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피릿 입력 2023.05.17 22:19 기자명강나리 기자

중국 소재 고구려 유물 유적 총 971건 집대성 완간  - K스피릿 (ikoreanspirit.com)

 

중국 소재 고구려 유물 유적 총 971건 집대성 완간 - K스피릿

현재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유물과 유적은 한국학자의 접근이나 직접 조사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해당 유물, 유적에 대한 조사는 20세기 전반 일본학자가, 1950년대 이후에는 중국학자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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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재 고구려 유물 유적 총 971건 집대성 완간

동북아역사재단,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10권…지도‧구글 지형도까지

 
동북아역사재단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총서 중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환도산성, 국내성, 집안고구려비 출토지 등 통구분지 전도. 10만분의 1 지형도 또는 구글 지형도로 주변 지리환경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사진 총서 중 통구분지1편 갈무리.

현재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유물과 유적은 한국학자의 접근이나 직접 조사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해당 유물, 유적에 대한 조사는 20세기 전반 일본학자가, 1950년대 이후에는 중국학자가 주도했다. 1992년 한중 수교로 한국학자에게도 접근의 길이 열렸지만,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한 이래 한국학자의 직접 조사는 통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학자는 기존 일본학자나 중국학자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각종 조사보고서나 연구논저가 여러 간행물에 산재하거나 절판된 경우가 많아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컸다.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은 2007년부터 15년간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집대성 작업을 추진한 결과, 지난 16일 통구 분지(우산하, 하해방, 만보정, 칠성산고분군) 총서를 끝으로 완간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16일 2007년부터 15년간 집대성한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총서를 완간해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권은 통구분지1편이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재단은 “총서를 통해 앞으로 고구려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뿐 아니라 중국 역사 왜곡에 대응할 기초자료이자 각종 역사콘텐츠 개발, 제작에 널리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발간된 총서는 김현숙 재단 수석연구위원이 총괄기획을 하고, 여호구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았다. 공동 연구원으로 강현숙 동국대 WISE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백종오 한국교통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김종은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초빙연구원, 이경미 전 한국외국어대 강사, 정동민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 집대성 사업은 1단계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DB 구축용 기초자료 정리를 진행했다. 2007년과 2008년 고구려의 발상지 압록강 중상류를 시작으로, 2009년부터 2011년에 국내성 통구분지, 2012년부터 2014년 요동반도와 요하, 송화강, 두만강 유역 등의 유적과 유물을 정리했다. 또한, 2015년과 2016년에는 첫 조사 이후 새롭게 조사된 유적 정리 작업을 했다.

DB구축사업 추진 결과 고분군 246곳과 개별 고분 269기, 성곽 301곳, 성곽의 개별 유구 31기, 기타 유적 40곳, 개별 유물 84개 등 총 971건의 유적, 유물을 정리했다.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총서에는 지형도와 더불어 각종 도면이 첨부되어 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총서 갈무리.

이어, 2단계로 기존의 DB 구축용 기초자료를 재정리해 총서를 발간함으로써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각 유적의 전체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총서 각 권의 서두에 지역별 전체 현황을 종합하고, 시와 현 행정구역이나 유적군 단위로 부部를 설정해 각 유적 현황을 정리하고 역사적 성격을 고찰했다.

특히, 총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10만분의 1 지형도나 구글 지형도에 유적 위치를 표시해 현장을 가보지 않아도 주변 지리환경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한 점이다. 아울러 각종 도면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수정보완해 전문 학술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금관]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신동아 (donga.com)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고구려 금관(?) 최초 발견기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 입력2014-01-23 11:07:00
 
  • 가야 포함한 삼국시대는 세계 유일의 금관 공동체
  • 대일항쟁기 ‘니시하라’라는 고물행상한테 구입
  • 1000여 년 이상 무덤에 있다 출토된 금관인 것은 확실
  • 동북공정에 맞서려면 금관을 연구하라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이다. 왕관이 아니라 금관 분야에서. 금관이란 금판을 기본으로 만든 관(冠)을 가리킨다. 청동이나 구리로 만들거나 금도금한 ‘금동관’ 등은 금관으로 치지 않는다. 천이나 말총, 자작나무 껍질 등으로 기본을 만들고 보석이나 금붙이를 ‘꾸미개(관식·冠飾)’로 단 유럽 왕실의 화려한 왕관도 금관으로 보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의 수는 13개다. 그중 9개가 한국에서 출토돼 현재 8개가 한국에 있다. 한국에서 출토된 9개 중 신라 것이 6개, 가야 것이 3개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 꾸미개는 나왔어도 완전한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의 무덤은 ‘처절할 정도’로 도굴을 당했기에, 꾸미개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

이러한 한국이 금관 수를 하나 더 늘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전 세계에 14개가 있는데, 10개가 한국에서 나와 9개를 보유하게 됐다”라고. 추가된 것이 보통 금관이 아니다. 소장자가 고구려 금관으로 주장하는 데다, 이 금관을 최초로 조사한 상명대 사학과의 박선희 교수도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최근 경인문화사에서 출간한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란 저서에서 이 금관을 고구려 것이라고 판정했다.

더 많은 조사가 이뤄져야겠지만 이들의 주장과 판단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우리는 최초로 고구려 금관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현대 기술로 정교히 제작된 ‘가짜’라면 정반대의 결과를 맞는다. 제3의 결과도 나올 수 있다. 더 많은 전문가가 고구려가 아닌 다른 왕조의 금관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른 왕조란 백제를 지칭하는데, 이러한 결론이 나오면 우리는 최초로 백제 금관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최초로 공개된 ‘고구려 금관’. 유물수집가이자 문화재 전문가인 김모 씨가 공개했다. 평남 강서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일항쟁기 소금판매업을 한 김 씨 조부가 구입해 집안에서 보관해온 것이라고 한다. 신라나 가야 금관과는 세움장식의 모양이 다른 게 눈에 띈다. 오른쪽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불꽃 무늬 모양의 금제(金製) 관(冠) 꾸미개.

 
우리 금관은 머리 위에 올리는 ‘관테’(과거에는 꼭 한자를 썼기에 ‘대륜·臺輪’으로 표기했다)와 관테 위에 세워놓는 ‘세움장식’(立飾·입식), 그리고 관테와 세움장식에 달아 화려함을 더해주는 ‘달개장식’(瓔珞·영락)으로 구성된다. 신라 금관이 ‘날 출(出)’자 모양의 나뭇가지형 세움장식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야 금관의 세움장식도 나뭇가지 형으로 보이나 신라 것과는 형태가 다르다.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관 꾸미개는 일렁이는 ‘불꽃 무늬’ 모양이다.

이번에 공개된 금관의 세움장식이 불꽃 무늬에 가깝다. 그러니 ‘최초로 나온 완전한 백제 금관이 아니냐’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장자와 최초 판단자가 고구려 금관이라고 주장하니 이를 수용하기로 한다. 사상 최초로 나온 고구려 금관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금관에 대한 정리를 한다.

통일 이후 금관을 만들지 않아

우리나라 금관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다. 통일신라부터는 금관을 만들지 않았다. 삼국 통일 직전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동맹을 맺은 후 중국식 제도와 복식을 도입하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때는 중국식 관복과 관모가 정착됐으니 금관과 금동관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국에는 가야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4국시대로 불러야 하는데 관례에 따라 그냥 삼국시대로 부른다.

신라의 금관 6개는 대일항쟁기 일제가 발굴한 금관총·금령총·서봉총 금관, 광복 후 우리가 발굴한 천마총·황남대총 금관 그리고 ‘교동 금관’이다. 이 가운데 가장 고졸(古拙)한 것이 1960년대 경주 교동에서 도굴돼 밀거래 직전 관계당국에 압수된 ‘교동 금관’이다.

신라의 여섯 금관. 왼쪽부터 다섯 개는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금관이다. 모두 나뭇가지 모양을 단순화한 ‘날 출(出)’자형 세움장식을 우뚝 달고있다. 오른쪽은 나뭇가지 모양을 ‘뫼 산(山)’자 형으로 단순화한 세움장식이 달려 있는 교동 금관.



가야 금관. 위에서부터 리움금관, 오구라금관, 호림금관. 리움 금관은 ‘현풍도굴사건’으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최종 구입한 리움 금관에는 ‘날 출(出)’자형 신라 금관 처럼 곡옥(曲玉)이 달개장식으로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도굴됐기에 객관적으로 출토지를 증명할 수 없는 유물에는, 출토지로 주장되는 곳 앞에 ‘~라고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 자를 붙인다. 교동에서 도굴로 출토됐다고 하는 금관은 ‘전(傳)교동 금관’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전’자를 떼어낸다. 알려지는 출토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면 소장한 곳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신라 금관은 관테 위에 ‘날 출(出)’자 형태의 세움장식 여러 개가 우뚝 서 있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교동 금관만은 ‘뫼 산(山)’자 형태에 가까운 ‘세움장식’ 세 개만 삐죽 올라와 있다. 미적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것이다. 교동 금관은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가야 금관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학자들은 교동 금관이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됐을 것으로 본다.

