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수도]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신동아 (donga.com)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잃어버린 땅’ 고구려 고토(古土)를 가다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 입력2015-08-21 14:06:00
  • 삼국사기의 ‘東’자를 해석하지 않은 역사학계
  • 지안(集安)엔 국내성 아닌 황성이 있었다
  • 장수태왕은 이북 평양으로 천도한 적 없다
  • 말로만 식민사관 탈피, 실제론 일제 史觀에 묶여
괄목상대(刮目相對). 오랜만에 찾아간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가 그러했다. 밝아지고 화려해지고 북적였다. 이유는 한국인이 풀어놓는 ‘돈’ 때문인 듯했다. 2003년 중국이 펼치는 동북공정이 알려진 후 수많은 한국인이 광개토태왕비 등이 있는 지안을 찾아왔다. ‘한국인의 성지’가 된 탓에 지안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7월 1일 지린시 인근의 한 다리에서는 고구려-발해 역사 탐방에 나선 한국의 지방공무원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해 10명(운전자 포함하면 11명)이 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최두영 지방행정원장은 지안으로 날아가 사고를 수습하다 7월 5일 투신자살했다.

과거 지안에는 꼬질꼬질한 지안호텔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도시에나 있을 법한 홍콩성호텔[香港城大酒店]의 불빛이 번쩍인다. 최 원장은 이 호텔에 묵었다가 자살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지안박물관은 몇 해 전만 해도 매우 초라했다. 그런데 지금은 ‘해자(垓字)’ 모양을 한 작은 연못을 두른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압록강이 휘돌아가는 첩첩산중인 지안에는 ‘한국인’만 오는데, 그들이 쓴 돈으로 지안은 환골탈태했다. 바뀐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안박물관에 들어가니 바로 한국인을 알아본 직원들이 따라붙으며, “절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슬쩍 찍는 것을 보면 불러 세워 삭제하게 했다. 이전 박물관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들은 동북공정을 의식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고 그런 모조품을 펼쳐놓고 ‘중국 고구려’ 운운하는 설명만 잔뜩 달아놓았는데, 뭐가 두려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가. 전시 내용이 한국에 알려질 경우 일어날 반발을 염려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으로부터는 돈만 벌고, 중국이 생각하는 고구려사를 한국인에게 주입하겠다’는 것인가.



고조선 ‘고’자도 안 보여

내몽골자치구와 맞닿은 랴오닝성 젠핑현 우하량(牛河梁)은 한국에서 가기엔 매우 멀다. 베이징(北京)이나 선양(瀋陽)공항에서 자동차로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한다. 그런데도 그곳을 찾는 것은 고조선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하량 일대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은 내몽골자치구 츠펑(赤峰)시 인근에 있는 홍산(紅山)에서 먼저 나왔기에 ‘홍산문화’로 통칭된다.

홍산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 황하(黃河) 중류에서 일어난 오르도스 문화다. 오르도스 문화는 바로 하(夏)-상(商)-주(周)나라의 중국 역사로 이어진다. 중국 고대 문헌에는 오르도스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 제법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 기록은 전무해, 홍산문화는 요동(만주)과 한반도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한국인은 우하량에 흥분한다.

우하량에서는 눈동자에 녹색 옥(玉)을 박고 흙으로 빚어 구운 여성의 얼굴상(像) 등과 곰 이빨을 박아서 만든 곰상(熊像)의 파편 등이 발굴됐다. 두 개의 상(像) 앞에 제물로 올려진 것 같은 돼지 뼈 등이 함께 발굴됐기에 학자들은 우하량에 살던 이들이 여성(여신)신과 곰을 숭배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분석은 환웅(桓雄)족과 결혼동맹을 맺어 단군을 낳은 웅녀(熊女)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삼국유사 등에 거론된 고조선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기에, 뜻있는 이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중국은 그러한 우하량에도 역사 공작과 돈벌이를 할 준비를 해놓았다. 적잖은 입장료를 받는 ‘우하량 유지(遺址)박물관’을 지어놓고 중국 역사에 흡수됐다고 꾸며놓은 홍산문화를 보여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곳에서는 고조선의 ‘고’자도 보이지 않는다.

숨 막히는 중국의 역사 공작이다. 답답한 심정이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둘러보지 않으면 고조선의 역사 흔적을 볼 수 없기에 많은 한국인이 지안과 우하량을 찾는다. 중국의 역사 도발은 장난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무대응에 요지부동이다. 새로운 연구는 하지 않고 일본 학자들이 과거에 내린 판단만 고수한다. 말로는 식민사관 탈피를 주장하면서.



“지안엔 국내성 아닌 黃城”

고구려사를 바로 세우려면 고구려의 수도와 영토가 어디였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먼저 수도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지안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런데도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한국 역사학계는 죽었다”라고까지 말한다.

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온 고구려의 천도사(史)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주목할 것이 서기 343년 고국원왕 13년 7월에 한 5차 천도다. 이 천도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4차 천도 1년 뒤에 일어났다. 1년 만에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누란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뒤에서 상술하고, 5차 천도에만 집중해보자.

