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박은식, 고별사에서 '이상룡 협조요망'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백암 박은식 선생
ⓒ 박유종 관련사진보기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등으로 어지러워진 임시정부의 혼란수습에 나섰다.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이승만 탄핵 심판위원회의 심판서를 접수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이라는 '주문(主文)'을 발표함과 아울러 새대통령에 <독립신문> 사장·주필인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박은식은 이에 앞서 1924년 12월 11일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유고상태인 대통령 대리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의정원에서 이승만의 탄핵이 결정되면서 정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은식의 나이 67세, 1911년 53세에 망명하여 만주와 해삼위, 중국관내의 수백만 리를 오가면서 국권회복투쟁에 나선 지 14년 만에 임시정부의 최고 수장에 선출되었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과도기의 적합한 인물로서 추대된 것이다.

박은식은 3월 24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조촐한 취임식을 갖고, 이어서 상하이 시내 3·1당에서 교민들과 함께 순국열사에 대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추도사에서는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조국광복을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고 참석한 각료들을 격려하였다. 

새 대통령에 취임한 박은식은 국무총리에 군무총장 노백린을 임명하고 나머지 각료들을 모두 유임시켰다. 박은식 내각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박은식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 노백린
 내무총장 이유필
 법무총장 오영선
 학무총장 조상섭
 재무총장 이규홍

박은식은 성격이나 체질적으로 관직에 연연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말에 남다른 학식과 자질에도 불구하고 능참봉에 그치고, 그마져 버리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일이나, 망명시기 각지에서 각급 단체를 조직하고서도 윗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모습에서 입증된다.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혼란 수습을 위해서, 그야말로 '임시'적으로 추대되고, 그럴 요량으로 수락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그동안 이승만의 탄핵과 맞물리거나 운영을 둘러싸고, 그리고 이념과 시국관에 따라서, 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안창호 중심의 '개조파', 정부를 아예 해체하고 새로 조직하자는 이동휘·문창범 계열의 '창조파', 김구·이시영 등의 '현상유지파' 등으로 크게 갈렸다. 박은식은 어느 쪽에도 편향하지 않으면서 통합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의 분열과 이합집산을 막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통치구조를 바꾸기로 하였다. 박은식의 뜻이기도 한 개헌작업이 의정원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대통령 대신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되는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데 대체적으로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무령을 최고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의 제3차 개헌안이 1925년 7월 7일 발효되면서 박은식은 '개정임시헌법 시행 축식(祝式)'을 갖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3개월 보름 정도의 재임기간 중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하고 하야한 것이다. 

권력의 속성 탓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위정자들은 그 자리에 앉으면 권력강화와 연장을 위해 음모를 꾸미거나 위법적인 행위를 일삼는데 비해 박은식은 짧은 기간에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은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체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박은식은 하야하면서 남긴 <임시 대통령 고별사>에서 신국무령 후보인 성망이 높은 이상룡에 협조하여 국사를 원만히 수행케 하도록 요망하였다.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국무령 후보인 이상룡씨는 〇〇숙덕(宿德))으로 성망이 소저(素著)하고 재만 다년에 광복사업을 위하여 효로한 성적이 많은 즉 우리 정국을 유지할 능력이 유한 것을 가히 확신할지며 우리 사회에 소위 지방별이니 당파별이니 하는 고질도 금일 차거로 인하여 소석(消釋)이 될지니 우리 전도에 이익될 점이 많은 즉 제군은 아무쪼록 여를 협조하든 충성으로서 신국무령을 협조하여 국사를 원만히 수행케 하면 오족 전도에 막대한 행복이라 하노라.
                                                               
대한민국 7년 7월 7일
임시대통령 박은식 (주석 6)

주석
6> <독립신문>, 1925년 10월 21일치, 〇〇란은 해독 불가.

 

 

출처; [동아플래시100]‘역사는 민족의 정신’ 외치며 임정 추스른 백암 별세|동아일보 (donga.com)

[동아플래시100]‘역사는 민족의 정신’ 외치며 임정 추스른 백암 별세

입력 2021-09-10 11:40업데이트 2021-09-10 11:40
 
1925년 11월 04일
플래시백


독립신문 호외가 중국 상하이 거리에 뿌려졌습니다. 1925년 11월 2일이었죠. 전 임시대통령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겨 망명한 뒤 14년 동안 이역의 하늘 밑을 서성이다 향년 67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유해는 고향 땅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모셨지만 상하이의 공동묘지에 임시 유택을 마련했죠. 그로부터 68년이나 지난 1993년이 되어서야 유해가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백암 박은식 이야기입니다. 이미 늙은 몸인데다 천식으로 건강까지 좋지 않았지만 무너져가는 임시정부를 추스르기 위해 임시대통령 자리를 떠맡은 ‘선공후사’의 어른이었습니다.

왼쪽은 전 임시대통령 박은식 각하의 서거 소식을 전한 1925년 11월 2일자 독립신문 호외. 오른쪽은 백암 박은식의 얼굴사진


 
무엇보다 박은식은 역사가였습니다. ‘국체는 비록 망했으나 국혼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마저 불살라 없어졌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망명하면서 남긴 말입니다. 서간도로 간 뒤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 등을 불과 7개월 만에 정력적으로 써냈죠. 그의 역사관은 ‘대동사상’이었습니다. 만주도 우리 국토이며 금나라, 청나라도 같은 민족이라고 봤습니다. ‘역사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죠. 1915년 펴낸 ‘한국통사’는 우리의 눈물, 1920년 써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피였습니다. 두 책은 독립운동의 무기였죠. 이를 겁내서였을까요? 일제는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자 추모 사설 ‘哭(곡) 白庵(백암) 朴夫子(박부자)’를 삭제하면서까지 그의 삶이 알려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자 1면에 박은식의 서거를 추모하는 사설 ‘哭(곡) 白庵(백암) 朴夫子(박부자)‘를 실었으나 일제 총독부에 의해 삭제당했다. 이 사설에서 동아일보는 유학자 박은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중국 밖의 공자를 뜻하는 ‘朴夫子(박부자)‘로 높여 불렀다.


