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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배달국시대/신시배달국

2. 신시배달국의 강역

대야발 2023. 11. 1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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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마고문화를 계승하여 유라시아 초원과 만주를 연결하는 요하지역에 꽃핀 배달문명
 

 

 

1. 현인류의 시원 마고문명의 중심지는 1만년 전 육지였던 서해지역
 

 

세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동북아시아 개들이다(미국 생물교과서). 그러면 동북아시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누구인가? 그건 마고문명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서해지역 진도의 진돗개로, 영리하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대한민국 명견인 진돗개는 동북아시아 개들의 DNA를 모두 가지고 있다. 고대 한국인들의 서쪽으로 이동하여 건설한 이집트(아이집터) 피라미드 벽화에도 개가면 그림이나 개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대에 한국인들이 이동하면서 개들을 사육하여 사냥에 이용하고 육식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문명의 특성과 동일한 중국의 요하문명 또한 1만년 전 중국과 한반도 연결되어 육지였던(호주 시드니 대학 지질학과 연구결과 보고서 내용) 서해지역의 마고문명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고는 여성통치자다.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요하문명의 특징도 마고를 상징하는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문화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고인돌과 지리산에서도 마고전설이 서려 있다.

 


 

 

 

 

 

한반도와 연결되는 '발해연안벨트문명'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홍산배달문명이 존재하는 요하지역은 한인 한국과 한웅 배달국의 문명중심지로 중심산은 천산과 태백산이였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성을 중앙 아시아 지역 파미르 고원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건 잘못된 논리다. 마고성은 서해지역에 존재했으며 마고성에서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간 사람이 한인씨의 조상인 황궁씨임으로 서해지역의 마고성 북쪽이면 정확히 요하지역의 천산이며, 요하문명은 고고학적으로도 이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문명의 생명수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삼족오 설화와 관련한 천제 준이 살았다는 대황지역에 속하는 압록강지역에는 환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2. 고산숭배신앙을 가진 고대 한국인들의 나라 한국과 배달국의 역사활동의 중심지역

 

 

 

 

 

 


서해 마고지역이 바다가 되면서 마고 대다수는 거리가 가깝고 땅이 비옥한 한반도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한(환)을 의미하는 태양숭배와 모계중심의 마고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정착하였다. 그래서 단군3조선 중에서 한반도지역을 마한.마조선이라고 불리운 것이다.그리고 훗날 부여(고구려.백제),흉노.선비족(신라.가야) 등 기마부대를 통하여 한반도.일본지역의 마한족을 지배하게 되는 북방계 한국인들의 조상이 되는 황궁씨는 북쪽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여 요하를 거쳐 바이칼호수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온화했던 시베리아 지역의 날씨가 추워지자 다시 남하하여 조상인 황궁.유인씨의 터전인 요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모계중심의 마고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던 곰족과 융합하여 배달문명을 낳고 단군조선을 낳은 것이다.

 

 

고대로부터 한국인들에게 있어 높은 산은 광명의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태양과 비를 내리는 하늘과 통하는 장소로 생각되어 제사를 지내는 지성소였다. 동북아시아인들의 고산숭배가 여기서 나왔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아즈텍 등 사막이나 평지로 이동하여 살게 된 한국인들은 산이 없기 때문에 피라미드나 지구라트를 만들어 제천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단군조선이전에 배달문명이 자리한 요하지역를 역사의 중심무대로 삼고 있었던 배달국과 한국의 중심산은 요하지역의 천산.태백산이었지 백두산은 아니였다.
 


한인씨가 살고 있던 파나루산은 천산(하늘산)으로 지금의 요하지역의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선비족의 동족인 오한족의 근거지가 되는 오한산(烏桓山)이라고도 했다. 서한산의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泓池水)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홍지수가 홍익인간의 뿌리라는 의미일까?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기원전 200년의 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래로 동북방 지역을 역사활동무대로 삼았던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단군조선 이래 요서지역의 번조선이 위만세력과 한나라에게 붕괴되고 진시황의 진나라와 한무제의 한나라의 동방진출로 인하여 요서.요하지역의 단군조선유민들이 백두산과 가까운 동북 만주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요하지역의 천산과 태백산을 대신하여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고려출신의 신라왕족의 후손인 김함보 후예의 나라인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정계비).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지금의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요하지역(흑수.백산)으로 이주해 온 한인씨.한웅씨


 
[한단고기]에 보면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지금의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의 요지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한인씨가 흑수 백산의 땅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단고기]는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 한국이 있는데, 모두 12나라며, 동서 2만리 남북5만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바이칼 호수 동쪽에 위치한 한국의 중심지는 파나루산(하늘산=한산)아래 요하지역에 위치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인씨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기후변화로 인하여 남하하여 요하지역에 중심지을 정하여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문명을 일으켰으며 유라시아-아메리카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 한인.한웅족이 시베리아.바이칼호수에서 남하하여 터전을 삼은 역사활동의 중심지 요하지역

 

 

 


계속해서 한웅씨의 이주와 배달국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자.

