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신동아 (donga.com)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

광개토태왕비 앞에는 發福 비는 잔돈만 수북이…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 입력2006-09-06 16:32:00



요즘 TV 방송에서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MBC는 ‘주몽’을, SBS는 ‘연개소문’을 방영하고 있는데,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당나라에 패망했다. 공교롭게도 두 TV 방송사는 고구려의 시작과 종말을 소재로 역사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인기 드라마로 다가오는 고구려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신동아’는 중국이 추진해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를 처음으로, 그리고 자세히 밝혀낸 매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광명일보 인터넷판은 2003년 6월24일자에 동북공정을 펼치는 의도를 밝힌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원제 試論高句麗歷史硏究的幾個問題)’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기자는 이 논문을 입수, 번역해 ‘신동아’ 2003년 9월호에 게재함으로써 대응을 촉구한 바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은 없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1500년간 나라(고조선)를 다스리다 1908세에 산신령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측은 “사람이 어찌 1908세를 살 수 있느냐. 그래서 한국도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여기고 있지 않느냐”며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인하다.

한국 사료는 단군조선에 이어 중국 은(殷)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고조선을 이끌고, 이어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측은 “은나라와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나라이니 기자와 위만이 세운 조선은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도둑맞았다”

중국 한(漢)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했는데, 중국은 한4군 중 하나인 현도군(玄?郡)의 고구려현에서 고구려가 태동했다고 보고 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중국 영토인 현도군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역시 중국 역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바람에 중국은 고구려사를 한민족에게 도둑맞았다고 분석한다. 중국측은 그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라면 고려 태조인 왕건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고(高)씨 성이어야 하는데, 왕(王)씨 성을 썼다’고 지적한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 세력은 국호를 조선으로 삼으며 기자조선의 뒤를 이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중국사의 일부인 고조선도 한국 역사로 빼앗기게 됐다는 것이 동북공정의 주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펼쳐진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때마침 건학 100주년을 맞은 동국대가 서울 중구청과 함께 동국대생과 서울 중구 관내 고등학생을 선발해 고구려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신동아’는 동북공정의 정체를 폭로한 3주년을 맞아 이 팀과 함께 만주 지역에 들어가 중국이 고구려사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동북공정이 지금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북공정의 위력은 상상외로 강력하고 우리의 대응은 한심할 정도로 무력하다.

[제 1부] 고구려는 없다, 그러나 ‘북한 사파리’는 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한반도만 차지했을 때 신의주는 불야성(不夜城)이었다고 한다. 신의주의 남쪽에 의주가 있는데 1906년 일제는 의주역을 지나 압록강변(신의주역)까지 경의선을 이었다. 대륙 진출을 노린 일제는 의도적으로 신의주를 발전시켰다. 1913년 신의주를 부(府)로 승격시킨 것. 부는 지금의 시(市)와 비슷하니, 신의주는 의주군보다 크고 발전한 지역이 되었다.

반면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안동(安東· 1965년 丹東으로 개명)은 어둠의 세계였다. 신의주가 화려해질수록 안동에 있는 중국인들은 신의주와 일제를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일제가 신의주와 안동을 잇는 철교를 완성하자 적잖은 중국인이 신의주로 건너와 화교(華僑)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의주보다 단동의 밤이 더 밝아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단행한 개혁개방의 물결이 단동에까지 몰아친 것. 그로 인해 단동으로 도주하는 탈북자가 많아졌다.

2001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은 반세기 만에 뒤바뀐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신의주특별행정구 설치를 계획했다. 다음해 9월 김정일은 중국 자본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중국인 사업가 양빈(楊斌)씨를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은 2002년 10월 양씨를 탈세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김정일의 꿈을 간단히 꺾어버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단동은 더욱 화려해지고, 신의주는 특구가 되었지만 어둠이 깊어가고 있다.

압록강 단교를 보는 눈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낙동강 전선으로 몰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그해 10월26일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태극기를 꽂는 쾌거를 이루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11월21일엔 미 7사단 17연대가 유엔군 부대 중에서는 최초로 압록강가 혜산진에 성조기를 꽂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펑더화이(彭德懷)로 하여금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 형태로 위장한 26만 대군을 이끌고 1950년 10월19일부터 압록강 철교 등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가게 했다.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중공군의 위세가 커지자 미 공군은 B-29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1950년 11월8일 오전 9시 압록강 철교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 압록강 철교는 ‘압록강 단교(斷橋)’가 되었다. ‘압록강 단교’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인의 눈에 비친 압록강 단교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혼쭐난 중국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중국인은 압록강 단교를,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올라오려는 미국군을 압록강에서 철저히 막아낸 구국항쟁의 상징으로 본다.

중국은 6·25전쟁을 조선(북한)을 지원하며 침략해오는 미국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전쟁으로 정의한다. 이들에게 보가위국은 항미원조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정의를 내린 순간 중국은 6·25전쟁에 임의로 개입한 침략국가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켜낸 방어국가가 된다. 단동에는 이를 기리는 항미원조 기념탑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해발 820여 m의 오녀산 정상에 오르면 뜻밖에도 남북으로 1000m, 동서로 300m쯤 되는 평지가 나온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일(一)자로 된 산 정상을 가리켜 임금을 낳을 수 있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명당으로 본다.

평지 정상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현재 이 샘터에는 ‘천지(天池)’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이곳에 이르려면 999개의 가파른 돌계단이나 하늘이 실처럼 보일 정도로 좁다고 하여 ‘일선천(一線天)’이라는 이름을 얻은 좁은 바위틈을 타고 올라야 한다. 군사적으로는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도처인 곳이다.

더구나 다섯 선녀의 전설까지 있으니 이 산 정상에는 일찍이 중국식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도관(道館·도교 사원)이 있었다. 중국 도교는 이 산을 10대 명산으로 꼽아왔다. 이곳에는 도교와 관련된 건물과 함께 20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오래된 성벽이 있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이 성벽은 견치석을 이용해 촘촘히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이 있었던 곳은 성벽이 항아리처럼 안쪽으로 움푹 들어온 ‘옹성(甕城)’ 구조인데, 이는 고구려의 성문 형태로 많이 발견되는 양식이다. 천지는 성 안의 우물 구실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녀산성 = 졸본성’에 꿰어 맞추는 중국

이 성벽 때문에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은 오녀산성이 졸본에 도읍을 정한 고구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고구려가 이곳을 첫 도읍지로 삼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두 개의 성을 쌓았다. 하나는 평상시 생활공간인 평지에 쌓는 ‘평원성(平原城)’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시 들어가 항전하는 ‘산성(山城)’이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한양에는 평시의 정치·생활 무대인 도성(都城)을 짓고, 유사시를 대비해서는 임금과 주민이 대피해 항전하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을 지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오녀산성을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올라가 항전하는 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이 성을 고구려의 왕실이 있던 도성으로 보았다.

중국이 오랫동안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 공개를 거부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2004년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난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조건 중 하나가 유적을 발굴한 다음에는 일반인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함으로써 중국은 만주에 있던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을 공개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지역에 있던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이면 이곳에서 살아온 중국 국적의 조선족도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 중국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까지 하고 있다.

한국인을 끌어들여 돈을 벌겠다는 중국의 의욕이 새로운 역사 왜곡을 낳고 있다. 즉 오녀산성 안에서 발굴된 모든 건물터를 고구려의 궁전터로 해석하는 오류를 낳은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터는 왕궁 유적으로 보기엔 턱없이 작다. 왕궁터가 아니라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지은 건물터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한데 중국은 일일이 고구려 왕실의 건물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 산성이 유사시 대피하는 곳이었다면 고구려는 이곳에 왕궁을 지을 이유가 없다. 왕궁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평지에 건설했을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녀산성 바로 곁에는 일제가 혼강을 막은 댐으로 생겨난 저수지 환용호(桓龍湖)가 있다. 오녀산 주위엔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 즐비한데, 환용호에 담수할 때 많은 무덤이 수몰됐다고 한다.

환용호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나가 오녀산성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광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쩌면 평지에 지었던 고구려 최초의 도성은 환용호 아래로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목적을 정해놓고 유적을 발굴했다.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도성이라는 전제 아래 이곳을 발굴했기에 오녀산에서 나온 건물터 대부분에 고구려 왕궁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러한 무리수는 도처에서 발견됐다.

가짜 주몽묘

오녀산성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환인만주족자치현 아하향(雅河鄕) 미창구촌(米倉溝村)이 나온다. 옆에 혼강이 흐르는 이곳에는 높이 8m, 둘레 150m쯤 되는 흙무덤이 있는데 중국측은 이 무덤을 ‘주몽의 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주몽의 무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국내 학자들의 일치된 판단이다. 이 무덤은 모든 부장품이 도굴된 상태에서 발견됐는데 환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연꽃 등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연꽃은 불교와 관련이 깊은 꽃인데, 고구려는 17대 소수림왕 때인 372년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근 400여 년 전에 붕어한 주몽의 묘에 연꽃을 그려 넣을 이유가 없다. 환인 지역에는 상고성자(上古城子·지명) 등 여러 곳에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무덤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강가에 있던 돌을 쌓아 만든 석총(石塚·돌무지무덤)이다.

장례는 매우 엄격한 행사이기 때문에 매장 풍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강가의 돌로 ‘돌무지무덤’을 쌓는 전통은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에도 계속된다. 후기로 가면서 육면체로 자른 큰 돌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흙을 올리는 ‘돌기단 흙무덤’을 만들고, 이어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봉토돌방무덤(土塚)’으로 변모해갔다.

미창구촌 무덤은 석실을 만들고 흙을 덮은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러한 무덤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후기에 많이 발견되므로 고구려 1대왕인 주몽의 무덤이 될 수가 없다.

현지인들은 이 무덤을 ‘장군묘’라고 불러왔다는데 유네스코에 등록을 하면서 중국은 이 무덤을 주몽의 무덤으로 바꿔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왜 이러한 역사 왜곡을 한 것일까. 이유는 결론을 내려놓고 역사를 짜 맞추었기 때문이다.

환인이 고구려 최초의 수도였다면 이곳에는 주몽의 무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발견되지 않자 중국은 이곳에서 가장 큰 무덤을 주몽 무덤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야 한국 관광객이 찾아오고,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답사팀을 이끈 동국대의 윤명철 교수는 이 무덤의 정체를 “졸본이 고구려 최초 도읍지였다면 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이나 평양으로 옮긴 다음에도 이곳을 왕족으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부터 주변국과의 관계가 안정됐다. 광개토는 왕이 아니라 황제와 유사한 태왕(太王)으로 불렸다. 수도에 태왕이 있고 지방에는 왕이 있는 중국식 봉건제와 비슷한 통치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무덤은 고구려 발상지인 이곳을 맡아 다스렸던 지방 왕이나 왕족을 위해 만든 고구려 중기 이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주몽은 ‘고구려’ 국명 안 썼다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은 태양과 함께 조상을 숭배한 전통을 갖고 있다.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조상신 숭배는 중요한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먼 곳으로 이주하는 우리 조상은 신주나 위패를 반드시 들고 갔다. 무덤은 갖고 갈 수 없으니 조상 혼령을 모신 신주를 대신 들고 간 것이다. 국가가 도읍지를 바꿀 때도 이 원칙은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국가를 운영하다 수도를 바꾼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뿐이다).

왕은 권력이 큰 만큼 무덤을 갖고 이주한다. 그러나 모든 왕의 무덤을 가져가진 못하고 나라를 연 첫 임금의 무덤을 갖고 간다. 427년 고구려가 세 번째 수도로 삼은 평양성 근처의 용산 아래, 5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주몽(동명왕)의 무덤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평양의 동명왕릉은 ‘돌기단흙무덤’ 형태다. 북한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1993년 단군릉과 함께 이 능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한국은 평양의 동명왕릉을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측면이 있다.

주몽 왕국은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몽이 왕국을 세우기 전인 기원전 75년에 고구려라는 이름의 나라가 있었다. 주몽이 세운 나라와 그전부터 존재해온 고구려는 어떤 관계일까. 주몽이 나라를 세우기 전 만주 일대에는 ‘조선’이라고 하는 강력한 정치체제가 있었다. 조선은 휘하에 소왕국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한 이후 그 밑에 있던 소왕국들은 상당한 독자성을 갖고 한4군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국의 대표가 부여인데 부여를 비롯한 소국들은 한4군을 몰아내고 자국이 중심이 된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의지를 가진 소왕국 가운데 하나가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던 고구려였던 모양이다.

현도군의 고구려현과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는 동일 지역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주몽의 나라와 고구려가 각기 따로 존재하다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된다.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는 꽤 강성해서 중국을 괴롭혔다. 진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가 왕망(王莽)에게 왕권을 빼앗겨,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는 서기 8년부터 23년 사이 15년간 존재했는데 서기 12년 신나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꿔 표기하게 했다. 주몽에 이어 왕위에 오른 유리는 아버지 주몽이 굴복시킨 비류국 송양의 딸과 혼인하고 서기 13년 부여국을 대패시키고 14년에는 현도군 고구려현을 빼앗았다는 기록을 남겼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강조하는 고구려는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었던 고구려다. 중국은,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한나라 영토인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자주 나오는 지방 왕국 가운데 하나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가 고구려현에 있던 왕국이 아니라면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주몽이 세운 왕국과 별도의 고구려가 기원전 277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는 반(半) 독립적인 상태에서 위만이 이끄는 조선의 통제를 받았고, 현도군이 생긴 다음에도 역시 반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解氏에서 高氏로 바뀐 미스터리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므로 성이 해(解)씨가 되어야 한다. 주몽은 원래는 해씨였는데 고(高)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에서부터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온 유리왕과 그의 뒤를 이은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6대 태조왕부터 고씨 성을 사용했다. 왜 고구려 왕가는 해씨와 고씨 성을 혼용했는가.

해모수란 인물도 의문 덩어리다. ‘삼국사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았다고 하나, ‘삼국유사’에는 해모수는 천제로서 흘승골성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부여를 세우고 아들 부루를 낳았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혼란은 고구려와 부여가 깊이 얽혀 있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부여와 고구려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고구려는 28명의 왕이 705년간 통치했다. 그렇다면 왕의 평균 재임 기간이 25.2년인데, 이는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매우 긴 통치 기간이다. 고구려 왕 가운데 가장 오래 통치한 이는 6대 태조왕으로 그는 47년부터 165년까지 무려 118세를 살며 93년을 통치했다. 20대 장수왕은 98세까지 살며 79년을 재임했다. 반면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을 재임했으나 39세에 붕어했다.

태조왕은 과연 118세를 살았을까. 또 그를 기점으로 고구려 왕의 성이 해씨에서 고씨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태조는 나라를 세운 첫째 임금에게 붙이는 묘호(廟號)인데 왜 고구려는 주몽이 아닌 6대 왕에게 태조란 묘호를 붙였을까? 태조왕 때에 고구려현에 있던 왕국과 부여, 주몽이 세운 나라가 복잡하게 합병된 것은 아닐까. 고구려는 많은 것이 비밀에 싸여 있다.

기원전 19년 유리왕이 2대 왕에 등극하였다. 서기 2년 유리왕이 용산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려고 준비해놓은 제물 돼지가 도망쳤다. 그로 인해 담당자인 설지(薛支)란 인물이 압록강의 위나암(尉那巖)이라는 곳까지 쫓아가 돼지를 잡았다. 돌아온 설지는 유리왕에게 위나암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아뢰, 이듬해 유리왕은 수도를 위나암이 있는 국내(國內)로 옮겼다. 국내성 시대를 연 것이다.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현에서 집안시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린다. 환인은 요녕성 소속이나 집안은 길림성에 속해 있다. 환인과 집안 일대는 지세(地勢)가 강원도 남부와 비슷하다.

장군총, 주몽의 무덤(?)

국내는 ‘나라 안’이라는 의미다. 나라는 곧 ‘집’이므로 국내는 ‘집안’이 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국내성이 있던 곳의 지금 한자 지명이 집안(集安·과거에는 輯安으로 적었다)이다. 집안 지역에는 두 개의 성터가 있다. 하나는 집안 시내에 있는 국내성터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시내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환도산성(丸都山城)이다.

일부 사료는 국내성에 자리잡은 고구려는 10대인 산상왕 때(196년) 환도산성으로 천도했다가 16대 고국원왕 때 국내성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한 세트로 보고 있다.

즉 국내성은 평시 생활공간인 평원성이고, 유사시 항전하는 공간이 환도산성이라는 것이다. 환도산성 앞에는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가 해자 구실을 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환도산성은 견치석을 이용하는 전형적인 고구려성 축조술로 만들어져 있다. 이 산성은 오녀산성보다 훨씬 커서 기병(騎兵)이 들어올 수 있다. 산성 안에는 말의 목을 축여주었다는 음마지(飮馬池)가 남아 있다. 이렇게 큰 산성을 쌓았다면 고구려의 국력은 오녀산성을 쌓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음을 뜻한다. 반면 국내성 터는 환도산성 규모에 비해 너무 작다. 평원성인 국내성을 환도산성보다 작게 만든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집안시 일대에는 강돌과 잡석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이 도처에 있다. 1만2000여 개에 달하는 무덤 가운데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광개토태왕릉이다. 광개토태왕릉 앞에 광개토태왕비가 있다. 이 능은 ‘태왕릉을 산처럼 안정되고 바위처럼 단단하게 해주소서’라는 뜻을 가진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한자를 새긴 벽돌이 발견됨으로써 광개토태왕릉으로 확인되었다. 광개토태왕릉은 환인 미창구의 가짜 주몽 무덤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듯, 아래쪽에 무너지긴 했지만 큰 기단석이 있고 그 위에 강돌과 잡석을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의 형태이다.

