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UPDATE : 2009-07-15 10:48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일행은 불볕 더위로 소문난 중국 서역의 투르판 분지와 중앙아시아의 키질쿰 사막, 중동의 루트 사막, 시리아 사막 등을, 그것도 연중 가장 뜨거운 7~8월에 찾아나섰다. 지열까지 합치면 보통 낮 기온이 50도를 웃도는 곳을 거친 40일 여정은 베이징~이스탄불의 오아시스 육로를 좇는 수만리 험로였다. 우리는 왜 열사 속을 누비며 험로를 택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 길의 참뜻을 터득하기 위해서였다.

 

 

연재리스트

 

위대한 문명에 취하고 ‘한국’ 자취에 놀라며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우리는 왜 열사의 험로를 누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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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에 막혀 에돌아 가보니 중화제국 야망이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실크로드의 꿈을 키워준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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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물’ 넘치던 천년왕도 영광 다시 꽃피는듯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동서문명의 접합지 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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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혜초…명성 화려해도 유적엔 쓸쓸함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선현의 체취가 배어있는 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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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문명의 샘 솟아나는 개발의 기운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오아시스 육로의 병목 둔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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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승탑’ 이라면? 혜초 입적지 예감에 전율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막고굴이 간직한 힌국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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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서역개통의 문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오아시스 북도의 관문 옥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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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래·바람…그 어떤 세력도 장벽을 넘지 못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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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장식한 집’…문명 파괴의 증언장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베제클리크 석굴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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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자연환경 맞선 인간 ‘응전의 전리품’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투루판의 명물 카레즈와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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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정벌의 영웅’ 고선지 장군 유적은 어디에…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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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개국 기업들 집결한 국제물류 중심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신실크로드의 요충지 우루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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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각축 예고하는 무한한 개발의 땅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황금의 초원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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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롭카’ 언덕서 고선지의 포효 들리는 듯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탈라스 전쟁의 현장을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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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복판에 언제나 말이 서 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명마의 고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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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르네상스‘ 피운 중앙아시아의 심장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이슬람의 성도 타슈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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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한 거름삼아 뿌리내린 ‘원조한류’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한국 문화의 전도사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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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사건 창조하는 수수께끼의 영웅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중앙아시아의 풍운아 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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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속 사절 틀림없는 고구려인이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중아시아에 간 한국의 첫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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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군에 잡힌 제지기술자들, 조선 도공처럼…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종이의 길’을 튼 ‘사마르칸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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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여년 영욕의 흔적, 떡시루처럼 층층이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한 권의 통사책’, 우즈벡 고도 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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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화원서 ‘3총사’ 학맥 꽃피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부하라 학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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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주름 외벽의 카라 왕궁, 건축가 지혜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불교 전파의 서쪽 끝, 메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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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오리엔트서 탄생”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헬레니즘의 산실, 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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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 드러낸 들판… 얼굴 내민 도자기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26〉‘채도의 길’ 튼 아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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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옷 갈아입은 ‘순교의 땅’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28〉시아파의 성지, 마슈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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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포도주 이름난 ‘페르시아의 요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30〉 페르시아의 얼굴, 시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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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혀’로 영혼 달랜 ‘페르시아 이태백’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이란의 시성, 하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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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향기 한반도 전해준 ‘생명의 과일’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석류의 고향, 시르쿠흐(사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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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불 꺼지지 않는 침묵의 땅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조로아스터교 성지, 야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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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조형예술의 파노라마 ‘황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이란의 진주’ 이스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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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독일 ‘활자로드’ 확인하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이란의 구텐베르크’ 가차투르 바르다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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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버린 현대화-되돌아온 전통 ‘엇박자’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진통 겪는 테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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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슬람-기독교 문명 충돌 들먹이나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천년 고도 다마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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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화해자’ 살라딘이여 다시 한번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이슬람 재통일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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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도 탐냈던 사천년 교역도시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오아시스로의 서단, 팔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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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여년전 첫 알파벳 경이로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서양문자의 산실, 우가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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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아들 또 그 아들이 예서 살았더라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터키 성지 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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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침입’ 허락 않는 산꼭대기 영령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성스러운 안식처, 넴루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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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 땅밑 미로도시…누구 작품일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자연과 인간의 조화상 카파도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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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마다 유적…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동로마로 불린 비잔틴제국의 수도 실크로드 종착지이자 기독교 심장부에서 15세기 술탄 정복으로 이슬람 도시로 1500년 3대 제국 122명 통치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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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길 끝에서 맛본 ‘태극무늬 백자’의 감동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자연과 인간의 조화상 카파도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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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잃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0일간의 대장정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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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6/#csidx600b1c8f7910a009a5741d442b36547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6) 인류문명의 노천박물관, 이스탄불

