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대모산성서 궁예가 세운 '태봉' 연호 적힌 나뭇조각 확인 (daum.net)

김예나입력 2023. 11. 15. 06:03수정 2023. 11. 17. 09:44
 
집수시설서 목간·배 모형 출토…8각 형태에 120여 자 적혀 주목
학계 "태봉 관련 목간은 국내 처음, 귀한 자료"…의례용 유물에 무게
출토된 목간 [양주시·기호문화재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경기 양주 대모산성에서 궁예(?∼918)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연호가 적힌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이 출토됐다.

국내에 남아 있는 목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태봉과 관련된 유물이 처음 확인된 데다 각 면에 쓰인 글자도 120여 자에 달해 연구 가치가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 학계에 따르면 양주시와 기호문화재연구원은 최근 양주 대모산성 동쪽 성벽 구간 일대를 조사한 결과, 물을 모으기 위해 만든 집수(集水) 시설에서 목간 1점을 발견했다.

원형으로 된 집수시설에서 나온 목간은 길이가 약 30㎝인 것으로 파악됐다.

양주 대모산성 동쪽 성벽구간과 성내 상단부 모습 [양주시·기호문화재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현장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목간은 나무를 8각으로 다듬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8면 가운데 총 6면에 한 줄씩 글이 적혀 있다.

남은 2면 중 1면은 비어 있었고, 다른 1면에는 얼굴을 그린 듯한 형체와 글씨가 있다.

발굴 조사를 담당한 양주시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에서 발견돼) 알려진 목간은 납작한 형태가 대부분인데, 이처럼 다각면 형태의 목간은 그 수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8각으로 된 목간에 글이 적힌 사례는 처음이라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발굴 조사단은 목간 형태뿐 아니라 그 안에 적힌 내용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글자가 남아있는 한 면을 해독한 결과, '정개 3년 병자 4월 9일'(政開三年丙子四月九日)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목간 세부 사진 [양주시·기호문화재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목간에 언급된 '정개'는 태봉국에서 914년부터 918년까지 약 5년간 쓴 연호를 뜻한다.

즉 정개 3년은 916년을 의미하며, 육십간지를 계산하면 병자년에 해당한다.

국내에서 태봉과 관련한 목간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고 복수의 관계자들은 전했다.

날짜가 적힌 나무 면에는 '성'(城), '대정'(大井), '대룡'(大龍)이라는 글자도 확인됐는데 '성의 큰 우물에서 큰 용을 위한' 행위가 있었고 이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목간을 살펴본 한 관계자는 "전체 글자를 해독 중이기는 하나, 큰 용이라는 뜻의 '대룡'은 왕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출토된 배 모양 유물 모습 [양주시·기호문화재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조사단 측은 목간이 실용적 목적보다는 의례와 관련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발견 당시 목간은 나무로 만든 배 모양의 조각과 함께 집수시설에서 출토됐다. 목간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배 모형은 의례용으로 쓰였거나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지난 2019년 경주 월성 유적에서 나온 목제로 된 배 모형의 경우 의례용으로 보인다는 게 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학계 안팎에서는 이번에 출토된 목간의 역사적 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주시 관계자는 "8면에 쓰인 글자를 합치면 120여 자"라며 "연대가 확실하고 지금까지 나온 목간 가운데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형 집수시설 모습 [양주시·기호문화재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양주시와 연구원은 오는 20∼21일 목간 연구 전문가들과 판독 회의를 열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사를 계기로 대모산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인 대모산성은 임진강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는 유적으로, 단순히 방어 목적으로만 지어진 게 아니라 행정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양주시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2018년부터 대모산성 일대를 조사 중이다.

발굴 상황을 잘 아는 한 전문가는 "양주의 지정학적 위치, 출토된 목간의 특징 등을 고려하면 앞으로 대모산성 일대를 지속해서 꾸준히 발굴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경주 월성 해자에서 나온 의례용 배 모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photo@yna.co.kr

yes@yna.co.kr

 

 

양주대모산성 '태봉국 목간'…한반도 발견 목간중 최다 문자 (msn.com)

양주대모산성 '태봉국 목간'…한반도 발견 목간중 최다 문자 © 제공: 머니S

목간 적외선 촬영 모음. / 사진제공=기호문화재연구원

 

양주시(시장 강수현)와 재단법인 기호문화재연구원(원장 고재용)은 양주 대모산성(사적 제526호) 13차 학술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태봉국 목간'의 판독회의를 지난 20일~21일까지 진행했다고 28일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는 목간 한 면에 적혀 있는 '정개 3년 병자 4월 9일'(政開三年丙子四月九日)의 문구에 대한 판독을 확정했다.

목간에서 언급된 '정개'(914~918)는 태봉국 궁예(? ~ 918년)의 마지막 연호이며, 정개 3년은 916년을 의미한다.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국과 관련된 이번 목간의 출토는 국내에서는 최초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판독회의에서는 916년은 병자년으로 목간의 기록과도 일치하여 "연호와 간지가 결합된 절대 연대를 보여주는 유일한 목간"으로 그 중요성을 높게 평가했다.

 

한편, 이번 판독회의에서는 대모산성 출토 '태봉국 목간'에 대해 총 8면으로 구성되었고, 그림이 있는 한 면과 공란 한 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에 8행의 글씨가 묵서되어 있다.

총 글자 수는 123자로 구성되어 한반도에서 발견된 목간 가운데 최다면(最多面), 최다행(最多行), 최다 문자 수인 것에도 주목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단편적으로 밖에 확인할 수 없는 '태봉국'의 모습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이번 출토 유물의 가치는 '새로운 삼국사기의 발견'에 비견될 정도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판독회의에서는 총 123자의 글자 가운데 102글자가 판독됐다. 판독 결과 양주대모산성 내 큰 연못(大井)에서 대룡(大龍)에게 제사를 지낸 내용이 주를 이루며, 이러한 내용 가운데 새로운 태봉 사람의 존재가 확인됐다.

바로 목간 4면에 '신해세입육무등'(辛亥歲卄六茂登) 의 글귀에서 신해년 태생의 26세 '무등(茂登)'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신해년은 891년으로 정개 3년(916년) 시점에 26세로 계산되어 목간의 제작 시점과 일치하며,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태봉 사람의 인명이다.

한편, 이번 목간은 양주대모산성 13차 발굴조사에서 새로이 확인된 집수시설에서 출토되었다. 이번 태봉국 목간의 출토는 양주대모산성이 삼국시대~후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 교통로 상의 중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며, 후삼국시대에도 양주대모산성 일대에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시는 이러한 양주대모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잠재성을 높이 평가하여 지난 2018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해 왔고, 그 결과 이번 발굴조사에서 '태봉국 목간'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강수현 양주시장은 '역사문화도시'의 위상 확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양주대모산성의 발굴조사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수현 양주시장은 "발굴 현장 공개회를 오는 12월 6일 개최하여, 이번 발굴조사 결과와 태봉국 목간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며, 판독회의에서 밝히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심도있는 연구를 통해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보여진 태봉국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밝혀나가겠다" 고 밝혔다.

 

 

https://youtu.be/iUNbhsJmloM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는 오랫동안 폭넓게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 나무(혹은 대나무)를 활용한 목간(혹은 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책(冊)’이라는 한자는 목(죽)간을 매단 모습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됐죠.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경제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목(죽)간은 종이에 견줘 몇 수는 위였습니다.

왜냐.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나무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될 수 있거든요.