집안에서 광개토태왕릉과 비석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장군총이다. 거대한 기단석을 두부 자르듯이 잘라서 7층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에 대해 중국 학자들은 장수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윤명철 교수를 비롯한 국내 학자들은 이 무덤은 주몽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윤 교수의 설명.

“광개토태왕릉과 비교하면 이 무덤은 큰 공을 들여서 만들었다. 두부 자르듯 올려놓은 돌이 세월과 풍우로 인해 밀려나지 않도록 아랫돌엔 턱을 만들어놓았다. 예사 건축물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면 당연히 주몽의 무덤도 옮겨와야 한다. 시조인 주몽의 무덤은 어떤 무덤보다 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주몽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 무덤과 달리 돌을 반듯하게 잘라 7층으로 올리고 그 위에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이라는 축제를 열었다.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성을 한자 ‘解’로 쓰긴 했지만, 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초기 왕이 태양을 뜻하는 해를 성으로 가졌다면 이들은 천손(天孫)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매우 철저히 하늘에 제를 올렸을 것이다. 장군총이니까 이름이 비슷한 장수왕의 능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윤 교수의 설명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고구려는 거친 기마민족이었다’는 가정도 다시 검토해보아야 한다. 이유는 장군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때문이다. 벽화에는 수렵도처럼 용맹한 모습도 있지만 춤추는 여인을 그린 그림도 적지 않다. 무덤에 벽화를 그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예술적 기질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길이가 2m는 넘을 것 같은 돌을 반듯반듯하게 잘라 장군총을 만들었다면 고구려의 철기 제조술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기마민족이면서 상당한 문화민족이었다.

광개토태왕비를 만든 거대한 돌은 집안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돌은 지금도 자동차로 8시간 달려야 도착하는 백두산 지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인들은 얼음이 꽝꽝 언 한겨울에 백두산에서부터 이 돌을 끌고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인들은 벽화에 천문도를 그려놓을 정도로 계절과 시간 변화에 민감했다.

지금 이 땅에서 유행하는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道詵)국사가 중국에서 배워와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무덤에는 풍수의 핵심인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의 사신도를 그려놓은 것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도선국사가 중국에서 배워오기 전 우리 민족은 고유한 풍수사상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재주는 우리가 넘고 돈은…

지금 중국은 고구려를 그들 역사 속에 나온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로 환치해놓고 자기 멋대로 분류하고 개방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와중에 북한은 볼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주는 한민족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버는 이 희한한 현실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그의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이 권력을 놓고 갈등하다, 남생이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 당나라군을 끌어들였다. 이에 남건과 남산이 군대를 동원해 맞섰으나, 셋째인 남산도 당나라군에 항복했다. 둘째인 남건은 끝까지 투쟁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배반해 평양성 문을 열어줌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자살에 실패한 남건은 보장왕과 함께 당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지금 김정일 정권은 미사일을 펑펑 쏘며 주변국을 위협하지만 경제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조만간 내분을 일으키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때 위기에 몰린 김정일 세력이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에 ‘북한 정세를 안정시켜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심양(瀋陽)군구의 부대를 투입해 북한의 불안을 잠재우고, 친중(親中) 정부를 세우는 것을 우리는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돌이켜보면 한민족은 통일신라 시기를 제외하면 ‘조선’과 ‘고구려’와 ‘한(韓)’을 번갈아 국호로 사용해온 사실이 발견된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는 조선(고조선)이고 이때 한반도 남쪽에 삼한(三韓)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고구려를 대표로 한 삼국시대가 열렸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멸망하자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고려가 등장하고 이어 조선이 탄생했다.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는데 이 전통이 이어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생겼다.

한국은 대외적으로는 고(구)려(KOREA)로 불린다. 북한의 국호는 조선이지만 그들도 대외적으로는 KOREA를 사용한다. 그러나 KOREA의 대표는 한국이므로 지금 한반도는 ‘남쪽의 고구려’와 ‘북쪽의 조선’이 대립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고구려와 북의 조선 중에서 세 번째로 한반도를 통일할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윤 교수는 “남북한은 모두 고구려의 정통성을 따르고 있으므로 통일한국의 국호를 ‘한고구려’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심양 서탑거리 유감

고구려는 고조선과 함께 다민족 체제를 이끈 나라였다. 고구려 왕국 안에서 말갈(여진)족과 선비족 등 여러 민족이 공생했다. 고구려가 이러한 민족을 상대로 통일전쟁을 벌이거나 때로는 연합전선을 펼쳐가며 하나로 묶어냈다. 그리고 중국이라고 하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자기만의 정치체와 역사체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고구려의 정신과 능력이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힘찬 동력이 될 수 있다.

중국은 하(夏)·상(商·은나라라고도 함)·주(周)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사의 지평을 넓힌 단대공정(斷代工程)에 이어, 독립 열기가 강한 소수민족인 장족(藏族, 중국 발음으로는 ‘짱주’. 서장자치구에 많이 거주하는 티베트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서북공정을, 중국 내 최대 소수민족(1400여만명)인 장족(壯族, 중국 발음으로는 ‘좡주’. 광서자치구에 주로 거주)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서남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삼키는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중화주의를 확산하기 위해 이러한 공정을 펼치고, 지방정부는 관광산업을 부흥시켜 돈벌이를 한다는 차원에서 이 공정에 적극 참여한다. 동북공정을 통해 중국 지방정부가 얻고자 하는 것은 한국 관광객의 돈이다.

조선의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의 동북아 세력 변화를 제대로 읽고 대처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집권한 인조는 동북아 정세를 잘못 읽고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지지하다 청나라의 공격을 받고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병자호란).

그로 인해 그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당시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때 두 사람이 머무르던 곳이 지금의 서탑(西塔)거리라고 한다.

지금 서탑거리는 심양시 최대의 유흥가다. 이곳에는 KTV라고 하는 한국식 룸살롱이 즐비하다.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밤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의 유행을 이끄는 것은 한국의 투기자본이라고 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자취가 있는 곳에 한국식 룸살롱이 즐비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한국은 동북공정의 실체를 과소평가하고 돈 자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인의 허영속에 고구려의 원혼이 울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400여 년 전에도 중국은, 한반도에서 올라오는 위협을 압록강에서 막아낸 바 있다. 1592년 조선을 침공한 왜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대륙 진출을 노리자(임진왜란), 명(明)나라 조정은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4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가 왜군과 싸우게 했다. 7년간 계속된 이 전쟁에서 명나라는 조선을 지원해 왜의 침략을 막아내는 ‘항왜원조(抗倭援朝) 보가위국’을 성공시켰다.

지금 한국은 단군 이래 가장 잘사는 시기를 맞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달러에 육박하고, 연간 국방비는 대략 200억달러로 중국의 추정 국방비인 300억~500억달러에 버금간다. 세계 10위의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신라와 고려에 이어 세 번째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 항왜원조와 항미원조전을 성공시킨 중국이 ‘항한원조(抗韓援朝·한국에 맞서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을 지원함) 보가위국’을 준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의 1인당 GDP는 1000달러 수준이다(2005년 1411달러). 중국은 14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이중 중국보다 확실히 잘사는 나라는 1인당 GDP 5000달러 수준의 러시아뿐이다(2005년 5341달러). 그러나 러시아는 북경조약(1860년) 등을 통해 청나라의 영향력이 미치던 연해주 지역을 차지했으므로, 중국의 대(對)러시아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또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역은 잘살지도 못하므로 중국인들은 ‘러시아의 매력’에 혹하지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대인 중국이 동북아의 강국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핵 보유와 더불어 국경을 맞댄 나라들보다 잘사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한족(漢族)을 포함해 56개 민족으로 구성돼 있는데, 55개 소수민족은 대개 변경지역에 포진해 있다. 중국이 주변국보다 잘살고 강한 나라로 존재하는 한 이들의 독립 노력은 미약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예가 내몽고자치구의 몽골인들이다. 이들은 바로 곁에 조국 몽골(1인당 GDP 547달러)이 있는데도, 중국에서 살기를 원한다. 중국이 몽골보다 훨씬 더 잘살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1인당 GDP가 1만달러대인 통일한국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兩手兼將의 동북공정

‘풍요의 유혹’은 강력하다. 통일한국이 압록-두만강변의 도시를 집중적으로 개발한다면,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나 장백조선족자치현의 조선족들이 흔들릴 수 있다. 중국에서 14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동요하면 나머지 소수민족 가운데 일부도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통일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세력을 업고 있으므로, 중국은 통일한국의 등장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북한을 흡수통일한 한국이 대륙으로 기운을 뻗치기 전에, 중국은 항한원조를 준비해야 한다. 통일한국이 등장하기 전 중국은 압록-두만강변에 사는 중국 국적자들의 정신을 다잡아놓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은 결코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수교한 개혁개방정책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냥 개혁개방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개혁개방을 했다. 그 결과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대만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수를 선보였다.

이러한 중국은 한국인 자본을 끌어들여 낙후한 동북지역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이 지역 중국인의 정신을 다잡는 양수겸장을 염두에 두고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장마철인 지난 7월말 단동엔 장대비와 안개비가 뿌렸다. 압록강은 장대비가 내릴 때를 제외하곤 끊임없이 안개를 피워 올렸다. 안개비가 내릴 때 유람선을 타고 신의주 쪽으로 접근해보았다. 인적이 드문 강변 부두에 어선과 경비정 수십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중 큰 배의 상갑판엔 AK(아카보) 소총을 둘러멘 국경경비여단원 두 명이 어슬렁거리며 동초(動哨)를 서고 있었다.

북한은 전연(전선)지대인 휴전선 북쪽엔 인민군을, 전연지대가 아닌 해안지역엔 경비총국 산하의 해안경비여단을, 조(朝)-중(中) 국경지역엔 경비총국 산하 국경경비여단을 배치하고 있다. 국경경비여단을 지휘하는 경비총국은 인민무력부의 통제를 받으므로 국경경비여단은 보병 위주로 편성된 정규군의 성격이 강하다.

단동은 한국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했다. 덕분에 단동은 요녕성에서 여섯 번째로 크고, 중국 변경도시 가운데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유람선을 탄 한국인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외치자 강변에 쭈그려 앉아 있던 북한 남자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순간 ‘북한은 살아 있는 사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동은 압록강 하구에서 상류로 30㎞쯤 올라온 곳에 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상류 쪽으로 20여 분쯤 더 올라 간 관전현 호산진 호산촌엔,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이 있다. 명나라 때인 1469년 중국인들은 이곳에 탑호산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탑호산성 유적을 발굴해내면 중국은 명나라 때 압록강까지 진출했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1990년 중국학자들은 이곳을 조사해 명나라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산성 유적을 찾아내고, ‘이 산성이 진한(秦漢)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명나라 시대의 성을 복원한 후, 동네 이름을 따서 ‘호산장성’이라고 이름지었다. 산에 있는 성이면 호산산성이라고 해야 할 텐데 왜 호산장성이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중국의 만리장성은 전국시대 연(燕)·제(齊)·조(趙) 등 여러 나라가 각기 고립된 장성을 쌓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이 성들을 잇고 서쪽으로 더 쌓아감으로써 만리장성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후 여러 왕조에 걸쳐 이곳저곳에 성을 쌓고, 명나라 때 이 성들을 연결하는 것을 완료해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됐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중국에서 나오는 모든 사료는 ‘명대에 완성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하북성(河北省)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山海關)이고, 서쪽 끝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틾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산해관에 가면 노용두(老龍頭)라는 곳에서 바다(발해만)에 맞닿아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 또 그곳에서는 ‘이곳이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호산장성 복원 공사가 끝난 1990년대 중반, 중국은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 아니라 호산장성이라는 것. 호산장성 옆에는 조악하게 만든 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 외벽에는 한글로 ‘중국 명(明) 만리장성 동단(東端) 기점’ ‘만리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기점(起點)에 가지 않으면 유감을 남긴다’는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만리장성 남쪽은 중원(中原)이고 바깥은 몽고족과 동이족 등이 사는 곳으로 여겨왔다. 중국이 만리장성 바깥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많지만, 그들이 정치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은 만리장성 남쪽이었다. 그런데 호산장성으로 인해 만리장성이 압록강가에 이르게 된다면 중국의 역사와 정치 무대는 갑자기 넓어지고, 만리장성 바깥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동이족인 한국인의 정치와 역사 무대는 현저히 오그라든다.

중국은 이러한 역사 인식을 한국인에게 강요하기 위해 박물관 외벽에 한글로 ‘만리장성 동단 기점’이라는 문구를 써붙여 놓은 것으로 보인다. “뿌드득-” 이가 갈리는 무서운 역사왜곡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복원한 산성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만들어야 했으니, 이 성을 고립된 호산산성이 아니라 다른 성과 연결된 호산장성으로 이름지은 것이다.

서기 598년과 612년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배했다(고수전쟁). 645년과 668년에는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는데(고당전쟁), 668년 전쟁에서 당나라가 승리함으로써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중국의 고구려 침략이 계속됐으니, 1500∼2000년 전 중국은 압록강가에 중국식 성을 지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조선과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절 중국 세력이 압록강가에 성을 세웠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고구려가 압록강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호산촌은 압록강 하구에서 30㎞쯤 들어온 단동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곳에 있으니, 압록강 하구로부터는 대략 100리 안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는 ‘648년 내주(萊州)를 출항한 3만여 명의 당나라 수군이 압록수를 100여 리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이라는 고구려 산성에 이르렀다. 박작성에서는 성주인 소부손(所夫孫)이 기병을 이끌고 나와 대항하다 무너졌다. 박작성은 산을 의지해 요새를 구축했고 압록수가 가로막고 있어 견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호산촌에서 발견된 산성 유적은 박작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산성을 조사할 때 중국 학자들은 산성 안쪽에서 지름 4.4m, 깊이 11.25m의 큰 우물터를 발굴했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고구려인은 산성을 쌓으면 반드시 산성 안에 우물을 만들었다. 발견된 우물의 안벽에는 고구려 산성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견치석(犬齒石, 뒤에서 설명)이 쌓여 있었는데, 이 우물터에서는 기원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3.7m 길이의 통나무배가 출토되었다.

 

중국 우주선 이름이 된 고구려의 배

중국측은 우물 안에서 나온 통나무배를 ‘진한 시대 옛 우물터에서 발견된 신비스러운 배’란 뜻으로 ‘고정신주(古井神舟)’로 명명했다. 그리고 진한 시대의 유적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박물관에 진시황의 등신상과 한무제 때의 자료를 많이 진열해놓았다. 우물의 발견으로 고구려 박작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지만 중국측은 박작성의 ‘박’자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압록강 중류에 있는 집안(集安)에는 고구려가 서기 3년부터 427년 사이 두 번째 도읍지로 삼았던 국내성이 있다. 국내성에 자리잡은 고구려 왕실은 압록강 수운(水運)을 통해 주변국과 무역했다. 중국이 위-촉-오 삼국으로 나눠 대립하던 시절, 고구려의 동천왕은 오나라의 손권과 동맹을 맺고 무역을 하며 위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요한 물류망이자 국내성 입구인 압록강 하구를 안전하게 지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는 압록강 하구에 서안평성(西安平城·현재 중국에서는 ‘애하(쾴河)라고 하는 압록강 지류 곁에 있다고 하여, ‘애하첨고성(쾴河尖古城)’으로 부른다), 구연성(九連城), 박작성, 그리고 대행성(大行城)을 지어 압록강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도시를 강 북쪽에 건설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도 한강 북쪽에 있다. 고구려의 국내성도 압록강 북쪽(중국 집안시)에 있었으므로, 압록강 방어성도 북쪽인 중국 땅에 건설되었다.

이 성들은 1차적으로는 압록강으로 올라오는 위협세력을 제거하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요동지역을 거쳐 육로로 압록강으로 진격해오는 위협세력이 있으면 이를 막는 구실도 했다. 한마디로 중국과의 전투를 위해 세워졌으니 이 성은 중국을 바라보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호산장성을 한반도를 바라보는 형태로 복원했다. 한반도에서 오는 위협을 막는 형태인데 그 이유는 박물관 진열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진한시대 전시물 이상으로 ‘갑오(甲午)중일전쟁’과 ‘일아(日俄·러일)전쟁’에 관한 전시물이 많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은 갑오년이다. 동학군을 막지 못한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력을 출동시켜 동학군을 무너뜨리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가 성 안에 있던 청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출해 요동반도를 장악했다.

 

抗日援朝에서 抗韓援朝로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맺어 승리를 확인하고, 요동반도를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개입으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는 굴욕을 맛보았다(3국간섭). 평양에서 청나라군을 패배시킨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호산진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당연히’ 청나라 군대가 패배했는데 박물관측은 음향과 입체 전시물을 통해 ‘호산보위전’을 과장되게 보여줌으로써, 이곳이 중국 방어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 벌어진 러일전쟁 때도 일본군은 이곳을 통과해 심양과 대련으로 진출했다. 박물관은 일본이 호산을 점령했을 때 자행한 잔혹상을 보여줌으로써 호산이 중국의 최변방 지역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압록강 단교가 성공한 항미원조의 상징이라면 호산장성은 실패한 항일원조(抗日援朝)의 전적지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중국측은 박물관 입구에 중국 육해공군 병사를 그린 대형 벽화를 걸어놓음으로써, 이곳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최전선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중국은, 자국 영토인 이곳에 고구려를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를 보기 위해 애써 이곳을 찾아온 한국인들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설명을 듣고 답답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압록강 하류에는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생긴 크고 작은 섬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덴 서울의 여의도처럼 한쪽으로는 압록강 본류(本流)가 흐르고 다른 쪽에는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샛강이 흘러, 한쪽 강변으로 붙은 형태의 섬이 적지 않다. 샛강 가운데 서울 시내의 청계천보다 폭이 좁은 것도 있어, 과연 이것을 섬으로 봐야 할지 의심되는 것도 적지 않다.