일제가 발굴한 최초의 금관인 금관총 금관은 국보로 지정됐다. 그다음으로 발굴해낸 금령총과 서봉총 금관은 최초가 아니기에 보물로 지정됐다. 반면 광복 후 우리가 처음으로 발굴해낸 천마총 금관과 두 번째 발굴해낸 황남대총 금관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이는 국보 지정에도 ‘최초냐 아니냐’ ‘우리가 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치적 판단이 개입한다는 뜻이다.

교동 금관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도 도굴된 탓인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 다른 판단도 해볼 수 있다. ‘고졸하다고 해서 반드시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추측이다. 이는 기술이나 물자가 부족하면 후대에 했더라도 수준이 떨어진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제작 시기를 알려면 이 금관과 함께 나온 동반유물을 조사해봐야 하는데, 교동 금관은 도굴로 세상에 나왔으니 당연히 동반 유물이 없다. 그래서 국보나 보물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신라 금관보다 단순한 가야 금관

가야 금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전(傳)고령 금관’, 일명 ‘리움 금관’이다. 이 금관은 대가야가 있었던 경북 고령군에서 도굴로 출토됐다고 하여 ‘전고령 금관’으로 불린다. 여러 차례 거래되다 최종적으로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매입해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돼 있기에 ‘리움 금관’이라고도 한다. 이 금관은, 도굴 세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1963년의 ‘현풍도굴사건’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사건은 경북 달성군 현풍면 농민을 포함한 일단의 도굴꾼들이 현풍면을 비롯한 경북 일대의 고분을 대놓고 도굴해 출토품을 밀거래하다 대구경찰에 검거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다. 규모가 컸고 귀중한 유물을 다수 밀거래했기에 ‘현풍도굴사건’으로 불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검찰에 송치돼 조사받던 중 한 도굴꾼이 “금관이 발견돼 다른 도굴꾼 몰래 빼돌려 매매했다”고 자백했다. 광복 후 이 땅에서 최초로 금관이 나왔다는 자백인지라 온 나라가 주목했다(천마총 금관은 1973년 발굴됐다).

당국은 “그 금관은 매각돼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회장이 구입해 1971년 중앙박물관에서 자신의 호를 딴 ‘호암컬렉션’전을 하면서 공개했고 국보 138호로 지정됐다. 이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교동 금관처럼 반드시 불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 백자의 99%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진품으로 판정하고 제작시기를 추정하면 당당히 국보로 지정된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일본 도쿄(東京)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금관’이다. 이 금관은 대일항쟁기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을 한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매입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오구라는 문화재 환수 운동을 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거론하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오구라가 죽자 1981년 그의 아들이 기증해 도쿄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 금관을 둘러싼 최대의 궁금증은 출토지다. 오구라는 경남 창녕군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을 주로 수집했기에 이 금관도 창녕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에 ‘전(傳)창녕 금관’으로 부를 수도 있다. 창녕에는 ‘삼국유사’에 후기 6가야 중의 하나라고 기록된 ‘비화(非火)가야’가 있었으니, 이 금관도 가야 금관으로 분류됐다. 이 금관에서는 풀잎이 양쪽으로 갈라져 솟은 듯한 세움장식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의 3대 사립 박물관으로는 리움미술관과 고 전형필 선생의 유물을 모은 간송미술관, 그리고 수집가로 유명한 윤장섭 선생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세운 호림박물관이 꼽힌다. 호림박물관도 가야시대 것으로 주장하는 금관을 갖고 있다. ‘호림 금관’으로 불리는 이 금관은 아주 단순한 모양이다. 장식 없는 관테에, 앞에는 나무줄기 형상의 세움장식, 뒤에는 더 작은 세움장식 하나가 있다.

원산에서 큰돈 번 조부가 구입

호림박물관 측은 이 금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증언이나 자료 없이 가야 금관이라고만 주장한다. 윤장섭 선생 자녀를 포함한 박물관 측에 수차 연락했지만 응답이 없거나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호림박물관은 문화재청에 평가나 감정을 요구한 적이 없기에 이 금관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가야 금관은 매우 수수하다. 그래서 신라 금관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가야 금관이 신라 금관에 영향을 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금관을 만들기 전 두 나라는 모두 금동관을 제작했으니, 그 기술이 각자의 금관 제작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고구려 금관은 평남 강서군에서 도굴 형태로 출토됐다고 하니 ‘전(傳)강서 금관’으로 부를 수 있다. 이 금관의 출토 경위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는 것은 소장자 김 씨(익명 요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일항쟁기 함남 원산에서 사업을 했던 조부가 ‘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한 ‘서원용성(西原用成)’이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이 금관을 아버지(1917년생, 97세)로부터 전해 받았는데 여기엔 사연이 있다. 그는 조부모를 본 적이 없다. 원산에서 만주로 소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해 큰돈을 모은 조부모는 광복 후 월남하지 못했고, 그는 6·25전쟁이 끝난 1960년대 초 출생했기 때문이다. 조부모는 6남매를 뒀다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남이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아버지)은 일본 주오(中央)대를 다니게 하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성남중에 다니게 했다.

광복 후 바로 분단이 됐기에 일본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원산으로 가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서울 신길동 집에 거주했다. 할아버지가 골동품 수집에 대단한 취미가 있어 상당한 유물을 수집했으며 둘째 아들을 공부시킬 때부터 서울 집에 상당 부분을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이 유물을 감추고 피난 갔다. 서울 수복 후 돌아와보니 다행히 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남한에 남은 유일한 핏줄인 동생을 잃었다(행방불명). 그리고 한참 지나 그가 태어났다. 재산이 있었던 그의 아버지도 골동품을 수집했다.

그는 “철이 든 뒤로 우리 집에 골동품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중요한 것만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이 금관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큰 취미가 없어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라고 말했다. K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화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도 유물 수집을 시작한 것.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기에 먹고사는 일로 급급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재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문화재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즐겨 사용한다. 외부인을 만날 때는 ·#52059;·#52059;역사문화연구소 이사 명함을 내놓는다. 또 다른 K대에서 문화재보존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의 집에는 유물이 넘쳐나기에 그는 3대에 걸쳐 수집한 유물을 고려대 중앙박물관, 단국대 석주선기념관, 상명대 계당박물관, 전북 부안의 청자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동북공정 보며 고구려 금관에 주목

김 씨 조부에게 전강서 금관을 판매한 고물행상 서원용성(‘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의 명함 전면과 뒷면.

 
15년 전 그는 인연 있는 상명대 사학과 교수팀과 도예지 답사에 갔다가 함께 온 박선희 교수와 인사를 했다. 둘은 ‘주체성 있는 역사’에 관심이 일치했기에 가끔 만나면 토론을 하며 교분을 쌓아갔다. 그리고 2003년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펼치는 것을 목도했다.

그는 집에 고구려 금관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중국에서는 금관이 단 한 점도 나온 게 없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처럼 고구려도 금관을 제작했다면, 고구려가 우리 문화권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라는 생각을 한 것. 그는 금관을 싸놓은 보따리에 들어 있던 명함을 떠올렸다.

그 명함 전면엔 ‘古物行商(고물행상)’이라는 직업명과 ‘西原用成(서원용성)’이란 이름, ‘京城府 鐘路區 明倫町 三丁目 七七番地(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란 주소가 찍혀 있었다. 뒷면에는 ‘江西郡 普林面 肝城里 金冠(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금관)’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대일항쟁기의 고물행상은 골동품상이다. 이는 조부가 ‘니시하라’라는 일본 성을 쓰는 골동품상으로부터 (평남)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출토된 금관을 매입했다는 뜻이었다.

강서군에는 고분이 많은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 고분들은 고구려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 때문에 일제는 그곳의 고분을 집중 조사해 그 결과를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정리해놓았다. 조선고적도보는 지금도 고구려 고분을 연구할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꼽힌다. 금관은 삼국시대에만 제작됐고, 이 금관은 강서군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는 고구려 금관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더는 추적하지 못했다.

중국 조사 ‘고구려 금관 있었다’

5년이 지난 2008년 박선희 교수가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란 책을 출간했다며 한 권을 보내왔다. 복식사(服飾史) 전공인 박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고조선 시대부터 ‘꼬깔(‘절풍’으로 부르기도 한다)’류의 모자를 써왔는데 여기에서 금관이 유래했다고 정리했다. 이 책을 읽어본 김씨가 박 교수를 만나 집에 보관해둔 고구려 금관을 보여주었다. 무릎을 “탁” 친 박 교수는 그때부터 고구려 금관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輯安)시에는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 등 고구려 고분이 즐비하다. 2003년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 등은 그곳에서 그들이 ‘마선 2100호’로 명명해놓은 대형 고구려 무덤을 발굴했다. 장군총처럼 계단식(4단)으로 돼 있는 무덤인데 장군총과 달리 허물어져 있었다. ‘당연히’ 도굴당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돌을 긁어내며 정밀 조사를 하자 550여 점의 유물과 유물 조각이 수습됐다. 그중에 금관에 달았을 것이 분명한 작은 금판의 달개장식이 여럿 나왔다.