1400년전 백제인의 ‘삶의 애환’을 전해주는 ‘빅5’ 목간. 구구단 목간,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이 보인다. 2022년 부여 동남리 출토된 목간을 두고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인을 기리기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금을 납부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견해가 나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진제공



■‘구구단·남근형’ 목간의 정체

해방 이후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조선시대 명문 목간은 730여점 되는데요.

그중 오늘의 주인공인 백제영역에서 출토된 명문 목간은 100여점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빅4’ 목간이 있습니다. ‘구구단 목간’과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입니다.

2011년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구구단 목간은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9981 897□ 7963)…’이 쓰여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 출토된 ‘구구단’ 자료였죠. 단순히 적거나 외우려고 기록한 구구단 목간은 아닌 것 같고요. 관청에서 물품을 출납하면서 썼던 ‘실용 구구단 목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기자의 모습. 목간에 글을 쓰고 있다. 기원후 105년 무렵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나무 에 글을 쓰는 목(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로 쓰였다. |고구려유적유물도감편찬위, <고구려 유적유물도감(5·6)-고구려편3·4>, 1990

 

능산리에서 출토된 ‘남근형 목간’(22㎝)도 시선을 잡아 끌었죠. 목간에 새겨진 명문 중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특히 남우세스러웠습니다. 가뜩이나 남근 형태의 목간인데, 또 굳이 ‘길에 서라(立)! 서라(立)! 서라(立)!’고 세번이나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연구자들이 머리를 싸매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즉 남근형 목간은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는데요.

그렇다면 백제인들이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사비(부여)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겁니다. 예부터 남근은 나라의 안녕과 악신 및 질병의 추·예방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거든요.

“이제 남근이 섰다! 섰다! 섰다! 그러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2022년 충남 부여 동남리 아파트 공사장에서 출토된 목간. 5점 중 3점은 단순한 물품꼬리표였고, 2점은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

 

■‘백제 가요’에 ‘신세한탄 인사청탁’ 목간까지

또 하나는 역시 능산리에서 확인된 ‘좀 있어 보이는’ 목간인데요.

“숙세결업(宿世結業) 동생일처(同生一處) 시비상문(是非相問) 상배백래(上拜白來)”라는 명문이 돋보였어요.

공식적으로는 ‘숙세(전세)에 업을 맺었기에 (현세에) 함께 같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잘잘못을 서로 물어(논하여) 우러러 절 올리며 사뢰옵니다’라고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국문학자(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은 색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우리 함께 한평생 살아가는데 세속의 시비 쯤이야 가려서 무엇하겠소.”

국문학자다운 맛깔스러운 해석이죠. 이렇게 되니 백제인 특유의 여유를 담은 소박한 가요로 읽힙니다.

최근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한 논문이 발표됐다. 특히 이 목간의 내용과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4좌평의 상관관계를 논증했다.(출처:손환일, ‘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

 

영락없는 충청도 사람의 가요라는 겁니다. 이 ‘숙세가’ 목간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백제 시가’라 할 수 있어요.

또 2010년 부여 구아리에서는 신세한탄과 함께 인사를 청탁하는 편지 목간이 확인됐는데요.

편지는 “이 몸이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於此貧薄 一无所有)”라고 신세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인사청탁으로 이어져요.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달라(不得仕也 莫瞋好邪)”는 당부와 함께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다(荷陰之後 永日不忘)”하는 읍소로 마무리합니다.

문맥을 보면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선물(혹은 뇌물)까지 함께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당서> ‘동이전·백제’조는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한다”고 했거든요. 만약 백제의 사법당국에 이 목간이 적발되었다면 해당관리는 평생 금고형을 받았겠네요. 재미로 따지면 이 ‘신세한탄’ 목간은 백제의 ‘빅4’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동남리 출토 ‘목간1’에 등장하는 간지는 ‘갑술’(554년)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인다고 했다. 이 경우 ‘성련금’, 즉 ‘잘 정련된 금’으로 읽을 수 있다. ‘보도자료’ 발표 당시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 논문을 토대로 정리



■난수표 같은 목간의 출현

지난 2022년 3~4월 부여 동남리 아파트 건설공사장에서 명문 목간 5점이 확인되었습니다.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였고요. 다른 2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문서용으로 보이는 이 2점에는 마치 난수표처럼 무언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요. 4번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와 판독회를 거쳐 겨우 단서를 찾았답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볼까요. ‘목간1’에서는 ‘날짜(12월10일)’와 ‘금(金)’자, 중량 단위를 뜻하는 ‘주(主)’자가 파악됐습니다.

‘주(主)’와 관련해서는 1971년 무령왕릉 출토 은제팔찌에서도 ‘230주(主)’라는 중량 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출납’을 의미하는 ‘내(內)’와, ‘물품의 이동’을 뜻하는 ‘보낼 송(送)’ 혹은 ‘맞이할 역(逆)’자가 보였습니다. ‘재고 없음’을 지칭할 수 있는 ‘망(亡)’자도 파악됐습니다.

손환일 소장은 동남리 ‘목간1’에서 ‘망(亡)’과 ‘부(夫)’를 붙여 ‘망부(亡夫)’로, ‘역(逆)’과 ‘금(金)’을 붙여 ‘역금’으로 읽었다. 그러면 ‘목간1’은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손환일 소장 논문을 토대로 정리

 

‘목간2’는 곡물의 일종인 ‘피(稗·고대 작물의 일종)’와 함께 ‘이동(送 혹은 逆)’, ‘연령 등급(丁)’, ‘사람 이름’, ‘용량 단위(斗)’ 등의 글자가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보도자료는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백제의 도량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했습니다.

이 명문 목간에는 대중의 시선을 끌 ‘아이템’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보도자료는 “세로로 쓴 문서 행간의 빈 공간에 이음표(′)를 표시한 뒤 그 다음 줄에는 글자를 180도 돌려 거꾸로 써내려갔다”고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현장 관리가 문서를 써내려가다가 공간이 없으면 빈쪽을 찾아 거꾸로 써서 이어나갔다는 뜻이죠.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는 ‘목간1’은 금의 출납과, 출납된 금으로 제작된 완성품(금공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는 현장 관리의 개인 업무일지(메모장)으로 파악했다.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을 임금으로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용현 교수의 논문을 토대로 정리

 

■“금 줄테니 금제품 만들라”는 의미?

동남리 목간은 학계에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속 발표되는 연구자들의 발표논문을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명문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 워낙 소략한 일종의 메모 형식이었거든요.

연구자 나름대로 글자를 판독하고, 해석했지만 볼수록 미궁에 빠지더라고요.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전달할 깜냥이 저한테는 없었습니다.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의 논문(‘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에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보였는데요.

동남리 목간은 발표 당시 부터 목간 전체를 빽빽하게 활용했고, 돌려서 거꾸로 쓴 부분도 보여서 화제를 뿌렸다. 백제인들의 알뜰함을 볼 수 있기도 하고, 바쁜 업무현장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울산문화재연구원·국립부여문화재연구원 제공

 

먼저 ‘목간2’에는 ‘피역(稗逆)’이라는 제목 아래 ‘와진(瓦進)+인명(人名)+정(丁·성인남성)+5두(五斗)’의 서식으로 모두 8명(앞·뒷면 각 4명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와진(瓦進)’은 기와를 제작하는 실무 일꾼을 뜻하고요. 따라서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메모장이라는 거죠.

