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한국사학사 본문
목차
개요
한국사학사는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시대구분이 아직 정설화되지 않았으므로 여러 견해가 있지만, 역사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고대사학은 역사서가 정식으로 편찬된 삼국 초기로부터 10세기초 신라의 멸망까지, 중세사학은 고려왕조와 16세기말의 조선왕조 중엽까지, 근대사학은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현대사학은 1945년 민족해방 이후의 역사학으로 구분한다.
고대사학
우리나라에서 역사학의 시작은 한자(漢字)가 전래되어 역사를 기록한 때부터이다.
한자는 BC 2세기말 한군현을 통해 전래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기록했다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 건국 이후이다. 고구려에는 국초로부터 영양왕 때까지 기록한 〈유기 留記〉 10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체재로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 백제에는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편찬한 〈서기 書記〉가 있었으며, 신라에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편찬한 〈국사〉가 있었다. 대개 역사편찬은 왕이 주관했다.
따라서 그 편찬목적은 왕실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조 신화를 알리고, 왕들의 정복전쟁에서의 승리, 정치적 업적 등을 밝히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사학의 특징은 자존의식이 충만하며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보다는 설화적 내용이나 영웅 중심적인 것들이 많다.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편찬은 개인이 역사편찬을 주도했던 중국과는 달리 관찬 중심이었으나, 삼국통일 후에는 김대문·최치원 등의 개인편찬물도 있었다.
중세사학
신라의 골품제 사회가 호족들의 내란으로 10세기초 붕괴되고 이를 계승한 고려왕조에서는 새로 사회를 개편·운영하는 데 유교정치이념을 활용했다.
따라서 고려초부터 사관(史館)을 설치하여 매일매일의 사건을 기록해서 왕이 죽은 후 그 기록을 모아 각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10세기 중엽 고려초에 편찬된 〈삼국사〉는 기전체로 편찬된 최초의 역사서였으나 현존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그 일부분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11세기 숙종·예종·인종대에 이르러 새로운 불교와 유교사상이 중국으로부터 폭넓게 수용됨으로써 전통사상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사상의 국제화가 급진전되었다. 이러한 시대 조류 속에서 김부식(1075~1151)은 문하시중을 은퇴한 후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1145년(인종 23) 그가 이 책을 왕에게 바칠 때, 먼저 당시 우리나라 학자와 관리들이 중국사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을 깨우치기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책은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았고 내용이 소략하여 교훈을 주기에 적절하지 않으므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 편찬했다고 하는 2가지 목적을 내세웠다.
내용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보완되었으나 당시 국내 자료의 수집이 미흡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국가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유교적 도덕사관에 입각하여 국제적 관점에서 비판·서술함으로써 중세사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어 13세기말 일연(1206~1289)은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당시는 무인 집권기로서, 몽골의 침입을 받았고 그들의 정치적 간섭으로 민족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민족적 저항의식이 나타나 〈삼국사기〉에서 기술하지 않은 고조선과 그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고 우리나라의 개국시기가 중국과 같았다고 썼다.
일연은 50여 년에 걸쳐 고문서·금석문 등의 사료를 수집하여 역사자료의 면에서 삼국사기를 크게 보완했다. 먼저 설화자료를 실음으로써 다양하고 풍부한 민속·문화에 대한 많고 상세한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일연의 역사관은 불교적 신앙을 통하여 초능력적인 신비력이 인간의 역사에 작용함을 강조한 한계가 있었다. 거의 같은 무렵 이승휴(1224~1300)도 우리나라의 강역이 중국과 구별됨과 우리나라가 중국과 대등하게 역사를 초기부터 발전시켜왔음을 시로 읊은 〈제왕운기〉를 편찬했다.
14세기말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 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주도의 역사편찬이 활발해졌다.
먼저 고려왕조사를 정리하기 위해 정도전(1337~1398) 등이 〈고려국사〉를 편찬했고, 1451년에 김종서(1390~1453) 등이 기전체로 139권의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다음해에는 편년체로 35권의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여기에는 고려왕조의 실록에 의거한 객관적 입장이 반영되었으나 지배층 중심의 유교적 역사관이 작용했고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관점도 강하게 나타났다. 1458년 세조는 〈동국통감〉을 편찬하도록 명했으나, 당대에 완성되지 못하고 1476년(성종 7) 14권의 〈삼국사절요〉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 단군조선으로부터 신라 멸망까지의 역사가 편년체로 정리되었다.
〈삼국사절요〉는 뒤에 편찬된 〈동국통감〉의 기초 자료가 되어 1485년에 〈동국통감〉이 56권으로 완성되었는데,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가 편년체로 총정리되었다. 이 책에는 이전 역사가들의 모든 사론을 거의 다 수록하고 그 위에 찬자들의 많은 사론을 붙였는데, 강상과 사대윤리, 절의를 지킨 자에 대한 칭찬, 반역자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16세기에는 〈동국통감〉을 줄인 사략형의 역사서가 학자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희령(1480~1552)의 〈표제음주동국사략 標題音注東國史略〉이다.
이 책의 특징은 지금까지의 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역사를 기술하던 전통을 깨고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역사를 기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서라는 점이다. 중세사학은 문헌기록을 중시하고 역사를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여 후대에 유교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에서 서술되었고 도덕적 평가를 중시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역사를 지배층 중심으로 파악하고 국제간의 전쟁을 배격하며 평화적 외교를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은 약했으나 국제적 관점이 중시된 점 등의 특징이 있다.