봉건시대에도 도굴은 엄금했기에, 도굴꾼들은 금제품을 발굴하면 바로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청자나 백자는 그대로 유통시켜도 금붙이만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우그러뜨린 다음 녹여서 금덩이로 만들어 거래한 것. 무덤에 들어간 도굴군들은 횃불 등을 켜놓고 이 짓을 했으니, 우그러뜨리는 과정에서 작은 금붙이들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물고고연구소가 그것들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천추(千秋)묘’라는 별명이 붙은 ‘마선 1000호’ 고분을 재조사해 금으로 만든 달개장식과 금동으로 만든 달개장식, 금동으로 만든 관테 조각을 찾아냈다. ‘우산 541호’로 지정해놓은 광개토태왕릉도 정밀 재조사하자 금제 달개장식과 금동제 달개장식, 금동제 관테 등이 출토됐다. 그 양이 매우 많아 한데 모아놓자 한보따리에 이르렀다. 이는 두 무덤에 금관과 금동관이 있었는데 오래전에 도굴당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이 자료를 수집한 박 교수는 고구려 고분에는 금관과 금동관이 부장됐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대일항쟁기에 처음 도굴된 고구려 무덤이라면 금관이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과학적인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전강서 금관에는 달개장식 하나가 떨어져 있었는데 이를 공주대로 보내 진짜 금인지부터 가려보기로 한 것이다. 공주대 연구팀은 성분 분석 후 ‘금 78.5%, 은 19.1%, 기타 1.6%’라는 결과를 보내왔다. 금동관이 아니라 금관임을 확인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금 성분이 78.5%라는 데 주목했다.

금관의 때는 위조할 수 없다

김 씨는 “현대는 기술이 발전했기에 이러한 순도의 금은 만들지 않는다. 현재 금관을 만든다면 금 함유율이 99%, 적어도 90%가 넘는다. 은이나 동은 섞여 있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이어 두 사람은 금관 몇몇 곳에 끼어 있는 새까만 ‘때’에 주목했다. 순금은 녹이 슬지 않는다. 그러나 1000년 이상 무덤에 들어 있으면 시신과 공기 중의 유기물이 썩으면서 금관에 점처럼 침착(沈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때’는 녹이 아니기에 화학처리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덤은 갇힌 공간이라서 공기가 적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많은 산소를 소모하고 나면 산소가 거의 사라져 금속의 부식이 억제된다. 그 때문에 쇠로 만든 제품은 발굴하는 순간 갑자기 많은 산소와 접촉하게 돼 순식간에 부식된다. 이를 막기 위해 발굴자들은 금속품은 발굴하자마자 바로 화학처리를 한다. 이를 역이용해 지금은 금속을 화학처리해 1000여 년간 부식이 억제되다 갑자기 녹슨 것처럼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영악한 골동품상들은 이 방법으로 가짜 금속 유물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기물이 변한 침착물만큼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1000년 만에 발굴한 무덤이면 1000년간, 1500년 만에 발굴한 무덤이면 1500년간 소량의 유기물이 붙어 침착해가면서 만들어진 때는 현대 기술로도 복제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일본 도쿄박물관도 침착물이 붙은 상태로 오구라 금관을 내놓았다. 김 씨는 “이 금관에도 제거되지 않는 침착물이 붙어 있다. 이는 이 금관이 1500여 년간 무덤에 갇혀 있었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김 씨와 박 교수는 이 금관이 신라나 가야 금관과는 세움장식이 다르고 강서군에서 출토됐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시하라 명함의 손글씨를 제외하고는 이 금관이 강서군에서 출토됐다는 증거는 여전히 없는 상태다.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던 기자는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강서군의 보원면과 학림면을 통합해 ‘보림면’으로 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보림면은 1914년 이후 등장했다. 그렇다면 니시하라는 1914년 이후 이 명함을 사용한 것이 된다.

기자는 일제가 강서군 일대의 고분 등을 조사 기록한 ‘조선고적도보’ 등을 찾다가 2010년 동북아역사재단이 4권으로 편찬한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이라는 도록을 보게 됐다. 이 재단의 김현숙 연구위원과 경북대 고고인류학과의 정인성 교수팀이 제작한 이 도록에는 조선고적도보 등을 토대로 일제가 조사한 간성군의 무덤 목록이 기재돼 있었다. 그중에서 간성리 고분으로 무덤 천장에 연꽃 무늬 그림이 있었다고 해서 일제가 ‘연화총(蓮花塚)’으로 명명한 것 하나가 있었다.

니시하라는 누구인가

연화총 조사는 ‘조선고적도보’를 만든 세키노 다다스(關野貞·1867~1935)와 훗날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 등을 조사해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사의 기초를 다진 야스이 세이이치(谷井濟一·1880~1959)가 시도했다. 두 사람은 고조선사도 펴냈는데 그때 ‘낙랑군 등 한4군이 북한에 있었다’고 비정해 지금도 우리는 한4군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배우고 있다. 중국의 많은 사료는 한4군이 요서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갑갑한 ‘반도사관’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1912년 9월 12일 연화총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미 도굴당해 쇠로 만든 못 하나만 발견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렇다면 ‘1912년 이전 누군가가 연화총을 도굴해 이 금관을 갖고 있다가 1914년 이후 김 씨 조부에게 판매한 것일까’ ‘아니면 간성리에 있는 다른 고분을 도굴해 꺼낸 것일까’ 등의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찾기 어려웠다.

니시하라의 주소지인 명륜정은 지금 명륜동이다. 대일항쟁기 명륜정은 성균관이 가까이 있어 조선인이 많이 살았다. 일본인은 명동과 용산 일대에 몰려 살았다. 니시하라의 이름인 ‘용성(用成)’은 일본인에게서는 잘 발견되지 않고 조선인 이름에서 많이 보이는 한자다. 그렇다면 성은 일본식으로 바꾸고 이름은 그대로 쓰는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고물행상이 이 금관을 김 씨 조부에게 팔았는지도 모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한 시기가 1940년부터이므로 니시하라는 1940년 후 이 금관을 김 씨 조부에게 팔았는지도 모른다. 기자는 여기까지 추적했다.

삼국시대는 금관-금동관 공동체

주체성 있는 역사를 추적하는 사람들은 평남 강서군을 고구려 영역으로만 보는 것에 반대한다. 이들은 백제가 대륙에 있다가 북한을 거쳐 경기-충청-호남지방으로 남하했다고 본다. 이들은 “강서군 일대의 고분은 중국 지안 일대의 고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며 이 무덤들을 백제 것으로 보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뿌리(동명왕)에서 나왔기에 유사성이 강한데, 일본인 학자들이 백제 영역을 경기-충청-전라도로 비정해놓은 사관에 갇혀, 강서군 고분을 고구려 것으로 쉽게 비정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지금 한국 사학계는 강서고분군(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각종 유물을 낙랑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낙랑군은 그 지역에 없었는데 왜 낙랑유물로 규정하는가. 그 유물은 강서지역에 있던 백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시기 고구려는 보다 북쪽인 지안과 랴오양(遼陽) 등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수용하면 전강서 금관은 백제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2003년 중국의 재조사 결과는 고구려도 왕릉에 금관을 넣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고구려는 금관을 만들지 않았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어 전강서 금관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니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말려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제가 만든 고조선사와 고구려사에 갇혔고, 지금은 중국이 만드는 고조선-고구려사에 휘둘린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중국과 완전히 구분되는 금관-금동관 공동체였다는 것을 우리 역사학계는 왜 외면하는가. 김씨와 박 교수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무능과 무소신을 감추기 위해서인가. 이제는 역사학계가 나서서 이 금관에 대한 정밀조사를 하고 니시하라의 정체를 추적해야 한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규정하고 싶다면….

(이 금관을 찍은 동영상 등 보다 많은 정보는 blog.donga.com/milhoon에서 소개한다).

다른 나라가 소장한 금관

틸리아테페, 사르마트, 이시크, 진국공주 금관


다른 나라의 금관 가운데 셰계적으로 유명한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테페(Tillya Tepe)’ 6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이 금관은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전해에 발굴됐다, 소련 강점기와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기를 이겨내고 살아남아 최근 세계인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두 번째는 흑해 북쪽에 있는 로스토프 지역 노보체르카스크 호흐라치 무덤군(群)에서 출토된 ‘사르마트(Sarmat) 금관’이다. 사르마트인들은 금 세공에 능했던 스키타이인들과 교류하고 싸웠던 종족이다. 일부 학자들은 사르마트인들을 스키타이 종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 금관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세 번째가 알마타 동쪽에 있는 이스크(Issyk)의 적석(積石)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황금 옷과 황금 검, 황금 모자로 치장한 전사(戰士) 시신에 씌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시신은 사라져 전사의 체구가 작다는 것만 확인했다. 전사에게 씌운 것이라 투구에 가까운 모양이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네 번째가 중국 내몽골자치구 철리목맹(哲理木盟)에 있는 요(遼)나라 진국(陳國)공주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도 이시크 금관처럼 머리에 눌러써서 뒷머리까지 덮어버리는 투구형이다.

우리 금관과 전혀 다른 형인데 이러한 것도 금관으로 본다면 우리 금관은 더 늘어난다. 금관총과 천마총에서는 고깔 형태의 금관모도 출토됐기 때문이다.