삼국사기는 이 천도에 대해 ‘추칠월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秋七月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으로 적어놓았다. 학자들은 이 한문을 ‘가을 7월에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고 번역해왔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중심이 돼 만들었기에 ‘지금[今]’은 삼국사기를 낸 고려 때를 의미한다. 이는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해석이다.

그런데 인하대의 복기대 교수(고고학)는 이 해석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번역은 원문 두 번째 문장에서 고딕으로 표기한 ‘동(東)’자를 해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동’을 넣어 제대로 번역하면, “이 성은 지금[삼국사기를 출간한 고려]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가 된다고 설명한다. ‘서경 목멱산’이 아니라 ‘서경 동쪽의 목멱산’이라는 것이다.

‘동’자를 넣어 해석한 그는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동황성도 ‘동’과 ‘황성’을 띄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전체 원문은 ‘가을 7월에 (왕이) 평양 동쪽에 있는 황성(黃城)으로 옮겨왔다. 이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이 성을 동황성으로 보았으나 그는 황성으로 본다. 복 교수의 해석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찾는 단서가 돼준다.

국내성 광개토왕비는 없다

광개토태왕은 고국원왕의 손자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6차 천도)하니, 광개토태왕릉과 그 비석은 황성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릉비는 지금 지안에 있다. 그럼 지안이 바로 황성이 되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국내성을 2대 유리명왕부터 10대 산상왕 때까지의 수도였다고 밝혀 놓았다(참조). 그렇다면 국내성 근처에서는 19대인 광개토태왕의 능비가 발견될 수 없다. 삼국사기만 제대로 봐도 국내성에는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는데 국사 교과서는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무지(無知)를 보인다.

지안을 국내성으로 처음 비정한 이는 일제 때 활동한 일본인 학자 도리이류조(鳥居龍臧)였다. 일제 때는 고구려사는 물론이고 역사 연구 자체가 일천했으니 정확한 역사를 추적할 수 없었다. 도리이는 제한된 자료와 자기 판단으로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속절없이 이를 따른다.

에서 보듯 고구려는 95년간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1년간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황성에서 84년을 보내고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는 85년 만에 다시 평양성을 수도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85년 전의 평양성과 85년 후의 평양성은 같은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서로 다른 곳으로 분석해왔다. 85년 후 옮겨간 평양성은 이북의 평양성에 있고 그전의 평양성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 대세였다. 국사 교과서는 85년 전의 평양에 대해선 아예 거론도 하지 않는다. 고구려가 평양성(85년 전의 평양)을 처음 수도로 삼은 것은 서기 247년인 11대 동천왕 21년 2월이다.

동천왕이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전의 고구려는 환도성을 수도로 삼았다. 동천왕 20년 8월 고구려는 소설 ‘삼국지’에도 나오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역사에서는 조조의 성을 따서 曹魏로 부른다)의 장수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때문에 동천왕은 “환도성은 병란을 치렀기에 다시 수도로 삼을 수 없다”며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기게 했다(천도를 했다는 뜻). 이 사실을 전한 삼국사기는 이어 ‘평양은 본디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으로, 왕의 도읍터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라고 기록했다. 왕검은 단군을 가리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라고도 한다)에서 나라를 연 단군왕검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첫 번째 천도) 비로소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이 평양성이 지금[삼국유사를 편찬한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단군왕검이 첫 번째로 천도한 곳이 평양인데, 고구려의 동천왕은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 평양이라고 하면서 천도를 했으니,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은 것이 분명해진다.

고조선 평양이 고구려 평양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고구려는 95년간 번성하다, 다시 심각한 위기를 만났다. 모용황이 이끄는 전연(前燕)군의 압력을 받게 된 것.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싸웠는데, 그러한 전연이 모용황 시절 강성해졌다. 모용황이 침입할 것이 분명해지자 고구려는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수도인 평양성을 증축했다(고국원왕 4년). 세자를 전연에 보내 모용황을 알현하고 달래보게도 했다(고국원왕 10년).

그런데도 모용황이 침입할 의지를 굽히지 않자 고국원왕은 12년 8월 환도성으로 ‘피난성’ 천도를 했다. 그러자 그해 12월 모용황이 남로(南路)와 북로(北路)로 침공했다. 이 공격으로 모용황군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의 부인과 어머니를 붙잡았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라는 곳으로 도주해 붙잡히지 않았다. 고국원왕 생포에 실패한 모용황군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고국원왕 아버지인 미천왕 무덤을 파 시신을 끌고 갔다.

전연에 지고 백제에 죽고

처절하게 패배한 고국원왕은 환도성은 물론이고 평양성으로도 들어갈 수 없어 평양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는 황성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전연군이 고국원왕을 굴복만 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전연은 중국으로 쳐들어갈 뜻이 있었기에 고구려 땅을 장악하기 위한 부대는 남겨놓지 않았다.