근대사학
한백겸(1552~1615)은 〈동국지리지〉에서 도덕적 교훈을 주려던 이전의 역사학에서 벗어나 영역, 옛 지명, 관방 등을 고증했다.
이후 이런 학문의 경향은 유형원·남구만·이세구·신경준·안정복·정약용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러한 실증적인 입장을 역사지리학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영역으로 확대시킨 사람은 안정복(1712~1791)이었다. 그가 쓴 〈동사강목〉에는 중세사학의 성격과 근대사학의 성격이 함께 나타나는데 주자의 성리학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유교적 교훈을 주려고 한 점은 중세적 성향이었고, 많은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방법론과 과거역사를 현실의 관점에서 살핀 것은 근대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역사지리학자들은 고구려 강역이 만주에 걸쳤다는 사실을 재발견하고 발해사가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재인식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우리나라는 중세적 모순이 극에 달하여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이어 서양 제국주의 열강에게 개항함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으로는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했다.
이에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한문이 혼용되기 시작하여 한문으로 기술되던 역사학이 국한문체로 서술되었으며, 또한 자료를 인용하여 편찬하던 중세사학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역사가 자신의 글로 서술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이에 대항하여 민족의 혼과 독립심을 고취하기 위한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는 박은식(1859~1924)과 신채호(1880~1936)였다. 박은식은 그당시의 역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침략과정을 낱낱이 밝히고, 3·1운동까지의 독립운동 역사를 상세히 서술했다.
신채호는 역사를 각 민족의 투쟁사로 파악하고 고대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중세사학을 정면 비판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고양시켰다. 특히 신채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 중심으로 보던 초기 견해에서 3·1운동 이후 민중 중심으로 전환했다. 이후 그의 역사관은 문일평·손진태 등에 의해 수정·발전되었다. 한편 민족주의 사학은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대항이었고 한편으로는 민족독립을 위한 사상적 투쟁이었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의 전역사를 통해 한국인에게는 문화적 독창성이 결여되어 사회가 정체되어왔다는 정체성론과 한국은 반도이기 때문에 항상 외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한 반발로 백남운은 한국사도 세계사의 보편적 과정을 밟아 발전해왔음을 주장했다. 그는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고대로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했다.
또한 이병도는 민족의식은 약했으나 역사고증을 내세워 실증사학의 선두에 서서 근대 초기의 역사지리학을 새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근대사학의 특징은 지배층 중심의 정치사로부터 민족 중심의 역사를 파악하는 민족주의적 역사로의 전환,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역사관으로부터 역사를 독립학문으로 객관화한 것, 자료의 편찬에 그치던 것에서 역사가가 국문으로 서술하게 된 것 등이다.
현대사학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좌우익의 사상적·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고 남북이 분단되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식민사학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민족주의 사학을 정신적으로 계승하고 민족사의 발전을 밝히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사회과학 이론이 들어와 역사의 발전을 과학적으로 밝히려는 노력이 행해졌으며, 사회사·경제사·고고학·과학사·사상사 분야에서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각 대학에 사학과가 설치되어 학문적 기반이 크게 확대되었고 역사학회·한국사연구회 등 20여 개의 전문학회가 조직되어 1,000여 명의 학자들이 새로운 연구업적을 내놓아 한국사 연구는 양적·질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북한에서는 초기에 마르크스·레닌의 유물사관에 의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점차로 민족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 민중의 생활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사학은 학문연구에서 다소간의 경직성을 가지고 있고,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현대사를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 남한에서는 소장 학자들에 의하여 민중적 역사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일반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대학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고, 역사를 아직도 지배층 중심으로 파악하는 방식과 제도사를 중시한 역사관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현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므로 앞으로 이런 연구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민중의 역사, 생활 중심의 역사, 과학적인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하여는 기존자료를 새로이 해석하려는 역사관의 변화와 아울러 새로운 자료, 예컨대 유물적 생활자료, 설화적 자료, 금석문이나 고문서의 수집·연구가 필요하다.
현대 한국사학의 과제는 과거의 역사를 전국민의 역사로 체계화해야 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한국사 연구는 기존 역사관으로부터 전환하여 사료를 재해석하고, 인근 국가의 역사, 더 나아가 세계사와 비교하여 민족사를 통해 세계사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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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학 사)한배달 이사장, 문학(역사) 박사
유사사학 구분 기준을 바로 세워라! - 한국NGO신문 (ngonews.kr)기사입력 2017.06.28 15:01기자명박정학
▲ 박정학 사)한배달 이사장, 문학(역사) 박사 |
요즘 언론에서는 ‘유사사학’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정확하게 어떤 사학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매국사학계에서 미워하는 것을 보니 참 좋은 학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정잡배들 입에서라면 이런 소리 저런 소리 아무런 소리가 나와도 무방하겠지만, 학문을 하는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함부로 나와서는 안 되는데 왜 이런 지경까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작년 봄 역사비평이라는 책에서 소개한 매국사학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젊은 사학도 몇 명이 모여서 자기 스승들을 욕하는 바른 역사학자들을 비난하면서 아무런 기준 제시도 없이 그냥 비하하는 용어로 만들어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작년 말에는 연세대학교 하일식 교수가 이 용어를 사용하더니 최근 대학 교수들의 모임인 고대사학회가 도종환 문제부장관 후보 인사청문회와 관련하여 발표한 성명서에서 조차 이 용어를 쓰고 있으니 문제다.
