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1) - 고구려의 발흥 본문
고구려의 발흥
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신라 문무왕은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우고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았다”며 추모를 찬양했고,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공자를 반대한 후한시대 학자 왕충은 추모의 행적을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그가 기원전 58년에 출생해서 기원전 37년에 즉위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연도라서 신뢰할 수 없다. 추모는 해모수의 아들이므로 기원전 200년 북부여·동부여가 분립되던 시기에 출생했을 것이다. 위만과 동시대의 인물일 것이다.
그 이전, 아리라(송화강) 부근에 어떤 부자가 살았다. 그는 유화·훤화·위화라는 세 딸을 두었다. 다들 절세미인이었지만, 유화가 가장 수려했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놀러 나갔다가 유화를 보고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고 아이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은 귀족과 결혼하고 서민과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모수는 유화를 책임지지 않았다. 당시 서민이 서민과 결혼할 때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에게 예물을 드리고 사위가 되기를 두세 번 청한 뒤에야 결혼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머슴이 되어 3년의 고역을 다해야만 딴살림을 차리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유화의 임신이 발각되자 아버지는 대노했다. 그는 유화를 우발수에 던져 죽이려 했다. 이때 어부 하나가 유화를 구해 동부여왕인 금와에게 바쳤다. 금와는 유화의 미모에 빠져 후궁으로 들여 첩으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화가 아이를 낳았는데 해모수와 동침한 결과였다. 금와왕은 유화에게 따져 물었다. 유화는 햇빛에 감응하여 천신의 아들을 낳았을 뿐이며 자신은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믿지 않은 금와왕은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보기도 하고, 말에 밟혀 죽게 하려고 길에 던져보기도 하고, 산짐승의 밥이 되게 하려고 깊은 산에 버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 실패했다. 그는 결국 유화가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유화의 아이는 성장하면서 용기와 힘이 또래보다 뛰어났고 또 활쏘기가 기묘하여 따를 자가 없었다. 그래서 추모라고 이름을 붙였다. 《위서》에서는 추모를 주몽으로 표기하고, 주몽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풀이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오늘날의 만주어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고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주몽이라 하지 않고 추모라고 했고, 문무왕의 조서에서는 주몽이라 하지 않고 중모(中牟)라고 했다. 주몽이라 한 것은 중국사에서 전하는 것을 신라의 문인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다가 그대로 〈고구려 본기〉에 올렸기 때문이다. 추모나 중모는 조선말로는 ‘줌’ 혹은 ‘주무’로 읽어야 한다. 한편, 주몽은 ‘주물’로 읽어야 하는데 이는 예어(濊語) 즉 고대 만주족의 말이다. 중국사의 주몽은 예어를 적은 것이니 《만주원류고》에서 말한 바가 이치에 가장 가깝다. 이 책에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추모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에서 대소가 장남이었다. 대소는 추모의 자질을 시기하여 왕에게 추모를 죽일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추모는 항상 유화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했다. 열아홉 살이 된 추모는 왕실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되었다. 그는 말을 잘 먹여 살찌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고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은 날로 수척해졌다. 왕은 마구간의 말을 둘러보고 추모의 공로를 치하한 뒤, 비쩍 마른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빼고 잘 먹였다.
신수두의 10월 대제가 열리자, 추모는 말을 타고 나가 수렵에 참가했다. 왕은 추모에게 화살을 한 개밖에 안 주었다. 그러나 말도 잘 달리고 추모도 잘 쏜 덕분에, 추모가 잡은 것이 대소 7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배나 되었다. 추모를 더욱 더 시기하게 된 대소는 살해 음모를 한층 더 서둘렀다. 이를 알아차린 추모는 예씨와 결혼하여 가정생활의 편안함에 빠진 것처럼 위장했다. 동시에 오이·마리·협보 3인과 몰래 공모한 뒤, 비밀리에 어머니 유화에게 하직하고 부인을 버려두고 졸본부여로 도망했다. 이때 추모의 나이는 22세였다.
졸본부여1)에 도착하니, 소서노란 미인이 있었다. 그곳 부호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하고 해부루왕의 서손(庶孫)2)인 우태의 부인이 되어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가 죽은 뒤에는 과부로 살았다. 추모가 갔을 때 그는 37세였다. 소서노와 추모는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추모는 소서노의 재산을 기반으로 명장 부분노 등을 불러 모아 민심을 모으고 왕업을 세웠다. 그는 흘승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가우리라 했다. 가우리를 이두자로 쓰면 ‘고구려’다. 가우리의 뜻은 중경(中京) 혹은 중국(中國)이었다.
추모는 졸본부여의 왕 송양과 활쏘기를 겨뤄 승리했다. 그런 뒤 부분노를 보내 무기고를 습격하고 탈취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또 인근의 예족을 쫓아내고 주민들의 위험을 제거했다. 오이·부분노 등을 보내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위치 미상)을 멸망시켜 성읍으로 삼고, 부위염을 보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를 탈취했다. 광개토왕비문에서 “동부여는 예전에 추모왕의 속국이었다”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로써 고구려의 기초가 세워졌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송양을 국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 편에 인용된 〈구(舊)삼국사〉에서 ‘비류왕 송양’이라 했으므로, 비류는 부여 즉 졸본부여를 가리키고 송양은 국명이 아니라 왕의 이름을 가리킨다. 추모가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했고 왕의 아들이 없어서 추모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졸본부여의 공주 즉 송양의 딸과 결혼한 것은 추모의 아들인 유류(儒留)였다. 추모가 결혼한 상대방은 소서노이지 졸본부여의 공주가 아니었다.
〈고구려 본기〉에서 추모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불렀지만, 동명은 이름이 아니다. 동명은 ‘한몽’으로 읽어야 한다. 한몽은 신수두 대제의 명칭이다. 신수두 대제에서 제사를 주관한다고 해서 한몽 즉 동명이란 호를 올린 것이다. 동명성왕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이다.
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에 이어 아들 유류왕이 등극하고, 유류왕에 이어 아들 대주류왕이 등극했다. 유류는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의 유리(類利)다. 유류·유리(琉璃)·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어야 하는데, 세(世)란 뜻이고 명(明)이란 뜻이다. 대주류왕은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이다. 무(武)·주류(朱留)·무휼은 다 ‘무뢰’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우박 혹은 신(神)이란 뜻이다. 유리(琉璃)와 명(明)을 시호로 이해해서 유리명왕이라고 하고 유리(類利)를 이름으로 이해한 것은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또 무(武)와 신(神)을 시호로 이해해서 대무신왕이라고 하고, 무휼을 이름으로 이해한 것 역시 〈고구려 본기〉의 잘못이다. 여기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라 유리(琉璃)·대무신을 유류·대주류로 쓰기로 한다.
유류왕 때는 동부여가 강성했다. 그래서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왕이 고구려에 신하의 예를 요구하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강요했다. 유류왕은 이를 따르려다가 두 태자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첫 번째 태자는 도절이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에 인질로 보내려 하자, 도절은 이를 거부했다. 유류왕은 진노했고, 도절은 근심과 울분으로 병사했다. 두 번째 태자는 해명이었다. 해명은 남들보다 대담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지금의 집안현인 국내성으로 천도하자, 해명은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황룡국왕 즉 북부여왕이 해명에게 강궁(强弓)을 주고 용력을 시험하려 하자, 해명은 즉석에서 강궁을 부러뜨림으로써 북부여인들의 약한 체력을 조소했다. 이 사실을 들은 유류왕은 ‘해명은 장차 국가를 위태롭게 할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명을 북부여에 보내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 했다. 그러나 해명을 경애한 북부여왕은 그를 후대하고 돌려보냈다. 더욱 더 분개한 유류왕은 해명에게 검을 주고 자살을 강요했다. 두 태자가 죽은 것은 궁궐 내 처첩 간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부여와의 외교적 문제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유류왕이 동부여에 대해 공포심을 갖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동부여왕 대소는 수차례에 걸쳐 수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쳤다. 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로써 고구려를 곤경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동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재촉하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의 편지를 사신 편에 보냈다. 왕자인 주류(〈고구려 본기〉의 무휼)는 나이는 어렸지만, 죽은 형인 해명처럼 기개가 대단했다. 그는 부왕의 비굴함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왕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꾸며서, 동부여의 사신을 보고 옛날에 금와가 추모왕에게 말을 관리하는 일이나 맡기고 대소가 추모왕을 해하려 한 일을 열거한 뒤 동부여왕과 신하들의 교만을 꾸짖고는 사신을 내쫓았다. 이를 전해들은 대소왕이 격노하여 대군을 동원해 침입하자,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생겼다며 격노했다. 하지만 다 늙은 나이에 도절이나 해명 때처럼 왕자를 또다시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모든 병력을 주류에게 주고 출전을 명령했다.
주류는 ‘동부여는 병력이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기병이고 고구려는 보병이므로, 소수의 보병이 다수의 기병을 상대로 평원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동부여 군대가 지나갈 학반령 골짜기에 병력을 숨기고 동부여 군대를 기습했다. 골짜기 길이 험해 기병에게 불편했으므로, 동부여 군대는 말을 버리고 모두 산 위로 올라갔다. 이에 주류는 군사를 몰아 전군을 섬멸하고 말을 많이 빼앗았다. 이 전쟁에서 동부여 정예군이 크게 당한 탓에, 동부여는 두 번 다시 고구려와 겨룰 수 없게 됐다. 전쟁이 끝나자 유류왕은 크게 기뻐하여, 주류를 태자로 책봉하고 군사 대권을 맡겼다.
