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보물선]

입력 2023. 7. 26. 10:04

태안 보물선 복원에 무려 21년 왜?..이제 6년 남았다 (daum.net)

 

태안 보물선 복원에 무려 21년 왜?..이제 6년 남았다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태안 앞바다 관장목은 울돌목 다음으로 물살이 센 곳이다. 이곳은 우리국토의 남쪽 끝에서 한양 또는 개경 가는 중간 지점이고, 한-중-일 무역선이 중간에 쉬다 가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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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선은 지금도 관람가능
복원은 원래 재료 짠물빼고, 다지고,
말린 다음, 문헌 따라 정확히 배치해야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태안 앞바다 관장목은 울돌목 다음으로 물살이 센 곳이다.

이곳은 우리국토의 남쪽 끝에서 한양 또는 개경 가는 중간 지점이고, 한-중-일 무역선이 중간에 쉬다 가야할 곳이라 지난 1000년간 선박의 이동이 많았지만 강한 물살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많은 조운선-무역선-상선들이 좌초하고 만다.

우리는 이 바다에서 많은 문화유산을 출수 발굴했기 때문에 이들 배를 ‘보물선’이라 부른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5년전부터 태안선과 마도선 등 태안 보물선들의 잔해를 수습해 복원작업을 벌여왔다.

탈염후 마도선
탈염후 태안선

 

26일 연구소에 따르면, 이제야 선박 잔해들의 소금빼기와 강도 복원 작업을 거쳐 이달부터 말리는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말리는 데는 5년, 원래 모습의 프레임을 만들어 출수된 부재들을 정확한 위치에 꽂아 넣는데 1년이 더 걸린다. 그래서 태안의 보물선은 2029년 국민앞에 보이게 된다.

참고로, 보존 복원선은 문화유산 가치가 있는 것이고, 문헌에 의거해 요즘 부재로 만들어 놓은 재현선은 국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뿐이다. 재현선은 이미 신안선, 태안선 모두 있어, 각각 목포와 태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조습 건조실
약품처리 경화

 

복원선은 다르다. 연구소는 지난 15년간 했던 작업은 목재 내 침투된 염분을 제거하는 보존처리인 ‘탈염’, 목재 뒤틀림이나 갈라짐을 약품으로 치환하여 수침(물에 잠기거나 가라앉음)목재의 강도를 높이고 원래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경화’ 작업을 벌였다.

이달 부터는 습도를 단계적으로 일정하게 유지 및 감소시켜 목재를 안전하게 말리는 조습건조 작업이 진행된다. 이것은 5년 걸린다.

물론 이들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국내외 추가 발견된 문헌을 고찰하고 선박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등 학술적인 연구가 병행되었다.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사소한 추후 발견이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꾸준한 업데이트 스터디가 필요하다.

태안선은 2008년 태안 대섬에서 마도1호선 2009년 태안 마도 해역에서 출수된 고려시대 선박이다.

보물선에서 발굴한 청자 향로

 

목재로 된 선체와 더불어 고려시대 도자기, 선상 생활용품 등 약 2만5000여 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주목을 받았고, 이 중 고려청자 3점(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 1점,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2점)은 2012년 12월과 지난해 4월에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진귀한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태안선과 마도1호선을 출수한 직후부터 보존처리를 진행해 약 15년에 걸쳐 탈염처리(2009~2011년)와 경화처리(2011~2023년 6월)를 실시했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보물선의 청자 두꺼비 벼루. 노란색이 느껴지지만 청자기법으로 만든 도자 벼루이다.

 

보존처리의 마지막 단계인 대형 수침목재의 원활한 건조처리를 위해서는 항습이 중요하지만 국내에는 50개가 넘는 대형 부재를 보유한 태안선과 마도1호선의 규모를 감당할 수 있는 항습 시설이 없었다. 이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20년 12월 ‘대형 수침목재용 자동 온습도 조절 건조처리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구축하고, 2022년까지 기능 점검과 보완 작업을 거친 후 이번에 처음으로 가동한다.

한편 조습건조 중인 태안선과 마도1호선을 직접 관람하고자 하는 국민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누리집에서 유물열람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한 후 정해진 신청절차를 밟으면 된다.

abc@heraldcorp.com

 

 

삼국시대 선박 발견될까…태안 마도 해역 수중발굴 진행 (daum.net)

CBS노컷뉴스 구병수 기자입력 2023. 7. 20. 15:21
 
핵심요약
국립해양연구소, 9월까지 수중발굴조사
고려와 조선 선박 4척, 유물 1만여점 찾아내
2023년 태안 마도 해역 수중발굴조사구역. 문화재청 제공

'수중 문화재의 보고'로 여겨지는 충남 태안 마도해역에서 수중발굴조사가 재개된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오는 21일부터 9월 말까지 충남 태안군 마도(馬島) 해역에서 수중발굴조사를 진행한다고 20일 밝혔다.

태안 마도해역은 물살이 거세 예로부터 해난사고가 잦았던 곳으로, 특히 고려와 조선시대 세곡을 나르던 조운선의 무덤으로 유명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태조 4년)부터 1455년(세조 1년)까지 60여 년 동안 200척에 달하는 선박이 태안 안흥량에서 침몰했다고 기록돼 있다.

2018~2019년 태안 마도 해역 출수 도자기. 문화재청 제공


연구소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태안 마도 해역에서 9차례의 수중발굴조사를 벌여 고려시대 선박 3척과 조선시대 선박 1척, 유물 1만여 점을 찾아냈다.

연구소측은 올해 발굴을 통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삼국시대 고선박의 흔적을 찾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무슨 무병장수? 농담이겠지!” 2020년 4월 충남 태안 신진도에서 이 일대 바다(안흥량)를 지키던 조선 수군의 지휘소 건물이 확인되었는데요. 폐가로 남아있던 건물에서 확인된 명문 기록 2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나는 벽지 형태로 발견된 한시인데요. ‘사람이 계수나무 꽃 떨어지듯 지니(人間桂花落)…’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수군지휘소의 현판 글씨(무량수각·無量壽閣)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충남 태안 마도 2호선에서 출토된 청자 병 두 점. 청자 두 점에는 개경의 중방(무신정권의 최고 의결기구) 도장교(정 8품) 오문부 댁에 참기름(眞)과 꿀(蜜)을 보낸다는 물품꼬리표가 붙어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명장수라고? 농담이겠지”

불교에서 ‘무량수’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수명’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무량수각은 ‘무병장수하는 집’라는 의미입니다. 대개 전란이나 재해가 심한 지역의 사찰에 주로 세워진답니다.

신진도 수군지휘소의 ‘무량수각’ 현판에는 ‘무량’ 부분에 낙관처럼 쓰인 단어가 있죠. ‘구롱(口弄·농담)’입니다.

왜 공공 건물의 현판에 ‘농담’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건물은 이곳 해안의 안전운항을 관장하는 수군 지휘소라 했죠. 그러나 한시에서 보듯 해난사고가 계속 일어나고 인명피해가 줄지 않았죠. 그래서 ‘무병장수’를 바라며 쓴 현판에 훗날 누군가가 ‘무병장수는 무슨! 농담(구롱)이야!’라는 풍자문구를 써놓았다는 겁니다. 억측 같지만 ‘안흥량’ 해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사고를 들춰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인양된 ‘태안선’에서 확인된 인골의 모습. 인골은 정면을 위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오른쪽 팔을 펴져 있었다. 어깨뼈와 척추가 정면에서 살짝 들려져 있었다. 비운의 고려선원은 겹겹이 쌓인 청자 꾸러미 아래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을 위해 팔을 뻗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청자더미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10척 중 7~8척이 침몰”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을 볼까요.

“안흥량 물길이 격렬한 파도 때문에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옛날엔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기 때문에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안흥량’은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혔습니다.

충남 태안 앞바다의 안전운항을 관리했던 조선 수군지휘소에서 확인된 ‘무량수각’ 현판. ‘무량’ 부분에 낙관처럼 쓰인 단어가 있다. ‘구롱(口弄·농담)’이다. 무량수각은 ‘무병장수’를 바라며 쓴 현판이다. 그러나 이 해역에서 해난사고가 빈발하자 훗날 누군가가 ‘무병장수는 무슨! 농담(구롱)이야!’라는 풍자 문구를 써놓았을 것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안흥량은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합니다.

여기에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물살이 더욱 빨라지죠.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승정원일기> ‘1667년 윤 4월9일’조는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중 7~8척에 이르고…한 해에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달한다”고 기록했어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안흥량을 통과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라·경상·충청도 등에서 거둔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피할 수 없는’ 조운선의 항로이기 때문이었죠.

고려시대 침몰선인 ‘태안선’에서 포장된 그대로 적재 되어있던 ‘신상’ 명품 고려청자. 침몰선에서는 총 2만3815점의 유물이 인양되었고, 그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고,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운하개통에 매달렸지만…

고려·조선 등 역대 왕조가 대를 이어 마련한 매력적인 대안은 ‘운하 개통’이었습니다.

처음 계획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4년(인종 12)의 일이었는데요.