▲ 발표중인 하일식 교수 |
하일식 교수의 비학문적인 ‘황당한’ 구분 기준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민족을 강조하고 웅대한 국가를 외치지만 전시에 군대를 지휘할 권한이 이국에게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든가, 최저임금 미달자가 늘어나고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등의 민주주의, 평등, 인권 복지 문제 등을 거론하지 않는 점과 태극기 집회, 환단고기 등과도 연결시키고, 1990년 다물민족주의 사례 등 권력과 연결된 조짐까지 거론하면서 그것이 유사사학의 책임인 듯이 비난하였다. 나에게는 오히려 지금까지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임을 인정하는 논리로 들려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고대사에 관한 터무니없는 주장’, ‘황당한 역사’, ‘민족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한 영광스런 역사 강조’, ‘영광스런 고대사’, ‘만들어진 고대사’, ‘부풀려진 고대사’ 등의 비학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비난하면서 이런 ‘불합리한 주장’을 확산시키고 있는 대표적 단체인 대종교 계통의 사)국학연구소, 증산도 계통의 사)대한사랑과 상생방송, 사)국학원 등이 ‘만들어진 고대사’를 꾸준히 알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2013년 6월 국회에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2015년 말까지 운영하면서 그런 유사역사 내용이 언론에 대대적 보도되어 ‘공적인 지위 확보’하게 했으며, 일반시민들이 강단학계를 불신할 여지를 조성했다고 연결시켜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유사역사 주창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적인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까지를 권력과 연결 조짐으로 분석했다.
문제는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학문적인 토론회장에 나오라는 데 대해서는 거부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비학문적이고 부풀려진 것이라는 구체적인 사실은 지적하지 않으면서 원색적 용어로 비난하는 것은 잘못으로 보인다. 심지어 “학계의 학술행사장이나 시민강좌 때 연구자를 향해 고성을 지르고 행패를 부리는 모습도 종종 나타났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다.”고 하여 비학문적인 민중들과 국가에서 인정하는 박사학위를 비롯한 학문적인 저변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자신들의 학문을 비판하는 민족사학자들을 구분하지도 않고 뭉뚱그려 ‘유사사학자’로 몰아 비판하는 데 있다. 학문적 논리로는 당할 수 없으니 자기들이 비난하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논리를 자신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토론중인 김종서 |
김종서 박사가 내세운 정통ㆍ유사사학 구분 기준
지난 3월 동북아역사재단 주최의 학술토론회에서 김종서 박사는 정통사학과 유사사학의 구분을 제시하면서 그런 기준에 의하면 현 강단 학자들이 유사사학자들임을 구체적인 근거를 대면서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진짜 역사학(정통역사학)’은 역사적 사건의 발생ㆍ진행 당시를 살던 사관ㆍ학자 등이나 그 사건의 발생ㆍ진행 과정을 알 수 있던 시대를 살던 사관ㆍ학자 등이 남긴 기록과 그 사건의 발생ㆍ진행 당시의 유물ㆍ유적에 대한 객관적ㆍ논리적ㆍ실증적ㆍ과학적 고증으로 역사적 사실과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하며, 반면 ‘가짜 역사학(혹은 사이비 역사학, 유사역사학)’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기록과 유물을 배척하거나 왜곡하는 대신 후세에 조작되거나 위조된 기록과 위조된 유물ㆍ유적을 증거로 채택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 역사의 진실을 말살, 왜곡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학문하는 방법으로써 구분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학문의 길을 배우고 있는 사학도들로서는 학문적 바탕이 부족하니 그럴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들의 입을 통해 ‘유사사학’이라고 하는 비논리적이고 비학문적인 얘기를 듣는 것은 우리 학계의 수준을 가늠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유사사학 말하려면 최소한의 학문적 구분 기준 있어야!
나도 대학교에서 학생들의 논문을 평가하였고, 지금도 종종 몇 개 학회로부터 논문 심사를 위촉받는다. 논문을 심사하는 데는 기준이 있다. 학회마다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최소한의 학문성을 검증하기 위한 기본조건을 만든 것이다. 그런 논문심사규정은 연구주제의 독창성과 명확성ㆍ적정성, 학술적 가치 및 완성도(논문의 질적 수준) 등 논문의 내용평가와 함께 논지의 일관성 및 표현의 적절성, 참고문헌과 각주의 서지정보에 대한 정확성과 완전성, 활용빈도 및 인용의 적절성, 학술지 투고 규정 준수 여부 및 논문초록의 질적 수준 등 형식적인 문제까지를 심사하게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학계에서 학문성을 판단하는 기준인 셈이다. 그러니 학자가 학자를 비판하려면 최소한 이런 기준에 비추어 ‘누구의 어떤 논문이나 주장이 학문적인 최소한의 기준에도 미달하므로 유사역사학’이라고 평가를 해야 한다.
