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지입력 2021. 7. 2. 12:28수정 2021. 7. 2. 16:06

 

 

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1년 7월 2일 (금요일)

□ 진행 : 최형진 아나운서

□ 출연 : 옥영정 한국학 중앙연구원 고문헌 관리학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최형진 아나운서(이하 최형진): 얼마 전 인사동 인근에서 금속활자가 대거 발견됐다는 소식 들으셨죠. 학계에서는 제대로 인정되면 역사가 바뀔 정도로 뜻깊은 상황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동안 금속활자와 관련된 유물은 직지가 가장 먼저였는데, 어떻게 다른 건지, 또, 한글이라고는 하는데 생소한 글자가 많아서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궁금하셨던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 들어보려고 합니다. 함께 말씀 나눌 분 모셔보죠. 옥영정 한국학 중앙연구원 고 문헌 관리학 교수 전화연결 돼있습니다. 안녕하세요?

◆ 옥영정 교수(이하 옥영정): 네, 안녕하세요.

◇ 최형진: 먼저 발견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에 함께 계셨습니까?

◆ 옥영정: 네, 그렇습니다.

◇ 최형진: 그 자리에서 서지학 전공자들에게는 뜻깊은 사건이다, 이런 소감을 얘기 하셨었는데, 약간 생소한 학문이라 먼저 여쭤봅니다. 서지학이 뭔가요?

◆ 옥영정: 서지학은 책 서(書)자, 그리고 기록할 기(誌)자, 해서 한 마디로 얘기하면 책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요즘 책도 있고 옛날 책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주로 옛날 책, 옛 고(古)자가 붙죠. 그래서 고서지학이란 얘기를 많이 합니다.

◇ 최형진: 고서지학, 이번에 역사가 바뀔 정도의 뜻깊은 발굴로 평가되고 있는데요. 해당 제작 시대에 만들어진 금속활자가 그렇게 귀한 겁니까?

◆ 옥영정: 예, 정말 귀한 겁니다. 전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동안. 그게 왜 그러냐하면, 우리나라가 금속활자를 처음에 창안해서 만들고 했을 때, 금속활자 종류가 수십 가지가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냥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계속 책을 찍어내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는 녹여서 없애고 다른 활자를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녹여서 없애도 또 만들고 그러다가 남아 있는 것 일부는, 임진왜란이란 큰 전쟁이 있었죠. 그때 다 없어져 버리고, 일본으로 약탈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 것이 남아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임진왜란이란 큰 전쟁으로 없어진 건줄 알았는데 이제 지금 남아서 이렇게 전해진 겁니다.

 

◇ 최형진: 굉장히 의미가 있는 발굴이고, 이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최초 한글금속활자인데요. 당시에는 동이 귀하지 않았어요?

◆ 옥영정: 맞습니다. 동도 귀했고, 금속 중에서 동이 지금도 귀한 편이지만, 그 당시에도 굉장히 귀한 금속이었습니다.

◇ 최형진: 이번에 발견된 장소를 보니까, 일반인이 살았던 지역으로 확인이 되는데, 이게 왜 여기서 나온 겁니까? 혹시 밝혀진 게 있나요?

◆ 옥영정: 아직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고요. 추적만 지금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 당시의 발굴단 얘기로는 민가인데, 아마도 그걸 갈무리 해놨다가 모아뒀다가 나중에 어디에 쓰려고 항아리 같은 데 담아뒀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녹여서 쓰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 최형진: 녹여서 쓰려고 했습니다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거죠?

◆ 옥영정: 그렇습니다.

◇ 최형진: 언제 누가 묻었는지도 전혀 밝혀진 바는 없겠네요?

◆ 옥영정: 네, 없죠.

◇ 최형진: 교수님 연구하시는 동안 이 정도의 발굴이 있었습니까?

◆ 옥영정: 근래에 들면, 북한에 고려 개성 만월대 유적 있습니다. 북한의 궁궐, 고려 시대 궁궐이죠. 거기서 고려 금속활자가 발견되기도 했죠. 그게 땅을 파서 나온 사례로써는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고, 그 다음에 그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활자가 발굴은 아니지만 전달된 게 아직까지도 규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온 게 있는데 그것은 그거와는 달리 기록도 정확하게 왜 만들었고 언제 만들었고 누가 만들었고, 그리고 얼마나 만들었고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대로 지금 나온 거죠. 그래서 의미가 큰 겁니다.

◇ 최형진: 한글 창제 당시 세종대왕이 인쇄기술 발달에 힘썼지 않습니까. 세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 옥영정: 네, 그렇습니다. 그게 한글 활자 모양이 자세히 보시면, 지금 우리 같은 한글하고는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당시 창제 당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지금도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보면 그런 모양의 글자들을 확인할 수가 있죠. 그 모양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에 의미가 큰 겁니다.

◇ 최형진: 우리가 금속 활자라고 하면 저도 이쪽에는 지식이 많이 없습니다만, 구텐베르크의 인쇄를 많이 기억하시는데, 구텐베르크보다 조선의 인쇄가 빠른 겁니까?

◆ 옥영정: 맞습니다. 보통 우리가 구텐베르크 활자 인쇄술을 얘기하면 그게 전 세계적으로 세계 역사를 바꾼 발명품 랭킹 1위라 그러기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이제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반대쪽에 있던 우리나라 동양에 인쇄 활자가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서양에서 제대로 안 알려져 가지고 계속해서 그렇게 되는 건데, 실제 연도를 보면 그렇습니다. 1450년경이 구텐베르크가 활자인쇄를 발명해서 거기서 인쇄를 시작했던 시점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때는 이미 활자가 세종 때 이미 한네다섯 종 정도가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물론 고려시대가지 올라가면 훨씬 더 올라가죠.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건 145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활자가 나왔다는 거죠. 그래서 구텐베르크보다 더 이른 시기의 것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 최형진: 굉장히 자랑스럽네요. 조금 전에 몇 가지 글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글자가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지?', 이런 글자가 굉장히 많았는데요.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발굴된 한글 활자를 보면 'ㅇ'위에 'ㅁ'이 올려진 활자가 있더라고요.

◆ 옥영정: 일명 그걸 순경음이라고 하는데요. 한글로 풀면 입술 순(脣)자입니다. 그래서 입술가벼운소리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래서 그걸 'ㅂ', 'ㅁ', 'ㅍ', 이런 글자들에 'ㅇ'이 붙어가지고 일반적인 'ㅂ'보다 발음을 연하게, 약하게 하는 소리를 내는 겁니다.

◇ 최형진: 그럼 애청자 분들이 조금 헷갈릴 것 같은데 쉽게 말하면, 동그라미 위에 네모가 올려진 글자(ㅱ)는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옥영정: '므'라고 하죠. 'ㅁ'을 입술을 탁 붙였다가 떼면서 '믐'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좀 더 가볍게, '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굉장히 어렵죠.

◇ 최형진: 쉽지 않은데요?

◆ 옥영정: 이 발음하기도 어렵고 하니까 후대로 가면 갈수록 이 글자들이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안 쓰이게 됩니다. 원래 이 글자를 표기한 이유는 중국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기 위해서 그걸 정확하게 우리가, 웬만한 발음은 전 세계의 어떤 언어든 우리나라 발음기호로 다 발음을 할 수 있는 거죠. 훈민정음이 위대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거죠.

◇ 최형진: 그러면 'ㅇ' 위에 'ㅂ'이 올라간 것(ㅸ)도 역시 그럼 약간 '브' 이렇게 읽는 겁니까?

◆ 옥영정: 마찬가지입니다.

◇ 최형진: 요즘 친구들을 노래 할 때 공기반 소리반,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마찬가지의 원리입니까?

◆ 옥영정: 요즘 노래를 제가 몰라요. (웃음) 죄송합니다.

◇ 최형진: 그럼 '으'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ㆆ'는요?

◆ 옥영정: 그건 여린 히읗이라고 합니다. 'ㅎ'의 꼭지가 하나 똑 떨어져 나간 거죠. 그래서 그걸 여린 히읗이라고 말합니다. 연하게 발음하면 됩니다.

◇ 최형진: '흐'이렇게 읽으면 됩니까?

◆ 옥영정: 네, 그렇죠.

◇ 최형진: 그렇군요. 저도 예전에 접한 적은 있는데 발음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거든요. 그리고 이모티콘처럼 'ㅎ'이 두 개 붙은 글자가 있어요. 'ㆅ', 쌍히읗, 이런 거...

◆ 옥영정: 그게 쌍히읗입니다.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된소리 표현이죠. 디귿 두 개는 쌍디귿이잖아요. 히읗 두 개도 쌍히읗입니다. 똑같습니다. 디귿을 된소리로 하면 '뜨'가 되잖아요. 이것도 히읗을 된소리로 하면 '흨'... 이것도 잘 안 쓰이게 되고 어렵잖아요. 그래서 이것도 사라진 겁니다.

◇ 최형진: '흨', 이렇게 하니까 방송 중에 죄송한데 가래가 끓네요. (웃음)

◆ 옥영정: 하하.

◇ 최형진: 굉장히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저도 기쁜 마음에 이렇게 여쭤봤고요.

◆ 옥영정: 네, 굉장히 기쁜 일입니다.

◇ 최형진: 아까 전에 구텐베르크 얘기하시면서 굉장히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면 이런 글자들 방금 사라졌다고 하셨던 문자들, 언제까지 사용되던 건가요?

◆ 옥영정: 이 글자는 보통 국어학 하시는 선생님들이 이것도 확정은 못 짓는데, 계속 쓰였을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15세기까지만 계속 쓰인 걸로. 1500년 넘어가면 이게 잘 안 쓰이게 되는 겁니다.

◇ 최형진: 1434년 쯤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추정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사용하는 글자에 따라서 제작 연도를 추정하게 되는 겁니까?

◆ 옥영정: 이게 왜 1434년이란 연도가 나왔냐면 세종실록에 기록이 나옵니다. 세종대왕실록,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도 나오고 원래 이 활자가 활자만 있는 게 아니라 원래는 책을 인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자를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책으로 지금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활자로 찍은 책들이, 이 책들을 간행하고 난 뒤에 발문이라고 있어요. 다 간행하고 난 뒤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이유나 목적을 적은 기록들이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이 책을 찍기 위해서 활자를 1434년에 만들었다, 그 기록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똑같은 동일한 모양의 활자를 찾아내면 '아 이것이 1434년에 만든 그 활자로 찍은 책이구나', 이렇게 확인이 되는 거죠.

◇ 최형진: 그렇군요. 참 반가운 발굴인데, 그 동안 금속활자라고 하면 직지를 가장 먼저 떠올렸거든요. 이게 고려시대인가요?

◆ 옥영정: 고려시대입니다. 1377년.

◇ 최형진: 그게 직지심체요절이라는 거죠?

◆ 옥영정: 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 최형진: 그럼 직지의 경우에는 이런 활자가 발굴되지 않고 인쇄본만 남아있는 겁니까?

◆ 옥영정: 그렇습니다. 활자가 없죠.

◇ 최형진: 구텐베르크 이야기도 아까 전에 말씀하셨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직지의 경우 현재 프랑스에 있잖아요?

◆ 옥영정: 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 최형진: 그런 경우는 우리나라로 다시 가져오기가 쉽지 않습니까?

◆ 옥영정: 굉장히 어렵죠. 지금도 계속 노력은 하고 있는데 한 번 전시를 하려고도 노력을, 그러니까 빌려와서 전시라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거조차도 아직 안 되고 있는 상황이죠. 대신에 직지의 영인본, 그걸 그대로 사진을 찍어가지고 볼 수는 있습니다. 이미 다 공개를 해놨으니까요, 그건 볼 수 있으니까 일단 그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 최형진: 이번에 활자의 발굴이 역사가 바뀔 정도의 뜻깊은 발굴로 평가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정리하는 차원에서 해당 제작시대에 만들어진 금속활자가 이렇게나 귀한 겁니까?

◆ 옥영정: 네, 유일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 그룹이 하나의 덩어리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귀하고, 활자 실물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드물다기보다 아예 그동안 없었죠. 조선 전기 것은. 조선 후기 것은 아직 많습니다. 그건 많이 남아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0만 자 가까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전기 것이기 때문에 그렇고 아까 말씀하신 연도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가 구텐베르크 시기보다 앞선 시기도 추정되는 게 나온다는 것, 그리고 세종 시대 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그런 글자의 모양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이번에 발굴된 것은 세종 때 만든 활자는 아닙니다. 한글 활자는. 그런데 아마도 추정하기로는 세조, 세종 다음에 세조가 있죠, 세조 때 만들어진 걸로 추정을 하는데 세조 때 만들어진 것이라도 그거는 굉장히 오래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관련해서도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이걸 직지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앞으로 이런 가치를 더 높여서 얘기를 하다보면 충분히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최형진: 추후에 직지처럼 세계문화유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 옥영정: 그걸 앞으로 계속 연구를 많이 해야죠. 직지도 처음에 1972년도인가, 그때 시작이 됐어요. 프랑스에서 전시에 나타난 거거든요. 등장한 거거든요. 그러고 나서 세계의 기록유산이 된 것은 2000년대 이후잖아요. 그러니까 한 30~40년 정도 기간 동안에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 활자도 우리가 섣불리 세계문화유산, 기록유산, 이런 얘기하는 것도 좀 더 정확하고 명확하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의견을 낼 수 없도록 학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우리가 잘 준비를 해서 해야겠죠.

◇ 최형진: 마지막으로 유물 출토 지역도 흔한 집터고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고 이번에 활자뿐만 아니고 물시계, 천문시계 등의 과학 유산도 나왔는데요. 교수님께서 앞으로 또 어떤 연구나 조사를 하실 계획이십니까?

◆ 옥영정: 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활자에 대한, 같이 나온 과학기기에 대해선 또 다른 분야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이미 과학사 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시고요. 제가 그날 발표장에서 듣기로도 그 과학기기도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었는데 저는 제 관심분야가 이쪽 활자니까, 그 관심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 대조하는 작업, 형태와 규격을 가지고 그 역사 기록하고 맞추어 보는 작업, 이걸 계속해서 규명을 해야죠. 그 작업을 계속 할 예정입니다.

◇ 최형진: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옥영정: 고맙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04.06.13 10:36l최종 업데이트 04.06.13 13:37l

배달겨레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랑 거리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이미 유네스코에서 세계 인류 문맹자를 없애자는 뜻에서 주는 <문맹퇴치상>이 <킹 세종 리터러시 프라이즈>로 이름 지어졌다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오천년 역사 가운데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인 훈민정음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니 단 5분 동안이나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려증동이 쓴 <배달글자(한국학술정보)>를 읽으면서 글쓴이의 혜안에 눈이 환하게 밝아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세종 홀로 만드셨다

먼저 훈민정음은 세종이 남 몰래 홀로 조심스레 만들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만든데 많은 도움을 준 것처럼 알고 있다. 하지만 최만리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세종이 그들을 설득하였지만 그래도 되지 않아 그들을 끝내 하옥시키기까지 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드시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집현전 학자가 아니라 그의 딸인 정의공주였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되었는데, 그때 석가모니 세보를 훈민정음으로 뒤친 <원각선종석보>를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세종에게 받쳤다. 세종은 이를 보고 정의공주에게 큰 상을 내렸다. 곧 훈민정음은 세종 홀로 만드신 것이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으로 이룩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 뚜렷이 밝혀 놓았다.

