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고구려 고고학 (1) 길림성의 고구려 유적 본문
길림성의 고구려 유적
중국 장춘시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왕건군(王建群) 소장과 저자뒤에 보이는 건물이 구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중국의 광개토대왕릉비 전문가인 왕소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1990년 8월, 중국 북경 수도비행장에서 쌍발 프로펠러기를 타고 연길 비행장에 도착하여 발해 고분 발굴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고구려 수도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길림성 집안시로 발길을 옮겼다. 연변박물관 엄장록(嚴長錄) 선생이 동행하여 길을 안내했다. 아침 일찍 연길역을 떠난 천진(天津)행 급행열차는 길림역(吉林驛)까지 350km를 무려 7시간여 동안 달렸다. 길림역 한 정거장 앞의 흥융역(興隆驛) 부근에는 고구려시대의 용담산성(龍潭山城)과 함께 송화강변(松花江邊)에 자리한 부여시대의 동단산성(東團山城)이 환히 시야에 들어왔다.
장춘시 버스정류장에는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방기동(方起東) 소장이 나와 2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방 소장은 오래전부터 만나보고 싶었던 고구려 전공 학자여서 여간 반가운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나 홍콩을 여행하는 기회에 몰래몰래 학술논문을 훔쳐보듯 하는 것 이외에 서로 얼굴을 대할 수 없는 것이 한·중 관계의 현실이었다. 그는 최근에 『통구고분군(通溝古墳群)』을 편찬하였다.1)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에서 고조선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길림성에는 주로 고구려와 발해 유적이 많이 분포돼 있다. 그중에서 고구려 연구는 길림성의 성도(省都)인 장춘시(長春市)가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특히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는 그 대표적인 연구기관이기도 하다.
집안 통구 고구려 고분군 분포도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은 이곳을 방문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왕건군(王健群) 씨가 맡고 있었다. 그가 정년으로 물러난 뒤 방씨가 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날 마침 퇴임한 왕씨도 연구소에 나와 반가이 맞아주었다.
왕씨는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로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사람으로, 1989년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저자와 토론회를 가진 이래 1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구 만주국 부의(傅儀) 황거(皇居)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는 옛 ‘만주국(滿洲國)’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시)의 황궁을 지키던 병영(兵營)을 개조한 건물이다. 연구소 이외에도 궁정의 외정(外庭)은 최근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부의(傅儀)가 만주국의 황제로 있을 때[1932~1945] 모습대로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길림성박물관에는 성내의 중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역시 고구려와 발해 유물이었다. 특히 이곳에는 집안시 오회분(五盔墳) 제4호 묘[벽화고분]를 실내에 복원·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현 육정산(六頂山) 벽화고분에서 수습된 발해시대의 벽화 잔편들도 진열되어 있다.
방 소장의 안내로 부의의 고거(故居)를 관람하고, 길림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부소장 조명기(趙鳴岐)]와 조선연구소[소장 양소전(楊昭全)]가 공동으로 마련한 좌담회에 참석, 길림성 일대의 고고학 성과와 고구려·발해역사 연구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 길로 방 소장과 조선족 출신 부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장춘역에서 장통(長通, 장춘-통화간) 야간열차에 올라 옛 고구려의 심장부인 집안으로 향했다. 이국에서 한밤중에 열차를 탄 느낌은 마치 1960년대에 강릉행 영동선을 타던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심 설레던 마음이라서 도저히 잠에 곯아떨어질 수 없었다. 장춘을 떠난 지 10여 시간이 가까워서야 통화(通化)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시간 가량 기다렸다가 하루에 한 번밖에 없는 통집(通輯, 통화-집안간) 열차로 갈아탔다.
국내성 북벽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노령(老嶺)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증기기관차 숨소리가 턱에 닿게 가쁘게 헐떡이면서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 속력이 느릿한 것으로 보아 높은 고개인 듯싶었다. 그 옛날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던 고구려시대에 이 준령을 자주 넘어야 했을 백성과 군사들의 강인한 모습이 떠올랐다. 고구려에는 남북 이도(二道)가 있었다. 남쪽 길은 집안현성(輯安縣城)을 출발, 마선구(痲線溝)를 거쳐 판분령(板分嶺)을 지나 패왕조성(覇王朝城)으로 해서 혼강(渾江)을 건너는 길이다. 또 하나 북쪽 길은 현성을 출발, 통집철도의 서쪽 협곡을 이용한 통집 공로(公路)를 통해 노령[해발 800m]을 넘어 두도(頭道)를 거쳐 혼강(渾江)을 건너는 것이다.
자동차 편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공로를 따라 노령을 넘어보았다. 집안 쪽에는 심산협곡이고 노령을 넘어서 통화 방면으로 비교적 평탄하다는 것을 느꼈다. 통화에서 4시간 여를 달려 노령을 넘어 쌍차(雙岔)에 이르렀다. 통구(通溝) 평원이 펼쳐지면서 압록강의 물줄기가 빛났다. 평원 전체가 마치 요새처럼 아늑해 보였다. 드디어 고구려의 옛 서울인 국내성에 도착한 것이다. 일행은 그 고토(故土)에서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역에는 방기동 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온 집안시박물관 전시부장 동장부(董長富)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씨의 안내로 먼저 택시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고구려 왕성인 국내성을 찾았다. 좁다란 시가지를 빠져나오자 긴 석벽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집안시 만보정 마을 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 동명성왕)이 기원전 37년에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세우고, 제2왕 유리명왕(琉璃明王) 22년[3]에 도읍을 옮긴 곳이 국내성이다. 국내성은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으로 남천할 때[427년]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
중국 국영 CCTV와 현장 회견하는 저자집안시 환도성 산성자산성하 고구려 묘구. 1993년 8월 집안시 박물관 손인걸(孫仁杰) 연구원[왼쪽]과 함께 통구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면서 고구려문화와 유적에 대하여 중국 관영 CCTV와 인터뷰하였다.
