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기자입력 2024. 3. 7. 05:00수정 2024. 3. 7. 11:09

‘아파트 고분’ 속 ‘모계 근친혼’ 흔적…1500년 전 영산강은 ‘여인천하’였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아파트 고분’ 속 ‘모계 근친혼’ 흔적…1500년 전 영산강은 ‘여인천하’였다[이기환의 흔적

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을 발굴 중이던 전남대 조사단이 심상치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굴삭기로 쌓인 소나무를 정리하면서 흙을 걷어내다가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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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을 발굴 중이던 전남대 조사단이 심상치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굴삭기로 쌓인 소나무를 정리하면서 흙을 걷어내다가 큰 판석(판자 모양의 큰 돌)들이 노출된 것이었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 주먹 크기의 틈새가 보였다. 고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흥분된 마음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함척(函尺·측량 자)을 넣어 보았다. 하염없이 들어갔다. 180㎝도 넘는 깊이였다.

영산강 유역인 나주 복암리와 영동리, 정촌 고분 등에서 ‘여성파워’, 즉 모계사회의 흔적을 잇달아 나타나고 있다. 40대 여성 지도자와 모계가 같은 남매끼리의 근친혼을 짐작할 수 있는 무덤과, 여성들만 보이는 여성전용 무덤의 흔적이 잇달아 나타나고 있다.|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동신대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금동신발을 신은 주인공

틈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독(옹) 같은 유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돌방무덤(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이 돌방무덤에 복암리 3호분 96석실(돌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의 대대적인 조사가 7월8일부터 두 달간 이어졌다.

발굴결과는 놀라웠다. 대형 독널(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노출됐다. 독널의 크기는 엄청났다. 2호 독널의 경우 큰 독(98.2㎝)과 작은 독(72.2㎝)을 합체한 크기가 150㎝ 정도에 이르렀다. 독널 한 기만이 놓인 4호는 1m에 가까웠다.

2005년 발굴된 나주 영동리 1호분 1호 돌덧널의 두 인골. 애초에는 강력사건으로 신고되었지만 1500년전 고분으로 밝혀졌다. 분석결과 두 인골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인 것으로 분석됐다. 만약 부부합장묘라면 근친혼 관계일 수도 있다.|동신대 영산강 연구문화센터 제공

또 ‘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둥근고리칼’과 각종 도기류, 철대도·철촉 등 철기, 말띠드리개·재갈·발걸이 등 말갖춤새가 쏟아졌다. 이것은 양념에 불과했다. 앞 오른쪽 독널(4호) 밑에서 진흙이 묻고 상당 부분 훼손된 금동신발이 노출됐다.

이 복암리 3호분에서는 ‘96석실’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봉분(3호분)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이 켜켜이 조성되어 있었다. 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발달한 독널무덤(옹관묘)부터 전형적인 백제식 돌방무덤(석실분·7세기)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이른바 ‘아파트형 고분’이라 할 만 하다. 가히 ‘고분박물관’이다.

그 중 대형 독널과 금동신발 및 고리자루칼 등 최고 위세품이 쏟아져 나온 96석실이 단연 돋보인다.

연구자들은 이 96석실의 주인공을 5세기말~6세기초 이 지역을 다스린 수장으로 추정한다.

영동리 1호분 2호 돌방에 안장된 7명 중 6명은 같은 모계 출신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다른 모계로 판단되는 남성 한 명은 다른 곳에서 장가온 데릴 사위일 가능성이 짙다.|동신대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유전자 분석의 결과

그런데 최근까지 이 복암리 3호분 96석실과 관련해서 간과된 ‘포인트’가 있다.

그것이 96석실에서 확인된 인골의 정체성이다. 1996년 발굴 당시 96석실에서는 모두 6개체분의 인골이 독널 3곳(1·2·3호)에서 확인됐다. 죽은 자들의 인골을 추려서 각 독널에 넣은 것이다. 그런데 발굴이 끝난지 5년 뒤인 2001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출토된 인골에서 채취한 시료 10편의 ‘미토콘드리아DNA’를 분석해보았다.

5기의 주검이 확인된 3호 돌방에는 5세 이하 유아이거나 성별 미상의 인골을 빼면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3호 돌방은 ‘여성 전용 고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설명·사진은 동신대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미토콘드리아는 동물세포 안의 호흡기관으로 존재하는 세포의 소기관이다.

원형의 이중나선을 지니고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약 99.9%를 난자로부터 형성하여 모계유전 된다.

형제, 자매, 남매 및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관계되는 모든 가족은 미토콘드리아 DNA가 일치하는 반복수를 지닌다.

인골 같이 오래되었거나 극히 미량인 시료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미토콘드리아 DNA의 반복수를 개인의 식별이나 가족 관계의 구명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4호 돌방에는 50대 남성과 40대 여성, 30대 여성이 묻혀 있었다. 50대 남성과 같이 묻힌 40대 여성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일 가능성이 짙다. 근친혼의 방증일 수 있다. 또 40대 여성에게는 출산흔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무덤에 묻힌 30대 여성은 50대 남성의 딸일 수 있다.|사진은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그림 및 설명은 김재현 동아대 교수

■예상밖 유전자 분석결과

연구소의 분석 결과 독널(옹관) 3호의 왼쪽 인골(남성)과 오른쪽 인골(여성)은 남녀로 판단됐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은 더욱 흥미로웠다. 두 인골은 모계 유전 간의 혈통관계로 추정됐다.

고변이부위 가운데 하나인 HV1의 염기배열이 16018~16378 베이스까지 서로 일치한 것이다.

이로써 모계 유전 간의 관계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복암리 3호분 96석실의 인골을 분석한 <보고서>는 ‘96석실=모계가 동일한 친족의 합장묘’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주 영동리 1호분의 발굴모습. 아래 위로 다양한 형식의 고분이 집중된 아파트형 고분이다.|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그런데 그 뒤에 붙인 ‘보고서 요약문’이 흥미롭다. “이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은 남매, 혹은 모자 등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상간(近親相姦) 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1500년 전 영산강 유역이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같은 모계의 남녀가 근친혼을 했다?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라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졌던 근친혼이 영산강 유역에서도 유행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딩시에는 이 분석 결과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만 나온 하나의 사례를 요란하게 내세우기가 왠지 ‘거시기’ 했던 것이다.

