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10) - 고구려 문화유산(4) 고구려 세계문화유산(4) 오녀산성 본문

여러나라시대/고구려(고려,고리)

고구려(10) - 고구려 문화유산(4) 고구려 세계문화유산(4) 오녀산성

대야발 2024. 8. 31. 22:33

 

 



세계문화유산 오녀산성은 요녕성(랴오닝성) 본계시(번시시) 환인현 오녀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됩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삼국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첼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녀산성 성벽 전체 둘레가 4574m에 이르는데, 그중 4189m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동쪽과 남쪽 그리고 정상부의 주요 계곡부에만 총 길이 565m 정도 인공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합니다.(1)

 

 

 

이형구교수는 요동반도는 고조선의 강역이지만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요동반도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이후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시기를 이룬, 고구려의 산업과 국방의 중심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 중의 하나인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한 사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 장소는 오늘날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지금은 환인시)에 있는 졸본성(卒本城),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고구려 하면 으레 중국 길림성() 집안시(, )나 북한의 평양 정도만 떠올리게 되는 것은 마치 우리가 백제의 건국 수도가 오늘날의 서울인 줄을 잘 모르고 오직 공주나 부여만을 연상하는 것과 같다.

칠성산묘구(七星山墓區)에서 바라본 집안시내(輯安市內) 풍경국내성 서벽(정비 후)과 북벽이 보인다.

 

요녕성 경내에서도 요동반도는 오늘날 중국에서 철 생산량이 가장 많은 안산() 제철소가 있고, 무연탄이 무진장한 무순() 탄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요동반도는 고조선의 강역이지만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요동반도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시기를 이룬, 고구려의 산업과 국방의 중심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녕성의 고구려 유적이나 유물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역사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오녀산성 ‘중국성급사적(省級史蹟)’ 지정비

 

“옛날에 (고구려) 시조 추모왕(, 혹은 동명성왕()이라고도 함)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로서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하여 알에서 태어났는데, 성스럽고 덕이 있었다. 추모왕은 천제의 명을 받아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 지금의 송화강())를 지나게 되었다. 추모왕은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띄워 다리를 놓아라”라고 말하자마자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들이 떠올라서 다리를 놓았다. 그러한 후에 (추모왕이) 물을 건너 비류곡(, 지금의 동가강())의 졸본(, 홀본()이라고도 함)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고구려 건국 신화에 보이는 졸본성이 바로 오늘날의 환인 오녀산성이다. 1993년 8월 15일 광복절날, 북한의 역사학자 박시형()·강인숙() 선생 등과 함께 졸본성[오녀산성]을 참관하였다. 여러 면에서 매우 감개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두분과 최영식 교수 그리고 방기동 소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한국·북한·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들과 환인(桓仁) 로정(路程) 중 합영[1993년 8월 15일 광복절날]집안에서 회의를 마치고 오녀산성 방문길에 길림성과 요녕성의 경계분수령인 괘패령(卦牌嶺) 위에서 잠시 쉬는 길에 기념촬영을 했다.(오른쪽에서부터 저자, 조유전 박사, 경철화 집안박물관 부관장, 박시형 교수, 현명호 교수, 최영식 교수(이상 김일성종합대), 방기동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 왼쪽 네 분은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고인이 되었다.

 

오녀산성은 요녕성 환인현 현성()으로부터 동북쪽으로 8.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훈강()의 건너편 해발 820m나 되는 높은 곳에 축성되었다. 이 산은 주위의 여러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오른 산으로 깍아지른 절벽의 높이만도 200m나 되는 험산이다. 산 꼭대기에는 동쪽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모두 절벽으로 성벽은 남북의 길이가 1000m이고, 동서 너비는 300m로 총 길이 2,440m에 이른다.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卒本城)졸본성은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연안에 위치한 지금의 환인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기원전 34년에 천애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석성으로 축성 방법은 고구려 산성의 선구이다.

 

동남쪽에는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여 판상석()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는데, 성벽은 바깥 높이가 3~6m나 되고 안쪽은 1~2m 정도이다. 그리고 성벽에는 아직도 단애가 남아 있다. 성안에서는 1986년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초기의 유물로 보이는 금은기·동기·철기·자기·옥기·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2)

오녀산성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말하는 “왕이 졸본천에 이르러 그곳 땅이 기름지고 산세가 험하고 견고하므로 이곳에 마침내 도읍을 정하고 집을 짓고 살면서 3년 후[기원전 34]에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은 곳”이라고 기록한 바로 그 성이다.