강을 국경으로 할 경우 한쪽으로 붙은 섬은 종종 영유권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이 된다. 북한과 중국도 강에 있는 섬에 대한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압록-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1960년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중국은 북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압록-두만강 본류 상에 있는 섬 영유권을 모두 북한에 넘겨주는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압록강에서는 실개천에 불과한 샛강만 있어도 그 섬은 모두 북한이 영유하게 되었다.

박물관 옆에 있는 실개천이 바로 압록강의 샛강이므로 방산마을이 있다고 하는 실개천 저쪽의 섬은 북한의 영토다. 실개천 위에는 노란 바탕에 회색으로 ‘금행(禁行·다니지 마시오)’이라고 써 붙인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다리를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다리를 달리거나 개울을 첨벙첨벙 건너 북한 땅으로 갈 수 있었다.

호산장성 반대편을 찾아가자 역시 에둘러 가는 압록강의 샛강이 조-중 국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나무다리 대신 ‘한 걸음만 뛰면 북한 땅에 도달할 수 있다’와 ‘매우 가깝다’는 뜻의 한자 ‘일보과(一步跨)’와 ‘지척(咫尺)’을 새긴 돌이 놓여 있었다. 실개천에 불과한 샛강에는 북한 땅을 더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나룻배가 있었다.

그리고 북한 사람에게 음식물이나 물건을 던져주지 말라는 중국어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몹시 거슬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었다. 경고문에 쓰인 북한 사람을 ‘동물’로 바꿔 적으면, 이곳은 물로 만든 해자(垓字)를 경계로 안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는 완벽한 사파리가 된다.

고구려를 보기 위해 돈을 써가며 달려온 한국인들은 고구려 대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역사왜곡과 동족이 있는 사파리를 보고 간다….

 

백암성도 없다

다음날 찾아가본 곳은 등답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있는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이다. 고구려는 육로를 통한 중국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한 1차 방어선으로 요하 동쪽에 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백암성과 안시성(安市城)이다.

요동반도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강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려 우왕 때 최영 장군이 추진했던 ‘요동정벌’의 그 땅이다. 고려가 요동정벌을 계획한 것은 그곳을 우리의 역사무대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때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해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회군) 개성을 공격함으로써,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열었다. 요하 서쪽은 요서(遼西) 지역이다.

요하 때문에 이곳에 있는 중국 지방정부의 이름이 요녕성(遼寧省)이 되었다. 1345㎞에 이르는 요하는 서만주의 젖줄인데, 요하와 나란히 흐르다 하류에서 복잡하게 갈라져 서해로 흘러가는 요하와 합수되는 큰 강이 혼하(渾河)다. 요녕성 성도(省都)이자 동북지역 최대 도시이며,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도시인 심양(瀋陽, 인구 800만)이 바로 혼하 중류에 있다. 이러한 혼하로 흘러드는 큰 지류가 뒤에서 설명할 태자하(太子河)다.

박작성이 함락되기 3년 전인 645년, 당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을 공격했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저항이 거세 점령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습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백암성 성주는 손대음(孫代音·‘孫伐音’이라는 기록도 있다)이었는데, 그는 요동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군에 항복했다. 백암성을 장악한 당나라군은 성 이름을 암주성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있건만 백암성은 고구려 산성에서 나타나는 ‘치(雉)’를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으로 꼽힌다.

성을 둥글게 쌓으면 적의 공격을 막기 힘들다. 그래서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밖으로 튀어나온 공간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치다. 치는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으므로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거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적군을 공략하기 쉽다. 백암성에는 55m와 61m 간격을 두고 세 개의 치가 나란히 나와 있다. 치의 높이는 9m에서 10m 정도다.

치는 적의 공격을 가장 세게 받게 되므로 단단하게 지어야 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성을 공략하는 무기로 돌을 쏘는 충거(衝車)와 직접 부딪쳐 성벽을 무너뜨리는 당거(撞車)가 사용됐는데, 치는 충거가 쏘는 돌과 당거의 공격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주 크고 튼튼한 돌을 치의 받침돌로 썼다. 그리고 그 위에 큰 돌을 9층 내지 10층까지 쌓는데, 뒤로 조금씩 물리면서 쌓는 ‘퇴물림 방식’으로 올렸다.

이렇게 하면 치나 성벽은 첨성대처럼 약간 뒤로 기운 모양이 되는데, 이렇게 쌓은 치나 성벽은 직벽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백암성의 치 윗면에는 망을 보거나 성벽을 부수기 위해 달려드는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로세로 5m 정도의 공간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성벽 밖으로 나오는 돌은 매끈하게 다듬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개 이빨(犬齒)처럼 뾰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견치석’이란 말이 생겼는데, 견치석은 다른 돌과 맞물리는 기능을 한다. 견치석으로 쌓은 성벽은 외부에서 압력을 받을 경우 맞물리는 정도가 강해져 오히려 더욱 단단해진다. 백암성에서는 폭이 3m쯤 되는 성벽 한쪽이 무너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견치석 모양의 돌이 수북했다.

고구려인들은 화강암으로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백암성만은 석회암으로 만들었다. 이유는 바로 곁에 석회암 채석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채석장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이곳에서 견치석 모양으로 석회암을 떼어내 퇴물림 방식으로 치와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이곳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는 고구려의 백암성이 아니라 ‘연주성산성(燕州城山城)’이라고 씌어 있었다. 연주성산성은 연나라 때 쌓은 산성이라는 뜻이다. 연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선비족이 사는 땅에 있던 왕국이다. 중국은 왜 고구려 산성에 연나라 성 이름을 붙인 것일까. 이유는 백암성 옆으로 흐르는 태자하와 고구려 역사 지우기에 있을 듯했다.

전국시대 가장 강한 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진(秦)이었다. 기원전 228년 진은 한(韓·우리와는 상관없는 나라임)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나라를 압박해 역수(易水)강까지 쳐들어왔다. 조나라가 무너지면 연나라가 공격을 받게 된다. 위협을 느낀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자객 형가(荊軻)에게 진시황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형가는 진시황 암살에 실패해 죽임을 당했다.

분노한 진시황은 기원전 226년 군대를 동원해 연나라 수도를 공격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연나라 왕 희(喜)가 요동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자 단을 죽여 그 목을 진시황에게 바쳤다. 아들의 목을 바치며 화해를 요청한 것인데, 진나라는 공격을 계속해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때부터 이곳에 흐르는 강을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태자 단을 기려 ‘태자하’로 불렀다고 한다.

태자하 옆에 있으니 중국은 이 산성을 연나라의 성, 즉 연주성산성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가 쓰러진 후 선비족은 5세기 무렵 북위(北魏)를 세워 140여년간 중국 북부를 통치하다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중국으로서는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고구려보다는 한족에 동화된 연을 이 땅의 주인으로 삼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성을 고구려의 성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

1963년 중국은 이곳에 ‘연주성산성’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고 1990년 같은 이름을 새긴 비석을 또 세웠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펼치기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 지우기를 해온 것이다.

[제 2부] 고구려는 있다, 그러나 미스터리가 넘쳐난다

고구려는 아직도 많은 것이 미스터리인 왕국이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주장하는 사람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을 정도로 고구려는 베일에 싸여 있다. 건국과정부터가 그렇다. 여러 사료에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광개토태왕비에는 ‘추모(鄒牟)’로 기록돼 있다)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인 해모수다. 해모수는 성(城) 북쪽에 있는 청하(淸河)에서 놀고 있던 하백의 딸 유화(柳花)와 정을 통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일로 유화는 잉태를 했고 그로 인해 하백에게서 쫓겨나 우발수에 있다가 부여의 금와왕에게 구출돼 알을 낳았다.

그 알에서 남자아이가 나왔는데 아이는 활을 잘 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그는 주몽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여의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해 죽이려 했다. 위기를 느낀 유화는 주몽에게 “남쪽으로 가면 뜻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며 도주를 권유했다.

주몽은 왕실의 말을 훔쳐 타고 세 명의 친구와 도망쳐 비류수(沸流水)에 이르렀다. 그의 뒤에는 추격군이 있었다. 이에 주몽이 “나는 황천(皇天·천제) 아들이며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추격병을 피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졸본부여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딸만 있었는데, 주몽은 졸본부여 왕의 딸인 소서노와 결혼했다.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주몽은 기원전 37년(‘삼국사기’ 근거) 왕국을 세우고, 이듬해 송양이 이끄는 비류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33년에는 행인국을,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때의 주몽 왕국은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도교의 성지인 오녀산

사료에 따라서는 주몽이 왕위에 오른 곳을 ‘흘승골성(訖升骨城) 또는 ‘홀본(忽本)’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은 졸본을 다르게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를 알려면 졸본(卒本)부여가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중국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은 요녕성 신계시 환인만주족자치현 환인진 유가구촌에 있는 오녀산성을 졸본으로 보았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것이 만주족(여진족의 후예, 1000여만명)이다. 고유의 문자와 말을 갖고 있던 여진족(후금)은 1625년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바꿔 부르며 도읍지로 삼아 청나라를 세우고, 1644년 북경으로 천도해 중국 전체를 장악했다. 하지만 급격한 한화(漢化)정책을 채택해, 지금 그들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만주족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환인현은 말과 글을 잃어버린 만주족을 위한 자치지역이다.

환인(桓仁)은 단군의 할아버지인 천제 환인(桓因)을 연상시키나, 한자가 다르다. 본래 회인(懷仁)현이었다가 환인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단군과는 전혀 관련 없는 지명이다. 환인현을 가로지르는 강이, 심양시를 관류하는 혼하(渾河)와 혼동하기 쉬운 ‘혼강(渾江)’이다. 심양의 혼하는 요하로 합류되지만, 환인의 혼강은 수풍댐 상류의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오녀산성이 졸본성이라면 혼강은 비류수가 된다. 고구려가 졸본을 수도로 삼은 기간은 40년이다. 그래서인지 오녀산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전설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 오녀산(五女山)은 이 곳에 있던 다섯 선녀가 혼강에 살며 사람을 괴롭히던 괴물과 싸워 함께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입력2003-08-22 13:25:00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신동아 (donga.com)

한국의 역사 主權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도전

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

  • 김정일 정권 붕괴시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동요 막으려는 심모원려
  • “옌볜의 지식인 사회는 ‘술렁’,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정부는 ‘조용’”
  • 한국의 북방사 연구 저작물 분석하는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들
  • 고구려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東北工程’ 프로젝트
  • 日本, 발해는 중국사로 고구려사는 한국과 중국사 양쪽으로 분류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내용의 시론을 담고 있는 광명일보 인터넷판과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변강사지연구 중심의 사이트

 

지난해 초 기자는 교토(京都)에 있는 일본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교토 박물관 벽에 걸려 있는 동북아시아 연표에 ‘한국 역사 속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던’ 고구려사가 한국과 중국 역사 양쪽으로 분류돼 있고, 발해는 아예 중국사 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접 국가끼리는 영토와 역사 문제를 놓고 다투게 마련이다. 한국은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로 다투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시비를 놓고 외교 마찰을 빚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제에 관해서는 ‘제3자’이다. 더구나 일본은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데도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중국사 양쪽으로 나눠 놓았고 발해사를 중국사로 분류해놓았다. 언제부터 일본이 ‘친중국’이 되었나?

난생 처음 이러한 자료를 접하고 나자 상당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튼 그 후 기자는 한국의 관련학자나 고위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하면 좋으리까.’

이제야 부활하는 北方史

해군은 KDX로 나가는 신형 구축함을 건조하며 고구려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KDX-Ⅰ 제1번함은 ‘광개토대왕함’, 제2번함은 ‘을지문덕함’, 제3번함은 ‘양만춘함’이다. 기자는 해군이 차후 건조할 함정에 발해 창시자인 대조영(大祚榮)의 이름을 붙일 계획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해군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 짓는 함정 중 한 척에는 반드시 대조영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먹혀든 것일까. 아무튼 해군은 KDX-Ⅱ를 건조하면서 애초 계획을 바꿔 현재 건조하고 있는 제3번함을 ‘대조영함’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미 건조된 KDX-Ⅱ 제1번함과 2번함은 ‘충무공 이순신함’과 ‘문무대왕함’이다. 제4번함은 ‘왕건함’, 제5번함은 ‘강감찬함’, 제6번함은 ‘최영함’으로 이름 지을 예정이다.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웅의 이름만 붙이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꿔 만주벌판을 누빈 호걸 이름을 넣기로 한 것이다.

한편 육군은 지난 2000년 ‘천하제일군단’으로 불리던 제1군단의 별명을 ‘광개토군단’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우리는 해군의 ‘광개토대왕함’과 ‘대조영함’, 그리고 육군의 ‘광개토군단’을 갖게 되었다.

사실 한국이 한민족 북방사에 눈을 돌린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고조선에서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민족 북방사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북한이 주도했다.

이는 김일성(金日成)이 정권의 정통성을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찾으려 했고 이에 대응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에서 남북통일의 기백을 이으려 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11일 북한이 식량난과 경제난이 심각한 가운데에도 단군릉을 완공한 것은, 그들의 정통성을 한민족 북방사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02년에 열린 한·일 월드컵은 한국에서 한민족 북방사를 극적으로 부활시킨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온 나라를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으로 뒤덮은 붉은악마가 중국 신화에서 ‘전쟁의 신’이자 ‘군신(軍神)’으로 나오는 동방의 지도자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신들의 상징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학설은 아니지만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따르면 한민족사는 환인이 다스리는 환국에서 환웅이 건국했다는 배달국으로, 그리고 단군이 세운 고조선으로 이어진다. 치우는 배달국의 14대 천왕으로 매우 용맹스러웠으며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와 많은 전쟁을 치러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치우는 황제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다. 중국 민족은 이러한 치우를 군신으로 받아들여, 한(漢) 고조 유방(劉邦)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치우천왕의 사당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치우의 등장은 한국 민중이 갖고 있는 ‘대륙과 백두산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민족 북방사를 보다 분명히 규명하려면 철저한 학문적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화약처럼 폭발하는 민중의 정서가 아니라 꼼꼼함과 인내로 상징되는 정치한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이 불과 11년 전이고 아직도 남북이 분단돼 있다는 현실은, 한민족 북방사를 연구할 충분한 인원과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어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고구려사를 중국과 한국 양쪽에, 발해사는 아예 중국사에 넣어버린 것이다.

최근 기자는 중국을 출입하는 한 사업가로부터 중국 공산당의 당보이자 당의 논리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던 변방민족의 왕조였다’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 사업가는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내용 보도 이후 크게 ‘술렁’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학계와 언론계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이징(北京)에 있는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은 이를 보지 못했거나, 보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무시한 것 같다. 아니면 중국 정부를 의식해 못 본 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은 한국 특파원에게 6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주고 있어 중국에 불리한 기사를 쓴 특파원은 비자 만료를 이유로 언제든지 쫓아낼 수가 있다. 따라서 베이징 특파원들은 이 문제를 거론하기 어렵고 천상 한국에 있는 기자가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를 대비(?)

그는 옌볜에 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덧붙였다.

“일제시대 만주로 나온 조선인들이 중국인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항일 투쟁을 한 조선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조선족은 ‘조선족이 항일 투쟁에 참전했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특히 문화혁명 때는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분위기 때문에 더더욱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조선족이 ‘일제 침략기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더불어 가열찬 항일 투쟁을 벌였다’고 말하게 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많이 진척된 지금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가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한 것이다.

추측컨대 중국은, 한국과 미국이 옌볜을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교두보로 이용할 것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이러한 글을 게재한 것 같다. 또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고 한반도에 ‘통일’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건설되면,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4만3547㎢)에 200만 인구를 가진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하면 시짱(西藏)자치구에 있는 티베트인과 신장(新疆·위구르)지구에 있는 회교도들도 술렁거릴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커지면 중국은 5대10국(5代10國) 이후 새로운 분열기로 들어갈 수도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수많은 분열을 겪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원래 중국사의 일부였다고 미리 강조함으로써 김정일 정권 붕괴기에 있을지도 모를 조선족의 동요를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업가의 전언과 해석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 학자들이 수행한 고구려사 등에 대한 연구 자료를 대대적으로 수집해가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8월6일자 ‘중앙일보’는 고구려와 발해 등 한민족 북방사를 연구해온 한국 학자들이 중국의 연구기관으로부터 ‘당신의 저작물을 중국어로 번역해도 좋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중앙일보’는 ‘학자들은 중국 연구기관의 제의를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생각했으나 곧 중국이 고구려사 등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논리를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알고 불쾌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실명이 거론된 한 학자는 이 보도가 사실임을 인정했다.