그럼 ‘목간1’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금공품 담당 관리가 금(金)의 출납과 사용처를 기록한 문서라 해석합니다.

앞면은 ‘날짜(월일)과 망(亡·금이 출납되어 없어짐)+부역(夫逆·기술자인 부가 수령해감)+금(金)+양주(兩主·금의 수량 단위)’ 형식과, ‘날짜(월일)+내납(內納·금이 납입됨)’ 형식으로 되어 있고요.

돌려쓰기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다. 나중에 헷갈리지 않게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것이다.|이용현 교수 논문에서

 

뒷면은 ‘물품명+작용(作用·만드는데 소요된)+금(金)’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물품을 만드는데 쓴 금이 얼마’라는 내용인데요. ‘금으로 만든 제품’이니 ‘어떤 물품=금공품’이 된다는 겁니다.

이 ‘목간1’에는 금의 출납과, 제작 완성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습니다.

그때마다 ‘릴레이식’으로 기록했고, 쓸 공간이 모자라면 옆의 빈자리를 찾아 ‘돌려쓰기’ 했다는 겁니다.

이용현 교수는 “각 행의 기록마다 서체와 붓의 농담(짙고 옅음)이 약간씩 다르다”면서 “이것이 한번에 쓴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 나눠 썼음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동남리 목간에서는 금의 중량단위를 나타내는 주(主)자가 보인다. 무령왕릉 출토 무령왕비 은팔찌에서도 230주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주(主)가 백제 시대 중량을 표시하는 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돌려쓰기 신공’ 발휘

이용현 교수의 설명 중에 웃음보가 터진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정말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습니다.

나중에 볼 때 헷갈리지 않게 ‘내가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겁니다.

1400년전 백제인의 ‘깨알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용현 교수의 논문에서 대중성의 일단을 보았습니다.

관산성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이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해 백제 좌평(장관급) 4명과 3만명에 달하는 군사가 전사했다.



■급히 소환된 ‘관산성 전투’

얼마전 서체연구자인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이 학술지(‘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에 실렸는데요. 논문의 부제(‘관산성 전투와 백제급료 지급 기록’)가 제 눈길을 잡아 끌더군요. 먼저 관산성 전투를 살펴볼까요. 워낙 유명하죠. 신라에게는 영광을, 백제에게는 악몽을 안겨준 전투였죠.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475)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찾아 사비(부여)로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

성왕(523~554)은 신라 진흥왕(540~576)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하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진흥왕의 배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룬 고토수복의 꿈은 산산조각나죠.

특히 동남리 목간에 등장하는 망부 4인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4좌평일 가능성을 개진됐다.|손환일의 논문에서 정리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했답니다.

이때 원로대신들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을 내시오”라 하면서 출전을 고집했답니다. 급기야 554년 7월 태자가 가야 연합군까지 동원하여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는데요.

그러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신주 주둔의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섰습니다.

전황이 심각해지자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서는데요. 하지만 성왕은 관산성 근처에서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삼국사기>는 “554년 7월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천신만고 끝에 사지를 빠져나온 태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이가 창왕(위덕왕·554~598)이었습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절터의 탑지에서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위덕왕) 13년(567), 왕의 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명문이 나왔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창왕(위덕왕)은 즉위 후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쓴다. 사찰 창건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망’, ‘부’보다 ‘망부(죽은 남편)’

대체 이 동남리 명문 목간과 관산성 전투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손환일 소장은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해나갔는데요.

출토된 목간 5점 가운데 가장 핵심인 ‘목간1’을 중심으로 볼까요.

판독결과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간지, 즉 ‘갑술(甲戌)’을 읽었답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갑(甲)’ 자 다음의 글자는 초서체로 쓴 ‘술(戌)’자가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목간의 제작연대는 ‘갑술년’이라는 얘기죠.

역시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이고요. 그에 따라 ‘성련금(成鍊金·금을 정련했다)’는 의미로 고쳐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보도자료에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습니다.

사실 한문은 어디서 끊어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천양지차가 됩니다.

동남리 목간의 경우 그동안 ‘망(亡)’과 ‘부(夫)’자를 떼어놓고 ‘망’은 ‘재고없음’, ‘부’는 ‘기술자’로 따로따로 해석했고요.

‘역(逆)’자 역시 ‘송(送)’자로도 읽혀 물품의 출납을 의미하는 ‘돌려받다(逆)’와 ‘보내다(送)’ 등으로 해독되었는데요.

그런데 손환일 소장은 ‘망부(亡夫)’를 문자 그대로 ‘죽은 남편’으로 해석했고요.

‘역(逆)’은 ‘금(金)’자와 붙여 ‘역금(逆金·정련되지 않은 금)’으로 판단했습니다.

창왕(위덕왕)은 45년간 즉위하면서 능사를 세우고, 국찰인 왕흥사를 창건하는 등 갖가지 불사를 일으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망부=관산성 전사 좌평 4명?’

그래놓고 ‘목간1’을 해독하면 대강의 내용이 파악됩니다.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 ‘사경 제작은 국가주도로 이뤄졌다’(국경)”는 겁니다.

목간에는 부인 4명이 두 달 사이에 죽은 남편을 위해 바친 금의 양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적게는 2냥(26g)에서 많게는 5냥(65.25g)까지 차이가 납니다. 모두 합하면 12냥13주(166g)에 이르죠.

사비 백제(538~660)의 도읍인 충남 부여 동남리에서 출토된 목간 5점. 6~7세기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

궁금하죠. 왜 이 부인 4명은 죽은 남편 4명을 위해 이만한 금을 국가에 바친 걸까요.

이 대목에서 554년, 바로 ‘갑술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가 소환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성왕’조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했죠. 이 대목입니다. 좌평 4명…. 동남리 목간의 ‘망부’ 4명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명’일 가능성을 제기한 겁니다. 물론 100% 맞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어느 사료에도 정답이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출토된 5점 명문목간 중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의 성격이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난수표 목간’이 ‘빅4 목간’으로?

그러나 성왕의 뒤를 이은 창왕(위덕왕)이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창왕은 관산성 전투의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할 분입니다.

<일본서기>는 “왕위에 오른 뒤 패전을 자책하던 창왕은 555년 8월 신하들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잘못을 뉘우쳤으면 됐다”면서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키고, 왕은 갖가지 공덕을 이루라”고 달래죠. 출가를 단념한 창왕은 잇달아 사찰을 창건하고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씁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그 증거가 나왔죠.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성왕의 딸)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국~조선시대 목간은 730여점에 이른다. 주로 저습지에서 출토되거나 물 속에서 인양됐다. 그중 백제 목간은 100여점에 달한다.|‘경북대 인문학술원의 <한국목간총람>, 주류성, 2022’ 자료를 토대로 정리

이 절은 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해석됩니다. 10년 뒤(577)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건립합니다. 동남리 명문 목간 역시 창왕의 불사와 연결지을 수 있답니다.

창왕이 관산성 전투(554년 7월)에서 순국한 원혼을 달래려고 ‘국가 주도의 사경 불사’(국경·國經)를 위해 금을 모았고요. 그때 전사한 4좌평의 부인이 거액의 금을 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라면 동남리 출토 목간은 백제의 ‘빅4’ 목간에 꼽힐 수도 있겠네요. 뭐 어떤 분은 그러실 지 모르겠네요.

