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10) - 고구려 문화유산(5) 고구려 세계문화유산(5) 국내성, 위나암성 본문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중국 길림성(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통구성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며, 현재 성벽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습니다. 집안(지안) 서북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있는데, 이 때부터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어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산성인 위나암성에 피난해 적과 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1)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都城)은 서기3년(유리왕 22년)에 고구려 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성입니다. 현재 길림성(지린성) 통화시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산상왕 원년인 197년에 공손탁(公孫度)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이듬해인 198년에 위나암성을 전면적으로 증축하고, 환도성(丸都城)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산상왕(山上王) 13년(209년)에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천왕(東川王) 20년(246년)에 위(魏)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와, 환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동천왕 21년(247년)에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通溝 부근의 어느 곳)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기며 환도성을 떠났습니다.
고국원왕 12년(342년)에 왕이 환도성(丸都城)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해 겨울에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병력 4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습니다.
위나암성(환도성)은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서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그 성벽이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의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위나암성은 뒤로 가파른 산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통구강(通溝河)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는 곳입니다.(2)
이형구교수는 국내성으로 천도[기원후 3]하기 이전에 이미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으며, 국내성은 이미 축조되었던 토성을 기초로 하여 석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국내성의 규모는 처음부터 동벽의 길이가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 등 전체 길이 2,686m의 방형으로 된 석축 평지성이다. 남벽 바깥에는 해자 자리에 도랑이 나 있다. 성벽은 내외 양 벽에 장방형 또는 방형의 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리고 성벽 안쪽은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북벽 일부와 서벽의 마면(馬面) 일부만이 남아 있다. 북쪽 성벽은 기단의 넓이가 약 7~10m이고, 높이는 2~4m이다. 그 밖에 남벽의 서쪽 끝 부분에 3~4m의 성벽 흔적이 일부 남아 있고, 동벽도 끝 부분에 약간 남아 있으나 모두 파괴되고 민가가 들어서 있다. 원래 초축은 토성이었다고 한다.
1975~77년, 국내성지의 시굴조사에서 국내성의 성벽을 석벽으로 쌓기 이전에 이미 토축(土築)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시굴시 토성의 내부에서 석부·석도·원형 석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보고자는 이들 유물을 중국의 전국시대[청동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칠성산묘구(七星山墓區)에서 바라본 집안시내(輯安市內) 풍경국내성 서벽(정비 후)과 북벽이 보인다.
국내성은 1947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보존되었으나 중국의 해방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동성로(東盛路)를 뚫고, 동서로는 승리대로와 단결대로가 뚫리고 성안에는 온통 민가가 들어섰다.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국내성에서 성문지는 물론 궁전지며 건물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서울의 풍납토성과 난형난제(難兄難弟)의 형상이다.
고구려가 이곳에 천도[기원후 3]하기 이전에 이미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으며, 국내성은 이미 축조되었던 토성을 기초로 하여 석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특히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국내성 내부가 관공서를 비롯하여 상가·주거지로 변해 모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옛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최근에는 2004년 6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앞서 파괴된 부분을 수축하고 정비·복원하고 있다.
저자가 2004년 1월 13일 현지를 답사한 바 최근에 통구하(通溝河)변의 서벽 부분에 있는 민가들을 헐고 정비하였다. 이때 원래의 성벽이 강가에서 드러났다. 지금의 성벽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342]조에 보면, “봄 2월에 환도성을 수용(修茸)하고, 아울러 국내성도 수축하였다”고 하였는데, 아마 2003년에 서벽을 발굴하여 드러난 기저부에 외향적으로 조금 남아 있는 고구려 성벽이 이때 수축한 성벽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1992년의 국내성(國內城) 복원 전의 서벽 마면(馬面)
2004년의 국내성 복원 후의 서벽 마면
환도산성(丸都山城)은 황성[국내성]을 보호하는 군사적인 수비성으로, 평상시에는 양식과 병마·병기를 비축해두었다가 전시(戰時)에는 이곳으로 입성하여 왕통을 지켰다. 그래서 산상왕(山上王) 13년[209]과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 공손강(公孫康)과 모용황(慕容皝)의 2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고도 잘 이겨내는 등 피난 도성의 역할을 다했다. 최근에 환도산성 내에서 고구려 환도산성 궁전지(宮殿址)가 발굴되었다.
최근에 발굴된 환도산성 궁전지2003년, 환도산성내 약 8,000m2에서 3단으로 조성된 대형건물지가 발굴되었다.』(3)
임기환교수는 국내성 천도 시기를 유리왕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왕이 처음 도읍한 곳은 졸본(卒本)이다. 졸본의 위치는 오늘날 중국 요령성 환인시(桓仁市) 일대로 보는데 거의 이견이 없다. <광개토왕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에 있는 산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여기서 서쪽 산위의 성이 지금 환인시 오녀산성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많이 있어, 첫 도읍지였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후 고구려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국내성은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이다. 집안에 가보면 국내성과 산성자산성을 비롯하여 7000여 기의 고구려시대 고분이 온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가장 오랫동안 도읍지였던 역사의 내력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면 언제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기원 45)에 천도했다는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유리왕 21년에 제사에 희생물로 쓸 돼지가 도망치자, 담당 관리가 이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잡았다. 그가 돌아와 유리왕에게 보고하기를 "국내 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이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고, 사슴과 물고기가 많이 납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에게 크게 이롭고 병란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유리왕이 직접 국내 지역을 시찰했고, 이듬해에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국내성 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민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제사에 쓸 희생물인 돼지를 등장시켜 마치 국내 천도가 하늘의 계시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도읍을 옮기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렇게 무언가 그럴싸한 천도의 이유를 밝히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럼 위나암성은 어디일까? 지금 집안시 일대에서 찾는다면 산성인 산성자산성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다음 기록과 그리 맞지 않는다.
