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breaknews.com)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신상구 국학박사 | 기사입력 2023/12/09 [20:33] 
 

<특별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 신상구 국학박사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2023년 12월 8일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탄신 143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사학자, 언론인, 항일독립운동가, 문필가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는 위대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권희영(權熙英, 1956) 원장이 어느 공개 학술회의 현장에서 “신채호 선생은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입니다.”라고 막말을 해서 신채호 선생이 순간적으로 일시에 폄하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해 애국 시민들을 분노케 한 적이 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역사학자들이 분개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신채호 선생의 출생지인 대전과 성장지인 충북에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61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천고(遷固) 이덕일(李德一, 1961) 박사가 자기의 저서인『우리 안의 식민사학』(만권당, 2014.9)에서 “프랑스 같으면 당장 감옥에 갔을 이런 극우 파시스트 매국노”가 한국 역사학계 주류의 한 갈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대전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과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8년 동안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가 살았다.

 

그는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申星雨)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세 때 행시(行時)를 지었으며,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18세 때 조부의 소개로 한말 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서재에 진열된 각종 서적을 읽어보고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다.

 

19세 때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 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26세 때인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주필로 활동하며 <독사신론>과 <을지문덕> 등을 발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신민회에 참가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금연을 결행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11년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한국선도 관련 논문인「동국고대선교고」를 발표하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여 외래 종교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의해 말살된 민족혼을 되살리는 데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조사 연구하여『조선상고사』(1915),『조선상고문화사』(1910년대 후반),『조선사연구초』(1924) 등을 집필함으로써 근대민족사학을 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문학적 상상력과 문장력이 뛰어나 <꿈하늘>(1916), <용과 용의 대격전>(1928) 등과 같은 소설을 창작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단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 1875-1965)의 ‘위임통치론’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단재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해 의열단원들의 이념과 투쟁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폭력독립운동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의 선언문을 기초하고,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는가 하면,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8년에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사건'으로 체포된 바 있고, 그 후 항일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또 체포되어 대련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에 56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뒤늦게나마 한국정부가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을 수여했고, 1978년과 1979년 사이에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위치한 묘역을 정화하고 이곳에 사당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1992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 복원해 놓은 기념물 제26호인 신채호 선생 생가가 2002년에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단재 생가 터는 지난 1992년 발굴조사와 고증 후 조성됐고 1996년 그 앞에 동상이 세워졌다.

 

이어 2015년에는 생가 주변에 홍보관이 문을 열었고,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는 서대전시민공원에도 동상이 설립됐다.

 

2, 단재 신채호 선생 탄생 143주년 기념식 개최 현황

 

대전 중구청과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대전보훈청이 후원한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43주년 기념식이 2023년 12월 8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에서 지역 보훈단체, 시민·사회단체, 시민, 청소년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면서도 성대하고 풍성하게 개최되었다.

이번 기념식은 그동안 대전과 청주에서 각각 진행되었던 탄신기념식이 통합하여 진행되는 두 번째 기념식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위대한 일생과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이번 기념식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을 축하하는 산성동풍물단의 식전공연과 DMC어린이합창단의 공연이 있었고, 헌사 . 축사 . 헌화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에서 개최된 탄신 143주년 기념식 사진(대전 중구문화원 제공)

 

이번 기념식 행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을 통한 대전과 청주의 근대역사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의 뜻을 깊이 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승환 충북대 명예교수는 헌사에서 “일생을 민족해방에 바친 신채호 선생은 조선, 러시아, 일본, 중국을 오가면서 일체의 타협과 굴종을 거부하고 견결한 반제 항일 투쟁의 길을 걸었다. 또한 선생은 아득한 이국 땅 여순 감옥에서 장렬하게 옥사하는 그날까지 민족의 역사와 민족의 정신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선생의 유훈은 삼천리에 선연하고, 선생의 혼백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대한 민족의 하늘 북(天鼓)을 울린다.”고 힘주어 말했다.

 

3.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의 문제점과 과제

 

단재 신채호 선생이 대전에서 태어났음에도 선양사업이 주로 충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어 안타깝다. 충청북도는 2009년에 신채호 선생을 '충북을 빛낸 역사인물'로 선정하고 단재문화예술제전, 단재 학술토론회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청주문화관 4층에 신채호기념관을 설치하고 단재의 일대기를 그린 영상은 물론 각종 서적과 사진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또한 단재교육연수원을 설립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43주년을 맞이하여 대전역 광장에 단재 동상을 세우고 대전역 광장을 ‘단재광장’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대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도심을 활성화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한다.

 

 

 

출처; 신채호의 선교사상과 대종교 인연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신채호(188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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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날카로운 필치로 항일구국논설을 집필했던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역사학자ㆍ언론인ㆍ독립운동가로서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조선의열단의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은 불멸의 일제타도의 문건으로 평가되었다.
 
국치 직전인 1910년 봄에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신문인 『해조신문』의 주필로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대종교의 중진 윤세복의 초청으로 1914년 서간도 봉천성 환인현 홍도천으로 가서 대종교와 인연을 맺는다.

망명 직전에 발표한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에서 '선교'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인다. 따라서 망명 이전부터 나철이나 대종교와 일정한 교유가 있었을 것 같다. 
 
신채호는 1914년 서간도로 망명하기 이전에 이미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서간도 봉천성 환인현 홍도천으로 가서 한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때에도 대종교계통의 학교인 동창학교에서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를 교수하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겸한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 간행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당시 서간도로 망명할 때에도 대종교의 중진이었던 윤세복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신채호가 단군의 역사적 존재와 의의를 강조한 것도 일제의 강점지배라는 식민지 상황과 밀접한 조응을 갖거니와 김교헌ㆍ윤세복ㆍ김좌진ㆍ신규식ㆍ이시영ㆍ박찬익ㆍ김백연ㆍ조완구ㆍ조성환 등 망명지사들이 모두 대종교의 지지자들이었으며, 공통적으로 이 시기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활력과 결속을 위해서 대종교 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 6)
 
신채호가 가졌던 한국고대사의 주제어는 선교와 '낭가사상(郎家思想)'이다. 
 
