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7.06 09:00 수정2020.07.06 09:00 지면S14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 한국경제 (hankyung.com)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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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3) '옛 영토' 수복은 고구려의 국시
고구려 수도 국내성(중국 지안) 뒤편인 산성하 고분군. 원조선의 무덤 양식을 계승했다. 석하사진문화연구소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

<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
 

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

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사공동체의 정통성 계승

고구려가 700년 이상 끊임없이 중국 세력과 경쟁하고 싸운 것은 현실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려는 목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 더구나 특별한 목적을 지닌 집단의 행동은 현실적인 이익만을 좇아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로서는 역사에서 사라진 원조선 땅, 잃어버리고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해 ‘원조선 계승성’을 구현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것은 단순한 영토쟁탈전을 넘어 원조선의 질서를 완성하기 위한 일종의 통일전쟁 성격도 있었다고 여겨진다.(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궁금하다. 우리 민족이 자주성을 지키는 가운데 민족공동체로서 장구한 역사를 유지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가 큰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명분과 힘은 무엇일까? 원조선에서 출발해 오랫동안 통일과 분열의 변증법을 거쳐 온 역사공동체라는 정통성과 계승성 때문이 아닐까?
 
 
독립군들은 만주 벌판에서 싸울 때 단군을 앞세우고, ‘다물단’을 만들었고, 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공부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 강대국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면 지금도 역사의 정통성과 계승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

고구려가 700년 이상 끊임없이 중국 세력과 경쟁하고 싸운 것은 현실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려는 목표 때문이었다. 고구려로서는 역사에서 사라진 원조선 땅, 잃어버리고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해 ‘원조선 계승성’을 구현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판단한다.

 

 

임기환 기자 입력 :  2019-02-07 15:01:01

고구려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 매일경제 (mk.co.kr)

 

고구려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 매일경제

[고구려사 명장면-64]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책 `수서(隋書)`에서는 백만 대군을 동원한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겨우 요수 서쪽 적(고구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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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고구려사 명장면-64]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책 '수서(隋書)'에서는 백만 대군을 동원한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겨우 요수 서쪽 적(고구려)의 무려라(武麗邏)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빈정거리는 투가 역력한 위의 표현은 아무래도 수왕조를 대신하여 등장한 당왕조의 입장에서 수양제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위 문장의 행간을 깊이 읽어보면 당나라 사관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고구려 역사의 일면을 찾아낼 수 있다.

요하 서쪽에 위치한 '무려라'는 고구려의 최전방 군사 거점이다. '라(邏)'는 소규모 군사 초소나 요새를 뜻하는 고구려 말이다. 이 무려라에 대해 '자치통감'에는 "고구려에서는 요서 서쪽에 라(邏)를 두어 요하를 건너는 사람들을 통제하였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무려라가 요하 서쪽에서 통행로의 경찰 업무나 영역 관리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수서' 기록에서는 이런 소규모 군사 초소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었다고 쓰고 있다. 무려라에다 통정진을 두었다고 한다면 진(鎭) 역시 군사 거점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려라를 빼앗은 곳에 요동군을 두었다는 점은 납득할 수 없다. 요동군은 거점이 아니라 다수의 현을 거느리는 지방통치 단위이기 때문이다. 즉 지도상에서 표시하자면 점이 아니라 면인 것이다.

 


그런데 위 '자치통감'의 주석을 보면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 여러 곳에 '라(邏)'를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무려라는 그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수양제가 요동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단지 무려라 군사 거점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고구려 '라(邏)'를 빼앗았거나 일정한 영역을 새로 확보하였음을 뜻한다. 적어도 이렇게 해석해야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612년 수양제는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고, 요하 서쪽의 고구려 영역을 빼앗은 정도의 전과는 거둔 셈이다. 다만 백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한 것 치고는 매우 초라한 전과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런데 수양제의 전과를 뒤집어 보면, 요서 지역이 그 이전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배운 역사책에는 고구려의 서쪽 영역을 대체로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는 지도가 실려 있다. 현행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그런 지도가 나와 있다.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진다. 요서 땅이 언제부터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며, 그 영역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 요서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면 왜 우리 역사 교과서 지도에는 그런 경계선이 그려지지 않았을까?