요나라는 중국으로 볼 수 없다. 북방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한족이 세운 송(宋)나라를 공격해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과 만주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 시기 중국의 정통은 송나라가 이었다. 진국공주 무덤의 유물은 전부 프랑스 기메(guimet) 박물관에 있다. 이 박물관은 신라 금동관도 소장하고 있다.

백제와 가까웠던 일본에서는 아직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 금동관 신라형 금동관은 여럿 출토됐다. 후지노키(藤ノ木) 고분에서는 전강서 금관과 비슷한 불꽃 무늬 또는 가지 많은 나무모양으로 볼 수 있는 세움장식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일본은 우리 금관-금동관 문화권의 아류로 판단된다.

틸리아테페, 사르마트, 이시크의 황금전사(머리에 쓰인 것을 금관으로 본다), 진국공주 금관(왼쪽부터). <출처 위키피디아와 http://blog.naver.com/PostView

 

[고분벽화]  

강영진입력 2020. 9. 1. 06:42

 

황해남도 월지리에서 고구려 벽화무덤 2기 새로 발굴 (daum.net)

노동신문 보도..지금까지 없던 별자리 등 무늬 다수
금귀걸이, 꽃잎모양 장식품 등 금장식 9점도 출토
북한 고고학회, 6세기 전반기 귀족 무덤으로 확인
[서울=뉴시스]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 월지리에서 최근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2기를 새로 발굴했다고 북한 노동신문이 1일 보도했다. (출처=노동신문) 2020.09.01.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 월지리에서 최근 고구려벽화무덤과 유물들이 발굴됐다고 노동신문이 1일 보도했다.

신문은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고구려벽화무덤 2기와 금장식품들을 새로 발굴, 고증했다고 전했다.

첫번째 벽화무덤은 무덤 내부의 천정이 평행삼각고임천정으로 된 석관흙무덤으로 전통적인 고구려의 형식이며 4개의 벽면과 천정에 사신도와 별자리, 연꽃무늬, 구름무늬, 연꽃잎, 보리수, 거북등무늬 등 그림의 일부 부분들이 발견됐다. 별자리, 연꽃무늬 등은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두번째 벽화무덤도 석관흙무덤으로 해를 형상한 그림을 비롯한 많은 벽화의 일부분들이 남아있다.

또 정밀하게 가공된 금귀걸이와 꽃잎모양의 장식품을 비롯한 9점의 금장식품들도 출토됐다.

북한 고고학회에서는 이번에 발굴된 벽화무덤들이 6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했다.

고구려시기 3품 이상의 관료들만 벽화무덤을 쓸 수 있었다는 문헌자료가 있는 것을 볼때 이번 벽화무덤 발굴은 이 지역이 고구려의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입력 2017.09.21 06:41

北, "고구려 벽화무덤 새로 발굴"...3세기 축조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일보

북한이 최근 평양시 외곽에서 고구려 시기의 벽화무덤을 새로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에서 고구려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무덤을 새로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통신은 이날 "최근 평양시 낙랑구역 보성리에서 고구려 벽화무덤이 새로 발굴되었다"며 "지하에 돌로 무덤칸(묘실)을 만들고 흙을 씌운 외칸으로 된 돌 칸 흙무덤"이라고 밝혔다.

무덤칸 크기는 길이 300㎝, 너비 268㎝, 높이 184㎝다. 검은색 안료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북쪽·동쪽·서쪽 벽의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보도 내용이다.

통신은 "북쪽 벽에는 무덤의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것으로 보이는 수레가, 그 아래위로는 창을 든 군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며 "동쪽 벽에는 3열로 구성된 개마무사(고구려 기병) 대열이 형상되어 있으며 서쪽 벽에는 북쪽을 향하여 달리는 말과 건물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최근 평양시 외곽에서 고구려 시기의 벽화무덤을 새로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통신은 벽화에 대해 "무덤의 구조 형식과 벽화의 내용, 그곳에서 나온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무덤이 3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무덤에 그려진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 무덤 벽화가 선각화(線刻畵)로부터 검은색으로만 그린 단색화 과정을 거쳐 채색화로 발전하였다는 것이 해명되었다"고 덧붙였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과 방울, 도기, 뼈 장식품 등도 출토됐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입력 2016-04-08 08:00업데이트 2016-04-08 08:00

삼족오. 중국 원태자 벽화묘 그림
 
“앗, 삼족오다!”

“곰도 보이네.”

3월 중순 인하대 6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4~5세기 동북아시아 고구려계 벽화고분 이해를 위한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현장에서 나지막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둥그런 태양 안에 긴 꼬리와 세발 달린 삼족오의 모습이 들어 있는 ‘태양도(太陽圖)’와 검은 곰이 두 앞발을 번쩍 들어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흑웅도(黑熊圖)’ 벽화를 보고서였다. 중국 랴오닝(遼寧) 성 차오양(朝陽) 지구 원태자(袁台子)촌 벽화묘에서 발견된 것들이었다. 50여 명의 청중은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벽화들을 연신 카메라로 찍어댔다. 직감적으로 우리 문화와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실제로 태양 안의 삼족오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문화 상징으로 꼽힌다. 각저총, 오회분 4호묘, 덕화리 1, 2호분 등 고구려 벽화 무덤에서는 삼족오가 등장한다. 검은 곰 역시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건국 신화의 곰과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그 전에 랴오닝 성 핑강(平岡)지구 유적에서는 삼족오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금동장식이 출토돼 한국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슬라이드로 벽화 그림을 소개하는 중국 요령성 문물고고연구소의 고분 전문가 이용빈(李龍彬) 부소장은 원태자촌 벽화묘를 전연(前燕)시대의 묘이며 선비족의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중원 지역의 한문화(漢文化)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는 ‘고구려’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준비해온 100여 장의 벽화 슬라이드를 빠른 속도로 넘겨 갔다. 국내에서는 한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벽화 자료들도 여러 장 있었다. 슬라이드 자료를 마구 찍어대는 청중들의 카메라 세례에 당황했던지 그는 서둘러 강연을 마쳤다.

수렵도. 중국 원태자 벽화묘에 새겨진 사냥하는 장면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주관한 이날 대회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분 벽화 연구 전문가 10여 명이 참가한 최초의 국제대회다. 중국 동북 랴오닝 성과 한반도, 일본 규슈 지역에 분포한 벽화고분의 역사와 해석, 벽화고분의 전파 경로 등을 발표하는 자리로 일본과 중국에서 8명의 연구자들을 초청했다. 행사 진행을 맡은 인하대 복기대 교수(융합고고학)는 “한국학계 주도로 중국, 한반도, 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석실 벽화 고분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논의해 보는 자리다. 이 주제를 놓고 3국 학자들이 처음 만나는 회의이니만큼 이를 시발점으로 고구려계 벽화고분 연구가 고대사 문화교류 연구에 중심축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중국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 차오양 등 지역에서 대거 발굴되고 있는 고분 벽화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모아졌다. ‘고구려 고분연구의 새로운 제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염정하 연구교수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고구려 고분 벽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5세기 중엽 이후에 만든 중국 랴오닝 성 일대의 고분들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한다”고 밝혔다. 염 교수는 문헌기록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중심부의 위치 변화와 벽화 고분 내용을 비교해본 결과 고구려의 고도(古都) 지안(集安) 지역과 랴오양 지역의 고분 벽화는 연결 구도가 뚜렷한 반면, 중국 중원지역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염 교수는 몇 가지 근거를 들었다. 첫째, 고구려와 중국 랴오양 지역에서 나타나는 석실봉토 벽화분은 중국 중원에서 발견되지 않는 무덤 양식이라는 것. 중국 황하 유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무덤 양식은 전실화상석 무덤으로 고구려와 중국 랴오양 지역의 석실봉토 무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현재 랴오양 지역에서 발견된 석실봉토 고분은 25기 정도. 앞서 중국인 학자가 보여준 벽화그림 상당수가 북원(北園) 1, 3호묘, 상왕가촌묘(上王家村墓), 봉대자(棒臺子) 1호묘, 삼도호(三道壕) 1호묘, 남교가(南郊街) 벽화묘 등 석실봉토 양식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한중일 삼국의 고분벽화 전문가들이 참가한 국제 학술대회.

둘째, 고구려의 요동성총과 랴오양 벽화고분에서는 구조상 유사점이 있으며, 묘주(墓主)의 생활상과 천상 세계 묘사 등 벽화에서도 공통점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사료를 살펴볼 때 4~6세기 중국 랴오양 지역은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계의 영역으로 추정된다는 것. 즉 중국 랴오닝 성 일대의 벽화는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와 관련이 깊다는 주장이다.

“여러 면에서 고찰해볼 때 중국 랴오양 지역과 황화 유역은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나 일본학계가 랴오양 지역의 벽화 무덤을 모두 중국계인 한-위·진 시대의 벽화로 인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구려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동안 일본학계 주도로 진행한 고구려계 벽화고분 연구가 기존 문헌기록과 맞지 않는 등 많 은 문제점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현재 북한의 평양 지역에 나타나는 벽화고분 연대와 내용은 중국 한나라계와는 큰 관련이 없으며, 이 지역의 벽화 양식 또한 지안 지역과도 차이가 나고 있다. 평양 지역을 지배한 권력 주체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발표중인 염정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염 교수의 이 발언은 기존 학계의 한사군 평양설, 고구려의 대동강 평양 도읍설과 정면으로 배치돼 논란이 예상된다. 이는 최근 들어 제기되고 있는 고구려의 랴오양 도읍설을 뒷받침한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 평양으로 도읍을 이전했는데, 그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랴오둥 지역의 랴오양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풍도 만만찮다. 최근 이른바 ‘주류’ 역사학계는 지난달 말 출간된 계간지 ‘역사비평(봄호)’에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주제로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한사군 평양설을 부정하거나 고구려 신(新) 평양설 등을 내세우는 주장을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비판한 것.