국난기를 맞은 그에게 선교와 낭가사상은 외래 사상과 외부의 침략에 맞서 이를 구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민족정신으로서의 고대 민족신앙인 선교와 전통적인 민족사상인 낭가사상의 이념을 「동국고대선교고」란 논설을 통해서 그 싹을 표출하게 된 것은 낭가사상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낭가와 낭가사상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여 국선ㆍ풍류도ㆍ풍월도가 갖는 의미가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즉 낭가사상의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도교의 '무위(無爲)'와 '불언(不言)'과는 판이하며, 낭가를 풍류라 함은 지나(중국)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킨 것이며 풍월(風月)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詠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신채호(뤼순감옥 투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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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는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와 함께 문화사 부분의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신채호는 단군조선 전반기 1천년의 정치와 문화는 고대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고 하며, 중국을 비롯한 동양 각국 문화의 원류가 된 모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만일 후손들이 무력으로 그 문화를 보호하고 확장하였다면 조선이 진실로 동양문명사의 수좌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독점하였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신채호는 여기에서 단군시대의 종교로서 선교를 들고 있으며 화랑은 신라의 과거법이 아니라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흔이요, 국수의 중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의 오행과 팔괘는 조선에서 수입해간 것이라 하여 한중관계를 문화우열의 관계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주석 7)

주석
6> 김동환, 「기유중광의 민족사적 의의」, 『국학연구』 제1집, 111쪽, 한국정통문화연구회 국학연구소, 단기 4321.
7> 박걸순, 앞의 책, 290쪽.

 

 

 

출처; 신채호 선생 1921년 발행 월간지 '천고' 제3호 전모 확인 (naver.com)

신채호 선생 1921년 발행 월간지 '천고' 제3호 전모 확인

입력2008.02.20. 오전 9:02 
 
수정2008.02.20. 오전 9:26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

자부 이덕남여사 베이징에서 발굴..연합뉴스에 최초 공개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상황ㆍ일본군만행 등 생생하게 기록

전문가 "단재사학 이해ㆍ독립운동사 연구에 활력소 기대"

(서울=연합뉴스) 이돈관 편집위원 =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21년 1월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발행한 순한문 월간 잡지 '천고(天鼓)' 제1권 제3호의 전문이 최근 유족들에 의해 발굴됐다.

천고 제1호와 제2호의 전문은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가 이미 수년 전에 입수해 국내 학계 등에 공개한 바 있으나 제3호의 전문을 확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단재사학의 이해는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활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92년의 한ㆍ중 수교 훨씬 전부터 중국에서 신채호 선생과 관련이 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그의 발자취를 추적해온 자부 이덕남 여사(64)는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연합뉴스에 천고 제3호 전문을 공개했다.

제1호, 제2호와 마찬가지로 베이징대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돼 있는 제3호의 전문은 복사본이 아니라 워드 프로세서 문서로 재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를 검토한 고려대 한국사학과 최광식 교수는 원본과 일치한다는 소견을 밝혔다.

최 교수는 1999년 베이징대학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당시 이 대학 도서관에서 제1-3호의 표지, 목차 및 '고고편(考古篇)' 본문 등을 복사한 후 그 자료를 토대로 '천고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모두 60쪽으로 된 천고 제3호에는 진왕(辰王)과 소도(蘇塗)에 대해 논한 고고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소개한 '임진왜란인물지일(壬辰倭亂人物之一)' 등 역사 및 독립운동 관련 문장과 세계 소식 등 14편이 실려 있다.

최 교수와 기념사업회 신홍식 사무총장은 이들 문장 가운데 '제3회 3.1절을 동포에게 널리 고함(第三回三一節普告同胞)' '독립운동중의 일대쾌보(獨立運動中一大快報)' '고고편' 등 3편의 문장을 신채호 선생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동이(東夷)'의 夷를 파자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大弓'의 이름으로 쓴 '제3회 3.1절…'에서 1919년 3월1일의 독립선언은 한민족을 크게 일깨우기 시작한, 5천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고, 따라서 3.1절도 5천년 이래 최대의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립운동중…'에서는, 진생(震生)이라는 필명으로,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를 표방한 친일단체 '국민협회'를 조직해 도쿄에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전개하던 민원식을 재일 독립운동가 양근환(당시 28세)이 1921년 2월16일 도쿄에서 처단한 소식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했다.

필명을 신지(神志)라고 한 고고편을 통해서는 진왕을 소왕(小王)들이 세운 삼한 70여국의 종주(宗主)인 대왕(大王)으로 보았고, 소도는 신의 칭호로서 신단을 의미하며, 3신5제(三神五帝)와 3경5부(三京五府) 등 고대의 모든 제도가 모두 소도에서 비롯하고 모든 풍속 역시 소도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천고 3호는 앞서 언급한 문장 외에 서울을 비롯한 국내와 중국 각 지역의 제3회 3.1절 기념 현황(各地第三回三一節紀念), 독립선언 지도자들의 옥중 근황(獨立運動首領之近況), 1921년 2월 이후의 독립운동 진행상황(二月以後獨立運動之進行) 등을 실었다.

청산리전투 직후인 1920년 10월 말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간도학살사건(간도참변)의 옌볜(延邊) 허룽(和龍)현 거류동포 피해 일람표(和龍縣居留同胞被禍一覽表), 봉오동전투(1920년 6월)에서 패한 일본군이 중국 마적을 사주해 일으킨 훈춘(渾春)사건(1920년 10월초) 이후의 현지 소식(渾春事件之彙報) 등도 전했다.

이들 문장에 따르면, 1921년 제3회 3.1절을 맞아 서울에서는 시민들이 북악산 위에 태극기를 높이 달고 만세를 부르며 경축의 뜻을 표시했으며, 이를 전후해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3천여 명에 달했다.

중국의 베이징, 톈진(天津), 한커우(漢口)의 동포는 물론 일본 도쿄의 히비야(日比谷)공원 광장에서도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3.1절을 맞아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 일본경찰에 여학생 8명을 포함해 모두 76명이 체포됐다.