요컨대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물길(운하)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는 “군사 수천명을 총동원한 이 대역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기록했습니다.

1154년(의종 8)과 1391년(공양왕 3)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중도 포기됐습니다. 공사구간이 파기 어려운 화강암 암반층이었고, 용케 팠다 해도 조수가 들락날락 하는 바람에 족족 다시 메어지는 난공사였기 때문입니다.

태안선이 ‘고려청자 운반선’이었다면 마도 1,2,3호선은 각종 곡물과 젓갈류 등 서울(개경)으로 가는 미곡과 특산물을 가득 실은 ‘세곡 특산물 운반선’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개국 후에도 운하를 향한 새 왕조의 열망은 식지 않았는데요. 개국공신인 하륜(1347~1416)은 나름 묘안을 짜냅니다.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겁니다. 고려 때 뚫어놓은 미완성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건데요.

그 사이 높낮이에 따라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마다 소선(작은 배)를 둔 뒤 포구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 방법을 쓴다는 겁니다.(1413년) 그러나 이 공법 또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무엇보다 세곡을 첫번째 저수지에 옮겨 실으려면 대선(大船·큰 배)이 우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안흥량의 바람이 워낙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입니까.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죠.

그럼에도 운하계획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종 때인 1537년 대안 노선인 ‘의항운하(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의항리)’ 건설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거센 조수간만의 차이 등으로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마도 3호선의 시그니처 유물은 장기알이다. 46개가 원들의 생활공간인 선체 중앙부에서 나왔다. 둥근 조약돌을 이용해 만든 장기알은 앞뒤에 차(車), 포(包), 졸(卒) 등을 적은 게 확인된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 사이 이 지역에서의 해난참사가 빈발했습니다. 조선 전기의 기록만 따져볼까요.

1395년(태조 4)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습니다.

이건 사고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1403년(태종 3)과 1414년(태종 14)의 침몰사고는 대형 참사였습니다.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여석이 수장됐습니다. 이때 태종이 “모두 부덕한 과인의 책임(責乃在予)”이라면서 “내가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고 간 것과 다름없다”이라고 사과한 것으로 유명하죠. 1414년에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습니다. 1455년(세조 1)에는 조운선 54척이 침몰했구요.

1395~1455년 사이 60년간 안흥량에서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에 달했습니다.

이로써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 국가재정 또한 고갈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태안선 출토유물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것은 ‘사자모양 향로’이다. 두 점 다 보물로 지정됐다. 출토된 사자 모양 향로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

그렇게 거센 풍랑 속에 빨려 들어간 ‘난파선’이 이제와서 ‘보물선’이 되어 떠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07년 5월 14일 밤이었는데요.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민 김용철씨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이랍니다.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답니다. 그중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던 주꾸미 한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원래 주꾸미를 잡으려면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습니다. 그러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뒤 입구를 자갈 같은 것으로 막아놓는데요. 그런데 문제의 주꾸미는 자갈이 아닌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이 태안군청에 신고되었구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 돌입했는데요. 발굴 3일만(7월6일)에 수심 15m 정도에서 95도 가량 기울어진 침몰선의 선체가 드러났습니다. ‘태안선’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은 이 난파선의 별명이 있죠.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선’이었죠.

‘태안선’에서는 ‘두꺼비 모양 벼루’도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2만3815점의 인양유물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구요.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청자들은 완충재(짚)와 목재를 이용하여 끈으로 묶어 포장한 그대로 쌓여있었습니다.

그중의 백미는 사자머리 모양 향로 2점(보물)이었습니다.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입니다. 또 ‘퇴화문(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무늬) 두꺼비형 벼루’도 올라왔는데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지죠.

이 사자모양 향로와 두꺼비 벼루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태안선에서는 명문 목간도 다수 인양됐는데요.

이중에는 ‘탐진(耽津·강진) 재경(在京·개경)…’과 ‘최대경댁상(崔大卿宅上·최대경댁에 올림)’ 등의 목간이 주목됩니다.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가 개경의 왕실이나 귀족층(최대경 등)에 납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395~1455년 사이 60년간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에 따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고려청자 보물선-태안 대섬 수중발굴보고서>(학술총서 제17집), 2009에서

 

■참기름, 꿀을 담은 고려청자

그렇게 태안선 발굴이 한창이던 2007년 7월 20일과 27일이었는데요.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 심선택씨가 청자 26점을 인양했다는 신고가 접수됩니다. 이곳은 ‘태안선’ 발견지점에서 약 2㎞ 떨어진 섬 앞바다였는데요. 이번에는 주꾸미가 아닌 청자가 그물에 걸렸답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어졌구요. 이곳에서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가 잇달아 인양됐습니다.

세 척의 화물 대부분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 및 메주, 젓갈류 등이었습니다.

태안선이 ‘청자운반선’이라면 마도 1·2·3호선은 전라도 각지에서 거둔 곡물 등 먹거리를 개경으로 운반하다가 난파된 ‘식량운반선’이었습니다. 마도 1호선의 경우 명문 목간을 분석하면 1208년(무진년) 출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서울(개경·한양)로 무사히 이송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1134년(인종 12) 나름 묘안이 나왔다.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물길(운하)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하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도 2호선 출토유물 중 백미는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과 죽찰(국화 모란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무늬 매병과 명문 대나무 조각’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과 죽찰’(연꽃 줄기 무늬 매병과 명문 대나무 조각)’ 등 2점의 청자였는데요.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제작된 2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죠. 그런데 이 두 점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요소가 따로 있습니다. 청자 두 점의 목에 걸려있던 명문 죽찰(대나무 조각)이었는데요. 두 점 모두 ‘중방(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의결기구) 소속 무관(도장교·정 8품) 오문부에게 보낸 참기름과 꿀’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모란~’ 매병에는 ‘참기름(眞)’자가, ‘연꽃가지~’ 매병에는 ‘꿀(精蜜)’자가 들어있었거든요. 명문 대나무 조각은 지금의 택배 물품표였던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명품 청자를 생활용기로 썼다니 말입니다.

하륜의 갑문식 공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안흥량의 바람이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인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다.

 

■장기 두다가 수장된 선원의 시신?

또 마도 3호선은 1265~1268년(고려 원종 연간) 사이에 난파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당대 최고 권력자인 무인집정 김준(?~1268) 등에게 보내는 곡물과, 젓갈·전복·홍합·상어 등 각종 식품을 실었던 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중 마도 3호만의 시그니처 유물은 장기알인데요.

모두 46개의 장기알이 선원들의 생활공간인 선체 중앙부에서 나왔는데요. 적어도 2벌 이상의 장기알이 있었을 겁니다.

모서리가 둥근 조약돌을 이용해 앞뒤에 차(車), 포(包), 졸(卒) 등을 적은 게 확인됩니다.

750년 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증거할 유물이 현현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선상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장기를 두고 있던 선원들이 갑작스런 풍랑 속에 배가 난파되고 침몰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수장되었다는 생각에….

새삼 태안선에서 인양된 인골이 떠오르네요. 이 선원은 선박의 침몰 당시 5겹으로 켜켜이 쌓은 청자 더미에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인골이 정면을 위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약간 틀어진 상태였는데요. 오른쪽 팔을 뻗고 있었구요. 견갑골(어깨뼈)과 척추가 정면에서 살짝 들려져 있었구요. 이런 인골의 상태로 미루어보면 안타까운 추론이 가능했습니다.

즉 이 불행한 고려 선원은 너무도 빨리 침몰한 선박과 함께 선적된 상자가 무너지면서 상자 아래에 깔렸다, 선원은 사력을 다해 몸을 틀어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뭐 이런 스토리가 되겠네요.

마도 3호선은 당대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무인집정 김준(?~1268) 등에게 보내는 곡물과 젓갈, 전복, 홍합, 상어 등 각종 식품을 실었던 배였음이 밝혀졌다.

 

■‘재난은 사람이 부른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안행량 등에서 일어난 잦은 해난참사가 단순히 ‘거센 바람과 암초,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1473년(성종 4) 4월 20일 성종 임금의 말씀을 한번 볼까요.

“안흥량이 험악하다고? 아니다. 험악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항행에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난다. 해당 관리들이 제대로 지휘·고찰한다면 조운선의 침몰을 면할 수 있다.”

1633년(인조 11) 7월21일 인조 임금의 하교가 귓전을 때립니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災不虛生 由人所召)

이제와서 ‘바다속 경주’니, ‘보물선으로 환생한 침몰선’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참사는 사람만 조심하고 제대로 관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인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23년 6월25일까지 충남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출귀물’ 주제전에 출품된 안흥량 출토 보물 청자들.|태안 해양유물전시관 제공

 

■‘신출귀물 고려청자’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내년 6월 25일까지 충남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특별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요.