과연 주류 역사학계가 내세운 설에 배치되는 주장이 역사적 파시즘에 근거한 사이비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중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교수는 “중국 측이 랴오둥 지역에서 발굴을 해 놓고도 파장을 우려해 감춰 놓은 벽화들이 상당수 있다”고 귀띔했다. 염 교수의 주장은 앞으로 엄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다만, 한마디로 배척하기보다는 학술적으로 검증할 가치는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7인의 歌人 목소리 바로 울릴 듯 생동감 넘쳐 (daum.net)

입력 2011. 6. 11. 00:10수정 2011. 6. 11. 00:10
 

베일 벗은 北 옥도리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일보]옥도리 고구려 고분의 석실 구조는 연도·전실·용도·후실로 조성되었는데, 전실에는 좌우측 벽에 감실(龕室)을 두고 있다. 벽화는 주로 전실과 주실인 후실 벽에 석회를 바른 후에 황색, 홍색, 심홍색, 갈색, 백색, 흑색으로 채색했다.

 

옥도리 고분 후실 북벽의 벽화. 휘장을 친 평상에 앉아 있는 여주인(점선안·왼쪽 사진)과 시녀들의 모습 (점선안·오른쪽). 당장이라도 벽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이와 같은 구조는 남포시 약수리 고분과 같은 구조다. 전실은 벽체가 많이 파괴되어 벽화는 서쪽 감실 벽면과 동벽 북측 부근에 기둥 흔적만이 남아 있다. 묘실의 모서리에 기둥과 두공(杜空)을 그리는 것은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옥도리 고분 벽화는 주로 후실의 북벽과 동·서벽 그리고 천장 아래 조정(천장 하부 받침) 부분에 남아 있다.후실 북벽에는 묘 주인의 실내생활도, 동벽에는 가무도, 서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조정(操井·우물반자)에서는 사신도를 그린 벽화 흔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후실의 북벽에 그린 묘 주인은 중앙의 평상 위에 부부가 정좌하고 있을 것이나 남자 주인의 오른쪽 무릎 흔적만 남았고 오른쪽에 여인 좌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각저총의 묘 주인 배치와 비슷하다.

북벽의 장막 뒤로는 물결무늬 사이사이에 '王'자 무늬와 '大'자 무늬가 있다. 이와 같은 '王'자 무늬는 중국 요녕성 환인 장군묘, 길림성 집안 장천 2호분 그리고 남포시 신령리 감신총에서도 발견되었다. 장군묘와 감신총은 대략 5세기 전반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실의 동벽은 3단으로 구성됐는데 상단에는 7인의 남녀 인물도가 그려져 있고, 중단에는 가무도 벽화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7인 가인(歌人)은 여자 3인 남자 4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울려 나올 것 같은 자세다.

이와 같은 인물상은 안악 2호분 인물상의 자세, 의복과 매우 비슷하다. 인물도의 선이나 채색은 남포시 덕흥리 고분의 인물도와 유사하다. 덕흥리 고분은 5세기 초의 작품이다.

 

그리고 후실 동벽에 있는 9인의 남녀 무인(舞人)은 춤새가 매우 사실적이고 율동적이다. 집안 무용총의 무인들의 춤새와 비슷하다. 무용수 중에 3인의 남자는 전통적인 고구려 남자 쓰개인 조우절풍(鳥羽折風)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 고분 중에 가곡무용도(가무도)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고분으로 보인다. 후실의 서벽에는 상하 2단에 주로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2필2인의 기마인물상이 그려져 있고, 1인은 활시위를 당기는 수렵인물의 상반신만 남아 있다. 하단에는 2필2인의 기마인물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래 일부분은 탈락되었다. 기마인물 1인은 상반신을 뒤로 돌린 자세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이와 같은 자세는 집안 장천 1호분이나 덕흥리 고분 등 고구려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고구려 무사의 궁시법이다.

후실의 천장은 거의 소실됐는데 천장 하부 부분만 약간 남아 있어 조정 부분에서 사신도의 흔적이 발견됐다.

 

위에서 바라본 옥도리 벽화묘 전경.

옥도리 고분벽화는 남포시 부근의 고구려 고분 벽화들과 매우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옥도리 벽화 고분의 구조나 벽화의 내용과 특징 그리고 후실 북벽의 '王'자무늬 등으로 보아 고구려 전성기인 5세기 전반기 장수왕 때의 벽화로 보인다.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충주 고구려비]

입력 : 2019.11.20 11:37 수정 : 2019.11.21 11:29

이기환 선임기자

[단독]40년 논란 충주 고구려비에서 '397년(영락7년)' 명문 읽었다…제2의 광개토대왕비가 확실 - 경향신문 (khan.co.kr)

고광의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1979년 충북 중원(충주)에서 발견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에 세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는 근거자료가 나왔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충주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아 22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고구려비의 연구성과와 과제를 점검하는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논문(‘충주 고구려비 판독문 재검토’)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문을 최첨단 기법, 즉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한 결과 맨 첫머리 제액에서 ‘397년(광개토대왕 영락 7년)’을 의미하는 연호(영락 7년) 등 8자를 읽어냈다”고 20일 밝혔다.

여러 각도로 빛을 쏘아보고 판독한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충주지역 향토답사동호회(예성동호회)가 발견한 충주 고구려비는 발견 이후 건립연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을 벌여왔다. 총 500여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판독가능한 글자는 200여자에 불과했다. 내용 또한 난해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해서 해독했지만 역불급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주인들조차 “아직까지 대박사(大博士)님들이 안왔나보다. 이 소박사(小博士)들은 (해석이) 잘 안되나보다”라며 쩔쩔매는 학자들을 딱하게 여길 정도였다.

1979년 6월9일 7시간에 걸친 고구려비 학술대회에서는 두계 이병도(1896~1989)가 “밤늦도록 고구려비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비문 전면에 ‘건흥(建興)’과 ‘4년’ 글자가 보였다”고 주장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칠’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시대에 일어난 일을 새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 할 수 있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여든이 넘은 두계(당시 83살)가 다소 황당무계한 ‘꿈 이야기’까지 꺼냈지만 처음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젊은 학자인 이호영 단국대 교수가 “저는 양원(陽原)으로 읽을 수 있고, 4년이 아니라 7년으로 보고있다”고 반박했다. 이후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지만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설, 장수왕(413~491)설, 문자명왕(492~519)설 등 다양한 설을 주장해왔다. 요즘 들어서는 장수왕설과 문자명왕설이 유력한 설로 운위되고 있다.

‘영락7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자인 ‘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그러다 이번에 이른바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다. 두 방식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다.

‘세(歲)자 부분,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광의 연구위원은 “두계 이병도가 읽은 부분은 비석의 전문에 가로쓰기 형태로 새겨진 제액(비문의 첫머리에 새기는 비석의 제목)인데, 이번에 이 부분을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로 읽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즉 고위원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판단했다. 자획의 판별이 쉽지 않지만 하부에서 ‘水’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水’자 우측에는 점획이 분명하고 상부에도 패인 부분을 가로지르는 획이 보이기 때문이다.

‘재(在)’자.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광의 위원은 “RTI 촬영 사진과 3D 스캐닝 사진 등을 통해 전체적인 글자의 형태는 ‘永’자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고위원은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고 밝혔다, ‘永’자 좌측에도 다소 복잡한 형태의 필획들이 보인다. 이는 1500년 이상의 세월을 겪은 비석은 자연적 풍화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 지우기’의 하나로 인위적인 훼손일 수도 있다.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낙(樂)’자에 가깝다. 상부에 ‘백(白)’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고 그 양옆으로 삼각형에 가깝거나 혹은 역삼각형 형태의 필획들도 나타난다. 하단부에는 가로획과 세로획들이 다수 엉켜있지만 ‘목(木)’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고광의 위원은 “전체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낙(樂)’자 형태와 유사한 결구로 보인다”고 밝혔다. 세 번째 글자는 ‘칠(七)’자가 확실했다. 가로획은 우측으로 약간 올라가는 형태이고 획의 끝 부분에서 미세한 파책의 흔적이 나타난다.

3D 촬영과 RTI촬영을 위해 포토샵으로 처리한 충주 고구려비.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 위원에 따르면 네 번째 글자는 ‘연(年)’자이다. 두계 이병도는 마멸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호영 교수는 ‘年’자로 읽었다. 이 글자의 좌측 부분은 물갈이 흔적이 잘 남아 있어 필획의 구별이 비교적 잘되며 2000년 고구려연구회 판독회에서도 제액의 글자 중에서 유일하게 확인하였던 글자이다. 첫 번째 획은 세로가 짧은 ‘ㄴ’ 형태이고 그 아래로 3개의 가로획이 있다. 그리고 이들 필획을 중간에서 관통하는 세로획으로 구성되어 있어 광개토태왕비와 유사한 자형 결구이다.

