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안 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전기의 유적이다.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쑤저우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 남포 등에 소재하는 후기의 고구려 고분군과 함께 등록이 결정되었다.

고구려는 기원 전 37년에 오녀산성(졸본성)을 도읍로서 건국해, 서기 3년 환도산성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평성인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427년 평양으로 다시 천도 했다. 668년에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개요[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애초 2000년경부터 유적의 세계유산 등록을 단독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003년에 등록될 예정이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북조선의 단독 등록에 반대하여, 지린성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의 등록신청을 실시했다. 그 이유로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적이 2004년 동시 등록이라는 형태로 등록되었다.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이에 고구려 역사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재차 인지되었다.

 

등록[편집]

유네스코지정번호사진                                             등록명                        소재지

1135
장군총
Tomb of the General
지린성 지안시
1135
광개토왕릉비
Gwanggaeto Stele
1135   태왕릉
Tomb of the Gwanggaeto
1135
위나암성
Hwando
1135   천추총
1135   서대총
1135   임강총
1135
국내성
Gungnae
1135   각저총
1135
무용총
Muyong Tomb
1135
오녀산성
Wunü Mountain
랴오닝성 환런 만족 자치현

 

 

고구려 고분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 Complex of Goguryeo Tombs)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평양과 평안남도 남포황해남도 안악에 위치한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쑤저우(蘇州) 회의에서, 중국 랴오닝성과 지린성에 위치하는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1][2]

 

개요[편집]

세계 유산에 등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구려 유산은 5개 지역 고분 63기(벽화고분 16기 포함)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대묘(江西大墓)를 포함하해 동명왕릉(東明王陵), 쌍영총(雙楹塚), 약수리 고분수산리 고분 등이 대표적이다.

안악 3호분처럼 많은 무덤 안에 아름다운 벽화가 있다. 벽화는 10,000여 개의 고구려 고분 중 90곳에서만 발견되는 매우 드문 것으로, 고분군의 주인은 왕족이거나 계급이 높은 귀족일 것으로 여겨진다.

 

유네스코지정번호사진등록명소재지

1091-001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군
Tomb of King Tongmyong and'
Jinpha-ri group of tombs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1091-002
호남리 사신총
 Homam-ri Sasin (Four Deities) Tomb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1091-003
덕화리 고분군 (1,2,3호)
Tokhwa-ri Tombs No. 1,2,3
평안남도 대동군
1091-004
강서 삼묘
Kangso Three Tombs
남포특별시 강서군
1091-005
덕흥리 고분
Tokhung-ri Tomb
1091-006
약수리 고분
Yaksu-ri Tomb
1091-007
수산리 고분
Susan-ri Tomb
1091-008
룡강대총
Ryonggang Great Tomb
남포특별시 룡강군
1091-009
쌍영총
Twin-Column Tomb
1091-010
안악 1호분
Anak Tomb No. 1
황해남도 안악군
1091-011 안악 2호분
Anak Tomb No. 2
1091-012 안악 3호분
Anak Tomb No. 3

 

 

세계유산 등재 앞둔 북한내 고구려유산 (daum.net)

입력 2004. 7. 1. 11:59수정 2004. 7. 1. 11:59
 

(서울=연합뉴스) 문관현 기자 = 중국의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개최중인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확실시되는 북한내 고구려 문화유산은 5개 지역 고분 63기로 구성됐다.

북한 소재 고구려 문화유산은 공식 명칭이 "고구려 고분군"(The Complex of theKoguryo Tombs)이다.

이들은 다시 ▲ 동명왕릉 주변 고분군(15기/이중 벽화고분 3기) ▲ 호남리 사신총 주변 고분(34기/벽화고분 1기) ▲ 덕화리 고분군(3기/벽화고분1기) ▲ 강서삼묘(3기/벽화고분 2기) ▲ 독립고분(8기/벽화고분 8기) 등으로 나뉜다.

 

◇동명왕릉(東明王陵) 주변 고분군 동명왕릉은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옛 중화군 진파리)에 위치한 고구려동명왕의 무덤이다. 무덤 주변이 왕릉동이라는 사실과 함께 후대에 설치된 동명왕릉비와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등(石燈), 그리고 1892년 세운 정자각과 비석 등이동명왕릉 전승의 근거가 되고 있다.

1974년 무덤 앞 절터에서 팔각형 목탑지, 회랑, 10여채 건물지 등과 함께 고구려 정릉사였음을 알려주는 고구려(高句麗), 사(寺), 정(定), 정릉(定陵)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굴됐다.

무덤 서쪽 400m 지점에서 "동국여지승람"의 진주지(眞珠池)로 추정되는 연못도조사됐다. 이러한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이 고분을 동명왕릉으로 부르게 됐다.

고분 외형은 2층의 정방형 돌기단을 1.5m 높이로 쌓은 다음 봉토를 쌓아올렸는데 돌무지무덤과 돌방봉토무덤이 결합된 형태다. 전체 높이는 기초부와 기단부 1.65m, 봉토부 6.5m로 총 8.15m에 이른다.

내부 구조는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서 널길(羨道),앞방(前室),널방(主室)의세 부분으로 축조한 돌방으로 되어 있다.

벽화가 비교적 잘 남은 동쪽 벽의 일부와 천장을 근거로 추정할 때, 널방에는고구려벽화 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풍속화나 사신도가 아닌 직경 12㎝의 연화문(蓮花文)을 벽면과 천장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4.2㎝)으로 640개 가량 그렸다.

 

◇호남리 사신총 주변 고분 평양 삼석구역 성문리(舊地名 : 평남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 대성산 기슭에 위치한 고구려 벽화고분이다.

 

1916년 개마총과 함께 조사됐고 고분 주위에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다. 벽화 고분으로는 서쪽에 고산리 1・9호, 동쪽에 남경리 벽화고분, 내리 1호분등이 있다.

분구(墳丘)는 광대산의 남쪽 경사면 일부를 파고 만들었다. 분구(墳丘)는 돌로기단(基壇)을 쌓은 후 흙을 덮은 방대형(方臺形)기단 봉토분구이다.

사신도(四神圖)는 아랫부분이 침수 피해를 입어 희미하지만 윗부분은 명확하게남아있다. 먹선과 녹색, 청색, 주색, 황색 등으로 밝고 화사하게 채색했는데 이는강서대묘와 같은 후기 벽화의 수법이다.

그러면서도 자세나 표정이 다른 고분벽화의 사신도와는 다소 색다르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는 몸이 입구 쪽을 향하고 머리는 뒤로 젖혀진 모습이다. 청룡의특징인 뿔이 하나인데, 후기의 사신도에 보이는 쌍각의 청룡과는 다르며 오히려 무용총 등의 5세기 청룡도와 같은 형태이다.

이처럼 사신도는 힘차기는 하지만 고졸(古拙)한 맛이 남아 있어 전기 양식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후기 사신도의 전형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준다.

 

◇덕화리 고분군 덕화리 고분군은 6세기 제작됐고 핵심 부분인 성숙도(星宿圖)는 구갑(龜甲) 모양의 일(日), 월(月) , 성신(星辰)을 그린 28숙(宿)을 그려넣고 각 성좌에 해당하는이름을 기입했다. 벽화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귀중한 천문도로서 의의가 크다.

화운(花雲)과 화취설(花吹雪)은 바람에 날리고 파도와 같은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 높이 솟은 2그루의 소나무도 생생한 새 잎을 나부끼고 있다.

활달한 필치로 나뭇가지를 그리고 윤곽을 그리지 않고 직접 채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인 몰골법(沒骨法)에 의해 소나무 잎을 형상화했다. 이 벽화는 6세기 후반의 동양화의 풍경화가 이뤄낸 원숙한 예술적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강서삼묘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옛지명: 평안남도 강서군 우현리, 평안남도 대안시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고분군이다.

삼묘리 고분군은 삼묘리의 넓은 평지에 위치하며 고분이 자리한 평야지대는 오른쪽으로 오석산(烏石山)이 있고, 왼쪽으로 무학산(舞鶴山)이 있다. 3기의 석실 봉토분이 평야지대에 삼각상의 배치를 하고 있어 삼묘리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삼묘리 고분군은 돌방봉토벽화고분(石室封土壁畵古墳) 2기와 돌방봉토분 1기로이루어졌고 주위에 고분들이 자리하고 있지 않아 3기의 무덤은 넓은 묘역을 가지고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 중앙에 있는 무덤이 가장 커 강서대묘라고 하고, 강서대묘에서 서북쪽으로95m 거리에 있는 중간 크기 무덤을 강서중묘라고 한다. 강서소묘는 강서대묘에서 동북쪽으로 85m 거리에 있다.

 

◇독립고분 약수리 벽화고분, 쌍영총 등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생활풍습도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생활풍습을 주제로 그려진 고분들은 안악 고분 1,2,3호와 용강대묘, 수산리 벽화고분, 덕흥리 벽화고분 등이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묘주인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어 고구려 시대 정치제도와 사회계급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홍수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고분은 약수리고분으로 보존대책이 시급한실정이다. 쌍영총과 용강대묘는 남포시 도심에 위치해 보호구역의 설정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여론이다.

한편 중국측이 신청한 고구려 유산은 북한지역과 달리 무덤 이외에 수도와 관련된 왕성 등이 주로 포함됐다.

신청목록은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 통거우(洞溝) 고분군, 그리고 염모총,환문총, 각저총, 무용총, 마조총, 장천 1.2호분, 임강총, 서대총, 천추총 등 총 43건이다.

khmoon@yna.co.kr

 

북, 고구려유적 세계문화유산 등록사업 진행중 < 북한소식 < 기사본문 - 통일뉴스 (tongilnews.com)

  • 기자명 이계환 기자 
  •  입력 2007.11.29 18:18
 
 
북한이 평양의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는 사업을 진행중에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9일 인터넷판 평양발에서 “오늘 평양의 곳곳에는 고구려시기 유적들이 계속 발굴되어 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면서 “개성, 묘향산과 함께 평양에 있는 고구려시기 유적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는 사업도 추진중에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면서 각 시기별로 나눠 고구려시기 유적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먼저, 고구려는 B.C. 277년 고주몽에 의하여 건국된 때로부터 천년가까이 오늘의 중국동북지방과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삼국시기의 역사문화 발전을 주도하면서 동방의 대강국으로 위력을 떨쳤다.

또한, 427년부터 586년까지 왕궁이었던 안학궁의 방어성 대성산성은 소문봉과 을지봉 구간에서 그때의 성벽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주변에는 대성산성의 성돌들이 흩어져 옛터의 흔적들을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장수봉, 국사봉 등에 정각들이 복구되는 등 고구려수도성의 면모가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현재 터자리가 남아있는 안학궁은 당시의 궁성에 대한 복원설계를 다 하여 건설에 착수할 수 있게 해놓고 있다.

그리고 586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668년까지 평양성 지역에는 보통문을 비롯하여 대동문, 칠성문, 을밀대, 최승대, 련광정, 부벽루 등이 민족문화유산보존정책에 따라 보존되고 있다.

신문은 “평양시에서는 고구려유적들을 원상대로 보존시키는 방향에서 도시건설이 진행되고 있으며 오늘도 고구려유적발굴정리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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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 중국어 간체자: 太王镇)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이다. 중국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개설[편집]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지만 고르지 않다. 대석은 3.35×2.7m이다.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1]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된다. 또한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금나라 황제의 비(碑)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의 봉금제도가 1880년대에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고,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내용[편집]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는 아직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첫째 부분은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이다.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마지막 부분은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이다.

건국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생애[편집]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열여덟 살(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셨다. (왕의) 은택은 하늘까지 적시고 위무(威武)는 온 세상에 떨치셨다. (왕이) □□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그 생업을 평안히 하였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윤택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우리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 서른아홉 살(412년)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셨다.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일에 산릉(山陵)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원문: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정복전쟁 부분[편집]

395년 기사 : 영락 5년,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패려(稗麗)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 북풍(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백잔(백제[2]),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1.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2.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396년 기사 :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도성(위례성)에 [다다랐다]. 백잔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백잔군이)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아신왕)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히 여겼다.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잔주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 원문: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398년 기사 : 영락 8년 무술년,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 식신(숙신) 토곡을 순찰하도록 했다. 이때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하고 내부의 일을 여쭈었다.[3]

  • 원문: 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3]

399년 기사 :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4]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 원문: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400년 기사 :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경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왜병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5] (관군이) 신라성, □성을 [차지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 ▨▨▨ 이하 71자 대부분은 글자 훼멸 때문에 알 수 없음.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에서 왜(倭)와 백제의 제(諸) 연합세력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구원한 전쟁 성과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5]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3][6]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 원문: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5]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5]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5]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3][6]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404년 기사 : 영락 14년 갑진년, 그럼에도 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황해도) 연안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을 [동원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원문: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407년 기사 : 영락 1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켰다.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 원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우리) 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도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 전체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대체로 헤아려 보니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천400개였다.[7]

  • 원문: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舉]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묘지기에 관한 규정[편집]

묘지기 연호(烟戶) 수는 매구여(賣勾余)의 백성 가운데서 국연(國烟)이 2집 간연(看烟)이 3집, 동해고(東海賈)에서는 국연 3집 간연 5집, 돈성(敦城) 백성 가운데서는 4집 모두가 간연, 우성(于城)에서는 간연 1집, 비리성(碑利城)에서는 국연 2집, 평양성(平穰城) 백성 가운데서는 국연 1집 간연 10집, △연(△連)에서는 간연 2집, △성(△城)에서는 간연 2집, 안부련(安夫連)에서는 간연이 22집, 개곡(改谷)에서는 간연 3집, 신성(新城)에서는 간연 3집, 남소성(南蘇城)에서는 국연 1집이다.[8]

새로 들어온 한(韓)과 예(穢) 가운데는 사수성(沙水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1집, 모루성(牟婁城)에서는 간연 2집,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에서는 간연 5집, 구모객두(勾牟客頭)에서는 간연 2집, 구저한(求底韓)에서는 간연 1집, 사조성(舍조城)의 한(韓)과 예(穢) 가운데서는 국연 3집, 간연 21집,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에서는 간연 1집, 막고성(莫古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3집, 객현한(客賢韓)에서는 간연 1집,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에서는 합해서 간연 10집, 파노성(巴奴城)의 한(韓) 가운데서는 간연 9집, 구모로성(臼模盧城)에서는 간연 4집, 각모로성(各模盧城)에서는 간연 2집, 모수성(牟水城)에서는 간연 3집, 간저리성(幹저利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3집, 미추성(彌鄒城)에서는 구연 1집 간연 11집, 야리성(也利城)에서는 간연 3집, 두노성(豆奴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2집, 오리성(奧利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8집, 모추성(模鄒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5집이다.

백제 남쪽에 사는 한(韓) 가운데서는 국연 1집 간연 5집, 대산한성(大山韓城)에서는 간연 6집, 농매성(農賣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7집, 윤노성(閏奴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22집, 고모루성(古牟婁城)에서는 국연 2집 간연 8집, 전성(전城)에서는 국연 1집 간연 8집, 미성(味城)에서는 간연 6집, 취자성(就咨城)에서는 간연 5집, 삼양성(삼穰城)에서는 간연 24집, 산나성(散那城)에서는 국연 1집, 나단성(那旦城)에서는 간연 1집, 구모성(勾牟城)에서는 간연 1집, 어리성(於利城)에서는 간연 8집, 비리성(比利城)에서는 간연 3집, 세성(細城)에서는 간연 3집이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계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선조 왕들께서는 원근 지방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였다. 나는 구민(舊民)들이 점차 고달퍼져 열악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때문에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을 지킬 자들은 내 스스로 돌아다니며 직접 데리고 온 한(韓)족이나 예(穢)족 들에게 수호·청소하는 일을 맡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한족과 예족 220집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수묘)법칙을 모를까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집을 데려와 새로 온 사람들과 합치니 묘지기 호수가 국연(國烟)30집, 간연(看烟) 300집이 되어 모두 330집이 되었다.

윗대 선조와 선왕(先王)이래 묘에 비석을 갖추지 못하여 묘지기 연호들이 착오를 일으켰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은 선조와 선왕의 무덤에 모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셨다. 또 묘지기 제도를 제정하여 앞으로는 묘지기를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셨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고, 법령을 어기는 자 가운데서 파는 자는 벌주고 사는 자는 법을 만들어 그 자신이 묘지기가 되도록 하였다.

신묘년조 논란[편집]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6년) 기사 바로 앞에 실린 다음의 기록에서 시작된 논란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영락 6년(396년)부터 14년(404년)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1.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2.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인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이 알려진 1888년 이후 이 기사를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이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 및 박시형, 이기백 등은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백잔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로 해석하였다.

1970년대 초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진희는 비의 문자가 석회 도포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하여,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김병기는 '渡海破(도해파)' 부분이 정상적 비문과 다르며, 획의 부분을 따졌을 때, 원래 글자는 '入貢于(입공우)'라고 주장했고,[9] 중국의 경철화(耿鐵華)는 '來渡海破'의 海에서, 부수인 삼수변(氵)이 종선 밖의 부분에 위치 있음을 통해 海가 아니라 '每'라고 주장했다.[10]

복제비[편집]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교문2동에 원본의 크기와 내용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구리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입력2023.11.23 18:54 수정2023.11.24 00:19 지면A33

새로운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프랑스서 발견 | 한국경제 (hankyung.com)

성수영 기자기자 구독

 

1910년 안팎 제작 추정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사진)이 프랑스에서 새로 발견됐다.
 
23일 학계에 따르면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24일 프랑스 고등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이전에 발표된 적이 없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을 소개할 예정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 탁본은 지난해 말 콜레주 드 프랑스가 소장품을 점검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탁본 연대 및 소장 시기는 1910년 안팎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중국 지린성 지안에 414년께 세워진 비석이다. 아들인 장수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높이 6.39m의 돌에 1775자 규모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다.
지금까지 서구권에서 보유하고 있는 탁본으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품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탁본은 불교 미술을 연구한 학자 앨리스 게티(1865~1946)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송고시간2019-05-24 12:00

장군총 변형·붕괴 우려도…"중국에 공동복원작업 적극 제안해야"

광개토대왕릉에 설치된 관람객용 돌계단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지난달 7일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릉. 관람객들이 능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돌계단이 설치돼있다. bscha@yna.co.kr 2019.05.24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광개토대왕릉 위로 돌계단이 설치돼 관람객들이 함부로 오르내리고, 장군총은 눈에 띄게 균형을 잃어 변형이 진행되는 등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고구려 유적의 보존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 광개토대왕(374~412)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 등 지안 고구려 유적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이를 계기로 한차례 정비가 이뤄졌다.

광개토대왕릉 전경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지난달 7일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릉. 능 곳곳이 허물어지는 등 원형이 훼손된 상태다. bscha@yna.co.kr 2019.05.24

 

하지만 최근 연합뉴스가 지안 고구려유적을 찾아 확인한 결과, 광개토대왕릉 곳곳이 허물어지는 등 원형 훼손이 심각한 상태였다.

또한, 중국 당국이 광개토대왕릉 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보전은 뒷전에 밀린 게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냈다.

과거에 있던 철제 계단은 사라졌지만, 능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능 위에 걸어 올라갈 수 있도록 돌계단이 놓여있었다.

능 정상에는 시신이 안치돼있던 묘실이 있다. 과거에 이미 도굴된 묘실은 원형이 많이 망가진 상태인데, 관람객이 내부 통로까지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조성돼 있었다.

묘실의 입구에 설치된 현대식 문 역시 고증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광개토대왕릉 묘실 문(좌)과 내부 통로(우)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지난달 7일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릉. 묘실 입구에 현대식 문이 설치돼있고(좌), 묘실 내부 통로까지 관람객이 들어가 볼 수 있다. bscha@yna.co.kr 2019.05.24

 

광개토대왕릉 인근에는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계단식 적석무덤 장군총이 있는데, 이 또한 보전대책이 시급해 보였다.

장군총은 비교적 원형이 보존돼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무덤을 구성하고 있는 돌 사이의 틈이 벌어지는 등 변형 및 붕괴 우려가 나온다.

장군총 앞모습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지난달 7일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장군총. 좌측 상단부의 돌들의 균형이 눈에 띌 정도로 무너져있다. bscha@yna.co.kr 2019.05.24

 

익명을 요구한 한 고대사 연구 학자는 "다른 돌들이 밀려나지 않게 괴어놓은 뒷면의 큰 돌(호분석) 하나가 없어졌다. 그래서 뒷면의 붕괴가 더 많이 이뤄지는 것 같다"면서 "이로 인해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앞면도 붕괴가 진행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장군총 뒷모습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지난달 7일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의 뒷모습. 돌 사이의 틈이 벌어지는 등 붕괴가 진행 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bscha@yna.co.kr 2019.05.24

 

이 학자는 또 "더 위험한 것은 광개토태왕비"라면서 "현재 비석의 중·상단 부분에 심각한 균열이 있다. 지진이 나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6.39m 높이 비석이 붕괴할 위험이 매우 크다. 시급히 실태조사와 보호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국내성 성벽 유적 역시 20세기 초반 중화민국 시기의 사진과 비교하면 여러 곳이 훼손되고 높이가 낮아진 상태라고 한다.

광개토대왕비

(지안=연합뉴스) 차병섭 특파원 = 지난달 7일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 6.39m 높이의 비석 중상단 부분에 균열이 심각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bscha@yna.co.kr 2019.05.24

 

이 학자는 지안시 고구려 유적에 대해 "결국 중국이 유적 관리자라는 점을 인정하고 협의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공동 복원작업을 중국에 적극 제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공동 학술조사나 유적유물의 복원·보호를 위한 연구팀 구성을 중국에 요구할 필요가 있다"면서 "역사 논쟁보다는 세계문화유산을 공동으로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부가 나서서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북한도 포함되면 좋을 것"이라면서 "중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최근 백두산에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점 등을 들어 위험성을 강조하고 설득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bscha@yna.co.kr

 

 

등록 2019-04-16 09:46수정 2020-12-27 18:08

[단독] 논란의 광개토왕비 해석, 실마리 찾나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최연식 동국대 교수 ‘신묘년조’에 도전적 해석
왜·백제·신라 전란 지목한 32자 글자 부분
사라진 글자 부분 고대 소국 ‘반파’로 해석
‘왜가 신묘년 반파로 건너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 해석
1884년 사코 중위가 일본에 가져간 광개토왕비의 탁본. 학계에서 ‘쌍구가목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흐릿한 원래 탁본의 글자윤곽을 좀더 잘보이도록 자의적으로 덧칠했다. 주황색 선 안의 구절이 논란이 된 ‘신묘년조’의 일부다. 역사비평사 제공
 
압록강 너머 중국 지안 옛 국내성터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재위 391~412)의 비가 올해로 1606년째 서 있다. 아들 장수왕이 414년 세운 고구려 문화유산의 대명사다. 높이 6m를 넘는 판석에 1775자의 예서체 한자들로 왕의 치적을 새긴 이 거대 비석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강건했던 나라의 역사와 품격을 드러낸다.광개토왕비는 드높은 위상과 달리 국내 학계에선 한국 고대사의 가장 큰 고민 덩어리처럼 인식된다. 일본 학계가 처음 비석 명문을 판독해 연구를 시작한 탓이 크다. 1883년 일본 장교가 비를 확인한 뒤 탁본을 입수해 학자들이 명문을 판독했다. 그때부터 왕의 백제 정벌 업적을 새긴 본문 앞 한 구절(전치문)의 해석내용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9번째 행의 이른바 ‘신묘년조’로, 영락 6년(396) 왕이 벌인 백제 정벌을 배경으로 앞선 신묘년(391) 일어난 왜, 백제, 신라의 전란을 지목한 내용이다. 원문(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은 32자에 불과한데, 지금껏 확고한 해독의 전범이 세워진 바 없다. 19세기말 먼저 판독한 일본학자들은 ‘왜가 바다 건너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 신민 삼았다’고 풀이했다.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확고한 물증으로 선전한 것이다. 이 구절이 뒤에 나오는 백제 정벌 명분을 제시하려고 배치된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 해석문에서 백제의 잘못이 안 보이는 허점은 묻어버렸다. 반면, 20세기초 연구를 시작한 정인보 등 국내 학자들은 고구려를 주어 삼았다. ‘왜가 신묘년에 오자 (고구려가) 건너가 격파하고 백제는 신라를 침략했다’ 등으로 풀었으나, 문법에 안맞고 부자연스런 해석이란 지적을 받았다. 70년대 일제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되면서 초기 탁본 재조명 바람이 일었으나, 해석상 진전은 미흡했고, 식민사관, 민족사관이 작용한 근대기 해석의 대립이 130년 이상 고착되면서, 비는 역사적 진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1889년 제작된 광개토왕릉비 원석 탁본(미즈타니본). 주황색 선 안은 논란이 된 ‘신묘년조’의 일부. 역사비평사 제공
 
옛 문헌과 문자 판독의 실력자인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신묘년조’에 도전적인 재해석을 내놓은 건 늪 같은 연구의 교착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그는 20일 열리는 한국목간학회 발표회(공주대)에서 ‘영락 6년 고구려의 백제 침공 배경과 역사적 의미’란 논고를 낸다. 한문의 정통 문법구조를 바탕으로 훑어보니 ‘신묘년조’의 기존 해석들은 그동안 몰랐던 결정적 모순을 지녔음을 확인했다는 게 핵심이다. 다른 명문들엔 없는 해석방식을 신묘년조에만 무리하게 적용했고, 뒤에 이어지는 백제 정벌 기사 명분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백제의 과실이 없거나 모호한 한계도 한결같이 갖고 있더라는 비판이다.논고를 보면, 신묘년조를 제외한 비문의 다른 명문들은 모두 한문 문장 전형인 4자+6자 구조다. 반면, 신묘년조 기존 해석문들은 ‘來渡…’ ‘…新羅’ 등 핵심부 10자를 아예 하나의 구절로 합치거나, 3자+7자 또는 5자+5자 구절로 나누는 등 한결같이 4자+6자 구조에서 벗어난 변격으로 자르고 이어붙였다. 이에 최 교수는 다른 명문처럼 4+6자 구조에 따라 신묘년조 구절을 갈라서 해석해보니 ‘而倭以辛卯年(이왜이신묘년), 來渡□破(래도□파), 百殘□□新羅(백잔□□신라)’로 나누어지면서, 새로운 풀이의 지평이 열렸다. ‘건너와 깨뜨리다’란 동사로 그동안 해석되면서, 그 주어가 왜인지 고구려인지 100년 이상 논쟁해온 ‘來渡□破’가 특히 그러했다. 4자의 문장구성에서 ‘깰 파’(破)자는 동사가 아니라 ‘건너오다’란 겹동사 來渡(래도)의 목적어로 볼 수 있게 됐다. ‘□破’(□파)를 두 글자 지명으로 본다면, ‘~파’가 들어가는 고대 한반도 지명들 중엔 반파(伴跛, 叛波)가 유일한 사례가 된다고 최 교수는 짚었다.
최 교수가 `반'자로 판독한 ~渡O~의 O자.
 
반파는 4~6세기 한반도 남부에 있던 정치체다. 백제, 신라와 경쟁했고 가야, 왜와는 가깝게 교류한 소국으로 <일본서기> 등 중국, 일본 사서에도 기록이 보인다.실제로 비 탁본 중 상태가 좋다는 경희대 혜정박물관 소장본을 검토한 결과 신묘년조의 ‘…□破’의 □부분에서 중간 부위의 ‘-’획과 그 아래의 ㄱ획, 글자 왼쪽의 삼수변 획 ‘氵’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이런 획들이 들어가는 글자는 ‘沜’(반:泮의 이체자) 이외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 沜(=泮)이라면 ‘□破’는 반파란 지명이나 국명을 표기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추론을 전제하면, 신묘년조 구절은 ‘왜가 신묘년 반파로 건너오자 백제가 그들과 함께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다’로 풀이할 수 있다. 뒤에 나오는 백제 정벌 배경도 구체적 설명이 가능해진다.
중국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의 현재 모습.
 
반파를 두고 고고역사학계는 경상도 고령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의 다른 명칭이라고 대체로 추정해왔다. 이에 대해 그는 ‘반파=대가야설’은 6세기 자료를 기반으로 하지만, 비문에서 판독된 반파는 4세기 세력이어서 지역기반, 정체가 다를 수 있다면서 논의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관건은 판독한 새 글자가 정말 ‘沜’(반)자일까 하는 점이다. 고광의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은 “탁본 표면 상태나 글자체의 구도로 볼 때 신묘년조에서 삼수변 붙은 ‘沜’(반)자가 판독될 여지를 얼마나 인정할지가 학계 논의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견해가 아닌 가설과 문제 제기”라고 밝힌 최 교수의 발표가 광개토왕비의 블랙홀을 벗어날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입력 2019. 12. 6. 10:36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고구려 고고학 논문 해제집』발간 (daum.net)

 

 

입력 2018. 5. 2. 03:00

광개토대왕비의 위엄 담긴 탁본 '혜정본' 직접 만나보세요 (daum.net)

인사동서 열리는 '세계고지도 전시회'

[동아일보]

‘2018 세계고지도 전시회’에서 시민들에게 처음 공개되는 ‘혜정본 광개토대왕비 원석탁본’. 학계에서는 1880년대 만들어진 초기 원석탁본 중에서도 매우 정교한 선본(善本)으로 보고 있다.
 
 
국내에 존재하는 광개토대왕비 원석탁본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는 ‘혜정본’이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혜정문화재단은 9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토포하우스에서 ‘2018 세계고지도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에서는 혜정본을 포함해 각종 희귀 고지도 60여 점을 선보인다. 김혜정 혜정문화재단 이사장은 “지도는 한 시대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와 예술의 척도”라며 “지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세계관의 변화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수천 점의 고지도를 수집한 컬렉터이자 경희대 혜정박물관장을 지낸 고지도 전문가다.

 

광개토대왕비 혜정본은 1985년경 김 이사장이 중국 베이징의 류리창(琉璃廠)에서 구입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인사동 같은 곳이다.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우리나라에 2종, 중국 6종, 일본 2종 등 10여 종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대부분 국내에 없거나 보존 상태가 불량해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후 김 이사장이 소장한 탁본을 2012년 한국박물관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 국립민속박물관이 공동으로 연 학술회의에서 처음 공개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 학술회의에서는 “1880년대에 만들어진 초기 원석탁본 중에서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혜정본’이라는 학명(學名)을 붙였다. 특히 종래에 판독할 수 없었던 일부 문자의 필획을 찾는 등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김 이사장은 “광개토대왕은 단지 정복군주가 아니라 고구려를 부강한 나라로 만든 경세군주이자 평화와 통일을 추구한 인물”이라며 “광개토대왕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

1760년 청나라 황천인이 제작한 ‘대청만년일통지리도’의 원본을 병풍으로 이어붙인 모습. 미국 의회도서관과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등 전 세계에서 수점만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혜정문화재단 제공

 

 

이번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건 18세기 청나라의 황천인(黃千人)이 제작한 ‘대청만년일통지리도’다.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 일본, 류쿠 등 동아시아 각 국가들이 모두 표현돼 있다. 현재 중국과 일본이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청나라 영토로 표시한 점이 흥미롭다.

서양인의 시선으로 중세 한반도를 표현한 고지도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1626년 영국인 존 스피드가 1626년 제작한 아시아 지도는 한반도를 ‘Cory(고려)’와 ‘Tauxem(조선)’이라는 지명과 함께 고구마 줄기처럼 길쭉하게 표현했다. 지도의 양 옆에는 아시아 각국의 민속 의상을 함께 실어 의복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혜정문화재단은 17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시관에서 특별전시회를 여는 등 전국 순회 전시를 진행할 계획이다. 김 이사장은 “시민들과 함께 고지도를 수집, 보존하기 위해 재단의 회원을 모집할 계획”이라며 “의미 있는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시민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료. 02-571-6261.

 

 

입력 2016-04-12 03:00업데이트 2016-04-12 10:39

[단독]“광개토대왕비 건립시기 414년 아닌 415년이다”|동아일보 (donga.com)

 

2015년 02월 11일 (수) 10:25  

일본의 역사왜곡,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시작됐다 (brainmedia.co.kr)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을 왜곡하여 조선 정벌의 명목을 세웠다. 사까와 탁본을 토대로 역사 조작을 합리화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이 과거에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찬구 교수는 지난 10일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139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진실’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이찬구 교수는 대전대학교 철학박사로 20여 년간 주역, 천부경, 동학(東學) 등을 연구했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 이찬구 교수가 국학원 139회 국민강좌에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진실'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으로 동북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죽고 나서 2년 후 부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뿐 아니라 고구려의 기원, 통치시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교수는 먼저 고구려의 기원에 대해서 “고구려는 B.C.37년에 갑자기 출현한 나라가 아니다. 난하 하류 고죽국(B.C. 5~3세기)의 멸망 직후 그 터에서 고구려족이 발생했고, 일부가 요동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고주몽)은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후손이다.”라고 말했다. 
 고구려 멸망 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의 손에 넘어갔다가 1881년에야 발견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비문에 대한 연구를 일본이 먼저 착수했다는 것이다. 1883년 일본 중위 사까와는 탁본(쌍구가묵본)을 참모본부에 전달하고 일본은 이를 5년간 연구했다.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역사 왜곡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을 놓고 지금까지 한·일 양국 간의 논쟁은 팽팽하다.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羅以爲臣民’
일본은 이 문장을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는 이 문장을 ‘왜’가 아닌 ‘고구려’를 주어로 하여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여 왔으므로 고구려가 공략하여 왜를 무찔렀다’고 해석했다.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해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국경(강역)을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교수는 본인이 연구한 해석을 덧붙였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단군의 오랜 족속민이다. 고조선 이후 고구려가 오래 전부터 조공관계를 유지해 왔다. 신묘년(391)에 왜적이 (신라를) 내침(來侵)하므로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擊破) 하였으나 백제가 (왜적과 연합하여) 잇달아 신라의 국경(國境)을 쳐서 (자기의)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하므로 영락 6년 병신년(396)에 태왕(太王)은 몸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왜적(倭賊)과 백잔(百殘)을 토벌(討伐)하였다."
지금도 일본은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일본이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5년 간 연구한 이유는 바로 조선 정벌의 명목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비문을 왜곡하여 야마모토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일본의 왜곡된 해석에도 불구하고 국내 학자들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식민사학이 뿌리깊게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역사의 진실을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10일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국학원 국민강좌에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우리의 역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광개토대왕은 비문에서 “내가 죽은 뒤에는 묘를 잘 지켜 깨끗이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뜻을 지키지 못했다. 광활한 벌판에 홀로 역사의 진실을 외치고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역사적 진실을 세계 속에 바르게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8/30 [08:12]

[단독보도 제 22편]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광개토대왕 재위 10년 경자(400년)에 기마보병 5만 명을 신라에 파견하여 [한국 땅의] 신라성에 가득찬 왜적을 즉시 항복시켰다. 드디어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임나가라)까지 쫓아가 대마도(임나가라) 신라성의 각 城(성)에 가득 찬 왜적들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안라인을 술병하시었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의 가장 큰 업적 부분의 왜(倭)와 관련된 기사(記事)의 [비문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와 같이 쪼아서 결락 자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1]. 광개토왕비문 훼손의 범인은 일본이다

[1], [조선상고사]를 저술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광개토대왕 비(碑)는 1876년 청나라 사람 영자평(英子平)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다. 라고 조선상고사에 밝혀져 있다. 즉 신채호 선생은 일본인들이 왜 관련 비문 글자를 도부(刀斧)로 쪼아 내고 역사적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글자가 첨가된 것 같다.」라고 일본인들이 비문(碑文)을 변조한 사실을 지적했다.

[2], [환단고기]를 편찬하신 계연수 선생은 1895년 5월 광개토왕 비문(碑文)을 답사(踏査)한 후 비문을 적어 둔 비문징실(碑文徵實)이 있다. 즉 계연수 선생이 1912년 다시 답사 했을 때 비문(碑文)이 훼손되어 전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1895년 답사했을 때 비문기록을 비문징실(碑文徵實)이라 한다. 비문징실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2면9행)官兵섭跡而越來攻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城倭滿倭潰城六(제2면10행□결자)被我攻蕩滅無遺倭遂擧國降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戌兵滿假□□倭欲敢戰與훼己呑卓淳(제3면1행)諸賊謀□□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斯諸賊悉自潰(제3면2행□결자)遂分爲郡安羅人戌兵

(제2면9행)[고구려]의 관병이 [벡제국 땅이었던] 越(월)까지 추적하여 공격해 오자 황급히 달아나는 [왜적]을 등뒤까지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까지 쫓아가 城(성)을 발본 색출하여 즉시 성을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이 戍兵(술병)하도록 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대마도] 신라성의 □(성城)에도 倭(왜)가 가득했으나 왜를 궤멸시켰는데 6城(성)□□□□□□을 공격하여 소탕 궤멸시켜 살아남은 왜적이 없었다. 일본 왜가 드디어 거국적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10중 8,9는 다 죽었다. 신하는 데려 오고 안라인을 술병하도록하였다. 

 假□□에 가득찬 倭(왜)의 훼己呑(훼기탄)국과 卓淳(탁순국(큐슈 현재多久타구)의 모든 적들이 공모하고 감히 전투하고자 하기에 관병 □□가 먼저 卓淳(탁순)국을 제압하고 佐軍(좌군)은 淡路島(담로도:일본 瀨戶內海 동부에 있는 섬, 兵庫縣에 속함)를 경유하여 단마(但馬(兵庫縣의 북부)에 도착하고 右軍(우군)은 難波(난파(大阪)를 경유하여 武藏(무장(那良의 春日野)에 도착했다. 광개토대왕은 직접 竺斯(축사:일본의 北九州)에 도착하니 모든 적들은 스스로 다 궤멸되었다. (제3면 2행 1행□□□□□□) 대왕은 드디어 [일본 北九州]의 郡(군)을 나누어 安羅人(안라인)이 戌兵(술병)하도록 하였다.

[환단고기를 저술하신 계연수] 선생님의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의하면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적혀 있는 문구는 광개토왕이 경자(400년)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일본의 응신조(應神朝) 왜(倭)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임나(任那:대마도)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왜(倭)를 통치하였다. 임나연정 시대에 일본열도 왜는 대화왜(大和倭), 구주왜(九州倭)로 갈라져 임나(任那:대마도)에 세워진 임나연정(任那聯政)은 고구려왕의 통제를 받았다.

대마도의 신라, 고구려, 가야, 구주왜, 대화왜를 정복한 내용이다. 비문장실을 만든 계연수님은 만주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 찾기 위해 항일투쟁 중에 일본 밀정에 붙들려 온 몸이 절단된 채 시신(屍身)이 압록강에 던져진 애국지사이며, 민족사학자이시다.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추종하는 한국의 얼빠진 일부 사학자들은 계연수 선생이 항일투쟁을 하다가 죽은 애국지사이기 때문에 애국심이 지나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비문징실을 위작(僞作)했으며, 광개토왕은 일본열도를 정복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400년에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비문장실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살펴본다. 앞절에 나온 "관병이 추격하자 황급히 달아나는 왜적들을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쫓아가서 .후략" 문구 중 임나가라(任那加羅)는 대마도(對馬島)로 밝혀졌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붙어 있자 임나(任那)는 경남 김해지역 이고 가라(加羅)는 경상북도 고령가야(加耶)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환단고기에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임나가라는 대마도(對馬島)가 분명하고, 경남 김해 지역이 아니다.

[3], 광개토대왕의 비문 수 종류를 비교 연구한 이진희 선생은 일본인들이 광개토대왕비에 석회를 발라 비문(碑文)을 조작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비문은 4면으로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 시조의 탄생과 대비려(對碑麗) 관계 기사(記事)가 318자, 백제에 대한 기사(記事)가 366자, 倭(왜)에 대한 기사(記事)가 382자, 부여(夫餘)에 대한 기사가 95자, 왕능 수묘(守墓)에 관한 기사(記事)가 641자 라고 밝혔다.

[2]. 일본은 왜 비문을 훼손하고 글자를 조작했는가?

상기의 [1~3]의 내용을 살펴보면 광개토비문은 1883-1884년경 일본 참모본부의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 일본 중위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처음 일본으로 가져왔을 때는 비문이 훼손되지 않고 깨끗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일본 중위가 가져온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원본에 광개토대왕이 일본을 멸망시킨 치욕적 내용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에 비문 글자를 쪼아 훼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청일전쟁(1894-1895년)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광개토비(碑)를 일본으로 운반까지 계획했다고 한다. 양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며 일본 관련 중요 글자만 훼손하여 위조된 글자에 석회로 발라 탁본한 흔적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 후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 금서룡(今西龍)이 1913년 중국에 출장가서 이 비(碑)를 답사한 결과를 "大日本時代史" 부록에 실으면서 "제2면 말행(10행)은 문자를 넣을 만한 여지가 없고, 제3면 제1행은 탁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비문(碑文)에는 제2면 10행의 문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고, 제3면 1행에도 결락되지 않은 글자가 있었다. 금서룡은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의 글자는 이미 글자를 알아 볼 수 없이 결락되어 "탁본(拓本)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했다. 금서룡은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며, 우리역사 왜곡의 주역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금서룡(今西龍)이 저술한 "大日本時代史" 부록은 금서룡이 비문을 훼손한 사실을 여실히 들어 낸 증거가 된다. 

   一自渡海所至擊破倭人倭人百濟之介也百濟先與倭密通使之聯侵新羅之境..中略.. 以環時則百濟新羅駕洛諸國皆入貢不絶契丹平凉皆平服任那伊倭之屬莫不稱臣」

[환단고기]「광개토대왕은 한번은 바다를 건너가서 倭人(왜인)를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가 개입하고 있었는데 백제는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고 연합하여 신라의 국경을 계속 침범하였다...중략.. 광개토왕이 친히 바다 건너 일본의 정벌이 끝난 후에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다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외(伊倭)는 물론 신하로서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기 본문의 임나는 대마도 왜이고 이세(伊勢)는 구주왜(九州倭)를 지칭한다. 따라서 "임나(任那)와 이왜(伊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문구는 대마도왜(對馬島倭)는 물론 구주왜(九州倭)가 모두 다 광개토왕에게 복속된 속신국이라는 뜻이다. 

  일본인들은 송서(宋書) 왜전(倭傳)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의 마지막 왕 무(武)는 동쪽의 모인(毛人) 55개국, 서쪽 66개국, 북쪽 95개국을 복속시켰다고 주장하고, 자칭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의 기록을 한국 땅을 다스렸다. 라고 주장하였다. 

    [ 興死弟武立自稱 倭, 百濟,新羅,任那,加羅. 秦韓, 慕韓. 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이때는「왜왕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이 되어 자칭 왜라 칭한 것은 일본 열도 속의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의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즉 자칭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한 왜왕(일본) 무(武)의 영역은 한국 땅이 아니고, 지금의 일본 본토이고,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다스렸다는 임나가라 또한 한반도 속의 경남 김해가 아니고 대마도로 밝혀졌다. 즉 광개토대왕은 경자(400년) 일본의 응신조(應神朝) 왜(倭)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후 대마도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했던 것이다.

환단고기의 고구려국 본기, 송서(宋書) 왜전(倭傳), 광개토왕 비문(碑文)을 종합하면 광개토왕은 영락(永樂) 10년 대마도(對馬島) 속의 왜를 즉시 항복시키고 안라인을 술병하도록 하고 일본 열도(日本列島) 속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왜(倭)를 모두 다 평정하고 안라인을 술병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계연수 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적혀 있는 비문 내용과 비문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 비문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서 결락된 글자는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적혀 있는 글자와 같은 글자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계연수님이 비문(碑文)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보았을 때 새겨져 있던 글자를 그 후 갑자기 결락된 것은 일본열도가 광개토왕에게 정복당한 사실을 영원히 감추기 위한 일본왕의 술책이었다. 그때 한국 역사왜곡의 주역이던 일본인 금서룡(今西龍)등 10여명의 일인 학자들이 중국을 출장하여 우리나라 사료를 수집 중에 광개토대왕비문을 훼손했던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의 왜 관련 부분의 결손된 글자는 1884-1885년경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의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 대위가 집안(輯安)에서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은 훼손하지 않고 원 비문대로 일본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데 1889년 6월 "會餘錄(회여록)" 제5집에 게재되어 처음으로 외부에 발표되었는데, 그 쌍구가묵본에는 왜(倭) 관련 부분이 집중적으로 결락되어 있었다.  즉 1895년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쌍구가묵본대로 광개토왕비의 왜 관련 부분글자를 훼손, 조작하고 비문의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쌍구가묵본을 대량 복사해서 진짜처럼 선전하였던 것이다. 