우리 역사교과서의 지도는 대체로 고구려 전성기 때 즉 장수왕~문자왕 때의 영토를 보여준다. 여러 자료로 보건데 당시 고구려의 영역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북으로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농안에서 송화강 유역에 있는 길림과 장춘을 잇는 선까지 올라가는데, 여기는 옛부여의 땅이었다. 동쪽으로는 지금의 두만강 하류에서 중국 훈춘지역이 되겠고, 서쪽으로는 요하가 경계선이 되겠다. 남쪽 경계선은 지금의 남양만에서 죽령 일대를 거쳐 동해안의 울진,영덕 일대를 잇는 선이 될 것이다.

다만 당시의 영토라는 것이 오늘의 국경선처럼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서남북 사방의 주요 거점이나 중심지를 파악하고 이를 중심으로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나 지리적 형세를 중심으로 대략의 범위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략 우리들이 눈에 익숙한 고구려의 영역 지도가 되겠다.

 


7차 교육과정 고구려 전성기 지도. 국정 국사 교과서의 지도가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역이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형세나 고구려의 대외진출, 혹은 주변국가와의 충돌 양상에 따라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문헌 기록에도 이런 변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고구려 영역을 가장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위서』에는 "동쪽으로는 책성, 남쪽으로는 소해에 이르고, 북쪽은 옛 부여에 닿는다. 그 땅의 크기는 동서 2천여 리이고 남북은 1천여 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수왕대의 영역 범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고구려 전성기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기록의 '동서 2천 여리, 남북 1천여리'라는 고구려 영역은 그 뒤의 중국 사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주서』에는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넘어서 (동서) 2천리이며,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이웃하니 (남북) 천여 리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서』는 "동서 2천 리이고 남북 천여 리이다"라고만 가장 간략하게 쓰고 있다. 동서 2천 여리, 남북 1천여리'라는 표현은 이어지는데, 『주서』에서 "서쪽으로 요수를 넘는다"라는 표현은 앞서 본 『수서』의 무려라 기록을 고려할 때 주의를 기울일 만한 표현이다.

그런데 『구당서』에 이르면 고구려 영역에 대해 전혀 다른 기록이 등장한다. 즉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신당서』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기록이 나오며 다만 동서 남북 리수는 쓰여있지 않다. 혹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라는 『구당서』 기록이 오류일까?

 


당나라때 편찬된 『통전』에는 고구려 영역이 수나라때부터 점점 커져서 6천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영역에 대해 앞 시기와는 다른 또다른 정보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또 그 과정에서 고구려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고 있었던 정황을 고려하면, 『구당서』 기록은 나름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된다.

『구당서』에는 서쪽 경계를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주는 당나라 영주도독부를 가르키는 것으로 치소는 지금의 조양시이지만, 영주의 관할 범위가 넓기 때문에 어느 지점이라고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서』의 무려라 기록과 연관해보면 요하 서쪽 상당한 범주가 고구려의 영역 관할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구당서』의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라는 기록을 그대로 다 인정하기는 힘들지만, 서쪽 경계선이 요하를 건너 요서의 어느 지역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면, 동서와 남북의 리수를 고려하면 북쪽이나 동쪽의 고구려 영역 범위도 장수왕, 문자왕대의 그것과는 변화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북쪽과 동쪽에서 말갈의 등장과 관련된 정세 변화에 따른 것이리라.

고구려 하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위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우리 누구에게나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역사교과서 지도상에서 지리적 영토의 넓이로만 따지고 본다면 발해의 영토가 더 크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대개 고구려를 오히려 더 큰 국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의 영역과 발해의 영역이 갖고 있는 영토의 성격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해 땅을 과소 평가하려는 뜻은 아니지만, 한반도 북부 및 요동지역을 포괄하고 있는 고구려 땅이 갖고 있는 영역의 질이 발해와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영역에 무슨 질이 있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다 똑같은 땅은 없는 법이다. 주민 거주성과 인구밀도, 생산력의 차이, 전략적 중요성, 교통로와 주변 지역과의 연결성 등등, 따지자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교과서에 나오는 고구려 지도에 나타난 그런 정도의 크기로는 대제국 고구려의 명성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북쪽으로는 훨씬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까지 확장하기도 하고, 서쪽으로는 요서나, 더나아가서는 지금의 북경이나 그 너머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실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근거를 따져보면 답이 나온다. 어쨋거나 어느 정도 영역의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영역이 고구려의 중심 무대라는 점은 틀림없다. 영역의 질적 수준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고구려 영역의 경계선이나 각 지역의 성격, 그리고 영역 지배의 양상에 대해 몇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들은 고구려를 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면에서 역대 다른 왕조와는 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이렇게 머리 속으로는 넓은 영토를 꿈꾸면서도 정작 우리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한반도 그중에서도 남쪽의 일부 땅. 좁다면 좁은 한국 땅인데, 거기서도 서울과 수도권에 죽기살기로 모여들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 보라.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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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환 기자 입력 :  2019-03-07 15:01:01