3)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 전투에서 동부여를 대파하고 유류왕을 계승한 지 4년 만에 5만의 북벌 군사를 일으켜 동부여를 침입했다. 가는 도중에 그는 창술이 뛰어난 마로와 검술이 뛰어난 괴유를 얻어 길잡이로 삼아 가시라 남쪽에 이르러 개펄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은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 진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말발굽이 진흙에 빠지자, 괴유가 달려들어 대소왕의 목을 벴다.
대소왕을 잃은 동부여인들은 한층 더 분발했다. 동부여 병사들은 왕의 원수를 갚고자 앞 다투어 달려들어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했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다치고, 고구려군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대주류왕은 몇 차례나 치고나가려 했지만 어찌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7일간이나 포위당했다. 때마침 큰 안개가 피어나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대주류왕은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진영에 놔두고 잔병들과 함께 샛길로 도망하여 이물촌에 당도했다. 모든 군사들이 배고프고 피로해서 움직이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했다.
이 전쟁은 동부여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 왕의 사촌형제들이 왕위를 다투는 바람에 동부여가 혼란스러워졌다. 막내 사촌동생인 모갑(某甲)은 부하 100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남옥저)로 가서 사냥 나온 해두왕을 기습해 살해하고, 그 병력을 모아 남가시라 전부를 평정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남동부여다. 또 다른 사촌동생인 모을은 기존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북동부여다. 그러나 여러 동생들이 공격하자, 그는 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이렇게 대주류왕은 북동부여 전부를 차지했지만, 국호만큼은 계속 남겨두었다. 역사서에 나오는 갈사국은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북동부여다. 《후한서》나 《삼국지》 등의 〈옥저 열전〉에 나오는 불내예(不耐濊)는 북동부여이고, 〈예(濊) 열전〉에 나오는 불내예는 남동부여다.
4)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
최씨가 남낙랑을 근거로 낙랑왕을 칭했다는 사실은 제3편 제4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말조선에서 서술했다. 남낙랑의 마지막 왕인 최리는 대주류왕이 북동부여를 정복할 당시의 낙랑국의 왕이다. 고구려를 두려워한 최리는 예쁜 딸을 앞세워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그 전에, 갈사국(남동부여) 왕이 미모의 손녀를 대주류왕에게 후궁으로 바쳤다. 거기서 생겨난 아들이 얼굴이 기묘하고 풍모가 수려하다고 하여 호동(好童)이라고 불렸다. 한번은 호동이 외가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됐다. 이때 최리가 외출했다가 호동을 만나자 “그대 얼굴을 보니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인 호동이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최리는 호동을 궁으로 데려가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이것을 울려 속국의 군대를 소집했다. 호동은 아내 최씨에게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면, 북과 나팔을 없애라”고 말하고 귀국한 뒤, 대주류왕을 움직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 보니, 조각조각 부서져 사용할 수 없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않으니, 속국의 구원병이 어찌 올 수 있으리오. 최리는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 항복했다.
이렇게 호동이 큰 공을 세우자, 왕후는 그가 태자가 될까봐 “호동이 나를 강간하려 했다”며 대주류왕에게 무고했다. 이 때문에 호동은 자살했다. 한 쌍의 선남선녀가 동일한 비극을 당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대주류왕 4년 4월(21년 5월 1일~5월 30일_옮긴이)에 대소의 사촌동생이 갈사왕(남동부여왕)이 되었고, 대주류왕 즉위 15년 4월(32년 4월 29일~5월 28일_옮긴이)에 호동이 최리의 사위가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32년 12월 21일~33년 1월 19일_옮긴이)에 호동이 왕후의 참언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갈사왕이 있은 뒤에 대주류왕이 그 손녀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뒤에 그 손녀가 호동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대주류왕 4년 4월 즉 갈사국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와 결혼했고 그 달에 태기가 있어 다음 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대주류왕 15년에 호동은 많아봤자 겨우 열한 살이다.
열한 살짜리가 어떻게 남의 서방이 되고 아내를 꾀어 일국을 멸망시킬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랴. 또 열한 살짜리가 어떻게 큰어머니 강간의 혐의로 부왕의 의심을 받아 자살까지 할 수 있으랴. 동부여는 원래 북갈사에 도읍을 두었으니, 여기 나오는 갈사왕이 분립 이전의 동부여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은 대소왕 시대의 일이 된다. 대소왕이 대주류에게 딸을 주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모순이 생긴 것은,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삭감하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겼기 때문이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대주류왕 20년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고 했다. 따라서 똑같은 낙랑을 이전에 멸망시켰을 리 없으므로, 호동의 결혼과 자살은 대주류왕 20년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북부여·북동부여·고구려 삼국은 모두 신조선의 옛 땅에서 흥기한 나라들이다.(1)
명림답부의 집권과 외정
차대왕을 죽인 명림답부는 차대왕 시대에 박해를 피해 산속에 숨어 있었던 백고(신대왕)를 왕으로 세웠다. 또 사면령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인 추안을 용서하고 양국군(讓國君)에 책봉하는 한편, 차대왕 때의 가혹한 형법을 폐지했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했다. ‘신가’가 되어 군국 대소사를 통할한 명림답부는 팔치와 발치를 겸직하고 예(濊)·양(梁) 같은 맥족의 부장들을 통솔했다. 그 위엄은 태조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했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명림답부가 국상(國相)으로서 패자(沛者)를 겸했다”고 하고, “좌·우보를 국상으로 바꾼 것이 이때가 시초였다”고 한다. 이것은 국상이 곧 신가라는 점, 패자가 팔치 즉 좌보라는 점을 모르고 건방지게 내린 해설이다.
태조 때 한나라가 요동을 지금의 난주로 옮겨 설치했다는 점은 이미 설명했다. 서기 169년에 한나라는 요동을 회복하고자 경림(耿臨)을 현도태수에 임명하고 대대적으로 침입했다. 명림답부는 신하들과 함께 신대왕의 어전에서 회의를 열고 공격과 수비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은지를 논의했다. 이때 다들 나가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명림답부는 “우리는 군사는 적지만 험난한 지형을 갖고 있고, 한나라는 군사는 많지만 군량미 수송의 어려움이 있다. 처음에는 수비를 하면서 한나라 병력을 약화시킨 뒤에 싸우러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백전백승의 방략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선 수비, 후 공격’으로 책략을 정하고, 인민과 양곡과 가축을 성이나 산성에 모으고 수비에 치중하도록 각 지방에 명령했다.
한나라 군대는 침략한 지 수개월이 되도록 약탈을 해봐도 소득이 없고 공격을 해봐도 소득이 없었다. 군량미가 다해 굶주리게 되니, 결국 군대를 되돌리게 됐다. 이를 명림답부가 좌원(坐原)까지 추격하니, 한나라 군대는 한 명의 사람도, 한 필의 말도 돌아갈 수 없었다. 명림답부는 한나라 침략군을 격파한 뒤 강토를 개척하고자, 선비족 명군(名君)인 단석괴를 끌어들여 유주·병주 즉 지금의 직예·산서 두 성(省)을 공격하도록 하고, 뒤이어 고구려 병력으로 한나라를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병으로 죽었다. 나이 113세였다. 신대왕이 직접 조문하고 통곡했으며 왕의 장례에 걸맞은 예법으로 묻어주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신대왕 4년(168년) 기사에서는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하여 우리 병사 수백 명을 살상하자, 왕이 항복하고 현도에 복속하기를 청했다”고 했고, 5년(169년) 기사에서는 “왕이 주부(主簿)인 연인과 대가인 우거를 보내 ······ 요동태수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치도록 했다”고 했고, 8년(172년) 기사에서는 “한나라가 대군으로써 우리를 향하므로, ······ 명림답부가 좌원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한나라 군대에서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는 《후한서》 및 《삼국지》에서, 뒤의 것은 우리나라의 《고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략(朝鮮史略)》에서는 “신대왕 5년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자 ······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대파하여 ······”라고 했다. 이것은 《후한서》에서 “건령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이 나라를 치고 수백 명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고 현도군에 복속하기를 청했다”고 한 것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이것을 보면,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배한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이것을 두 개의 사실로 오인해서 앞의 것은 신대왕 4년 기사에, 뒤의 것은 신대왕 8년 기사에 넣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탁은 한나라 헌제 때인 영평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다. 영평 원년은 서기 190년이며 신대왕 5년으로부터 약 20년 뒤다. 신대왕이 20년 뒤에 요동태수가 될 공손탁을 도울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김부식이 〈고구려 본기〉 신대왕 편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패주한 경림이 대첩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공손탁을 신대왕의 종주국 군주로 기록했으니, 이런 점을 통해 중국 역사서에 조작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동국통감》에서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하다가 명립답부에게 패한 일을 신대왕 8년 때 사건으로 기록함으로써 《조선사략》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 초엽에는 《삼국사기》 외에 《삼한고기》·《해동고기》 등의 책들이 더러 있었다. 연도가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기(古記)들 간에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2)
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이 안류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안류는 “저의 재능으로는 대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처사(處士)인 을파소를 천거했다.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이다. 고금의 정치에 밝고 민간의 사정을 잘 알며 학식이 풍부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초야에 묻혀 밭을 갈고 살았으며,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 고국천왕은 겸손한 말과 극진한 예로 맞이하고 스승의 예로 대했다. 왕은 그에게 ‘일치’라는 작위를 주고 가르침을 청했다. 을파소는 벼슬과 작위로 인해 오히려 포부를 펼 수 없다면서 고사했다. 그는 왕에게 새로이 인재를 뽑아 높은 지위를 주고 대업을 성취하시라고 말했다. 속뜻을 알아차린 왕은 을파소를 ‘신가’에 임명하고 백관의 위에서 국정을 처리하도록 했다.