 [3]. 일본인들이 광개토비명을 훼손한 결정적 증서

일본인들이 비문을 훼손하고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탁본하여 만든 결정적 증서가 있다.

  [1], 중국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 선생이 1902년에 입수한 탁본에는 새카만 바탕에 자형이 뚜렷하고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고 한다. 이는 1902년 이전에 일본인들이 비 전면에 석회를 칠하여 글자를 조작했다는 확실한 증서인 것이다. 

  [2], 프랑스의 동양학자 사반누가 1907년 4월에 입수한 탁본에는 양수경(楊守敬) 탁본에도 없던 글자가 나타나고, 다른 글자로 바뀐 것도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비문을 훼손시키고 비명에 다시 석회를 발라 일부 글자를 만들어 넣은 후 탁본(拓本)했기 때문이다.

그때 "安羅人戍兵" 뒤에 "滿"자 등을 만들어 넣었는데, 이는 중국 집안으로 파견된 조선사편수회 위원들이 변조된 쌍구가 묵본 대로 왜(倭) 관련 부분을 훼손했다가 나중에 학자들의 연구로 "滿"자 등이 임나일본부 학설을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滿"자 등을 만들어 넣은 증거로 밝혀졌다. 즉 일본인들은 1889년 6월 "會餘錄" 제5집에 게재된 쌍구가묵본을 인용하고, 그들은 한결 같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극구 감추고 "某人" "某 日本人" 등으로 적어서 대대적 홍보를 시작했던 행위가 일본의 만행을 엿볼 수 있다.

사코오 대위의 신분이 노출된 시기는 그로부터 30여년 후 참모본부에서 퇴역한 장교가 술기운에 경솔하게 입을 놀렸을 때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수십년 동안이나 극구 감춘 사유는 사코오 대위의 처음 탁본한 원본은 결자(缺字)가 없이 깨끗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 원본을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변조한 사실이 노출됨으로써 비명훼손과 일제의 우리역사 왜곡이 들통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 정부 당국자는 비문 원본을 입수하라

 정부당국자는 1902년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이 탁본한 원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 사반누가 1907년 4월에 입수한 탁본을 즉시 입수하라, 그리고 정부당국자는 7천만 국민을 기만하는 민족 반역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조국에 목숨을 바친 민족사학자 계연수 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에서 광개토대왕이 일본을 정복한 역사적 진실을 지금이라도 국내에 공포해야 마땅 할 것이다. 한편 일본인들이 광개토비문을 훼손하고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탁본한 사코오 대위가 만든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본인들의 만행을 전 세계 각국에 규탄하라


[4]. 광개토비문을 훼손, 조작한 일본왕은 사죄하라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무려 7,200여년의 역사를 말살한 천인공노할 만행(蠻行)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인류의 부모”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원숭이류에서 진화되어 사람이 된 것처럼 진화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편 일제가 [종교 원천국의 한국역사]를 말살했기 때문에 오늘도 세계 각처에서 종교 전쟁이 끊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 근본적 요인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된 한국 고대사 복원은 대한민족 만을 위하는 중대사가 아니고 세계의 전 인류를 위하는 일대역사(一大役事)입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의 본 연재는 [인류 부모국의 한국역사 말살]에 대해 일본왕의 실토를 촉구하기 위함이 목적입니다. 즉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인터넷 상 모든 정보가 노출된 대명천지에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 없고 역사적 진실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은 천리이며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大韓民國이 [인류의 부모국이며, 4대문명과 종교의 원천국]의 역사적 진실을 중국, 일본사학자들은 다 알고 있으나 오직 얼빠진 한국인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본 고증에 의한 폭로는 한, 중, 일의 3국사학자는 물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본왕은 참회하고, 스스로 전 세계 인류 앞에 사죄해야 천벌(天罰)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왕은 천벌을 받기 전에 진심으로 사죄하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 정부 당국자는 한국의 유적물을 검증하라

현재 중국 본토의 柵城(책성)에는 太祖武烈帝(태조무열제)의 紀念功德碑(기념공덕비)가 있으며, 東鴨綠(동압록)의 皇城(황성:집안)에 광개토대왕의 대훈적비가 있으며, 安州(안주)의 淸川江(청천강) 상류에 을지문덕 장군의 石像(석상)이 있다, 烏蘇里江(오소리강)밖에는 연개소문의 頌德碑(송덕비)가 있으며, 平壤(평양)의 牧丹峰(모란봉) 기슭에는 東川帝(동천제)가 만든 朝天石(조천석)이 있다, 朔州(삭주)의 巨門山(거문산) 서쪽 기슭에 乙巴素(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雲山(운산)의 九峰山(구봉산)에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 고구려 제11대왕 東川帝(동천제) 역시 단군이라 칭하였다 매년 寒盟祭(한맹제)를 맞이하면 반드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지금 평양의 箕林窟(기림굴)이 곧 한맹제를 맞아 [황천상제 여호와 하느님]에게 禮典(예전)에 맞춰 제사하던 곳이다. 무덤의 동굴은 궁전같이 만들어져 있고 아홉 개의 사닥다리로 내려간다. 이 箕林窟(기림굴)이 있는 곳으로 가는 행로(行路)에 모든 사람이 다 알아 볼 수 있도록 그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표석을 세워 두었는데 이를 朝天石(조천석)이라 했다. 

 을파소는 서기 203년 고구려 산산왕 시대의 재상으로 압록곡 사람이며 고구려 제 2대 留儒王(儒璃王:유리왕) 시대의 大臣(대신) 乙素(을소)의 손자이다. 을파소는 전국의 나라 사람 중에서 皀衣仙人(조의선인)을 선발하여 특수교육을 시켰다. 이들은 법식을 잘지켰음으로 어느 누구 보다도 자긍심이 대단하였으며 무슨 일이던 일을 더하여도 게이치 않고 모두가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고 이들은 국왕의 使臣(사신)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을파소의 묘가 있는 朔州(삭주)를 국사에서 춘천으로 기록 되어있다 춘천에 “을파소의 묘”가 있는가? 상기와 같이 중국 대륙에 선조님의 유적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 당국자는 철저히 탐색 검증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보존하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고구려 文咨好太烈帝(문자호태열제)는 改元(개원)을 明治(명치)로 하고 11년에 齊(제),魯(노),吳(오),越(월)의 지역을 소속시켜 고구려 강역은 점점 확대되어 대국이 되었다. 고구려 文咨帝(무자제)께서 明治(명치) 11년 11월 백제의 越州(월주)를 공격하여 쟁취하고 署(서), 郡(군), 縣(현)으로 개명)하면서 松江(송강), 會稽(회계) 吳(오), 越(월)을 左越(좌월), 山越(산월)을 泉州(천주)라 하였다.

平崗上好太烈帝(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크고 말을 타고 활을 잘 쏘아 고주몽의 기풍을 갖고 있었다. 改元(개원)을 大德(대덕)이라 하고 덕치로 교육에 힘을 쏟아 그의 미덕은 세상이 밝았다. 大德(대덕) 18년 丙申(병신 509)에 황제는 대장군 溫達(온달)을 시켜 碣石山(갈석산)과 拜察山(배찰산)을 추격하여 楡林關(유림관)을 대파시키고 북쪽에 楡林鎭(유림진)을 설치하고 동쪽은 다 평정시켰다 註 : 楡林(유림)은 중국 山西省(산서성)에 있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국의 石多山(석다산) 사람으로 일찍이 입산 修道(수도)하며 기도를 하던 중에 꿈같이 天神(천신)을 만나 대오각성하여 득도하신 분이다. 매년 3월 16일 날은 당연히 摩利山(마리산:강화도,산해관, 관미성)으로 달려가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 왔으며 10월 3일은 곧 백두산에 올라 황천상제 여호와 하느님에게 祭天祭(제천제)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는 것은 옛 神市(신시) 시대부터 풍속이었다. 

弘武(홍무) 23년(서기 612년)에 隋(수)나라는 국군 130여만 명으로 水軍(수군)과 육군을 아울러 침공하여 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기묘한 계략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薩水(살수)의 대전투에서 파멸시키니 隋(수)나라 水陸軍(수육군)은 모두 함께 궤멸되어 요동성(昌黎(창려,갈석산, 관미성,강화도)에서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 뿐이였다.

隋(수)나라 楊廣(양광)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구걸했으나 을지문덕은 듣지 않았다. 烈帝(열제)역시 엄명을 내리시니 을지문덕 장군과 모든 장병들은 승리한 여세로 한쪽은 玄兎道(현토도)에서 太原(태원)까지 이르고 한쪽은 樂浪道(낙랑도)에서 幽州(유주:하북성 북쪽)까지 들어갔다. 그 곳 州縣(주현)유민들을 초청하여 편안히 살수있도록 어루만져 주었다.

建安(건안),建昌(건창),白岩(백암),昌黎(창려)를 모두 安市(안시)에 소속시키고, 昌平(창평), 城(탁성), 新昌(신창),용道(용도)도 모두 진압하여 如析(여석)에 소속시키고, 孤奴(고노),平谷(평곡),造陽(조양),樓城(누성),沙溝乙(사구을)은 上谷(상곡)에 소속시키고, 和龍(화룡),汾州(분주),桓州(환주),豊城(풍성),鴨綠(압록)은 臨潢(임황)에 소속시켰다. 이로 인하여 옛 땅을 모두 다 회복하고 관리를 두었다.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1.일본의 천왕이 된 협야노(陜野奴:배반명(裵幋命)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 3세 가륵] 8년 병오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가륵 임금이 지백특(支伯特)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다. 10년 무신(BC 2173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餘守己)에게 명을 내려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했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우수국(牛首國)이라 한다. 소시모리의 후손 협야노(陜野奴)가 해상으로 도망하여 일본의 三島(3도)를 점령하고 천왕이라고 참칭하였던 것이다.

[단군세기 마한세가 하] 27세 마한 궁홀(弓忽) 원년 갑진(BC 737)년에 즉위하고, 갑인(BC 667)년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海島(해도:대마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단군세기 35세 단군 사벌] 50년 임금이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을 [일본에] 파견하여 웅습(熊襲:일본 규수 남쪽)을 평정하였다. [단군세기 36세 단군 매륵] 갑인 38년(BC 667년)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을 일본에 보내어 날마다 도적질을 일삼는 왜구(倭寇)를 토벌케 하였다. 12월 일본의 삼도(三島)가 모두 다 평정되었다. 이 陜野後裵幋命(협아후배반명)이 일본의 왕이된 인물이다. 가지마는 니기하야노모데루로서 페니키아왕이라 번역 했다. 일본서기는 [배반명(裵幋命)을 니기하야히노미꼬]라 했다. 한편 B.C 667년 일본서기는 신무왕(神武王)이라 했다. 즉 일본은 배반명을 신무왕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2. 신라의 연오랑이 일본의 천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 전문(全文)]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나타나서 연오랑을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를 본 일본 사람들이 연오랑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가 남편을 찾아 바닷가에 나갔더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바위 위에 있었다. 세오녀가 올라가자 바위는 세오녀를 업고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일본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라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자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되었다. 이에 그 비단을 궁궐 창고에 간수하고 그 보물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불렀다." 끝.

신라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일본의 '천일창(天日槍)설화와 『일본서기, 고사기』 등에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본서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 천일창이 배를 타고 하리마 국에 정박하여 시사하 촌에 있었던 때에 천황은 사람을 보내어 천일창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은 '나는 신라국 기미의 아들이요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있다 하므로 나의 나라는 동생인 지꼬에게 주고 귀화하러 왔노라 대답하면서 바친 물건은 하호소노-다마(葉細珠), 아시다까노-다마(足高珠), 우가까노-아까시노-다마(鷄鹿鹿赤石珠), 이즈시노-가다나(出石刀子), 이즈시노-호꼬(出石槍), 히노-가가미(日鏡), 구마노-히로로기(熊神籬), 이사사노-가다나(膽狹沙太刀) 등 아울러 여덟 가지 물건이다.

이어서 천일창에게 '하리마국 시사하촌, 아와지섬 이데사촌의 두 마을 중 네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고 하였다. 이에 천일창은 '신에게 만약 장차 살 곳에 대해 은혜를 베풀어 신의 뜻을 들어 주시면 신으로 하여금 몸소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신의 마음에 합당한 곳에서 살도록 허락해 주소서' 라고 청원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사기』는 '천일창 설화'를 『일본서기』와 다르게 전하고 있다. "옛날 아메노-히보꼬(天之日矛)라는 신라 왕자가 배를 타고 일본에 왔다. 신라에 있을 때 아누구마라는 늪이 있었는데 이 늪가에서 어떤 천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어 천한 사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더니, 햇빛이 여인의 음부를 비추어 여인이 빨간 구슬을 낳았다. 엿보던 사내는 그 구슬을 얻어서 허리에 차고 다녔다. 사내가 밭갈이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소에 싣고 골짜기를 들어가다가 아메노-히보꼬를 만났다.
 
아메노-히보꼬는 그 사내가 골짜기로 들어가 그 소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사내를 옥에 가두려 하였다. 사내는 차고 있던 구슬을 풀어 바쳐 풀려날 수 있었다. 아메노-히보꼬가 구슬을 가져다가 침상가에 놓았더니 구슬이 아름다운 계집아이로 변하여 계집아이를 아내로 삼았다.

그 아내는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왕자에게 바쳤다. 때문에 왕자는 거만해져서 아내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내는 '나는 너의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 가겠다'하고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나니와(難波)에 머물렀다. 아메노-히보꼬는 아내가 도망갔음을 알고 바다를 건너와 나니와에 이르자 거기 나루의 신이 가로막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지마 국에 머물렀다." 고 한다.

상기의 본문을 살펴보면 '천일창 설화'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공통점은 첫째는 신라 땅에 살았던 부부가 모두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둘째는 두 설화가 모두 일월과 관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월과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천일창 설화보다는 이즈모 신화와의 비교가 더욱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3.고구려의 섬부가 일본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성제의 벗이며 유리명왕(BC19~서기 17년)의 大輔(대보) 陝父(섬부)는 유리명왕에게 바른 직언을 올리다 직책을 강등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馬韓(마한) 산중에서 수백여 가구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나자 연속된 큰 홍수로 흉년이 들었다. 섬부와 將革(장혁)은 군중들과 함께 양식을 배에 싣고 패수를 경유하여 海浦(해포)에서 곧바로 바다로 航海(항해)하여 일본의 狗耶韓國(구야한국)에 도착하여 加羅(가라)국의 북쪽 해안에서 수개월 동안 살다 거주지를 阿蘇山(아소산)으로 옮겨서 정착하고 살았다. 이 陝父(섬부)가 일본의 多婆羅韓國(다파라한국) 시조가 되었다. [제21편 참조 바랍니다]


4. 선비(鮮卑) 모용외는 일본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

[환단고기, 대진국본기] 정주(正州)는 依慮國(의려국)의 도읍지이다. 鮮卑(선비)족 慕容廆(모용외)는 패망이 임박하자 갑자기 생각하기를 나의 魂(혼)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살아 있으니 어데를 간들 성공할 수 없겠는가? 하고는 은밀이 아들 扶羅(부라)를 깨워 부촉 받으며 白狼山(백랑산)을 넘어 야간에 海口(해구)를 건너 따르는 자가 수천 명과 함께 드디어 바다를 건너 倭人(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모용외가 말하기를 나는 三神符(삼신부)를 가지고 하느님의 명을 받았으니 군신들은 축하 儀式(의식)을 거행하고 공물을 바쳐야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혹 이르기를 依慮王(의려왕)은 鮮卑(선비)가 패망하자 도망쳐 바다 건너 일본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子弟(자제)들은 北沃沮(북옥저)로 달아나 이듬해에 자식들이 依羅(의라)국을 세웠다 하였다. 후에 慕容廆(모용외)는 또다시 침략을 받자 依羅(의라)국 사람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드디어 倭人(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註:慕容廆(모용외 269~333) 5호16국 중 전연(前燕)의 1대왕 남연왕(南燕王) 모용덕(慕容德)의 조부]

舊日本(구일본)에 伊國(이국)이 있었는데 또한 伊勢(이세)라 하며 倭(왜)와 이웃하고 살았다. 伊國(이국)의 도읍은 筑紫(축자)에 있으며 역시 일향국(日向國)이다. 동쪽은 倭(왜)에 속하고 그 동남은 安羅(안라)국에 속했다. 安羅(안라)는 본래 고구려의 忽本(홀본) 사람들이며 북쪽 阿蘇山(아소산)에서 살았다. 일본에 들어간 安羅人(안라인)은 후에 任那(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일찍이 협정을 맺어 친밀하였다.

[일본 땅] 末盧國(말로국) 남쪽에 大隅國(대우국)이 있었다. 始羅郡(시라군)은 본래 南沃沮(남옥저)사람이 취락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며, 南蠻(남만), 屠抌彌(도침미), 완夏(완하)와 比自체(비자체)의 족속은 모두 조공을 하였다. 南蠻(남만), 九黎(구려)의 종족은 山越(산월)로 부터 일본에 들어 온자들이며 比自체(비자체)와 弁韓(변한), 辰韓(진한)과 比斯伐(비사벌)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완夏(완하)는 고구려에 속한 노예들이며 이때 일본의 倭人(왜인)들은 산이나 섬을 거점으로 각기 100여국이 있었다. 그 중에서 拘耶韓國(구야한국)이 최대로 큰 나라였다. 본래 拘耶(구야)는 고구려의 사람이었다.

海商(해상) 선박은 모두 種島(종도)에 모여서 교역이 이루어 졌으며 吳(오), 魏(위) 蠻(만), 越(월)은 모두 통상 교역을 하였다. 처음 바다로 1,000여리 건너가면 對馬國(대마국)에 이르는데 4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바다로 1,000여리건너 가면 一岐國(일기국)에 이르며 4방이 300리쯤 된다. 본래는 斯爾岐國(사이기국)이라 하였으나 아들이 많아 여러 섬에서 모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또 바다로 1,000여리 건너가면 末盧國(말로국)에 이르는데 본래는 把婁(파루)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동남쪽 육로로 500여리를 가면  伊都國(이도국)에 이르며 곧 옛 盤余彦(반여언) 읍이라 하였다.


5. 광개토대왕은 일본을 평정하고 다스렸다

[비문 11] : 10년 庚子(경자:400년)에 교서를 내려 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고자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 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황급히 후퇴하기에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城(성)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拔本(발본)한 城(성)은 安羅人(안라인)이 戌兵(술병)하도록 하였다.[이 부분의 비문(碑文)에서 결락자가 집중돼 있다.] [제21편 참조바랍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實聖王) 4년(405년) 조의 기록에는 "왜병이 침입하여 명활성(明活城:강소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실성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 남쪽에서 왜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격파하고 300여성에서 살획(殺獲)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비명] 9년 己亥(기해 399년)에 백제의 殘黨(잔당)과 倭(왜)는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공격하고 다시는 신민국으로서 위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도 왜(倭)는 1년 후에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일본은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결정적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속민국으로 조공을 바치겠다는 제2차 광개토대왕과 왜(倭)와의 약정을 지키고 일본 열도로 들어가 500년까지는 한반도 침략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 후 일본 천왕의 부모국이며 본국의 백제 의자왕을 구원하기 위해 662년 일본은 대규모 군사를 한반도에 파견하게 된다.

상기 [1~5]의 고증서로서 ▶ 일본의 뿌리는 대한민족이며 일본의 고대역사는 없다. 는 역사적 진실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아키히토 일본왕은 2001년 12월 KBS와 기자회견에서 “나는 백제의 혈통이다.” 라고 솔직히 자인했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고대사는 전부다 왜곡, 변조, 조작하고 일본 부모국의 한국 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하고 천황(天皇)이라 참칭하고 있으니 어찌 패륜아가 아니며, 천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 광개토왕릉비문의 각미성(閣彌城)은 어디인가?

중국 하북성의 산해관(山海關)은 해발 500m의 각산(角山)과 발해(渤海)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산해관이라 이름 지었다. 현재 동문에 해당하 관성 입구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산해관(山海關)을 일명 관성(관미성)이라하며 이름과 같이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입니다. 산해관은 높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있는 가장 좁은 협곡이며 성 밖으로 나가면 수중현(綬中縣)이고 넓은 평야는 없습니다.  

天下第一의 산해관(山海關) ▲ &nbsp; &nbsp; &copy; 박병역 위원

 

왕험성(王險城) 패수(浿水) ▲ &nbsp; &nbsp; &copy; 박병역 위원


깊은 바다와 가파른 산이 바로 만나는 곳으로 산의 이름이 글자 그대로 각산(角山)이며 지형적으로 누구나 자칫 잘못하면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절벽이라 쉽게 침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요새지입니다. 이 관미성(關彌城)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성곽이 있다.동서남북으로 동익성(東翼城)ㆍ서익성(西翼城)ㆍ남익성(南翼城)ㆍ북익성(北翼城)이 있고 위원성(威遠城)이 멀리 밖에서 위용을 뽑내며 노룡두(老龍頭)가 있는 영해성(寧海城)은 바다 쪽을 용이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있고 대부분 성벽은 높이 12m에 두께 6m 정도이다. 
 

(1).낙랑군(樂浪郡)은 하북성 수성현에 있었다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북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따라서 낙랑군은 하북성 수성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은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다. 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다.

낙랑군=평양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지시대의 조선사편수회 핵심위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이후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李丙燾)는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1972)의 ‘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수성현(遂城縣)을 황해도 수안(遂安)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수성과 수안의 ‘수(遂)’자가 같다는 뜻에서 비정했던 것이다. [이병도는 민족사학자인가? 식민사학자인가? 민족반역자인가? 우리국사를 정립한 선구인가?]

중국은 자국의 역사를 변조 조작한 사실을 영원히 감추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속의 가장 중요한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을  수중현(綬中縣)으로 고쳐버렸다.


(2).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은 백제의 북쪽이다

고구려의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 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 소수림왕의 동생이다. 소수림왕 재위 14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은 41년(371)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땅 들에 장사지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어 놓았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말이다.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포로잡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케 했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웅진(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조에 아신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백제의 북쪽 변경의 요새지이다." 반드시 되찾기를 당부했다. <8월에 아신왕이 장군무(武)에게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 백제 북변의 요새인데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과인이 뼈아프게 생각하는 바다. 경은 당연히 [관미성]을 항상 잊지 말고 나의 한을 꼭 설욕하라.”>라고 당부하였다. 백제의 아신왕은 관미성을 비릇한 석현성 등 10여 개의 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이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한번 도 승리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 하북성 창려(昌黎)는 고조선 변한의 준왕 도읍지이다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索隱韋昭云「古邑名[중국이 글자 조작 삭제」徐廣曰「昌黎有險瀆縣」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遼東郡 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 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조작 삭제]

[사기권 115 조선열전 제55]: 집해서광(集解徐廣)이 말하기를, [하북성]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색은위소(索隱韋昭)가 이르기를 [고조선 변한 준왕의] 옛 도읍지 이름이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응소주(應劭注)의 지리지(地理志)에 요동(遼東)의 험독현(險瀆縣)은 조선왕(朝鮮王)의 옛 도읍지라 했다.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있고 패수(浿水) 동쪽에 있었다.

요동군(遼東郡)편 험독(險瀆)에 대하여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왕(朝鮮王) 위만(衛滿)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지역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험독이라 했다."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있으며 패수(浿水) 동쪽에 있었다. 이때부터 험독(險瀆)이라 했고, 사고(師古)와 신찬(臣瓚)이 말한 곳이 바로 이 험독(險瀆)이다.

BC 195년 위만은 1000여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와 고조선 변한의 제 41대 준왕(準王:武康王(무강왕:애왕)에게 망명을 요청했다. BC 194년 위만은 고조선 변한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고조선 왕험성(王險城)에 쳐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4). 인천시 강화군의 강화도는 관미성이 아니다

강화도 조약은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재개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국서접수를 거부했다.

이윽고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는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제7조,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영·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또 제1조의 내용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 땅을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고, 제7조는 군사작전시의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932년 1월 남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이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여 이 지역 전체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울 때 전략적 무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민족 반역자 이병도는 [강화도를 관미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관미성을 경기만(京畿灣)의 교동도(喬棟島)라고 비정했다. 

(5).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은 가짜가 아니겠는가?

단군왕검 재위 51년(BC 2283년) 운사(雲師) 배달신이 단군왕검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전해오는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 정상에 참성단이 있고 북동쪽 기슭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참성단(塹城壇)은 삼신(三神)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이며, 매년 전국체전 때 성화가 채화되는 성지(聖地)이며 대한민족의 영산(靈山)이다.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 &nbsp; &nbsp; &copy; 박병역 위원

 

강화도&nbsp; 참성단(塹城壇) ▲ &nbsp; &nbsp; &copy; 박병역 위원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에 희정선사가 창건한 정수사는 조선 세종 8년(1426년) 함허대사가 수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지었으나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등사(傳登寺)로 개명됐다.

전등사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돼 옮겨진 법화경 목판 104장이 보존돼 있다. 또 정화공주의 시주물로 전해오는 청동수조와 옥등도 남아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도 볼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해 호국불교의 사찰로서 당시 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강화도는 일명 갑비고차(甲比古次)라 칭하며, BC 2280년 3월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또한 高失(고시)씨의 후손 치우천제(蚩尤天帝)는 도읍을 樂浪忽(낙랑홀)에 정하고 국호를 靑丘國(청구국)이라 칭했다. [배달국 제 14세 慈烏支(자오지환웅(치우천왕)]의 그 용맹은 세상에서 다시없을 만큼 뛰어난 영웅으로서 머리에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철로 만든 도끼를 들고 안개를 일으켜 대적할 자가 없었다.

청구국 자오지환웅(치우)는 천하를 통일 할 결심을 굳히고 葛盧山(갈로산:갈석산)에서 광석을 채굴하여 칼과 창, 화살촉을 만들어 군사물자를 비축하고 드디어 81명의 형제들과 군사를 일으켜 涿鹿(탁록:북경 서북쪽)의 황제헌원을 물리쳤다. 또 九渾(구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일년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치우천제의 후손 番韓王(번한왕) 치두남은 경자(BC 2301)년 遼中(요중:요령성과 하북성 일대)에 열두성을 쌓았는데 險凟(험독),令支(영지),湯地(탕지),桶道(통도), 渠용(거용), 汗城(한성),蓋平(개평),帶方(대방),百濟(백제),長嶺(장령),碣山(갈산),黎城(려성)이다. 
 

   [광개토비문의 각미성(閣彌城)의 역사적 진실]

 1,광개토비문의 각미성이, 관미성(關彌城)이며, 왕험성(王險城)=험독현(險瀆縣)=산해관(山海關)은 다 같은 성(城)의 지명이며,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 2, [배달국 제 14세 慈烏支(자오지환웅(치우천왕)]의 도읍지이며,  3, 치우천제의 후손 변한왕(弁韓王) 치두남의 도읍지이며, 4, 고조선의 변한왕 기자(箕子) 성인(聖人)의 도읍지이며, 그의 후손 기준(箕準) 왕의 도읍지로서 결국 배은망덕한 위만의 침략을 받아 고조선 3한 중의 변한이 멸망하고 말았다. 5, 낙랑국(樂浪國)이며, 6,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이며, 7,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이며, 8,패수(浿水)가 있고, 9,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江華島) 조약을 맺은 곳이다.

10, 고조선 단군왕검이 BC 2280년 3월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던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이 아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기마보병을 거느리고 순행 길에 摩利山(마리산)의 塹城壇(참성단)을 친히 등정하시여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린 곳도 아닙니다.

한반도 속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한 강화도[江華島]는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20여일 이상이나 걸려 필사의 공격을 해야 할 정도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 요새지가 아닙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이병도가 중국 대륙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거짓 가짜의 대표적 산물이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의 塹城壇(참성단)이다.  중국 하북성‘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산해관(山海關),왕험성(王險城)’의 참성단이 진짜가 아니겠는가?

출처; 광개토대왕 비문 훼손-조작의 범인은 일본, 일본왕은 사죄하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8/23 [09:34]

 

 

[이덕일의 한국통사]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 고구려의 불교를 일으킨 소수림왕의 조카 담덕이 왕이 된 사연

조회수 16,832회

2020. 7. 20.

https://youtu.be/FC5708AjZD0?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광개토대왕 집중적으로 삭제된 2면 하단과 3면 상단 | 환단고기란 무엇인가

https://youtu.be/GwHmUV8Isvc?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마방] 광개토태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와 왜(倭) / 새로운 광개토태왕릉비 연구 - 이찬구 철학박사

https://youtu.be/hrB_RtttQP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우리가 몰랐던 광개토태왕비 1600여년의 시간 (feat.안교수님)ㅣ역사이다

https://youtu.be/jJfvZe5HYpY?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태왕릉]

태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태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또는 태왕릉(太王陵)은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 NewPP limit re

ko.wikipedia.org

 

조종엽 기자입력 2019. 8. 21. 03:00

"광개토대왕 묻힌 곳은 태왕릉 아닌 장군총" (daum.net)

고구려왕릉 3곳서 나온 유물.. 연꽃무늬 와당 비교 분석
"태왕릉은 광개토왕 때 개보수.. 선대왕인 고국양왕 무덤일 것"

2017년 촬영한 중국 지안시 장군총. 공석구 한밭대 교수는 출토된 와당을 분석해 장군총에 묻힌 이가 장수왕이 아닌 아버지 광개토대왕일 것이라고 논문에서 주장했다. 동아일보DB

 

출토된 와당(瓦當·지붕 기와 끝을 막는 막새기와)을 근거로 광개토대왕이 묻힌 왕릉이 태왕릉이 아니라 장군총일 가능성을 뒷받침한 연구가 나와 주목된다.
 

공석구 한밭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학술지 ‘고구려발해연구’ 최근호에 실은 논문 ‘연꽃무늬 와당으로 본 광개토왕릉 비정’에서 “여러 와당과 명문(銘文) 기와 등의 유물을 종합해 보면 광개토대왕이 태왕릉에 묻혔다고 보기 어렵다”며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안(集安)시에는 고구려 왕릉이 산재해 있다. 대중적으로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 장수왕릉은 장군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중국 학계는 광개토왕릉은 태왕릉이라고 보는 편이지만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태왕릉설과 장군총설이 경쟁하고 있다.

공 교수는 중국 측이 출간한 발굴보고서를 통해 출토 유물을 비교 분석했다. 그는 먼저 지안시에 있는 또 다른 고구려 고분인 천추총을 광개토대왕이 개·보수했다고 봤다. 천추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생전 연호 ‘永樂(영락)’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또 천추총에서 함께 출토된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제작 시기 역시 광개토대왕 때라고 봤다. 광개토대왕이 천추총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영락’ 명문 기와와 이 와당을 함께 제작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이 기와에 등장하는 ‘未(미)’자를 간지로 보아 제작 시점은 광개토대왕 재위 17년인 407년(정미년)이라고 봤다.

왼쪽은 태왕릉, 오른쪽은 장군총에서 출토된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의 그림이다. 공석구 교수 제공
 
문제는 태왕릉에서도 이 와당과 문양의 구성 방식 등 모양이 거의 같은 이파리 6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이다. 공 교수는 “이는 천추총과 태왕릉을 비슷한 시기 개·보수했다는 뜻이고, 태왕릉 역시 광개토대왕 시절인 ‘영락’ 연간에 개·보수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이 될 수 없다. 왕의 사후, 장례의 일환으로 왕릉이 건설됐다고 볼 때 살아있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무덤을 개·보수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태왕릉에 묻힌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선대왕인 고국양왕일 것이라고 봤다.
 

그럼 광개토대왕은 어디에 묻혔을까. 이 역시 또 다른 와당에 힌트가 있다. 태왕릉과 장군총에서는 모두 이파리 8개짜리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됐다. 이 역시 서로 모양이 거의 같아 같은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장군총을 축조하면서 이 와당을 썼고, 할아버지의 무덤인 태왕릉 역시 이 와당으로 함께 개·보수했던 것”이라며 “결국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라고 밝혔다.

 

장군총에서 연꽃무늬 와당이 한 종류만 출토된 것 역시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장군총은 축조된 이후 개·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공 교수는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왕실이 직접 제사를 받들기 어려워진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기 412년 39세로 서거해 장수왕 3년(414) 산릉에 묻힌 광개토왕의 무덤은 어디일까.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학자들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위치한 광개토왕비 주변의 태왕릉과 장군총을 놓고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다.

특히 중국 학자들은 2004년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한결같이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내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있다.

광개토왕비와의 거리로 따지면 태왕릉이 400여m, 장군총은 1.7㎞ 정도 떨어져 있다. 고분군이 밀집한 국내성 동쪽 용산(龍山)과 우산(禹山) 아래에 형성된 무덤으로, 거리상으로 따지면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일 가능성이 높다. 크기도 태왕릉이 장군총의 두 배에 달한다. 그러나 방위적인 면에서 볼 때는 광개토왕비가 장군총 묘실 전면에 위치하고 있어 능의 전면에 비가 위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부합한다.

 

태왕릉은 무덤 주변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바라건대 태왕릉이 뫼처럼 안정되고 높은 산처럼 굳건하기를)'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실시된 조사에서 제대(祭臺) 시설이 확인되고 '신묘년 호대(태)왕 □조령 구십육(辛卯年 好大王 □造鈴 九十六)'이란 글씨가 새겨진 청동방울이 출토됐다. 제대 시설의 성격이나 호태왕이 반드시 광개토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등 반론이 적지 않지만,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늘어나고 있다.

국내 학자 가운데 태왕릉을 광개토왕으로 비정해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지난 18∼19일 열린 광개토왕 1600주기 국제학술회의에서 광개토왕비 앞을 흐르는 소하천을 동천(東川)으로 비정한 뒤 태왕릉과 광개토왕비가 동일 공간에 위치한 것에 비해 장군총은 광개토왕비와 동천으로 비정되는 하천에 의해 별개의 공간으로 구획돼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 했다.

 

 

입력 2005. 8. 2. 16:02수정 2005. 8. 2. 16:02

백승옥씨 주장, "광개토왕릉은 장군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지린성 지안현 태왕릉 앞에 있는 광개토왕비(414년 건립)는 신도비(神道碑) 일종이며, 종래 광개토왕을 묻은 곳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인 태왕릉은 광개토왕 아버지인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 384-391)이고, 실제 광개토왕릉은 종래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는 장군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백승옥 함안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국고대사학회가 4-5일 계룡산 동학사 입구 동학산장에서 '집안지역 고구려 왕릉의 제문제'를 주제로 개최하는 제7회 하계학술대회에서 이런 주장을 담은 논문을 제출한다.

 

주최측이 미리 배포한 논문 '중국 집안 지역 고구려 왕릉의 피장자 문제 : 태왕릉ㆍ장군총을 중심으로'에서 백씨는 최근 중국측이 공개한 태왕릉 출토 유물 중에서도 소위 '신묘년'(辛卯年)이라는 명문이 확인된 청동방울을 태왕릉 피장자로 고국양왕을 지목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거론한다.

백씨는 우석대 조법종 교수가 이 자료를 지난해 1월에 국내에 처음 소개하면서 주장한 '광개토왕릉 확정설'을 정면 반박하면서 "(나는) 이 청동방울이야말로 태왕릉 주인공이 광개토왕이 아님을 말해주는 자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청동방울은 중국측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2003년, 태왕릉 남쪽 하단부 구(溝. 도랑의 일종)를 조사할 때 청동 부뚜막을 비롯한 다른 유물 30여 점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여기서는 "辛卯年 好大王 ○造鈴 九十六"이라는 12자가 확인됐다.

5번째 글자 '大'(대)는 발음이나 뜻 모두 太(태)와 통용됨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이 문구에 나오는 '好大王'(호대왕)은 '好太王'(호태왕)과 같을 것임은 두 말이 필요없다. 문제는 ○로 처리된 일곱 번째 글자. 백씨는 이 글자가 많은 지적이 있었듯이 무당을 의미하는 '巫'(무)일 것으로 간주했다.

백씨는 이 '好太王' 혹은 '好大王'이 여느 고구려왕의 시호에는 항용 붙는 수식어일 뿐이며, 그것을 광개토왕비라든가 모두루 묘지명, 혹은 신라 호우총 출토 금동은합 등지에서 확인되는 광개토왕을 지칭하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나 '國岡上廣開土地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시호에 '好太王'이란 말이 들어갔다 해서, 그것이 곧 광개토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고구려왕의 시호에도 이런 문구는 흔히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독창적인 견해는 아니다. 일부에서는 그런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씨는 이 논문에서 문제의 청동방울에 적힌 문구는 신묘년이라는 해에 호태왕의 무당이 방울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되므로, 당연히 이 방울이 출토된 태왕릉은 신묘년에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백씨는 신묘년은 광개토왕 즉위년이기도 하면서, 그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은 해이므로 신묘년에 만든 방울을 부장한 태왕릉은 당연히 고국양왕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씨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광개토왕 생전 업적을 잔뜩 나열하고 있는 광개토왕비의 성격을 중국에서는 이미 진(晉)-송(宋) 시대에 유행하는 신도비(神道碑)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신도비란 말 그대로 무덤으로 통하는 길, 귀신이 통하는 길에 세우며, 더욱 중요한 점은 그런 신도비가 중국에서는 묘를 기준으로 동남쪽에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백씨는 강조한다.

그런데 신도비인 광개토왕비는 장군총을 기준으로 정확히 동남쪽에 위치하며, 이로 볼 때 광개토왕릉은 장군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박진호씨, 고구려 태왕릉 3D 복원 (daum.net)

입력 2003. 11. 14. 09:24수정 2003. 11. 14. 09:24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고구려 두번째 도읍인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 소재 태왕릉(太王陵)이 3D로 복원됐다.

디지털복원 전문가인 박진호 숙명여대 강사는 고구려 국내성 천도 2000주년을기념해 15일 충북 충주시 후렌드리호텔에서 백산학회(회장 신형식) 주최로 열리는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3차원 입체영상으로 복원한 고구려 태왕릉을 공개한다.

이를 위해 박씨는 1910년대 일본에 의해 작성돼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태왕릉 평면도와 장군총 무덤에 대한 조사 및 연구 성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된요동성 그림인 요동성도(遼東城圖)에 나오는 고구려식 건물을 대폭 활용했다.

 

피라미드식 7단의 방단식(方壇式) 구조를 하고 있는 태왕릉은 제일 아래쪽 단을기준으로 한변 길이 63m에 달하고 있으며 시신이 안치됐던 관(棺)은 제7단 계단 서쪽 문을 통해 중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일찍이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시어, 산악과 같이 평안하소서)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이 나와 "태왕릉"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광개토왕비가 발견된 지점 등으로 보아 광개토왕이 묻힌 곳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박씨가 복원한 태왕릉은 꼭대기에 향당(享堂)이라고 하는 사당을 갖추고 있다.

태왕릉과 같은 대규모 방단식 고구려 고분이 향당 시설을 갖추었다는 직접적인증거는 장군총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장군총 정상에는 지금도 건물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초석이 남아 있으며, 막새등의 기와가 주변에서 다량 출토됐다.

이를 근거로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1980년대에 장군총에는 애초에 능상(陵上)건물이 있었으며 이것이 곧 향당이라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박씨는 이와 같은 기존 연구성과를 반영해 태왕릉 정상에 향당 건축물을 복원하되 그 구조는 요동성도(遼東城圖)에 나오는 건축물을 원용했다.

박씨는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최근 직접 답사하고,관련 자료를 종합해 3차원 입체영상으로 복원하기도 하는 등 문화유산 디지털 복원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장군총]

장군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장군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군총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ko.wikipedia.org

 

  • 입력2009-04-30 17:06:00

장군총의 비밀|신동아 (donga.com)

장군총의 비밀

광개토왕·장수왕 묘가 아니라 고구려 시조 모신 신전(神殿)

  • 윤명철│동국대 교양학부 교수(고구려사) ymc0407@yahoo.co.kr│
  • 입력2009-04-30 17:06:00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개 계단을 가진 7층 구조다. 고대에 3과 7은 성수로 여겨졌으니 21계단을 가진 장군총은 특별한 이의 무덤이 된다. 윗부분 구멍이 뚫린 곳이 묘실이 있는 곳이고 아래 1층에 기대놓은 큰 돌이 ‘정호석’이다.

흔히 만주라고 일컫는 지역은 필자에겐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보다도 더 애착이 가고 가슴 뭉클한 곳이다. 잃어버린 땅이요 강제로 잊힌 역사를 품은 곳이라 생물학적 회귀본능이 그곳을 돌아다보게 만드는 모양이다.

만주 땅이 시작되는 곳, 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에 고구려는 서기 3년에 도읍하고 국내성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420여 년 동안 이곳은 한민족의 핵, 동아시아의 핵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둘레가 2.7km인 사다리꼴 성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궁성(宮城)과 도성(都城) 행성(行城)을 구분하지 않은 탓에 나온 오류다. 국내성은 남쪽으로는 압록강, 서쪽으로는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서 10km, 남북 5km에 달하는 분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안 시내에서 발견된 둘레 2.7km의 사다리꼴 성터는 궁성이었을 것이다.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해모수 그림. 평양 동명성왕릉 옆 기념관에 있다.

 
궁궐의 동쪽 문으로 나서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압록강이 흐르는 그다지 넓지 않은 들판 한가운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장중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돌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윗부분은 잘려나간 듯 편평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피라미드 모양을 닮아 중국인들은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옛터를 찾는 사람들은 장군총을 보는 순간 놀라워하다 금방 의문에 휩싸인다.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특이한 모양, 색다른 의미를 지닌 듯한 위치, 복잡한 구조 때문이거나 혹은 망해버린, 격파당한 역사의 상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기가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 건축물은 왕의 무덤이다”라고. 규모나 크기 위치로 보아 특별한 임금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주몽의 묘, 고국원왕의 묘, 광개토태왕의 묘, 장수왕의 묘라는 설이 난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수왕릉으로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정말 그럴까? 이 독특하고 복합적인 형태의 기념물이 그저 임금의 묘일 뿐일까?

고구려의 神市?

고대사회에서는 공공성이 강한 건축물에 집단의 시원이나 가치관, 자연과 만나는 태도, 조상을 맞이하는 방식, 백성들에게 전하는 정책, 후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등을 상징과 은유로 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건축물에 숨은 코드를 추적해보면 장군총의 주인뿐 아니라 이 건축물에 담긴 논리와 시대정신, 지향성 등을 알 수도 있다.

장군총을 축조한 사람들은 그 위치에 어떠한 의미를 두었을까.

사진 오른쪽 위에 있는 장군총은 왼쪽 아래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및 광개토태왕릉과 일직선으로

장군총은 북으로 우산(禹山)을 바라보며 동북으로 약간 기울어진 용산(龍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줄기가 낮아지는 편평한 언덕에 있다. 산골 분지답지 않은 너른 터에 서남쪽으로 통구평야와 이어지면서 지안분지 전체를 내려다보는 곳이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선 압록강이 묘실 입구의 방향과 거의 동일한 각도를 이루며 서남 방향으로 흐른다.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풍수상으로도 생기가 넘치는 명당으로 혈(穴)자리에 가까워 보인다.

주몽신화에는 천손이 강림한 장소에 의미를 두려는 ‘중심’ 사상이 있다. 단군신화도 유사하다. 천상에 살던 환웅이 인간세계를 구하려는 의지를 강력히 표방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무리(徒) 3000명과 함께 하늘을 모방한 ‘신시(神市)’라는 중심공간을 창조한다. 고구려는 여러 면에서 (고)조선 계승을 표방한 나라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수도에는 신시에 해당하는 신성 구역이 있어야 한다.

