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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구려 문화유산 (6)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천추총, 서대총, 임강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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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구려 문화유산 (6)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천추총, 서대총, 임강총

대야발 2024. 9. 2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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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총

 

 

 

천추총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집안 통구고분군을 이루는 6개 고분군 가운데 마선구고분군(麻線溝古墳群)에 속하는 고구려고분이며, 마선구평야에 위치한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입니다.

 

 

천추총(千秋塚)이라는 명칭은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명문에서 유래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35년(소화 10)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에 의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공식명칭은 ‘마선구 1000호묘’입니다.

 

천추총은 훼손이 심하여 원상을 잃었지만 원래는 10층 정도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 평면은 한변 길이 63m 정도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10.9m, 파괴가 심한 동쪽은 7.9m 정도입니다.

 

 

무덤의 윗부분은 편편하며 정상부에서 태왕릉(太王陵)의 집모양 돌덧널〔石槨〕과 같은 석재가 남아 있어서 태왕릉과 같은 돌방 내에 가형 돌덧널이 있고 돌덧널 내에 부부를 합장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널방은 기단 상부에 축조되었으며 무덤의 전체 외형은 방추형이다. 무덤의 주변에서 상당수의 명문전(銘文塼)이 출토되었습니다. 무덤의 주위에서 격자무늬·노끈무늬·구름무늬〔卷雲文〕등의 기와편이 다량 수습된 것으로 보아, 장군총(將軍塚)이나 태왕릉과 함께 묘역에 사당이나 관계시설이 세워졌던 듯합니다.

 

 

그밖에 2003년도 조사에서 금실과 금제장신구, 금동못과 갑옷편, 청동방울, 철제칼과 고리, 철제갑옷, 꺾쇠 등이 수습되었습니다.

 

천추총에서는 ‘미재영락(未在永樂)’으로 판독되는 기와편이 수습되었는데, 고구려 영락(永樂) 연간의 미(未)는 을미(乙未: 395)와 정미(丁未: 407)가 있어서 천추총의 축조연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천추총은 명문기와와 연화문와당으로 미루어 4세기말경 태왕릉보다 먼저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토된 기와편 가운데 구름무늬와당은 집안현박물관 근처의 유적에서 수습된 ‘태(泰)’자 명문 와당과 거의 같아 같은 시기인 4세기 중엽경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분의 규모 및 축조기법으로 보아 왕릉급에 해당하는 완성기의 기단이 있는 돌무지무덤입니다. 천추총의 주인공으로는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비정되고 있습니다.(1)

 

 

 

 

이형구교수는 천추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국학자들은 1990년부터 2003년까지 마선하 일대에서 8개의 왕릉급 고분을 조사하여 < 지안 고구려 왕릉 > (2004)이란 보고서를 간행한바 있다. 이 왕능급 고분중 하나인 천추총은 이 비와 400여m의 거리에 있다. 이 고분은 사방 63m 높이 11m로 광개토왕능이라고 하는 태왕능의 규모와 비슷한데, 이 천추총에서는 일찍이 '千秋萬歲永固'라 새긴 전돌과 많은 양의 와당이 출토된 바 있다. 천추총은 축조 방법이 간략하고 능원도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왕릉(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천추총에서 출토된 와당 중에는 '□未在永樂'이란 글자가 보이는데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이고 '□未'의 앞자리 □자는 간지 정미(丁未)의 '丁'자의 아래획 같은 흔적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보아 광개토대왕 재임중의 정미년으로 추측된다. 정미년은 광개토대왕 17년 즉, 407년이다. 그러므로 이 천추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이 된다. 이 비는 고국양왕의 능비이지만 고국양왕의 능을 위시해서 마셴허 유역의 여러 선왕(先王)의 능을 수호와 제사를 드리도록 법을 정하여 공포하기 위해 세운 비로 추측된다. 』(2)

 

 

 

 

서대총

西大塚
 

중국 지린성 지안시 건강촌 북측 산기슭 사면에 위치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통구 고분군 마선구 묘구 500호(JMM 0500)에 편호되어 있다.


통구 고분군은 서쪽의 마선구, 칠성산 고분군과 북쪽의 산성하 고분군, 동쪽의 우산하, 하해방 고분군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서대총은 서쪽구역의 큰 무덤이라는 뜻에서 서대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대묘, 서대총으로도 둘 다 불리고 있으나 한국고고학사전에 서대총으로 불리고 있어 이를 따른다.
 
서대총은 분구의 형태에 따라 계단식 적석총, 방단계제적석총으로 구별되며 통구 고분군 내에서 초대형으로 분류될 만큼 크다. 평면형태는 사다리꼴로 동측과 북측이 약 53m, 서측 56m, 남측이 62m 가량이며 높이는 11m이다.
 