고국원왕은 당나라에 끌려갔던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 다음으로 고단했던 임금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동명성왕을 시조로 모신 이복형제 사이다. 그래서인지 고국원왕 선대에서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신도 교환하지 않았다(백제와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서로 단 한 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고구려를 굴복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전연은 모용황이 죽으면서 약해졌다. 서쪽에서 일어난 전진(前秦)이 맹렬하게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전연은 중국 진출이란 꿈을 접고 방어에 급급하다 무너져갔다. 견디지 못한 전연에서는 ‘태부(太傅)’라는 높은 벼슬을 가진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주해왔는데, 복수심에 불탄 고국원왕은 그를 붙잡아 전진으로 보냈다. 그해 전연은 패망했다(고국원왕 40년, 서기 370년).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해 약탈하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전연이 패망하기 1년 전(369), 힘을 회복한 고국원왕은 백제 때리기에 나섰다. 2만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백제를 치러 간 것.

그런데 치양이란 곳에서 싸우다 패배했다. 전연에 패한 후 처음으로 기병한 것이 백제와의 첫 전쟁이었는데, 고구려는 또 패배한 것이다.

그러자 2년 뒤(371) 백제의 근초고왕이 복수를 해왔다. 3만 병사를 이끌고 원래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병사를 이끌고 막으러 나갔다가 조준하지 않고 쏜 화살인 ‘헛살[流矢]’에 맞아 두 달 뒤 붕어했다. 그러한 고국원왕의 손자가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은 할아버지의 원한 갚기에 나섰다.

광개토태왕비는 그의 아들 장수태왕이 세운 것이라, 당대의 일은 삼국사기보다 더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광개토왕비는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백제를 ‘백잔(百殘)’과 ‘잔국(殘國)’으로 새겨놓았다. 이 비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원문은 생략. △는 비문에서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



광개토태왕은 전연을 세운 선비족의 잔당도 토벌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패려(稗麗)로 표현했다. 비문은 광개토태왕이 패려를 쳐서 얻은 새로운 영토를 시찰까지 했다며 이렇게 표현했다(원문 생략).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복수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친 것은 남진정책, 선비를 두들긴 것은 서진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장수태왕 때 한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렇게 본 이유로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꼽는다. 국사 교과서 편찬자들은 장수태왕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그런 판단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곳은 85년 전 수도로 삼은 평양이다. 삼국사기 고국원왕 조는 평양 동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평양은 황성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황성은 지금의 지안이니, 평양은 지안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북 평양은 지안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주장은 삼국사기 내용과 완전 배치된다.

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신동아 2013년 2월호 참조).

삼국사기는 고국원왕 13년 7월 조(앞에서 ‘동’을 고딕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도읍을)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겼다. 이 성(황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함으로써,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삼국유사도 ‘(고조선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이는 평양에 대한 현재 해석을 완전 뒤집는 중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역사학계는 고려가 서경이라고 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고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이북 평양이 고려와 조선의 평양이다’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과 다르다.

고구려의 평양이 이북 평양이 아니라는 것은 조선시대 청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갔던 이들이 써놓은 여행기에서 숱하게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 근처로 가니 그곳을 평양이라고 한다. 조선에 있는 평양과 어떻게 다른가’란 의문을 남겨놓았다.

장수태왕은 南進 아닌 西進

요동에 있는 평양을 이북의 평양으로 끌고 온 것은 조선이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뒤집은 이방원이 명나라 황실에 ‘화녕과 조선 중에 나라 이름을 정해달라’고 하자 명 황제가 조선을 골랐다. 그때 조선은 요동을 장악하지 못했다. 요동을 수복하려는 최영을 죽이고 등극한 것이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북 평양을 평양이라 부르며 기자의 사당과 기자의 무덤을 지었다. 이 정책이 성공해 요동에 있는 평양과 별도로 이북 평양이 만들어지면서 역사 추적에 혼란이 생겼다.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고구려의 국력이 회복됐다는 뜻이다. 고구려를 괴롭히다가 사라진 연나라(전연)는 그 후 다시 일어나는데, 이 연나라를 앞의 연과 구분하기 위해 후연(後燕)이라고 한다. 후연은 장수태왕의 고구려와 맞서다 세력이 약해져 황실이 바뀌는데, 이를 북연(北燕)이라고 한다. 북위(北魏)가 공격하자 북연 황제인 풍홍은 고구려로 도주해왔다.

장수태왕은 그를 2년 정도 받아줬다가 죽여 북위로 보냈다. 장수태왕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킨 것이다. 증조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단단히 갚은 장수태왕은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48년이 지난 475년(장수왕 6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격하고 백제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에 이어 또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고구려는 이렇게 장악한 한성을 고구려가 수도로 삼았던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3경으로 삼았다는 것이 중국 정사인 북사(北史) 등에 있는 기록이다. 그러한 고구려는 함께 북연을 없앤 북위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100여 년간 싸우지 않고 잘 지냈다.

고구려는 705년 역사에서 233번 외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중 37%에 해당하는 87회를 북위와 교환했다. 장수태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 4명의 왕만 상대한 것이 북위인데, 이렇게 많은 사신을 보낸 것은 고구려가 북위와의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장수태왕 때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처럼 데리고 있었고 백제에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으니 남쪽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새로 강국이 된 북위와의 관계에 전력을 기울였으니, 그때의 고구려 정책은 서진정책으로 보아야 한다.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다. 조선사는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폈다고 써놓았다. 일제는 고구려의 힘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 이렇게 했을 수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그대로 사용해왔다.

