던 월족은 과거부터 떡을 만들어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나눠먹는 습속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 은나라까지 올라간다.

월(越)은 월(月)과 발음이 같다. 한국의 한자 독음과도 같다. 이것은 월병(月餠, 달떡)은 원래 월병(越餠, 월나라 떡)이었는데 달을 숭상하는 풍속과 결합이 되어 월병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월병에는 또 다른 유래가 있다. 원나라 말에 관가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태주(천태산이 있는 곳)의 장사성(張士誠)이 ‘몽고족을 죽여 원나라를 멸망시키려니 8월 15일에 거사하자’라고 쓴 종이쪽지를 둥근 떡 속에 넣어 전했다. 8월 보름 예상대로 의거가 시작되어 결국 원나라는 멸망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5일 월병을 먹으며 장사성의 공훈을 기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무대도 월나라의 근거지인 항주 일대이다.

추석날 한국도 달떡을 만들어 먹는다. 물론 달떡의 모양은 다르다. 중국 것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한국에서는 상현달 같은 반달이다. 이 차이는 지역과 시대를 내려오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이동식은 설명했다.

월 지방에는 우리의 무당과 같은 무속인들이 후대까지 전해진다는 것도 제시됐다. 명나라의 방효유는 월무(越巫)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월의 무당은 스스로 귀신을 부릴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람이 병이 나면 단을 세우고 호각을 불고 방울을 흔들며 뛰고 소리를 지른다. 둥글둥글 호무를 추며 귀신을 쫓는다. 요행스럽게 병이 나으면 술과 음식을 먹은 뒤 상 위에 놓인 돌을 가지고 가고 혹 환자가 죽게 되면 귀신이 요망을 부렸다며 자신의 기술이야말로 요망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동식 기자는 월무라는 무당이 우리나라의 무당과 큰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무당은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민속 중에 하나인데 월지방에도 있었고 그 무당의 형태가 오늘날 한국의 무당과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역사가 삼황오제로부터 ‘하-은-주’로 일직선으로 내려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우월주의를 버리고 다원성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학자 서북문(徐北文)은 신석기시대 말기 이후 중국대륙에는 서부지역의 화하문화와 동부지역의 동이문화가 함께 병존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화하문화는 하나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우임금으로부터 시작해 주나라로 이어지고 동이문화는 치우천황을 거쳐 요순시대 이후 은나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큰 문화의 흐름 즉 이질적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중국 측의 변화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일련의 사건을 볼 때 진의를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가 자신과는 다른 이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도 포함하게 되자 그들 역사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설명이다.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동이문화의 뿌리가 산동성뿐만 아니라 양자강 일대까지 확산돼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설명도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한국 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안겨 주었던 신라 말 최치원의 글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해하고 북으로 연(燕)ㆍ제(齊)ㆍ노(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거적(巨賊)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쪽으로 침범했다는 오·월은 절강성 일대인데 최치원의 짧은 이 말 한마디가 그동안 잊혀졌던 한국의 과거사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우천황과 헌원이 탁록에서 전투하여 치우천황이 패배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치우천황이 패배했기 때문에 동이족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헌원의 포로가 되었고 다른 부류는 도망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포로가 된 많은 동이족들이 중국의 화하족에 동화되었을 것은 이해가 되며 중국이 강조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점을 기수연 박사는 분명히 했다. 한대(漢代) 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 대립하는 상대적인 개념의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배한 이후 상당수의 동이족들이 화하족에게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포로가 되지 않고 탈출한 사람들은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동이족의 전통과 풍습을 계속 유지해 내려왔다고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 대목이 한국민이 강조하는 것으로 한민족은 헌원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하족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 동이족으로 내려와 현재의 한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윤명철 박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문화전통을 유지 발전시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치우천황을 바라보는 각도가 중국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치우천황이 중국의 헌원에게 패배한 후 일부 부류는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한민족은 동화되지 않은 채 그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했으므로 치우천황의 맥을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는 것은 한민족이다.’

동이족이 헌원에게 패배하면서 도망갈 때 반드시 중국의 동북방으로만 진로를 잡았다고 볼 수는 없다. 동이족인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배할 때도 같은 정황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했지만 동북방의 동이족 후예인 한민족과 중국 남부의 월족이 같은 부류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실크로드의 관문인 난주(蘭州)에서 돈황까지 가는 유일한 통로가 ‘하서주랑(河西走廊)’이다. 남쪽으로는 기련산맥(祁連山脈)이 우뚝하고, 북쪽으로는 몽골고원과 사막이 펼쳐진 가운데, 좁은 곳은 10km, 넓은 곳은 100km에 이르는 회랑(回廊)이 1000km 정도 길게 뻗어 있다.

하서주랑은 옛 주인이었던 삼묘족(三苗族)과 흉노족(匈奴族) 때문에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소여림(邵如林)은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삼묘족을 구려족(九黎族)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속문명을 지녔던 치우(蚩尤)의 구려족이 황제족(黃帝族)과 탁록 전투에서 패한 후 이 고원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구려족은 동이족의 한 갈래이므로 하서주랑의 삼묘족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중국 길림성의 송호상 교수는 1990년을 기준으로 중국에 있는 동이족의 후예를 조선족 200만 명, 만족 1000만 명, 묘족 750만 명, 리족(黎族) 100여 만 명이며 묘족의 해외교포만 100만 명이 넘는다고 적었다. 물론 묘족을 포함하여 만족, 리족이 동이족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한민족과 동일 선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하다는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여하튼 10여 년 전 만해도 역사학자들이 치우천황과 한민족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현재와 같이 한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이름을 잘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국 고대사에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치우천황이 스포츠를 통해 가까워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과거를 찾아주는 고대사가 앞으로 스포츠를 비롯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계속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끝.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 글: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 suryang@chollian.net
  • 입력2003-10-28 10:03:00
 
  • ‘붉은악마’와 함께 부활한 군신 치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 동아시아판 트로이 전쟁 ‘탁록대전’
  • 염·황·치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중국의 속내
  • 치우는 동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다

2002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치우의 모습으로 분장한 응원단.

 
중국이 지난해부터 5년에 걸쳐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박았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03년 9월호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참조).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왜 갑자기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훔쳐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중국의 국경문제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중화사상이라고 하는 오래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부분은 이미 그들의 역사가 됐다)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鬼面)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먼저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치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 군(軍)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기마족의 이동폭이 넓었음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등이 있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부락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치우 시기에 이르러 동이연맹(고을사회로 볼 때)을 다스리던 염제(왕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염제가 있음)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연맹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일어났다. 그러나 어리석은 염제 유망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한다(이에 앞서 염제는 황제와의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황염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족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였다.

같은 동이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여성들에게 쫓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 패하곤 했다. 여기서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 ‘여성들이 황제를 좋아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모권사회였으므로 각 부락의 실질 지도자가 여성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치우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인 금속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안개를 일으키고 비와 바람을 부르는 등의 도술을 행했다고 하니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자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진다. 이 대전은 기마족이 내려와 농경족과 섞인 동이족 가운데서,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기마족 문화의 치우와 모계사회 지향의 농경문화의 황제 간의 충돌이었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는 동쪽의 정신문화와 서쪽의 물질문화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무덤이 산동반도 서남쪽에 있으며 군신으로 추앙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탁록에서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동·서 문명의 특성이 구분되어 뚜렷하게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두 문화집단(모권·물질 대 부권·정신)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순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치우에 집착하는 중국

이렇듯 의미가 깊은 치우천왕의 역사지만, 그의 활동영역이 대부분 현재의 중국 땅인 데다 국내 문헌사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 학계는 치우 연구를 소홀히했고, 아예 중국 고대의 신화인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중국측은 몇 년 전부터 “치우는 묘족의 선조일 뿐 아니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의 3대 인문시조(人文始祖)”라고 주장하고 치우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적 존재로 보았고, 하우(夏禹)부터 실존 역사로 취급했다. 황제의 자손인 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면서 스스로를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 외에 염제의 후손인 동이족과치우의 후손인 묘만족은 오랑캐라며 야만족 취급을 했다.

1997년 4월 호남성 이안링(炎陵縣)현에 있는 염제 신농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높은 산 위에 ‘염황지자손(炎黃之子孫)’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황제의 자손(子孫)일 뿐 아니라 염제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유적유물의 발굴작업이 진행될수록 황하문명을 비롯해 선진(先秦) 문명의 주인공이 그동안 오랑캐라 비하하던 동이족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자를 비롯해 우수하다고 알려진 많은 중국문화가 한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연구도 속속 나옴에 따라 황제의 자손인 것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치우 연구자들은 세 차례에 걸쳐 치우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동이족의 시조 염제(炎帝 神農)를 자기들의 시조에 포함시키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의 ‘동화정책’에 따라 한 민족이 두 조상을 갖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필자는 ‘한배달’ 치우학회 회원들과 함께 동이족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산동반도와 탁록지역을 찾았다.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에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에 세운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삼조당(三祖堂)’에 염제·황제·치우제 세 사람의 좌상을 안치하고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치우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치우를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야만족으로 취급하고, 염제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 치우의 정벌이라 자랑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치우를 황제·염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스스로 ‘염·황·치(炎·黃·蚩)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셋이 된 이상 황제의 자손이라는 화하족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화하족(황제의 후손)과 동이족(염제의 후손) 및 묘족(치우의 후손)을 합쳐 ‘중화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이로써 중국은 동이의 역사, 묘족의 역사를 모두 ‘중화족’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염·황·치’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93년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이어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가 열리고, 1995년에 귀근원을 만들면서 삼조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후속 연구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치우 끌어안기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2001년 산동반도의 치우무덤을 찾았을 때 주민들 대부분이 그 위치조차 알지 못했으나, 2002년 봄 명지대학 진태하 교수 일행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산동성의 치우 무덤을 복원 중이었다. 또 호남성에 치우의 동상을 세우고 1993년부터 ‘간추절(켋秋節)’ 행사를 개시하여 묘족의 독특한 문화전통을 살리면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계 치우학술대회를 열어 치우에 대한 연구범위를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 이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북유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학자 왕대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1980년대까지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에 대항했다 해서 미워하던 치우를 공동조상으로 받들면서 세계적인 공인을 얻으려 하고 있다.