왜 남몰래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며 그 의문이 풀어지면서 세종의 지혜와 백성을 위하는 세종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우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훈민정음을 왜 세종은 당당하게 만들지 못하고 남몰래 홀로 조심스레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그리고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문자를 만드는 일인즉, 명나라 황제가 알아서는 안 되기에 세종 임금이 혼자서 비밀 속에 가만히 진행시켜야 되는 일로 되었다. 배달글자를 만들고 나서도 중국황제가 알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넘어가야 되는 그런 일이었다.(59-60쪽)

상황이 그러하였기에 왕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세종이 남 몰래 홀로 훈민정음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왜 <조선문자>라 하지 않고 <훈민정음>이라고 했을까

또 하나 세종은 왜 만드신 글자를 떳떳하게 우리문자 곧 조선문자라고 이름하지 아니하고 훈민정음이라고 했을까?.

소리에는 「바른소리」라는 것이 없다. 소리에는 「짧은소리」, 「긴소리」, 「힘들어간소리」, 「높은소리」, 「낮은소리」, 「된소리」, 「거센소리」등으로 갈래지어질 뿐, 「바르다」, 「그릇되다」가 잣대가 될 수가 없다.

세종 임금이 중국황제의 눈을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말이 되지 않는「正音」이라는 엉터리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세종이 이름짓고 싶었던 것은 조선문자(朝鮮文字)였다. 「朝鮮文字」라고 하게 되면 명나라 황제가 노여워하면서 세종 임금을 해롭게 했거나, 조선국을 해롭게 했을 것이다. 또 「朝鮮文字」라고 이름짓게 되면 집현전 학사들의 거센 반발을 이겨낼 길이 없었다.(61쪽)

글자를 소리라고 한 것은 세종의 뛰어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우리는 중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말 못하는 백성들을 그냥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이것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짜낸 지혜가 바로 중국과의 마찰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글자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훈민정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정의공주가 석가모니 세보를 훈민정음으로 뒤친 목판본 <원각선종석보>가 세종 20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최소 5년 이상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세종의 끈질긴 의지와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노력과 의지는 다름이 아니라 훈민정음에 나와 있듯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가엾은 백성들을>위하는 따뜻한 마음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소창진평의 조작한 위서 <훈민정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첫 번째, 안동의 어느 집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는《훈민정음》이라는 책은 나라잃은시대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小倉進平의 조작임을 확실한 증거를 들어 명명백백하게 밝혀 놓았다.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을 간행했다라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당시에 집현전 대제학을 빈자리로 비워 두었는데 정인지의 벼슬이 대제학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둘째이며, 서법이 우리와 다르게 표기된 곳이 몇 군데 있다는 것이 셋째이며, 그리고 원본과 다른 엉터리 글자가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들어 안동 어느 고가에서 나왔다고 하는《훈민정음》은 위서(僞書)라고 이 책은 밝혀 놓았다.

이 책은 소창진평이 장사꾼의 속셈을 가지고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을 베끼고 1940년대 규장각에서 발견된 지은이를 모르는 책 ‘훈민정음해례’와 《세종실록》에 있는 정인지 서문을 편집하여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지질 검사를 해보면 바로 밝혀질 것이라고 려증동은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세종실록》에서 가져 왔기에 위서가 아니다. 단지 소창진평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엉터리로 엮었기에 지금이라도 《세종실록》에 있는 《훈민정음》을 제대로 역어 책으로 만들어 두어야 할 것이다.

10월 9일 <한글날>은 잘못되었다

두 번째, 이른 바 한글날이라는 것도 바로 잡혀지길 바란다.

배달글자가 발표된 것은 세종 25년 계해년 12월이었다. 이러한 것인데도 나라잃은시대 경성제국대학 교수자 小倉進平이라는 무식쟁이가 「세종 28년에 언문을 반포(斑布)했다」라고 했다. 무식한 거짓말이었다. - (중략) - 책을 널리 돌리는 것을 「반포」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달글자인 「ㄱㄴㄷㄹㅁㅂ……ㅎ」28개 글자는 책이 아니기에 「반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일본사람 進平을 무식쟁이이라고 말했던 바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책을 돌리는 것을 「반포」라고 한다. 사실을 알리는 것을 「敎書」라고 한다.(58쪽)

글자를 만든 것은 「制」자를 쓰고, 책을 만든 것은 「成」자를 쓰게 된다. 그리하여 세종 25년 12월에 「上親制 諺文二十八字」라고 실록에 적혔고, 세종 28년 9월에 「訓民正音成」이라고 실록에 적혔다. 「訓民正音書成」이라는 내용을 「訓民正音成」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 (중략) - 「訓民正音書成」을 두고 무식쟁이 進平이 「訓民正音이 완성되었다」라고 번역했던 것이다. 「訓民正音 이라는 이름으로 된 책이 이룩되었다」라는 말인 것을 발바닥 눈 무식쟁이 進平이 일본말 「完成」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광복 후 「세종실록 번역서」에서도 무식쟁이 進平의 번역대로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라고 되어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114쪽)

곧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날은 훈민정음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날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날이라는 것이다. ‘성(成)’자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였기에 부끄럽게도 우리는 훈민정음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제대로 모르게 되었다. 이제 바로 알게 되었으니 한글날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라도 한글날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훈민정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소창진평이라는 일본 학자의 무지에서 비롯하여 광복 후 우리 학자들이 아무 생각없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온 데 기인한다.

이제라도 이것을 바로 잡고자 <배달글자>라는 책이 나왔으니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하루 빨리 바로 잡아 올바른 것을 기리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이것이 사필귀정인데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바른 것을 보고도 지난날 자기의 잘못이 부끄러워 올바른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외면하는 못된 버릇이 남아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2015년 12월 22일 10시 48분 
 
붕어, 잉어, 숭어, 상어는 얼핏 보면 순우리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자어다. 붕어는 부어(鮒魚), 잉어는 이어(鯉魚), 숭어는 수어(秀魚), 상어는 사어(沙魚)에서 각각 나온 말들이다.


그런데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첫 글자와 두 번째 글자 사이에 ‘ㅇ’이 덧붙여졌다는 것인데, 이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른바 ‘모음충돌 회피현상’으로 인해 발음의 편리상 자연스럽게 매개자음인 ‘o'이 들어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나라 말에서든 발견되는 공통된 현상으로 충분히 일리 있는 설명이다.


두 번째는 지금은 사라진 한글 창제 당시 ‘옛이응’에 관한 것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옛이응’은 훈민정음 28자모 가운데의 한 글자인 ‘ㆁ’으로 ‘꼭지이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글자는 1443년(세종 25)에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부터 1500년대 초기까지 쓰였고, 그 뒤로도 ‘ㅇ’자와 혼용되어 쓰여 오다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제정으로 완전히 ‘ㅇ’자로 통합되어 사라졌다.


그렇다면 붕어, 잉어에서 ‘옛이응’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답은 ‘魚’(어)에 있다.

원래 魚(어)의 옛 발음은 그냥 '어'가 아니라 ‘옛이응’이 달린 '어'라는 것이다. 로마자 표기로 'ngeo'(ㆁ어)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옛이응’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ng' 소리는 'ㅇ' 받침으로 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鮒魚(부어)는 부+옛이응+어로 'bungeo'(붕어)가 된 것이고, 鯉魚(리어)는 리+옛이응+어로 ‘ringeo’(링어)가 됐다가 두음법칙으로 다시 잉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부어가 붕어로 바뀌었는지 궁금해진다.

신문기사(1920년~)에서 부어를 붕어로 최초로 표기한 것은 1923년 동아일보 1923년 2월 21일 ‘가실(嘉實) 九(구)’라는 칼럼에서다.


봄철 마을 풍경을 묘사하는 대목 중 "농사하는 여가에서는 쑥대로 발을 만들고 밈통을 만들어 붕어와 잔고기와 게를 잡아오면 처녀가 압개천에 나가 말끔이 씨서다가 풋고추를 넛고 조려 먹엇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처음 붕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아무래도 글 전체를 순 한글로만 적었기 때문에 부어란 한자식 표기의 문어체 대신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구어체의 붕어로 적은 듯하다.


하지만 이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에서는 모두 부어라는 표현만을 썼다.

정리하면 이 당시에는 부어와 붕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었는데, 특히 한자와 병기할 때는 부어로, 그렇지 않고 단독으로 쓸 경우에만 붕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 1929년 6월 19일 동아일보 ‘改訂(개정)키로 討議(토의)된 朝鮮語綴字法(조선어철자법)’이란 기사에서 붕어의 표기법이 다시 부각되었다.


그 내용은 부어(鮒魚)를 붕어로, 취향(趣向)을 추향으로, 십월(十月)을 시월 등으로 표기하자는 조선어철자법 통일안에 대한 것이다.

이때 최초로 부어를 붕어로 표기해야 한다는 학술적인 논의가 이루어졌고, 결국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철자법통일안’(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부어 대신 붕어가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 기준은 한자음 중 습관 등에 의하여 음이 생략되거나 또는 더해지거나 혹은 다른 음으로 변화되어 발음되는 글자는 표음적 표기법에 따라 발음대로 쓴다는 것이다.


이로 유추해보면 그 당시 붕어를 뜻하는 鮒魚(부어)의 실제 발음이 부어(bueo)가 아닌 붕어(bungeo)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어라고 발음하기 보다는 매개자음 ‘ㅇ’이 들어간 붕어라고 발음하는 것이 편해서일 수도 있고, 魚(어)에 옛이응 ‘ㆁ’이 남아 있어 실제 발음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1933년 ‘조선어철자법통일안’ 제정으로 부어를 붕어로 표기할 것을 권고했지만 실제 언론에서는 여전히 붕어 대신 부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다 1938년에서야 붕어라는 표현이 처음 언론에 등장하는데 ‘咸北鮒魚(함북부어)를 京城(경성)에서 낚어’란 동아일보 기사에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함경북도 구용평에서 1척 2,3촌(36,39cm)~2척(60cm) 가량 되는 큰 붕어(鮒魚) 5천여 마리가 청량리 양어장에 들어올 예정으로 벌써부터 장안의 낚시인들이 들떠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신문기사에 鮒魚(부어)를 부어가 아닌 붕어로 표기되었고, 그 후로도 이 원칙은 비교적 잘 지켜져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 당시 ‘조선어철자법통일안’이 제정되지 않아 지금까지 붕어를 '부어'라 부르고, 잉어를 '이어'라 불러야 된다면 이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할까? 천만다행이다.
제공=대한민국 NO.1 낚시방송 FTV(김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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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어제훈민정음편에서 세종대왕은 ㄱ의 명칭을 君(군)이라 정하였다.

 
【서울=뉴시스】 박대종 소장 = 세종대왕은 명저 ‘훈민정음’ 어제훈민정음 편에서 우리말의 자음 명칭을 지을 때, 기존 중국 운서들에서 통일적으로 사용하던 명칭들을 버리고, 7음의 순서에 따라 국민 삶의 풍요에 집중한 부국의 염원을 담은 총 23자로 된 시문에서 ㄱ에서 ㅿ까지의 23개 자음에 대한 명칭 “君(임금 군)~穰(풍년들 ㅿㅑㆁ)”을 정하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1446)에서 첫 번째 자음인 ‘ㄱ’을 “君字初發聲(군자초발성)” 또는 “君字初聲(군자초성)”, 혹은 더욱 줄인 “君(군: 해례 11, 12, 15, 19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집현전 8학사 중 핵심인물인 신숙주는 ‘동국정운’(1447) 서문에서 “以御製訓民正音定其音(임금이 지은 글인 ‘어제훈민정음’ 편에 따라 그 ‘음=초성’을 정하고)”라고 밝힌 후, 본문에서 ㄱ을 중국운서들에서 쓴 명칭인 ‘見(견)’이 아닌 ‘君(군)’이라 기재하였다. 

지금 현대인들이 부르고 있는 ‘기역’은 조선 중종 때 통역관이었던 최세진이 그의 저서 ‘훈몽자회’(1527)에서 정한 ㄱ의 명칭이다. 그는 ‘其(기)’자의 초성과 ‘役(역)’자의 종성에 쓰임, 곧 “기자초성, 역자종성”을 줄여서 ‘其役(기역)’이라 하였다. 기역 또한 한자어인 것이다.

이처럼 “기자초성, 역자종성”의 준말인 ‘기역’이 ㄱ의 이름이므로, “군자초성”의 준말인 ‘군’이 세종대왕이 정한 ㄱ의 명칭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왜 지금의 학교에서는 ‘군’이 아닌 ‘기역’만을 가르칠까? 왜 우리는 세종대왕이 깊은 통찰 끝에 지은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까? 한마디로 훈민정음의 정통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연산군 이후 세종대왕의 정신을 계승하는 왕맥이 단절되고, 신성한 훈민정음의 왕국에서 ‘正(바를 정)’이 아닌 ‘歪(왜)’와 ‘俗(속)’을 중시하는 섭정들이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2> 국보 71호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는 어제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 편에 따라 초성 ㄱ의 명칭을 君(군)으로 기재함.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서는 ㄷ과 ㄸ을 당연히 구분했다. 그리고 꼭지 없는 동그라미(ㅇ)는 목구멍소리, 꼭지 있는 동그라미(ㆁ)는 어금닛소리라고 하여 아설순치후 5음 중 소속이 서로 다른 소리로 철저히 구별했다.
 
그러나 최세진은 그러한 구분을 무시하고 ‘훈몽자회’에서 제 마음대로 ‘池末(디귿)’과 ‘異凝(이응)’의 이름을 지었다. ‘池’자를 현대한국인들은 ‘지’로 읽지만 구개음화 이전 최세진은 ‘디’로 기재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찬저이자 제2 훈민정음 프로젝트인 ‘동국정운’에서 ‘池’의 우리말 정음은 그 초성이 ㄸ을 쓴 ‘띠’이다. 그러니 최세진이 지은 ㄷ의 명칭 ‘池末’은 그릇된 것이다.

