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4. 고구려 문화유산 (3)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진파리고분군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

4. 고구려 문화유산 (3)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진파리고분군

대야발 2024. 8. 18. 17:22
SMALL

 

 

진파리고분군은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 산재해 있는 10여개의 무덤입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습니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봅니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합니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장군인 고흘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1호분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으로, 온달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4호분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⑥ 평양지역의 고구려왕릉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2020. 11. 21. 08:02

 

......

 

2007년 2월 리명화 해설강사가 동명왕릉을 뒤쪽에 있는 ‘진파리 제7호분’에 직접 들어가 묘실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무덤을 북한에서는 고구려 건국공신인 마리 장군의 묘라고 주장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는 10여개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본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 고분군’. 북한에서는 ‘동명왕릉고분군’이라고 한다. 현재 10여기가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한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장군인 고흘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1호분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으로, 온달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4호분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고분군’ 중 하나인 진파리1호분 전경. 북한에서는 고흘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남한학계에서는 무덤 내부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이 무덤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고분군’ 중 하나인 진파리4호분 전경. 북한에서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고 주장한다. 남한학계에서는 무덤 내부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이 무덤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고구려, 찬란한 황금문화 꽃피우며 부국강병 이뤄내

2021. 3. 8. 09:05
 
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9)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직경 0.2mm 정교한 금실, 병사 갑옷에도 금도금
평양 역포 진파리 6호분에서 발견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뚫음무늬 금관

평양 대성구역 청암리에서 발견된 불꽃 문양 금동관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뛰어난 금관들이 6점이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 조상은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금을 좋아했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귀족이 금·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했으며, 고구려인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어 금·은 같은 재물이 없어진다고 기록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의 귀족이 저택과 모자 의복을 금·은·구슬로 치장하고, 금목걸이·금귀고리·금가락지 등의 장신구를 소유했다고 썼다. 또 무덤에서는 금동등자, 금동재갈, 안장, 금동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겨진 금실이 나왔다. 주조, 압연, 도금, 합금, 가늘새김 등의 금세공술로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기술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그뿐만 아니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645년 요동전투에서 말들과 함께 명광개(금갑, 금휴개) 1만 벌(《구당서》에는 5000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고구려 병사들은 황옻칠 또는 금도금을 해서 햇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전투한 것이다.

 

군수산업으로 부국강병

금도금을 한 화살촉들(중국 지안박물관)

 

평안북도 운산 등은 금의 산지였고, 송화강 중류와 상류 주변에는 사금 광산이 많았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점령한 이후 금 생산은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위서》에는 고구려가 북위에 황금 200근(120㎏), 백은 400근(240㎏)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금과 은 무역을 했다. 왜국의 최초 사찰인 ‘아스카사’는 고마척(高麗尺)을 사용해 고구려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황금 300냥(11.25㎏)을 보내 불상을 제조하게 했다. 이어 금과 은을 또 왜국에 보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다량의 백금(은)을 보낸 적이 있다. 중국 기록(《고광록》)에는 은광산에 수백 가구에 이르는 사람이 주거하며 채굴·제련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지안 일대에는 1만20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직경이 60여m에서 80여m에 이르는 대형 피라미드가 10여 기 이상이다. 토목공학이 발달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결과물이다. 700여 년 지속된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 기억해주세요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점령한 이후 금 생산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2)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청동거울이 세상에 나온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이 거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하학적 추상무늬'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한반도 청동거울의 기원과 거울 뒷면의 무늬, 이 거울에 담긴 세계관은 무엇인지 밝혀 보고자 한다. -기자말 
 
▲ 〈사진164〉 천왕지신무덤 고구려벽화 평안남도 순천군 북창면 북창리 송계마을. 5세기 중엽. 고구려벽화에 관한 역사 기록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석기와 청동기 세계관에서 벽화의 기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 김찬곤 관련사진보기
 
신석기에서 시작해 조선 민화까지

위 고구려벽화는 천왕지신무덤 벽화다. 그림 사이에 천왕(天王)과 지신(地神) 먹물 글자가 있어 천왕지신무덤이라 한다. 나는 위 벽화에 나와 있는 것을 천문(天門), 천문에서는 나오는 구름(云), 봉황(瑞鳥)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 학계에서는 이 벽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가 알기로 이에 대한 해석은 전혀 없다.

우리는 고구려벽화에 대한 연구가 거의 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아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위 벽화 속 천문(天門)만 하더라도 고구려벽화에 수없이 나오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해석도 내놓지 못한 형편이다. 나는 고구려벽화에서 천문을 가장 중요한 도상으로 본다. 천문은 주로 천장에 그려져 있고, 이 천문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이 바로 천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천문은 망자가 누웠을 때 바로 보이는 천장이나 발끝 위쪽에 있다. 사람 또한 천문에서 나왔으니 다시 천문으로 돌아간다는 구상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한반도인이 죽음을 해결한 방식이다. 이 세계관은 신석기에서 시작해 고구려벽화에, 그리고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조선 민화에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 〈사진165〉 안악 제2호 무덤 천장벽화, 〈사진166〉 환문총 벽화  〈사진165〉 안악 제2호 무덤 천장벽화.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상지마을. 5세기 말 6세기 초. 〈사진166〉 환문총 벽화.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하해방촌. 5세기.
ⓒ 김찬곤 관련사진보기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한반도인의 세계관

이 천문은 지금도 비석 머리장식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여의주다. 여의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용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통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것으로 본다. 여의주가 있어야 용이 승천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것과 망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무덤은 애당초 죽음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또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해결과 용의 승천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해석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우선 신석기부터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한반도인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죽음을 어떻게 해결해 왔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일단 비석 머리장식에 있는 용과 보주의 기원은 저번 글에서 보기로 든 진나라 벽돌 '용문공심전' 그림에 있다는 것만 밝혀둔다(다뉴세문경, 드디어 풀리다).

