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고구려 문화유산 (8)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장군총 본문
이형구교수는 장군총은 통구 고분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고구려식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다. 이 무덤에 대해 한국·중국·일본 등 세 나라 학계에서는 서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이다”,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정비된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태왕릉[오른쪽]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와는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이른바 장군총을 장수왕릉(長壽王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 이 두 무덤이 모두 7층으로 축조된 피라미드형이다.
집안의 장군총(將軍塚)동양 최대의 피라미드(Pyramid)로 장수왕의 능이라고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압록강 유역의 집안 지방은 고구려 전기의 수도였던 곳인데, 이 일대에는 무려 1만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다.
노령(老嶺) 남록 고구려시기 채석장(採石場)
장군총은 통구 고분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고구려식 피라미드로, 피라미드의 기단은 지면과 수평으로 놓여 있다. 기단 한 면의 길이는 31.58m이다. 7층으로 쌓아 올린 무덤 전체의 높이는 12.4m. 여기에 사용된 돌은 모두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은 것이다. 무려 1,100여 개가 사용되었다. 그중 가장 큰 돌은 길이가 5.7m, 너비 1.2m, 두께 1.1m나 된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기단부 4면에는 각각 3개의 기둥모양의 대석(大石)을 비스듬히 기대어 놓았다. 가장 작은 것이 15t이라니 이 무덤의 규모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피라미드의 제5층은 정면에 능침의 석실 입구가 나 있다. 정방형 석실의 크기는 60m2나 되는데 천정석은 한 장의 거대한 석관을 덮어 만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돌을 어디서 떼어 어떻게 운반해왔을까? 문제의 채석장(採石場) 유적은 비포장된 통집공로(通輯公路)를 따라 현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노령산맥 중턱에 남아 있다. 지난 1981년에 발견된 이 채석장은 암석의 석질이 ‘정동화강암(晶洞花崗巖)’으로 밝혀졌다. 이는 장군총의 석질과 똑같은 것이다.
장군총 향당 건축의 ‘주춧돌’장군총 정상부의 회삼물 부분의 동남쪽에 4개의 판석을 확인하였는데, 묘상 건축물[향당]의 주초로 쓰였던 판석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장군총은 본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피라미드형 무덤인 석축고분으로, 피라미드 한 면의 길이가 31.58m이고, 높이는 12.4m이다. 각 면에는 크기가 3~5m의 돌기둥 모양의 호석(護石)을 3개씩 적당한 간격으로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저자는 이것이 기능적인 면에서 피라미드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시설로 일종의 버팀돌[호분석(護墳石)]의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종교적인 의미에서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도 이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과거 일제시대에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 7층 정상부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발견되었고, 피라미드의 정상부와 층급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 위에 원래는 어떤 목조 건축물[묘상건축(墓上建築)]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능묘 위에 세우는 일종의 사당(祠堂, 능상종묘(陵上宗廟))과 같은 성격의 건축물을 이른바 향당(享堂)이라고 하였다. 역시 제사의 대상(對象)을 위한 종교적인 시설로서 옛날에 동이족의 묘제의 하나이다.
장군총 향당(享堂)[이형구(李亨求) 복원도, 『동방학지』 32, 1982]향당은 고분의 정상부에 세운 일종의 능상종묘(陵上宗廟)이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는 집안역(集安驛) 중국 고구려 연구학자들과 합영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 이전복[李殿福, 오른쪽]·손옥량[孫玉良, 왼쪽] 씨와 저자. (1991년 11월 촬영. 고구려 벽화 전문가인 이전복 선생은 수년전 고인이 되었다.)
1990년 8월, 저자는 집안시 박물관을 방문하여 ‘내부자료’로 1984년에 출판된 『집안현문물지(集安縣文物志)』를 구득할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장군총의 정상부에 묘상건축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묘 위에는 원래 향당과 같은 건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可知墓上 原有享堂一類建築]”고 하였다. 이는 저자가 논문을 발표한 지 3년 만에 나온 중국측의 학설이다. 다시 한 번 학문하는 기쁨을 느끼게 하였다. 그 후 북한에서도 “집안의 장군 무덤의 꼭대기에 집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그러한 풍습이 고구려에도 있었으며”라고 무덤 위에 건물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천추총(千秋塚)·임강총(臨江塚)·중대총(中大塚)·서대총(西大塚) 등의 고분 정상과 층급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전벽돌이 출토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들 고분의 정상부에도 향당(享堂) 건축을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길림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이전복(李殿楅)·손옥량(孫玉良) 연구원의 안내로 현지를 답사하면서 ‘장군총’의 맨 위 정상부 동남쪽에서 여러 장의 판석을 확인하였는데, 아마 주춧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1)
백승옥 함안박물관 학예사는 태왕릉은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릉이며, 장군총은 광개토왕릉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백승옥 함안박물관 학예사는 "태왕릉은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무덤이며,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무덤"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백 학예사의 주장은 4·5일 충남 계룡산 동학산장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주최의 '지안지역 고구려 왕릉의 제문제'란 세미나에서 '고구려왕릉의 피장자문제-문헌자료'라는 글을 통해 정식 발표된다.
그에 따르면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인들이 414년 세운 신도비(神道碑), 즉 왕과 고관의 무덤 앞이나 그 길목에 세워 고인의 업적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그 근거는 중국 고래의 신도비 건립에 대한 엄한 규범을 총집대성한 명나라 때의 '문장변체서설''문체명변서설' 등 옛 사료들이다.