최세진의 ‘異凝(이응)’ 작명은 더욱 심각하다. 그나마 ‘其役(기역)’은 ‘기’의 초성과 ‘역’의 종성이 일치하고 ‘尼隱(니은)’도 ‘니’의 초성과 ‘은’의 종성이 일치하는 이름이지만 ‘異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異凝’은 ‘異자초성, 凝자종성’의 준말로, ‘異(다를 이)’자의 초성은 꼭지 없는 동그라미인 후음 ‘ㅇ’이지만, ‘凝(엉길 응)’자의 종성은 그도 훈몽자회에서 인정했듯이 꼭지 있는 동그라미인 아음 ‘ㆁ[ŋ]’으로 서로 짝이 맞지 않고 불일치한다. 이는 마치 하나는 나무젓가락을, 다른 하나는 쇠젓가락을 한 세트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다. 초성 ㆁ과 ㆆ 및 쌍자음을 없애버린 최세진의 행위는 훈민정음에 대한 왜곡이고, 창제자인 세종대왕에 대한 배신이며, 국문 교란 및 후대에 심대한 악영향 끼침인데, 우리는 언제까지 그를 섭정으로 모셔야 할까?

<사진 3> 훈민정음 어제훈민정음 편에서 세종대왕이 정한 23개 자음의 명칭.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요로운 부국을 염원하는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다.

세종대왕의 어제훈민정음 편에 그 이름이 정해져 명기된 자음의 수는 총 23개이다. 훈민정음 28자는 자음 17개와 모음 11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음의 경우 전탁성(全濁聲)이라 불렀던 쌍자음 6개 글자(ㄲㄸㅃㅉㅆㆅ)를 합치면 23개로 늘어난다. 이 23개 자음은 세종대왕께서 수천 년간 전해져 내려온 우리나라의 말소리를 세심한 관찰 끝에 파악해낸 결과치이다. 당시 중국 명나라의 ‘홍무정운’(1375)에 기재된 중국의 자음 수는 31개였으니, 우리나라의 말소리(國之語音)는 중국과는 달랐다.
 


세종께서는 ‘훈민정음’ 책 중, 맨 앞 넉 장 분량의 어제훈민정음 편에서 총 23개에 달하는 우리말 자음들의 명칭을 7음(①아음, ②설음, ③순음, ④치음, ⑤후음, ⑥반설음, ⑦반치음)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다. 편의를 위해 각 이름자 뒤에 붙는 “字初發聲(자초발성)” 부분을 빼고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ㄱ君 ㄲ虯 ㅋ快 ㆁ業, ㄷ斗 ㄸ覃 ㅌ呑 ㄴ那,
ㅂ彆 ㅃ步 ㅍ漂 ㅁ彌, ㅈ即 ㅉ慈 ㅊ侵 ㅅ戌 ㅆ邪,

<사진 4> 세종대왕이 ㄷ의 명칭으로 정한 斗宿(두수)의 모습. 고천문 28수 중, 북방7수의 하나로 북두칠성과 비교해 남두육성이라고도 부른다.

ㆆ挹 ㅎ虛 ㆅ洪 ㅇ欲, ㄹ閭, ㅿ穰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0년 11월 6일, 필자는 위 글자들을 무심코 바라보던 중에 불현듯 어금닛소리 ㄱㄲㅋㆁ의 명칭 君虯快業(군규쾌업)이 유의미한 사자성어를 이루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사진 3>에서와 같이, 아설순치후 5음 중에서 쌍자음이 둘 있는 치음을 제외하고 설음, 순음, 후음 모두가 넉 자 구조로 되어있었다. 요즘 말로 ‘심쿵’하는 감정이 일어났고, 첫 글자인 ‘君(ㄱ)’에서 마지막 반치음 ‘穰(ㅿ)’자까지 집중하여 살펴보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君(ㄱ)에서 穰(ㅿ)까지의 23개 글자는 그 전체가 세종대왕의 정신과 염원이 담긴 하나의 시문이었다. 세종께서는 “군왕의 으뜸 책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신조를 나타내고 가르치기 위해, 23개 자음 중 우두머리 글자(ㄱ) 명칭을 ‘君(임금 군)’으로 정하고 마지막 반치음(ㅿ)을 ‘穰(풍년들 양)’자로 정했다. 그런 후, 훈민정음 왕국의 백성들과 후손들이 대대로 쉽게 암송하고 따라 부를 자신의 시가를 다음과 같이 읊어나갔다. (옛글자 표기가 안되는 것은 현대음으로 적되, ㄲㄸㅃ 등 긴소리 쌍자음은 당시 표기대로 적음)

세종어제명칭시문 (해석: 박대종)

君虯快業(ㄱㄲㅋㆁ: 군뀨쾌업)은
군왕과 용왕이 기뻐하는 과업은
 
斗覃呑那(ㄷㄸㅌㄴ: 두땀탄나)니라.
두성의 밝은 빛이 미치고 에워싸 천하가 평안한 것이니라.
 
彆步漂彌(ㅂㅃㅍㅁ: 별뽀표미)한
활이 뒤틀리면 화살의 진행은 방향을 잃고 활시위는 느슨해지는
=근본이 틀어지면 나랏배는 표류하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即慈侵戌邪(ㅈㅉㅊㅅㅆ: 즉짜침술싸)하야
즉, 그로 인해 흉년이 들고 만사가 어그러질 것을 가엾이 여겨
 
挹虛洪欲(ㆆㅎㆅㅇ: 읍허홍욕)
허공의 큰물(은하수)을 두수로 떠서
 
閭穰(ㄹㅿ: 려양)이어라
마을마다(방방곡곡) 풍년 들게 하고 싶어라

위 23개 글자로 이루어진 어제명칭시문(御製名稱詩文)을 토씨와 함께 “기역, 니은, 디귿···” 외우듯 음만 암송하는데 10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참고로, 세종대왕의 위 초성 명칭들 중 일부는 동시에 11개 중성의 명칭이기도 하다.

유념할 사항은, 세종임금의 어제명칭시문에서 虯(뀨→규)는 ‘새끼용’이 아니라 ‘용’에서 나아가 君(임금 군)과 결부되어 비를 내려주는 ‘용왕’의 뜻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농자천하지대본야의 농업국가에서 적절한 비는 풍요의 필수조건이므로 구름을 몰고 와 비를 뿌려주는 용왕을 표현키 위해선 ‘龍(용 룡)’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전체 문장의 의미와 음까지 고려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라 ㄱ 다음의 ㄲ에 해당하는 용을 찾다보니 ‘虯(뀨)’자가 융통성 있게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명칭시문에서 覃(담)은 미치다(及), 呑(탄)은 에워싸다(并包), 那(나)는 평안하다(安), 彌(미)는 활시위를 늦추다(弛弓也)에서 ‘활시위가 늦추어지다’를, 그리고 “慈侵戌邪”에서 慈(짜→자)와 戌(술)은 어제서문의 ‘憫(불쌍히 여길 민)’자와 똑같이 모두 ‘가엾이 여기다’를 뜻한다. 侵(침)은 뒤쪽 穰(풍년들 양)자의 반대어로 쓰여 ‘흉년 들다’를, 邪(사)는 어그러지다(歪, 不正)의 뜻을 나타낸다. 挹(읍)은 ‘(물 따위를) 뜨다’, 欲(욕)은 ‘~하고자 하다’를 뜻한다.

ㄷ의 명칭인 ‘斗(두)’는 천상 28수 중 두수(斗宿), 곧 남두육성을 의미한다. 세종 때 간행된 천문학서인 ‘천문유초’에서는, 두성이 크게 밝으면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이 되고 천하가 화평하다고 한 바, 이것이 바로 세종께서 ㄷ의 이름으로 ‘斗’를 삼은 까닭이리라. 국자 모양의 두수로써 허공 은하수의 큰물을 퍼내어 방방곡곡 풍년 들게 하고 싶다는 최고의 염원을 글자 명칭에 담으셨으니, 그 정신에 감동치 않을 수 없다.

결론하면, ‘훈민정음’ 앞 4장 분량의 어제훈민정음 편 중, “나랏말싸미…어엿비너겨…편안킈 하고져할 따라미니라”의 어제서문에는 세종대왕의 자주정신과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면, 이어지는 “君虯快業∘斗覃呑那。彆步漂彌∘即慈侵戌邪∘挹虛洪欲閭穰”의 어제명칭시문에는 애민정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풍요의 부국(富國) 정신이 담겨 있다. 국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나라가 곧 부국이다. 이에 비해, 최세진이 지은 기역, 니은 등의 명칭들에는 혼과 의미가 없다. 훈민정음의 법칙을 무시, 왜곡하고 오직 편리성만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발견하고 그저 세종대왕의 위대한 가르침과 훌륭한 정신에 후손으로서 존경심과 함께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대종언어연구소 heobulan@naver.com

 

“한글, 24자만이 아닌 28자 모두 써야”:진보와 정론의 인터넷 신문 - 대자보 - (jabo.co.kr)

[책동네] 한글 천문학적 원리 밝힌 <한글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쓰기>

김영조 2007년 10월7일

 

 
▲≪한글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 쓰기≫ 책 표지     © 도서출판 역락

 

지난 7월 중국 연변에서 열린 ‘07다종언어정보처리국제학술대회’에서는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인 지노족에게 한글을 기초로 하여 글자를 만들어주기로 합의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등 글자가 없는 민족에게 글자를 만들어주려는 단체들도 여럿 있다.
 
그런 노력은 글자가 없는 민족에게 글자를 만들어주는 데는 한글이 가장 적합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언어를 적절하게 표현하려면 지금 쓰는 24자만이 아닌 훈민정음 창제 당시처럼 28자를 살려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훈민정연구소 반재원 소장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이번에 그는 도서출판 역락(대표 이대현)을 통해서 ≪한글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 쓰기≫란 이름의 책을 허정윤 씨와 공저로 펴냈다. 반재원 소장은 훈민정음을 30여 년 동안이나 연구한 사람이지만 전문학자가 아니라는 까닭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그동안 학계에서 밝혀내지 못한 것들이 그의 노력으로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먼저 책에서는 한글 국제 공용화의 선결과제로 옛글자들을 살려 써야 한다고 밝히면서 그 까닭을 설득력 있는 논리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없어진 네 글자의 음가를 명확하게 규명한다. 그를 통해 그는 몽골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힌디어, 베트남어의 발음 표기 사례를 들기도 한다. 이는 그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러시아어 외국어 표기의 예     ©반제원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은 거기에 더해 훈민정음 바탕이론이 천문학이었음을 조목조목 분석한다. 한글 28자는 천문도의 28 별자리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또 책은 아히루(신대) 문자가 훈민정음의 아버지 문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훈민정음은 가림다(가림다)문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이 아님을 규명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책은 태극과 음양오행 그리고 천부경이 훈민정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소상히 밝혀낸다. 또 훈민정음 해례본 전문을 쉽게 풀이해주며, 훈민정음 해례본∙훈민정음 언해본∙세종실록 훈민정음 등의 영인본을 실어 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이 책에도 물론 옥에 티는 있다. 훈민정음 원본의 출처에 다양한 학설이 있는데 최근 새롭게 밝혀진 사실 곧 안동 긍구당가에서 이용준이 장인의 책을 유출했다는 내용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예전에 알려졌던 학설만 소개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으며, 천문학과 천부경 얘기에 어려운 낱말을 그대로 써서 이해가 쉽지 않았던 점도 조금은 섭섭했다.
 

 
▲정음 28자 천문 방각도     ©반제원

 
하지만,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이론을 명쾌하게 밝히고, 없어진 네 글자의 음가를 분명하게 확인해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값어치가 이 책에는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국어원 이상규 원장은 추천사를 통해 그가 쓴 책에 대해 이렇게 칭찬한다.
 
“학계에서는 이미 한글 창제에 대한 원리가 의문 없이 다 밝혀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보면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글자의 음가 복원, 한글의 국제 공용화, 그리고 문자가 없는 많은 소수 민족에게 글자를 만들어줄 수 있는 바탕이론이 될 외국어 표기 활용 예와 더불어 여기에 밝혀 놓은 한글창제 원리는 여태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이상규 원장은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밝혀지는 훈민정음 창제 이론이 세계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극찬하여 마지않는 한글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여줄 것이라고 단언했다. 
 

 
▲훈민정음 언해본 영인     ©반제원


또 한국어정보학회 진용옥 회장은 한국어정보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한글의 국제 공용화를 위하여 정음 4글자의 음가를 복원하여 컴퓨터 자판에 살려 넣자는 제의가 만장일치로 결의되었는데, 이는 반 소장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며, 반소장을 진정한 문화를 낚는 어부라고 손뼉을 쳤다. 이밖에 북한 교육성 교육정보센터 리수락 소장과 중국 소흥 월수외국어대학 류은종 부학장 등도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다.
 
내일 10월 9일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561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이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큰 혜택을 누리는 우리는 적어도 한글이 어떻게 창제되었는지 공부해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옛글자들을 살려 써야 한글 국제 공용화가 가능하다.

[대담] ≪한글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 쓰기≫ 지은이 반재원 대담

▲대담중인 지은이 반제원     © 김영조

 

- 훈민정음 연구에 매달린 계기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원래 동양 철학에 흥미가 있어 동양 철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부모의 만류와 본인의 용기 부족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대학원 동양철학과로의 진학을 위해서는 우선 한문 실력을 쌓는 것이 먼저라고 하여 사서(四書)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훈민정음이 역학(易學)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올해로 28년째가 되었다.
 
훈민정음 연구를 하게 된 동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내 팔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연구를 하는 동안 힘들어 다 집어치우고 탈출하려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세종임금이 꿈에 나타나서 음가를 짚어준 것이 2번 있었고, 연구에 고비를 맞을 때에도 암시 같은 것을 준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오늘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
 
- 어떤 이는 더 많은 글자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글의 국제 공용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24자는 말하자면 국내용이고 우리말의 사투리나 의성어를 표기하려면 없어진 4글자를 포함한 옛글자들을 살려 써야 하며, 또 그래야만 외국어 발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 국제 공용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이 자기네 고유 글자가 없어서 남의 글자를 빌려 쓰는 글자 없는 소수민족에게 우선 적용될 수 있는 조건이며, 그들이 원한다면 옛글자를 살려 쓴 한글이 희소식이 될 것이다.
 
세종이 창제한 28자로 모든 외국어 표기가 거의 100% 가능하다. 그런데도 28자 이외에 또 다른 자기만의 얄궂은 글자를 만드는 것은 창제 기원을 연구해보지 않아서 그렇다. 세종이 이미 적지 못할 것이 없는 천상의 악보를 만들어 놓았는데도 또 다른 자기만의 악보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총명이 세종을 능가한다는 오만일 뿐이다. 또 뒤집어 말하면 한글로는 세상에 적지 못하는 소리가 아직 많다는 역설적인 표현밖에 안 된다.”
 
- 이 책에는 아홉 나라의 발음표기 사례가 나와 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할 수 있었나? 

“전문 회화 강사들의 발음지도를 받았으며 몽고어는 학원이 없어서 유학 온 학생에게 공부했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는 현지 학술 발표회에 참가하여 조언을 받기도 하였다. 힌두어도 국내에 학원이 없어서 1개월간 인도 여행을 하면서 정리하였고 우루드어는 인도의 젊은 사람 중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독일어나 불어 일본어 등은 그 나라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받았으며 또 각종 여행 회화책을 참고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다소 부족하게 표현되었을 수가 있다. 더 정확한 표기는 다음 기회에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옛글자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발음을 하는 이와 또 듣고 받아 적는 이와의 미묘한 차이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마다 발음이 같지 않았고 듣는 사람에 따라 음가를 서로 다르게 알아듣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15개국어 정도의 언어를 표기한 책이 곧 나올 예정이다. 외국어 표기 시도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 훈민정음 창제원리 등 이 책에 있는 내용이 더는 밝힐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한 것인가? 