 


그는 언론인이기도 했습니다. 46세이던 1905년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되어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두려워하여 한성 밖으로는 배포를 막고 박은식을 사령부로 잡아가기까지 했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은 전합니다. 박은식은 같은 시기 황성신문의 장지연과 함께 ‘쌍두마차’처럼 활약했습니다. 1906년 설립된 대한자강회에서도 매달 발행하는 대한자강회월보의 논설 집필을 요청받았죠.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일제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대한제국의 자강을 외치면서 그의 이름이 높아진 영향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떠난 뒤 1908년 입사한 황성신문에서도 박은식의 붓은 멈추지 않았죠. 평안도와 황해도 인사들 중심으로 결성된 서우학회의 임원으로 맡은 직책도 주필이었습니다.

왼쪽은 1917년 판 한국통사 표지이다. 한국통사는 1915년 처음 출간됐다. 가운데는 1920년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표지. 오른쪽은 1912년 출간한 안중근전의 한 쪽


박은식은 뼛속까지 유학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황해도 2대 신동'으로 꼽혔고 17세에 사서삼경에 통달했습니다. 방에 주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매일 절을 올릴 정도였죠. 동아일보는 추모 사설에서 그를 ‘朴夫子(박부자)’로 높여 불렀습니다. 중국 밖의 공자라는 뜻이죠. 하지만 주자학에 매몰되진 않았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3, 6일자 기고 ‘학(學)의 진리(眞理)는 의(疑)로 좇아 구(求)하라’처럼 맹목적 추종보다 합리적 의심을 멈추지 않았죠. 바로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1909년 ‘유교구신론’에서 양명학을 받아들여 근대 유학의 길을 열었고 이후 사회주의까지 끌어안았죠. 교육자강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오른쪽은 1925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 호외. 탄핵안 통과로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면직과 새 대통령 박은식의 취임식을 거행한다는 소식 등을 담았다. 가운데는 2015년 10월 서울대 사범대 역사관 1층에 세워진 박은식 흉상. 박은식이 1900년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낸 교육자였던 점을 기렸다. 왼쪽은 박은식 등 애국지사 4명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85년 1월 9일자 7면


그가 러시아에서 한족공보 주필로 일하고 노인동맹단에 가세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노인동맹단 대표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였죠. 하지만 희망에 넘쳐 돌아온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가 분열돼 민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5년째 하와이에서 ‘원격통치’ 중이었죠. 보다 못한 박은식은 ‘이완용보다 보다 더한 역적’이라는 매도를 받아가며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최후수단인 이승만 탄핵과 대통령제 폐지를 박은식은 국무총리로, 2대 임시대통령으로 해냈습니다. 임시정부는 가까스로 국무령체제로 넘어가게 됐죠. 그는 유언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민족적으로 뭉쳐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꿈이던 ‘한국건국사’ 집필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백암 선생은 세계인이었고 그의 역사서는 세계사였죠” (hani.co.kr)

“백암 선생은 세계인이었고 그의 역사서는 세계사였죠”

노관범 서울대 부교수 ‘박은식 평전’
백암 전공 역사학자가 쓴 첫 평전
“유학으로 근대 체험·사유한 사학자”

기자강성만
  • 수정 2021-08-26 02:30 등록 2021-08-25 20:58
노관범 교수.

 

“백암 박은식(1859~1925) 선생은 민족주의 사학자로 불리지만, 실제는 민족과 국가를 넘어 보편적 인류라는 넓은 정체성을 보였어요. 여기에는 선생이 국가나 지역에 매몰되지 않는 보편주의를 갖는 유학을 공부한 영향이 클 겁니다. 백암은 전 근대 유학을 가지고 근대를 체험하고 사유한 분이죠.”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백암 박은식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부교수는 최근 <백암 박은식 평전>(도서출판 이조)을 냈다. 역사학자가 쓴 첫 박은식 평전이다.

한말 유학자 백암은 국망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기에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언론인으로 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다. 경술국치 이듬해 서간도로 망명해 중국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책을 저술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망명 중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 저술인 <한국통사>(1915)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썼고 1925년에는 탄핵당한 이승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이어 2대 대통령을 지냈다.

<백암 박은식 평전> 표지.

 

이번 평전 부제는 ‘유학자 겸곡 박은식’이다. “원래는 책 이름을 ‘겸곡 박은식 평전’으로 하려고 했어요. 지금껏 나온 백암 평전을 보면 조선말 유학자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 대한제국기 사회운동이나 국망기 독립운동가 모습만 다뤘거든요. 백암은 망명 이후 뒤늦게 쓴 호이죠. 겸곡은 1890년대 초부터 사용했고요.” 이처럼 저자는 백암이 마흔 나이에 선교사가 쓴 신서적을 읽고 ‘교육 자강 운동’으로 나아가기 이전 유학자 생애도 비중 있게 다뤘다.

책의 다른 특징은 백암 저술을 단편적으로 다루지 않고, 박은식 독립운동 궤적과 전체 저작의 틀 안에서 설명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백암 생각은 5년의 시차가 있는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다르게 서술된다. “<한국통사>에서는 동학혁명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국가도 같이 끌고가야 한다’는 관념이 동학에 부족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5년 뒤 저술에선 동학을 진정한 의미에서 평민 혁명이라고 평가해요. 손병희(동학 3대 교주)가 이끈 3·1운동에서 천도교(동학을 계승 발전한 종교)의 힘을 봤기 때문이죠.”

노 교수 생각에 “박은식은 세계인이었고 그의 역사서는 세계사였다.” 왜? “한국 독립운동 역사를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갓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계에 홍보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백암은 여기서 1차 대전(1914~18)을 군국주의와 인도주의 세력 대결로 볼 수 있다며 종전 뒤 인도주의 관점에서 많은 나라가 독립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군국주의가 짓누르고 있다고 써요. 인도주의 관점에서 한국 독립을 이야기했죠.”