1996년 발굴된 나주 복암리 3호분. 아파트형 고분으로 조성된 나주 복암리 3호분. 영산강 유역에서 산 사람들이 400년 동안 대를 이어 켜켜이 조성한 무덤이다.|국립나주문화재욘구소 제공

■‘강력사건’(?) 신고전화

그런데 복암리 인골의 기억이 가물가물 사라졌을 무렵인 2005년 2월이었다.

복암리에서 2㎞ 정도 떨어진 나주 영동리의 둔덕에서 대나무 숲을 개간하던 주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112’ 전화를 걸었다.

“사람의 해골이 2구나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순간 강력사건을 떠올렸다.

‘백골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살인 혹은 시신 유기 사건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둘러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복암리 3호분 96석실(돌방)의 모습. 그 돌방에 안장된 독널 3곳에서 인골들이 출토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인골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나온 게 아니라 고분의 돌덧널(석곽) 안에서 노출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나주시로 유물 출토 사실을 신고했다. 연구자인 이정호 동신대교수가 달려왔다.

돌덧널 무덤 안에서는 2구의 머리뼈가 나란히 노출됐다, 그 아래로 몸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뼈만 남은 유골을 정리해서 재매장한 삼국시대 장례의식(2차장)으로 인식되었다.

복암리 3호 96석실 3호독널 무덤의 두 주인공은 남녀로 판단되었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결과 두 인골은 모계 유전 간의 혈통관계로 추정됐다. HV1의 염기배열이 16018~16378 베이스까지 서로 일치한 것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변을 살펴보니 이 1기 뿐이 아니었다. 이 무덤은 큼지막한 봉분의 윗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무덤들도 이 봉분 위에 박혀있었다. 일부는 파괴된 채 노출되어 있었다. 이제 강력사건에서 발굴조사(동신대박물관)로 바통터치 했다.

이후 4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나주 영동리의 고분에는 모두 7기의 무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중 조사된 5기의 고분에서 구덩무덤(토광묘)과 독널무덤(옹관묘)·돌덧널무덤(석곽묘)·돌방무덤(석실묘) 등이 계속 확인된 것이다. 인근 복암리의 아파트형 고분과 흡사했다. 그러나 복암리에서처럼 지체높은 분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도 출토유물은 독널(옹관)을 비롯해 모두 280여 점에 이르렀다.

복암리 3호분 출토 인골분석 ‘보고서 요약문’은 “이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은 남매, 혹은 모자 등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상간(近親相姦) 임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나란히 묻힌 남매

유물로 미루어보면 무슨 획기적인 발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영동리 고분의 ‘α와 Ω’는 역시 여러 무덤에서 확인된 인골이었다.

출토 양상도 심상치 않았고, 인골의 형질 및 미토콘드리아DNA 분석결과도 의미심장했다.

즉 대부분의 고분에서 어머니가 같은 계통인 모계가 묻힌 흔적이 역력했다.

 

우선 첫번째 조사에서 확인된 1호분만 봐도 그렇다. 아래 위로 1호 돌덧널무덤과 1~6호 돌방이 모여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같은 가문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중 1호 돌덧널에서 확인된 2구의 인골을 보자.

형질 분석 결과 여성은 20대 전반, 남성은 40대 전반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이 두 인골의 미토콘트리아DNA 분석은 모계(어머니쪽 계통)가 동일한 남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를 보였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남매를 왜 같은 자리에 사이좋게 묻어 주었을까.

20년 먼저 죽은 누이와 함께 묻혀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토록 우애가 깊은 남매였을까. 아니면 근친혼 관계였을까.

96식실 출토 금은장식 세 잎사귀 둥근고리칼과 금동신발. 복암리 3호분 96석실이 1500년전 영산강 유역을 다스리던 수장이었음을 웅변해준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여성 전용 무덤도

2호 돌방무덤은 어떨까. 무덤의 돌문짝을 열자 무덤방에서 ‘우르르’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

인골 2구의 머리뼈가 가장 안쪽 벽에 붙어 세워진채 나란히 놓여있었다. 양쪽 벽과 심지어는 입구 쪽에서도 머리뼈와 함께 뒤섞인 몸뼈가 확인됐다. 2호 돌방무덤에서만 모두 7구의 인골이 확인됐다.

분석 결과 7구 가운데 3구는 5살도 안된 어린이 인골로 추정됐다. 조사단의 분석결과 이 2호 돌방에 묻힌 주검은 2호 남성(50대)→1호 여성(60대)→3호 유아→4호 유아→5호 유아(이상 5세 이하)→6호 여성(40대)→7호 남성(30대) 순으로 묻힌 것으로 짐작된다. 묻힌 이들은 같은 모계 관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남성 한 개체(30대)는 다른 곳에서 장가온 데릴 사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영산강 유역의 모계 사회에 장가든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형질 및 유전자 분석결과 복암리와 영동리 출토 인골들의 특성은 모계가 같은 인물들이 한 무덤에 묻혔다는 것이다. 1500년전 복암리와 영동리가 모계사회였다는 방증자료가 된다.|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김재현 동아대 교수 설명

또 5기의 주검이 확인된 3호 돌방의 경우 1호 여성(60대)→2호 여성(20대)→4호 여성(10대 후반)→5호 유아(5세 이하)→3호 인골(미상)의 순으로 묻혔다. 그런데 5세 이하 유아이거나 성별 미상의 인골을 빼면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김재현 동아대 교수) 그렇다면 이 3호 돌방은 ‘여성 전용 고분’일 가능성도 있다. 또하나 착안점은 2호와 3호 돌방무덤에는 오로지 주검(시신)만 매장했다. 죽은 순서대로 인골만 추려 안장했다.

4호 돌방은 굉장히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다른 돌방무덤과 달리 두 개의 돌방을 이뤄진 ‘짝돌방(쌍실)’이다.