“창제 원리 각론에 대해서는 더는 덧붙일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다만 이와 별도로 살펴볼 것은 사성(四聲) 연구부분으로 아직은 미진하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 마디 보탠다면 창제원리를 잘 이용할 때 건강을 지키는 방법과 본성을 깨닫는 도구 등으로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혹 어떤 이는 세종 당시의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안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떤 이는 신미대사가 만든 것을 세종의 이름으로 반포하였다든지, 최항이 만든 것을 세종이 반포하였다고 말한다. 또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는 문장을 보고 창제가 아닌 모방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신미대사는 유학과 불경과 범어에 밝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였을 수는 있다. 그러나 창제원리를 연구하면 할수록 처음부터 끝까지 이론적으로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정연하고 일목요연함을 볼 때 세종이 홀로 창제에 몰두하여 이루어낸 단독작품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어떤 이는 ‘세종이 여자를 좋아하여 18남 4녀나 낳았고 성병(임질)까지 있었는데 언제 그런 일을 할 틈이 있었는가’하고 우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는 그때의 ‘임질’이 요즘의 성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담석증을 일컫는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 그만큼 정력이 왕성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이야기는 창제원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용감한 말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유언비어는 이제는 정말 사라져야 한다.”
 
- 지은이는 연구의 후속 조치를 국가기관이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나? 

“가능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국가 연구기관에서는 예산 한 푼 들이지 않았는데도 민간이 이만큼 밝혀 놓았으니 앞으로 이 연구내용을 검증해 본 후 잘못이 없다면 이를 인정하고 정설로 받아들여야 하며, 학계에서는 더욱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 이제부터는 국가에서 이 일을 감당하기 바란다.”
 
- 앞으로 연구할 과제는 무엇이 있는가? 

“물론 한글 국제 공용화 작업이다. 그러려면 외국어 발음 표기에 필요한 옛글자의 음가 규명과 나라마다 그 나라의 발음에 써야 할 옛글자의 범위를 정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며, 나라마다 발음기호에 대한 한글 음가를 예시해 줌으로써 기준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정해 주더라도 자기네 정서에 맞게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어나 몽골어에서는 알파벳 ‘P’를 우리 발음의 ‘ㄹ’ 발음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H’는 ‘ㄴ’ 발음으로 쓰고 있다.
 
또 우선 글자 없는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정부 기관에서 한국어 학당을 많이 보급하여 편리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세종의 뜻을 펴야 할 것으로 본다.” / 김영조

 

 

한국고대사 | 국제적 발음을 위한 한국 복자음 복원의 필요성 - Daum 카페

 

국제적 발음을 위한 한국 복자음 복원의 필요성

조선시대 영어발음을 원형에 가깝게 표기한 복자음 표기역시 F 발음은 ㅍ 가 아니라 ㅎㅍV 발음은 ㅂ가 아니라 ㅎㅂR은 ㄹㄹL은 ㄴㄹ 아닐까 한다.왜 복자음 발음을 제대로 안하는가?닭 을 닥으

cafe.daum.net

 

 

송고시간2020-08-31 12:59

1889년 한글 우수성 알린 미국인 독립운동가, 서거 71주기 추모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박사

[보훈처 제공]

 

(서울=연합뉴스) 최평천 기자 =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1863.1.26∼1949.8.5) 박사가 131년 전 미국 언론에 기고한 '조선어'(THE KOREAN LANGUAGE) 기고문의 원본과 번역본이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31일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헐버트 박사 서거 71주년 추모식을 거행하며 헐버트 박사가 미국 언론 뉴욕트리뷴에 1889년 기고한 기고문을 공개했다.

헐버트 박사는 기고문에서 "알파벳과 비슷한 한글은 완벽한 문자"라며 "조선어(한글) 철자는 철저히 발음 중심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갈망하고,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조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표음문자 체계의 모든 장점이 여기 한글에 녹아 있다"며 "영어는 모음 5개를 각각 여러 개의 다른 방법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모음은 하나만 빼고 모두 짧은 가로선과 세로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높임말이 어렵다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결론은 간단하다"며 "조선어 높임말은 대부분 동사 어간에 한 음절인 '시' 또는 두음절인 '옵시'만 추가하고 음조를 부드럽게 해주면 끝이다"라고 말했다.

김슬옹 세종 국어문화원 원장은 "헐버트 박사의 한글 평가는 한글 창제자인 세종의 훈민정음 관점과 취지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며 "한글의 과학성과 효율성에 주목해 한글이 완벽한 문자임을 전 세계에 최초로 알렸다"고 말했다.

미국 버몬트주 태생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23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왕립 영어 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와 외국어를 가르치고 외교 자문을 맡아 광무황제(고종)를 보좌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후에는 고종 친서를 품고 미국에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역설했고, 이듬해에는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했다.

미국에 돌아간 후 40여 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 참석을 위해 방한했던 헐버트 박사는, 불과 일주일 뒤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pc@yna.co.kr

 

 

입력 2018-10-15 03:00업데이트 2018-10-15 18:50  

김동진씨, 1889년 美紙 기고글 확인
‘THE KOREAN LANGUAGE(조선어)’라는 제목의 1889년 뉴욕 트리뷴 칼럼. ‘조선, 서울에서 헐버트 교수’라고 필자가 명시돼 있다. 지면에 인쇄된 기고문은 한글 모음 ‘ㅏ’ ‘ㅗ’ ‘ㅣ’ ‘ㅜ’를 수직선과 수평선을 조합해 표현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제공
“한글은 완벽한 문자.”

케이팝 등의 효과로 한글을 배우는 세계인이 늘고 있는 가운데, 한글의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서양에 알린 최초의 글이 새로 확인됐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68·사진)은 ‘고종의 밀사’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1889년 미국 ‘뉴욕트리뷴’에 기고한 글 ‘The Korean Language(조선어)’를 최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조선에는 모든 소리를 자신들이 창제한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가 존재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기고문은 한글의 과학성을 깊이 있게 논증했다.

지금까지 학계는 헐버트 박사가 3년 뒤인 1892년 1월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을 창간하고 발표한 논문 ‘The Korean Alphabet(한글)’을 한글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린 최초의 학술적 글로 파악해왔다. 이번 기고문이 실린 뉴욕트리뷴은 시기도 앞서는 데다 당시 미국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아 해외 여론에 큰 영향력을 지녔던 신문이다.

 
김 회장이 공개한 지면에는 영어 알파벳 사이에 한글 모음 ‘ㅏ’ ‘ㅗ’ ‘ㅣ’ ‘ㅜ’가 선명하다. 헐버트 박사는 이 기고문에서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 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한글 자모가 얼마나 읽고 쓰기 쉬운지 소개했다. 김 회장은 “국제사회에 최초로 한글 자모를 소개한 것”이라며 “한글과 한국어의 우수성을 제대로 평가한 최초의 글”이라고 평가했다.

신문 기사 250줄가량의 장문인 기고문은 내용이 학술 논문 수준이다. 헐버트 박사는 “영미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며 글자와 발음의 일대일 대응을 설명했다. 알파벳은 모음 철자가 ‘a, e, i, o, u’밖에 없기에 읽을 때마다 다르게 소리가 나지만, 한글은 ‘ㅏ’에 획 하나를 더하면 ‘ㅑ’가 되는 것처럼 간편히 발음마다 여러 모음 글자를 따로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어가 지닌 구조적 아름다움과 단순성도 함께 설명했다.

기고문은 김 회장이 헐버트 박사의 손자 브루스 헐버트 씨로부터 2009년 스크랩된 형태로 넘겨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기고 시점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김 회장은 최근 헐버트 박사가 쓴 편지를 연구하다가 1889년 6월 9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Korean Language’라는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낸다는 구절을 확인했다.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같은 해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당시 쓰이지 않는 훈민정음의 자모 3개(옛이응, 여린히읗, 반시옷)를 찾아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훈민정음 연구에 열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헐버트 박사는 뉴욕트리뷴 기고 2년 뒤인 1891년 조선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출판하기도 했다.

미국인인 헐버트 박사는 고종의 최측근으로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가운데 한 명이다. 이상설의 헤이그 특사증도 헐버트 박사가 이회영을 통해 전했다. 조선에서 교육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선교사로 활약했다. 역사학자, 한글학자로도 활동해 서양인으로서 한국학을 개척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한글의 존재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글로는 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가 꼽힌다. 하지만 관련 내용이 소략하고, “배우기가 매우 쉽고, 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것도 표기할 수 있다”고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헐버트 박사의 ‘뉴욕 트리뷴’ 1889년 기고 발췌 ▼

조선어
<The Korean Language>


조선에는 모든 소리를 자신들이 창제한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가 존재한다. 음소문자인 조선 문자는 음절문자인 일본 문자와 매우 다르며, 각 음절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다. 훌륭한 문자는 간단해야 하고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정확하게 혼란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소리를 모호함 없이 표현할 수 있을 정도만 글자 수가 있어야 한다. 즉, 최소의 글자로 최대의 표현력을 발휘해야 한다. …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 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모음은 하나만 빼고 모두 짧은 가로선과 세로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ㅏ’는 ‘a’의 긴 발음, ‘ㅗ’는 ‘o’의 긴 발음, ‘ㅣ’는 ‘i’의 대륙식 발음, ‘ㅜ’는 ‘u’ 발음과 같다. 이렇게 글자를 모두 쉽게 구별할 수 있기에 읽기 어려운 글자 때문에 발생하는 끝없는 골칫거리가 한글에는 없다. …조선어 철자법은 철저히 발음 중심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 즉, 글자 하나당 발음이 딱 하나씩이다. …

표음문자 체계의 모든 장점이 여기 한글에 녹아 있다. …

‘ㅑ’ 등의 이중 모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번 글자를 하나 더 쓰는 대신에 간단하게 획 하나만 추가하면 된다. 예를 들어 긴 ‘a’ 발음은 ‘ㅏ’이고, 긴 ‘ya’ 발음은 ‘ㅑ’이다. 긴 ‘o’는 ‘ㅗ’, 긴 ‘yo’는 ‘ㅛ’이다. 아주 간단한 이 방법은 조선어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간결성을 크게 높여 준다. …단어 ‘quick’의 발음을 들으면 ‘kuik’으로 써야 하는데도 영어에서 그러지 않는 것이 조선인에게는 단어 ‘fun’을 ‘phugn’으로 쓰는 것만큼 어리석게 느껴질 것이다. …
번역: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입력 2021. 4. 30. 11:54수정 2021. 4. 30. 11:57

"한글과 한자의 창제 원리는 같은 뿌리" (daum.net)

시조시인 김락기 '한글과 韓字의 아름다운 동행'에서 주장
김락기 지음 '우리 시조와 어우러진 한글과 한자의 아름다운 동행'

 

시조시인 김락기(전 한국시조문학진흥원 이사장)씨가 한글과 한문 창제의 기원을 탐구한 산문집 ‘우리 시조와 어우러진 한글과 韓字의 아름다운 동행’(도서출판 한아름)을 펴냈다.

저자는 한자가 우리의 옛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만든 문자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에서 동이족의 활동과 갑골문자 등 고대 문자 변천사를 바탕으로 한자와 한글의 창제 원리가 같은 뿌리라는 것을 추적했다. 그는 한자는 다른 나라 글자인데, 모두 우리말 발음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저자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소리를 표기하는 반절법(反切法)을 적용해 한자를 발음하면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은 한국어뿐”이라고 했다.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중 중국은 같은 글자인데 다르게 발음되거나 아예 발음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한자가 70% 정도 차지하는 일본도 한자 발음에 혼선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코로나 사태 여파로 인한 비대면 수업 등으로 초·중·고교 학생들의 문해력(文解力·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급속히 저하되는 것과 관련, “한자를 배워야 이해력은 물론, 사고력·창의력·조어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며 “한자를 초등학교부터 정규·필수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2007-10-08 09:59

"''온누리 한글표기법''으로 한글문화 대제국 건설" - 노컷뉴스 (nocutnews.co.kr)  

충남대 정원수 교수 "세계 모든 글자는 한글로 통한다''''

온누리 한글 정원수 교수
 
지구 위에는 몇 개의 언어가 존재할까? 유네스코에 따르면 약 6천7백 개, 이 가운데 문자를 가진 언어는 300 개가 조금 넘는다. 그리고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교류하는 문자는 30개 정도.

이 30개 문자를 모두 표기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문자가 <한글>이라는 신념으로 제 2의 한글 창제에 온 몸을 던진 사람이 있다

주인공은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정원수 교수 (49). 정 교수는 현재의 한글 표기법에서 자모를 축약해 간단히 적을 수 있는 온누리 한글 표기법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다.

또 이 표기법을 이용해 중국 휴대전화 및 컴퓨터 자판에 활용하는 방안도 개발하고 있다.

중국어로 ''''你好(안녕하세요)''''는 ''''니하오''''라 쓰고 보면서 그대로 읽으면 중국인이 알아듣는다.

한국에 사는 조선족 노동자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시죠?''''라고 묻고 싶을 때 한자를 몰라도 ''''니 바바 마마 선티마마?'''' 소리 나는 대로 휴대폰 문자로 찍어 보낸다. 고향의 부모가 한글을 읽을 줄만 안다면 쓰인 대로 소리 내 읽으면 내용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 [BestNocut_R]

한글 어휘를 익히지 않고 그저 소리 내고 적는 것만 배우는 데는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일주일만 투자하면 로밍된 국산 휴대폰으로 휴대폰 문자 대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지구촌 각국 휴대폰 버튼에 그 나라 문자와 함께 천지인 형식의 한글이 적용돼 있는 즐거운 상상도 가능하고 현실화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abc, ABC를 번갈아 가며 한참을 두들겨야 하는 영어 대신 간편하고 확실한 한글이 얼마나 좋은가. 또 이것을 컴퓨터 자판에 응용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대박임이 분명하다.

세계 각국의 언어들이 나름의 독특한 발음을 갖고 있지만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에 약간의 보조 표시만 더하면 그 발음들도 다 소화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정원수 교수의 설명이다.

그것은 한글이 성리학에 기초한 음양오행설과 과학적인 음성발화(發話)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문자 속에 소리 자질이 내재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거기에다 옆으로도 풀어쓸 수 있고 자음과 모음을 떼었다 붙였다 조합하여 음절 단위로 묶는 모아쓰기도 가능하다. 가로 쓰기, 세로 쓰기 모두 가능한 건 기본이다.