그는 석사 과정 때 한말 충청도 유학자 송병선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다 “유학자이면서 대한제국 중심 사상가를 다루는 게 좋겠다”는 지도교수 권유로 ‘백암과 위암 장지연(1864~1921) 자강사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을사늑약 체결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글로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했던 위암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백암과 달리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무엇이 둘의 행로를 갈랐을까? “대한제국기에 두 사람 모두 한일간 국력 차가 너무 커 한국이 먼저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1905년 위암은 대한제국 관리들과 함께 방일해 일본 신문물을 직접 체험합니다. 그 뒤로 한국이 강해지려면 일본과 함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매체인 <해조신문>에서 일하며 겪은 교민사회의 분열상도 영향을 미쳤죠. 반면 박은식은 대한제국기부터 중국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해요. 중국과 일본 세력의 균형으로 한국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죠. 임정 대통령 퇴임사에서도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세계주의를 향해 진전하는 단계라며 중국과 러시아, 인도와 연합해 행동할 것을 강조합니다. 캉유웨이(중국 사상가·정치가)가 서문을 썼고 중국인들이 많이 본 <한국통사>도 ‘한중 연대에 입각한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이라고 봐도 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노관범 교수 제공

 

 

 

출처; 대종교인 박은식의 역사인식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박은식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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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과 대종교가 특히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국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시기에 발간된 대종교의 각종 경전은 민족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1914년 그가 망명하여 정착한 만주 화룡현 청파호의 대종교총본사는 민족사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 또는 순례의 코스가 되었다. 이런 모습은 김교헌ㆍ윤세복으로 이어진 후계자들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1859~1926)은 개화파 지식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등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각종 계몽ㆍ항일논설과 많은 사론을 집필하였다. 1911년에 국경을 넘으면서 "나라는 망해도 역사만 지키면 반드시 부흥한다"는 신념으로 망명길을 택하였다. 나철의 '국망도존'과 같은 인식이었다. 

망명한 박은식은 윤세복의 집에 1년간 머물며 대종교 교도가 되었고, 고대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답사하는 한편 다수의 고대사 저술을 하였다. 박은식이 언제부터 대종교에 가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는 유근이나 김교헌과의 교유를 통해 망명 이전부터 대종교를 체득하고 있었으며, 망명을 전후하여 정식으로 입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그가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단군의 의미를 거론하지 못하였고, 강역인식도 한반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망명 직후 서술한 고대사 저술에서는 커다란 인식의 차이와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하였다.
 
언론인ㆍ민족사학자ㆍ독립운동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 박은식은 『한국통사』ㆍ『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는 『동명왕실기』, 『몽배 김태조』, 『대동고대사론』 등을 집필하는 한편 단군의 신교(대종교)에 관한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한 기록이다.

 단군의 신교(檀君之神敎)

시조 단군은 신도(神道)로써 교를 베풀고 제천(祭天)으로써 보본(報本)하였으니,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고려가 대대로 그 교를 준수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삼신(三神)께 제사하여 생산의 신을 위한다고 하노니, 삼신은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을 말함이다. 
 
기자조선 때에 단군묘(檀君廟)를 세우고 받들었으며, 삼국시대에 와서 불교가 홍기해도 환인제석을 높여 화엄경중에 게재하여 국내 사찰들이 모두 환인제석으로 받들었으니 이제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제석(帝釋)이란 곧 인도어로 상제(上帝)를 칭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묘향산에 3백 6십여 개의 암자를 지었으니 단군시조가 정치하던 3백 6십여 사를 상징한 것이며, 중 무극 일연(無極一然)이 『삼국유사』를 찬하매 삼신의 이화(理化)한 사적을 논했고, 본조(朝鮮時代)에 와서 명유 이익(李瀷 號는 星湖)이 말하되 우리 나라의 종교는 단군에서 나왔다고 했고, 다산 정약용이 삼신을 말하되 인민의 시조라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신교의 원류(源流)를 고증함에 족하다. 제천ㆍ보본함으로써 배천교(拜天敎)라고도 하며 또한 대종교(大倧敎)라고도 하니, 종(倧)이란 것은 상고시대에 신인(神人)을 칭하는 말이다. (주석 5)

주석
5> 박은식, 『백암 박은식전집』제1권, 1062쪽, 동방미디어, 2004.

 

 

출처; [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혼이 보존되면 국가는 부활”···한국통사 쓴 박은식 - 시사저널e - 온라인 저널리즘의 미래 (sisajournal-e.com)

[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혼이 보존되면 국가는 부활”···한국통사 쓴 박은식
  •  이준영 기자(lovehope@sisajournal-e.com)
  •  승인 2020.03.28 09:00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국무령제 만든 후 스스로 물러나
사이토 총독 제거 계획 추진
독립군의 독립투쟁사 밝힌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독립운동을 이루려면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뤄야한다”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는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박은식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박은식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민족사학자였다.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을 통해 일제를 규탄하고 동포들의 독립투쟁 정신을 고취했다. 선생은 한국통사 등 우리 역사를 쓰는 이유에 대해 나라는 형체로써 무너졌으나 역사는 정신이라며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역사가 보존되면 나라도 부활한다고 했다.

선생은 강우규 의사와 함께 사이토 총독 제거 계획을 추진했다. 또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했고 임시정부가 분열의 위기를 맞자 이를 추스렸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선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꾼 후 스스로 물러났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1915년 『한국통사』의 결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박은식 선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암·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무치생(無恥生)이다.

일제시기 송상도(宋相燾)가 쓴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따르면 선생의 인상은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너그럽고 후했으며 소탈한 성품이었다.

선생은 1880년 경기도 광주(廣州)로 가서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들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인이었다. 선생은 이들을 통해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개혁론을 익혔다. 또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 체계 아래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를 통해 선생은 개혁적 사고를 가지게 된 것 같다”며 “이 같은 사상적 배경이 선생을 양반 관료제 사회의 질서를 고집하는 보수적 성리학의 틀에만 매어 있지 않고 근대적인 변화와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개신 유학자로 거듭나게 한 것 같다”고 했다.

이처럼 선생은 다양한 수학 과정을 거치며 양명학과 실학에 토대를 둔 현실적이며 근대적인 사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척사적 민족주의를 키워 갔다.

◇일제 침략 맞서 황성신문 주필로 민족의식 일깨워···민족교육 실천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선생은 개화 지식인들과 서울 민중들이 중심이 돼 전개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운동에서 문교 분야의 간부급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 해 9월 선생은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해 ‘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로 활동하면서 민중 계몽운동을 했다.

박은식 선생은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영국인 배설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자 이 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당시 일제는 1905년 11월 이른 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어 국권을 빼앗았다.