초야의 한미한 처사였던 을파소가 하루아침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시기한 신하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비난이 자자했다. 그러자 왕은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하겠다”면서 을파소에 대한 신임을 한층 더 강력하게 나타냈다. 뜻이 맞는 임금을 만난 것에 감격한 을파소는 지극정성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상벌을 신중히 처리하고 법령을 엄격히 하니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고구려 900년 역사에서 최고의 재상으로 불리게 됐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고국천왕(혹은 국양)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이니, 신대왕인 백고의 둘째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장남인 발기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이이모(伊夷謨, 《위지》에서는 ‘謨’가 아니라 ‘模’_옮긴이)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헌제 때인 건안 초에 발기는 형인 자기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 《위지》에서는 ‘消’가 아니라 ‘涓’_옮긴이)와 더불어 각각 하호(下戶, 가난한 서민층_옮긴이) 3만여 명을 데리고 공손강에게 항복하고 비류수 상류로 돌아와 정착했다”라고 했다. 김부식은 이 내용을 《삼국지》 〈고구려 열전〉에서 옮겨 왔다. 그런데 발기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산상왕 편의 발기이고 이이모는 산상왕 연우다.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연우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기록했음을 알지 못한 김씨는 고국천왕 남무가 이이모이자 발기의 동생이라고 기록하는 오류를 범했다. 《삼국지》 〈공손탁 열전〉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탁이 한나라 헌제 때인 초평 원년에 요동태수가 되었다. 그가 건안 9년에 사망하자, 공손강이 지위를 승계했다. 한나라 헌제 때인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이다. 고국천왕의 집권 초기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아버지 공손탁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김씨는 이것을 고국천왕 재위 원년의 사건으로 잘못 기록했다. 앞에서 소개한 “공손탁을 도와 부산의 적을 치도록 했다”는 신대왕 5년 기사와 함께 고려해보면, 김씨는 공손탁이 어느 시대 사람인 줄 몰랐던 것 같다. 이것은 기괴한 일이다.1) (3)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서기 197년 발기의 반란 이후부터 서기 370년 고국원왕의 말년까지는 고구려의 중쇠시대였다. 하지만 미천왕 시대는 이 시기에서 가장 나은 시기였다.
필자는 예전에 환인현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의 문인이자 만주족인 왕자평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고구려 때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다. 신분이 낮을 때에 처지가 불우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하면서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다.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을 우굴로(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고 하는 것은 그 대왕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렇게 걸식할 정도로 곤궁하면서도 대왕은 요동을 경영할 뜻을 늘 품고 살았다. 그래서 요동 각지에서 걸식할 때에, 산천의 형세와 도로의 원근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갖고 다니며 길가에 뿌렸다. 자신이 다닌 길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도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는 을불뿐이므로,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의 소싯적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천왕은 서기 300년부터 331년까지 31년간 재위한 제왕이다. 그 31년간의 역사는 선비족 모용씨와 혈전을 벌인 역사다. 축소된 〈고구려 본기〉와 과장된 《진서》를 종합한 뒤 그중에서 진실에 가까운 것을 골라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군의 회복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 또다시 한나라의 소유가 됐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했다. 즉위한 이듬해에 현도군을 공격한 미천왕은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에 옮기고, 재위 16년에 마침내 현도성을 점령했다.
2) 낙랑군의 회복
한무제 때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은 대대로 이동이 매우 잦았다. 대체로 요동 땅에 잠정적으로 설치한 것으로서,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에 나오듯, 위나라 군대가 낙랑으로 물러날 때에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위나라·진(晋)나라의 낙랑태수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국의 낙랑이 조선의 평양인 남낙랑이었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인 동시에 중국 낙랑군의 군청 소재지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모순적인 역사적 사실이 있었겠는가.
미천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은 재위 14년째인 서기 313년1)이었다. 당시 진나라 사람인 장통이 낙랑·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에 잠정적으로 설치된 군이다. 장단이나 봉산의 ‘대방국’과는 다르다)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미천왕이 장통을 공격하자, 항거할 힘이 없는 장통은 모용외의 부장인 낙랑왕 모용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모용준은 구원하러 나왔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용준은 장통을 꾀어 천여 호의 민가를 데리고 모용외에게 투항하도록 했다. 이에 모용외는 류성(柳城) 즉 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에 임명했다. 한편,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가 됐다.
3) 요동 승전
요동군청 소재지는 양평 즉 지금의 요양이었다. 《진서》에서는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배하자 화친을 구걸했다”고 했지만, 《양서》에서는 “을불이 요동을 자주 침략했다. 모용외가 막을 수 없었다”라고 하여 모용외가 미천왕에게 항상 패배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두 기록이 상호 모순된다.
《진서》는 당태종 때 지어진 책이다. 당태종은 요동이 중국의 요동이었던 것처럼 위조함으로써 자국 신민(臣民)을 고무하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 열기를 일으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이전 왕조의 역사서인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등에 적힌 조선 관련 기사, 특히 고구려 관련 기사를 상당 부분 조작했다. 이 정도였으니 자기 시대에 편찬한 《진서》는 어떠했겠는가. 따라서 《양서》에 기록된 내용이 진실일 것이다. 당시는 현도와 낙랑이 정복된 뒤였으니, 겨우 몇 개 현(縣)만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정도로만 언급한다.
4) 극성 전투
서기 320년, 미천왕은 선비족 우문씨·단씨 및 진(晋)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연합하여 모용외의 서울인 극성을 쳤다. 그러자 모용외는 네 나라를 이간시켰다. 이 때문에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는 모용외와 싸우다가 대패했다. 이에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如奴子)는 사성(詞城)을 지키다가 모용외의 장수인 장통에게 패했다. 이상은 《진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사실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노자는 고노자(高奴子)의 오자인 것 같지만, 모용외를 여러 차례 격파한 명장인 고노자가 장통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또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로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가 그 즈음에 사망했다는 뜻인데, 그런 그가 근 40년 만에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 따라서 위의 내용은 조작된 기록일 것이다.(4)
윤내현
고구려의 건국과 연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라는 이름은 서기 전 37년에 추모왕이 고구려라는 독립국을 건국하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중국 문헌에서는 고구려가 서기 전 12세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고죽 · 기자조선 등과 인접하여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기 전 195년에 위만이 서한에서 고조선의 서부 변경으로 망명하여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의 준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하고 그 영토를 지금의 대릉하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의 지배층과 일부 주민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족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서기 전 108년에 서한에게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에 서한의 군현(한사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에 서한은 고구려족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원주지에 남아 있던 고구려족을 분산 이주시켰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고구려족은 또 다시 여러 곳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여러 곳으로 이주한 고구려족 가운데 큰 집단은 고구려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수맥이라 불린 구려족, 지금의 요하 서부유역으로 추정되는 현도군의 고구려현, 지금의 요녕성 남부해안 수중綏中과 전위前衛사이에 있는 고려하와 고려성지 등은 바로 그러한 연유로 고구려족이 남겨놓은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이름들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영토에 편입되었던 지금의 요서 지역에 남겨진 고구려의 이름이었는데 이와는 달리 지금의 요동 지역에는 서기 전 37년에 추모왕이 독립국 고구려를 건구하였다.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이주해 왔지만 부여족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였고 아버지는 스스로 해모수라 하였는데 아마도 추모왕은 단군의 후손인 고구려 거수의 혈통일 것이다. 그가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한 것도 이전의 고구려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추모왕의 조상과 일족은 위만조선의 영토확장으로 그들의 거주지를 잃게 되자 잠시 북쪽의 북부여에 의탁하고 있다가 지금의 요동으로 이주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에는 추모왕을 포함하여 고구려족이 주체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 건국된 고구려국의 영토 안에는 부여족과 그 이전부터 그곳에 거주했던 토착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옛 문헌에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이라 기록한 것은 추모왕이 한때 북부여에 의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주민 가운데 부여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705년 동안 존속되었다. 그런데 옛 문헌에는 고구려가 이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존속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서기 전 3~2세기경으로 올려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조선 붕괴 연대와 고구려 건국 연대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구려는 그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705년보다 길게 말한 것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까지를 포함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역년을 대개 800~900여 년으로 말하고 있는데 고구려는 고조선 초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보다 훨씨 오래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800~900여 년이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서기 전 4~3세기경의 고조선 말기에 단군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거수국들이 반독립적인 위치에 있는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고구려도 반독립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역년을 이 시기부터 계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
이형구
고구려 건국의 터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 중의 하나인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한 사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 장소는 오늘날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지금은 환인시)에 있는 졸본성(卒本城),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고구려 하면 으레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輯安市, 集安市)나 북한의 평양 정도만 떠올리게 되는 것은 마치 우리가 백제의 건국 수도가 오늘날의 서울인 줄을 잘 모르고 오직 공주나 부여만을 연상하는 것과 같다.
