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2) - 광개태왕 서토남정의 개시 본문
신채호
서기 384년에 백제 근구수왕이 사망하고 장자인 침류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2년 만에 침류왕이 사망하자 차남인 진사왕이 즉위했다. 진사왕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호탕했던 그는 근구수가 성취한 강국의 위세만 믿고 인민을 함부로 혹사했다. 그는 지금의 개성인 청목령에서부터 위쪽으로 지금의 곡산인 팔곤성까지 성책을 쌓은 뒤 서쪽으로 꺾어 서해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았다. 또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최고라 할 수 있는 궁궐을 매우 장엄하게 쌓았다. 큰 연못을 파서 각종 어류를 기르고 연못 중앙에 인공 산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기이한 동물과 특이한 풀을 심었다. 그런 뒤 그곳에서 도를 넘는 오락을 즐겼다. 그러니 인민들이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해외의 영토를 적에 다 빼앗기는 바람에, 짧은 시간에 국세도 크게 쇠약해졌다.
고구려 고국양왕은 진사왕과 동시대 인물이다. 고국양왕은 부왕2)이 죽임을 당한 한(恨)과 영토를 빼앗긴 수치를 갚기 위해 항상 백제를 벼르고 있었다. 당시 선비족 모용씨가 전진에 의해 망한 뒤로 전진왕 부견이 강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부견이 90만 병력으로 동진을 쳤다가 대패했다. 이를 기회로 고국양왕은 요동·낙랑(북낙랑)·현토군 등을 다 회복했다.
이때 모용씨에서 나온 모용수란 자가 지금의 직예성을 근거로 천왕(天王)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다시 연(후연_옮긴이)이라 하고 세력을 회복했다. 모용수는 군대를 동원해서 자주 요동을 공격했다. 한편, 몽골 등지의 과려족(《삼국사기》의 거란족)이 강성해진 뒤에 고구려의 신성 등지를 침략했다. 그래서 즉위 이후의 고국양왕은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고 과려족을 쫓고 북방 변경을 지키기에 바빴다. 그래서 남방을 공격할 겨를이 없었다.
고국양왕의 태자인 담덕 즉 훗날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영민하고 용맹했다. 군사를 맡은 그는 항상 귀신처럼 빠른 전략으로 백제군을 기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누차 대패를 거듭한 진사왕은 결국 한강 남쪽의 위례성(지금의 광주 남한(南漢))으로 천도했다. 진사왕은 담덕의 군사행동이 무서워서 감히 전쟁에 나서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한수(中漢水) 즉 지금의 한강 이북 지역은 거의 다 고구려의 소유가 됐다. 관미성 즉 지금의 강화도는 예나 지금이나 천연적인 요새로 알려진 곳이다. 이 역시 담덕의 해군에 의해 함락됐다.
《삼국사기》에는 위와 같은 전쟁이 기록된 데 반해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가? 《삼국사기》는 본래 고대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3) 그런 기록들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서들에 인용된 문장들을 볼 때 그런 기록이 편년체가 아니라 기전체임을 알 수 있다. 기전체는 연대를 확인하기 곤란하다.4) 그런데 김부식은 그런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를 집필하면서, 연대를 착실히 조사하지도 않은 채 각 왕의 연대에 사실 관계를 아무렇게나 배분했다. 예컨대 그는 법흥왕 원년의 사건인 아라가야의 멸망을 진흥왕 37년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또 석현성 등의 회복과 과려족의 격퇴는 고국양왕 말년에 훗날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 태자 담덕이 이룩한 성과인데도, 이것을 태자 담덕이 왕이 된 뒤에 이룩한 성과인 것처럼 잘못 기록했다. 《삼국사기》를 읽을 때는 이런 것들을 잘 판별해야 한다.(1)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태왕은 야심이 넘치고 군사전략이 출중한 동시에, 동족에 대한 사랑도 많았다. 백제를 공격한 것도 백제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지, 영토를 탈취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태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력한 선비족을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과 직예성 등지를 소유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남방과의 전쟁은 소극적 의미밖에 없었고, 북방과의 전쟁만이 적극적 의미를 띠었다.