오녀산성 안의 평지에는 건도 당시의 돌로 쌓은 연못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견고한 오녀산성을 건성한 지 불과 38년 만에 고구려 제2대왕인 유리왕()이 22년[3], 서울을 국내성(,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후로는 북방의 한 중성()으로 남게 되었다. 2003년 10월이 천도 20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원왕()이 왕위에 오르고 그 이듬해[332] 2월에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지 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새로 등극한 왕이 졸본성에 와서 제사 지냈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그 중요성을 알 만하다.(2)

 

 

 

 

임기환교수는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벽과 마찬가지로 돌을 가공하여 쌓는 적석무덤의 축조 양상과 비교해서 보면,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는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동남부의 인공 성벽이 다소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오녀산성이 건국 초기에 도성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흘승골성 아니 오녀산성은 주몽 때에 아니 꼭 주몽 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몽왕 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축성된 성일까? 오녀산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점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게다. 먼저 밝혀둘 점은 이 글에서는 고고 유적으로 가리킬 때는 오녀산성으로, 역사적인 성으로 가리킬 때에는 흘승골성으로 표기하겠다. 그동안 대부분 오녀산성이란 이름으로 써왔기 때문에 혹 독자분들의 혼동이 있을까 봐서이다.

 

오녀산성 원경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 trimming)
 
 

 

 

오녀산성 정상부에서는 환인댐 저수지와 환인 시내를 굽어볼 수 있다. 사방 주위를 모두 공제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갈 때에는 올라온 서쪽 절벽 반대편 동쪽 산비탈로 내려갔다. 성의 동쪽과 남쪽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다소 완만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면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지금은 탐방로를 잘 만들어 놓았으니 하산 길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1995년 당시에는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왔다.

 

그래도 그곳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공 성벽을 만났다는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녀산성 아니 흘승골성은 고구려인에게만 성지(聖地)가 아니었다. 고구려사를 공부하던 내내 나에게도 성지나 다름없었으니 그 감동이 어떠하였겠는가. 차디찬 성벽 돌과 덮고 있는 푸른 이끼를 어루만지고, 길게 뻗은 높은 석축 성벽을 바라보니, 비로소 오녀산성이 '성곽'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오녀산성 성벽 전체 둘레가 4574m에 이르는데, 그중 4189m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동쪽과 남쪽 그리고 정상부의 주요 계곡부에만 총 길이 565m 정도 인공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대략 12% 정도만 인공 성벽인 셈이니, 자연 지형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석축 성벽이 있어야 고구려인의 자취를 제대로 실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녀산성 동쪽 성벽과 문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trimming)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는 각각 1개의 문지가 남아 있다. 일부 무너진 성벽에서 축성법을 엿볼 수 있었는데, 고구려의 가장 전형적인 축조 방식인 쐐기형 성돌과 북꼴형 성돌을 이용하고 있고, 높게 쌓은 외벽에는 기초에 장대석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살짝 들여쌓기 하는 방식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필자는 고구려 시대 성벽을 처음 보는 상황이라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 성벽이 과연 주몽왕 때 아니 넉넉하게 잡아서 초기에 쌓았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축성이 훌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벽의 축성 연대를 파악하려면 성벽을 절개하여 기초부까지 발굴하는 등 좀 더 면밀한 발굴이 필요하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아직까지는 중국 측에서도 본격적인 발굴보다는 축성의 형태와 방식을 근거로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를 고구려 초기로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이 다수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벽과 마찬가지로 돌을 가공하여 쌓는 적석무덤의 축조 양상과 비교해서 보면,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는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기 어렵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주몽왕이나 고구려 건국 초기에 쌓아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중후기에 축성된 성벽 축조와 비교하면 쐐기꼴 성돌이 정연하지 못한 점이나 다소 서투른 느낌을 주는 겉쌓기 방식을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오녀산성 성벽을 만든 시기는 이른 중기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건국기라는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에 필자도 동의한다.

 

동남부의 인공 성벽이 다소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오녀산성이 건국 초기에 도성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초기에 오녀산성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정상부의 평탄지를 절벽 사이로 올라간 서문 자리와 동북쪽의 트인 부분 일부, 그리고 동남부 산비탈로 이어지는 일부에 방어시설을 갖추면 따로 성벽이 없더라도 훌륭한 성곽이 될 수 있다.

오녀산성 저수지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trimming)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에는 이런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에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 오자 대무신왕은 위나암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한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지 않자 대무신왕이 계책을 물었는데 좌보 을두지가 이렇게 건의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높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밖에서는 성안의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지형에다, 성안에 연못이 있는 오녀산성의 모습이 연상되는 내용이다. 여기 위나암성에 대해서는 국내 천도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부분이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오녀산성의 동, 남부에 축조된 인공성벽 등은 뒤에 성을 확장하면서 축성되었을 것이며, 이는 오녀산성 즉 흘승골성이 단지 시조의 건국지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사실 오녀산성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도 건국지라는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주>

 

 

(1) 오녀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건국의 터전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3) 오녀산성은 주몽 때의 성인가? (daum.net)임기환 2022. 3. 4. 

 

 

 

<참고자료>

 

 

 

오녀산성 - 나무위키 (namu.wiki)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의 산성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첫 도읍지 졸본은 어디일까? (daum.net) 2022.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