칠성산묘구(七星山墓區)에서 바라본 집안시내(輯安市內) 풍경국내성 서벽(정비 후)과 북벽이 보인다.
요녕성 경내에서도 요동반도는 오늘날 중국에서 철 생산량이 가장 많은 안산(安山) 제철소가 있고, 무연탄이 무진장한 무순(撫順) 탄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요동반도는 고조선의 강역이지만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요동반도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시기를 이룬, 고구려의 산업과 국방의 중심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녕성의 고구려 유적이나 유물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역사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1)
오녀산성 ‘중국성급사적(省級史蹟)’ 지정비
“옛날에 (고구려) 시조 추모왕(鄒牟王, 혹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함)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나왔다. (추모왕은)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하여 알에서 태어났는데, 성스럽고 덕이 있었다. 추모왕은 천제의 명을 받아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 지금의 송화강(松花江))를 지나게 되었다. 추모왕은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을 띄워 다리를 놓아라”라고 말하자마자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들이 떠올라서 다리를 놓았다. 그러한 후에 (추모왕이) 물을 건너 비류곡(沸流谷,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의 졸본(卒本, 홀본(忽本)이라고도 함)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고구려 건국 신화에 보이는 졸본성이 바로 오늘날의 환인 오녀산성이다. 1993년 8월 15일 광복절날, 북한의 역사학자 박시형(朴時亨)·강인숙(姜仁淑) 선생 등과 함께 졸본성[오녀산성]을 참관하였다. 여러 면에서 매우 감개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두분과 최영식 교수 그리고 방기동 소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한국·북한·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들과 환인(桓仁) 로정(路程) 중 합영[1993년 8월 15일 광복절날]집안에서 회의를 마치고 오녀산성 방문길에 길림성과 요녕성의 경계분수령인 괘패령(卦牌嶺) 위에서 잠시 쉬는 길에 기념촬영을 했다.(오른쪽에서부터 저자, 조유전 박사, 경철화 집안박물관 부관장, 박시형 교수, 현명호 교수, 최영식 교수(이상 김일성종합대), 방기동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 왼쪽 네 분은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고인이 되었다.
오녀산성은 요녕성 환인현 현성(縣城)으로부터 동북쪽으로 8.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훈강(渾江)의 건너편 해발 820m나 되는 높은 곳에 축성되었다. 이 산은 주위의 여러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오른 산으로 깍아지른 절벽의 높이만도 200m나 되는 험산이다. 산 꼭대기에는 동쪽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모두 절벽으로 성벽은 남북의 길이가 1000m이고, 동서 너비는 300m로 총 길이 2,440m에 이른다.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卒本城)졸본성은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연안에 위치한 지금의 환인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기원전 34년에 천애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석성으로 축성 방법은 고구려 산성의 선구이다.
동남쪽에는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여 판상석(板狀石)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는데, 성벽은 바깥 높이가 3~6m나 되고 안쪽은 1~2m 정도이다. 그리고 성벽에는 아직도 단애가 남아 있다. 성안에서는 1986년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초기의 유물로 보이는 금은기·동기·철기·자기·옥기·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2)
오녀산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말하는 “왕이 졸본천에 이르러 그곳 땅이 기름지고 산세가 험하고 견고하므로 이곳에 마침내 도읍을 정하고 집을 짓고 살면서 3년 후[기원전 34]에 성곽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은 곳”이라고 기록한 바로 그 성이다.
오녀산성 안의 평지에는 건도 당시의 돌로 쌓은 연못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견고한 오녀산성을 건성한 지 불과 38년 만에 고구려 제2대왕인 유리왕(瑠璃王)이 22년[3], 서울을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후로는 북방의 한 중성(重城)으로 남게 되었다. 2003년 10월이 천도 20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왕위에 오르고 그 이듬해[332] 2월에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지 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새로 등극한 왕이 졸본성에 와서 제사 지냈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그 중요성을 알 만하다.
환인현 하고성자성지
환인 서북 3km 지점의 하고성자성지(下古城子城址)는 훈강 서안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훈강은 길림성의 북쪽에서 흘러 내려와 성지의 동부를 경유하여 남쪽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의 서쪽에는 작은 개울이 있고 성의 남쪽 1.2km 지점에서 훈강에 진입한다. 이곳에서 약 10km 상류에 오녀산성이 있다. 성지는 훈강의 수면에서 약 5m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벽이 226m, 서벽 264m, 북벽 237m, 남벽 212m로 방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2~5m이고, 성벽 상부의 넓이는 2m 정도이다.
1982년 요녕성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성내에서 회색토기·갈색토기·철제 화살촉·기와·와당 등이 출토되었는데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대체로 오녀산성과 하고성자성은 모두 고구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고성자성과 오녀산성은 훈강 우안의 비교적 가깝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두 성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에 이곳 사람들은 평시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성에서 생활하고 전시에는 산성인 오녀산성 안에서 농성하였을 것으로 보고 평지토성(平地土城)인 하고성자성을 고구려 초기 역사상 매우 주목되는 성지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혹, 고구려의 초도(初都)인 졸본성이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왕조에 나오는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초려를 짓고 국호를 고구려[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라 했다고 하는 기사의 비류수 가의 초도가 바로 이 성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녀산성의 동쪽으로 15km 정도 거리의 훈강 동안에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이라고 하는 마을의 남쪽 언덕에는 750여 기의 고구려 초기 적석총이 있었다고 한다. 1957년, 환인(桓仁)댐과 사첨자(沙尖子)댐을 건설하면서 원래 229기를 발굴하려고 하였으나 예산상의 이유로 이를 모두 발굴하지 못하고 65기만을 발굴한 뒤 나머지는 모두 수장되었다고 한다.4)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환인시 미창구(米倉溝) 장군묘는 1984년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가 발굴한 바 고구려 벽화가 발견되었다. 연꽃 무늬와 ‘왕(王)’자 무늬가 연속적으로 장식된 일종의 문자 및 장식 벽화 고분이다. 이는 대체로 5세기경으로 보고 있다.5)
환인현 미창구(米倉溝) 장군묘 원경
미창구 장군묘 현실 북벽 연꽃 무늬
국내성의 규모는 처음부터 동벽의 길이가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 등 전체 길이 2,686m의 방형으로 된 석축 평지성이다. 남벽 바깥에는 해자 자리에 도랑이 나 있다. 성벽은 내외 양 벽에 장방형 또는 방형의 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리고 성벽 안쪽은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북벽 일부와 서벽의 마면(馬面) 일부만이 남아 있다. 북쪽 성벽은 기단의 넓이가 약 7~10m이고, 높이는 2~4m이다. 그 밖에 남벽의 서쪽 끝 부분에 3~4m의 성벽 흔적이 일부 남아 있고, 동벽도 끝 부분에 약간 남아 있으나 모두 파괴되고 민가가 들어서 있다. 원래 초축은 토성이었다고 한다. 1975~77년, 국내성지의 시굴조사에서 국내성의 성벽을 석벽으로 쌓기 이전에 이미 토축(土築)으로 쌓아 올린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시굴시 토성의 내부에서 석부·석도·원형 석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보고자는 이들 유물을 중국의 전국시대[청동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6)
국내성은 1947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보존되었으나 중국의 해방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동성로(東盛路)를 뚫고, 동서로는 승리대로와 단결대로가 뚫리고 성안에는 온통 민가가 들어섰다.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국내성에서 성문지는 물론 궁전지며 건물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서울의 풍납토성과 난형난제(難兄難弟)의 형상이다.
고구려가 이곳에 천도[기원후 3]하기 이전에 이미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으며, 국내성은 이미 축조되었던 토성을 기초로 하여 석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특히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국내성 내부가 관공서를 비롯하여 상가·주거지로 변해 모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옛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최근에는 2004년 6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앞서 파괴된 부분을 수축하고 정비·복원하고 있다.
저자가 2004년 1월 13일 현지를 답사한 바 최근에 통구하(通溝河)변의 서벽 부분에 있는 민가들을 헐고 정비하였다. 이때 원래의 성벽이 강가에서 드러났다. 지금의 성벽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342]조에 보면, “봄 2월에 환도성을 수용(修茸)하고, 아울러 국내성도 수축하였다”고 하였는데, 아마 2003년에 서벽을 발굴하여 드러난 기저부에 외향적으로 조금 남아 있는 고구려 성벽이 이때 수축한 성벽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1992년의 국내성(國內城) 복원 전의 서벽 마면(馬面)
2004년의 국내성 복원 후의 서벽 마면
환도산성(丸都山城)은 황성[국내성]을 보호하는 군사적인 수비성으로, 평상시에는 양식과 병마·병기를 비축해두었다가 전시(戰時)에는 이곳으로 입성하여 왕통을 지켰다. 그래서 산상왕(山上王) 13년[209]과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 공손강(公孫康)과 모용황(慕容皝)의 2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고도 잘 이겨내는 등 피난 도성의 역할을 다했다. 최근에 환도산성 내에서 고구려 환도산성 궁전지(宮殿址)가 발굴되었다.7)
최근에 발굴된 환도산성 궁전지2003년, 환도산성내 약 8,000m2에서 3단으로 조성된 대형건물지가 발굴되었다.(6)
박병식
**필자/역사학자.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쓴 책으로는 "일본어의 비극" "일본어의 발견" "야마토언어의 기원과 고대조선어"등의 저서가 있다.
우리와 북쪽에서 접경(接境)하고 있는 중국(中國)사람들은, 가라족(韓族)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歷史)를 왜곡하는 중국
요새,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는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다"라고 아주 맹랑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저들이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가 어떤 경유(經由)로 세워졌는지를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더 앞으로 나가기에 앞서, 우선 임승국이 펴낸(번역·주해)'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 중국의 사학자(史學者)인 왕동령(王桐齡)이 저술한 '중국민족사'(4페이지)의 한 구절을 잠시 옮겨 소개하기로 하자.