궁궐의 동문으로 빠져나가면 장군총을 비롯해서 광개토태왕릉, 임강총(臨江塚) 등의 대형 적석계단묘와 무용총, 각저총, 5회분 등 벽화를 담고 있는 고분을 만나게 된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는 추모(주몽)를 ‘부란강세(剖卵降世)’한 존재로 표현했다. 여기서 ‘알(卵)’은 해를 상징한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모두루총(牟頭婁塚)의 묘지석에서는 추모를 ‘일월지자(日月之子)’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어두운 공간에 유폐된 유화부인이 햇빛을 받아(感應) 임신했다고 적어놓았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태백산(太伯山)’의 ‘백(伯)’과, 환인(桓因) 환웅(桓雄)의 ‘환(桓)’자는 태양을 상징한다. 고구려도 해와 관련이 깊어서, 하늘(天)이란 곧 일월(日月)을 의미했다. 부여의 천제가 해모수(解慕漱) 또는 해부루(解夫婁)였듯이, 고구려 2대인 유리왕의 이름은 ‘해유(解孺)’, 왕이 되지 못한 그의 아들은 ‘해명(解明)’, 3대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4대 민중왕은 ‘해색주(解色朱)’, 5대 모본왕은 ‘해우(解憂)’란 이름을 가졌다.

경사 45도로 올라가는 계단 때문에 장군총은 무한 상승구조를 이룬다. 몸체와 묘실, 신전이 정확히 3등분된 형태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세 건축물

모두 ‘해(解)’를 성으로 쓰는데, 여기서 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실제로 ‘삼국유사’는 성을 해씨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해와 관련이 깊은 고구려에서, 궁궐 동쪽에 있는 무덤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존재가 된다. 장군총은 국내성의 동문과 거의 오차가 없는 직선으로 연결돼 있는데, 이는 동쪽 또는 해(日)와 관련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장군총에서 광개토태왕릉비까지는 일직선으로 1650m, 광개토태왕릉까지는 2050m인데, 이 세 구조물은 자로 잰 듯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이러한 인위적인 구도 속에 우리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코드가 숨어 있다.

장군총은 보통 무덤과 모양 자체가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보는 지규랫(ziggurat)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완성한 조적식(組積式) 형태다. 높이는 12.4m이고 네 밑변의 길이는 35.6m인 정방형의 사각뿔인데, 네 측면의 사선을 이으면 경사는 대체로 45도가 나온다. 정면에서 보면 1:1:1의 배율로 삼각형을 이루는 무한 상승구조다.

이러한 형태는 이전의 무덤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광개토태왕릉도 형태상으로는 유사한 9층의 무덤이지만 기하학적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왜 고구려인들은 유연성과 절제미를 갖춘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장군총에 실현된 우주산

고대 건축물에서 삼각형이나 정사각의 뿔은 보통 ‘우주산(宇宙山)’을 상징한다. 정사각뿔의 중심점을 통해 하늘과 땅과 지옥이 연결된다. 인간과 천계(天界)가 결합한다. 이러한 우주산 개념은 세계 곳곳에 구현되었다. 인도의 메루산이나 예루살렘의 시온산, 그리스의 올림포스산, 일본의 후지산, 미국의 올리브산이 그런 곳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나타났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태백산 꼭대기가 우주산이다. 주몽신화에서 해모수가 하늘에서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흰 고니(鵠)를 탄 100여 명과 함께 내려온 곳으로 묘사된 웅신산(熊神山)도 우주산이다. 그렇다면 산 모양을 이룬 장군총은 단군신화의 태백산 혹은 주몽신화의 웅신산이나 용산(龍山)을 상징한 것일 수 있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고, 주몽신화는 단군신화를 이었으므로, 국내성 근처에는 주몽신화뿐 아니라 단군신화와 연관된 기념물도 있어야 한다. 장군총이 그러한 기념물에 걸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장군총은 7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1200여 개의 화강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큰 것은 길이가 5m가 넘는다.

사각뿔의 장군총은 개정석(蓋頂石) 위의 사라진 부분까지 포함해 몸체, 현실(묘실), 신전(墓頂)의 세 부분으로 정확히 등분되어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공간은 셋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환인 등이 사는 천계, 두 번째는 환웅이 가화(假化)하여 웅녀와 결합해 건설한 새로운 질서인 인간계, 세 번째는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동물계다. 이러한 공간 분할 구조는 주몽신화에서도 나타난다.

맨 아래층인 제 1층은 4계단으로 되어있고, 나머지 6개 층은 3계단씩이므로 합하면 22계단이다. 그런데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는 3수론을 따르므로 계단은 21개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1층에서 밑돌로 보이는 계단을 기단부의 상대석(上臺石)으로 본다면, 1층도 3계단이 된다. 7층×3계단=21계단으로 단군신화와 같은 수리구조를 이루게 된다.

고대에서 수(數)는 단순한 부호를 넘어 사상을 지배한 존재였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물론이고 ‘천부경(天符經)’ 등에서도 수는 현상을 나타내고 본체를 규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샤머니즘 세계에서 3은 우주성(宇宙性)을 상징하고 신비한 힘을 가진 숫자다.

‘3×7=21’이 이뤄진 곳

‘3’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자주 나타난다. 주몽신화에서 해모수가 웅심연(熊心淵)에서 만난 하백의 딸은 유화를 비롯해 셋이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거느린 신하도 오이 마리 협보 세 명이었고, 모둔곡(毛屯谷)에 도착해서는 이상한 옷차림을 한 세 사람을 만나 나라를 건국(生)한다. 유리도 세 명의 신하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졸본부여로 온다.

고구려에는 삼종의 신보(神寶)가 있었다. ‘삼국사기’와 ‘수서’ ‘북사’에는 고구려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고인의 시신을 사망 후 3년까지 집에 마련한 특별한 방에 모셔놓았다가 길일을 택해 매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부모와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3년간 상복을 입으나 형제들을 위해서는 석 달만 입었다고 한다.

7이란 숫자도 3 못지않게 중요시했다.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우주목은 칠혹성(七惑星)의 하늘과 동일시된다. 우리 문화에서 7은 북두칠성과 관계가 깊다.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은 95기가 넘는데, 이 가운데 22기의 고분에 750개 이상의 별이 그려져 있다. 몇몇 고분벽화에서는 일월과 북두칠성이 함께 그려져 있다. 주몽이 유리에게 신표로 남긴 단도를 숨긴 곳도 ‘일곱 고개와 일곱 골짜기가 있는 돌 위의 소나무(七嶺七谷 石上之松)’였다(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

장군총의 네 밑변에는 세 개의 정호석이 놓여 있다. 정호석 하나가 사라진 북면(사진의 아래쪽) 은 뒤틀림이 일어나 약간 무너져내렸다.

이렇게 고조선과 고구려에는 3과 7이 큰 의미를 갖고 있었으므로 둘이 만나서 만든 ‘21’에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은 곰에게 쑥 한 줌과 마늘 20톨을 주며 이것을 먹으면서 백일(100일) 동안 해를 보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얻을 것(便得人形)이라고 했다.

곰은 묘하게도 ‘삼칠일(三·七日)’만에 여인이 됐다. 100과 의미가 같은 3·7은 쑥과 마늘을 합친 21이란 수와 같다. 우리 민속에서 어린애를 낳으면 ‘세·이레’를 지나야 외부인을 만나게 했으니 ‘21’일은 생명을 시작하는 기간이다.

장군총의 형태에는 의미를 지닌 숫자가 또 하나 있다. 네 면의 모서리는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데, 이 모서리 아래층의 한 변 길이는 35.6m이다. 그런데 안학궁이나 정림사 등 그 시대에 만들어진 고구려 건축물을 보면 1척은 대체로 35cm 전후였다. 그렇다면 장군총의 아래 변은 정확히 100척이 된다.

정호석의 비밀

장군총 밑변에는 정호석(頂護石, 또는 護墳石)이라고 하는 거대한 돌이 비스듬하게 놓여 있다. 그 위용이 당당한 데다가 정면 가운데에 세운 것은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의미 있는 글씨나 그림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호석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대체로 무거운 하중 때문에 장군총이 뒤틀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공학적인 기능물로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호석이 두 개만 남은 북면은 일부가 뒤틀리면서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정호석의 기능을 이것만으로 한정지을 순 없다.

다행스럽게도 장군총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무덤들이 서울시 송파구의 석촌동에도 있었다. 대부분 파괴되고 4호분만 남았는데, 이 고분은 정방형에 한 변이 24m인 3층의 피라미드 구조다. 길이와 폭은 넓고, 경사는 완만하며, 높이는 낮고, 작은 돌들로 쌓아져 있었다. 붕괴 위험성은 전혀 없는 구조인데도 이 고분에는 작은 돌판을 기대놓았다. 그렇다면 장군총의 정호석은 공학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의미와 상징까지 고려한 것이 틀림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정호석의 숫자다. 지금은 북면에서 한 개가 사라져 11개가 남아 있지만, 원래는 한 면에 3개씩 12개가 서 있었다. 조금 후대에 만들어진 김유신의 묘 둘레에도 12지신상석이 서있고,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아스카(飛鳥) 키토라 고분 벽화에도 12지신상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징군총의 12개 정호석은 12지신상과 연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장군총의 세부구조 가운데 주목할 것이 묘실(墓室, 또는 玄室)이다. 묘실은 3층과 7층 사이에 위치하나 시신은 4층과 5층 사이에 놓여 있다, 땅이 아니라 땅 위에 떠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뜬 시신? 이러한 무덤 구조야말로 ‘하늘의 자손’에 걸맞은 무덤 양식이 아닐 수 없다.

시조묘를 모시고 이동했다

묘실은 물리적으로도 무게 중심에 해당하며 시각적으로도 중심이다. 내부는 한 변의 길이가 대략 5m이고, 높이는 5.5m인 정방형 구조다. 천장에는 면적이 60여㎡에, 무게가 50여t인 개정석이 덮여 있다.

고구려인의 의식대로라면 묘실은 현세와 다른 내세, 곧 하늘이 되는데 묘실 안에는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관대만 두 개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정확한 사실은 증명할 수 없지만 이곳에 있던 관은 명나라 시대에 도굴당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로 본다면 장군총이 분묘(墳墓)였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묻힌 특별한 존재는 누구였을까? 한때는 광개토태왕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근처에서 태왕릉이 발견됐으므로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장수왕이라는 설은 중국인들이 주장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즉위 15년 만에 이곳을 떠나 평양으로 천도했다. 그에게 불만을 품은 구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이곳에 그가 자기 무덤을 썼을 리 만무하다. 고구려에서는 임금이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무덤을 쌓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러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의 무덤일까? 장례풍습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보자. 여러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장례풍습에는 공통점이 있다. 유난히 조상을 숭상했고, 시조에 대해서는 각별한 의미를 두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풍습이 발전하면 무덤은 매장처를 넘어서 신앙의 대상체로 확장된다.

고대에는 수도를 이전할 때 신앙의 대상지나 시조와 연관된 상징물을 갖고 이동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조선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묘 건설부터 서둔 것을 보면 이는 확실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강한 고구려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고구려는 700여 년 동안 최소한 세 군데 수도를 두었다.

첫 수도로 알려진 곳은 환인지역이고, 두 번째는 국내성, 세 번째가 평양지역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에는 놀랍게도 세 번째 수도인 평양지역의 중화군에 시조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으로 불리는 진파리 10호분이다. 세 번째 수도에 시조묘를 조성했다면 420여 년간 도읍한 국내성에는 반드시 시조묘를 조성해놓아야 한다.

그랬을 경우, 국내성 묘역에 시조묘일 가능성이 높은 무덤은 어느 것일까? 고대 에는 탄생과 죽음을 서로 이어진 관계로 보았다. 주몽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 따르면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다니면서 정치를 했다. 주몽은 황룡(黃龍)으로 표현되었는데, 살아 있을 때는 기린굴(麒麟窟)을 통해서 하늘에 오갔으며, 죽을 때는 옥채찍(玉鞭) 하나만 남긴 채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운명시의 상황을 “하늘은 황룡을 아래로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오르시었다(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고려하면 주몽의 무덤은 수도의 동쪽에, 지형으로는 구릉이고, 의미상으로는 용과 관련 깊은 장소에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대왕 3년에 홀령에 황룡이 나타났으며, 40세에 돌아가셔서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해놓았다. ‘동국이상국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평양성 근처에 신축한 동명왕묘도 용산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첫 수도로 알려진 환인의 오녀산성도 용산으로 불렸다.

그런데 장군총의 뒷산이 바로 용산이다. 이러한 개연성 때문인지 지안의 역사를 기술한 ‘집안현지(集安縣志)’에도 장군총을 동명성왕묘(在城北十五里山勢莊嚴可觀前有東明聖王墓俗稱將軍墳)로 기록해놓았다. 그렇다면 지안에서는 장군총을 빼놓고 더 이상 시조묘를 찾기 힘들어진다.

용산 밑에 있는 장군총

장군총을 시조묘라 해도 그것으로 장군총의 비밀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묘라고 하기에는 위치나 형태, 묘실의 위치와 내부구조가 상징하는 이미지가 너무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장군총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묘실 위에는 또 다른 구조물이 있었다. 개정석 위의 사면에는 돌아가면서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20여 개 남아 있다. 난간이 설치되었던 흔적이다. 그리고 각 층의 사이나 무덤 구역의 안팎에서 잿빛 와당과 평기와 조각, 전돌 등이 출토됐다. 장군총의 정상에 기와를 덮은 건물이 있었던 증거다.

2003년 중국은 광개토태왕릉에 대한 조사를 끝내면서, 이 능은 장군총과 같은 계단식 적석무덤이며 9층 위에는 목조건물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주변의 천추총(千秋塚), 임강총(臨江塚), 중대총(中大塚), 서대총(西大塚) 등도 같은 구조를 가졌다고 했다. 묘 위에 있었던 건물은 어떤 용도이고 어떻게 생겼을까?

발해 고분의 위에 불탑을 세운 사실에 착안해 불탑설(佛塔說)이 제기됐다. 능묘 위에 세우는 일종의 사당(陵上完廟)과 같다는 향당설(享堂說)도 제기됐다. 이 설은 일찍이 이형구가 주장했는데, 대체로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하늘 신과 지모신이 만나는 곳

이 무덤을 지을 무렵 고구려의 성격과 처한 상황을 종교와 연관시켜 살펴보자. 여러 사료의 기록을 종합하면 4세기 무렵까지 고구려는 조상과 별 하늘 귀신 등을 모시는 다신교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핵심은 해와 하늘로 상징되는 해모수 세력과 물(水)과 구멍(穴)으로 상징되는 지모신(地母神)의 유화(柳花) 세력이었다. 이 양대 신 세력이 하나를 이루어 시조를 탄생시키고 고구려의 건국을 완성시켰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고구려는 전 시대와 사뭇 다른 환경을 맞이했다. 팽창을 거듭함에 따라 영토가 확대돼, 여러 종족이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국가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 고구려로서는 개방적인 태도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자기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임금을 강력하고 위엄 있는 존재로 격상시킬 필요가 절실해진다.

그 무렵에 만들어진 모두루총(牟頭婁塚)의 묘지석에서 나타난 ‘일월지자(日月之子)’와 광개토태왕릉비에서 보이는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라는 표현은 시조를 비롯한 고구려 임금들의 위상에 의미 있는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임금들은 정권(政權)과 신권(神權)을 동시에 장악하려는 정책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양한 신앙을 통일하고 신의 서열을 재정비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제의는 시조의 위상을 높이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중요한 행사가 된다. 자연스럽게 제의의 형식이 복잡해지고 신비스러워진다.

고구려인들은 사당을 세워 주몽에게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國中大會)처럼 시조와 관련된 행사를 국가제사의 중심에 놓았다.

‘위서’에는 645년 요동성이 당나라의 군대에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성안의 사람들이 주몽신을 즐겁게 하려고 여자를 곱게 단장시켜 성을 빼앗기지 않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당서’에는 요동성에 주몽사(朱蒙祠)가 있는데, 3일간 피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안시성에서 당나라군과 공방전을 벌일 때 상황이 위험해지면 성안에 모셔놓은 주몽사에 가서 빌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주몽은 이전부터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속의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존재였던 것 같다.

층의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계단 7층의 성수(聖數)로 만들어진 구조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주몽말고 또 하나의 신앙 대상이 있었다. ‘삼국사기’ 제사조에는 유화가 돌아가자 동부여에서 태후의 예로 장례를 지낸 후에 신묘를 세웠고, 그 후에 태조대왕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북사’ 고려전에는 고구려인들의 신묘(神廟)가 두 곳 있었는데, 주몽을 가리키는 등고신(登高神, 高登神이라고도 한다)과 유화부인을 가리키는 부여신(夫餘神)을 모셨다고 했다.

지모신 유화부인도 모셔

‘삼국지’의 동이전도 국가제사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즉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었는데, 이름을 수혈(穴)이라고 한다. 10월에 나라에서 큰 모임을 갖는데, 수신(神)을 나라 동쪽으로 맞이해 제사를 지내고, 목수(木)를 신좌에 안치했다’라고.

여기서 수혈에 사는 수신은 유화부인을 말한다. 유화는 건국신화에서는 지모신(水神, 농사신)이지만, 제의에서는 혈신(穴神)의 성격을 지닌다. 고구려의 여인들은 혼인 전에 집 뒤의 작은 집(小屋)에서 일정 기간 햇빛을 보지 않고 혼자 사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유화가 암흑(穴) 속에서 수태를 기다리는 과정을 풍습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렇게 주몽은 빛과 동굴의 결합으로 태어난 존재다. 천제를 알현할 때 그는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굴속에 들어갔다는데 실제로 오녀산성에는 큰 굴이 있고, 지안에도 국동대혈(國東大穴)이라는 굴이 있다. 평양 근처에도 기린굴(麒麟窟)이 있다.

이러한 신앙 형태를 가진 고구려가 국중대회나 동맹 같은 국가 규모의 제사를 지낼 때 유화의 신체인 목수를 안치한 신좌(神座)는 어디였을까? 이 장소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해모수(빛)가 내려올 수 있고 땅(水)에서 올라온 유화가 만날 수 있는, 하늘도 땅도 아닌 제3의 공간이어야 한다. 의미상으로는 합일(合一)을 이루어내는 곳이므로 그와 연관된 상징과 은유로 치장돼 있어야 한다.

그곳은 장군총 꼭대기에 있었던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이었다. 그곳은 형태와 명칭이 어떠하든 제의공간이었다. 시조묘이면서 시조가 신으로 추앙받는 제사장소였고, 수혈신, 즉 목수를 안치하는 신전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과 대지의 어둠이 만나는 합일의 공간으로 ‘하늘의 자손’들이‘하늘의 뜻을 받았다(天託)’는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였다.

윤명철

 1954년 김포 출생

 동국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저서 :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고구려 해양사 연구’ ‘장보고의 나라’ ‘역사전쟁’ ‘고구려의 정신과 정책’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장수왕 장보고. 그들에게 길을 묻다’ 등

장군총이 세워진 시대는 고구려가 질적으로 성장해 내부적으로는 다양성에 의한 갈등이 표출되는 시기였다. 갈등을 줄이면서 고구려를 발전시키려면 지식인들은 통합의 논리와 강한 자의식을 창출하고, 이를 ‘고구려 세계’에 선언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특히 3이라는 숫자로 상징된 합일(合一)의 논리를 담고 있다. 장군총은 해모수와 유화부인, 그리고 동명성왕의 혼이 살아 있는 고구려의 성소였다.

 

 

[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25> 고구려 국내성 '장군총'

[서울신문]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고구려 고분 유적
1966년 1만1280기… 현재 6854기만 남아
1~2세기 계장식·3세기 계단식 적석총 발전
최종단계 모습 갖춘 ‘장군총’ 형식 완성
北 “장수왕”… 南 “광개토왕” 묘주 이견
200t 횡압 견딘 정교한 기술로 원형 유지
적절한 거대함에 정교한 세부기법 백미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남아 있는 장군총 전경. 모두 7단의 계단식으로 축조했다. 제5단 중앙에 돌방 묘실을 만들고 입구를 노출시켜 기념물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제1단에 기대어 놓은 호분석 3개는 무덤의 횡압력을 지지하는 버팀돌이다.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제공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왕국의 수도는 성곽과 왕궁과 왕릉을 갖추어야 한다. 퉁고우(通溝)성이라 부르는 성곽이 바로 고구려 도성의 성곽이며, 시정부 청사 부근이 왕궁 터다. 그리고 십여기의 대형 왕릉이 산재하고, 그 최후의 완성작인 장군총이 우뚝 서 있다.

 

●국내성, 묘분총릉으로 남은 도성

첫 수도 졸본성은 현재 랴오닝성 환런(桓仁)현 오녀산성으로 비정한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고구리’에서 왔고, ‘높은(高) 고을(구리)’이라는 뜻이다. 첫 수도의 지형이 곧 나라 이름이 됐다. 도시국가적 성격이 강했던 고대의 국(國)이란 도성을 뜻하는 한자이며, 국내(國內)란 ‘도성 안’이라는 의미의 땅 이름이다. 2대 유리왕이 서기 3년에 천도한 국내성은 20대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25년간 수도였다.

평양 천도 후에도 평양성, 한성(황해도 재령 비정)과 함께 고구려의 큰 중심 도시로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668년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형제 간의 권력투쟁에 밀려 국내성에 은신했고 당나라에 부역해 고구려 멸망에 앞장섰다. 이후로는 중국계 왕조의 영토가 되어 한국사의 범위에서 사라졌다.

환도산성에서 내려다본 산성하 고분군 전경. 530기의 적석총을 포함해 총 1582기 고구려 고분이 밀집돼 있다.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제공

 

현존하는 국내성 일대의 중요한 유적은 거의 흔적만 남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성곽, 광개토왕비, 그리고 수많은 고분들이다. 고구려 고분은 1966년 조사 때 1만 1280기였는데, 1997년 통계는 6854기뿐이니 최근까지도 참담할 정도로 멸실되어 왔다. 600여년간 조성했던 고분들이 1400년 동안 파괴의 역사를 겪어 남은 것이 이 정도로, 전성기에는 최소 2만기 이상의 방대한 유적이었을 것이다. 5세기까지는 봉분을 돌로 쌓은 적석총, 그 이후는 흙으로 쌓은 봉토분으로 조성됐다. 국내성 일대에 현존하는 적석총, 즉 돌무지 무덤은 1700여기이며 추정 왕릉들은 모두 적석총이다. 무용총, 각저총 등 벽화로 이름 높은 무덤들은 돌방을 흙으로 덮은 봉토분들이다.

고고학에서 묘란 크고 작은 모든 무덤이며, 분총릉은 왕릉급 대형 무덤을 뜻한다. 그 가운데 매장자가 확실한 것은 릉, 매장자는 모르나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된 것은 총, 매장자도 모르고 특징물도 없는 것은 분이라 부른다. 국내성 일대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은 13기 정도인데 서대묘, 칠성산211호분, 장군총, 태왕릉 등으로 다양하고 혼란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칠성산 고분군의 871호분은 급경사지에 기대 높낮이가 다른 돌담을 쌓은 계장식 적석총의 대표적인 사례다. 산 정상부에 기대어 축조된 모습으로 산상왕의 무덤이라 비정하기도 한다.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제공
태왕릉은 초대형 계단식 적석총으로 광개토왕릉, 또는 그 부왕인 고국양왕릉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됐다.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제공

 

크고 높은 왕릉을 만들기 위해 초기에 발달한 축조법은 계장(階墻)식이다. 급경사지에 기대어 높은 돌담을 쌓고, 점차 낮은 돌담을 덧붙여 쌓는 방법이다. 완공되면 마치 아랫단부터 쌓아 올린 피라미드와 같은 모습이 된다. 국내성 일대의 계장식 적석총은 1~2세기에 조성된 마선구 626호분, 칠성산 871호분 등이다. 3세기부터는 완만한 경사지나 평탄지에 아래부터 여러 석단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계단(階段)식 적석총이 나타난다. 그리고 최종 단계인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에 이르러 그 형식을 완성했다. 이 세 무덤은 7~11단을 계단식으로 쌓았고, 중간 단에 돌방을 만들어 관을 안치했다. 또한 최상단 위에는 기와집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계장식 적석총은 밑변 길이 40여m, 높이 5m 이상의 큰 규모였고, 장군총을 제외한 계단식은 더 커져 밑변 60여m, 높이 10m 이상이었다. 대부분 붕괴되어 돌무지 언덕과 같이 남았지만, 뛰어난 기법으로 쌓은 장군총만은 그 온전한 모습이 남아 ‘동방의 금자탑’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금자(金字)탑이란 피라미드의 한자어다.

장군총 1호 배총. 장군총 뒤에 부속된 배장묘 유적으로, 규모는 작으나 역시 계단식 적석총이며 묘실의 거대한 천장돌이 남아 있다.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제공

 

●장군총, 동방의 금자탑

‘장군총의 묘주가 어느 왕인가?’는 뜨거운 논쟁거리다. 서쪽 1㎞에 떨어진 태왕릉이 광개토왕릉,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는 추정이 중국과 북한의 주류 의견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 64년 후에 죽은 장수왕이 굳이 국내성에 묻힐 이유가 없다. 따라서 장군총은 광개토왕릉이고, 태왕릉은 그 아버지 고국양왕릉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태왕이란 중국의 황제에 버금가는 고구려식 존호였고, 광개토왕뿐 아니라 고국원왕, 고국양왕도 태왕이라 불렀다.

 

밑면의 한 변 길이 31.6m, 높이 12.4m 규모다. 모두 7단을 쌓았고, 제4~5단에 석실을 만들어 묘실을 노출시켰다. 무덤의 표면은 잘 다듬은 사각형 큰 돌들을 쌓아 마감했다. 1100여개 마감돌 중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m의 거석이다. 정방형 석실의 천장은 5평이 넘는 거대한 판석으로 덮었다. 제7단 위에 난간 구멍과 초석들이 있어 목조 기와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고, 중남미 마야의 피라미드는 제단이었다. 장군총을 비롯한 계단식 적석총 정상에 제사용 건물이 있었다면, 이집트와 마야의 기능을 합친 복합형 피라미드가 되는 셈이다.

장군총 뒤에는 2개의 작은 적석총 폐허가 나란히 남아 있다. 이른바 배장묘로 장군총 묘주와 밀접한 관계인의 무덤이라 보인다. 그 옆에 좁고 긴 돌무지 면이 있는데 제사를 지내던 제대로 추정한다. 제대를 가진 적석총이 대개 11기이고, 제대는 왕릉의 필수 요소였다. 무덤 주변으로 잔자갈을 넓게 깔아 묘역을 만들었고, 그 바깥으로 돌담을 둘러 묘역을 보호했다. 완성된 고구려의 왕릉을 그려 보자. 광활한 벌판에 능장을 둘러 독립된 묘역을 조성하고 배장묘와 제대를 부설한 뒤, 그 중심에 우뚝한 적석총이 산과 같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군총이 아직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비밀은 정교한 축조기술에 있다. 우선 지하를 깊고 넓게 판 뒤 돌들로 단단히 다져 기초층을 만들었다. 기초부 자연석의 형태에 맞추어 1층 기단석들을 깎는 그렝이 기법을 사용했다. 모든 마감석 상부 끝 모서리에 돌출된 돌턱을 만들어 윗돌이 밀려나는 걸 방지했다. 돌을 많이 쌓으면 수직압력뿐 아니라 옆으로 밀치는 횡압력이 발생한다. 이전의 거대 적석총들이 붕괴된 가장 큰 이유다. 그렝이질과 돌턱은 횡압을 견디는 견고한 장치다. 제1층 석단에는 거대한 호분석을 기대 놓았다. 한 변에 3개씩 모두 12개에 이르는 호분석은 무덤의 총체적 횡압을 견디는 버팀돌이다. 하나의 무게가 20t 정도이니 어림잡아 200여t의 횡압을 1500년 동안 버텨 온 것이다.

장군총 최상단 상부에 21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난간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묘 위에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위로 갈수록 줄어드는 퇴물림 기법으로 돌을 쌓았고, 돌턱을 만들어 윗돌의 밀림을 방지하고 있다.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제공

 

●고구려의 미학, 거대함에서 적정함으로

장군총의 주인공으로 회자되는 광개토왕이나 장수왕은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왕들이다. 그 이전의 고구려는 잦은 외침으로 수도까지 함락당할 정도로 국력이 충분치 않았다. 왕권과 국력으로만 따진다면 훨씬 더 거대한 왕릉을 만들 수 있었지만, 장군총은 오히려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직전의 태왕릉은 한 변이 66m, 장군총은 그 절반이다. 이전의 모든 거대 적석총은 무너졌지만 4분의1 면적으로 축소된 장군총은 무너지지 않았다. 앞서 말한 정교한 기술들도 이유지만, 무엇보다 규모를 축소해 돌의 총무게를 줄인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거대함 속에는 늘 붕괴의 위험이 도사리게 된다. 태왕릉에서 출토된 전돌에 이렇게 쓰여 있다. “태왕릉이 산악과 같이 안정되고 견고하길 소망합니다.” 천추총에서도 문자 전돌을 발견했다. “천추와 만년의 세월 동안 견고하기를.” 무너질 줄 알면서 왜 그리 거대하게 쌓았을까? 권력이 약하면 허장성세가 커지지만, 충분히 강해지면 안팎이 일치하는 균형을 잡게 된다. 이전의 적석총들이 지나치게 커서 축소된 것으로 보일 뿐, 장군총 역시 거대한 크기다. 오히려 적절한 거대함이라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정교한 세부 기법으로 충만하다. 아름다운 거인이며, 세련된 군왕이다.

장묘법은 가장 바뀌지 않는 풍습이어서 종족적·지역적 문화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묘제는 단순 돌무지무덤에서 출발해, 계장식 적석총으로, 그리고 거대한 계단식 적석총으로 변화를 거듭했다. 장군총은 거대 형태를 추구한 적석총의 완성작이자 최후작이다. 이후의 고분들은 묘실 안을 화려하게 장식한 봉토분으로 바뀐다. 이제 무덤은 겉보기 대상물이 아니라 내세의 행복을 위해 은밀하게 준비된 실내가 된다. 허장에서 내실로, 현실에서 이상으로, 거대함에서 적정함으로. 장군총은 그 역동적 변화의 씨방이었다. 또한 고구려 문화의 풍부함과 역동성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남겨진 화석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위나암성]

위나암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위나암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나암성의 남쪽 성터 위나암성의 망대 위나암성의 동쪽 궁터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都城)은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고구려 유리명왕이 국내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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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국내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국내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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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를 찾는 고향, 국내성 [고구려사 명장면] (daum.net)

임기환입력 2022. 11. 19. 12:03
 

[고구려사 명장면-161] 고구려 역사를 찾는 고향, 국내성

이번 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자분께 양해의 말씀부터 드리겠다. 본 <고구려사 명장면> 연재를 여러 사정으로 부득이 올해 안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난 142회에서 고구려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기 위해 <고구려 역사현장 명장면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연재를 이어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를 마무리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애초 50~60회 정도로 예상했던 연재가 160회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독자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질책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 연재를 이어갈 수 있도록 귀한 지면을 선뜻 내어주고, 또 6년여 동안 내내 아무말 없이 제 원고를 받아주었던 ‘매일경제 프리미엄’의 무언의 배려에도 큰 감사를 드려야겠다.

 

이렇게 감사의 말씀으로 시작하니 마치 이번 회로 마무리하는 듯한 인상이지만, 그래도 160회를 넘긴 연재인데 불쑥 고별 인사로 끝내기는 못내 아쉽기도 해서, 앞으로 3~4회 정도 나머지 이야기를 집약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앞서 고구려 역사현장을 중심으로 풀어가고자 고구려의 첫 도성인 졸본(지금 중국 요녕성 환인) 현장으로 시작하였다. 다만 그 뒤 연재에서 역사현장 보다는 건국신화 등 초기 전승을 다룬 내용이 다소 많았다. 그런데 졸본 땅에서는 오녀산성[흘승골성] 말고는 딱히 고구려의 건국지이면서 초기 도성을 찾는 감동을 주는 유적지가 마땅치 않다. 주요 역사 현장 등이 환인 저수지 물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고성자고분군, 하고성자토성 등이 남아 있지만, 고구려인의 자취를 찾기에는 많이 허전하다.

물론 오녀산성 하나만으로도 환인을 찾는 방문객의 마음은 고구려 역사로 가득 찬다. 고구려인들이 건국지로 추앙했던 오녀산성은 멀리서 바라보는 그 경관이 지금도 여전히 신비로우며, 오녀산성에 올라 굽어보는 혼강과 환인 시가지 경관 역시 아득하게 먼 과거로의 상념에 빠져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환인의 졸본 도성은 오늘날 우리같은 방문자에게도 마치 설화로 남은 현장과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초기 역사 자체가 건국 신화부터 여러 설화들이 중첩되어 신화와 설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굳이 변명하자면 본 연재에서도 여러 전승 등을 두루 다루면서 역사와 설화의 경계를 탐색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 역사 현장을 찾는 본격적인 탐방은 두번째 수도 국내도성[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시작할 요량이었다. 어떻게 보면 국내성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오늘 우리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존재이다. 왜 행운이라고 했는지는 가보시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삼국시대 고대 도성이 여러 곳 남아 있다.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은 워낙 변형되고 파괴되어 예외로 치더라도, 웅진[공주]과 사비[부여], 그리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에 가면 저절로 역사 여행을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천년 수도였던 경주에서 많은 고분과 성곽, 폐사지 등 수많은 역사 현장에 서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고구려 국내성은 그 몇 배쯤이나 역사 현장답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집안 시내 곳곳에 눈을 돌리는 곳마다 발길 가는 곳마다 남아 있다.

이렇게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게 된 이유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곳 국내성에 한번도 주요 도시가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중국 세력과 한반도 세력이 접하는 변경지대였고, 그저 최변방의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하니 고구려시대의 유적과 그 유적이 보여주는 영화로운 경관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사진> 통구 분지 전경 (20세기 초)
그런데 19세기 말에 청이 이 지역의 봉금을 해제하고 관리를 파견하면서 고구려 국내성을 다시 수축하여 사용하였고,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집안시는 점점 도시화되어 갔고, 인구가 급증하고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아무래도 고구려 유적이 파괴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아있는 고분 등 고구려 유적이 압도적이라서 필자가 집안을 답사하기 시작한 90년대만 하여도 여전히 고구려의 옛도시라는 느낌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근래 백년 동안의 변화 과정을 비껴갈 수 있었으면, 우리는 살아 남아있는 고구려시대 도시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런 고구려 역사와 유적이 흘러 넘치는 국내성이란 역사현장을 이번 한 회에 일별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독자분들이 중국 집안시 국내성에 갔을 때 둘러보게 될 유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가이드 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사실 2년여 넘게 팬데믹이 있기도 했고 아직도 여전히 중국 여행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필자도 집안에 다녀온지 5년여 시간이 지났기에, 요새는 다시 집안으로 고구려 역사 여행이 가능해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동안 집안 그곳도 여러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는 탐방객의 발길이 거의 끊어져 있었을 테니, 다시 집안에 가게 되면 고구려 유적 탐방에 대한 허가 내지 관광 안내 등의 방식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독자분들은 의아하게 여기실 지도 모르지만, 집안시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을 허락없이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지는 않다. 그나마 집안시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되어서 형편이 나은 정도이다.

<사진> 집안시 고구려 유적 지도 (『집안고구려왕릉』,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집안시박물관)
집안시에서는 대체로 환도산성, 태왕릉, 장군총, 광개토왕비, 오회분 5호묘 이 5곳을 일반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공개하고 있다. 이 다섯 유적이 고구려 유적을 대표하는 면도 있어서, 대부분 관광객들은 이 5곳만 둘러보아도 충분치는 않아도 고구려 역사 현장의 감동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물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개방이 원칙이기 때문에 따로 집안시 관련 기관에 요청하면 탐방이 가능하지만, 전문 학자들 외에는 굳이 나머지 유적을 더 둘러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도 필자가 추가로 추천한다면, 집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구려 왕릉인 ‘천추총’, 그리고 집안 가장 서쪽 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미천왕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서대총’, 이 두 곳은 왕릉으로 나름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으니 탐방 목록에 추가하면 좋겠다.

고구려 시대 왕성이 있었던 국내성은 집안시 구 시가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입장료도 없고 허가도 필요없이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다. 아침 일찍 산책 겸 국내성을 한바퀴 둘러보시기를 권해드린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 및 그 이후에 국내성 성벽을 차지하고 있던 민가와 시장을 철거하고 성벽을 복원하여서, 과거 국내성벽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필자가 집안 답사를 시작했던 90년대만 해도 아파트 사이에 있던 북쪽 성벽 외 나머지 3개 성벽은 민가와 시장으로 가로 막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국내성벽은 전체 둘레가 2,7Km 정도이니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성문과 옹성, 치, 각루 등 고구려 축성술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어, 가벼운 산책길로 나섰지만 대체로 좀더 진지한 탐방길로 바뀌어 가게 마련이다.

집안시에서 탐방객의 눈길을 모으는 1순위 왕릉은 뭐니뭐니해도 장군총이다. 규모로 따지자면 장군총은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에서 열손가락에 겨우 들어갈 정도이지만,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으며, 그 입지도 높은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고분의 크기에 관계없이 장중힌 위용을 갖추어 이미지상으로는 다른 왕릉들을 압도하고 있다. 장군총에 대해서는 굳이 이런저런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터인데, 혹 집안을 탐방하게 되면 장군총의 현존 상태를 눈여겨 보기 바란다. 오랜 세월을 꿋꿋이 버텨왔는데 근자에는 조금씩 여기저기서 짜맞춘 돌 틈이 벌어지거나 기울어지는 상황이라 안타까운 마음이다.

다음 장군총 앞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우선 가장 가까운 거리에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너머 멀리에 집안 시내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이 경관을 꼭 보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장군총은 아직 그 고분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다. 가까이에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이 있으니, 결국 광개토왕의 왕릉이 장군총이냐 아니면 태왕릉이냐 하는 논쟁이다.

90년대만 해도 장군총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집안 시내를 바라보면서 이 장군총 자리가 마치 국내 지역 전체를 보위하는 입지라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렇다면 국내시대 최후의 왕인 광개토왕 왕릉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물론 논증이라기 보다는 심증에 가깝다는 점도 숨기지 않겠다. 하지만 이런 면이 역사 현장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이른바 ‘현장 감각’인데, 필자는 이런 현장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부지런히 만주 지역을 누비고 다닌 이유이다.

장군총 답사 뒤에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을 함께 둘러보면 고구려 역사 현장에 왔음을 온전히 실감하게 된다. 장군총과 더불어 집안에서 고구려 역사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유적에 대해서는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게다. 여기서도 하나 더 눈에 담고 가시는게 좋다. 광개토왕비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아주 가까이 제법 높은 구릉 위에 거대한 고분 1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임강총’이다. 이름대로 과거에는 압록강변 가까이 면해 있었던 고분이었다. 고구려 왕릉 중 가장 동쪽 편에 위치하고 있어 동천왕의 무덤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동천왕 때에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침공하여 수도 국내성이 함락된 아픈 경험이 있었다. 이른바 밀우와 유유 등이 활약하는 전승이 말해주는 바로 그 전쟁이다.

고구려 왕 이름 중에서 동천왕-중천왕-서천왕-미천왕으로 이어지는 이 4왕은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집안 분지 일대에 차례로 왕릉을 조영한 왕들이다. 앞서 이야기한 가장 서쪽에 있는 서대총은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그러하니 현 집안 시내에서 동천, 중천, 서천, 미천에 해당되는 물길을 찾으면 대략 이들 네 왕의 왕릉은 비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중국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왕릉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필자는 그 결과를 토대로 고구려 왕릉을 비정한 바 있다.

집안 답사에서 절대 빼놓아서는 안되는 곳이 환도산성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산상왕 때 환도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그 뒤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환인의 오녀산성과 그 입지의 특성을 비교하면, 고구려 산성이 갖는 또다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오녀산성이 산정상에 자리한 산정식이라,면 환도산성은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이다. 환도산성 역시 자연 지형을 최대한 잘 이용한 대표적인 고구려 산성의 좋은 사례이며, 근래에 남쪽 성벽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 복원하여 좀더 실감나게 고구려 성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산성 아래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고구려 시대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통상 “산성하고분군”이라고 부르는데, 고분 수가 약 1,600기에 이른다. 초기 고분부터 전형적인 계단식 적석무덤, 봉토 석실무덤 등 다양한 고구려시대 고분 형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들 고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면 고구려 시대로의 시간 여행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회분 5호묘를 소개하겠다. 국내성과 태왕릉 사이에 거대한 봉토무덤 5기가 동서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오회분이라고 부른다. 그 중 4호묘와 5호묘가 사신도 벽화고분인데, 5호묘를 그동안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 들어가서 그 벽화 실물을 본다는 것은 주요한 관광 자원임은 분명하다. 그만큼 오회분 5호묘 벽화는 이미 필자가 조사한 시점인 2013년 무렵에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고 있었다. 폐쇄가 시급하였지만, 중국 당국은 보존보다는 관광에 더 중점을 두고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펜데믹 기간과 그 이후의 운영 방식은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고구려 유적 탐방객들이 집안시에서 만나는 고구려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발굴조사 및 정비, 복원이 이루어진 유적이다. 90년대에 이들 유적이 방치되어 민간 주택이나 채마밭 등으로 훼손되어 가던 상황에 비해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정비와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고구려 유적으로서 진정성을 갖게 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런 점을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모든 정비와 복원에 임하는 기본 자세는 과거 역사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라는 점은 누누이 강조할 수 있다. 집안시에서 이루어진 정비와 복원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그런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게 필자 경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독자분들도 집안시에 가면 제 말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현지 중국 당국만을 비난할 수 없음은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2022년 8월에 김해 구산동 고인돌 유적이 세계 최대라는 그 가치에도 불구하고 참담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보도되었다. 일부러 훼손했다기 보다는 사적으로 지정받기 위해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기에 더욱 어처구니 없었다. 이는 이 유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보다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한 욕망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사실 보도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이땅에서 우리 손에 의해 훼손되는 과거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집안시에 가서 고구려 유적이 어떻게 관리되고 보존되고 복원되고 있는지를 보면, 역사와 역사현장에 대한 애정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태도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 고구려 유적과 역사 현장을 통해 받은 감흥과 감동 만큼, 돌아와서 이 땅의 역사 현장과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제든 한번쯤 집안시 고구려 역사 탐방길을 떠나보시기를 권한다.

 

 

[각저총]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에 그려진 씨름장면, 고구려인과 서역인이 심판인듯한 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열한 한판승부를 벌이고 있다. 씨름은 이미 1600~1700년전부터 글로벌 스포츠였다.

 

“(조선 씨름은) 힘이 세야 이긴다하되 꾀가 있으면 더욱 용하다.”

17~18세기 한·일 교류의 상징인물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의 조선어 학습지인 <교린수지>(交隣須知)가 설명한 조선씨름의 특징이다. 일본의 스모(相撲)과 달리 힘보다는 기술을 강조하는 한국씨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지고보면 한국의 씨름과 비슷한 무예이자 놀이는 세계 어느 곳이나 다 존재한다. 각 대륙과 지역에 160여종의 씨름이 분포하고 있다니 말이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신체활동이니, 씨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놀이이자 스포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전세계

각 나라와 종족은 주어진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저마다 개성있는 씨름을 발전시켜왔다.

예컨대 일본의 스모는 물론이고, 몽골의 부흐와 우즈베키스탄의 크라쉬, 터키의 그레스, 스페인의 루차 카나리아, 스위스의 쉬빙겐, 아일랜드의 팽은 물론이고 세네갈의 람브 등이 ‘유사 씨름’의 형태이다.

 

■고구려 대 서역의 씨름대결

한국 씨름의 첫번째 기록은 1600~17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만주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 벽화(4~5세기 추정)에 등장하는 씨름 장면이 그것이다.

벽화에 나타난 씨름의 방식은 짧은 바지를 입고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상대의 허리띠를 잡는 왼씨름이다.

역시 고구려고분인 장천 1호분에서 보이는 싸름장면. 씨름이 삼국시대부터 사랑받아온 놀이이자 스포츠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한국씨름을 보는 듯 하다. 앞편의 장사는 고구려인이고, 큰 눈과 메부리코가 특징인 뒤편의 장사는 서역인인 듯 하다. 씨름 경기는 4마리 새가 앉은 나무 아래에서 한 노인이 보고있는 가운데 열리고 있다. 이 노인은 심판인 듯 하다. 나무 옆에는 곰과 호랑이가 앉아있다. 곰과 호랑이라면 단군신화의 ‘필’이 확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딘가 신성한 곳에서 펼쳐지는 씨름경기라는 얘기인가.