고구려의 북쪽 경계는 어디까지? - 매일경제 (mk.co.kr)

 

[고구려사 명장면-66] 고구려가 6세기 중반 이후 요하를 너머 요서로 진출하여 대릉하 하류와 의무려산을 잇는 선까지 영역의 경계를 확장했음에 대해서는 전 회에서 언급했다. 다만 고대에 영역 경계는 오늘날 국경처럼 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이나 산맥 등 자연 조건이나 영역이 서로 맞닿은 국가들 간 세력 관계 등 다양한 조건에 의해 중간 점이지대가 설정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중간 점이지대는 주민이 살지 않는 공백으로 남는 게 아니라 두 국가와는 무관한 다른 종족이나 집단이 거주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말하자면 세력의 완충지대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경계가 선이 아니라 면이라는 점이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쩌면 이런 면의 형태를 갖는 경계선이 자연 조건이나 인문 환경에서 보아도 훨씬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처럼 딱 잘라서 선을 긋고 이를 양 국가와 주민의 단절적 경계선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사고와 행위다.

이처럼 면으로 구성되는 경계로서 점이지대나 완충지대는 양 국가의 역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하게 마련이다. 6세기 이후 고구려와 중원 왕조 세력이 충돌하는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그러했다. 6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요서로 진출하였고, 6세기 말~7세기 초에는 수가 요서로 진출하면서 양국 간 경계의 충돌이 심화되고, 수의 고구려 원정에 따라 요서 지역이 수에 편입되는 변화가 이어졌다.

물론 수가 멸망한 뒤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 다시 요서로 진출하였는지 아니면 요하선에 머물렀는지, 또 당나라와 경계의 충돌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구려와 당의 전쟁을 살펴볼 때 다루도록 하겠다.

이제 2회에 걸쳐서는 고구려의 북계와 동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6세기 이후 북계와 동계는 중원 왕조나 유목세력과 연속되는 서계와는 양상이 달랐다. 즉 고구려와 세력을 다툴 수 있는 수준의 국가나 정치집단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변화가 작은 편이었다. 이는 5세기 초를 전후하여 고구려 세력권 범위 내에서 경계가 형성되었고, 이를 깨뜨릴 형세 변화가 없이 고구려 말기까지 죽 이어졌기 때문이다.

본래 고구려가 성장해갈 때 3세기까지 고구려 서북쪽에는 부여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부여는 고조선의 뒤를 이어 만주 일대에 등장하여 세력을 떨쳤지만,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큰 타격을 받고, 346년에 다시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면서 결국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부여의 본 중심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길림시 일대이고, 후에 세력이 약화되면서 장춘, 농안 근처로 이주한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따라서 부여를 복속한 고구려의 북계는 과거 부여 영역의 북쪽 경계와 거의 일치할 것이다. 3세기 중반 사정을 기록한 중국 역사서 '삼국지'에는 부여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 약수는 지금의 송화강으로 보기도 하고 흑룡강으로 보기도 하는데 전체 정황으로 보면 흑룡강이 타당해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가 부여의 영역을 모두 차지했다고 보면 북계는 흑룡강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흑룡강 전체를 하나의 경계선으로 그릴 필요는 없다. 부여가 농업에 기반을 둔 국가였기 때문에 부여의 영역 또한 농업이 가능한 환경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게 합리적이다.