2014년 복암리 고분군에서 600m 떨어진 잠애산 구릉의 정촌고분에서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굴식돌방무덤이 확인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한 가운데 두꺼운 판석을 세워 두 개의 방으로 나눴다. 훼손이 심했던 한쪽 방의 유물 분석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쪽 방에서는 50대 남성과 40대 여성, 다른 공간에는 30대 여성의 유골이 남아있었다. 중요한 착안점은 50대 남성과 같이 묻힌 40대 여성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이들이 남매라면 역시 근친혼의 방증일까.

또 하나 특이점은 이 40대 여성에게는 출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함께 묻힌 30대 여성은 누구일까. 50대 남성의 딸일까.

3기의 나무관에서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다. 첫번째 인골은 5세기 3/4분기(450~475년)에 1차로 안치된 주인공으로 판단됐다. 3차 주인공이 안치된 때는 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475~525년)로 추정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착장한 주인공

이 대목에서 1996년 조사된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의 인골을 ‘급소환’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골의 미토콘트리아DNA 분석결과가 어땠나.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이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혼이라고 했다. 그런데 영동리에서까지 똑같은 사례가 확인됐다면 어떨까. ‘1500년 전 영산강 유역=모계 중심의 사회’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 두 곳의 발굴 사례로 100%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2014년 복암리 고분군에서 600m 떨어진 잠애산(해발 114m) 구릉의 정촌 고분에서 또한차례 의미심장한 발굴성과가 나왔다. 정촌 고분 역시 14기의 무덤이 조성된 ‘아파트형’이었다. 특히 너비 355㎝, 길이 480㎝, 높이 296㎝ 규모의 무덤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이 주목을 끌었다.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3차로 안장된 주인공 부근에서 확인된 금동신발. 주인공의 지위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무덤에는 3기의 나무관이 차례로 안치되었는데, 그 중에서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다.

부스러진 머리뼈와 정강이뼈가 확인된 1개체는 5세기 3/4분기(450~475년)에 1차로 안치한 나무관의 주인공으로 판단됐다. 또 머리뼈 등이 수습된 인골의 주인공은 3차(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475~525년)로 안장한 것으로 추정됐다. 또 3차 주인공의 부근에서는 금동신발과 다량의 유리구슬, 옥류 등이 확인됐다.

금동신발 속에서는 주인공의 발목뼈 조각 1개와 다량의 파리번데기 껍질이 확인되었다. 번데기 껍질에서 추출한 콜라겐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 ‘400~420년’ 사이였다. 무덤에서 출토된 도기와 말갖춤새 등의 연대는 450~475년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고분의 연대는 늦어도 ‘475년 전후’로 조성된 고분(1호분)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인근의 복암리와 영동리 고분과 비슷한 연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대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이 지역 수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말은 안해도 수장이라면 당연히 남성일 것으로 판단했다.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에서는 주인공의 발뼈와 함께 다량의 파리번데기 껍질이 확인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40대 여인

그러나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실시한 두 인골의 3차원 계측 결과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두 인골 모두 여성으로 추정된 것이다. 즉 1차 안장 인골의 경우 3차원으로 복원한 아래턱뼈의 앞뒤 길이와 아래턱뼈가지의 높이를 역시 3차원 공간에서 계측한 결과 75.96㎜와 60.26㎜였다.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두 인골의 3차원 계측 결과를 한국인의 성별 판별 공식에 대입해봤더니 모두 여성으로 판명됐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대략 45~47세 정도로 인식됐다.|가톨릭대 산학렵력단 자료

이 수치를 한국인의 아래턱뼈를 이용한 성별판별 공식에 대입해보니 ‘여성’으로 판별됐다. 이는 위팔뼈의 앞면을 바닥에 놓고 위팔뼈의 아래면을 관찰할 때 안쪽관절융기의 방향이 바닥면과 수평을 이루면 남성, 위쪽을 향하면 여성으로 추정하는 방법이다. 3차로 안장된 여성의 경우도 같은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여성으로 판단됐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45(3차 주인공 여성)~47세(1차 주인공 여성) 정도로 측정됐다.

또 3차 주인공 주변에서 출토된 금동조각(19점 이상 출토)이 금동관의 밑동 테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피장자는 금동신발은 물론 금동관을 착용한 채 묻혔다는 얘기가 된다. 5세기 후반~6세기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여성이 당대 백제 중앙정부로부터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사여받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과시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후반~6세기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여성이 당대 백제 중앙정부로부터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사여받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과시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글로벌 사회

이렇듯 복암리에서, 영동리에서, 정촌에서 잇달아 나타나는 ‘여성파워’, 즉 모계사회의 흔적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이제 역사를 공부할 때 섣부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따위는 벗어던져야 할 것 같다는….

단적인 예가 영동리에서 보인다. 영동리 3호분의 2호 석실에서 출토된 ‘세 발 달린 접시’(삼족배)와 ‘꼭지 달린 뚜껑’이 그 예다. 즉 ‘세 발 달린 접시’는 전형적인 백제 도기이다. 반면 이 ‘세 발 달린 접시’의 ‘꼭지 달린 뚜껑’은 신라만의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영산강 지역의 도공은 이 백제 접시에 신라 뚜껑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 구운 것 같다.

나주 영동리 3호분 2호 돌방에서 출토된 도기. 뚜껑은 전형적인 신라식이고, 세발 달린 그릇은 영락없는 백제식이다. 백제+신라 도기는 백제접시에 신라 뚜껑을 덮어두고 구운 흔적이 역력하다. 구울 때 들러 붙지 않게 깔아둔 이기재의 흔적이 보인다.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제공

접시와 뚜껑에서 이기재(離器材·가마에서 그릇을 포개 구울 때 들러붙은 것을 방지하려고 그릇 사이에 두는 물질)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상할 수 있다. 백제 도공과 신라 도공이 이곳에서 만나 ‘백제·신라 합작 도기’를 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 뿐일까. 영산강 유역의 고분과, 그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백제 및 토착세력’이라는 핵심요소와, 가야·신라·왜와 같은 주변 요소가 섞여있다. 이를 두고 실체를 알 수 없는 ‘800년 마한론’을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지역고고학이다.