당시, 일제 법정에서 판결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독립선언 지도자 48명은 아침 7시에 일어나 저녁 7시에 취침할 때까지 하루 8시간씩 힘든 노역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한 방에서 3명이 담요 한 장으로 추위를 견디는 등 목불인견의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

오세창ㆍ권동진ㆍ최남선ㆍ최린ㆍ박희도 등은 모처럼 가족들과의 통신을 허가받아, 부모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을 대신해서 가족을 잘 돌봐주도록 부탁하는 내용 등을 담은, 짤막한 편지를 모친이나 부인, 형제 등에게 보내기도 했다.

천고 제3호는 양근화의 민원식 암살, 북군서(北軍署) 사령관 김좌진 휘하 결사대 등 각지의 독립군 활동과 함께 경남 밀양의 일본경찰서를 폭격한 최수봉 의사에 대한 부산지방법의 공판 개시, 광한단(光韓團) 단원 전용수 등 독립운동가들의 순국 사실 등도 전했다.

그 중에는 북군서 총재 서일과 사령관 김좌진, 북로독군부(北路督軍府) 수령 최명록, 의용단 사령관 홍범도, 서군서(西軍署) 사령관 이청천, 흥업단(興業團) 부단장 김혁 등 여러 단체 수장들이 조만간 그 부하들을 이끌고 '대한총합부(大韓總合部)'를 조직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포함돼 있다.

허룽 현에서 일본 군경의 총격이나 방화로 인한 사망자 등 98명, 중상자 13명, 기타 가옥 소실자 등의 이름과 피해 내용, 중국 주재 미국공사가 중국의 간도 순열사(巡閱使) 장쭤린(張作霖)에게 비밀서한을 보내 일본군의 잔인한 행동을 비난하고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덕남 여사는 "신채호 선생이 천고를 7호까지 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마지막 호인 제7호도 중국의 모처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그 전문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나 아직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한편 기념사업회 측은 신채호 선생이 1910년 4월19일자 대한매일신보 제3면에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자신의 초가 6칸짜리 가옥 소유문서의 분실을 알리는 광고를 낸 사실이 최근 확인돼 조만간 종로구청에 현재 지번과 사실관계를 파악해 주도록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분실광고는 "본인의 소유인 초가 6칸의 문권(文券)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분실하였기에 광고하오니 누구든지 이를 습득하더라도 쓸모가 없으니 휴지로 처리하기 바람. 경북서(京北署) 삼청동 2통4호. 신채호 백."이라고 돼 있다.

◇ 단재 신채호 = 1880년 충남 대덕훈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해 평생을 독립운동, 고대사 연구,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 앙양에 바치다 1936년 2월21일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다.

'경술국치'(1910년)를 당해 일제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중국 칭다오(靑島)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랐고, 그 이후 서거할 때까지 중국에서 신문발행, 의열단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과 한국 상고사 연구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만주지역과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중국에 산재해 있는 역사자료를 섭렵해 이루어낸 그의 선구자적이고 실증적인 고대사 연구가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사는 지금보다 훨씬 허전했으리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1915년께부터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조선상고사'와 소설 '꿈하늘'을 집필했고, 1921년 '하늘북'이라는 뜻의 가진 순한문 월간잡지 '천고'를 창간해 주간으로 활동했다. 제7호까지 발간된 이 잡지는 중국인들 독자들까지를 염두에 두고 독립에 관한 논설과 독립운동 소식을 주로 전했다.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1922년)과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다물단'의 선언문(1924년)을 기초했고, 이후 '무정부동방연맹'과 '신간회'에서 활동하다 1930년 무정부동방연맹의 국제위폐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중국 다롄(大連)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중 순국해 유골로 충남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향으로 귀환했으나, 일제에서 해방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가 그를 무국적자로 방치해두고 있어 유족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자부인 이덕남 여사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이미 서거한 분이라는 이유로 신채호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하고, "아버님과 후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죽을 때까지 국적회복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또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해 가면, 그곳에 백범기념관에 버금가는 단재기념관을 만들어 올바른 민족사 정립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면서 "아버님이 언론인이기도 했던 만큼 아버님의 이름을 딴 언론 관련 재단을 만드는 것도 꿈으로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don@yna.co.kr

 

 

출처; 살아계신 분들, 내게도 국적을 주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 솟을 대문 단재 사당에서 바라본 풍경. 주변이 아늑하긴 하지만 선생이 거처하긴 답답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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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그는 거목이었다. 그러나 그가 키운 거목엔 꽃은커녕 잎도 피어나지 못했다.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거친 숨을 몇 번이고 몰아 쉰 후에야 작심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10일)이었으며, 낙엽이 길바닥을 휩쓸던 쓸쓸한 날이었다.

단재 신채호, 세상이 그에게 무심했던가

내가 무심했던가. 아니면 세상이 그에게 무심했던가. 그도 아니면 이 나라가 그의 이름이 존재하는 것조차 싫어하는가. 그 물음을 안고 단재 선생의 사당이 있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고드미 마을로 갔다.

그날 오전만 해도 바람은 잔잔했다.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들은 제 발등에 낙엽을 수북히 떨구었다. 점심 때를 지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 만난 차량들은 서로의 속도를 자랑하며 씽씽 지나오고 지나갔다.

지도책도 없이 떠난 길에서 단재 선생이 잠들어 있다는 고드미 마을은 멀기만 했다. 두어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은 애초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몇 번이고 길을 갈아탔다. 고드미 마을에서의 행사는 오후 3시. 오전 11시에 출발했는데도 시간이 빠듯했다.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국도에서 지방도로, 지방도에서 다시 국도로, 국도에서 마을 길로, 단재 선생의 사당에 도착하고보니 오후 3시 5분. 다행히 행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강원도 정선에서 고드미 마을까지 어떤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재 선생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주변은 가을빛이 완연했다. 싯누렇게 단풍이 든 낙엽송은 작은 바람에도 바늘 같은 잎을 우수수 털어냈다.