의무려산이 요동 · 요서의 기준

강성기의 고구려가 랴오양시 인근에 있는 평양을 다시 수도로 삼았다면 고구려는 서진을 한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이미 패려를 정벌해 새로 확보한 영토를 광개토태왕이 둘러보는 유관토경(遊觀土境)을 했고 장수태왕 때는 북연의 황제를 죽였으니 서쪽으로 영토를 넓혔을 것이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만주평원은 요하 좌우에 있는 드넓은 평야를 가리킨다. 지금은 요하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하라고 하지만, 현지에 가서 보면 요동과 요서는 요하라는 물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역사학계는 전성기의 고구려가 요하를 지나 지금의 요서평원 어디쯤을 국경선으로 삼았을 것으로 막연히 추측한다.

우리 역사학계의 큰 오류 중 하나는 고구려는 돌성[石城]만 쌓았다는 인식이다. 우리도 토성(土城)을 쌓았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풍납동에서 발굴된, 백제가 쌓았다고 보는 대규모 토성이다. 요하 동서에는 이렇다 할 돌산이 없어 돌성을 지을 방법이 없다. 그곳에서는 토성을 지어야 한다. 랴오닝(遼寧)성의 베이전(北鎭)시에 가면 고구려 때 쌓은 것이 확실한 토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베이전시는 요서 지역의 요하평원이 끝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남북으로 긴 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중국은 산맥을 산으로 표기한다). 그러한 베이전시에는 고구려와 동시대인 북위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마애불상이 있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돌로 만든 무덤도 발견됐다(그러나 오래전에 도굴돼 유물은 없었다). 이는 고구려가 의무려산 동쪽을 확실한 영토로 지배했다는 뜻이다.

고구려와 대륙 세력은 의무려산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요동·요서를 나누는 기준은 요하가 아니라 의무려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전성기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만리장성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차지했다는 증거가 있다. 산해관 동쪽에 갈석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이 산을 동쪽(왼쪽)에 있는 갈석산이라 하여 좌갈석으로 불렀다. 갈석산은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가 오른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불린다.

만리장성 근처까지 차지

당나라 때 ‘두우’라는 중국인이 만든 책 ‘통전(通典)’에는 ‘’지금(당나라 시절) 북평군 남쪽 20여리는 고려(고구려) 땅인데 그곳에 좌갈석이 있다[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라고 해놓았다. 이는 고구려가 좌갈석산을 차지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산해관 근처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만리장성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의무려산도 넘어가지 못한 모양으로 고구려 최대 영토를 그린다.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잘못 비정했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도 좁게 그리는 어리석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웃는 것은 통전을 비롯해 많은 사서와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땅을 차지한 중국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언제 식민사학에서 벗어날까. 고구려의 원혼이 땅을 칠 노릇이다.

 

 

  • 기사입력 2017.09.18 11:41

고구려의 압록수와 평양은 현 압록강과 평양 아니다!  - 한국NGO신문 (ngonews.kr)

황순종『매국사학의 18가지 거짓말』 저자

  • 기자명황순종
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43) 고구려의 압록수와 평양은 현 압록강과 평양 아니다!

『삼국사기』는 동천왕이 옮긴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지 않았으나, 훗날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 평양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하여 “평양은 서경인 것 같고 패수는 대동강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은 한 번도 지금의 평양에 있은 적이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 이를 수ㆍ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기록을 통해 밝히겠다.

▲ 고구려 시기의 압록수, 살수, 평양, 사비성 위치

고구려 때의 ‘압록수’는 현 요하
중국의 수나라가 남북을 통합한 후 양제는 612년에 2백 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수나라의 9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에 이른 뒤 ‘압록수의 서쪽’에 재집결했는데 을지문덕 장군이 압록수를 건너와 거짓 항복하겠다고 속이고 다시 압록수를 건너 돌아왔다. 수나라는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 압록수를 건너 추격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삼국사기』‘영양왕’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수나라 군대는)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십 리 되는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펼쳤다.”

매국사학에서는 이 압록수를 당연히 지금의 압록강으로, 그리고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고 있으며, 각 급 학교에서 모두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위 기록과 맞지 않는 반도사관에 불과하다. 수나라 군사가 ‘압록수의 서쪽’에 집결했다고 했는데, 만약 압록수가 지금의 압록강이었다면 동서로 흐르는 압록강의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집결했다고 해야 된다. 또 수나라 군대가 압록수를 건너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넜다고 했다. 살수가 만약 청천강이라면 압록강을 건넌 후 동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진격해야 이르게 됨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위의 압록수는 지금의 랴오허(遼河)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나라 군대가 남북으로 흐르는 이 랴오허의 서쪽에 집결한 것이며, 또 이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에 이른 것이다. 『삼국유사』 ‘순도조려’ 조에 보이는 “요수(지금의 랴오허)는 일명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고 한 기록에서 랴오허를 이전에 압록수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평양은 현 북한의 평양 아니다!
그리고 또 수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십 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인 이때의 평양은 살수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청천강의 남쪽인 지금의 평양이 될 수 없음도 자명하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또 하나 있다. 수 양제는 거듭된 패전에도 불구하고 614년에 3차 원정에 나섰으며, 이때 수나라 수군 대장 내호아는 비사성으로 진격했는데 이에 관하여 ‘영양왕’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우니 내호아는 이를 쳐 이기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 ”

여기의 비사성은 지금의 랴오허 동쪽, 발해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하이청(海城)을 말한다. 매국사학에서는 지금의 랴오허(요하)를 옛 요수로 간주하여 그 강이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경계였던 것으로 우기지만 두 나라의 국경인 옛 요수는 지금의 랴오허가 아니라 훨씬 더 서쪽인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흐르는 강이었다.