내 기억으로는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국사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 국사찾기협의회 측의 주장에 대해 이기백이, 윤내현 교수의 주장에 대해 김철준이 ‘영토가 크면 다 좋은 줄 아느냐?’는 지적은 했으나 그것을 가지고 ‘유사사학’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 후 교과서에서는 민족사학자들의 주장대로 ‘단군신화’라는 말이 없어지고, 한반도 북부에 그려져 있던 한사군 지도가 사라졌으며, 고조선의 경계가 요하로부터 난하까지로 넓어졌다. 나는 이것이 하일식 교수의 주장과 같은 권력과의 연결 때문이 아니라 윤내현 교수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역사를 내세운다고 유사사학이 아니라 학문 방법론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학계라는 데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학자의 한 사람인 이병도의 책을 읽으면서 ‘과연 지금 학생들이 이런 수준의 논문을 쓰면 그의 책을 인용해서 학위를 받은 교수들이 학점이나 학위를 줄 것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고려시대에 붙여진 수안이라는 이름이 고조선 때 수성과 이름이 비슷하다고 같은 곳으로 비정’한 데서 유사사학의 태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종서 박사
동북아역사재단 상고사토론회
“강단 주류 고대사학자들이 ‘사이비역사학자’다!” - 한국NGO신문 (ngonews.kr)기사입력 2017.04.05 16:10기자명민족NGO 면 편집장
김 박사는 지난 3월 22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상고사토론회에서 이후석 박사의 발표에 대한 토론자로 나서서 토론에 앞서 이런 내용을 발표하여 참석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토론문은 38쪽에 달하므로 그 중 도입부인 ‘한국고대사 주류학계가 일으킨 사이비역사학 전쟁’만은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것 같아 소개한다.
▲ 전체 토론 장면 |
제자들 내세워 기준 없는 ‘사이비역사학’ 용어 제작
김종서 박사는 『역사비평』 2016년 봄ㆍ여름ㆍ겨울호에 ‘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연속기획시리즈를 게재하면서 강단사학계의 사주를 받은 것 같이 보이는 9명의 젊은 사학도들이 쓴 글을 게재했으며, 여기서 ‘사이비 역사학(자)’ ‘유사역사학(자)’라는 비학문적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책으로까지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작년 가을 한국상고사학회가 주관한 ‘고고학ㆍ역사학협의회’ 제1차 학술대회에서도 이런 비판이 중심이었다며 근황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신시 부정설’, ‘단군 부정설’,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 부정설’, ‘고조선 재한반도설’, ‘한사군 재한반도설’, ‘백제의 중국지배 부정설’, ‘고구려ㆍ신라ㆍ백제 초기 역사 부정설’, ‘여진(숙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발해ㆍ여진) 한국사 배제설’ 등인데, 여기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역사학을 ‘사이비 역사학’으로 비판할 뿐, 어떻게 역사 연구를 하는 것이 정통역사학이고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연구를 하는 것이 사이비역사학이고 그들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학문적으로 제대로 비판하려면 ‘누구의 어떤 주장이 어떤 점에서 학문적이 아니다’라고 근거와 기준을 가지고 지적해야 하는데, 그들은 1980년대에 이기백이 그랬듯이 ‘영토가 크면 좋은 줄 안다’거나 ‘『환단고기』류의 믿을 수 없는 책을 신봉한다’는 등 순수재야학자들과 학문적 연구를 한 민족사학자를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사이비사학자 또는 유사사학자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 토론 중인 김종서 박사 |
바른 구분기준으로 보면 강단사학이 ‘사이비사학’
김 박사는 꼭 사이비역사학과 진짜 역사학(정통역사학)을 구분하여야 한다면 그 기준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진짜 역사학(정통역사학)’은 역사적 사건의 발생ㆍ진행 당시를 살던 사관ㆍ학자 등이나 그 사건의 발생ㆍ진행 과정을 알 수 있던 시대를 살던 사관ㆍ학자 등이 남긴 기록과 그 사건의 발생ㆍ진행 당시의 유물ㆍ유적에 대한 객관적ㆍ논리적ㆍ실증적ㆍ과학적 고증으로 역사적 사실과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학문이어야 한다.
반면, ‘가짜 역사학(혹은 사이비 역사학, 유사역사학)’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기록과 유물을 배척하거나 왜곡하는 대신 후세에 조작되거나 위조된 기록과 위조된 유물ㆍ유적을 증거로 채택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 역사의 진실을 말살, 왜곡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우리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일제의 식민지사학과 광복 후 지금까지 한국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식민사학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거나 이를 추종하는 강단 주류 고대역사학이야말로 反역사적, 反실증적, 反논리적, 反객관적, 反민족적인 사이비역사학으로서 그런 학자들이야 말로 가짜[유사, 사이비] 역사학자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적반하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김 박사는 고조선이 실존할 당시를 살던 관중, 사마천 등과 같은 중국의 학자ㆍ사관 들이 남긴 『관자』, 『산해경』, 『사기』, 『전국책』, 『여씨춘추』, 『설원』, 『회남자』, 『한서』 등의 기록을 근거로 고조선의 위치가 발해 북쪽 요하 서쪽에 있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한사군이 실존할 당시를 살던 중국의 학자ㆍ사관 등이 남긴 『한서』, 『후한서』, 『무릉서』, 『설문해자』, 『수경』, 『삼국지』, 『진서』 등 기록들을 근거로 한사군이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 요하 서쪽 사이에 있었음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사이비사학자들이 말하듯이 ‘근거 없이 땅이 크면 좋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의미다.