선생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황성신문이 강제 폐간될 때까지 여러 애국적 논설을 발표해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또 이 시기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국권을 되찾고 민족과 국가 간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선생은 자강운동 단체로 1906년 4월 조직된 대한자강회에 참여했다. 선생은 대한자강회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 발행에 관여하면서 여러 애국적인 논설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고, 민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웠다.

선생은 언론 계몽운동과 함께 교육 계몽운동에도 집중했다. 우리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교육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1906년 10월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교육 계몽운동 단체로 서우학회를 만들었다. 선생은 이 학회의 기관지인 ‘서우’의 발행을 맡아 교육 진흥과 민족 교육기관의 역할을 할 사립학교의 설립을 촉구했다.

선생 등의 노력으로 1908년 1월 서북인 중심의 서우학회와 관북인 중심의 한북흥학회가 통합해 서북학회가 창립했다.

서북학회의 회장을 맡은 선생은 그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를 통해 사립학교의 설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개설됐다. 선생은 이 두 학교의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또 선생은 서북협성학교의 분교 설립을 적극 추진해 1908년부터 1909년 말까지 전국 각지에 63개 지교(支校)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민중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운동에 나섰다.

◇국권회복운동 단체 ‘신민회’ 활동···중국의 최초 한국 독립운동단체 ‘동제사’ 결성

선생은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신채호 등이 결성한 신민회는 전국적인 비밀결사로 계몽운동 단체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다.

신민회는 민주 공화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국채보상·산업진흥·교육계몽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이끌었다. 또 ‘대한매일신보’ 발행을 통해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박은식 선생은 주로 교육과 언론·출판 부문에서 활동하며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국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화했다. 일제는 무단정치를 시행하면서 신민회 등 민족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또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서북학회월보 등 애국적인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일제는 박은식 선생의 저작 등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의 발행과 열람을 금지시켰다.

이에 선생은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1년 5월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역사서 집필을 통해 민족혼을 드높일 목적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에 있는 동지 윤세복의 집에 1년 동안 머물면서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집중했다. 이를 재만 한인 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하게 했다.

이 때 선생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을 저술했다. 민족 영웅호걸들에 대한 것이 많았다.

이는 선생이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이들과 같은 영웅호걸이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912년 3월 북경·천진·상해·남경 등지를 순방하며 망명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했다. 동제사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단체다. 신규식의 주도로 선생과 신채호·조소앙 등이 조직했다.

선생은 동제사의 총재를 맡았다. 동제사는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상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선생은 원세개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썼다. 보훈처는 “이는 근대적 민주 공화주의를 수용하고 있던 선생이 중국 국민혁명을 외곽에서 지원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했다.

◇한국통사 저작···“혼이 보존되면 국가는 부활할 것”

이후 선생은 상해에서 ‘안의사중근전(安義士重根傳)’을 집필했다. 또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 간행했다.

선생은 한국통사 서문에서 집필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나라)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

선생에게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진력하면서도 우리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한 이유였다.

한국통사는 1864년 대원군 집정으로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뤘다. 구체적으로 일반 정치사와 일제 침략사,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기술했다.

특히 일제 침략사에 초점을 맞춰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대내적으로는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했다.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아픈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투쟁의 정신을 고취하려 했다.

◇ 독립운동 세력 통합한 임시정부 수립 제의···강우규 의사와 사이토 총독 처단 계획 실행

선생은 1915년 3월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했다. 또 상해에서 신규식과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해 중국 관내 및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를 추진했다.

선생은 1917년 7월 신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했다.

보훈처는 “3·1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담아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박은식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의 이러한 노력의 기반 위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온 겨레가 참여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지원했다. 65세의 노인동맹단원인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파견해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하세가와 총독의 후임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이후 선생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해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했다. 선생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임시정부의 통합을 도왔다.

또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하고, 임정사료편찬회를 주도하면서 독립운동사료의 편찬 작업을 했다.

◇“열 번 밟혀도 일어나면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작

특히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관련 자료를 모아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책으로 써서 간행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선생은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고발했다. 3·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 발전되어 온 민족 독립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의한 봉기임을 밝혔다.

또 선생은 역사의 대세와 국제 정세가 일제가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계기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선생은 “백번 꺾어도 회절(回折)하지 않고, 열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고 최후의 승리를 위한 독립투쟁을 끌어올렸다.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선출···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꾼 후 스스로 물러나

선생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와 이념의 대립, 주요 구성원 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파탄으로 임시정부가 무력화되자 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썼다.

당시 임시의정원도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제의 핵심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임시의정원은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 유고안’을 결의했다. 그리고 12월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 선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했다.

선생은 이를 수락하고 임시의정원과 협조해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추진했다. 당시 정상화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각종 폐단을 가져온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내각 책임제 정부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이 독립운동세력이 분열된 당시 상황에서 각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대통령 대리로서 이를 앞장서 수행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힘썼다.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후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선생은 곧 바로 국무령제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했다. 이것이 통과되자 선생은 그 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선생은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악화돼 1925년 11월 1일 66세에 상해에서 서거했다. 선생은 “우리가 귀중한 독립운동을 반드시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뤄야한다”고 뒷일을 부탁했다.

선생의 유해는 서거 68년만인 1993년 8월 신규식·노백린·안태국·김인전 선생 등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기자명김충남 
  • 입력 2019.10.25 11:55
  • 수정 2019.10.25 14:09
 
[김충남의 힐링고전]

우리 역사를 중국에 팔아먹은 사대사가(事大史家), 일본에 팔아먹은 식민사가(植民史家)가 있었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우리 역사를 지켜온 민족사가(民族史家)들이 계시다. 

조선시대에는 북애자(北崖子), 일제 강점기에는 백암 박은식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 그 대표적인 분들이라 하겠다. 

먼저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선생의 민족운동과 우리역사를 통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여러 자료 및 문헌을 참조하였음)

▴ 선생의 66년 삶, 이 나라 독립의 제단에 바친 삶이었다.
• 선생은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1859년 철종), 부친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修學)하였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해 안태춘(안중근 의사의 부친)과 함께 황해도의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 선생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문인들로부터 다산의 정치, 경제, 사회분야의 개혁론을 섭렵하여 개혁적 사고를 갖게 되었고 그 후에도 성리학자이지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여러 학문을 접하면서 현실적이고 근대적인 사고와 민족주의를 키워갔다. 
이 같은 사상은 선생께서 구한말시기에 민족계몽운동, 구국운동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음이라 하겠다. 

