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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10) - 고구려 문화유산(9) 고구려 세계문화유산(9) 광개토대왕릉비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고리)

고구려(10) - 고구려 문화유산(9) 고구려 세계문화유산(9) 광개토대왕릉비

대야발 2024. 9. 25. 14:41

 

 

 

 

'광개토대왕릉비'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에 있는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릉비입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입니다.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입니다.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열여덟 살(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셨다. (왕의) 은택은 하늘까지 적시고 위무(威武)는 온 세상에 떨치셨다. (왕이) □□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그 생업을 평안히 하였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윤택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우리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 서른아홉 살(412년)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셨다.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일에 산릉(山陵)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원문: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395년 기사 : 영락 5년,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패려(稗麗)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 북풍(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백잔(백제[2]),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이 문장 바로 다음의 해석은 논란이 있다. 

  •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396년 기사 :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도성(위례성)에 [다다랐다]. 백잔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백잔군이)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아신왕)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히 여겼다.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잔주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 원문: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398년 기사 : 영락 8년 무술년,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 식신(숙신) 토곡을 순찰하도록 했다. 이때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하고 내부의 일을 여쭈었다.[3]

  • 원문: 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3]

399년 기사 :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4]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 원문: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400년 기사 :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경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왜병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5] (관군이) 신라성, □성을 [차지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 ▨▨▨ 이하 71자 대부분은 글자 훼멸 때문에 알 수 없음.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에서 왜(倭)와 백제의 제(諸) 연합세력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구원한 전쟁 성과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5]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3][6]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 원문: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5]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5]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5]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3][6]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404년 기사 : 영락 14년 갑진년, 그럼에도 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황해도) 연안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을 [동원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원문: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407년 기사 : 영락 1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켰다.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 원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우리) 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도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 전체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대체로 헤아려 보니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천400개였다.[7]

  • 원문: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舉]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1)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6년) 기사 바로 앞에 실린 다음의 기록에서 시작된 논란입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영락 6년(396년)부터 14년(404년)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일본인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이 알려진 1888년 이후 이 기사를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이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 및 박시형, 이기백 등은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백잔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로 해석하였다.

 

1970년대 초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진희는 비의 문자가 석회 도포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하여,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김병기는 서예학의 시각에서 '渡海破(도해파)' 부분이 정상 비문과 다르며, 획의 부분을 따졌을 때, 원래 글자는 '入貢于(입공우)'라고 주장했고, 

 

중국의 경철화(耿鐵華)는 '來渡海破'의 海에서, 부수인 삼수변(氵)이 종선 밖의 부분에 위치 있음을 통해 海가 아니라 '每'라고 주장했다.

 

2020년에는 기존 주장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연구가 나왔다. 이 논문에 따라 위 문장을 해석하면 '백잔(=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계속 조공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넘어) ▨破로 건너오자 백잔(=백제)은 (왜와 연결[또는 이용]해서)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또는 삼으려고 했다].'가 된다.』(1)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파견되어 만주 지방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사까와()라는 일본 육군대위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이른바 쌍구가묵본()이라는 가탁본()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1889년에 공개되었는데,  이 쌍구가묵본이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사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왜()에 관한 기사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왜가 백제, 신라 심지어는 가야까지도 그들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이른바 신묘()년[391] 기사이고, 또 하나는 왜가 신라성을 궤멸시켜 신라를 정벌하였다고 하는 이른바 경자()년[400] 기사입니다. 

 

이형구교수는 신묘년기사의 ‘왜(倭)’자는 같은 면 경자년 조의 ‘왜적(倭賊)’이나 갑진(甲辰)년[404] 조의 ‘왜구(倭寇)’의 ‘왜(倭)’자의 결구(結構)와는 완전히 다르다. 신묘년 기사의 ‘왜(倭)’자의 실상은 서체(書體)의 구조상으로 볼 때 많은 모순이 있으며 문장으로도 합리적인 해석이 되지 않음을 연구 결과[「위작 ‘왜’자고」]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자년 기사에서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는데, 1880년을 전후하여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첩자[사까와(酒匂)]에 의해 만들어진 쌍구가묵본에는 “왜가 신라성에 가득 차고 그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新羅城 □城 倭滿倭潰城······]”라고 되어 있는데, 100년 뒤에 만들어진 탁본에는 “신라성에 들어온 왜구가[고구려 원정군에게] 크게 궤멸되었다[新羅城 □城 倭寇大潰城······]”라고 쌍구가묵본과는 완전히 상반된 뜻을 가진 글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광개토대왕을 꼽을 것이다. 대왕은 18세의 나이로 고구려 제19대 왕에 등극하여 39세에 기국()할 때까지 22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인 만주 일대를 회복하고 고구려가 200~300년 가까이 동북아에서 가장 강성하고 안정된 국가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래서 아들인 장수왕()이 즉위 2년[414]에 선왕의 큰 공덕을 기리기 위해 왕릉을 만들고 높이 6.39m의 거대한 비를 세워[414] 4면에 1,802자에 달하는 비문을 새겼다.