3D촬영과 RTI 촬영의 기초자료를 확보하려고 준비하는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 위원에 따르면 다섯 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이다. ‘세(歲)’자 부분은 상부의 ‘山’자 형태가 비교적 명확하고 그 아래쪽에 비스듬한 세로획들과 이 세로획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획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 여섯 번째 글자는 ‘재(在)’자이다.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 고광의 위원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 따라서 고위원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밝혔다. 고광의 위원은 “이번에 읽어낸 제액은 총 8자이며,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전했다. 고구려에서 이러한 연호와 간지를 기재하는 방식은 광개토태왕비의 ‘영락5년세재을미(永樂五年歲在乙未)’ 등을 비롯하여 ‘건흥오년세재병진’명 금동광배 등에서도 보인다.

그동안 갑인으로 읽었던 부분은 경인(庚寅)으로 고쳤다. 397년 12월27일의 일을 새긴 비석임이 밝혀진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또한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지금까지 전면 7행 15~22자 사이의 ‘12월23일 갑인(十二月입三 甲寅)’ 날짜와 좌측면의 ‘신유년(辛酉年)’이라는 연간지 중심으로 추정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최첨단 촬영으로 판독한 글자는 ‘23일’이 아니라 ‘27일(입七)’이었다. 제액에서 확인된 ‘영락7년세재 정유’가 397년이라면 그해 12월27일은 ‘경인(庚寅)’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경(庚)자를 갑(甲)자로 잘못 읽은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신유’로 읽었던 부분도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일 가능성이 크다. ‘신유년’이 아니라 ’공이백육십’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유년’으로 읽었던 부분. 그러나 이번에 판독결과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인 것으로 판명됐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12월 27일 이후일 것”이라면서 “이 비석의 건립연대가 광개토대왕 재위시절로 소급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중원고구려비에서 읽은 주요 내용은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이다.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여형여제’ 즉 형제사이임을 영원히 맹세했다는 뜻이다 물론 고구려가 형이고, 신라가 동생이다. 또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일컬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스스로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폄훼한 것이다.

또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주둔과 관련된 대목이다. 즉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고구려 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즉 광개토대왕 2년(내물왕 37년·392년) 신라 왕족 실성(훗날 실성왕으로 등극)이 고구려 인질로 떠났다. 401년 귀국한 뒤 내물왕의 후계자가 된 신라 실성왕은 412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보낸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424년 장수왕 12년(눌지왕 8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聘)의 예를 닦았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신라의 우호관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독이 맞다면 충주 고구려비가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그러나 아직까지 비문에 등장하는 간지 등의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00% 확증할 수는 없다”면서 “향후 비문을 더 판독하겠다”고 밝혔다.

출처; [단독]40년 논란 충주 고구려비에서 '397년(영락7년)' 명문 읽었다…제2의 광개토대왕비가 확실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 선임기자입력 2021. 3. 15. 06:00수정 2021. 3. 15. 17:06

마을 어귀의 '선돌', 이끼 벗겨보니 '제2의 광개토대왕비'였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

[경향신문]

 

https://youtu.be/_olJNqNZeHI

 

“어? 이건 ‘국토(國土)’네, 이건 ‘토내(土內)’, 이건 ‘대(大)이고….’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1979년 2월24일 충북 충주의 향토답사모임인 예성동호회 회원들이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서있던 비석에서 옛 글자들을 읽어내고 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고구려 비석을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유창종·장준식씨 제공


예성동호회는 1978년 9월 당시 유창종 충주지청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와 장준식 충주 북여중 교사(전 충청대 교수) 등이 결성한 답사모임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예성동호회는 예사로운 향토모임이 아니었답니다. 동호회를 결성한 그해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기와도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이 분들이 틈나는대로 발품을 팔아 충주 일대를 답사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박사(1918~2011)가 전부터 “이곳에서 진흥왕순수비가 발견될 수 있으니 만약 비슷한 고비를 보면 반드시 연락해달라’고 누누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충주 일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각축을 벌인 요충지였으니까요.

예성동호회가 찾아낸 문화유산들. 1978년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숭선’명 기와도 확인했다.|문화재청·충청대박물관 제공

■잇달아 국보 보물을 찾아낸 향토모임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1978년 1월 6일 단양 성재산(해발 323m)을 답사하던 장준식 교사(당시 단국대학원 재학중)가 신발에 묻은 흙을 털다가 그 유명한 단양 적성비(국보 198호)를 찾아냈으니까요.

적성비는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땅이던 적성(赤城·단양)을 점령한 뒤, “신라의 척경을 도운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결성된 예성동호회 회원들은 장준식 교사를 본보기로 삼아 열정적으로 답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1979년 2월24일 의정부지청으로 발령받은 유창종 검사를 위한 송별회 및 기념촬영을 위해 답사에 나섭니다. 그러다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우뚝 서있던, 그리고 40여 일 뒤 ‘충주 고구려비’로 명명된 ‘국보 중 국보’ 명문비석을 발견한 겁니다. 물론 발견 당시에는 얼만큼 중요한 비석인지는 알 수 없었죠. 동호회원들은 4월 5일 충주를 방문한 황수영 박사에게 이 비석과 비석 탁본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비에서 선입견 때문에 잘못 읽은 부분. 처음부터 ‘진흥왕순수비’로 여겼기 때문에 ‘고려’를 ‘진흥’으로 잘못 읽었다.(①)그러나 자세히 보면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어렴풋 보인다(②). 선입견이 빚은 오류였다.

과연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대왕(大王), 국(國), 태자(太子)’와 같은 글자들이 드러났습니다. 황교수는 순간 외마디 비명일 질렀습니다. “아! 진흥대왕(眞興大王)이다.” 석비 전면 맨 앞줄에 “○○大王”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은 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꿈에 그리던 진흥왕순수비일 것”이라면서 “아! 혈압이 높아 흥분하면 안되는데….”라면서 연신 차를 마셨답니다.

황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 단국대 교수(1934~2017)에게 “자네가 조사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고려대왕’ ‘전부대사자’와 ‘제위’, ‘하부’ 등 고구려 왕을 지칭하는 표현과, 관직명, 그리고 고모루성, 우벌성과 같은 고구려 성의 이름이 보였다. 반면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신라매금’ 처럼 상대방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계속 보였다.

■“대박사는 안오고 소박사만 왔나봐”

조사단(단국대박물관)은 3일 후인 4월8일 이끼와 청태를 완전히 제거한 뒤 조심스럽게 뜬 탁본을 걸어놓고 비문해독에 나섰습니다. 조사단과 몇몇 자문위원들이 필획 하나하나 글자 한자한자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데도 비석의 국적조차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비석의 마멸이 워낙 심했다지만 뭔가 이상했습니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였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고모루성’이 확인됐습니다. 수상했습니다.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정작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또한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모인삼백’, ‘신라매금’ 등 마치 상대편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판독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비석이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혼돈에 빠진거죠. 하도 해석이 안되자 토론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수근수근댔습니다.

“아니 서울에서 대학자들이 안 왔나봐. 소학자들만 와서 해석을 못 하는 거 아니냐?”

충주 고구려 비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표현.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는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또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다.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고려대왕이지 어째서 진흥대왕이야?”

비석 해석을 두고 골머리를 썩일 때인 오후 3시 김광수 교수(건국대)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김교수는 현장에서 ‘진흥대왕이 어떠니 저떠니’하고 설왕설래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단칼에 정리했습니다.

“도대체 뭔 소리들 하는거야. 저게 어떻게 진흥대왕이냐. 고려대왕이지.”

김광수 교수의 한마디에 좌중은 순간 얼음이 되었답니다. 그러다니 잠시후 “아! 아! 맞아”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진흥왕’이라는 선입견에 꽂혀있던 이들이 무릎을 친 거죠. 고려대왕, 즉 고구려 임금이 주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뒤늦게 도착해서 선입견이 없던 김교수가 본대로 ‘고려대왕’을 읽어낸 겁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돌덩이가 일약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비로 탄생되는 역사적이고도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은 마침내 “이 비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던 충주에 세운 고구려의 비석”이라고 발표합니다.

1979년 당시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이 학계 자문위원 및 원로들에게 조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의 마멸이 워낙 극심해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조차 판독에 애를 먹었다. 지금도 전체 500여자 중 200여자 정도만 읽었다.

■‘꿈의 계시론’을 개진한 이병도

그후 쟁쟁한 학계원로와 연구자들이 비문 해석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여가 지난 1979년 6월9일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정영호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여 막 발견된 충주(중원) 고구려 비문의 해독에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와, 잘 연결되지 않은 문장을 두고 고뇌에 찬 해석을 하고, 또 다른 이와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명문은 확인됐지만 비문의 마모가 너무 심했습니다. 비석 앞 부분은 50%만 확실했고, 문맥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5% 뿐이었습니다. 하도 비문해석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자 차문섭 교수(단국대)는 “주민들 말마따나 우리는 대박사가 아니라 소박사들만 모였나 봅니다. 원 이렇게 못해서야 원!”라고 자책해서 한바탕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83살이던 이병도 박사는 ‘꿈의 계시론’을 개진했을까요.