안흥량 해역 발굴 유물 중 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신출귀물(新出貴物), 태안 바다의 고려청자’ 주제전(테마전)인데요. ‘사자형뚜껑 향로’와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과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 등 보물들이 선을 보입니다. ‘난파선의 무덤’에서 ‘바닷속 경주’로 거듭난 안흥량 해역에서 ‘보물’로 떠오른 명품청자들을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와함께 거센 풍랑 속에 희생된 분들의 넋도 빌면서….(이 기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김현용·김동훈·진호신 학예연구관, 신종국 전시과장 등이 자료 및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청자보물선-태안 대섬 수중발굴보고서 본문 및 도판>(학술총서 제17집), 2009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 1·2·3호선 수중발굴보고서>, 2010·2011·2012

서태원·문광균·박범·문경호,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태안 안흥진성의 사적진성을 위한 학술세미나), 태안시, 2020

진호신, ‘태안 신진도 고가(古家) 발견 유물의 종류와 성격’, <해양문화재> 16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2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출처; 태안 마도 앞바다서 송·원대 도자기 등 유물 113점 발굴 (daum.net)

태안 마도 앞바다서 송·원대 도자기 등 유물 113점 발굴

이종길입력 2018. 12. 27. 18:33
 
태안 마도해역 조사모습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바닷속 경주'로 불리는 충남 태안 근흥면 마도 앞바다에서 유물 113점이 나왔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5월부터 10월까지 마도 해역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묵서(墨書)가 남은 중국 송·원대 도자기 일곱 점과 북송(960∼1127) 동전인 원풍통보, 고려청자 등을 발견했다고 27일 전했다.

묵서명 중국 도자기는 바닥에 무역 상단(商團)을 의미하는 '강(綱)'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 남부 푸젠성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 측은 "강은 상업적 거래를 하는 회사 또는 단체를 말한다"며 "한중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고려청자는 모두 쉰한 점이 나왔다. 분청사기도 네 점도 발견됐다. 일부 도자기는 선체 아래쪽 저판재 주변에서 다량의 석탄과 함께 출토됐다. 배를 바다에 정박할 때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닻돌 열다섯 점도 확인됐다. 생활용품으로는 벼루, 숫돌, 청동숟가락, 청동받침, 동곳(상투가 풀리지 않도록 꽂는 물건), 생활용 도기 등이 발견됐다.

묵서명도자기

 

마도 해역은 고려시대 국제항구인 벽란도와 조선시대 도읍 한양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방문하고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사신이 머무는 객관인 안흥정(安興亭)이 마도에 있었다. 이곳은 물길이 험해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렸다. 실제로 2009년 뒤 해저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선박 네 척이 물 밖으로 인양됐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출처; <태안 앞바다는 고려청자 쌓인 수중박물관> | 연합뉴스 (yna.co.kr)

태안 앞바다는 고려청자 쌓인 수중박물관

송고시간2008-07-27 07:10

 
9백년만에 빛보는 고려청자들

(태안=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앞바다 속에서 침몰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에 실린 청자들. 12세기 중반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 1만2천점의 청자들은 대섬 앞바다에서 침몰한 뒤 약 9백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지난 5월 청자 한 점을 뒤집어 쓴 주꾸미가 이 지역 어민의 그물에 잡히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 잠수협조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jihopark@yna.co.kr

해저 곳곳에 유물..'수중의 경주' 불리기도

9백년만에 빛보는 고려청자들

(태안=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앞바다 속에서 침몰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에 실린 청자들. 12세기 중반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 1만2천점의 청자들은 대섬 앞바다에서 침몰한 뒤 약 9백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지난 5월 청자 한 점을 뒤집어 쓴 주꾸미가 이 지역 어민의 그물에 잡히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 잠수협조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jihopar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태안 앞바다 해저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섬 인근 해저에서 침몰 고려선박이 발견되고 여기서 2만여 점에 이르는 고려청자가 수습된 일은 이제 '수중의 경주'를 알리는 신호탄에 지나지 않는다고 국립해양유물전시관(관장 성낙준)은 해저 속 상황을 전했다.

이를 입증하듯 대섬 해저 발굴에 이어 해양유물전시관은 최근 이곳에서 10㎞ 가량 떨어진 마도(馬島) 해저에서도 무려 515점에 달하는 고려청자 뭉치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태안 앞바다 해저에는 도대체 얼마 만한 유물이 가라앉아 있을까?

태안 앞바다서 또 대규모 청자 인양

(서울=연합뉴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태안 지역 마도(馬島) 앞바다에 대한 긴급탐사와 수중 발굴조사를 최근 실시한 결과 연판문대접을 비롯한 고려청자 515점을 인양했다. 청자는 꾸러미(줄) 단위로 출토되는 양상으로 출토되며 종류 또한 다양하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제공>>

 

그 구체적인 수치에 대해 해양유물전시관 측은 함구로 일관한다. 도굴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성 관장은 "그것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면서 "다만 이 시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해저 곳곳에 청자가 널려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해저 발굴에 종사하는 진호신 학예연구사는 해저 사정을 "유물의 지뢰밭", "수중박물관"이라는 말로 비유했다.

태안 앞바다에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진 학예사는 이곳이 안개와 암초와 조류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 선박의 좌초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걸맞게 태안 앞바다는 고려-조선시대에는 안흥량(安興粱)이라 불리면서 난행량(難行梁)으로 꼽혔다. 난행량이란 통행이 어려운 여울목 같은 곳이란 뜻이다.

고려청자 보물선 특별전

(목포=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23일 전남 목포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막한 '고려청자 보물선-강진,태안. 그리고'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해저유물이 출토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선박을 살펴보고 있다. <관련기사 참조>
minu21@yna.co.kr

 

이는 실제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3년(1403)에만 34척이 이곳에서 침몰했으며, 태종 14년(1414) 한 해에만 무려 66척에 이르는 조운선이 침몰하거나 좌초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다소 의외인 점은 태안 앞바다는 물론이고 연안 해저에서 발견된 선박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자 해양유물전시관과 태안군청은 더욱 바빠졌다. 당장 전시관은 내년부터 현지사무소를 운영하기로 했으며, 태안군청은 이곳에 인양 유물을 전문적으로 전시할 박물관 건립과 해양유물조사 전문 국책 연구소 설립을 정부당국에 강하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항로 알려준 목간(木簡)

(목포=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23일 전남 목포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막한 '고려청자 보물선-강진,태안. 그리고' 특별전에서 공개된 목간(木簡). 목간은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선박의 항로와 화물의 수취인 등 정보가 기록돼 고려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련기사 참조>
minu21@yna.co.kr

 

하지만 여건은 좋지 않게 돌아간다.

당장 해양유물전시관만 해도 태안 앞바다 조사인력을 빼내 새만금 방조제 건설 일환으로 다음달에는 매립 예정인 야미도 일대 조사에 투입될 예정이다.

나아가 해양유물전시관은 해저유물 발굴인양을 위해 크레인을 장착한 전용 해저발굴선 1척이 필요하다고 정부 당국에 예산 편성을 요청했으나 "야단만 맞았다"고 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출처; ''태안 유물'' 총 2만2538점 건져올렸다 | 세계일보 (segye.com)

''태안 유물'' 총 2만2538점 건져올렸다

입력 : 2007-10-26 15:28:00 수정 : 2007-10-26 15:28:00

 

침몰 ''보물선'' 1, 2차 발굴… 내년 본격 선체 확인조사고려시대 해저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2차로 해저유물 2만여점이 인양됐다.
25일 태안군 등에 따르면 지난 8월부터 지난 24일까지 60일간 태안 근흥면 대섬 앞바다에서 이뤄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팀의 2차 발굴조사 결과 접시와 대접 등 고려시대 청자를 비롯해 목간(木簡) 등 2만1803점의 유물이 인양됐다.
이로써 최초 유물 발견 신고 당시 긴급 탐사를 통해 발굴한 9점의 유물과 1차 조사 때의 726점 등을 포함해 모두 2만2538점의 유물이 대섬 앞바다 해저에서 건져졌다.
특히 2차 수중 조사에서는 유물의 선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목간을 비롯해 선원들의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는 철제 솥, 유물 적재 쐐기목, 밧줄(칡), 잡유호(젓갈추정 생선뼈)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료가 수습됐다.
발굴된 청자도 ‘철화퇴화문 두꺼비형 벼루’와 철화통형잔, 앵무문대접 등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됐으며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 34점, 합(盒) 18점 등 특이 유물도 인양됐다.
이에 따라 해양유물전시관 측은 올 연말까지 태안 근흥면 신진도 일원 5291㎡에 보존처리장을 설치, 현재 응급처리 후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수장고에 임시 보관된 유물들을 옮겨 탈염처리 등에 나설 계획이다.
또 내년부터는 침몰 선체의 형태 파악과 선체 주변에 대한 확인 발굴 조사 작업에도 본격 나설 계획이다.
현재 청자 운반 선체는 부분적인 노출(외판 추정 4편 확인)이 이뤄진 상태로 2층 유물 수습 후 토사를 제거하면 형태 파악이 가능할 것으로 유물전시관 측은 보고 있다.
태안군 문화재계 관계자는 “지난 24일 해저유물과 함께 희생됐을 선조들의 영령을 기리고 남은 발굴조사가 원만히 진행되길 기원하는 위령제를 발굴 현장에서 지내고 중간 발굴을 마무리했다”며 “아울러 해저에 있는 청자 운반선은 훼손 방지와 추가 발굴 등을 위한 안전조치를 해놓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근흥면 대섬 인근 바다에서 어민이 주꾸미 통발 인양작업 중 청자 대접 1점을 건져 올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정밀 조사에 나서 고려청자 수만점을 실은 채 침몰한 고선박 한 척을 확인했었다.