난수표 같은 글자 몇 자로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토유물을 단서로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또한 연구자나 기자의 몫이죠. 시쳇말로 얘기가 되는 논문이나 거리가 되는 주장 및 견해가 있다면 저는 냉큼 받아 소개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와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 고상혁 동국대WISE캠퍼스 겸임교수, 황창한 울산문화재연구원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손환일, ‘부여 동남리 출토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

이용현, ‘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부여 동남리49-2 유적 목간1, 2의 분석시론’,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

고상혁, ‘부여 동남리 49-2번지 신출토 목간 소개’, <신출토 문자자료의 향연>(한국목간학회 38회 정기발표회), 2023

울산문화재연구원, <부여 동남리(49-2번지) 공공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문화재 시굴·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2007

정훈진, ‘사비도성에서 발견된 구구단 백제 구구표 목간’, <한국의 고고학> 통권 32호, 2016년 6월

김영욱, ‘백제 이두에 대하여’, <구결연구> 제11집, 태학사, 2003

국립부여박물관, <백제목간>, 소장품조사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8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대구 팔거산성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 2호의 전경. 문화재청 제공

 

또다른 목간(木簡) 보물창고가 될 수 있을까. 삼국의 격변기였던 7세기 초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 팔거산성에서 목간 11점이 최초로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대구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대구 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됐다고 28일 밝혔다. 문자를 기록한 나무 조각인 목간은 문헌이 적은 고대사 연구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기록 유산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굴 조사를 벌인 화랑문화재연구원으로부터 현재까지 발견된 목간 11점을 받아 기초 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11점 중 7점에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이 보이고, 그 중에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도 등장한다. 4점의 목간에서 크게 3종류의 간지가 발견됐으며, 임술년(壬戌年)과 병인년(丙寅年) 그리고 글자 부분이 파손되어 간지 중 글자 일부와 세 번째 글자 년(年)만 보이는 사례가 확인했다. 여기서 임술년과 병인년은 각각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되며, 목간을 작성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또한 보리(麥의 속자)와 벼(稻), 콩(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한다.

팔거산성은 금호강과 그 아래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구 함지산 정상부에 축조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선 팔거산성 역시 기존 목간이 나온 다른 지역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하면서 물자가 집중된 거점으로 추정했다. 목간이 담고 있는 내용이 곡식과 관련되었고,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거점이 대부분 산성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칠곡 지역을 중심으로 금호강 하류와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통제하던 곳이 팔거산성이라는 점도 확실해졌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팔거리현(八居里縣)이 등장하는데, 그동안은 대구 칠곡 지역을 가리킨다고 막연히 추정해왔다.

대구 팔거산성 유적 전경. 문화재청 제공


팔거산성은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7세기 초반 무렵, 신라 왕경 서쪽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진평왕 시절인 7세기 초반 백제 무왕은 본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특히 642년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으로 대야성(경남 합천)을 잃은 뒤 군사·행정 거점을 신라 왕경과 가까운 압량(경북 경산)으로 옮겼다. 신라 서쪽 지역에서 왕경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늘날 낙동강을 통해 대구-경산-영천을 거친다. 이러한 경로에서 가장 서쪽에 있던 팔거산성은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통제하는 중요 거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심이 모이는 것은 목간의 내용이다. 목간에는 ‘왕사(王私)’와 ‘하맥(下+麥의 속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의미 해석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왕사의 경우 기존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보이는 왕송(王松)과 동일한 표현으로 추정됐으나, 두 차례 판독조사를 거쳐 ‘송(松)’을 ‘사(私)’로 수정해야 함을 밝혀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번 목간은 다른 데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간지가 많이 쓰여 있고, 일반적으로 연월일이 나오는 것과는 달리 연도만 나오는 것도 특이하다”면서 “현재 반 정도 발굴이 됐기 때문에 더 많은 목간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왕사’라는 글씨가 확인되면서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았다”면서 “개인적 의견으로는 왕실 직속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고, 역시 팔거산성의 중요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팔거산성은 대구 북구 노곡동 산1-1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2018년 사적으로 지정된 구암동 고분이 있다. 2015년 지표조사, 2018년 시굴조사를 거쳐 2020년 10월부터 학술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 조사에선 석축(石築) 7기, 추정 집수지(集水池) 2기, 수구(水口) 등이 발견됐다. 석축은 조사지역 북쪽 경사면에 조성되었으며, 일부 유구가 중복되어 있어 석축 사이에 축조 순서 또는 시기 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집수지는 남반부 평탄면에 조성되었는데, 추정 집수지 1호는 돌, 2호는 목재를 사용하여 조성되었다.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 2호는 길이 7.8m, 너비 4.5m, 높이 약 3m이다.

신라 지방 유적에서 목간이 출토된 사례는 인천 계양산성, 경기 하남 이성산성, 경남 함안 성산산성 유적 등이 있다. 2019년 11월 대구 인근 경산 소월리에서도 사람 얼굴 모양으로 화제를 모은 토기 아래에서 6세기 신라 토지 관련 목간이 발견됐다. 하지만 대구 소재 유적에서 목간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 2호의 토층. 문화재청 제공
목간 출토 상태. 문화재청 제공
목간 1호. 문화재청 제공
목간 3호. 문화재청 제공
목간 7호. 문화재청 제공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단독] 컴퓨터로 성산산성 목간 연대 최초 확인..고대사 해석 바뀐다 (daum.net)

입력 2017. 7. 11. 03:01수정 2017. 7. 11. 09:10
 
성산산성 축성 의도, 아라가야 멸망시기 통설 흔들려

 

 

첨단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목간(木簡·글자를 기록한 나무막대기)에서 연대(간지)를 최초로 확인했다. 이에 따라 6세기 신라가 대가야를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성산산성을 쌓았다는 학계의 기존 통설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일본 나라(奈良)문화재연구소 와타나베 아키히로 부소장이 올 3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해 ‘모지조(MOJIZO)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목간 판독을 실시했다. 판독 결과 ‘王子寧(왕자녕)’으로 해석된 21번 목간 글자가 사실은 ‘壬子年(임자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라문화재연구소와 도쿄(東京)대 사료편찬소가 지난해 공동 개발한 모지조는 일본의 고대 목간 화상 3만 건을 모은 데이터베이스(DB)를 바탕으로 목간 글씨를 판독하는 소프트웨어다. 목간 이미지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아이폰)으로 업로드 하면 이를 정자체로 풀어서 보여준다. 약 40만 점에 달하는 출토 목간을 보유한 일본학계에서 모지조의 신뢰성은 높은 편이다. 앞서 올 초 일부 학자들이 해당 목간을 ‘왕자녕’으로 판독한 결과가 공개된 이후 권인한 성균관대 교수(국문학)와 서체 연구자인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중심으로 반론이 제기됐다. 필획이나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임자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지금껏 성산산성에서 1991년부터 17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뤄져 국내 출토 목간의 절반에 육박하는 총 308점의 목간이 발견됐으나, 연대가 확인된 건 처음이다.

 

목간 연구자인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후 문맥을 봐도 ‘왕자녕’은 오독(誤讀)이 분명하며 ‘임자년’이 99% 맞다”고 말했다. 일본 목간 연구 권위자로 해당 목간을 관찰한 와타나베 부소장도 “‘임자년’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중국 쪽 목간 연구자도 같은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임자년 목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산산성에서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감안할 때 임자년 간지의 연대는 532년, 592년, 652년 중 하나에 해당된다. 주목할 점은 해당 목간이 성을 쌓기 전 나뭇가지 등 폐기물로 땅을 다지는 부엽층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목간 연대가 성산산성의 축조 시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학계는 삼국시대 당시 정황을 감안하면 임자년은 532년 혹은 592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만약 592년으로 본다면 대가야는 이미 562년에 멸망했으므로 성산산성 축성 의도는 백제나 왜(倭)를 겨냥한 걸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6세기 말∼7세기 초 백제는 왜와 손잡고 신라에 맞서는 형국이었다. 백제 무왕이 602년 왜와 동맹을 맺고 전북 남원 일대의 신라 영토를 공격한 ‘아막성 전투’가 대표적인 예다.