그날 준비한 행사는 한국문학평화포럼(회장 임헌영 문학평론가)에서 주최한 '단재 신채호 문학축전'이었다. 100여명 남짓한 문화예술인들이 찬바람이 쓸려다니는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행사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은 원로 시인인 이시형 시인을 비롯해 김녹촌 아동문학가, 김창규·김이하·양문규·박운식·홍일선·이소리·김규철·윤일균 시인, 무용가 김기인 등이다.

▲ 문학축전 단재문학축전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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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가는 길 묘소로 올라가는 길. 낙엽이 깔려있다. 날 추워지고 다들 떠나면 이곳엔 선생 혼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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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의 기조강연을 맡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조촐하지만 이렇게라도 단재 선생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어 반갑다"라고 소회를 피력했다. 단재 선생의 평전을 집필하기도 한 김삼웅 관장은 단재를 대접하고 있는 이 사회의 수준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친일파들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상금도 어마어마 합디다. 처음엔 친일파들이 주는 상금이라 받네 안 받네 하더만 요즘은 넙죽넙죽 잘도 받아요. 하지만 단재 선생을 생각한다면 그런 일들 부끄럽지요. 단재 문학상이 그렇게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단재 선생이 이렇게 고립무원의 땅에 갇혀 신음하는데도 세상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아요."

단재 신채호(1880~1936). 그는 언론인이자 소설가, 역사학자, 사상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면 어느 일이고 가리지 않고 앞장 섰던 선각자였다.

단재 선생은 아직 무국적자, 정부와 정치권은 '침묵 중'

그는 이 나라의 근대사가 배출한 거목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과 삶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배제당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이승만을 향해 "나라가 독립도 하기 전에 나라를 팔아먹을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맞았다. 이승만은 해방 정국에서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이 빌미가 되었던가. 해방 후에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신채호를 공산주의자로 칭하며 철저하게 배격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절대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선 채로 세수를 했던 단재 신채호.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아직 국적이 없다. 이 말에 누군가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국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말이 되는 나라"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국가에서는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국가유공자로 예우해주지만 그의 국적은 회복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은 비단 단재뿐이 아니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노은 김규식 등. 우리가 입버릇처럼 떠벌리던 독립운동가들이 다들 무국적 무호적 상태이다. 그 수가 300여 명이나 된다니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 묘소가 있던 자리 단재의 묘소가 있던 곳. 수맥이 지나가는 자리여서 묘소를 사진 뒷편의 공간으로 이장했다. 생전이나 사후나 단재 선생의 삶은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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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묘소 터 묘소가 있던 자리는 석물과 비석만이 덩그러이 남아있다. 아래로 보이는 곳은 단재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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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일제는 조선의 호적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민사령'을 제정했다. 조선인 국적을 가졌던 단재는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망명 길에 올랐다. 정처없는 망명 길이었다.

망명지에서 단재는 나라를 되찾는 길은 '강도 일본'에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혁명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이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주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능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잔혹하게 다룬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단재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문' 중에서)

단재 선생이 의혈단의 부탁을 받고 쓴 '조선혁명선언'은 100여 가지 독립선언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잘 쓰여진 문장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을 '강도'라고 직접적으로 표기한 단재 선생의 선언문에는 일제의 패악과 매국노들에게 대한 경계가 잘 나타나 있다.

미완성인 <조선상고사> 완성은 살아남은 자의 몫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단재처럼 뜨거운 가슴을 지닌 이도 드물다. 친미주의자인 이승만과의 대립으로 인해 후대에까지 그 이름이 성대하게 떨치지는 못했어도 역사적 평가는 그를 이승만보다 '큰 인물'로 인정하고 있다.

민중이 주인되는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던 단재의 사당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단재신채호전집>이 봉헌되어 있다. 살아 생전 언론인으로 역사학자로 많은 글을 남겼던 단재의 사상과 역사가 전집에 들어있다. 아직 담기지 못한 원전의 대부분은 북한에 남아있다.

단재가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왜곡된 역사가 아닌 '옳은 역사'였다. 망명 길에 오를 때 단재의 괴나리봇짐에는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 질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역사만큼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망명 길에 오른 단재는 직접 발로 뛰며 우리의 역사를 썼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았던 단재였기에 사대주의 사관에서 벗어난 우리만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하여 만들어진 것이 <조선상고사>였다. 애초 <조선사>였지만 미완성이기에 <조선상고사>가 된 <조선상고사>는 우리가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역사서임에 틀림없다. 이제 <조선상고사>를 완성할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의 몫으로 남았다.

▲ 단재 묘소 새롭게 이장한 단재 선생의 묘소. 사당과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공터에 버려진 듯 쓸쓸해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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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기념관 수 많은 활동과 저술을 남긴 선생의 생애를 기념하기엔 공간이 너무 좁다. 대륙을 가슴에 담았던 선생의 삶이 이렇듯 보잘 것 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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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한 생애가 이리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단재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벽초 홍명희는 그런 단재의 죽음을 접하고 '곡 단재'에 이렇게 썼다. 사람 중에는 "살아서도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라고 단재를 평했다.

지금 이곳은 누구의 나라인가
일제의 발톱이 움킨 매국의 계절에
손가락을 자르고 떠나 버린 조선의 사나이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은 부정한 정부를 버리고
입을 다물고 행동으로 떨쳐 일어나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한 자루 붓에 맡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인 사나이
그가 돌아올 수 없는 이곳은 누구의 나라인가
중국 땅, 연해주, 만주를 떠돌며 온몸으로 혁명을
민중의 혁명을 꿈꾸며
미리를 무찌르던 그의 손가락은 아홉 개
그러나 그가 고개를 꺾어야 할 나라는
오지 않았는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매국의 계절에
이제는 전쟁으로 두 동강나고
결국은 한 동강마저 글로벌 자본에 목이 졸린 나라
그는 올 수 없는가, 민중의 굴레인
북곽같은 정치와 법률과 윤리와 도덕과 종교
노예의 근성, 그 모든 것 다 버리고
오로지 민중이 주인인 무정부의 조선을 찾아 떠난 외길
매국의 走狗는 아직도 천지에 깔렸고
1936년 이후 한사코 혼으로 떠돌고 싶었던 사나이
태백산 같은 백골탑도 못 쌓고 쟁기도 녹이 슨 지금
그 혼은 아직도 멀리 계신가
어서 오시라, 그 한마디 구천에 뿌릴 수 없는
지금 이곳은 누구의 나라인가
- 김이하 시 '어느 무정부의자의 망명' 전문