1500년 전인 5세기 말~6세기 초 영산강 유역이 상상 이상으로 ‘글로벌 사회’였던 것 같다. 나주 벌판처럼 확 트인 시야를 갖는게 어떠한가.(이 기사를 위해 동신대 이정호 교수와 이수진 교수, 김재현 동아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전용호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이수진, ‘나주 영동리 고분 발굴 이야기, 천오백년 동안의 잠을 깨우다’, <천오백년전 나주의 기억>,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엮음, 2023

이정호, ‘출토 유물로 본 영동리 고분 세력의 대외관계’, <6~7세기 영산강유역과 백제>(국제학술대회), 동신대문화박물관, 2010

김재현, ‘나주 영동리고분 출토인골에 대한 형질학적 연구’, <나주 영동리고분군>, 동신대문화박물관, 2011

민나영·최지혜·하그바슈렌·고영종·최재성·한성훈·이광호, ‘백제시대 나주 영동리 고인골의 분자유전자학적 분석>, <나주 영동리고분군>,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나주 복암리 3호분>, 2001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발굴조사보고서>, 2017

이규식·정용재·한성희·이명희·한면수·최동호, ‘출토 인골의 유전자분석-나주 복암리 3호분 옹관 인골을 중심으로’, <나주 복암리>(분석), 2001

오동선,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석실의 매장의례와 금동신발의 특징’,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신발과 금동관>(국제학술대회),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19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8. 24. 05:00수정 2021. 8. 24. 10:02

1991년 장고분 가운데 처음으로 내부구조를 밝힌 전남 함평 신덕고분. 전형적인 일본식 고분(장고분 혹은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발굴조사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아니 이건….” 1991년 3월 26일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찾은 국립광주박물관 조사팀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분의 원형부 서쪽에 드러난 도굴구덩이가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 도굴구덩이는 불과 며칠 전에 판 흔적이 분명했다.

“팠다가 다시 메운 구멍에는 부러뜨린 소나무 가지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갓 베어진 소나무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는 약간의 철기 부스러기와 도자(刀子·작은 칼)편이 흩어져 있었습니다.”(성낙준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회고)

함평 신덕고분의 도굴흔적. 국립광주박물관이 실측조사하기 불과 며칠전 도굴당한 흔적이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생생한 도굴 흔적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도굴 흔적이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강도높은 검찰 수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관람객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에 포장상자를 잠시 맡겨놓고는 사라졌다. 맡긴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그 포장상자를 뜯어보니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철기류’ 였다. 도굴범들은 2년 6개월 뒤인 1993년 9월 검거됐다.

그러나 이미 도굴품 중 상태가 좋은 65점은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뒤였다. 당시 신문은 ‘신덕고분은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이며, 도굴범이 팔아치운 유물 중 5~6점은 국보급’이라고 소개했다.

함평 신덕고분의 원경. 신덕고분은 1980년대부터 존재가 알려졌다. 도굴이 됐지만 1991년 장고분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부구조가 밝혀졌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처음 조사된 일본식 고분

검찰수사와는 별도로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4월부터 40여일간 본격 발굴을 펼쳤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발굴이 마무리되면 학술자료 축적을 위해 발굴조사보고서를 펴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국립광주박물관은 고심 끝에 신덕고분의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보고용 행정보고서만 만들었을 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공식 조사된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한다. ‘앞은 네모나고’(前方) ‘뒤는 둥근’(後圓) 형태라 해서 이름붙은 무덤(墳)이다. 한국에서는 ‘장고’와 닮았다고 해서 ‘장고분(長鼓墳)’이라 한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일왕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 사망한 닌토쿠(仁德) 일왕의 무덤이다.

신덕고분은 비록 도굴됐지만 금동관과 금동신발 조각들이 여러 점 확인됐다. 무덤의 주인공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금동관은 일본풍이 역력하지만 백제의 제작기법도 더러 보인다. 금동신발은 백제산일 가능성이 짙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터부시된 장고분 논쟁

신덕고분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일부가 전남 나주 덕산리와 신촌리 등의 고분 중에 장고분(전방후원분)과 유사한 고분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국내학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1972년 윤세영 고려대 박물관 주임과 황용훈 경희대 교수 등이 “충남 부여에 장고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긴급 문화재위원회가 소집되어 윤세영·황용훈 두 사람의 발표를 청취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허황된 이야기니만큼 발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된 토기류. 뚜껑 접시 56조가 무덤입구에 깔려있었다. 굽다리 접시와 짧은목항아리 등도 보였다. 영산강 유역에서 제작된 토기가 다수인 것으로 파악된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그로부터 12년 뒤인 1983년 6월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한발 더 나간다.

“경남 고성 등과, 전남 나주·영암·무안·함평 등 여러 곳에서 장고분이 보인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강교수의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강교수가 거론한 고분 중 가야 지역에 존재한 고성 송학동 1호분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물론 강교수는 “‘전방후원분’(장고분)은 일본의 고유묘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학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주로 원로학자들은 일왕 가계의 것으로 신성시되는 무덤형태가 한반도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과 화살통장식, 나무 널. 손잡이가 꼰 형태의 고리자루큰칼과 관재로 쓰인 나무(금송)는 일본제로 보인다. 화살통 장식의 제작지는 일본일 수도, 백제일 수도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그러나 ‘한반도 장고분’을 임나일본부와 연결짓는 이들이 생겼다. 일부 소장파는 장고분이 특히 고성 등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강교수의 주장에 흥분했다. 이거야말로 임나일본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후 전남 해남의 장고산 고분과 용두마을의 말무덤고분 등 장고형 고분의 존재가 계속 알려졌다.

