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 (1) 고구려의 발흥 본문
고구려의 발흥
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신라 문무왕은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우고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았다”며 추모를 찬양했고,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공자를 반대한 후한시대 학자 왕충은 추모의 행적을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그가 기원전 58년에 출생해서 기원전 37년에 즉위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연도라서 신뢰할 수 없다. 추모는 해모수의 아들이므로 기원전 200년 북부여·동부여가 분립되던 시기에 출생했을 것이다. 위만과 동시대의 인물일 것이다.
그 이전, 아리라(송화강) 부근에 어떤 부자가 살았다. 그는 유화·훤화·위화라는 세 딸을 두었다. 다들 절세미인이었지만, 유화가 가장 수려했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놀러 나갔다가 유화를 보고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고 아이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은 귀족과 결혼하고 서민과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모수는 유화를 책임지지 않았다. 당시 서민이 서민과 결혼할 때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에게 예물을 드리고 사위가 되기를 두세 번 청한 뒤에야 결혼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머슴이 되어 3년의 고역을 다해야만 딴살림을 차리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유화의 임신이 발각되자 아버지는 대노했다. 그는 유화를 우발수에 던져 죽이려 했다. 이때 어부 하나가 유화를 구해 동부여왕인 금와에게 바쳤다. 금와는 유화의 미모에 빠져 후궁으로 들여 첩으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화가 아이를 낳았는데 해모수와 동침한 결과였다. 금와왕은 유화에게 따져 물었다. 유화는 햇빛에 감응하여 천신의 아들을 낳았을 뿐이며 자신은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믿지 않은 금와왕은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보기도 하고, 말에 밟혀 죽게 하려고 길에 던져보기도 하고, 산짐승의 밥이 되게 하려고 깊은 산에 버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 실패했다. 그는 결국 유화가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유화의 아이는 성장하면서 용기와 힘이 또래보다 뛰어났고 또 활쏘기가 기묘하여 따를 자가 없었다. 그래서 추모라고 이름을 붙였다. 《위서》에서는 추모를 주몽으로 표기하고, 주몽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풀이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오늘날의 만주어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고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주몽이라 하지 않고 추모라고 했고, 문무왕의 조서에서는 주몽이라 하지 않고 중모(中牟)라고 했다. 주몽이라 한 것은 중국사에서 전하는 것을 신라의 문인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다가 그대로 〈고구려 본기〉에 올렸기 때문이다. 추모나 중모는 조선말로는 ‘줌’ 혹은 ‘주무’로 읽어야 한다. 한편, 주몽은 ‘주물’로 읽어야 하는데 이는 예어(濊語) 즉 고대 만주족의 말이다. 중국사의 주몽은 예어를 적은 것이니 《만주원류고》에서 말한 바가 이치에 가장 가깝다. 이 책에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추모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에서 대소가 장남이었다. 대소는 추모의 자질을 시기하여 왕에게 추모를 죽일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추모는 항상 유화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했다. 열아홉 살이 된 추모는 왕실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되었다. 그는 말을 잘 먹여 살찌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고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은 날로 수척해졌다. 왕은 마구간의 말을 둘러보고 추모의 공로를 치하한 뒤, 비쩍 마른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빼고 잘 먹였다.
신수두의 10월 대제가 열리자, 추모는 말을 타고 나가 수렵에 참가했다. 왕은 추모에게 화살을 한 개밖에 안 주었다. 그러나 말도 잘 달리고 추모도 잘 쏜 덕분에, 추모가 잡은 것이 대소 7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배나 되었다. 추모를 더욱 더 시기하게 된 대소는 살해 음모를 한층 더 서둘렀다. 이를 알아차린 추모는 예씨와 결혼하여 가정생활의 편안함에 빠진 것처럼 위장했다. 동시에 오이·마리·협보 3인과 몰래 공모한 뒤, 비밀리에 어머니 유화에게 하직하고 부인을 버려두고 졸본부여로 도망했다. 이때 추모의 나이는 22세였다.
졸본부여1)에 도착하니, 소서노란 미인이 있었다. 그곳 부호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하고 해부루왕의 서손(庶孫)2)인 우태의 부인이 되어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가 죽은 뒤에는 과부로 살았다. 추모가 갔을 때 그는 37세였다. 소서노와 추모는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추모는 소서노의 재산을 기반으로 명장 부분노 등을 불러 모아 민심을 모으고 왕업을 세웠다. 그는 흘승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가우리라 했다. 가우리를 이두자로 쓰면 ‘고구려’다. 가우리의 뜻은 중경(中京) 혹은 중국(中國)이었다.