하늘(.), 땅(ㅡ), 사람(ㅣ) 세 개의 모음기호를 결합하기에 따라서 무려 50개 이상의 모음소리를 적을 수 있고 발음기관 모양을 본 떠 만든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자음도 여기에 몇 개의 표시를 더하면 수십 개의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

성경의 한 구절을 온누리 한글로 표기해 보자.

타 훼다  : ''''니  진신, 진싱, 진, 진이, 애  니더  ; 유  애 
루통 쯔지''''

他 回答 说 : "你 要 尽心,尽性,尽力,尽意,爱 主 你的 神 ; 又 要 爱 邻舍 如同 自己。"

Tā huídá shuō, nǐ yào jìnxīn, jìn xìng, jìnlì, jìn yì, aì zhǔ nǐde shén. yòu yào aì línshè rútóng zìjǐ.

: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정원수 교수의 각고의 노력으로 충남대학교에 <온누리 한글=""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정 교수는 곧 벤처기업인 <온누리 한글="" 예슬(주)="">를 설립해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사업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한자를 쓰는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로마자 표기언어인 베트남과 터키어, 키릴문자 표기언어인 러시아와 몽골어, 그리고 난문자를 사용하는 일본 가나와 인도 힌디어를 적는 데바나가리, 아랍, 태국어에 대해 한글표기시스템을 개발하는 게 목표다. 한글을 사용해 위의 언어들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다면 한글은 지구촌의 대표문자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정 교수는 올 한글날을 맞아 <한글문화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요지는 한글을 먼저 아시아의 공동문자로 해 아시아 한글 문화벨트를 조성하고 지구촌 공용의 표기문자로 등극시킬 경우 한글문화의 세계화를 통해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고, 한글관련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마이크로소프트 형태의 세계지배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입력 2018-10-05 03:00업데이트 2018-10-05 03:00

16세기 초간본 후쇄본 기탁받아… 국어학-서지학 연구에 높은 가치
한국국학진흥원 “문화재 신청 계획”
한국국학진흥원이 최근 기탁받은 ‘용비어천가’ 권4의 일부분.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제572돌 한글날(9일)을 앞두고 한글로 쓴 가장 오래된 문헌인 ‘용비어천가’의 새로운 목판본이 공개됐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조선 초기인 16세기에 간행된 ‘용비어천가’ 초간본 후쇄본을 경북 영천시의 한 문중에서 기탁받았다고 4일 밝혔다. 후쇄본은 초간본이 간행(1447년)된 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 같은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이번에 공개된 용비어천가는 전체 10권 5책 중에서 2번째 책인 권3, 4에 해당한다. 고문헌은 2권을 1책으로 분류한다.

조선 초기 악장 문학을 대표하는 용비어천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기까지 6대조와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읊은 노래에 주석을 붙인 것이다.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짓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을 달았다. 책의 전래 과정이 분명해 15세기 국어학과 서지학 연구에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국학진흥원은 “기존에 보물(제1463호)로 지정돼 있는 용비어천가 판본이 부분적으로 훼손돼 있는 것과 달리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입력 : 2015-10-07 02:28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의 복간본(왼쪽)과 훈민정음 연구자 김슬옹 교수(미 워싱턴 글로벌 유니버시티)가 중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해례본 해설서.교보문고 제공
 
한글 창제의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 목판본으로 발간됐다. 당시 200부 이상 발행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것은 딱 한 부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을 간송 전형필이 사들여 현재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몇 해 전 또 하나의 해례본인 ‘상주본’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근래 화재 등으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간송 소장 해례본은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일부에서 남대문 대신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바로 이 해례본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간송재단과 교보문고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복간해 판매한다. 그동안 해례본은 전시장에서 유리벽 안으로 바라봐야만 했는데 복간본이 만들어짐에 따라 일반 시민들도 해례본을 직접 만져보고 소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해례본은 모사본(베껴 쓴 것)이나 영인본(복사본)으로 유통돼 왔으며, 마지막 영인본이 나온 것도 60여년 전인 1953년이다.

6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허균 교보문고 편집장은 “간송 보관본의 현재 상태 그대로 복원하는, 이른바 ‘현상복제’ 방식으로 복간을 했다”며 “책의 색감과 질감까지 그대로 살려 원본을 직접 체험하는 느낌을 갖게 했다”고 설명했다.

복간본은 한지를 사용해 고서의 촉감을 살렸으며, 제본도 네 군데 구멍을 뚫어 실로 묶는 원본 방식을 따랐다. 다만 간송본은 본문 뒷면에 낙서가 된 페이지가 다수 있는데, 복간본에서는 낙서를 모두 제거해 읽기 쉽도록 했다.

간담회에 동석한 전인건 간송재단 사무국장은 “그간 사진촬영 등으로 만들어진 영인본과 달리 현재 소장 중인 원본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낸 복간”이라고 평가하면서 “국민 모두가 페이지를 넘겨가며 세종의 애민사상과 문화정신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해례본 복간과 함께 해례본 해설서도 발간됐다. 훈민정음 연구자인 김슬옹 교수(미 워싱턴 글로벌 유니버시티)가 집필한 해설서는 해례본에 대한 한글·영문 번역문을 수록했으며, 한글 창제 배경과 과정, 해례본의 구조와 내용, 간송과 해례본 소장에 얽힌 역사 등을 충실하게 담았다. 원로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감수를 거쳐 학문적 엄밀성을 기하는 한편 중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다는 게 특징이다.

복간 해례본은 이날부터 서점에서 판매된다. 복간본과 해설서를 박스에 담아 판매하는데, 가격이 25만원이다. 교보문고 측은 “제작비가 보통 책들의 2배 이상 들어가 가격이 비싸졌다”며 “향후 보급판 출간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270055&code=13110000&cp=du

 

 

 

문화일보입력 2007-10-09 15:00

한민족 문기(文氣)의 최고봉 세종의 고독한 프로젝트, 한글 :: 문화일보 munhwa

 

 

2007-10-05

세종이 발명한 최고의 알파벳 한글/김영욱 지음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7-10-19 03:00수정 2009-09-26 08:53

어느 기하학자의 한글 창제|동아일보 (donga.com)

 

 

한국일보  : 2007-10-05 18:49

"언어의 구조를 깨우치면 말문이 트여" (daum.net)

 

 

2007년 10월 9일

한글 르네상스 - 노컷뉴스 (nocutnews.co.kr)

 

 

한겨레신문 2007년 9월 22일

[말살이] 무량대수 / 우재욱 (hani.co.kr)

 

[훈민정음 상주본]

 

 

입력 : 2019.11.08 11:11 수정 : 2019.11.08 15:27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출현한 <훈민정음 해례본>(원본 혹은 간송본).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서문 포함)는 전해졌지만 한글의 창제원리가 적힌 ‘해례’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 해례본이 출현함으로써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다.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에서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나왔을 때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는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셨다”면서 감격했다.

외솔은 왜 그렇게 환호했을까. <훈민정음 해례본>(원본 혹은 간송본)은 한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해례본>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세종대왕이 직접 쓴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한문글이다. ‘해례’는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맨 뒤에 실린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1396~1478)의 ‘서문’은 ‘해례’의 서문이다.

■‘화장실 창살론’을 변파한 해례본 출현

<해례본>은 1940년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해례본>의 ‘예의’ 부문만 한글로 풀어쓴 <훈민정음 언해본>은 존재했다. 하지만 해례가 빠진 <언해본>만으로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알 수 없었다.

일제는 1930년대 말 우리말과 글의 사용을 금하고(1938년), 창씨개명과 종합일간지 폐간을 강행(1940년)하는 등 한글말살 정책을 폈다. 언어가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 즉 세계관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언해본>까지 허구로 몰아붙인 일제로서는 해례본마저 없다면 조선초까지 소급되는 세종의 한글창제 쾌거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었다.

즉 당대 ‘화장실 창살론’까지 등장했으니,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세종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글 창제의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해례본>이 현현했으니 외솔이 뛸 듯이 기뻐한 것이다. 우리 말과 글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말살하겠다고 나선 일제강점기하는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글 반포(1446년) 후 494년만에 현현했으니 얼마나 극적인 일인가.

 

■한글창제의 오묘한 뜻

한글의 해설서인 <해례본>은 쉬운 문체로 되어 있다. 왜냐. 세종대왕의 말씀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창제했고,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1396~1478)의 언급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문자를 해설하는데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되겠는가.

하지만 당대 최고의 철학을 담고 있는 <해례본>의 뜻은 오묘하고도 심오하다.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가 합해서 이뤄지는 글자는 하늘(첫소리), 사람(가운뎃소리), 땅(끝소리)의 조화라 했다. 첫소리에는 피어나고 움직이는 뜻이 있으니 하늘의 일이며, 끝소리는 그치고 정해지는 뜻이 있으니 땅의 일이고, 가운뎃소리는 첫소리가 생겨나서 끝소리가 이뤄지는 것을 이어주니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음절의 핵심은 가운뎃소리에 있는데, 첫소리·끝소리와 합해 소리(음절)을 이루니 역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고 그것을 잘 조절해서 깁고 돕는 것은 반드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의 경우 첫소리를 다시 끝소리로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즉 사계절의 운행은 돌고 돈다. 첫소리가 다시 끝소리가 되고 끝소리가 다시 첫소리가 되는 것은 우주와 자연의 이치이다. 훈민정음, 즉 한글의 창제원리가 이렇듯 심오한데, 어디다대고 ‘화장실 창살’ 운운했단 말인가.

2008년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총 66쪽 가운데 18쪽이 없어서 ‘불완전한 진본’이라 평가된다. 66쪽 중 4쪽이 없는 <간송본>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바로 이러한 한글 창제의 원리와 의미를 담은 ‘해례’, 즉 해설이 담긴 <해례본>이 현현했으니 외솔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셨다”고 외친 것이다. 한글 반포(1446년) 후 무려 494년 만의 일이다.

이렇게 출현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당대의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가 구입해서 소장했으므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이하 간송본)이라 했다.

■<상주본>은 1조원의 가치인가

그후 68년이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 살던 배익기씨가 또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했다. 전문가들은 <간송본>과 동일판본인 이 해례본을 <상주본>이라 했다. 그런데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에 달하고, 보존상태도 <간송본>보다 훨씬 좋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졌다. 왜 이런 평가가 나왔을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 2011년 9월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상주본>의 감정가액을 의뢰하자 문화재위원들이 모여 ‘금전적 가치가 부적절한 무가지보지만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으로 판단한 게 빌미가 됐다. 이후 <상주본>을 꽁꽁 숨겨놓은 배익기씨는 ‘1조원’이라는 금액에 ‘꽂힌’ 나머지 1조원의 10%을 달라고 버텨왔다. 심지어 2017년 4월 재선거에 출마한 배익기씨는 자신의 재산을 1조4800만원으로 신고하려다가 ‘실물 소유를 확인할 수 없어서 불가하다’는 상주시 선관위의 이의 제기 때문에 무산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8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상량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상주본은 불완전한 진본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가치가 높은 것일까.

기자가 이 해례본 취재를 위해 <상주본>을 직접 실사했거나 연구한 학자들과 연락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말한 내용이 있었다,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은 오해이며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주본>의 가치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상주본>의 경우 원소장자가 행간에 이 책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일종의 메모(주석)이 남아있다. 전문가들은 이 주석이 대단한 식견을 가진 이의 기록이며 이 내용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원 소장자가 어떤 가문의 학자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상주본>은 학술적인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유물로서의 가치는 <간송본>과는 견줄 수 없는 깜냥이 안된다. 물론 <간송본>에도 흠결은 남아있다. 총 66쪽(33장) 가운데 표지와 세종의 어제 서문 등 앞부분 4쪽(2장)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66쪽 중 62쪽이 건재하다.

하지만 <상주본>의 경우 66쪽 가운데 무려 18쪽이 떨어져 나갔다. 2008년 배익기씨의 공개 때 <상주본>을 실사한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상주본>의 경우 세종의 어제 서문·예의 8쪽(4장)과 해례 부분 8쪽(4장), 뒷부분의 정인지 서문 2쪽(1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분명히 밝혔다. 4쪽이 없는 <간송본>에 비해 <상주본>은 18쪽이 없으니 ‘불완전한 진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공개 당시 국립국어원장으로서 하루늦게 안동으로 달려가 원본 일부와 편집 이전의 안동 MBC 촬영본을 검토했다는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공개된 자료 중 가장 앞면의 경우도 3분의 1이상 부식되었다”면서 “<상주본>의 보존상태가 <간송본>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밝혔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간송본>의 경우 3쪽 정도는 남아있는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 부분이 <상주본>에는 단 1쪽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상주본>은 나중에 일부가 화재 때문에 일부 훼손됐다고 했는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고의적인 훼손이 의심스럽다”면서 “<상주본>은 문화 유물로서의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1940년 7월 30일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됐다는 조선일보 보도. 국어학자 방종현과 홍문기는 이후 5회에 걸쳐 원본 훈민정음 해례 부분을 번역 요약해서 연재했다.

 

■<간송본>을 지킨 사람들

이렇게 불완전한 <상주본>을 두고 <간송본> 보다 보존상태가 좋니, 후대에 표제와 주석이 새롭게 더해졌으니 학술가치는 대단하니 하는 평가가 상식처럼 퍼졌다. 굳이 다른 사람을 예로 들 필요가 없다. 기자의 기사에서도 복사한 것처럼 붙어있다. 제대로 된 ‘팩트체크’ 없이 기사를 쏟아냈으니 낯부끄럽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자는 이러한 보존상태로만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유산은 단순히 그 유산의 값어치만 따질게 아니다. 그 문화유산을 알아보고 지켜냈으며, 많은 이들과 공유한 사람의 향기가 더욱 그 유산의 가치를 높인다.

<간송본>을 보자. <간송본>의 원소장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경북 안동의 진성 이씨 가문 인물인 이한걸(1880~1950)’이며, 이것을 당대의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에게 매각한 이는 ‘이한걸의 아들인 이용준’으로 알려졌다. <해례본>의 가치를 알리고 매매를 중간에서 도운 이는 이용준의 서울 경학원(성균관대 전신) 시절 스승인 김태준(1905~1950)이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용준이라는 인물이 판 것은 똑같은데, 출처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즉 이용준(이한걸의 3남)이 처가(광산 김씨 안동 종가)에서 유출했다는 주장이다. 이용준의 처조카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할아버지(이용준의 장인)가 고모부(이용준)에게 ‘선비가 남몰래 책을 춤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 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두가지 버전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맞다고 손들어 줄 계제는 아니다.

다만 이용준의 처조카가 “일부에서 고모부를 도둑이라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훈민정음 보존에 공을 세운 셈”이라며 “고모부(이용준)가 훈민정음을 알아보고 훔쳐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평가했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해례본> 매매과정에서 등장하는 국어학자 김태준은 어떤 인물인가. 경성제대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강사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던 김태준은 경성콤그룹에 참가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만약 김태준이 <해례본>을 간송이 아니라 당시 경성제대 한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에게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고노는 훗날 “1940년 당시 경성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놓쳤다”고 아쉬워했단다. 그러고보면 이용준이 아니었다면 한낱 벽지로 쓰였을 수도 있었고, 김태준이 아니었다면 일본으로 반출됐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개한 간송 전형필의 공적에는 비할 수 없다. 간송은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면서 <해례본> 가격으로 1만원(기와집 10채값)외에 중개인에게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었단다.