물론 영역이라는 게 꼭 주요 산업 기반과 일치하는 땅만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교역이나 정치군사상 요충지나 전략적 거점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영역으로 편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근대 시대, 특히 고대사회의 경우 비효율적인 영역의 확보는 오히려 국력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굳이 영역으로 편제하지 않더라도 공납을 통한 간접 지배나 세력권 내에 거느리는 방식의 유연한 통제가 오히려 더 유리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고구려 입장에서 부여 복속지를 본다면 모든 부여 영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부여의 중심 지역이 가장 중요하였을 것이다. 즉 부여의 수도였던 지금의 길림시 일대나 후기의 중심지인 장춘, 농안 지역이 우선이고, 다음에 길림의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교통로, 이른바 사출도의 지배 범위가 중시되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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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시에 위치한 용담산성의 용담 : 용담산성은 부여의 수도에 축조한 고구려의 요충성이다. 현존하는 고구려 주요 성으로 가장 북방에 위치한다. /사진=바이두


전 회에서 영역이라는 게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질의 관점에서 보면 영역 전체가 균질적인 사례는 결코 없다. 중심과 변경은 꼭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만 따지는 게 아니다. 영역의 질이란 관점에서도 중심과 변경은 존재한다. 고구려의 북계를 따져볼 때 이런 관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유목 지역이나 산림수렵 지역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 고구려의 북쪽에는 5세기 후반부터 물길(勿吉)이란 존재가 등장한다. 물길의 기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마 동만주 산림지대에 거주하였던 숙신, 읍루 계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 읍루는 부여에 복속되기도 하였는데, 부여 세력이 약화되면서 읍루의 일부가 성장하면서 후기 부여를 몰아내고 동류 송화강 혹은 흑룡강 일대로 세력이 확장된 것으로 본다.

5세기 후반 물길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 뒤 6세기 중반까지 20여 차례 북위에 조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나름 활동한 존재로서 북위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물길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물길의 존재는 고구려의 북계를 파악하는 데 주요 요소가 된다.

5세기 후반 고구려는 서방의 유목제국 유연과 손을 잡고 양국 사이에 위치한 지두우(地豆于)를 분할 점령하려고 했다. 지두우는 대흥안령 산맥에서 내몽골 지역에 걸쳐 위치했던 유목국가였다. 지두우 분할의 실행 여부와 결과는 기록상 나타나지 않지만, 지두우 옆에 위치한 실위에 고구려가 철을 수출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서북방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간 모습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물길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는 조공로를 100여 년 유지한 점을 고려하면 물길의 거주 지역과 물길에서 북위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남쪽으로 고구려의 영역 범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서북방 진출에 따라 물길과 북위를 잇는 조공로가 차단되기도 하였고, 이 조공로가 북위와 우호관계를 고려한 고구려 측의 묵인 아래 유지된 것일 수도 있다. 물길이 고구려와 적대적이라는 점을 들어 북위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했던 점을 생각하면 고구려 북방의 물길이란 존재를 고구려에 복속된 존재로 볼 수는 없겠다.

고구려 북계와 관련하여 물길의 존재를 간략하게 언급하였는데, 물길의 본 거주지는 목단강 일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고구려의 동계를 따질 때에도 고려 대상이다. 이 물길은 6세기 후반부터는 보이지 않고 그 대신에 말갈(靺鞨)이란 존재가 등장한다. 물길과 말갈은 음운에서도 서로 통하는 바 있기 때문에 어떤 계승관계에 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말갈은 거주 공간 범위나 내부 구성이 훨씬 복잡하다. 말갈은 고구려와 수, 당 전쟁이 전개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하고, 양국에 의해 전쟁에 동원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다음 회에서 고구려의 동계를 짚어본 뒤에는 물길, 말갈에 대해 별도로 살펴볼 예정이니, 본회에서는 이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북계는 지금 장춘, 농안 지역에서 길림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북쪽으로 펼쳐지는 농경 지대 어느 범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북계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점이지대를 포함하는 면의 형태로 그려져야 할 것이다.

한 뼘 땅을 놓고도 영토 분쟁이 치열한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점이지대나 완충지대라는 넓은 면의 경계를 그대로 놔 둔 고대인들의 심성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입장이 가장 현명한 판단의 결과라는 점, 그래서 고대의 역사는 고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환기하게 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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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환 기자입력 :  2019-02-21 15:01:03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언제, 왜 이루어졌나? - 매일경제 (mk.co.kr)

[고구려사 명장면-65] 고구려의 서쪽 영역 경계가 내내 요하 일대에 머물지 않았을 가능성은 이미 전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관련 자료가 의외로 드물고, 그마저도 매우 단편적이어서 고구려가 요하를 넘어 서쪽으로 언제 어떻게 왜 진출했는지를 파악하기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래도 요서 진출 여부 및 그 시점을 아는 것은 7세기 고구려와 수, 당과의 충돌 배경을 이해하는 주요한 요인이니,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주제이다.