임자년을 532년으로 봐도 새로운 역사해석이 가능하다. 함안은 신라가 점령하기 직전까지 아라가야의 영토였는데, 학계는 아라가야가 550년 무렵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성산산성이 신라에 의해 532년에 세워졌다면 아라가야 멸망 시점은 통설보다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성산산성에서 7세기 전반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걸 보면 임자년 목간은 592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며 “성산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단독] 구구단 적힌 1500년전 나무문서 발견 (daum.net)

입력 2016. 1. 18. 01:36수정 2016. 1. 18. 17:46
 

[한겨레] 문화재재단 판독결과서 첫 확인
4년전 백제 사비성터 발굴 유물

구구단 목간 전면(왼쪽)과 숫자공식이 보이는 중간부분. 四(사)三(삼) 十二(십이:4×3=12)’ ‘四(사) 四(사) 十六(십육:4×4=16)이라고 쓰여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곱셈 기초공식 ‘구구단’을 써넣은 1500여년 전의 백제 목간(나무쪽 문서)이 발견됐다. 한반도에서 처음 확인된 수학 공식을 써넣은 고대 문서이자 국내 최고의 수학사 관련 유물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은 16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2012년 백제 사비성터인 충남 부여읍 쌍북리 일대의 옛 관청터를 발굴조사할 당시 나온 6~7세기께 목간들의 정밀판독 결과를 공개하고, 이들 가운데 1점에서 구구단 일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재단 쪽 자료를 보면, 구구단 목간은 길이 30.1cm, 너비 5.5cm로 칼 모양이다. 전면에 희미하게 먹글씨로 쓴 수십여개 숫자들이 보인다. 재단과 학회 연구진이 판독한 결과 목간 맨 위와 중간 아래 부분에서 각각 ‘九(구) 六(륙) 五十四(오십사:9×6=54)’ ‘四(사)三(삼) 十二(십이:4×3=12)’ ‘四(사) 四(사) 十六(십육:4×4=16)’ 등의 구구단 공식이 확인된다. 이 목간은 맨위에서 9단 공식이 먼저 시작되고, 아래로 그보다 적은 숫자의 단으로 읽어내려가는 순서여서 오늘날과 정반대 순서로 구구단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정훈진 연구원은 “애초엔 물품 수량 등을 적은 하찰로 봤으나, 정밀판독해보니 상하 네개 숫자를 한 단위로 삼아 구분선을 횡으로 긋고 공식을 되풀이하는 구구단임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학계는 확인된 구구단 목간이 옛 백제 관청터에서 나온 점으로 미뤄 관리들이 세금용 곡식의 수량을 재는 계산도구로 활용하거나 암기용 교재로 삼았을 것이란 추정을 내놓았다. 여느 목간과 다른 칼 모양이어서 계산 도구로 쓴 뒤 다시 깎아 제의용구로 재활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삼국시대 선조들이 수학을 생활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획기적 유물”이라며 “백제인들이 구구단으로 숫자를 셈하면서 건축이나 측량에 활용할 만큼 상당한 수준의 수학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중국, 일본에서는 구구단 목간이 종종 출토된다. 중국 실크로드 유적인 신장위구르자치구 니야 유적과 간쑤성 거연 유적에서 기원전 시기의 구구단 목간이 나왔고, 일본에서도 7~8세기 옛 도읍 나라 등에서 출토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일본에선 이번에 부여에서 나온 구구단 목간과 비슷한 모양새와 내용의 목간이 출토된 바 있어 시기가 앞서는 백제 구구단 목간이 그대로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신라]

국내 최장 '꼬챙이' 신라목간 1500년전 논땅 세금 매긴 장부였다 (daum.net)

노형석입력 2019. 12. 10. 08:06수정 2019. 12. 10. 10:56
 
굽은 나무 표면 다듬은 육면에
94자 추정되는 한자 고루 적어
남한 출토 역대목간 중 가장 커
골짜기'곡' 논'답' 둑 '제'기록
경산 인근 마을 저수지, 논 조성 정황
조세 징수용 땅 면적 단위로
'결''부' 쓴 것도 확인
통일 전 신라 국가경영 기초 다진 흔적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 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

 

최근 <한겨레>가 출토 사실을 단독 보도(6일치 18면)하면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경북 경산 소월리 신라 촌락 유적의 나무쪽 문서(목간)가 1500여년 만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의 판독 결과, 이 유물은 6세기 신라 관리들이 경산 일대 촌락의 저수지와 농토를 관리해온 상황과 세금을 매기는 단위 면적 등을 기록한 촌락 행정 문서였다. 길이 70㎝가 넘는 길쭉한 나무쪽을 여섯 면으로 각지게 다듬어 각 면에 총 90자 이상을 빼곡하게 새긴 이 목간은 지금까지 남한에서 출토된 고대 목간 중 가장 크며, 시기도 가장 오래됐을 가능성이 큰 희귀기록물로 밝혀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9일 이런 판독 결과와 함께 길이 74.2㎝의 목간 사진을 공개했다. 목간은 화랑문화재연구원이 최근 발굴·공개해 큰 화제를 모은 5세기 삼면 얼굴 모양 토기 출토 지점 바로 아래쪽에서 발견됐다. 발굴 즉시 경주연구소로 옮겨져 지난 6일 한국목간학회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와 윤선태(동국대)·이수훈(부산대)·김재홍(국민대) 교수의 1차 판독을 거쳤다.

적외선 사진으로 포착한 출토 목간 에이(A)면의 세부.

 

발견된 목간은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각진 여섯 면을 만들고 모두 합쳐 94자로 추정되는 한자를 적었다. 해서체의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경산 인근 토지 현황을 기록한 6세기 무렵 공문서의 성격인데, 6면 가운데 2면은 글자를 연습한 습자 흔적으로 보인다. 기존 국내 목간보다 훨씬 커 발굴 당시엔 대형 나무쪽 문서인 목독으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하지만 모양새로 미뤄 관의 권위를 드러내는 대형 시각(視覺) 목간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대세였다.