치우 무덤과 유적복원 활발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치우학술대회에서 중국측으로는 유일하게 치우에 대해 발표한 짜오위다(趙育大)씨는 “치우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황제와 치우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라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측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중화민족은 황염동맹을 핵심으로 한다” “치우는 묘족의 시조”라고만 하고 동이의 수장이었음은 간과했다. 또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인 의미를 띄는 인문시조”라고 하여 당시 동서문명충돌론이 아니라 중화문화라고 하는 문화집단만을 강조했다. 한편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으므로 그 무덤도 당연히 탁록에 있어야 한다”면서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는 등 치우라는 걸출한 인물을 인정하면서도 중화문화라고 하는 카테고리 속에서만 보려고 해 ‘동서 문화충돌론’을 주장한 한신대 김상일 교수와 상당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김교수는 “두 문화집단이 있어 충돌이 생기는 것이므로 중화문화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중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필자가 “공동시조로서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해 앞으로 연구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학술대회를 통해 옌볜대학 교수들에게 ‘치우는 우리 조상’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도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과연 조선족에게 그런 연구를 허락할지 미지수다.

이렇게 중국이 치우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단순하게 소수민족을 끌어안는 동화정책의 일환이며, 한반도의 남북통일시 생길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문화유적의 관광자원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실리적 목적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을 포함하는 동이·묘족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중국사로 끌어가려는 논리로서, 패권주의인 중화사상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삶 깊숙이 자리잡은 치우의 흔적

이처럼 중국이 일방적으로 치우 연구를 진행하면서 모든 치우의 후예들을 ‘중국인화’하는 것을 경계하려면 국내에서도 치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치우를 한(漢)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다. 즉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어느 지역에 그 흔적이 원형대로 많이 남아 있느냐, 또 그 유산을 누가 더 현대화하느냐에 따라 치우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또는 둘 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곳곳에서 치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주요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해치(또는 해태, 사천왕)의 모습으로 치우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밀한 홍소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포효로 보이는 표정을 통해 악귀로부터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또 기와집 치미나 막새기와(귀면와)에 위치하여 집을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동짓날에는 붉은 팥죽이 되어 병마와 액운을 막아준다. 또한 단오절 적령부(赤靈符)라는 붉은 부적을 통해 개인과 집안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군사들의 방패와 무기와 군기(軍旗), 투구 등에 새겨져 승리를 일궈내는 군신으로 작용을 하며, 잡귀를 막아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붉은 도깨비로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도깨비 연구가인 조자용 박사나 윤열규씨에 의하면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홍소 같은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뿔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치우희,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저희라고 했던 씨름은 현재 우리 민속의 대표적인 놀이가 되어 있으며, 소뿔 대신 황소를 상으로 준다.

상고사 연구는 어디로

사실 한국 상고사 연구자들은 정사로 인정할 만한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어 발을 구른다. 단군도 신화적 인물로밖에는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이전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의 출처가 바로 ‘환단고기’라는 것이다. 책 자체는 위서로 의심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의 보편적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1만년 전후 중석기 내지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작은 부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부락사회 또는 마을사회(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주장) 시대라 한다. 그러다 약 6000년을 전후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보호를 위해 서로 연맹을 시도한 부락연맹사회 또는 고을사회(윤내현)가 형성된다. 그 후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4500년 전후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기록이 있는 것은 바로 국가사회부터다. 그 이전의 역사는 창세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해졌다.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집 치미와 막새기와에 새기는 도깨비의 모습은 바로 치우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고조선이라는 국가 이전에 마을이나 고을사회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신화나 전설이 구전이나 무가(巫歌) 형태, 또는 야사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는 단군 이전 시대를 역사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그 속에 포함된 치우의 역사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역사책에 ‘치우가 동이족이며, 구려의 임금’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만약 그 때를 우리의 고을사회 역사로 해석해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이를 보완한다면 훌륭한 단군 이전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만주지역에 있던 요·금·원·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중국 고대사에서 동이로 분류되던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우리는 말갈, 여진, 만주족이라며 오랑캐로 몰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대신 중국은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로 흡수했다”는 논리로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 또한 처음에는 ‘진’이었으나 당나라가 멋대로 ‘발해국왕’에 봉하자 나라 이름도 발해로 바꾸었고, 지금도 우리가 스스로 부른 이름 ‘진’보다는 ‘발해’라고 부르고 있으니, 중국은 이를 근거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지도를 보면 난하 동쪽, 청천강 이북까지만 고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그 남쪽을 삼한이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많은 국내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을 신라통일이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로 보고 있다. 바로 ‘광명일보’의 주장처럼 ‘고씨 고려(고구려)와 왕씨 고려는 다르므로 고구려는 중국, 고려는 삼한의 후예인 한민족’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 국내 학자들은 한반도 밖의 한민족 청동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하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 영토로 거론하기도 하는 산동반도와 만주 요녕성의 경우 기원전 25세기까지의 청동기 유물이 나오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로 인정받지 못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대동강 유역의 기원전 30세기 청동기 유물이나, 양수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24세기 청동기 시대 유물들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의 형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기가 기원전 10세기 설에 묶여 있으니, 그 이전 인물인 치우는 물론 단군조차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중국 학자가 “한자는 한(漢)족의 언어체계와 맞지 않으므로 한족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글자다”라고 주장해도 동이족의 핵심이라는 우리는 한자가 우리 겨레의 글자일 가능성조차 무시해버린다.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만주를 포기하는 동안 국민들은 의분에 젖어 백두산 관광길에 올라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등 대책 없이 중국측을 자극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정부가 한국의 국무총리에게 항의서신을 보내는 등의 해프닝이 발생하는 것도, 알고 보면 한국 고대사에 대한 논리적,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치우에 대한 연구는 재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겨레얼 바로찾기 운동단체인 사단법인 한배달은 1999년부터 중국의 치우연구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그 해 12월말 치우학회를 설립해 국내외의 치우 관련 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한국과 중국(옌볜대학)에서 각각 치우학술대회를 열고, 치우자료집과 학회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경기대 법정대 고준환 교수가 ‘치우천황’이라는 책을, 소설가 이우혁이 ‘치우천왕기’라는 소설을 발표했지만,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중국 ‘중화삼조당’에 모신 치우상.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제2회 치우학술대회(주제 ‘고대동아시아 종족과 한민족’)에서 확인한 바는 옌볜대학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족들에게 고구려 이전 역사연구가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이족, 묘만족, 화하족을 합쳐 ‘중화족’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고 선후를 이은 관계인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도 고구려족, 발해족 등 나라마다 민족의 이름을 붙여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민족을 더욱 작은 단위로 나누어 자체연대나 단결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동북공정’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2003년 봄 동북아 경제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역은 본래 아시아인들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백인들이 주인이다. 1860년대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극동함대를 앞세워 백인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아인(특히 고려인들)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관은 1860년 이전의 역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150년 만에 인구의 구성과 역사의 주도세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역시 200여 년 만에 원주민인 인디언의 역사는 사라졌다.

이렇게 지역의 역사와 종족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만주지역과 산동반도 지역은 수천 년 전에도 중국 땅이었고, 한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버리면 우리 고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쓰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쓰거나, 그 이전의 역사는 빼버릴 가능성이 높다. 마치 미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에서 원주민들의 역사가 지워진 것과 같다. 반대로 과거 거주했던 종족(원주민)의 시각에서 쓰면 미국은 인디언의 역사,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주도권 싸움 대신 공동연구를

현실적으로 보면 둘 다 옳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이 조화돼야 완전해진다. 양국의 공통 조상인 치우 문화라는 공통점이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쉽고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치우의 역사가 종족간 다툼의 빌미가 아니라 협력과 화합의 근거가 돼야 한다. 치우의 종족적인 계보로 따지면 중국의 만주-산동반도-남서지역, 한반도, 일본, 대만, 동남아 지역까지 동이와 묘족의 거주영역이 모두 해당한다. 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치우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만주지역은 배달나라 시대를 빼더라도 고조선-고구려-진(발해)까지 약 3300년 동안 한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러니 여기서 ‘지배층은 고구려족,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3300여 년 동안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민족이 다를 수 있겠는가.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은 한민족 내지 배달민족(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지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와 일본의 조상이기도 하고 중국 동이족이나 묘족의 조상이기도 한 치우천왕. 각자가 자기 민족의 선조로 기록하고 있고, 양쪽이 다 옳다면 결론은 이렇다. 당시 동아시아에 큰 문화집단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치우와 황제였으며, 그들 간에 충돌이 있어 각자의 문화 독창성이 더 강화되거나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도 했을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이를 동서문화의 충돌로 보았다. 종족의 이동과 문화의 이동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추적하여 동아시아의 상고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중국이나 중화만이 중심이어서도 안 되며, 한민족만이 중심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각국이 보유한 역사기록과 전설, 신화, 민속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너와 나를 버리고 양쪽의 공동 조상, ‘우리’의 조상인 치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05-10-04 11:33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hani.co.kr)

우리는 왜 긍지를 덮고 치욕의 역사를 가르쳐왔나


어린 시절, 국사 책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고조선이다.