광명일보 인터넷판에 올라 있는 고구려사 관련 문제의 시론

 

7월14일자 ‘중앙일보’는 소수민족사를 연구하는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www.chinaborderland.com)’이 지난해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세웠다고 보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5년간 200억위안(약 3조원)의 사업비를 들여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대대적으로 펼쳐 고구려를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의 계획서는 ‘중국의 동북지역은 근대 이후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특히 개혁 개방의 요구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역사 연구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적고 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한 한국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확실히 편입시켜 한반도 유사시 옌볜조선족자치주 등이 동요치 않게 하려는 중국측에 심모원려(深謀遠慮)라고 지적했다.

사업가의 제보와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중국측에 고구려사를 흡수하기 위한 모종의 분위기가 있음을 감지한 기자는 문제의 ‘광명일보’ 기사를 찾아 나섰다. 기사는 ‘광명일보’의 인터넷판인 ‘광명망(光明網, www.gmw.com.cn)’의 ‘역사’ 부분에 6월24일자로 올라가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원제 試論高句麗歷史硏究的幾個問題)’이고, 이 기사가 실린 사이트는 http://www. gmw.com.cn/gmw/gmwhomepage.nsf/documentview/2003-06-24-16-48256A22001B0C1248256D4F00003216?OpenDocument이다.

기사의 작성자는 ‘변중(邊衆)’으로 되어 있었는데, 변중이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중국 변방에 사는 민중’이라는 뜻의 가공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시론의 주제는 한마디로 ‘고구려족은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하나였으므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라는 것. 이 시론은 ‘철저히’ 중국 자료에만 의존했고 중국과 고구려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분석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이 시론을 읽어본 한 관계자는 “이 시론은 고구려가 신라 백제와 전쟁과 외교를 통해 맺어온 관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오직 중국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 있었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분석했기 때문에, 이 시론을 읽어본 중국인은 ‘고구려는 한국과 전혀 상관없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바야흐로 한국은 일본의 역사 왜곡만 문제 삼던 시절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도 눈을 돌려야 하는 시절로 진입했다”고 말했다.

‘광명일보’ 시론의 억지

이 시론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의 궤변을 펼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억지는 중국과 고구려는 원래 한 나라였다면서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벌인 싸움을 ‘이민족 정복전쟁’이 아닌 ‘통일전쟁’으로 묘사한 점이다. 예컨대 같은 민족인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상대를 흡수하려고 벌이는 전쟁은 ‘통일전쟁’이라고 하고 이민족을 흡수하려는 전쟁은 ‘정복전쟁’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시론은 정복과 통일을 의도적으로 혼동시켰다.

이 시론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억지는 왕건이 세운 고려는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 것이다. 시론은 당나라의 통일전쟁 성공으로 고구려는 다시 중국의 품 안으로 들어왔는데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주장한 왕건이 고려를 세움으로써 다시 고구려사를 뺏앗아갔다고 주장한다. 시론은 그 근거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서에 ‘고려’로 나오는데 왕건이 이를 도용해 한반도에 세운 나라를 ‘고려’로 명명했다고 지적한다.

또 고구려는 고씨가 왕위를 이어간 ‘고씨 고려’이고 왕건의 고려는 ‘왕씨 고려’로 분명히 다르다고 전제한 뒤, ‘왕씨 고려’의 고려가 ‘고씨 고려’를 이으려면 왕건은 왕씨가 아닌 고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건이 진짜로 고씨 고려를 이었다면 후손에게 십훈요(훈요십조)를 남길 때 “나는 고씨 고려의 후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같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론은 또 왕건은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왕씨 고려는 고구려를 잇지 않은 것이며 한 발 더 나가 왕건은 낙랑 시절에 있던 한족(漢族)의 후예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왜 국가를 왕족 관계로만 보느냐”는 문제를 일으킨다. 시론은 아마도 유(劉)씨 성으로 이어지던 한나라(前漢)가 멸망했다가 다시 세워졌을 때, 후한(後漢)의 황제가 전한과 같은 유씨였다는 중국적 특징에서 이러한 논지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는 왕실의 성이 같아야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수나라의 황실은 양(楊)씨 성을 썼고 당은 이(李)씨 왕조였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수와 당이 모두 중국의 법통을 이어온 국가라고 주장한다.

우습게도 시론은 지금의 한국 또한 왕씨 성의 고려와 이씨 성의 조선을 이어온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왕건은 고구려 왕실의 피를 이은 것이 아니라 그 법통을 이었다는 의미로 고려를 건국했는데 시론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3척동자도 지적할 수 있는 허점을 ‘중국 공산당의 당보’는 버젓이 내놓은 것이다.

세 번째로 시론은 ‘명나라 황제는 이성계를 조선왕에 책봉함으로써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 때문에 고려의 후예인 이씨 왕조는 중국인이 건국한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한사군-고구려에 그 맥을 대게 되었다. 여기에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도용해간 것이 보태짐으로써, 중국이 기자조선 이후 동북지역에서 만들어온 역사가 몽땅 한국사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심한 억지이다. 시론은 중국역사서에 나오는 고조선을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복생(伏生)이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인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보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시키자 그는 이를 탐탁찮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 연조(燕條)에도 “은나라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와 농사·양잠·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다.

‘상서대전’과 ‘한서’의 묘사대로라면 기자가 오기 전 이미 중국 동쪽에 ‘조선’(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표현한다)이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시론은 단 한 번도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리한 사료만 인용하고 불리한 사료를 배제한 시론 저자의 태도는 이 시론이 특수 목적을 위해 쓰여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민족 국가 유지 위한 심모원려

‘광명일보’ 시론에 대해 제보해준 사업가는 “이 시론은 단순히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쓴 것 같지는 않다. 이 시론은 중국과 고구려는 통일전쟁을 치른 같은 국가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당신들은 지금의 고구려인이요. 당신들은 중국 사람이란 말이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지금의 중국은 전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중국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소수민족은 좡족(莊族) 만족(滿族) 후이족(回族) 먀오족(苗族) 위구르족(維吾爾族) 이족(彛族) 투자족(土家族) 멍구족(蒙古族) 등이다. 조선족은 전체 소수민족의 2.6%, 192만명으로 소수민족 중에서는 14번째로 많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우대 정책을 펼침으로써 소수민족의 독립 분규를 피해나가고 있다.

이 사업가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무너졌을 때 소련 안에 들어와 있던 소수민족이 CIS 국가로 독립해 나갔다. 그후 러시아는 소련이 누렸던 초강대국 지위를 잃고 2등 국가로 추락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소련처럼 경제가 추락하고 소수민족마저 독립해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국은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육지를 통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 북한을 포함해 14개국인데, 이 나라들은 하나같이 중국보다 못살고 있다. 독립된 주변 국가들이 잘산다면 중국 변방에 있는 소수 민족은 ‘우리도 독립해서 잘살아보겠다’고 할 터인데, 주변국가들이 가난하니 중국은 이들을 붙잡아둘 명분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2차 북핵위기가 높아지면서 미국의 힘에 의해 한반도가 한국 중심으로 재통일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통일된 한반도가 빠른 시간 내에 지금의 한국처럼 잘살게 된다면,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이 자극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시론을 공산당 당보에 게재한 것이다.”

이 시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시론은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이다. 학술 세계에서 따져야 할 고구려사 문제를 정치문제화 하려는 경향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적고 있다.

지금 적잖은 조선족이 한국을 찾아와 취업하고 있다. 조선족과 한국의 만남은 한민족 북방사 복원 움직임과 맞물려 한국 사회에 ‘고구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론은 이러한 한국의 분위기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 전략가는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중국의 일부이고 조선족이 중국인이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맞서 ‘조선족은 한국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면, 이는 한·중간에 불필요한 마찰만 일으킨다. 한국이 한반도를 재통일하려고 할 때 중국을 협조자가 아닌 반대자로 돌아서게 할 가능성만 높이는 것이다”라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론에 숨겨져 있는 중국의 탁월한 동화(同化·assimilation) 능력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중국은 앞선 문화를 토대로 고구려족은 물론이고, 중원을 침범해 왕조를 세웠던 몽골족(元)과 여진족(淸)을 동화시켜 영토와 문화의 지평을 넓혔다. 지금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으로 수많은 소수민족을 껴안고 이들을 동화시켜나가고 있다. 이제 한국도 주위를 향해 동화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이 동화시켜나갈 대상은 이민족이 아니라 동일민족이다.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계에는 남한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 북한에 살고 있는 북한인(그리고 탈북자),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구소련의 영토에 살고 있는 고려인, 미국·일본 등 자유 세계에 살고 있는 해외동포가 있다. 이러한 범(汎)한국계의 주류는 역시 남한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다.

지금 한국인과 가장 잘 융합되고 있는 것은 해외동포일 것이다. 조선족과도 비교적 융합이 잘 되고 있다. 조선족은 한국에 저임금 노동자로 진출해 큰 마찰 없이 한국인과 융화되고 있다. 구 소련권에 있던 고려인들은 세력이 작아서인지 한국과 적극적인 접촉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고려인과 한국인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어 융합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한국이 앞으로 통일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 북한인이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중에는 한국사회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로부터 정착금을 지원받기까지 하면서도 이들 일부가 한국사회에 합류하지 못하고 불평분자가 되는 현상은 왜 생기는가.

한국사회가 탈북자를 흡수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통일 후 북한인과 융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북방사 복권 분위기가 일고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소수인 한국계를 융합하기 위한 우대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통일 한국을 만들고 한국 역사를 지키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의 同化정책은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주요국가들이 하나같이 ‘동화’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6월15일 영국의 ‘가디언’은 ‘군주제의 미래에 관한 위원회가 영국 왕은 더 이상 영국 교회(성공회)의 수장직(Supreme Governor of the Church of England)을 유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영국은 1534년 헨리 8세 때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해 로마교회(가톨릭)로부터 독립하며 성공회를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영국 왕은 성공회의 수장을 맡아왔다. 그런데 군주제의 미래에 관한 위원회는 500년 가까이 된 이 전통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왜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일까. 이유는 ‘다양한’영국인을 포용하기 위해서다. 영국은 대항해 시대가 열린 후 세계 각지로 진출해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 시기 다양한 종교를 믿는 다양한 인종이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들어왔다. 이들 중에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립해 국가를 이룬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를 믿는 다양한 인종이 영국의 국민으로 남았다(런던 시내에 가면 흑인과 터번을 두른 인도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위원회는 영국 왕은 이렇게 다양한 종교를 믿는 다양한 인종의 영국인을 대표하는 국가원수가 되어야 하므로 성공회 수장직은 내놓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위원회의 이러한 결론은 이른바 ‘잡종 우세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잡종 우세론은 단일 혈통보다는 다른 혈통을 흡수해 후사를 이어가는 것이 보다 뛰어난 민족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프랑스 역시 비슷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에서 나오는 모든 공문서에는 앞가슴을 드러낸 옷차림으로 3색의 프랑스 국기와 장총을 높이 쳐들고 있는 미모의 젊은 백인 여성이 실루엣으로 새겨져 있다. ‘마리안(Marianne)’으로 불리는 이 여성 그림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8월초 프랑스 하원은 ‘오늘의 마리안들(Mariannes d’Aujourd’hui)’이라는 제목으로 이슬람과 흑인 여성 등을 모델로 한 마리안 사진 13장을 청사 앞에 내걸었다. 다양한 인종의 프랑스인을 포용해 동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다민족 국가를 지향해 영토와 문화 지평을 넓혀 세계 최고에 이른 미국은 다민족이라는 국가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법률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억제하고 있다.

한 전략가는 “범한국계를 주도하는 한국인은 순수 혈통주의를 버리고 이국적인 한국계를 포용해 동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통일을 수월하게 하는 지름길이며 한국문화와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방안이다”라고 말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공산당 대변지인 ‘광명일보’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시론을 싣고 중국공산당의 미래를 제시하는 사회과학원 산하 연구소가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면,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할 것은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학계를 중심으로 북방사 연구를 심화하고 문화적으로 포용력을 넓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이 이러한 노력에 실패한다면 치우천왕의 깃발은 태워버리고 광개토대왕함과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그리고 대조영함을 침몰시키며 광개토군단을 해체하여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동북아는 ‘역사전쟁’시대로 진입했다. 고구려인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해 나라를 잃었다. 그런데 1400여 년이 지난 지금 또 어리석게 대처한다면 우리는 고구려사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고구려의 대외 관계]

승인 2013.07.25 17:50

中 둔황에 그려진 한국인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  한정석 편집위원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의 숨은 실력자였다


 
최근 실크로드 둔황의 막고굴에서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려인들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무더기로 발견됐다는 연구보고가 나왔다. 보고자는 중국 둔황연구원. 지난 6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에서였다.

당시 이 내용을 보고한 둔황연구원 측은 막고굴 벽화에 고대 한국인의 대거 등장에 대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중국으로 이주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통일신라와 당(唐)과의 경계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에 이른 점을 염두에 두고 그 이북의 지역, 발해를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대 한국인들은 서역과 교류가 이전에는 없었던 걸까.

서기 607년 수나라 양제는 변경을 순시하던 중에 오르도스 지역 서쪽의 동돌궐, 즉 지금의 동투르기스탄 시조인 계민카간의 막사에 예고 없이 다다랐다. 계민카간은 이미 수 양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속키로 한 상태였다.

그때 계민카간은 막사에서 외국 사신들과 모종의 면담을 하고 있었다. 수 양제는 이들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이들은 다름 아닌 고구려 영양왕이 보낸 사신들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위구르, 즉 동투르기스탄의 투르크에 해당하는 돌궐과 손잡고 수나라를 칠 계략을 세웠다. 수 양제는 그의 선대(先代), 문제가 100만을 선발해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별 소득 없이 끝났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옆에 있던 신하 배구는 양제에게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반드시 돌궐과 연합해 수를 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 양제는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드는 2차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역시 실패하고 수나라는 그 영향으로 멸망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의문을 가졌다. 왜 그렇게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구려는 어떻게 저 멀리 유라시아의 투르크족들과 연대를 도모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문제의 해답은 4세기 5호16국과 고구려간의 관계에 있다.

고구려가 중앙아시아에 미친 영향


6세기경 돌궐의 기마궁사. 고구려와 거의 구별이 어렵다.

 

 

고고학자 강인욱 서울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는 일찍이 투르크계인 돌궐에 뛰어난 군사무기들을 공급해 왔던 것으로 보고됐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굴된 돌궐계의 철제 마구들과 도끼, 창과 같은 무기들은 미약했던 돌궐의 문화에서 4세기경부터 갑자기 등장했고 그 유형은 고구려와 정확히 닮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일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돌궐족을 내세워 중원지역에 힘의 공백을 만들려 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중국의 분열기인 4세기 5호16국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고구려-돌궐(투르크)간의 연대는 문화적 거리가 가깝고 심지어 언어면에서도 친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를 언어 종족가설이라고 부른다.

미국 인디아나대 중앙아시아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백위드(Christopher I. Beckwith)는 몇 년 전 고구려어와 기타 중앙아시아 고대어간의 분석을 통해 고구려어가 투르크계에 근접해 있음을 발표했다. 당시 이 주장은 학계에 큰 충격을 줬지만 민족주의 사관에 매몰돼 있던 국사학계는 제대로 된 평가를 내놓지 못했다.

벡위드의 주장을 하나 살펴보자.

고구려의 초기 중요한 수도는 丸都城(환도성)이었다. 백위드 교수는 이 丸都라는 한자어의 3세기경의 음가가 ‘Ar(丸) Du(都)’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르두’는 고대 투르크어로 군사기지를 의미하는 ‘와르도’, ‘우르도’에 해당할 수 있었다.

백위드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많은 군사어에서 투르크어의 요소들을 발견했다. 그러한 이유는 아마도 고구려가 투르크-몽골계인 선비(鮮卑)를 정복하거나 이들과 교류하면서 종족간에 활발한 교합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선비는 이후에 북위를 세워 동북아에 패자(覇者)로 등장했으며 서쪽으로 그 세력을 넓혀갔다. 이러한 선비족의 문화는 현재 몽골과 카자흐스탄에 큰 유산을 남겼다.

아울러 6세기 초반에 그 세력을 다시 확보한 곡투르크(Gok-truk)는 이후 티무르제국으로 이어져 중앙아시아의 최대 정복자가 됐고 오늘날 투르크연방의 정신적 제국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곡투르크의 발흥에 고구려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강인욱 서울대 교수의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구체적으로 이 곡투르크와 무슨 관계에 있었을까. 우리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수 양제와 고구려 사신들이 조우했던 돌궐의 계민카간의 막사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사신들을 막사에서 만난 수 양제에게 그의 신하 배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중국의 역사서 <수서>에는 적혀 있다.

“고구려는 원래 고죽국입니다.”(高句麗本孤竹國)

<수서>의 이 구절은 한국 고대사의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였다. 고죽국은 殷(은)과 周(주)대에 발해만 지역에 있던 아주 오래된 나라였다. 수양산 고사리만을 먹으며 절개를 지키다가 숨졌다는 백이, 숙제가 바로 이 고죽국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원래 고죽국이라니, 이 말은 사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벽화에 등장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나 혹은 고구려 씨름도에 등장하는 서역인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고구려와 곡투르크라는 이름이 가진 모종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고구려와 투르크는 친족이었을까

배구가 말한 孤竹國의 孤竹(고죽)은 당시 漢語中古音에 따르면 kog(孤)truk(竹)이다.