목간의 첫 면인 에이(A)면에는 ‘□부감말곡답칠(?)□제상일결 구미곡삼결 제하□부’(負甘末谷畓七(?)□堤上一結 仇彌谷三結 堤下□負)라는 글자가 보이며, 다른 면에도 논을 뜻하는 답(畓), 밭을 뜻하는 전(田) 등이 숫자와 함께 보인다. 학자들은 판독 글자 가운데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과 답(畓), 둑을 뜻하는 ‘제’(堤)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골짜기에 형성된 일정한 신라인의 촌락 집단을 ‘곡’이라 칭했으며, 둑(堤)이 조세 부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처음 밝혀졌기 때문이다. 골짜기와 둑을 중심으로 당시 지방 촌락이 형성되고, 계곡에 제방을 쌓은 뒤 물길을 빼 논을 만들어 고유 면적 단위인 ‘결’(結)이나 ‘부’(負)를 매겨 조세를 거둔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 양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선태 교수는 “6세기 초 고신라 시대 이미 지방 곳곳에 중앙정부가 토목기술을 동원해 제방을 쌓고 농토를 조성했고, 이를 측량해 세금 징수 기반까지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통일 이전에 신라가 국가 경영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라고 짚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창안된 고유 한자인 논 답(畓) 자를 목간에 썼다는 점, 조세를 매기기 위한 농지 면적 단위로 결이나 부를 이미 쓰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은 큰 성과다. 그간 학계에선 답(畓)은 경남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561년 건립)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간주했다. 소월리 출토 목간에 ‘답’이 적혀 있어 제작연대를 그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주보돈 교수는 “이 목간은 신라 목간을 대표해온 경주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의 연대인 580년대보다 이른 시점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물론 남한 출토 고대 목간 중 가장 이른 유물일 수 있다”고 밝혔다.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 목간의 컬러사진.
소월리 유적 수혈 구덩이에서 문자가 적힌 다면목간을 발굴할 당시의 현장 작업 모습.

‘결’(結)과 ‘부’(負)의 두 단위 한자도 지금까지 삼국 통일 뒤부터 쓴 것으로 봤지만, 이 목간을 통해 6세기께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됐다. 7세기 통일 직후의 신라 촌락문서(일본 쇼소인 소장)에 나오는 지방 촌락 경제의 국가 지배 방식이 한 세기 전 이미 충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연구소 쪽은 자연과학적 분석도 병행해 추가 판독 성과와 세부 분석 내용을 지속적으로 공개할 방침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제 죄를 아뢰옵니다.." 신라 지방관리 나무막대 보고서 (daum.net)

박정호입력 2017. 1. 5. 01:11수정 2017. 1. 5. 06:31
 
종이 없던 시절 소나무 다듬어 기록
6세기'목간' 23점 공개..'4면목간'도
당시 행정·율령체계 유물로 첫 확인
6세기 중반, 561년 무렵이었다. 백제와 대치 중인 신라는 물적·인적 자원을 경남 함안군 일대에 집결시켰다. 쌀·보리·피 등 다른 지역에서 걷은 물품은 물론 방어시설을 지을 인력도 여러 곳에서 동원했다. 당시 진내멸이라는 지방의 촌주가 중앙(경주)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에게 잘못된 법 집행을 아뢰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타리라는 사람이 60일 동안 일하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단지 30일만 채우고 떠나간 것에 대해 사죄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신라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의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함안 성산산성 사면목간. [사진 문화재청]
 
종이가 없던 시절, 촌주는 보고서를 길이 34.4㎝, 두께 1.0~1.8㎝의 소나무에 적었다. 이른바 목간(木簡)이다. 나무를 길게 잘라 네 면을 다듬고, 그곳에 총 56글자를 기록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상급 관리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시 신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지방에 강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즘으로 치면 법치주의, 신라의 율령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6세기 신라의 지방지배 및 조세 체계를 엿볼 수 있는 목간이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 가야문화재연구소는 561년 축성된 함안 성산산성에서 2014~2016년 새로 발굴한 목간 23점을 4일 공개했다. 그 중 네 면 모두에 글자가 기재된 사면목간이 주목된다. 나머지는 1면, 혹은 2면 목간이다. 내용 또한 어디에 사는 누군가가 어떤 물건을 보낸다는 꼬리표(하찰목간) 같은 게 대부분인 것에 비해, 이번 사면목간은 보낸 이와 받는 이, 보고 사실을 두루 갖춘 행정문서 형식을 취했다. ‘□법 30대’ ‘60일 대법’ 등 신라의 율령이 구체적으로 기록됐고, 경주 중앙정부의 관등명인 ‘대사(大舍)’도 확인됐다.

 

목간은 고대사회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총 1289점이 발굴됐다. 성산산성은 국내 최대 목간 출토지다. 1991년 첫 발굴 이후 308점이 나왔다. 가야문화재연구소 김용민 연구관은 “6세기 신라의 행정체제를 보여주는 목간이 나온 건 획기적”이라고 말했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신라 율령체계의 전개·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성산산성 최고의 목간”이라고 평가했다. 이성시 일본 와세대 교수는 “일본에선 이런 형식의 목간이 7세기에 많이 제작됐다.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고대목간의 보고' 성산산성, 신라 목간 또 무더기 출토 (daum.net)

입력 2007. 12. 11. 11:02수정 2007. 12. 11. 11:02
 

국내 최대의 고대 목간(木簡) 출토지인 경남 함안 성산산성(사적 67호)에서 신라시대 목간 76점이 또다시 출토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진흥왕 시대(540-576년) 신라가 가야 지역을 복속한 뒤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산산성에 대한 제12차 발굴조사에서 목간 76점과 함께 목기와 토기류 등을 발견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목간 발견으로 성산산성에서는 총 238점의 목간이 출토돼 국내에서 출토된 전체 고대 목간 459점 가운데 절반 이상을 보유하게 됐다.

 

목간은 좁고 길게 다듬은 나무조각에 각종 기록을 남긴 것으로 고대인의 삶을 생생히 보여 주는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경주 월성 해자, 충남 부여 궁남지, 경남 함안 성산산성 등에서 신라와 백제 목간이 출토됐다.

목간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쓰여진 종이 문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고대사회의 비밀을 알려주는 보물창고로 여겨지고 있다. 목간에는 식재료의 제작 시기와 가공지 등의 음식문화와 행정체계, 호적제도는 물론 낙서 그림과 글씨까지 남아있어 고대의 사회·경제·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성산산성에서 추가로 출토된 목간에서도 신라의 지명과 인명, 신분 등이 기록된 물품 꼬리표인 하찰(荷札)목간이 다수 발견됐다.

일례로 '仇利伐(구리벌, 지명) 仇陀知(구타지, 인명) 一伐(신라 외위 8등급 벼슬) 奴人(신분) 毛利文(인명) 負' 즉 '구리벌에 사는 일벌 벼슬의 구타지에게 속한 노인(노비와 비슷한 계급으로 추정) 모리문이 지고 왔다'는 문구가 적힌 하찰목간이 확인됐다.

또, 米(쌀) 물품이 처음 확인됐고, '勿思伐(물사벌)'이나 '(丘伐)구벌' 등의 지명과 '매곡촌'(買谷村) 등 경북 상주 지역의 옛 지명도 새로 확인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13일 오후 3시 성산산성 발굴현장에서 현장설명회를 열고 14일 오전 9시30분에는 창원대 국제회의장에서 일본 와세다대학 조선문화연구소(소장 이성시)와 공동으로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백제]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한성도읍기 목간(木簡)

[인천시 계양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홍현기 기자 = 삼국시대에 축조돼 한강 유역 교두보 역할을 했던 인천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유물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개관을 앞두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물 1천800여점을 확보했다.

인천시 계양구는 인천 계양 산성박물관을 개관을 앞두고 유물 운송 작업을 하고 있다고 29일 밝혔다.

계양구는 이달 16일부터 전국 4개 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계양구 지역 출토 유물 1천885점을 계양 산성박물관으로 옮기고 있다.

 

이들 유물은 그동안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남 나주 국립나주박물관, 인천 연수 인천시립박물관, 경기 고양 겨레문화유산연구원 등지에 보관돼 있었다.

 

계양산성에서 9차례에 걸쳐 발굴된 유물이 1천841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천 귤현구역 유적에서 나온 유물이 44점이다.