그러므로 양제가 처음베이징 부근의 국경인 요수를 건너 압록수(지금의 랴오허)까지 진격하여 군사들을 그 서쪽에 재집결시켰고, 수군대장 래호아가 랴오허 하류의 비사성(지금의 하이청)에 상륙한 것은 평양성을 공략함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상륙했을 것이다.

따라서, 평양성은 랴오허와 살수의 멀지 않은 동쪽, 비사성으로부터도 멀지 않은 북쪽에 있어야 하는데, 최근 강원대 남의현 교수는 요양이 당시의 평양이었다고 밝혔다. 만에 하나라도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내호아는 당연히 대동강으로 상륙하지 거기서 멀리 떨어진 요하 입구로 상륙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고대사학계에서는 이렇게 명확한 것조차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입력 2015.03.18 08:54 수정 2015.03.18 09:13

고구려 도읍지 역사 새롭게 쓰일까 - 시사IN (sisain.co.kr)

‘고구려의 평양’에 대해 연구하는 복기대 교수는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 대한 교차 분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고구려사에 접근하고 있다.

기자명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복기대 교수는 국내 고조선 연구 권위자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직계 제자다. 윤 교수로부터 문헌학적 연구 기초를 배운 그는 우리 상고사의 무대였던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랴오닝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길림성(지린성) 지린 대학에서 박사를 하면서 홍산문명(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 문명)과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조선 연구를 백안시해온 주류 사학계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견제를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발표한 〈고구려 도읍지 천도에 대한 재검토〉 논문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류 사학계 내에서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다. 중국 사서에 대한 치밀한 교차 분석과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문이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박사 과정의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구려사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역사 연구 주관부서인 교육부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이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 연구과제 공모에 복기대 교수팀이 참여해 앞으로 3년간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현재 복 교수를 중심으로 문헌 연구, 지리 연구, 고고학 전공자 등이 참여하는 연구단을 구성했다.

ⓒ시사IN남문희신채호가 투옥되었던 뤼순 감옥을 찾은 상고사 전문가 복기대 교수.
 
연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복 교수가 주장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 상고사 체계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하는 대사건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고려 초기의 강역부터 바꿔야 한다. 장수왕이 요양(랴오양)으로 천도한 후 계속 그곳에 머물다가 거기서 당나라에 패했다면 그 뒤로도 한민족이 만주 일대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즉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선이 지금 알려진 것과 달라질 수 있다. 고려 초기 북쪽 경계가 원산만과 청천강으로 알려졌는데, 조선 초 편찬한 고려사에는 고려의 북쪽 경계가 지금의 지린성 일대인 선춘령이었고 서쪽으로는 고구려에는 못 미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즉 고구려처럼 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요동(랴오둥) 땅의 상당 부분을 고려가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거란의 동쪽 경계나 여말 선초 철령위 문제를 가지고 비정해보면 대략 현재 랴오닝성 본계(번시)시까지 고려의 국경선이 뻗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국가의 강역은 이웃 국가의 국경선, 그리고 선대의 국경선 등과 수직 수평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하나가 바뀌면 그에 따라 나머지도 전부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향후 연구 결과에 따라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복 교수의 연구가 있기 전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왔다. 즉 동명왕이 현 랴오닝성 환인에서 첫 도읍을 열었고 유리왕 때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 그다음 산상왕 때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장수왕 때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국사 교과서에서 대대로 수록돼 왔다.

 

그가 ‘평양’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

복 교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국에서 공부할 때였다. 1992년 랴오닝 대학에서 수학할 때 만주 지역의 지리와 역사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요해총서〉라는 책을 처음 보고 혼란을 느꼈다. 국내에서 배운 한국사와 다른 얘기가 많아서다. 처음에는 그 역시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 등 다른 중국 사서를 비교해보니 내용이 딱딱 맞아들어 갔다. 그러던 중 〈자치통감〉 강의를 듣던 중국인 교수로부터 “사실 수나라와 고구려 간 전쟁 때 수나라가 지금의 평양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라는 얘기를 들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보다 당시 랴오양을 여행하던 박지원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복 교수의 논문을 읽어보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초기 연구가 엉터리로 진행됐다는 점이 드러난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패수를 대동강으로 규정해놓고 지금의 평양이 그 위에 있으니 옛 고구려 평양이라는 식으로 단정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실증사학을 표방했던 식민사학의 파탄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바로 자신들의 의도와 맞지 않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이나 〈요사〉 〈원사〉 등의 사서는 무시해버리는 태도다. 특히 고구려 천도 과정에 대한 그들의 설정이 잘못됐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 고고학계가 해당 지역을 전부 발굴해봤는데 그 시기의 유물이 나온 게 없었다는 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동명왕 1년(BC 37년)에 도읍했다는 환인현 오녀산성에서는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동천왕(247년)~고국원왕(342년)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왔다. 또 AD 3년에 해당하는 유리왕 때 왕궁 터라던 지안의 국내성 터와 200여 년 후인 AD 209년 산상왕의 환도성 터로 알려진 지안의 왕궁 터 유물·유구에 큰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다 장수왕이 옮긴 평양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랴오양이라면 식민사학에 이어 해방 후 주류 사학이 견지해온 고구려 도읍지 역사는 모두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수도를 옮긴 것이 세 번이 아니라 모두 일곱 번이었다(위 표 참조). 환도성이 두 번, 평양성이 네 번이다. 그동안의 학설은 이름이 같으면 같은 지역으로 봤는데, 이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따라서 전체 8군데의 도읍지를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했다. 이 중 처음 세 곳인 졸본·국내성·환도는 복 교수가 2010년 논문을 쓸 때까지는 찾지 못했으나 지금은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동천왕 21년 옮긴 평양은 고구려 창건지로 잘못 알려진 환인으로 확인됐다. 문헌 기록을 교차 확인하고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 결과에서 고구려 중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확인됐다. 이곳에서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초기까지 재임했다.

