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고구려 문화유산 (10)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안악 3호분 본문
이형구교수는 북한의 미술사학자 주영헌(朱榮憲)씨가 안악 3호분을 미천왕릉(美川王陵)으로 보고 있는데, 1990년대에 와서는 고국원왕릉(故國原王陵)이라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안휘준(安輝濬) 선생은 “안악 3호분은 중국인인 동수(冬壽)의 묘로 보기보다는 역시 고구려 왕(王)의 능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또 “묘주는 왕의 신분을 지닌 지체 높은 인물로 신격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동 지방은 고조선의 옛 영토이다. 이곳은 3세기 무렵 위(魏)나라에 의해 점거되었고, 310년까지 서진(西晋)이 장악하였다. 물론 이후는 5호(胡) 16국(國)이 중국 중원을 차지하려고 할거하던 시기이다. 그래도 요동 지방은 중원 지방보다는 전란이 덜 미쳐 평온한 까닭에 경제·문화가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서울 코엑스 전시장에 전시된[2002. 12. 6~2003. 5. 25] 안악 3호분 실물대 복제품. 평양조선중앙박물관 복제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신대왕(新大王)[165~178]의 요동 척경을 시작으로 미천왕(美川王)[300~330]은 낙랑과 대방을 멸하고, 고국원왕(故國原王)[331~370]에 의해 요동 지방의 고조선 강역이 회복되었다. 그 후 이 지방의 경제·문화가 자연 고구려에 흡수되었음은 당연하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최강자가 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문화를 집대성한 벽화고분이 황해도 안악군 류설리(柳雪里)에서 1949년에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안악(安岳) 3호분이다. 처음에는 고분 전실 입구 좌측의 인물상 위에 먹으로 쓴 글씨로 미루어 전연(前燕)에서 고구려에 망명하여 장하독(帳下督) 벼슬을 지낸 동수(佟[冬]壽)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북한 학계에서는 이 벽화고분의 규모나 벽화 내용이 왕릉이어야 한다고 했다.
안악(安岳) 3호분의 주인[왕(王)] 초상화1949년에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안악 3호분은 돌로 만든 지하궁전의 벽면에 왕의 생존시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인물에게서 풍기는 당당한 위엄과 백라관(白羅冠, 흰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쓴 모습이 왕의 존엄을 잘 나타내고 있다. 357년 혹은 4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구당서(舊唐書)』 고려[고구려]조에는 “왕은 오채로 된 옷을 입고 백라관을 쓴다[唯王五綵 以白羅爲冠]”고 하였는데, 실제로 안악 3호분 벽화에도 주인공은 흰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있다. 서쪽 측실 벽에 그린 주인공의 좌우에는 주실(主室)·소사(小史)·성사(省事)·문하배(門下拜) 등 대소 신하가 지필묵이나 홀(笏, 조안할 때 신분의 표시로 드는 의기)을 들고 있다. 부인의 초상의 품위와 갖춤새 또한 왕비의 기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안악 3호분 주인공의 부인상[왕후(王后)]서쪽 측실의 남벽에 그린 부인상은 높이가 94cm로 장막 안의 좌상 위에 약간 옆으로 돌아서 앉아 있다. 풍만하고 도도한 자태의 부인[왕후]은 머리에 채머리[가생(加笙)]를 붙여 마치 조선시대의 어여머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회랑 동쪽의 왕의 의장(儀仗) 행렬을 그린 노부도(鹵簿圖, 행렬도(行列圖))는 조선 정조(貞祖)대왕의 능행도(陵行圖)를 연상케 한다. 안악 3호분의 벽화는 한마디로 말해 고구려 회화의 극치다. 따라서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벽화 예술이 잉태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미술사학자 주영헌(朱榮憲)씨는 안악 3호분을 미천왕릉(美川王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는 고국원왕릉(故國原王陵)이라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다. 안휘준(安輝濬) 선생은 “안악 3호분은 중국인인 동수(冬壽)의 묘로 보기보다는 역시 고구려 왕(王)의 능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또 “묘주는 왕의 신분을 지닌 지체 높은 인물로 신격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요양시 상왕가촌(上王家村) 고분의 인물상 모사도주인공이 평상에 앉은 자세와 우선(羽扇)을 든 모습이 안악 3호분의 주인공과 닮았다. 장막의 표현이나 주인공이 주위에 병풍을 두르고 4명의 시종이 서 있는 구도도 비슷하다.