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진서》에서는 “고구려왕이 연나라(후연_옮긴이) 평주의 숙군성을 침략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도주했다”라고 한 것을 빼고, 그 외에는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 왜 이랬을까? 《춘추》에서 북적(北狄)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것은 중국 사관들이 습성이다. 사실, 모용씨의 후연이 망하고 탁발씨의 북위가 강해진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 동진의 유유(劉裕)가 일어나 선비족과 강족을 꺾고 또 유송(劉宋)의 고조가 황제가 될 기반을 닦은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간접적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완고한 습성을 고수하느라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 5세기 초반에 중국 정세가 바뀐 실제 원인이 은폐된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태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왕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서》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 그런데 선비족 정벌에 관한 내용이 한 구절도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예전에 태왕의 비석을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간 적이 있다. 그곳 여관에서 만주족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났다. 그와의 필담에서 나온 비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비석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영희(만주족)가 이것을 발견했다. 그 비문에서 고구려가 영토를 빼앗은 부분은 모두 다 칼과 도끼로 도려내져 있었다. 그래서 식별 가능한 문구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뒤 일본인이 이것을 차지한 뒤 영리를 위해 비문을 탁본해서 팔았다. 이때 문구가 깎인 곳을 석회로 바르다 보니, 더욱 더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내용이 첨부됐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왕이 선비족을 정복한 전공이 비문에 없는 것은 그런 내용이 삭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태왕이 평주를 함락한 뒤 선비족의 쇠락을 틈타 계속 진격했다면, 태왕이 개척한 영토는 그 존호 이상으로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후연 신하인 풍발이 후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후연에서 벼슬하던 고구려왕 후손 고운을 북연의 천왕으로 옹립하고 태왕에게 보고했을 때였다. 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면서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종족 간의 도리를 정하고 전쟁을 그쳤다. 이로써 태왕의 서진정책은 종언을 고했다. 태왕은 백제 근구수왕이 즉위하기 전년인 374년에 태어나서 391년에 즉위하고 412년에 죽었다. 향년 39세였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의 비문은 지금의 봉천성 집안현 북쪽 2리쯤에 있다. 높이는 약 21척이다. 서기 ○○○○년에 만주족인 영희가 발견해서(영희가 처음 탁본을 입수한 것은 1903년이다) 탁본해보니 비문에 빠진 글자가 많았다. 그 뒤 일본인이 비석을 입수한 뒤 탁본하여 판매했다. 이때는 빠진 글자를 석회로 발라 덧붙였다. 학자들은 그것의 실제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2)
기존 전략을 수정한 장수태왕
서기 412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491년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은 79년간이었다. 이 79년간은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다. 무슨 변화일까? 고구려 역대 제왕들은 서진(西進)주의나 서남(西南)동시공략주의를 썼다.1) 서수남진주의(西守南進主義, 서쪽을 방어하고 남쪽을 공격하는 전략_옮긴이)를 쓴 것은 장수태왕 때부터다. 이로 인해 남방의 삼국은 고구려에 맞서 공수동맹을 맺게 되었다. 당시,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져 있었고 신라와 가야도 점차 강성해지고 있어서 옛날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정치가라면, 남방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광개태왕은 이민족인 한족·선비족·과려족 등은 정복했지만, 동족 여러 나라는 고구려의 깃발 아래 자연스레 무릎을 꿇도록 하였다. 장수태왕은 이런 정책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동족을 먼저 통일하고 이민족과 싸우는 게 옳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광개태왕의 정책을 변경하고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남진주의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이때 후연 신하 풍발은 후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고구려 왕족의 방계인 고운을 북연 황제로 세움으로써 광개태왕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풍발은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천왕을 자처했다. 다음 대인 풍홍 때는 선비족 별종인 탁발씨가 지금의 산서 등지에서 북위를 세운 뒤로 나날이 강성해졌다. 탁발씨가 황하 이북을 거의 다 차지한 뒤 병력을 보내 북연을 치자 풍홍의 영토는 날로 줄어들었다. 견디기 힘들어진 풍홍은 고구려에 사신을 자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장수태왕은 서수남진이라는 확고한 전략을 갖고 있었기에, 북위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북연은 후연의 모용희 이래로 백성을 착취하여 궁궐과 정원을 매우 장엄하게 조성했을 뿐 아니라, 궁중에 보물과 미인을 수없이 모아 두었다. 그래서 음탕과 사치가 열국의 으뜸이었다. 욕심이 남달랐던 장수태왕은 이를 탐해 북연 사신을 속였다. 남방의 백제 때문에 고구려가 대병을 보낼 수는 없지만, 북연왕이 굳이 고구려에 체류하겠다고 한다면 장사들을 보내 영접한 뒤 기회를 봐서 북연을 구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북연왕 풍홍은 이를 수락했다.
서기 436년2)에 북위가 기병 1만 명과 보병 수만 명을 동원해서 북연의 서울인 화룡(지금의 조양)을 침입했다. 태왕(장수태왕_옮긴이)은 말치(좌보)인 맹광에게 수만 병력을 주고 북연왕 풍홍을 데려오도록 했다. 북연의 도성에 당도한 북위 군대가 서문으로 입성하자, 신속히 동문으로 들어간 맹광은 북위에 항복한 북연 상서령3) 곽생의 군대와 싸워 곽생을 죽였다. 또 북연의 무기고에 들어가 우수한 병장기를 빼내 북위 군대를 격파하고, 궁전에 방화한 뒤 미인과 보물을 이끌고 나왔다. 북위왕은 미인과 보물을 빼앗긴 것은 불평하지 못하면서도, 북연왕 풍홍이 고구려에 체류하는 것은 불평했다. 그래서 풍홍을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태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위의 환심을 잃지 않기 위해 북위와 자주 교류하는 한편, 남중국의 유송과도 친교를 맺어 북위를 견제했다.(3)
바둑 두는 승려의 음모와 백제의 추락
중국의 북위 및 유송을 외교적 수단으로 견제한 장수태왕은 백제를 파멸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장수태왕은 아버지 광개태왕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폭하고 사나운 음모가였다. 그는 칼과 활로 적국의 정면을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간교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적의 심복들을 부패시킨 뒤 실행에 착수하는 사람이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그는 비밀리에 조서를 내려, 백제 내정을 문란케 할 만한 계책을 가진 책사를 모집했다. 이 조서에 호응한 인물이 불교 승려 도림이었다.