발길마다 유적…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등록 :2006-08-31 19:00수정 :2006-09-01 10:14

 

김경호 기자

 

 

동로마로 불린 비잔틴제국의 수도
실크로드 종착지이자 기독교 심장부에서
15세기 술탄 정복으로 이슬람 도시로
1500년 3대 제국 122명 통치 ‘찬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6) 인류문명의 노천박물관,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관광을 마친 일행은 항공기를 타고 마지막 답사지 이스탄불로 날아갔다. 영국의 문명사가 토인비(1889~1975)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이스탄불을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라고 했다. 문명사를 종횡무진 갈파한 그에게 이 말은 한낱 수식어가 아니었다. 남의 것을 가로챈 탓에 연고 없는 유물로만 채워진 브리티시 박물관 같은 옥내 박물관에 익숙했던 그로서는 도시 전체가 공개된 유적유물인 이스탄불을 이런 조어로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구 1천2백만의 이스탄불은 세계에서 두 대륙을 잇는 유일한 도시다. 유럽쪽 골든 혼의 남부 옛 시가지와 북부 갈라타 지역, 아시아쪽 위스퀴다르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동서 150km, 남북 50km에 총 면적 7500㎢에 달하는 세계 유수의 대도시다. 신석기 시대부터 아시아쪽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래, 기원전 660년께 비자스가 이끄는 그리스 메가론인들이 유럽쪽 땅에 왔다. 비자스는 기도 끝에 ‘눈먼 땅에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 델피 신전의 신탁을 받고, 선대 통치자들이 미처 못 보았던 땅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으니, 바로 그의 이름을 딴 비잔티움이다.

 

비잔티움은 얼마 못가 기원전 513년 페르시아에 점령되고, 196년 로마 식민지로 전락했다.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로부터 동방의 이곳으로 옮겨와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고쳐 부른다. 후세 사가들은 이 동방의 로마 제국을 옛 도시 이름을 따 ‘비잔틴 제국’이라고 지칭한다. 서로마 멸망(476년)을 대신해 부흥한 비잔틴은 6~9세기 전성기를 맞았다. 콘스탄티노플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이자 기독교 심장부로서 실크로드 종착지 구실을 했다. 이 즈음, 수차례에 걸친 아랍-이슬람군의 공격도 막아낸다.

 

번영하는 도시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외세의 공격 목표가 되어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이스탄불도 예외는 아니다. 1204년 4차 십자군에게 함락됐다가 57년 만에 탈환되는 곡절을 겪는다. 뒤이어 내침한 동방의 오스만 튀르크가 1453년 점령하고, 정복자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이름을 이스탄불로 다시 바꾼다. 기독교 도시에서 이슬람 도시로 탈바꿈한 셈이다. 그때부터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으로 수도를 앙카라로 옮기기까지 47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남아 있었다. 이스탄불은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무려 1528년 동안 통치자 122명에 의해 세계사의 한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역시 3대 제국(한·수·당)의 수도로 장수했던 중국 장안(738년간 통치자 38명)보다 배가 넘는 나이다.

 

아시아 - 유럽 잇는 유일한 도시

 

이토록 오랫동안 세계 제국의 수도로서 위용을 과시하고 문명의 접점 구실을 했던 이스탄불은 갈무리한 수많은 옥내·옥외의 유적유물들을 통해 명실상부한 인류문명의 노천박물관임을 실증하고 있다. 일행이 우선 찾은 곳은 토프카프 궁전이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끝자락에 자리잡은 궁전은 오스만 지배자들의 거처이자 행정 중심지였다. 튀르크어로 ‘토프’는 ‘대포’, ‘카프’는 ‘문’이란 뜻인데, ‘궁전’을 의미하는 ‘사라이’와 합쳐 ‘토프카프 사라이’, 즉 ‘대포문궁전’이라고 불렀었다. 궁전 문 앞에 대포를 건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통치의 본산답게 규모가 어마어마할 뿐만 아니라, 소장 유물은 여러 문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바티칸 두 배에 달하는 70만㎡의 궁전은 지금 연간 250만 명의 관람객을 모으는 박물관으로 변했다. 먼저 소장한 도자기 1만2천여점은 취사인부 1200명이 매일 2만 명분의 음식을 조리한 부엌에서 쓰던 것으로 주로 중국과 독일, 일본에서 들여왔다. 보물관 전시품으로는 작은 다이아몬드 49개에 에워싸인 86캐럿짜리 대형 다이아몬드와 유명한 에메랄드 단검이 눈에 띈다. 잘 알려진 하렘은 면적 6,700㎡에 300여개 방이 딸린 금남의 공간이다. 살던 여자들은 대부분 포로 혹은 인신매매로 사들이거나 선물로 받은 당대 각국의 미녀들로서 문자 그대로 ‘세계 미녀 전시장’이었다고 한다. 이슬람 관에는 1517년 오스만이 칼리파제(계위제)를 채택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차있다. 특히 교조 무함마드가 쓰던 칼, 깃발, 활, 망토 등 유품과 그의 발자국, 이빨, 수염 같은 유물은 값을 따질 수 없는 이슬람의 무가지보(無價之寶)다. 재정부로 쓴 무기 관에는 16~19세기 각종 외국산 총과 화살, 칼 등이 있었다. 러시아 황제가 술탄 압둘 마지드에게 선물한 시계도 눈길을 끈다.