조선총독부 추종 강단 사이비사학자들 퇴출시켜야!
이어서 김 박사는 부여ㆍ고구려ㆍ백제가 실존할 당시를 살던 중국의 학자ㆍ사관 등이 남긴 기록인 『후한서』, 『삼국지』, 『송서』, 『남제서』, 『양서』 등을 연구 분석하여 여진족은 부여ㆍ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혈통적으로 여진족 피의 90% 이상이 고구려ㆍ백제인 것이라는 것도 밝혀냈으며, 고구려가 서기 49년에 중국 영토 수천 리를 정벌했을 만큼 건국 초부터 강대국이었고, 백제는 약 200년간 북경ㆍ천진 지역으로부터 중국 동남부 지역까지 지배한 제국이었다는 것도 구체적 증거를 들어 밝힌 바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강단 주류 고대사학계에서는 고조선, 한사군, 부여, 고구려, 백제의 역사가 진행 중일 당시를 살던 관중, 사마천 같은 중국 학자ㆍ사관 등이 남긴 역사지리 기록들을 철저히 배척하고, 식민학자들처럼 삼국시대 이후에 위조된 기록인 『위략』의 연나라 장수 진개의 조선 땅 2,000리 침탈 기록, 고조선과 한사군 등이 소멸한 이후에 중국인들이 왜곡한 기록, 세칭 낙랑유물 등만을 가지고 ‘신시 부정설’, ‘단군 부정설’ 등 앞에서 적시한 주장들을 지금도 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 김종서 박사가 밝힌 실제 요동.요서.한사군과 주류사학이 왜곡한 요동.한사군 위치 |
특히 강단 주류 고대사학계에서 고조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라 제시하여 온 세칭 ‘낙랑유물’을 철저히 연구 분석해본 결과 낙랑군 호구부 , 봉니, 인장, 와당, 벽돌, 점제현신사비, 대구(帶鉤), 마구(馬具), 옥기(玉器) 등의 유물들은 대부분 조악한 위조품이거나 오히려 한반도 북부 지방이 전한(前漢)ㆍ신(新)ㆍ후한(後漢)ㆍ위(魏) 등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세력, 독립된 국가였다는 증거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연나라 장수 진개의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에 위조된 기록이라는 것과 소위 요하문명이 고대 한국 문명이라는 것 등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학문적 방법으로 밝혀낸 바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처럼 과거 조선총독부의 의도적 왜곡 내용을 추종하는 반민족적인 강단 주류 고대사학은 학문으로는 역사학에서 도태시켜야 할 사이비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 매몰된 학자들 또한 사이비역사학자로 비판받고 퇴출되어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상고사 토론회 단체 사진 |
모든 고대사학자들과 무제한의 공개토론 제의
김 박사는 그 직후 만난 자리에서 “토론회에서도 말했지만, 혼자서라도 강단 주류 고대사학자 모두와 그런 모든 쟁점에 대해 객관적, 실증적, 논리적, 과학적으로 토론할 용의가 있다. 그래서 국민들이 어떤 것이 사이비역사학이고, 어떤 것이 진짜 역사학인지 알 수 있도록 무제한 시간의 공개토론을 제의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1차 사료 배척한 채 떼쓰는 강단식민사학자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기자명허성관 입력 2016.08.03 11:54수정 2016.08.03 11:59
1차 사료 배척한 채 떼쓰는 강단식민사학자들
매국식민사학을 감추려 민족사학을 사이비로 매도...
‘낙랑군=요서’설 비판하며 사이비 사학자로 매도…
학문적 정치성 구성·요건논리의 정연성도 부족..
계간지 ‘역사비평’ 2016년 봄호는 ‘기획1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주제로 세 편의 논문을 실었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은 이 세 편의 논문을 거의 요약 전재하는 형태로 대서특필했다. 이 과정에서 윤내현, 신용하, 이덕일, 복기대는 졸지에 박사학위를 가진 사이비 역사학자로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자로서 3편의 논문을 정독했다. 이들 논문은 학문적 정치성(精緻性)과 논리의 정연성이 부족하며,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되는 1차 사료와 선행연구 결과를 배척하고 있어 논문으로서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대학원 재학 중이거나 갓 졸업한 사람들이 쓴 글이라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러니 이 글들을 게재한 ‘역사비평’ 수준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주장을 살펴보자.
낙랑군이 지금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왜 자꾸 문제를 제기하느냐는 주장은 거의 떼를 쓰는 수준이다. 예를 들면,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사마천의 ‘사기’ 등 중국 사료를 통해 낙랑이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논증했다. 세 명의 저자들이 한문 원전은 고사하고 윤내현의 이 책을 정독했는지 묻고 싶다. 낙랑군이 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많은 중국 기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1차 사료로 비판하면 될 일이다. 그런 1차 사료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누구와 무엇을 위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기를 쓰고 나서는가?
실증적 학문 분야에서 통설은 영원불멸의 진리가 아니다. 그 시점까지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관련 학자들이 공감하면 통설이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거나 더 정치한 분석 방법을 활용한 결과, 결론이 달라지면 기존의 통설은 무너지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낙랑군=평양’ 설은 강단 사학자들만의 통설인데 이를 비판하면 사이비 학자라는 논리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동북아 역사지도를 통설에 따라서 그렸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비난은 푸념일 뿐이다.