고대 투르크어로 ‘곡투르크’는 하늘(Gok)의 투르크(turk)라는 뜻이다. 이 곡투르크의 후손들인 투르크 몽골계 Daghur는 큰(Da) 집단(ghur)라는 뜻이고, 위구르(Uyghur)는 날랜(huy) 집단(ghur)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투르크인들로서는 高句麗를 3~4세기 한자음으로 Goh Ghuri로 읽게 되는데 이는 고대 투르크어로 天族을 뜻하는 Gok ghur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다시 말해 다구르, 위구르, 곡구르는 모두 투르크어로 ‘뛰어난 집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수 양제와 동행한 배구는 고구려와 돌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돌궐 왕조의 뿌리가 다름 아닌 발해유역의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났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아시아의 조공·책봉은 君臣아닌 外交관계”

2004년 08월 02일 (월요일) 18 : 26  조선일보

거세지는 중국의 고구려史 왜곡… 정부·학계 “강력 대응”
세계도 인정한 定說… 중국만 자국중심으로 해석
中도 80년代 이전엔 인정… ‘東北工程’후 바뀌어
정부, 北核·탈북자 문제 딜레마로 대응수준 고민

[조선일보 유석재, 이하원 기자]

베이징 대학·푸단 대학 등 중국의 주요 대학 역사 교재가 고구려사를 언급하면서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복속된 정권’이라고〈조선일보 2일자 A1면〉 말하는 것은 무슨 근거일까.

 

국내 고구려사와 고대사 연구자들은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대 아시아 지역의 독특한 외교 형식이었던 ‘조공(朝貢)·책봉(冊封) 제도’를 극히 편협한 중국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학계가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복속된 정권’이었다고 보는 근거는 고대의 외교 형식이었던 ‘조공(朝貢)·책봉(冊封) 제도’를 군신관계의 중앙·변방 권력 구조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원의 천자국이 주변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책봉’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헌상물을 바치는 이 형식을 중국 학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왔다.

 

동북공정의 주역 중 한 명인 쑨진지(孫進己) 중국 선양(瀋陽)동아연구중심 주임은 “고구려가 비록 중원의 전란을 틈타 많은 군현을 점령했지만 시종 중국의 역대 정부가 책봉한 ‘고구려왕’이란 직책을 사용했으므로 중앙과 지방정권의 관계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이미 1980년대 후반 중국 학자 리뎬푸(李殿福)·쑨위량(孫玉良)이 쓴 ‘고구려간사(簡史)’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국내 학계는 물론 중국과 조공관계에 있던 주변국의 연구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사학자 신형식(申瀅植) 백산학회 회장(이화여대 명예교수)은 “중국은 책봉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던 전근대 시대 외교의 한 형태”라며 “조공국의 정체성과 자주성은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광식(崔光植)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고려대 교수)는 “조공·책봉제가 동아시아의 고전적인 외교형식이라는 것은 이미 세계 학계에서도 정설로 굳어진 것”이라고 단언한다. “당시 중국과 같은 형식의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이나 베트남 등도 조공 관계를 그같이 분석하고 있으며, 1970년대 존 페어뱅크(John K Fairbank) 등 미국의 동양사학자들의 연구로 세계 학계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유독 중국만 자국 위주의 해석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준우(朴晙雨) 아시아·태평양국장은 2일 북핵문제 협의차 방한 중인 닝푸쿠이(寧賦魁) 외교부 한반도문제 담당 대사를 만나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 왜곡을 중단할 것을 다시 촉구했다. 박 국장은 이날 중국에 대한 국민 감정이 악화되고 있음을 전달하고, 중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강력한 대처를 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정부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강력한 대처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대응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북핵·탈북자 문제가 우리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이하원기자 may2@chosun.com )

 


中, 南北통일 대비 조선족 분리 포석

 

고구려와 중원(中原)의 관계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한국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적 세계질서’에 도전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킨 강대국이었다고 본다. 광개토대왕비나 중원 고구려비 등에 등장하는 ‘태왕(太王)’ ‘성왕(聖王)’ 등의 호칭과 ‘영락(永樂)’ ‘연가(延嘉)’ 등의 고유한 연호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가진 나라였음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북한 학자들은 덕흥리 벽화 고분을 근거로 “고구려가 4세기 중국의 전연(前燕) 왕조를 무너뜨린 뒤 지금의 베이징과 허베이(河北)성에 해당하는 유주(幽州)를 점령해 통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왜 “조공·책봉제는 실질적인 군신(君臣) 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조법종(趙法鍾) 우석대 교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를 지향하는 중국은 소수민족의 분열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우려하는 것이 남북한과 인접한 만주 지역의 조선족”이라며 “한국의 민족주의 성장과 통일을 대비한 사전 포석으로 동북 3성(지린·랴오닝·헤이룽장)의 역사를 한국과 떼어놓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이나 명나라의 임진왜란 참전, 6·25 전쟁 등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때마다 항상 실패한 역사적 교훈 때문에 이번엔 몇 단계 앞서 손을 쓰려는 입장을 보인다는 것이다.


내년 中교과서 개정때 더 노골화 될듯

 

학자들은 이같은 서술은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상관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중국의 국가주의 사관의 반영이라고 지적하며 “내년에 나올 각급 학교의 새 역사 교과서에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는 동북공정역사관이 본격적으로 반영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푸단대학의 역사 교재에서 “수나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실질적인 군신관계”라면서도 고구려를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부분이 나온 것은 아직 ‘동북공정’의 시각이 파급되지 않은 증거라는 것이다.

 

최광식 교수는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역사관이 반영되면 이번 지안 일대 고구려문화유적에서 벌어진 ‘고구려 문화여행절’ 안내서에 나온 것처럼 아예 ‘고구려’의 명칭을 ‘중국 고구려’로 둔갑시키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 연구자는 “이제 고구려사 문제를 단순히 학술에 국한된 문제로 봐 왔던 우리 정부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교적인 대응은 물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북한의 고구려 유산을 알리기 위한 남북한 협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 ▲각급 학교 교사들에 대한 고구려사 연수 ▲인터넷을 통한 대대적인 고구려사 홍보 ▲역사도시 ‘평양’의 유네스코 유산 등재 등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東北공정이란

중국의 국가기관인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관, 2006년까지 동북(만주) 지방의 역사와 현황 국책 연구 사업이다. 고대 중국의 강역(彊域·국경)과 지방사·민족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중조(中朝)관계사,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만주·한반도의 각 분야 연구를 포괄한다.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보고 있으며, 고조선조차 한국사의 영역에서 제외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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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media.daum.net/politics/administration/200408/02/chosun/v7122150.html

 

 

 

송고시간2020-04-10 09:57

문화재청 "고대 한국인,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사실 보여줘"

고구려 사신 그려진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박물관 궁전벽화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고구려 사절단 모습이 그려진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박물관 소장 궁전벽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마무리됐다.

문화재청은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박물관 소장 궁전벽화의 보존·관리 상태에 대한 현지 조사를 마치고, 벽화 파편 11점을 지난해 12월 국내로 들여와 최근 과학적 분석을 마무리했다고 10일 밝혔다.

아프로시압 박물관은 우즈베키스탄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유적지인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7세기 바르후만왕 즉위식에 참석한 고구려와 티베트, 당나라 등 외국 사절단 모습이 그려진 궁전벽화가 소장돼 있다.

지난해 4월 문재인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순방 때 아프로시압 박물관을 방문해 이 벽화에 담긴 고구려 사신의 모습을 살펴봤다.

문화재청은 당시 우즈베키스탄 문화부·과학아카데미와 문화유산 분야 상호협력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궁전벽화 보존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아프로시압 박물관 궁전벽화 현황조사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국내로 들여온 벽화 파편에 대한 전자현미경 분석, X선 형광분석·회절분석, 열분석 등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벽화 제작기법과 채색 안료의 성분, 광물 조성, 과거 보존처리에 사용된 재료 등을 확인했다.

연구 결과 벽화 시료 모든 바탕에는 석고가 사용됐고, 청색 안료의 경우 청금석, 적색 안료에는 주토가 사용됐으며, 특히 흑색은 먹을 사용한 우리나라 전통 기법과 달리 납을 함유한 광물성 안료를 사용해 채색했다는 점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런 흑색 안료의 차이점은 앞으로 중앙아시아와 한반도 간 벽화 제작기술과 안료의 유통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열분석 결과 벽화 표면 물질이 아크릴 계열 수지로 밝혀져 현대에 들어 채색층 표면에 합성수지 재료를 사용해 보존 관리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번 벽화 시편 분석연구는 고대 중앙아시아 채색 안료의 재료적 특성 등 기초자료를 확보해 현지 벽화 보존을 위한 과학적인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상세한 분석 결과는 3개 언어(한국어, 영어, 러시아어)로 정리한 책자로 제작해 앞으로 양국 간 심화 연구, 벽화 보존을 위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우즈베키스탄 문화부, 과학아카데미 양해각서 체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문화재청은 "아프로시압 박물관 궁전벽화가 고대 한국인이 중국을 넘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인 만큼 이번에 도출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벽화 보존처리 설명서 제작과 국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공적개발사업(ODA)을 통한 사마르칸트 지역 박물관과 보존처리실 개선, 보존처리 전문가 기술 연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 지원을 할 예정이다.

dklim@yna.co.kr

 

 

송고시간 2020-04-10 15:22

고구려 사신은 왜 사마르칸트를 갔을까? (anewsa.com)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사압 궁전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사신도. 머리에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칼을 찬 이들이 고구려 사신들이다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국 사신도

당나라 장휘태자의 묘실 벽화에 그려진 신라 사신의 모습. 깃털장식 모자를 쓴 인물이 신라사신이다.


 

유원모 기자입력 2018. 11. 21. 03:00

우즈베키스탄의 7세기 고구려 사신도, 우리 손으로 보존한다 (daum.net)

우즈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 복원 모사도. 사진 오른쪽에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 2명이 새겨져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입력 2007-10-26 03:13업데이트 2009-09-26 07:53

우즈베크 7세기 벽화속 사신 2명 모습 크게 훼손|동아일보 (donga.com)

 

 

 

기사입력 2009/10/29 [10:34]

한국과 터키,중앙아시아 돌궐과 고구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입력 2008. 1. 31. 11:23수정 2008. 1. 31. 11:23

중앙아시아로 뻗은 고구려 기상을 찾아 (daum.net)

 

 

[온달장군]

  • 입력 2011.05.11 19:13

바보 온달은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 < 사회/르포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사마르칸트 왕은 온(溫)씨… 온달은 삼국사기의 유일한 온씨”
“고구려·사마르칸트 교역 빈번해 이민족 아들 가능성” 이색 논문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온달 장군상. ⓒphoto 이은정 블로거

 

“바보로 유명한 고구려 온달(溫達·?~590) 장군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연세대학교 지배선(64·역사문화학) 교수는 자신의 최근 논문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온달 장군은 서역인과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고구려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며 “그를 국제적 인물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달에 대한 새 해석이 담긴 이 논문은 5월 둘째 주 발간되는 백산학보 제89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 무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은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렸던 큰 나라였습니다. 강국은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실크로드 대상길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 무대였죠. 이 지역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사방으로 길이 열려 있고, 주변이 평탄해 이동이 유리했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강국 사람들이 외국으로 교역을 나갈 때는 상인뿐 아니라 자체 호위무사, 책임자 등이 한 집단이 되어, 그 규모가 적게는 수백 명부터 많게는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동서문명의 교통 루트가 된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데 강국 사람들이 선봉 역할을 한 것입니다.”

지 교수는 “이같은 지정학적 요인은 비즈니스를 강조했던 강국의 문화와 어울려 당시 고구려와의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통전(通典) 권(卷) 193 변방(邊防) 강거전(康居傳)’에 인용된 위절(韋節)의 ‘서번기(西蕃記)’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기록엔 당시 강국과 강국 사람들에 대해 “강국인은 모두 장사를 잘하며, 사내아이가 5세가 되면 문자를 익혔고, 장사를 가르쳐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고 돼 있다. 지 교수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강국 사람들이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머나먼 고구려로 가는 것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며 “온달의 아버지도 장사를 위해 고구려에 방문한 강국의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사마르칸트, 5살 때부터 장사 가르쳐

중앙아시아와 고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는 지 교수가 주목한 것은 온달과 관련된 각종 고서의 기록. 지난 1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던 지 교수는 당나라 때 책인 통전(通典)을 비롯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호삼성주(胡三省註), 위서(魏書)의 강국전(康國傳), 북사(北史)의 강국전(康國傳), 구당서(舊唐書)의 강국전(康國傳), 신당서(新唐書)의 강전(康傳), 전당문(全唐文)의 강국왕조륵가(康國王鳥勒伽) 등의 고서를 뒤졌다. 그는 고서에서 ‘사마르칸트 왕의 성은 온(溫)씨’라고 기록한 부분에 주목했다.

“온달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온씨입니다. 우리나라 온씨 계보의 시조이죠. 그런데 중국 정사(正史)인 구당서 권 198 강국전에 따르면 ‘한대(漢代) 강거(康居)라는 지역에 월씨(月氏)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에서 나온 온씨(溫氏) 성을 가진 사람이 강국의 왕이 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강국과 고구려의 교역이 빈번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온달이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 45 온달전(溫達傳) 고구려평강왕시인야(高句麗平岡王時人也)조’에는 온달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 때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은 순박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해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이 ‘바보’가 훗날 평강공주와 결혼, 고구려 장수가 되어 북주(北周) 무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각종 드라마나 연극 소재로 각색되고 있다. 지 교수는 “온달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이민족의 자녀로, 고구려 육군 지휘관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며 “평강공주를 만나 정규 교육을 받은 뒤, 당시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장군 지위에 올랐다”고 말했다.

 

“온달은 현대의 다문화가정 자녀”

지배선 교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특이한 점은 삼국사기 온달전에는 온달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만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줄의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지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고구려는 귀천이 분명한 사회입니다. 고구려인을 최고로 치고, 그 다음으로 말갈인을 쳤습니다. 가장 신분이 낮았던 계급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온달이 바보로 불린 것은 실제로 지능이 낮은 바보가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왕따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민족의 아들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보’라 불리며 천민 취급을 당했던 것이죠.”

지 교수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기록을 인용해 강국 사람들의 기질을 설명했다. “강국 용사들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용맹하여 전투할 때 그들의 앞에 나타날 적(敵)이 없었죠. 또 강국인은 멀리 교역을 자주 나가 말타기를 잘할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상술을 배우기 위해 타국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들은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와 백제까지 자기들의 상권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지 교수는 “강국인들은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말타기를 배웠으며, 도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용맹한 기질을 갖게 됐다”며 “이같은 강국인의 기질이 온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말했다.

“온달은 북주 무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후에 후주(後周) 무제가 요동을 공격했을 때도 선봉에 서서 반격했습니다. 후일 영양왕 때 신라가 한강 북쪽을 빼앗자 온달이 출정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이는 온달이 강국의 용맹한 기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온달의 아버지가 멀리 고구려까지 와서 교역을 했던 강국인이라는 시각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2007년 11월 17일 (토) 16:43   오마이뉴스

명장은 아무 데서나 죽지 않는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양만춘]

입력 2018. 9. 30. 06:00수정 2018. 10. 1. 00:29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철천지 원수였을까

 

영화 ‘안시성’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안시성 출신으로 주필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패잔병이 된 사물은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으로부터 반역자 양만춘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안시성에 잠입합니다. 안시성은 당 태종이 이끄는 대군의 침입을 앞둔 상황, ‘안시성은 어떻게 되느냐’는 사물의 질문에 ‘안시성은 포기하고 모든 병력은 평양성을 지킬 것’이라는 연개소문의 차가운 답변이 돌아옵니다.
중앙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고립무원의 처지-연개소문의 양만춘 암살 지령 등은 영화 ‘안시성’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주요 얼개입니다.

 
영화 '안시성' 촬영현장 모습. [사진=NEW]
 
그렇다면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실제로 어떤 관계였을까요. 정말로 적의 침공을 앞두고 자객까지 보낼 만큼 적대했을까요. 또,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포기하고 평양성 사수에 ‘올인’ 했을까요.

답변에 앞서 가벼운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안시성을 지킨 성주 이름은 무엇일까요? 만약 자신 있게 ‘양만춘’이라고 대답한다면 결과는 ‘땡’입니다.
안시성 전투는 국사 시간에 빠지지 않고 배우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를 둘러싼 주요 ‘팩트’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645년 당 태종이 이끈 10만 대군과 맞서 80일 동안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지금부터 사서에 남겨진 기록들을 따라가며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안시성을 지킨 남자
“황제(당 태종)가 백암성에서 이기고 이세적(당 태종의 심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병력이 정예이며,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막리지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 안시성주가 성에 올라 절을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고수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고 격려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삼국사기』가 전하는 안시성주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안시성주’라고만 나올 뿐 이름은 물론 출생지나 생몰연도를 비롯해 그가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단서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그렇다고 김부식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안시성 전투를 다룬 중국 측 사서에도 유독 성주에 대한 정보는 없으니까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1145년은 고구려가 멸망(668년)하고도 무려 5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기록과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부식도 안타까웠는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당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다. 병력을 운용함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
 
삼국사기. [중앙포토]
 
결국 의존할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 외에 『신당서』에 남겨진 당 태종의 언급(“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지세가 험하고 무리들이 사나워 막리지(연개소문)가 공격하였지만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안시성은 그대로 두자”) 뿐입니다. 이를 통해 안시성주를 떠올려 보면 ①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참하지 않았고, 군사 충돌까지 벌일 정도로 갈등 관계였으며 ②당 태종이 전투를 피하려고 했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③사나운 무리들을 통솔할 수 있는 리더십을 인정받았던 인물인 듯합니다.
 