고구려는 여러 차레 요하를 넘어 요서 지역에 군대를 보냈다. 광개토왕 때 후연과 주도권을 다투면서, 후연의 숙군성(宿軍城)과 연군(燕郡)을 공격하였다. 장수왕 때에는 북연의 풍홍을 구원하기 위해 화룡성(和龍城·현재의 조양)에까지 군대를 보내 북위군과 일촉즉발 충돌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화룡성에 입성했던 고구려군이 그곳을 점령하지 않고 되돌아왔음에서 5세기 전반까지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요서 지역 진출이 일시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가 요서 지역으로 세력 확대를 자제하고 있었던 데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북위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위의 세력이 요하 일대까지 미쳤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북위의 세력 범위는 화룡성(지금의 요령성 유성)을 거점으로하여 의무려산과 대릉하(大凌河) 하류를 잇는 범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릉하에서 요하 일대까지는 고구려나 북위의 영역이 아닌 중간 점이 지대였고, 이 지역에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서 북쪽, 즉 요하의 서북쪽 시란무렌강 유역 쪽으로는 고구려가 꾸준히 세력 침투를 꾀하고 있었다. 일찍이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거란[비려]에 대한 정벌을 나선 바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5세기 후반에 들어서 고구려는 동북아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중심 국가로서 안정된 위상을 확보한 뒤, 서북방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시라무렌 일대 거란(契丹)족은 일부는 북위에 투항하여 이주해 갔고 일부 집단은 고구려에 부용세력화되었다. 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거란 북방의 지두우(地豆于)를 유목 제국인 유연(柔然)과 함께 분할 점령을 기도하는 등 시라무렌강 북방으로도 지배력을 확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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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무렌강 : 시라무렌강은 5세기 이래 고구려 요서 진출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사진=바이두
그러다가 523년부터 북위에서 내란이 확산되어 갔는데, 요서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북위 조정은 이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틈타 525~528년경에 고구려는 요서 진출을 단행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적어도 영주(營州) 일대까지 밀고 들어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대릉하 동쪽 범위로 세력 확장을 자제했다. 당시의 군사 행동이 북위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한 전격적인 작전이었지만, 향후 북위는 물론 동북아 여러 종족의 동향까지 염두에 둔 대응이었다고 보인다.

한편 북위는 내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붕괴하였고, 그 뒤를 이은 동위(東魏)도 요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자 거란족이 시라무렌강 유역 본거지에서 남하하여 영주 가까이까지 내려왔다. 동위를 이어 북제(北齊)가 등장하면서 거란족에 대한 통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553년 북제 문선제(文宣帝)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거란 정벌에 나섰다.

용의주도한 공격으로 문선제가 이끄는 북제군은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개선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제군의 작전 범위는 어디까지나 대릉하 서안, 즉 요서 서부지역에 국한하여 전개되었다. 대릉하 하류의 동쪽 지역, 즉 요서 동부지역으로의 군사 행동은 자제한 인상이다. 아마도 대릉하 동안 지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서 지역은 대릉하 하류와 남북으로 뻗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자연 경계로 동서로 구분되고 있다. 과거 한(漢)이 이 지역과 요하 이동을 묶어 요동군으로 편성했던 연유도 이러한 자연 조건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요서 동부지역을 차지한 것은 단지 수백리 영토를 얻었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요동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전략적 지역을 확보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요서 지역을 통해 거란은 물론이고 북방 유목 세력과 교섭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요서 지역은 농경과 유목이 연결되는 전이(轉移) 지대에 속한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북위 30~40도에 걸쳐서 농경과 유목이 공존한 농목 전이지대가 거대한 벨트를 이루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실크로드로부터 중앙아시아의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거쳐 내몽골의 오르도스, 북중국의 산서지역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요서지역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농목 전이지대는 농경사회와 유목사회가 만나는 곳으로 농목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요서 지역의 여러 종족들은 대부분 유목이나 수렵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들 유목, 수렵사회는 자급자족이 어려워 어떠한 형태로든 농경사회와 지속적으로 교역하면서 물자를 획득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요서 지역의 유목, 수렵 종족들 사이에서는 농경사회인 고구려가 부족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주요 교역국인 셈이다.