경향신문 1952년 11월12일 자. 희방사(영주 풍기) 등에서 <훈민정음>를 찍어낸 원판목 400매가 불에 탔다는 기록이다. 제3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 현현할 수 있다.

 

간송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또 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 해례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간송은 훗날(1959년) 영인본 출간과 관련해서 “서고 깊이 넣어두었다가…영인본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술회했다. “영인본 출간으로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대하게 됐고…연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는 <한글학회 100년사>의 평가가 심금을 울린다.

이처럼 <간송본>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고 보존하며 공개하고 연구한 이들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래서 <간송본>은 국보 제70호(1962년 지정)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이 되었다. 만약 이들이 해례본의 가치를 몰라봤다면 <간송본>은 이미 80여 년 전에 한낱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른다.

 

■배익기씨의 공로도 있다

반면 <상주본>은 어떤가. 2008년 배익기씨 공개이후 소유권 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배익기씨가 민사에서 패소하여 <상주본>의 소유권은 조용훈씨(2012년 작고)에게 넘어갔다. 승소한 조씨가 유물을 확보하지 않은채 문화재청에 기증함에 따라 <상주본>은 국가로 귀속됐다. 배씨는 <상주본>을 조용훈씨의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4년 5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절도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배익기씨는 민사에서는 졌지만, 형사에서는 이긴 셈이 됐다.

배익기씨의 공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상주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공개했기 때문이다. 만약 배씨가 아니었다면 <상주본> 역시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배씨는 이용준이나 김태준과 같은 인물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의 문화유산을 인질로 삼아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간송본>의 가치를 알아본 이용준이나 김태준 같은 이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배씨의 용기를 기대한다.(이 기사는 지난 5일 인터넷 판에 2회에 걸쳐 연재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팟캐스트’용으로 재정리·보완한 것입니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입력 2019. 11. 5. 05:00수정 2019. 11. 8. 13:33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출현한 <훈민정음 해례본>(원본 혹은 간송본).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서문 포함)는 전해졌지만 한글의 창제원리가 적힌 ‘해례’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 해례본이 출현함으로써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다.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에서

 

최근 문화재위원회는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을 보관할 간송미술관 보호각의 청사진을 조건부 가결했다. 2021년 완공될 보호각에 들어설 문화유산은 국보 12건, 보물 32건, 시도지정문화재 4건 등이다. 이중 최고의 문화유산은 뭐니뭐니해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보호각 설립 계획안의 가결을 계기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최근 말썽을 빚고 있는 <상주본>과 <간송본>을 2회에 걸쳐 비교해보고자 한다. ①은 간송본의 출현에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가 “반갑도다!”라 감탄사를 외친 이유, ②는 <간송본>과 <상주본>과의 비교가 어림없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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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뜻하였으랴. 수개월전 (훈민정음) 원본(이하 해례본)은 경북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 모씨의 소유로 돌아갔다…단지 책을 입수한 지 겨우 열흘도 넘지 못하여 그 번역문이 정리되지 않은 원고상태로 연재하는 것임을….”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는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신문은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소식과 함께 훈민정음 한문본 해례본의 핵심내용인 ‘훈민정음 해례(보기를 들어 풀어줌)’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방법)를 일부 번역해서 실었다. 당시 국어학자인 방종현(1905~1952)과 홍기문(1903~1992)은 해례본을 번역하여 8월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런데 연재가 끝난지 불과 6일 뒤인 8월10일 조선일보는 강제폐간됐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킨 뒤 우리말·글의 교육과 사용을 금하고(1938년), 창씨개명을 단행(1940년)하면서 소통과 지식의 매개체였던 전국종합신문 폐간까지 강행한 것이다. 신문 폐간을 불과 10여 일 앞둔 암흑기 조선에서 한줄기 빛처럼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소식이 전해졌으니 얼마나 극적인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는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의 발견을 두고 “경북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면서 이렇게 외쳤다.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7월30일 조선일보.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훈민정음 창제후 494년 행방이 묘연했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사실을 알리고 있다. 조선일보는 5회에 걸쳐 훈민정음 원본 관련 소식을 연재했고, 연재가 끝난 8월4일 이후 6일만에 강제폐간됐다. |김슬옹 전문위원 제공

 

■외솔 최현배가 비명을 지른 이유

그렇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이 어떤 의미를 갖기에 외솔이 비명을 질렀을까.

훈민정음 원본 혹은 해례본은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한문으로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한글을 만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8세기 실학자들은 해례본의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문만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찾기는 했다. 이것이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익숙한 <언해본>인데, 세종의 한문 서문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서문을 포함한 ‘예의’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있다. 하지만 해례가 빠진 <언해본>으로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알 수 없었다. 외솔 최현배는 이를 두고 “훈민정음(한글) 반포 뒤 훈민정음(해례본)을 찍어 폈다는 기록이 없었다”면서 “최세진(1468~1542)·신경준(1712~1781)·유희(1773~1837) 같은 한글 학자도 그 원본을 보지 못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세종이 직접 지은 서문·예의 7쪽 중 4쪽이 사라진채 발견됐다. 총 66쪽 중 62쪽은 남아있다. 없어진 부분은 이용준 등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토대로 채워넣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편하게 쓰고자 한다(便於日用耳)’에서 ‘이(耳)’자를 ‘의(矣)’자로 잘못 쓰는 등의 오류가 생겼다. 이 오류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은 바로 외솔 최현배였다.

 

■화장실 창살론까지

그런 <해례본>이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창제의 원리를 두고 온갖 억측이 나왔다. 급기야 ‘화장실 창살설’까지 등장했다. 화장실에 앉아 새 문자 창제를 고심하던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이었다. 대부분은 일제강점이 일본 어용학자들의 한글폄훼론이다. 일제 관학자들은 <언해본> 마저도 위작이라고 깔아 뭉갰다.

끝내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그저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고 신문까지 강제폐간하던 바로 그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홀연히 나타났으니 외솔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한글반포(1446년) 이후 무려 494년만의 일이었다.

간송 전형필.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와집 10채값인 1만원에 구입하면서 거래를 주선한 이에게는 수고비로 1000원을 더 주었다. 귀한 유물은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기와집 10채 가격으로 구입한 <훈민정음 해례본>

그렇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해례본>을 처음 소개한 방종현은 ‘수개월전 경북(안동)의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의 모씨 소유가 됐다’고 했다. ‘시내의 모씨’는 당대의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그러나 원소장자 및 매각자와 관련된 정보는 1950년대 경북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정철은 1950년과 54년 국어국문학회가 내는 학술지 <국어국문학>에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정철은 이 글에서 10여년간 베일에 싸였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소장자는 ‘경북 안동 와룡면 주하동에 사는 진성 이씨 가문의 후촌 이한걸(1880~1950)’이라 소개했다.

 

“이한걸 선생의 3남인 이용준이 서울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공부했는데…이용준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 김모(국어학자 김태준)에게 자기 고향 안동에 훈민정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김모는 곧 전형필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안동으로 내려와서 현물(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게 되었습니다…김모는 사례금으로 3000원을 책주인인 후촌 선생에게 치르고….”

정철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진성 이씨 가문이 소장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일찍이 진성 이씨의 선조가 여진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상으로 받아 늘 상자 속에 감추어 보존했고, 연산군(재위 1494~1506)의 한글 탄압 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첫머리 두 장을 뜯어버리고 둘둘 말아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을 전형필이 소장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학술서. 외솔 최현배는 1942년 <한글갈>에서 “ 최근에 경북 모 고가에서 발견되어 경성 전형필님의 간수로 된 <훈민정음>”이라고 밝혔다. |김슬옹씨 제공

 

아닌게 아니라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으니, 바로 첫머리 두 장(4쪽)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서예가이기도 한 이용준이 안타깝게 여겨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의 서문 등을 참고해서 안평대군 글씨체를 모방하여 채워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편하게 쓰고자 한다(便於日用耳)’에서 ‘이(耳)’자를 ‘의(矣)’자로 잘못 쓰는 등의 오류가 생겼다. 이 오류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은 외솔 최현배였다.

“어쨌든 김모(김태준)는 ‘국어학계의 연구자료로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후촌 선생은 김모의 소원을 승락하고 동시에 500여년 전해오던 국보 원본 훈민정음을 김모(김용준)의 수중으로(결국 전형필님) 인도하게 되었습니다.”(정철)

우여곡절 끝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쥔 간송 전형필은 1958년 소장 경위를 직접 밝혔다.

“친한 서적상이 ‘시골에 훈민정음 원본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틀림없이 원본이면 무슨 노력을 해서라도 살테니 가져오라’고 했어요…1년 후 그 사람이 와서 ‘오늘 저녁 가져오겠다’고 했어요. 초조하게 그 사람을 기다렸는데 밤중에 온 그 사람이 개선장군처럼 위세당당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전형필은 “그때 속심으로 ‘가져왔나보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헌 종이에 아무렇게나 돌돌말아 쥔 구겨진 종이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당시 간송 전형필은 <해례본>의 가격으로 1만원(기와집 10채값)을 군말없이 내줬고, 거기에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는 간송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훈민정음 간송본>(이하 간송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459년(세조 5년) 나온 <훈민정음 언해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시작된다. 그러나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와 용법이 나오지 않았다. |서강대 소장

 

■진성 이씨냐, 광산 김씨냐…원 소장처의 논란

최근에는 훗날 <훈민정음 간송본>의 원소장처를 둘러싸고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왔다.

즉 <간송본>은 이용준(이한걸의 3남)이 처가(광산 김씨 안동 종가 ‘긍구당’)에서 유출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긍구당설’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는 이용준이 광산 김씨 안동종가의 종손이자 이용준의 장인인 김응수(1880~1957)에게 보낸 편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즉 “(긍구당에서) 가려뽑은 책은 몇 분의 1에 불과하여 서가에 영향은 깊지 않으며…값을 90원으로 결정했다”는 편지와, “(긍구당에서) <매월집>을 가져온 일은 송구하옵고 범한 행동은 스스로 큰 죄라 여겨 할 말이 없지만…용서하심이 어떠냐”는 편지 등이 그것이다.

<간송본>이 긍구당에서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용준이 처가인 광산 김씨 안동 종가인 긍구당에서 <매월집> 등을 빼돌렸을 때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유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훗날 김응수의 손자(김대중)가 “고모부(이용준)가 긍구당의 책방에서 <훈민정음 원본>과 <매월당집>을 유출해서 조부(김응수)가 고모부에게 ‘공부한 선비가 남몰래 책을 훔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 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단다.

이들은 연산군 때 한글(언문) 탄압을 피하려고 세종의 어제 서문 2장(4쪽)을 뜯어냈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은 한문으로 적혀있기 때문에 떼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의 한글탄압이 아무리 극심하다 한들 임금(세종)이 하사한 내린 책, 그것도 ‘어제 서문’을 뜯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해례본의 낙장 2장은 ‘원소유자인 광산 김씨 집안이 대대로 찍었던 장서인, 즉 증거를 없애려고 이용준이 찢은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전히 <간송본>의 원소장처가 진성 이씨 가문이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 이들도 있다. <매월당집> 만으로는 <간송본> 유출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46년 조선어학회가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영인본. 간송은 이 영인본의 출간을 허락함으로써 훈민정음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김슬옹씨 제공

 

■훈민정음의 가치를 알아본…

원소장처가 어디이든 <간송본>의 가치는 값으로 칠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할 수 있다.

어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문화유산을 많은 이들에게 공개하여 연구토록 하는 것은 더더욱 평가받아야 한다.

사실 <간송본>이 이용준 친가인 진성 이씨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인지 혹은 아니면 처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보존해온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당시 24살인 이용준은 아마도 친가나 처가 어른의 동의없이 <간송본>을 팔아넘긴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 과정에서 증거를 없애려고 앞 두 장을 뜯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또한 명백한 과오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과오를 감안하더라도 이용준은 <간송본>의 가치를 알아본 인물이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다. 이용준의 조카이자 광산 김씨 문중 인물인 김대중은 “일부 학자들이 고모부를 도둑이라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훈민정음 보존에 공을 세운 셈”이라면서 평가했단다.

“고모부가 똑똑해서 훈민정음을 알아보고 훔쳐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르는 입니다.”(최기호의 ‘훈민정음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에서)

이용준이 아니었다면 ‘무가지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낱 벽지로 썼을 수도 있었다는 모골 송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2015년 간행된 <훈민정음 복간본>. <훈민정음 간송본>은 1962년 국보(제70호)로 지정됐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김슬옹씨 제공

 

■일본학자에게 넘어갔다면…

이용준과 함께 해례본을 간송에게 넘기는데 핵심역할을 한 김태준(1906~1950)은 사회주의 국어학자이다. 당시 경성제대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강사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고, 재직 중 경성콤그룹에 참가해서 인민전선부를 담당했다. 김태준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주하·김삼룡 등과 함께 한국군에게 총살 당했다. 국어학자 안병희(1933~2066)는 바로 김태준의 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김태준씨가 해례본(간송본)을 전형필씨가 아니라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에게 가져갔다면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다. 김태준씨의 그때 일이 얼마나 휼룽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김슬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은 “안병희가 말하는 일본인 교수는 1940년 당시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였다”고 밝힌다. 바로 그 고노가 1947년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국어학자인 김태준이 일본인 교수에게 <해례본>을 넘길리 없었겠다. 그렇지만 순수 학문 연구자의 입장에서 같은 경성제대 강단에 섰던 고노에게 <해례본>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골이 송연하다.

■영인본 출간의 의미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공로야말로 첫손가락에 꼽혀야 한다.

한글학회장을 지낸 김계곤(1926~2014)은 “아무리 가산이 넉넉하다한들 돈을 보람있게 쓸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몇사람이나 되겠냐”면서 “간송의 공로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간송이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시절인 1940년대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와집 10채값을 주고 사들여 지켜냈다. 이것만으로도 천고에 길이 빛날 업적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 해례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간송은 훗날(1959년) 영인본 출간과 관련해서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오랫동안 서고 깊이 넣어두었다가 해방 이후…널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영인본이 나와 널리 책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적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소장자의 입장에서는 꽁꽁 숨겨놓고 혼자만 감상해야 박물관적인 희소가치가 생기고, 그 가치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가치있는 문헌을 오래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공유’라 여겨 영인본 출간을 허락한 것이다. <한글학회 100년사>는 영인본 출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간송본>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민족적인 경사였다. 그러나 손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영인본이 나옴으로써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대하게 됐고 신진들의 날카로운 분석도 뒤따랐다.”