역사는 벽화중 씨름 장면이 유독 돋보이는 이 고분에 특별히 씨름고분이라는 뜻인 각저총(角抵塚)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씨름경기에 임하는 두 장사의 그림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앞쪽의 장사는 고구려인인 듯 싶은데, 뒤편의 장사는 서역인인 듯 싶다. 큰 눈과 메부리코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있지만 고구려인과 서역인의 씨름대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씨름 벽화가 각저총에서만 그려진 게 아니다. 역시 고구려 고분인 장천 1호분의 벽화에도 흐릿한 씨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외교사절 관람용 스포츠

씨름은 권법의 일종인 수박(手搏)과 함께 호신무예로서 중시되거나 외국사신이나 손님에게 그 나라, 혹은 그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의전용 유희로 유행되기도 했다. 136년 부여왕이 한나라를 방문했을 때 씨름을 관람했고, 642년(백제 의자왕 2년) 백제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연회 자리에서 씨름을 관람한 예가 있다.

1343년(충혜왕 후 4년) 2월 왕이 궁궐에 나가 용사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관람했다.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도 사신의 요구로 개경 시가의 누각에 나가 격구와 씨름을 구경하고 상도 주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들어앉은 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아들인 세종과 함께 한강변에서 씨름을 구경했다. 이후 씨름을 ‘잡기(雜技)’로 여겨 국왕이 관람하는 씨름 경기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외국 사신의 관람 요청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1426년(세종 8년) 명나라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 활을 쏘고 씨름경기를 관람했다.

김홍도의 풍속화 중 씨름도. 씨름이 저잣거리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대중 스포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가 왕년엔…” 이항복의 씨름 무용담

16세기 들어 씨름을 둘러싼 무용담이 속출했다.

예컨대 이항복(1556~1618)은 14~15세에 씨름과 공차기를 잘해서 길거리에 맞설 자가 없었다고 한다.(<백사집>)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1567~1596)도 유생 시절 씨름으로 지역 장사를 쓰러뜨렸다.(<용호한록>)

1557년(명종 12년) 대사헌 오겸 등은 “진사 김홍도(1524~1557)가 부친의 장례를 마친지 얼마후에 동료들과 함께 장기와 바둑을 두고 혹은 씨름을 겨룬 사실을 알고도 제대로 문책하지 못했다”면서 사임을 청했다. 같은 시기인 1565년(명종 20년) 명종은 강섬(1516~1594)을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으로 임명했는데, 이때의 <명종실록> 기자는 “강섬은 한성판윤 같은 중책을 맡을 자격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 이유는 “강섬이 (13살에 죽은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1551~1562)의 묘를 지킬 때 재실에서 씨름판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씨름은 사대부마저 물불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씨름은 명종 시기, 즉 16세기 중엽 민중의 세시풍속으로 깊숙히 뿌리박는다. 당대의 문신인 소세양(1486~1562)의 문집인 <양곡선생집>을 보면 단옷날 서울 거리에서 씨름과 그네뛰기 하는 풍경이 등장한다.

북한의 씨름 장면. 상의를 입고 경기를 펼치는 모습이 남측과는 다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에 불어닥친 씨름 광풍

이 뿐이 아니다. 단옷날에 요즘의 민속장사씨름대회가 열려 각지의 장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호남의 풍속에 단옷날이면 관아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여 우승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그러자 먼 곳에서 식량을 싸가지고 오는 자도 있었다.”(<송자대전> ‘부록 최신록’)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지역인 여산 작지골이나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금산 직지사는 씨름경기자 자주 열리던 곳이었다.

 

<동국세시기>는 “해마다 단오가 되면 금산 직지사에서 씨름을 했는데, 수천 수만명이 구경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단옷날 씨름 풍속이 종종 과열현상까지 빚었던 모양이다.

1560년(명종 15년) 동궁(세자궁)의 별감 박천환이 시강원(세자의 교육기관)에 와서 “저잣거리에서 양반의 무리에게 집단구타당했다”고 호소하는 실록(<명종실록>) 기사가 흥미롭다.

“제(박천환)가 단옷날 세자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양반의 무리를 만났는데, 억지로 각저(씨름) 놀이를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제가 거부하자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의복과 갓을 찢고 회사문(回謝文)까지 찢었습니다.”

세자궁 소속 관리가 모욕을 당한 이 일 때문에 단옷날 씨름(각저)대회는 금지됐다.

“사대부의 종이라도 이렇게 모욕을 당하면 안되는데 하물며 궁중의 별감이랴. 별감을 집단 구타한 자들을 끝까지 잡아들이라. 그리고 지금 이후 각저(씨름)과 도박, 답교놀이 등은 엄금하라.”(<명종실록>)

20세기초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씨름은 장소 불문, 나이 불문으로 펼쳐진 놀이였다.

 

■씨름으로 청나라 장수 죽인 무용담

씨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와중에는 적군과의 백병전 개념으로 훈련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중에 휘하 장수와 수군들에게 4차례 씨름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씨름을 선상 군사 훈련의 하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오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한 진작책으로 활용한 것이 틀림없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간 김여준은 청나라 장수 우거와 씨름판을 벌여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세기에 편찬된 <해동속악부>는 “김여준과 우거의 씨름은 단순한 씨름이 아니라 주먹까지 쓰는 격투 씨름이었으며, 결국 청나라 장수인 우거가 쓰러져 죽는 것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김여준은 ‘단순 살인이 아니라 군대에서 무용을 겨루다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조선 씨름은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조선씨름은 이후 청나라 사신의 접대용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청나라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씨름 구경을 원했다. 씨름판은 조·청 국경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의주·평양·황주·개성의 주요 지역마다 열렸다. 씨름꾼은 1667년(현종 8년) 60명에서, 1676년(숙종 2년) 200명으로 늘어났다. 경기는 연승제로 진행되었는데, 한사람이 5연승을 거두면 상급을 받았다. 씨름은 이렇게 온 백성이 즐기는 놀이로 변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각저총 씨름의 관전포인트

씨름의 장구한 역사를 굳이 돌이켜 볼 필요도 없다.

앞서 훑어본 4~5세기 무렵의 각저총 벽화는 왜 인류가 공동으로 지켜가야 할 무형유산인지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씨름은 지금도 전세계 160여종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1600~1700년전 고구려와 서역이 친선경기를 벌일만큼 ‘글로벌 스포츠’였음을 일러준다. 즉 씨름이 단순히 특정지역의 놀이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무형유산이자 인류 다양성의 원천임을 ‘각저총’ 벽화가 상징해주고 있다.

또하나 놓쳐서는 안될 관전포인트가 있다. 각저총 벽화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고구려인이며, 무엇보다 그 경기 모습이 지금의 한국씨름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씨름의 형태가 전세계 160여종에 달한다지만 한국 씨름만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씨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샅바’라 할 수 있다. 씨름꾼을 샅바꾼이라 할만큼 샅바는 한국씨름을 대표한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간 펼쳐진 씨름 대결. 씨름은 별다른 기술없이도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문화재청 제공

 

■남녀노소와 외국인까지 즐길 수 있는 샅바씨름

샅바를 잡으니 맨몸이나 허리띠 만으로 잡고 하는 씨름보다 승부를 내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게다가 다리와 허리에 매는 한국 특유의 샅바 덕분에 다리씨름의 다양한 기술이 생겼다.

상대의 다리를 지레대로 삼아 공격하고, 상대의 다리를 잡아 다양한 기술로 승부를 내는 것이 한국 씨름의 특징이다. 힘이 약한 사람도 샅바를 이용한 기술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랬으니 아메노모리 호슈가 ‘힘보다 꾀가 있어야 좋다’고 평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씨름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부상의 염려가 거의 없는 모래판이나 매트에서 샅바라는 끈 하나만으로도 상대와 겨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맨처음 샅바를 잡아보는 이 누구나, 심지어는 외국인까지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씨름을 즐길 수 있다. 선수 뿐이 아니라 모이는 사람, 누구나 참여해서 즐기는 놀이가 바로 씨름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국의 샅바씨름을 ‘고려기(高麗技)’라 따로 불렀다. 중국의 씨름인 ‘솔각’과 일본의 스모(相撲)가 손동작 위주인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특징들은 각저총 벽화 등에 등장하는 고구려 씨름이 고려-조선을 거쳐 세시풍속의 다양한 놀이 형태로 퍼졌지만 씨름의 원형은 지금까지 변치않고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지금 비록 땅은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씨름은 1600~1700년 이상 공동체의 얼을 담아 지켜온 무형유산이라는 뜻이다.

2013년에 벌어진 외국인 씨름대회. 샅바를 잡으면 강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무너뜨릴 수 있다.|문화재청 제공

 

■남북한 공동등재의 길 열린 씨름

지난 29일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의 전문가 기구가 의미심장한 평가결과를 발표했다. ‘남북한이 각자 등재를 신청한 씨름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서 등재를 권고한다’는 것이었다. 남북한 씨름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적격판정’을 받은 것이다.

전문가 위원회는 원래 심사 결과를 등재(Inscribe), 정보 보완(Refer), 등재 불가(Not to inscribe) 세 등급으로 나눠 무형유산위원회에 권고한다. 이 결과는 이변이 없는 한 그대로 수용된다. 따라서 11월 26~12월 1일 모리셔스 포트 루이스에서 열리는 제13차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의 최종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 씨름의 남북한 각자등재에 만족할 수 없다. 이번 등재권고 판정에 따라 남북한 공동등재의 길이 활짝 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이미 아리랑(한국 2012년, 북한 2014년)과 김치(한국 2013년, 북한 2015년) 등을 각자 등록한 바 있다. 씨름 역시 남북한 각자(북한 2015년, 한국 2016년)가 등재신청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낸 바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얼을 담아 전승해온 무형유산에 무슨 군사분계선이 있으며, 무슨 분단이 있겠는가.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씨름의 남북 공동등재를 추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제안한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씨름의 공동등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이 기사는 지난 10월 12일 한국문화재단이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 ‘민족의 공동유산 씨름’에서 발표된 심승구의 ‘한국씨름의 정체성’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2017년 5월 30일 문화재청이 개최한 ‘씨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허건식의 ‘문화적 자산으로서 씨름의 전승 활성화 방안’ 등 논문도 참고했습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고구려사 명장면-33] 무용총과 마치 쌍둥이 무덤처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벽화고분이 각저총(씨름무덤)이다. 각저총의 축조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무용총보다는 다소 앞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광개토왕, 장수왕 때로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한껏 펼쳐지는 시기답게 벽화에서도 그런 활달한 기운이 넘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뭐니 뭐니 해도 무덤의 이름이 유래한 씨름도이다.

각저총 씨름도

널방 왼쪽 벽면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으로 나무 아래에서 두 역사가 어깨를 맞대고 서로 힘을 응축시켜 막 시합을 시작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수염난 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마치 심판을 보는 듯한 장면이다. 씨름을 하는 복장이나 씨름 자세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씨름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마치 천오백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에 재현되는 느낌이다.

씨름을 하는 두 인물 중 왼쪽 인물의 얼굴은 보면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큼직한 매부리코로 묘사되고 있어, 동북아시아계 인물은 분명 아니고, 서역(西域)계 인물로 추정된다. 그 상대인 오른쪽 인물의 얼굴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고구려인의 얼굴이다.

사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씨름이나 수박희 그림에서 이런 서역계 인물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장천1호분 앞방 오른쪽 벽화의 씨름도, 무용총 널방 안벽 천장고임의 수박희 그림, 안악3호분 앞방 벽화의 수박희 그림 등등을 꼽을 수 있다. 나중에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서역계 인물이나 서역계 문물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보고자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몇 가지 사례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도록 하겠다. 다만 서역계 인물을 포함한 두 사람이 등장하는 씨름그림 한 장면을 통해서 고구려 사회가 다종족 국가였으며, 그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음은 충분히 유념해야겠다.

무용총 수박도
안악3호분 수박도

다음 주목할 것은 씨름하는 인물 오른쪽의 노인상이다. 얼굴은 지워져 잘 보이지 않지만, 긴 수염과 백발에 지팡이를 집고 있는 모습으로 충분히 노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수많은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 노인 모습은 매우 드물다. 무덤 주인공이 나이가 들어 이른바 노인이 되어 죽은 경우도 있을 텐데, 대개 주인공도 노인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본 안악3호분의 주인공 동수도 69세로 죽었고, 덕흥리고분의 유주자사 진도 77세로 사망하였는데, 벽화에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장년의 모습뿐이다. 무덤 안의 생활 풍속도가 내세에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재현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내세에서도 여전히 장년이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살기를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예부터 꿈꾸는 것이 불로장생이라는 점을 무덤 주인공의 묘사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씨름도에서 심판을 보는 듯한 인물을 노인 모습으로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고구려인들이 즐겨 했던 씨름판에서 노인들이 심판을 보았을 수도 있겠다. 또 실제로 그러했건 아니건 간에 노인들이 삶의 경륜과 지혜로 올바른 심판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었지도 모르겠다. 희귀한 노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씨름 장면이 주된 그림이지만 그 왼쪽 나무 그림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벽면의 한가운데 천장까지 높게 그려진 나무는 단순히 씨름도의 배경이 아니라 벽면 오른쪽의 씨름도와 왼쪽의 건물과 집안 풍경을 구분하는, 즉 전체 벽면 그림을 분할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각저총에는 나무가지를 X 형태로 교차시킨 나무들이 여러 벽면에 그려져 있는데, 이런 나무 그림이 주요 주제로 그려진 점이 각저총 벽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씨름도 옆의 나무 그림은 이리저리 뻗은 나뭇가지에 잎은 다 떨어지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지 끝에 푸른색 잎 비슷한 형태를 달고 있다. 덩어리처럼 그려진 이런 잎의 묘사는 중국 한나라 때 화상석에 자주 나타나는 수목 그림을 연상시킨다. 혹은 지금도 집안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잎이 덩어리지듯이 돋는 가래추자나무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나무줄기와 가지들은 모두 자색이고, 가지 끝의 잎은 연녹색으로 묘사하였는데, 윤곽선이 없이 채색으로만 그렸다. 이런 묘사법은 뚜렷한 윤곽선으로 표현한 씨름도 인물 그림과는 기법상에 차이가 나타난다. 당시 화공들이 여러 가지 표현 기법을 대상과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구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커다란 나무의 여러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검은 색으로 표현된 새 4마리가 앉아 목을 길게 빼고 지저귀는 듯한 모습은 건조한 나무 표현과는 달리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나무 둥지 좌우에는 두 마리 동물이 서로 등 돌리고 서 있는 듯한 모습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 왼쪽의 동물은 호랑이 형상이고, 오른쪽은 곰의 형상이다.

곰과 호랑이 그림

 

곰과 호랑이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는 이야기가 금방 생각날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4마리 새가 깃들어 있는 나무도 단순히 나무 그림만으로 볼 수는 없겠다. 우리나라 전통 솟대에서 보듯이 새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이다. 따라서 신의 전령 역할을 하는 새가 깃들어 있는 나무는 신성한 나무, 즉 단군신화의 신단수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의 묘사도 잘 살펴보면, 모두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고,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이다. 곰이야 본래 그렇게 생겼다고 치고, 호랑이는 이른바 호랑이 무늬의 특징이 있을 법하지만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무용총 수렵도에서 도망가는 호랑이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된 점을 고려하면, 호랑이를 검은색으로 표현한 것도 묘사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이나 검은색으로 단조롭게 묘사한 것은 마치 인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게다가 곰과 호랑이가 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에서 서로 경쟁관계에 있거나, 결코 우호적인 관계로 보이지 않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의 추정이 조금 지나칠지 모르지만, 신단수 그리고 곰과 호랑이는 고조선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의 내용을 절로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군신화의 모티브가 고조선의 주변 지역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귀한 역사적 증거를 하나 확보하게 된다. 이를 통해 고구려 문화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 그림에서 단군신화의 핵심인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신 환웅의 존재는 찾아지지 않는다. 사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하늘신인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고구려인들이 주몽 말고 다른 어떤 하늘신의 혈통을 갖는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각저총의 씨름그림 한 장면에는 고구려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 위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전통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갖춘 문화를 향유하였던 모습이 담겨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오늘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의 하나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무용총]

무용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무용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용총(舞踊塚, JYM458)은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구에 있는 고구려 고분이다. 고분 내부의 오른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 벽에는 검은색 말을 탄 사람과 무용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ko.wikipedia.org

 

무용총 수렵도 착시, 달리는 말은 허공에서 다리를 오므린다 [오성주의 착시 여행] (daum.net)

 

입력 2022. 10. 31. 20:00
 
편집자주
생활 주변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착시현상들. 서울대 심리학과 오성주 교수가 ‘지각심리학’이란 독특한 앵글로 착시의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달리는 말의 네 다리가 허공에서 역동적으로 쭉 뻗은 모습이다.
동서양 모두 쭉 뻗은 다리로 달리는 말의 역동성 묘사
마이브리지의 연속 사진촬영으로 경주마의 비밀 포착
동작의 과학보다 표현에 신경 쓴 예술가 고민의 산물

중국 국가박물관이 고구려 역사를 감추려는 모습이 화제다. 우리 민족인 고구려는 기원전후를 시작으로 700여 년 동안 한반도 중부에서 중국의 만주 남부까지 광활한 땅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가 들춰지는 것이 못마땅할 것이다. 고구려 무용총 벽에 그려진 수렵도를 보면 고구려인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고구려 사냥꾼들이 말을 달리면서 활로 호랑이나 사슴 등을 겨누고 있고, 심지어 그림 위쪽의 백마를 탄 사냥꾼은 몸을 돌려 활을 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다루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1821년작 '엡솜에서 더비'(Derby at Epsom). 무용총 벽화의 말처럼 경주마의 네 발이 허공에서 앞뒤로 펼쳐져 있다.

 

이 벽화는 의복, 말, 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일부 훼손되기는 했지만,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흔적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은 물감의 보존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전문 화가의 솜씨일 것이다. 한편, 이 그림은 예술적으로도 매우 빼어나다. 그림의 상징, 구도, 배치, 색감 등 여러 부분이 우수하지만, 역동성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 활쏘는 사람의 자세가 그렇지만, 특히 말의 네 발이 허공에서 앞뒤로 최대한 뻗어있는 점이 역동적이다. 말이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이후 우리 옛그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수렵도의 말 자세는 매우 독특하다. 한편, 말의 이런 자세는 서양화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엡솜에서 더비(Derby at Epsom)'가 있다.

 

제리코는 궁정 마굿간에서 말을 면밀히 연구한 화가로서, 이 그림에서 말의 자세를 수렵도처럼 그렸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네 발이 앞뒤로 뻗은 자세는 과학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즉, 사슴과 호랑이는 몰라도, 말은 전속력으로 달릴 때 네 발이 허공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라 모아진다. 사실, 오랫동안 말의 네 발이 모두 허공에 떠 있는지 한 발이라도 땅에 닿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논쟁거리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은 다리가 너무 빨라 맨눈으로 다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영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에 의해서 이 논쟁이 끝나게 되었다. 당시 카메라의 셔터 속도로는 말이 달리는 모습을 짧은 간격을 두고 연속으로 찍기 어려웠지만, 마이브리지는 셔터에 끈을 매달아 말이 달릴 때 건드리도록 했다. 이렇게 연속사진이 탄생하였다. 나중에 이 기술은 더 발전하여 영화를 찍는 영사기의 발명에 큰 기여를 하였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1878년작 '달리는 말(The Horse in Motion)' 사진에 포착된 흐릿한 이미지를 재가공해 만든 기념 카드. 네 발 모두 공중에 떠 있을 때 다리가 오므려진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용총 수렵도의 말 모습은 단순히 화가의 착시 또는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렵도의 화가는 말 달리는 모습의 역동성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이 빠르게 달리고 있는 모습을 정지해 있는 벽에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화가는 주어진 재료를 이용해 말이 달릴 때 느껴지는 역동성을 최대한 담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의 다리가 최대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자체는 과학적으로는 틀린 기술이지만, 역동성의 감상 역시 사실이므로 다른 관점에서 이를 착시나 거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는 정밀성에 집착하고 화가는 표현에 집착한다. 예술 작품은 누군가에게 감상되어야만 한다. 무용총 벽화를 그린 화가는 감상을 고민한 예술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게 관습이 되었다. 무용총 벽화의 웅대한 기상이 아쉬운 향수가 된 지 오래이다.

오성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무용총 벽화의 명장면(1) - 가무배송도 (daum.net)

임기환입력 2017. 10. 19. 15:20
 

[고구려사 명장면-31] 평양 일대에 위치한 덕흥리 벽화고분을 5회에 걸쳐 살펴보았는데, 벽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평양지역이 아닌 고구려의 오랜 수도였던 국내성에 위치한 벽화고분도 살펴보는 게 균형이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평양지역의 벽화고분과 국내 지역의 벽화고분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수도로서 400년 이상을 지낸 곳이기에 국내 지역에도 적지 않은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대략 덕흥리고분과 시기상 가까운 고분 가운대에는 아무래도 우리 눈에 익숙한 무용총(춤무덤)과 각저총(씨름무덤)의 벽화가 적합하리라 생각한다. 이들 무덤 벽화의 명장면을 좀 더 상세하게 관찰하는 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먼저 무용총 벽화부터 살펴보자. 두방무덤인 무용총은 널방 벽면의 가무배송도, 수렵도, 묘주접객도가 유명하며, 그외 천장에 있는 하늘세계를 꾸미는 다양한 벽화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용총이란 이름은 벽화 중에 무용그림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무용총의 벽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은 수렵도이다. 생동감 있는 필치와 세련된 화면 구성이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씩씩한 기상을 보여주는 수렵도로 무덤 이름을 삼지 않고, 일제 시기에 의도적으로 유약한 이미지의 춤그림으로 이름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수렵총으로 무덤 이름을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렵도가 대표적인 그림이기는 하지만, 사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림이 수렵 장면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난 회까지 살펴본 덕흥리고분 천장에도 활기찬 수렵 장면이 그려져 있다. 춤그림도 다른 벽화고분에 없지는 않지만, 무용총의 춤그림과 같이 다수 인물이 등장하고 그 표현도 매우 세련된 그림은 없다. 그런 점에서 춤그림 역시 수렵도에 못지않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구려 벽화 중에 고구려인의 기백이 담기지 않은 그림이 어디 있겠나.

그러하니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고구려의 춤을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금꽃 장식 절풍모에(金花折風帽)
흰빛 옷이 천천히 빙글돌다가(白馬小遲回)
넒은 소매 나부끼며 너울너울 춤을 추니(翩翩舞廣袖)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구나(似鳥海東來)

 

이 시만 보아도 살포시 한 발 두 발 내딛다가 너른 소매자락 휘몰아치는 춤사위가 마치 멀리서 힘차게 날아온 새와 같은 듯 기상이 넘치는 하나의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가?

이제 무용총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춤을 좀 더 실감 나게 감상해보자. 그림을 꼼꼼하게 봐 주시기 바란다. 가무배송도는 널방 왼벽에 그려져 있다. 앞에는 검은 말을 탄 인물이 뒤에 시종 한 명을 거느리고 서있고, 그 앞으로 상단에는 5인의 무용대가, 그 아래에는 7인의 합창대가 그려져 있다. 무용대 위에는 한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지금은 박락되어 다리 부분만 겨우 보일 뿐이다. 그리고 악사 앞쪽으로, 즉 말탄 인물의 머리 윗부분쯤에 또 한 사람 무용수가 악사를 마주 보며 무용대와 똑같은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무용총 가무배송도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주인공인 왼쪽에 말 탄 인물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그 오른편으로 무용대와 합창대를 상하 두줄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서 왼쪽 인물을 위한 춤과 노래가 펼쳐지는 장면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말 탄 인물이 널방 안벽에 있는 접객도의 주인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 무덤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멀리 떠나는 주인공을 환송하는 것인지, 무사히 잘 다녀온 주인공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장면인지는 금방 알기 어렵다. 다만 이런 생활풍속도가 현세의 생활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내세의 복된 생활을 소망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내세로 떠나는 주인공을 떠나보내는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환송의 장면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좀 더 그림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그 앞에서 5명의 무용수가 줄지어 같은 춤사위로 춤을 추고 있는데, 맨 앞의 남성 인물은 긴 새깃을 꽂은 절풍을 쓰고 있다. 그 위치나 혼자만 절풍모를 쓰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다른 무용수들을 이끄는 모습이다. 이 절풍모를 쓴 인물의 춤은 앞서 이백의 '고려무' 시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동작이다.

악사 앞의 남자 무용수가 춤을 지휘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절풍모를 쓴 인물이 춤을 이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단독 무용수는 그 앞 악사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것으로 아래 무용대와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그림은 두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즉 1인 악사의 반주에 맞추어 1인 무용수가 춤추는 무대가 있고, 5인의 무용대와 7인의 합창대가 함께 펼치는 무대가 있는 셈이다. 즉 주인공의 환송을 위해 2인의 작은 무대와 12인이 꾸미는 큰무대, 이렇게 2회가 열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아래 무용대를 살펴보자. 5명의 무용수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앞의 세 사람은 비스듬한 선을 이루고 있고, 뒤의 두 사람은 수평선상에 나란히 선 모습이다. 또 옷의 색깔도 주의 깊게 배치되어 있다. 앞의 세 사람 중 긴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으며, 맨 앞의 절풍모를 쓴 인물이 입고 있는 윗도리와 바지는 이 두 가지 색상으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맨 뒤의 두 사람은 이 두 가지 색상으로 윗도리와 바지 색깔을 서로 엇갈리게 표현하고 있다.

색상만이 아니다. 옷차림을 보면 5인 중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을 두 번째, 세 번째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저고리와 바지 차림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섯 사람이 열을 짓고 있는 평면적 배치에 다채로운 율동감을 부여함으로써 마치 춤을 추는 분위기를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맨앞의 인물에만 화려하게 나부끼는 새깃을 꽂은 절풍을 씌움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그 인물로 모아가다가 결국 말을 탄 인물에까지 미치게 한다.

무용대 아래에는 7인의 합창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화사한 옷차림과 율동감 넘치는 무용대와는 달리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다소 경직된 자세로 열을 짓고 있다. 무덤 주인공이 탄 검은 말의 색깔과 합창대의 옷 색깔이 서로 조응함으로써 자연스레 합창대와 주인공을 연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밝은 분위기의 무용대를 아래에서 든든하게 떠받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합창대의 맨 앞사람과 무용대의 두 번째 인물이 위아래 수직선으로 일치시키고, 합창대의 마지막 인물과 무용대의 마지막 인물 역시 수직선으로 이어짐으로써 전체적으로 사각형 구도를 이루게 되어 시각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성이 된다. 그런데 무용대의 맨 앞쪽 절풍모를 쓴 인물은 합창단의 받침이 없어 마치 공중에 붕 뜬 모습을 하게 된다. 그렇게 아래 공간이 비어 있는 구성이 이 인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절로 시선을 무덤 주인공으로 유도하게 된다.

언뜻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지만, 이 가무배송도를 꼼꼼하게 들여다 보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그림이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그려진 회화적으로 매우 뛰어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도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먼저 노래 부르는 합창대를 살펴보면 앞에서 세 번째 인물은 다른 사람과 달리 뒤돌아보면서 뒷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다. 왜 그렇게 그렸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다소 경직된 합창대의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을 화가가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무용도에서도 다소 어색한 모습이 있다. 두팔을 완전히 뒤로 나란히 젖힌 모습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마치 두팔이 겨드랑이에서 돋아난 것처럼 표현되었다. 그림과 같은 자세를 취해보시라.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춤사위의 모습은 집안 지역 장천1호분 앞방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에 무용총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딘지 그 모습이 이상하다. 실제 춤사위가 이런 형태인지, 아니면 회화적 표현에 아직 서투른 면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일전에 한 무용전문가가 이 춤사위의 복원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두팔을 뒤로 젖힌 모습이 아니라 두팔을 나란히 옆으로 같은 쪽으로 쭉 뻗은 춤사위로 재현하였다. 보통 우리나라 전통무에서 볼 수 있는 춤사위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런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필자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왜 무용도를 그린 고구려 화가는 그런 춤사위를 이 그림처럼 어색하게 그렸을까? 결코 그리기 어려운 형상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표현 능력의 서투름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앞에서 필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주도면밀한 회화적인 구성으로 볼 때에 더욱 그러했다. 다른 설득력 있는 그린 이의 의도를 읽어내야 했다. 이에 대해 필자가 얻은 설명 방식은 다음 회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가무배송도 그림을 놓고 나름 구석구석 세밀하게 살펴본 이유는 통상 우리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볼 때 의례 고구려인의 기백이니, 혹은 고구려인의 생활상이니 하는 부분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구려인이 무덤 주인공을 위해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릴 때에는 어떤 소재를 선택할 것인가? 그 소재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많은 생각과 공력을 기울여 제작하였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런 총체적인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림 속에 담긴 고구려인들의 다양한 의도와 관념, 나아가 미의식 등을 최대한 세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애정을 갖추기 위한 최소한의 그리고 올바른 태도라 믿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무용총 벽화의 명장면(2) - 수렵도 (daum.net)

임기환입력 2017. 11. 2. 15:03
 

[고구려사 명장면-32]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많이 등장하는 제재 중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수렵도하면 누구나 얼른 떠올리는 그림이 무용총의 수렵도일 만큼 워낙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수렵도는 무용총 널방 서쪽벽에 자리 잡아 동쪽벽의 무용도와 마주 보고 있다.

먼저 그림 전체를 살펴보자. 모두 5인의 말을 탄 무사가 등장하며 호랑이, 사슴 등 5마리동물이 사냥 대상이다. 앞뒤로 네 다리를 쭉 뻗어 힘차게 달리고 있는 말 위에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머리에 새 깃을 꽂은 무사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들을 뒤쫓고 있다. 사람과 짐승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그려지고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힘차고 속도감이 넘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무용총 수렵도 (복원)
 
기마무사와 동물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표현력에 비하면 산과 나무는 마치 도안화된 모습이다. 산은 굵고 가는 선으로 마치 물결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으며,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산맥이 꾸불꾸불 흘러가는 듯한 형상이다. 산맥은 위아래 2그룹을 이루는데 아래쪽, 즉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은 흰색이며, 그다음은 붉은색, 가장 멀리 있는 산들은 노란색으로 채색하였다. 원근에 따라 색을 다르게 하는 방식인데, 색원근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색상을 달리하여 산과 산을 서로 다른 층위로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다소나마 공간감을 살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오른쪽 하단의 산맥 모습은 좌우 대칭적인 구도이지만 흰색과 붉은색으로 구분되어 산이 겹쳐 보이게 의도했다. 그 위쪽, 즉 멀리 있는 작은 산과 그 뒤의 큰 산도 겹쳐 보이도록 표현하여 공간의 깊이를 살리고 있다. 또 이들 산맥은 윗부분의 사슴 사냥 장면과 아랫부분의 호랑이 사냥 장면을 분리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하고 있다. 아래쪽 산의 기능도 맨 아래쪽의 사슴 사냥하는 장면과 그 윗부분을 구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맨 아래쪽에 2인 무사의 사냥하는 모습이 하나의 열을 이루고, 맨 위의 사슴 사냥하는 장면까지 차례로 모두 4개의 수평 열을 이루면서 다중적인 공간감을 형성한다.

또 무사가 타고 있는 말이나 사냥감인 짐승들 대부분이 오른쪽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음에도 주목해보자. 이는 오른쪽 방향으로 역동적인 흐름을 만들어 수렵도에 박진감을 넘치게 한다. 게다가 아래 1열과 2열의 기마무사는 삼각형을 구성하며 거의 동일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구도에 안정감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중 가장 크게 묘사된 2열의 기마무사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맨 위쪽 4열에는 두 마리 사슴이 왼쪽으로 달리고 있어 그 아래 4열까지 오른쪽 방향으로의 흐름을 다소 역류시키고 있지만, 그 오른편 기마무사의 말이 오른쪽으로 달리면서 그 아래의 흐름과 조응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흐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맨 위쪽 4열의 사슴들과 이를 겨냥하고 있는 무사와 활의 방향이 반대 방향을 취함으로써 화면의 단조로움을 깨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나름 조화로운 구성 중에 다소 이질적으로 눈에 띄는 인물이 보인다. 2열 가장 왼쪽에 있는 기마인물이다. 이 말은 네 발을 앞뒤로 한껏 뻗으면서 내달리는 다른 말과는 달리 뒷발을 마치 도움닫기 하듯이 잔뜩 웅크리고 있으며, 무사 역시 활시위를 당기지 않고 그냥 들고 있으며, 어떤 짐승도 쫓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매우 동적으로 움직이는 다른 기마무사와는 달리 매우 정적이다. 이 무사는 지금 사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일까?

 

화면 구성상에서 볼 때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즉 이 정적인 기마무사는 다른 4인의 기마무사가 힘차게 오른쪽으로 내달리기 직전의 모습이다. 즉 여기서 힘을 응축시켰다가 일시에 폭발시켜 오른쪽으로 강렬한 속도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렵도가 활기차고 박진감 넘치면서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화면 구성의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수렵도는 무용총에 있는 벽화 가운데서 회화적인 구성과 그 효과가 가장 뚜렷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렵도에도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다. 제일 위쪽에서 말이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로 틀어 활을 쏘는 기마무사의 모습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이런 자세는 이란 땅 북부에 있던 파르티아 왕국에서 유래하여 파르티안 사법이라고 부른다. 이 파르티안 사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마무사는 왼손잡이로 표현되었다. 정말 왼손잡이였을까? 그런데 덕흥리고분 천장 수렵도를 보면 왼쪽 방향을 향해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무사가 왼손잡이로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화면상 왼쪽 방향으로 활을 쏘는 자세가 되는 두 사람 모두 왼손잡이로 그렸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덕흥리고분 수렵도 (복원)
 
사실 이들을 오른손잡이로 그리게 되면 무사의 정면이 아니라 뒷모습을 그려야 한다. 아마도 이를 피하기 위해서 부득이 왼손잡이로 그려서 인물의 앞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 대목에서 전 회에서 다룬 무용대 춤사위의 의아한 표현이 떠오른다. 무용전문가의 재현처럼 옆으로 두 팔을 나란히 뻗은 모습으로 그리면 무용수들의 앞모습을 가리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색한 표현으로 두 팔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런 필자의 추정이 어느 정도 타당할지는 앞으로 좀 더 검증을 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의 추정이 타당하다면 그런 인물을 묘사 방식에 담겨 있는 관념들도 함께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몽골에 유학하고 온 한 학자에게서 무용총의 그림과 비슷한 춤사위가 몽골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직 필자가 이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런 춤이 몽골에 있다면 고구려가 유목민족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유목문화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무용총 그림과 같은 춤사위를 추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열어놓아야 한다. 고구려는 다양한 계통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기화했던 국가였다. 오히려 우리의 시각이 고구려인들만큼 넓고 다양하지 못해 벽화 속 다양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넓은 영토가 아니라 넓은 시야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오녀산성]

오녀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오녀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

ko.wikipedia.org

 

[신간]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후 유홍준의 새 '국토박물관 순례' (daum.net)

CBS노컷뉴스 김민수 기자입력 2023. 11. 28. 16:51
 
창비 제공

 

스테디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 이후 30년. 답사기에서 다 담아내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보고를 각 시대순으로 지역 대표 문화유산을 만나는 유홍준의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가 출간됐다.

순례기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저자의 철학을 담았다. 답사지 소개와 해당 시대에 대한 친절하고 깊이 있는 설명을 곁들여 우리 역사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

이번에 출간되는 '국토박물관 순례' 1·2권은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다뤘다.

 

연천 전곡리 유적은 1978년 미군 병사 그레그 보엔이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발견하면서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존 학설이 뒤집히는 등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꾼 획기적인 발굴이 이뤄진 곳이다. 이후 유적 전체가 공원으로 조서오디고 전곡선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한반도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자 배움터로 거듭났다.

고구려의 역사 중심이었던 만주 탐방을 통해 고구려의 오골성과 박작성으로 추정되는 심양 봉황산성과 단동 호장산성을 거쳐 압록강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탐구한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민 요령성 환인 지역의 오녀산성, 길림성 집안의 국내성, 환도산성, 왕릉과 고분, 광개토대왕릉비 등 고구려의 주요 유적을 순례한다.

2권에서는 백제와 신라, 비화가야를 다루며 백제와 통일 전 신라의 역사, 가야의 일부였던 비화가야의 이야기를 담았다. 부여 왕릉원의 우아함과 금동대향로의 예술성을 확인하는가 하면 신라 옛 무덤 속에 숨겨진 이야기 등 신라 금관의 빛나는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시리즈 구상 이유를 "즐겁게 여행 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도 겸하는 답사기를 쓰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30년 전 일반 대중에 우리의 찬란한 역사 유적을 확인하고 새롭게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번 '국토박물관 순례'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도 발길이 닫는 곳마다 시대별 우리 역사 유물과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풍부한 자료와 해설을 담았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지난 21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우리 역사가 보일 수 있도록 책을 써 내려갔다"며 "즐겁게 여행하면서 역사 공부도 겸하는 답사기"라고 설명했다.

 

유 교수의 새 역사탐방 시리즈 '국토박물관 순례'는 선사시대와 고대사를 다룬 1·2권을 포함해 근현대사 순례까지 이어진다. 3권은 가야·발해·통일신라를, 4권은 고려·조선·근현대를 각각 다룰 계획이다. 마지막 5권의 주제는 독도로 예정됐다.

유홍준 지음 | 창비 | 각권 324쪽·216쪽

 

 

오녀산성은 주몽 때의 성인가? (daum.net)

임기환입력 2022. 3. 4. 15:03
 

[고구려사 명장면-144]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흘승골성 아니 오녀산성은 주몽 때에 아니 꼭 주몽 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몽왕 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축성된 성일까? 오녀산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점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게다. 먼저 밝혀둘 점은 이 글에서는 고고 유적으로 가리킬 때는 오녀산성으로, 역사적인 성으로 가리킬 때에는 흘승골성으로 표기하겠다. 그동안 대부분 오녀산성이란 이름으로 써왔기 때문에 혹 독자분들의 혼동이 있을까 봐서이다.

오녀산성에 대한 조사는 20세기 초에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2년 겨울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오녀산성을 조사하여 서문지 일대와 동벽, 집수시설을 포함한 성 내외의 여러 모습을 유리건판 사진과 스케치 등으로 남겼다. 그 뒤에도 여러 일본인 학자들이 오녀산성을 답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녀산성은 고구려 산성 유적으로 알려졌지만, 그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는 막연한 추정뿐이었다.

굳이 도리이 류조의 조사 건을 언급한 이유는 이때 찍은 유리건판 사진들을 몇몇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요즘 오녀산성 모습은 많은 분들이 답사를 다녀와서 올린 사진이 인터넷에 가득하고, 또 필자의 사진도 그와 그리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다소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도리이의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110년 전 오녀산성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오녀산성 원경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 trimming)
 
그 뒤 1964년에 북한과 중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4일간의 조사를 진행한 바 있지만 지표조사 수준이었다. 나름 제대로 된 조사는 1985년에 이루어졌다. 오녀산에 TV 송신탑을 세울 때 일부 발굴 조사를 하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 초기 성곽으로서 유적 성격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필자가 오녀산성에 처음 오른 때는 1995년 5월이었다. 일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1993년에 첫 고구려 유적 답사를 다녀왔는데, 경비 부담도 부담이려니와 적잖은 시간을 투입하고도 현지답사 성과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다시 답사 간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마친 직후에 행운이 찾아왔다. 모 일간지에서 만주의 고구려 유적 탐방을 기획했는데, 4명으로 꾸려진 팀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더욱 팀을 이끄는 분은 유명한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 선생님이었다. 1972년에 일제참모본부에 의한 광개토왕 비문 석회도부설을 주장하여 한일 양국 학계에 충격을 주었던 주인공 그분이었다.

 

이진희 선생님은 이미 두어 차례 일본 소장학자를 이끌고 집안과 환인은 물론 요동의 주요 고구려 성을 두루 답사한 터였다. 국내 시민들에게도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제대로 소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모 신문사를 설득하여 이 기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 유적을 제대로 답사한다는 설렘도 적지 않았지만, 이진희 선생님을 모시고 귀동냥으로 배울 게 적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무엇보다 컸다.

10여 일이 넘었던 그 탐방길에서 이진희 선생님께 배웠던 가장 큰 공부는 고구려 유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대하는 학자로서의 꼿꼿함과 성실함이었다. "저런 기개와 의지를 갖고 계시니 일본 학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홀로 비판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는구나"라는 존경의 마음이 절로 들었다. 66세에도 불구하고 산성을 오를 때에는 언제나 앞장서 계셨다. 필자가 그 뒤 누구보다도 많이 만주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도록 노력하게 된 계기이다.

오녀산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진희 선생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탐방 길에서 인상적인 답사 중 하나가 오녀산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환인시 자체가 외국인이 숙박할 수 없는 제한 지역이었는 데다가, 출입 금지 구역인 오녀산성 답사는 한국인으로서는 더더욱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이진희 선생님의 명성은 중국 학계에도 알려져 있어서, 그분 덕분에 요령성 문물국의 허가 아래 환인에서 1박하고 오녀산성 답사도 이루어진 것이다. 대신 환인현 문물관리소장이 안내라는 명분 아래 우리 팀을 감시하기 위해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1986년 오녀산에 송신탑을 세운 뒤, 지금은 탐방객들이 서쪽 절벽으로 999개 계단을 오르는 그 길에는 당시는 계단이 아니라 산 정상까지 물품을 끌어올리는 리프트 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5월이었지만 철제 레일은 손으로 잡기 뜨거웠고, 가파른 레일 옆에 깔아 놓은 잔돌들은 한발 내디딜 때마다 흘러내려 미끄어지기 십상이었다. 정말이지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오녀산 정상에 올랐다. 오녀산성이 난공불락 성이라는 점을 그때 온몸으로 배운 셈이니, 그 경험을 어찌 잊겠는가. 요즘은 오녀산성에 갈 때 절벽 아래까지는 차량으로 올라가고 거기에서 999개 계단을 천천히 오르게 되니, 오녀산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점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울 듯싶다.

오녀산성 서문지 등산로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 trimming)
 
그 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여에 걸쳐 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와 본계시 박물관 등이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오녀산성 탐방은 거의 불가능했다. 발굴 조사가 끝나고 2000년도부터 관광이 가능해졌으니, 그런 점에서 1995년 5월 오녀산성 답사는 중국 측에서 복원 등 손을 대지 않았던 날 것 유적 그대로의 오녀산성을 보았던 것이니 더더욱 행운이었던 셈이다. 예컨대 그때 어렵사리 올랐던 서문 터는 리프트 설치 공사로 인해 일정 부분 훼손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때 정상부의 널찍한 대지는 온통 숲과 풀밭뿐이었다. 요즘에 오녀산성에 가면 발굴조사 결과로 크고 작은 건물지들이 유적으로 전시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의 역사적 자취를 탐색할 수 있어 나름 탐방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1995년 그때 처음 오녀산성에 올랐을 때에는 유적이고 뭐고 그보다는 더 가슴에 와닿는 게 너른 평탄지였다. 가파르게 올랐던 절벽 위에 이런 평탄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도면상으로 정상부 평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평탄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가로질러 다녀보고서야 이 오녀산성이 방어와 거주가 잘 어울리는 천혜의 요지임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지형을 골라 성곽을 축조한 고구려인의 혜안에 절로 감탄하게 되었다. 2004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정상부 평탄지의 크기가 남북 길이 600m, 동서 너비 110~200m가량 된다고 하니 독자분들도 어느 정도 넓이인지 가늠하실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축구장 9개 이상 들어갈 크기는 되지 않을까 싶다.

 

오녀산성 정상부에서는 환인댐 저수지와 환인 시내를 굽어볼 수 있다. 사방 주위를 모두 공제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갈 때에는 올라온 서쪽 절벽 반대편 동쪽 산비탈로 내려갔다. 성의 동쪽과 남쪽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다소 완만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면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지금은 탐방로를 잘 만들어 놓았으니 하산 길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1995년 당시에는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왔다.