고국원왕 대에 전연의 모용황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환인 안에서 환도성으로 1년간 거처를 옮겼으나 모용황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미천왕의 묘가 파헤쳐지고 고국원왕의 모친이 포로로 잡혀간다. 이 상황에서 고국원왕이 천도한 곳이 지금 광개토대왕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린성 지안의 동황성(東黃城)이다. 지안은 랴오둥의 중심에서 멀찍이 벗어난 곳으로, 패전의 실의를 딛고 재충전해야 할 고구려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 기간 고구려의 위대한 왕들이 등장한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동쪽으로 신라·백제, 랴오둥의 북쪽까지 광범위하게 영토를 확장했다. 더 이상 랴오둥의 구석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됐다. 따라서 장수왕 대에서 랴오둥 지역의 중심인 랴오양에 진출해 적극적인 서진정책을 추진했고, 베이징 근처 난하(롼허) 유역까지 완전히 수복함으로써 국시인 ‘다물’정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입력 2015.03.18 08:54 수정 2015.03.18 16:55 391호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 시사IN (sisain.co.kr)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가 배워온 것과 전혀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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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의 백암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해발 300~400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인데도, 막상 들어서자 발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등산로에는 얼음이 녹는 중이라 미끄러지기 십상이었고, 그 옆에는 눈이 수북했다. 등산로 왼편으로는 매끈하게 빠진 성곽이 정상까지 쭉 이어졌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백암산성(白巖山城)’이 사성(蛇城·뱀성)이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밝혔는데, 아닌 게 아니라 길게 도열한 성곽 모습이 꼭 뱀의 몸뚱어리 같았다.

민간 답사팀의 강청을 못 이겨 동참하게 된 복기대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과)는 백암산성이라는 이름이 영 마뜩지 않은 눈치다. 고구려-당나라 전쟁 당시 백암산성 성주 손대흠이 항복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하는데, 이 성은 아무리 봐도 대규모 전투를 치를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병력을 주둔시키거나 무기와 식량을 보관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직접 정상에 올라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답사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렇게 천혜의 지형 위에 축성을 했는데 군사적 용도를 배제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도 나왔다. 고구려 산성 특유의 방어용 시설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것 역시 반박의 근거가 되었다.

ⓒ시사IN 남문희백암산성 정상부에 있는 정방형의 석축물. 강화도 참성단과 같은 원리다.
 
서울에서 조사한 자료의 내용은 이랬다. “백암산성: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서대요향에 있는 고구려 산성. 하얀 석회암으로 쌓아 백암산성이라 불렀다. 당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10년에 걸쳐 6m 높이의 거대한 산성을 쌓았다. 성 밑에 절벽이 있고 태자하(太子河)가 흘러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둘러보니 과연 군대가 주둔했을 법한 공간이 없다. 그나마 정상 부위는 공간이 더욱 좁아져 탑을 연상케 한다. 방어용 요새라고 보기 어렵다는 복 교수의 판단에 수긍이 갔다.

그렇다면 백암산성은 도대체 어떤 건축물이란 말인가? 정상에는 정방형 석축물이 있다. 고구려인들이 당대에 쌓았다. 모습이 범상치 않다. 지난해 국립 고천문연구소 선임연구원들과 함께 조사 작업을 벌인 복 교수 팀은 천문 관측용 시설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각형인 석축물의 각 모서리는, 약간의 오차가 있기는 하나, 거의 정북·정남·정동·정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고대의 천문 관측에서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정북 방향을 기준으로 시설물을 배치하는데, 백암산성 석축물 역시 그런 원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이 낯설지 않다. 요서·요동(랴오시·랴오둥) 지역의 고대 유물 전문 사진작가로 백암산성만 20여 차례 방문했다는 전성영씨는 “석축물 위아래가 전형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모습을 띠고 있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각형인 석축물 아래의 기초 시설이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원지방’이란 하늘을 원으로, 땅은 네모로 보는 동양의 전통적 관념이다. 지상에 이를 구현할 때는 반대로 원형 구조물(하늘) 위에 정방형 단(땅)을 얹는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이나 경주 첨성대가 전형이다. 모두 천문을 관측하는 유적들이다. 고대부터 요동(랴오둥) 지역의 중심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요양(랴오양)의 고구려 산성에서 마니산의 참성단과 비슷한 유적을 보게 되다니…. 묘한 전율감을 느꼈다.