“비문 첫 꼭대기에 액전(제목)이 있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단 말이야…아! 그래 눈이 번쩍 띄어가지고… ‘건흥(建興)’ 두글자는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틀림없어요.”

1979년 83살의 이병도 박사가 학술대회에서 “꿈속에서 고구려비문이 보였다”면서 “비석의 윗부분에서 제액(비석의 제목)이 있었고, (장수왕의 연호인)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한 내용을 실은 동아일보 1979년 6월14일자

■“고구려, 신라는 영영 (고구려)처럼 동생(신라)처럼 지내자”

당대 내로라는 학자들은 일단 비문의 대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문을 작성할 무렵의 고구려·신라의 주종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거죠. 즉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대목을 보죠.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요.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는 표현도 주목거리입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이니까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어떨까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죠.

1979년 단국대박물관이 뜬 충주 고구려비의 탁본. ‘고려대왕’ 등의 기록이 그나마 잘 보이는 한 면 빼놓고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거나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출처:고구려연구회의 <중원고구려비연구>, 학연문화사, 2000에서)

■“영락 7년(397년) 명문 읽어냈다”

지난 2000년 관련학계 연구자 55명이 4박5일간 모여 잘 보이지 않는 비문을 판독하기 위해 분투해서 겨우 19자(2000년)를 더 읽어냈는데요. 그럼에도 비문의 실체에 다가가기까지는 부족했죠.

특히 비석의 건립연대가 지금까지도 논쟁거리인데요. 여전히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설, 장수왕(413~491)설, 문자명왕(492~519)설 등이 혼재합니다.

그런데 2019년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이해서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는데요. 두 방식은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래요.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고 위원은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고 해독했다.|고광의 위원의 논문에서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연구자들은 이 기법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두차례에 걸쳐 판독회를 열어서 총 19곳에서 23자를 제시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결론은 비석의 앞면 윗단 부분에 비문의 제목(제액)에 해당되는 글자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재차 합의했습니다.

그 부분은 1979년 당시 이병도 박사가 ‘꿈의 계시’ 운운하면서 비석의 제목, 즉 제액이 존재하고 그곳에 글씨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 의견을 모으지 못한채 유보했습니다.

그런데 연구에 참여한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흥미로운 판독결과를 발표합니다. 즉 연구자들이 합의하지 못한 글자를 8자 읽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겁니다. 즉 가로쓰기 형태의 비석제목에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가 보였다는 겁니다. 즉 비석은 ‘영락 7년(광개토대왕· 397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라는 겁니다.

①고광의 위원이 읽은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던 글자다. ②‘락(樂)’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서 읽었다. ③‘칠(七)’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④‘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고광의의 논문에서

먼저 고위원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판단했답니다.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는거죠. 또 두번째와 세번째 글자는 ‘낙(樂)’과 ‘칠(七)’자가 확실하고 네 번째 글자는 ‘연(年)’자라는 거구요. 다섯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가 확실하다는 거죠. 고광의 위원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합니다.

이 판독이 맞다면 이 충주 고구려비석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이후’라는 얘기가 되겠죠. 광개토대왕의 재위기간이 391~412년이니까 비석의 건립연대는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까지’로도 소급해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첫번째 ‘광개토대왕비’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고광의 위원은 ①②를 두고 ‘세재(歲在)’로 읽힌다고 했다. ③은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한다.|고광의의 논문에서

■제2의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죠. 이번 고광의 위원의 판독이 맞다면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발표를 수용하는 연구자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아직까지 학계의 검증이 필요하겠죠. 최첨단 판독 기술이 개발된다면 보이지 않던 비문을 더 읽어낼 수 있겠죠. 총 500여자 중에 어렴풋 읽어낸 글자까지 포함해도 200여자에 불과하니까요. 소학자라는 비판을 들으면서 꿈의 계시까지 동원해서 비문을 읽어내려던 연구자들의 분투를 기대해봅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고구려 비석] 

2013-01-16 15:24

中 지안서 고구려비 발견.."고고학적 사건"(종합) | 연합뉴스 (yna.co.kr)

'중국문물보' 공개, 제2의 광개토대왕비 추정

<그래픽> 中 지안서 고구려 비석 발견


(서울=연합뉴스) 박영석 기자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고구려 비석이 발견됐다고 여호구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가 16일 밝혔다.
zeroground@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황윤정 기자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기존에 알려진 광개토왕비문을 압축한 내용을 새긴 고구려 비석이 발견됐다.

광개토대왕비, 충주 고구려비에 이어 세 번째 고구려비로 등록된 이 금석문을 국내 학계는 "고고학적 대발견"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비석은 광개토왕비처럼 고구려 역대 왕릉을 관리하기 위한 규정을 담은 이른바 수묘비(守墓碑)로 평가된다.

 

한국고대사 전공자들인 윤용구 박사와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는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발행하는 '중국문물보'가 이달 4일자 기사에서 고구려 비석 발견 소식을 보도했다"면서 "이번 발견은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학계의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말했다.

 

'중국문물보' 보도에 따르면 이 비석은 지안시 마셴향 마셴촌 한 주민이 지난해 7월29일 마셴강(河) 가에서 발견해 지안시 문물국에 신고한 것이다. 문물국은 현장에 조사팀을 파견해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정밀 조사한 결과 고구려 비석임을 확인했다고 중국문물보는 전했다.

비석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결실된 상태로, 현재 크기는 높이 1m73cm, 너비 60.6-66.5cm, 두께 12.5-21cm다. 무게는 464.5kg.

비석 정면에는 예서체로 총 218개 글자를 새겼다.

비석은 총 10행으로, 마지막 10행을 제외하고 행마다 22자를 적었다. 10행에는 가장 많은 20자가 확인된다.

(지안<중국 지린성>=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 2011.7.8(자료사진)

 

218자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140자.

비문은 광개토왕비 비문을 압축한 듯한 느낌을 준다.

첫머리에는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건하니라"(始祖鄒牟王之創基也) "하백의 손자"(河伯之孫), 그리고 그런 추모가 "나라를 일으켜 (왕위가) 후대로 전해졌다"는 구절 등이 보인다.

이어 '연호(烟戶)'를 배치해서 사시(四時)로 제사에 대비케 하고" "부유한 자들이 (묘를 관리하는 사람들인) 수묘인(守墓人)들을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는 구절 등이 발견된다.

비문에 보이는 연호(烟戶)는 보통 인가(人家), 민호(民戶) 등으로 학계에서는 본다.

이와 같은 내용은 결국 광개토왕비 비문을 압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비석 또한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역대 고구려 왕가의 공동묘지인 지금의 지안시 우산하 고분군 앞에다가 광개토왕비를 건립하면서, 또 다른 왕가의 공동묘지인 지금의 마선구 고분군 앞에다가 그 축소판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윤용구 박사는 "광개토왕비가 종합안내판이라면, 이번 비석은 그 미니어처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yunzhen@yna.co.kr

출처; 中 지안서 고구려비 발견.."고고학적 사건"(종합) | 연합뉴스 (yna.co.kr)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1/23 [09:20]

中 집안서 발견된 고구려비는 '수묘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3/13 [19:25]

고구려 수묘비 수수께끼가 풀리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입력 2019. 4. 27. 15:56수정 2019. 4. 28. 10:56

[단독]만주 고구려 성터에서 고구려비석편 발견됐다 (daum.net)

 
중국쪽 2009년 발굴사실 뒤늦게 확인
백암성 고구려 비편

 

옛 고구려의 서북쪽 거점이던 중국 만주 랴오닝성 덩타시 백암성터에서 10년전 고구려 비석편이 발견된 것으로 밝혀졌다.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백암성터를 답사하면서 유적 안내판과 2010년 발간된 <중국고고학연감>을 살펴본 결과 2009년 7~12월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소가 성벽 서남쪽을 조사하다 글자가 새겨진 고구려석비조각 1점을 발굴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박 교수가 이날 한국고대사학회 누리집에 공개한 유적 약보고문과 석비의 사진 등을 보면, 석비편에는 고구려 고위관직명인 '대형(大兄)'과 성씨명으로 추정되는 '맹(孟)', 연도를 나타내는 간지명인 '경신(庚申)' 등의 글자가 해서체로 새겨진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양원왕 3년인 547년에 개암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그 뒤의 경신년에 해당하는 600년 혹은 660년에 비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부근에서는 고구려 집터와 더불어 막대한 분량의 고구려 기와조각들도 수습됐다고 한다. 박 교수는 약보고문에서 “2010~2016년 백암성터의 후속 발굴조사를 벌여 해서체 글자를 새긴 또다른 석각편과 고구려 집터, 토광묘 등을 발견한 사실이 현지 학계에 보고됐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있다”면서 “국내학계가 조속히 세부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백암성 고구려 비편 탁본

 

출처; [단독]만주 고구려 성터에서 고구려비석편 발견됐다 (daum.net)  

 

 

2012-06-08 00:50

“고구려 성까지 만리장성으로 덮어씌워서야…” | 서울신문 (seoul.co.kr)

 

 

2010/05/18

고구려성까지 萬理長城으로 날조하는 지나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5/28 [18:40]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州 = 漁陽 )에서 발굴된 유물은 '고구려' 왕족급의 묘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고구려 고분벽화 금박 사용 첫 확인

입력 2008. 2. 5. 17:14수정 2008. 2. 5. 17:14
 

온달·평강공주 묘 추정 진파리 4호분서

고구려 고분 벽화에 채색 안료로 금박이 사용된 것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5일 북한 평양시 력포구역 용산리의 동명왕릉지구에 있는 진파리 1호분과 4호분에 대해 남북 공동조사를 실시한 결과, 진파리 4호분에서 연도(널길)의 양벽과 현실의 천장 부분 등에서 금박을 사용한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소와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지난해 5월30일~6월9일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와 함께 훼손이 심한 진파리 1ㆍ4호분의 보존작업을 벌였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 보고서를 발간했다.