반전의 과정도 있었다. 1970년대 ‘장고분’ 논쟁의 출발점이 된 충남 부여의 ‘추정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1호분도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최종 판명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속속 알려진 장고분은 학계로서는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자칫 임나일본부의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되는 구슬류. 이런 유리구슬류는 백제산이거나 일본에서도 백제관련 유적에서 출토된다. 신덕고분 구슬류는 백제를 통해 유입됐을 것이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왜색 고분의 충격

그런 상황에서 또하나의 장고분으로 알려진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된 것이다.

과연 일본의 고분형식이라는 장고분이 맞았다. 무덤 내부에서도 일본색이 보였다. 천정과 4벽, 문의 안쪽에 모두 주칠(朱漆)이 되어 있었다. 빨갛게 칠했다는 얘기다. 출토된 대형 칼의 경우 손잡이 구멍이 일본 후나야마(구마모토현·熊本縣) 고분의 유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쓰인 금송제 관의 흔적이 보였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파편도 여러점 출토됐다.

국내에서 처음 내부구조가 밝혀진 일본식 장고분인 것도 모자라 대단한 위상까지 갖췄다니…. 아니 그런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다는 것인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발굴조사를 맡은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쉬쉬하며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뭐 시쳇말로 두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 연구자가 전무한 형편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덜컥 보고서를 냈다가 일본 학계에 이용만 당할 수 있지 않은가.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말갖춤새. 웅진기 후반을 대표하는 백제산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단적인 예가 있다.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1면 주요기사가 눈에 띄었다.

“한국 광주의 명화동 고분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

기사는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장고분인 명화동 고분의 주위에 50㎝ 간격으로 원통형 토기가 세워져 있다는 것에 주목한 기사다. 원통형 토기(하니와)는 고분 주위에 세운 토기로 일본식으로 알려진 무덤조성방식이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보도 된 다음날(21일) 명화동 고분을 발굴한 국립광주박물관은 큰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전화를 걸어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냐”면서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주문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거리가 생겼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언론이 주요 기사로 다뤘으니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철기와 갑옷 등 철유물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속속 확인되는 장고분의 존재

이후 신덕 및 명화동 고분 뿐이 아니라 전남 영암 자라봉, 함평 장고산, 영광 월산리,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됐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였던 것이다. 그것도 5세기말~6세기초까지 딱 50여년간….

장고분 발굴이 이어져 자료가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하

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 또한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백제인(혹은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학계는 “네모 지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 자생설을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이 주구묘가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한국과 가까운 규슈(九州)에서는 고훈(古墳) 시대(3세기 중반~7세기) 초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원 전후에 조성된 주구묘(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한반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 만약 주구묘가 장고분의 전신이라면 외려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14기만 확인됐지만 일본 전역에는 2,000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반짝(5세기말~6세기초)했지만 일본에서 300년 넘게 대유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왼쪽은 1972년 7월18일 동아일보에 실린 전방후원분 관련 기사. 부여에서 전방후원형 구릉이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1983년 7월11일 경향신문 기사.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등 영산강과 낙동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 일본인?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5세기말 6세기초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왜(일본 규슈 지방)와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묘제(장고분)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5세기 말이라면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국세가 약화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마한 출신 토착세력이 왜의 묘제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또는 영산강 유역에 살고 있다가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 관료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도 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들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의 신분이 되어 본향(전남)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백제인이든 마한 출신이든)이라면 원천적으로 임나일본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는 4세기말~6세기초까지 2세기 가량 한반도 남부에 경영했다는 식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고분은 50년여간 반짝 유행했다. 그것도 겨우 14기 정도만 확인된다.

이 정도로는 왜가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주무대인 영남 지방에서 장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백제가 외국인 채용 방침에 따라 조정에 출사시킨 왜인의 무덤이라 해도 임나일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 확인된 원통형 토기열.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은 “한국 광주의 명화동 전방후원분에서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고 보도했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촌스러워진 국적논쟁

최근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1991년 기껏 조사해놓고도 ‘쉬쉬’하며 보고용 행정보고서로 만족해야 했던 신덕고분 발굴보고서가 30년만에 발간됐다. 이에 발맞춰 10월24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라는 제목으로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 장고분을 다룬바 있다.

당시 몇몇 연구자가 복사본으로 갖고있던 행정보고서를 입수해서 그걸 토대로 학계의 입장을 취재한 바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신덕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의 발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필자는 보고서에 실릴 한·일 연구자들의 논문을 미리 받아보고 20년 남짓만에 장고분 공부를 다시 해봤다. 그런데 기원 및 국적논쟁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딴은 그렇다. 무령왕릉처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국적 논쟁은 영영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장고분 주인공의 국적을 따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학계의 분위기도 달라진 것도 같다.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고 국적을 딱 잘라 주장하는 것을 약간 촌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장고분(전방후원분)인 닌도쿠(仁德)왕릉.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보고서 논고 가운데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글(‘신덕고분의 분구와 석실’)은 “신덕고분은 일단 왜의 규슈(九州) 세력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서술했다. 고분 형태나 매장시설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 주위를 두른 도랑(주구)과 돌뚜껑을 덮은 무덤길 항아리, 띠모양으로 얇게 깐 돌(즙석), 원통형 토기(하니와)를 두르지 않은 점 등은 또 전형적인 일본식이 아니다.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 등은 백제 중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어떤가.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고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을 왜계와 백제계, 왜+백제계, 재지계(마한 출신 토착세력) 등으로 도식화했다.

다카타에 따르면 왜계는 장고형 분구와 규슈계 돌방, 그리고 꼰 모양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등이다. 백제계는 장식 목관과 말갖춤새 세트, 구슬류와 신발 등의 장신구, 그리고 목관의 안치방식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왜+백제’는 금동관과 은제장식, 삼각형 철모(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무기) 등이다. 이밖에 무덤길 제사에 사용된 토기류는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요소가 보인다.

그러나 다카타의 견해 중 금동관의 경우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라는 견해(이한상 대전대 교수)도 있다.

게다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도굴범이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중국제 자기와 초두(조리기구·솥)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일 3국의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1980년대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일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논쟁이 일었다. 그러나 이 고분은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판명되었다.