반대로 요서 지역의 여러 종족들은 많은 수의 말과 소를 보유하고 있고, 다수의 기병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요서 지역이 우마의 공급처로서 혹은 지원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와 수, 당 전쟁 때에 요서 지역 종족들은 저마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고구려 혹은 수, 당의 편에 서서 군사력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요서지역 종족들에 대한 복속이나 세력권으로 편입은 고구려의 대외전략과 군사적 안정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렇게 농목 전이지대의 동쪽 끝인 요서지역은 4세기 이후에 실크로드 및 오아시스 경로가 요서 지역까지 연장되면서, 농목 교역의 중심지로서 그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런 요서 지역에 눈길을 거두지 않고, 결국 북위 말의 정세를 이용하여 요서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농목교역의 이권을 차지하는 한편 유목세력과 긴밀하게 교섭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점점 증대되어 가는 요서지역의 정치, 경제적 가치는 고구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인 중원 세력이나 돌궐 세력 모두가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6세기 중반 이후 요서지역이 동아시아의 세력 각축의 화약고가 되어갔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배경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다. 북위의 내부 정세나, 점점 커지는 요서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새로이 변화되는 국제질서 운영의 전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정세 판단에서 이루어졌다. 5세기 이래 농축되어 왔던 세계질서 및 전망을 읽는 능력이 다시 한번 발휘된 것이다. 동북아시아 패자의 자리가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고구려인의 넓은 시야와 결단력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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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고구려의 진실’… 동북공정 고발한 기자가 전하는 새로운 주장

 
 
 
 
기자강성만 수정 2020-10-11 18:47 등록 2020-10-11 18:47

“중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들 사라질까봐 절박한 심정이죠” (hani.co.kr)

 

“중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들 사라질까봐 절박한 심정이죠”

【짬】 중국 사업가 출신 역사 저술가 원종선씨 2005년부터 중국에서 상주하며 무역 업무를 하고 있는 원종선(65) ㈜하이코리아 중국부문 총경리가 고구려 성 답사에 나선 때가 2014년이었다.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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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들 사라질까봐 절박한 심정이죠”

【짬】 중국 사업가 출신 역사 저술가 원종선씨

지난 5년 동안 중국에 있는 고구려 산성 170곳을 답사한 원종선 ㈜하이코리아 중국부문 총경리. 강성만 선임기자

2005년부터 중국에서 상주하며 무역 업무를 하고 있는 원종선(65) ㈜하이코리아 중국부문 총경리가 고구려 성 답사에 나선 때가 2014년이었다. 베이징과 항저우를 1794km 물길로 이은 ‘경항 대운하’ 답사기인 <중국운하 대장정> 원고를 탈고한 바로 뒤였다. 이 책을 쓰며 수나라 양제(569~618)가 대운하 건설에 집착한 데는 고구려 정복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그는 이런 궁금증을 품게 되었단다. 고구려는 어떻게 대운하까지 만들어 동원한 113만 수나라 대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고구려 성 답사를 시작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중국 동북3성에 산재한 고구려 성 170곳을 답사했다. 이 중 73개와 85개 성 답사기를 2년 전 출간한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이하 통나무)와 최근 펴낸 <고구려의 핵심 산성을 가다>에 각각 담았다. “중국에 고구려 성이 220개 정도 있어요. 남은 50곳까지 가보고 세번째 책으로, 고구려 성 답사기를 마무리해야죠.” 지난 7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교정에서 만난 저자의 말이다.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2018) 표지

“고구려 성 답사를 언제 마무리할 지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달렸어요. 작년 11월이 마지막 답사였죠. 코로나가 터진 뒤로는 사무실이 있는 다롄도 못 가고 있어요.”

그는 중국 상주 첫 4년은 경항 대운하의 남쪽 끝 항저우에서, 그 뒤로 5년은 운하의 북쪽 끝인 베이징에서 살았다. 2014년에는 고구려 성 답사를 위해 랴오닝성 다롄으로 아예 사무실을 옮겼다. “다롄 주변에 비사성을 비롯해 고구려 성이 많아요. 제가 장기 거래처에서 원자재를 확보하는 일을 하고 있어, 사무실 위치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가족도 한국에 있어 사무실을 쉽게 옮길 수 있었죠.”

그가 고구려 성 답사에 나선 것은 수 양제나 당 태종의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힘의 원천이 바로 고구려 산성이라는 생각에서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도 성을 뜻하는 고구려 말인 ‘구루’에서 나왔어요.” 그가 펴낸 두 권의 고구려 성 답사기에 각각 서문을 쓴 도올 김용옥 교수는 “고구려는 산성의 연합네트워크로 이뤄진 대제국이었다”고 썼다.