무덤은 황토층을 정지(整地)하여 기반으로 삼아 축조되었으며 화강암, 사암, 석회암을 가공하여 계단을 쌓아 올려나갔다. 배타적인 경관을 확보하기 위해서 평지보다 약간 높은 비탈진 경사면에 입지한 것으로 보이며, 무덤을 구축할 평면을 만들기 위해서 계단 가장 아래 기단부의 앞쪽엔 거대한 석재를 층층이 쌓아 수평을 맞추었다. 계단의 층수는 가장 잘 남아있는 쪽이 11단이며 무덤 자체가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각 변마다 계단의 층수가 다를 수 있으며 더군다나 계단을 구성하였던 석재들이 이탈하여 정확한 층수를 알 수 없다.
 


극심한 도굴의 피해를 입어 현재까지도 무덤의 정상부엔 거대한 도굴갱과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모종의 피해로 말미암아 매장주체부는 알아 볼 수 없는 형태이다. 다만 도굴갱의 깊이를 볼 때 석곽(돌덧널무덤), 석실(굴식돌방무덤), 그리고 양자를 합친 개념인 광실(壙室)[6]로 구분된다. 역시 명확한 형태로 추정되는 것은 없다.
 


서대총의 남쪽 아래에는 이른바 묘설(墓舌)이라고 불리는 위에서 보면 말그대로 혓바닥처럼 튀어나온 돌무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서는 견해가 두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앞에 말한 묘설이라는 것이 서대총 이전에 상대적으로 허접한 적석총[7]을 쌓을 때의 전통이 유지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도굴(또는 모종의 파괴행위)을 하다가 나온 돌들을 이쪽으로 버리면서 쌓인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만 서대총은 무덤을 어느 정도 해체하면서 진행하는 발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견해가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없다.
 


서대총에는 위의 추정 묘설 외에도 작고 얇은 판석(版石)을 북측의 일부 계단에 기대어 놓았는데, 이러한 작은 판석을 기대어 놓는 행위(또는 장식)도 앞선 시기의 적석총[8]의 축조 방식을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 밖에 제대(祭臺)라고 불리는 추정 제단 시설이 동쪽에 1기, 무덤의 공간을 표시하면서 경계 지었던 담장[陵墻]이 북쪽에서 확인되었다. 그 밖에는 기단부를 구성하는 석재에 大吉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서대총은 도굴의 피해로 인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언제 만들어졌는지 추측할 수 있는 자료들이 일부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제 장식을 비롯하여 철제 꺽쇠와 못, 괭이, 재갈, 많은 수의 기와와 막새 등이 확인되었다. 말갖춤새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전체를 아우른 연구에 적용할 때 서대총에서 출토된 철제 재갈은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활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국형 운주의 형태나 금동제 장식의 우산하 992호분[9]과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4세기 전반경으로 보는 것이 주를 이룬다. 또한 출토된 고구려 막새로 편년을 한 연구에서는 권운문(圈雲紋) 막새를 먼저 주로 사용하다가 연화문(蓮花紋) 막새로 점차 유행이 변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서대총에서는 권운문 막새만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 막새에서 기축년◯◯간리작(己丑年◯◯刊利作)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329년 경인 것으로 보는 것이 대세론적이다.
 


유물의 연대 - 대체로 4세기 전반 경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 적석총 축조 상의 몇 기법들이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는 점에 말미암아 축조기술상으로 유물의 연대 상으로나 대체로 늦는 태왕릉 천추총의 앞에 서대총이 놓이게 된다.
 
 
 

따라서 명문에 따라 329년으로 보게되면 331년에 사망한 미천왕의 무덤으로 서대총이 거론되는 것은 거의 고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유물의 출토위치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무엇보다 기와는 썼던 기와를 다시 재활용할 수 있으므로 시간적 동시성이 무조건 담보되지 않는다. 서대총 막새의 명문을 398년으로 해석하는 연구자의 견해는 고구려 왕릉의 주인을 비정하는 연구에서는 다소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반론을 고구려 유적과 유물 자체의 고고학적 연구로 반증하기는 쉽지 않으며 소위 동북아시아 삼국시대 연대론으로까지 넘어가서야 반론을 할 수 있다.
 
 
皝從之 發美川王廟墓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모용황이 한수의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十八 高句麗本紀 第六)> 고국원왕조 中 (#출처)
 
 

무엇보다 서대총 미천왕 설의 또다른 근거 중의 하나인 고국원왕 12년(342년) 모용황의 침공 때 미천왕의 무덤이 도굴 당하는 기사이다. 이때의 흔적이 바로 지금의 서대총에 남아 있는 도굴갱이라는 것이 바로 그 근거이다.[11] 그러나 다시 1년 뒤에 시신을 돌려받기까지 하는데 굳이 붕괴된 형태로 남겨두었는지는 근거로서의 신빙성이 떨어지게 한다. 물론 이 반론에의 반론도 있는데 미천왕의 무덤을 서대총에 만들었다가 도굴의 피해를 342년에 입게 되자 343년에 다시 돌려 받으면서 새롭게 무덤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 새로운 무덤이 바로 같은 마선구 고분군에 소속된 마선구 2100호라는 것이다.
 