그래도 그곳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공 성벽을 만났다는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녀산성 아니 흘승골성은 고구려인에게만 성지(聖地)가 아니었다. 고구려사를 공부하던 내내 나에게도 성지나 다름없었으니 그 감동이 어떠하였겠는가. 차디찬 성벽 돌과 덮고 있는 푸른 이끼를 어루만지고, 길게 뻗은 높은 석축 성벽을 바라보니, 비로소 오녀산성이 '성곽'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오녀산성 성벽 전체 둘레가 4574m에 이르는데, 그중 4189m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동쪽과 남쪽 그리고 정상부의 주요 계곡부에만 총 길이 565m 정도 인공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대략 12% 정도만 인공 성벽인 셈이니, 자연 지형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석축 성벽이 있어야 고구려인의 자취를 제대로 실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녀산성 동쪽 성벽과 문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trimming)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는 각각 1개의 문지가 남아 있다. 일부 무너진 성벽에서 축성법을 엿볼 수 있었는데, 고구려의 가장 전형적인 축조 방식인 쐐기형 성돌과 북꼴형 성돌을 이용하고 있고, 높게 쌓은 외벽에는 기초에 장대석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살짝 들여쌓기 하는 방식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필자는 고구려 시대 성벽을 처음 보는 상황이라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 성벽이 과연 주몽왕 때 아니 넉넉하게 잡아서 초기에 쌓았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축성이 훌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벽의 축성 연대를 파악하려면 성벽을 절개하여 기초부까지 발굴하는 등 좀 더 면밀한 발굴이 필요하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아직까지는 중국 측에서도 본격적인 발굴보다는 축성의 형태와 방식을 근거로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를 고구려 초기로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이 다수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벽과 마찬가지로 돌을 가공하여 쌓는 적석무덤의 축조 양상과 비교해서 보면,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는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기 어렵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주몽왕이나 고구려 건국 초기에 쌓아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중후기에 축성된 성벽 축조와 비교하면 쐐기꼴 성돌이 정연하지 못한 점이나 다소 서투른 느낌을 주는 겉쌓기 방식을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오녀산성 성벽을 만든 시기는 이른 중기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건국기라는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에 필자도 동의한다.

동남부의 인공 성벽이 다소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오녀산성이 건국 초기에 도성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초기에 오녀산성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정상부의 평탄지를 절벽 사이로 올라간 서문 자리와 동북쪽의 트인 부분 일부, 그리고 동남부 산비탈로 이어지는 일부에 방어시설을 갖추면 따로 성벽이 없더라도 훌륭한 성곽이 될 수 있다.

오녀산성 저수지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trimming)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에는 이런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에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 오자 대무신왕은 위나암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한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지 않자 대무신왕이 계책을 물었는데 좌보 을두지가 이렇게 건의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높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밖에서는 성안의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지형에다, 성안에 연못이 있는 오녀산성의 모습이 연상되는 내용이다. 여기 위나암성에 대해서는 국내 천도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부분이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오녀산성의 동, 남부에 축조된 인공성벽 등은 뒤에 성을 확장하면서 축성되었을 것이며, 이는 오녀산성 즉 흘승골성이 단지 시조의 건국지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사실 오녀산성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도 건국지라는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환런(桓仁) 시내에서 8㎞쯤 달렸을까.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길을 굽이굽이 돌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상상 속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 떡하니 솟아있다. 이름하여 오녀산성이다. 산과 마을을 수호하던 선녀 5명이 흑룡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해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고구려의 발상지라면서 뜬금없는 오녀산성이라니…. 하지만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으니 어쩌랴.

 

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녹록지 않다. 입구에서 30~40분간 999계단을 힘겹게 오르다가 숨이 목젖까지 차오를 때면 정상(해발 820m)에 닿는다.

정상은 남북 길이 1.5㎞, 동서 길이 200~300m의 평평한 땅이다. 고구려 사람의 체취가 곳곳에서 풍긴다. 그들이 쌓았던 성벽의 흔적이 보이고, 그들이 마셨던 우물이 그대로 있다. 후대 사람들이 '소천지(小天地)'란 재치있는 이름을 붙였다. 궁궐터와 곡식창고, 대형맷돌 등의 유적·유구들이 잇달아 보인다. 고구려 군인들의 내무반터에서 온돌의 흔적이 보인다. 옛 문헌의 기록 그대로다.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 불을 때서 따뜻하게 만든다"(<후당서>)

'운해송도(雲海松濤)'라 이름 붙인 전망대에 서면 100m 수직벼랑이 현기증을 자아낸다.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필자의 오금이 저려온다.

몸서리를 치며 살짝 눈을 들자 환런 시내와, 시내를 '역S자'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시선을 휘어잡는다.

"저 강이 역사서에 보이는 비류수(지금은 훈강·渾江)입니다. 고구려 역사의 탯줄이라 할 수 있는…."

신형식 전 이화여대 교수와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이 한목소리를 낸다. 답사단(강남문화원)을 이끈 최병식 강남문화원장은 "강과 강 유역의 도읍, 산성 등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소리친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시(桓仁市)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우뚝 서 있는 오녀산성 정상. 100m 수직벼랑이 현기증을 자아낸다. 과연 천험의 요새다. 저 멀리 역S자 모양의 비류수가 보인다. 기원전 37년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이 비류수 가에 정착한 뒤 이곳 오녀산에 산성을 세웠다(기원전 34년). 환런(중국) | 사진작가 이오봉씨·강남문화원 제공

■ 주몽의 '기획 결혼'

2000여 년 전 저 비류수와, 이 산성에서 일어난 흥미진진한 역사를 되돌아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다.

"추모(주몽) 일행은 비류곡의 홀본(졸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建都) 세위를 다하지 못한 왕은 홀본성 동쪽 언덕에서 하늘이 보내준 황룡의 머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광개토대왕 비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명성왕조'는 이때의 상황을 부연 설명해준다.

 

"주몽이 졸본천(비류수)에 이르렀다.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도읍하려 했다. 그러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무슨 말인가. 주몽은 동부여 태자(대소)의 추격을 피해 창졸간에 망명했다. 나라를 세울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짓고, 서쪽 산(오녀산)에 산성을 지을 작정이었지만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숨어있다.

<삼국사기>는 "도망친 주몽이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고 왕위를 이었다"고 했다. <삼국사기>는 이 기록 밑에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미망인인 소서노와 혼인했다"는 다른 설(說)도 소개했다. "소서노가 주몽의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과 함께…. 어떤 내용이 맞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눈에 들어, 혹은 능력있는 여인(소서노)을 얻어 창업의 날개를 달았음을 알 수 있다. 빈손으로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으로서는 '기획 결혼'에 성공한 것이다.

 

오녀산성 원경.

■ '듣보잡' 취급당한 주몽

동명왕(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했다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비류수 상류에 기존의 비류국이 버티고 있었다. 행인국과 동부여, 북옥저, 낙랑국도 신생국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렸다. 중원의 한나라는 물론 선비와 말갈족 등 이민족도 위협적이었다. 주몽은 우선 비류국을 도모하기로 했다.

"기원전 36년 왕이 비류국을 찾아가자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명성왕조')

송양이 동명왕을 '듣보잡'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러자 주몽은 "난 천제의 아들인데, 여기(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정했다"고 말했다. 송양은 피식 비웃었다.

"우린 여러 대에 걸쳐 임금노릇을 했다. 여긴 땅이 좁아 두 주인이 나눠 가질 수 없다. 항복하는 편이 나을걸…."

결국 동명왕과 송양은 활쏘기로 승자를 가렸는데, 송양이 대적할 수 없었다.(<삼국사기>)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은 <고기(古記)> 등을 인용, 나라의 운명을 건 '벼랑 끝 결투' 장면을 현장중계한다.

"네가 천제의 후손이라고? 헛소리마라. 활쏘기로 겨루자."(송양)

송양은 사슴 표적을 100보 안에 놓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동명왕은 옥(玉)으로 만든 가락지를 100보 안에 걸어놓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정확히 옥가락지를 꿰뚫었다. 동명왕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고구려주민들의 생명수였던 천지.

■ 주몽, 황룡 타고 승천하다

한숨을 돌린 동명왕은 창업 4년째(기원전 34년) 미뤄뒀던 성곽과 궁궐을 건설했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34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일주일간이나 빛을 분간하지 못했다.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된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세운 성', 즉 오녀산성인 것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이때의 상황을 드라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검은 구름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했다. 오직 수천명의 소리가 들렸다. 토목 공사를 하는 것 같았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라고 했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의미심장한 기록이 또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 35년 황룡이 나타나고, 상서로운 구름이 보였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고 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동명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국 황룡은 주몽(추모), 즉 동명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녀산성의 온돌유적.

■ 수성에만 만족하지 않은 아들

동명왕은 창업(기원전 37년)-비류국 접수(기원전 36년)-성곽 및 궁실 축조(기원전 34년) 등 나라의 기틀을 잡는다.

이어 행인국(기원전 32년)과 북옥저(기원전 28년)마저 정벌, 성읍으로 삼았다. 고구려 시대의 개막이었다. 주몽(동명왕)을 죽이려던 동부여도 고구려의 기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4년(동명왕 14년) 동명왕의 생모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었다. 동부여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고구려는 동부여의 처사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사신을 부여로 보내 토산물을 보냈다. 바야흐로 동부여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던 기원전 19년 동명왕은 홀본성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타고 승천했다.(광개토대왕비문)

노심초사 나라의 기틀을 잡느라 지존(至尊)의 자리를 즐기지 못했던 동명왕이 아니었던가. 22살에 창업했고, 19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다가 겨우 마흔살 언저리에 승천한 것이다.

그가 품었던 '황룡의 꿈'은 맏아들 유리(왕)에게 이어졌다. 아버지가 말 위에서 이룩한 '창업(創業)'의 기틀 위에 나라를 유지해야 할 '수성(守成)'도 유리왕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 면에서 개국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비축해서 나라의 기틀을 쌓는 데는 이 깎아지른 듯한 지형의 (오녀)산성이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유리왕은 '수성(守成)'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간직한 '황룡의 대업'을 펼치기 위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 황룡의 현신

주변의 소국을 속속 흡수함에 따라 먹여 살려야 할 경작지도 더 필요했다. 당연히 천도론이 제기됐다.

"기원후 2년(유리왕 21년) 설지(제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아뢰었다. '국내 위나암(현 지안 퉁거우·集安 通溝)은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오곡을 키우기 알맞습니다.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생산됩니다.'"

설지는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무진하고, 전쟁의 걱정도 면할 것"이라고 천도를 강력히 추천한다. 유리왕 역시 설지의 천도론을 좇았다.

이듬해인 기원후 3년 10월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성을 쌓았다.

"지안은 천혜의 도읍지 터입니다. 북위 41도의 북쪽 지방이지만 노령산맥이 북풍을 잘 막아주고…. 여기에 우산(북)과 용산(동)이 울타리가 되고, 남쪽에는 서해 바다로 나가는 압록강이 온대 계절풍을 실어나르고…. 그런 의미에서 지안을 두고 '새외(塞外)의 소강남'이라 일컫고 있습니다."(신형식 교수)

고구려는 두번째 도읍에서 424년간(유리왕 22년 기원후 3~장수왕 15년 기원후 427년) 주몽이 꿈꿨던 '황룡의 꿈'을 마음껏 펼쳤다.

필자는 지금 이 순간 오녀산성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숨어 저 멀리 실개천처럼 흐르는 비류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37년간의 도읍은 그 몫을 다한 뒤 황룡의 전설로 남았다. 구름 사이로 햇빛의 줄기가 뻗어 땅과 통한다. 혹 황룡의 현신은 아닐까.

<중국 환런(桓仁) | 이기환 사회에디터 http://leekihwan.khan.kr/>

 

[동명왕릉]

동명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명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명왕릉(東明王陵)종목국보 제36호시대고구려주소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東明王陵)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

ko.wikipedia.org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⑥ 평양지역의 고구려왕릉 (daum.net)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입력 2020. 11. 21. 08:02
 
광개토왕, 장수왕릉도 확정하지 못한 상황
왕릉 주인공 놓고 남북 견해 차이 확연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세무덤(강서삼묘)를 비롯해 덕흥리벽화무덤(국보유적 제156호), 진파리 7호무덤 등 여러 고구려시기 무덤에 직접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안타까운 점은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건국시조인 동명왕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 28명의 국왕이 있었다. 고구려왕들은 추모왕(동명왕), 유리왕 등 이름을 딴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장지명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미천왕은 미천원에,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광개토왕의 경우도 원래 공식 호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므로, '국강상(장지명)+광개토경평안(업적)+대왕(태왕)' 형식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는 광개토왕을 국강상왕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고국곡에 묻힌 8대 신대왕이 '고국곡왕'이 아닌 '신대왕'으로 기록된 것은 광개토왕처럼 왕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킨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왕들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장지명으로 왕의 이름이 붙어 있기 때문에 왕릉이 있는 지형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지역에서 고국천왕의 '고국천'(故國川), 고국양왕의 '고국양'(故國壤), 광개토왕의 '국강상'(國岡上)이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환도산성에서 국내성터로 가는 길에 있는 고구려시기 무덤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부터 제20대 장수왕 15년(427)까지 42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지역에는 1만 2천여기의 고구려 무덤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태왕릉에서 바라다본 광개토왕비 비각과 장군총(將軍塚). 태왕릉과 장군총은 1.7km 떨어져 마주보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고구려는 2대 유리왕 때 국내성지역(현재 지안지역)으로 수도를 옮겼고, 장수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고구려 왕릉은 이 지역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있는 지안(集安)지역에는 현재 수많은 고구려시기 무덤이 남아 있다. 그 중 임강총, 천추총, 서대총, 태왕릉, 장군총 등이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을 두고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서대총은 미천왕의 무덤으로 견해가 모아져 있다.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태왕릉 전경.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학계에서는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 전경. 과거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한국학계에서는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 뉴스1

 

과거 태왕릉 인근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태왕릉은 광개토왕릉,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현재는 태왕릉을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릉으로,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었지만 비 근처에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 둘 중에서 어느 게 광개토왕의 무덤인지를 놓고 여전히 확정짓지 못하는 상황이니 다른 고구려 왕릉의 주인공을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평양에 있는 고구려 왕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 평양에 있는 고구려 무덤 중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은 경신리1호무덤, 전(傳)동명왕릉, 진파리1호무덤과 4호무덤, 강서대묘·중묘·소묘, 호남리사신무덤, 토포리큰무덤(토포리대총), 안악3호무덤 등이다.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20대 장수왕으로부터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등 8명의 국왕은 평양에 묻혔을 것이다. 마지막 보장왕은 고구려가 멸망 후 당나라가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해 묻혔기 때문에 제외된다.

평양지역에 남아 있는 왕릉 중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평양 중심부에서 25km 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역포구역 용산리(옛 진파리)의 동명왕릉(국보유적 제36호)이다. 이곳에는 동명왕릉을 비롯해 10여기의 고분이 남아 있다. 북한에서는 '동명왕릉고분군'(국보유적 제15호)이라 부른다. 동명왕릉은 고분군에 속한 돌방무덤(石室墳) 가운데 가장 크고, 예로부터 '진주'(眞珠墓)라고 불렸다.

1973년경 김일성종합대학 채희국 교수의 주도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전(傳)동명왕릉을 발굴하고 있다. 발굴과정에서 모두 641송이의 연꽃무뉘 벽화가 발견됐고, 금과 은으로 만든 왕관 자편들과 구슬 등이 출토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의 무덤은 당연히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에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대 대무신왕은 졸본에 동명왕의 사당(廟)을 세웠고, 고구려의 역대왕들은 평양천도 이후에도 졸본까지 가서 한 달을 머물며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졸본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덤의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졸본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무덤이 평양 일대에서 다른 고분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연꽃무늬 벽화가 그려져 있고, 동명왕릉이 속한 진파리 고분군의 다른 무덤들이 모두 동명왕릉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주요 근거다. 그리고 '정릉'(定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과 기와가 출토되어 정릉사로 불린 사찰이 무덤 앞에 건립되어 원찰의 역할을 한다는 점도 시조릉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다. 실제로 능사를 갖춘 왕릉은 전동명왕릉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이 무덤이 특별한 위상을 갖는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한은 이 무덤을 발굴 후 동명왕릉으로 확정하고, 1993년 5월에 화려하게 개건했다.

1974년 발굴 후 화려하게 개건된 동명왕릉의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 뉴스1
1974년 발굴 후 웅장하게 개건된 동명왕릉의 정면 모습.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사실 이 무덤을 동명왕릉으로 보는 것은 북한학계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적어도 고려 후기부터는 고려나 조선에서도 동명왕릉이라고 인식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고려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의 용산묘(龍山墓)라고 기록돼 있고, 조선 초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동명왕 무덤은 부의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의 경계 용산(龍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의 동명왕릉이 고려시대에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당대에 잘못 파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평양 천도한 후에 졸본의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겨왔거나 혹은 평양에도 동명왕릉의 허묘(墟墓)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시 미창구(米倉溝)에는 '장군묘'(將軍墓)라고 불리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오녀산성 남쪽에 있고, 묘 앞으로 혼강(渾江, 비류수)이 흐른다. 일각에서는 이 장군묘가 동명왕의 무덤을 옮겨 다시 조성했거나 장수왕 때 개축된 것으로 보고, 비슷한 시기에 천도한 평양에도 동명왕릉의 허묘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남한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무덤을 장수왕릉이나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릉으로 추정한다. 현재로선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2007년 2월 리명화 해설강사가 동명왕릉을 뒤쪽에 있는 ‘진파리 제7호분’에 직접 들어가 묘실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무덤을 북한에서는 고구려 건국공신인 마리 장군의 묘라고 주장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는 10여개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본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 고분군’. 북한에서는 ‘동명왕릉고분군’이라고 한다. 현재 10여기가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한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장군인 고흘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1호분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으로, 온달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4호분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고분군’ 중 하나인 진파리1호분 전경. 북한에서는 고흘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남한학계에서는 무덤 내부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이 무덤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고분군’ 중 하나인 진파리4호분 전경. 북한에서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고 주장한다. 남한학계에서는 무덤 내부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이 무덤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이렇게 추론만 무성한 평양지역 고구려 왕릉들의 주인공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장수왕과 평원왕의 무덤이 확인되어야 한다. 두 왕릉이 다른 왕릉의 주인공을 가리는데 기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동명왕릉을 장수왕릉으로 판단했지만 현재는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평안남도 평성시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한다. 경신리1호무덤은 장군총보다는 훨씬 크고 태왕릉에 다소 못 미치는 규모로, 석실봉토분으로서는 한반도 내에서 가장 큰 고분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이 무덤은 예로부터 '한왕묘'(漢王墓), '황제묘'(皇帝墓)로 불렸다. 이 무덤에서는 연꽃무늬 와당과 다수의 기와가 출토됐고, 이 와당은 대략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490년에 사망한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근거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무덤 남쪽의 현재 행정구역명이 평양시 삼석구역 장수원동이다. 북한은 이 지역의 오랜 마을인 '장수원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수원동이라고 했다. 장수원동의 북쪽에는 청운산에서 발원해 대동강으로 흐르는 장수원천(長壽院川)이 있다. 장수왕이 다녀간 강이라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 지역이 장수왕과 인연이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이 발굴하면서 촬영한 경신리1호무덤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11.21.© 뉴스1

 

경신리1호무덤에서 남동쪽 대동강변에는 석실에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 토포리큰무덤과 사신도로 유명한 호남리사신무덤(국보유적 제26호)이 자리 잡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22대 안장왕과 23대 안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장수원동과 호남리 일대에는 많은 벽화무덤이 남아 있고, 최근까지도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무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한편 평원왕릉은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대묘라는 주장이 제기돼 있다. 강서구역에는 이 무덤 외에도 약수리벽화무덤(국보유적 제29호), 수산리벽화무덤(국보유적 제30호), 태성리벽화무덤 등 고구려시기 무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세무덤(국보유적 제28호)은 특이한 배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강서세무덤은 무덤 크기에 따라 대묘, 중묘, 소묘로 불린다. 대묘가 가장 앞에 위치하고 그 뒤에 중묘와 소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토포리큰무덤이나 호남리사신무덤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삼묘 전경. 앞쪽에 대묘가 있고, 뒤쪽으로 중묘와 소묘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특히 왕릉급으로 평가되는 고구려 무덤 중 강서세무덤처럼 2기이상이 모여 있는 경우가 없다는 점에서 이 무덤의 주인공은 아버지(대묘)와 두 아들(중묘, 소묘)의 관계이거나 3형제 관계로 추정된다.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고구려왕으로는 25대 평원왕과 그의 아들들인 26대 영양왕, 27대 영류왕, 대양왕(평원왕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아버지로 보장왕 때 왕으로 추존) 밖에는 없다.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세무덤(강서삼묘) 앞에 북한이 세운 표식비. 현재 강서세무덤은 삼표리협동농장의 한 가운데에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이에 따라 남한학계에서는 강서대묘를 평원왕으로 추정하고, 강서중묘는 영양왕이나 대양왕, 강서소묘는 영류왕이나 대양왕의 무덤으로 본다. 이 무덤을 형제묘로 봐서 대묘를 영양왕, 중묘를 대양왕, 소묘를 영류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소묘를 대양왕이나 영류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소묘에만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정변으로 시해되거나 공식 왕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본다.

2003년 2월 강서대묘와 중묘 안에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안학궁에서 평양성(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긴 평원왕이 대묘에 묻혔고, 어머니가 같은 영양왕과 대양왕이 대묘 뒤쪽에 나란히 있는 중묘와 소묘의 주인공이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관찰자 입장에서 해봤다.

이외에도 황해남도 안악군에는 국보유적 제73호, 제74호, 제67호로 각각 지정된 세 개의 무덤이 있는데, 그중 안악3호무덤(국보유적 제67호)의 주인을 두고 남북학계 사이에 논쟁이 치열하다. 안악3호무덤에는 무덤조성 시기와 주인을 알 수 있는 7행 68자로 된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됐다. 당연히 이 무덤의 주인공은 336년 연나라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로 확정됐다. 문제는 묵서명이 발견된 위치였다.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무덤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무덤 주인의 초상 벽화는 서쪽 곁방의 정면에 그려져 있고, 서쪽 곁방 입구 양쪽 벽에는 왕을 호위하는 무관인 장하독 2명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의 묵서는 좌측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쓰여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동수의 이름이 쓰인 묵서명이 묘주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묘주의 신하인 장하독에 대한 내용으로 평가한다.

반면 남한학계는 안악3호무덤의 양식이 당시 국내성에 조성된 왕릉 형식과 달리 요녕지역에서 확인되는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본다.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무덤 내부 모습. 정면에 묘지 주인공이 그려져 있고, 앞쪽 입구 양 벽에 장하독(帳下督)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묘지 주인공을 두고 남한학계에서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冬壽)로, 북한학계에서는 고국원왕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원왕은 재위 4년(서기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고, 12년에 환도성을 수리하며 국내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 11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침입해 궁실을 불태운 뒤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다음해 7월 고국원왕은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이주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이 동황성이 서경(西京, 현재 평양) 동쪽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목멱산은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청암동토성)의 대동강 건너편에 있다. 북한은 동황성이 청암토성의 동쪽에 있는 청호토성이라고 보고 있다.

재위 39년(369년)에 고국원왕은 백제를 공격했으나 치양(雉壤, 황해남도 배천)에서 패전했다. 2년 뒤 평양성을 공격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화살에 맞아 사망한 후 고국원(故國原)에 묻혔다. 북한은 고구려가 공격한 평양성이 현재 평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해남도 신원군의 장수산성 일대에 위치한 남평양이라고 해석한다. 즉 남평양성인 장수산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남평양 북쪽의 안악에 묘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평양성과 동황성이 만주에 있다고 보거나 남평양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않는 입장에서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고구려 왕릉들의 주인공을 확정하는 작업은 아직까지도 미로찾기 같다. 고구려의 중심지가 만주와 평양지역이었기 때문에 현재 남한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고구려 왕릉에 직접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의 학자들은 공식입장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남한에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러한 요인들은 고구려왕릉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쟁에서 남과 북의 견해 차이를 좁히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모든 왕릉이 지안(집안)지역에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온 적이 있다. 평양지역의 고구려 왕릉이라도 남북이 활발히 교류하며 공동조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yeh25@news1.kr

 

[진파리고분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9)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직경 0.2mm 정교한 금실, 병사 갑옷에도 금도금
평양 역포 진파리 6호분에서 발견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뚫음무늬 금관

평양 대성구역 청암리에서 발견된 불꽃 문양 금동관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뛰어난 금관들이 6점이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 조상은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금을 좋아했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귀족이 금·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했으며, 고구려인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어 금·은 같은 재물이 없어진다고 기록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의 귀족이 저택과 모자 의복을 금·은·구슬로 치장하고, 금목걸이·금귀고리·금가락지 등의 장신구를 소유했다고 썼다. 또 무덤에서는 금동등자, 금동재갈, 안장, 금동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겨진 금실이 나왔다. 주조, 압연, 도금, 합금, 가늘새김 등의 금세공술로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기술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그뿐만 아니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645년 요동전투에서 말들과 함께 명광개(금갑, 금휴개) 1만 벌(《구당서》에는 5000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고구려 병사들은 황옻칠 또는 금도금을 해서 햇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전투한 것이다.

 

군수산업으로 부국강병

금도금을 한 화살촉들(중국 지안박물관)

 

평안북도 운산 등은 금의 산지였고, 송화강 중류와 상류 주변에는 사금 광산이 많았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점령한 이후 금 생산은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위서》에는 고구려가 북위에 황금 200근(120㎏), 백은 400근(240㎏)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금과 은 무역을 했다. 왜국의 최초 사찰인 ‘아스카사’는 고마척(高麗尺)을 사용해 고구려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황금 300냥(11.25㎏)을 보내 불상을 제조하게 했다. 이어 금과 은을 또 왜국에 보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다량의 백금(은)을 보낸 적이 있다. 중국 기록(《고광록》)에는 은광산에 수백 가구에 이르는 사람이 주거하며 채굴·제련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지안 일대에는 1만20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직경이 60여m에서 80여m에 이르는 대형 피라미드가 10여 기 이상이다. 토목공학이 발달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결과물이다. 700여 년 지속된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점령한 이후 금 생산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호남리사신총]

 

[덕화리고분군]

 

[강서삼묘]

 

강서대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강서대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고적도보(1915년)에 실린 강서대묘 모습 강서대묘(江西大墓)는 남포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 고분(굴식 돌방무덤)이다. 강서삼묘 중 가장 큰

ko.wikipedia.org

강서대묘(江西大墓)는 남포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 고분(굴식 돌방무덤)이다. 강서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이다. 고구려의 왕인 평원왕 혹은 영양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강서대묘 깊이 보기 1 - 산악도 (daum.net)

임기환입력 2019. 5. 30. 15:03
 

[고구려사 명장면-72] 전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하여 고구려 벽화고분 다수를 조사하였다. 평양 체류 기간 일주일 내내 쉼 없이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였기에 어느 하루도 흥분과 감동이 수그러든 날이 없었다. 그런 긴장감은 필자 평생에 다시는 없을 일이었다. 평양 조사 일정 4일째에 마침내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강서 삼묘를 찾아갔다.

강서 삼묘는 무학산에서 흘러내린 낮은 구릉을 살짝 거리를 두어 등지고 있고, 사방으로 너른 들을 끼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치 양택의 명당 자리를 골라 음택을 마련하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강서 삼묘의 가장 앞자리에 대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강서 대묘 내부는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널방은 방형으로 남북 길이 3.17m, 동서 길이 3.12m, 높이 3.51m 규모였다. 지난 회에서 강서 대묘의 널방이 매우 조화롭고 이상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비례를 갖추고 있다고 언급했다. 필자는 실제 강서 대묘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으로 그 탁월한 공간감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강서 대묘 투시도

 

널방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석 두세 장을 잇대어 쌓았고 맨 윗단은 안으로 살짝 기울어지게 다듬었다. 벽과 천장이 만나는 네 모서리에는 삼각형을 잇댄 형태의 5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끼워 넣어 경직되어 보이기 쉬운 모서리를 부드럽게 처리하였다. 이 부분이 내부 방형의 사방 공간을 일체감으로 연결하는 시각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널방의 공간 처리가 매우 섬세하게 설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천장은 받침돌이 벽면보다 약간 안쪽으로 나오게 2단을 평행으로 올려 쌓고 그 위에 모줄임 방식으로 삼각고임돌을 2단으로 얹어 축조하였다. 천장 각 단의 고임돌 역시 살짝 기울임을 주었기 때문에 널방의 공간에서 직선의 경직성이 한결 줄어들었다. 바닥에는 잘 다듬은 두 개의 관대가 동서 양쪽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덤의 널길은 널방 남벽 중앙에 냈고, 널방 입구에는 두 짝 문을 달았던 문확 자리가 남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부 벽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유리벽을 사방으로 둘렀는데, 이 유리벽 때문에 널방의 공간감을 금방 느끼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시선과 머릿속에서 이 유리벽을 제거하는 상상력을 다소 발휘해야 그 완벽한 공간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리벽 때문에 시선에 차단이 있어 벽화를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북측 관계자는 사진 촬영자 외에는 유리벽 안으로 들어가기 곤란하다고 했다. 물론 벽화를 보존하려는 그 뜻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던가. 여기서 유리벽 너머로 보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 관계자에게 30여 년 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열정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숱하게 떠올렸던 모든 이미지를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하는 데는 충분하였다. 구석구석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이른바 안광을 스스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차적 관심은 의당 사방 벽면의 사신도였지만, 어느 새 모줄임 고임돌의 다양한 입체면에 그려진 그림들의 다채로움에 내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강서 대묘 천장 모습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의 고임돌 옆면에는 인동무늬를 감싸안은 초롱무늬가 띠를 두른 듯 이어져 있고, 제2단 고임돌 옆면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상, 선인상, 산악도 등이 서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단, 4단의 고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신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고, 이들 여러 단 고임돌의 아랫면에도 인동초롱무늬, 연꽃무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맨 위 사각형 천장돌에는 둥근 원을 그리며 꿈들거리는 황룡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강서 대묘의 널방은 천장의 황룡부터 사방 벽면의 사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림이 신비스럽고 비현실적인 관념과 환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 중에서 유독 현실 세계를 묘사한 듯이 사실적인 그림이 몇몇 숨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산악도(山岳圖)다.

천장 고임돌 산악도1

 

천장 고임돌에 2종의 산악도가 그려져 있다. 하나는 4개의 신봉우리가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좌우로 다소 낮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앞에 작은 산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앞뒤로 겹치면서 3~4층의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삼각형 모습의 윤곽선 안쪽으로 농담을 넣어 산의 입체감을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면 자체에 깊은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다.

더욱 고임돌의 중간까지만 산을 그리고 그 위로 너른 여백을 두어 마치 하늘을 넓게 담은 듯한 한 폭의 풍경화 분위기를 듬뿍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현실세계의 산악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매우 사실적인 산악의 묘사는 천상의 산이라기보다는 지상의 산임을 느끼게 한다. 이 산악도는 마치 천상과 지상을 나누는 경계에 있는 존재인 듯하다.

천장 고임돌 산악도2

 

또 다른 산악도는 다소 가늘게 우뚝 솟은 둥근 산봉우리가 좌우로 뾰족한 산봉우리를 끼고 있는 모습이다. 각 산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오른 형상이 마치 인간의 염원이 충만되어 솟구치는 듯한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우측 산에서는 붉은 줄기에 녹색의 잎이 무성한 낙락장송 같은 그림이 하늘까지 꿋꿋이 서 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왕의 상징인 일월오악도 그림 좌우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우주목을 연상케 한다. 이 나무 그림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따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주작도와 산악도
서주작도와 산악도

 

이들 천장 고임돌의 산악도와 달리 남쪽 벽의 동서 주작도 아래에도 또 한 폭의 산악도가 펼쳐져 있다. 동서 주작도 아래의 산악도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으로 굵은 붓질로 삼각 모양으로 높고 낮은 산을 좌우로 펼치고 앞 귀로 겹쳐서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산은 붉은색을 칠하여 마치 불타는 화염산처럼 느껴지는데, 붉은 선 아래는 흰색으로 받쳐서 불길을 살짝 죽인 듯하다. 전체적으로 표현 방식은 천장 고임돌의 산악도와 그리 다르지 않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바로 산악도 위에서 거대한 형상으로 날고 있는 주작의 신비로움을 더하는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강서 중묘 현무도와 산악도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 산악도가 이웃해 있는 강서 중묘의 널방 북쪽 현무와 함께 있는 산악도다. 이 산악도 역시 산의 능선 표현에 윤곽선을 따라 농담의 표현이 있고 그 안쪽으로 약간 담채를 넣어 입체감을 드러낸다. 현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듯한 곳은 나지막하게 그리고, 현무 좌우 양쪽에 불쑥 솟아서 마치 현무를 살짝 감싸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여러 겹 이어져 산맥처럼 보이는 산세의 모습은 기암괴석과 같이 울퉁불퉁하고 각이 지고 굴곡져 있어 현실의 산세라기보다는 다소 신비스럽고 기이한 세계를 보여준다. 더욱이 그 위에 현무가 움직이고 있어서 마치 현무의 운동감이 산악의 기이한 형태에 조응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더욱더 현무를 신비스럽게 연출하고 있다.

무용총 수렵도의 산악도
약수리고분 수렵도의 산악도(선묘화)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 벽화에서 보이는 이런 사실적인 산악의 표현은 앞선 시기 벽화에 보이는 산악도와는 매우 다르다. 무용총 수렵도에 보이는 산악도는 구불구불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고, 약수리벽화 수렵도에 보이는 산악도는 그릇을 엎어 놓은 도안적인 형태다. 게다가 이들 산악도는 수렵하는 장면에서 하나의 배경으로만 기능하고 있음에 반하여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의 산악도는 독립된 제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강서 대묘의 주작도와 강서 중묘의 현무도 아래에 그려진 산악도조차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독립된 산악도로서 독자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적인 산악의 표현 방식이나 제재의 새로운 성격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회화적 진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 고구려인 생각의 진전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추론하자면 이런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산악의 모습은 고구려인들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산천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봄직하다.

6세기 말~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에 이런 산악도가 담기게 된 것은 수나라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인들이 자신들 삶의 무대에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된 결과라고 이해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서대묘 깊이보기 2 - 수목도 (daum.net)

임기환입력 2019. 6. 13. 15:03
 

[고구려사 명장면-73] 산악은 산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산악에는 나무가 숲을 이루기 마련이다. 거대한 암반이나 기괴암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일지라도 나무가 드문드문 곁들여지지 않으면 멋진 풍광이 되지 못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면 암산과 토산이 좌우로 나뉘어 태극의 형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왼쪽의 토산은 산봉우리마다 가득이 나무 숲을 표현하였으며, 오른쪽의 암산에서는 솟구치는 봉우리 곳곳에 나무와 작은 숲을 조화롭게 담아내고 있다. 금강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나무와 숲을 입혀야 비로소 완성된다.

지난 회에서 산악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는데, 사실 산과 나무는 고구려 벽화 내에서도 함께 또는 따로 표현되는 주요한 재재였다. 강서대묘 천장에 그려진 산악도 중의 하나에는 산악의 형상만이 아니라, 오른쪽 산봉우리 기슭에 산봉우리 높이만큼 키가 큰 나무 숲을 그려놓았다. 녹색 잎이 무성한 소나무처럼 보이는 나무들인데, 조선시대 왕권의 상징물인 일월오악도의 좌우에서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목을 연상시키고 있다.

 

1.강서대묘 산악수목도

강서대묘 산악수목도

 

산봉우리와 나무의 크기 비례를 염두에 두면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나무 자체의 묘사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아마 사생(寫生)의 결과인 듯하다. 즉 강서대묘의 산악과 수목의 표현은 사실적이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세계는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이 산악수목도가 현실세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천장 벽화의 선인상, 비천상과 마찬가지로 하늘세계나 이상세계를 그려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내리1호분 산악과 수목도

내리 1호분 산악도

 

이런 산악과 수목의 묘사는 6세기 후반~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리1호분 산악도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천장부 1층 평행고임돌 동북벽과 서북벽이 이어지는 모서리 양면에 걸쳐 그려진 산악도는 한가운데 3산 형태의 산악을 배치하고 능선 기슭에 암산형 산봉우리와 수목을 그렸다. 나무의 경우 다소 도안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나무 밑둥에서 굵은 줄기가 위로 가면서 두세 갈래로 갈라지고, 다시 여러 갈래 나뉜 작은 가지 끝에 잎이 무성한 소나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이 강서대묘의 산악수목도와 매우 흡사하다.

다만 강서대묘의 산악수목도가 훨씬 사실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내리1호분보다 좀 더 발전한 회화적 기법을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산악수목도 모두 다른 주제의 배경이 아니라 독립된 재재로서 한 폭의 산수화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러한 두 수목도 이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무 그림은 어떠하였을까?

우선 가장 이른 시기인 5세기 전반 무렵에 축조된 무용총과 각저총의 나무 그림을 살펴보자. 무용총 수렵도 화면의 오른쪽, 즉 무사들이 말을 달려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다. 굵은 나무줄기가 똑바로 위로 자라다가 줄기 윗부분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고 또 나뉘면서 풍성하게 펼쳐지고, 아래 밑둥에서부터 좌우로 갈래갈래 갈라져 나온 가지들과 한껏 어우러진다. 가지 끝에 달린 연녹색 잎이 마치 꽃망울처럼 탐스럽다. 이 나무 그림은 수렵도의 배경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 나무 그림으로 인하여 왼쪽의 산야에서 펼쳐지는 수렵 장면이 더욱 생동감 넘치게 느껴진다.

 

3.무용총 수렵도 나무 그림

무용총 수렵도와 나무그림

 

각저총 씨름도 왼쪽에 있는 나무 그림도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지 끝에 푸른색 잎 덩어리가 하나씩 매달려 있는 모습이 무용총의 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무용총 나무와는 달리 오른쪽 씨름하는 무사들의 머리 위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어, 마치 씨름이 나무 아래에서 펼쳐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나무에 검은색 새 네 마리가 길게 목을 빼고 지저귀는 모습을 그려 씨름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4.각저총 수목도

각저총 씨름도와 나무그림

 

이 나무 그림은 씨름도의 배경 구실을 하고 있지만,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씨름하는 장면에서 왼쪽의 나무가 없다면 화면은 매우 밋밋하고 씨름하는 역사들의 동작도 그 힘찬 느낌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나무 그림을 가리고 한번 보시라, 어떤 느낌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서 율동감 넘치는 나무로 인해 씨름 장면 전체에 역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무용총 수렵도와 각저총 씨름도에 보이는 이들 나무 그림은 비록 한 그루이지만 화면에서 결코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무가 독립된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배경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두 나무 그림 모두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율동감을 갖고 있어, 이 나무 그림으로 인해 수렵도와 씨름도가 생동감을 갖게 된다. 또한 나무의 좌우에 서로 다른 재재가 그려지고 있어 자연스레 화면을 분할해주는 역할도 한다.

 

5.장천1호분 백희기악도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

 

이보다 다소 뒷 시기에 축조된 장천 1호분에는 이와 다른 이미지의 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귀족들의 갖가지 놀이와 즐거움을 표현한 벽화 장면의 한가운데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는 위치에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무용총이나 각저총과는 달리 밑둥에서부터 아무런 잔가지 없이 위로 쭉 뻗어올라간 굵은 줄기의 위끝에만 좌우 대칭 형태로 가지들이 뻗어 나가고 있다. 가운데 줄기 맨윗단은 가지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교차되는 모습으로 그려져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6.장천1호분 하단 나무 그림

장천1호분 하단 나무 그림

 

화면의 왼쪽 아래 구석에도 나무 한 그루가 작은 동산 위에 서 있는데, 가운데 굵은 줄기 중간부터 길게 뻗어나간 가지들이 마치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듯이 오른쪽으로 뻗어가며 율동감을 잔뜩 안고 있다. 가지 끝에는 연녹색의 둥근 잎이 달려 있는데,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나무 그림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이 나무 오른쪽에는 힘차게 질주하는 무사와 사슴들이 그려진 수렵도가 있어, 이 나무 그림이 일종의 배경이 되고 있다.

 

7.장천1호분 상단 나무 그림

장천1호분 상단 나무 그림

 

여기 전체 화면에서는 앞서 본 나무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 나무 오른편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고, 나무 줄기가 울퉁불퉁하게 표현되어 사실적인 느낌을 주고 있어, 귀족들이 즐기고 있는 현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그런데 나무 왼쪽에는 무덤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나무를 향한 자세로 자리 잡고 있고, 나무 오른쪽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무인지 주인공인지를 향해 무릎을 꿇거나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무를 가운데 놓고 주인공 인물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 모습으로 처리된 이 화면에서 나무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나무가 신성한 성격을 갖는 존재로 그려진 것인지 여부는 충분히 확인되지 않지만, 나무의 크기나 우뚝 선 모습이 시각적으로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위상을 부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나무 그림과 비교할 때 그 형상이나 표현 기법뿐만 아니라 화면상에서 나무가 차지하는 비중과 성격도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6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나무 그림은 그 자체가 독립된 재개가 될 뿐만 아니라 사실적 묘사 등 표현 기법 등에서 상당히 진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평양 동명왕릉 주변에 위치한 진파리1호분의 널방 북벽에 그려진 나무 그림이 대표적이다.

 

8.진파리 제1호분 북벽 수목도2

진파리 1호분 북벽 현무와 수목도2

 

화면에서 나무는 현무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대칭을 이루듯 두 그루씩 자리 잡았다. 그런데 두 나무가 아주 가까이 있으며 좌우로 나누어 가지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실상은 한 그루의 모습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몰골법으로 처리된 나무 줄기는 살짝 휘어지면서 멋을 부리고, 부채살처럼 펼쳐진 잔가지 끝에 달린 푸른 잎은 풍성하게 흐드러져 있다.

조선시대 소나무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줄기와 가지, 잎의 표현이 무척 세련되었다. 북벽 전체 화면에서는 가운데 현무를 보위하는 구성이지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소나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아도 충분하다. 동시에 좌우 소나무와 현무가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아마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산수풍경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로 넘어가면서 고구려 벽화에서 사실적 표현이 풍부해진다. 여기서 '사실적 표현'이란 관찰을 통한 현실세계에 대한 묘사력이 높아진다는 뜻만이 아니라 비록 상상의 세계라도 그 대상의 구체성에 대한 표현이 풍부해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생(寫生) 등 회화적 기법의 발달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 및 사유와 연관될 것이다. 이 무렵 고구려 사회에서 세계관이나 사생관의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어렵다.

필자는 이 진파리 4호분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문득 조선시대 일월오봉도를 떠올렸다. 일월오봉도는 하늘에 해와 달을 두고, 암괴가 층층이 쌓인 다섯 봉우리가 산악을 이루고 그 좌우로 붉은 줄기에 푸른 잎이 가득한 소나무가 좌우 2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굳건하게 서 있다. 소나무 그림은 사실적이지만 정적인 자태로서, 전체 화면에서 하단에 일렁거리는 파도를 제외한다면 매우 정적인 구도와 표현이다.

 

9.일월오봉도

조선시대 일월오봉도

 

진파리 2호분 북벽 현무수목도의 하늘세계에서는 구름인지 기운인지가 오른쪽으로 힘차게 휘몰아 흐르고 그 사이를 연꽃 등이 흩날리고 있다. 좌우의 소나무 역시 이런 바람 기운에 흔들리는 율동감이 가득하다. 화면 전체에 역동성과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아마 이렇게 역동적인 표현은 동시대 어디 그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조선시대 일월오봉도와 이 현무수목도는 우선 정적 분위기인지, 동적 분위기인지부터 다르다. 하지만 두 그림 사이에는 좌우에 두 그루 소나무가 마치 우주목처럼 땅과 하늘세계를 연결하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이 양자를 과연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두 그림 사이에 비록 1000여 년 시간의 격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여기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 면면이 흐르는 어떤 문화적 맥락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큰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이어지는 문화 전통을 발견하는 것이 역사 탐구 또 다른 매력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서대묘 깊이보기 3 - 비천과 선인 (daum.net)

임기환입력 2019. 6. 27. 15:09
 

[고구려사 명장면-74] 강서대묘의 천장 고임에는 하늘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중에 이번 회에서는 불교신앙에서 비롯하는 천인(天人)과 신선신앙이나 도교신앙의 선인(仙人)들로 추정되는 존재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 천인이나 선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데, 날개를 갖고 하늘을 나는 우인(羽人), 봉황 같은 신성스러운 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선인, 그리고 하늘거리는 날개옷을 입고 하늘을 나는 비천 등이 그려져 있다.