 

이어 술탄 아흐마드 광장에 있는 고대 도시 심장부인 히포드럼(경기장)으로 갔다. 그 중심에 40줄 계단식 좌석에 3만 명을 수용하는 ‘U'자형 경기장(길이 400, 너비 120m)이 있었다. 고대 로마시대 로마의 시쿠스 맥시무스 경기장 버금가는 큰 경기장으로 그 자체가 노천박물관이다. 중앙에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기둥과 동상, 해시계 등 기념물이 설치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그리스 뱀기둥이다. 이집트 파라오가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15세기 세운 오벨리스크는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0년 이집트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옮겨와 세웠다. 높이 20m의 핑크색 화강석 기둥 무게는 약 300톤. 기둥 사면에는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의 용맹성을 찬양하는 상형문자가 새겨졌으며, 대리석 받침대 사면에는 히포드럼에서 행해진 행사들이 생생하게 새겨졌다.

 

높이 짜리 뱀기둥(원래 6.)은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와 벌인 팔라테아 전투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델피 아폴로 신전에 세웠던 것이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가져왔다. 뱀 세 마리가 몸을 서로 꼬고 올라간 모습이다. 머리 위에는 지름 2m의 황금 트로피가 있었는데, 옮겨오기 전 분실되었고, 머리는 오스만 시대 돌에 맞아 부서졌다. 두 유물 말고도 이곳을 방문한 독일 황제 카이세르 빌헬름이 사례로 보내와 1898년 세운 독일 분수도 눈에 띈다. 모두 역사의 한 단면을 무언 중 증언하는 유물이다.다음 날엔 세계 5대 고고학박물관의 하나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을 찾았다. 외형부터 웅장할 뿐 아니라, 그리스-로마의 고전 건축미가 물씬하다. 1887년 레바논 시돈(지금의 사이다)의 왕가 묘지에서 일군의 석관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지은 이곳은 개관 100주년을 맞은 91년 구관(단층)을 개축하고 신관(3층)을 증축했다. 터키 전체 고고박물관 유물 250만 점 중 8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나, 지금은 10분의 1만 전시중이다. 유물은 그리스-로마 시대가 주종이나, 신관을 증축하면서 전후 시대 유물들도 모으고 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등재

 

8만여점의 설형문자 점토판, 5만여점의 각종 동전, 신상들과 동물 조각상 등도 주목되지만, 가장 눈길 끄는 것은 구관에 전시된 5기의 대리석 돋을새김 석관(기원전 5세기 중엽~4세기 말)이다. 그 가운데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장면을 생동감있게 부조한 석관이 있기 때문이다. 신관에는 수수께끼로 남았던 고대 트로이의 3천년 역사를 풀어주는 9개 도시유적이 40개 문화층별로 정리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키프로스, 시리아 등 주변 국가들의 역사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도 많다. 박물관에 딸린 고대동방박물관도 볼거리가 넘친다. 오리엔트 각지에서 출토된 유물 2만여점을 전시중인데, 기원전 13세기 중엽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맺은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문인 ‘카데슈 조약문’이 발길을 붙잡는다. 은판에 새긴 원문은 남아있지 않고, 전시된 것은 45행의 아카드어 번역문 점토판이다.이스탄불 구석구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박물관, 광장, 교회, 이슬람 사원, 성벽들….어느 것 하나 문명의 티가 짙게 배인 유적 유물 아닌 것이 없다. 그 위에 과거와 현재, 동과 서가 공존한다. 그래서 토인비는 ‘노천박물관’이라 했고, 유네스코는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도시의 세계화는 문명 세계화의 견인차다. 도시들이 제각기 ‘노천박물관화’할 때, 그만큼 문명은 세계화 선진화할 것이다.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6/153428.html#csidxcf96f4686a63ac89f7e51688a9a498c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7> 자연과 인간의 조화상 카파도키아 