 

국사 책에는 단군이 조선(朝鮮)을 개국한 것이 BC 2333년인데, 갑자기 BC 108년 중국 한나라에 왕검성이 함락된다는 망국 이야기로 끝맺는다. 반만년 역사 중 고조선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2113년)보다 그 이전 고조선(2225년)의 역사가 더 길다. 그런데 고조선과 관련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단군신화, 홍익인간·재세이화(在世理化), 3개 밖에 전하지 않는다는 8조법금, 그리고 멸망. 그게 끝이다. 그나마 고등학교 국어 고문 시간에 배운 백수광부(白首狂夫·흰머리 미치광이)의 처가 지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2천년 뒤, 가수 이상은의 노래로 되살아나기도 했다)가 고조선 시대에 지어졌다는 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고조선에 대한 전부다.

 

의심했다.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론 2천년 남짓이 고작 아닌가 하고.

그러다 1985년 소설 <단>(丹)을 접했다. <단>은 그해 베스트셀러 1위였다. <단>은 삼국시대 이전에 환인-환웅-단군 시대가 각각 존재해 우리나라의 역사가 5천년이 아닌 9천년이며, 단군은 고유명사가 아닌, 임금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고조선 시대 47대에 걸친 단군(임금)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 우리 역사의 강역이 이 좁아터진 한반도가 아니라, 저 북방 바이칼 호수에서 저 남방 파미르 고원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을 거의 장악했다는 것 아닌가? 긴가민가 했지만, 일단 뻐근한 감격이 올라왔다. 말 그대로 웅혼한 기상이 마음 속에 일었다.

 

처음 <단>을 읽을 때, 다분히 창작인 줄 알았던 그 내용이 실은 <환단고기>(桓檀古記·‘한단고기’라는 주장도 있다)를 중심으로 한 내용이었다는 것을 안 건 나중이었다.

 

1. 우리 역사는 9천년인가, 7천년인가, 5천년인가, 2천년인가?

 

<환단고기>는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동이족의 비사(秘史)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4권의 책을 묶은 것이다. <삼성기>(三聖記)는 신라 승려 안함로가 쓴 책으로, 고조선 이전 환인-환웅 시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문정공이 쓴 책으로, 1세 단군 왕검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고조선 2096년 왕조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기>는 고려말 학자 범장이 전한 책으로, 동명성왕의 아버지이자,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부여 멸망까지의 부여 300년사다. <태백일사>는 조선 연산군때 학자 이맥이 전한 책으로, 환국-신시(神市·환웅시대)-고조선에서 마한, 변한, 고구려, 고려때까지의 역사를 드문드문 전하고 있다.

 

이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 역사는 BC 7199년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근처에 세워진 환국(桓國)이 7세, 3301년 동안 지속되고, 이어 환웅이 BC 3898년 산동반도 근처에 배달(倍達)국을 세우고,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했다. 배달국은 18세, 1565년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BC 2333년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전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BC 131년이 끝이다. 그다음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굳이 언급하자면, BC 108년까지의 빈 공간인 위만조선(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연나라가 망하자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 서쪽 지방에 살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前漢書)에 쓰여져 있음. 그리고 위만조선은 4대까지 왕위가 이어졌으나, 한반도에 위치한 진(辰·삼한의 전신)나라의 중국 소통을 막다가 한나라와 전쟁이 일어나 BC 108년 망하고, 한나라는 이곳에 한4군을 설치했다고 전함. 우리 역사는 중국 역사서인 <전한서>를 따르고 있는 것임)이 빠져 있다.

 

태초에 가까운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역사는 오늘날까지 무려 9204년이 되는 것이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3년이며,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단기 4338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삼국사기>에는 신라(BC 58년), 고구려(BC 37년), 백제(BC 18년) 이전의 이야기가 없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2천년을 겨우 넘으며, <삼국사기>가 스치듯 언급한 기자조선(BC 1122년)을 더해도 우리 역사는 3127년에 그친다.

 

2. 환국(桓國)(BC 7199~BC 3898)

 

“오래전 한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백력(斯白力: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흑룡강) 백산(白山:백두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중생을 돌보는 직책)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환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파나류산(중국 하얼빈 남쪽 완달산/소설 <단>은 이를 파미르 고원으로 봤다) 밑에 환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호) 동쪽 땅이다. 그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통틀어 환국이요. 7세, 3301년 동안 지속됐다” 환산하면 강역이 대략 북으로는 바이칼 호수, 남으로는 양쯔강 북쪽, 동으로는 만주와 백두산 지역, 서로는 몽고가 다 속한다.

황제의 나라인 환국은 그 아래로 비리, 양운, 구막한, 구다천(캄차카), 일군, 우루, 객현한, 구모액, 매구여, 사납아, 선비(퉁구스), 수밀이 등 12개의 나라를 둔 일종의 연방체(?)였다. 일본 학자인 가지마 노모루는 수밀이국과 중동 지방에서 최초의 도시문명을 이룩한 수메르 문화와의 연관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3. 배달국(BC 3898~BC 2333)

 

환국 말기에 환인이 서자 환웅을 삼위와 태백에 보내, 홍익인간의 뜻을 펴도록 한다. 이에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중국 감숙성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이라고도 한다) 꼭대기에 신시를 세우니, 그가 곧 배달국 제 1대 환웅천왕이다. 이때 배달국 인근에는 곰을 숭상하는 족속과 호랑이를 숭상하는 족속이 살며 서로 다투었는데, 웅씨족의 여추장이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환웅과 혼인했는데, 이것이 후세에 단군신화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단고기에는 이 장면을 “환웅이 웅(熊)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했다”고만 전하고 있다. 배달국은 18세 거불단 환웅까지 이어진다.

4. 조선(BC 2333~BC 108?)

<삼국유사>는 중국 역사서인 <위서>(魏書)를 참조했다며, “단군 왕검이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묘(BC 1122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한다”고 전해 단 1명의 신화 속 단군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단고기>를 보면, 47명의 단군(고조선 임금)이 나온다. 또 이때 문명이 크게 발달해 쌀 되와 저울을 통일하는 도량형 통일이 진시황보다 1900년 전인 2대 단군 부루(BC 2238년) 때 이뤄졌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거의 똑같은 글자인 정음 38자 ‘가림다’도 3대 단군 가륵 때 만들어진다.(BC 2181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도 완전창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글을 재구성해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글자가 만들어진 뒤, 이전까지 구술로 전해오던 옛일을 글로 적어 첫 역사서인 <배달유기>(BC 2180년)가 지어진다.(고구려 영양왕 때(AD 600년) 때 이문진이 <유기>를 요약해 <신집> 5권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유기>가 바로 이 책은 혹시 아닐까? 지금은 <유기>도 <신집>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밖에 인삼, 돈, 배 등이 4대 단군 오사구 때 발견되거나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하나 주목할 것은 BC 1987년 8대 단군 우서한 때 대궐로 날아왔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다. 그 까마귀는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삼족오(三足烏)는 나중에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나는데, 우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이 ‘삼족오’는 일본의 신화 속 동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즈인 울트라니폰의 상징물이 바로 이 ‘삼족오’이다. 우리가 우리 옛 역사(또는 신화)에 무관심한 사이, 우리 것들을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5. 치우천왕(蚩尤天王, BC 2748~BC 2598)

 

환단고기에서 특히 주목한 임금(황제)이 바로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환단고기> 외에도 <제왕연대>, <규원사화> 등 우리 역사서에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지리지>, <상서>, <운급헌원기> 등에도 실려 있다.

 

<환단고기>를 보면, 치우천왕은 BC 2706년(42살) 환웅의 자리에 올라 BC 2598년(151살)까지 재위 109년 동안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다.

 

그는 10년 동안 중국의 황제 헌원(BC 2692~BC 2592)과 73번 싸워 모두 이겼다. 헌원은 중국 하나라 이전 삼황오제의 삼황(三皇) 중 태호복희에 이은 2번째 황제다.(삼황 다음은 오제(五帝, 요순 임금 등)가 이어지고, 이어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그리고 은(殷)나라,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현재 은나라부터 역사시대로 인정하고, 그 이전은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도 은허 유적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전 중국에서 하나라 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수레와 투석기(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전쟁에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는 치우천왕이 탁록(오늘날 하북성) 벌판에서 헌원을 끝내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는 이와 다르다.

 

“제후가 모두 다 와서 (치우에게)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

 

<사기>에 따르자면, 치우는 중국 산동성(산둥반도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동이족의 나라)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중국 조상인 신농이 다스리던 영역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었다. 치우는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신농의 후계자인 유망(楡罔)을 무찌른다. 그러자 유망이 황제 헌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중원을 놓고 헌원과 치우가 대결전을 벌인다. 고대의 세계대전인 셈이다. 그리고 치우는 전군을 동원해 헌원과 10번을 싸워 9번을 모두 이긴다. 여기까지는 우리 역사서와 같다. 헌원은 폭풍우 속에서 치우에게 쫓기다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세력을 회복해 용맹하던 치우의 형제(아마도 신하 장군으로 추정) 81명이 하나씩 하나씩 스러지고, 마지막 탁록 대전에서 치우는 종국에는 혼자 남아 싸우다 헌원의 병사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처형된다. 이후 동이족은 중원에서 밀려나 중국 동쪽 변방(만주)으로 옮겨갔다.

 

중국 역사서를 따르더라도, 우리 민족의 무대가 만주벌판에서 한반도로 축소된 단절점이 신라의 3국통일이었다면, 우리 민족의 무대가 중국대륙에서 만주와 한반도 등 대륙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 치우천왕의 패전이니, 우리 상고사의 중요한 한 순간이다.

 

중국 역사에서 치우는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머리가 구리와 쇠로 돼있고(아마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치우가 휘두르는 강력한 청동 신병기에 놀란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치우가 그렇게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폭풍우를 뿌리기도 한다.