고구려가 국내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세력을 뻗치는 동안 고구려인들은 통구 지방에 그들의 삶과 죽음의 흔적을 무척이나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고분은 고구려인들의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노령(老嶺)이라는 준령은 우산(禹山)을 끝으로 더 이상 산자락을 펼치지 못한 채 이내 집안의 통구 평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양지바른 통구 평원에는 온통 군락을 이룬 고구려인들의 무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 군락의 통구고분군(通溝古墳群)들이 바로 유명한 고구려묘구(高句麗墓區)인 것이다. 우산(禹山) 묘구만 하더라도 우산남록을 동서로 5km나 잇고 있다. 그리고 국내성의 서쪽을 돌아 만보정(萬寶汀) 묘구가 나오고 통구하(通溝河)를 따라 올라가면 산성하(山城下) 묘구가 즐비하게 전개된다.
집안 환도산성(丸都山城)과 산성하(山城下) 고분군길림성 집안시 통구하(通溝河) 유역 환도산(해발 767m)의 능선을 따라 글자 그대로 수도 국내성을 에워싼[환도(丸都)] 산성이다. 둘레 6,951m. 산성 아래에 고구려 적석총군이 펼쳐져 있다.
통구하 바로 건너편으로 국내성 서쪽에는 칠성산(七星山) 묘구가 자리했다. 국내성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마선구하(麻線溝河) 양안에 마선묘구가 나타났다. 그리고 국내성의 먼 동쪽 용산(龍山) 아래의 하양어두촌(下羊魚頭忖)에 있는 무덤군이 하해방(下解放) 묘구인 것이다.
고구려 제2 수도 국내성(國內城) 평면도
집안시에는 통구고분군 이외에도 여러 지역에 크고 작은 고분군이 더 있다. 그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집안 현성(縣城)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한 장천(長川) 고분군과 현성 서남쪽 45km 지점의 대고려묘자(大高麗墓子) 고분군이다. 또 현성을 중심으로 서남쪽 27km 지점의 태평(太平) 고분군, 현성 서북 85km 지점의 횡로구대(橫路九隊) 고분군, 현성 서남쪽 90km 지점의 고마령(古馬嶺) 고구려 고분군, 동북쪽 45km 지점의 청석(靑石) 양민(良民) 고분도 빼놓을 수 없는 고구려 유적이다. 그 밖에 압록강 유역 상하활룡(上下活龍) 고분군, 현성 서북쪽 80km 지점의 반가가(潘家街) 고분군, 혼강(渾江) 유역의 모배령(母背嶺) 고분군이 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 산성자산성[환도성] 아래 고구려 고분군
집안현문물지편집위원회가 지난 1984년에 펴낸 『집안현문물지(集安縣文物志)』에 의하면, 1966년 통구 지구의 고구려 고분을 실사한 바 모두 1만 1,280기가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현재 통계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6,854기가 확인돼 날로 파괴·인멸되어가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묘제(墓制)에 있어서도 무덤 숫자만큼이나 다양했다. 묘제는 크게 석묘(石墓)와 봉토묘(封土墓)로 나누어지며 석묘로는 적석총(積石塚)·방형(方形) 계단식(階段式) 적석총·방형 계단식 석실묘·봉석동실묘(封石洞室墓) 등이 있다. 그리고 봉토묘 중에는 봉토석실묘(封土石室墓)·토석혼합(土石混合) 봉토석실묘·석축 계단식 봉토묘·석축 방형 계단식 봉토묘 등이 있다.
집안 산성자산성하 고구려 적석고분군의 돌무지무덤1층 층급 외벽에 호석(護石)을 세움.
이 가운데 돌무지로 이루어진 적석총은 통구고분군의 22%인 1,700여 기에 이른다. 이는 대개 하천석이나 낙석을 이용하여 토광을 쌓은 묘제이다. 그리고 돌로 묘광의 사주(四周)를 두르고 돌을 쌓은 형식의 방형 적석총(方形積石塚)은 통구고분군의 16%인 1,2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방형 계단식 적석총은 방형기단 위에 2~7층으로 좁혀가면서 계단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축조하는 형식이다. 이 무덤은 전체의 6%인 400여 기로 모두 통구 지방에 흩어져 있다. 고구려 적석총은 대개 3·4세기에 유행한 묘제이다.
서울 석촌동 백제 적석고분군의 제4호 돌무지무덤고구려 돌무지무덤을 방불케한다.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의 축조수법은 발해연안에서 발생한 묘제로,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성립되면서 이것을 계속 자신들의 묘제로 받아들여 유행시켰던 것이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적석총]은 그대로 백제에 전해져 임진강이나 한강 유역의 초기 백제시기인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묘제로 발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림성의 고구려 유적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참고자료>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고구려 금관(?) 최초 발견기|신동아 (donga.com)이정훈. 2014-01-23
고구려 고분은 왜 페르시아 양식을 닮았을까 (hani.co.kr)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피라미드의 웅자(雄姿)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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