각 근거의 장단점이 있지만 적석총의 발전 과정, 출토 유물 및 정황 등이 4세기 전중엽 언저리에 축조된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고 그 외에 통구 고분군 내에서 서대총만큼 미천왕으로 비정할만한 근거를 가진 고분이 없기에 미천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현 시점에서는 대세라고 할 수 있다. 미천왕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또 한편으로는 안악 3호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반론이 많다. 미천왕 문서와 안악 3호분 문서를 참고.(3)

 

 

 
고구려 초기 도읍지인 국내성(중국 지안·集安)의 왕릉급 고분인 서대묘(미천왕릉 추정)과 태왕릉, 천추총 등에서 #의 비밀을 가늠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왔다. 이들 세 무덤은 호우총보다 적어도 30~80년 먼저 조영된 왕릉급 고분이다.

출처; 호우총·천추총·태왕릉의 ‘#’문양의 정체…‘광개토대왕’? ‘운수대통’?[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2024. 5. 30.  

 

 

 

 

임강총

 

 

중국 지린성 지안시 태왕진에서 압록강 쪽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 왕릉 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압록강의 북변에 위치하고 있어 임강총이라고 불리고 있다. 통구 고분군 우산하 묘구 43호(JYM 0043)으로 편호되어 있다.
 
 
 
 
臨江塚
 
 
압록강 북변의 절벽 위, 약간 높은 미고지에 입지하고 있어 임강총에서 바라보면 태왕릉 장군총이 잘 보이며 도성인 국내성에서도 임강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입지도 단독 입지로써 보다 빨리 만들어진 왕릉급 내지 대형 적석총들에 비해서 왕권이 신장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기도 하다. 부속시설로는 제례 행위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대(祭臺)라 불리는 시설과 배수시설이 있다.
 


동서 길이가 71m, 남북 길이가 76m, 높이가 10m로 초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적석총 가운데서는 가장 크며, 전체 적석총을 통틀어서도 태왕릉 천추총을 제외하면 임강총보다 큰 무덤은 없다.
 


평면형태는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사각형이라는 뜻으로 말각방형(抹角方形)이라고 분류되고 있다. 이 말각방형이라는 것이 유의미한 속성이 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적석총들이 비교적 완전한 사각형의 평면을 만드는 것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현 시점에서 비교적 통구 고분군에서도 빨리 축조되는 무덤의 특징을 보이는 하나의 근거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임강총은 분구의 형태에 따라 계장식[6] 적석총에서 계단식 적석총으로의 변화 과정 중에 있는 무덤으로 보고 있다. 임강총의 경우에도 분구에 트렌치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의 제토 과정은 정확한 무덤의 규모와 형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지 분구를 절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완전한 고분 발굴조사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계장식인지 계단식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분구의 외형이 계장식 적석총 단계에서 보이는 비교적 간단하게 돌을 깨서 만든 석재를 무덤에 사용하고 있으며 계단의 수도 계장식과 마찬가지로 수십 단(段)에 달하는 등[8] 이른 시기의 적석총들인 마선구 626호, 마선구 2378호, 산성하 전창 36호, 145호, 칠성산 871호의 특징을 일부 공유하고 있어 계단식 적석총으로의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진 왕릉인 서대총 우산하 992호분보다는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른 시기의 적석총의 공통적인 특징은 분구의 정상에 도굴갱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파져있는데 이것이 도굴갱인지 아니면 석곽(石槨, 돌널), 광실(壙室)의 자연붕괴의 현상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잠정적으로 이른 시기의 적석총의 공통적인 특징, 매장주체부의 석곽(돌널)에서 석실(돌방)으로의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발전과정 상에서 석곽(내지는 광실)을 매장주체부로 채용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게 보편적이다. 다만 전통적 속성과 새로운 속성이 모두 나타나고 있어 분류 명칭은 다소 혼잡함이 있다.
 
 
임강총의 출토 유물은 기와류가 2,000여점에 달한다. 다만 막새가 아닌 기와 자체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라 단순히 중국측 보고서 및 연구에서는 “한대(漢代)의 품격이 보인다.”라는 식의 표현을 쓰며 대체로 통구 고분군 중에서 빨리 축조된 무덤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나마 임강총에서 채집된 철제 재갈을 통해 동아시아 광역 편년에 따라 3세기 후반경 내지는 4세기 전반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마차에 쓰이는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청동제 인물형 수레굴대(차할, 車轄)가 나온 바 있다. 이 수레굴대와 똑같은 유물이 우산하 2110호분(JYM 2110)이라는 또 다른 왕릉급 적석총에서도 나왔는데 거의 임강총과 동일한 형태여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임강총과 우산하 2110호분을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따라서 임강총/우산하 2110호분-서대총/우산하 992호분-천추총의 순서가 보편적인 변화 순서.
 