• 선생께서 근대 민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898년 독립협회가 전개한 만민 공동회 운동에서 문교 분야  간부급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부터이다. 

• 선생께서는 신민회를 비롯한 여러 민족운동단체에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오성학교, 서북협성학교의 교장을 맡아 본격적인 민족교육을 실천하였다. 

•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과 잡지에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하는 논설을 써서 전 국민이 애국사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 선생께서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1925. 3. 24) 노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통합화를 위해 노심초사하셨다. 
선생께서는 독립 쟁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단결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66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하셨다.(1925. 11. 1) 

그야말로 선생의 66년 삶은 민중계몽활동, 언론활동, 교육활동, 역사서 저술활동, 정치활동 등으로서 이 나라 독립의 제단에 바쳐진 숭고한 삶이라 하겠다.
(지면 관계상 선생의 눈부신 독립운동활약 상을 다 담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 선생의 역사서 저술활동, 그것이 독립운동이었다.
 선생에게 있어 한국사연구와 저술은 곧 독립운동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한 힘의 축척과정이었다 하겠다. 
그리하여 선생께서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독립운동전선에서 한 날 한시도 붓을 놓지 않고 역사서를 저술하셨다.

① 선생은 1919년 4월 만주에 있는 윤세복 동지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역사서 저술에 전념하였다.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사, 천개소문전(연개소문전) 등과 같은 민족영웅들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이는 우리 국민이 민족영웅들의 기상을 본받아서 독립 쟁취의 기상을 기르도록 함이었다. 
그리고 만주에 있는 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하게 하였다.

② 선생께서는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저술하여 중국인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1915) 
3편 113장으로 구성된 한국통사는 1864년 대원군 집정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다루었다. 
특히 일제침략 사에 초점을 맞추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규탄하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③ 선생께서 상해에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과 독립운동사료 편찬 작업을 수행하던 중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집필을 시작하였고 1년 후인 1920년 상해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무장 투쟁까지의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 책에서 선생은 일본제국주의 침략만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한편 3.1운동이 갑신정변이래 발전되어온 민족독립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봉기한 것임을 밝혔다. 

선생은 이 책에서‘백번 꺾어도 꺾이지 않고 열 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비관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이다.’라 하여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최후의 승리를 위한 독립투쟁을 고취 시켰다.

▴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원동력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나라를 멸할 수는 있으나 역사를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 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역사)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나라)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에서)

▴ 그렇다. 옷깃을 여미고, 선생의 숭고하신 독립의 삶을 기려 본다.


김충남 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강사.

필자 김충남 강사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堂)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 대전시민대학, 서구문화원 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古典의 향기"을 연재하고 있다. 

※ 대전 KBS 1TV 아침마당 "스타 강사 3인방"에 출연

 

 

출처; [신간] 백암 박은식 평전·신라왕조실록 | 연합뉴스 (yna.co.kr)

[신간] 백암 박은식 평전·신라왕조실록

송고시간2017-09-07 07:30 

 
백암 박은식 평전

▲ 백암 박은식 평전 국혼의 지사 = 김삼웅 지음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1859∼1925)의 평전.

구한말 미관말직의 유학자에서 자유민권사상가로 변신해 역사학자,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백암의 인생행로를 충실히 담았다.

민족사연구와 민중계몽을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선택한 백암은 40세에 언론계에 투신해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서 매국노를 질타하는 글을 썼다.

1910년 을사늑약 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일제의 침략과정을 폭로하는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다. '한국통사'가 국내로 반입돼 널리 읽히자 일제는 책을 수거해 소각하고 대신 어용 사학자들을 동원해 '조선반도사'를 펴내기도 했다.

백암은 1921년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을 거쳐 1925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짧은 임기를 마친 뒤 건강 악화로 6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백암의 사상은 '국혼'으로 집약된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국사를 혼(魂)과 백(魄)으로 구분하면서, 우리 겨레가 비록 백을 일제에 빼앗겼지만, 혼만 잃지 않는다면 결코 완전한 국망(國亡)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국혼은 종교, 학문, 언어, 문학, 역사를, 국백은 경제, 군사, 영토, 기술을 가리킨다.

또한 "신(神·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形·국가)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채륜. 318쪽. 1만9천원.

 

 

출처; 이승만과는 완전히 다른 이 사람, 박은식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11월 1일. 무슨 날일까? 안타깝게도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바로 백암 박은식 선생(아래 박은식)의 서거일이다. 올해로 91주기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의 저자로 대중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박은식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 혹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한국통사>의 저자'로 기억될 뿐이다.

실제로 박은식은 <한국통사> 하나로 국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거의 노년에 쓴 책이다. <한국통사>만을 기억한다면 이는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그렇다면 박은식은 무슨 일을 했을까? '유학자'부터 '임시정부 2대 대통령'까지. 그는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언론활동에 투신한 '유학자'

  박은식 선생(1859~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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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음력 9월 30일. 박은식은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신동으로 불렸을 만큼, 유학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이후 참봉으로 벼슬을 지내며 여러 행보를 보였다.

여기서 나는 의아스러운 부분을 찾았다. 당시 1894년,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동비(東匪)들의 반란'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갑오개혁에 대해서도 사설(邪說), 즉 그릇되고 간사한 말로 여겼다. 오히려 박은식은 조선시대에 어울릴 법한 유학자였던 셈이다.

이런 보수적인 유학자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개혁에 비판적이던 박은식도 격동하는 정세에 눈을 뜬 걸까? 청일전쟁·을미사변·아관파천 등의 위기를 겪은 후, 박은식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위정척사를 표방하던 그가 독립협회에 가입했을 만큼, 나라에 위기가 온 것이다.

독립협회 가입을 기점으로 그는 활발하게 언론활동도 병행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을 창간·보급에 힘을 쓴 것도 박은식이다.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주필이 돼 의병활동에 대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후일 박은식은 저서 <한국통사>에서 동학운동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동학당은 본래 정치사상과 혁명 성질이 포함되어 있어, 많은 것이 비적 무뢰배나 어리석고 무지한 무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처럼 난폭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잔인했던 종래의 계급관념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니 또한 개혁의 선구자라 말할 수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동학운동과 갑오개혁에 부정적이던 유학자가 이렇게나 변한 것이다.