추모는 졸본부여의 왕 송양과 활쏘기를 겨뤄 승리했다. 그런 뒤 부분노를 보내 무기고를 습격하고 탈취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또 인근의 예족을 쫓아내고 주민들의 위험을 제거했다. 오이·부분노 등을 보내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위치 미상)을 멸망시켜 성읍으로 삼고, 부위염을 보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를 탈취했다. 광개토왕비문에서 “동부여는 예전에 추모왕의 속국이었다”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로써 고구려의 기초가 세워졌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송양을 국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 편에 인용된 〈구(舊)삼국사〉에서 ‘비류왕 송양’이라 했으므로, 비류는 부여 즉 졸본부여를 가리키고 송양은 국명이 아니라 왕의 이름을 가리킨다. 추모가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했고 왕의 아들이 없어서 추모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졸본부여의 공주 즉 송양의 딸과 결혼한 것은 추모의 아들인 유류(儒留)였다. 추모가 결혼한 상대방은 소서노이지 졸본부여의 공주가 아니었다.
〈고구려 본기〉에서 추모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불렀지만, 동명은 이름이 아니다. 동명은 ‘한몽’으로 읽어야 한다. 한몽은 신수두 대제의 명칭이다. 신수두 대제에서 제사를 주관한다고 해서 한몽 즉 동명이란 호를 올린 것이다. 동명성왕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이다.
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에 이어 아들 유류왕이 등극하고, 유류왕에 이어 아들 대주류왕이 등극했다. 유류는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의 유리(類利)다. 유류·유리(琉璃)·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어야 하는데, 세(世)란 뜻이고 명(明)이란 뜻이다. 대주류왕은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이다. 무(武)·주류(朱留)·무휼은 다 ‘무뢰’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우박 혹은 신(神)이란 뜻이다. 유리(琉璃)와 명(明)을 시호로 이해해서 유리명왕이라고 하고 유리(類利)를 이름으로 이해한 것은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또 무(武)와 신(神)을 시호로 이해해서 대무신왕이라고 하고, 무휼을 이름으로 이해한 것 역시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여기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유리(琉璃)·대무신을 유류·대주류로 쓰기로 한다.
유류왕 때는 동부여가 강성했다. 그래서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왕이 고구려에 신하의 예를 요구하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강요했다. 유류왕은 이를 따르려다가 두 태자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첫 번째 태자는 도절이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에 인질로 보내려 하자, 도절은 이를 거부했다. 유류왕은 진노했고, 도절은 근심과 울분으로 병사했다. 두 번째 태자는 해명이었다. 해명은 남들보다 대담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지금의 집안현인 국내성으로 천도하자, 해명은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황룡국왕 즉 북부여왕이 해명에게 강궁(强弓)을 주고 용력을 시험하려 하자, 해명은 즉석에서 강궁을 부러뜨림으로써 북부여인들의 약한 체력을 조소했다. 이 사실을 들은 유류왕은 ‘해명은 장차 국가를 위태롭게 할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명을 북부여에 보내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 했다. 그러나 해명을 경애한 북부여왕은 그를 후대하고 돌려보냈다. 더욱 더 분개한 유류왕은 해명에게 검을 주고 자살을 강요했다. 두 태자가 죽은 것은 궁궐 내 처첩 간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부여와의 외교적 문제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유류왕이 동부여에 대해 공포심을 갖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동부여왕 대소는 수차례에 걸쳐 수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쳤다. 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로써 고구려를 곤경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동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재촉하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의 편지를 사신 편에 보냈다. 왕자인 주류(〈고구려 본기〉의 무휼)는 나이는 어렸지만, 죽은 형인 해명처럼 기개가 대단했다. 그는 부왕의 비굴함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왕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꾸며서, 동부여의 사신을 보고 옛날에 금와가 추모왕에게 말을 관리하는 일이나 맡기고 대소가 추모왕을 해하려 한 일을 열거한 뒤 동부여왕과 신하들의 교만을 꾸짖고는 사신을 내쫓았다. 이를 전해들은 대소왕이 격노하여 대군을 동원해 침입하자,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생겼다며 격노했다. 하지만 다 늙은 나이에 도절이나 해명 때처럼 왕자를 또다시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모든 병력을 주류에게 주고 출전을 명령했다.
주류는 ‘동부여는 병력이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기병이고 고구려는 보병이므로, 소수의 보병이 다수의 기병을 상대로 평원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동부여 군대가 지나갈 학반령 골짜기에 병력을 숨기고 동부여 군대를 기습했다. 골짜기 길이 험해 기병에게 불편했으므로, 동부여 군대는 말을 버리고 모두 산 위로 올라갔다. 이에 주류는 군사를 몰아 전군을 섬멸하고 말을 많이 빼앗았다. 이 전쟁에서 동부여 정예군이 크게 당한 탓에, 동부여는 두 번 다시 고구려와 겨룰 수 없게 됐다. 전쟁이 끝나자 유류왕은 크게 기뻐하여, 주류를 태자로 책봉하고 군사 대권을 맡겼다.