‘환단고기’를 지극히 혐오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강단 사학자들 주장에 대해서 안경전이 2005년에 종합적으로 반론했지만 재반론은 보지 못했다. 중국 사서의 내용과 일치하면 베낀 것이고 중국 사서에 없으면 조작이라는 주장은 최재석이 지적한 대로 전형적인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막가파식 주장과 같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사실의 진실 여부를 진지하게 연구해보는 것이 학자의 자세이다. ‘환단고기’가 강단 사학자들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기에 이렇게 혐오하는가?
사이비 사학자들이 강연, 언론, 정치인들을 통해 대중을 선동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윤내현과 이덕일은 대중을 선동한 적이 없다. 강연 요청이 오면 선별해서 수락하고, 기고를 요청하면 글을 쓰고, 국회에서 증언을 요청해서 나갔다. 학자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강단 사학자들이 언론사와 제휴해서 시민 강좌를 개설한 것도 대중 선동인가? 역사가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지식이다. 서고 속의 역사학은 유물일 뿐이다.
세 편의 논문 필자들은 민족주의를 경원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주의를 국수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민족사학 대 식민사학’이라는 구도 대신 ‘사이비사학 대 강단사학’으로 분류한 것도 민족이라는 용어를 싫어하는 반증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민족사학이고 일제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식민사학이다. 민족주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워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동력으로 삼자는 사상이다. 신채호 선생에게는 민족주의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 이론이었다. 민족사관을 이렇게 경원하니 강단사학이 일제 총독부 사관을 옹호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세 편의 글 중에서 안정준의 마지막 주장을 보자. ‘낙랑군의 지배자는 중국인이고, 피지배자는 토착 조선인들이며, 조선인 관료들도 있었고, 조선인들은 중국인 지배에 협력했기 때문에 낙랑군이 420년 동안이나 존속할 수 있었다. 토착 조선인이 줄곧 지배층이었다. 낙랑군의 중국인과 조선인을 지배-피지배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보기는 어렵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아마도 낙랑군을 중국 식민지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이 표현을 일제 강점기 조선에 적용하면, ‘조선총독부 지배층은 일본인이고, 피지배층은 조선인이며, 총독부에 조선인 하급 관리도 있었고, 친일파들은 여전히 조선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을 일제 식민지로 보기 어렵다’는 논리와 같다. 섬뜩한 주장이다. 식민지 근대화론보다 더 조선총독부 통치를 합리화하는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보자. 이 주장은 결론이 같은데도 학파가 다르다고 떼를 쓰는 데 불과하다. 조선 후기 일부 실학파 학자가 식민사학자들과 같은 주장을 했다는 것이 그 논거다. ‘한사군=한반도’ 설을 차마 실학이라고 명명하지 못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인가? 조선 후기 일부 유학자들이 기자 존숭 차원에서 그렇게 주장했지만 그들이 지금 환생한다고 해도 강단 사학자들의 주장을 옹호해줄지는 의문이다. 선현들의 주장을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매도하는 것은 후학들의 바람직한 학문 자세가 아니다.
강단 사학자들이 많이 있다. 첨예한 논쟁에 학문적으로 영글지 않은 사람들이 나서 떼쓰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강단 사학계의 타락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글: 허성관(전 광주과학기술원 원장)
이 기사는 '이투데이'에 게재한 것을 허성관님의 허락을 받아 올리는 것임.
윤내현 교수
강단사학의 악행..홀로서기,외롭지 않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10/08/09 [23:05]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비난보다 따뜻한 격려부터 보내야..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의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 내거나 잘못 전해 온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저서를 출간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 왔던 것을 바로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결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 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 주는 아량이 부족하다.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공격 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그 날 발표내용은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 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 내라는 것이다.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들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본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학문연구를 하는데 강단과 재야라는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교수인데 필자를 강단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필자가 일부 사학자들을 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라고 비난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글을 쓴 적이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 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 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 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 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생활에만 정진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 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 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기쁘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 잡는데 조금은 이바지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 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고 따뜻하게 안아 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윤내현(尹乃鉉, 1939년 6월 11일 ~ )은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생의 대한민국 역사학자이다.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핬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등 역임하였다.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과 단군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으로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다.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 역사학자 학술교류 및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식민사관에 정면 도전..학문하는 자의 주체적 자세를 부르짖다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 (13)] (daum.net) 김언호입력 2020. 6. 16. 21:58
[경향신문]
우리 고전 연구를 집성시킨 한국학의 거목 이우성 선생. 고향 밀양 퇴로리에서.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상가·실천가들의 정신을 나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읽고 싶었다. 1980년부터 2년에 걸쳐 펴낸 <한용운> <신채호> <김구> <박은식> <김창숙> <조소앙>이 그 책들이었다. 일제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편은 이우성(李佑成·1925~2017) 선생의 기획이었다.
“심산 선생은 민족주의자로 자명(自命)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일과 일제에 대해 비타협·불복종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해방 후에는 민족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했다. 분단에 대한 통한과 통일에의 염원을 잠시도 잊지 못했다.”
이우성은 1947년 22세 청년으로 심산 선생을 만난다. 심산은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을 담당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우성의 공부가 대단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를 불렀다. “자네가 이우성인가. 교수가 되기엔 너무 어리니 우리 대학에 학생으로 입학해 두게.” 나이도 나이지만 대학 학력도 없었으니 심산의 반응은 당연했을 것이다.