답사길 끝에서 맛본 ‘태극무늬 백자’의 감동

등록 :2006-09-07 20:57수정 :2006-09-07 21:09

 

이스탄불은 동쪽으로 95%가 아시아대륙에 속하고 서쪽은 유럽에 걸쳐 있다. 유럽지역인 토프카프 궁전박물관에서 남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멀리 보스포루스 다리가 보인다. 왼쪽이 아시아 쪽이고 오른쪽이 유럽이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7> 자연과 인간의 조화상 카파도키아

 

‘소의 문’ 해협 통해 유럽-아시아 접점
기원전부터 민족이동·전쟁·문물교류
궁전 박물관 구석 국적불명 백자 사발
태극·팔괘 우리것과 닮은꼴 ‘전율’

 

토프카프 궁전박물관에 전시된 태극무늬 청화백자(왼쪽). 우리나라 최초 우표인 ‘대조선국우초’(1884년·오른쪽)에 새겨진 태극무늬와 같은 모양이다.

 

이스탄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대륙을 한품에 껴안은 국제도시다. 두 대륙이 세계 문명의 2대 본산이라는 동양,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아시아와 유럽이어서 의미는 각별하다. 이스탄불은 명실상부한 동서 문명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접점이 가능한 것은 좁은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대륙이 맞붙어 있으며, 그 지리적 간극을 다리 같은 물리적 매체가 메워주기 때문이다.7500년 전 지금 모습을 갖춘 이 해협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제우스 신은 부인 헤라의 질투로부터 애인 이오를 구하려고 소로 변신시켰지만, 이 사실을 알아낸 헤라는 파리를 보내 이오를 계속 괴롭힌다. 이오는 파리를 떨치려고 이 해협을 건넜는데, 이때부터 ‘소의 문’을 뜻하는 ‘보스포루스’(카우 게이트)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길이 31.7㎞의 보스포루스해협은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분기점이다. 평균 깊이가 50~120m인 이 해협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은 660m, 가장 넓은 곳은 3.4㎞다.

 

다리 하나 건너면 대륙이동 출근

 

원정이건 교역이건 두 대륙을 오가려면 당연히 서로를 잇는 다리가 필요했다. 기원전 4세기 유럽 쪽 시티안으로 원정을 떠난 70만 페르시아 군대는 배와 뗏목을 이어 붙여 가교를 만들었다. 그 뒤 2천여년 동안 배로만 오갔을 뿐 다리 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3년 사상 처음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가 놓였고, 88년에는 두 번째로 파티흐(정복자) 술탄 무함마드 다리가 세워졌다. 두 다리 밑으로 해마다 5만여 척의 각종 선박이 지나간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보스포루스 다리(일명 아타튀르크 다리)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갔다 오는 ‘다리 여행’을 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차량들로 붐빈다. 다리는 지난 50년 건설 계획을 짜놓고 공사는 70년에야 시작해 터키 공화국 수립 50돌인 73년 10월 29일 총공사비 2300만 달러를 들여 완공했다. 길이 1560m, 폭 33m, 바다로부터 높이는 64m다. 현수교로 하루 차량 20만대와 60만명이 지나다닌다. 2002년 현재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긴 현수교이며, 세계에서 7번째 긴 다리라고 한다.

 


이런 지리적 여건과 더불어 이스탄불이 동서문명 접점이 된 것은 대륙간의 빈번한 민족 이동, 전쟁, 교류 같은 역사적 배경과도 연관된다. 일찍이 그리스 도리아인들이 아시아 쪽에 와서 기원전 7세기께 칼세돈이란 도시를 건설한 데 이어, 알렉산더 동정 때는 그리스인들이 대거 옮겨와 동서융합 문화인 헬레니즘을 꽃피웠고, 로마 시대 식민도시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는 서구 기독교의 동방 보루가 된다. 한편, 이슬람화한 튀르크족과 아랍인들의 내침은 동방 문명의 유입을 낳았다. 기원전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공방전은 동서 문명의 만남을 자초했고, 중세 오스만제국의 유럽 정복전은 두 문명의 접촉 범위를 더욱 확대했다. 더불어 실크로드 육로의 서쪽 끝 이스탄불은 시종일관 동서 문물의 집산지 구실을 해 왔다.