당시 백제 근개루왕(개로왕_옮긴이)은 바둑의 명수였다. 도림 역시 바둑의 명수였다. 태왕에게 은밀히 자청한 도림은 허위로 죄를 짓고 백제에 들어갔다. 그는 근개루왕의 바둑 동무가 되어 조석으로 근개루왕을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 근개루왕은 자기와 바둑의 적수가 될 만한 이는 천하에 오직 도림 하나뿐이라면서 그를 둘도 없이 총애했다. 수년간 근개루왕의 곁에서 그의 성격과 행동을 골고루 훑어본 도림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일개 망명죄인으로서 대왕의 총애를 받아 이처럼 호화로운 의식주를 누리고 있지만,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온 마음을 다해 대왕께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대왕의 나라는 안으로는 산악을 끼고 밖으로는 바다에 싸여 있어서, 적병 백만 명도 어찌하지 못할 요새입니다. 대왕이 이런 요새에 의지하여 숭고한 지위와 풍요한 재산을 갖고 사방의 눈과 귀를 두려워 떨게 할 만한 기세를 보인다면, 사방의 열국이 열심히 존경하고 섬길 겁니다. 그런데도 성곽을 높이 쌓지 못하고 궁궐을 크게 짓지 못하며 선왕의 유골을 작은 묘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또 매년 장마 때마다 인민의 가옥이 강물에 흘러가버리니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 많습니다. 이러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쳐다보고 높이 받들겠습니까? 신은 이것이 대왕께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달콤하게 받아들인 근개루왕은 전국의 남녀를 총동원하여 벽돌을 굽고 둘레가 수십 리 되는 왕성을 높이 쌓고, 성 안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궁궐을 짓고, 욱리하 가의 큰 돌을 가져다가 큰 석관을 만들어 부왕의 유골을 넣은 뒤 넓은 왕릉에 매장하고,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쌓아 어떠한 장마에도 수재를 입지 않도록 하였다.
이 같은 공사를 마치자, 국고가 비고 군비가 없어지고 백성도 피폐해지고 도둑들이 창궐했다. 국가의 위급함이 누란지란 같았다. 이에 자신의 성공을 확신한 도림은 고구려로 도망가서 장수태왕에게 이런 사실을 아뢰었다.(4)
윤내현
고구려의 다물이념
지금까지 필자는 고구려가 그 말기에 수 당과 충돌하기 전까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대외관계 기록(주로 전쟁기록)을 살펴보면서 고구려 대외전쟁의 기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대외전쟁의 성격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첫번째 단게는 추모왕(서기 전 37~20년) 때부터 민중왕(서기 44~47년) 때까지로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반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두번째 단계는 모본왕(서기 48~52년) 때부터 미천왕(서기 300~330년) 때까지로서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와는 거의 마찰이 없었다. 백제와는 동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화평을 유지하였고, 신라와는 신하나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갈등의 요인을 없앴다. 세번째 단계는 고국원왕(서기 331~370년) 때부터로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침공한 시기였다. 이 기간에는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관게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의 대외정책에 보이는 이러한 분명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는 중국에 서한과 동한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있던 시기였으며, 고구려의 대외전쟁이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향하던 시대는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흥망과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일반 상식으로 본다면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하던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를 중단하고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는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했던 것은 맹목적인 영토 확장이 아니었고 다른 목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 방향에서 추구했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으므로 그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이 있기 직전 미천왕 때인 서기 315년에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중국의 군현을 모두 축출하여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를 그 판도에 넣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나 고조선 말기에 위만조선이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서한이 차지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 목표는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남쪽으로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것도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 해안까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서기 392~412년)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지금의 요서 밖의 비려,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 왜구 등을 침공하여 신하나라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는 이미 전부터 신하나라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은 물론 그 밖까지 호령함으로써 형식적이지만 고조선의 천하질서는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를 안전히 병합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을 신하나라로 삼아 조공을 비치도록 했으니 고조선시대의 거수국과 비슷한 천하질서가 일단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장수왕(서기 413~491년) 때부터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천하 질서를 이루기 위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직접지배 영역으로 만들 필요를 느끼고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고구려는 배후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나라들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에 수 · 당이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출현하여 이들과도 마찰을 빚게 됨으로서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구려의 대외전쟁은 한반도와 만주를 재통합하여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것으로서, 바로 다물이념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형식적이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이념은 광개토왕 때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수왕 때부터 추구했던 실질적인 통합에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이 고조선의 계승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졌음은 〈광개토왕릉비문〉으로도 뒷받침된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속민이었다" 하였고,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사 사실과는 다르다. 광개토왕 이전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동부여도 추모왕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구려시대가 아닌 그 이전 고조선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시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거주민이 고조선의 속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단군의 후손이라고 믿었으므로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를 포함한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들은 당연히 고구려 왕의 속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은 바로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다물이념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토만의 병합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
윤명철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궁금하다. 우리 민족이 자주성을 지키는 가운데 민족공동체로서 장구한 역사를 유지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가 큰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명분과 힘은 무엇일까? 원조선에서 출발해 오랫동안 통일과 분열의 변증법을 거쳐 온 역사공동체라는 정통성과 계승성 때문이 아닐까?