이렇게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전세계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참고자료>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상규,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

최기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회>, 31, 한국어학회, 2006

박영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 <한글새소식> 395, 한글학회, 2005

김주원, ‘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권, 국어학회, 2005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신문 선임 기자입력 2019. 11. 5. 11:21수정 2019. 11. 7. 10:28

2008년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총 66쪽 가운데 18쪽이 없어서 ‘불완전한 진본’이라 평가된다. 66쪽 중 4쪽이 없는 <간송본>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훈민정음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 어림없는 소리다.’ 언젠가부터 2008년 경북 상주에서 확인된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다닌다. 그러나 이 상주본을 직접 봤거나 깊게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고개를 내젓는다. 어떤 이는 “<상주본>이 과연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랍다”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왜 ‘<상주본>=1조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왜 전문가들은 ‘문화유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고 있는 것일까.

 

■출현하자 마자 소유권 분쟁

때는 바야흐로 <간송본>이 출현한지(1940년) 68년 만인 2008년 7월 30일 엄청난 소식이 전해진다.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추정되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북 상주에 사는 배익기씨가 집 수리 도중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기에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상주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었다. 상주본을 처음 공개한 배씨와 ‘내가 원 소유주다’라고 주장한 조용훈씨(2012년 작고)의 소유권 분쟁이 시작됐다. 결국 대법원은 조씨의 소유권을 최종 인정했다. 조씨는 상주본을 국가(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2016년 승계 집행문을 받았다.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분)의 적법한 소유권은 문화재청으로 귀속됐다. 배씨는 이 상주본을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4년 5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절도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배익기씨는 민사에서는 졌지만, 형사에서는 이긴 셈이 됐다. 배씨는 이후 이 상주본을 꽁꽁 숨겨놓은 채 “문화재청이 재산가치 추정액(1조원)의 10%인 1000억원만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버텨왔다.

2008년 발견된 <상주본>은 낙장이 많아 <간송본>보다는 유물로서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진다. 다만 <상주본>에는 원소장자가 기록한 메모가 남아있다. 누군가 이 해례본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용법)를 요약하면서 자신의 견해 등을 기록한 주석이다. 사진은 칠음 오성 배치에 대한 메모이다.|이상규 교수의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년에서

 

■<상주본>도 나름 가치가 있지만…

왜 1조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2011년 9월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상주본>의 감정가액을 의뢰하자 문화재위원 등 서지학자 4명이 모여 ‘금전적 가치가 부적절한 무가지보지만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으로 판단한 게 빌미가 됐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경제적 가치가 8000억원 정도라는 자료가 있으니 그보다 가치가 더 큰 해례본은 1조원 이상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1조원 운운’은 상징적인 금액이고, 그보다는 ‘무가지보’라는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게 문화재위원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배익기씨가 거두절미하고 ‘1조원’을 고집해왔던 것이다. 문화유물을 두고 굳이 가격으로 매겨야 한다는 배금주의가 은연중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던 것이 문제였다.

 

물론 <상주본>의 가치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특히 <상주본>을 직접 보았거나 검토한 전문가들은 <상주본>에 원소장자가 행간 아래에 남긴 필사 묵서를 주목하고 있다. 누군가 이 해례본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용법)를 요약하면서 자신의 견해 등을 기록한 일종의 주석이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 주석은 성운학자로서 대단한 식견을 가진 이의 기록”이라면서 “이 내용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원 소장자가 어떤 가문의 학자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소장자가 달아놓은 메모(주석)은 <상주본>의 학술적 가치를 높인다”고 평가했다. 또 유일본이었던 <간송본> 외에 <상주본>이 현현함으로써 두 해례본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이상규 교수는 “두 판본을 비교해보면 동일한 목판에서 쇄출한 동일한 원본”이라고 밝혔다. 그중 <간송본>은 개장(改裝)과 함께 원본의 아래 윗부분의 일부를 잘라낸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지만 <상주본>은 위 아래가 잘라지 않은 원래의 판본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상주본>의 자모배열에 대한 필사기록. 이상규 교수는 “이 주석은 성운학자로서 대단한 식견을 가진 이의 기록이며 이 내용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원 소장자가 어떤 가문의 학자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상규 교수의 논문에서

 

■<상주본>은 ‘불완전한 진본’

하지만 유물로서의 <상주본> 가치는 <간송본>과는 감히 견줄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간송본>에도 흠결이 남아있다. 총 66쪽(33장) 가운데 표지와 세종의 어제 서문 등 앞부분 4쪽(2장)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66쪽 중 62쪽이 건재하다. 하지만 <간송본>과 달리 <상주본>에는 떨어진 부분이 상당히 많다. 2008년 배익기씨의 공개 때 <상주본>을 실사한 임노직 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상주본>의 경우 세종의 어제 서문·예의 8쪽(4장)과 해례 부분 8쪽(4장), 뒷부분의 정인지 서문 2쪽(1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밝혔다. 총 66쪽 가운데 18쪽이 탈락되고 48쪽이 남은 불완전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경북 영주 풍기 희방사에서 훈민정음을 찍어낸 판목 400여장이 한국전쟁 도중 소실되었음을 알려준 1952년 11월12일 경향신문 기사. 만약 제3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다면 역시 경북 지역일 것으로 기대된다.

 

또 공개 당시 국립국어원장으로서 하루늦게 안동으로 달려가 원본 일부와 편집 이전의 안동 MBC 촬영본을 검토했다는 이상규 교수는 “총 66쪽 가운데 약 3분의 1만 보인다”면서 “공개된 자료 중 가장 앞면의 경우도 3분의 1이상 부식되었다”고 밝혔다. <상주본>의 보존상태가 <간송본>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주본은 ‘불완전한 진본’이라는 것이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무엇보다 ‘간송본’의 경우 3쪽 정도는 남아있는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부분이 ‘상주본’에는 단 1쪽도 남아있지 않다”고 밝혔다.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상주본>은 발견되었을 때 낙장이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하다”면서 “불에 탄 것인지 고의로 태운 것인지 확인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고의적인 훼손이 의심스럽다”면서 “<상주본>은 문화유물로서의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상주본>은 <간송본>과 겨룰 수 있는 깜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상주본>이 <간송본>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고, 후대에 표제와 주석이 새롭게 더해졌으니 학술가치는 대단하다’는 수식어가 상식처럼 퍼졌다. 웬일일까. 굳이 다른 이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필자의 여러 기사들에도 이런 수식어가 복사한 것처럼 반복해서 붙어있다. 제대로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기존의 수식어를 전제로 기사를 쓴 것이다. 낯뜨거운 일이다.

■죄인으로 전락한 <상주본> 소장자

<상주본>의 가치가 결코 <간송본>을 넘어설 수 없는 핵심요소는 또 있다. 바로 국보 제70호(1962년 지정)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고 보존하고 연구한 사람들의 숨결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간송본>은 이미 80여 년 전에 한낱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상주본>은 어떤가. 물론 <상주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공개한 배익기씨의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배씨가 아니었다면 <상주본> 역시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지금 배익기씨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문화유산을 인질로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있다. 뒤늦게나마 이용준이나 김태준, 전형필 등의 뒤를 따르는 인물로 평가가 뒤바뀔 지는 배익기씨의 결단에 달려있다.

<훈민정음 상주본>은 2015년 3월 화재로 일부 훼손됐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상주본>의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있다.|연합뉴스

 

■안동에서 또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올까

사족을 달자면 <간송본>과 <상주본> 등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곳이 다름아닌 경북 안동 지역이라는 점이 심상치 않다. <상주본>도 원래는 안동의 사찰인 광흥사 나한상 복장유물이었는데, 1999년 절도범이 훔쳐 조용훈씨(작고)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광흥사는 조선 전기 불경 등을 간행했던 곳으로 알려져있다.

2013년에도 광흥사 지장전 인왕상과 시왕상 복장에서 <월인석보> 권7, 권8, 권21(2종) 등 4책과 <선종영가집 언해> 등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들 자료에는 훈민정음 반포 직후의 글자와 말이 담겨 있어 한글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찍은 목판은 안동 광흥사에 보관돼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절에 불이 나면서 사라졌다”고 전했다. 광흥사 뿐이 아니다. 희방사(영주 풍기) 등에서도 <훈민정음>를 찍어낸 원판목 400매가 불에 탔다는 기록(1952년 11월12일 경향신문)이 보일만큼 영남은 훈민정음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다. 정재영 교수는 “만약 제3의 훈민정음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또다시 안동이나 그 인근지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 서문과 예의까지 완벽하게 남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영국의 역사가 존 맨의 훈민정음 찬양을 인용해본다.

“한글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일파벳의 대표적인 전형이고, 알파벳이 발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참고자료>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상규,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

최기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회>, 31, 한국어학회, 2006

박영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 <한글새소식> 395, 한글학회, 2005

김주원, ‘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권, 국어학회, 2005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CBS 김현정의 뉴스쇼 입력 2021. 06. 29. 09:51 수정 2021. 06. 29. 10:39 

"1000억 달라" 훈민정음 상주본, 낱장으로 분산 보관 가능성 (daum.net)

훈민정음 해례본 압수수색 왜 못 하나
문화재청, 관료주의 폐단 벗어나야
국보에 1호, 2호 지정번호.. 일제 잔재
사람, 문화재에 번호 매겨? 한국만 유일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대한민국 국보 1호? 하면 숭례문. 하도 외워서 절로 나오죠. 그런데 이제 ‘국보 1호 숭례문’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텐데요. 숭례문을 헐어버리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문화재명 앞에 붙이는 국보 1호, 2호, 3호. 이런 지정 번호를 없앤다는 겁니다. 굳이 왜 그렇게 하는 걸지 궁금하고 또 여러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배익기 씨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던 그거. 그거 어떻게 됐는지 오랜만에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이분을 모셨습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님, 어서 오세요.

 

◆ 황평우> 네, 안녕하세요.

◇ 김현정> 우선 국보 1호, 2호, 이거 없앤다고요?

◆ 황평우> 관리번호를 없애는 거죠.

◇ 김현정> 그러니까요. 왜 굳이.

◆ 황평우> 지금까지 유독 우리나라만 국보 제1호, 국보 제2호, 이렇게 등급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요.

◇ 김현정> 우리나라만 그래요?


◆ 황평우> 네, 사실 북한도 지금 현재 남아 있다고 얘기하는데 북한의 문화재 보호법하고 제가 꾸준히 살펴봤더니 북한은 지정제가 아니고 등록제예요. 그래서 등록제하고 지정제하고 묘하게 다릅니다. 물론 일본에 의해서 영향 받은 건 맞는데 그래서 지금 아마 제가 판단할 때는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가치번호.

◇ 김현정> 그렇습니까?

 

◆ 황평우>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김현정> 그러면 처음에 만들어질 때는 어떻게 붙여졌어요?

◆ 황평우> 사실은 이게 다 일제 때 일본이 보물관리법, 문화재 관리하면서 1930년대에 일본이 보물 1호를 남대문, 또 이렇게 해서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가까운 순서로 했다, 라는 설이 있는데요.

◇ 김현정> 조선총독부 기준으로 거리상 가까운 순?

◆ 황평우> 그리고 또 일로에서는 임진왜란 때, 임진왜란 승병이 가토하고 고니지가 동대문과 숭례문으로 진격했는데 승전기념비로 남겨놔야 한다는 설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요.


◇ 김현정> 설만 있군요. 정확한 건 없군요.

◆ 황평우> 그렇죠.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 우리나라가 만들면서 그냥 그거를 고쳤으면 되는데 안 고치고 그대로 남겨둔 게 문제가 되고요. 전부 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제가 꾸준히 살펴봤더니 일본은 문화재보호법을 서구 유럽에서 받아왔거든요. 그럼 주로 프로이센에서 많이 받아왔는데 일본이 서구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법률이나 모든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자기네들 나름대로 변형을 해버린 게 서열화, 등급화. 그래서 그 사람들은 1호, 2호, 3호 같은 걸 되게 좋아하죠. 그게 남아 있는 거죠.

◇ 김현정> 그렇군요. 그러면 우리는 국보 1호, 보물 1호 하면 거기에서부터 제일 중요한 거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거라는 것도 아니고.

◆ 황평우> 혹시 김현정 앵커께서 고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 몇 번이었어요?

◇ 김현정> 제 번호요? 매번 달랐죠.

◆ 황평우> 1번이 공부 제일 잘했어요?

◇ 김현정> 그건 아니죠.

◆ 황평우> 그런 식으로 우리 중고등학교 때 번호 매기는 나라도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일본하고. 그것도 일제 잔재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서 번호를 매기거나 또 등급 가치처럼 여기게 만드는 게 제국주의의 본질이었다는 거죠.

◇ 김현정> 일제 잔재인데 일찌감치 왜 안 없앴어요?

◆ 황평우> 그게 1962년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문화재보호법을 우리 나름대로 제정을 하면서 그때 교체해야 되는데 우리 그동안 바꾸면 교과서 바꿔야 되죠. 뭐 바꿔야 되죠, 이러니까.

◇ 김현정> 표지판 바꿔야지. 복잡하니까.

◆ 황평우> 그래서 그냥 그대로 뒀습니다.

◇ 김현정> 이번 기회에 더 미루지 말고 없애버리자.

◆ 황평우> 잘 바꾼 거죠.

◇ 김현정>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 황 소장님 나오시면 꼭 좀 질문드려야지 했던 게 뭐냐 하면 문화재 얘기 나오면 늘 궁금한 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그 귀한 거. 그거 지금은 어떻게 됐나? 배익기 씨라는 분이, 상주에 사시는 배익기 씨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는 거를 알고 그분하고 인터뷰를 여러 번 했어요. 그런데 그분은 1000억 다오, 1000억 원 정도 주지 않으면. 지금도 그 입장입니까? 지금 해례본 잘 있습니까?

◆ 황평우> 사실 이 질문은 없었던 얘기인데 지금 와서 들었던 얘기인데.

◇ 김현정> 갑자기 떠올랐어요.

◆ 황평우> 그런데 이 얘기를 참 하기가 난감한 문제지만 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게 이제 문화재청에 사범단속단이라고 있는데 꾸준히 이제 잃어버린거나 도난 문화재에 대해서 찾는 팀이거든요. 이 팀을 전면 다 교체를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시 단속반들은 굉장히 강한 사람들과 같이 계속 설득도 해야 되고 카리스마도 있어야 되고 나름대로 도난 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잘 이용하고.

◇ 김현정> 노하우가 있군요, 그분들의.

◆ 황평우> 노하우가 있어야 되는데 11년 이상 된, 또 이런 사람들을 전부 교체해버리고 1년 정도 경험 있는 사람도 다시 불러다 놓고. 제가 좀 말씀드리기 애매하지만 고위직들의 보복인사 아니냐, 라는 지금 얘기도 나옵니다. 왜냐하면 사범단속반 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이 됐는데 이게 국회까지 가니까 이게 보복인사지 않았나라고 얘기를 하고 있고요.

◇ 김현정> 무슨 단속반이요?