 

치우천왕의 능은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었던 것으로 <한서지리지>에 전해지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됐고, 이어 진나라, 한나라 때는 주민들이 제를 지냈다. 또 <사기> 봉선서에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전쟁에 나가기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했다고 한다.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치우천왕은 신화시대인 그때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 역대 왕릉 모두에 도깨비상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그런데 탁록의 마지막 전투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인 치우(정사로 인정받는 <사기>를 따를 때)는 수천년이 흐른 뒤인 1999년 또다시 깨어난다.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

 

붉은 악마는 당시 회원이던 한 축구디자이너의 권고로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캐릭터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3월29일 한국-브라질 전이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치우천왕 깃발이 첫 선을 보인다. 이날 한국은 한국 축구역사상 처음으로 히바우두가 뛴 세계 최강 브라질을 1 대 0으로 물리친다. 4500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이 ‘불패의 신화’를 또 한번 보여준 걸까?

 

그리고 붉은 악마는 이후,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울릴 때는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치우천왕기를 펼치는 것이 공식화 돼 있다. 그리고 치우천왕이 등장한 이후, 처음 맞은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4강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또다른 치우가 있다. 만화가 이현세는 이보다 앞선 97년 고대 동아시아 전설을 집대성해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로 다시 표현해낸 <천국의 신화>에서 치우와 헌원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치우는 천족(天族·동이족)의 영웅으로, 그리고 헌원은 화족(華族·한족)의 영웅이다. <천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까치 오혜성’, 황제 헌원은 ‘마동탁’의 이미지다.

이 만화에서 치우는 천족의 임금인 천군의 두번째 부인 발기달의 아들로 태어난다. 왕비가 아들이 없어 자연스럽게 천족의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나, 이를 시기한 왕비가 벌인 왕실 다툼에서 어머니 발기달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부하들이 그를 안고 도망치다 밀림에 홀로 버려져 산속에서 호랑이에게 키워진다. 나중에 나라의 칼을 만드는 충신 손돌이 치우를 발견해 몰래 데려다 손자로 키운다. 치우는 아무 것도 모른채 평화롭게 자라나고, 그 사이에서 동네 여자친구 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와 연정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천족(天族)이 그동안 제후국이었던 화족(중국 민족)의 황제 헌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다 스러져가는 천족의 나라, 배달국을 지키는 적통 왕세자, 메시아로 부상하고,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며 부족을 지켜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미리내가 교활한 헌원에게 사로잡히고, 헌원이 미리내를 이용해 치우를 괴롭히자, 치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돼 부하들을 찔러 죽이는 등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킨다.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느끼는 가운데, 치우는 결국 잠들어 있는 사이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이현세는 치우천왕을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에서 나온 ‘까치 오혜성’과 너무나 흡사한 인물로 그려냈다.(개인적으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승리자 치우천왕(<환단고기>)보다 <사기>에 나오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죽음에 이른 ‘비극적인 치우’가 애잔해 마음이 더 끌립니다. 또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실제 치우는 후자 쪽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6. 그리스 신화는 알면서 자기네 신화는 모르는 한민족

이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이런 내용들이 관련 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한단고기>가 엮은 책들이 신라~조선초기에 걸쳐 쓰여졌는데, 이전까지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다가 구한말에 들어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미뤄 혹 이것이 어떤 의도를 가진 위서(爲書)라는 주장까지 있다.

그러나 <한단고기> 외에도 1675년에 쓰여진 <규원사화>(揆園史話)도 고조선 47대 1195년의 역사가 소개돼 있고, 신라의 박제상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부도지>도 환국-배달국-조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또 우리 역사서가 아닌 <사기>, <상서>, <위지> 등에서도 비록 조각조각난 것이긴 합니다만, 배달국과 조선, 그리고 치우천왕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백번을 양보해 이 모든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화로는 왜 전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제우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아폴론, 큐피트,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등 그 복잡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은 줄줄 외우면서 우리 동이족의 영웅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 아닌가? 게다가 역사로 인정받는 은나라 이전에 대해서도 요순 시대, 삼황오제 등 그 이전시대의 일화나 용어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불쑥불쑥 등장하는데 그 옛날 중원을 호령했을 치우천왕은 어디에다 내평겨쳤단 말인가?

7. 화근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어떨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가 이토록 수치스러운 것인가 하고.

 

“거룩할사 당나라 큰 업을 개발하여/황가의 정치 경륜 높고도 창성하구료/싸움을 끝맺어 천하를 안정하고/전임금 잇받아 문교를 닦았도다/(…)/산악의 기운받아 재상들 태어나고/임금님은 충량한 신하만을 믿으시네/삼황으로 뭉치어 한 덕이 되니/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65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승리하자(아직 백제 멸망은 아니었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써 당 태종에게 올린(?) 글이다.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해 <삼국사기>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삼국통일의 주역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의 사신으로 당에 갔을 때, 당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중국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한 뒤, 중국 옷을 입고 아뢰었고, “신의 자식이 7형제가 있으니, 원컨대 성상(당 태종)의 곁을 시위케 하여 주소서”라며, 자기가 스스로 청해 아들을 중국에 사실상 볼모로 남겨두고 온다. 또다른 역사서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연개소문을 만났을 때, 연개소문이 “신라와 우리 고구려가 함께 하면 당나라가 무서울 게 무어냐?”며 “우리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할 때, 아무 말도 않고 이를 거절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당나라에 빌붙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노예의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또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에 자기를 묻게 한 문무왕.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편을 보면, 문무왕은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 의상을 입게 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문무왕 8년, 당으로부터 이후로는 여자를 헌납하지 말라는 칙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전까지는 당에 바치는 조공에 여자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런 역사요, 너무나 낯뜨거운 신라 왕들의 행태다.

또 <삼국사기>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땅에서 당나라 장수들과 함께 잔치를 열면서 항복한 의자왕을 데려와 옛 백제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에서 술을 따르게 했다고 전한다. 당시 신라는 정말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나라였단 말인가?

 

삼국시대 이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해동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다. 기자가 주실(주나라)에서 수봉(受峰)함으로부터(BC 1122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의 신하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중국 역사서를 이야기한다) 위만이 한초에 참호할 때(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뒤, 한나라와 맞섰을 때)까지는 연대가 막연하고 문자가 소략하여 상전할 수가 없다”는 한 마디로 끝맺었다. 김부식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땅 곳곳에 흩어져 있었을 고대 역사서, 고조선의 옛 이야기들을 단칼에 다 생략해 버린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는 신채호가 ‘일천년래 최대 사건’이라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다. 김부식은 유교사상을 나라의 이념으로 삼고, 중국을 숭상하는 것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다. 이때 이미 고려 초기의 자주적이고 웅혼한 기상은 사라진 때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전에 다섯번이나 중국을 다니면서 중국의 역사서를 섭렵했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제 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중국의 시각에서 그저 귀퉁이에 조금 흘려쓴 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주워담아 얼기설기 엮어 역사로 만들다니.

 

그러나 어쨌든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책이 됐고, 또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엮었다고 전해지는 각종 역사서들이 구한말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서 논란을 빚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김부식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국 중심의 모화사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중국과 일합을 겨룰 뿐 아니라, 중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는 치우천왕이나 환국-배달국의 이야기를 누가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론한다.

숨죽여 고이고이 전해질 뿐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진실은 아마도 중국 역사와 우리 중심 역사인 <환단고기>, 그 중간 어디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은 <삼국사기>가 중국 역사서와 내용은 물론 중국 중심의 관점조차(우리를 준오랑캐 나라로 스스로 자칭하는) 똑같다는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고조선을 사실상 계승한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우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날로 더해지는 이때, 치우천왕의 신화만이라도 최소한 “우리네 역사 속에 이런 신화도 있다”라고 하는 정도로 자라나는 아이들(초등학생들이 혼동스러워한다면 최소한 중고생에게라도)에게 알려주는 것, 그것도 안되는가?

 

치욕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읽기 전에 치우천왕을 먼저 알게 하는 것이 정신건강면에서도 좋을 것 같다.

 

참조:<한단고기>(임승국 번역·주해),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천국의 신화>(이현세), <부도와 한단의 이야기>(지승),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등.