대전=임정재 기자
jjim61@segye.com

 

KBS 역사스페셜 – 800년의 타임캡슐, 태안 마도선

조회수 830,361회

최초 공개: 2020. 6. 15.

https://youtu.be/5zV-9iB8-pg?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삼국시대 선박 발견될까…태안 마도 해역 수중발굴 진행

핵심요약국립해양연구소, 9월까지 수중발굴조사 고려와 조선 선박 4척, 유물 1만여점 찾아내 '수중 문화재의 보고'로 여겨지는 충남 태안 마도해역에서 수중발굴조사가 재개된다. 문화재청 국립

v.daum.net

 

 

KBS 역사스페셜 – 마도3호선의 비밀 / KBS 2012.10.25 방송

최초 공개: 2020. 10. 16.

https://youtu.be/JzPzg1t0354?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신안 보물선]

이기환 기자입력 2023. 12. 4. 05:00수정 2023. 12. 4. 22:23

"700년 전 침몰한 신안보물선…수출금지품 800만개 실은 밀수선"[이기환의 Hi-story] (daum.net)

 

"700년 전 침몰한 신안보물선…수출금지품 800만개 실은 밀수선"[이기환의 Hi-story]

30, 50, 70, 700, 900, 1500. 무슨 숫자조합일까요. 올해(2023년)에 유독 많이 붙은 ‘~주년’의 수식어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과, 천마총 발굴 50주년이고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입니다. <고

v.daum.net

 

 

 

 

입력 2021. 2. 15. 05:07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daum.net)

[서울신문]1970년대 어부 그물에 도자기 자주 걸려
당시 중요성 몰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려
1976년 도굴꾼 유물 팔려다 존재 알려져

수중발굴 경험 없어 해군 등과 합동조사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대규모 유물 나와
금속품·도자기 등 2만 4000여점 찾아내

목간 글씨 연구 결과 원나라 국적 밝혀져
당시 항로·유물 추정… 고려 거쳐 日향한 듯
신안보물선 14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실증

신안보물선은 700년 가까이 물속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13~14세기 생활상을 알려줬다. 전남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에 신안보물선을 복원해 전시해 놨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1970년대 중반 보물선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발굴된 신안보물선에서 값진 고려청자와 송·원대 도자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수중 발굴은 물의 흐름, 기상조건, 기압차이 등에 따라 매우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고, 고가의 발굴 장비와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수중고고학은 신안보물선 발굴 전까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신안보물선 발굴 현장에서 나온 도자기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어부 그물에 걸린 도자기 6점의 가치

신안보물선은 1975년 8월 처음 확인됐다. 어부 최모씨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다른 어부들은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가 개밥그릇이나 재떨이로 썼다. 최씨도 도자기의 중요성을 몰랐지만,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동생은 달랐다. 동생의 관심으로 신안군청에 신고해 나온 감정 결과, 중국 송·원대의 도자기였다. 그 이듬해 침몰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무려 700년 동안 깊은 바닷속에 잠들었던 보물선이 비로소 물 위로 떠올랐다.

이듬해 9월 도굴꾼이 잠수부를 고용해 유물을 건져내 팔려다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도굴이 잇달아 일어났고, 발굴 해역 주민들도 도굴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관계 당국은 조사를 서둘렀지만 수중발굴 경험이 없던 탓에 유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도구나 장비도 딱히 갖추지 못했다.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과 해군해난구조대 등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

신안보물선의 발굴 위치는 전남 신안군 증도 해역이다. 증도는 전남 목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40㎞ 떨어진 섬이다. 발굴 현장은 증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 떨어진 해역이었다. 여기서 197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이 시작됐다. 이후 약 10년 동안 조사가 이어진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물의 흐름이 바뀌는 정조 시간에만 발굴할 수 있었다. 수심은 평균 20m 정도였는데, 수중 시야가 좋지 않고 조류가 빨라 조사에 어려움이 상당했다.

1977년 제3차부터 바둑판 모양의 철재로 된 ‘그리드’를 설치해 육상 발굴처럼 조사 결과를 기록했다. 해군이 발굴하고, 학자들은 유물과 도면을 정리했다. 이렇게 해 선박과 송·원대 도자기 등 무려 2만 4000여점이 최종 출수됐다.

신안보물선에서 찾은 목간.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지치삼년’이 새겨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보물선의 국적은 뜨거운 관심사였다. 고려냐, 중국이냐, 아니면 일본이냐로 의견이 속출했다. 연구 결과 중국 선박으로 최종 밝혀졌다. 신안보물선에서 나온 ‘지치삼년’(至治參年)이라고 새겨진 목간의 글씨가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가와 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선박의 구조는 어땠을까. 당시는 고려시대로,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된 선박은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지만 신안선은 중국 선박으로 배 밑이 ‘V’자 모양인 첨저선이었다. 신안보물선은 중국 푸젠 지역 첨저선으로, 수심이 깊은 해역에서의 운항과 파도를 가르기에 적합하고, 배를 만들 때 무사 항해와 안녕을 기원하는 보수공이 있어 중국 선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수공은 선수·선미 용골재 연결부에 위치한다. 선수 수직접합면 원형 구멍에는 청동거울을 넣었고 선미에는 송대 화폐인 태평통보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했다. 선체는 모두 720여편(조각)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여년 동안 보존처리 후 복원했다. 추정 실물 크기는 길이 34m, 폭 11m, 깊이 3.7m이다.

●신안보물선에 고려인들도 승선한 듯

신안보물선의 유물은 도자기 2만여점, 금속품 1000여점, 자단목 1000여점, 향신료, 약제품, 석제품, 목제품, 유리·골각제품, 동전 28t(약 800만개) 등이다. 도자기는 길이 50~70㎝, 너비 40~60㎝, 높이 40~60㎝ 정도 나무상자에 10~20개씩 포개서 끈으로 묶어 적재했다. 배의 균형을 잡고자 자단목을 배 밑에 골고루 깔고 그 위에 28t이나 되는 동전을 쌓았다. 동전 상단에는 도자기와 칠기·금속제품 등을 수납했다.

배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고려와 원, 일본에서 사용한 것들로 2만여점에 달한다. 침몰한 배에서 도자기가 대량으로 나온 사례는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드문 사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우리나라 유물은 청자 매병과 청자 베개, 선원들이 배 위에서 사용하던 청동숟가락 등이 있다. 고려청자는 12~13세기 강진 사당리요와 부안 유천리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에서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인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숟가락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승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신안보물선의 항로나 유물로 봐서는 고려를 거쳤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려 왕실과 귀족들에게는 중국의 영향으로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 취향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예의 발전을 이끌어 고품질 상감청자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유물로는 세토매병과 나막신, 칼코 등이 있다. 일본 가마쿠라시대는 중국과 외교 관계가 중단된 상태였지만,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교류는 활발했다. 차 마시고, 향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선종사찰,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사와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이런 문화를 즐기고자 관련 기물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와 관련한 유물들이 향로, 향합, 꽃병, 잔, 주전자 등이다.

신안선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도자기·토기류로, 2만 660여점에 이른다. 도자기는 청자와 청백자가 다수였는데 대부분 중국 용천요와 경덕진요계였다. 도자기 분류로 편년과 생산지 등도 밝혀냈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출수된 도자기는 지금까지도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유례가 드물다.

금속 유물은 1000여점으로 분향구, 불교의식구, 주방용구, 생활용구, 금속정 등 다양했다. 금속덩어리인 금속정은 녹여서 불상이나 기타 기물 제작에 사용하고자 했을 터다. 주석정과 철정이 340여점으로 가장 많고 ‘왕구랑’(王九郞)이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특히 ‘경원로’(慶元路)가 새겨진 청동추 덕분에 선박 출항지가 중국 경원로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목제유물로는 목간, 목기발, 목제반, 칠기완, 자단목 등이 나왔다. 목간 360여점은 화물표이니만큼 화물주·적재품 단위 등을 밝히는 데 요긴하게 쓰였고 침몰연대를 분석하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중 목간에서 언급한 ‘도후쿠지’(東福寺)는 일본 교토시 도잔구에 있는 임제종 사찰을 가리킨다. 1319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325년 가마쿠라 막부의 도움으로 재건됐다. ‘도후쿠지’ 목간은 1323년 도후쿠지 사찰 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신안보물선을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아래 파견된 무역선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식물류는 후추, 은행, 빈낭(기호식품), 여지(과일) 씨 등이 나왔다. 이러한 식물은 한약재와 향료 등이 거래되거나 구급약, 혹은 식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며 당시 해상운송의 규모와 교류 정도를 가늠케 한다.