◆ 황평우> 문화재 사범단속반에서 이 일을 전담하는데 이게 준사법경찰이거든요. 이거를 굉장히 경험이 필요하고 한데 이걸 교체했는데 교체한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느냐, 라고 지적을 하고 있고요. 그러고 나서 또 궁금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잘 있느냐, 문제잖아요.

◇ 김현정> 잠깐 그 전에, 그분들이 11년이나 있었는데 상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같은 걸 못 찾아오니까 다른 사람이 해봐라 하고 했다고 교체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요?

◆ 황평우> 그거는 아니고요. 사범단속반 안에 다른 문제. 예를 들어서 사범단속단의 체질강화나 인력보강이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좀 이제 윗분들하고.

◇ 김현정> 정치적인 문제가 있다 그 말씀이세요?

◆ 황평우> 갈등이 많았는데 그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보강하고, 인력 보강을 하고 전문성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전부 다 교체해버리는 거로 이렇게 결정이 나니까 제가 봐도 굉장히 아쉬워요. 그런데 그런 부분이 있는데. 확인을 해 보니까 해례본은 낱장으로 해서 코팅을 했는지 모르지만 여러 군데로 분산돼 있다, 라는 설이 제일 유력한 설이고요.

◇ 김현정> 아니, 잠깐만요. 이거 진짜 귀한 거잖아요.

◆ 황평우> 지난번에 불나고 난 다음에 사진 한 장 나왔었죠. 코팅돼서 낱장으로 나왔죠.


◇ 김현정> 그것만 배익기 씨가 “빨리 돈 내고 사가십시오. 나 이거 보관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집에 화재가 나서 이만큼 탔어요.” 하면서 그거를 공개했단 말이에요.

◆ 황평우> 네, 그런 식으로 낱장으로 여러 군데 분류가 돼 있고 숨겨져 있고요. 그래서 문화재청에 관련한 사람들한테 제가 확인을 해 봤더니 압수수색 영장을 발동을 하면. 그런데 지금까지 소유는 문화재청으로 돼 있거든요.

◇ 김현정> 굉장히 법적으로 뭔가 지리한 재판이 있었죠. 마지막 결론이?

◆ 황평우> 소유권은 문화재청이지만 지금 실제 점유하고 있는 건 배익기 씨거든요. 그래서 이거를 압수수색 영장을 발행을 하면 찾아올 수 있는데, 반 정도 이상은 찾을 수 있다. 경험자들은. 그런데 문제는 압수수색 영장을 발행을 안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만약에 압수수색 영장을 발행했다가 압수수색 영장 집행을 하다가 소장자가 조금 반발로 훼손을 하거나 이럴 경우를 하면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져야 되니까 책임지기가 싫은 거예요.

◇ 김현정> 누구도 섣불리 못하는군요.

◆ 황평우> 그래서 어떤 청장 때나 본인이 하는 게 아니라 다음으로 미루고 미루고. 그러니까 이게 지금 저는 관료주의의 폐단 아니냐. 이런 걸로도 생각을 해 볼 수 있고요. 또 두 번째는 지금 사립대학에, 몇 몇 오래 된 대학의 도서관에 고문서들 정리가 안 된 게 꽤 많거든요. 여기를 국고 지원을 하다 보면 좋은 자료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 김현정> 그 해례본이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는 배익기 씨, 점유자 배익기 씨 제외하고는 모르는 상태인데 아까 그 노하우 가지고 계신 문화재청 분들이 내 생각에는 낱장으로 어디 어디 뭍어 있는 것 같다 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 황평우> 그렇죠.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제가 계속 탐문을 해 보니까 그렇게 답변을 해왔어요.

◇ 김현정> 큰일이네요. 그게 그렇게 될 물건이 아닌데.


◆ 황평우> 그래서 저는 지금도 문화재청에서 강력하게 실시를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문화재에 관한 이야기, 황평우 소장님, 고맙습니다.

◆ 황평우>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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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김현정의 뉴스쇼]

 

앵커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가 보상금으로 천억 원을 달라며,실물도 공개하지 않고 있죠.

그런데 11년 전 이 상주본을 공개했을 때부터, 책 전체의 1/3 이상이 없었다는 분석이 새로 나왔습니다.

알려진 것보다 불완전한 상태라는 건데, KBS취재진이 만난 소장자는 상주본에 세종대왕 친필이 있다는 뜻밖의 주장을 내놨습니다.

유동엽 기자입니다.

리포트


2008년 공개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법적 소유권을 가진 문화재청이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소장자 배익기 씨는 책을 숨긴 채 거액을 요구하며 협상을 질질 끌고 있습니다.

최근 KBS 취재진과 만난 배 씨.

다시 보상금을 언급합니다.

[배익기/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 "천억이면 적은 돈이 아니니까 그 정도 주면 내가 따지지 않고 내주겠다..."]

그러면서 상주본에 세종대왕의 친필이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본문 위아래에 적힌 작은 글씨가 세종의 친필이란 겁니다.

[배익기/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 "세종이 보고 (신하들이) 뭔가 잘 모른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지시한 내용이 있고..."]

그래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값어치가 높다고 주장합니다.

[배익기/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 "간송본은 분명히 부본이고 제 것은 특히 (임금이 보는) 어람본, 진상본이다..."]

그렇다면 상주본의 상태는 어떨까?

2008년 공개 당시 촬영 화면을 분석한 전문가를 만났습니다.

[배익기/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 "이게 남아 있는 첫 페이지입니다."]

책을 넘기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첫 장부터 여덟째 장까지가 없습니다.

촬영 당시 배 씨는 중간과 끝의 1장씩이 없다고 했습니다.

합하면, 총 33장 가운데 10장 이상은 원래 없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천명희/안동대 국문과 교수 : "3분의 1에 해당하는 책의 분량이 없다는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다시 재고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화재청은 배 씨와 45차례나 면담을 했지만 정작 해례본의 정확한 상태조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상헌/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문체위원 : "(상주본의) 상태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까?"]

[정재숙/문화재청장 : "아직 저희가 실물을 찾지 못해서 어느 정도 상태인지 정확하게 설명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은 강제집행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상주본의 운명은 여전히 소장자 배 씨에게 맡겨진 막막한 상황입니다.

KBS 뉴스 유동엽입니다.

 

 

입력 : 2018.10.08 15:55 수정 : 2018.10.08 16:15

“572돌 한글날에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볼 수 없다” - 경향신문 (khan.co.kr)

 

 

2018-02-22 18:09 송고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소송 기각…강제집행 길 열려 - 뉴스1 (news1.kr)

 

 

입력 2015.04.06. 10:57

사라진 훈민정음 "벽 속에 있었다" (daum.net)

 

 

송고시간2015-03-27 16:10

'훈민정음 상주본' 행방 묘연…그러나 불 타지 않은듯 | 연합뉴스 (yna.co.kr)

 

 

[우리말 쓰기]

561돌 한글날, '하이 세종' 외치는 대한민국:진보와 정론의 인터넷 신문 - 대자보 - (jabo.co.kr)

[김영조의 한글사랑] 시민들 거리에서 “나라말살리기서명운동” 시작

대자보 2007년 10월 8일

 

우리나라는 지금 누구나 정보통신(IT)강국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것은 한글이 으뜸으로 큰 몫을 했다고들 말한다. 한글이 그 어떤 글자보다 정보통신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특히 휴대전화와 컴퓨터 자판에는 알파벳보다 한글이 훨씬 잘 맞는다. 어떤 방식이든 간에 영자 자판과 비교할 때 그 운용체계가 훨씬 합리적인 까닭이다. 


예를 들면 '널 사랑해'와 'I love you'를 견주어보면 자모음의 자소 자체는 한글은 10자, 영어는 8자로 영어가 적다. 그러나 실제 휴대전화 자판 누르는 횟수를 보면 한글은 18번, 영문은 커서를 옆으로 옮기는 것을 제외하고도 26번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컴퓨터에서 한글 자판은 왼쪽은 자음, 오른쪽은 모음으로 확연히 갈라져 배우기 쉽고 치기 쉬운데 영어는 모음 글쇠 위치가 일정한 규칙이 없고 실제 칠 때도 ‘read'처럼 오로지 왼손으로만 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영문 자판을 쓰면 한글로 쓸 때보다 컴퓨터 증후군, 곧 어깨가 결리는 일이 잦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통신 강국을 만들어준 한글을 창제한 세종임금에 고마운 마음을 드려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한글날 561돌을 맞은 오늘 한글은 영어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경기도가 파주에 이어 안산 영어마을을 수백, 수천억 원을 들여 문을 열자 이에 질세라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여기저기 영어마을을 만든다. 그런데 그 영어마을들은 수십억 원에서 백억 원대의 적자에 허덕인다고 한다. 이미 실효성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아니다. 아예 영어마을이 아니라 영어도시를 만든단다. 부산시와 인천시가 영어도시 계획을 발표하자 경상남도와 밀양시는 1조 원을 들여 영어도시를 만든다고 법석이다. 이에 더하여 정부 제주도지원위원회는 7,800억 원을 투자해 제주 서귀포시를 영어도시로 바꾼다고 하여 <우리말살리기겨레모임>이 발표하는 2007 우리말 으뜸 헤살꾼에 뽑혔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교육을 하겠다는 계획을 내비쳐 영어과외 열풍을 불게 하더니 행정자치부는 동사무소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영어를 써서 “주민센터”로 바꾼다. 참고로 중국은 센터가 아닌 ‘中心(중심)’으로 쓴다.
 
정부가 이러니 기업도 뒤지지 않는다. 국민은행이 BK로 바꾸자 기업은행은 IBK로 뒤따른다. 한국통신이 KT로, 포항제철은 POSCO로, 선경은 SK로 영문기업이 되어 버렸다. 아파트들은 대한주택공사의 "Humansia"처럼 영어 이름 일색이다. 경찰청은 절도특별수사팀을 새로 만들어 영어로 "TSI(Thief Special Investigation"라고 이름 붙였고, 한국도로공사는 기업 표시를 '이엑스(EX)'로 쓴다.
 
거기에 영어는 진학과 취업의 필수 관문이 되어버려 젊은이들은 토플∙토익에 온 삶을 사르는데 삼성경제연구소의 추산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영어 사교육비는 15조 원에 이른단다, 일본보다 무려 3배나 더 들이고 있다. 하지만 한 언론사는 이렇게 엄청난 사교육비를 쓰면서도 영어 실력이 형편없는 것을 빗대 “영어 못하는 영어공화국”이라고 표현한다.
 

나라에 사는 우리 교포 조선족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구는 남의 간판에 한자보다 한글을 먼저 쓰는 등 뿌리지키기에 애를 쓰는 것에 견주면 모국인 대한민국은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제 세계는 언어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군사, 경제 강국인 것보다는 영어가 세계 공통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진단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중국은 세계 곳곳에 중국어를 퍼뜨리기 위한 “공자학당”을 열면서 400억 원의 예산을 들인다. 그런데 이제 몽골, 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연 “세종학당” 사업에 우리 정부가 투자하는 예산은 겨우 40억 원이란다.
 
국립국어원과 몇몇 한글단체, 그리고 한글을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이 몸부림치고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 561돌을 맞은 오늘 한글은 영어에 숨이 막힌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기업들이 영어를 무기로 한글의 목을 조르고 있음이다.
 
이에 “나라말살리기서명운동본부”(본부장 박용수-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 이하 본부)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일제강점기에도 선각자들이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켜냈는데 이제 와서 다시 한글이 영어에 목을 졸리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7일 일요일 이른 10시부터 12까지 본부를 꾸리는 10여 명의 회원이 서울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길거리 서명운동을 벌여 3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특히 날마다 우리말편지를 보내 한글학회의 2007년 두 번째 우리 말글 지킴이로 뽑힌 수원 농촌진흥청 성제훈 씨의 5살 난 딸 지안 양이 아버지와 함께 참여 열심히 전단을 나눠줘 큰 손뼉을 받았다.
 
일요일이어선지 통행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시민은 서명에 적극적이었으며, 답사를 나온 수십 명의 어린이는 단체로 참여하고 학교에서 서명을 받아 보내겠다며 서명용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 한 노인은 아파트 이름이 거의 영어로 되어 있어 노인들이 찾기 어렵다며, 먼저 그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본부 회원은 길거리 서명 전에 이미 개개인이 서명을 받았는데 의원 명패를 모두 한글로 바꿔 문화정치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서울시의회 박주웅 의장과 동대문구 홍사립 구청장을 비롯하여 1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날 서명을 하던 최형미(43. 서울 한남동) 씨는 “지나가다 우연히 서명을 하게 되었지만 나라말 지키는 운동에 작은 힘이라도 보탠 듯하여 보람을 느낀다. 정말 요즘 영어가 온 나라를 뒤덮은 듯하여 안타까웠는데 이제라도 서명운동을 통해 한글이 숨 막히는 것을 절대 막아야 한다. 그리고 한글이 자랑스럽게 세계 공통어가 되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박용수 본부장(74살)은 말한다. “지금 나라말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 세종임금의 큰 은혜인 한글, 일본 강점기 때 선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한글이 우리 대에 와서 영어에 짓밟히고 있다. 우리 모두 떨쳐 일어서야 한다. 세종임금과 선각자들에게 배은망덕한 후손이 되어서도, 어리석게 우리의 가장 큰 무기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단연코 모든 국민과 함께 한글을 지켜낼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10월 말까지 1차 서명을 마치고, 이를 모아 대통령 후보들에게 한글 사랑 실천을 공약으로 내걸도록 종용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한글이 굳건히 설 때까지 서명운동을 그치지 않을 것이란다.
 
 
언어 철학자인 박영식 전 문교부장관은 어떤 학술대회에서 “한 명문대 교수가 일본 유명대학에 가서 우리 학교는 영어강의가 30%인데 앞으로 50%까지 늘일 예정이라고 했더니 일본인 교수는 우리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계화 바람 속에 살아남으려면 우리 것, 우리말을 명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최고의 글자라고 칭찬하기에 침이 마른다. 하지만 정작 제 나라 사람들은 한글을 외면하고 영어를 극진히 모시기에 바쁘다. 자원도 없고 작은 나라가 어떻게 세계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문화, 그 가운데서도 한글을 내세우는 길밖에 없을 터이다. 우리 모두 나서야 한다. 영어에 정신이 팔린 정부와 기업들에 매운 채찍을 때려야 한다. 그래서 한글이 나라말이 다시 우뚝 설 수 있도록 작은 힘이라도 모아야만 하지 않을까?
[나라말살리기서명운동본부] ▶ ☎ (02) 722-1824  sol119@empal.com

 

 

 

역사스페셜 –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2019. 10. 7

https://youtu.be/CgGGi_ATrX8

 

 

 

<참고자료>

 

훈민정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훈민정음 (naver.com)

 

 

훈민정음 (naver.com)

 

 

훈민정음 해례본 (naver.com)

 

 

훈민정음언해본 (naver.com)

 

 

한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글/역사 - 나무위키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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