<한겨레> 경제부 권태호 기자 ho@hani.co.kr

[덧붙이는 글]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권태호 기자입니다. 자신이 쓴 글이나 말 뒤에 ‘내 의도는 그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비겁함을 무릅쓰고 다시 글을 띄웁니다.경제부 기자가 뜬금없이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이유는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의 진짜 주인공들을 한 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쓴 것입니다. 제가 치우천왕 이야기를 쓴 목적은 (물론 아시겠지만) 치우천왕 고사를 국사교과서에 올리자거나, 정사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네 신화 속 인물 중에 이런 이도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치우천왕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교 때였습니다. 그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왜 초등학교 때, 중고등학교 때, 우리 역사와 신화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던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네 역사를 보며 늘 패배의식에 젖어있기 보다 (비록 마취제 성격이 있었을 진 몰라도) 더 큰 상상력과 창의력, 자긍심을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제가 글을 쓴 첫번째 이유는 제 후배들이 그때 제가 느꼈던 그 안타까움을 똑같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신화시대의 이야기인 치우천왕이 실존인물이냐 하는 문제는 논란거리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최소한 동이족의 신화 속 영웅인 치우천왕(중국은 치우천왕을 악마로 묘사합니다)을 우리들이 좀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문화는 또 얼마나 더 풍부해 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치우천왕을 역사로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라, 묻혀진 우리의 신화를 끄집어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치우천왕이 속한 민족인 구려족이 우리 민족이 아닌, 지금은 사라진 중국의 소수민족이었다고 이야기하면 원인무효가 되기도 합니다. 구려족이 동이족의 한 분파이며,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이미 치우천왕은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도깨비 등으로 이미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고, 이미 붉은 악마의 캐릭터로도 등장합니다. 그것마저 정사가 아니라며, 내쫓아야 합니까? 고구려 벽화에 있는 삼족오를 일본이 자기네 신화 속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둘째, 또다른 문제의식은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나온 것입니다.자기네 역사란 대개 자기네 나라가 가장 강성할 때, 실제보다 조금 부풀려서 쓰여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있는 역사도 잘라버리고, 굴욕적인 부분(물론 현대적 관점과 시각에서 판단한 것입니다)을 당연했다는 시각으로 쓰여지는 것을 보고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한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도 한편으론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완벽한 창작물이라는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숨겨진 역사서를 유교 사상이 위축된 시점에서야 다시 엮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첨삭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한단고기의 내용들이 중국의 역사서에도 일치하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가치, 아니면 최소한의 연구가치라도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점입니다. 덧붙일 점은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 2가지이나, 우선 그 전제로 되는 한단고기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언급해야 했기에 한단고기 이야기를 처음에 장황하게 썼습니다. 물론 한단고기를 이미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먼저 관련 정보와 전제를 제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글의 비중이 한단고기 소개에 치우친 점은 인정합니다. 그 다음, 글에서 몇 가지 틀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5. 치우천왕 편에서 99년 3월29일 호나우두가 뛴 브라질을 1 대 0 으로 꺾었다고 했는데, 호나우두는 그때 뛰지 않았고, 히바우두가 뛰었습니다. 6. 그리스 신화는 아는데 제나라 신화는 모르는 한민족 편에서 주지육림(하나라)라고 썼는데, 주지육림은 은나라 마지막왕 주왕과 달기의 고사인데, 제가 그 직전 나라인 하나라로 잘못 썼습니다. 7. 화근은 <삼국사기> 편에서 김춘추가 고구려 사신으로 간 것은 백제 멸망 전인데, `백제 멸망 뒤'라고 잘못 썼습니다. 이 내용들은 수정했습니다. 넓은 이해 바랍니다. 권 태 호 올림

 

 

입력 2005. 7. 14. 07:21수정 2005. 7. 14. 07:21

이것을 탁록 들판에서 있었던 대첩이라고 한다.”(원동중 <삼성기>에서) 걜×李 『뉵潁?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 황제가 곧 응룡을 시켜서 기주들판에서 공격하라고 했다.”(<산해경> 제17권에서) 배달임금 중 차이나옛글에 나오기로는 ‘치우’(蚩尤)가 처음이다. ‘치우’란 환웅조선14세 ‘자오지 환웅’(慈烏支 -)이다. ‘자오지’가 차이나로 쳐들어가 ‘황제헌원’(黃帝 軒轅)을 사로잡았다.

으뜸글이 <삼성기> ‘서전려형’에 실렸다.

 

여기엔 ‘자오지’가 “작란했다” 곧, “빼앗았다가는 넘겨주는 일들”이라고했다. 치우의 본국 존호가 ‘자오지 천왕’이다. 당시 차이나땅임금이었던 ‘염제 신농’이 쇠약함을 보고 하늘뜻을 물어서울을 ‘신시’에서 ‘청구’로 옮기고 병사를 일으켜 색도로부터 회수와 대산사이를 점령했다. 이 무렵엔 염제 신농 뒤를 이어 ‘황제 헌원’이임금자리에 올라 있었다. 치우 천왕이 탁록으로 들어가서 헌원을 사로잡았다.

이를 ‘탁록 대첩’이라고 한다. 사로잡힌 황제가 신하 되기를 맹세하매살려주었다. 사로잡았으나 살려준 것이 치우의 ‘어짊’인데이를 ‘홍익인간’이라 했다.

치우가 탁록을 점령하고 다시 남정에 나서유망의 서울 ‘공상’에서 ‘천제’에 올랐다. 이때 헌원이 지난날 탁록전치욕을 씻어보려고 서둘렀으나 100리 밖으로 쫓겼다. 치우가 탁록에 성을 쌓고드넓은 회대땅(중원)을 다스리니 헌원의 부하들이 모두 신하로 일컫고 공물을 바쳐왔다. 헌원이 외롭게 쫓긴 지 10년이었고 그 사이 전투가 73회였다.

나중에 치우가 하늘과 민심을 살피고서 허물없는 백성을 마구 죽일 수 없다며군사를 거두는데, 부장 하나가 헌원군에 잡힌다. 이를 <산해경>이 치우를사로잡았다고 왜곡했다. 치우 무덤이 산둥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고(한서지리지), <진천문지> <한서병장도>에 ‘치우깃발’ 모양과 함께 ‘군기’로 삼은기록이 있다.

월드컵 축구 때 ‘붉은악마’가 ‘자오지 셔츠’를 입고응원한다. ‘홍익장군’ ‘자오지천왕’이 나았겠다. 자오지 병사의큰활(大弓)을 차이나 겨레가 두려워했다. ‘大弓’을포개니 ‘이’(夷)가 되었다. ‘동방 대궁인’ 곧 ‘동이’(東夷)가 여기서나온다. 배달겨레가 활쏘기에서는 선수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6.06.26 00:00 이종호 과학저술가

치우천황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 Sciencetimes

 

2006.07.03 00:00 이종호 과학저술가

치우천황은 한국인일까 중국인일까? – Sciencetimes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07 [02:42]

'단오절'은 치우천왕과 고주몽의 탄신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민족의 3대 명절의 하나인 단오절은 일년 중 가장 양기가 센 날

 

음력 5월 5일인 단오절(端午節)은 설날.추석과 함께 민족의 3대 명절로 꼽힌다. 수릿날(水瀨日)·천중절(天中節)·중오절(重五節)·단양(端陽) 등의 다양한 이름이 있다. 예로부터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등 월과 일이 겹치는 날은 양기(陽氣)가 가득찬 길일로 쳐왔는데, 그 가운데 5월 5일을 가장 양기가 센 날이라고 해서 으뜸 명절로 지내왔다.

수리란 말은 고(高)·상(上)·신(神)을 의미하는 옛말인데, 이 날은 1년 중 최고의 날이란 뜻이다. 농경사회에서 파종을 하고 모를 낸 후 약간의 휴식의 시점이 단오절이다. 이날 하루 마음껏 놀이를 즐긴다. 추위가 늦게까지 계속되는 북쪽지방은 이때 비로소 날이 완전히 풀리기 때문에 더 경사스러운 날이 될 수밖에 없다. 남쪽이 추석을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에 북쪽에서는 단오를 더 중시했음은 지역의 기후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날 약초를 캐고, 창포를 문에 꽂아두기도 하며, 창포물에 머리를 감기도 하고, 창포주나 약주를 마셔 재액을 예방했다. 또 쑥으로 인형이나 호랑이를 만들어 문에 거는 풍습으로 보아, 약초·창포·쑥 등의 강한 향기와 약성(藥性)으로 재액을 쫓았던 것 같다. 이날은 둥근 절편도 만들어 먹었고, 그네뛰기·씨름·탈춤 등 여러 가지 민속놀이가 행해진 명절이었다. 민간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여러 행사가 있었다.

 
중국에서 주장하는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 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을 받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해 멱라수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 이었다고 한다. 그 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단오가 되었다고 우리 국민들은 알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단오의 참 뜻을 숨기기 위해 중국에서 지어낸 말을 우리가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지조를 보이기 위해 자살한 사람을 기리는 제삿날을 명절로 하는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명절이란 기쁘고 즐거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 죽은 자를 추모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건만, 이 나라 국민들은 모두 다 단오의 유래가 중국인 굴원 때문에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일본/중국에게 우리 민족의 정신인 역사를 다 빼앗겼는데도 정부가 아직 역사회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오절은 바로 배달국 14대 자오지 한웅인 치우천왕의 탄신일로부터 기인한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이기도 하다. 즉 치우천왕과 고주몽 성제의 탄신을 기리는  민족 고유의 즐거운 명절이지, 중국에서 굴원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는 명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nbsp;&nbsp;호남성 화원현 묘족자치구에서 세운 치우천왕의 상. 오른쪽은 치우천왕의 능임을 밝혀준&nbsp;치우총이라는 비석


단오절은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북부여의 시조인 단군 해모수 이야기가 나오고, 해모수의 증손자인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는데 때는 한나라왕 원봉 2년(B.C 79년) 임인 5월 5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 성제는 동부여에 살다가 졸본으로 와서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고, B.C 58년 21세의 나이로 아들이 없던 고무서단군의 대통을 잇게 된다. 즉 북부여 7세 단군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어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고 고구려의 시조가 되고 연호를 다물(多勿)이라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단고기>가 다르게 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국 본기>에는 북부여에 대한 기록이 없고, 동부여에 있던 고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스스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때가  B.C 37년으로 주몽의 나이 22세라고 적었다. 즉 B.C 58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19년 후 주몽은 4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백제국본기>에 온조의 왕모인 소서노가 B.C 6년 61세의 나이로 죽는다고 기록했다. 즉 소서노는 B.C 66년생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위의 이 기록들은 김부식이 조상인 신라의 건국년도(B.C 57년)를 고구려의 건국보다 앞서게 하기 위한 고의적인 기록으로 보인다. 고주몽의 나이를 20년 가령 줄임으로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언급하기를, 본기와 다른 <고기>의 내용도 있다고 간단히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의 기록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삼국사기 내용대로라면, 고주몽이 아무리 위대한 군주였다 하더라도 단칸 셋방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단시간 내에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국토를 넓히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자수성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한단고기>의 내용처럼 고주몽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를 물려받았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국사기>의 고주몽 출생년도와 <한단고기>에서 주몽이 북부여의 대통을 잇는 해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김부식이 모든 것을 알고도 신라를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적은 것으로 본다.