독립군들은 만주 벌판에서 싸울 때 단군을 앞세우고, ‘다물단’을 만들었고, 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공부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 강대국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면 지금도 역사의 정통성과 계승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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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북조와 '동아시아 4강' 형성한 고구려…전투·외교·무역 병행하며 국가 위상 높였다
장수왕은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한 뒤 남진을 계속했다. 서쪽은 금강 이북과 대전 일부 지역을, 동쪽은 경북의 순흥 안동 청송을 지나 영해까지 영토로 삼았다. 481년에는 포항 외곽까지 공격해 육지 영토를 넓혔다. 동해 중부 이북, 서해 중부 이북, 요동만에서 해양력을 강화했고,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경기만을 안정적인 내해로 삼아 평양, 강화, 남양(화성시) 등을 항구로 삼았다.
4세기부터는 일본 열도와도 교류했다.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시마네현 지역의 이즈모 등에는 고구려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북한 사학자 김석형의 설). <일본서기>에는 장수왕 75년에 왜인들이 고구려와 내통한 내용을 포함해 모두 12번에 걸쳐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고구려는 중국 지역, 북방 지역, 일본 열도 등과 전투, 외교, 무역을 병행하는 해륙국가로 변신했다. 북방의 유연, 중국의 남북조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이뤘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연구>).
산업을 발전시키고 동아시아 물류 허브가 된 나라. 백성의 신뢰를 받는 지도자들이 국제관계의 중핵에서 성숙하고 자의식에 충실한 문화를 일군 나라. 나는 이 같은 고구려의 부활(refoundation)을 꿈꾸며 ‘동아지중해 중핵조정 역할’과 통일을 뛰어넘은 ‘해륙국가의 완성’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
성훈
고구려 천리장성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북경북 ~ 산해관 장성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것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10/24 [13:34]
명립답부의 쿠데타에 의해 차대제가 시해 당하고, 8세 신대제가 즉위하였으나 조정의 실권은 모후인 상태후와 명립답부가 쥐게 되었다. 한나라 대군이 침입했을 때 말 한필도 살려보내지 않은 좌원대첩의 명재상 명립답부와 신대제는 같은 해에 죽는다. 두 사람은 참으로 인연이 많기도 한 것 같다.
신대제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9대 고국천제가 즉위한다. 6년(A.D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오자, 임금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여 역시 좌원에서 크게 이겨 목 벤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이를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 한다고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략>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국천제는 을파소라는 명재상을 국상(國相)으로 등용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 죽려지인을 주어서 부도한 이들을 즉석에서 주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빈민을 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훌륭한 군주였으나 주색에 빠져 끝을 좋게 맺지 못하고 춘추 43세에 승하했다 한다.
10대 산상제의 등극과 발기의 실패한 역쿠데타
고국천제가 승하하자 황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고국천제의 부인인 우후(于后)가 국상이 났음을 숨기고, 예전부터 통정하던 연우(신대제의 서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가짜 조서로써 제위에 세우고 국상이 났음을 알리게 된다. 여기에 반발하는 측이 있었으니 바로 고국천제의 동복아우인 발기(發岐)였다. 즉 황위가 서자 출신의 배다른 동생 산상제에게 돌아가자 적출(嫡出)인 형 발기가 반발을 하고 나섰다.
이에 국상 을파소가 산상제를 받들고 발기를 치자, 발기는 두눌 지방으로 도망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공손찬은 발기를 돕는 척 하며 고구려의 서쪽인 서안평(西安平) 등을 쳐서 빼앗는다. 나중에 요동태수에게 속은 것을 안 발기는 울분으로 등창이 날 지경이었다.
발기는 사병(私兵) 300인을 거느리고 범궐(犯闕)하나 붙잡히게 되고, 산상제는 어리석고 무모하였던 것이라며 발기의 죄를 면하여 주었으나, 발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두눌의 땅으로 들어가 칭제하고는 공손탁과 상통하게 된다. 그러자 산상제가 군대를 보내 두눌을 쳐서 빼앗으니 마침내 발기는 패하고 자결하고 만다고 <고구려사초.략>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위의 기록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 우씨가 이를 비밀에 부치고 밤에 아우인 발기의 집을 찾아가서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모르고 대답하기를 “하늘의 운수는 정해져 있으니 함부로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어찌 예라 할 수 있으리까?”하니 황후가 무안해하며 나와 연우의 집으로 찾아간다.
연우가 의관을 정제하며 문에 나와 맞으며 술을 대접하니 “대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집안 중 어른이라 당연히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나더러 딴 마음이 있다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시숙을 보러 온 것이오.”말한다. 연우는 밤에 불상사가 있을 지도 모르니 궁중까지 데려다 달라는 우후의 청을 응락하고 따라가니 왕후가 손을 잡고 들어가고, 이튿날 거짓으로 선왕의 유명이라 꾸미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세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기가 이를 듣고 노해 군사를 내어 왕궁을 3일간이나 포위했음에도 백성들이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으니 일이 글렀음을 알고 처자를 버리고 요동으로 도망친다.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3만의 군사를 빌려 고구려로 쳐들어오나 아우 계수에게 패해 배천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왕이 본시 우씨로 인해 말미암아 위를 얻었기 때문에 다시 장가를 들지 아니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후사정으로 보아 이 내용은 <고구려사초.략>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우씨가 후계 서열 0순위인 발기에게는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연우에게는 왕이 죽었음을 알렸다는 것과 둘이 밤에 손을 잡고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다. 서로 연인 사이가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인 것이다. 중차대한 황위를 전함에 있어 이렇듯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다.