강서대묘 우인(우인)의 모습

그중 날개를 갖고 우인의 존재가 다른 고분벽화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하늘을 나는 모습은 아니지만, 날개를 갖고 있는 천인은 오회분 4호묘의 동쪽벽 청룡 위에 그려진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오회분 4호묘 동벽, 우인의 모습

현실세계에서 새들처럼 날개가 있어야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날개 달린 우인의 존재가 상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하늘을 나는 데 꼭 날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날개 대신에 상서로운 새나 학처럼 하늘을 나는 동물들을 타고 하늘을 날거나, 아니면 날개옷 같은 어떤 상서로운 기물의 힘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우인이 그려진 예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오회분 4호묘의 해신과 달신은 마치 옷이 날개처럼 좌우로 쭉 뻗어있어서 날개는 아니지만 마치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는 형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날개옷을 날개 모습으로 그렸다는 점이 화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오회분 4호묘 해신과 달신

한편 강서대묘에서는 봉황과 비슷하게 묘사된 새를 타고 붉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가는 선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상서로운 동물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이야기는 고구려 건국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천제인 해모수는 다섯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땅과 하늘을 오르내렸다고 하며, 그의 아들 고구려 시조 주몽은 용의 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강서대묘 새를 탄 선인

이처럼 상서로운 동물을 타고 하늘을 나는 존재는 도교의 선인들로 보이는데, 중국 지안시에 있는 오회분 4호묘에 해까마귀와 달두꺼비를 좌우로 호위하는 듯한 선인 여럿이 그려져 있다. 학을 탄 선인, 용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선인, 봉황을 탄 선인, 괴수를 탄 선인 4인이 하늘을 날고 있다. 통구사신총에도 학을 탄 선인의 모습이 보인다.

오회분 4호묘 해까마귀와 선인
오회분 4호묘 달두꺼비와 선인

강서대묘 하늘세계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존재는 날개옷과 같이 하늘거리는 옷을 바람에 한껏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비천상(飛天像)이다. 상반신은 벗은 몸을 드러내고 몸을 반쯤 휘감은 옷자락은 물결치듯 흩날리고 있다. 이들은 요고나 뿔 나팔, 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마치 천상의 음악이 들려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강서대묘 비천상

이런 날개옷으로 창공을 나는 존재들을 상정하는 상상력은 과거 옛이야기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우리에게 친숙한 선녀와 나뭇꾼 설화에서 하늘나라 선계에서 내려온 선녀는 날개옷을 빼앗김으로써 하늘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뭇꾼과 살다가 나중에 날개옷을 되찾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좋은 사례이다.

상원사 동종 및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이런 날개옷을 휘날리는 비천상하면 상원사 동종의 주악 비천상이나 에밀레종으로 널리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에 부조된 비천상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상원사 동종 비천상은 주악비천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 비천상의 하늘로 휘날리는 아름다운 기운의 이미지가 강서대묘 비천상과 더 흡사하다. 다만 이들 신라의 비천상은 옷자락이 아니라 어떤 영기에 휘감겨 있는 이미지이고, 또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있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다. 이와 달리 강서대묘의 주악비천상은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어서 하늘을 날고 있는 이미지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아름다운 비천상으로는 안악2호분 비천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비천상은 보통 하늘을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덤방 천정부에 그려지지만 안악 2호분의 비천상은 무덤방 벽면의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점도 독특하다. 안악 2호분에는 여러 비천상이 있지만, 무덤방 동벽에 그려진 비천상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려졌다.

안악2호분 비천상
안악2호분 비천상의 얼굴 모습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둥근 얼굴에 코는 오똑하고, 짙은 초생달 같은 눈썹에 살포시 눈웃음치고, 미소를 띠는 듯 살짝 벌어져 있는 붉은 입술 사이로 천상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듯하다. 두 손은 연꽃이 담긴 화반을 다소곳하게 받쳐들었는데, 아마도 꽃을 공양하는 모습을 그린 듯하다. 그리고 몸보다 두 배 이상 긴 옷자락이 물결치듯 흔들거리며 뒤로 길게 두 줄기 뻗친 모습은 너무나도 우아하게 나는 이미지를 그지없이 드러낸다.

특히 안악2호분은 무덤방 주인이 자리하는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여성 혼자이고 게다가 시신을 두는 관대도 하나밖에 없어,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남편이 함께하지 못하고 아내 혼자 묻힌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여성 비천상이 그려진 배경도 무덤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강서대묘 천장의 비천과 선인들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 이야말로 하늘을 향한 고구려인들의 소망 역시 다채로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고구려사 명장면-75] 강서대묘 하면 의당 사신도부터 떠올리기 때문에, 오히려 필자는 무덤 공간의 균형과 조화로움으로부터 시작해서 천장의 여러 그림들부터 살펴보고 있다. 이번 회가 천장 그림으로는 마지막이다.

석실 무덤을 축조할 때 무덤 바닥과 네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천장고임을 만든 뒤 마지막에 덮개돌을 덮음으로써 무덤 내부가 완성된다, 그 덮개돌이 무덤 안에서 볼 때는 천장석이 된다. 그래서 천장석은 무덤 축조의 마침돌이 되는 셈이다. 필자는 벽화고분을 축조하면서 어느 단계에서 벽화를 그리는지 늘 궁금해 했지만, 아직 전문가로부터도 그리 명쾌한 확답을 듣지는 못했다.

 

예컨대 벽화를 천장석까지 맞추어 완성해놓고 인공적인 불을 밝히고 벽화를 그리는지, 아니면 천장석은 비워놓고 자연광 아래에서 벽화를 완성하고 나중에 천장석을 덮고, 마지막 천장석 그림을 그리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광이냐 인공광이냐는 벽화의 채색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터이니, 벽화고분 천장석이 갖는 의미를 환기해보시라는 정도의 문제 제기만 하고 다시 강서대묘 천장석으로 돌아가자.

강서대묘의 정방형 천장석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천장석의 네 모서리에는 연꽃이 수줍게 살짝 얼굴을 드러내듯 4분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이 천장석을 받치고 있는 삼각 고임돌의 네 옆면에는 날개과 꼬리를 휘날리는 서조 등이 그려져 있고, 그 삼각 고임돌의 아랫면에는 화려하게 피어나는 연꽃과 인동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랫단 삼각고임돌의 옆면에는 봉황과 기린 등이, 그 아랫면에는 활짝 핀 연꽃과 하늘을 나는 서수들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

강서대묘 천장 (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 천장석의 황룡, 2단의 삼각고임돌에 봉황과 기린, 여러 서수, 연꽃 문양 등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강서대묘 천장 윗부분은 2단의 삼각고임과 천장석으로 구성하여 반구형으로 상상되는 하늘세계를 구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거기에 선인과 비천상이나 여러 서수, 연꽃 등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장의 황룡을 마침표로 하여 하늘 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그중에서 아랫단 삼각고임 옆면에 신령스러운 화초를 가운데 두고 서로 다정스레 마주 보고 있는 암수 한 쌍으로 그려져 있는 기린과 봉황이 눈길을 끈다. 기린은 입으로부터 영기를 뿜어내며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다.

강서대묘 천장 기린 (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기린은 중국 고대에서부터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 수컷을 기(麒), 암컷을 린(麟)이라고 하며 합쳐서 기린이라고 부른다. 그 형상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처음에는 사슴의 형상으로 표현되다가 점차 말의 몸을 갖는 형태로 바뀌어 갔다. 여기에 하나의 뿔을 갖고 있으며, 입에서는 서기(瑞氣)를 뿜어내고 날 수 있다고 한다.

경주 천마총 출토 말다래 천마도

이런 기린의 모습은 경주 155호 고분에서 출토된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와 매우 비슷하다. 게다가 나중에 적외선 촬영으로 이마에 뿔이 하나 그려진 것이 확인되면서, 하늘을 나는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주장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지금도 말갈기를 묶어 뿔처럼 장식하는 몽골의 풍습을 보면, 기린이 아니라 천마도가 맞는다는 반론도 여전하다. 천마인지, 기린인지를 따져볼 때, 강서대묘의 기린 모습은 이 시기 사람들이 상상한 기린의 형상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

안악1호분 기린도 : 안악 1호분 무덤방 서쪽 천장에도 기린도가 그려져 있는데, 말처럼 네 다리를 내디디며 날개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다음 기린과 하나의 세트를 맞추어 그려져 있는 게 봉황이다. 붉은 날개를 힘껏 날갯짓하며 기다란 꼬리를 휘날리고 있는 모습이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여 합쳐 봉황이라고 한다.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갖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조금 다른 묘사도 있는데, 상상의 동물인 만큼 그 모습이 같을 수는 없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신비로움을 부여하는 상상력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강서대묘 천장 봉황(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든 봉황이 상서롭고 아름다운 새로 인식되었음은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사신의 하나인 주작 상서로운 새라는 점에서 역시 봉황과 그리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 게다. 그래서 도상이나 인식에서 봉황과 주작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그래서 도상들의 그려지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예컨대 고구려 벽화고분 무덤방의 남쪽 벽에 그려진 것은 사신의 하나인 주작이다. 그러나 천장 등에 그려지는 상서로운 새는 주작과 비슷한 모습일지라도 봉황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린과 봉황이 그려져 있는 그 윗단 삼각모줄임 옆면에도 봉황과 비슷한 모습의 서수가 그려져 있다. 긴 꼬리와 날개를 흔들고 있는 모습이 봉황과 비슷하지만, 이들 존재를 봉황으로 보기는 어렵겠다. 아랫단에 암수 쌍으로 표현된 봉황과는 달리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서로 같은 방향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기린과 봉황 이외에도 비어(飛魚) 등 여러 서수들이 강서대묘 천장에 담겨 있다는 점만 확인하고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마지막으로 천장석에 그려져 있는 황룡을 살펴보자. 다소 손상되어 그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황룡은 몸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마치 소용돌이 치는 듯한 역동감을 불러일으키고, 둥근 원의 몸에서 뻗어나가는 듯한 꼬리는 큰 반원형에서 점점 작아지는 파형을 그리면서 율동감과 속도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방형의 하늘을 유영하는 듯한 황룡의 묘사는 네 벽면의 사신도 못지않은 생동감이 넘치는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강서대묘 천장 황룡(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강서대묘는 이 천장석의 황룡으로 인해 동서남북 사방의 사신도와 더불어 오행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고분이 되었다. 그런데 황색이 중앙 색이고 거기에 왕권을 상징하는 용으로 표현되면서, 천장석의 황룡은 고구려 태왕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 다만 용은 워낙 다양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왕릉으로 볼 수 없는 집안의 오회분 4호묘의 천장에도 황룡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오회분 4호묘 황룡도

오회분 4호묘의 황룡 그림은 우아함과 세련됨에서는 강서대묘의 그것에 다소 모자라지만, 힘의 역동성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느 사신도에 못지않다. 왼쪽 앞발과 뒷다리는 힘을 응축하듯 잔뜩 구부리고 있지만, 오른쪽 앞발과 뒷다리는 힘차게 내지르고 있다. 특히 S형으로 굴곡지게 그려져 있는 목과 꼬리 사이에서 일직선으로 쭉 뻗치고 있는 뒷다리는 불균형 크기임에도 오히려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여기에 용의 비늘 덮인 몸은 오방색을 연상시키는 5색이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동시에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리고 크게 벌린 입술과 날름거리는 혀, 두 뿔은 붉은색으로 표현하여 용의 뒷다리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흰색과 대비되어 한층 생명력을 일으키고 있다.

 

필자는 이 황룡도를 볼 때마다 마치 현대 회화를 보는 듯한 그림의 파격적 구성과 색채감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필자 개인 생각으로는 이 오회분 4호묘 황룡도를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걸작으로 꼽을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천장에 황룡이 그려져 있는 고분은 강서대묘와 오회분 4호분 단 2기뿐이다. 평양 지역 벽화고분 중에는 왕릉급 고분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강서대묘를 제외하고는 천장석에 황룡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서대묘 천장석의 황룡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강서대묘와 나란히 있는 강서중묘도 왕릉임이 분명한데, 천장에는 연꽃이 그려져 있다. 황룡도에 사방 중앙의 군주권이라는 상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강서대묘에 묻혀 있는 주인공이 강서중묘의 주인공보다는 좀 더 특별하게 기려졌던 왕이었음을 시사받을 수 있겠다.

앞서 본 연재 70회에서 강서삼묘의 무덤 주인공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천장의 황룡도를 고려한다면 과연 그들 중 어느 왕이 강서대묘의 주인공일까? 어차피 확증도 없고 정답도 모르니, 독자 여러분도 나름 상상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보시기 바란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서대묘 깊이보기 5 - 사신도는 언제부터 그려졌나? (daum.net)

임기환입력 2019. 8. 8. 15:03수정 2019. 8. 8. 17:15
 

[고구려사 명장면-76] 강서대묘 사신도가 워낙 뛰어난 품격을 자랑하다 보니 고구려 사신도를 강서대묘의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강서대묘 사신도처럼 뛰어난 걸작이 그냥 절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거기에 이르는 하나의 회화적·사상적·기술적 맥락 등이 있기 마련이다. 전회에서 강서대묘 천장벽화의 수목도나 산악도, 신수도, 황룡도 등을 중심으로 그런 맥락을 짚어 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신은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고 인기를 모은 방위신(方位神)으로서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일컫는다. 사신의 기원은 별자리로, 동아시아 별자리인 28수를 동서남북 사방으로 구획하여 7수씩 나누어 이를 신령스러운 동물인 사신에 배정하였다. 또한 오행 사상에 따라 중앙은 토(土)로서 황색, 동방은 목(木)으로 청색, 서방은 금(金)으로 백색, 남방은 화(火)로 적색, 북방은 수(水)로 흑색 등 사신의 방위 색깔도 맞추었다.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사신은 단지 별자리에 그치지 않고 벽사의 의미도 갖게 되고, 음양오행 원리를 드러내는 신령스러운 존재로서의 성격이 점점 두드러져 갔다.

 

사신이라는 도상과 관념이 본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때는 중국 전한 때부터다. 고분의 내부나 건축물 등 공간 또는 동경(銅鏡) 등 기물에 사방의 수호신으로서 사신을 장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사신과 관련된 문화적 양상이 고구려에 수용되면서, 특히 죽은 자의 공간인 무덤에 사신이란 도상과 관념이 고구려 방식으로 적용되고 변화되어 갔다. 벽화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초기에 사신은 천장에 내세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조그맣게 그려졌다. 그러다가 점차 사신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사신은 방위신으로서 성격도 강화되고 신비스러운 동물의 형상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신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면서 무덤 칸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핵심 제재로 등장하였다. 이는 사신이 단지 내세를 구성하는 하나의 존재에서 무덤의 수호자이며 우주적인 존재로서 그 위상이 격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신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회화적 표현에서도 그 신령스러움을 극대화하는 형상으로 진전되어 갔다. 이렇게 사신도를 고분벽화의 중심 주제로 삼는 것은 이웃 나라에선 찾기 어려운 고구려 고분 벽화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사신도가 무덤 벽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까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주요 사례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이른 시기에 사신이 표현된 벽화 무덤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한 무용총이다. 무용총은 여기서도 여러 차례 소개하였는데, 천장 그림이나 사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무용총 천장에는 해와 달, 별자리, 천인과 선인, 서수, 연꽃 등과 많은 요소가 다채롭게 어울려 화려한 하늘 세계를 이루고 있는데, 사신도 그중 하나로서 그다지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다.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가 선인·연꽃 등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그나마 눈길을 끄는 것은 남쪽에 그려진 주작이다.

무용총 주작도

긴 꼬리가 있는 닭 형상의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아마 주작을 표현한 듯하다. 주작이 닭의 형상으로 묘사된 것은 아직 주작에 대한 분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려져 있는 닭의 모습이 신비스럽고 서기가 어려 있는데, 혹 주작을 대신하는 기능을 하는 존재로도 볼 수 있겠다. 북쪽의 현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무용총 단계에 사신은 아직 방위신으로서 기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존재였다.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약수리고분은 인물풍속도 중심인 두방무덤이다. 앞방에는 주행렬도, 수렵도, 주인공의 실내 생활 등을 그렸다. 널방 벽면 상단에는 사신을 그렸는데 북벽에 주인공 부부와 현무, 동벽에 청룡과 해, 서벽에 백호와 달, 남벽에 주작을 배치하였으며 구름과 별자리도 함께 어울리도록 그렸다.

약수리고분 주작과 청룡
약수리고분 현무, 묘주초상

위 그림에서 보듯이 약수리고분 사신도는 당시 고구려에서 사신이 별자리신·방위신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사신의 크기나 비중이 작고, 사신 형상도 정형적인 도상을 갖추지 못했으며, 회화적 표현도 서툴러서 기이하고 어색한 모습이다.

팔각 돌기둥 두 개를 갖추고 있어 쌍영총으로 불리는 벽화고분은 북한 평안남도 룡강군에 위치한다. 두방무덤으로 널방 서벽을 제외하고는 다행스럽게도 벽화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벽화 내용은 인물풍속도와 사신도다. 그런데 쌍영총의 사신 배치는 매우 독특하여 앞방에는 청룡과 백호, 널방에는 주작과 현무를 배치하였다.

쌍영총 앞방 동벽 청룡도
쌍영총 널방 북벽 부부초상과 현무(모사도)

앞방 동·서벽에 있는 청룡과 백호 그림은 많이 손상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벽면 중심 제재로서의 위상이 있다. 이와 달리 널방의 현무와 주작은 작게 그려져 있고 중심 제재도 아니다. 예컨대 현무는 북벽 장막 안에 앉아 있고 무덤 주인공 부부상의 서쪽 편에 작게 그려져 있는데, 무덤 주인공의 수호자라는 성격을 갖는다. 앞방의 청룡·백호도에서 점차 사신이 벽면의 중요 주제로 떠오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쌍영총 벽화 중 일부인 기마무사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 조사 때 옮겨온 것이다. 생동감 넘치는 빼어난 필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니 꼭 보시기 바란다.

북한 남포시에 위치한 매산리사신총은 1913년 발견되어 옛 지명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가, 무덤방 안에 있는 수렵도가 인상적이어서 지금은 수렵총이라 부른다. 외방무덤으로 널방의 네 벽에 사신과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서편으로 현무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북두칠성이라 할 수 있는 별자리가 자리하고 있다. 동벽 청룡의 윗부분 가운데에는 해를 상징하는 세발까마귀가, 그 뒤편에는 기마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서벽 백호 위에는 수렵도, 그 위에는 달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남벽에는 봉황 모습으로 그려진 주작 두 마리가 마주하고 있다.

수렵총 남벽 주작도(모사도)
수렵총 동벽 청룡도(모사도)
수렵총 서벽 백호, 수렵도(모사도)

특히 서벽 벽화는 인상적이다. 넓은 벽면 윗부분에 달두꺼비, 그 아래 벽면 중앙에 비록 기마인물 한 명과 동물 두 마리로 매우 간략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수렵도, 그리고 수렵을 받치고 있는 듯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백호도. 이 세 가지 요소를 넓은 벽면에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는 서벽 벽화 전체는 마치 저세상과 같은 공허한 신비감을 풍기고 있다.

이 서벽 벽화에서도 금방 알 수 있듯이 벽면에서 사신도 비중이 인물풍속도보다 커지고 있다. 점차 사신도 중심의 벽화고분으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신도가 인물풍속도보다 주요 제재로 등장하는 벽화고분으로는 고산리1호분, 덕화리1호분, 대안리1호분 등을 들 수 있다.

 

이 다음 단계에 등장하는 것이 사신도 중심의 벽화고분이다. 진파리1호분, 통구사신총, 오회분4호묘, 오회분5호묘,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 후기의 사신도 고분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초기에 사신 그림은 천장벽화에서 별 존재감도 없다가 벽면으로 내려오고, 점차 벽면에서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다가 마침내 벽면 벽화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사신도의 변천에서 보듯이 모든 문화적 현상은 맥락이 있다. 물론 갑자기 돌출하는 문화 현상도 없지 않지만, 그런 것조차도 그 이후에는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 역사 공부란 그런 맥락을 찾아내는 작업이며, 동시에 갑자기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공부이기도 하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서대묘 깊이보기 -청룡, 백호 (daum.net)

임기환입력 2019. 8. 22. 15:03
 

[고구려사 명장면-77] 사신도가 널방의 사방 벽면에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벽화고분은 6세기 들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덤 구조도 무덤길과 하나의 널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외방무덤이란 특징을 갖는다.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사신도 벽화고분으로는 평양 지역에서는 호남리 사신총, 개마총, 진파리 1호분, 4호분, 내리 1호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이 있고, 집안 지역에서는 통구사신총, 오회분 4호묘, 5호묘 등이 있다. 그동안 이들 고분 이름은 여러 차례 언급하였기에 어느 정도 낯이 익으리라 생각한다.

여하튼 열 개 남짓한 사례만으로 6세기 사신도 등 벽화의 전개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시기별로 사신도 그림을 늘어놓고 보면 거기서 어떤 변화의 맥락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이제 2회에 걸쳐서 대표적인 사신도 벽화를 보여드릴 테니 독자들께서도 어떤 흐름이 있는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다만 현재 전하는 벽화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열심히 들여다보셔야 하는 수고로움이 전제되어야 함을 먼저 말씀드린다. 그나마 벽화 상태가 좋은 편인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 1호분, 오회분 4호묘,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사신도 사진이나 모사도를 중심으로 하겠다.

 

사신은 사방의 별자리 신으로서 의당 상상의 동물이다. 따라서 사신의 도상은 현실 동물 모습에 상상력이 복합된 모습을 갖게 되며,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번 회에서 다룰 청룡과 백호는 네 다리와 긴 꼬리를 갖고 있으며, 허공을 나는 듯한 자세로 비슷하게 표현된다. 청룡은 뱀의 비늘이 온몸을 감싸고,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머리에는 뿔이 한 개 혹은 두 개 있고 입을 벌려 혀를 날름거리거나 화염을 뿜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백호는 전체적인 자세는 청룡과 비슷하지만, 이름 그대로 온몸에는 호랑이 얼룩무늬를 갖고 얼굴도 호랑이의 특징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전체적인 도상의 틀은 이러하지만, 이를 하나의 형상으로 구현해내는 필력이나 표현력 또는 화면 배경의 구성과 배치 등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이미지를 드러내게 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사신도 벽화고분으로 편년되는 호남리 사신총은 무덤 벽의 소재로 대리석을 사용한 유일한 고구려 고분이다. 잘 다듬은 대리석으로 사방 벽을 세우고 판석의 틈을 회로 메웠다. 그리고 그 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다. 1916년 발견 당시에 이미 천장부 벽화는 훼손되었고, 사방 벽의 사신도만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호남리 사신총 청룡(좌), 백호

청룡과 백호는 모두 고개를 돌려 자신의 꼬리를 바라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청룡은 정측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긴 뿔을 갖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강조되어 있다. 신비스러움보다는 기괴한 분위기를 보인다. 그리고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후 청룡도에 나타나는 목 뒤 척목(尺木)이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백호도 측면도이면서도 두 눈과 두 귀를 과장되게 그렸으며,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얼굴이다. 몸에는 호랑이 무늬를 그렸다. 전체적으로 필력이 거칠고 서투른 인상이다. 더욱 사신의 묘사도 생동감이 없는 데다 배경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떤 생동감도 느끼기 어려운 분위기다. 아직 사신을 벽면의 주인공으로 묘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과도기적인 단계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진파리 1호분은 전동명왕릉 근처에 있는 20여 기 진파리 고분군에 속하며 진파리 4호분과 함께 사신도 벽화고분이다. 널방 내부에 석회를 바른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동벽의 청룡과 서벽의 백호가 모두 무덤 입구가 아닌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사신도 고분과 큰 차이가 있다. 청룡의 네다리는 함차게 달려 나가는 자세로 묘사되어 있고, 목은 S자로 강하게 휘어 있고, 꼬리는 물결 치듯이 흘러나가 주변의 구름과 인동문의 흐름이 어울려 역동감을 드러낸다. 청룡의 목 부분에는 삼각형의 붉은 불꽃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척목의 표현이다. 백호는 호랑이 얼굴로 묘사되었고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는 모습이다. 전체적인 자세는 청룡과 그리 다르지 않다.

진파리 1호분 청룡(좌), 백호

진파리 1호분 청룡·백호도는 벽면의 배경이 무엇보다 눈길을 끈다. 청룡이나 백호가 움직이는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구름, 휘날리는 인동연화 무늬 등이 강한 운동성을 보이면서 화면 전체를 역동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다소 경직된 청룡과 백호의 자세가 이런 배경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생동감을 얻게 된다. 배경이 주역을 살리고 있는 그림이라고 하겠다.

집안 오회분 4호묘는 바로 옆 5호묘와 함께 집안 지역을 대표하는 사신도 고분이다.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무덤방을 구성하고, 그 벽면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천장에는 매우 다양한 하늘 세계를 묘사하였으며, 사방 벽면에는 그물망 모양에 불꽃과 연꽃 문양을 연속적으로 펼쳐 그려서 배경 화면으로 삼고 그 위에 사신을 묘사하였다.

오회분 4호묘 청룡(좌), 백호

오회분 4호묘의 청룡은 오색띠 비늘로 온몸이 덮여 있는 가늘고 길쭉하지만 힘이 넘치는 몸매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두 앞발을 힘차게 내딛고 뒷다리 하나는 잔뜩 구부려 힘을 응축하고 있고, 다른 다리는 쭉 뻗어서 이제 방금 온몸을 앞으로 힘차게 밀어낸 듯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통과 앞다리가 만나는 어깨 죽지에는 불꽃 모양 기운이 다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어 상서로움을 더하고 있다. 백호도 청룡과 거의 비슷한 자세인데, 얼굴은 역시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룡의 목 부분에는 불꽃 모양 무늬가 그려져 있다. 앞다리 어깨 죽지의 기운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는 척목의 표현이다. 고대 중국 문헌에 "용이 척목이 없으면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고 하는 바로 그 척목이다. 앞서 진파리 1호분 청룡에서도 척목은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척목이 처음 나타난 것은 장천 1호분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진 청룡에서부터인데, 엉치 부분에 척목이 그려져 있다. 덕화리 1호분 청룡에서 척목이 목덜미에 묘사된다. 그리고 오회분 4호묘에서 비로소 상서로운 기운이 넘치듯이 불꽃이 힘차게 뻗어가는 형태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서대묘는 사신도 벽화의 최고봉을 자랑한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매우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앞서 진파리 1호분이나 오회분 4호묘의 사신과는 달리 아무런 배경 그림 없이 오직 텅빈 벽면에 사신만을 그렸을 뿐이다. 그러기에 청룡이나 백호는 무한한 하늘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깊은 공간감을 연출하고 있다. 오직 청룡이나 백호 그 자체만으로 뛰어난 역동감과 신비스러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의 표현력과 기법이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서대묘 청룡(좌), 백호

그리고 주목할 점은 백호의 얼굴이다. 앞서 살펴본 고분의 백호도는 모두 호랑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백호는 더 이상 호랑이 얼굴이 아니라 상상의 얼굴을 한 신성한 존재다. 완전히 현실성을 벗어난 존재로서 신령스러움이 더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 남북조 시대 백호의 도상에서 벗어난 고구려적인 도상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백호의 표현에서 보자면 강서중묘의 백호도를 최고로 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독자 여러분도 직접 평가해 보시기 바란다.

강서중묘 청룡 청룡(좌), 백호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신도 벽화 고분에서 청룡이나 백호 그림으로 보자면 점차 세련되고 완숙해지면서 6세기 후반, 7세기 초 가장 늦은 시기인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사신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문화 양상의 하나인 고분 벽화로 볼 때 가장 전성기라고 하는 시기에 고구려는 멸망을 맞게 된다. 문화의 성쇠와 국가의 운명은 무관한 것일까? 강서대묘에 들어서면서 필자가 가졌던 의문이었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싶은 질문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서대묘 깊이보기 7 - 주작과 현무 (daum.net)

임기환입력 2019. 9. 5. 15:03
 

[고구려사 명장면-78] 지난 회 청룡과 백호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나머지 주작과 현무를 그린 벽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요 대상 역시 지난 회와 짝을 이루기 위해 호남리사신총, 진파리1호분, 오회분 4호묘,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사신도 사진이나 모사도를 중심으로 하겠다.

사신 가운데 남방의 수호신인 주작의 도상은 상서로운 새의 형태를 갖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봉황과 도상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주작은 보통 암수의 쌍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봉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이를 합하여 봉황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봉황은 성군(聖君)이 등장할 때 나타나는 상서로운 동물로서 그 신이함을 더하기 위한 신체적 특징을 상상하였다. 예컨대 중국 옛 기록에 봉황은 가슴은 기러기, 엉덩이 쪽은 수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이마는 새, 깃은 원앙, 무늬는 용, 등은 거북, 얼굴은 제비, 부리는 수탉 등 10종의 특징을 합한 신조(神鳥)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낙양 서한 복천추묘 주작 / 사진=바이두

물론 이런 특징이 도상으로 드러날 때 모두 그대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습을 갖기 마련이다. 이러한 신조(神鳥)로서의 봉황 모습이 또 다른 신조인 주작과 겹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서로 비슷한 도상이지만, 사령(四靈)의 하나로 그려질 경우에는 봉황, 방위신인 사신의 하나일 경우에는 주작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북방의 수호신인 현무(玄武)는 거북이와 뱀을 합친 도상인데, 어의상 현(玄)은 검은색을 뜻하고 무(武)는 거북의 딱딱한 등갑이나 비늘을 뜻한다. 그런데 중국 전한 초까지는 대체로 현무는 거북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뱀이 거북을 휘감고 있는 도상, 즉 구사교미형(龜蛇交尾型)으로 바뀌었다. 거북 형상에서 뱀과 거북이 얽혀 있는 도상으로 바뀐 이유는 고대 중국인들이 거북은 암컷뿐 수컷이 없다고 생각하여 머리 모양이 비슷한 뱀을 수컷으로 짝지은 결과라고 설명한다. 즉 현무는 음양의 조화라는 사고방식이다. 특히 북방의 수호신으로서 구사교미형 현무는 남방의 수호신인 주작이 암수 한 쌍으로 표현되는 점에 대한 대응으로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산동 청리 동위장군묘 현무 / 사진=바이두

그런데 현무를 이루는 뱀과 거북의 자세를 보면 서로 딴 곳을 보는 도상도 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그 모습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마치 격렬하게 싸우는 듯한 이미지를 풍긴다는 점이 흥미롭다. 더욱 뱀은 거북을 칭칭 감고 있고, 거북은 단단한 등껍질로 버티는 듯한 이미지는 음양의 조화는커녕 서로 생사를 걸고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처럼 보인다. 어쩌면 바로 이런 모습이 현무를 사신 중 가장 역동적인 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그러면 고구려 사신도 중 주작과 현무 그림을 직접 살펴보도록 하자.

호남리 사신총 주작
호남리 사신총 현무

호남리사신총 널방 남벽 입구 좌우에 자리 잡고 있는 주작은 다소 밋밋한 두 날개를 위로 한껏 벌리고 있고, 길쭉한 모습의 꼬리도 위쪽으로 뻗치고 있는데, 날개와 꼬리가 평행선을 이룬다. 머리는 새의 형상인데, 흔히들 표현되는 공작이나 장닭의 머리 모습과는 전혀 다르며 그다지 신령스러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호남리사신총 널방 북벽의 현무는 구사교미형인데, 서쪽을 향하고 있는 거북은 머리를 길게 빼어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뱀은 거북을 칭칭 감고 있되 머리를 거북 꼬리 쪽에서 솟구쳐 서쪽을 쳐다보고 있다. 따라서 음양의 조화라는 현무의 이미지가 무색하게 거북과 뱀이 머리를 마주하기는커녕 서로 딴 곳을 쳐다보고 있다. 청룡과 백호의 경우도 그러한데, 호남리 사신총에서는 아직 벽면의 주인공으로서의 위엄을 갖는 사신의 도상이 충분히 완성되지 않았던 단계였다.

진파리 1호분 주작 모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파리 1호분 현무 모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파리 1호분 남벽 널방 입구 좌우를 지키고 있는 한 쌍의 주작은 몸집에 비해 그리 크지 않지만 화려한 날개를 좌우로 펼치고 있고, 너울거리는 긴 꼬리를 한껏 위를 향해 뻗치고 있다. 이 꼬리의 흐름을 따라 구름무늬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 표현되면서 주작의 생동감이 한층 더해진다. 벼슬이나 부리 등 주작의 머리 표현은 장닭의 이미지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암수가 서로 다르게 묘사되어 있어 같은 듯 서로 다른 세밀한 표현 방식이 눈길을 끈다.

북벽의 한가운데에 아래에 조금은 작은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현무는 동쪽을 향하고 있고 귀갑문이 표현된 거북의 몸을 두어 번 감고 있는 뱀은 거북의 목을 한 차례 감으면서 몸을 비틀어 거북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낸 뱀은 마치 거북을 집어 삼키려는 듯한 표정이다. 호남리사신총의 현무에 비해 뱀의 운동성이 크고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진파리 1호분의 현무는 북벽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현무 좌우에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수목 그림와 함께 어우러져 있어 풍경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또 소나무와 현무 아래에는 검은 산악이 그려져 있어 마치 현무와 소나무가 허공이나 천상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후일 강서중묘의 현무도와 맥락이 통한다. 현무 위로는 빠르게 흐르는 구름과 휘날리는 인동 연화 무늬는 거북과 뱀의 격렬한 싸움을 예고하는 듯하다

오회분 4호묘 주작 / 사진=바이두
오회분 4호묘 현무 / 사진=바이두
통구사신총 현무 모사도

오회분 4호묘의 남벽은 널방 입구가 남벽 중앙이 아닌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보통의 다른 벽화고분 남벽과는 달리 제법 넓은 화면을 확보하고 있는데, 여기에 주작 한 마리만 그려져 있다. 널방 입구에 의해 좌우로 나누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 마리 주작을 그리기에 충분함에도 외주작만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암수라는 주작의 본래 형상보다는 북벽의 현무에 조응하기 위해 외주작만 그린 게 아닌가 싶다.

주작의 머리는 장닭 머리고, 목의 좌우에서 커다란 푸른 깃털이 마치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붉고 푸른 날개는 한껏 펼치고 긴 꼬리는 위로 흔들거리며 뻗어나가고 있다. 날갯짓하며 막 날아오르려는 율동감이 넘치고 있는 표현이다.

 

오회분 4호묘의 사신 중에서는 뭐니 해도 북벽의 현무가 가장 인상적이다. 서쪽을 향해 걷고 있는 거북의 몸은 슬쩍 한 번 감싼 뱀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격렬하게 뒤틀고 심하게 엉키고 있다. 얼마나 뱀의 몸이 꼬여 있는지 마치 두 마리 뱀이 어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거북과 뱀은 서로 마주하고 노려보고 있는데, 뱀의 격렬한 몸짓과는 달리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와 비슷한 현무 도상이 통구사신총의 현무도이다. 두 현무도는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렇게 보면 집안 지역의 현무도가 평양 일대의 현무도보다는 훨씬 역동감이 넘치는 현무도를 그려낸 셈인데, 수도 평양과 부도 국내성의 문화적 분위기가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강서대묘 주작(동) 모사도 / 사진=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강서중묘 주작(서) 모사도 / 사진=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강서대묘의 주작은 신령스러운 봉황의 형상이다. 부리는 연봉오리에 달린 가지를 물었고, 양 날개는 힘차게 펼치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꼬리는 둥글게 원을 그리며 주작의 날개와 조응하고 있다. 무엇보다 강인한 두 다리는 산악도 위에 굳세게 버티고 있으면서 날개 바람을 하늘 가득 채우는 듯하다. 그 생동감은 이제까지 본 주작도 중에서 최고라고 하겠다.

이와 달리 강서중묘의 주작은 율동감보다는 우아한 자태를 자랑한다. 마찬가지로 봉황의 머리에 잎에는 붉은 구슬을 머금고 있다. 활짝 펼친 두 날개와 꼬리에는 섬세하게 표현된 부드러운 깃털의 세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역동감이 넘치면서도 단정하고 우아함을 잃지 않는 걸작이다.

강서대묘 현무
강서중묘 현무

강서대묘의 현무도는 고구려 사신도의 현무, 아니 그 모든 사신도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무어라 여기서 기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이 현무도 하나만으로도 고구려의 회화 수준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서대묘의 현무도가 워낙 뛰어나서인지 강서중묘의 현무도는 좀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산악도 위 허공에 떠 있는 현무의 모습은 무한한 우주 공간의 수호자로서 신령스러운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등 벽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벽화 주제별로 고구려 벽화의 흐름을 짚어보고자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분량이 적지 않다 보니, 최소한의 것만 살짝 엿보았을 뿐이다. 나중에 다시 고구려 고분벽화를 좀 더 두루 살펴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독자 여러분 스스로 벽화 모사도나 도록 사진 등을 수집해서 직접 살펴보시면서 그 세계에 빠져들어가 보시기를 권한다.

어쨌든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늦은 시기의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에 이르러 고구려 벽화 수준은 최절정에 도달했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런 고분벽화의 전개상을 보면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게 그리 믿기지 않는다. 문화상의 최절정에서 과연 급격하게 몰락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고구려 최말기의 역사에서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고구려사 명장면-70] 평양 일대 고구려시대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은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평안남도 평성시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이다. 기단부 한 변 길이가 약 54m이고, 높이는 약 12m로, 평양 일대의 고구려 석실봉토 무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이런 거대한 규모로 인해 예부터 '한왕묘(漢王墓)', 혹은 '황제묘(皇帝墓)'로 전해왔다.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총의 크기를 보면 한 변 길이 32m, 높이 12.4m이다. 장군총과 더불어 광개토왕릉의 후보로 꼽히는 태왕릉은 한 변 62~68m, 잔존 높이 14m 정도이다. 이 두 고분과 비교하면 이 경신리1호분은 장군총보다는 훨씬 크고, 태왕릉에 다소 못 미치는 규모이니, 석실봉토분으로서는 한반도 내에서 가장 큰 고분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독자들께서 규모만을 어림짐작하려면 경주의 신라 서악동 고분들과 비교해 보면 좋을 듯하다. 물론 경신리1호분은 봉분 기단이 방형이고 경주 서악동고분은 원형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서악동 3호분이 높이 12m, 직경 60m이고, 4호분이 높이 10m, 직경 51m 정도이니 서로 견줄 만한 크기라고 하겠다.

경신리1호분 전경(1930년대)

 

경주의 서악동 고분들은 무덤 규모가 초대형인 왕릉급인데, 무열왕릉 뒤편 능선에 위아래로 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혈연적으로 서로 이어지는 무열왕 직계 조상 왕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龍春), 즉 문흥대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경신리1호분 출토 와당과 기와

 

경신리1호분은 그 규모 외에도 형태 및 출토 유물에서 눈길을 끄는 점이 많다. 전동명왕릉과 마찬가지로 하단에 방형의 석축 기단을 두르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형태이다. 이 석축 기단부가 고분의 웅장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효과도 있다. 이러한 방형 석축 기단부는 장군총과 같은 적석무덤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동명왕릉과 마찬가지로 평양 천도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고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신리1호분에서는 연꽃무늬 와당과 다수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와당은 대략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무덤에 와당과 기와가 왜 필요했을까. 국내성에 있는 장군총이나 태왕릉, 천추총에도 와당과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국내성 시대의 왕릉급 적석총과 유사한 시설이 경신리1호분에도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경신리1호분 석실 내부

 

무덤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관련된 시설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많지만, 무덤 석실 내부로 빗물 등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평양 지역 석실봉토분 중에서 이런 와당과 기와를 덮는 시설이 확인된 사례는 경신리1호분이 유일하다. 이 점에서도 평양 천도 이후 국내성 시대의 고분 양식을 잇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세기 후반인 와당의 제작 연대와 고분의 조영 시기가 일치한다고 보면 이때 만들어질 수 있는 왕릉은 유일하다. 바로 490년에 사망한 장수왕이다.

전 회에서 평양의 '전동명왕릉'이 건국지인 졸본에 있는 '장군묘'와 더불어 장수왕이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 왕실의 위엄와 정통성을 과시하는 하나의 표상으로서 건립한 동명왕릉임을 추정하였다. 그동안 전동명왕릉은 장수왕릉의 가장 유력한 후보의 하나였기에,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장수왕의 무덤은 달리 찾아야 하는데, 바로 경신리1호분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다.

경신리1호분-조선고적도보

 

그리고 일제 시기 조사 때에는 경신리1호분에 벽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78년 조사 과정에서 벽화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규모, 국내성 시기 적석총 왕릉의 전통을 잇는 방형 기단과 기와 시설물, 무덤방의 벽화 등으로 보아 경신리1호분은 평양 천도를 실행하고, 평양 지역에 묻힌 첫 번째 군주인 장수왕의 왕릉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다.

다음 왕릉급 고분으로 비정할 수 있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강서3묘라고 불리는 3기의 무덤 주인공에 대해 살펴보자. 강서3묘는 전동명왕릉이나 경신리1호분과는 외형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적석총 왕릉의 전통을 잇는 석축기단부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평양에서 왕릉의 형태가 점차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며, 전동명왕릉이나 경신리1호분 외에 석축기단이 있는 토포리대총이나 호남리사신총보다도 뒷 시기에 조영되었음을 뜻한다.

 

이 강서3묘, 즉 3기의 무덤은 그 규모에서 왕릉급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다소 크기 차이가 있어서 대묘, 중묘, 소묘로 이름 붙였다. 대묘가 가장 앞에 위치하고 그 뒤에 중묘와 소묘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무덤 규모를 보면 대묘는 봉분 아래 지름이 51.6m, 높이 8.86m이며, 중묘는 지름 45.45m, 높이 7.78m이고, 소묘는 지름 40.90m, 높이 6.8m 정도이다. 앞서도 살펴본 경주에 있는 신라 서악동고분 중 제1호분이 지름 39m, 높이 8m, 제2호분이 지름 40m, 높이 8m이니, 강서3묘 중 가장 작은 소묘의 규모와 엇비슷하다. 따라서 소묘 역시 왕릉급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고분 내부 석실의 양상은 다소 차이가 있다. 일단 강서 대묘와 중묘는 매우 화려한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데 반하여, 강서 소묘에는 벽화가 없다. 그래서 소묘를 왕릉급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덤 내부 석실의 규모를 보면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즉 석실의 크기를 보면 강서대묘는 길이 3.17m, 너비 3.12m, 높이 3.51m, 중묘는 길이 3.23m, 너비 3.9m, 높이 2.5m 인데, 소묘도 길이 3.35m, 너비 3.49m, 높이 3.03m로 거의 차이가 없다.

봉분의 규모나 석실의 크기를 볼 때 소묘가 대묘나 중묘에 비해 무덤을 만드는 데 들인 공력이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겠다. 즉 벽화가 있고 없음이 왕릉급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은 왕릉이라는 점에서 어떤 정치적 사정을 우선 고려할 수 있을 듯하다.

강서3묘 전경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3기의 고분이 한곳에 삼각형을 이루며 모여 있다는 점이다. 왕릉급으로 비정되는 고구려 고분 중 이렇게 2기 이상이 모여 있는 경우는 없다. 국내성 시기 이래 고구려 왕릉은 독자적인 능역을 갖고 독립적으로 조영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경신리1호분이나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 앞뒤로 나란히 조영된 신라 서악동고분의 경우도 무열왕과 그의 직계 혈통 왕들의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강서3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무덤 주인공들은 매우 가까운 혈통일 것이다. 그중 대묘가 그 뒤에 중묘와 소묘를 나란히 거느린 형상을 고려하면 아버지(대묘)와 두 아들(중묘, 소묘)의 관계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3형제 관계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고구려 후기에 부자 및 형제 관계로서 3사람이 모두 왕인 경우가 있을까.