 

ⓒ시사IN 남문희백암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태자하 모습. 왼쪽에서부터 흘러와 앞쪽으로 해서 발해만으로 향한다.
강화도와 랴오양의 고조선 문명

 

답사팀이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20일 오전이었다. 대련(다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북쪽으로 달려 이미 캄캄해진 뒤에야 영구(잉커우) 대석붕(고인돌)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해성(하이청)의 석목성자(析木城子)산의 고인돌과 산 정상부 곰바위(복기대 박사 작명)에 새겨진 별자리 그림까지 봤다. 백암산성의 석축물과 석붕산·석목성자산의 고인돌 간에는 기묘한 일관성이 관찰된다. 모두 천문 관측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고인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이다. 한반도의 한강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되는 남방식 고인돌은 주로 지석묘, 즉 매장 용도로 활용되었다. 이에 비해 북방식은 대다수가 기단 위에 탁자를 올린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제사나 천문 관측에 관련된 구조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방식 고인돌은 하나같이 진남북 방향, 즉 하지나 동지, 특히 동지 때 해 뜨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두칠성 방향이다. 특히 석목성자산 정상의 곰바위에는 BC 3000년대의 이곳에서 관찰된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시사IN 남문희하이청(해성)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천문 관측과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런 북방식 고인돌과 백암산성 석축물로 이루어진 조합은 또다시 강화도를 연상시킨다. 강화도에도 비슷한 북방식 고인돌이 있기 때문이다. 두 군데 문명이 마치 포개놓은 듯 닮았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복 교수에 따르면, 강화도뿐 아니라 황해도나 평양, 즉 한반도 서해안에도 비슷한 유적들이 등장한다. 현재로서는 고대 대륙 문명의 주인공이었던 고조선 유민들이 두 차례의 정치적 격변(위만의 기자조선 정권 찬탈,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황해도나 평양 등에 진출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장이 나온다.

온갖 상념을 간직한 채 백암산성 절벽 아래 태자하를 찾았다. 복기대 교수는 2010년 발표한 논문 〈고구려 도읍지 천도에 대한 재검토〉(고구려 도읍지 역사 새롭게 쓰일까 참조)에서, ‘요양이 고구려 전성기의 수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주장의 핵심적 키워드가 바로 태자하다. 복 교수는 한국 상고사의 해묵은 논쟁 주제인 패수(浿水)가 태자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패수는 상고시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었던 강이다. 패수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고조선의 강역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일부 조선시대 유학자나 일제시대 일본 관변 사학자, 현대의 주류 사학자들은 패수를 압록강이나 청천강으로 본다. 이에 반해 일제하에서 민족사학을 개척했던 신채호, 〈고조선 연구〉를 쓴 북한 사학자 이지린,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 등은 요서(랴오시) 지역의 대릉하(다링허)나 난하(롼허)를 패수라고 주장했다.

 
ⓒ시사IN 남문희랴오양 박물관 안의 전시실 입구. 평양의 앞뒤를 바꿔 양평이라 불렀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랴오양 박물관에 걸려 있는 <요사> 지리지(왼쪽). 오른쪽 둘째 줄에 이곳이 옛 평양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같은 ‘패수 논쟁’의 역사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후한 말엽인 3세기에 나온 지리서 〈수경〉에는 ‘패수가 동남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200여 년 뒤인 남북조 시대 북위의 지리학자인 역도원은 이에 의문을 품고 고구려 사신에게 직접 패수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역도원의 지리서 〈수경주〉에 따르면, 고구려 사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즉 수도인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 ‘패수 논쟁’의 시발점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는 패수로 불리는 강이 다수 등장한다. 〈수경주〉를 단서로 패수의 위치를 추정하려면, 저자인 역도원이 언제 고구려 사신을 만났는지 분석해야 한다. 복 교수는 그 시기를 고구려 문자명왕 때로 본다. 장수왕 바로 다음 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다. 이 평양이 지금 북한의 수도인 그 도시라면, 〈수경주〉의 패수는 평양 남쪽 즉 대동강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복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평양이 바로 이곳 랴오닝성 랴오양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중국의 여러 사서들이다. 특히 중국 역대 왕조들이 공식 편찬한 관찬 사서인 〈25사〉 중 〈요사〉와 〈원사〉에 당시 동경요양부로 불렸던 랴오양의 내력이 언급됐다는 것이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조의 다음 구절을 보자.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내 그들이 거처하는 평양성에 이르게 했으니….”

위 태무제 때 고구려왕은 장수왕이다. 따라서 위 내용을 풀면 위의 태무제 때 동경요양부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고 장수왕이 그곳에 거처했다는 것이 된다. 원나라 때 역사를 밝힌 〈원사〉 지리지에도 지금 북한의 평양이 원래의 옛 평양이 아니라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패수’를 태자하라고 추정하는 이유

“진나라 의희(義熙) 이후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 평양성에 살았다.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점령하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의 동남으로 천여 리다. 예전의 평양이 아니다.”