■ 그러면 안시성주는 왜 양만춘으로 알려졌을까요.

 

「 '양만춘'이라는 석 자가 처음 등장하는 건 조선 선조 때입니다. 윤근수가 쓴 『월정만필』에는 그가 임진왜란 때 만난 명나라 장수의 말을 빌려 『당서연의』라는 중국 책에 안시성주가 ‘양만춘’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이후 송준길, 박지원 등 학자들이 이를 받아쓰면서 ‘안시성주=양만춘’으로 굳어졌죠. 그런데 『당서연의』는 명나라 시대 출간된 소설입니다. 학계에선 양만춘은 작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실제로 고구려 주요 인물 중 양(梁)씨 성을 쓰는 인물은 없기도 했습니다.


안시성을 버린 연개소문?
당나라 측은 속전속결로 진격했습니다. 645년 3월 말 고구려 국경에 진입한 뒤 불과 한 달 반 만에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 고구려의 주요 거점을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다음 목표는 안시성이었죠.
이에 연개소문은 6월 21일 북부 욕살(고구려의 지방 장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 군사를 맡겨 안시성 구원에 나서게 합니다. 안시성마저 무너지면 평양성까지는 오골성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인데, 이곳은 전력이 약했습니다. 연개소문으로선 얄궂게도 정적과도 같은 안시성 세력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당 태종의 진격로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 『資治通鑑』 권198, 貞觀 19년 8·12월조 『考異』의 「實錄」 자료와 관련 하여』에서 인용]
 

6월 23일 안시성 40리 앞 지점에서 고구려와 당의 정예군 25만명이 뒤엉켜 훗날 주필산 전투로 불리는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습니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고구려군은 당 태종의 계략에 빠져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피가 흘러 내가 넘쳐 푸른 물결이 잠깐 사이에 붉게 물들었다. 목을 친 머리가 무덤이 되어 머리뼈로 큰 산을 만들었다." (『전당문(全唐文)』, 7권)

군을 이끌었던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의 길잡이로 전락합니다. “연수와 혜진이 무리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청하니…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주필산 전투 상황. 주필산 전투는 평원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당 태종이 고구려군을 골짜기로 유인한 뒤 북서쪽에 매복한 장손무기가 고구려의 측면을 쳤다.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 『資治通鑑』 권198, 貞觀 19년 8·12월조 『考異』의 「實錄」 자료와 관련 하여』에서 인용]
 

주필산 전투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15만명은 평양성 수비군을 제외한 거의 전 병력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제아무리 군사 강국이라도 더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 태종조차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가 나라를 들어 존망을 걸고 왔으나 (내가) 한 번 깃발 들어 패배하니 천우가 나에게 있다"고 기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정도였으니까요. 누가 봐도 고구려는 풍전등화의 상태였고 안시성은 고립무원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6월 말 안시성 앞에 진주한 당나라 군대가 8월 초순까지 약 40여일간 공격하지 않은 것이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영화 '안시성' [사진=NEW]
 
『삼국사기』엔 없지만, 송나라 때 사마광이 집필한 역사서 『자치통감』에는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 측 움직임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 태종이 주필진에서 고구려 중앙군을 대파했다. 이에 막리지(연개소문)는 말갈인 사절을 설연타에 몰래 파견했다.”
이것은 안시성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한 수가 됩니다.


제3의 변수-초원의 강자 설연타
동아시아 역사를 이해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존재입니다. 중원-북방 민족-한반도의 삼각관계는 청나라 때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는 북방 민족이 황하 이북을 장악한 5호 16국 시대입니다. 한족과 북방민족이 샅바 싸움을 벌이는 동안 고구려는 만주 일대로 힘을 키울 수가 있었던 것이죠. 반대로 한나라가 흉노를 물리쳤을 때는 창끝을 한반도로 돌려 고조선이 멸망했습니다.
북방 세력도 중원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려 했습니다. 흔히 ‘고구려=군사 강국’을 떠올리지만 실은 고구려의 흥망은 돌궐, 거란, 철륵 같은 북방 세력을 다루는 외교술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3세기 칭기즈칸 군대의 기마 전술을 재현한 몽골군인들이 20일 세렝게의 초원을 질주하고 있다. [세렝게=강병철 기자]
 
당 태종이 요동으로 향했을 무렵 몽골 고원에는 설연타(薛延陀)라는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강대국은 아니지만, 당나라 변방을 괴롭힐 정도의 힘은 갖춘 세력이었습니다. 이 무렵 설연타의 지도자는 진주가한(眞珠可汗)이었는데 당 태종과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당 태종이 그를 포섭하려고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가 지키지 않았던 탓이죠.
진주가한은 이 때문에 낭패를 입었습니다. 폐물 명목으로 말 5만 마리ㆍ소와 낙타 1만 마리ㆍ양 10만 마리를 각 부족에게 거둬들인 뒤 당 태종에게 보냈는데 일방적 혼인 취소로 큰 경제적 손실을 본 것이죠. 리더로서 위신도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몽골 남부 지역의 유목민들이 모터펌프로 퍼올린 물을 양과 염소에게 주기 위해 호스를 끌어당기고 있다. [오문고비=김경빈 기자]
 
다시 『자치통감』의 기록입니다. “연개소문이 보낸 말갈 사절은 거대한 이익(厚利)을 조건으로 진주가한에게 당을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혼인 사기’로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본 진주가한에게 ‘당나라의 주요 병력은 안시성에 집중되어 있으니 지금 당나라 본토를 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지난번 입은 손해도 우리가 갚아줄 수 있다’는 식으로 꼬드긴 것이죠.
하지만 설득이 쉽진 않았습니다. 당 태종도 설연타의 기습에 대비해 고구려 원정을 떠나며 이 일대에 병력을 배치한 데다 진주가한은 와병 중이었기 때문이죠.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그런데 연개소문이 보낸 이 말갈인 사신의 수완이 꽤 좋았던 모양입니다. 와병 중이던 진주가한이 마지막 기력을 다해 움직였는지, 아니면 차기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그의 두 아들이 왕위계승전에 필요한 자금을 노렸던 건지 설연타 측은 7월 중순경 수만여명의 병력으로 당나라 북쪽 국경을 침공합니다.
졸지에 두 개의 전선 사이에 놓인 당 태종은 마음이 급해졌죠. 황급히 추가로 군사를 보내 설연타의 군대를 막게 했습니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눈앞에 두고도 40여일간 움직이지 않은, 아니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당 태종의 진격로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 『資治通鑑』 권198, 貞觀 19년 8·12월조 『考異』의 「實錄」 자료와 관련 하여』에서 인용]
 


안시성을 구원한 40일
긴박했던 645년 여름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보면 이렇습니다. 연개소문 15만명의 안시성 구원군 파견(6월 21일)→주필산 전투 패배(6월 23일)→연개소문이 설연타에 사신 파견(6월 23일 직후)→설연타의 당 공격(7월)→당 태종의 안시성 공격 개시(8월 10일)

설연타 덕분에 안시성은 40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훗날 전개된 전투를 보면 안시성주는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사들도 충원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시성 전투 중반 “인근 건안성과 신성에 10만명의 고구려 병사가 지키고 있다”는 당나라 측 발언이 나오는데, 주필산 전투에서 생존한 패잔병 상당수가 전선에 다시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설연타의 침공을 격퇴한 당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안시성주와 병사들의 필사적인 방어에 막힙니다. 성벽보다 높은 토성(土城)을 만들어 시도한 공격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당 태종은 결국 말머리를 돌립니다. 때는 9월 18일, 양력으로는 10월 말입니다. 만주는 이미 초겨울에 접어들었습니다. 포위군에게는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죠. 당 태종으로선 7월을 안시성에 쏟지 못한 것이 아쉬웠을 대목입니다. (하나 첨언하면 철수하던 당 태종이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기록은 어떤 사서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게다가 설연타에서 다시 불온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설연타에선 진주가한이 죽자마자 둘째 아들 발작(拔灼)이 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호전적이었던 발작은 내부 혼란을 빠르게 수습한 뒤 재차 당을 공격했습니다. 어쩌면 연개소문 측은 발작의 왕위 계승을 돕는 '베팅'을 했을지도 모르죠.
안시성에서 철수하던 당 태종도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듬해 2월까지 설연타 토벌에 나섭니다. 배후에 있는 설연타 세력을 뿌리 뽑아야 고구려 정벌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은 646년 설연타 세력을 제거한 뒤 647·648년 고구려를 다시 침공합니다.
참고로 설연타의 첫 공격 시기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른데 일부 학자는 7월이 아니라 9월, 그러니까 안시성 철수 직전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든 주요 전선이 안시성에서 몽골로 옮겨졌으니 연개소문의 외교 공작은 성공을 거둔 것이죠.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안시성을 지킨 진짜 주인공
첫머리에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할 차례입니다.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이름으로 남은 안시성주, 그와 함께 성을 지킨 병사들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지요. 적대 세력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15만명의 군대를 기꺼이 보내고, 군사력이 바닥나자 기민한 외교술로 대처한 연개소문도 주인공의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사서에 그저 ‘말갈인’으로만 표기된 연개소문의 사신입니다. 말갈인은 고구려 사회에서 2등 국민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말갈인에게 고구려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신뢰했거나 그가 설연타의 사정에 매우 정통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설연타를 전선(戰線)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안시성주처럼 이름을 남기지 않은 그는 안시성 전투의 숨겨진 '언성(unsung) 히어로'였습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한때 칼을 겨눈 정적이었지만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 기꺼이 손잡은 정치가, 주력군이 붕괴된 상황 속에서도 지도층을 믿고 분란 없이 성을 사수한 군인과 주민, 어려운 여건에서도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외교관… 안시성의 80일은 고구려라는 사회가 어떻게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해 나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무대였습니다.
중원 왕조의 갖은 위협 속에서도 700년간 만주에서 존속했던 고구려의 저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고구려를 그리워한다면 그 시선은 만주 땅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저력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 설연타 공작과 당 태종의 안시성 撤軍- 『資治通鑑』 권198, 貞觀 19년 8·12월조 『考異』의 「實錄」 자료와 관련하여』·『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김용만 『고구려 후기 고구려, 수ㆍ당, 북방 제국의 대립관계』, 김락기 『17~19세기 고구려 안시성 인식과 ‘城上拜’-「연행록」과 「문집」을 중심으로』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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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입력 2007-05-01 14:14 

 

고구려, 발해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구려 말 최고 권력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주목받고 있다. TV드라마에선 연개소문이 온갖 간난을 딛고 일어선 영웅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오로지 나라의 안위만 걱정한 충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은 연개소문에 대해 결코 온정적이지 않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틀어쥠으로써 결국 고구려의 귀족 연립체제를 와해시킨 주역으로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고구려의 멸망으로 연결됐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에 수록된, 전미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의 글 ‘연개소문의 집권과 정권의 한계’는 연개소문에 대한 기존 사학계의 시각을 잘 정리하고 있다. 이를 요약, 소개한다.

◆ 연개소문의 배경과 정변 = 연개소문 가문은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세도가였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인 자유(子遊)와 아버지 태조(太祚)는 둘 다 막리지를 지냈다. 나아가 아버지 태조는 당시 귀족들의 최고 수장 격인 대대로를 역임했다. 하지만 연개소문 가문의 독주는 다른 귀족들에게 결코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한 가문의 세력이 다른 귀족들을 누를 만큼 커지는 것은 다른 귀족들에게는 불안과 위협의 요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대대로였던 연태조가 죽자 그것을 기회로 연개소문 가문을 누르려고 했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귀족들에게 간청, 겨우 아버지의 지위를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자 반대파 귀족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고, 여기에 영류왕까지 가세했다. 영류왕 25년(서기 642년)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발령하고, 연개소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자신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눈치 챈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군사들을 사열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을 불러 모은 뒤 정변을 일으켰다.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참석한 귀족 100여명을 죽이고 다시 왕궁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죽인 후 영류왕의 아우인 태양왕의 아들 보장왕을 왕으로 세웠다.

◆ 연개소문 정권의 성격 = 정변 직후 연개소문이 최고위직인 대대로에 취임하지 못하고 막리지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적어도 집권 초기 연개소문 정권이 귀족 연립체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막리지 연개소문 아래에서 대대로는 물론 국왕도 무력한 존재였다. 집권 초기 연개소문 정권의 성격은 귀족 연립체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으나, 연개소문 개인과 그 일가에 권력을 집중화시키는 작업이 서서히 진행됐다. 대대로를 무력화하고 막리지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 연개소문은 점차 정치·군사적 권한은 물론 국정 전반을 장악해 나갔다.

연개소문은 대당 정책에 있어 집권 초기부터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지는 않았다. 집권 직후 연개소문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도교를 청하기도 하는 등 당과의 대립을 피해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고구려를 침략할 구실만 찾고 있던 당나라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연개소문을 비난했다. 당은 또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격파하고 돌아온 연개소문에게 다시 신라를 치면 출병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연개소문으로서는 당의 침략이 이미 결정되고, 그 침략의 명분이 자신에게 정면으로 맞춰져 있는 이상 당과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와 평가 = 고구려가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멸망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귀족 세력들의 분열이다. 이는 귀족 연립체제를 부정하고 모든 정치권력을 자신의 일가에만 집중시킨 연개소문의 독재체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아들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 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급속히 분열됐다. 연개소문의 독재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귀족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는 자생적인 통로는 사라지고, 귀족 세력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당과의 전쟁을 성공으로 이끈 영웅으로 보는가 하면,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서 조선 후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중세기 사서에서 보이는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부정일변도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근대에 들어서면서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연개소문을 당에 대해 민족적, 자주적 자세를 견지한 인물로 치켜세웠다. 오늘날에도 연개소문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독재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과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우리 민족사상 고구려라는 대제국을 사라지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꼬리표는 뗄 수 없을 것이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3부)입니다만, 고구려에는 정변이 많아 워낙 장문이 되므로 추가로 몇 장으로 나누어 연재되겠습니다.
(1부)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허구의 기자조선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3부) 고구려의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

(3부 1장)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의 기록은 옳은가? 

지금까지 (1부)와 (2부)에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때 일어난 쿠데타를 조명함으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고구려 때 발생한 쿠데타에서는 나라가 바꾸지 않고 황제만 바뀌는 정변이 몇 차례 있었다.

고주몽에 대한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다른 기록

북부여 6대 고모수단군의 사위가 되었다가 B.C 58년 23세의 나이로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주몽은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말하는 고구려인 것이다. 즉 고주몽으로 인해 북부여가 자연스럽게 고구려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고주몽의 후손인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분명히 고주몽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고 새겨 놓았으며, 17세손을 언급함으로서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내려왔음을 확실히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주몽과 북부여와의 관련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년도와 나이를 B.C 37년에 22세의 나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단칸셋방에서 시작하여 자수성가하는 것으로 기록하면서도, “혹은 주몽이 졸본부여에 당도하니 마침 왕이 아들이 없다가 주몽을 보고서 범상한 인물임을 알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함으로서 <한단고기>의 내용이 틀리지 않음을 시사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하였으며, 모든 고구려의 왕들이 자체 년호를 썼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영락’이라는 년호와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장수열제(장수왕)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어 <삼국사기>의 년호에 대한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한단고기>에는 고주몽이 다물(多勿)이라는 년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 2년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땅을 다물군(多勿郡)으로 만들고 송양을 봉하여 지주를 삼았다. 고구려 말에 구토를 회복하는 일을 다물이라 한다.”고만 기록하였다.

그런데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는 추모대제(고주몽) 원년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고 기록함으로서 고주몽이 북부여 시절에는 다물(多勿)이라는 년호를, 고구려 시절에는 동명(東明)이라는 년호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작명함으로서 고구려의 년호 사용을 교묘히 숨겼던 것으로 보인다.  

시조 추모대제(고주몽)의 의문의 죽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19년(B.C 19년) 여름 4월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은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다르면서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17년 해소(유화와 금와의 아들)가 예후와 유리를 보내주었다. 19년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4월 임금께서 서도(西都)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仙記)엔 “임금이 보위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고, 9월에 용을 타고 상천하였으며 옥 채찍을 버려둔 곳이 용산릉(龍山陵)이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또 사신(史臣)이 논하길. “동명은 세상에 다시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중략)... 나라를 창업하는 일이 급하였기에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인 추모대제(고주몽)와 유리태자 사이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가 오자마자 태자가 되고, 곧바로 추모대제가 승하하고, 찬자가 논하길 추모가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뭔가 당시 조선왕조 때의 왕자의 난과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고구려사초.략>를 번역한 김성겸선생은 추모대제의 능이 있던 용산(龍山)을 현재 북경 서남쪽 방산(房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龍(용)-->龐(방)-->房(방)으로 은폐시켰다고 보면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중재선생은 산동성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용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산동성 용산은 한자는 같으나 백제의 영역이고, 유리묘(琉璃廟)가 북경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용산은 북경 근처가 유력하다 하겠다.

▲   북경 북쪽에 유리왕의 사당인 유리묘가 있고, 북경 서남쪽에 방산구를 흐르는 유리하가 있다.
▲  현 주일대사인 권철현의원이 답사한 유리묘가 있던 자리. 문화혁명 때 다 파괴가 되었다고 한다.