하북성 망도(望都)의 한대 벽화서기 2세기경에 그려진 인물상. 고양이 수염뿐만 아니라 어깨의 흐름이나 평상 위에 앉은 자세, 그리고 옷무늬[의습(衣襲)]의 표현이 안악 3호분 주인공의 표현 방법과 비슷하다.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藥水里) 고분벽화의 부부상이나 용강읍(龍崗邑) 쌍기둥무덤[쌍영총(雙楹塚)]의 부부상의 용모나 자세에서 안악 3호분의 부부상의 의취(意趣)를 읽을 수 있다. 한편, 안악 3호분의 주인공[왕(王)]의 집정도(執政圖)는 요양시 북쪽 교외 상왕가촌(上王家村)에서 발견된 진대(晋代, 220~316) 고분벽화에 보이는 주인공의 연회도(宴會圖)와 비슷해서 주목된다. 인물의 표현기법과 옷 주름의 필치는 중국 하북성 망도(望都) 1호 한묘[2세기 경]의 인물 좌상과 상통하고 있어 우리의 흥미를 끈다.
강서 약수리 고분벽화의 주인공 부부상
용강 쌍기둥무덤[쌍영총] 주인공 부부상
평양 덕흥리 고분 벽화의 주인공[진(鎭)] 초상 앞에서 저자. [1989] 평양조선중앙박물관 모사. 동경 조선대학박물관 실물대 복제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벽화 고분의 주인공의 묵서명을 보면 유주자사(幽州刺使)를 지낸 진(鎭)이 광개토대왕 18년(408)에 묻혔다고 한다.
이 같은 중국 하북 지방이나 요동 지방의 한·진 시기의 벽화양식이 고구려에서 최고조로 발휘되었다. 이로써 동북아시아의 문화 중심이 고구려로 이동하여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391~412] 때에 이르면 동방문화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 벽화가 바로 광개토대왕 당시에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고분 벽화[408]이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 고분 벽화의 진수이며, 동방회화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분, 강서대묘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흐름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합니다. 이들 고분의 벽화를 통해 1천500여 년 전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과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합니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주역인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수만 기의 고분을 남겼다. 벽화가 있는 고분만 해도 100기 이상 발견됐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분, 강서대묘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흐름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들 고분의 벽화를 통해 1천500여 년 전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과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은 황해도 안악군 재령평야에 위치한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이전인 4세기 중엽에 축조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북한은 현재 이 무덤을 고국원왕릉으로 표기한다. 고국원왕은 광개토대왕의 조부로 백제와의 전쟁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하지만 정확한 무덤 주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안악3호분은 넓은 회랑과 여러 개의 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화는 회백색 석회암 판석을 쌓아 올려 회칠을 바른 벽면에 그려졌다. 길이 10여m의 회랑 벽을 장식한 대행렬도는 그 중 백미로 꼽힌다.
대행렬도에는 무려 250여 명이 등장한다. 무덤 주인이 타고 가는 수레를 중심으로 기수, 마부, 악사, 기병, 보병, 악사, 무용수, 남녀 시종이 묘사돼 있다.
도포를 입은 무덤 주인은 오른손에 깃털부채를 들고 머리에는 검은 내관(內冠)과 흰색 나관(羅冠)을 썼다. 나관은 왕 또는 상급 관인이 내관 위에 쓰는 덧관으로 색깔로서 지위가 구분된다. 수레 좌우로는 궁수들과 부월수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무엇엔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표정의 무덤 주인과 팔을 크게 벌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모습에서 사실감과 생명력이 전해진다.