집안 벌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릉비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있는 동양 최대의 기념비이다. 414년 장수왕이 선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이 비는 높이가 6.39m의 석회응회암제의 4면비인데 예서체에 가까운 독특한 고구려체로 모두 1,802자의 비문을 새겼다. 고구려의 건국신화, 대왕의 영토 확장, 그리고 능묘를 지키는 법령 등을 기록했다. 정비 이전의 사진이다. 1991년 8월. 저자 촬영.

중원(中原) 고구려비1979년에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 부락에서 발견된 것으로 한강 이남의 유일한 고구려비이다. 장수왕 때(5세기 후반)에 건립한 높이 1.3m의 4면비[비석의 4면 모두에 비문을 새긴 비]로 광개토대왕릉비의 형태와 매우 닮았다.

 

광개토대왕 시대의 고구려는 당시 동북아에서는 최대의 국가였다. 서쪽으로는 요하, 북으로는 흑룡강, 동쪽에는 연해주, 남쪽으로는 한강에 연했으니 당시 여러 갈래로 조각나 있던 남북조시대의 중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정된 대국이었다.


이러한 위업을 달성한 광개토대왕을 기린 비석은 문화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첫 번째로는 동양 최대의 비석이고,

 

두 번째는 독특한 사면비란 점이다. 4면에 명문을 새긴 사면비()는 고구려 특유의 비석 형태이다. 1979년에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에서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장수왕 때 건립]도 4면비다.

 

세 번째로 특기할 만한 점은 전서기()가 있는 예서체()의 글씨체이다. 광개토대왕릉 비체는 중국 비석에서 볼 수 없는 웅장한 서체이다. 이 같은 비석의 글씨만 보더라도 당시 고구려의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에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1946년 경주시 노서동에서 발굴된 호우총()의 청동호우()의 밑바닥에 새겨진 명문은 마치 광개토대왕릉비의 서체()를 방불케 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 임금[장수왕]이 직접 세운 금석문에 일본[왜()]에 유리한 기록이 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

경주 출토 광개토대왕명 호우(壺杅)[오른쪽]와 명문 탁본[왼쪽]1948년 경주시 호우총(壺玗塚)에서 발견된 청동합의 바닥에는 광개토대왕의 묘호(廟號)가 새겨진 명문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보다 1년 후인 을묘년(415)에 만들어졌다. 명문은 광개토대왕릉비문과 같은 서체이다.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실린 가짜 탁본일본 육군참모 본부가 1880년대 초에 만든 이른바 쌍구가묵본은 가짜 탁본이다. 원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절지 분책된 것을 4면으로 재편집하였다.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문제의 광개토대왕릉 비문은 당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파견되어 만주 지방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사까와()라는 일본 육군대위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이른바 쌍구가묵본()이라는 가탁본()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6년이라는 긴 세월이 경과한 후에 일본 육군대학 요꼬이()에 의하여 1889년에 공개된 『회여록()』 제5집이다.

이때 처음으로 비문을 쌍구가묵본으로 뜬 것은 탁본()과는 달리 비면에 종이를 대고 글자의 윤곽을 떠서 글자가 희게 드러나도록 주위를 먹칠하는 일종의 백묘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비문을 직접 찍어내는 탁본과 달리 임의성이 개재되기 마련이다.

이 쌍구가묵본이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사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왜(倭)에 관한 기사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왜가 백제, 신라 심지어는 가야까지도 그들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이른바 신묘(辛卯)년[391] 기사이고, 또 하나는 왜가 신라성을 궤멸시켜 신라를 정벌하였다고 하는 이른바 경자(庚子)년[400] 기사이다. 이로써 일본 명치(明治) 정부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과 일본 군부는 조선을 정복할 절호의 명분을 조선의 금석문에서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다.