 


5세 폭군 모본제의 죽음.
모본제는 대무신제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케 하다가, 요동태수 채동이 신의와 은혜로서 대하므로 다시 한과 화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은 달리 기록하고 있다. 모본왕 2년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의 습격 기사를 대무신제 22년(A.D 49년)으로 적고 있으며,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공략하고 그곳의 보물.노리개.예쁜 계집.비단.진미 등 다수를 빼앗았다. 년 중 내내 이런 일이 잦았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크게 두려워하며 매년 조공하기로 약속하며 화친을 구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일어난 년도는 같으나 모본왕의 업적이 아니라 대무신왕의 재위 중이란 기록이다. 이는 두 사서의 역대 년표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두 사서의 년표를 서로 비교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삼  국 사  기

      고  구  려  사  초  .략

 시조

동명성왕

  BC37 ~ BC19

 19년

 시조

추모대제

  BC37 ~ BC19

  19년

  2세

유리왕

  BC19 ~ AD18

 37년

  2세

광명대제

  BC19 ~ AD28

  47년

  3세

대무신왕

  AD18 ~ 44

  27년

  3세

대무신제

  AD28 ~ 64

  37년

  4세

민중왕

     44 ~ 48

  5년

  4세

민중제

     64 ~ 68

   5년

  5세

모본왕

     48 ~ 53

  6년

  5세

모본제

     68 ~ 73

   6년

  6세

대조대왕

     53 ~ 146

 94년

  6세

신명선제

     68 ~ 112

  40년

 

 

 

 

  7세

태조황제

    112 ~ 146

  35년



* (주) 명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왕조와 일제의 손을 많이 탄 <삼국사기>에는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대조대왕(大祖大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 태(太)를 큰 대(大)로 점까지 없애면서 역사왜곡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이 역겹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대조대왕을 태조대왕이라 적는다. 

<삼국사기>보다 <고구려사초.략>의 광명대제(유리왕)가 +10년, 대무신제가 +10년이고, 대조대왕이 신명선제와 태조황제로 나뉘면서 -20년이 되어 있다. 태조황제 이후의 년표는 두 사서가 일치한다. 왜 위 두 년표가 서로 다른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모르겠으나,

여하튼 모본제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습격은 분명 모본제의 시대가 아닐 것으로 생각되며, <삼국사기> 기록대로 대조대왕이 7세에 즉위하여 치세가 94년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두 왕으로 나뉘는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모본왕(또는 대무신제)이 습격한 곳은 하북성과 태원까지 내려갔으니 산서성 전체이다.



그리고 요동태수 채동과 화친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 두 사서가 상당히 다르다. <삼국사기>의 위 기록은 뭔가 어패가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요동태수는 서로 전쟁을 한 사이인데 갑자기 신의와 은혜로서 대하므로 화친했다는 영국신사(紳士 ?)와 같은 기록은 뭔가 이상한 기록으로 보여 진다. 이것도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여하튼 모본제는 즉위하자마자 대무신제와 민중제가 쓰던 연호인 ‘대무(大武)’를 ‘모본(慕本)’으로 바꾼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이 더하여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으며, 사람이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이고,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을 때는 활을 당겨 쏘았다. 6년 겨울 11월 두로(杜魯)가 왕을 죽였다”고 기록하면서 간단히 그 시해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가 동생인 민중제에게 보위를 전하면서 아들인 모본을 태자로 삼는 과정과 모본제가 제위에 오르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자 시절부터 황음했던 모본은 재위 중에도 황음을 계속했으며, 사치했고 술 마시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사람 죽이기를 예사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궁중의 작은 황제로 불렸던 두로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두로는 낙랑국왕이었던 최리의 딸 니만(尼滿)의 말을 듣고는 모본제를 시역할 마음을 먹는다. 두로는 모본을 죽인 후 스스로 보위에 오르려 했다가 결국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모본제의 죽음은 두로에 의한 실패한 쿠데타의 작품이었다. 결국 황제를 시해한 두로는 자결하고 대무신제의 서자가 즉위하니 이분이 <삼국사기> 기록에 없는 신명선제(神明仙帝)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모본제가 시해 당하고 태조대왕이 즉위하는데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다.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고, 모본왕이 죽고 태자는 불초하여 사직을 맡을 수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태조대왕을 맞아들여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나이 7세인 까닭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는 기록이다.

즉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손자로 왕손이기는 하지만, 유리왕의 아들인 대무신왕의 아들들도 분명 여럿 있었고 게다가 민중제의 아들도 있었을텐데 이런 왕위 계승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대무신왕은 태자인 모본이 어리므로 동생인 민중왕에게 전위하며 모본을 태자로 세운다. 그런 모본이 죽었다면 과연 다음 보위는 누구에게 가야 상식적으로 마땅하겠는가?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비록 모본왕이 잔인한 폭군이긴 했으나 한의 요동을 공격해 승리하는 등 특별한 실정(失政)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조금 죽였다는 이유로 두로에게 시해 당했는데, 모본왕의 태자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가 계승 안되고 할아버지 유리왕의 왕손을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법도상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신명선제는 휘가 재사(再思)로 대무신제의 별자(別子=서자)이다. 친모는 갈사태후이고, 태후의 부친은 해소로 유화부인과 소생 금와(동부여 2세 왕)의 아들이다. 동복형은 호동(好童)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두 기록이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에서는 태조대왕을 재사(再思)의 아들이라 했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신명선제가 재사의 아들이라 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왕통 승계의 원칙으로 보아 재사의 아들은 태조대왕이 아닌 신명선제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2명의 선대왕(대무신, 민중)이 지나갔고 모본왕까지 직계왕통이 내려왔는데 유리왕의 손자인 방계 혈통의 왕손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조선왕조로 치면 <삼국사기>의 태조대왕은 XX대군(大君)도 아닌 그냥 XX군(君)이다. 대군이 있는데 어떻게 XX군이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신명선제는 년호를 신명(神明)으로 하여 40년 동안이나 제위에 있었던 엄연한 황제이거늘 <삼국사기>에는 왜 생략이 되어 있고 대신 태조대왕이 94년간이나 재위했다고 되어있는지 그 이유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신명선제 29년(AD 101년) “신라가 월성(月城)으로 이사했다. 월성의 둘레는 1,023보가 된다고 했다.”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천도한 적이 없이 금성(金城) 한군데에서 천년간 왕업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식민사학계는 그 금성을 현 경북 경주라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 (BC 37년) 경성(京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 

그런데 38년 기록에 보면,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과 더불어 살았다.”고 하면서 식민사학계는 마한(백제)은 충청.전라 지역이고 신라는 경상도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진나라의 상징인 만리장성은 어디까지 왔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시황의 장성은 황하를 넘지 않았으며, 위의 이론대로라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경상도까지 왔다는 말이다.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왕 기준이 남하한 곳인 마한 역시 서화 동쪽임을 알 수 있다.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라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경상도까지 왔다는 말인데 이걸 믿으란 말인가?  


따라서 신라의 수도인 금성은 진시황의 장성이 끝나는 곳에서 동쪽 마한 근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신라가 AD 101년 월성으로 천도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월성은 안휘성 합비 근처로 보여진다.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에서 보듯이 양자강 중류가 최적관측지로 나타나고 있다.


태조황제의 죽음과 명림답부에 의한 차대왕의 죽음
차대왕(A.D146 ~ 165년)은 20년 동안 제위에 있었으나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는 차대왕을 고구려 7세왕으로 적고 있는데 반해, <고구려사초.략>은 차대왕을 폐주(廢主)로 적으면서 아예 역대 왕통에 넣지 않고 있다. 즉 7세 태조황제--> 폐주 차대제 --> 8세 신대제로 적고 있다. 어떤 황제이기에 역대 왕통에서 빼버렸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차대제는 휘는 수성(遂成)으로 태조황제의 동복아우인 것은 두 사서가 서로 기록이 같은데,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태조대왕의 추앙을 받아 76세에 즉위하였다. 용장(勇壯)하고 위엄이 있으나 인자심(仁慈心)은 적었다.”고 젊잖게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략>은 “태조를 위협하여 양위를 받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군권을 장악하고 세운 공도 많았지만 성품은 음란하고 포악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차대왕 수성은 형인 태조대왕 때 맹활약을 한다. 수성은 요동(하북성)을 쳐서 빼앗는 등 혁혁한 무공을 세우자 태조대왕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통섭케 하였다. 주위에서 수성더러 늙기 전에 왕이 되라고 부추기는 세력이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를 신하로부터 전해들은 태조대왕은 오히려 자신이 늙음을 이유로 양위를 결심하게 된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수성은 왕이 되어서는 2년(147년) 3월 태조대왕의 가까운 신하를 베어 죽였다. 3년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이니 그 아우 막덕이 두려워하며 목메어 죽였다. 가을 7월 흰 여우에 대한 길흉을 설명하는 무사(巫士)를 죽였다. 그리고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간신들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20년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죽으니 향년 10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이 견디어 내지 못함을 이유로 차대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신대왕(新大王)이 즉위하는데 태조대왕의 막내아우로 당초 차대왕이 무도하여 백성이 따르지 않으므로 왕제(王弟)는 화란(禍亂)을 피하여 산 속으로 도망하였다가 76세에 왕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태조대왕이 109세에 죽을 때 신대왕이 76세의 나이로 즉위하는데 태조대왕의 동복아우라는 것이다. 33살의 차이가 있는데 동복아우라는 기록은 솔직히 믿기 어렵다. 과연 태조대왕의 모후는 도대체 신대왕을 몇 살에 낳은 것인가?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다.

아무리 빨라도 50살이 다 되거나 넘어서 신대왕을 낳았다는 얘기인데 이걸 믿으려면 믿을 수도 있으나 솔직히 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에는 신대제가 태조황제의 별자(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삼국사기>가 정사서가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차대제 수성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태조황제 10년(121년) 한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수성이 등후(鄧后)의 나이를 묻자 사신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수성이 이르길

“지난날 여후(한고조 유방의 처)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고 모돈(흉노의 선우)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등만(후한의 5세 상제의 처)이 내게 허리띠를 풀고 어육(魚肉)이 되게 하지 않는가? 호(후한의 6세 공종)의 애미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후한의 수도)은 잿더미가 될 것이야!”

하였더니 사신들이 가만히 있자 태조황제가 이 말을 듣고 수성을 꾸짖자 수성이 아뢰길“저는 한나라를 초개와 같이 여기는데, 제가 어찌 그들이 두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심하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솔직히 참으로 보기에 통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덕은 부족하나 용맹과 기개 하나는 천하제일이었던 수성이었다. 이후 수성은 대추가가 되어 병권을 위임받는다.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주위에서 황제가 늙어도 죽지 않으니 쿠데타를 권하게 되고 수성은 결행하려 한다. 이를 알게 된 황제는 수성의 위협으로  79세에 양위하고 물러났다가, 차대제 20년(165년) 태조황제는 전처인 상후(태조의 처였으나 수성에게 준다)가 위로하러 온 자리에서 마지막 통정을 나누고 98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태조황제가 보위에서 물러나 다음 황제의 재위 20년 동안이나 살았던 것으로 보아, 태조가 수성(차대)에게 보위를 전달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정상적인 양위를 거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대로 동생인 수성에게 위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쿠데타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수성에 의한 보위찬탈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차대왕이 시해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대제가 상후에게 “백고(후에 신대제로 상후의 아들)가 누구 자식이오?”라 물었고, 상후가 거짓으로 대답을 하자 차대제가 상후를 윽박지른다. 위급함을 느낀 상후는 명림답부에게 연통하여 도움을 청해놓고 차대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죽지 않고 오히려 갈래창을 집어 들고 상후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제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였으며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연후에 상후의 아들인 백고를 맞아 즉위시키다.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자신이 직접 보위에 오르는 역성혁명을 하지 않고 신대왕을 추대하여 황제로 세운다. 명림답부는 군권을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어 명목상 황제는 아니었으나 실질적인 황제로서 그리고 명재상으로 그 명성을 남긴다.

또한 명림답부는 신대제 10년 한나라 대군이 쳐들어오자 이를 좌원에서 대파하여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좌원대첩(坐原大捷)을 남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나라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는 이 좌원대첩을 잘 알지 못한다. 식민사학계가 안 가르쳤기 때문이다.

명림답부는 신대제와 같은 해인 15년(179년)에 죽는다. <삼국사기>에서는 향년 113세라 하였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52세라 적고 있어 차이가 난다. 이건 명백한 <삼국사기>의 오기라고 본다. 어떻게 명림답부가 100살이 가까운 나이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3부 2장에 계속됩니다)  

 

 

 

기사입력 2008/10/24 [13:34]

고구려 천리장성과 연개소문의 쿠데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북경북 ~ 산해관 장성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것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본 글은 아래 우리 민족사의 쿠데타 3부작의 (3부) “고구려의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의 기록은?”의  제3부-2장입니다.

명립답부의 쿠데타에 의해 차대제가 시해 당하고, 8세 신대제가 즉위하였으나 조정의 실권은 모후인 상태후와 명립답부가 쥐게 되었다. 한나라 대군이 침입했을 때 말 한필도 살려보내지 않은 좌원대첩의 명재상 명립답부와 신대제는 같은 해에 죽는다. 두 사람은 참으로 인연이 많기도 한 것 같다.

신대제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9대 고국천제가 즉위한다. 6년(A.D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오자, 임금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여 역시 좌원에서 크게 이겨 목 벤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이를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 한다고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략>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국천제는 을파소라는 명재상을 국상(國相)으로 등용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 죽려지인을 주어서 부도한 이들을 즉석에서 주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빈민을 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훌륭한 군주였으나 주색에 빠져 끝을 좋게 맺지 못하고 춘추 43세에 승하했다 한다. 


 
10대 산상제의 등극과 발기의 실패한 역쿠데타

고국천제가 승하하자 황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고국천제의 부인인 우후(于后)가 국상이 났음을 숨기고, 예전부터 통정하던 연우(신대제의 서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가짜 조서로써 제위에 세우고 국상이 났음을 알리게 된다. 여기에 반발하는 측이 있었으니 바로 고국천제의 동복아우인 발기(發岐)였다. 즉 황위가 서자 출신의 배다른 동생 산상제에게 돌아가자 적출(嫡出)인 형 발기가 반발을 하고 나섰다.

이에 국상 을파소가 산상제를 받들고 발기를 치자, 발기는 두눌 지방으로 도망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공손찬은 발기를 돕는 척 하며 고구려의 서쪽인 서안평(西安平) 등을 쳐서 빼앗는다. 나중에 요동태수에게 속은 것을 안 발기는 울분으로 등창이 날 지경이었다.

발기는 사병(私兵) 300인을 거느리고 범궐(犯闕)하나 붙잡히게 되고, 산상제는 어리석고 무모하였던 것이라며 발기의 죄를 면하여 주었으나, 발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두눌의 땅으로 들어가 칭제하고는 공손탁과 상통하게 된다. 그러자 산상제가 군대를  보내 두눌을 쳐서 빼앗으니 마침내 발기는 패하고 자결하고 만다고 <고구려사초.략>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위의 기록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 우씨가 이를 비밀에 부치고 밤에 아우인 발기의 집을 찾아가서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모르고 대답하기를 “하늘의 운수는 정해져 있으니 함부로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어찌 예라 할 수 있으리까?”하니 황후가 무안해하며 나와 연우의 집으로 찾아간다.

연우가 의관을 정제하며 문에 나와 맞으며 술을 대접하니 “대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집안 중 어른이라 당연히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나더러 딴 마음이 있다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시숙을 보러 온 것이오.”말한다. 연우는 밤에 불상사가 있을 지도 모르니 궁중까지 데려다 달라는 우후의 청을 응락하고 따라가니 왕후가 손을 잡고 들어가고, 이튿날 거짓으로 선왕의 유명이라 꾸미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세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기가 이를 듣고 노해 군사를 내어 왕궁을 3일간이나 포위했음에도 백성들이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으니 일이 글렀음을 알고 처자를 버리고 요동으로 도망친다.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3만의 군사를 빌려 고구려로 쳐들어오나 아우 계수에게 패해 배천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왕이 본시 우씨로 인해 말미암아 위를 얻었기 때문에 다시 장가를 들지 아니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후사정으로 보아 이 내용은 <고구려사초.략>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우씨가 후계 서열 0순위인 발기에게는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연우에게는 왕이 죽었음을 알렸다는 것과 둘이 밤에 손을 잡고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다. 서로 연인 사이가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인 것이다. 중차대한 황위를 전함에 있어 이렇듯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다.

따라서 필자는 고국천제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4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하한 것은 필시 연인 관계인 우후와 연우가 짜고 뭔가 독살 음모를 완벽하게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멀쩡하던 고국천제의 죽음과 산상제의 등극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게다가 고국천왕의 등극에서도 두 사서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고국천제는 신대제의 둘째 아들인 것은 서로 기록이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발기를 고국천왕의 친형’으로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현(玄)태자가 장자이나 선하기는 해도 용감하지 못하여 부황이 고국천제를 후사로 삼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고국천왕이 죽자 우씨가 왕의 아우 발기의 집을 찾아갔고, 발기가 궁궐을 포위하고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것이 예이거늘 너는 차서를 무시하고 마구 빼앗는 큰 죄를 범하였다.”고 적었다. 이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고국천왕의 등극 과정에서는 발기가 형으로 기록되었다가, 고국천왕이 죽은 다음에는 발기가 동생이 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발기가 일으킨 내란(반란)으로 인해 고구려는 서쪽 땅인 서안평 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잃어버린 서안평을 산상제 9년(205년)에 다시 되찾게 된다. 서안평은 우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으로 이 서안평 일대를 한나라와 고구려의 경계로 보면 될 것이다.