대무신왕 11년(서기 28)에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쳐들어 오자 대무신왕은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 일 동안 굳게 지켰으나, 점차 적의 포위에 군사들이 지쳐갔다. 이때 신하 을두지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한나라 군사들이 우리 성안에 샘이 없다고 생각해 우리를 포위하고 궁핍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술과 함께 보내는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렇게 하자,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어 금방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 이야기 정황을 보면 성안에 샘이 있는데, 이를 한나라 군이 잘 알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 그런데 집안시의 산성자산성은 성밖에서 성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구조라서, 위 이야기가 성립할 수 없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이 198년에 환도성을 쌓고, 209년에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 환도성이 바로 산성자산성이 된다. 즉 위나암성과 환도성이 같은 곳이 되어 서로 모순이 생긴다. 오히려 위 이야기의 정황과 잘 맞는 곳은 바로 졸본의 오녀산성이다. 그렇다면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중국에서 집안시 국내성을 발굴 조사해보니 3세기 초 이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유리왕대 천도는 부정된 셈이다.
그럼 언제 국내성으로 천도했을까? 여기서부터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 태조대왕 때라는 견해가 있다. 모본왕과 태조왕 사이에 왕계가 단절되는 면이 있는 등 태조왕이 시조적 모습을 갖고 있으니 이때 국내성이 졸본을 대신하여 도읍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여러 정황으로는 가장 그럴 듯하지만, 앞서 고고학적 조사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209년에 산상왕이 환도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바로 국내성 천도를 가르킨다는 주장도 나왔다. 더욱이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는 산상왕이 "새로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산상왕 때 천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근사하게 맞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의 아버지인 신대왕 때, 그 다음 고국천왕 때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명확하다. 이미 졸본이 도읍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산상왕 이전에 국내성으로 천도해야 앞뒤가 맞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대왕 때 국내로 천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아직 논거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새롭게 검토해볼 만한 견해이다.』(4)
복기대교수는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랴오닝성 랴오양 일대이고, 또 2대 유리왕 때 도읍지로 정해 장수왕 때까지 고구려 수도로 알려진 집안(지안集安· 지린성)의 국내성은 고국원왕 이후의 도읍지라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도읍을 모두 8곳에 정했다. 동명왕때 졸본, 유리왕(2대)때 국내성, 산상왕(10대)때 환도, 동천왕(11대)때 평양에 도읍을 정했고, 이어 고국원왕(16대)때 환도산성과 평양 동황성, 장수왕(20대)때 평양, 평원왕(25대)때 평양 장안성으로 옮겼다. 그런데 1940년대 고구려 도읍지를 처음 비정한 일본 학자들은 동명왕때 졸본을 환인으로 확정했고, 유리왕부터 장수왕까지의 도읍지를 집안의 국내성으로, 그리고 장수왕부터 평원왕까지의 도읍지를 평양으로 구분했다. 8곳을 3곳으로 좁혀 파악한 일본 학자의 연구결과는 우리 학계에 그대로 전수됐다.
복 교수는 그러나 동천왕, 고국원왕, 장수왕 때 천도한 곳으로 알려진 평양은 지금의 평안도 평양이 아니라 각각 환런(桓仁), 지안, 랴오양이라고 주장한다. 평양의 지명을 가진 지역이 여러 곳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요사'의 기록을 보면 동천왕이 도읍을 옮긴 곳은 요나라 시대 행정구역인 환주 지역으로 추정되며, 이는 오늘날 환런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 가운데 중기의 것이 많은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복 교수는 또한 유리왕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했던 국내성의 상한 연대가 330년께보다 빠르지 않다는 유적 발굴 결과를 근거로 고국원왕때 옮긴 도읍지 평양은 집안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장수왕이 옮긴 평양의 위치도 '요사'와 '원사'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랴오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평원왕때에 이르러서라는 주장이다. 환런을 동천왕때 도읍지로, 지안을 고국원왕 이후의 도읍지로 본다면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과 유리왕과 산상왕이 천도한 도읍지의 위치는 애매해진다. 즉 고구려의 첫 도읍지가 환런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된다.
복 교수는 "이렇게 본다면 그간 연구되었던 고구려사는 전면 재조정돼야 하며, 환런, 지안, 평양 세 곳에 초점을 맞췄던 고구려 연구도 많은 부분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 때문에 오늘날 지린성 동북부로 추정되는 부여의 위치와 '평양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한사군의 문제 역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5)
<주>
(1) 국내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위나암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3)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건국의 터전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4) 고구려 국내성 천도 시기 산상왕·신대왕때가 유력? (daum.net) 2016. 11. 10.
(5)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中 요양" (daum.net) 2009. 6. 24.
<참고자료>
https://namu.wiki/w/%EA%B5%AD%EB%82%B4%EC%84%B1
고구려 역사를 찾는 고향, 국내성 [고구려사 명장면] (daum.net)임기환 2022. 11. 19.
https://v.daum.net/v/20170709123302662
https://v.daum.net/v/20170814030139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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