역사책 집필과 독립운동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10만의 애국지사가 지키려고 했던 나라가, 10명도 안 되는 매국노에 의해 외세에게 넘어갔다. 나라가 없어지자 박은식은 중국으로 망명해 역사책을 집필했다.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등의 역사책이 세상에 나왔다. 가장 유명한 저서인 <한국통사>도 이 시기에 집필된 것이다.

수많은 저서 중에서 특히 <한국통사>가 유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평가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나 박은식을 단순히 '역사학자'로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를 역사학자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무렵 박은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노인동맹단은 강우규 의사를 파견해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투척 의거를 일으키기도 했다. 즉, 그는 '얌전한 샌님'이 아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해서 투쟁한 '노익장'인 셈이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큰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3·1운동으로 국외 곳곳에 임시정부가 수립했을 시기의 일이다.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한성 등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60세의 고령임에도 박은식은 임시정부 통합에 힘썼다. 그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임시정부는 통합에 성공했다. 즉 독립운동의 역량 집중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감탄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만 국한시킬 수가 없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바로 아래에 나와 있다.

위기의 임시정부를 수습한 '2대 대통령'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요원들의 단체사진.
ⓒ 국가보훈처 관련사진보기

통합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누구일까? 당시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박사' 이승만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석·박사 학위를 갖춘 명성보다 그의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결국 불성실한 활동과 분열을 야기한 '위임통치 청원'으로 탄핵당했다. 신채호가 이에 대해서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결국 이승만은 쫓겨났으나, 임시정부는 공중분해의 위기를 겪는다. 임시정부는 가망이 없으니 해체하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기도 했다. 이때 공중분해를 당할 임시정부를 수습한 것이 바로 박은식이다.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은 제일 먼저 개헌을 실시했다. 이승만이 고집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으로 내각책임제를 선택했다. 이후에 박은식은 뭘 했을까? 놀랍게도 스스로 대통령에서 사임했다. 국무령이 선출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것이다. 대통령에 연연해 임정에 고집을 피우던 이승만과 달리 말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에서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뭘 했을까? 제일 먼저 그가 미국에서 벌인 행동은 무엇일까? 재미교포들의 임시정부 후원을 바로 차단했다. 그리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가 벌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참으로 '졸렬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대통령을 사임한 1925년. 박은식은 이미 병색이 완연했다.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렵게 통합시킨 임시정부가, 해체의 위기를 맞이한 상황 속에서 그걸 수습하기에 분주했다. 그 때문에 병을 치료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향년 6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나는 이 점이 대단히 안타깝다. 나이든 몸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까지….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은식은 서거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의 병세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오.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어야 하오.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疎)의 별(別)이 없어야 하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 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 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겠소."

본인의 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조국독립을 염려하는 말이다. 정말로 사리사욕이 아닌, 조국독립을 위해 힘쓴 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참으로 애석한 점이 많다. 이렇듯 많은 행적을 보이고, 임시정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박은식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식의 인지도는 너무나도 낮은 게 현실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박은식을 '한국통사'의 저자로만 기억할 뿐이다. 서글픈 일이다. 이는 교과서에서 <한국통사>만을 다루고, 기타 활동은 다루지 않은 영향이 크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임정 2대 대통령'인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와는 다르게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려던 박은식을 누구도 '임정 2대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올해로 벌써 서거 91주기다. '민족반역자'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그런 민족반역자들을 옹호하는 자가 대통령까지 하는 현실이다. 현재의 이런 모습은 타국에서 눈을 감은 박은식 선생에게 떳떳할 수가 있을까? <한국통사>로만 국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영웅, 박은식.

그런 영웅에게 떳떳할 수가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 모두 '떳떳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돼야 하지 않을까.

 

 

 

출처; 박은식 '양명학실기' 100년만에 완역 (naver.com)

박은식 '양명학실기' 100년만에 완역

입력2010.12.06. 오후 3:47 

 
수정2010.12.06. 오후 3:48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 겸 언론인이었던 백암 박은식(1859∼1925)의 한문 저서 '양명학실기(陽明學實記)'가 초판 출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양명학실기는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1472∼1528)의 일대기와 사상을 저자의 생각과 함께 소개한 책으로, 1910년 발표됐다가 조선총독부에서 판매금지되기도 했다.

당시 육당 최남선이 양명학실기를 잡지 '소년'에 실었으나 총독부는 양명학의 지행합일 정신이 조선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불온서적이라며 판금 조치를 내리고 '소년'도 폐간했다.

이런 가치를 지닌 책이지만 그동안 온전한 번역이 없었다. 한국철학사에서 양명학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리 높지 않은 점도 한몫했다.

이 책을 완역한 이종란씨는 한국철학을 전공한 중견학자로, '주희의 철학' '왕부지 대학을 논하다' 등을 번역하고 '최한기의 철학과 사상' '이야기 속의 논리와 철학' 등을 저술했다.

백암이 저술에 참고한 양명의 일본판 '연보', 명말청초의 '명유학안' '덕육감', 다카세 다케지로의 '왕양명상전'을 구해 일일이 대조하는 등 작업을 거쳐 번역을 마음 먹은 지 10여 년 만에 책을 완성했다.

양명학실기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를 개혁하자는 최초의 주장이 실렸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자학 일변도의 풍토에서 유교를 양명학으로 개혁하자는 시도가 쉽지 않았지만 박은식은 주자학이 국권을 회복할 동력을 상실했다는 생각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한국판 종교개혁운동'인 셈이었다.

이 책은 편년체(編年體) 형식으로 왕양명, 즉, 왕수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각종 일화와 어록, 시를 망라했고 중간중간 저자의 의견과 소감도 덧붙였다.

목차가 따로 없고 왕양명의 가계와 유년 시절, 혼인과 청년기 학문편력, 고난과 진리의 깨달음, 가르침의 시작, 도적 토벌, 반란 진압, 서거 등의 내용을 차례로 기술했다.

책에는 왕양명이 석서라는 귀주 지방의 교육관리의 물음에 답하면서 양명학의 핵심 사상인 지행합일설을 설명하는 장면도 나온다.