3)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 전투에서 동부여를 대파하고 유류왕을 계승한 지 4년 만에 5만의 북벌 군사를 일으켜 동부여를 침입했다. 가는 도중에 그는 창술이 뛰어난 마로와 검술이 뛰어난 괴유를 얻어 길잡이로 삼아 가시라 남쪽에 이르러 개펄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은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 진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말발굽이 진흙에 빠지자, 괴유가 달려들어 대소왕의 목을 벴다.
대소왕을 잃은 동부여인들은 한층 더 분발했다. 동부여 병사들은 왕의 원수를 갚고자 앞 다투어 달려들어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했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다치고, 고구려군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대주류왕은 몇 차례나 치고나가려 했지만 어찌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7일간이나 포위당했다. 때마침 큰 안개가 피어나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대주류왕은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진영에 놔두고 잔병들과 함께 샛길로 도망하여 이물촌에 당도했다. 모든 군사들이 배고프고 피로해서 움직이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했다.
이 전쟁은 동부여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 왕의 사촌형제들이 왕위를 다투는 바람에 동부여가 혼란스러워졌다. 막내 사촌동생인 모갑(某甲)은 부하 100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남옥저)로 가서 사냥 나온 해두왕을 기습해 살해하고, 그 병력을 모아 남가시라 전부를 평정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남동부여다. 또 다른 사촌동생인 모을은 기존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북동부여다. 그러나 여러 동생들이 공격하자, 그는 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이렇게 대주류왕은 북동부여 전부를 차지했지만, 국호만큼은 계속 남겨두었다. 역사서에 나오는 갈사국은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북동부여다. 《후한서》나 《삼국지》 등의 〈옥저 열전〉에 나오는 불내예(不耐濊)는 북동부여이고, 〈예(濊) 열전〉에 나오는 불내예는 남동부여다.
4)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
최씨가 남낙랑을 근거로 낙랑왕을 칭했다는 사실은 제3편 제4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말조선에서 서술했다. 남낙랑의 마지막 왕인 최리는 대주류왕이 북동부여를 정복할 당시의 낙랑국의 왕이다. 고구려를 두려워한 최리는 예쁜 딸을 앞세워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그 전에, 갈사국(남동부여) 왕이 미모의 손녀를 대주류왕에게 후궁으로 바쳤다. 거기서 생겨난 아들이 얼굴이 기묘하고 풍모가 수려하다고 하여 호동(好童)이라고 불렸다. 한번은 호동이 외가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됐다. 이때 최리가 외출했다가 호동을 만나자 “그대 얼굴을 보니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인 호동이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최리는 호동을 궁으로 데려가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이것을 울려 속국의 군대를 소집했다. 호동은 아내 최씨에게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면, 북과 나팔을 없애라”고 말하고 귀국한 뒤, 대주류왕을 움직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 보니, 조각조각 부서져 사용할 수 없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않으니, 속국의 구원병이 어찌 올 수 있으리오. 최리는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 항복했다.
이렇게 호동이 큰 공을 세우자, 왕후는 그가 태자가 될까봐 “호동이 나를 강간하려 했다”며 대주류왕에게 무고했다. 이 때문에 호동은 자살했다. 한 쌍의 선남선녀가 동일한 비극을 당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대주류왕 4년 4월(21년 5월 1일~5월 30일_옮긴이)에 대소의 사촌동생이 갈사왕(남동부여왕)이 되었고, 대주류왕 즉위 15년 4월(32년 4월 29일~5월 28일_옮긴이)에 호동이 최리의 사위가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32년 12월 21일~33년 1월 19일_옮긴이)에 호동이 왕후의 참언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갈사왕이 있은 뒤에 대주류왕이 그 손녀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뒤에 그 손녀가 호동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대주류왕 4년 4월 즉 갈사국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와 결혼했고 그 달에 태기가 있어 다음 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대주류왕 15년에 호동은 많아봤자 겨우 열한 살이다.
열한 살짜리가 어떻게 남의 서방이 되고 아내를 꾀어 일국을 멸망시킬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랴. 또 열한 살짜리가 어떻게 큰어머니 강간의 혐의로 부왕의 의심을 받아 자살까지 할 수 있으랴. 동부여는 원래 북갈사에 도읍을 두었으니, 여기 나오는 갈사왕이 분립 이전의 동부여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은 대소왕 시대의 일이 된다. 대소왕이 대주류에게 딸을 주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모순이 생긴 것은,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삭감하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겼기 때문이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대주류왕 20년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고 했다. 따라서 똑같은 낙랑을 이전에 멸망시켰을 리 없으므로, 호동의 결혼과 자살은 대주류왕 20년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북부여·북동부여·고구려 삼국은 모두 신조선의 옛 땅에서 흥기한 나라들이다.(1)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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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명림답부의 집권과 외정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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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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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이념은 中에 뺏긴 조선회복˝ (breaknews.com)박병식2007/12/18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022656131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 중앙일보 (joongang.co.kr)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사실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1/28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고구려가 장안을 점령한 것은 장수태왕초기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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