 

부자 관계의 경우라면 평원왕과 그의 두 아들, 영양왕과 영류왕을 상정할 수 있다. 형제 관계라면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을 상정할 수 있다. 대양왕은 영양왕, 영류왕의 동생이며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버지로서 보장왕 즉위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이 두 경우 외에는 달리 3기의 왕릉을 구성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면 두 경우 중 어느 게 정답일까. 현재로서는 어느 경우가 더 타당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강서대묘를 기준으로 볼 때 여기에 묻혔을 두 인물, 즉 평원왕 사망년이 590년이고, 영양왕 사망년이 618년으로 불과 28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현재의 연구 수준으로는 이런 정도로 정교하게 고분 조영 연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고분 내부 벽화 등을 고려하면 좀 더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추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차회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다만 벽화가 없는 소묘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여기서 좀 더 짚고 넘어가야겠다. 같은 왕릉급으로 조영되었음에도 대묘와 중묘와는 달리 소묘에만 벽화가 없다는 점은 벽화를 그리지 못할 어떤 정치적 사정이 우선 고려될 수 있겠다.

따지고 보면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 두 경우를 모두 합쳐도 강서3묘 무덤의 피장자의 후보는 평원왕과 그의 아들인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 모두 4인에 불과하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은 영류왕이다. 영양왕의 동생인 영류왕은 수양제의 침공 시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살해되어 시신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 도랑에 버려졌다고 한다.

문헌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이제는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합리적 추론이 필요하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했을지라도,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에는 선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정상적으로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봄 직하다. 다만 위 이야기는 영류왕릉이 왕릉으로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였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벽화가 그려지지 않아 대묘, 중묘에 비해 왕릉급 요소가 다소 결여되어 있는 소묘의 주인공을 영류왕으로 비정하는 게 가장 타당해 보인다. 소묘를 영류왕릉으로 비정하게 되어도 대묘와 중묘의 주인공은 평원왕(대묘), 영양왕(중묘)으로, 아니면 영양왕(대묘), 대양왕(중묘) 두 경우 모두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 영류왕이 비록 비참하게 살해되었을지라도 왕릉의 예로 묻혔다고 한다면 무덤 내부도 왕릉의 온전한 격식에 맞게 벽화가 그려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벽화가 없는 소묘를 대양왕 무덤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즉 추존은 어디까지나 추존이기 때문에 왕릉의 격식을 완전히 갖추어 조영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영양왕(대묘), 영류왕(중묘), 대양왕(소묘)으로 비정된다.

아니면 영류왕의 경우 위의 기록대로 시신이 함부로 버려져서 아예 제대로 된 능묘를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강서3묘는 영류왕을 제외하고 평원왕(대묘)과 영양왕(중묘), 대양왕(소묘)으로 비정될 수 있다.

앞서 경신리1호분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는 반면에 강서3묘는 적지 않은 고분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겨우 후보 왕 4인 중에서 3인을 비정하는 다양한 경우를 추정할 수 있고, 그중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역사 사실을 밝히는 실증의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음을 강서3묘의 피장자 탐구 과정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실증을 무시하고 상상력만으로 섣부르게 역사를 구성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상상력마저 사료에 기초하여 합리적 추론을 거치는 역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다면 그 결과물은 결코 '역사'와 '사실'이 될 수 없다. 픽션과 허구일 뿐이다. 그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게 역사 탐구의 첫걸음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강서대묘의 옻칠 벽화, 당장 가서 복원·보수하고 싶어 (daum.net)

김미진입력 2019. 7. 15. 11:12수정 2019. 7. 15. 11:15
 
옻칠화가 이종헌 "벽화와 재료를 제대로 알아야 재현도 모사도 가능"

[오마이뉴스 김미진 기자]

[이전 기사] 일색칠로 태어난 달항아리, 오색으로 옻을 입다

오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 신관(T:02.739.4937) 갤러리는 이종헌 개인전 '칠색유감(漆色有感)'을 열고 다양한 현대적인 감각의 달항아리를 선보이고 있다.

이종헌 작가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동국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청와대 신본관 벽화 제작에 참여한 이력을 갖고 있다. 1998년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벽화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2010년에 중국 남경사범대학 미술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2004년 한국옻칠화회(현 한국옻칠협회)를 설립하고 (사)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의 옻칠분과위원장을 역임하다가 2017년, 2018년에는 제15대 민미협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좌>전남 보성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강서대묘와 중묘의 화강암에서 옻칠한 자연도막이 떨어져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화강암에 옻칠 을 한 후 그 과정을 연구 관찰한 데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중간>1990년 대 중반 중국 집안 오회분 오호묘에서 옻칠벽화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우> 강서대묘 중묘의 화강암에서 옻칠 벽화가 훼손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실험 관찰한 화강암 들.
ⓒ 김미진
 
억압이 있는 곳에서는 저항이 있기 마련, 예술도 그러해

기자 : 이제 좀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이명박 · 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블랙리스트이기도 하셨죠?
 
이종헌 작가(이하 이종헌) :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도 될 듯해요. 블랙리스트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죠. 하지만 그 시절 이름이 올라가고, 안 올라가고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였던 시절이죠. 기자님 역시 이름 안 올라간 블랙리스트였을 테고, 그랬기에 우리들이 모여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혁명을 이루어 낼 수 있었죠.
 
기자 : 올해 초에 제15대 민미협 회장 임기가 끝나신 걸로 아는데 왜 민미협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하셨고, 또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계획이세요?
 
이종헌 : 민미협은 '민족미술인협회'의 줄인말이죠. 박정희 독재시절 때부터 끊임없이 사회의 변혁과 함께 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한 축을 구축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그리면 빨갱이 취급을 받았어요. 저는 전두환·노태우 독재 시절에 대학생이었는데 그런 활동들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당시 학생 신분으로 걸개 제작에 참여하고, 집회에 걸 걸개를 숨겨서 집회 장소로 운반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들은 당연히 사람이라면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억압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이죠. 또 한 편으로는 예술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민미협은 우리나라의 편향된 미술 사조를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단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계속 민미협 옻칠예술분과위원장으로서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기자 : 그럼 본격적으로 좀 여쭤볼까요? 벽화가 전공이시던데 벽화와 옻칠화, 그 사이에는 어떤 인연과 사연이 있는지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집안 사신 무덤의 벽화. 이종헌 작가 소장
ⓒ 김미진
 
이종헌 : 잠시 청와대 신본관 벽화제작에 참여 했던 경험도 있었지만 고구려 벽화에 관심이 있었어요. 고대부터 현대의 벽화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북경중앙미술학원이어서 그곳 대학원에 입학을 하니 리린쭈어, 손징포, 장스엔 교수님들께서는 앉아서 그림 그릴 생각하지 말고 다니면서 많이 보라고 하셨어요.

중국 전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죠. 돈황, 맥적산, 쿠처 석굴뿐 아니라 한대의 묘실벽화, 당대의 묘실벽화, 윈깡과 따통의 석굴, 산시성지역의 오대, 송, 원, 명, 청나라의 사관벽화(불교도교벽화), 요대사관벽화 등을 돌아다니면서 수천 년 동양 문화의 축을 이루는 작품들을 봤죠.
 
"다시 고구려벽화였죠, 제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은 사건이었어요"

 
그때는 사실 기가 죽어버렸죠. 우리 전통미술이 거기에도 있더군요. 우리 전통미술인 불화나 민화의 뿌리는 온통 거기에 있었어요. 하다못해 까치와 호랑이와 책거리그림까지…. 좋게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유입이 된 거고, 까놓고 말하면 베껴온 거구요. 공부는 많이 됐지만 한동안 젊은 화가에게는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다시 고구려 벽화였죠. 1990년대 중반에 보게 된 중국 집안에 있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고구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옻칠화로 된 벽화예요. 그 벽화를 보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번개 맞은 듯했어요. 보는 순간 마치 제가 그 시절에 그 벽화를 그린 화가처럼 처음 제작과정부터 마무리까지 어떻게 그려졌는지 생생하게 알겠더군요. 지금도 그 때 생각만하면 온 몸의 솜털이 다 일어서는 것 같아요. 제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사건'이에요. 이전에도 옻칠화를 하고는 있었지만 제 두 눈으로 옻칠화로 된 고구려벽화를 봤으니 옻칠화를 열심히 할 수밖에요.
  
  이종헌 작가 소장의「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강서대묘의 내부 벽화 모습.우리 눈에 익은 현무와 청룡, 주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김미진
 
기자 : 고구려벽화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이종헌 :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문화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집안의 오회분 4호묘와 5호묘는 돌무덤 안에 벽면들을 옻칠로 그림을 그린 화강암으로 장식을 했어요. 고대 국가에서 옻은 전략물질이에요. 왕과 귀족만이 옻칠로 된 기물들을 사용할 만큼 귀했어요. 기물에 옻칠을 하면 단단하고 아름답고 또 위생적인 측면도 있구요. 화살촉을 화살대에 붙이는 접착제가 옻이구요, 갑옷에 바르면 녹이 슬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라에서 옻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고 아무나 쓰지 못하도록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했죠.
 
그렇게 귀중한 옻을 사용해서 벽화를 그린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가진 강성한 국가가 아니고서는 꿈도 못 꿀 일이죠. 중국에 여러 나라가 들어서고, 망하고 하는 동안 고구려는 계속 고구려였어요. 힘이 강하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중국에도 많은 벽화들이 남아 있지만 고구려처럼 옻칠로 벽화를 완벽하게 구현한 곳은 없어요.

집안의 사신총,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북한 평양의 강서대묘와 중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어있는 옻칠로 그린 유일한 벽화예요.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기물에 옻칠을 한다는 것은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라고 볼 수 있지만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그리고 강서대묘와 중묘의 옻칠 벽화는 옻이라는 재료를 예술적으로 극대화 시켜 그야말로 '명작'을 만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동양문화권에서 옻칠로는 최고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 : 중국 집안성 고구려 오회분 4호묘, 5호묘는 직접 보셨고, 그럼 평양의 강서대묘도 가 보셨어요?
 
이종헌 : 중국 집안의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벽화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살다시피 해서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잘 알 수 있어요. 특히 오회분 4호묘 벽화 중에 한 부분을 제가 직접 손으로 본을 뜨고 또 제 작품으로도 구현해서 발표도 했어요. 평양에 있는 강서대묘는 직접 못봤지만 사진으로 보니 어떤 과정을 거쳐 무덤의 벽화로 완벽하게 장식을 했는지 그냥 다 알겠더군요.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신 고 임권웅(ICOMS-KOREA) 연구원과 함께 「고구려 오회분 오호묘 벽화의 조벽지 기법에 대한 연구 ? 옻칠 기법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라는 논문을 같이 발표했어요. 임권웅 박사가 유명을 달리 해서 그렇지 조금만 오래 사셨더라면 아마도 같이 복원 작업까지 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죠.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 직접 중국 집안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를 찍은 사진이다.
ⓒ 이종헌
기자 : 그럼 중국 집안성 오호분 4회묘, 5회묘와 강서대묘, 중묘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종헌 : 중국 집안성 오회분 4회묘, 5회묘가 아직 초기의 모습으로 규모면에서도 작고 그림이 좀 거칠지만 7세기 제작된 강서대묘와 중묘는 화강암을 절단하고 깍고, 연마해서 이은 기술도 훨씬 뛰어나구요, 그림도 완벽하고, 규모면에서도 엄청나죠. 오회분 4호묘나 5호묘의 그림이 제가 좀 거칠다고 표현했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지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그러니 강서대묘나 중묘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집안성 오회분 4호묘나 5호묘의 벽화도, 강서대묘는 우리 인류의 문화 유산이에요.
          
  <좌>는 「조선유적유물도감」제4권에 실린 중국 집안 오회분 4호묘 내부사진 <우>는 1990년대 중반 이종헌 작가가 직접 찍은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 사진. 벽화와 재료에 대한 이해 정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김미진
         
"벽화에 대해, 재료인 옻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강서대묘와 중묘의 보수와 복원이 가능해요. "

기자 : 일본이나 북한에서 모사도를 제작해 우리나라 박물관에 전시도 하고 그러던데 어떤가요?
 
이종헌 : 꼭 필요하죠. 그런데 옻칠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와 경험 없이 복원을 하겠다고 들면 문제가 크죠. 또 옻칠로 된 벽화를 붓으로 모사를 하는 건 그냥 베낀 그림일 뿐 감상적 측면에서도 전승적 측면에서도 별 의미가 없죠. 제가 찍은 이 사진이랑 북한에서 찍어 책으로 만든 이 사진이랑 비교해 보세요. 어떤 게 더 나아요? 재료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또 부분적으로 옻칠로 그린 부분이 있고, 유화방식인 기름을 섞어 그린 부분이 있구요, 그림을 그리기 전 화강암에 어떻게 처리를 하고 그렸는지 볼 줄 알아야 해요. 옻칠로 그리기가 쉽지 않거든요.

일반 채색화 물감과 달리 옻은 점성도 높고. 흔히들 무덤을 만들고 벽면에 그렸다 생각하시는데 화강암을 눕힌 상태에서 그린 후 축조한 겁니다. 벽화 제작 과정을 이해 못하니 무덤 만든 순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재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요. 또 강서대묘, 중묘를 복원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제가 한 번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옻칠화는 천년이 지나도 어제 그린 것처럼 보존이 가능하단 말예요.
  
  <위>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에 직접 찍은 중국 집안 5회분 5호묘 벽화 일부. <아래> 중국 집안 오회분 4호묘를 조사하고 일부를 직접 본을 떠서 현대 옻칠 회화로 재해석해 화강암에 그린 「고구려벽화 오회분의 모사화」
ⓒ 김미진
 
기자 : 만약 기회가 주어져 평양의 강서대묘와 중묘를 복원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방문한 후 1천 5백년전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다면 어떨까요?
 
이종헌 : 시간이 지나면서 온도의 변화로 인한 결로 현상으로 인해 훼손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지금이라도 빨리 보수와 복원을 시작해야만 해요. 제가 몇 년 전부터 '강서대묘·중묘 보수와 복원을 위한 남북한 공동연구' 팀을 꾸리려고 방법을 찾고 있는데 쉽지가 않더군요. 기회만 닿는다면 정말 제대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똑같이 강서대묘와 중묘의 사신도를 복원하고, 동일한 재료와 옻칠벽화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재현해서 누구라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제가 벽화를 전공한 이유도, 옻칠화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어요. 지키고 보존하고, 또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하죠. 그게 우리의 의무고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기자 :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는 옻칠예술을 전공할 수 있는 관련학과와 커리큘럼이 있나요?
 
이종헌 : 안타깝게도 지금은 학부에서 전공과목으로 개설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미술 전공자들의 취업률이 낮으니 대학에서 예술 분야 전공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없어졌죠. 일본은 잘 알다시피 대학 커리큘럼도 잘되어 있구요. 옻칠예술가나 장인들이 그 나라의 대표 문화로서 대접을 받고 있어요. '재팬(japan)'이 옻칠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베트남은 중국이나 일본,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지만은 옻칠화 자체를 화가들이 기본으로 배워서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자유자재로 적용할 만큼 자기네들의 고유한 문화로, 또 칠공예품들을 통해 생활예술로 정착했습니다. 중국은 옻이 동양 문화권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왔다는 것을 잘 알아요. 동양 문화의 해석이 가능한 키워드인 걸 알죠. 그러니 미술대학 각 학과마다 옻칠전공을 두고 엄청나게 교육에 투자를 하죠.
  
  이종헌 작가 소장의「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강서중묘 내부 벽화 모습. 청룡, 주작, 백호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 김미진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 직접 중국 집안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를 찍은 사진이다.
ⓒ 이종헌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나전을 올리는 배경으로서의 칠, 제기의 옻칠 등 뭐 그 정도였지만 많은 변화들이 있어요. 옻칠에 대해 궁금해 하고, 하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해요. 그럼 제대로 문화를 만들어야죠. 그저 기능적 측면이 아니라 동양 문화의 키워드인 '옻칠'을 문화의 맥락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해요. 일본의 옻칠 예술은 정교해요, 대신에 대범하게 나가지를 못하구요, 중국은 대범하게 나가는데 정교함이 부족하구요. 우리나라는 대범함과 정교함을 다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아시아의 옻칠 예술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기자 : 마지막으로 꼭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이종헌 : 우리 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저는 그것이 고구려 사신총, 오회분 사호묘, 오회분 오호묘와 평양의 강서대묘, 강서중묘에 있는 사신도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중국 미술을 베끼는 데서 시작한 미술이 아니라 이 땅에 살던 그 누군가가 그들만의 눈으로, 손으로, 감성으로 그린 그림 말예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동양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응집된 힘이 있는 그 그림들을 이 땅에 다시 살려내 보고 싶어요.

시급히 강서대묘 · 중묘 보수와 복원을 위한 남북한 공동연구』팀을 꾸려
강서대묘와 중묘의 복원과 보수에 들어가야만 해

기자 : 평양의 강서대묘나 중묘에도 우리가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요. 통일의 전초단계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강서대묘와 중묘가 지닌 옻칠 벽화의 예술성에 대한 연구를 같이 해서 복원도 하고, 재현을 통해서라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꼭 보고 싶군요. 또 우리 전통 미술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이해들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야겠군요. 긴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종헌 : 참 기자님, 마지막으로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경주 포석정에 술잔을 띄우면 벽에 부딪히지 않고 떠다니는 술잔으로 풍류를 즐겼다는 이야기 아시죠? 그 때 사용한 술잔이 칠기로 만든 잔일걸요, 칠기로 만든 잔이 아니면 그렇게 뜰 수가 없거든요. 재밌죠? 문화의 맥락 속에서 부분을 이해한다는 거요.
  
  동양문화권에는 경주 포석정과 비슷한 연못을 만들어 칠기로 만든 '이배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耳杯)'에 술을 따라 풍류를 즐겼다. 오른쪽 중간 사진의 이배는 이종헌 작가가 소장한 것으로 한나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 칠기 유물에 대한 예산이 제대로 편성되지 않아 칠기가 발굴되면 보존과 보수는 물론 그것을 관리조차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유물발굴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 김미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일본에서는 무기류에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했다고 한다. 전자파 차폐 성질까지 갖춘 옻은 스텔스기와 무인자동차, EMP(전자기기 훼손전파) 차폐막 등 산업과 군사용 코팅재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옻이 일구어낸 문화는 아주 먼 오랜 옛날부터 오늘까지 그 모습을 바꾸며 우리 곁에 살아있었다. 옛날 1천 5백년전의 무덤에 그려진 옻칠 벽화의 귀중함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종헌 작가는 옻칠예술을 통해 동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는 창문 하나를 만들고 있다.

 

[덕흥리고분]

평남 덕흥리 고분 벽화에 묘사된 ‘사희주기인(射戱注記人)’, 즉 ‘마상궁술(말타고 활쏘기) 대회의 기자(기록자)’를 표현했다. |고광의, <고구려문자문화>(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137, 2023,

 

흔히들 조선을 ‘기록에 진심인 나라’라 평한다.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

1대(태조)~25대(철종)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만 888책에 4770만자에 이른다. 더 기막힌 기록물이 있다.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일기체로 정리한 <승정원일기>이다. 임진왜란(1592)와 이괄의 난(1624) 등을 겪으면서 앞부분이 전부 소실됐다. 그래도 인조(1623)~순종4년(1910)의 기록(3245책)이 남아있다. 글자수는 자그만치 2억2650만자에 달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이십오사>(3996만자)와 <명실록>(1600만자)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두 역사서를 기록한 이들이 누구일까. 지금으로 치면 7~9급 하위직 공무원들이었다.

<실록>은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품) 4명 등 8명이, <승정원일기>는 주서(7품) 2명이 교대로 임금 곁에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마상궁술의 기자를 의미하는 ‘사희주기인(射戱注記人)’이 마상궁술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점수를 ‘정(正)’자의 ‘T(2점)’로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기록에 한맺힌 사람들처럼 불철주야 쓰고 또 썼을까.

그 답을 조선초 사관인 민인생(1373~?)이 1401년(태종 1) 4월29일자에 남긴 한마디에서 찾는다.

이날 태종(1400~1418)은 편전 사관 민인생이 들어오자 “편전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고 짜증냈다. 그러나 민인생은 “임금과 대신이 정사를 돌보는 편전에 사관의 출입을 금하면 어찌하느냐”면서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를 던진다. “사관은 곧게 써야 합니다…신(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태종실록>)

기원후 400년 무렵 열린 마상궁술대회 장면을 그린 덕흥리고분 벽화. 참가 선수 중 먼저 출전한 선수가 쏜살같이 말을 달려 180도 몸을 돌려 쏘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의 신공을 뽐내고 있다. 기둥 위에 설치해놓은 과녁 2개가 두동강 났다. 3개의 과녁은 그대로다. 그것이 앞선 선수의 성적인지, 혹은 경기 후 새롭게 설치된 과녁을 두번째 선수가 쏘고있는 것을 표현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만약 새롭게 설치한 과녁이라면 두번째 선수는 2개의 과녁을 연속으로 맞추며 달리고 있는 것이다.

 

1735년(영조 11) 2월10일 영조가 새벽까지 대신들과 밀담을 나눴다. 영조(1724~1776)는 이복형인 경종(1720~1724)을 둘러싼 독살 연루설과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이때 영조가 ‘역대급 잘못’을 저지른다.

“오늘의 말씀이 너무 망측해서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다”는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밀담을 기록한 사관의 사초책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전직 사관인 이덕중(1702~?)과 정이검(1695~1754)이 득달같이 달려와 영조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사초책을 불태우다니요. ‘목이 달아나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영조실록>)

첫번째 선수가 얼마나 빨리 말을 달렸는지 머릿수건에 달았던 술 장식이 바람에 날려 두번째 선수의 뒤쪽에 떨어져 있다. 극 사실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벽화에서 읽는 ‘전지적 기록자 시점’

참으로 추상같은 기록자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이 어느날 갑자기 조선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일까.

아니다. 마침 기자는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최근 펴낸 <고구려의 문자문화>(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137)에서 그 ‘기록자 정신의 원류’를 새삼스레 읽을 수 있었다.

고광의 위원은 “‘문자’라는 키워드로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목적을 두고 이 연구서를 펴냈다”고 했다.

과연 다양한 국내외 사료를 찾고, 고고학 발굴 및 조사를 통해 축적된 문자 자료와 고분 벽화를 비교한 역작이었다.

그렇게 방대한 내용 중 기자의 시선이 ‘꽂힌’ 대목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덕흥리 고분의 마상궁술대회 장면. 먼저 출전한 두 선수가 경기를 펼치는 동안 심판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씩 웃고 있다. 좌우의 두 선수는 촐전을 기다리고 있는데 자못 긴장한 표정이다. 그 사이에서 기자(기록자)가 열심히 경기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벽화에 나타난 주인공과, 그 시대의 풍속도만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 보지 않았던가.

연구서 덕분에 이번에는 ‘전지적 기록자 시점’에서 벽화를 바라보게 되었다.

우선 벽화에 등장하는 ‘붓을 쥐고 무언가를 끄적대는 사람’을 무어라 표현할까. 단순히 문서를 작성하는 기록원이나 혹은 관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에 붓을 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가 ‘역사 사(史)’자가 아닌가.

따라서 ‘붓을 든 사람’을 벽화에 그려진 당대의 상황을 후대에 남길 임무를 맡은 기자 혹은 ‘사관’으로 해석해도 무리는 아니다. 아닌게 아니라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역사서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삼국사기> ‘영양왕’조는 “600년 대학박사 이문진이 옛 사서를 5권짜리로 줄인 <신집>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의미심장한 부연 설명을 한다. 즉 “고구려 건국초 ‘어떤 이’가 <유기>라는 100권짜리 역사서를 편찬한 바 있다”고 소개한 것이다. <삼국사기>가 언급한 ‘어떤 이(有人)’는 ‘사관’의 직분을 맡은 인물이 틀림없다.

덕흥리 고분 벽화 중에는 주인송인 ‘진(鎭)’의 휘하 관리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중 밑쪽 가운데는 어떤 이가 높은 감투를 쓴 사람에게 뭔가를 바치고 있다. 감투 쓴 사람의 오른쪽을 보라. 머리수건을 쓰고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이 옆을 돌아보며 손을 마주대고 무언가 이야기 하고 있다. 역시 머리수건을 쓰고 갈색저고리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 쓰고 있다.

 

■파르티안 샷 선보인 마상무예 대회

고광의 위원의 설명을 토대로 ‘어떤 이(有人)’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보자.

평남 남포에 자리잡고 있는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마상궁술(말타고 활쏘기 대회)’ 그림을 보자.

경기장에는 말을 탄 2명의 기수가 쏜살같이 달리면서 기둥 위의 과녁을 쏘고 있다.

 

왼쪽 사수는 몸을 뒤로 돌려 활을 힘껏 당기는 ‘파르티안 샷’의 묘기를 선보이고 있다. 고대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의 궁기병이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구사한 기술이다. 이 사수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머릿수건에 달았던 술 장식이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졌다. 두번째로 출전한 사수(오른쪽)는 앞의 과녁을 겨누고 있다.

과녁 기둥을 보면 첫번째와 두번째 과녁이 명중되어 두동강 나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림 위에는 두 사람이 말을 탄채 출전 대기 중이다.

그런데 경기장 가운데 3명의 인물을 보라. 심판인듯한 두사람은 약간 웃음기 띤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맨 오른쪽 인물은 왼손엔 목간, 오른쪽엔 붓을 들고 옆 사람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적고 있다. 기자(기록자)의 모습이다.

 

■고구려 스포츠 기자가 적은 경기 기록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앞에 서있는 인물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점수를 열심히 적고 있다.

이 대목에서 고광의 위원의 ‘디테일’한 설명을 듣고 놀라 넘어지는 줄 알았다.

다소 넓은 목간에 세로로 선을 그어 두 부분으로 나눴는데, 그 양쪽에 ‘T’와 같은 부호로 표기해놓았다.

 

이 무슨 부호일까. 과녁을 2개 맞췄으니 ‘正’ 자 중 ‘T’로 표기해놓은 것이 아닐까. ‘2점’이라고….

그런데 이 인물의 앞쪽에는 ‘사희주기인(射戱注記人)’, 즉 ‘마상궁술(말타고 활쏘기) 대회의 기록자’라는 묵서가 있다.

이 인물은 마상궁술 대회의 기록원일까. 그러나 스포츠 기자 출신인 필자는 달리 생각해봤다. 요즘도 마찬가지겠지만 필자가 스포츠 종목을 취재할 때는 그 경기의 점수를 일일이 기록해가면서 그때 그때의 상황을 체크했다.

그래서 필자는 ‘사희주기인’으로 표현된 인물을 재미삼아 ‘고구려 시대 스포츠 기자’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싶다. 경기 결과를 보고하고, 또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면 뭐 ‘기자’이자 ‘사관’으로 일컬어도 무리는 아니겠다.

평남 남포시 덕흥리 고분. 고분 안에는 408년(광개토왕 18)에 죽은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이라는 고위관리의 경력과 무덤 조성과정이 담겨 있다.

 

■유주자사의 무덤에 등장하는 ‘기록자’

덕흥리 고분 벽화 중에는 ‘기록자’가 또 한사람 그려져 있다.

덕흥리 고분은 408년(광개토대왕 19) 죽은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이다. 무덤에 주인공의 이름과 이력이 적힌 묵서가 있다. ‘진’은 건위장군-국소대형 등과 요동태수를 거쳐 유주자사를 지낸 고위인물이었다.

고분에는 ‘유주’에 속한 13개 군의 태수와 휘하 관리가 ‘진’을 찾아와 하례하고 업무보고하는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중 ‘진(鎭)’의 휘하 관리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이게 심상치않다.

밑쪽 가운데는 어떤 이가 높은 감투를 쓴 사람에게 뭔가를 바치고 있다. 감투 쓴 사람의 오른쪽을 보라. 머리수건을 쓰고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이 옆을 돌아보며 손을 마주대고 무언가 이야기 하고 있다. 역시 머리수건을 쓰고 갈색저고리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 쓰고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붓이, 왼손에는 폭이 넓은 목간을 들고 있다.

고구려왕(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이나 중국 귀화인 동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해도 안악3호분에는 기록 담당관리인 ’기실(記室)’이 보인다. 기실은 오른손에 붓, 왼손에 목간을 들고 기록하고 있다. 성사(省事·관리 직책)가 묘주인공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기록하는 것 같다.

 

■무언가를 잔뜩 기록중인 ‘기실’

황해도 안악에서 확인된 안악3호분의 벽화에도 ‘기록자’가 등장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두고 ‘고구려왕(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설’과 ‘중국 귀화인(동수)설’로 나뉜다.

주인공이 누구든 이 고분은 마치 지하궁전을 방불케하는 어아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무덤 주인공이 정사를 펼치는 그림과 함께 250여명이 등장하는 대행렬도가 벽화를 장식하고 있다.

그중 주인공의 ‘정사도’를 보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사람의 신하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성사(省事·관리 직책)’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문서를 받쳐든채 주인공에게 보고하고 있다.

주인공 왼쪽 인물은 어떨까. 이 인물에는 ‘기록 담당 관리’를 뜻하는 ‘기실(記室)’ 직책이 쓰여있다.

‘기실’은 오른손에 붓을, 왼손에 목간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주인공 오른쪽 ‘성사’의 보고 내용을 받아 적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보고 후 주인공이 내리는 명령이니 지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안악3호분 주인공의 좌우에는 보고하는 관리(성사)와 그 보고내용이나 혹은 주인공의 지시사항을 적는 기록자가 그려져 있다.

 

■앉아서 기록하고 있지만

6세기 전반에 조성된 집안(지안·集安) 통구(퉁거우·通溝) 사신총의 벽화에서도 ‘기록자’의 모습이 보인다.

무덤방 서쪽의 천장고임 벽화 인물을 보라.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른 무릎은 꿇고 왼발을 세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인물은 오른손에 붓을 들고 왼손에는 두번째 손가락으로 목간의 바닥을 받쳐 손바닥으로 감싸쥔채 무언가를 쓰고 있다. 얼핏 보면 기록자의 자세가 매우 불편해보인다. 이를 두고 고광의 위원은 “실제로 폭이 좁은 목간이나 죽간을 손에 쥐고 오랫동안 많은 양의 문서를 쓰다보면 왼손이 피곤하지 않겠냐”면서 “그래서 벽화에서와 같은 자세로 바꿔 앉아서 목간을 쥔 왼손의 팔꿈치를 왼 무릎 위에 가볍게 받쳐서 글씨를 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안(集安) 무용총 벽화의 ‘기록자’는 평상에 걸터 앉아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자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올려놓고 있다. 그래도 앉은 자세이니 편안해 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이런 상태에서 허리를 세우고 목간에 글씨를 쓴다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악3호분 정사도 모사본. 성사는 묘 주인공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있고, 기실은 붓과 목간을 들고 보고내용 혹은 지시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의 표정도 써야 합니다”

기록자의 자세와 관련해서 조선조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489년(성종 20) 8월27일 사관인 검열(9품) 이주(1468~1504)가 문제를 제기한다.

“저희(사관)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하니 사람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옛 역사서를 보면 ‘발연히 얼굴빛이 변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를 띠었다’는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집안 통구 사신총에 표현된 기자(기록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른 무릎은 세우고 왼발을 세운 자세를 취한채. 오른손에 붓을 들고 왼손에는 두번째 손가락으로 목간의 바닥을 받쳐 손바닥으로 감싸쥔채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이주의 말은 “옛 사관들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했는데 조선의 사관들은 땅에 엎드려 기록하니 매우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기록하는 것도 버릇없는 짓이라는 주장과. 엎드려서는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때 성종이 절충안을 마련했다.

“그래? 그러면 앉아서 기록하도록 하여라”

이때부터 사관은 앉아서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하루종일 꿇어앉아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분투했던 사관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통구 사신총이나 무용총의 ‘기록자’의 자세에서도 그러한 고단함이 묻어나온다.

집안 통구 사신총에 표현된 기자(기록자)의 모습. 막 적성한 목간 꾸러미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채 열심히 뭔가를 끄적대고 있다.

 

■“지혜로운 자가 붓을 썼다”

그렇다면 벽화 고분 ‘기록자’의 도구는 어떨까.

가장 중요한 도구는 붓이다. 1988년 경남 창원 다호리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제작된 붓 5점과 ‘삭도(削刀·지우개용 칼)가 출토됐다. 이 붓 5점은 양쪽에 붓털을 끼운 형식이었다. 한쪽만 붓털을 끼운 중국 붓과 다른 독자적인 붓이다.

붓대의 양쪽 끝단과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필가(筆架·붓을 걸어놓는 기구)에 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옻칠 칼집에 들어있던 ‘지우개용 칼’은 죽간이나 목간에 잘못 쓴 글자를 지울 때 사용됐다.

중국 후한의 왕충(27~100?)은 “지혜를 갖춘 이는 세치의 혀와 1척의 붓으로 일한다(知能之人 須三寸之舌 一尺之筆)”(<논형>)고 했다. 기원전 1세기면 이미 한반도 남부에까지 ‘지혜를 갖춘 이가 붓으로 무언가를 기록한’ 시대였다는 뜻이다.

집안 무용총의 기자(기록자)는 평상에 걸터앉아 기록하고 있다.

 

붓의 전통은 고구려 시대에 접어들며 더욱 발전했다. 특히 고분 벽화 그리기가 유행하면서 다양한 붓이 제작·활용되었다.

고광의 위원은 “안악3호분의 ‘기실’과 덕흥리 고분의 ‘사희주기인’, ‘통구 사신총’의 ‘서사인’ 등이 쓰는 붓이 사뭇 다르다”고 분석한다. 특히 ‘덕흥리 고분’의 ‘마상궁술’ 기록자가 쥐고 있는 붓 끝을 자세히 보면 고리인 듯한 것이 보인다. 이 붓을 걸어두며 썼던 것으로 해석된다. 다호리 붓이 연상된다.

벼루는 어떨까. 통구 사신총의 ‘기록자’ 앞쪽에 걸상을 놓고 그 위에 검은 색 벼루를 올려놓았다.

이와같은 고구려 벼루의 실물자료는 종종 보인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에두아르 샤반느(1865~1918)가 1907년 집안의 태왕릉애서 와당 형태의 벼루를 수집해간 것이 효시였다. 이후 집안과 평양의 고구려 유적에서 다양한 형태의 벼루가 나왔다.

최근에는 경기 연천 호로고루와, 서울 홍련봉 2보루 및 몽촌토성에서도 잇달아 출토됐다.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절 전투와 전쟁 상황을 보고하는 숨막히는 문서행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다.

집안과 평양, 연천, 서울 등지에서 출토된 고구려 벼루. 심지어 치열한 전쟁 중에도 활발한 문서활동을 했다는 증좌이다.|프랑스 기메박물관·집안박물관·길림성박물관·토지주택박물관·한성백제박물관 등 소장

 

■목간인가 종이인가

벽화의 기록자들은 종이를 썼을까, 아니면 목간이나 죽간 등을 사용했을까.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도 목간은 보편적인 서사자료였다. 물론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확인할 수 있다.

“통구 사신총을 보십시요. 기록자 앞의 책상 위에는 목간으로 보이는 11개의 물체가 정연하게 놓여있습니다. 위와 아래 끝부분에 다소 불규칙하죠. 목간마다 길이가 약간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고광의 위원)

창원 다호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붓과 지우개용칼. 이미 2100년전부터 한반도 남쪽까지 활별한 문자생활을 했다는 증거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원래 문서가 완성되면 다른 문서와 섞이지 않도록 끈으로 묶는다. 안악3호분 벽화에서 ‘성사’가 묘주인공에게 보고하는 목간 문서가 끈으로 묶여있다. 반면 아직 작성중인 통구 사신총의 문서는 끈으로 묶어놓지 않았다.

이밖에도 무용총과 덕흥리 고분의 기록자들은 목간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고광의 위원의 저작물을 통해 고구려 고분벽화의 글자와 그림을 살펴보았다. 새삼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의 명제가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 벽화를 그렸던 고구려인과 1500년 시공을 초월한 소통을 즐겼으니 푹푹 찌는 무더위에 얼마나 시원한 피서인가.(이 기사를 위해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고광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서사 관련 내용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34권, 한국고대사학회, 2004

고광의, <고구려의 문자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23

고구려유적유물도감편찬위, <고구려 유적유물도감(5·6)-고구려편3·4>, 1990

박진욱·김종혁·주영헌·장상렬·정찬영, <덕흥리벽화무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 덕흥리고분 (daum.net)

임기환입력 2017. 8. 17. 15:06
 

[고구려사 명장면-26] 1976년 12월 8일,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 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서편 옥녀봉의 남쪽 자락. 향금산이라고 불리는 구릉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고구려 시대 벽화고분 1기가 발견되었다. 한겨울임에도 발굴단은 부랴부랴 12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한 달여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덕흥리고분 전경. 덕흥리고분 주변에는 유명한 강서 3묘 고분이 1.8㎞ 거리에 있고, 그밖에도 약수리고분, 수산리고분 등 벽화고분 10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출처=한성백제박물관 2016년 고구려고분벽화 특별전도록
 
무덤은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었다. 각 방은 방형이며, 앞방 천장은 궁륭고임 위에 2단 평행고임을 얹었고, 널방 천장은 궁륭고임 위에 4~5단 평행고임을 얹었다. 그리 크지 않은 넓이의 무덤방이지만 높은 천장으로 공간은 제법 넉넉했다. 사방 벽면과 천장에 가득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생활풍속도 그림으로서 마치 고구려 시대로 돌아간 듯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사실 벽화만으로도 고구려 벽화고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도 풍성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묵서가 무덤 벽면 곳곳 56군데에 쓰여 있었다. 묵서 글자만도 600여 자. 게다가 무덤 주인의 묘지명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120여 기 중에서 무덤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명이 쓰여 있는 고분이 몇 기나 되는지? 여기서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는 안악3호분(무덤주인공이 고구려왕인가, 동수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지만), 그리고 모두루고분(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딱 2기뿐이다. 범위를 삼국 전체로 넓혀도 단지 백제의 무령왕릉만 추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묘지명에 의하면 이 무덤의 완성 일시가 영락(永樂) 18년 무신(戊申)년 초하루가 신유(辛酉)일인 12월 25일 을유(乙酉)라고 밝혀져 있다. 양력으로 따지면 409년 1월 26일이다. 이렇게 보면 이 무덤은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무덤인 셈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덕흥리고분의 발견은 안악3호분 발견 이후 고구려 고고발굴 역사에서 최고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덤의 묵서 중에는 날짜와 관련된 묵서가 하나 더 있었다. 널길 서벽에는 "태세재기유이월이일(太歲在己酉二月二日)"이라는 묵서가 쓰여 있었다. 음력 409년 2월 2일이며, 양력으로 3월 4일이다. 이 날짜는 무엇일까? 널길에 쓰여져 있고, 무덤 완성 일자보다 뒤인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무덤을 폐쇄한 시점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렇다면 무덤을 완성하고 무덤 주인을 안장하고 장례 절차 등이 한 달 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고구려의 장례문화를 추적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처럼 무덤을 폐쇄한 날짜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묵서의 사료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

덕흥리고분 투시도 동→서.두방 무덤에 평행궁륭고임 천장이다.
 
묘주의 묘지명에 쓰여 있는 영락(永樂) 18년이란 기년 묵서 또한 쉬이 지나칠 수 없다. 영락(永樂)이 광개토왕 연호임은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비문에는 광개토왕 생시의 칭호를 '영락(永樂)태왕'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비문의 영락을 영락태왕 몇 년이라는 재위년을 표시하는 것이지 연호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실 비문만으로 영락을 연호로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덕흥리고분이 발견되어 묘지명의 영락(永樂) 18년 사례에 근거해 영락이 광개토왕 연호임을 '확정'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몇몇 사례만으로도 덕흥리고분의 묵서가 갖는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벽화 제재의 풍부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림의 대상과 내용에 대해 그 이름과 설명이 묵서로 밝혀져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벽화 내용이 무엇인지 그냥 짐작해보는 것과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고구려인의 의식과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명료한 '표지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벽화와 묵서 등 이 무덤에 담겨 있는 역사 자료의 가치로 볼 때 덕흥리고분을 현존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첫 자리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덕흥리고분의 벽화와 묵서 내용이 모두 다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고구려 역사의 단면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표지판'은 있지만 그 길로 들어서서 무엇을 찾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덕흥리고분은 더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무덤을 만든 고구려인은 자신들이 담고자 하는 많은 사실과 생각, 관념들을 그림과 묵서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그 분명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덕흥리고분은 여러 치열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묘주는 고구려인인가, 망명객인가? 유주는 고구려의 영토였나? 등등이 대표적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런 논쟁점들을 짚어보겠다. 어쩌면 이런 논쟁점보다는 고구려인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더 귀중한 자료인 벽화 명장면들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덕흥리고분의 구석구석,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마치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 것으로 믿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약수리고분]

약수리 고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약수리 고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약수리 고분(藥水里古墳)은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에 있는 5세기경의 고구려 벽화고분이다. 1958년에 발굴되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방과 같은 모양이지만,

ko.wikipedia.org

 

[수산리고분]

수산리 고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수산리 고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 쌍영총]

고구려 쌍영총 벽화, 눈으로 직접 본다 (daum.net)

노형석입력 2020. 10. 11. 18:06수정 2020. 12. 27. 18:36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빛의 과학' 특별전 11월15일까지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 여인상을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갸름한 얼굴에 입술을 칠하고 볼에 곱게 화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168.7㎝, 너비 182.7㎝. 어른의 몸체 크기만한 1600년 전 벽화편으로 다가가자 가슴이 떨렸다.

곱게 화장한 1600년 전 고구려 여인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입술에 색칠하고 볼에는 연지를 찍었다. 그들은 순박하면서도 야무진 표정으로 맞은편의 모자 쓴 고구려 청년들을 바라보며 열을 지어 서 있다. 시선을 옮기니 바로 위쪽에 당당한 표정으로 갑옷을 차려입은 개마무사가 보이고, 그 옆쪽엔 한가로이 소가 끄는 수레를 모는 시동이 있다. 다시 위쪽을 주시하면 깃발을 들고 걸어가는 남성들의 행진 모습이 자리한다. 5세기 말 도읍 평양을 중심으로 우아하게 농익은 고구려 벽화미술 특유의 도상인 ‘남녀거마도’(男女車馬圖)다.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 여인상을 가까이에서 찍은 모습. 갸름한 얼굴에 순박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코로나19 재확산 사태로 곡절 끝에 지난달 말 재개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의 특별전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11월15일까지)의 하이라이트는 사상 처음 관객에게 공개된 고구려 쌍영총 벽화편이다. 이 유물은 1913년 일본 학자들이 평양 외곽의 평안남도 용강읍의 고구려 고분 쌍영총에서 처음 조사했던 무덤 내부 벽화들 가운데 일부로 원래 널길 동쪽 벽에 붙어 있었다. 1920년대 혹은 1930년대 훼손돼 떨어진 것을 당시 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수습해 소장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는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복원도만 알려져 있다가 박물관이 전격적으로 벽화편을 대중 앞에 공개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 복원도. 오늘날 학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쌍영총의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고구려 벽화는 북한이나 중국 만주의 석실무덤에 있어 실물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뜻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에 조각편이 등장한 쌍영총과 개마총을 비롯해 감신총, 고산리 1호분, 운봉리 고분 등의 벽화 조각을 무려 262건 401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이 수집한 뒤 해방 이후 그대로 인수해 보관해온 것들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총독부 당국과 일본 학자들은 1910년 평남 대동군 대성산성 고분 조사를 시작으로 1941년 평남 중화군 진파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 이들 가운데 벽화무덤만 30기에 이르렀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벽화편은 일제의 이런 적극적인 조사의 부산물이다.

이상한 점은 수집된 벽화 조각편 가운데 구체적인 수습·수집 경위에 대한 기록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편은 최소한 80년 이상의 수장 내력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대중에 선보였던 것은 쌍영총 고분의 널길 서쪽 벽에 붙어 있다 수습된 말 탄 기마무사상을 그린 조각이 유일하다. 그나마 이 조각도 주로 복제품으로 선보였을 뿐이다.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적외선 촬영 이미지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에서 지난해와 올해 작업해 ‘빛의 과학’전에 처음 내보였다.