"앎과 행동이 본래 하나인데 도리어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효도와 공경을 안다고 말한다면, 이미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 형을 공경했어야만 그가 효도와 공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의 앎을 말하면 이미 하나의 행동이 있고, 하나의 행동을 말하면 하나의 앎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중략)"

여기에 백암은 "세상에는 단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만 있지 완전히 무지한 사람은 결코 없다. 그러나 오직 행하지 않으므로 앎이 되지 못할 뿐이다"라는 자신의 견해를 붙였다.

백암은 이 책에서 철학자이자 교육가, 군사지휘관, 문학가인 왕수인의 소설 같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진리가 어떻게 발견되고 실천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내용을 보면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왕수인과 양명학을 대중에게 소개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기 쉽게 접하기 어려운 왕양명의 생애와 사상, 한국철학사에서 박은식의 주자학 비판과 양명학에 대한 그의 독특한 견해가 갖는 의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라는 의미도 있다.

특히 이번에 나온 번역서는 본문 밑에 1천80개 주(注)를 붙여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고 전공자들을 위해 백암이 저술에 참고한 책의 내용과 원문을 비교해 역주에 표기하고 책 말미에 한문으로 발표한 원저도 정서체(인쇄체)로 고쳐 수록했다.

그러나 1910년 당시, 시대의 절박성을 감안한다면 이미 유교적 토대가 상실된 상황에서 유교를 양명학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나라를 구하는 게 가능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464쪽. 2만5천원.

kong@yna.co.kr

 

 

 

출처; 주체적 역사관으로 민족혼 되살린 백암 박은식 선생 < 보훈 < 사회 < 기사본문 - 천지일보 (newscj.com)

주체적 역사관으로 민족혼 되살린 백암 박은식 선생

  • 보훈
  • 입력 2010.04.08 20:21
기자명유영선 기자 sun@newscj.com
▲ 백암 박은식 선생(사진제공: 독립기념관)

 

[뉴스천지=유영선 기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으나 그 역사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고 했다. 나라가 겉모양이라면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모양은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정신은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역사를 쓴다.”

19세기 말 일제의 국권찬탈로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했을 때 국가의 운명을 놓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미래를 고심한 백암 박은식 선생.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그는 10세 이후 서당 훈장인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1885년 향시에 합격해 1888년 능참봉에 오르는 등 1894년까지 벼슬을 지냈다.

박 선생은 대원군의 집정시대에 유년기를, 문호개방기에 소년기를, 20대의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신문명 수용의 개화풍경과 일ㆍ청ㆍ러 등 제국주의의 침입을 경험했다.

그 후 30대에 들어서는 대원군과 명성황후, 수구당과 개화당 등의 파벌항쟁, 자주성이 결여된 근대 외교와 문명 수용으로 인한 국가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나라를 구하는 길은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세계에 맞설 근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판단, 민족교육과 애국계몽에 앞장섰다.

1989년에는 ‘황성신문’이 창간되자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이 됐고, 1905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도 활동했다.

이같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선 그는 1908년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한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되자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사회ㆍ정치활동 등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국권을 잃자 국내에서 더 이상 정치ㆍ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최남선과 함께 광문회의 위촉으로 저술에 힘쓰기도 했다.

1911년 5월에는 서간도로 망명한 후 고구려의 옛 터를 답사해 고대사와 고구려 위인전의 저술에 힘썼다.

▲ 백암 박은식 선생의 서거를 보도한 중화보 기사(1925.11.4>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그 후, 상해로 가 신규식과 더불어 항일 비밀결사인 동제사와 한중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여 총재로 추대되기도 했다.

한편, 박 선생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저술이다.

박 선생은 ‘한국통사’에서 “일제에 나라를 뺏긴 한국, 그 망국사를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발해가 그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과 영토까지 잃어버린 쓰라린 그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국혼(國魂)을 간직하고 광복을 확신하기 위해 이 통사를 쓴다”고 밝혔다.

박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의 저서를 통해 강조했다.

1915년 ‘한국통사’를 저술한 그는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1884년 갑신정변 이래 항일운동의 모든 사실을 모아 3ㆍ1운동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사를 기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또한 당시 상해임지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에 임명돼 민족언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1925년 3월엔 의정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취임한 그는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1925년 11월 1일 67세의 나이로 그가 확신하던 광복을 맞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독신으로 평생 조국광복에 헌신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백암 박은식 선생이 저술한 한국통사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출처; 항일언론인 박은식-양기탁 전집 출판기념회 6일 열려 (naver.com)

항일언론인 박은식-양기탁 전집 출판기념회 6일 열려

입력2002.09.06. 오후 10:27
 
 
독립운동가로 항일언론투쟁을 주도했던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1859∼1925), 우강 양기탁(雩崗 梁起鐸·1871∼1938) 선생의 전집 출판기념회가 6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실에서 열렸다.

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윤병석·尹炳奭·인하대 명예교수)는 새로 발굴된 자료를 포함해 ‘백암 박은식 전집’(전 6권)과 ‘우강 양기탁 전집’(전 4권)을 동방미디어에서 출간했다.

백암 전집에는 한국 근대사학을 성립시킨 기념비적 저술로 꼽히는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외에도 국내와 중국에서 최근 찾아 낸 ‘발해태조건국지’ ‘이순신전’ ‘단조사고(檀祖事攷)’ 등 7종의 저작이 수록됐다. 또 우강 전집에는 서신을 비롯한 20여편의 글과 우강 선생이 관련된 항일투쟁 재판기록 등이 담겨있다.

출판기념회에는 현승종(玄勝鍾) 전 국무총리, 장철(張鐵) 광복회장, 조동일(趙東一) 국민대 명예교수, 신용하(愼鏞廈) 서울대 교수, 김호일(金鎬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출판기념회에 앞서 오후 1시부터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엄 ‘박은식과 양기탁의 독립운동 조명’이 개최됐다. 이문원(李文遠) 독립기념관장은 심포지엄 개회사에서 “백암 우강 선생의 전집 발간은 학계의 숙원사업을 이룬 의미 있는 작업이며 민족운동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출처; 박은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박은식(朴殷植, 1859년 10월 25일 ~ 1925년 11월 1일)은 일제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이다. 그는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1] 자(字)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다. 밀양 박씨이다.