"4000년 전(…중략…), 현재의 호북(湖北)·호남(湖南)·강서(江西)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시작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君主)는 치우(蚩尤)다」
여기서 <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중국 고서(古書)에, <句麗)>·<九黎> 따위로도 표기돼 있다. 그리고, <치우(蚩尤)>는 단국(檀國) 시대에 치우대왕(蚩尤大王)이라고 불려지던 용맹한 가라족(韓族)의 임금이므로, <구려>라는 국호는, <가라(韓)>에서 모음교체된 형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호북(湖北)·호남(湖南)·강서(江西) 등지」라 하는 곳은, 대만(臺灣) 건너편에 위치한 복건성(福建省) 부근 일대(一帶)다. 따라서, 왕동령이 기술(記述)한 내용으로 봐서,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년 전의 가라족(韓族)은, 중국 본토(本土)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강력한 민족(民族)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치우대왕(蚩尤大王)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가 처음이 아니다. 전한(前漢. bc202년-ad8년)의 사마천(司馬遷)이 찬(撰)한 중국의 정사(正史)'사기(史記)'에도, 치우대왕(蚩尤大王)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莫强)했는지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제후(諸侯)가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蚩尤)가 매우 난폭(亂暴)하였으나, 천하(天下)에 능히 이를 막을 자(者)가 없었다."
이러한'사기(史記)'의 서술(敍述)은, 왕동령(王桐齡)의'중국민족사'에 나오는 가라족(韓族)의 강력한 세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구한이 부여를 세웠다"
'사기(史記)'나' 중국민족사'에 기술돼 있는 <구려(句麗)> 는 원형(原形)이 <하라→가라→구려=해의 자손이 사는 나라>이었다. 그들은 여러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으므로, 그들 전부를 통 털어서 구한(九桓)이라도 했고,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에는 구이(九夷)라 적혀있다.
그 구한(九桓)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부여(夫餘)>라고 불려진 나라를 세웠다. 그 건국(建國) 시기(時期)가 언제였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아마도 진(秦. bc 221년-bc 207년)나라 보다 빨랐던 게 아닌가 싶다. 왜냐면, 진(秦)나라 때 사람인 복생(伏生)이, 그가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 말하기를, 「해동(海東)의 제이(諸夷)는 모두 부여(夫餘)에 속(屬)한다」라 했을 뿐 아니라, 중국문화대학(中國文科大學) 출판부가 발행한 중국역사지도의 진대통일지도(秦代統一地圖)에도 부여(夫餘)가 뚜렷이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 부여(夫餘)는, 수도(首都)를 송화강(松花江) 유역(流域)에 세우고, 그 수도(首都)이름을 부여부(夫餘府)라 했다. 지금도 그 부여부(夫餘府)라는 지명이, 중국문화대학(中國文科大學) 출판부가 발행한 중국역사지도책의 51 페이지, 오대도(五代圖)에 뚜렷이 남아 있다.
<부여(夫餘)>라는 이름은, <하라=해의 자손이 사는 나라>에서 유래(由來)된 것인데, 그 소리 변화과정은 <하라→바라→부라→부려→부여>다. <ㅎ>소리가 <ㅂ>소리로 바뀐 것은, <하라=넓은 땅(原)>이 <바라>로 바뀐 다음, 모음교체를 일으켜서 현대어(現代語) <벌(原)>이 된 것과 같다.
우리의 옛말 <화라(弓. 활)>을 <바라>라고 도하며, <가잘하다=비유하다>를 <가?비다>라고도 하는 것 역시, 그런 자음변화(子音變化)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그 <바라>는, <바라→부라>를 거쳐 <부려>가 된 다음, <려>는 <여>로 소리바뀜 됐는데, <ㄹ>소리가 <ㅇ>소리로 바뀐 것은, 나라이름 <가라(加羅)>가 <가야(伽倻)>로 변하고, <달래다>를 고어로 <달애다>라고 한 것과 같은 자음변화다.
부여(夫餘)의 시조(始祖) 이름은 <해부루>라고 전해져 오며, 왕실(王室)의 성씨(姓氏)는 <해>라고 했다. <해부루>의 <해>가 태양을 뜻하는 <하>의 모음교체 꼴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해부루>의 <부루>는 <넓은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하는 현대어(現代語) <벌(原)>(예: 서라벌=신라)의 옛 형태다.
이로서, 부여(夫餘)의 시조(始祖)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해부루>도, 우리의 최초의 국호인 <가라=태양의 땅·태양족이 사는 땅>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실려있는 부여조(夫餘條)를 보면, 「부여는 장성이북(長城以北)에 있으며, …중략…남(南)쪽에는 고구려, 동(東)쪽에는 읍루(?婁=肅愼), 서(西)쪽에는 선비(鮮卑), 북(北)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부여의 위치는, 중국역사지도의 19페-지, 한대서역도(漢代西域圖)에서 확인된다.
이것으로, 부여라는 나라가 창건(創建)됐을 때엔, 그 남쪽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이름은 도대체 무슨 뜻을 나타내는 것일까?
우리민족은 태양신의 자손
우리민족은 스스로를 태양신(太陽神)의 자손이라고 자부해 오는 탓으로, 그들이 정착(定着)한 땅(나라)를 <가라>라 했으며, 부여(夫餘)라는 이름도 거기에 유래 된 것임을 앞에서 확인(確認)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도 역시 그런 뜻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렇다! <고구려>의 <구려>는, 우리의 첫 국호인 <가라>가 모음교체를 일으켜 변화된 형태로서, 중국 사서에 <구려=句麗·九黎·九麗>라고 표기돼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고>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한자(漢字) <고(高)>에서 빌려온 것이며,「종래의 <가라>보다 더 위대한 <가라>라」고 뽑내는 의미(意味)로, <높은 가라>, 즉 <대가라(大加羅)>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가라(高加羅)>라고 했던 것인데, 연대가 내려오면서 차차 <고구려>로 바뀐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현대의 우리가, <한국(韓國)>인 나라이름을, <대한(大韓)>이라 하고, britain(영국)이 great britain(대영국)이라 하는 심리(心理)와 같은 현상이다.
그런 기백(氣魄)에 넘치는 나라였던 고구려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은, 중국에 빼앗긴 조선(朝鮮)의 옛 강역(彊域)을 도로 회복(回復)하자는 것이어서, 고구려 말로 <다물(多勿)>은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있기도 한다.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구려(句麗)>나 <고구려(高句麗)>라는 이름이, 모두 우리민족의 첫 국호인 <가라=태양족의 나라>에 유래된다는 게 확실한데, 어찌 중국 사람들이「고구려는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다」라고 우겨댈 수 있겠는가!
▲가라. 검은 빛을 뜻하는 형용사(形容詞). 만주의 북부지역을 흐르는 대하(大河)를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한다. 그 지역 전체는 <가라족(韓族)>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을 흐르는 강물 이름을 왜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했을까가 궁금하다.
예컨대, 부여(夫餘)가 자리잡았던 지역을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이름은 「가라족(韓族)의 물(江)」이란 뜻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왜냐면, 그 이름은, 지금도 여진어(女眞語)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이름 <솔궈>에 유래되기 때문이다. 즉 <솔궈>의 <솔>을,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漢字)인 <松>으로 표기하고, <솔궈>의 <궈>소리가 꽃(花)과 흡사(恰似)하므로, 한자(漢字) <花>를 써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遼) 나라가 위치했던 지역을 흐르는 강물은, 요하(遼河)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흑룡강(黑龍江)이라는 이름도 역시, 가라족(韓族)의 물(江)」이란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면, 흑룡강(黑龍江)의 <黑>은, 우리의 고어(古語)로 <가라>라 하지 않던가? 다시 말하자면, <가라=黑>라는 우리의 고어(古語)는, <가라족(韓族)>의 <가라>와 꼭 같은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용(龍)>은 우리말로 <미르>라고 하는데, 그 원형(原形)은 <마라=신성한 것>이었으며, <마라>→<무르>→<미르>와 같은 모음교체를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물(水)의 원형도 <마라=신성한 것>이었던 게, <마라>→<무르>→<무르>→<물>의 모음교체를 거친 것이다. 즉 흑룡강(黑龍江)의 <黑龍>은, 우리말 <가라마라=黑水>가 <가라마라=黑龍>와 꼭 같은 소리이기 때문에 오기(誤記)된 것임을 추정(推定)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어원을 캐 보면, 한자(漢字)로 흑룡강(黑龍江)이라 표기돼 있는 이름은, 원래 <가라마라=가라의 물(江)>이라고 불리던 것<마라=물>과 <마라=龍>가 같은 소리였던 탓으로 흑룡(黑龍)이 되었고, 원래의 뜻을 모르게 된 후세(後世) 사람들이, 거기에 다시 강(江)을 덧 부쳤기 때문에 흑룡강(黑龍江)이라는 새 이름이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한족이 세운 나라라고?