당시 위나라와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고구려가 서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점이요, 위나라가 고구려로 북동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이 서안평을 현 압록강변의 단동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나,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서안평은 석문(현 석가장) 부근인 것이다. 


산상제는 형수인 우후와 혼인하여 부부가 된다. 예로부터 고구려에는 증모처수(烝母妻嫂)라는 제도가 있어 형수인 우후와 시동생인 산상제의 혼인은 평범한 일이었다. 증모처수란 제도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친모 이외의 서모나 형수/계수를 처로 거두는 것으로 북방유목민족의 고유한 풍습이었다.

단군의 후손인 선비족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 선비는 조선비왕(朝鮮卑王)의 준말이다. 선비족으로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 문제가 아들인 양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양제는 아버지의 후궁인 한국부인을 취한다. 역사기록에서는 이를 증(烝)이라 한다. 증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인 당태종 이세민의 궁녀였던 무미랑(후에 측천무후)을 좋아했던 당고종은 태종이 죽자 출궁하여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무미랑을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는다. 무미랑은 나중에 황후가 되어서는 간질병이 있었던 당고종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결한다. 황제 아닌 황제로 군림하던 무측천은 황제인 자신의 두 아들(중종과 예종)을 끌어내리고 나중에는 직접 중국역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주(周)나라의 일대 여황제가 된다.  
 


참고로 산상제의 아들인 11대 동천대왕이 승하하자 장자인 중천대제가 즉위한다. 그러자 동생 예물이 “선제가 독살 당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면서 병사를 일으켜 범궐하였으나 결국은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실패한 쿠데타였다.

14대 봉상제의 등극과 창조리의 쿠데타

서천제가 53세에 갑자기 죽자 맏아들인 치갈태자가 봉상제로 즉위한다. 태자 시절부터 성품이 교만하고 색을 밝혔으며 시기하는 것도 많았고 매우 잔인하여, 선제(서천제)는 자질이 모자라는 태자에게 나라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는데 서천제가 갑자기 죽자 어머니 우후가 거짓 조서로 봉상제를 세웠다.

또한 안국군에게 병권을 빼앗아 우후의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탄식하며 한숨지었다고 <고구려사초.략>은 기록하고 있다. 안국군은 봉상제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자결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자결이 아니라 왕이 안국군이 숙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까닭으로 계획적으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에는 황태제인 아우 돌고를 죽인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 없이 죽었다 하여 애통해 했다. 돌고의 태자인 을불(乙弗 후에 미천제)은 탈출하여 도망간다. 봉상제는 을불을 사로잡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을불이 붙잡혀 함거에 실려 보내지자 백성들이 습격하여 풀어주는 일이 발생한다.

나라 안은 서리와 우박으로 곡물이 죽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궁궐 노역에 시달려 원성이 자자하였다. 백성들은 서로 뭉쳐서 도둑이 되는 세상이 되었고, 하늘에서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일어났다.

 
 
9년(300년) 8월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이 궁궐을 짓는 부역에 끌려갔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국상 창조리(倉助利)와 신하들이 이를 간해도 황제는 듣지 않았다. 창조리가 충심으로 간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국상이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 하는가? 다시 말이 없기를 바란다.”했다.

창조리는 임금이 마음을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염려되어 군신들과 더불어 을불을 맞아들여 황제로 세우고 봉상제를 행궁에 가두었더니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모본제와 차대제에 이은 세 번째 폐위였던 것이다.
 

미천제(을불)는 일찍부터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하는 등 세상을 유랑하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깨달았기에 황제로 등극해서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열고, 30만 수륙군을 양성해 고구려를 군사강국으로 키운다.

당시 중원은 한조, 선비, 흉노가 엉켜 5호 16국으로 나뉘어 서로 전쟁하기에 바빴기에 대륙의 진정한 강자는 고구려와 백제뿐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별다른 쿠데타(정변) 없이 한동안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어진다.


만고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한 쿠데타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26대 영양제가 죽고 27대 황제로 이복동생인 건무(建武 영류제)가 즉위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고조 이연은 영류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는, 고.수 전쟁 후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돌려 보내달라고 하여 찾아보았더니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양국 사이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 것이다. 


 
영류제는 형인 전 황제의 모든 정책을 폐기한다. 그리고는 당나라로부터 천존(天尊)의 상과 도교(道敎)의 법을 가지고 온 도사(道士)에게 노자(老子)와 도덕경을 강의하게 하고 백성들과 함께 들었다. 또한 당나라는 사람을 보내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을 묻고 위령제를 지냈으며 당시에 세웠던 경관(京觀 살수대첩 승전기념비)을 헐어 버렸다.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류제 14년(631년) 백성 수십만을 동원해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으로 부여성에서 동남으로 남해부(南海府) 바다에 이르기까지 1,000여리를 잇대니 무려 16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 하는데(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之海 千有餘里 凡十六年畢功: 구당서에는 동과 서를 바꿔 기록함으로서 우리 역사를 왜곡한다),

이 장성은 동단(東端)인 산해관 노룡두 (山海關 老龍頭)에서 시작해 북경 북쪽으로 이어지는 장성의 원본(오리지날)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이 천리장성이 아닌가 한다. 후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막기 위해 산해관부터 북경 북방으로 이어지는 장성을 개.보수를 하는데, 중국 사학자들은 연나라 장성을 개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과연 그럴까? (다음에 상세히 소개됩니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도교를 강의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하자고 왕께 청하였으나, 영류제는 오히려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고는 은밀하게 다른 대인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 소문을 듣고 탄식하며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여 대신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고자 하였다. 모두들 참석하자 연개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들 구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하니 측근들이 오는 대로 모두 잡아 죽이니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영류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송양으로 도망쳐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들을 모으려 했으나 한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다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고 <한단고기>는 적고 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열전>에는 영류왕의 죽임에 대해 달리 적고 있다. “그 길로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여 여러 동강을 내어 구렁텅이에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은 영류제의 조카인 장(藏)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고구려의 마지막 대왕(황제)인 보장제인 것이다. 


이렇듯 고구려에서는 몇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으나 역성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즉 황제는 바뀌었으나 나라가 바뀌지 않고 주몽의 후손인 고씨(高氏)가 제위(帝位)를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비록 황제는 되지 않았지만, 전권(全權)을 한 손에 틀어쥐고는 마치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세하면서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드는데 전념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쿠데타 뒤에는 오히려 정치가 안정되고 민심이 수습되며 더욱 강성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덕한 황제가 바뀌는 큰 정변 뒤에는 명림답부, 을파소, 연개소문과 같은 명재상이 있었던 것은 900년 고구려 사직의 크나큰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될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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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광]

 
 

입력 2016. 2. 12. 20:22

일본 땅에서 부활한 고구려 역사

유경훈 기자
 

[투어코리아] 기원전 1세기 동아시아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고구려의 역사가 일본 가나카와현과 사이타마 현에서 부활했다.


고래신사와 고마신사는 우수한 고구려 문화를 일본에 전하고 무사시(武葳) 지역을 개척하며 고구려 군민들을 사랑한 고구려 왕족 약광을 모신 곳으로, 그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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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현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0/06/19 [00:06]

日本 神이 된 고구려 보장태왕 子'약광':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연남생]

 

입력 : 2015.12.02 21:30 수정 : 2016.01.20 10:41

‘배신의 죄’…그를 위한 진혼곡, 누가 부르겠는가

중국 북망산에 묻힌 연남생 일가의 흔적을 찾아서

당에 고구려 넘긴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

그의 무덤은 초라했고, 묘지문은 ‘반역의 증언’이 됐다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거든 낙양성을 보라.(欲問古今興廢事 請君只看洛陽城)”

<자치통감>을 쓴 북송 사마광의 언급에서 읽을 수 있듯 뤄양(낙양·洛陽)은 ‘파란만장한’ 중국 역사의 축소판이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주나라(서주)가 기원전 770년 도읍을 옮겨옴으로써 뤄양의 우여곡절 역사가 시작된다. ‘동주(東周)’는 곧 제후들이 천자를 윽박지르며 다툰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출발이 심상치 않았던 탓일까. 13개 왕조의 도읍이 된 뤄양은 주로 격동기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웅변해준다. 동주-동한-위-서진-북위-후량-후당-후진 등 명멸한 왕조의 면면을 보라. 난세엔 영웅호걸이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삼국지>의 주인공들인 조조와 유비, 손권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묻혔는지 ‘뤄양엔 소가 누울 자리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높아 봐야 해발 300m에 불과한 북망산(北邙山)은 ‘망자의 천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살기 좋은)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에 살다가 북망산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꼽았다. 북망산이 2000㎞나 떨어진 곳에 있지만 우리네 여염의 뒷산처럼 친숙하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민요 ‘성주풀이’를 보라. 왜 우리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은 몇몇이며 절세가인은 몇몇이냐…’를 구슬프게 읊조리게 되었을까.

중국 뤄양(洛陽) 북망산 인근의 들판에 방치된 연남생 일가의 무덤들. 농가 가건물 뒤에 연남생의 증손자인 연비와 연남생, 그리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의 묘가 있다. 연남생 일가의 무덤이 이 근처였음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1920년대 발견됐지만 정확한 무덤의 위치는 2005년이 돼서야 확인됐다. 그러나 민족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쓴 연남생 일가의 무덤을 찾는 이는 없었다. 필자를 비롯한 강남문화원 답사단은 30분 정도 들판을 헤매다 겨우 무덤을 찾았다. 뤄양 | 이오봉 사진작가 제공

■처음 찾은 배신자의 무덤

필자는 갖가지 상념을 안고 강남문화원 답사단과 함께 뤄양의 한적한 농촌을 찾았다. 유명한 용문석굴도, 백마사도, 소림사도 아니었다. 옥수수 추수를 막 끝낸 북망산 인근 뤄양의 멍진현(孟津縣) 쑹좡진(送庄鎭) 둥산터우촌(東山頭村) 들판을 찾아 헤맸다. 한 30분간 긴 외줄을 그리며 헤매던 답사단의 시선 저편에 잡풀과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란 야트막한 지형이 걸렸다. 최병식 강남문화원장이 “봉분이 3개의 모양이니 이곳이 맞는 것 같다”고 소리쳤다.

그랬다. 2005년 발견된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634~679)과 남생의 둘째아들 헌성(650~692), 그리고 남생의 증손자인 비(708~729)의 무덤이었다. 이곳저곳 무너졌으니 깔끔한 ‘비주얼’은 아니었다. 오히려 흉물스러웠다. 변변한 팻말마저 없었다. 다 쓰러져가는 농가의 가건물이 역시 다 쓰러져가는 무덤을 힘겹게 호위하고 있었다. 그대로 방치하면 시골 마을까지 불어닥친 개발붐에 언제 사라질지 모를 판이었다. 답사단 누군가가 “우리 정부라도 나서 무덤을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누가 저 연남생을 위해 진혼가를 부를 수 있겠는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배신자의 가문 무덤 앞에서….

일찍이 연개소문은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목해야 한다. 절대 다투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연개소문은 아들 3형제의 반목을 예견했던 것이다.

665년(고구려 보장왕 24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대막리지 자리를 물려받아 국정을 총괄했다. 그러나 남생이 국정을 두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맡기고 지방순찰에 나선 것이 파국을 불렀다. 형제 간 반목을 부추기던 불온 세력의 올가미에 걸렸다. 남생과 남건·남산이 골육상쟁을 벌였다. 반란을 일으킨 두 동생은 남생의 맏아들 헌충을 죽였다. 이때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남생은 국내성에서 재기를 노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둘째아들 헌성을 비롯해 3번이나 당나라에 항복사절을 보내 원군을 청한 것이다. 남생이 이끌던 국내성 등 6개성 10여만호가 투항하고 말았다.(666년)

1922년 발견된 연남생의 묘지문.

“남생은 계략을 꾸며 승려 신성과

평양성 안팎에서 내통했다.

이로써 평양성이 저절로 함락되자

보장왕과 남건은 포로가 됐으며….”

<연남생 묘지문>

■연남생의 죄

연남생은 고구려 멸망의 선봉에 섰다. 662년 사수대첩에서 고구려군에 대패한 뒤 고구려 정벌 계획을 포기했던 당나라로서는 천군만마였다. 당나라의 가언충이 황제(고종)에게 “연남생 덕분에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예전에는 고구려에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생 때문에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다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삼국사기> 보장왕조)

실제로 남생은 668년 9월 평양성 전투에서 또 다른 배신자인 승려 신성과 내통함으로써 고구려 멸망을 촉진시켰다. 고구려의 숨통을 끊은 자가 바로 남생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성을 지키다 포로로 잡힌 남건은 전향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아 형을 배신자로 만든 죄인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겠느냐”고 형제간 골육상쟁을 후회했다. 남건은 결국 원지로 유배됐다. 하지만 남생은 떵떵거렸다. 그 덕분에 골치 아픈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 고종은 대대적인 전승 축하연을 베풀고 우위대장군 번국공이란 높은 벼슬을 내렸다. 식읍 3000호도 주었다. 당 고종은 황제 호위군으로 무기를 들고 황제를 보위할 수 있는 특권도 내렸다.

■연남생에서 천남생으로 창씨개명

남생의 더욱 씻을 수 없는 죄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앞장서서 막았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가열한 부흥운동을 펼쳤다. 멸망 직후인 669년 ‘고구려의 배반자들이 많아 황제의 칙명으로 3만8200호를 여러 주로 이주시켰다’(<자치통감>)는 기사가 보일 정도다. 당나라는 남생을 고구려인의 집단이주지역인 요서 지역에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조직적으로 진압했다. 그의 창씨개명도 주목거리다. 당나라 창업주인 고조(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해 연(淵)씨를 천(泉)씨로 개명한 것이다. 물이 솟는 못(淵)과 샘(泉)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679년 연남생이 46살로 죽자 당나라 조정은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황제가 친히 나서 곡(哭)을 했으며, 5품 이상의 관리들도 모두 곡을 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의 죽음을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이라 했다. 황제는 연남생의 묘를 북망산에 두도록 했고,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했다. 그것이 바로 1922년 이곳에서 발견된 천(연)남생의 묘지석이다. 아마 죽어서도 연남생, 아니 천남생은 황제의 배려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을 것이다.

“공(남생)은 고구려를 떠나 태평한 나라(당)로 귀순했다. 668년 고구려 정벌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처럼 내쳐서 평양성에 다다라…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그 공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가 갑자기 죽으니 황제의 슬픔이 진실로 깊었다.”(<연남생 묘지문>)

■그래도 그들은 반역자였다

나라를 배반한 남생은 당나라의 충견이 되어 한평생 잘 먹고 잘산 것이다. 1926년 발견된 아들 헌성의 묘지문도 마찬가지였다. “헌성은 돌궐 정벌의 선봉에 섰고, 또 모반사건을 진압한 공로로 측천무후로부터 비단 100단과 황제가 타던 말 1필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을 담았다. 남생·헌성 부자는 몰랐을 것이다. 한때는 가문의 자랑이었을 묘지문이 훗날 명명백백한 배신의 진술서로 영원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줄은…. 물론 남생에게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고구려 멸망의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보장왕도, 둘째형 남건과 함께 평양성을 지키던 막내 남산도 휘하의 수령 88명과 함께 막판에 당나라에 투항했다. 남산의 무덤 또한 이곳 남생의 묘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역시 투항 이후 “금허리띠를 차고 황실의 번역관 일을 하면서 음악에 심취한 채 호의호식했다”고 한다.

어디 고구려뿐인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해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만2807명도 이역만리 중국땅에 인질로 잡혔다.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던 흑치상지도 당나라에 투항한 뒤 돌궐·토번족 토벌의 선봉에 섰다. 의자왕은 두 달 만에 죽었지만 부여융은 당나라의 주구가 되어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는 악역을 맡았다. 의자왕과 부여융, 흑치상지 역시 북망산 인근 어디엔가 묻혀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연남생의 죄에는 미치지 못한다. 당나라에 투항한 것도 모자라 선봉에 서서 ‘바람처럼 달려 번개같이 내쳐’ 700년 고구려의 사직을 끝냈으며, 또 그것도 모자라 부흥운동까지 철저하게 틀어막았으니 말이다.

남생은 아마도 천년 만년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달콤한 꿈을 꿨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승승장구했던 아들 헌성은 측천무후 때의 간신 래준신의 모함에 걸려 죽고 말았다. 무엇보다 역사가의 엄정한 평가를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김부식은 이렇게 평했다.

“남생·헌성이 비록 당나라 황실에 알려진 신하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역자가 됨을 면할 수는 없다.”(<삼국사기> ‘연개소문전’)

하염없이 무너지고 방치된 연남생 일가의 무덤 곁을 떠나 걸어나왔다. 새삼 들판의 흙을 만져본다. 못난 지도자를 만나 이역만리까지 끌려온 고구려·백제 백성의 백골도 뤄양의 진토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KBS 역사스페셜 –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최초 공개: 2020. 3. 20.

https://youtu.be/jrYDHMjWJgo?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KBS 역사스페셜 – 연개소문은 왜 투르크에 사신을 보냈나

최초 공개: 2020. 3. 23.

https://youtu.be/mBTQEf9aIL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시리즈 2 - 몽골초원, 실크로드 사막, 토번의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요서지방 등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고구려 포로들

2020. 5. 2.

https://youtu.be/eTx8F3mo4og?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KBS 역사스페셜 – 고구려성, 만리장성으로 둔갑하다

최초 공개: 2020. 6. 17.

https://youtu.be/p9-K_RSfE1s?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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