 

두 문명의 접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성 소피아(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 터키어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교회를 짓기 시작했으나 곡절 끝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7년 지금 같은 규모의 대성당을 완공했다. 완공 뒤에도 몇 번 재앙을 입었다. 1453년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함마드는 점령 3일 만에 여기서 이슬람식 금요예배를 본 데 이어 미흐랍(메카 쪽 예배방향을 알리는 벽감)과 민바르(설교단), 미으잔(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 같은 시설을 증축하고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를 개설했다. 모자이크 성화들은 석회 칠로 덮고, 문에 새긴 십자가는 수직 부분만 없애 형체를 감추는 등 ‘개축’을 단행했다. 이슬람 사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건평 7570㎡에 이르는 성 소피아는 비잔틴 건축의 백미이며 이스탄불의 상징이다. 1935년 박물관이 될 때까지 성 소피아는 916년간(537~1453) 성당으로, 481년간(1453~1934) 이슬람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한 건물이 이질적인 두 종교의 성소로 이토록 오래 공존한 예는 드물다. 수난이 없지 않았지만, 두 종교, 두 문명의 만남과 공존의 상징으로 문명사의 한 장을 장식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70년 전 박물관으로 공개될 때, 성화, 장식에 가했던 덧칠을 벗기고 원상 복원한 것은 실로 가상스럽다. 이 때문에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중층적 문화유산을 경건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성 소피아는 건물 소재부터 각 지역의 융합물이다. 107개 기둥 가운데 일부는 지중해 연안국과 레바논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왔고, 돔에 쓴 가벼운 타일과 벽돌은 로도스 섬에서 구해 왔다. 그림이나 장식물도 두 문명을 아우른다. 본당에 들어가는 9개 문 중 황제가 들어가는 가운데 문 위에 9세기 모자이크 성화가 그려져 있다. 가운데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왼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보인다. 오색영롱한 천장과 벽에는 초기 기독교, 비잔틴 시대 황제나 주교들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눈길 끄는 것은 이슬람 관련 유물들이다. 지름 31m, 높이 55.6m나 되는 돔 정면에 증축된 미흐랍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벽을 빙 둘러 아랍어로 알라 →아부 바크르→오스만→하산→후사인→알리→오마르→무함마드 등의 순으로 이슬람 성자들의 이름을 지름 7.의 대형 원판 속에 새겼다. 2층 갤러리는 주로 여성 예배장소로 쓰였다. 왕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오르는 길을 계단 아닌 비탈길로 만들어 조용히 다니도록 이끌었다고 하니 건축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시아-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의 아침 출근길 표정.

 

 

문명간 접점답게 이스탄불은 새 융합문명의 산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비잔틴 문화다. 비잔틴 문화란 한마디로 그리스적 헬레니즘 문화에 동방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일부 서구 학자들이 이 융합적 성격을 근거로 비잔틴을 ‘낮은 제국’, 즉 후진제국이라고 호도하는 건은 편견이다. 비잔틴은 유럽이 중세 암흑기에 놓였을 때 그리스-로마 고전문화를 보존해 르네상스 터전을 마련했고, 그리스 정교를 확립해 동유럽 슬라브 세계에 전했다. 이후 러시아가 비잔틴의 ‘후계자’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처할 만큼 슬라브 세계의 부흥을 촉진했다. 따라서 비잔틴은 ‘낮은 제국’이 아닌 높은 제국이며, 선진 제국이었다.필자는 동서 문명의 접점인 이스탄불 현장을 살펴보면서 세계 문명사에 기여해 온 우리네 문화유산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계속 응어리로 남았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본산인 토프카프 궁전 박물관 도자기실을 찾았을 때도 그런 심정이었다. 박물관은 궁전 부엌에서 쓰던 세계 각 나라 도자기 1만2천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나, 3천점만 전시하고 있다. 소장 도자기의 3분의 2인 8천여점이 중국(7~17세기), 일본(18~19세기), 타이 등의 동양산이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수리 중이라 전시실 한 곳에 몇 백 점만 공개하고 있었다.

 

‘세계적 조선 도자기 확인’ 대미 장식

 

대부분 중국산인 도자기 속을 누비다 우연히 안테에 팔괘가, 바닥에 태극문양이 새겨진 청화백자 사발이 보였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짜릿한 느낌이 들면서 걸음이 멎었다. 설명문에는 ‘청화백자, 16세기’(Blue and White Ware, 16c)라고만 적혀 있고, 출처는 이례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근처에서 출처 설명 없는 백자 사발과 병 2개도 발견했다. 우리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반,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기대 반 속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귀국해서 보니, 청화백자 사발 문양은 1884년 처음 발행한 ‘대조선국우초’ 5문과 10문짜리에 새긴 태극 문양과도 신통하게 같다.)한때 세계 도자업을 선도하던 우리 도자사를 반추하면서, 동서 문명 접점에서 세계의 도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했으리란 믿음으로, 수만리 오아시스 육로 답사의 대미를 꾸미고자 한다.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잔틴식 돔 무더기·첨탑 버무린 ‘튀르크식 걸작’


이스탄불의 건축문화

성 소피아 대성당 본당 천장의 ‘마리아와 예수’ 모자이크 성화.