두 사서의 기록을 정리해 본다면, 고주몽 성제는 B.C 79년 임인 5월 5일 탄생해서,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B.C 19년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고주몽의 부인이었던 소서노의 사망 나이도 B.C 6년 61세가 아니라 81세 정도로 최소 20년 이상 늘려야 역사의 톱니바퀴가 맞을 것으로 본다. 

김부식은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 B.C37년을 고구려를 세운 연도로 보고 그 이전에는 고주몽이 야인이었다고 고의적으로 적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북부여를 고의적으로 뺌으로서 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고구려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정통성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고주몽 성제의 2,087회 생신인 2008년 올해 6월 8일 단오절에는 국민들이 성제의 탄신년도 즉 나이라도 정확히 알아주었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램이다. 김부식에 의해 고의로 잘못 기록된 고주몽 성제의 탄신년도와 북부여 7대 단군으로의 등극년도와 고구려 건국년도를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배달국 14대 자오지한웅은 치우천왕

배달국(倍達國)은 역년 3,301년의 한인(桓因)시대에 이어 B.C 3897년 건국된 나라로서, 한웅(桓雄)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명칭으로서, 그 도읍한 곳을 신시(神市)라 하며 18세 1,565년을 누렸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의 이름으로,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배달국 14대 한웅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며 청구국(靑丘國)으로 도읍을 옮겨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신 분이다. 치우천왕의 무덤은 현재 중국 산동성 동평(東平)에 있다. 

▲&nbsp;&nbsp;&nbsp;복원중인 치우천왕의 능. 산동성 동평에 있다.


신시의 옛 힘을 받아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알고, 땅을 열어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었다. 온갖 사물의 원리를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그 덕이 미치지 않은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던 우리의 조상이다.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그를 크게 두려워했다.

삼황(三皇)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과 10년 동안 73회를 싸워 번번이 이겼다. 탁록(하북성)의 전투에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조공을 받았다.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 서토(중국)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nbsp;치우천왕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 우리와 근원이 같다.


현재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방의 군신이며,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인 묘족(苗族)의 시조(始祖)이며, 지금의 티벳으로 판명된 장당경(藏唐京)에서 그의 후손들이 800년간 왕 노릇을 했다는 서경보 스님의 설도 있다.

치우천왕은 우리 민족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고대 제왕의 이름으로, 비록 동이계는 아니지만 한(漢)고조 유방이 치우천왕을 군신(軍神)으로 받들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사당에 들러 제를 올렸다 한다. 사기 봉선전에는 “축관에게 명하여 장안에 치우사(蚩尤祠)를 세우도록 하고 사관(祠官), 축관(祝官), 여무(女巫)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nbsp;&nbsp;중국에서 발견된 치우사 표지석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치우천왕에게 제를 올리는 풍속이 생긴 것은 치우천왕이 전쟁에서 연전연승하여 패배를 몰랐고,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도 전부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 측의 기록대로 치우천왕이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혀 죽었다면 어찌 그런 인물을 중국인인 한고조 유방이 군신으로 추앙할 수 있었겠는가! (참고로 치우천왕의 부하 중 치우기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공을 세우려 서두르다가 황제헌원에게 잡혀 죽은 것이 와전되어 사기에 기록된 것이다.) 

▲&nbsp;&nbsp;황제헌원이 사로잡혀 치우천왕 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그림. 김산호화백의 작품이다.


 단오절은 치우천자의 탄신일

고구려 이전에도 단오라는 명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오는 치우천왕의 탄신을 기리는 축제인 명절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날이 고대 배달국의 치우천왕과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은 단오절에 행하는 씨름 등의 여러 행사 내용들이 치우와 연관되어 있는 행사라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nbsp;&nbsp;축구대표팀 서포턴스인 붉은 악마의 상징 치우천왕

 

씨름을 비롯하여 치우를 상징하는 “적령부”라는 부적의 사용 및 단오일을 태양을 상징하는 “수릿날”이라 불렀다는 사실 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충분히 있다. 치우를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중국의 문헌 기록에는 염제(炎帝)와 동일시한 내용도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 붉은색은 행운의 색으로 통용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바람도 축구대표팀의 서포턴스인 붉은 악마가 엠브렘으로 치우천왕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며, 월드컵을 개막한 6월 역시 음력으로 단오절이 들어 있는 5월이었고, 간지로 역시 붉은 색과 같은 임오년 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오년(午年) 오월(午月 5월)로 가장 뜨거운 붉은 색의 간지 오(午)가 두 번 겹쳐 중복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축구대표팀이 치우천왕의 기를 받았기 때문에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겠는가?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시대에도 치우천왕에게 제를 올렸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적혀 있기를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兵主)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武神)으로서 용맹하고 강함의 조상(勇强之祖)이라 할지니, (중략), 이로서 태시(太始)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대대로 치우천왕을 군신 또는 무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명나라가 과대망상소설인 삼국연의를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동방의 군신(東方軍神)의 지위는 관우에게로 넘어간다. 관우는 적장 여몽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린 촉한의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 의해 군신으로 추앙된다. 조선에도 임진왜란 후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關王廟 현 동묘)가 생겼다. 명나라는 건축비용까지 댔다.

조선은 명나라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해 관왕묘에 제사를 올린다. 명나라는 관우의 생일이 5월 5일 단오라고 선전했다. 군신은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센 날에 태어났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나 그건 거짓이었다. “관우의 생일은 5월 5일 단오가 아니라 3월 12일이다.”라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말한다. 이 이야기는 관우 이전의 군신으로 모셔졌던 치우의 탄신일이 단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비록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라 동묘에도 제사를 올리면서, 조상이며 진정한 군신(軍神)에게도 제사를 올렸다. 그 제사의 이름은 둑제(纛祭)로 둑소제(纛所祭)의 준말로 일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고 그리고 무장(武將)들이 임지로 떠가기 전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도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둑제는 대가(大駕)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軍旗祭)라고도 하며, 둑제를 지내는 사당이 바로 둑신묘(纛神廟 또는 둑신祠)로 둑도(纛島) 즉 뚝섬에 있었다. 뚝섬의 유래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뚝방이 있던 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둑제 지낼 때 집사(執事)들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서 예(禮)를 행하는 것이 법도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3년의 기록에 “영안군에게 명하여 둑신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은 모두 무복(武服)의 차림이었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출전하기 전 1593~1595년 1년에 한 차례씩 3차례 둑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선조의 기록에는, 비변사가 아뢰기를 “군사를 출동시킬 적에 둑제(纛祭)를 지내는 것은 고사(古事)이나 다만 출동한 후에 제사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 제사는 기원(祈願)을 고하는 것이니 종묘사직을 버려두고 둑(纛)에만 제사하는 것은 경중의 순서를 잃는 일입니다. 물리어 종묘사직과 함께 제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 하며 전란 증에는 특히 군신인 치우천왕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조선시대 때도 소중히 모셨던 둑신(纛神)은 다름 아닌 군신인 치우천왕인 것이다. 치우천왕만이 이 나라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이렇게 치우천왕께 둑제를 지냈던 것이다. 그렇게 전해 내려오던 둑제가 없어진 것은 바로 일제시대였다. 

▲&nbsp;&nbsp;&nbsp;한재규화백이 그린 동방의 군신 치우천왕.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사라진 치우천왕의 사당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의 특명으로 단군을 신화하하고, 우리 삼국의 역사를 반도내로 몰아넣었고, 민족의 혼을 자르기 위해 많은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뚝섬에 있던 치우천자의 사당인 둑신묘(纛神廟 또는 纛神祠)도 수난을 당하게 된다.

치우천왕의 사당을 부셔버리고 그 자리에는 말을 키우는 장소로 사용하다 나중에 경마장이 들어서게 된다. 일제의 이런 짓은 원구단 자리에 철도호텔을 짓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집어넣고, 남산 국사당자리에 식물원을 만들고, 경희궁을 학교로 사용하는 것과 다 일맥상통하는 행위이다. 다 민족정기를 끊자는 것이었다.

당시 둑신사에는 높이가 6자 길이가 36자나 되는 큰 벽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도 분명 있었는데 그 이후로 종적을 감쳐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일제가 패망 시 가지고 갔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누군가가 깊이 감춘 것 같다. 

▲&nbsp;&nbsp;나라의 상징인 둑기는 8괘로 되어있다. 대장기, 군기, 치우기라고 한다. 태극기의 원형이다.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軍旗祭)를 둑제라고도 하는데 그 대장기 즉 군기(軍旗)가 바로 치우기(蚩尤旗)로 이 깃발이 바로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치우기에는 가운데 음양인 태극이 들어있고 주위로 8괘가 둘러싸고 있었다. 박영효가 일본으로 갈 때 8괘는 너무 많다는 이유로 4괘로 줄여 간 것이 지금의 태극기이다.

예전엔 단오절에 치우부적을 나눠주던 풍습이 있었는데, 그 부적이 둑신묘(둑신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뚝섬 경마장은 과천으로 가버리고 그곳은 현재 시민공원으로 변해있고 성동구청이 관리하고 있다. 현재의 뚝섬이란 지명이 치우천왕을 모시던 둑신사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가 단오절을 취재하기 위해 성동구청.서울시청.문화재청 등 여러 군데 전화를 해 보았으나 관련 공무원조차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필자가 묻기를 “아니 어떻게 그런 걸 몰라요?”하니, “우리는 국가에서 알리라는 최근의 현대사에 대해서만 홍보하지, 건국 이전의 일제시대 것은 모른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이걸 대답이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 잘났다고 앉아 있는 공무원들 정말이지 정신 차려야 한다.

또 문화재청의 한 공무원은 “우린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관리한다. 둑신사가 예전에 문화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 말대로 현재는 없어졌다고 하니 실존 문화재가 아닌 모양이다. 그럼 우리하고 상관없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참으로 자~알난 문화재청이다.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손자인 이건무가 수장으로 있는 기관인데 오직 하겠는가!