단재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나라는 해방이 되었다고 하나 두 동강이 났고, 반쪽의 나라는 여전히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정부가 있었으나 그 의지는 득세자들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단재가 외쳤듯 민중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러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는 그야말로 유물이 되어버린 나라 대한민국. 신채호는 모르지만 체 게바라는 알고 있는 웃지 못할 요즘의 시대에서 참된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헛헛한 것인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단재는 오늘도 찬바람을 맞으며 고드미 마을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국적도 없이 잠들어 있는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가 이리 쓸쓸하고 허접하게 대접받아도 되는 것인지 해답을 만들어야 할 이들은 여전히 침묵 중이다.

▲ 단재 사당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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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한국문학평화포럼은 '인간, 역사, 평화를 위한 문학축전 2007' 올해의 마지막 행사로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도리 여강변에서 '여강생명농업문학축전'을 개최한다. 행사는 11월 24일(토) 오후2시이며, 행사장으로 떠나는 전세버스가 마련되어 있다. 서울 출발은 수운회관 앞에서 오전 10시. 문의 : 019-214-1902.

 

 

출처; <데스크 시각>역사의 단절과 단재의 눈물 :: 문화일보 munhwa

<데스크 시각>역사의 단절과 단재의 눈물

문화일보 입력 2007-02-22 14:19

 
 
“송도(松都)를 지나 만월대를 쳐다보라. 반쪽짜리 기와인들 남아 있더냐. 초석 돌 하나가 남아 있더냐. 고려의 궁궐이 무슨 병화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같이 무정한 유허만 남았느냐. …백제의 유물도 찾을 수 없고, 평양에서 고구려의 구형(舊型)도 볼 수 없다.”
 

구한말 석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만큼 단절의 역사를 애통해한 인물도 드물다. 최근 한글로 다시 옮겨진 단재 ‘조선상고사’를 접하는 순간 안타까움이 하늘을 가렸다.

“후에 일어난 왕조가 앞 왕조를 미워해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고, 불살라 없애 버렸다. 신라가 흥하자 고구려, 백제 두나라 역사가 파괴됐으며, 고려가 일어나자 신라역사가 소멸됐다. 그리고 조선이 흥하자 고려역사가 흔적도 없이 파괴됐다.”

단재는 우리민족의 정체성(Identity)을 찾기 위해 한반도는 물론 고조선과 옛고구려 등 곳곳을 누볐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로부터 해로(海路)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선 윤관(尹瓘·혹은 연개소문)의 기공비, 봉천성성(奉天省城)에서는 이통주(伊通州)읍 동편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의 송덕비, 해룡현으로부터 나온 과객으로부터는 문무대왕의 유묘(遺廟)를 보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여비가 없어 가 볼 수가 없으니…. 한번은 압록강 위 집안현(緝安縣), 곧 고구려 제2 환도성을 돌아보았다. 놀라운 장관이었다. 능이 수백개, 묘가 1만여 개였다. 수백원이 있으면 묘 한개를 파볼 수 있고, 수천원만 있으면 능 한개를 파 볼 수 있었을텐데… 탁본해서 파는 광개토 비문도 가격만 물어보고 돌아섰다. 아! 슬프다.”

단재의 집안현 고찰은 사실임이 최근 확인됐다. 지난해 5월 중국은 이곳 댐 수몰 지역에서 고구려 고분 2300여 기를 한꺼번에 발견했다. 그러나 며칠 안 가 중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다시 수몰시켰다.

단재는 우리나라가 어느 민족보다 역사서가 많았음도 지적했다.북부여 진서(晋書), 고구려 ‘유기’ 100권, 백제 고흥박사가 쓴 ‘서기’, 고구려 이문진 박사가 쓴 신집(新集), 신라 거칠부가 쓴 ‘신라고사’ 등등. 하지만 이들 책은 오늘날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바람 잘 날 없는 외환과 뒤에 일어난 정권이 앞 정권의 역사를 철저히 파괴한 탓이다. 조선 태종은 공자사상에 위배된다 해서 서운관에 보관돼 있던 수많은 역사서들을 불태워버리기조차 했다. 단재는 이와 관련,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다”고 통탄했다.

그의 한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본토수복의 북벌론자들을 진압한 뒤 정권을 잡은 이씨 조선은 중국에 누가 되는 기록은 모두 불태우거나 규장각에 비장했다. 사대주의로 일관한 조선은 역사책도 아예 쓰지 못하게 했다. 삼한고기와 해동고기, 삼국사 등은 온데간데 없고, 사대주의파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붙은 일연의 ‘삼국유사’만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보존돼온 수십만권의 역사서들도 일제 때 불태워지거나 강탈당했다. 단재는 “일본이 조선의 보장(寶藏)들을 남김없이 다 가져가 어둠속에 썩히고 있음은 통탄스럽고 애석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일본 황실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는 우리 역사서들을 지적한 것이다. 충남 공주 수촌리 1호 고분에서 출토된 1600년 전 백제의 금동관이 지난 20일 공개됐다. 용무늬 등이 아름답다. 정체성이 없는 민족은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창규 산업부장]]chang@munhwa.com

 

 

출처; 서거 70년, 단재는 편히 잠들었을까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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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 선생.
 
ⓒ 이덕남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36년 2월 18일, 황사가 지나는 길목인 랴오닝 반도의 끝 뤼순(旅順) 감옥에서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한 인물이 뇌일혈로 쓰러졌다. 부인과 가족들이 급히 도착했지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3일 뒤인 21일 오후 4시20분 차가운 감옥의 바닥에서 옥사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11시, 쓸쓸히 감옥 옆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만 남긴 채 떠나갔다. 그가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1910년 3월 같은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된 지 26년 만에 같은 길을 떠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사학자이자 언론인, 그리고 문학, 철학,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선구적인 활동을 해온 독립 운동가였지만 서거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한국 국적이나 호적조차 갖지 못한 상태다.