 

이스탄불은 두말할 나위 없는 건축의 도시다. 동서 문명의 접점으로 이 도시가 누려온 명성은 세계 건축사의 한 정점인 돔 무더기와 첨탑군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사원과 궁전의 이미지에서 상당 부분 비롯한다. 유목민 출신의 튀르크족은 본래 노천에서 천막생활을 했으므로 이렇다할 건축적 전통이 없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정착한 그들은 아랍권의 모스크 아치형 대신 서구 비잔틴 제국의 돔형 건축양식을 절묘하게 차용해 이스탄불에 숱한 건축사 걸작들을 만들었다.

 

모델이 된 것은 성 소피아 사원이었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그리스 건축가를 시켜 537년 재건한 이 대사원은 정사각형 평면 위에 거대한 원형 돔을 얹은 거대한 동산 모양을 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900여년 뒤 튀르크 건축의 새 모태가 된 것이다.

 

비잔틴 건축 양식을 오스만 튀르크의 건축양식으로 새롭게 계승한 주역은 대가 미마르 시난(1489~1588?)이다. 동유럽 알바니아 출신으로 황실 친위대 예니체리 군단에서 기술장교로 복무하며 군용건축으로 경험을 쌓은 그는 제국의 최전성기인 16세기 슐레이만 대제 때 기념비적 건물들을 잇달아 지었다.

 

소피아 사원의 거대 돔 건축 양식을 기본꼴로 삼되 딸린 반구형의 여러 돔들과 돔들을 받치는 첨탑, 그 아래 아케이드처럼 구성된 복합시설물 단지로 짜인 사원 양식은 시난 건축의 특징이다. 1548년 지어진 셰자데 모스크는 이런 대형 돔+반구 돔 결합양식을 보여주는 첫 걸작이다. 금각만(골든 혼) 해협을 마주보는 언덕에 세워진 슐레마니에 모스크(1557년 완공)는 에디르네의 셀리미예 모스크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름 27m를 넘는 큰 돔에 동서에 딸린 반구형 돔, 영롱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으로 유명하다. 사원 134개와 토프카프 궁전의 주방, 하렘 등도 설계한 시난은 무려 477채의 건축물(현전하는 것은 196개)을 설계한 다작가였으나 무덤은 슐레마니에 모스크 한쪽에 조그맣게 붙어 있을 뿐이다.(건축사가들은 ‘이스탄불에 남긴 시난의 서명’이라고 부른다.)

 

시난 특유의 돔 무더기 건축은 이스탄불의 또다른 상징 블루 모스크를 지은 제자 메메드 아가 등에게 계승되었고, 17세기 유럽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곡면 스타일까지 융합시켰다. 이스탄불 사원건축은 개방적인 튀르크 문화가 낳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고도 할 수 있다.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6/155174.html#csidx0543339ffe97db88f3fd0d1fbd3206e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8> 40일간의 대장정을 마치며 

‘아시아의 잃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등록 :2006-09-14 21:08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8> 40일간의 대장정을 마치며

 

이스탄불에서 마지막 답사 일정을 마치고 마르마라해의 수면에 부챗살 낙조가 비낄 무렵 아타투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타고 갈 두바이행 비행기는 ‘기계 사정’으로 예정보다 4시간 25분이나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2시간 여유를 두고 두바이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먼 길 떠난 나그네에게 돌아가는 길은 한시바쁜 일이지만, 어찌하랴. 자정에 뜬 비행기는 3시간 30분쯤 날아 두바이 공항에 안착했다. 새벽녘인데도 30도를 웃돈다. 항공사가 내준 공항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8월 25일) 새벽 서울로 향했다.꼭 40일 만의 귀향이다. 하루 푹 쉰 덕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답사 과정에서 보고 듣고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면서 그 모든 것을 한 줄로 얽은 답사 길이 마냥 꿰미처럼 캄캄칠야의 거죽에 드러난다. 그 길이 바로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이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 밟고 지나간 오아시스 육로 수만리 길이다.