따라서 필자는 고국천제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4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하한 것은 필시 연인 관계인 우후와 연우가 짜고 뭔가 독살 음모를 완벽하게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멀쩡하던 고국천제의 죽음과 산상제의 등극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게다가 고국천왕의 등극에서도 두 사서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고국천제는 신대제의 둘째 아들인 것은 서로 기록이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발기를 고국천왕의 친형’으로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현(玄)태자가 장자이나 선하기는 해도 용감하지 못하여 부황이 고국천제를 후사로 삼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고국천왕이 죽자 우씨가 왕의 아우 발기의 집을 찾아갔고, 발기가 궁궐을 포위하고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것이 예이거늘 너는 차서를 무시하고 마구 빼앗는 큰 죄를 범하였다.”고 적었다. 이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고국천왕의 등극 과정에서는 발기가 형으로 기록되었다가, 고국천왕이 죽은 다음에는 발기가 동생이 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발기가 일으킨 내란(반란)으로 인해 고구려는 서쪽 땅인 서안평 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잃어버린 서안평을 산상제 9년(205년)에 다시 되찾게 된다. 서안평은 우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으로 이 서안평 일대를 한나라와 고구려의 경계로 보면 될 것이다.
당시 위나라와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고구려가 서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점이요, 위나라가 고구려로 북동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이 서안평을 현 압록강변의 단동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나,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서안평은 석문(현 석가장) 부근인 것이다.
산상제는 형수인 우후와 혼인하여 부부가 된다. 예로부터 고구려에는 증모처수(烝母妻嫂)라는 제도가 있어 형수인 우후와 시동생인 산상제의 혼인은 평범한 일이었다. 증모처수란 제도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친모 이외의 서모나 형수/계수를 처로 거두는 것으로 북방유목민족의 고유한 풍습이었다.
단군의 후손인 선비족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 선비는 조선비왕(朝鮮卑王)의 준말이다. 선비족으로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 문제가 아들인 양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양제는 아버지의 후궁인 한국부인을 취한다. 역사기록에서는 이를 증(烝)이라 한다. 증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인 당태종 이세민의 궁녀였던 무미랑(후에 측천무후)을 좋아했던 당고종은 태종이 죽자 출궁하여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무미랑을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는다. 무미랑은 나중에 황후가 되어서는 간질병이 있었던 당고종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결한다. 황제 아닌 황제로 군림하던 무측천은 황제인 자신의 두 아들(중종과 예종)을 끌어내리고 나중에는 직접 중국역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주(周)나라의 일대 여황제가 된다.
참고로 산상제의 아들인 11대 동천대왕이 승하하자 장자인 중천대제가 즉위한다. 그러자 동생 예물이 “선제가 독살 당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면서 병사를 일으켜 범궐하였으나 결국은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실패한 쿠데타였다.
14대 봉상제의 등극과 창조리의 쿠데타
서천제가 53세에 갑자기 죽자 맏아들인 치갈태자가 봉상제로 즉위한다. 태자 시절부터 성품이 교만하고 색을 밝혔으며 시기하는 것도 많았고 매우 잔인하여, 선제(서천제)는 자질이 모자라는 태자에게 나라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는데 서천제가 갑자기 죽자 어머니 우후가 거짓 조서로 봉상제를 세웠다.
또한 안국군에게 병권을 빼앗아 우후의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탄식하며 한숨지었다고 <고구려사초.략>은 기록하고 있다. 안국군은 봉상제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자결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자결이 아니라 왕이 안국군이 숙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까닭으로 계획적으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에는 황태제인 아우 돌고를 죽인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 없이 죽었다 하여 애통해 했다. 돌고의 태자인 을불(乙弗 후에 미천제)은 탈출하여 도망간다. 봉상제는 을불을 사로잡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을불이 붙잡혀 함거에 실려 보내지자 백성들이 습격하여 풀어주는 일이 발생한다.
나라 안은 서리와 우박으로 곡물이 죽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궁궐 노역에 시달려 원성이 자자하였다. 백성들은 서로 뭉쳐서 도둑이 되는 세상이 되었고, 하늘에서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일어났다.
9년(300년) 8월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이 궁궐을 짓는 부역에 끌려갔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국상 창조리(倉助利)와 신하들이 이를 간해도 황제는 듣지 않았다. 창조리가 충심으로 간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국상이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 하는가? 다시 말이 없기를 바란다.”했다.
창조리는 임금이 마음을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염려되어 군신들과 더불어 을불을 맞아들여 황제로 세우고 봉상제를 행궁에 가두었더니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모본제와 차대제에 이은 세 번째 폐위였던 것이다.
미천제(을불)는 일찍부터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하는 등 세상을 유랑하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깨달았기에 황제로 등극해서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열고, 30만 수륙군을 양성해 고구려를 군사강국으로 키운다.
당시 중원은 한조, 선비, 흉노가 엉켜 5호 16국으로 나뉘어 서로 전쟁하기에 바빴기에 대륙의 진정한 강자는 고구려와 백제뿐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별다른 쿠데타(정변) 없이 한동안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어진다.