6·25가 터졌다. 수도가 부산으로 피란왔다. 성균관대는 이우성이 교사로 재직하는 부산고 가건물에 더부살이하는 형편이었다. 이우성은 낮에는 교사, 밤에는 학생 노릇을 했다.
이우성에게 또 하나 정신의 기둥은 단재 신채호였다. 1985년 10월, 나는 이우성 선생을 뵙고 단재의 민족독립정신과 역사정신을 오늘에 다시 세우는 일을 해보자고 의논드렸다. 선생도 이미 심산상과 함께 단재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1986년 단재 선생 순국 50주년을 맞아 이우성과 변형윤·강만길 교수가 이끄는 단재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재 신채호! 일편단심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선생은 1936년 2월21일 오후 4시20분,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단재 선생이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한 심산 선생은 “단재의 죽음으로 나라에 정기(正氣)가 쓰러졌다”고 통탄했다.
■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민족사의 진취적 지향 염두에 둔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강조
“지금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이 땅의 역사학도에 주어진 과제”
1982년 4월 한길사는 임형택·최원식 편으로 <한국근대문학사론>을 펴낸다. 1960년대 이후 고조된 민족적 각성과 민주화운동으로 개안된 ‘민족주체적인 시각’으로 근대문학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이우성 선생의 ‘고대시와 현대시의 교차점’을 경이롭게 읽었다. 1962년 발표했다는 사실도 주목되었다.
“시는 민족과 더불어 성장한다. 시인은 민족의 고난을 몸으로 체험하며 시를 생산해야 한다. 국토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고 대중의 실천·노동에 의하여 변혁된 역사적 존재며 생활을 매개로 친해지는 자연이다.”
나는 그 무렵 우리 국토와 산하를 온몸으로 답사하는 역사기행을 구상하고 있었다. 선생은 국토기행 기획에 큰 관심을 표했다. 민족이 살아온 발자취, 민중의 삶과 정서를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인식하는 국토운동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했다.
1982년 8월 창작과비평사가 출간하는 <한국의 역사상>은 문·사·철을 아우르는 이우성의 학문과 지성의 넓이·깊이를 보여준다.
이우성의 역사학은 ‘민족사학’이다. 민족사의 진취적·역동적 지향을 늘 염두에 두었지만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통한 민족사의 정립을 강조했다. “학문의 주체성, 학문하는 자의 주체적인 자세”는 사학자 이우성의 확고한 문제의식이었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것이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역사학도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과제다.”
■ 식민지 현실로 조부의 유훈을 못 지켜
신라의 토지 사적 소유 증명하고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여
실학의 ‘내재적 발전론’ 정립 등
선구적 연구로 역사학계 경각
이우성은 경남 밀양의 퇴로(退老)에서 1925년에 태어났다. ‘문한(文翰)’과 ‘부(富)’를 함께 누리는 양반가문이었다. 부친은 ‘개명(開明)적 지주형’ 인사였다. 일제하 한국인으로 가장 큰 규모의 누에종자 제조업을 경영했다. 그럼에도 집안에서는 “조부의 유훈을 받들어” 그를 끝내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일제가 강요했던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고 가문의 각별한 관심하에 ‘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증조부 항재공(恒齋公, 李翊九·1838~1912)과 조부 성헌공(省軒公, 李炳熹·1859~1938)은 유학자이자 역사가였다. 항재공은 사론적 성격의 <서고독사차기>(西皐讀史箚記)를 저술했고, 성헌공은 조선조의 역사를 기술한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을 저술했다. <조선사강목>은 숙종에서 중단된 미완성 대작이었다. <조선사강목>을 완성하는 것이 그 손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문중이 근대적인 학교인 정진의숙(正進義塾)을 설립해 운영하고, 서울이나 일본에서 유학하는 친척이 여럿 있었지만 유독 이 손자는 전통적인 공부를 해야 했다. 조부는 “글공부를 중단하지 말고 방향도 바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부의 유훈’은 ‘가학의 계승’이었다. 그러나 조부의 유훈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한 현실이 펼쳐졌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었다. 조부의 <조선사강목> 사초(史草)를 압수당했다. 부친이 경남경찰부 고등과에 구속되었다.
이우성은 드디어 집 안에 소장된 ‘만 권의 책’에서 근대적 지식을 만나게 된다.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만난다. 집안 어른들이 정통의 공부를 하는 손자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치워두었던 책이다. 이우성은 이 책을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근대의 발견이었다. 일본에 유학하다가 학병으로 끌려간 자형이 역사·철학 책들을 보내와서 “서양에 관한 지식, 현대에 관한 지식을 나름대로 섭취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과 유물론적 사관에 대한 이해도 점차 갖게 되었다.
이우성 선생은 여름이면 젊은 연구자들과 우리 고전을 탐구하는 워크숍을 열었다(왼쪽 사진). 이우성 선생의 집안에서 실학의 태두 이익의 사상을 집성하는 <성호집>을 간행했다. 판목 1041장이 보존되어 있다.