■아직 회수되지 않은 신덕고분 유물들

비단 신덕고분만이 아니다. 고분을 구성하는 이런 복잡한 속성이야말로 영산강유역 ‘장고분’ 뿐 아니라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정촌고분 등 토착세력의 고분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분석한 다카다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특정 정치체의 정치·경제적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마무리했다.

당시 영산강 유역 사회의 다각적인 대외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만에 펴내는 보고서 내용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한국인이라는 거냐, 일본인이라는 거냐 분명하게 언급하라고 채근한다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5세기 말~6세기 전반 영산강 일원은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을 방문한 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을 보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무덤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또한 ‘외국인 우대정책’을 편 백제의 조정에 출사해서 백제 관료 혹은 귀족이 된 왜인의 무덤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지금 이 순간의 민족 감정으로 1400년 전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

또하나, 검거된 신덕고분의 도굴범들은 도굴품 중 최상품 65점을 팔아넘겼다고 진술했다.

수사과정에서 국보급 유물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점 당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판 유물들은 3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굴품인줄 알고도 사들였다면 그것은 장물이 분명하다.

물론 몇단계를 거쳐 유통되었다면 지금 소장자는 도굴품인지도 모르고 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선의취득’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굴품은 이제 유통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안에 떨면서 그와같은 도굴품을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신덕고분 도굴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1991년 도굴범이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 갖다놓았던 전례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1400년전의 수수께끼 같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이 기사 작성을 위해 박경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권오영 서울대·이한상 대전대·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노형석입력 2021. 3. 18. 05:06수정 2021. 3. 21. 11:56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술렁
일본 고분 닮은 얼개·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 받은 왜인?
일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최근 발굴 조사된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 내부 돌방(석실)의 모습. 주검을 놓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현문이 정면에 보이고 납작한 판석 여러 개를 놓은 바닥면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가 보인다. 1990년대까지 두 차례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단일 무덤이 새해 벽두 마침내 열렸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에 놀라워했고 곧장 흙에 덮여 다시 묻힌 것에 허탈해했다. 1월 국토 최남단 해남에서 들려온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이 유적은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다. 6세기 전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무덤의 바깥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1500여년 만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무덤 돌방은 일본 규슈섬의 바깥 해안과 아리아케 내해 일대에서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 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다.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입구에서 본 내부 공간.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조성하고 위쪽 천장에 덮개돌(개석)을 놓는 전형적인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석실 무덤 얼개를 띤다. 천장과 벽체에는 역시 일본 고대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조사단은 후면 봉토를 파고 무덤방과 통하는 널길(연도)로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조사 결과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만드는 고대 규슈의 석실분 특유의 얼개가 뚜렷했다. 천장과 벽체에도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출토품은 대부분 도굴됐으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유물이 상당수 수습됐다.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뚜껑 달린 접시(개배) 10점이 대표적이다. 일부 개배 안에선 조기 등 생선뼈와 육류 등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덩어리도 검출됐다.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다.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돌문짝(문비석)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 입구의 사다리꼴 현문과 내부 모습. 내부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를 넘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2m에 달하는 큰 공간이다.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깬돌을 차곡차곡 올려 벽체를 쌓는 고대 서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석실과 얼개가 똑같다.
무덤 석실로 들어가는 연도(널길 통로)의 들머리 부분 발굴현장. 토압에 따른 붕괴 위험에 대비해 윗부분 덮개돌 아래 금속지지대를 받쳐놓았다.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도랑 포함), 높이 9m에 이른다. 황남대총 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보다 큰 국내 최대급 무덤이다. 겉모습은 일본에서 고대 국가가 정립될 당시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 모양새다. 전방후원분은 봉분의 앞쪽은 네모진 방형,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특징을 따서 일본 학자들이 지은 명칭이다. 일본 무덤 형식인 전방후원분이 고대 해상로 길목인 전남북 해안 일대에 10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1990년대 잇따라 확인됐다. 일본 우파 세력은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학계에서 묻힌 이의 출신지가 한반도인지 왜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해남 장고봉 고분의 전경.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전방후원분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뒤쪽 원형 봉분에 역 ㄱ 자 모양의 갱을 파고 석실을 드러낸 발굴 공간이 보인다.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겉모습.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봉분 모양인 고대 일본 특유의 무덤 전방후원분의 전형적인 모양새다.

 

장고봉 고분도 논란 속에 풍상을 겪었다. 80년대 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엔 자연 지형인 언덕으로 간주했다. 80년대 중반 강인구 전 영남대 교수가 발굴 허가를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불허로 외형 실측밖에 할 수 없었다. 1986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보존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90년대 두 차례 도굴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지난해 가을에야 시작했다.

하지만 무덤 석실은 2월 말 다시 묻혔다. 연구원 쪽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5~9월 무덤 주구(도랑)의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조사 내용은 한반도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지난 20여년간 백제 정부의 통제를 받는 왜인 관료·용병이란 설과 일본에 이주했다가 현지 무덤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마한인 또는 백제인이란 설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철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 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장고봉 고분의 주요 출토품들. 원래 묻은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이번에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와 아궁이틀 조각, 철제 갑옷과 철촉의 파편 등이 상당수 나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조언을 새겨볼 만하다. “장고봉 고분은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지만, 묻힌 이를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외형, 구조, 유물 등을 당대 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해요. 민족주의를 넘어 고대인의 관점까지 생각하며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마한문화연구원 제공

 

 

입력 2019-02-14 18:08:19

하동군은 횡천면 남산리 일원에 8기 규모의 고분군이 발견됨에 따라 한화문물연구원(원장 신용민)에 의뢰해 지난 1월 8일부터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 결과 ‘남산리 고분군2’에는 직경 10m 내외의 봉토분 8기가 잔존하고 있으며, 규모와 구조로 볼 때 삼국시대 하동을 기반으로 하는 중심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됐다.

 

한화문물연구원은 지금까지 1·2호 석실묘를 발굴했는데 1호 석실묘는 해발 51∼56m 선상에 입지하며 봉분 형태는 원형(圓形)에 가까웠다.