이 사료들에 따르면 신도비는 신도(神道,능의 입구에서 능에 이르는 길)를 따라 묘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광개토왕릉비가 장군총의 신도를 기준으로 정확히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군총이 광개토왕릉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당시 고구려인들이 신도비를 세우는 규범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가. 백 학예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태학이 설립돼 본격적인 한학교육이 이뤄졌고,여기에 한학의 기초인 '예기' 등의 오경이 포함됐으므로 고구려인들의 신도비에 대한 상식은 이미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는 "장군총의 동남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광개토왕릉비는 한학을 바탕으로 철저한 계획에 의해 세워졌으며,따라서 광개토왕이 묻힌 곳은 장군총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는 '청동방울과 비석에 기록된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문구를 근거로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 이유로 △호태왕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구려왕들에게 일반적으로 붙이는 명칭이라는 점 △청동방울이 만들어진 서기 391년은 고국양왕이 죽고 광개토왕이 즉위한 시기로 왕위에 오른 해에 무덤에 넣을 방울을 만들 수는 없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호태왕'이라고 적힌 유물이 출토됐다고 태왕릉을 광개토왕의 능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고,외려 신도비의 위치로 보건대 장군총이 다름아닌 광개토왕릉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윤명철교수는 장군총이 '시조묘'라고 보았습니다.
『고대에 성스러운 숫자(聖數)로 여겼던 3과 7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장군총은 하늘나라에서 온 해모수가 유화와 만나는 곳이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을 모시는 곳이다. 고구려인들은 어떤 수학적 기반을 갖고 이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만들었나.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개 계단을 가진 7층 구조다. 고대에 3과 7은 성수로 여겨졌으니 21계단을 가진 장군총은 특별한 이의 무덤이 된다. 윗부분 구멍이 뚫린 곳이 묘실이 있는 곳이고 아래 1층에 기대놓은 큰 돌이 ‘정호석’이다.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해모수 그림. 평양 동명성왕릉 옆 기념관에 있다.
고구려의 神市?
고대사회에서는 공공성이 강한 건축물에 집단의 시원이나 가치관, 자연과 만나는 태도, 조상을 맞이하는 방식, 백성들에게 전하는 정책, 후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등을 상징과 은유로 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건축물에 숨은 코드를 추적해보면 장군총의 주인뿐 아니라 이 건축물에 담긴 논리와 시대정신, 지향성 등을 알 수도 있다.
장군총을 축조한 사람들은 그 위치에 어떠한 의미를 두었을까.
사진 오른쪽 위에 있는 장군총은 왼쪽 아래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및 광개토태왕릉과 일직선으로
경사 45도로 올라가는 계단 때문에 장군총은 무한 상승구조를 이룬다. 몸체와 묘실, 신전이 정확히 3등분된 형태다.
모두 ‘해(解)’를 성으로 쓰는데, 여기서 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실제로 ‘삼국유사’는 성을 해씨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장군총의 네 밑변에는 세 개의 정호석이 놓여 있다. 정호석 하나가 사라진 북면(사진의 아래쪽) 은 뒤틀림이 일어나 약간 무너져내렸다.
그렇다면 누구의 무덤일까? 장례풍습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보자. 여러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장례풍습에는 공통점이 있다. 유난히 조상을 숭상했고, 시조에 대해서는 각별한 의미를 두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풍습이 발전하면 무덤은 매장처를 넘어서 신앙의 대상체로 확장된다.
고대에는 수도를 이전할 때 신앙의 대상지나 시조와 연관된 상징물을 갖고 이동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조선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묘 건설부터 서둔 것을 보면 이는 확실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강한 고구려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고구려는 700여 년 동안 최소한 세 군데 수도를 두었다.
첫 수도로 알려진 곳은 환인지역이고, 두 번째는 국내성, 세 번째가 평양지역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에는 놀랍게도 세 번째 수도인 평양지역의 중화군에 시조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으로 불리는 진파리 10호분이다. 세 번째 수도에 시조묘를 조성했다면 420여 년간 도읍한 국내성에는 반드시 시조묘를 조성해놓아야 한다.
그런데 장군총의 뒷산이 바로 용산이다. 이러한 개연성 때문인지 지안의 역사를 기술한 ‘집안현지(集安縣志)’에도 장군총을 동명성왕묘(在城北十五里山勢莊嚴可觀前有東明聖王墓俗稱將軍墳)로 기록해놓았다. 그렇다면 지안에서는 장군총을 빼놓고 더 이상 시조묘를 찾기 힘들어진다.
층의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계단 7층의 성수(聖數)로 만들어진 구조다.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피라미드의 웅자(雄姿)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2) "장군총은 장수왕이 아니라 광개토대왕 무덤"..새로운 학설 제기돼 2005. 8. 2.
(3) 장군총의 비밀. 광개토왕·장수왕묘가 아니라 고구려 시조 모신 신전|윤명철. 신동아 (donga.com)2009-04-30
<참고자료>
이도학, 장군총과 주변 고구려 왕릉 비정 문제, 역사문화연구 vol. 58, 2016
윤명철, 단군신화의 해석을 통한 장군총의 성격 이해 - 의미를 중심으로, 고조선단군학 vol. 19, 2008
백승옥, 광개토왕릉비의 성격과 장군총의 주인공, 한국고대사연구 vol. 41, 2006
이도학, 장군총과 태왕릉의 피장자 문제 재론, 고구려발해 연구 vol. 19, 2005
장군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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