 

한반도~로마 ‘오아시스 육로’ 확인
경주에서 베이징 거쳐 시안서 만나
3만7천리, 하루 100리씩 걸어 1년 거리
낙타 대신 비행기 뜨는 ‘신오아시스로’
그 길 따라 ‘세계 속 한국’도 보았다

 

실크로드 3대 간선의 하나인 오아시스 육로(오아시스로)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북위 40도 부근 건조 지대에 흩어진 오아시스들을 잇는 문명 교류의 통로를 말한다. 이 길은 다른 간선인 초원로, 해로와 달리 시종 큰 변동 없이 줄곧 이용됐을 뿐 아니라, 연도의 포괄 범위도 더 넓으며, 그 연변에서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한마디로, 오아시스로는 동서교통로의 중추 구실을 해왔다. 그래서 오늘날도 실크로드 하면 흔히 이 육로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오아시스로 변천사를 돌아보면, 처음부터 극동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이 일시에 개통된 것은 아니다. 원래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고원을 사이에 두고 동서 각지엔 짤막짤막한 길들이 단절적으로 널려 있었다. 이 길들이 파미르 횡단로가 뚫리면서부터 이어져 비로소 동서 오아시스들을 관통하는 완결된 길이 되었던 것이다.

 

파미르고원 뚫리며 비로소 동서연결

 

파미르 서쪽의 서아시아에는 기원전 6세기께 이미 정비된 교통로가 줄줄이 뻗어 있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 재위) 때 인도 서북부 간다라부터 이집트 지역까지 정연한 교통망이 사통팔달해 영내 23개 주와의 연계가 원활했다. 그 바탕에서 오아시스로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수도 수사부터 아나톨리아 사르디스에 이르는 이른바 ‘왕의 길’이 개통되었다. 곳곳에 숙소 등이 두루 갖춰진 약 2475㎞의 이 길을 준마 탄 전령사는 열흘 걸려 주파하곤 했다. 지금도 이 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파미르 동쪽 지역 교통은 전한 때인 기원전 139~126년 장건이 13년간 서역 사행을 다녀온 뒤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옛 기록을 보면, 전한시대에는 크게 남도와 북도가 있었는데, 모두 시안(장안)을 기점 삼아 하서회랑으로 서행하며 둔황에 이른다. 여기서 남북도가 갈라진다.남도는, 둔황 서남쪽 양관에서 누란(선선, 이하 괄호 안은 당시 이름임)을 거쳐 쿤룬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간다. 이어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의 체르첸, 호탄 등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나 피산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길은 계속 서행해 파미르고원을 넘고 아프가니스탄(대하, 박트리아)을 지나 이란(안식, 파르티아)에 이르며, 다른 한 길은 서남쪽으로 틀어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거쳐 인도에 닿는다.

 

반면, 북도는 둔황 서북쪽 옥문관에서 시작해 ‘악마의 늪’이 펼쳐진 고비사막 서단과 투루판(차사전왕정)을 거친 뒤 톈산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간다. 그 다음 타림분지 북방 언저리의 카라샤르(언기), 쿠얼러(위리), 쿠처(구자) 등 오아시스 국가들과 카슈가르(소륵)를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은 뒤 페르가나(대원)에 도착한다.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 길은 서북쪽으로 사마르칸트(강거)를 지난 뒤 시르다리야강 연안을 따라 아랄해(북해)에 이르며, 다른 길은 서남쪽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에 도달한다.

 

이 오아시스로는 1~2세기 후한 때는 3도, 3~6세기 위진남북조 때는 다시 4도로 세분화했다. 하지만 기본노선은 전한 때의 것을 답습했다. 7세기 당대에는 파미르고원 서쪽에 도호부 22개를 두어 서역 경영을 본격화하면서, 서역의 지역 개념도 인도와 이란, 아랍, 로마까지 확대되고, 오아시스로의 동서 두 끝도 그만큼 멀리 옮겨간다. 이때부터 여러 갈래 육로는 크게 남북 양도로 합쳐져 오늘에 이른다.

 

남도는 뤄양이나 시안에서 시발해 안시, 둔황을 거친 뒤 전한시대의 남도대로 인더스강 상류에 이른다. 다시 서쪽으로 카불, 칸다하르, 이란 루트 사막 언저리 케르만을 거쳐 바그다드와 팔미라(시리아), 지중해 동안에 도착한다. 북도도 뤄양, 시안에서 시작해 안시에서 남도와 갈라진 뒤 전한 시대 북도대로 카슈가르를 지난다. 그 뒤 톈산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서행해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와 이란 니샤푸르, 테헤란(라가에)을 지난 뒤 서북쪽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지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이른다. 여기서 계속 서북 방향으로 가면 발칸 반도 서변을 거쳐 로마에 종착하게 된다.