2005년 여름 <단재 신채호 평전>을 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E.H. 카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인용하면서 단재의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대결>은 외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통탄했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도 남미의 혁명 전사 체 게바라는 표상화 하지만 단재에 대해서는 무감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단재는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100년 전에 통감했던 인물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훼손되는 고구려사는 만약 단재가 없었다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며, 최근 재평가 받고 있는 '의열단'의 투쟁도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이 없었다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올해는 단재 선생이 서거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그가 베델이 주도한 <대한매일신보>에서 언론생활을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 안중근 의사와 단재 선생이 목숨을 잃은 뤼순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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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는 알아도 단재 신채호는 모른다?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에서 태어난 단재 선생은 10세에 행시(行詩)를 짓고,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신동이었다. 그는 1905년에는 성균관의 박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해 을사늑약이 일어나고 민영환이 자결한 데 이어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그는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모든 활동은 국체의 유지에 맞춰졌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자 칭다오(靑島)를 경유해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감옥에서 서거할 때까지 그곳에서 신문발행, 의열단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 백탑사 맞은 편 진스팡지에 21호는 신채호 선생이 1920년 결혼 후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이 건물도 92년에 증축했고, 1~2년 안에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다.
 
ⓒ 조창완
 
단재는 포괄적인 지식으로 당대의 독립 운동을 정확히 파악했다. 초반기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치며 나라의 운명을 미국 등에 맡기겠다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를 철저히 반대하는 등 역사가 흘러갈 방향에 대해서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대신 그는 무장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한편 김원봉의 '의열단'에 방향지침서인 '대한독립선언'을 써주며 사상의 방향을 인도했다.

단재는 일찌감치 고구려 등 상고사에 대한 정리를 확실히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신라 김유신이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임으로써 단군 이래 일궈온 민족 터전의 4분의 3을 잃게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라가 통일 후 고구려 땅 수복 노력을 게을리 한 점을 강조하며 이런 관점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는 단군 이래 융성한 민족사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동북공정을 앞세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단재 사상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국적은 여전히 '무국적'
 
 
단재 신채호 선생 연표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에서 출생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진으로 초빙됨
1910년 안창호 등과 중국으로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 주필로 활동
1914년 옛 고구려 땅 답사 이후 대고구려주의적 역사의식 갖게 됨
1915년 북경에 체류하며 <조선상고사> 집필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1920년 박자혜 여사와 북경에서 결혼. 다음에 아들 수범씨 얻음.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기초
1924년 무장독립운동단체 '다물단' 선언문 기초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가입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발표
1930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돼 체포됨. 대련 법정에서 10년형 선고받음. 여순감옥으로 이송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자료)
 
 
뿐만 아니라 단재의 국적회복이나 호적문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단재는 일제가 조선민사령을 제정해 조선인 호적을 장악하기 전에 중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호적상 무국적인이 된 후, 중국에서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국적이 없는 상태다.

지난해 8월, (사)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주최로 신채호 선생 국적회복을 위한 공정회를 개최해 단재를 비롯한 무국적자 신분의 독립유공자들의 국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단재 선생을 비롯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독립유공자 예우를 위해 신기남 의원 등이 '무국적사망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까지도 국회에 계류된 상태로만 남아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온라인 상에서 수천명이 이에 지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으나 단재의 국적을 회복해주지는 못했다.

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안치됐던 단재 선생의 묘소도 98년 홍수 이후 붕괴된 이래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가묘상태로 남아있다. 누추하기는 가묘로 남아있는 묘소뿐만이 아니다. 이런 어려움은 단재의 유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곤궁하게 이어져온 후손들의 삶

 
▲ 단재가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베이징대학의 웨이밍후와 급수탑.
 
ⓒ 조창완
 
단재는 16살에 고향에서 결혼을 했지만 타국 행을 결정하면서 부인과 이별했다. 자칫 후손이 없을 뻔하다가 40세인 1920년 연경대학에 유학중이던 28살의 박자혜 여사와 재혼해 다음해 맏아들인 수범을 낳았다. 하지만 독립운동 중에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어 부인과 아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잠시 베이징에 왔을 때 둘째 두범을 얻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집안의 길이란 고난의 길이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1942년에 아들 두범씨가 사망했다. 수범씨는 19살에 한성상업학교 졸업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의 족적을 좇기 위해 북만주로 향했으나 그 사이 신수범 선생의 친구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박자혜 여사도 작고했다. 박 여사는 소식이 닿지 않아 도착하지 못한 아들이 오기도 전에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져 묘소도 없다.

이후 단재 후손의 삶은 여느 독립운동가의 가정처럼 어렵기 그지없었다. 특히 단재는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수범 선생의 신변도 안전하지 않았다. 신 선생은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몇 번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후 신수범 선생은 고철장사에 넝마주의, 부두 노동자를 전전하며 이승만 정권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잠 자다가도 아버지 단재 선생의 이야기만 나오면 뛰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스크와 심장판막으로 1991년 작고했다.

이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족은 신수범 선생의 부인인 이덕남씨(62)와 그들의 자녀인 두 남매가 남았을 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포괄적인 독서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순간도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던 민족의 혼이었다. 123년(한성순보를 기점으로) 한국 언론사에 단재 선생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언론인은 없다. 또한 사학 연구에 있어서도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실증사학 등에 머물러 있을 때 당당하게 역사의 주체가 우리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뤼순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숨을 거둔 지 70년이 지난 지금 단재가 조국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국적도 없고, 묘도 제자리 못 찾고...며느리로서 피 토할 일"  
  [인터뷰]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  
 
 

현재 단재 신채호 선생의 장남인 신수범씨의 부인 이덕남씨는 베이징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면서 단재 선생의 자료 정리 및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 10일, 베이징에서 이덕남씨를 만났다.