계양구는 유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문화재 운송 전문 업체를 선정해 유물을 옮기고 있다.

문화재 전문 직원들은 문화재 운송 전용 무진동 차량을 이용해 안전하게 유물을 옮긴다.

삼국시대 대표적 토기인 '원저단경호'

[인천시 계양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계양구는 이달 중 유물 운송이 완료되면 유물 상태를 하나씩 확인한 뒤 표준유물관리시스템 등록과 전시실·수장고 보관 등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계양 산성박물관에 전시될 대표적인 유물로는 논어 글귀가 기록된 백제 한성도읍기 목간(木簡), 삼국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원저단경호', 계양 지역의 가장 오래된 지명인 '주부토(主夫吐)' 명문(銘文) 기와 등이 있다.

계양구는 이 외에도 2018년부터 10차례에 걸쳐 계양 지역 옛 지도와 지리지 등 12점을 구매했다.

또 계양구 주민들에게서 기증받은 과거 충신을 표창한 '정려', 일제강점기 초등학교 졸업증서, 옛 교과서 등 유물 59점도 확보한 상태다.

계양구는 개관 준비를 마무리하는 대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추세 등을 고려해 박물관 문을 열 날짜를 확정할 계획이다.

'주부토(主夫吐)' 명문(銘文) 기와

[인천시 계양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계양산성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에 있는 계양산 주봉(主峯)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봉우리에 자리한 유적으로 둘레는 1천184m다.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돼 한강 유역 교두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는 계양산성 사적 지정 안건을 검토해 가결했다.

문화재위원회는 앞으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계양산성을 사적으로 지정할지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hong@yna.co.kr

 

 

[단독] 1400년전 '논어' 구절·궁궐명 적힌 백제목간 나왔다 (daum.net)

입력 2018. 7. 12. 02:46수정 2018. 7. 12. 20:26
 
'논어' 구절, 궁궐명 적은 백제목간
부여 쌍북리 왕경유적서 출토
12일 한국목간학회 워크숍서 공개
'목간밭' 왕경유적 보존가치 커질 듯

[한겨레]

부여 쌍북리 백제 왕경유적에서 나온 <논어>목간. ‘학이편’ 1, 2장 구절들을 선명한 먹글씨로 적었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중국 성인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첫머리 ‘학이(學而)’편 1·2장의 유명한 문구가 1400년전 백제인의 나무쪽 문서인 목간에 선명한 붓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12일 낮 경남 창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워크숍은 열기로 가득했다. 7세기 백제 사비시대 왕경 유적이 처음 드러난 충남 부여 쌍북리 56번지 한옥마을조성터(<한겨레>5월16일치 26면 참조)에서 <논어> ‘학이’편 1, 2장의 구절과 당대 궁궐명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적힌 목간 등이 잇따라 출토된 사실을 이날 자리에서 처음 공개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유적을 발굴한 울산발전연구원의 한지아·김성식 부연구위원은 이날 판독 내용을 담은 출토 목간들의 내역을 조심스럽게 소개했다. 연구원의 보고문을 보면,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은 모두 17점으로, 문자가 일부라도 판독된 것은 5점이다. 연구원 쪽은 <논어>의 ‘학이’편 구절이 적힌 사면 목간을 비롯해, ‘丁巳年(정사년)’이란 연대명과 ‘岑凍宮(잠동궁)’으로 자체 판독된 목간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논어>목간은 길이 28cm에, 너비가 각각 1.8cm, 2.5cm로 ‘학이편’ 1장 전체와 2장의 서두 일부분을 적었다. 1면은 ‘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란 뜻의 ‘자왈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子曰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면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란 뜻의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3면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란 뜻의 ‘인부지이불온불역(人不知而不? 不亦(君))’ 구절이 말미 한두글자가 빠진 것을 빼고는 온전하게 씌어 있다. 4면은 ‘유자가 말하기를, 사람됨이…’이란 뜻의 ‘자호유자왈기위인야(子乎 有子曰 其爲人也)’란 구절만 남았다. 특히 3, 4면의 경우 문구 사이 띄어쓰기가 되어있고 띄운 공간에 각주로 추정되는 먹 자국도 보이는 점이 주목됐다. 백제인이 <논어>를 자체적으로 번역해 새겨 읽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윤선태 동국대교수는 “한문을 번역할 때 우리식 어법에 맞게 띄어서 읽는 방식이 구결의 시초인데, 이번에 나온 논어 목간은 한반도 구결역사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출토 목간의 ‘학이편’ 첫구절에 나오는 ‘기쁠 열(悅)’자는 백제 특유의 표기 방식으로, 고대 일본의 <논어>목간의 글자 표기와 똑같다. 중국 산동반도 일대의 고대 제나라 강역의 <논어> 표기와도 연관성이 보여 중국서 전래된 <논어>를 백제가 다시 일본에 전파했다는 실증적 근거로 볼 수 있다고 연구자들은 분석했다.

한반도의 고대 <논어>목간은 1990년대 평양 정백동 낙랑계 고분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논어> 죽간(대나무 문서)이 가장 오래된 유물로 꼽히는데, 전한시대 중국인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에서는 2000년 경남 김해 봉황대 출토품과 2005년 인천 계양산성 출토품이 있는데, 모두 신라시대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선문대가 발굴한 계양산성 목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5세기 한성백제 토기와 목재조각들이 출토층에서 나온 점을 근거로 조사단 쪽이 국내 최고의 <논어>목간으로 단정한 보고서를 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논어>목간은 백제인이 쓰고 읽은 사실이 이론의 여지없이 확인되는 최초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는게 연구자들의 견해였다.

‘정사년’이란 연대와 ‘잠동궁’이란 궁궐명칭이 처음 확인된 쌍북리 출토 목간.

발표회에서는 ‘정사년(丁巳年) 10월20일’이란 연대명과 백제 궁궐명이 확인되는 다른 목간의 문구를 놓고도 논란이 오갔다. 연구원 쪽은 궁궐명을 ‘잠동궁(岑凍宮)’으로 판독했으나, 공개된 확대사진을 검토한 학자들은 획 상태로 미뤄 ‘잠동’이 아닌 다른 글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 목간에는 ‘먹는 쌀 일곱석 여섯두’라는 뜻으로 보이는 ‘飡米七石六斗□(찬미칠석육두)’란 글귀도 판독돼 곡물 입출고 내역 등을 적은 장부였을 것으로 연구원 쪽은 추정했다. 정사년의 연대도 사비시대의 597년(위덕왕 44년)과 657년(의자왕 17년)의 두 가설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연구원은 657년이 유력하다고 봤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필체가 6세기 무령왕릉의 묘지석과 비슷해 597년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마을 이장으로 추정되는 ‘里後(이후)’, 농가로 추정되는 ‘田舍(전사)’ 등 옛 문헌에 거의 보이지 않는 한자어가 들어간 목간들도 눈길을 모았다.