이와 같이, 중국 사서(史書)에 남아있는 <九麗>·<句麗)>·<九黎>라는 나라이름은,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을 나타내는 것임이 너무도 분명한데, 어찌 고구려(高句麗)를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일본 유전학자(遺傳學者)들이 밝혀낸 바와 같이, 옛 고구려 영역에 살고있는 조선족과, 한반도에 살고있는 우리의 dna는 동일(同一)하지만, 한족(漢族)의 dna는 조선족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7)
김운회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중앙선데이
입력 2011.03.06 00:00
중국 사서엔 고구려 발상 지역이 중국 란하~현재 선양 지역으로 나타난다. 초기 고구려 영역 가운데를 대릉하가 흐른다. 대릉하 상류에는 조양이란 지역이 나타난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와 햇빛을 뜻하는 양(陽)이다. 이 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사는 아침을, 달은 벌판을 의미하는데 조양이 아침해가 뜨는 벌판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진은 현재의 조양시와 시를 가로지르는 대릉하다. [사진=권태균]
⑦고조선과 고구려
BC 108년 고조선은 멸망했다.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다. 첫 갈래는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東夷列傳濊)이라 했고 수서(隋書)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다(裵矩傳). 구당서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했다.”(“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舊唐書裵矩傳)고 한다. 즉 수·당 시대에는 ‘고죽국=조선=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다. 고죽국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지역이므로 고구려는 고조선 옛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최초의 정사 기록은 한서로 “한무제 원봉 3년(BC 108)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음 해 4군을 설치하는데 현도(玄<83DF>)군에 고구려현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한서에는 왕망이 말하기를 “하구려(고구려 비칭)는 유주에 속하고 4만5000여 호에 인구는 22만 명”이라면서 그 주석에 “현도군은 과거 진번에 속했고 조선 오랑캐의 나라(地理志下 玄<83DF>郡)”라고 했다.
한사군은 고조선 옛 땅에 설치한 4개 행정구역으로 BC 108년 낙랑·임둔·진번을, 이듬해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현도를 현재의 함흥으로 봤다. 그런데 한서에 “현도군은 유주에 속한다…현도군은 고구려,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 등의 세 현”이라고 했다. 유주는 후한 때의 주 이름으로 현재의 베이징~랴오닝(遼寧)성 남부 지역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수서와 구당서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현도는 결코 함흥이 될 수 없다. 현재의 베이징에 가까운 지역이다. 이를 한서와 수경주(水經注)가 검증해준다.
한서에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바 서남으로 요대(遼隊)
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地理志 玄<83DF>郡)라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대요수와 합류하는 백랑수(白狼水)는 교려(交黎)를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창려(베이징 동남)다.
문제는 요수를 달리 요하(遼河)라고도 하고 고대에는 상류를 낙수(樂水), 하류를 대요수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수서에 “요산은 북위가 요양(遼陽)이라고 했는데 … 개황 16년(596) 요주에 속했다(遼山后魏曰遼陽 … 十六年屬遼州)”고 했다. 요양은 현재의 선양(瀋陽) 또는 랴오양(遼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재의 란하(루엔허)에서 선양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서의 현도군에 관한 주석으로 “과거에는 진번군으로 조선 오랑캐(朝鮮胡)의 나라이고 고구려(高句驪)현은 구려 오랑캐(句驪胡)다”(地理志下 玄<83DF>郡)라는 기록과 위략(魏略)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 오랑캐의 옷(胡服)을 입고”라는 기록을 보면 중국이 고구려와 조선을 동일 계열의 호(胡)로 보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동이(東夷)라는 개념과 결부시키면 동호(東胡)라는 보통 명사가 도출된다. 중국에서 호(胡)는 일반적으로 흉노(匈奴)를 말한다.
고조선 멸망 후 전한 시대(BC 202∼AD 7)를 통틀어 고구려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즉 고조선이 무너지고 100여 년 뒤인 AD 1세기 초까지도 고구려는 건국되지 않고 한나라의 자치현(自治縣)과 같은 형태로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한서에는 “(AD 12년)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나라의 법을 범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王莽傳)라고 한다.
추(騶)는 한편으로는 명목상 한나라의 제후였지만 북방 세력(흉노)과도 긴밀했기 때문에 중화 편집증을 가진 왕망(신 황제)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추가 왕망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고구려가 정상적인 정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추는 한나라의 위계에 빠져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고구려 자치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으며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추’가 후일 ‘주몽’의 이름을 빌려 신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 기원 전후로 추(騶)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에 해당되는 어떤 실존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주몽·추모(鄒牟) 등은 ‘추(騶)’의 전음으로 추정된다.
양서(梁書)에는 “(서기 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고 이때 비로소 고구려왕을 칭하였다”(高句麗傳)라고 한다. 즉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므로 고구려는 바로 이 시기에 서서히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에는 태조 대왕(53~146)을 국조왕(國祖王), 즉 건국 시조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태조왕의 생몰연대(97세 서거)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상식적이지 못하므로 여러 왕들의 업적을 통합해 이를 건국 시조화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고구려 전문가인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4세기 소수림왕(371∼384) 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됐다. 이때 고구려 초기왕계도 함께 정립됐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같은 계열인 부여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신화는 부여 신화의 복사판이다. 삼국사기에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金蛙·금개구리)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어느 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고구려 본기)라 한다. 이 신화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과 ‘금와왕’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다.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동호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하다. 삼국지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가 ‘낮에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쩍이는 빛이 입에 들어와 임신하여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으니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자라면서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하여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단석괴는 선비족(동호의 후예)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장렬히 산화한 고구려후 추의 일생을 존숭하여 동호의 영웅인 단석괴의 출생신화에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 북방 패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신화를 강화한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부여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이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알타이에 퍼져 있는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는 “옛날 알타이에 탄자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붉은 개구리와 싸우던 흰 개구리를 구했다. 이 일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되고 꾸르부스탄(하늘의 신)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는다”(양민종 알타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우렁각시나무꾼과 선녀혹부리 영감심청전 등의 원산지다.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다. 물론 부여·고구려의 신화가 거꾸로 알타이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연구 과제다.
위략(魏略)에 “옛날 북방에 고리(<69C0>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인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三國志魏書 扶餘傳 주석)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바로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어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는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동이들이 과거에 하던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라든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부여와 같다고 한다”(魏書 高句麗)라고 했다. 부여세력 일부가 고구려 건설에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부여계→고구려’라는 역사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략에 나타나는 고리(<69C0>離)는 이후 고리(高離:삼국지(三國志)), 고리국(藁離國), 탁리(<69D6>離:논형(論衡)), 삭리(索離), 콜리(忽里: Khori),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등으로 나타난다. 사기나 당서(唐書: 940)당운(唐韻: 751) 또는 명나라 때의 정자통(正字通: 1671)에서 ‘려(麗)’라는 글자의 발음은 ‘[리(li)]’로 난다. 따라서 대체로 위의 발음은 ‘까오리’에 가깝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한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한편 부여로 세력을 확대했다. 동시에 추의 죽음을 기리고 거기에 부여와 단석괴 신화를 결합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이 고주몽의 건국신화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 사라진 옛터에, 고주몽으로 환생한 고구려왕 추(騶)의 수급(首級)이 흘린 혈흔(血痕) 위로 새로운 역사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9)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5147388
성훈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
<고구려사초.략>과 많이 다른 <삼국사기>의 고구려 쿠데타 기록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3부)입니다만, 고구려에는 정변이 많아 워낙 장문이 되므로 추가로 몇 장으로 나누어 연재되겠습니다.
(1부)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허구의 기자조선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3부) 고구려의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
(3부 1장)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의 기록은 옳은가?
지금까지 (1부)와 (2부)에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때 일어난 쿠데타를 조명함으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고구려 때 발생한 쿠데타에서는 나라가 바꾸지 않고 황제만 바뀌는 정변이 몇 차례 있었다.
고주몽에 대한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다른 기록
북부여 6대 고모수단군의 사위가 되었다가 B.C 58년 23세의 나이로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주몽은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말하는 고구려인 것이다. 즉 고주몽으로 인해 북부여가 자연스럽게 고구려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고주몽의 후손인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분명히 고주몽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고 새겨 놓았으며, 17세손을 언급함으로서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내려왔음을 확실히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주몽과 북부여와의 관련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년도와 나이를 B.C 37년에 22세의 나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단칸셋방에서 시작하여 자수성가하는 것으로 기록하면서도, “혹은 주몽이 졸본부여에 당도하니 마침 왕이 아들이 없다가 주몽을 보고서 범상한 인물임을 알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함으로서 <한단고기>의 내용이 틀리지 않음을 시사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하였으며, 모든 고구려의 왕들이 자체 년호를 썼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영락’이라는 년호와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장수열제(장수왕)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어 <삼국사기>의 년호에 대한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한단고기>에는 고주몽이 다물(多勿)이라는 년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 2년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땅을 다물군(多勿郡)으로 만들고 송양을 봉하여 지주를 삼았다. 고구려 말에 구토를 회복하는 일을 다물이라 한다.”고만 기록하였다.