<고구려의 핵심 산성을 가다>(2020) 표지

그는 고구려 성 답사기 2권 격인 최근작에서 645년 당 태종의 공격에 맞서 고구려를 지킨 안시성과 주변 21개 성들의 상세한 위치와 형태는 물론 전투 관련 전설과 민담을 기록하는 데 특히 공을 들였다. “재작년 6개월 동안 안시성 주변 성들(평지성 3곳, 산성 18곳)을 틈이 날 때마다 둘러 보았어요. 당 대군이 요동성을 함락한 게 5월 17일입니다. 그런데 요동성에서 불과 60km 떨어진 안시성 앞에 나타난 날이 6월 20일이에요. 왜 60km 전진에 한 달 이상 걸렸는지, 그 답을 찾고 싶었어요.”

산성을 둘러본 뒤 의문이 풀렸단다. “(당 군대의 진격이 늦춰진 것은) 요동성과 안시성 사이 고구려 성들 때문이었죠. 이 성들을 직접 확인하고 전투 관련 민담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졌어요. 아무리 많은 대군도 산성 공격은 힘들어요. 산에 오르다 지치죠. 이수난공(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렵다)이 바로 산성입니다. 산성과 산성이 연합하면 그 힘을 몇 배로 발휘할 수 있고요. 고구려가 당 태종의 군대와 맞서 이긴 힘은 바로 산성의 포국(전체 배치)에서 나왔죠. 당 군이 바로 전진했다가는 배후에서 공격받을 수도 있고 보급로도 차단될 수 있어 백암성이나 개모성 등 도중에 있는 성들을 치다 당 군대가 입은 전력의 손실이 컸어요.”

원종선 작가가 현지 답사 등을 통해 추정한 645년 당 태종 군대의 고구려 요동성과 안시성 사이의 이동 경로. 통나무 제공

자신보다 더 많이 고구려 성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 저자는 책에 학술보고서라고 해도 될 만큼 세밀하게 답사한 각 성의 현황과 유래를 담았다. 사진은 물론 현지 답사를 토대로 추정한 각 성의 원래 모습도 직접 그렸다. 이렇게 상세히 기록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고구려를 알려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고구려를 수박 겉핥기로 배워요. 저도 세밀하게 배우지 못했죠. 전해 내려오는 고구려 역사서가 부족한 탓도 있죠.” 덧붙였다. “고구려 유적으로 고분이나 벽화가 있지만 이는 도읍지에 있는 지배계층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강역 전체에 흩어져 있는 성은 백성을 동원해 쌓은 민의 역사이죠. 전쟁이 나면 고구려 백성은 산 아래 농사짓고 있는 것을 다 불태우고 먹을 것만 가지고 산성에 모여들어 군대와 함께 싸웠죠. 그게 고구려 역사입니다. 성은 고구려의 실체이죠. 이 실체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지난 5년간 동북3성일대 170개 확인2018년 이어 최근 두번째 답사기 내“중국 백만대군 물리친 힘의 원천”나머지 50개까지 보고 기록할 계획2005년부터 중국 근무…‘대운하’ 저술도“겉핥기로 배운 우리 역사 정확하게”

그가 지금 이 순간의 고구려 성을 온전히 기록하자고 맘먹은 데는 언제 이 성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란다. “200개가 넘는 고구려 성 중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중국 국가급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비사성과 환도산성 등 10개가 안 됩니다. 성급이나 시급 보호를 받는 성은 잘 보존이 되지 않아요. 답사하며 훼손된 성을 많이 봤어요. 다롄에서 선양 가는 국도변에 있는 마권자산산성을 보니 주민들이 성의 돌로 계단식 과수원 밭을 만들었더군요. 돌을 담장으로 쓰는 곳도 많아요. 산성 가장 높은 곳에 이동통신탑을 세운 곳도 있고요.”