 

목간이 나온 쌍북리 한옥마을조성터는 학계에서 사비도읍의 백제 관청가이자 물류거점으로 유력시되어 왔다. 2000년대 이래 부근에서 대규모 생산유적, 도로터는 물론, 백제시대 구구단표와 춘궁기 구황사업을 기록한 장부인 ‘?‘좌관대식기’ 등의 중요 목간들이 잇따라 출토됐기 때문이다. <논어>목간과 궁궐명 목간의 추가발굴로 이곳이 백제 생활사 타임캡슐인 목간들의 ‘밭’이란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다. 부여군은 이곳을 부여 도심 발굴대상터 주민들의 이주단지로 개발한다는 방침을 사실상 굳힌 상황이어서, 유적 보존을 둘러싼 학계와 당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창원/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울산발전연구원 제공

 

 

입력2016.01.18. 오전 1:35 
 
수정2016.01.18. 오후 5:45
 
[한겨레] 문화재재단 판독결과서 첫 확인
4년전 백제 사비성터 발굴 유물


구구단 목간 전면(왼쪽)과 숫자공식이 보이는 중간부분. 四(사)三(삼) 十二(십이:4×3=12)’ ‘四(사) 四(사) 十六(십육:4×4=16)이라고 쓰여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곱셈 기초공식 ‘구구단’을 써넣은 1500여년 전의 백제 목간(나무쪽 문서)이 발견됐다. 한반도에서 처음 확인된 수학 공식을 써넣은 고대 문서이자 국내 최고의 수학사 관련 유물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은 16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2012년 백제 사비성터인 충남 부여읍 쌍북리 일대의 옛 관청터를 발굴조사할 당시 나온 6~7세기께 목간들의 정밀판독 결과를 공개하고, 이들 가운데 1점에서 구구단 일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재단 쪽 자료를 보면, 구구단 목간은 길이 30.1cm, 너비 5.5cm로 칼 모양이다. 전면에 희미하게 먹글씨로 쓴 수십여개 숫자들이 보인다. 재단과 학회 연구진이 판독한 결과 목간 맨 위와 중간 아래 부분에서 각각 ‘九(구) 六(륙) 五十四(오십사:9×6=54)’ ‘四(사)三(삼) 十二(십이:4×3=12)’ ‘四(사) 四(사) 十六(십육:4×4=16)’ 등의 구구단 공식이 확인된다. 이 목간은 맨위에서 9단 공식이 먼저 시작되고, 아래로 그보다 적은 숫자의 단으로 읽어내려가는 순서여서 오늘날과 정반대 순서로 구구단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정훈진 연구원은 “애초엔 물품 수량 등을 적은 하찰로 봤으나, 정밀판독해보니 상하 네개 숫자를 한 단위로 삼아 구분선을 횡으로 긋고 공식을 되풀이하는 구구단임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학계는 확인된 구구단 목간이 옛 백제 관청터에서 나온 점으로 미뤄 관리들이 세금용 곡식의 수량을 재는 계산도구로 활용하거나 암기용 교재로 삼았을 것이란 추정을 내놓았다. 여느 목간과 다른 칼 모양이어서 계산 도구로 쓴 뒤 다시 깎아 제의용구로 재활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삼국시대 선조들이 수학을 생활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획기적 유물”이라며 “백제인들이 구구단으로 숫자를 셈하면서 건축이나 측량에 활용할 만큼 상당한 수준의 수학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중국, 일본에서는 구구단 목간이 종종 출토된다. 중국 실크로드 유적인 신장위구르자치구 니야 유적과 간쑤성 거연 유적에서 기원전 시기의 구구단 목간이 나왔고, 일본에서도 7~8세기 옛 도읍 나라 등에서 출토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일본에선 이번에 부여에서 나온 구구단 목간과 비슷한 모양새와 내용의 목간이 출토된 바 있어 시기가 앞서는 백제 구구단 목간이 그대로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고려]

목간은 고대史 비밀 푸는 열쇠|동아일보 (donga.com)

 
입력 2007-10-17 03:08업데이트 2009-09-26 09:14
 

 

최근 충남 태안군 대섬 앞바다 청자 운반선에서 화물 꼬리표로 쓰인 고려시대 목간(木簡)이 처음 발견되면서 고대의 비밀을 간직한 목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본보 12일자 A13면 참조

▶ 태안 보물선서 고려 목간 첫 발굴

목간은 좁고 길게 다듬은 나무판에 글씨를 쓴 것. 고대인의 삶을 생생히 보여 주는 기록유물이다. 1975년 경북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경주 월성 해자, 충남 부여 궁남지, 경남 함안 성산산성 등에서 신라와 백제 목간 400여 점이 출토됐다.

그러나 중국 일본에 비해 국내에서 발견된 목간의 수는 적으며 체계적인 연구도 부족한 실정. 우리 목간을 종이가 발견되기 전에 사용된 기록수단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목간은 중국 죽간(竹簡)과 달리 종이와 함께 쓰였다. 종이가 최고급품으로 귀했던 6세기경 목간이 종이 문서의 일부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종이와 함께 쓰인 목간이 왜 고대사회의 비밀을 간직한 보물창고로 여겨질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기록된 종이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과 일본 쇼소인(正倉院·왕실 유물 창고)에 남아 있는 신라 촌락 문서가 전부다. 고대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200∼300년 뒤 후대인이 기록한 2차 사료다. 이들 사료는 고대인의 일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비문과 같은 금석문도 법령, 왕의 행차, 축성, 승려의 일대기를 보여 주는 데 한정돼 있다. 목간엔 음식문화, 도시의 모습, 행정체계, 물품의 이동 경로뿐 아니라 연습용 글씨와 낙서까지 발견된다.

○ 음식문화

안압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왕실의 식생활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목간이 발견됐다. 목간 전문가인 이용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최근 계간지 ‘역사와 현실’(65호)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안압지 출토 목간 중 가오리를 뜻하는 가화어(加火魚) 등 다양한 식재료가 적힌 목간이 확인됐다.

목간은 식재료를 담은 단지에 붙은 꼬리표였다. 목간에는 식재료의 제작 시기와 가공지, 등급도 적혀 있어 고대에도 오늘날처럼 유효기간을 지키며 식품 유통을 철저히 관리했을 것이란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목간에선 젓갈이란 뜻의 ‘조사(助史)’, 액체류를 담는 용기 ‘부(缶)’, 통 모양의 두레박을 뜻하는 ‘관(罐)’이란 표기도 발견돼 흥미를 더한다. 이 학예연구사는 “음식을 상하지 않도록 절인, 이른바 ‘통조림’ 형태의 항아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하급관리의 일상

안압지에선 사람의 얼굴을 익살스럽게 그린 목간도 발견됐다. 목간 앞면에는 신라 하급관리를 뜻하는 ‘한사(韓舍)’를 여러 번 쓴 글씨가 확인됐다. 하급관리가 무료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연습용 목간에 낙서를 한 것이다.

○ 도시 모습

목간은 오늘날 시군구와 같은 고대 도시의 행정구역을 추정할 단서도 제공한다.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 궁남지에서 발견된 목간에선 백제의 5부 아래 행정단위인 항(巷)의 존재가 확인됐다. 신라 궁성인 경주 월성 해자에서 발견된 목간에서는 신라 왕경의 행정체제인 6부 아래 단위인 이(里)의 존재가 확인됐다. 자연적 지명뿐 아니라 상리(上里) 하리(下里) 신리(新里)처럼 인위적으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재편한 흔적도 나왔다.

○ 호적제도

궁남지 목간에선 이름 뒤에 21세 남성을 뜻하는 정(丁), 16세 이하를 나타내는 소(小), 20세 이하를 나타내는 중(中)이 확인됐다. 백제시대에 이미 연령별로 인력을 구분한 호적제도가 정비된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태안 보물선서 고려 목간 첫 발굴

동아일보 2007년10월 12일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10120189

 

태안 보물선서 고려 목간 첫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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