이건 모두 정부의 잘못으로, 정부가 제대로 우리 역사를 복원하지 않고 민족사를 교육시키지 않은 결과이다. 뚝섬의 유래나 태극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둑기(纛旗) 등은 국민들이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이다. 치우천자를 마치 도깨비로나 취급하고 중국의 조상으로 알고 있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정부는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붉은 악마라도 있어 치우천왕의 존재를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nbsp;&nbsp;중국의 삼조당에 모셔져 있는 치우천왕. 왼쪽부터 치우천자, 황제헌원, 염제신농은 다 동이족이다. 중국은 우리 동이의 조상을 자기네 조상으로 다 빼앗아 갔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치우천왕이&nbsp;우리의 조상인지 모르고 있다.

 
치우천왕은 동화 속의 도깨비가 아니고, 실존 인물로 배달국 14대 자오지 한웅이며, 동방의 군신으로 불패(不敗)의 전신(戰神)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렇듯 자랑스러운 조상을 자기 조상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실을 국민들에게 홍보나 교육을 하지 않고 있는 잘못된 정부의 책임이다. 정부의 역사관련 공무원들은 다 조상님들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들고 반성해야 한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 때 중국과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 역사를 이제는 되찾아 복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엉터리 국사 이론이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으며, 그걸 그대로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의 일개 지방정부인가 아니면 중국의 제후국 정부인가?

금년 6월 8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절로 바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인 치우천왕과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이거늘, 이 사실을 아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단오절이 중국인 굴원을 기리는 축제라고 말하고 있다. 왜 정부는 중국과 일본에게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가!

숭례문이 불타던 당시 숭례문에는 상시관리인이 상주하지 않았다. 그런데 치욕의 역사 현장인 동묘에는 관리사무소까지 두고 관리를 했다. 얼마 전 가짜 군신인 관우의 사당인 동묘는 많은 예산을 들여 보수 단장했다. 진짜 군신인 치우천자를 모시던 둑신사는 복원 계획조차 없는 정부가 역사인식(정신)이 제대로 박힌 정부라 할 수 있겠는가! 썩은 정신을 가지고는 잘못된 정치 밖에 못하는 것이 만고의 이치인 것이다. 
 
단오절 특집으로 이러한 사실을 몇 번만 방송해도 전 국민들이 다 알게 되건만, 이런 쉬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정부와 언론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이제는 잃어버린 역사복원에 정부와 언론이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송고시간2017-10-27 15:48

강원도 삼척 흥전리 절터에서 나온 귀면와.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치우는 마구잡이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살해하고, 오만하고, 사악하고, 난을 일으켰으며, 빼앗고 도둑질을 하여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중국의 요순시대부터 주나라 시기까지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상서'(尙書)의 일부인 주서(周書) 여형(呂形) 편에는 치우(蚩尤)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재앙을 뜻하는 '치'(蚩)와 욕심을 의미하는 '우'(尤)가 결합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치우는 한족(漢族)에 대항한 악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 인물인 치우가 현대에 갑작스럽게 환생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옆 나라인 한국에서도 치우가 민족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심지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한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가 치우를 형상화해 만들어졌다는 말도 나왔다.

중국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한 김인희 박사가 쓴 신간 '치우, 오래된 역사병'은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우 환생의 과정을 조명하고, 치우의 실체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과 한국에서 치우를 선조로 모시는 견해가 회자하기 시작한 시기는 모두 1990년대다.

그는 일단 중국에서는 1989년 발생한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지향하는 민족주의의 형태가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까지는 민족의 해방이 목적이었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중화주의에 치우쳐 '천하주의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태곳적 전설의 제왕인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를 시조로 내세웠는데, 소수민족인 먀오족이 치우를 선조로 주장하자 소수민족 통합 차원에서 중국 전체의 조상으로 승격시켰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한민족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치우가 어떻게 한국의 조상으로 등장했을까.

치우는 주류사학계에서 위서로 간주하는 환단고기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문헌과 귀면와(鬼面瓦)를 근거로 한국의 민족적 뿌리가 치우이고, 고대에 치우가 중국 중원에서 벌인 싸움은 한민족의 영토가 그만큼 넓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과 중국에서 공히 치우는 민족주의에 이용됐다고 지적한다. 마음대로 쓰는 역사인 '심사'(心史)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집단기억의 강화와 구조적 망각으로 역사를 만드는 이러한 현상을 '역사병'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치우는 케케묵은 신화 전설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역사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며 양국이 모두 '역사과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푸른역사. 368쪽. 2만원.

psh59@yna.co.kr

 

 

 

중앙일보 입력 2015.04.20 15:31 업데이트 2015.04.20 15:31

[백가쟁명:유주열]뚝섬에서 만난 치우왕(蚩尤王) | 중앙일보 (joongang.co.kr)

 

[백가쟁명:유주열]뚝섬에서 만난 치우왕(蚩尤王) | 중앙일보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통치이념은 중화민족의 부흥 즉 중국의 꿈(中國夢)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몽과 함께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軒轅)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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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통치이념은 중화민족의 부흥 즉 중국의 꿈(中國夢)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몽과 함께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軒轅)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신화의 영역에 속했던 황제 헌원의 이야기를 고고학의 발달을 근거로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우월적인 중화민족(華)과 그렇지 못한 주변민족(夷)간의 이른바 화이(華夷)를 엄격히 구분하는 화이질서(華夷秩序)를 구축하였다. 그 구분을 지어 준 영웅이 황제 헌원으로 보고있다.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북쪽으로 300km 정도 가면 황제릉(黃帝陵)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는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蚩尤)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어셨다” 라는 문구가 있다. 매년 황제릉을 찾아 참배하는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지 모른다.
사마천(司馬天)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 고대에는 2차례 문명의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린 치열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잔혹성을 묘사하여 “들판에는 피가 백리나 흘렀고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 다녔다”는 과장된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 훤원은 2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초대 천자(天子)로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허베이성(河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의 경계에 위치하는 장자커우(張家口) 인근의 반취안(阪泉 판천)에 일어난 반취안 전쟁은 황제 헌원(軒轅)이 이끄는 중화민족이 복희 여와 염제(신농)으로 이어지는 고대 삼황 부족과의 전쟁이었다. 황제 훤원은 화이(華夷) 혼합민족을 이끌고 있는 삼황부족의 최후의 왕인 염제와 반취안 전쟁을 통하여 승리한다.
삼황부족을 제압한 황제 헌원의 마지막 라이발은 산동성의 동이(東夷)족을 통솔하는 치우였다. 치우는 삼황부족의 잔존 민족과 구려족(九黎族) 등 80여개의 변방 민족을 결속시켜 세력을 과시하였다. 장소는 반취안 인근의 줘루(탁록 ?鹿) 지방이다.
황제 헌원은 줘루전쟁에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막강한 치우세력을 격파하였다. 치우 세력이 패배하자 구려족이 분산되어 남방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묘(苗)족 려(黎)족 등이 되었고 치우의 세 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중 한 아들이 동북으로 달아나 지금 한반도인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줘루 전쟁에서 치우는 망했지만 싸움을 잘하는 치우왕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진시황은 치우의 사당을 만들었고 유방도 항우와 싸우기 전에 반드시 치우왕에게 무공을 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치우왕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그가 동이족으로 분류되어 단군의 선조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한반도에서도 치우왕을 전쟁의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무장들은 출진하기 전에 반드시 치우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도 치우사당에서 제사지낸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 한반도에는 치우사당이 많았다. 서울에서 치우왕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 성수동에 있는 뚝섬이다. 뚝섬은 본래 한강과 중량천에 둘러싸인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일시 섬이 되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무장 출신이라 새로 도읍을 정한 한양에 사냥터가 필요했다. 그는 지금의 뚝섬에 치우사당을 지어놓고 치우왕을 상징하는 치우기(纛旗 독기)로 치우사당을 표시하였다. 독기에는 검은 쇠꼬리나 꿩 꼭지 털로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고 한다. 뚝섬은 본래 독기가 있는 섬을 의미하는 독도(纛島)가 뚝도 뚝섬으로 변형되었다. 지금의 뚝섬은 치우사당이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은 이곳을 사냥터로 정해 놓고 신하들이 활을 쏘게 하고 직접사열을 하여 무예를 연마했다. ‘화살곶이벌’ ‘살곶이(箭串)벌’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이곳 사냥터에서 나왔다. 이러한 전통으로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은 뚝섬에 나와 사냥을 겸하여 무예를 익히고 갑옷차림으로 치우사당에 치우제(纛神祭 독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홍수로 유실되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치우사당에는 치우왕이 황제 헌원이 싸웠던 ‘탁록 전투도’가 걸려 있었다. 치우왕은 전쟁에 패배하여 천하의 맹주가 되지 못했지만 황제 헌원의 후손인 중화민족을 제외한 주변의 소수 민족 즉 동북아시아 지역의 여러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에서 치우왕의 스토리가 남아 있는 뚝섬에 치우사당을 복원하고 내친 김에 황제릉과 같은 ‘치우릉(蚩尤陵)’을 조성한다면 어떨까. 중화민족 이외의 치우왕 후손들인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치우사당에는 황제와 치우의 대전인 ‘탁록전투도’를 그려 놓으면 요우커(遊客)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자녀들에게는 광활한 중국을 무대로 천하를 다투어 싸운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상상력을 키워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줘루(탁록)전쟁의 최종 승리자인 황제 헌원은 자신을 포함 후손인 전욱, 곡, 요, 순 등 5제 시대를 연다. 마지막 순(舜)임금의 신하 중에 우(禹)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하 치수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도 돌보지 않고 양서류처럼 항상 물과 가까이 하면서 치수사업을 성공시킨다. 후에 순임금의 천거로 왕이 된 우는 새로운 국가 하(夏)를 창건한다. 기원전 2070년경이다.
중국은 중국몽의 장기포석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내 세우고 있다. 육지와 해양의 신 실크로드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둔화되고 있는 경제성장을 밖에서 끌어 오겠다는 발상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금융지원을 위해 57개국을 창립회원국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한다. 중화민족(華)이 주변민족(夷)과 협력 동반성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중국몽은 황제와 치우왕의 구분을 통하여 화이질서를 강조했지만 새로운 중국몽은 황제와 치우왕 후손들의 화이공영(華夷共? 윈.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중국몽은 화이협력(華夷協力)의 신시대가 필요하다.