그런데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는 추모대제(고주몽) 원년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고 기록함으로서 고주몽이 북부여 시절에는 다물(多勿)이라는 년호를, 고구려 시절에는 동명(東明)이라는 년호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작명함으로서 고구려의 년호 사용을 교묘히 숨겼던 것으로 보인다.
시조 추모대제(고주몽)의 의문의 죽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19년(B.C 19년) 여름 4월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은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다르면서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17년 해소(유화와 금와의 아들)가 예후와 유리를 보내주었다. 19년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4월 임금께서 서도(西都)에서 죽고 동궁이 즉위하였다. <선기(仙記)엔 “임금이 보위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동궁에게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었고, 9월에 용을 타고 상천하였으며 옥 채찍을 버려둔 곳이 용산릉(龍山陵)이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또 사신(史臣)이 논하길. “동명은 세상에 다시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중략)... 나라를 창업하는 일이 급하였기에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인 추모대제(고주몽)와 유리태자 사이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가 오자마자 태자가 되고, 곧바로 추모대제가 승하하고, 찬자가 논하길 추모가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뭔가 당시 조선왕조 때의 왕자의 난과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고구려사초.략>를 번역한 김성겸선생은 추모대제의 능이 있던 용산(龍山)을 현재 북경 서남쪽 방산(房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龍(용)-->龐(방)-->房(방)으로 은폐시켰다고 보면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중재선생은 산동성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용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산동성 용산은 한자는 같으나 백제의 영역이고, 유리묘(琉璃廟)가 북경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용산은 북경 근처가 유력하다 하겠다.
▲ 북경 북쪽에 유리왕의 사당인 유리묘가 있고, 북경 서남쪽에 방산구를 흐르는 유리하가 있다.
▲ 현 주일대사인 권철현의원이 답사한 유리묘가 있던 자리. 문화혁명 때 다 파괴가 되었다고 한다.
5세 폭군 모본제의 죽음.
모본제는 대무신제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케 하다가, 요동태수 채동이 신의와 은혜로서 대하므로 다시 한과 화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은 달리 기록하고 있다. 모본왕 2년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의 습격 기사를 대무신제 22년(A.D 49년)으로 적고 있으며,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공략하고 그곳의 보물.노리개.예쁜 계집.비단.진미 등 다수를 빼앗았다. 년 중 내내 이런 일이 잦았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크게 두려워하며 매년 조공하기로 약속하며 화친을 구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일어난 년도는 같으나 모본왕의 업적이 아니라 대무신왕의 재위 중이란 기록이다. 이는 두 사서의 역대 년표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두 사서의 년표를 서로 비교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삼 국 사 기 |
고 구 려 사 초 .략 |
||||||
시조 |
동명성왕 |
BC37 ~ BC19 |
19년 |
시조 |
추모대제 |
BC37 ~ BC19 |
19년 |
2세 |
유리왕 |
BC19 ~ AD18 |
37년 |
2세 |
광명대제 |
BC19 ~ AD28 |
47년 |
3세 |
대무신왕 |
AD18 ~ 44 |
27년 |
3세 |
대무신제 |
AD28 ~ 64 |
37년 |
4세 |
민중왕 |
44 ~ 48 |
5년 |
4세 |
민중제 |
64 ~ 68 |
5년 |
5세 |
모본왕 |
48 ~ 53 |
6년 |
5세 |
모본제 |
68 ~ 73 |
6년 |
6세 |
대조대왕 |
53 ~ 146 |
94년 |
6세 |
신명선제 |
68 ~ 112 |
40년 |
7세 |
태조황제 |
112 ~ 146 |
35년 |
* (주) 명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왕조와 일제의 손을 많이 탄 <삼국사기>에는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대조대왕(大祖大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 태(太)를 큰 대(大)로 점까지 없애면서 역사왜곡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이 역겹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대조대왕을 태조대왕이라 적는다.
<삼국사기>보다 <고구려사초.략>의 광명대제(유리왕)가 +10년, 대무신제가 +10년이고, 대조대왕이 신명선제와 태조황제로 나뉘면서 -20년이 되어 있다. 태조황제 이후의 년표는 두 사서가 일치한다. 왜 위 두 년표가 서로 다른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모르겠으나,
여하튼 모본제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습격은 분명 모본제의 시대가 아닐 것으로 생각되며, <삼국사기> 기록대로 대조대왕이 7세에 즉위하여 치세가 94년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두 왕으로 나뉘는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모본왕(또는 대무신제)이 습격한 곳은 하북성과 태원까지 내려갔으니 산서성 전체이다.
그리고 요동태수 채동과 화친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 두 사서가 상당히 다르다. <삼국사기>의 위 기록은 뭔가 어패가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요동태수는 서로 전쟁을 한 사이인데 갑자기 신의와 은혜로서 대하므로 화친했다는 영국신사(紳士 ?)와 같은 기록은 뭔가 이상한 기록으로 보여 진다. 이것도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여하튼 모본제는 즉위하자마자 대무신제와 민중제가 쓰던 연호인 ‘대무(大武)’를 ‘모본(慕本)’으로 바꾼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이 더하여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으며, 사람이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이고,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을 때는 활을 당겨 쏘았다. 6년 겨울 11월 두로(杜魯)가 왕을 죽였다”고 기록하면서 간단히 그 시해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가 동생인 민중제에게 보위를 전하면서 아들인 모본을 태자로 삼는 과정과 모본제가 제위에 오르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자 시절부터 황음했던 모본은 재위 중에도 황음을 계속했으며, 사치했고 술 마시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사람 죽이기를 예사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궁중의 작은 황제로 불렸던 두로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두로는 낙랑국왕이었던 최리의 딸 니만(尼滿)의 말을 듣고는 모본제를 시역할 마음을 먹는다. 두로는 모본을 죽인 후 스스로 보위에 오르려 했다가 결국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모본제의 죽음은 두로에 의한 실패한 쿠데타의 작품이었다. 결국 황제를 시해한 두로는 자결하고 대무신제의 서자가 즉위하니 이분이 <삼국사기> 기록에 없는 신명선제(神明仙帝)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모본제가 시해 당하고 태조대왕이 즉위하는데 이상한 기록이 하나 있다.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고, 모본왕이 죽고 태자는 불초하여 사직을 맡을 수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태조대왕을 맞아들여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나이 7세인 까닭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는 기록이다.
즉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손자로 왕손이기는 하지만, 유리왕의 아들인 대무신왕의 아들들도 분명 여럿 있었고 게다가 민중제의 아들도 있었을텐데 이런 왕위 계승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대무신왕은 태자인 모본이 어리므로 동생인 민중왕에게 전위하며 모본을 태자로 세운다. 그런 모본이 죽었다면 과연 다음 보위는 누구에게 가야 상식적으로 마땅하겠는가?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비록 모본왕이 잔인한 폭군이긴 했으나 한의 요동을 공격해 승리하는 등 특별한 실정(失政)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조금 죽였다는 이유로 두로에게 시해 당했는데, 모본왕의 태자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가 계승 안되고 할아버지 유리왕의 왕손을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법도상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신명선제는 휘가 재사(再思)로 대무신제의 별자(別子=서자)이다. 친모는 갈사태후이고, 태후의 부친은 해소로 유화부인과 소생 금와(동부여 2세 왕)의 아들이다. 동복형은 호동(好童)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두 기록이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에서는 태조대왕을 재사(再思)의 아들이라 했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신명선제가 재사의 아들이라 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왕통 승계의 원칙으로 보아 재사의 아들은 태조대왕이 아닌 신명선제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2명의 선대왕(대무신, 민중)이 지나갔고 모본왕까지 직계왕통이 내려왔는데 유리왕의 손자인 방계 혈통의 왕손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조선왕조로 치면 <삼국사기>의 태조대왕은 XX대군(大君)도 아닌 그냥 XX군(君)이다. 대군이 있는데 어떻게 XX군이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신명선제는 년호를 신명(神明)으로 하여 40년 동안이나 제위에 있었던 엄연한 황제이거늘 <삼국사기>에는 왜 생략이 되어 있고 대신 태조대왕이 94년간이나 재위했다고 되어있는지 그 이유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신명선제 29년(AD 101년) “신라가 월성(月城)으로 이사했다. 월성의 둘레는 1,023보가 된다고 했다.”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천도한 적이 없이 금성(金城) 한군데에서 천년간 왕업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식민사학계는 그 금성을 현 경북 경주라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 (BC 37년) 경성(京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
그런데 38년 기록에 보면,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과 더불어 살았다.”고 하면서 식민사학계는 마한(백제)은 충청.전라 지역이고 신라는 경상도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진나라의 상징인 만리장성은 어디까지 왔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시황의 장성은 황하를 넘지 않았으며, 위의 이론대로라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경상도까지 왔다는 말이다.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왕 기준이 남하한 곳인 마한 역시 서화 동쪽임을 알 수 있다.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라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경상도까지 왔다는 말인데 이걸 믿으란 말인가?
따라서 신라의 수도인 금성은 진시황의 장성이 끝나는 곳에서 동쪽 마한 근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신라가 AD 101년 월성으로 천도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월성은 안휘성 합비 근처로 보여진다.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에서 보듯이 양자강 중류가 최적관측지로 나타나고 있다.