신안보물선 발굴 당시 해군 조사 모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출항한 신안보물선, 최종 목적지는

신안보물선의 항로는 두 갈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추정은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항에서 연안 항로를 따라 온저우 등을 거쳐 칭위안으로 북상해 무역품을 싣고 고려,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다. 중국 저장성 칭위안항을 출발한 배는 고려 개경을 중간 기착지로 삼았을 것이다. 배의 발굴 지점은 한중 항로인 서남해사단항으로, 기상재해 등 돌발 상황으로 인해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추정은 중일 무역이 활발했던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항이 목적지인 항로다. 중국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직항하던 무역선이 남송·원대의 중국과 일본 간 주요 무역품이던 도자기와 동전들을 싣고 표류하다 침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물주는 일본인과 기관의 대리인 등이 많았으며 목간에 새겨진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筥崎) 등은 규슈의 사찰로, 하카다항과 관련이 있다. 출항지는 청동추에 새겨진 대로 ‘경원로’이다. 칭위안은 현재 중국 저장성 닝보 지역으로 남송대에 광저우, 취안저우와 더불어 국제항으로 성장한 곳이다. ‘지치삼년육월삼일’(至治參年六月二日) 목간은 신안선이 6월 남풍 시기에 출항했음을 알려준다.

신안보물선과 유물은 14세기 전후 해양 실크로드 무역의 실증이며 고려·일본 유물도 출수돼 한중일 관련성도 증명한다. 당시 중국 범선의 무대는 고려·일본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였다. 신안보물선이 고려를 경유해 일본으로 갔는지, 아니면 바로 일본으로 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수가 우리나라 해역인 것은 분명한 만큼 우리나라가 해양 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대변한다.

신안보물선 수중발굴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수중고고학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복원된 신안보물선의 선체와 다양한 도자기, 자단목, 목간, 금속제품 등 유물은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시하고 있다. 연구소를 방문하면 영상과 전시를 통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신안 증도 발굴해역은 현재 사적 제274호로 지정돼 안내판과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생생한 해양 실크로드를 보고 싶다면 직접 방문해 볼 만하다.

김병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출처; 신안선부터 십이동파도선까지..부산서 만나는 해저선박 유물 (daum.net)

신안선부터 십이동파도선까지..부산서 만나는 해저선박 유물

입력 2019. 8. 12. 09:20
 
20일부터 부산박물관 '한국의 수중보물'展 통해 해양유물 480점 소개
바닷속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청자매병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바다에 침몰했다가 수백, 수천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고선박은 당대의 생활과 문화, 나아가 국제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보물선'이다.

1976년 한국 수중고고학의 시작을 알린 신안선을 비롯해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고선박 유물을 갈무리한 전시가 20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 부산시립박물관에서 개막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부산시립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특별전 '한국의 수중보물, 타임캡슐을 열다'는 해양유물 480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특별전은 5개 공간으로 구성된다.

1부 '바닷속 보물창고, 난파선을 만나다'는 수중고고학의 전개를 설명한다.

2부 '바닷길에서 새로운 삶과 풍요를 꿈꾸다'는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보물선인 신안선을 중심으로 14세기 아시아의 국제해양교류 양상을 소개하고, 신안군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을 소개한다.

침몰한 태안선에 청자잔이 실렸던 모습 [문화재청 제공]

3부 '흙과 불로 빚은 미학, 바닷길로 퍼지다'는 고려시대 서해에서 난파됐다가 2003년 군산시 옥도면 해저에서 발견된 십이동파도선을 비롯해 도자기 운반선에 실린 자기와 그 선적 방법 등을 보여준다.

4부 '바닷길로 나라의 세금을 걷다'는 태안군 마도 인근 바다에 침몰한 고려 곡물운반선 마도 1, 2, 3호선과 조선 조운선 마도 4호선 등을 유물과 함께 펼쳐 보인다.

5부 '뱃사람들, 머나먼 항해를 떠나다'는 과거 뱃사람들이 사용한 도구와 즐긴 먹거리 등 선상 생활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특별전 개막식은 19일 오후 3시 부산시립박물관 부산관에서 열린다.

이날 오후 1시30분부터 대강당에서는 이귀영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의 '한국 수중박물과 해양교류' 강연이 진행된다.

 

 

 

출처; [도재기의 천년향기](29)건져올린 14척 중 고려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는 겨우 1척씩뿐 바다만 아는 미스터리 ‘고선박’ - 경향신문 (khan.co.kr)

(29)건져올린 14척 중 고려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는 겨우 1척씩뿐 바다만 아는 미스터리 ‘고선박’

입력 : 2019.08.03 06:00
도재기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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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의 보물선, 고선박

수중고고학이 발전하면서 ‘보물선’으로 불리는 고선박 등 다양한 수중문화재들이 주목받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지금까지 바다에서 발굴한 고선박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두 14척이다. 사진은 경기 안산시 대부도 방아머리해수욕장 인근에서 고려시대 선박 ‘대부도2호선’이 발굴되는 장면(2015년)이며, 선체에서 청자 등 유물과 함께 곶감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 수중고고학, 1976년 ‘신안선’ 발굴로 첫걸음…선박들 안에 콩·젓갈·솥부터 청자 수만점까지 온갖 물건물살 악명 높아 “1392~1455년 200척 침몰” 실록에도 기록된 태안 마도해역, 지금은 ‘바다의 경주’ 평가
고고학 지식·잠수능력 겸비한 전문 인력 태부족…육지서 많이 사라진 도굴꾼들이 바닷속 호시탐탐

 

문화유산이 땅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의 해저, 해안의 갯벌 속에도 묻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이 땅은 3면이 바다여서 고대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했고, 서남해안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로 국제 문화교류의 현장이었다. 특히 서해는 갯벌이 발달돼 유물의 보존환경도 좋다. 2000년대 들어 수중문화재를 다루는 수중고고학이 자리 잡으면서 수중문화재도 부상하고 있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대표적 수중문화재는 옛 배, 고선박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누비다 침몰, 수백~수천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난파선이다. 고선박은 대부분 침몰 당시의 사람들이 쓰던 온갖 물건이 실린 ‘타임캡슐’이자, 유물이 가득한 ‘보물선’이다. 실제 고려시대 고선박에선 적재물품의 내용과 발송처·수취인 등을 기록한 목간은 물론 청자, 콩·메밀 같은 곡물, 각종 특산품, 젓갈 등 먹거리, 솥·수저 같은 생활용품 등이 발견된다. 전남 완도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완도선’에선 청자 3만여점이 포장상태 그대로 확인됐고, 중국 원나라 무역선 ‘신안선’에선 2만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다. 유물도 귀하지만 고선박도 전통 배(한선) 연구, 당시 해상운송 체계·국제교류 등을 파악하는 데 소중하며 때로 한국사를 다시 쓰게 하는 문화재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배는?

해저 수중발굴에서 유물을 수습하는 모습.

 

알다시피 배의 역사는 길다. 신석기시대부터 바다나 강·호수를 누볐다. 신석기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어업활동을 한 사실은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배 그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배 유물은 약 8000년 전의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다. 통나무 속을 파낸 배는 경남 창녕 비봉리 조개무지(패총·사적 486호) 유적에서 나왔다. 길이 310㎝, 폭 62㎝ 정도다. 발굴된 곳은 공기가 차단돼 보존환경이 좋은 저습지 유적이어서 아직도 불로 지지고 돌도끼 등으로 가공한 흔적이 배에 남아 있다. 이 소나무로 만든 통나무배는 보존처리를 거쳐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삼국시대 유적에서는 배 모양 토기들이 출토돼 해상활동의 증거를 보여준다. 실제 가야시대의 선박 부재(3~4세기 추정)가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됐다. 통일신라시대의 배로는 ‘안압지선’이 유명하다. 왕실 정원의 인공연못인 경주의 월지(안압지)에서 나온 안압지선은 통나무배에서 진화, 가공한 나무 판재들로 만든 목선이다. 선박 발달사로 볼 때 원시적 뗏목배~통나무배~(부재 가공을 해 짜맞춘) 준구조선~구조선의 단계 중 준구조선이다. 8~9세기에 제작됐으며 재료는 소나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다. 통일신라의 활발한 해상활동은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상이 잘 말해준다. 통일신라와 남북국시대를 이룬 발해도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과 사절단을 교류할 정도로 조선술·항해술이 뛰어났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바닷길이 더욱 열렸다.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세곡)이나 궁중에 상납하게 한 특산물(공물)을 운송하는 조운선, 신안선 같은 동북아시아 무역선들이 서해를 오르내렸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청자운반선이 강진, 부안에서 빚어진 명품 청자들을 실어 날랐다.

 

■ 14척의 고선박, 역사를 증언하다

왼쪽부터 고려시대 청자운반선 ‘태안선’에서 나온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보물 1782호), 고려 선박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청자 상감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보물 1783호).