만고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한 쿠데타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26대 영양제가 죽고 27대 황제로 이복동생인 건무(建武 영류제)가 즉위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고조 이연은 영류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는, 고.수 전쟁 후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돌려 보내달라고 하여 찾아보았더니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양국 사이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 것이다.
영류제는 형인 전 황제의 모든 정책을 폐기한다. 그리고는 당나라로부터 천존(天尊)의 상과 도교(道敎)의 법을 가지고 온 도사(道士)에게 노자(老子)와 도덕경을 강의하게 하고 백성들과 함께 들었다. 또한 당나라는 사람을 보내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을 묻고 위령제를 지냈으며 당시에 세웠던 경관(京觀 살수대첩 승전기념비)을 헐어 버렸다.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류제 14년(631년) 백성 수십만을 동원해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으로 부여성에서 동남으로 남해부(南海府) 바다에 이르기까지 1,000여리를 잇대니 무려 16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 하는데(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之海 千有餘里 凡十六年畢功: 구당서에는 동과 서를 바꿔 기록함으로서 우리 역사를 왜곡한다),
이 장성은 동단(東端)인 산해관 노룡두 (山海關 老龍頭)에서 시작해 북경 북쪽으로 이어지는 장성의 원본(오리지날)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이 천리장성이 아닌가 한다. 후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막기 위해 산해관부터 북경 북방으로 이어지는 장성을 개.보수를 하는데, 중국 사학자들은 연나라 장성을 개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과연 그럴까? (다음에 상세히 소개됩니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도교를 강의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하자고 왕께 청하였으나, 영류제는 오히려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고는 은밀하게 다른 대인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 소문을 듣고 탄식하며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여 대신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고자 하였다. 모두들 참석하자 연개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들 구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하니 측근들이 오는 대로 모두 잡아 죽이니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영류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송양으로 도망쳐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들을 모으려 했으나 한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다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고 <한단고기>는 적고 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열전>에는 영류왕의 죽임에 대해 달리 적고 있다. “그 길로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여 여러 동강을 내어 구렁텅이에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은 영류제의 조카인 장(藏)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고구려의 마지막 대왕(황제)인 보장제인 것이다.
이렇듯 고구려에서는 몇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으나 역성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즉 황제는 바뀌었으나 나라가 바뀌지 않고 주몽의 후손인 고씨(高氏)가 제위(帝位)를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비록 황제는 되지 않았지만, 전권(全權)을 한 손에 틀어쥐고는 마치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세하면서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드는데 전념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쿠데타 뒤에는 오히려 정치가 안정되고 민심이 수습되며 더욱 강성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덕한 황제가 바뀌는 큰 정변 뒤에는 명림답부, 을파소, 연개소문과 같은 명재상이 있었던 것은 900년 고구려 사직의 크나큰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될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8)
이진아
고구려인은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의 강을 지배했을까
- 기자명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 입력 2020.05.26 08:32
- 수정 2020.08.05 15:59
- 호수 2609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며 던져진 화두, 그 핵심은 한민족이 과거에 동아시아 대부분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일부까지를 포함하는 방대한 영토의 주인이었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입력해 출력한 우리 앞의 이 지도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고구려에서 출발해 보자. 지도를 보면 일식 현상 관측 중심지, 혹은 정치 중심지라고 추정되는 곳이 두 군데다. 강력한 국가의 중심지가 되기엔 위도가 너무 높은 곳에 치우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위도가 높으면 기온이 낮고 일조량이 적어 농업생산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많은 인구를 부양하는 도시로 성장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에는 이곳도 꽤 살기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볼 만한 근거가 있다. 이때는 지구 기후변화 역사에 있어서 온난한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46억년 역사를 통해서 기온이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으로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기후변화가 진행되어 왔다. 그중 지난 4000년 동안의 변화를 표시한 것이 위 왼쪽 그래프다. 오른쪽 그래프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이라는 고구려 존속 기간의 기후변화를 보여준다. 대체로 기온이 높은 편이어서 위도가 좀 높다 하더라도 농사가 잘돼서 인구가 불어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기후가 온난한 시대엔 산에 삼림이 무성해지고 강엔 수량이 많아져서 물길로 이동하기 쉬워진다. 이렇게 물길로 이동하기 쉬웠다는 점이 바로 박창범 교수의 지도가 시사하는, 넓은 고구려의 영토가 가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다. 이 지역은 지대가 높은 몽골고원 쪽에서 북쪽으로는 북극해, 동쪽으로는 태평양에 이르는 아주 긴 거리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서서히 낮아지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긴 강이 모여 있는 곳이며, 이런 곳에서 권력을 장악한 집단은 그만큼 넓은 영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 지도는 박창범 교수의 지도가 보여주는 고구려 일식 관측 중심지와, 그곳이 실제 고구려의 중심지였다면 고구려인들이 이용했을 법한 강의 수계를 표시한 것이다. 아무르강, 레나강, 셀렝가강의 주요 흐름만 알아보기 쉽게 표시했다.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곳이 박창범 교수의 천문관측지도가 시사해 주는 고구려 중심지 추정 위치다. 보라색 선이 아무르강을 이루는 수계로, 이 강의 제1지류는 바로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쑹화강이다. 진한 청색 선은 레나강인데, 바이칼 호수를 제일 큰 발원지로 해서 지금까지 고구려 영토였다고 알려진 지역의 북쪽, 현재 러시아 영토를 통과해서 북극해로 흘러 들어간다. 밝은 청색 선은 몽골 지역 전체를 흐르는 강들이 바이칼호수로 모여드는 셀렝가강 수계를 표시한다.