■ 전두환 신군부 비판 ‘361인 선언’ 주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비판
정신문화연구원 영입을 거부
전두환 시절엔 ‘교수 선언’ 주도
강직한 신념 끝내 굽히지 않아
이우성은 1960년 4월혁명과 함께 진전되는 ‘학원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61년 동아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성균관대로 옮긴 선생은 1960년대 중반에는 박정희 정권의 졸속한 한·일 회담을 비판하는 역사학회의 성명을 주도한다. 다시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하는 ‘교수 361인 선언’을 주도한다. 이 일로 잡혀가서 10여일간 조사받는다. 4년 동안 ‘해직교수’가 된다.
선생의 선구적인 연구는 역사학계를 경각시킨다. 신라 때부터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다는 실증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일본 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다는 관점을 뒤집는다.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신라와 발해는 한 민족으로서 ‘남북국시대’를 전개했다는 연구다. 실학 연구에 몰두하여, 실학파가 추구한 개혁사상을 ‘내재적 발전론’으로 정립했다. 근대로의 지향을 실학의 시기로 잡아 자본주의 맹아론을 도출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할 때부터 식민지 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민족의 사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민족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진정한 민족사관이지요.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30년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고, 민중이 북방 오랑캐들을 막아내고 나라와 문화를 지켜내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 고전의 천착
1995년 한길사는 이우성 선생이 1960년대부터 천착한 우리 고전 연구를 집성하는 <한국고전의 발견>을 펴낸다. 사진작가 황헌만의 컬러사진을 곁들여 나는 큰책으로 번듯하게 만들었다.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 굳건히 자기를 지켜가며 민족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지주(支柱)가 될 수 있는 품위 있는 학자·지식인이 지금 어느 시기보다 절실히 요망된다. 우리 조상들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과 격조 높은 시문학의 정서가 담겨 있는 고전을 가까이하고 읽는 일이 요구된다.”
이규보·이승휴의 <고려명현집>부터 이황의 <퇴계전서>, 김육의 <잠곡전집>, 허목의 <미수기언>, 이익의 <성호전서>, 안정복의 <동사강목>, 박지원의 <연암집>,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최한기의 <명남루전집>, 김창숙의 <심산유고>까지 우리 민족이 창출해낸 고전 39종의 이론과 사상을 해석해내는 <한국고전의 발견>을 펴내는 선생의 표정은 밝았다.
“옛 책이라고 하여 다 고전이 아니다. 역사를 통하여 여과된 고전만이 고전이다. 읽는 사람의 눈을 통하여 가슴에 와 닿을 때 비로소 고전의 값을 한다.”
2001년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이우성 선생은 <도산서원>을 편한다. 윤사순·금창태·정순우·이동환·송재소·임형택·이상해 등 한국의 퇴계 연구자, 두 웨이밍·장리원·도모에다 류타로 등 중국·일본의 퇴계 연구자들이 써낸 주요 논문을 수록했다. 자신이 쓴 ‘퇴계 선생의 이상사회와 서원창설운동’이 머리글로 실렸다. 도산서원의 사계와 의례를 담아낸 황헌만의 사진들이 책을 빛나게 했다.
“도산서원은 16세기 말 창립된 이래, 조선시대 사림의 정신적 메카가 되어왔고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귀중한 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시절부터 퇴계 선생이 직접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으로 선생의 학문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 있는 곳에 대강장(大講場)인 도산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생전과 사후가 그대로 연결된 도산서원의 배경과 유서는 실로 우리나라 서원의 전형이다.”
2003년 선생은 <퇴로리지>(退老里誌)를 간행한다. 퇴로 마을 풍경, 퇴로의 건축물들과 퇴로의 의례, 장서와 인보와 간찰을 사진으로 담았다. <항재집> <독사차기> <조선사강목>의 해제와 정진학교 연구를 실었다. 밀양 근대교육의 요람 정진학교는 1899년 항재 이익구가 세운 화산의숙을 1921년에 개편하여 개교했는데, 1939년 일제는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정진학교를 기어코 폐교시킨다. 나는 황헌만이 촬영작업할 때 여러 차례 퇴로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우성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기도 했다. 고서들의 보존을 걱정하는 말씀도 했다.
■ 정신문화연구원 영입을 단호히 거부
선생은 1990년 퇴임 후 연구실 실시학사(實是學舍)를 열고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우리 고전 연구에 정진한다. 한길사는 그 연구결과를 출간한다. <다산의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1995), <다산과 문산(文山)의 인성(人性) 논쟁>(1996), <조희룡전집> 전 5권(1999), <다산과 대산(臺山)·연천(淵泉)의 경학논쟁>(2000), <다산의 경학세계>(2002)가 그것이다.
유신 말기 박정희는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선생의 영입을 한사코 시도했다.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선생에게, 대통령이 결재한 사안이라 되돌릴 수 없다면서 협박과 회유를 가해왔다. 선생은 끝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해직 시절, 일본의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교수를 비롯한 양심적인 학자들이 선생의 처지를 걱정하여 선생 내외를 초청해 도쿄에서 1년 동안 체류하게 한다. 선생과 의논해 환영회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참석자들 모두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 와중에 교과서 문제가 터졌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준비했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환영회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교과서 문제를 좌시하는 사람들과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타다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 “우리들은 교과서 문제를 묵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항의집회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참석 거부를 철회하여 환영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하타다 교수는 “이우성 선생에 대한 존경의 염(念)이 한층 더 깊어졌다”고 했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김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