일생생활 엿볼 수 있는 안악3호분
안악3호분에선 당시의 일상적인 생활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무덤 앞방의 동쪽 곁방에 부엌, 마구간, 방앗간 등 가내 시설이 그려져 있다. 노루, 돼지 등을 갈고리에 꿰어 매단 고기창고도 볼 수 있다.
가내 시설 벽화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여자다. 우선, 부엌에 3명의 여인이 있다. 커다란 솥단지 앞의 여인은 오른손에 국자를, 왼손에 긴 막대 모양의 도구를 들었다. 솥단지 안을 저으면서 국자로 국물을 뜨려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고구려 부뚜막의 아궁이 앞에선 또 다른 여인이 불을 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선 그릇 정리가 한창이다. 음식을 끓이고 그릇을 만지는 것으로 보아 금세 상차림이 이루어질 듯하다. 방앗간에선 디딜방아를 발로 밟아 방아를 찧는 여인, 두 손으로 키질을 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물가에선 두 여인이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항아리에 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의 여인들은 벽화에서 걸어 나와 말을 걸어올 듯 묘사가 생생하다.』(2)
임기환교수의 [고구려사 명장면-15]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4) - 공무 생활과 행렬도'입니다.
『안악3호분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귀족의 저택을 재현하는 공간과 벽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림집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방의 동, 서 곁방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앞방과 널방에는 저택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무덤 주인공의 공적인 활동과 관련된 그림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 곁방에 그려진 무덤 주인공 부부의 초상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상황을 추정했지만, 이 무덤 주인공의 초상은 단지 저택 내에서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공적인 공간에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4) - 공무 생활과 행렬도
그래서 서쪽 곁방으로 들어가는 벽면의 좌우에는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시종 관료가 그려져 있다. 동수의 묘지 묵서가 장하독의 머리 위에 쓰여 있기 때문에 동수가 무덤 주인공이냐, 아니면 장하독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동수가 무덤 주인공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자, 그러면 동수의 공적 생활을 벽화를 통해 살펴보자.
무덤의 널길 동서 양쪽 벽에는 의장대열이 그려져 있는데, 보존 상태가 나빠 지금은 붉은 방패와 창만 겨우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무덤 입구의 널길에 의장대를 그려 넣은 것은 안악3호분에만 보이는 특징으로, 무덤방의 주인공에 대한 의례적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의도한 듯하다.
앞방 남벽은 널길로 통하는 문을 기준으로 동서 양 벽으로 나뉘어지는데, 양쪽 모두 검은 가로선을 그어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그림을 배치하고 있다. 서측 상단에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두 남자가 마주 보며 커다란 뿔나팔을 불고 있고, 하단에는 큰 북을 두드리고 무릎을 꿇고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도포 차림의 4인의 악사가 그려져 있다. 모두 무덤 주인공이 거느린 악대를 표현하고 있다.
동측에는 상단에 화개, 각종 깃발, 절(節) 등을 든 7명의 의장기수가 그려져 있는데, 다채로운 의장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앞에 있는 4명은 거의 같은 복장으로, 긴 두루마기에 허리띠를 동여매었으며 작은 깃발을 들었다. 뒤의 세 명은 각각 색이 다른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다른 의장구를 들었다. 갖가지 의상과 깃발 등으로 의장대의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앞방 남벽 동측 의장대 그림
이들 부월수는 다른 벽면에도 그려져 있다. 동측 곁방 입구 오른쪽 벽에는 수박희 장면과 도끼를 든 부월수(斧鉞手)의 대열이 상하 두 단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대행렬도에도 도끼를 든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앞방에 두 군데나 그려진 의장대 혹은 병사로서의 부월수와 같은 인물들일 것이다.
앞방 동벽 수박희 그림
사실 안악3호분에는 서역계 요소가 적지 않다. 위 서역계 무용수와 춤은 물론 비파 등 악기도 서역계이다. 앞방 수박희 장면에서도 대결하고 있는 한 사람은 높은 코와 큰 눈으로 보아 서역계 인물로 보인다. 동쪽 곁방 부엌그림에서 부뚜막에는 속이 보이는 투명한 그릇이 놓여 있는데, 유리그릇이라면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안악3호분 안에서만도 이렇듯 여러 서역계 인물이나 문화요소가 발견되니 당시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 교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살피도록 하겠다.