기후와 함께 지형을 고려한다면 오른쪽 빨간 원으로 표시된 곳이 고구려의 중심지였을 거라는 추정에 무리가 없다. 세계 9위의 긴 강인 아무르강 상류 수계와 10위인 레나강 상류 수계 사이에 위치하는 곳, 현재는 러시아 영토로 자바이칼 변강주 지역이다. 러시아, 몽골, 중국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이며, 여러 갈래의 지천들이 만나 큰 강을 형성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비옥한 땅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지역, 이 지도에서 왼쪽의 빨간 원을 보자. 몽골고원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알타이산맥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는 몽골과 카자흐스탄의 접경 지역이다. 서쪽으로 높은 산을 둔 기슭이니까 건조한 바람을 막아주며, 기후가 온난해서 산림이 무성한 시기에는 비옥한 충적토가 조성되는 살기 좋은 땅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얼핏 보아선 고구려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고구려의 주요 수로였을 레나강을 거슬러 올라가 바이칼호수에 도착, 거기서 셀렝가강을 따라 지금의 몽골 전 지역으로 가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르강 최상류 지천에서 셀렝가강 지천 사이가 불과 40~50㎞ 떨어진 곳도 있으니 그곳을 통해 연결됐을 가능성도 있다.
몽골의 지형은 주로 고원인데 바이칼호수 쪽은 꺼져 있어서, 고원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강들이 모두 모여 바이칼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를 하고 있다. 셀렝가강 수계다. 거꾸로 보아 바이칼호수 쪽에서 강을 타고 올라가면 몽골 전역으로 갈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이 물줄기를 따라 당시 몽골의 주요 지역을 전부 장악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박창범 교수의 천문관측지도에서 고구려 일식 관측지의 중심으로 보여지는 두 곳은 실제로 정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당시의 기후조건과 그 지역의 지형을 통합해서 인간 거주의 기반이 되는 생태학적 조건을 찬찬히 따져보면, 오히려 고구려 사람들이 그 정도의 활동무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여기서 또 하나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동할 수 있다고 해서 다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자기 나라 영토를 만들 수 있는가? 고구려 사람들이 그렇게 강했을까? 거기 대한 필자의 대답은 단연 “그렇다”이다. 그 이유가 다음의 주제다.(9)
고구려인들의 강력한 한 방, 흑요석의 정체
- 기자명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 입력 2020.06.02 08:44
- 수정 2020.08.05 15:59
- 호수 2610
“동(東)으로는 북태평양 오오츠크해 연안에서 서(西)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한 영역이 고구려 땅이었다.” 엄정한 과학의 소산인 고(古)천문학 지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이것을 사실(fact)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전 연재 기사에서 서술한 논리에 따르면 이는 충분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지형·기후·삼림 분포·하천 환경 등 생태학적 조건을 통합해서 고려한다면 말이다. 고구려인의 활동 시기는 기후적으로 봤을 때 온난기였다. 게다가 고구려 영토로 추정될 수 있는 광활한 지역에는 고산지대를 관통해 흐르는 긴 강들이 호수들을 연결고리 삼아 이어져 있었다. 당시의 산에는 지금보다 나무가 무성했고, 따라서 여기서 발현한 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었을 것이다. 큰 배를 만들어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박창범 교수의 고대 관측지도와 당시의 지정학적·생태학적 환경 조건을 고려해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를 추정하면 사진1에서 주황색으로 표시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풍부한 삼림 기슭엔 비옥한 땅이 조성되어 사람이 살기 좋았고, 사람들은 서로 연결된 긴 강을 따라 소통하기 쉬웠을 테다. 이 넓은 땅에 많은 인간 집단이 살고 있었을 텐데,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한반도 북부 출신인 고구려인들이 이 영토의 주인이었다고 말하는 건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에게는 그들만의 강력한 한 방이 있었다. 바로 ‘흑요석’이다. 흑요석은 유리질의 화산석이다. 투명하게 검고 부드러운 광채가 있어, 예전부터 문학작품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검은 눈을 흑요석에 많이 비유했다. 웬만한 금속보다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면서도 잘 깨지지도 않는다. 그 절단면을 아주 날카롭게도 무디게도 만들 수 있고, 쉽게 변형되거나 부패하지 않는다.
지금은 흑요석이 희귀해져서 고가의 보석으로 여겨지며, 드물긴 하지만 첨단 수술 기계의 날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까마득한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해서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상당 기간, 흑요석은 가장 폭넓게 쓰인 원자재였다. 과거 사람들은 흑요석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 무기·농기구·낚시바늘·도끼 등을 만들었으며, 조리용구·식기·장신구·등잔 등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흑요석은 나오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 화산이 폭발할 때 형성되는 화산암인데, 흑요석이 만들어지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용암의 주성분이 유리질을 많이 포함한 알칼리성 유문암이어야 하고, 뿜어져 나오면서 바로 폭우를 맞던가 해서 급속 냉각이 돼야 한다.