봉분의 잔존규모는 가장 아랫단의 1차 호석의 경우 직경이 남북 1220㎝·동서 1165㎝, 2차 호석은 남북 1120㎝·동서 1090㎝, 3차 호석은 남북 950㎝·동서 980㎝ 정도였다.

이 중 1·2차 호석은 2단 정도로 축조하면서 주로 강돌을 이용한 반면 3차 호석은 3∼4단 정도를 할석으로 높여쌓기를 해 비교적 정교하고 촘촘하게 면맞춤을 하면서 축조됐다.

 

또한 동쪽 경사하부는 기반토인 명갈색 사질토 상부에 갈색 사질토를 40∼50㎝ 성토한 후 그 상부에 1차 호석을 설치해 경사면의 토압을 어느 정도 감안한 토목적인 기술을 부가한 것으로 추정됐다.

석실 내부는 하부 너비가 220㎝, 상부가 155㎝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좁혀지는 맞조림식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석실 벽면의 각 벽석사이에는 회를 채워 넣어 벽면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1호 석실묘에서는 1차 시상대 서쪽지점에서 두개골로 추정되는 인골과 유개합 1조, 유개대부호 1조 등 4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1호분의 동북쪽 경사면 아래쪽 330㎝ 떨어진 곳에 있는 2호 석실은 길이 212㎝, 너비 85㎝, 높이 107㎝의 중소형급에 속하며, 할석과 강돌을 병용해 축조됐다.

2호 석실묘에서는 두침(頭枕)으로 보이는 석재 2점이 나란하게 있고 유물이 세 군데로 나눠 부장된 것으로 볼 때, 먼저 1명이 매장되고 그 이후에 서쪽과 동쪽에 2명을 동시에 안장한 것으로 추정됐다.

북단벽에서 유단구연대부장경호를 비롯해 유개대부완, 고배, 대부완, 호, 병 등 7점이 출토됐고, 서장벽 쪽으로 병과 방추차 각 1점, 동장벽 쪽으로 유개고배 3조와 대부완 1점, 시상면에서 소도자 2점 등 모두 19점이 출토됐다.

 

아울러 1호분에서 드러난 인골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조사를 위해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이준정 교수와 하대룡 연구원이 참석했으며, 수습된 인골은 연구실로 옮겨져 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발굴단은 고분의 규모와 구조 등으로 미뤄 삼국시대 하동을 기반으로 하는 중심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하동군에 6세기 후반대의 조사사례가 없어 삼국시대 하동지역의 고분문화와 지역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군은 남산리 고분군2에 대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14일 고분군 발굴현장에서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이범홍 경남도문화재위원과 이동희 인제대 교수, 심경보 군청 문화체육과장, 추신자 횡천면장, 정병학 상남마을 이장, 신용민 한화문물연구원 대표 및 조사원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발굴단은 이날 회의에서 남산리 고분군2의 조사 진행방법과 조사과정, 유적조사 결과 분석된 내용, 수습 유물에 대해 설명했다.

이범홍·이동희 자문위원은 유적지를 살펴보면서 유적의 조사과정에서 추가 조사해야 할 사항이나 분석내용에 대한 검토 등을 자문했다.

 

훼손된 유적으로 조사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인골의 수습에 따른 기간소요와 추가적인 과학적 분석 등 체계적인 조사를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번 남산리 고분군2 긴급 발굴조사는 문화재청 복권기금(문화재보호기금) 지원으로 실시됐으며, 군과 한화문물연구원은 향후 일정을 협의한 뒤 조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동=강종효 기자 k123@kukinews.com

 

 

입력 2018. 6. 1. 05:06수정 2018. 6. 1. 11:57

옻칠된 창집, 과집 발견은 역대 발굴 사상 처음
과집 표면의 오수전 무더기 장식 놀라움 안겨
영남 일대 군림한 진한 소국들의 실체 보여줘

[한겨레]

경산 양지리 6호분 무덤의 요갱에서 드러난 옻칠된 최상급의 무기갖춤 유물들. 긴창을 넣은 창집이 비스듬하게 요갱 안에 걸쳐있다. 긴 창집 옆에 놓인 작은 창집과 두 창집 아래 중국 오수전을 표면에 붙인 과집의 일부도 보인다.

 

2000여년전 까맣게 옻칠된 표면은 방금 바른 듯 윤이 났다. 날카로운 창과 꺽창(과)이 쑥 들어간 무기집은 옛 자태 그대로였다. 놀랍게도 꺽창 집에는 중국 동전 수십여개가 장식물로 붙어있었다.

기원전 1세기~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진한 소국의 왕 무덤에서 옻칠한 역대 최고급의 무기갖춤이 세상에 나왔다. 20세기 이래 발굴된 삼국시대 이전 출토품들 가운데 단연 최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국보급 명품의 발견이다.

 