1) ‘’변과 ‘’부 사이에 공간이 없이 붙어 있다.
2) ‘’부의 ‘’자와 ‘’자의 점유 비율은 1:1이 아니고, 1:3 정도로 ‘’자가 지나치게 크다.
3) ‘’변이 ‘’변으로 보이는 한편 파임도 보인다.
4) ‘’부의 ‘’자와 가로획[]은 지나치게 길고 세로획[]이 없어 ‘’자 혹은 ‘’자로 변형되어 있다.
5) ‘’자의 경우, 가로획이 한 획[일필()]이 아니고 가운데에서 끊어진 두 획[이필()]이 서로 엇갈리어 ‘이필상충형( )’이다. 그리고 ‘’자의 ‘<’획 역시 ‘이필상충형’으로 되어있다.

규장각본의 ‘신묘년(辛卯年) 기사’ 중의 위작 ‘왜(倭)’자[왼쪽]와 제2면 ‘왜적(倭賊)’의 ‘왜(倭)’자[오른쪽]

 

이처럼 문제의 신묘년기사의 ‘왜(倭)’자는 같은 면 경자년 조의 ‘왜적(倭賊)’이나 갑진(甲辰)년[404] 조의 ‘왜구(倭寇)’의 ‘왜(倭)’자의 결구(結構)와는 완전히 다르다.

저자는 일본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신묘년 기사의 ‘왜()’자의 실상은 서체()의 구조상으로 볼 때 많은 모순이 있으며 문장으로도 합리적인 해석이 되지 않음을 연구 결과[「위작 ‘왜’자고」]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자년 기사에서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는데, 1984년 중국에서 출판된 왕건군의 『호태왕비연구』의 탁본에는 쌍구가묵본의 글자와 전혀 다른 글자가 확인되었다. 이는 저자의 현지 조사 때 다시 확인되었다.

1880년을 전후하여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첩자[사까와(酒匂)]에 의해 만들어진 쌍구가묵본에는 “왜가 신라성에 가득 차고 그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新羅城 □城 倭滿倭潰城······]”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100년 뒤에 만들어진 탁본에는 “신라성에 들어온 왜구가[고구려 원정군에게] 크게 궤멸되었다[新羅城 □城 倭寇大潰城······]”라고 쌍구가묵본과는 완전히 상반된 뜻을 가진 글자가 나왔다.

100년 전의 변조된 비문[왼쪽]과 오늘의 비문[오른쪽]1889년 5월 3일에 발간된 『회여록(會餘綠)』 제5집에 처음으로 공개된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 중 이른바 경자년(400) 기사. “왜가 신라성을 궤멸시켰다(倭滿倭潰)”고 나왔으나, 석회가 떨어져나간 후인 1981년에 찍은 탁본에는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倭寇大潰)”라고 원래의 비문에 나와 있다.

 

100여 년 전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만들었던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석회가 떨어져 나가게 되자 원래의 글자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 부분은 저자가 여러 번에 걸쳐 현지를 탐방하면서 육안으로 확인하였다.

사까와 일당이 쌍구가묵본을 만들 때 원래의 글자인 ‘왜구대궤()’를 왜[일본]에 유리하도록 석회를 발라 ‘왜만왜궤(滿)’로 바꾸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변조된 비문1889년의 쌍구가묵본 석문.

원래의 비문1981년의 탁본에 의한 석문 ○표시는 1981년 주운태() 탁본에 의하여 새로 확인된 글자.[왕건군 석문]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광개토대왕과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연구를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추진해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 아래 재원의 확보와 연구 인력을 배양할 수 있는 연구센터 설립, 그리고 탁본의 구입 및 전시관 건립 등 연구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역사의 진리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2004년 1월 모습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앞서 2003년에 능비 보호각에 유리로 보호창을 만들고, 능비의 사주를 철조망을 쳐서 경계하였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한다.』(2)

 

 

 

 

<주>

 

 

(1) 광개토대왕릉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토대왕릉비의 웅혼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참고자료>

 

 

 

 

https://namu.wiki/w/%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EB%A6%89%EB%B9%84?from=%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EB%B9%84

 

 

 

새로운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프랑스서 발견 | 한국경제 (hankyung.com)2023.11.23.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고구려 고고학 논문 해제집』발간 (daum.net)2019.12.06

 

 

 

광개토대왕비의 위엄 담긴 탁본 '혜정본' 직접 만나보세요 (daum.net)2018.05.02

 

 

 
 

 

[마방] 광개토태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와 왜(倭) / 새로운 광개토태왕릉비 연구 - 이찬구 철학박사

https://youtu.be/hrB_RtttQP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우리가 몰랐던 광개토태왕비 1600여년의 시간 (feat.안교수님)ㅣ역사이다

https://youtu.be/jJfvZe5HYpY?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광개토대왕 집중적으로 삭제된 2면 하단과 3면 상단 | 환단고기란 무엇인가

https://youtu.be/GwHmUV8Isvc?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