이제 회랑으로 들어가보자. 회랑은 널방의 동벽에서부터 북벽까지 'ㄱ'자로 둘러싸여 있다. 이 회랑의 남쪽 벽면에는 고상식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동쪽 벽면에는 25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이 행렬도의 길이만도 10m에 이른다.
행렬도(복원)
이 행렬도는 행렬의 앞부분 무리와 주인공을 호위하는 중간 행렬을 그렸을 뿐이다. 그림에서 그리지 않은 행렬 뒷부분까지 고려하면 본래 전체 행렬 구성은 300명이 넘는 규모로 추정할 수 있겠다. 행렬도의 규모가 방대하며 전체가 매우 장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무덤 주인공의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행렬도를 보면 소가 끄는 수레를 탄 무덤 주인공은 행렬의 3분의 1 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인공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악대가 노래와 연주를 하고, 춤을 추며 나아간다. 수레 뒤쪽으로는 의장 기수, 시녀, 말을 탄 문관 등이 뒤따르고 있다. 이들의 좌우로는 창, 칼, 도끼, 활을 지닌 보병과 개마무사들이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다.
그리고 행렬의 앞부분은 3열로 진행되는데 주인공의 수레 앞의 악대 등 무리에서는 5열로 늘어서 있고, 다시 주인공의 수레 지점에서는 7열로 확장된다. 행렬이 서서히 커지면서 화려함과 장중함이 점점 상승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더욱 7열의 묘사에서는 인물들 간에 겹쳐 그리기를 하고 있어 행렬 폭의 깊이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겹쳐 그리기는 다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매우 수준 높은 묘사법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이런 대규모 행렬에 묘사되어 있는 무기와 갑주, 악기, 복식 등등의 그림만으로도 당시 사회와 군사, 생활상을 밝히는 자료가 가득하다. 이런저런 점에서 뭐니 뭐니 해도 이 행렬도가 안악3호분 벽화 중 최고의 벽화다. 아니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그림의 수준이나 풍부한 내용에서 뛰어난 가치를 갖고 있다.
무덤의 구성을 주인공의 공무 생활 공간으로 비견하면, 주인공의 초상이 있는 서측 곁방은 집무실에 해당하며, 악대와 의장대, 수박희 등이 벌어지는 앞방 공간은 관청의 앞마당과 부속 시설 공간이 되겠다. 무용수와 악사가 있는 널방은 주인공이 여유를 즐기는 후원쯤 될 터이고, 행렬도가 그려져 있는 회랑은 소속 관리들의 집무 공간이나 관청의 바깥 진영쯤 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안악3호분은 무덤 주인공의 공적, 사적 공간이며, 그가 생시에 행했던 여러 활동들이 펼쳐져 있는 독자의 세계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초기에 해당되는 안악3호분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고구려 묘제 양식과는 다르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벽화의 수준이나 무덤의 구성이 매우 세련되고 완성된 모습이다. 그래서 이 무렵 고구려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악3호분에 담겨 있는 진정한 비밀은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 왕이냐 동수냐가 아니라, 폭넓은 대외관계를 바탕으로 여러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시대 문화 창조의 빈곤을 절감하는 우리들이 고구려인들에게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3)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극치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2) [TRAVEL FEATURE]불멸의 공간① 고구려의 숨결 느껴지는 고분벽화 (daum.net)2006. 10. 4.
(3) https://v.daum.net/v/20170316150406315
<참고자료>
https://namu.wiki/w/%EC%95%88%EC%95%85%203%ED%98%B8%EB%B6%84
안악3호, 덕흥리 고분 주인공은 누구? (daum.net)2016. 8. 18.
https://v.daum.net/v/20170202150406400 2017. 2. 2.
https://v.daum.net/v/2017030215160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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