 

한국 수중고고학의 첫걸음은 1976년 ‘신안선’ 발굴 작업이다. 당시엔 전문인력, 장비가 없어 해군이 주도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수중문화재 조사·발굴·연구·전시 등을 이끈다. ‘비봉호’나 ‘안압지선’과 달리 바다에서 지금까지 발굴한 고선박, 명실상부한 ‘바닷속의 보물선’은 모두 14척이다. 고려시대 배가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 각 1척이며, 국내에서 발굴됐지만 중국 고선박이 2척이다. 발굴 장소는 인천 옹진부터 전남 진도·완도에 이르기까지 서남해에 집중돼 있다. 발견 당시 모습을 보면, 운항 중이거나 정박 상태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 고선박은 겨우 1척인데, 고려시대 배는 10척으로 훨씬 많이 발굴됐다. 그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고, 조선시대에 조선술·항해술이 더 발전해 침몰한 배가 적을 수 있다는 분석 등이 나올 뿐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바다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고선박은 ‘영흥도선’이다. ‘안압지선’과 더불어 2척뿐인 통일신라시대 배다. 인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해저에서 2013년 발굴됐는데, 선체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710~774년으로 나타났다. 선체는 철제 솥 10여점과 도기 등 유물에 눌린 길이 약 6m, 너비 1.4m가 남아 있다. 황금빛을 내는 당시 최고급 도료인 황칠이 발견돼 화제를 모았으며, 주변 해저에선 수백점의 청자 등이 흩어져 있어 또 다른 배가 침몰해 있을 가능성도 높다.

고려시대 고선박은 10척인데,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만 3척이 발굴됐다. ‘마도 1~3호선’이다. ‘마도3호선’은 선체와 함께 나온 30여점의 목간 분석 결과, 1265~1268년 사이 전남 여수 일대에서 거둬들인 곡물과 전복 등을 싣고 강화도로 가던 중이었다. ‘마도1호선’은 1208년 나주와 해남·장흥 등의 곡물을 개경으로 운반하던 중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마도2호선’은 4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주목할 만하다. 1213년쯤 전북 고창 일대에서 모은 곡물 등을 싣고 개경으로 가던 배에서는 청자 매병 2점과 물품꼬리표라 할 수 있는 죽찰(대나무 조각의 목간)도 발견됐는데, 죽찰에서 매병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동안 매병의 용도를 놓고 여러 주장이 난무했는데, 참기름이나 꿀을 담은 생활용기로 확인된 것이다. 이 매병과 죽찰은 각각 보물 1783호(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 1784호(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로 지정됐다. 마도 해역 인근인 대섬 앞바다에선 청자운반선 ‘태안선’이 나왔다. 통발에 주꾸미가 청자대접을 붙들고 올라온 덕분에 발견된 태안선에선 2만3000여점의 청자가 당시 포장한 그 상태로 확인됐다. 그중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는 워낙 희귀해 보물 1782호로 지정됐다.

마도 해역에서는 지금까지 발굴된 유일한 조선시대 고선박인 ‘마도4호선’도 나왔다. 1417~1421년 사이에 세곡과 분청사기 같은 공물을 싣고 한양으로 가던 이 배는 당시 조운선의 구조나 조운체계·조세제도 등의 연구에 귀중한 첫 조운선 실물자료다. 전통 한선에는 나무못만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왔는데 마도4호선에는 쇠못이 박혀 있어 그동안의 학설이 수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마도 해역에서 고선박이 유독 많이 발견될까. 이 지역은 개경, 한양으로 올라가는 바닷길의 길목이자 외국 사신들의 숙소도 있어 무역선·조운선 등 많은 배가 오르내렸다. 정박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센 물살과 암초, 안개 등으로 난파 위험성도 높은 대표적 바닷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392~1455년 사이 200척이 이곳(태안 안흥량)에서 침몰됐다고 기록될 정도다. ‘배 무덤’이라 불리던 곳이 지금은 ‘수중문화재의 보물창고’ ‘바다의 경주’라고 평가받는다.

고려 고선박은 경기 안산시 대부도 해역에서도 ‘대부도선’ ‘대부도2호선’이 확인됐다. 또 다른 고려 배로는 ‘신안 안좌도선’(전남 신안군 안좌도), ‘군산 십이동파도선’(전북 군산시 십이동파도), ‘목포 달리도선’(전남 목포시 달리도), ‘완도선’(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이 있다.

국제교류의 결과로 국내에서 발굴된 중국 배는 ‘신안선’과 ‘진도 통나무배’다. ‘신안선’은 1975년 발견돼 1976~1984년 총 11차례 발굴이 이뤄졌다. 중국 도자기 2만여점을 비롯해 동전 28t, 인도·동남아시아산 향료·향나무·한약재 등을 싣고 중국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로 가던 중 1323년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통나무배’(전남 진도군 벽파리)는 원시적 통나무배가 아니라 구조선의 하나이며, 일본 배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 배가 국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고려 고선박이 발굴됐다. 산둥성 펑라이(蓬萊)시의 항구유적인 봉래수성(蓬萊水城) 해안에서 발굴된 ‘봉래 3·4호선’이다. 이들 배는 형태·구조 등에서 고려 선박의 특성을 보이고, 고려 청자도 실려 있었다.

이들 고선박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고려 선박의 구조와 형태, 당시 해상운송 루트나 체계, 중국 배와의 특성 비교, 실린 유물을 바탕으로 한 각종 연구 등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수중발굴된 고선박과 해저 유물들은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의 보존센터·해양유물전시관에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수중고고학의 중요성, 이해를 높이기 위해 체험교육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 운영 중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육지의 발굴에 비해 수중문화재 발굴에 대한 정부의 관심, 지원은 크게 부족하다. 3면이 바다인 한국의 특성상 주목하는 게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많은 문화재가 해저, 갯벌에 있음을 알면서도 조사·발굴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육지에선 많이 사라진 도굴꾼들이 바다에서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학계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역사의 죄인”이라 자책하는 이유다. 수중문화재 발굴은 그 특성상 예산, 시간, 노력이 육지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고고학 전문지식에 더해 잠수 같은 전문능력을 갖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선 과감한 지원과 높은 관심으로 전문인력 양성, 수중발굴조사에 특화된 기술 개발, 로봇 등 첨단장비의 활용 등이 시급하다. 나아가 단순히 수중유물 발굴을 넘어 이젠 세계적 추세처럼 해양문화유산 전반으로 연구 지평을 넓혀야 한다. 혹시 이번 여름 바다를 만난다면 저기 어딘가에 묻혀 있을 ‘보물선’을 상상해봤으면 한다. 그리고 그 고선박이 우리에게 안기는 숙제도 되새김질했으면 좋겠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36년간 꼭꼭 숨겨뒀던 신안 해저유물 어디서 났을까

입력 2019.06.13. 15:06 수정 2019.06.13. 18:25 댓글 242

 

일본 반출하려다 붙잡힌 60대 "어머니 유품" 주장
경찰, 정부 발굴 때 일부 빼돌려졌을 가능성 배제 안 해
하나씩 종이로 싼 뒤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보관한 덕에 보존상태 훌륭

https://news.v.daum.net/v/20190613150619965

 

36년간 꼭꼭 숨겨뒀던 신안 해저유물 어디서 났을까

(대전=연합뉴스) 김준범 기자 = 신안해저유물 57점을 36년 동안 숨겨오다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60대가 경찰에 붙잡힌 가운데 그가 이들 유물을 어떻게 지니게 됐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매장 문화

news.v.daum.net

 

 

[군산]

"바닷 속에서 청동기 유물".. 군산 선유도 '선사시대 해상활동' 증거 (daum.net)

이정용입력 2023. 11. 27. 16:36수정 2023. 11. 27. 18:01
 

선유도 해역에서 발굴한 간돌검, 기와, 토기, 어망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북 군산 선유도 해역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선사시대때부터 선유도에서 해상 활동이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분석입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올해 4~10월 선유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조사를 한 결과, 간돌검을 포함한 유물 180여 점을 발굴했다고 오늘(27일) 밝혔습니다. 

 

간돌검은 돌을 갈아 만든 칼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입니다.

 

연구소 관계자는 "선유도의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해상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서남해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침몰한 선박에 실려 있던 다양한 유물이 수중 발굴조사를 통해 나왔으나, 선사시대 유물이 선유도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고 덧붙였습니다. 

 

간돌검과 함께 청자와 백자, 기와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고려청자 38점, 분청사기 5점, 백자 27점 등 50점에 달합니다.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백자 접시와 귀 모양의 고리형 손잡이가 4개 달린 청자 항아리 등도 발굴됐습니다. 

 

이는 선유도 해역에 중국 고선박이 매장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게 연구소 측의 설명입니다. 

 

실제 선유도 일대는 과거 물건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정박하거나 수군 진영인 군산진, 사신이 묵었던 객관인 군산정 등이 있던 곳으로 많은 선박이 오간 길목입니다. 

 

국제무역 항로의 기착지로 서해 연안 항로의 거점 역할을 한 해역으로도 전해져 왔습니다. 