태조황제의 죽음과 명림답부에 의한 차대왕의 죽음
차대왕(A.D146 ~ 165년)은 20년 동안 제위에 있었으나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삼국사기>는 차대왕을 고구려 7세왕으로 적고 있는데 반해, <고구려사초.략>은 차대왕을 폐주(廢主)로 적으면서 아예 역대 왕통에 넣지 않고 있다. 즉 7세 태조황제--> 폐주 차대제 --> 8세 신대제로 적고 있다. 어떤 황제이기에 역대 왕통에서 빼버렸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차대제는 휘는 수성(遂成)으로 태조황제의 동복아우인 것은 두 사서가 서로 기록이 같은데,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태조대왕의 추앙을 받아 76세에 즉위하였다. 용장(勇壯)하고 위엄이 있으나 인자심(仁慈心)은 적었다.”고 젊잖게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략>은 “태조를 위협하여 양위를 받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군권을 장악하고 세운 공도 많았지만 성품은 음란하고 포악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차대왕 수성은 형인 태조대왕 때 맹활약을 한다. 수성은 요동(하북성)을 쳐서 빼앗는 등 혁혁한 무공을 세우자 태조대왕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통섭케 하였다. 주위에서 수성더러 늙기 전에 왕이 되라고 부추기는 세력이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를 신하로부터 전해들은 태조대왕은 오히려 자신이 늙음을 이유로 양위를 결심하게 된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수성은 왕이 되어서는 2년(147년) 3월 태조대왕의 가까운 신하를 베어 죽였다. 3년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이니 그 아우 막덕이 두려워하며 목메어 죽였다. 가을 7월 흰 여우에 대한 길흉을 설명하는 무사(巫士)를 죽였다. 그리고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간신들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20년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죽으니 향년 10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이 견디어 내지 못함을 이유로 차대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신대왕(新大王)이 즉위하는데 태조대왕의 막내아우로 당초 차대왕이 무도하여 백성이 따르지 않으므로 왕제(王弟)는 화란(禍亂)을 피하여 산 속으로 도망하였다가 76세에 왕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태조대왕이 109세에 죽을 때 신대왕이 76세의 나이로 즉위하는데 태조대왕의 동복아우라는 것이다. 33살의 차이가 있는데 동복아우라는 기록은 솔직히 믿기 어렵다. 과연 태조대왕의 모후는 도대체 신대왕을 몇 살에 낳은 것인가?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다.
아무리 빨라도 50살이 다 되거나 넘어서 신대왕을 낳았다는 얘기인데 이걸 믿으려면 믿을 수도 있으나 솔직히 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사초.략>에는 신대제가 태조황제의 별자(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삼국사기>가 정사서가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차대제 수성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태조황제 10년(121년) 한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수성이 등후(鄧后)의 나이를 묻자 사신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수성이 이르길
“지난날 여후(한고조 유방의 처)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고 모돈(흉노의 선우)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등만(후한의 5세 상제의 처)이 내게 허리띠를 풀고 어육(魚肉)이 되게 하지 않는가? 호(후한의 6세 공종)의 애미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후한의 수도)은 잿더미가 될 것이야!”
하였더니 사신들이 가만히 있자 태조황제가 이 말을 듣고 수성을 꾸짖자 수성이 아뢰길“저는 한나라를 초개와 같이 여기는데, 제가 어찌 그들이 두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심하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솔직히 참으로 보기에 통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덕은 부족하나 용맹과 기개 하나는 천하제일이었던 수성이었다. 이후 수성은 대추가가 되어 병권을 위임받는다.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주위에서 황제가 늙어도 죽지 않으니 쿠데타를 권하게 되고 수성은 결행하려 한다. 이를 알게 된 황제는 수성의 위협으로 79세에 양위하고 물러났다가, 차대제 20년(165년) 태조황제는 전처인 상후(태조의 처였으나 수성에게 준다)가 위로하러 온 자리에서 마지막 통정을 나누고 98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태조황제가 보위에서 물러나 다음 황제의 재위 20년 동안이나 살았던 것으로 보아, 태조가 수성(차대)에게 보위를 전달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정상적인 양위를 거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대로 동생인 수성에게 위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쿠데타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수성에 의한 보위찬탈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차대왕이 시해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대제가 상후에게 “백고(후에 신대제로 상후의 아들)가 누구 자식이오?”라 물었고, 상후가 거짓으로 대답을 하자 차대제가 상후를 윽박지른다. 위급함을 느낀 상후는 명림답부에게 연통하여 도움을 청해놓고 차대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죽지 않고 오히려 갈래창을 집어 들고 상후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제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였으며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연후에 상후의 아들인 백고를 맞아 즉위시키다.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자신이 직접 보위에 오르는 역성혁명을 하지 않고 신대왕을 추대하여 황제로 세운다. 명림답부는 군권을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어 명목상 황제는 아니었으나 실질적인 황제로서 그리고 명재상으로 그 명성을 남긴다.
또한 명림답부는 신대제 10년 한나라 대군이 쳐들어오자 이를 좌원에서 대파하여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좌원대첩(坐原大捷)을 남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나라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는 이 좌원대첩을 잘 알지 못한다. 식민사학계가 안 가르쳤기 때문이다.
명림답부는 신대제와 같은 해인 15년(179년)에 죽는다. <삼국사기>에서는 향년 113세라 하였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52세라 적고 있어 차이가 난다. 이건 명백한 <삼국사기>의 오기라고 본다. 어떻게 명림답부가 100살이 가까운 나이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3부 2장에 계속됩니다)(10)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의 발흥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명림답부의 집권과 외정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네이버 지식백과] 을파소의 등용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4) [네이버 지식백과]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5)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109-111쪽
(7) ˝고구려 건국이념은 中에 뺏긴 조선회복˝ (breaknews.com)박병식2007/12/18
(8)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022656131
(9)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 중앙일보 (joongang.co.kr)
(10) 고구려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 기록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조선상고사》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 제1장 열국 총론
- 제2장 열국의 분립
- 제3장 한무제의 침입
- 제4장 계립령 이남의 두 신생국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 제1장 1세기 초반 고구려의 국력 발전과 그 원인
- 제2장 태조대왕·차대왕 두 대왕의 문치
- 제3장 태조대왕·차대왕의 한족 축출과 고토 회복
- 제4장 차대왕의 왕위 찬탈
- 제5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집권
- 제6장 을파소의 재상직 수행
제5편(二)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더보기
- 제1장 고구려의 대(對)중국 패전
- 제2장 고구려와 선비족의 전쟁
고구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구려(高句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명성왕부터 보장왕까지…고구려 700년을 읽다https://v.daum.net/v/201602021146547932016. 2. 2.
고구려판 장희빈과 중천태왕의 사냥터 (1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2/23
중천태왕이 후궁을 던져 죽인 西河는 어디인가? (2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3/11
뜨거운 사랑을 나눈 고구리 중천태왕과 신라 김옥모 태후 (3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3/30
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가 된 신라 태후 김옥모 (4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4/17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에서 왕이 된 이유는? (5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5/08
로물루스(로마의 건국신화 주인공)와 주몽(고구려 시조)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chosun.com)2014.06.14
‘고구리’로 불러야! ‘고구려’는 중국 동북공정용 용어: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3/07/05
KOREA, ˝고구려 그것이 바로 코리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3.03.02
세계최강 고구려와 로마의 최후 승자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기사입력 2010/02/22 [14:44]
지금은 고구려가 강성대국이 된 이유를 알아야 할 때: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윤복현 시사칼럼 | 기사입력 2009/05/28 [11:07]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 고구려를 세운 벤처 기업가 주몽.: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1/29
고구려를 수성한 기업가 유리왕.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2/13
여자에게 당한 고구려 모본왕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3/22
˝해모수의 '해'씨는 고구려 태조때 '고'씨로 변경˝: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4/26
원수의 자식을 거둔 목도루-고구려 신대왕편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04/05
고구려에서 통일한국의 미래 찾는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윤명철.2008/05/04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고구려 정신:플러스 코리아(Plus Korea)기사입력 2008/04/21 [02:15]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02
[대담]우리에게 고구려는 무엇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기사입력 2008/03/21 [03:10]
고구려 군대의 전쟁승리 원동력은 과학: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이종호.2008/03/15
뉴욕타임스에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 광고 실려 (hani.co.kr)2008-02-12
고구려사, 방송사들의 놀라운 역사왜곡: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임동주 사학자 | 기사입력 2008/01/08
[인문사회]한말 파란눈 학자들…아! 고구려|동아일보 (donga.com)2007-08-18
[열린세상] 태왕사신기 유감/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 서울신문 (seoul.co.kr)2007.11.26
[단독]광개토 태왕, 일본을 멸망시켰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7/08/23
서길수 교수 "고구려 아닌 '고구리'로 읽어야" (daum.net)2007.5.1
고준환의 '고구려 만주벌판을 달리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기사입력 2006/09/07 [13:39]
'고구려’는 ‘크크리’다 : 문화생활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hani.co.kr)2003.01.05
분자인류학논단 | 구려 ..고구려 ..고려..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고리족과 맥족은 다르다 - Daum 카페
역사 천문 기록을 통해 살펴본 고구려 관측지 - 양홍진 박사 (한국천문연구원) [히스토피아]
https://youtu.be/tmTYPktrIVM?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질문과 답변] 삼국사기 대무신왕조 15년,20년,27년조에 관해
https://youtu.be/NdUtW3KEmc8?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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