〈사진165-166〉 벽화를 보면 천장과 벽에 둥근 고리무늬가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이 둥근 무늬의 정체를 풀지 못하고 있다. 단지 둥근 겹무늬 동심원, 고리무늬 동심원이라 할 뿐이다.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에서는 "의미 불명의 기하학적 문양"이라 하고, 환문총 같은 무늬는 고구려벽화에서 평남 대동군 내리 제1호 무덤에서만 보인다고 말한다(1315쪽).

하지만 이는 잘못 본 것이다. 〈사진164-5〉도 〈사진167〉도 본질적으로 환문총 동심원 무늬와 같은 것이다. 더구나 이 무늬는 고구려벽화에서 기본 무늬이다. 다시 말해 환문총과 내리 무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벽화 거의 모든 무덤에서 볼 수 있고, 이 무늬가 무덤 무늬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늬의 정체를 풀어야만 다른 여타의 무늬도 총체로 맞물려서 풀리는 것이다.

천문에서 나왔으니 죽어 다시 천문으로

〈사진166〉은 환문총 벽화인데, 이렇게 둥근 고리무늬가 있다 해서 환문총(環文塚)이라 한다. 환문총은 고구려 벽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원래는 생활그림을 그렸으나 어떤 영문인지 모르지만 무덤 주인이 그 위에 회를 바른 다음 이렇게 둥근 고리무늬만 그려 넣었다. 물론 고구려 벽화에는 수정을 하기 위해 회를 덧바르고 다시 그린 벽화가 있다. 그런데 환문총처럼 이렇게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은 이 무덤이 유일하다.
 
▲ 〈사진167〉 진파리 제4호 무덤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둥근 고리(天門)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나고 있다. 이렇듯 고구려 벽화에는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이 천문(天門)이라는 것을 곳곳에 그려 넣었다.
ⓒ 김찬곤 관련사진보기
 
2014년 전호태는 《비밀의 문, 환문총》(김영사)을 내며, 이 둥근 고리무늬를 불교의 '윤회'로 해석한다. 그는 불교의 세계관으로 환문총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 뒤 불교 미술 문양 가운데 환문총 같은 고리무늬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슷한 것으로는 보주(寶主)를 들 수 있지만 보주는 이것과는 다르다. 만약 이것을 보주로 본다면 고리무늬 둘레에 있는 다른 무늬와 총체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다.

고구려 벽화는 불교 이전의 세계관 내지는 내세관이라 할 수 있는데, 전호태에게는 불교 이전의 고구려 세계관이 없다. 또 내세관도 문제가 있다. 전호태는 고구려 벽화에 생활그림이 많은 것을 두고, 전생에서 귀족으로 살았듯 내세에 가서도 귀족으로 살고 싶은 욕망을 그렸다고 본다.

하지만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고구려인들에게 이런 내세관이 있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유물에서도, 미술에서도 없다. 한반도 사람들에게 내세관은 불교 이후의 세계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주 옹관, 원통형토기, 고인돌을 다루면서 아주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벽화를 총체로 보면 전호태와 같이 해석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없다. 고구려인들은 천문에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았던 삶을 벽에 그리고, 죽어 다시 천문으로 돌아간다는 내세관을 천장에 그렸다. 그래서 〈사진165〉 안악 2호분 무덤처럼 천장에 천문을 그린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천장에 있다. 벽화의 시작도 그 끝도 천장 그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우리 학계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 벽화는 무덤 '벽'이 아니라 망자가 누워서 바로 보이는 천장 그림이 핵심이고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다.

〈사진165〉 안악 2호분을 보면 한가운데 천문(天門)이 있고(이것은 연꽃이 아니다! 연꽃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사방에 둥근 고리 무늬 천문(天門)이 네 개 있다. 이것은 사방오주(四方五州), 다시 말해 동서남북 사방과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다섯 들판(五州)를 뜻한다. 이 세상 사방오주의 만물이 하늘 구멍 천문에서 비롯했고, 이 천문에서 나왔으니 죽어 다시 천문으로 돌아간다는 내세관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씁니다) (3)

 

 

 

 

<주>

 

(1)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⑥ 평양지역의 고구려왕릉 (daum.net)2020. 11. 21. 

 

 

(2) 고구려, 찬란한 황금문화 꽃피우며 부국강병 이뤄내 (daum.net)2021.3.8.

 
 
 
 
(3) 22화다뉴세문경 무늬, 드디어 풀리다3[차근차근 한국미술사22] 고구려 사람들의 세계관과 내세관 그리고 다뉴세문경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