따라서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으로 대체로 연대가 고정되므로 이 시기에 사망한 고구려 왕을 살펴보면 산상왕, 동천왕으로 비정되는 경향이 크다. 산상왕이 거론될 수 있는 것은 3세기 후반의 상한의 기준이 근거가 살짝 미약하여 논자에 따라서 3세기 중엽까지도 더 올려보거나 막연히 3세기 언저리로 정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산상왕도 후보로 거론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장지형 왕호를 고려해보면 약간 높은 지대에 입지하고 있어 山上이라는 말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한편 압록강 내지 지금의 우산 아래쪽을 흐르는 구 하천을 고려하면 또 東川이라는 말과도 상통하고 있어 임강총의 묘주는 동천왕이 유력하지만 잘라말하긴 어렵다. 한편 서천왕 봉상왕이 시간적으로는 가능하긴 하지만 西川이라는 말 때문에 문제[10]가 다소 있고 봉상왕의 경우에는 쫒겨난 왕으로 이렇게 큰 무덤을 쓰기 어려웠으리라 보는 경향이 있다.
 


임강총의 거대한 크기의 경우 동천왕의 능이라는 설에 따르면 동천왕이 승하함에 따라 순사를 택한 백성과 신하들을 동반 매장해서 이렇게 커졌다는 해석도 있다.
 
 
임강총의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보통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에서 주로 거론되는 반면, 천추총-태왕릉-장군총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역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고구려 전공자 외에도 삼국시대 역사학, 고고학의 타 주제 연구에서도 곧잘 거론된다. 따라서 임강총은 상술한 3개 왕릉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좀 있는 편이라 묘주의 문제는 집중적인 관심사가 아닌 편이다. 물론 앞시기 적석총의 양상이 유물의 빈약함과 발굴 자체의 문제[11] 등으로 다소 미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구려 왕릉을 모두 비정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임강총의 위치는 태왕릉, 장군총과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진다.』(4)

 

 

 

 

 

임기환교수는 임강총이 고구려 왕릉 중 가장 동쪽 편에 위치하고 있어 동천왕의 무덤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고 합니다. 

 

 

광개토왕비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아주 가까이 제법 높은 구릉 위에 거대한 고분 1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임강총’이다. 이름대로 과거에는 압록강변 가까이 면해 있었던 고분이었다. 고구려 왕릉 중 가장 동쪽 편에 위치하고 있어 동천왕의 무덤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동천왕 때에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침공하여 수도 국내성이 함락된 아픈 경험이 있었다. 이른바 밀우와 유유 등이 활약하는 전승이 말해주는 바로 그 전쟁이다.

 

고구려 왕 이름 중에서 동천왕-중천왕-서천왕-미천왕으로 이어지는 이 4왕은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집안 분지 일대에 차례로 왕릉을 조영한 왕들이다. 앞서 이야기한 가장 서쪽에 있는 서대총은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그러하니 현 집안 시내에서 동천, 중천, 서천, 미천에 해당되는 물길을 찾으면 대략 이들 네 왕의 왕릉은 비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중국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왕릉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필자는 그 결과를 토대로 고구려 왕릉을 비정한 바 있다.』(5)

 

 

 

 

<주>

 

 

 

(1) 천추총(千秋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경향마당]새로 발견된 고구려비 더 활발한 논의를 (daum.net) 2013. 4. 15.  

 

 

 

(3) 서대총 - 나무위키 (namu.wiki)

 

 

 

(4) 임강총 - 나무위키 (namu.wiki)

 

 

 

(5) 고구려 역사를 찾는 고향, 국내성 [고구려사 명장면] (daum.net)임기환 2022. 11. 19. 

 

 

 

 

 

<참고자료>

 

 

https://namu.wiki/w/%EA%B5%AD%EB%82%B4%EC%84%B1

 

 

 

고구려 고분(高句麗 古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고구려 토기에 새겨진 ‘해시태그’…# 문양은 행운의 상징 (daum.net) 2024. 5. 13.  

 

 

 

 

1500년 버텨온 '동방의 금자탑'.. 만년 굳센 고구려 축조기술 (daum.net) 2020. 11. 30.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⑥ 평양지역의 고구려왕릉 (daum.net) 2020. 11. 21.

 

 

 

"작년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 건립" (daum.net) 2013. 2. 21.   

 

 


중국 소재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목록 (daum.net) 200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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