- 단재 선생은 1910년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일보>나 <중화보>에 한국독립과 한중연합에 관해 기고하고 1인 매체를 만드는 등 많은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어느 정도나 정리가 된 상태인지요?
"정리는커녕 손도 못 대고 있다. 세월도 오래 지났지만 이후 중국도 혼란을 겪었다. 더더구나 문화대혁명 시대에 소실된 것이 많다. 일부 남아있는 것도 다 찾아내려면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간다. 당시에는 대부분 비밀리에 활동했다. 때문에 실명이 아니라 필명이었다. 아버님만 해도 필명이 현재까지 12개나 나왔을 정도다. 또 문맥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최소 석사 이상의 연구자들을 투입해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손도 못 대고 있다."

-단재 선생을 비롯해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중국 활동사 연구에 어떤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현재 아버님의 유고는 북한에 있다. 황석영 선생은 물론이고 조선족 학자들도 확인했다고 들었다. 남북한이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현재 아버님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하는 분들이 몇 분 있다. 대표적인 분이 최룡수(전 중앙당학교 교수), 권철(전 옌볜대 교수), 박충록(전 베이징 대 교수) 같은 분들이다. 모두 연로하신데 작고하면 큰 손실이다. 가능하면 정부 쪽에서 이분들을 활용해서 빨리 자료를 모아야 한다."

-단재 선생의 국적이나 호적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데요.
"한국 정부가 호적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지난해 8월 신기남 의원 등이 발의한 '무국적사망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안'도 현재까지 계류 중이다. 지난해 12월 국회 답변에서 천정배 장관은 조선인을 부모로 한 사람에게 국적을 주기로 했지만 생존한 사람으로만 국한했다. 때문에 아버님의 호적회복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2004년에 이장 문제로 복잡했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며느리 된 입장에서는 피를 토할 일이다. 98년부터 2004년까지 묘소에 14번의 붕괴가 있었다. 처음에는 보령의 큰 비 때문이라고만 여겨 괜찮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 계속 그랬다. 2001년부터 이장을 건의했는데 군에서 알았다며 동의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공청회 등을 한다고 해놓고 전혀 진척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옆으로 옮기로 했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진척이 없었다. 결국 2004년 9월23일 내가 일꾼을 불러 이장을 강행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묘는 도 기념물(제90호)로 지정돼 있어 형질변경 등 관련 절차를 밟지 않고 이장할 경우 문화재법에 저촉된다는 문화재 당국의 반대에 부딪혀 가묘 상태로 남겨져 있다. 다행히 단재 선생 순국 70주년 위원회가 이번에는 모금을 통해서라도 해결을 하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

- 단재 선생의 현재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아버님(단재 선생)은 독립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쫓겨 다니는 순간에도 역사를 제대로 증명하고자 저술을 남겼다. 지금 와서 보면 눈물이 난다. 고구려사는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변방 역사로 만들려 한다. 아버님은 그 역사를 진짜 우리 역사로 저술했다. 그런 것을 왜 우리 역사에서 빠져나가게 하는가." / 조창완
 
 
▲ <단재 신채호 평전>을 쓴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과 책 표지 이미지.
 
ⓒ 조성일
 
해마다 맞는 광복절이지만 60주년인 올해는 남다른 의미로 와 닿는다. 60이란 숫자가 십진법으로 떨어지는 숫자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의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한다는 환갑을 의미하기에 성대하게 기리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 해외에서 성대한 행사가 줄을 잇고 있고, 신문·방송도 여느 해와 달리 다양한 특집들을 다루고 있어 일단 겉치레는 그럴 듯하다.

이렇듯 특별한 이때 특별한 한 인물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럼 누가 좋을까? 그야말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라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한반도가 아직 분단국이란 점을 감안, 남과 북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금상첨화이리라.

그런 인물이라면 손으로 꼽아볼 수 있을 터, 신채호, 홍범도, 정약용, 전봉준 등으로 압축되는데, 때마침 나온 <단재 신채호 평전>(시대의창 펴냄)이 우리의 고민을 덜어준다.

해서 <단재 신채호 평전>을 쓴 김삼웅(62) 독립기념관장을 만나 단재의 삶과 정신에 대해 들어봤다. 김삼웅 관장과의 인터뷰는 광복절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인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11일 이루어졌다.

온몸으로 일제와 싸운 처절한 혁명가

“단재의 생애는 망국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일제와 싸운 처절한 혁명가의 삶이었습니다. 선생은 개인은 물론 가족의 안위와 영달 따윈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일제의 타도와 조국의 해방만을 위해 살다 가신 분입니다.”

<단재 신채호 평전>의 저자 김삼웅 관장은 십 수 년 준비한 책을 이제야 내놓게 되었다며 혹시 자신의 작업이 선생을 그리려다 선생의 뼛속까지는 고사하고 선생의 겉모습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세계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사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단재와 같은 지식인 혁명가가 있었기에 일제 강점기가 꼭 그렇게 패배와 좌절의 시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관장의 단재에 대한 평가는 흠모에 가까웠다. 김 관장은 이 책이 생애의 정사곡직(正邪曲直)과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담아내야 하는 평전이라는 점에서 의식적으로 단재의 흠결을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했다고도 했다.

더군다나 단재가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냈듯 그 역시 <대한매일신문> 주필을 지낸 이력 때문인지 김 관장은 단재와의 개인적 인연을 ‘운명’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단재는 격동의 시대에 지식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당시 성균관 박사로서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단재는 그 기득권을 버리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실천의 길에 나섰습니다. 씹던 껌도 버릴 땐 수없이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애국혼으로 뭉쳐진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셨던 그 분은 민족사의 모순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극복하려 했습니다.”

“품은 뜻은 천도였고, 잡은 붓은 사필이었다!”