 

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주변 해역에 대한 조사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선유도 해역에서는 2020년 수중에서 유물을 목격했다는 잠수사의 신고를 받아 조사를 시작한 이래 2022년까지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유물 500여 점이 나왔었습니다. 

 

조사 대상 면적은 약 23만 5천㎡(약 7만1천 평)로, 현재는 일부만 조사가 이뤄졌으며, 연구소는 유물이 다수 발견된 암초 주변부터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2023년 선유도 해역에서 발굴한 다양한 시기의 유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군산 선유도 앞바다서 유물 180여 점…청동기시대 석기도 확인

김예나입력 2023. 11. 27. 10:22수정 2023. 11. 27. 11:11
수중 발굴조사서 간돌검 첫 발견…"선사시대부터 해상활동 이뤄져"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간돌검 날의 일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전북 군산 선유도 인근 바다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 유물이 처음 확인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올해 4월부터 10월까지 선유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조사를 한 결과, 간돌검을 포함한 유물 180여 점을 발굴했다고 27일 밝혔다.

 

간돌검은 돌을 갈아서 만든 칼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 유물이다.

주로 고인돌과 같은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수중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발견된 부분은 칼날의 일부 조각인 것으로 파악됐다.

선유도 해역에서 발굴한 간돌검, 기와, 토기, 어망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간 선유도의 조개무지(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형성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볼 때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당시 해상 활동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연구소 관계자는 "간돌검은 국내 수중 발굴조사에서 처음 발굴된 유물"이라며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선유도 해역에서 해상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의미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올해 조사에서는 간돌검 외에 청자, 백자, 기와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확인됐다.

연구소 관계자는 "유물 가운데 고려청자가 38점, 분청사기가 5점, 백자가 27점, 도기류는 50점에 이른다"며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폭넓은 시기를 아우른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중국 남송 대에 제작된 유물이 발견된 점을 눈여겨보고 있다.

중국 남송시대 추정 백자비문접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조사 결과, 빗으로 긁은 듯한 문양이 있는 백자 접시, 귀 모양의 고리형 손잡이가 4개 달린 청자 항아리 등이 확인됐는데 이는 선유도 해역에 중국 고선박이 매장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게 연구소 설명이다.

실제 선유도 일대는 과거 물건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정박하거나 수군 진영인 군산진, 사신이 묵었던 객관(客館)인 군산정 등이 있던 곳으로 과거부터 많은 선박이 오간 길목이다.

국제무역 항로의 기착지로 서해 연안 항로의 거점 역할을 한 해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선유도 해역에서 발굴한 다양한 시기의 유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주변 해역에 대한 조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선유도 해역에서는 2020년 수중에서 유물을 목격했다는 잠수사의 신고를 받아 조사를 시작한 이래 2022년까지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유물 500여 점이 나온 바 있다.

조사 대상 면적은 약 23만5천㎡(약 7만1천평)로, 현재는 일부만 조사한 상태다.

연구소는 "유물이 많이 발견된 암초 주변부터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2024년에도 고선박과 유물 집중지역을 확인하기 조사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선유도 해역에서 조사 중인 발굴바지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es@yna.co.kr

 

 

고려청자·백자 등 무더기 발견
전북, 수중 유물 보관시설 없어
‘수중고고학 센터’ 건립 목소리

전북 군산시 앞바다 일대에서 인양된 고려청자 등 각종 수중 유물(사진)을 보관·전시할 수 있는 시설이 건립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전북에는 적절한 시설이 없어 고군산군도 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유물들을 전남 목포시에 있는 해양유물전시관으로 옮겨 보관하기 때문이다.

8일 전북도와 군산시에 따르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고군산군도 해역에서 고려청자, 백자, 숫돌 등 356점의 유물을 추가로 발굴했다. 고군산군도는 지금까지 고려시대 도자기 운반선 등 1만 50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됐고 앞으로도 계속 발견될 것으로 전망되는 유물의 보고다. 2018년 십이동파도 해저에서는 고려자기 등 8100점의 유물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고군산군도에서 많은 문화재가 발굴되는 것은 이곳이 개성과 한양을 오가던 뱃길이었고 중국으로 이어진 해양 교류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선유도·무녀도 등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고군산군도는 배들이 거센 바람을 피해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여건을 갖춘 곳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건져 올린 문화재는 모두 목포의 해양유물전시관으로 옮겨졌다. 전북에는 수중 유물을 보존 처리하고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북도와 군산시는 문화재청과 함께 ‘수중고고학 교육 훈련센터’를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건립 장소는 비응항 앞쪽과 야미도 입구가 거론된다. 이곳에 수중 문화재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훈련장과 유물 보존센터, 전시관 등을 설치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1000억원의 사업비 확보가 관건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2023년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신청할 계획이나 윤석열 정부가 긴축 재정 기조를 강조하고 있어 이를 설득하는 일이 과제”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진도]

 

입력 2021. 4. 19. 05:07수정 2021. 4. 19. 10:11

'명량대첩' 바닷속 보물이 세상으로 나온 건 도굴꾼 덕? (daum.net)

[바다에서 건져올린 타임캡슐] <4>명량대첩로 해역서 발굴한 유물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2~2020년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모두 7차례 수중발굴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화기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을 비롯해 고려청자, 닻돌 등을 거뒀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2014)에서 보여 준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활약상을 재조명하고, 찬란한 해양 실크로드 문화를 소환하며, 여몽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삼별초항쟁을 보여 주는 출토품들이다. 이 유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도굴꾼들의 내분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전남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은 찬란한 해양실크로드의 보고다. 2012년 이 해역에서 소소승자총통을 출수하면서 처음 실체를 확인했다. 소승자총통보다 길고 총구가 작은 이 무기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제공

 

●고려청자 도굴 제보, 도굴꾼 내분이 발단

2011년 일이다. 진도 앞바다에서 고려청자를 도굴했다는 제보가 연구소에 들어왔다. 도굴한 향로가 제값을 받지 못하자 도굴꾼끼리 싸움이 일었다. 도굴품 중 고려시대 ‘청자 버드나무·갈대·물새무늬 향로’는 이미 보물로 지정한 ‘청자괴물향로’와 그 형태가 매우 유사했다. 그런데 골동품상이 향로 표면의 패각류와 이물질을 제거하려고 염산 등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는데, 청자 본래의 자연미가 퇴색하고 유약변질 등을 이유로 구매자가 값을 후려쳐 거래가 불발됐다. 이런 갈등 탓에 거래가 지연되면서 문화재청과 서울경찰청은 수사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2011년 11월 문화재청과 서울경찰청이 합동으로 청자 베개 등을 거래하는 현장에서 도굴꾼들을 검거했다. 조사해 보니, 도굴꾼들은 전남 진도·신안해역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뒤 잠수장비를 착용하고 바닷물이 빠질 때를 기다렸다가 수심 7∼15m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고려시대 강진에서 출발한 도자기 운반선의 항로를 파악하고, 침몰지점을 추정해 도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물길 험하지만 선박왕래 잦았던 명량대첩로

명량대첩로 해역은 남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예로부터 선박들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이 해역은 물살이 빠른 울돌목으로, 태안 난행량 등과 함께 험한 물길로 유명했다. 고려와 조선 때에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거둔 세곡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과 무역선의 통로였다. 강진과 해남에서 생산한 청자를 개경으로 운반하는 ‘세라믹 로드’이자,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양 실크로드’였다.

고려 희종 3년에 지은 벽파정은 외국사절을 맞은 곳으로, 고려 때 해상교류 항로를 가늠하게 한다. 문화재청 제공

 

발굴지역은 울돌목에서 남동쪽으로 약 4㎞ 떨어진 벽파항 일대다. 벽파항 인근에 고려 희종 3년인 1207년 만든 정자인 벽파정이 있는데, 고려는 이곳에서 외국 사절을 맞이했다. 이곳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여몽연합군과 맞서 싸운 곳이기도 하다. 앞서 1991~1992년에는 벽파항 인근에서 진도 통나무배를 발굴하기도 했다. 중국 남부 푸지엔에서 만든 배로, 고려시대 해상교류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이곳은 또 일본군을 대파한 명량대첩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 수군은 벽파진에 주둔하며 왜군의 기습공격을 방어했다. 울돌목을 배후에 두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한 조선 수군은 명량대첩 하루 전 해남에 있는 전라우수영으로 이동했다. 왜군이 다음날 133척 배를 이끌고 울돌목으로 이동하자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울돌목에서 13척 배로 31척 왜선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뒀다.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 모습.문화재청 제공

 

●도굴품 정보로 탐사… 여러 시대 유물 나와

도굴품의 정보를 배경으로 2012년 9월부터 명량대첩로에서 수중발굴을 시작했다. 발굴해역 수심은 5~20m, 밀물과 썰물의 차이는 3~4m 정도였다. 밧줄로 바둑판 모양의 그리드를 설치하고, 진흙이나 개흙의 침전물을 퍼 올리는 슬러지 펌프를 사용했다. 수중 시야가 나빠 수중과 해저면에 있는 문화재를 탐지하는 수중초음파카메라도 활용했다. 유물은 넓은 범위에 흩어져 묻혀 있었고, 또 층위가 구분되지 않고 여러 시대 것들이 뒤엉켜 나왔다. 빠른 조류 때문에 소용돌이가 생기는 와류현상 때문이었다.