 

이처럼 오아시스로는 로마에서 시안까지라는 게 지금까지 통설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다시피, 이 길을 통한 동서문명 교류는 시안에서 멎지 않고 계속 동진해 한반도까지 이어졌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여러 서역 유물들은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따라서 오아시스로를 한반도까지 연장하는 것은 역사의 당위적 복원이다. 이 연장의 요체는 시안부터 한반도까지 육로 노정을 밝혀내는 것이다. 문헌기록이나 출토 유물에 근거해 노정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즉 한반도의 남단(경주)에서 출발해 서울(한주)과 평양을 지나 강계(동황성)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선양(심주), 요중(광주)을 거쳐 고대 한-중 접경지인 초양(영주)에서 중국 땅에 접어든다. 6세기께 초양은 고구려가 지배한 동북아 최대의 국제 무역도시였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산하이관(임투관)을 넘으면 베이징(유주)이다. 이어 동·중·서로의 세 갈래 길을 따라 남하해 뤄양에 이른 뒤 서진해 시안에 도달하면 서역 오아시스로와 맞닿는다. 그렇게 되면 서쪽 끝을 로마로, 동쪽 끝을 경주로 하는 오아시스로 전 노정이 복원된다. 총연장은 약 1만5천㎞(약 3만7천리)로, 하루 100리씩 걸으면 주파에만 1년이 걸린다.

 

초원로·해로도 재발견하게 되길

 

이상은 기원전 6세기께부터 중세까지 2천여년 동안 전개된 오아시스로다. 이 시기 길은 낙타·말 같은 가축 중심 교통수단이나 인간 보행에 의해 소통되고 운영되었고, 그 길 위에서 고대, 중세의 숱한 문명이 명멸을 거듭했다. 그러나 근세 들어 철도와 비행기, 기선 등 기계동력에 따른 교통수단이 도입됨으로써 오아시스로를 비롯한 실크로드 전반은 운영·기능 면에서 전래 태생적 모습은 차츰 사라지고, 육·해·공에 걸친 입체적 교통망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문명교류의 면모도 크게 달라졌다. 이를테면 교류 통로라는 속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용과 형태, 수단에서는 획기적 변화가 일었다. 근대를 기점으로 이전의 길은 전통 오아시스로로, 이후의 길은 구별된 ‘신오아시스로’로 정립하는 것이 가당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낙타·말 아닌 자동차와 기차·비행기로 옛 흙길 위에 포장된 새 길을 따라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오간다.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는 이런 변화에서 나온 ‘신실크로드’(신오아시스로 포함) 개념이다. 수천년 동안 발길을 불허하던 ‘죽음의 바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생겨난 ‘사막공로(沙漠公路)’는 다름 아닌 ‘신오아시스로’다. 이 ‘신오아시스로’ 연변에는 우루무치나 아슈하바트, 테헤란이나 앙카라 같은 현대도시가 생겨났고, 숱한 부존자원이 개발되면서 문명과 그 교류는 모습을 일신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잊었던 옛것을 찾고 더 깊이 알아내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새것을 발견하고 미래의 꿈에 부풀기도 한다. 그래서 일행의 답사에 ‘실크로드의 재발견’이나 ‘신실크로드’라는 의미를 새삼 부여하게 된다.

답사길에 만났던 실크로드 연변의 숱한 사람들. 생김과 생활방식은 다르지만, 문화를 잇는 교류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소중하다.

 

 

사실 이런 의미는 일찍이 이 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포착했다. 1993년 유럽연합은 이른바 ‘유럽-카프카스-아시아 회랑지대 운송(약칭 트라케카) 프로그램’을 공포한 바 있다. 98년엔 흑해 주변국들과 중앙아시아 4개국 등 12개 나라 대표가 바쿠에 모여 ‘아시아의 잃어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는 협약, 즉 동서 자유무역 회랑지대를 설립하려는 협약에 서명했는데, 그 지대를 ‘뉴실크로드’라고 불렀다.‘한겨레’ 답사단 일행은 서울에서 이스탄불로 이어진 수만리 길을 누비면서 ‘세계 속 한국’이란 위상에 가슴 뿌듯해졌고, 오롯한 동서 문물의 교류 흔적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아울러 인류가 그 연변에서 꽃피운 문명들의 향훈도 즐길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전운이 감도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땅은 밟지 못했다. 밟았더라면 필히 반달리즘의 해악을 고발했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재발견’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오아시스로 말고도 초원로와 해로가 재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끝〉

 

연재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6/157130.html#csidxcce1e6c85cb2a2bae9dd8908132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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