흑요석이 많이 나는 곳의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흑요석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류가 처음으로 장기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만든 것도 흑요석으로 인한 것이란 연구1)도 있다. 기원전 1만 년, 지중해에 ‘배’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와 그리스의 멜로스 섬 등에서 나는 흑요석을 나르기 위해서였다. 또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도시로 알려진 사탈후유크(기원전 7000년 경, 현재 터키 영토)는 흑요석 생산, 가공, 수출 때문에 만들어진 도시였다.
그런데 백두산 인근에 엄청난 규모의 흑요석 광맥이 형성되어 있다. 기원전 9만 년에서 기원전 8만 년까지 약 1만 년 동안, 백두산이 대규모 폭발을 한 시기가 있었다. 지질학자들이 백운봉기 대폭발이라 이름 붙인 이 폭발 당시에 알칼리성 유문암의 용암이 대거 분출됐다. 그 결과 알칼리성 화강암이 산의 대부분 지역을 덮었는데, 동남부 사면에는 대규모 흑요석 광맥이 형성된 것이다. 태평양 쪽에서 오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백두산 인근의 찬 공기와 부딪쳐서 때맞추어 폭우를 퍼부었던 것일까?
이 광맥은 유라시아 대륙의 아시아 쪽 북쪽 절반, 그러니까 우랄산맥의 동쪽에서 오오츠크해에 이르는 광활한 일대에서 유일한 흑요석 산지다. 지금의 주류 역사학에서는 흑요석이 인류의 문명에서 갖는 의미를 크게 조명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딕슨과 렌퓨 박사팀의 연구처럼 역사학이 과학과 결합한다면, 백두산 인근에 기반을 두어 출발한 고구려가 우랄산맥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과학적인 논거를 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역은 지금의 러시아·중국·몽골·카자흐스탄에 걸쳐져 있다. 과거 이 지역의 주인이 한민족이었다 하더라도, 1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충분히 왜곡되고 잊힐 만하며, 다시 그 역사를 복구하기 위한 현지 조사도 쉽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한가지 과학적 사실은 분명하다. 이 일대에서 흑요석 산지는 백두산 동남사면 뿐이라는 것 말이다.
만일 고구려가 정말 이 광활한 땅의 주인이었다면, 고구려 사람들은 흑요석의 유일한 생산자로서 갖는 파워를 잘 활용했던 거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온난기에 잘 형성된 수로(水路)를 따라 쉽게 세를 넓혀 갔을 것이다. 굳이 전쟁을 통해 정복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흑요석을 갖고 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을 시절이니까.
전쟁을 했더라도 문제없었을 것이다. 가볍고 강하며 가공하기 좋은 흑요석은 화살, 창, 칼 등의 무기에서 제일 중요한 날 선 촉을 만드는 최적의 재료였다. 중국의 한족(漢族)이 한반도 사람들을 이족(夷族), 즉 큰 활을 잘 쓰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전설 속에는 중국 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두려움과 동시에 추앙을 받았던 ‘치우(蚩尤)’황제가, 역사 속에서는 실크로드를 평정했던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의 이름이 남아있다. 이 외에도 이 지역에서는 한민족의 뛰어난 용맹과 전투력을 증언하는 민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박창범 교수의 지도에서 A의 영향권인 카자흐스탄이 고구려의 흔적을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은 현지와 교류하는 다수의 학자 및 저널리스트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언어구조, 단군 등 신화 모티브들이 고구려의 것과 대단히 유사할 뿐 아니라 고대사회의 군사 편성 시스템도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까지 연구결과 드러났다.
고구려는 막강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한반도 전체의 주인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반도 남부와 서부에 자리 잡은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10)
1) 1968년 미국의 J.E.딕슨과 C.렌퓨 박사 팀이 흑요석 유물의 잔재를 분광분석하는 과학적 연구방식을 통해 밝힌 것이다.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태왕1) 서토남정의 개시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네이버 지식백과] 기존 전략을 수정한 장수태왕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4) [네이버 지식백과] 바둑 두는 승려의 음모와 백제의 추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5)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324-326쪽
(6)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0070387901
(7)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0071795591
(8) 고구려 천리장성과 연개소문의 쿠데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10/24
(9) 고구려인은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의 강을 지배했을까 - 주간조선 (chosun.com)
(10) 고구려인들의 강력한 한 방, 흑요석의 정체 - 주간조선 (chosun.com)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조선상고사》
- 제1장 고구려·백제 관계의 유래
- 제2장 근구수왕의 무공과 고구려의 위축(백제의 해외정벌)
-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정책과 선비족 정복
- 제4장 장수태왕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 제1장 4개국 연합군의 전쟁과 고구려의 퇴각
- 제2장 백제의 북위 격퇴와 해외식민지 획득
“아시아의 조공·책봉은 君臣아닌 外交관계”
2004년 08월 02일 (월요일) 18 : 26 조선일보
[조선일보 유석재, 이하원 기자]
[이덕일의 한국통사]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 고구려의 불교를 일으킨 소수림왕의 조카 담덕이 왕이 된 사연
https://youtu.be/FC5708AjZD0?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제1부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高談德)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제2부_팍스 코리아나, 고구려에 의한 평화
역사추적 – 광개토대왕 청동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
https://youtu.be/Ohe3EaKFb2c?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KBS역사스페셜 – 고구려 남부전선 최후의 증언, 임진강 철갑옷
https://youtu.be/l90qGwTkE8Y?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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