생애[편집]

박은식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

임기 1925년
전임 이승만
후임 이상룡
총리 노백린 (1925)
출생일 1859년 9월 30일
출생지 대한제국 조선 황해도 황주군 남면
사망일 1925년 11월 1일
사망지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사망 원인 인후염
직업 독립운동가 · 학자 · 언론인
부모 박용호(父), 노씨(母)
종교 대종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대 수반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몰락했던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으고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7살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한 뒤 1875년 황해도에서 널리 이름나 있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서로 사귀면서 여러 의견들을 자주 나누는 등의 교류를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히 자질이 뛰어났다.

소년기[편집]

1877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1879년 연안 차씨(延安車氏)와 혼인, 분가하여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남인계 정약용 학파의 계승자였던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에게 학문을 수학하였다. 1885년 관서(關西)의 대학자였던 화서학파 운암 박문일(朴文一, 1822~1894)과 성암 박문오(朴文吾) 형제에게서 정주학(程朱學)을 수학하였다. 1년 후 1886년 그는 향시에 참가해서 특선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6년 동안 박은식은 줄곧 숭인전 능참봉이란 벼슬을 맡아 생활하였다.

1892년 민병석(閔丙奭)의 천거로 동명왕릉참봉(東明王陵參奉)으로 전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동비(東匪)들의 반란으로 규정하였다. 그해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그는 갑오개혁은 사설(邪說)이라며 조정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였다.

경술국치 이전[편집]

독립협회 활동[편집]

박은식은 40세가 가까워오던 무렵부터 여태까지 공부했던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의 본질에 의심을 품고 신학문·신지식을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에 절감하여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황성신문[편집]

1898년 9월 민족지사 장지연·남궁억·나수연·유근(柳瑾)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새로이 《황성신문》으로 제목을 바꾸고 창간 보급하였으며, 박은식은 장지연과 같이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2]

대한매일신보[편집]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1904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그는 대한매일신보에도 주필이 되어 사설을 썼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편집인이자 발행인인 한·영 종합일간지였으며, 고종 황제와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의병투쟁을 사실 그대로 보도한 정론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양기탁의 주선으로 박은식이 주필로 활동하였다. 당시 다른 언론들은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았지만, 《대한매일신보》만은 발행인인 배설의 국적이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친교하던 영국이어서 언론의 자유를 다른 신문들보다는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제가 신문법을 고쳐 대한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던, 외국에서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던 모두 압수와 판매 금지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배설과 양기탁을 구속하였고, 특히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서 탄압하였다. 결국 1910년 항일언론인인 배설이 물러나고, 영국인 비서였던 앨프리드 W. 마넘(萬咸(만함), Alfred W. Marnham)이 통감부에 신문을 팔아 넘기고 말았다.

서우학회[편집]

박은식은 1906년 신석하김달하김병도등과 함께 서우학회를 결성하여 기관지 《서우》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서우는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냈으며,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발행하였는데 박은식은 집필, 편집, 지도를 모두 맡았다. 1908년에는 서우학회를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창설하고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를 창간하였다.

황성신문 주필[편집]

1905년에는 황성신문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1906년 2월 황성신문이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사장으로 복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191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황성신문에서 주필로 있었다. 당시 박은식은 일제의 검열을 피해서 '연무제진'(聯武濟進,무장운동과 연관하여 나란히 전진하다.)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애국계몽활동이 의병의 무장항쟁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언론인 박은식은 옳지 못한 것을 매섭게 꾸짖고,사리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글을 써서, 청나라의 언론인이자 사상가인 캉유웨이가 "법필(法筆)이 사공(사마천)의 정수를 득(得)하였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비위를 거슬려서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나는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언론의 영향력[편집]

그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언론 활동을 한 것은 《독립신문》의 영향이었다.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국민을 관리와 군주보다 우위에 둚으로써 민주주의를 전파하였다. 이를 본 박은식은 언론이 계몽활동에 매우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을 때까지 언론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3]

1907년 비밀결사회인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는 그 곳에 가입하여 교육·출판 부문에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독립 운동[편집]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편집]

박은식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그 이듬해인 1911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환인현 흥도천에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1년간 머무르면서 ≪대동고대사론≫·≪동명성왕실기≫·≪명림답부전≫·≪연개소문전≫·≪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를 집필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 각지의 이름난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상해로 와서 1914년 망명 이후 줄곧 써오던 ≪한국통사≫의 집필을 완성하고 이듬해인 1915년에 간행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4]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러면서도 일제에 대한 독립 운동도 중시하여 의병 활동은 정신 역사적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박은식이 쓴 ≪한국통사≫는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교포 사이들에서 널리 읽혀졌고, 1917년 미국 하와이에서도 출판되어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박은식은 3·1운동을 경험하고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노력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1919년 10월 15일 그는 국민교육의 연구장려 및 유학생파견, 지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서 조직하였으며,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2]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과 죽음[편집]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파벌 싸움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마땅한 사람이 없자,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7월 오히려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뒤,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또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회를 폐지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최후[편집]

그는 한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독립을 보고 광복사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인후염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20년만 더 버텼더라면 광복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는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全族)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둘째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셋째 동지간의 애증친소(愛憎親疎)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5]

사후[편집]

  • 1925년 11월 4일 그의 국가, 민족에 끼친 공훈을 추도하여 임시정부 최초로 국장을 거행하여,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장되었다.
  • 중국 《중화보》,《상해화보》등의 언론사들도 박은식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특집기사를 작성하였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2]
  • 그의 유해는 1993년초 김영삼 정부의 임정 요인 유해 봉환사업에 따라 사후 68년 만인 1993년 8월 5일 서울로 운구 및 송환되어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 최종적으로 안장되었다.

저서[편집]

저술[편집]

  • 박은식은 1911년 만주에서 1년간 6권의 책을 저술하였고,[6]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7]
  • 1912년에도 상하이에서 여러 책을 저술하였다.

번역서[편집]

  • 《발해사》
  • 《금사》

가족 관계[편집]

박은식은 연안차씨와 결혼하였고 아들 두명에 딸 세명을 낳았다 위로 사남매는 일찍 죽었고 막내인 박영애만 성장하였다. 박영애는 윤철선과 결혼했다

  • 부인 : 연안 차씨
  • 딸 : 박영애 (1894 ~ 1986)
  • 양자 : 박시창 (朴始昌) 1903년 11월 5일 ~ 1986년 6월 7일 대한민국 육군 2성 장군으로 예편하였으며 그도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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