2012년 10월 발굴조사가 가장 주목받았는데, 12∼13세기 고려청자 등 90여점이 나왔다. 소소승자총통 3점도 최초로 빛을 봤다. 다른 유물로는 고려시대 도자기, 조선시대 백자를 비롯한 총통·석환·금속유물·닻돌 등 1000여점이다.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발굴한 청자향로 등 유물. 문화재청 제공

 

가장 많이 나온 유물은 도자기였는데, 조사 구간 전역에서 넓게 발견됐다. 강진·해남 등에서 만든 고려청자는 베개·잔·접시·유병·향로·붓꽂이 용도로 쓴 것들이었다. 특히 기린·오리·원앙모양의 상형청자향로뚜껑, 청자삼족향로, 청자기와 등은 가치가 아주 높았다. 이외에 토기·백자·분청사기·흑유 등도 함께 출수됐다.

명량대첩로에서 출수된 석환은 이곳에서 벌였을 해전의 이야기를 소환한다. 문화재청 제공

 

금속유물들은 주로 무기류였다. 총통과 발사장치가 달린 활(쇠뇌)과 방아쇠 등 전쟁 유물이었다. 석제유물은 나무로 만든 가벼운 닻을 물속에 가라앉히는 용도로 쓰이는 닻돌이 많았다. 닻돌은 일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면서 총 60여점이나 출수됐다. 석환(돌포탄)도 나왔는데, 해전에서 전함끼리 근접전을 벌일 적에 상대의 머리에 큰 타격을 가하는 유용한 병기였다. 삼별초나 임진왜란 전투 때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유물은 닻돌, 북송대 동전, 흑유완 등인데 고려시대에 진도 벽파항을 거점으로 한중일을 잇는 해상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소소승자총통에 새겨진 ‘장윤덕영’. 장인인 윤덕영이 제작했다는 뜻이다. 문화재청 제공

 

●문헌기록에 없던 소소승자총통 최초 확인

도굴범들의 뜻하지 않은 길잡이 덕에 발굴된 소소승자총통은 명량대첩에서 사용한 무기류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 소총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다. 그러나 화포는 조선군 총통이 우세했다. 명종 때부터 왜구를 상대하려고 대형화기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에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 등 대형화포를 선박 전후좌우에 장착해 포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왜군은 중·소형선과 조총으로 배를 뱃전에 붙이는 백병전 위주여서 원거리 화포전이 벌어지는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개인용 화기인 소소승자총통은 실물뿐만 아니라 문헌기록에도 없는 무기였던 터라 이때 처음으로 실체를 확인했다. 그동안 조선시대 소형화기로는 세총통·승자총통·별승자총통·차승자총통·소승자총통 등이 알려져 왔다. 승자총통은 조선 선조 때 개발한 소형화기인데, 총구에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점화해 탄환을 발사하는 유동식화기이다. 이를 개선한 게 소승자총통, 소소승자총통이다. 특히 소소승자총통에는 모두 명칭이 표기돼 있고, 소(小)와 승(勝)자 사이에 두 개의 점을 겹쳐 새겼다. 현재 가늠자와 가늠쇠가 남아 있지 않지만, 가늠자·가늠쇠를 부착한 흔적으로 보인다.

 

●소승자총통 개량한 소소승자총통으로 승리

소소승자총통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소소승자총통에는 ‘만력무자삼월일 좌영 조소소승자 중삼근오량 장윤덕영’(萬曆戊子三月日 左營 造小勝字 重三斤五兩 匠尹德永)이라는 명문(明文)이 있다. 1588년 3~5월 좌영의 장인 윤덕영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소승자총통은 조선 중기 국토방위와 화기 제조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발굴했고, 좌영에서 제작한 명문도 확실하다. 결국 제작시기, 발굴지역 등을 고려할 때 1588년 제작해 1597년 명량대첩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과 총통, 발굴 지역만으로 이 총통을 전라좌수영에서 제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 수군이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이 총통은 소승자총통을 개량한 화기로서 현존하는 소승자총통과 비교할 때 총신 길이가 575~578㎜로 길지만, 구경은 12㎜로 매우 작다. 화기의 화약 소모량과 사거리 등 성능을 개선한 이 무기로 명량해역에서 대승을 거뒀다.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에선 도기와 토기가 다양하게 출수됐다.문화재청 제공

 

명량대첩로에서 출수된 도기와 토기, 고려청자, 진도 통나무배 등은 해양 실크로드의 실제 증거이며, 총통·석환 등 무기류는 삼별초 항쟁과 명량대첩을 재인식시켰다.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교류실에서는 명량대첩로에서 찾아낸 도자기와 총통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소소승자총통 3점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명량대첩로 해역도 사적으로 가지정해 보호한다. 수중발굴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해남]

2023년 5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해수욕장 갯벌 속에서 발굴된 ‘해남선’ (사진제공=문화재청)


2023년 5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해수욕장 해역에서 오래된 선박 한 척이 발견됐습니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고선박이 훼손될 우려와 유물들의 도굴이 염려됐기 때문입니다.

발견된 후 한 달 뒤인 2023년 6월부터 수중발굴조사 작업이 시작됐고, 약 4개월 만에 발굴조사 작업은 완료됐습니다.

2023년 5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해남선’ 발굴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이 선박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내부에서 수습된 유물들과 선체 부재들의 방사성탄소연대분석 결과 이 선박은 11세기 초반에서 12세기 중반 때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선박은 고려시대에 제작돼 운항됐을 겁니다.

2023년 5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발견된 ‘해남선’ 안에 있던 유물 (사진제공=문화재청)


이 선박의 운항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곡물 운반선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출수된 유물은 도기와 기와 숫돌, 닻돌 등 총 15점이었는데, 도기 내부에서는 볍씨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씨앗들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2023년 5월 발견된 ‘해남선’ 내부에서 나온 볍씨 등 여러 종류의 싸앗들 (사진제공=문화재청)


조사 결과, 배의 아래쪽 면인 저판은 7열이 남아 있었습니다. 선체의 양 옆면을 이루는 외판 부재는 좌현 2단, 우현 3단이 각각 남았습니다.

남은 부분을 토대로 추정하면 이 선박의 최대 규모는 길이 13.4m, 폭 4.7m입니다. 저판 규모로만 봤을 때, 현재까지 국내에서 조사됐던 한반도 제작 고선박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이 고선박의 이름은 발견된 해역의 명칭을 따라 '해남선'으로 붙여졌습니다. 곡물을 싣고 남해를 유유히 항해하던 선박이 좌초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2023년 5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발견된 ‘해남선’의 실측 도면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이 해남선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좌초 경위도 규명할 예정입니다.

이 해남선을 포함하면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고선박은 모두 15척이 됐습니다.

 

 

[제주 신창리]

출처; 中 남송 유물 나온 제주 신창리 해역 3차 발굴조사 시작 (edaily.co.kr)

中 남송 유물 나온 제주 신창리 해역 3차 발굴조사 시작

7일 개수제 열고 본격 수중조사
선박 잔해 조사로 해상교류 유물 확보 예정
  • 등록 2021-04-07 오전 9:48:24
  • 수정 2021-04-07 오전 9:48:24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제주박물관은 중국 남송(1127~1279)대 유물이 발견된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해역에 대한 제3차년도 공동 수중발굴조사를 오는 7일 개수제 행사와 함께 착수한다.


개수제는 수중발굴조사 시작을 알리는 제사를 뜻한다.

신창리 해역 수중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제3차 발굴조사는 6월 22일까지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중국 닻돌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신창리 수중유적에 남아있을 선박의 잔해 등을 조사해 과거 해상교류와 무역상황을 구명할 수 있는 유물들을 확보할 계획이다.

신창리 수중유적은 1983년 금제유물이 처음 발견·신고 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1990년대에는 중국 남송 시대 도자기도 발견됐다.

첫 발굴조사인 2019년에는 남송대 도자기와 함께 ‘삼가 봉한다’는 의미의 ‘謹封(근봉)’ 글자를 새긴 인장 등 목제 인장 두 점이 확인됐다.

2020년 2차 조사에서는 중국 선박에서 사용한 길이 310cm, 무게 586kg의 대형 닻돌이 발견됐다.

이 유물들은 신창리 수중유적이 중세 중국 무역선이 난파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문화재청 측은 설명했다.

양 조사기관은 이번 조사 외에도 제주도에서 과거 해양교류 유물이 발견됐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역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는 등 제주도 수중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함께 관리할 계획이다.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인주 묻은 중국 남송 시대 인장 발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9300905360864?did=DA&dtype=&dtypecode=&prnewsid=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인주 묻은 중국 남송 시대 인장 발견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확인된 중국 남송대 인장. 글자 사이에 인주가 묻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중국 남송(1127~1279) 시대 인장(印章)과 인장함이 발견됐다.문화재청 국립해

ww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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