 

 

"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한인=광명신을 받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내용을 보면 한웅씨족은 한인씨족임을 알 수 있고 교통의 중심지를 천평으로 정하니 천평이 바로 청구라는 것이며, 신시를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달민족이라고 할 때는 한웅의 배달국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며 단군민족이라고 할 때는 단군한국조선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니 한인의 한국민족이나 한웅의 배달민족이나 단군의 단군민족이나 조선민족이나 모두 동일한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한겨레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인씨의 터전은 바이칼 호수와 몽골초원을 통하여 완만한 홍안령 산맥을 넘어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오기 전까지는 기후가 온화해서 유목생활하기가 좋았던 시베리아 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고, 기후가 추워지자 따뜻한 남쪽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종족이 바로 한인씨의 후예 한웅족임을 알 수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중국 황하문명의 근원이며, 이집트.아즈텍 피라미드 연대보다 1천년이 훨씬 넘는 초기 석석총들이 널려 있고,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문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하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요하지역이 한웅족이 정착한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닌 요하지역의 태백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산지역은 서해지역에 위치한 마고성이 점점 바다가 되면서 마고족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질 때에서 마고의 율려를 반드시 회복하겠다며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이주하여 도를 닦았다는 황궁씨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양심의 자유율법(율려)이 통했던 마고시대의 도맥을 계승한 황궁씨는 유인씨의 조상이고 유인씨는 한인씨의 조상이다. 율려국가란 예컨대 주인없는 가게라도 양심적으로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 가는 사람들의 나라를 의미한다.

 


 
3. 고고학적 사료(위서로 취급받는 '한단고기'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한인씨의 한국의 중심지역과 관련한 파나루산이 있던 부하진은 인류 최초의 복골(卜骨)이 출현한 유적지가 있다. bc3300년의 유적이라고 밝혀졌으니 은나라의 복골은 이보다 1000년 뒤의 것이다.

 

 

또한 주변 고성터의 흔적을 보면 bc3300년 이전의 유물과 유적 발견도 기대된다. 뒤에 흉노에 패망한 동호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환산, 혹은 선비산이라고도 하였다. 

 

선비족이 터전으로 삼은 오환산주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한인씨가 한국의 중심지로 삼았을 지역의 실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단고기]에 기록된 한인족이 살았다는 파나류산 모습이다. 한인족이 거주했을 파나루산(하늘산=천산)은 지금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흉노족에게 패망하여 도주한 선비족이 살았던 오환산이라고도 한다. 파나루산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한웅이 강림한 요하지역의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1000년 전 화산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에 "세상에서 건국이 가장 오래 된 한국은 동서2만리 남북5만리로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 있는데 모두 12나라의 연방국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천해면 바이칼 호수이고 바이칼 호수 동쪽지역에 한국의 중심지역에 존재하는데 파나루산 아래라고 명기되어 있으니 지금의 요하지역이라 할수 있다. 서해 마고문명을 계승한 요하지역은 1만년이후 한반도문명과 함께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에 문명을 전파하는 문명의 젖줄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요하지역으로 들어와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다. 이 대광정자산이 태백산 혹은 불함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한검이 나라를 개국한 곳도 바로 불함산이였다. [한단고기]는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단군한검이 불함산(태백산)에 올라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개국을 선포한 낸 후에 첫 도읍지로 삼았다는 아사달 또한 한국과 배달국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요하지역의 조양(아침태양=아사달)이였다. 조양지역은 고고학적으로 단군조선의 상징인 비파청동검이 최대로 발굴되는 지역이다. 따라서 조양은 옛 조선의 도읍지라는 중국문헌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지역이다.

 

 

 

 

▲ 환웅천황의 신시 아사달(백악산 아사달) 위치. 한웅천황이 배달국을 개국한 후에 첫 도읍지로 삼았던 신시 아사달은 색불루가 쿠테타를 일으켜 22대 단군천황에 올랐던 백악산 아사달이라고도 한다. 옆에는 해모수가 부여를 일으킨 웅심산이 있다. 고열가 단군57년,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는데,그 조상은 고리국(藁離國=句麗國) 사람이다. 해모수는 은밀히 수유족(須臾) 과 내통하여 옛 도읍지 백악산(白岳山) 아사달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임검이라 칭했다.웅심산(熊心山)은 지금의 서란(舒蘭)으로 길림성 영길현의 서북방향이며, 나목하의 지류인 잡분하의 동쪽지역이다. 

 

 

 


커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 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 천평으로 옮겨갔다.

 

 

한웅족과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태백산(불함산)이 한웅천황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마고문화를 유지하는 웅녀족과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족도 환웅족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 곳에 살던 기존의 호족(예穢족=호랑이 토템족)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 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족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세계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족과 곰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피라미드형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들 © 윤복현 저널리스트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玉[]), 옥고형기(玉[]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陳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배달국의 녹도문자에서 유래한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한국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요하지역의 홍산배달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한반도지역을 기원으로 두어야 하는 유물로써 한반도를 출발점으로 유라시아 지역에 분포된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 있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역시 한반도 마한인들의 특징으로써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용,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역시 한반도 마한인들의 고인돌양식과 동일한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네번째 특징인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한국인들의 특징인 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다섯번째 또한 한반도지역에 분포한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바로 바다와 강에서 고기를 잡던 1만년이전의 마고족들이 한반도와 요하지역으로 이동하여 어로활동을 바위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요하지역의 암각화는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암각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사슴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내려오기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한웅족의 먹이의 상징이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狼이다.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암각화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족이 마고족에 해당하는 곰족의 요하지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증거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하지역의 홍산배달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유네스코는 한반도-만주를 '문명시원지'로 공식화해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10/05

 

 

 

<참고자료>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co.kr. 2019.08.01

 

 

 

단군넘어 한웅, 중국요서 우하량에 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8.07.09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3/17

 

 

 

청구국의 강역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분자인류학논단 | 청구[靑丘] - Daum 카페

 

 

 

한국고대사 | 삼위태백(三危太伯)과 태백산(太白山)에 대한 간략정리 - Daum 카페

 

 

 

백두산 서쪽 제천 유적의 발견 통화 만발발자 유적ㅣ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온 기록과 일치ㅣ정경희 교수의 놀라운 연구

https://youtu.be/VJT_4OVxFS0?list=PLRAmvpNm4pmk-9thWqaZWsYbtqUc1oh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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