유물이 나온 곳은 경북 경산시 하양읍 양지리 택지개발터에서 지난해 조사된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께의 삼한시대 목관묘 6호분. 31일 학계 등에 따르면, 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은 지난해 12월 무덤 관 자리 밑 요갱(주검 허리 부분 아래쪽에 판 부장품 구덩이)을 찾아내 무덤주인의 부장품인 2점의 청동창과 옻칠된 창집, 1점의 청동과와 옻칠된 과집을 각각 발견해 수습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게 옻칠된 창집과 과집은 요갱의 옻칠된 나무상자 안에서 발견됐다. 긴창이 든 창집은 길이 70㎝, 작은 창이 든 창집과 과집은 길이 30cm 정도다. 창집들은 마디마다 서너개의 장식용 금속띠(금구)를 둘렀다. 특히 과집은 한나라 동전 오수전 26개로 표면을 수놓아 권세를 과시하는 독창적인 장식 구도를 보여준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삼국시대 이전 유물로는 가장 월등한 가치를 지닌 국보급”이라며 “기원전 진한 소국의 실체를 명백히 드러내는 대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소식을 접한 고고학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처음 출토된 옻칠 창집들과 오수전이 잔뜩 붙은 창집 표면의 장식 등 요갱의 부장품들은 삼국시대 이전의 출토 유물들 가운데 가장 만듦새가 뛰어난 유물로 평가된다. 기원전부터 한반도 남부 일대 소국들이 강력한 정치체제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창적 문화와 교역망을 갖고 있었음을 실증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청동 과(꺽창)를 감싸는 옻칠된 과집은 양지리 6호분의 핵심 유물이다. 검게 옻칠된 표면에 중국 한나라 동전인 오수전 20여개를 가득 붙여놓은 것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디자인이다. 중국 선진 문물의 상징이던 오수전을 무기의 장식소재로 쓴 건 무덤 주인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전례 없는 최상급 유물들의 의미는? 양지리 6호분 요갱에서 나온 옻칠된 창집, 과집 등은 진한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고있던 왕의 무덤임을 보여준다. 앞서 지난해 11월 연구원 쪽이 요갱 윗부분 묘실의 발굴 성과를 공개할 당시에도 옻칠된 동검·철검 칼집, 호랑이 모양 허리띠, 중국제 청동거울, 길쭉한 쇳덩이(판상철부) 등의 중요 유물들이 쏟아져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삼한시대 최고의 발굴 성과로 꼽히는 80~90년대 창원 다호리 고분군 출토품과도 연관되는 양상을 보여, 영남권 진한 소국들의 실체를 드러낼 새 타임캡슐로 주목받아온 상황이었다.

 

그뒤 요갱의 후속 발굴에서 드러난 무기갖춤은 지난해 공개된 묘실 조사 성과를 압도할 뿐 아니라 획기적인 역사적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칼보다 큰 장창과 적을 찍어누르는 기능을 하는 꺽창이 나무 재질에 고급스런 검정 옻칠을 더한 창집에 넣어져 부장됐을 뿐 아니라, 중국교역으로 얻은 선진 문물의 상징이던 오수전이 무더기로 창집에 붙은 장식재로 발견된 것이다. 영호남 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오수전·반량전은 한나라에서는 화폐로 쓰였지만, 고대 한반도 지역세력들 사이에서는 지위나 위신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인식됐다. 이전에는 유적마다 1~3점의 소량이 출토되는 정도였으나, 양지리 6호분에서는 20개 넘는 오수전들이 모두 무기의 장식재로 쓰였다는 사실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고고학회 회장인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동전 자체로도 위세품인 오수전을 거리낌 없이 무기류에 붙여 장식했다는 점에서 무덤 주인인 진한 수장의 권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무덤 조성 당시 이미 개인 권력자의 지배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꺽창(과) 들어간 과집을 투사한 엑스레이 사진. 표면 곳곳에 붙은 중국돈 오수전들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인다.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기원전부터 진한은 융성했다? 요갱에서 나온 최고 수준의 부장품들은 삼한의 존속 시기와 관련해 논란도 예고한다. 지난해 1차 발굴 결과에서 연구원이 밝힌 것처럼 이 무덤의 연대는 애초 기원 전후이거나 기원후 1~2세기까지로 늦춰 보는 게 통설이었다. 연약한 와질토기나 금속유물들의 양상이 다호리에서 나온 청동검과 붓 등의 무기, 생활유물들보다 연대가 떨어진다는 견해였다. 이 설은 한반도 서북부 낙랑군과의 교역에 따른 영향을 받아 빨라도 기원 전후에나 삼한 소국의 기틀이 마련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6호분 요갱에서 나온 오수전과 묘실에서 추가확인된 구름무늬를 새긴 거울(성운경) 등은 모두 기원전 중국 전한시기의 연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이에 따라 무덤 연대를 기원전 1세기까지 올리게 되면 삼한 소국들의 등장과 존속 시기도 이른 시점까지 확장된다.

중국 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삼한시대 20여개 소국들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만, 기원후 3세기대의 문헌기록이다. 경산·영천 일대의 소국 압독국, 골벌국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경우도 3~4세기의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데 그치고 있다. 반면, 요갱 출토품 연대는 문헌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시기 중국과 교역하면서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체제를 갖춘 소국이 영남 일대에 번성했을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압독국, 골벌국에 시기적으로 앞선 미지의 진한 소국들이 기원전과 기원 전후 건재했다는 결론에 이르는 셈이다. 앞으로 학계에서 삼한시대의 구체적인 연대 범위와 기존 문헌상의 소국들보다 앞서 융성한 기원전후 시기 소국들의 정체에 대해 좀더 깊은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양지리 6호분의 무덤 관 자리 바닥에 있는 요갱(흰줄 쳐진 사각형)의 발굴 당시 모습. 안에 옻칠된 창집들이 보인다.

요갱에서 발굴된 무기갖춤들은 현재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 처리 중이다. 6호분의 요갱 출토품들 사진과 지난해 11월 공개된 묘실 유물 등은 19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개막하는 특별전 ‘금호강과 길’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전북CBS 남승현 기자 2019-08-14 14:06

70m 떨어진 평탄대지 삼국시대 토축 발견

전북 임실 봉화산 봉수군 주둔지가 발견됐다. (사진=임실군 제공)
 
삼국시대 봉수시설로 추정할 수 있는 토기가 전북 임실군에서 발견됐다.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시굴조사를 맡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와 오수면 봉천리를 경계하는 봉화산 정상부에서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목짧은항아리(단경호, 短頸壺), 적갈색연질토기편 등 다량의 토기를 출토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번에 출토된 토기는 당시 봉수와 관련된 일을 하는 봉수군의 주둔지로 추정되는 근거 자료가 된다.

전북 임실군에서 삼국시대 운영된 봉수시설로 추정할 수 있는 토기가 발견됐다. (사진=임실군 제공)
 
봉화산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70m 떨어진 평탄대지는 흙과 잡석으로 쌓였으며 생토면 위로 여러 겹의 목탄과 소토층이 있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봉화산봉수 출토 유물이 가야고분군으로 알려진 전북 장수군 동촌리․삼봉리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철배 학예사는 "삼국시대와 가야시대 토기가 나왔는데 AD400~50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며 "추가 발굴을 해야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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