 

연구소는 보고서에서 "2006년 첫 조사에서 진파리 4호분 연도 동쪽 벽에서 금색이 눈에 띄어 현장에서 비파괴 성분 분석을 실시한 결과 광석의 일종인 '웅황'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금색 흔적을 선별해 휴대용 형광 X선 분석기로 분석한 결과 금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구려 고분 63기 가운데 16기에 벽화가 있으며, 문화재연구소는 이 가운데 지금까지 10기를 조사했으나 금박을 사용한 흔적을 확인한 것은 진파리 4호분이 처음이다.

금박은 현실 안 천장 벽화에 별자리를 표시하거나 천장 받침의 문양대에서 금꽃을 강조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됐는데 심하게 긁혀 남아있는 부분은 별로 없는 상태였다. 일제시대 당시 고분이 열린 채로 방치됐을 때 사람들이 긁어냈을 것이라는 게 북측 관계자들의 추정이다.

연구소는 "금박의 가장자리가 칼로 잘린 듯 날카로운 직선인 점으로 미뤄 금박을 붙이기 전에 금박을 종이와 같은 바탕에 붙여 원하는 모양으로 오려내 붙인 후 바탕재를 벗겨내는 작업을 반복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김순관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사는 "진파리 4호분에서 사용된 금박은 연꽃 문양과 소나무 가지 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됐다"면서 "이는 고구려의 금 세공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이 고분에 매장된 인물이 권력이 있는 왕족 또는 귀족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 고분의 격이 한층 올라가게 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료는 없지만 북측에서는 진파리 4호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보고서는 이번 조사를 통해 진파리 1ㆍ4호분의 손상 상태를 여러 과학 장비를 통해 정밀하게 확인했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손상도면을 제작해 고구려 벽화고분의 보존에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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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4-10 20:45:14 수정 : 2009-04-10 20:45:14

고구려, 아차산에 살아있었구나 (segye.com)

 

 

[우수지방자치단체를 찾아서]서울시 광진구

남한 내 최다 고구려 유적… 역사문화관 건립
매년 10월 아차산고구려축제 동맹제 등 재현

 

남한 내 가장 많은 고구려유적을 갖고 있는 아차산 전경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고구려군은 광개토대왕의 명을 받아 지금의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다. 병사를 이끌고 온 장군은 아차산 홍련봉에서 멀리 이천까지 한강 이남을 내려다봤다. 고구려의 국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백제, 신라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고구려는 장수왕을 거쳐 양원왕까지 이곳 아차산에 160여년간 주둔했다. 광진구 주민들은 명소로 아차산을 가장 먼저 꼽는다.

해발 287m인 아차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아 가족과 함께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산꼭대기에서는 한강은 물론 서울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다. 아차산으로 인해 아름다운 경치도 자랑이지만 서울시 광진구는 온통 고구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조명받고 있다.

▲광진, 고구려의 숨결을 만나는 곳

광진구 아차산에는 사적 234호로 지정된 아차산성과 사적 455호 보루군 17개중 9개가 있다. 아차산성은 삼국시대 한강 주도권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탈전을 벌이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아차산성과 보루군에는 고구려가 160여년이나 주둔했기 때문에 남한내 가장 많은 고구려 유적을 자랑한다. 지금까지 5600여점의 고구려 유물이 나왔다. 광진구 지역내에서 출토된 양만 3751점에 이른다. 대표적인 유물은 국내 최초로 발굴된 연화문와당(연꽃무늬 기와)이다. 학계에서는 연화문와당이 발굴된 홍련봉을 1600여년 전 고구려 장수가 주둔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지휘부가 있던 자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밖에도 온돌 유구, 디딜방아, 와당, 명문토기 등이 발굴됐다.

아차산 일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로 유명한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제 개로왕이 전사한 곳도 아차산이다. 이렇듯 광진구는 남한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광진구가 구 슬로건을 ‘고구려의 숨결, 행복도시 광진’으로 정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아차산고구려역사문화관

광진구는 아차산에 고구려역사문화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아차산 고구려역사문화관을 민족 자긍심을 다시금 일깨우고 웅대한 고구려의 기백을 되살릴, 민족 정체성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광장동 384번지 일대 3만7444㎡,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질 아차산고구려역사문화관에는 전시관을 비롯해 체험관, 교육실, 수장고 등이 마련된다. 또 일대는 아차산성 및 홍련봉 보루 등과 함께 고구려 역사공원으로 꾸며진다. 광진구의 아차산 고구려역사문화관 건립계획은 정부와 서울시도 인정했다. 광진구는 지난해 5월 중앙재정투·융자 심의를 거쳐 국·시비 지원 결정을 얻어냈다. 현재 광진구는 국·시비 30여억원과 구 예산 등을 합쳐 총 146억원의 사업예산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아차산 고구려역사문화관 부지는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에서 860m, 광나루역에서 270m에 위치하고 있다. 또 외국인을 포함해 연 280만여명이 찾는 워커힐과도 가까워 접근성이 뛰어난 장점이 있다.

특히 광진구는 인근 송파의 한성백제문화관 및 몽촌토성, 강동구에 위치한 암사선사유적지와 함께 선사·고대 역사·문화·관광벨트를 형성, 시너지 효과를 얻겠다는 계획이다. 또 서울시의 ‘1200만 외국관광객 유치’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인프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광진구는 현재 진행중인 정부 연구용역이 끝나면 그 결과를 반영해 시굴조사, 토지보상, 기본 및 실시설계 등을 거쳐 착공에 들어가 2011년말 아차산 고구려역사문화관을 완공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정송학 서울 광진구청장이 광개토대왕비 모형을 들고 고구려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축제’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광진구는 매년 10월 ‘아차산고구려축제’를 연다. 참가인원만 10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성대하게 열린다. ‘고구려’라는 특화된 주제를 갖고 있는데다, 프로그램이 충실해 고구려축제는 대한민국 대표축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축제는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제를 시작으로 3일간 열린다. 광진구는 2007년 축제때부터 남한에서 처음으로 동맹제를 재현해 오고 있다. 동맹제에 이어 열리는 퍼레이드 역시 볼거리다. 고구려복식의 취타대를 선두로 기마병과 궁수, 퍼레이드카와 15개동 주민, 풍물패 등이 뒤따르며 흥을 돋운다. 특히 참가자들은 퍼레이드 구간 곳곳에서 무예진법과 고구려와 당나라 군사간 전투장면을 연출, 역동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구려를 테마로 한 예술공연도 진행된다.

이 축제의 특징은 다양한 체험 행사가 어우러진다는 점에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 복장으로 변신해 활쏘기 시합에 나설 수도 있으며, 고구려 병영체험마당에서는 전문 교관을 통해 당시 무예를 배울 수도 있다. 이밖에 전통 활 및 부채 만들기, 고구려문양 탁본뜨기 등도 인기가 많다. 광진구는 이같은 고구려축제와 아차산고구려역사문화관이 ‘컬처노믹스’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자랑한다. 문화·관광을 통해 일자리와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아차산 해맞이축제에서 정송학 광진구청장이 큰 북을 치며 첫해가 떠올랐음을 알리고 있다.


▲도시 전체가 고구려 상징

광진구 곳곳에는 수렵도 그림과 함께 ‘고구려의 숨결, 행복도시 광진’이라는 글귀가 붙어있는 배너를 만날 수 있다. 특히 광진구와 택시회사들이 손잡고 광진구에 적을 두고 있는 모든 택시에 ‘고구려 광진’을 홍보하는 배너를 붙이고 있다. 빌딩주들도 자발적으로 빌딩 벽에 각종 고구려 관련 그림을 그려 넣고 있다. 고구려벽화를 광진구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유다. 뚝섬 한강공원으로 드나드는 진입로 벽에도 현대화된 고구려벽화와 각종 고구려 관련 패턴 그림이 있다. 거리 곳곳의 자전거 주차장 역시 마찬가지다. 광진구 캐릭터 ‘광이와 진이’는 각각 온달장군과 평강공주를 형상화하고 있다.

정송학 광진구청장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을 때 반짝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다시 시들해지고 있는 느낌”이라며 “고구려는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기상이 담겨 있는 가장 웅대한 역사인 만큼, 고구려의 숨결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광진구는 고구려를 현재에 되살리는 운동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고구려-페르시아 성곽 유사”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이 땅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석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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