 

고구려 벽화편의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이렇게 홀대를 받는 것엔 속사정이 있다. 1904년 평남 강서군수 이우영이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대묘 안에 들어가 벽화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20세기 초 고구려 벽화는 일본 학계는 물론 서구 학계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집중 탐구 대상이 됐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민심을 자극했다. 외지 연구자들이 몰려들자 주민들 사이엔 벽화 무덤 속 회벽이 신통한 영약 재료여서 외지인들이 찾아온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회벽을 갈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돌면서 벽화무덤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고구려 벽화 전문가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20~30년대 이런 속설 때문에 평안도 일대의 고구려 벽화무덤 상당수가 파괴·훼손에 직면했고, 유적의 정비 보존을 위해 파견된 당국자들이 벽화 파편을 급히 거둬 박물관에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쌍영총 벽화편과 함께 처음 공개된 개마총 벽화편의 적외선 촬영 사진. 태양 안에 다리 셋 달린 삼족오와 구름무늬 등이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벽화편들을 수습하고 보관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기록이 전혀 남지 않았고, 후대 학예사들도 유물의 내력과 정확한 연고를 알지 못해 사실상 수장고에 파묻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전시에 나온 쌍영총의 행렬도 벽화편과 개마총의 삼족오 무늬 파편들은 이런 방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세상에 나왔다. 지난해 보존과학부와 고고역사부 학예사들이 적외선과 엑스선 투과 기술을 활용해 정밀한 도상을 확인하고 연고 무덤을 밝힌 성과를 업고 출품된 것이다. 쌍영총은 국내 학자들에게 전혀 개방된 적이 없고 개마총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됐다. 박물관 쪽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쌍영총과 감신총의 다른 벽화 조각편들도 별도로 해체 보존 처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쌍영총 앞방 전경 (daum.net)

입력 2006. 8. 29. 14:49수정 2006. 8. 29. 14:49
 

고구려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고분 중 하나인 쌍영총의 앞방 전경. 8각 돌기둥과 앞방 벽, 그리고 천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합뉴스와 서울역사박물관이 일본 교도통신과 함께 개최하는 '인류의 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9.1-10.22.서울역사박물관)에 선보인다.//문화/ 2006.8.29 (서울=연합뉴스)

[안악1,2,3호분]

안악3호, 덕흥리 고분 주인공은 누구? (daum.net)

입력 2016. 8. 18. 19:26수정 2016. 8. 19. 16:46
 

[한겨레] 망명 중국관리로 알려졌지만 정체 미궁 속
전호태 교수, 고구려 옛 무덤 아카이브 위해
중국 집안권·북 평양권 고분 10기 집중조명

고구려 벽화고분
전호태 지음/돌베개·3만5000원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 중에서 벽화가 발견된 무덤은 지금까지 121기가 넘는다. 이 분야 전문연구자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의 <고구려 벽화고분>을 보면, 이들 중 38기가 중국 길림성 집안·환인·무순 지역(집안권)에, 83기는 북의 평양군과 황해도 안악군 주변(평양권)에 분포돼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벽화고분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만, 고대 특정 시기(4~6세기)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뛰어난 미술이자 건축물이 광범위한 지역에 이토록 많이 다채롭게 남은 예는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유물들에 대한 연구는 재발굴된 지 100여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기초 조사와 발굴 보고 정리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고, 전문 연구자들은 아직도 “국내외를 통틀어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없으며, 유물들은 급속도로 훼손돼 가고 있다. 이를 바꾸고 제대로 된 연구와 보존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이 책은 집안권 3기, 평양권 7기, 모두 10기의 주요 벽화고분과 그 전반적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각 고분의 구조와 벽화 내용을 하나하나 매우 세밀하게 살피고 측정하고 기존의 연구 성과들과 비교하면서 그 실체와 의미, 역사(시대)적·지역적 특징들을 때론 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하게 짚고 정리했다.

덕흥리벽화분 북벽 서쪽의 벽화. 무덤 주인인 유주자사 진(오른쪽)이 장방형 평상에 앉아 자신이 관할한 13개 군 태수 및 장군들로부터 하례를 받는 모습. 벽 상단에는 14행 154자로 된 한문 묵서 묘지명이 적혀 있다.

1500년 전인 6세기 이전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이 놀라운 유물들은 7세기 고구려 멸망과 함께 방치돼 도굴당하고 훼손된 채 잊혀졌다가 19세기 말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재발견돼 공개되기 시작했다.

일제 패망과 함께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 조사·연구는 북과 중국 학자들이 주도했고, 일본 연구자들은 멀어졌으며, 남쪽 연구자들은 냉전이 무너질 때까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듯 고구려 벽화고분이 100년 넘도록 제대로 조사·연구되지 못한 것은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 전쟁과 이념적 대립이 야기한 복잡한 정치현실 탓이 크다. 예컨대 일제 관학자들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감탄하면서도 독자성·주체성을 부정하고자 중국 쪽 영향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다. 동북공정을 밀고 나간 중국 쪽은 또다른 의도를 갖고 있다. 남북분단은 고대사 발굴·연구마저도 철저히 분단시켰다. 내셔널리즘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역사적 사실 자체의 온전한 조망과 연구를 위해서도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고구려 벽화고분들이 세계적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 중국의 동북공정이 야기한 고대사 논쟁,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계기가 됐다.

집안권 3기(통구사신총, 삼실총, 장천1호분), 평양권 7기(개마총, 진파리1호분, 덕흥리벽화분, 수산리벽화분, 쌍영총, 안악2호분, 안악3호분)의 고분들은 이 책에서 다시 시기별로 재분류된다. 중국 랴오양의 한나라, 위·진 시기의 벽화고분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면서 낙랑·대방의 벽돌무덤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당대 생활풍속 중심의 벽화를 남긴 초기(4세기~5세기 초)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분. 불교의 영향과 그것의 고구려화 경향, 연꽃 그리기가 두드러지는 중기(5세기 중엽~후반, 6세기 초 고구려 전성기)의 안악2호분, 수산리벽화분, 쌍영총, 삼실총, 장천1호분. 그리고 사신도 일색의 후기(7세기 전후)의 개마총, 진파리1호분, 통구사신총.

1949년과 1957년에 북이 발굴한 안악3호분과 역시 북이 1976년에 발굴한 덕흥리벽화분은, 그 무덤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서쪽으로 시안까지 이어지는 ‘유주’ 지역을 지배했는지 여부가 갈릴 수 있다. 안악3호분 벽의 한문 글(묵서명)에 나오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이 당시 전연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佟)수’와 동일인물이냐, 아니면 고구려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이냐는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덕흥리벽화분 묵서명에 나오는 유주자사 진(鎭)이라는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중국 왕조의 관료였는지 고구려 출신 대귀족이었는지도 확정돼 있지 않다. 그들이 망명객이냐 아니냐, 그들의 직책이 망명 전 중국 것이냐 고구려 것이냐에 따라 고구려 영역이 요동칠 수 있다.

지은이는 최근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를 남쪽 학자들이 주도해왔다면서도 연구자는 여전히 소수이고 새로운 연구세대는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 벽화고분들에 관한 정보 수집과 정리, 데이터베이스화, 보존조처, 이를 위한 국제적 연대와 기금 조성이 절실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연합르페르)

피라미드, 진시황릉, 타지마할 등 최고 권력자의 무덤은 단순한 매장의 공간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대의 건축학, 과학, 예술, 사상, 종교 등 모든 분야가 집대성된 문화적 총체였다. 시간이 소멸되지 않는 또 하나의 완전한 세계였던 셈이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부터 고구려 고분벽화까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조형언어의 금자탑을 찾아가본다.

 

꿈틀거리는 선(線)과 살아오는 색(色)

고대 동북아시아의 주역인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수만 기의 고분을 남겼다. 벽화가 있는 고분만 해도 100기 이상 발견됐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분, 강서대묘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흐름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들 고분의 벽화를 통해 1천500여 년 전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과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은 황해도 안악군 재령평야에 위치한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이전인 4세기 중엽에 축조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북한은 현재 이 무덤을 고국원왕릉으로 표기한다. 고국원왕은 광개토대왕의 조부로 백제와의 전쟁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하지만 정확한 무덤 주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안악3호분은 넓은 회랑과 여러 개의 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화는 회백색 석회암 판석을 쌓아 올려 회칠을 바른 벽면에 그려졌다. 길이 10여m의 회랑 벽을 장식한 대행렬도는 그 중 백미로 꼽힌다.

대행렬도에는 무려 250여 명이 등장한다. 무덤 주인이 타고 가는 수레를 중심으로 기수, 마부, 악사, 기병, 보병, 악사, 무용수, 남녀 시종이 묘사돼 있다.

도포를 입은 무덤 주인은 오른손에 깃털부채를 들고 머리에는 검은 내관(內冠)과 흰색 나관(羅冠)을 썼다. 나관은 왕 또는 상급 관인이 내관 위에 쓰는 덧관으로 색깔로서 지위가 구분된다. 수레 좌우로는 궁수들과 부월수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무엇엔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표정의 무덤 주인과 팔을 크게 벌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모습에서 사실감과 생명력이 전해진다.

 

일생생활 엿볼 수 있는 안악3호분

안악3호분에선 당시의 일상적인 생활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무덤 앞방의 동쪽 곁방에 부엌, 마구간, 방앗간 등 가내 시설이 그려져 있다. 노루, 돼지 등을 갈고리에 꿰어 매단 고기창고도 볼 수 있다.

가내 시설 벽화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여자다. 우선, 부엌에 3명의 여인이 있다. 커다란 솥단지 앞의 여인은 오른손에 국자를, 왼손에 긴 막대 모양의 도구를 들었다. 솥단지 안을 저으면서 국자로 국물을 뜨려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고구려 부뚜막의 아궁이 앞에선 또 다른 여인이 불을 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선 그릇 정리가 한창이다. 음식을 끓이고 그릇을 만지는 것으로 보아 금세 상차림이 이루어질 듯하다. 방앗간에선 디딜방아를 발로 밟아 방아를 찧는 여인, 두 손으로 키질을 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물가에선 두 여인이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항아리에 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의 여인들은 벽화에서 걸어 나와 말을 걸어올 듯 묘사가 생생하다.

덕흥리벽화분은 평양과 지척인 남포에 자리 잡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기인 5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벽과 천장에 목조가옥의 골조를 그려 넣은 다음 그 안에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무덤 안을 사후의 저택으로 여긴 셈이다.

덕흥리벽화분의 주인은 유주자사(幽州刺使)라는 관직을 지낸 진(鎭)으로 밝혀졌다. 그의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이를 위해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았다고 전해진다.

5세기 초는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시기다. 중국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돼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던 혼란기였다. 고구려는 우월적 위치의 대외관계를 바탕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덕흥리벽화분에는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이 잘 드러난다. 안악3호분과 비교했을 때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 묘사방식을 취했다.

덕흥리벽화분에는 남녀 시종들이 무덤 주인의 뒤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부채를 부치고 있는 벽화가 있다. 시종들은 안악3호분의 인물들에 비해 얼굴이 갸름해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상, 하의가 뚜렷이 구분되는 간편한 스타일의 고구려 옷을 입고 있다. 번잡한 머리 장식도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변화는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벽화미술을 주체적 방식으로 재창조한 결과로 해석된다.

살아있는 듯 세밀한 강서대묘 사신도

고구려 고분벽화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또 한 차례 변화를 보인다. 무덤 주인과 생활풍습의 묘사 대신에 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方位神) 즉, 사신이 전면에 등장한다.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강서대묘(江西大墓)와 강서중묘(江西中墓)가 대표적이다.

강서대묘, 강서중묘는 덕흥리벽화분과 마찬가지로 평양 주변 남포에 위치한다. 1900년대 초반 벽화고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의 출입이 잦았다. 잘 다듬어진 대형 화강암 벽면에 아무런 배경 장식 없이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두 고분의 벽화는 목필(木筆)이나 죽필(竹筆)에 비수용성(非水溶性) 안료를 묻혀 벽면에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안료의 대부분이 요철이 있는 석질의 입자 사이에 박혀 바탕층과 채색층이 일체를 이루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같은 방식으로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강서대묘 사신도는 살아 움직이는 듯 세밀한 묘사와 힘이 느껴지는 질감으로 정평이 나 있다. 북벽의 현무(玄武)는 높은 회화적 완성도로 인해 발굴조사 당시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널방 동벽의 청룡(靑龍), 포효하는 백호(白虎), 주작(朱雀) 역시 화려하고 세련된 색채감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벽면 아래에 흐릿하게 펼쳐진 산봉우리는 상서롭고 정제된 느낌을 준다. 절정기에 이른 고구려의 문화적 자긍심과 풍요로움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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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6-01-22 19:25 등록 2016-01-22 19:25

[한 장의 다큐] 하얀 제국의 흔적 (hani.co.kr)

[토요판] 한 장의 다큐

압록강변 지안 퉁거우(통구) 지역의 환도산성에서 바라본 고구려 무덤군의 설경이다. 환도산성은 산성자산성이라고도 하며 국내성의 북쪽 약 2.5㎞ 지점 해발 670여m의 산성자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앞쪽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일찍이 대륙을 호령하며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던 고구려

 

압록강변 지안 퉁거우(통구) 지역의 환도산성에서 바라본 고구려 무덤군의 설경이다. 환도산성은 산성자산성이라고도 하며 국내성의 북쪽 약 2.5㎞ 지점 해발 670여m의 산성자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앞쪽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일찍이 대륙을 호령하며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던 고구려, 140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났지만 잃어버린 역사를 찾고 그 기상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에 정의가 흐르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2006년. 박하선/사진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상적 고찰

하늘의 빛에서 생명을 얻은 자 빛의 세계로 돌아가니…

  • 글: 유재신 토론토대 동아시아학부 석좌교수
  • 입력2004-06-01 10:38:00
 
  •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한국 고유의 사상과 도교 및 불교사상이 곁들여져 있다.
  •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에 한국적 특색을 가미한 셈이다.
  • 특히 도교가 한국으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시사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삼족오(三足烏)’가 일본 축구국가대표팀의 엠블렘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일본의 상징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내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눈으로 직접 본 것은 1988년 지안(集安)에서였다. 짧게는 1500년, 길게는 1700년 가량 된 작품들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그 화려한 빛깔과 훌륭한 솜씨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벽화들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얼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한 21세기 회화에 영감을 주고 동아시아 미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동양미술과 종교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도 소중한 재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도 훌륭한 역사적 재료이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그려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벽화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한국 역사의 뿌리를 찾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발전된 채색 기술과 우수한 회화 기법을 통해 미술사를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고구려의 고분 벽화 연구는 고구려의 역사, 풍속, 해외정책, 음악, 미술, 그리고 종교사상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삼족오(三足烏)’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는 일본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엠블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은 1930년부터 삼족오를 상징물로 사용했는데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축구협회가 삼족오를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외국인들은 삼족오가 일본의 고유 상징으로 오해하는 일도 생겨났다.

하느님의 자손, 고주몽



그러나 실상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는 태양 숭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이라는 숫자는 동양철학에서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며 ‘천지인(天地人)’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 안의 세 발 까마귀와 달 안의 두꺼비는 어떤 사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까.

고구려 건국신화에 따르면 시조 고주몽은 하느님의 자손, 해와 달의 자손이다. 해 안의 까마귀는 신비한 출생과 관계가 있다. 고주몽은 천제(하느님)로 칭하는 해모수(天神)와 지모신(地母神)이라는 유화가 만나서 태어난 신인(神人)이라는 것이다.

고주몽이 알에서 햇빛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은 하늘, 즉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무교의 천신(天神)과 천조(天鳥)신앙, 즉 알에서 새가 나온다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다시 말해 이는 일신(日神)신앙과 천조신앙의 결합을 의미한다.

해와 달은 도교의 음양사상과도 무관하지 않아 중국의 복희씨와 여와씨의 신상(神像)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간 무당이라는 설이 있는 일본의 첫 여황(女皇) 천조대신(天照大神)은 일신(日神)이면서 황조신(皇祖神)으로 이 역시 삼족오(三足烏) 설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고대 동이(東夷)족의 태양숭배 신앙이 조류숭배 신앙과 합쳐진 결과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새들은 무속의 천조(天鳥)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새는 이 세상과 하늘세계를 연결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분 벽화는 동이계의 조류숭배와 태양숭배의 샤머니즘, 즉 원시신앙에 근거를 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무덤 주인은 생전에 자신의 일족이 받들던 조상신의 일원이 되어 계급 신분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구려인에게 사후에 영혼이 도달하는 곳은 광명의 신(神)이 지배하는 ‘빛의 하늘’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빛에서 생명을 얻고, 죽은 후에는 자신의 근원인 빛의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고구려인들의 이러한 세계관, 즉 하늘은 광명의 세계이자 아래 세상에 복을 베푸는 선한 신의 세계라는 사상은 단군신화와도 관계가 깊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고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이 세상을 잘살게 했다는 단군신화와, 해모수와 유화가 결혼해서 고구려 태조 고주몽을 낳아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이룩하여 복을 내리게 한다는 고구려 건국설화는 모두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우주관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성스럽고 큰 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은 천신(天神)신앙이 산신(山神)신앙으로 연결되는 대목이다. 나무에는 곰과 호랑이가 기대고 있는데 이는 단군신화에서 인간이 되기를 꿈꾸었던 웅녀(熊女)와 이곳을 드나드는 신(神) 환웅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또 나무, 곰, 호랑이 그림은 죽은 사람이 다음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벽화에 그려진 나무들은 고구려인들이 전통적으로 수목(樹木)을 숭배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신화에서도 환웅이 내려온 곳은 태백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이고 웅녀가 잉태한 곳도 단수(檀樹) 아래다. 시베리아 지역에는 인간의 영혼이 벌거벗은 몸으로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신화가 내려오고 있다. 단군은 세상에 내려와 1500년 동안이나 오늘날 무당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명, 질병을 다스리던 산신이었다. 옛 사람들이 산에 가서 산신제를 지낸 풍습도 모두 여기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는 종교적으로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였다. 또한 생명의 근원이며 창조의 근원이며 재산의 근원이었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대교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구원했고,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가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의 구원을 성취시켰다고 했다.

불가에서는 불타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불교를 창시했다고 하였다.

단군은 나무의 임금이란 뜻이며 죽은 후에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신목(神木)신앙은 천신(天神)신앙의 구체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시(神市)는 신단(神壇)이 있는 성지(聖地)이고 신단수(神檀樹)는 신목신앙에 말미암은 것이다.

단군신화의 신목신앙은 고구려의 목수(木隧)신앙으로 이어지고 다시 마한의 소토(蘇土)신앙으로 연결되었다. 고구려의 목수신앙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월에 국중(國中)에서 대회를 가졌다. 수신(隧神)을 영접해 나라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여 제사를 올리는데 수신이 앉는 자리에 나무를 세운다. 또 10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목수(木隧)신앙에 따라 귀신을 받든다. 천신에게 제사를 올릴 목적으로 나라의 도와 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두어 이름을 천군(天君)이라 했다.

또 제국(諸國)에 각각 특별한 도읍을 정하여 소토(蘇土)라 이름짓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 달린 북을 달고 큰 장대 끝에 새 모양을 장식하여 귀신을 섬겼다. 무당은 죽은 사람의 혼이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며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만주의 무당은 천신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주관하였다. 사좌(師坐-스승무당)는 왕에게 권장하여 덕을 닦고 재앙을 물리치라고 했다. 소토는 근세까지 부락제로 계승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제단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들의 일신(日神)인 고주몽에 대한 제사는 말할 것도 없고 무덤 속 가족 선조신에게도 제사를 지냈음을 시사한다. 고주몽을 위한 제사가 국민의 단합을 위한 것이었다면 가족 선조신을 위한 제사는 가족의 단합과 복을 비는 의미를 띠었을 것이다. 또 춤추고 노래하는 그림으로 보아 제사 때는 춤과 노래, 악기 등이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천장 내부에 그려진 수렵도

고구려 고분에 남아 있는 수렵도 또한 제사의 한 형태로, 수렵 후에 그 희생제물을 통해 하느님과 교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렵도는 천장 내부에 그려졌는데 그 위치로 보아 일상적인 수렵이 아닌, 하늘에 바치는 희생물을 잡기 위한 제의(祭儀)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에서는 왕이 친히 사슴을 사냥한 후에 군신들이 참석하여 희생 동물을 매개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사냥의 대상은 짐승이나 물고기였으며 제사행위를 위한 제물로 삼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연꽃을 비롯해 불교사상을 상징하는 그림들도 눈에 띈다. 동아시아에서는 원래 연꽃을 불교와 관계없이 생각해왔다. 중국 은나라 이래 연꽃은 세계의 중앙이나 천제(天帝-하느님)를 상징했다.

연꽃은 淨土세계 상징

연꽃은 불교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수용되기 이전부터 고구려 고분에 그려졌다. 연꽃은 재생의 개념으로 정토의 세계를 상징한다. 즉 정토신앙 및 아미타 신앙과 연관이 있으므로 연꽃 안에 있는 남녀 인물상은 보살과 석가라고 볼 수 있다. 연화를 벽면에 뿌린 것은 현실(玄室)을 불세계화(佛世界化)하자는 의도이며 각각의 연화는 불상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꽃 봉오리의 특이한 모양은 고구려의 독특한 기법의 산물이다.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다수의 연꽃장식분(墳)이 출현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묘실 내부를 정토세계의 상징인 연꽃으로 장식함으로써 사자(死者)의 정토화생(淨土化生)을 소망했음을 알려준다. 무덤 주인이 생전에 쌓은 선한 공덕에 의하여 연꽃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 정토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기원한 것이다. 정토세계에서는 무덤 주인이 단순한 하늘 사람으로 회생할 수도 있고 보살이나 천왕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연화문(蓮花紋)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무덤 주인공의 유해와 영혼이 있는 묘실을 왕생서방정토(往生西方淨土)로 구상했다는 해석이다. 묘실 전체가 연꽃으로 장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묘실이 연화정토(蓮花淨土)이며 불국토(佛國土) 자체로서 연꽃은 불토(佛土)이자 무수한 불(佛)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천정(天井)은 불천(佛天)의 구상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승천하여 천계(天界)에 머무른다는 뜻을 표현했다는 해석이다. 왕생무량수국(往生無量壽國)의 의미로 연화문 장식을 그렸다고 본다.

고구려인들이 가지고 있던 태양의 광명과 연결된 천상신앙(天上信仰)의 태도는 단군, 주몽, 해모수 신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東夷族)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있는 화연문은 자연적인 빛의 형태만을 간단히 암시한다. 부처나 불법을 상징한 불성(佛性)을 빛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암흑을 밝히는 태양과도 비교되며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신(神)의 속성, 즉 광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화연문은 천상의 테두리에 있는데 이는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의 경계지역을 나타낼 뿐 아니라 천상세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천상의 화연문은 전통적 사후관에 기반을 두고 있어 새로 수용된 불교적 사후관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고구려인은 햇빛인 태양의 정(精)을 인식했기에 시조인 주몽을 가리켜 ‘천하를 지배하는 태양의 아들’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신화를 통하여 시조를 천신으로 모셨는데, 이는 고구려인이 하늘의 빛, 즉 햇빛을 새 생명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생명 상징하는 고사리 문양

불성(佛性)을 표현한 삼각화연문은 불상의 광배(光背)를 닮은 삼각형 연화문인데 천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안에는 고구려의 전통적 태양 빛인 고사리 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고사리 문양이란 일정(日精), 즉 생명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고구려인이 그들의 전통적 사후관인 영혼불멸사상에 바탕을 두고 불국토에서 재생하기를 기원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고구려식 화연문은 하늘에서 복을 내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이 개국한다는 시조신앙을 뒷받침한다. 고구려의 삼각화연문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것이 중국에는 보이지 않으니 화연문은 한국에서 중국에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불정토관과 고구려식 세계관이 혼합되어 ‘불법(佛法)은 따르되 귀신을 함께 제사하라’는 경향이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정토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재래의 계세(繼世)적인 내세관이 고구려의 독자적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도교사상에 관한 것이다. 도교사상은 유교와 함께 중국의 고유사상으로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중국의 주(周)와 한(漢)을 중심으로 발전한 유교와 달리 중국적인 성격이 미미한데, 은(殷) 및 제(齊)와 관계가 깊은 동이족에서 비롯돼 발전했다는 견해가 있다. 고구려 고분에 적지않게 출현하는 도교의 산해경(山海經) 신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중국문화에 있어 도교는 비(非)한족적 성격인 동방의 변경문화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그 중에서도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무수한 별들이 그려져 있고 도교적 맥락의 남두육성(南斗六星) 별자리도 그려져 있다. 북두칠성은 도교적 성수관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교 사찰의 칠성각을 연상케 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성숙(星宿) 그림과 삼림(森林)을 보면 그 기저에 하늘과 달과 별을 숭상하던 고구려인의 샤머니즘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숭상의 대상이 되는 천공(天空)도 죽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신선이 그려진 3~4세기의 고구려 벽화에는 하늘의 세계를 노니는 선인 선녀들,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들, 선조(仙鳥)를 탄 천왕이 깃발을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승선(乘仙) 장면, 승조(乘鳥)의 신선이 학을 타고 있는 모습 등이 등장한다.

이는 모두 무술적인 비상(飛上)을 의미한다. 날개 돋친 인간, 즉 조인(鳥人) 형상은 후대 도교에서 우인(羽人), 우사(羽士), 비천(飛天)의 모양으로 발전한 조인일체(鳥人一體)의 형상이다. 해모수가 쓴 깃털관은 곧 까마귀의 깃털을 의미하고 이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연상케 한다.

해모수는 동이족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이며 도교의 설화가 담긴 그림이라 하겠다. 또 죽은 사람을 하늘로 보내는 표현은 도교의 신선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죽음의 세계에서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고 여기는 계세(繼世)적 사상은 고구려의 후기 특징으로 나타난다.

장생불로한다는 도교의 신선은 반드시 수양을 쌓고 술(術)을 체득해야만 비로소 하늘을 날 수 있다. 즉 신선사상이 그들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채색 구름과 풍악 속에서 수많은 존재의 호위를 받으며 오륜거(五輪車)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은 이를테면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의 강림이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야장신 그림은 예로부터 중국 민간에서 믿어오던 대장간의 직업신 행신(行神)이 노자에 등장하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인괘로(人掛爐)에서 금단(金丹)을 제련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고구려 고분(각저총과 무용총)은 천장이 팔각을 이루어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팔각정 건물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여덟 면으로 뻗어나가는 우주를 상징하는데 다분히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태양신 사상, 조화사상, 선비사상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고분은 고구려에서만 발견되는데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지안 지역과 후의 수도인 평양 지역에서 모두 34기가 발견되었다. 사신도는 도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4방천, 즉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상징하는 것으로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사신은 사상적으로 오방성두(五方星斗)의 신앙, 신성신앙,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사신오행도(四神五行圖)는 일월도(日月圖)와 함께 승선선(乘仙船)인 용이나 학을 탄 장수불로의 도교적 종교사상을 나타낸다. 사신을 천장에 그려넣은 것은 하늘 세계의 구성요소의 하나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사신도는 오행설에 바탕을 둔 사신신당의 표현, 즉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남향 무덤칸에 그렸다. 즉 풍수지리설의 사세(四勢)를 염두에 두었다. 사신도는 천장과 벽면에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6세기 이후 것으로 추정되는 사신도는 종교 사상적인 배치보다는 보안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고구려인이 고분 벽화에 사신을 그린 것은 주술적인 목적에서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이나 특히 현무처럼 뱀과 거북이 서로 엉킨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주작과 현무는 상대적으로 작고 어색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벽화 속에서 그 존재가 뚜렷하지 못한데 아마도 일종의 부적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四神과 五行說

고구려의 사신(四神)과 관계가 깊은 오행설(五行說)은 유교의 오륜(五倫)· 오상(五常)과도 관계가 깊다. 오행설은 자유정치이념의 정비와 정치구조의 개편, 지배이념의 강화 목적에 널리 활용되어왔다. 오행설의 기초가 된 오상(五常)의 덕치주의가 고구려에 수용되었다. 오행방위 개념은 고구려 정치제도 5부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정치제도에도 창조적으로 활용되었다. 그 한 예로 발해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정부 부서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고구려 고분벽화는 다음과 같은 사상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하겠다.

첫째, 고구려 고분벽화는 한민족의 역사적 신앙적 뿌리인 태양신 사상, 즉 ‘인격적인 유일신’ 사상을 표현했다. 물론 무속적인 다신교의 개념이 함께 들어 있지만 단군이나 고주몽을 천제지자(天帝之子)라 할 때의 천제는 인격적인 하느님이고 왕은 천제의 자손이므로 왕실의 조상신이다. 하느님은 해와 달로 표현되었지만 이 하느님은 자연현상의 이법(理法)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이며 왕실의 조상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고구려인이 인격적인 유일신을 섬겼다고 할 만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태양 안의 삼족오는 태양숭배 사상과 조류숭배 신앙이 동일화된 우주사상이라 하겠다. 세 발 까마귀는 고주몽이 햇빛을 받아 알에서 태어났다는 사상으로 해(日)와 알(鳥)은 우주사상의 표현이다. 이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그림이다.

고구려 태조 고주몽에 대한 신앙은 광명한 하늘에서 영원히 사는 영혼의 삶을 지향하고 고대 한국적인 종교행사를 거행함으로써 민족의 뿌리를 제시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동심도문의 둥근 무늬도 태양신 사상, 하느님 사상을 뒷받침한다.

중국의 천(天) 개념은 처음에는 인격적인 신(神) 개념(天帝)으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천륜(天倫), 천리(天理), 천공(天空)처럼 비인격적인 개념과 같이 쓰여지면서 오히려 비인격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고구려 王名의 유래

일본의 신(神) 개념은 처음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에서 볼 수 있듯 인격적인 면이 강했지만 팔백만신(八百萬神) 같은 다신교적인 신을 섬겼으며 천황마저 신으로 숭배하였다. 대체로 인간이 신보다 강한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무속의 다신교적인 면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단군이나 고주몽처럼 뿌리(근본)는 해이며 인격적인 유일신의 자손이라는 점과 비교할 때 그 의미가 훨씬 약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단군과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이라는 사상이 강했으며 고구려인은 그를 ‘하느님’으로 제사지내며 숭배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천손인 시조 동명왕과 더불어 그들도 천손이라는 믿음으로 초월적인 권력에 기초한 정치를 행했다. 그들은 왕인 동시에 종교행사를 하는 신인(神人)이라 하여 제사를 주관했던 것이다. 광명을 강조하고 신성한 왕권을 하늘로부터 받은 천손으로 하늘의 덕을 발휘한다 하여 왕명(王名)도 동명왕(東明王), 유리명왕(琉璃明王), 대무신왕(大武神王) 등으로 지었다. 그들이 지냈던 동맹제(東盟祭)는 신에 대한 감사제인 동시에 천손국(天孫國)으로서 단합하는 힘의 근원이 되었다.

고구려인은 고구려가 신국(神國)이라고 여겼으며 자신들은 하느님의 자손으로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했다. 이것은 곧 고구려인이 힘있게 단합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뿌리에 기초를 둔 사상은 신의 자손이라는 정신이 깃들여 있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고구려 고분 벽화는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이 죽으면 몸은 없어지지만 영혼은 하늘의 광명한 세상에서 영생한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 담겨 있었다. 조상을 후장(厚葬)하여 명계(冥界)에 가게 하면 신격화(神格化)된 조상이 그곳에서 후손을 잘 보살펴주리라고 믿는 사상이다. 고분의 벽면에도 사자(死者)의 생시(生時) 생활을 묘사한 그림들로 가득 채워놓았다는 것은 사후 세계에서도 현세의 그것과 같은 삶을 누릴 것이라는 계세적인 내세관(來世觀)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사후세계는 윤리적인 공덕과 선악에 의해 결정된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현세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사회적 지위나 부귀의 삶이 이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후의 영혼이 도달하는 곳은 고분 벽화의 ‘해 속의 까마귀’나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무덤에서 보듯이 광명의 신이 지배하는 빛의 하늘이었다. 고구려인은 하늘의 빛에서 생명을 얻었으니 죽은 다음에는 다시 자신들의 근원인 빛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늘의 세계를 광명의 세계, 그리고 아래 세상에 복을 베푸는 선신(善神)의 세계로 보는 것은 단군신화나 해모수 신화에 반영되었던 샤머니즘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화와 선비 사상

후에 불교가 수입된 후 연꽃으로 상징되는 불(佛)이나 정토생명을 화생(化生)하는 정토가 일월(日月)과 같은 밝은 빛의 존재로서 여기에 첨가되었고 또 하늘을 나는 신선의 장생불사 사상이 들어와 다 함께 조화되어 발전했다. 불교의 화연문은 불상의 광배(光背)와 닮은 삼각 화연문인데 고구려의 전통적인 태양빛의 표현인 고사리 같은 무늬가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식 화연문은 도솔천에 산다는 미륵의 전각 등 천상에 관련된 부분에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불국토 재생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여기에서 고구려인의 내세는 빛의 하늘과 불교에서 말하는 빛의 정토, 도교의 장생불사하는 신선세계 등이 조화되었다고 본다.

셋째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사상은 ‘조화사상’과 ‘선비사상’이다. 중국은 문(文)을 강조했고 일본은 무(武-사무라이)를 강조하였으며 고대 한국은 문무를 조화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한국의 이러한 사상은 화랑도의 ‘유불선’을 조화하는 현묘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중국으로부터 도교가 수입되기 이전에 그려진 것인 데도 이미 도교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도교의 근원이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는 학설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삼각연화문이 상징하는 불교의 극락세계와 도교의 우화선인(羽化仙人)이 한민족의 뿌리인 태양빛 사상에 흡수 조화되어 계세사상으로 발전해왔음을 고분 벽화를 통해 이해하여야 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종교사상은 한국 고유사상의 뿌리에 도교사상과 불교사상이 곁들여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곧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을 모두 조화시키면서 한국적인 특색을 가미시켜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권 문화의 원류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2012.03.22 18:00 연합뉴스 제공

北 고구려 벽화무덤 디지털복원 완료 – Sciencetimes

동북아역사재단은 북한 소재 고구려 벽화무덤 ‘안악3호분’에 대한 디지털 복원작업을 마쳤다고 22일 밝혔다.


지난해부터 복원작업을 벌여 최근 완료한 이 자료들은 웹 서비스용 데이터로 가공해 재단 홈페이지(http://contents.nahf.co.kr/gogurye)를 통해 공개한다.

이번에 디지털로 복원한 안악3호분은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석실봉토 벽화고분으로 고국원왕 대인 서기 357년에 만들어졌다. 회랑에 그려진 대규모 행렬도(行列圖)로 유명한 무덤이다.

▲ 디지털 자료로 복원한 안악3호분의 ‘묘주부인상’


벽화는 돌벽 위에 직접 그린 것이 대부분이며 벽화를 구성하는 주요 주제는 생활풍속도이다. 묘주부부 초상을 비롯해 대규모의 묘주행렬도, 주방장면을 그린 실내 생활도, 씨름 및 가무 장면, 문지기, 연꽃, 귀면 및 괴운문(怪雲紋) 등 갖가지 장식들이 어우러져 있다.

안악3호분 웹사이트에서는 무덤에 대한 소개와 홍보영상, 가상체험 VR(Virtual Reality)이 제공된다. 영어·일본어·중국어로도 제작해 외국인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정재정 재단 이사장은 “이번 안악3호분 디지털 복원과 더불어 2010년 이미 제작한 덕흥리 벽화무덤도 가상체험 VR을 3D 화면으로 다시 제작해 서비스할 예정”이라면서 “고구려 고분벽화 복원사업을 계속해 주변국의 고구려사 문제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고구려 고분벽화 3D 가상전시관 (nahf.or.kr)

 

고구려 고분벽화 3D 가상전시관

 

contents.nahf.or.kr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4-12-11 22:37

1500년의 미스터리를 소설처럼 풀다 (hani.co.kr)

고구려 고분 최고 권위자 전호태 교수
타임머신 탄듯 시대 넘나들며 비밀 탐구

기자신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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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환문총
전호태 지음
김영사·1만6000원

 

무용총, 각저총, 강서대묘, 안악3호분, 덕흥리 벽화분…. 널방과 천장고임에 벽화가 가득한 고구려 고분은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별자리, 사냥과 일상의 장면 등이 담긴 벽화는 1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인들의 삶을 읽어내고 그들의 내세관, 종교관, 우주관을 해석하는 장의미술이다.

 

중국 집안 고구려 무덤 환문총 벽화에는 정체 모를 겹둥근무늬 동심원들이 가득하다. 그 동심원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도 희미하게 비친다. 남겨진 벽화 아래 먼저 그려진 또 다른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120여기의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세부적인 표현을 일부 수정한 사례는 많다. 하지만 먼저 그린 그림 위에 석회를 바르고, 주제를 바꿔 전혀 다른 그림을 다시 그린 경우는 환문총이 유일하다. 더욱이 망자의 생전 생활상이나 내세인 조상신의 세계가 아닌 동심원을 가득 채웠다. 현재까지 그 이유는 비밀로 남아 있다.

<비밀의 문 환문총>은 그 미스터리의 해답을 찾아 1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전호태 울산대 교수(울산대박물관장)는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으며 축적한 성과를 이 책에 쏟아부었다. 환문총 미스터리를 고리 삼아 북한 남포의 강서대묘, 중국 집안의 무용총과 사신총 각저총 등 산재한 고분의 벽화 사진과 모사도는 물론 고분 조성 및 벽화 제작 방식, 발굴 기법 등에 관한 고고학적 지식을 종합적으로 풀어냈다. 또 고분이 조성될 당시인 4~6세기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싼 고구려와 북위, 송, 유연의 ‘4강’ 쟁탈전 속에서 전쟁포로나 노예로 팔려가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 불교 전파를 위해 고행의 길에 나선 승려들의 모습까지 두루 담아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서술 방식의 독특함이다. 지금껏 고구려 고분 벽화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고고학적 전문서적 성격이 강했다. 대중적인 것조차 벽화 그림을 따라가며 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비밀의 문 환문총>은 미스터리 소설 형식을 차용했다. 벽화가 제작됐을 4~6세기, 발굴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고분이 방치 훼손됐던 한국전쟁과 중국 문화혁명기까지 1500년의 역사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듯 넘나들며 각 시대마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벽화의 비밀을 풀어간다.

 

이야기는 1988년 여름 국립박물관 미술부의 신입 학예사 한인규에서 시작된다. 고구려 고분 환문총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인규는 논문과 박물관 특별전 때문에 좀체 연구에 집중할 엄두를 못 내는 그야말로 신입이다. 하지만 대학 선배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해 온 1960년대 후반 출간된 책 꾸러미 속에서 자신보다 먼저 환문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고태일 교수의 자료를 접하면서 환문총의 실체에 한발 한발 다가가는 설정이다.

1966~76년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을 피해 연길로 떠난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조선족 교사 이윤호와 한국전쟁 참전 동기 만대복의 회고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상황에 몰린 자신들이 대동강과 재령강, 중국 집안 일대에 산재한 고구려 벽화 무덤 속에서 추위와 미군의 폭격을 피하며 생존한 얘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실제 고분이 방치되고 훼손된 당시 현실도 담아낸다.

 

또 벽화 발굴에 참여했던 가상 인물 아즈마 다다시 등의 독백을 통해 일제 강점기 고분을 발굴 조사한 일본 관학자들의 모습과 당시 발굴에 동원된 조선인의 고뇌를 다룬다. 120여기의 고구려 벽화 가운데 널리 알려진 무용총, 각저총,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이 일제 강점기에 발굴된 것을 염두에 둔 설정이다.

책의 주제인 한 무덤에서 벽화의 내용이 완전히 뒤바뀐 환문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은이는 고구려의 요충지 북부여성을 지키는 성주 한보를 무덤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생전 생활상과 사후 조상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당시 보편적인 벽화와 새로 도래한 불교 사상을 벽화에 구현하려는 인물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통해 당시 종교관, 내세관, 우주관의 충돌을 포착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입력 2017.05.01 15:22

6세기 중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불상이 중국 베이징에서 확인됐다. 불신,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춘 완형의 고구려 불상은 이번 불상을 포함 4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 제공

 

6세기 중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금동불상이 중국 베이징에서 새로 발견됐다.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큰 데다 역대 발견된 금동불상 중 두 번째로 오래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국 사업가 A씨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구입한 불상이 고구려계 금동불입상”이라며 “10여 점밖에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 불상의 하나로 의의가 크다”고 1일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불상은 부처가 서 있는 입상이다. 높이 18㎝, 너비 8.6㎝ 크기다. 불신(부처의 몸), 광배(불상 뒤쪽의 배 모양 장식물), 연꽃 대좌(불상 받침대)를 두루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완형의 고구려 불상은 연가7년면금동불입상(539 또는 479),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563), 경4년명금동삼존불입상(571) 3구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부처 머리에 공처럼 생긴 둥근 육계(상투)가 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문 소장은 이러한 모양에서 불상의 이름을 ‘구형(球形)육계식금동불입상’이라고 붙였다. 가슴에 ‘V자’ 모양을 이루는 두터운 옷을 걸쳤고 왼쪽 손바닥은 펴서 아래로, 오른쪽 손바닥은 펴서 위로 올리고 있다. 육계와 옷과 손 모양이 고구려 불상의 전형적 특징이라는 점이 문 소장의 설명이다. 지난해 9월과 11월 베이징에서 이 불상을 직접 살펴 본 문 소장은 “연가7년명금동불입상과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고구려계 금동불입상의 진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제작연대가 확실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국내 불상은 국보 119호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이다. 광배 뒷면에 539년 고구려에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문 소장은 구형육계식금동불입상이 6세기 중반 고구려 불상의 변모과정을 보여주는 불상이라고 봤다. 기법과 양식 등을 따져볼 때 연가7년명불상에서 계미명불상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계미명불상과 상투 모양이 거의 똑같다는 점이 근거다. 또 부처 머리 뒤에 타원형으로 음각한 장식이 연가7년명불상에는 없던 것으로 계미명불상에서 보다 섬세한 양각 문양으로 발전했다고 문 소장은 설명했다. 그의 설명대로 이번 불상이 두 불상 사이에 조성됐다면 남아있는 고구려 불상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1924년 일본 오사카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당시 불상의 도록사진.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 제공

 

이번 불상은 1924년 11월 일본 오사카 미술전람회에 사흘간 출품된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도록에는 중국 ‘북위(北魏) 금동여래상’으로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대표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상회에 의해 1900년대 초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전해진다. 문 소장은 이번 연구 결과를 내달 학술지 ‘강좌미술사’에 게재할 예정이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日 국보가 된 '고구려 밤하늘'…천문도 특별 공개 (sbs.co.kr)

日 국보가 된 '고구려 밤하늘'…천문도 특별 공개

최선호 논설위원 작성 2015.11.07 21:09 수정 2015.11.07 21:27 조회 3,481

 

"https://news.sbs.co.kr/news/player.do?newsId=N1003255250&plink=SBSNEWS&cooper=SBSNEWSMAIN&cornerId="

 

 

<앵커> 8년째 복원작업이 진행 중인 일본의 국보, 다까마스 고분에서, 고구려의 밤하늘을 담은 천문도가 공개됐습니다. 1300년 전, 고구려에서 건너간 조상들이 일본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그 수수께끼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도쿄 최선호 특파원이 다녀왔습니다.

 

<기자> 일본 나라 현의 다카마쓰 고분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발견이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된 곳입니다. 보존을 위해 8년째 해체-복원 작업이 한창인데, 이번에 처음 공개된 석실 천장 앞에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점점이 금박으로 표현된, 1300년 전 천문도입니다. 북두칠성을 비롯한 28개 별자리가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마츠모토/특별공개 관람객 :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별자리가) 남아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입니다. 일본 도카이대 연구팀은 북위 38에서 39도, 즉 평양 밤하늘이라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 자취는 이뿐만 아닙니다. 도굴로 남쪽 주작은 사라졌지만, 현무, 청룡, 백호 사신도가 뚜렷하고, 색동 주름치마를 비롯한 여인의 복색은 고구려 쌍영총과 판박입니다. 동물이나 배 그림이 전부였던 일본 벽화에는 없던 채색입니다.

 

[다테이시/日 문화청 고분벽화조사관 : 관람객들이 한국(고구려) 문화재와 비교하면서 둘러보고 계십니다. 한국과 정보교환이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망명객, 이른바 도래인이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아직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죽어서도 고구려를 동경한 이 무덤의 주인은 1300년 전 이곳 아스카 지역의 왕족이나 귀족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영상취재 : 한철민)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55250&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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