고구려 연통산산성의 성문이다. “1500년 이상 끄떡없이 지켜온 성문을 보면서 하나의 조각품을 대하는 듯한 마음이었죠.”(원종선 작가) 통나무 제공

답사 중 가장 기쁜 순간을 묻는 질문에 그는 “산을 헤매다 성벽을 만날 때”라고 했다. 그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희를 느낀”단다. 답사 전에 성이 위치한 현에서 나온 역사지리서나 역사잡지, 서적 등 관련 자료를 훑어보며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현지에서 성벽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단다. “처음에는 여러 산 가운데 어디에 성이 있는지 찾기 매우 어려웠어요. 그럴 때는 먼저 70대 이상 현지인을 수소문합니다. 젊은이들은 대개 ‘고구려 산성이라니, 무슨 이야기냐’는 반응이지만 어르신들은 ‘아 그거 까오리(고려) 산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까오리는 당신네 선조 아니냐, 당신네와 관련 있지 않느냐’고 하죠. 중국이 동북공정(2002~2007년)으로 고구려를 자기들 역사라고 했지만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어르신에게 같이 올라가자고 부탁합니다. 같이 오르면서 전해 오는 이야기나 성벽이 훼손된 사연도 들을 수 있어요. 지금은 산세를 보면 대략 성이 어디쯤 있을지 80~90%는 압니다. 노하우를 터득했죠.”

그는 고구려 성 답사에는 중국인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는 말도 했다. “지린성을 보면 각 현들이 동북공정 이전인 80년대 중반에 일제히 역사지리서를 발간했어요. 알고 지내는 중국 친구들이 이런 자료와 1960~90년대에 나온 여러 역사 전문 잡지들을 고서점에서 구해 줬어요. 답사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고구려는 저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의 고향이죠. 우리 역사는 대륙에서 시작해 한반도로 이동했어요. 고구려는 대제국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고구려를 잊고 살았어요. 식민사관 때문에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만 한정했죠. 일본과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고구려 땅을 되찾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지난 답사로 얻은 학술적 성과가 있는지 궁금했다. “중국이나 한국 학자들이 고구려 산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10여개의 산성을 새로 찾았어요. 당나라 시절 산성이었다거나 고구려와 당 군이 거기서 싸웠다는 주민 증언을 토대로 제 나름대로 추정한 거죠. 제 생각이 100%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문연구자들이 고구려 성을 새로 발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원종선 작가가 가장 아름다운 고구려 산성 중 하나로 꼽은 백암성 북벽 모습이다. ㄷ자 형으로 돌출된 치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산성이다. 원종선 작가 제공

직접 눈으로 확인한 170개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딘지 물었다. “다롄 인근에 있는 성산산성은 원형이 그대로 남은 게 많아요. 미학적으로 괜찮아요. 당 태종이 요동성 전투를 치르고 그 다음에 공격한 백암산성은 ㄷ자 모양으로 돌출된 성벽 구조물인 치가 아름답고 온전하게 남아 있어요. 당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떠올릴 수 있죠.”

계획은? “고구려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 그 강역이 어디까지였는지 추적해 보고 싶어요. 보통 제국의 영토를 이야기할 때 직접 지배, 간접 지배, 영향권으로 나눠 보잖아요. 영토가 가장 넓었던 장수왕 시절에 고구려 영향권이 어디까지였는지 알아보고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오종홍 | 승인 2017.02.14 16:59

고대 압록강은 어디인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고대 압록강은 어디인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역사지리의 위치를 찾는 것은 역사연구의 핵심이다.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작용하는 압록강은 언제 붙여진 이름일까?중국의 수많은 정사류正史類는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고 한다.

www.koreahiti.com

고대 압록강은 어디인가?

고려시대까지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역사지리의 위치를 찾는 것은 역사연구의 핵심이다.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작용하는 압록강은 언제 붙여진 이름일까?

중국의 수많은 정사류正史類는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고 한다.

 

 

2007/10/13 [10:24]

고대의 '평양'은 과연 지금의 평양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고대의 '평양'은 과연 지금의 평양인가?

노무현대통령과한나라당간의NLL공방이뜨겁다.대통령은헌법제3조까지인용했다.그헌법제3조란“대한민국의영토는한반도와그부속도서로한다”이다.그

www.pluskorea.net

 

平壤城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때부터이다. 그럼 최초의 고구려 平壤城은 어디일까?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東夷편을 보면
高麗者,出自扶余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裡。

해설을 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고구려의 平壤城이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에 있다 했으니 하북성 북부 지역 즉 북경 근방이다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동북아의 절대강자 고구려의 최대 영토 어디까지?

https://youtu.be/d7LuOhTuzBg

 

 

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1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 염수의 비밀 / KBS 20000101 방송

https://youtu.be/UL1D6Ip0POA

 

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2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 미지의 장벽 대흥안령 산맥 / KBS 20000108 방송

https://youtu.be/DRNgicoM0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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