 

 

기사입력 2012/11/15 [14:19]

배달국 치우천황의 ‘청동검’이 ‘본국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가, 중국-일본무술의 복사판인가-(1편):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배달국 치우천황의 ‘청동검’이 ‘본국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가, 중국-일본

[역사=플러스코리아]리복재기자=어느민족이건그민족을대표하는전통무예가있다.그러나우리에게대표하는무예가어떤것인가하고어리둥절하게만든다.바

www.pluskorea.net

 

 

 

중앙선데이 입력 2020.12.05 00:21

반란·수난의 민족…‘치우’ 조상설로 무모한 역사 리모델링 | 중앙일보 (joongang.co.kr)

 

반란·수난의 민족…‘치우’ 조상설로 무모한 역사 리모델링 | 중앙일보

940여 만명, 중국서 네 번째 큰 민족 . 중국의 먀오족 인구는 940여 만(2010년)으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네 번째로 많다. "우리 먀오족이 중화민족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치우의 후손이지 염제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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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먀오족

구이저우성 카이리시 외곽에 있는 시장이라는 먀오족(苗族) 마을. [사진 윤태옥]

산등성이에 올라 맞은편을 바라보면 집집마다 하나씩 내건 백열등이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야경. 힘들게 올라온 산등성이의 허름한 식당 평상에 백숙 한 냄비 끓여 놓고 백주 한잔 곁들이면, 나의 십수 년 중국 여행 가운데 최고의 한 장면이 완성된다. 구이저우성 카이리시 외곽에 있는 시장(西江)이라는 먀오족(苗族) 마을이다.

구이저우 동남부의 바사(岜沙)와 후난성 서부 봉황고성(鳳凰古城)도 잊을 수 없는 먀오족 마을이다. 바사의 먀오족은 오래도록 사냥을 생업으로 살아왔다. 이 마을 남자들은 지금도 구식 사냥총을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닌다. 봉황고성은 강변에 밀집된 조각루라는 이 지역 특유의 전통적인 살림집들의 야경이 유명하다. 급경사에 붙이듯 지은 집이라 경사면 아래로 몸체를 받쳐 촘촘하게 세운 나무 기둥(弔脚)이 독특하다. 이 기둥의 경관조명이 환상적이다. 여행으로는 매혹적이지만 그들이 견뎌 온 수난의 세월과 오늘의 민족사 서술을 들여다보면 역사란 무엇인지 새삼 되짚게 된다.

940여 만명, 중국서 네 번째 큰 민족

먀오족이 조상으로 여기는 치우. 한국응원단 붉은악마가 사용하는 도깨비의 원형이다. [사진 윤태옥]

중국의 먀오족 인구는 940여 만(2010년)으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네 번째로 많다.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미주에 걸쳐 300여 만이 더 있다고 하니 ‘지구촌 소수민족’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넓게 퍼져 사는 먀오족의 역사는 수난으로 점철됐다. 애초에 버거운 변방 생존의 노고 위에 중원의 압박에 시달리는 역사가 수천 년 이어져 왔다. 스스로 거두는 물산은 부족한데 황제와 관리들이 걷어 가는 세금은 가혹했다. 저항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집단으로 생사가 엇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먀오족은 문헌상으로는 송대부터 나타난다. 송대와 원대 중앙의 통치력은 구이저우, 윈난, 티베트 등 서남방 산골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토착민의 수장을 토사(土司)로 임명하여 간접 통치를 하는 정도였다. 먀오족도 마찬가지. 그러다가 원나라가 기울고 명나라가 일어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명나라는 원의 잔여세력인 양왕(梁王)과 서남의 토착민이었던 단(段)씨 세력을 정벌하기 위해 1381년 30만 대군을 보냈다. 명군이 구이저우와 윈난으로 들이닥치면서 먀오족을 포함한 토착민들은 무지막지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먀오족의 수난은 청대에 극심했다. 청조는 토사 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중앙관리를 보내 직접 통치하는 강경책(改土歸流)을 폈다. 먀오족은 이에 반발했다. 강희제가 1703년 보낸 군대는 먀오족 40만여 명을 죽였고 300개 마을을 불태웠다. 옹정 연간에는 가혹한 세금과 정치적 박해로 인해 포리(包利)와 홍은(紅銀)이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30만이 주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1855~72년 장수미(張秀眉)와 양대륙(楊大六)이 과도한 군량 징수에 반발하여 먀오족 최대 최장의 항전을 일으켰다. 17년 항전의 결과는 역시 참극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먀오족의 반란은 다섯 차례나 더 있었다. 중원의 권력에 순치되지 않는 저항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난과 저항의 역사 그 이전의 고대사 내지 중고사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먀오족 마을에 들어가면 작은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그들 스스로 말하는 먀오족의 역사를 읽어 볼 수 있다. 송대 이전의 고대사는 먀오족-남만-삼묘-구려(동이)-치우(蚩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목에서 내 눈길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구려와 치우’라니.

먀오족의 복장. [사진 윤태옥]

치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고대사 인물이다. 대한민국 응원단 붉은 악마의 엠블럼에 그려진 도깨비의 원형이었다. 현대 먀오족의 역사가들은 치우가 이끌던 동이족의 일부가 남으로 이동하여 자신들의 선조가 됐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것이 역사학으로 충분히 논증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과 『치우, 오래된 역사병』의 저자인 김인희 박사는 먀오족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김 박사는 춘추-전국-한대-당송-청대-중화민국까지, 문헌상의 치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신중국에서 치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치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상당한 변신과 비약을 거듭해 왔다는 것이다.

치우는 춘추시대 문헌자료에서는 ‘상서-여형’편에서 황제(皇帝)와 전쟁을 한 인물로 등장한다. 전국시대 문헌에서는 기주 또는 탁록에서 황제(黃帝)와 전쟁을 한 인물로 출연한다. 한대에 들어 사마천이 『사기-오제본기』에서 황제를 모든 제왕의 시조로 선정하면서, 황제와 맞섰던 치우는 비중이 큰 악인으로 설정됐다. 사마천 이후에는 치우가 악인이라는 관념이 강화됐다. 치우는 청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근대 혁명파 지식인에 의해 조연으로 다시 소환됐다. 국가는 민족이 있어야 하고, 민족은 조상이 있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황제(黃帝)가 전체 한족의 조상으로 승격되고, 황제에 대적했다는 치우도 함께 주목받게 됐다.

역사 이용 편협한 애국주의 씁쓸

먀오족의 전통 민속 행사. [사진 윤태옥]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황제와 치우의 선악 대치관계는 새로운 방식으로 리모델링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먀오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사를 쓰기 시작했다. 과거사에서나 현실에서나 가난과 고난에 시달려온 먀오족은 민족적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오래된 역사와 위대한 조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인접한 주변의 역사를 꿰맞춰 먀오족-남만-삼묘-구려-치우라는 연결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치우는 현대 먀오족의 새로운 역사 기술에 등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신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후 빈부격차로 인해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도포하기 시작했다. 한족만이 아닌 중국인 전체를 중화민족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조상으로 염제와 황제를 강조해 왔다. 염황에 대한 역사연구를 지원하고 다양한 기념활동을 전개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도입한 애국주의 사상교육도 가속페달이 됐다. 중국 곳곳에 염제와 황제의 상이 세워지고, 사당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 홍군 출신의 먀오족 학자 천징(陳靖)은 허난성 정저우의 염황 거상과 허베이성 탁록현의 황제사당 건립계획을 알고는 국무원 등에 심각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우리 먀오족이 중화민족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치우의 후손이지 염제 황제의 후손은 아니다. 만약 중국이 염황의 상을 세우고 치우를 악인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중화민족에서 마음이 떠나게 될 것이다.”

학술토론회에서는 염황에 치우까지 합친 ‘염황치 삼조’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민족분열에 대단히 민감한 신중국은 먀오족의 항변에 학술이 아닌 정치로 조응한 것이다. 그 결과 허베이성 탁록현에 치우와 염제 황제를 한 자리에 모은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건립됐다.

신중국의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저항적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김인희 박사는 역사를 이용해 배타적 민족주의나 편협한 애국주의로 기울어가는 경향을 니체를 인용하여 ‘역사병’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치우는 중국에서 역사병의 하나로 굳어지는 것 같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환국배달조선이 학계에서 부정당하는 이유, 왜 유대민족의 선민사상은 인정하면서 배달의 선민사상은 부정하는가, 박석재박사

2018. 12. 21.

https://youtu.be/5Ekd8r2TIOE?list=PLRAmvpNm4pmlK0pL_6QCe3gXPm9VfISJz 

 

 

안녕하세요. 배달국 14세 환웅 치우천황에 대해 알려드립니다ㅣ치우천황총정리

https://youtu.be/n0cC-yySuQw?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신주사기] 세계 최초 중국 시조 계보도를 밝히다 | 사마천이 삭제한 김유신 시조 소호김천씨

2020. 6. 23.

https://youtu.be/q54Ml2JBQBA?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

 

 

 

<참고자료>

 

개국의 시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환웅과 사서기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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