 
▲ 단재가 북경에서 발행했던 순한문잡지 <천고>(왼쪽)와 독립선언문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혁명선언'(오른쪽)
 
ⓒ 김삼웅
 
전통유학자에서 개명유학자로, 또 공화주의자로 이념의 변화를 가졌던 단재는 일제시기엔 무장투쟁을 견지한 혁명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일제시대 발표된 수많은 독립선언문 중에서 내용과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의열단선언문’으로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단재는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명을 이렇게 부르짖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 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하자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이렇듯 단재는 서릿발 같은 자세로 일제와는 터럭끝만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지사라고 김 관장은 평가한다.

특히 단재가 북경 망명 시절 유일한 호구 수단인 <북경신문>의 기고마저 어조사인 ‘의(矣)’ 자를 편집자가 임의대로 뺐다고 하여 사장이 직접 찾아와 사과해도 끝내 기고를 거부했던 지사적 언론인의 결기와 행동이 바로 단재정신이라고 김 관장은 설명했다.

“특히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기 싫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세수를 하였던 단재는 가슴속에 만 권의 독서량이 쌓여서 피어나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넘쳐야 한다는 추사가 말한 선비의 자질에다 문사철, 무장투쟁, 직접혁명론을 갖추었고, 비록 체구는 왜소하고 말은 어눌했지만 품은 뜻은 천도(天道)였고, 잡은 붓은 사필(史筆)이었고, 행동은 가히 천하대장부였습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우리가 역사를 말할 때 유식한 체 하며 으레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나 E.H. 카의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를 인용하면서도 정작 단재의 그 유명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은 외면하는 현실을 김 관장은 개탄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생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조선상고사> 총론 중에서)

여기서 단재가 말한 ‘아와 비아의 관계’는 국가와 민족의 대립, 지주 자본가와 무산계급의 대립을 말하며 이러한 대립의 투쟁은 쉼 없이 계속된다고 했다.

“단재의 사관은 뚜렷한 자아 주체론입니다.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삼아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의 소장성쇠를 서술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재는 사학자로서 민족사학의 골격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국고대사 복원은 물론 잘못된 역사의 과오와 왜곡된 역사에 대해도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단재는 삼국사기를 백번 읽는 것보다 만주지역 고구려 유적지를 한 번 돌아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파하면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조상의 고토를 찾아다니며 고대사를 썼습니다. 우리가 단재의 고대사 연구만 제대로 배웠대도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물을 통해 역사 연구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단재사학은 단군조선의 수두제전(단군제)에서 민족의 기원을 찾고 영고·동맹·무천·소도 등 부족국가 열국의 민족제전, 고구려의 선배제도, 신라의 화랑제도로 성장 발전해왔다는 낭가사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 가묘 상태로 있는 단재 선생의 묘소
 
ⓒ 김삼웅
 
특히 단재는 애국심과 자강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해외 역사 서적을 번역했고,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과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 한국 사상의 영웅들의 책을 직접 저술하는 영웅사관을 견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을 통해 지도자들은 다 빠지고 의혈단 같은 민중들만 나서는 것을 보고 단재는 영웅사관을 폐기하고 민중의 직접혁명론을 이념으로 삼고 활동하기 시작한다.

“남북이 공동으로 <단재전집>을 발간하자!”

몇 년 전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30주기를 맞아 그의 평전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신문들이 앞 다투어 그에 관한 특집을 꾸미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김 관장은 다소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체 게바라 역시 유능한 혁명가로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만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투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민족해방을 위해 일제와 혈전을 벌이다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쓸쓸히 고단한 삶을 마친 단재 선생의 30주기, 50주기, 그리고 60주기를 우리는 어떻게 보냈습니까? 내년이 7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지금부터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일들을 모색해야 합니다.”

단재에 대한 우리의 홀대는 그뿐이 아니다. 눈 밝은 독자들은 가끔 언론에 회자되고 있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단재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여태껏 국적조차 회복이 안 된 상태이다.

“선생의 혼백이 깃든 망명기의 유고는 남북과 중국, 일본에 흩어져 여전히 ‘망명’ 신세고, 유족은 신산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구덩이에 잠긴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무덤은 파헤쳐져 가묘상태에 있고, 오자투성이인 묘비문은 바로잡을 날을 기약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김 관장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단재 선생을 기리자며 늦었지만 가묘 상태를 방치할 게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하는 ‘민주시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안장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북한 인민문화궁전과 국내외 산재한 유고를 모아 남과 북이 공동으로 단재 선생의 전집을 발간하자고 했다.

또한 단재 아들 수범씨가 제기한 죽음에 대한 의문도 풀어야 할 숙제라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김 관장은 여러 차례 루쉰감옥을 방문하여 자료를 찾으려 했으나 감옥에서 찍은 사진 한 장과 화장터를 확인하는데 그쳤다며 죽기 얼마 전 건강하다는 전보를 받았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점과 시신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서둘러 화장하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김삼웅 관장은 이번 평전 작업이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지만 단재의 삶과 죽음, 투쟁과 애국혼에 흠뻑 빠져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며 가없는 사상의 봉우리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학문의 심연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말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약력  
 
 
-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895년 첫부인 풍양조씨와 결혼
- 1898년 신기선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감
-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됨
-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됨
- 1907년 ‘신민회’에 가담
- 1910년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청도를 거쳐 해삼위로 망명
- 1914년 고구려 유적 답사
- 1918년 북경의 보타암에서 <조선사> 집필
- 1919년 대한독립청년단 단장이 됨
- 1920년 박자혜와 재혼
- 1921년 맏아들 수범 출생. 한문체 잡지 <천고> 발행
- 1922년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 저술
- 1923년 의열단 요청으로 ‘의열단 선언문’ 작성
- 1924년 임시정부가 창조파를 탄압하자 북경으로 가서 ‘다물단’ 조직
- 1928년 대만 무정부주위 비밀결사 사건에 관련, 국제 위체 사기문제로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10년을 받고 루쉰감옥에서 복역
- 1936년 2월18일 루쉰감옥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3일 후인 21일 오후 4시20분 옥사. 다음날 오전 11시 화장됨

 

 

 

역사만이 희망이다, 단재 신채호 [역사스페셜] - 1부 / KBS 20010310 방송

https://youtu.be/Zmp5eoDNLLs

 

<참고자료>

 

신채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채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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