위 내용 중 고련은 바로 장수왕의 이름이다. 거련(巨連 또는 璉)이라고도 한다. 의희는 동진(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민족의 발호 때문에 강남으로 달아나 세운 왕조)의 연호 중 하나로 405~418년에 사용되었다. ‘의희 이후’라면 418년 이후인데,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가 427년이다. 즉, 고구려 문자명왕 시대의 평양(장수왕이 이곳으로 천도)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사〉 지리지에서 밝힌 동경요양부(지금의 랴오양)라는 것이다.

왜 이런 혼돈이 벌어졌을까. 고구려 도읍지를 가리키는 평양이나 환도 등의 용어는 어느 특정 지역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평평하고 너른 땅’, 즉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에 가깝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평양으로 불려도 시기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진다. 고국원왕 때 거의 패망 수준으로 랴오둥의 구석인 집안(지안)현까지 쫓겨 갔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거치면서 장수왕 때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동진정책을 통해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랴오둥의 북부로 영토를 확대했다면, 장수왕은 적극적인 서진정책으로 베이징 근처 난하(롼허) 유역까지 진출했다. 이런 나라의 수도로 지안현은 너무 외지고 협소했다. 따라서 요동벌의 중심이자 문물의 집산지인 랴오둥으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그때 평양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참조).

그렇다면 〈수경주〉에 등장한 패수는 어디인가. 〈요사〉 지리지의 또 다른 부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 패수는 요양(랴오양) 근처에 있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 사신의 증언까지 종합하면, ‘랴오양 부근을 거쳐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 패수다. 랴오양 근처의 강으로는 혼하와 태자하가 있다. 그런데 혼하는 랴오양의 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복 교수는, 랴오양을 통과하는 바로 저 발 밑의 태자하가 패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22일 오전, 별 기대 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 입력 2015.03.18 08:53 수정 2015.03.19 12:00 391호

그때 평양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 시사IN (sisain.co.kr)

기자명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지금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 때 어떤 지명으로 불렸을까? 요동·요서(랴오둥·랴오시) 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한 고구려 등 북방 민족들은 지역 거점(京·경)을 여러 군데 두었다. 산이 많은 지형 때문에 이동과 연락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해와 거란은 오경(五京), 고구려는 삼경(三京)을 설치했다. 고구려의 삼경은 평양·국내성·한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지금의 평양에서 한성이라는 명문이 찍힌 유물이 몇 차례 발견됐다고 한다. 고구려 당시 지명이 한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이라는 이름은 고려 공민왕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사〉 지리지에서 ‘지금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라고 기록한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랴오양이라면 이후 고구려 수도는 어떻게 됐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100여 년 뒤인 평원왕 때 장안성으로 다시 천도했다. 복기대 교수는 2010년 논문에서 이 장안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복 교수는 이후 연구를 통해 종전의 추정을 수정한다. 장안성 역시 랴오양에 있었을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마침 명나라 때 지도를 보면, 랴오양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장안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구려가 당과 치른 마지막 혈전이 랴오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시사IN 남문희랴오양 박물관 안의 전시실 입구. 평양의 앞뒤를 바꿔 양평이라 불렀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랴오양 박물관에 걸려 있는 <요사> 지리지(왼쪽). 오른쪽 둘째 줄에 이곳이 옛 평양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신동아 (donga.com)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 이정훈 기자 | hoon@donga.com
  • 입력2013-01-22 17:13:00
 
  • 요령성 요양은 본래 고조선 땅이었다
  •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후 요양이 수도
  • 패수도 요양 근처, 발해 중경도 요양에 위치

사회과부도 교과서의 고구려 지도. 우리 교과서는 장수태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요사’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지금의 중국 땅에서 일어났고 관련 유적과 자료가 중국에 있으니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른다. 이런 답답함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학자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인 ‘요사(遼史)’를 완역했다. ‘요사’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이 때문에 여러 학자가 부분 번역했지만 완역되기는 처음이다.

번역 기획은 복기대 뇌교육대학원 교수(고고학)가 했다. 복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와 ‘금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 ‘금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귀국 후 그는 스승인 윤내현 단국대 교수와 ‘요사’ 전문가인 김위현 명지대 교수와 협의한 뒤 교육인적자원부를 설득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때라 교육부도 우리 국사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요사’ ‘금사’ 인정 안 하는 중국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족이 겁낸 적국인데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했기에 다음 왕조는 그들의 역사서를 제작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를 제작한 것은 한족이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두 사서만 비(非)한족이 만든 것이다(반면 ‘원사’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학계는 두 사서가 부정확하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에도 전해져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사서는 원나라 말기 몽골인인 탈탈(脫脫)의 주도로 급하게 제작됐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를 이유로 두 사서의 기록을 무시한다. 그러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는 고려와 세 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학자들은 이에 착안해 동북공정에 맞설 객관적 사료 확보를 위해 1월 중순 ‘요사’ 번역본을 내놓았다. ‘금사’는 내년 말 완역본을 낼 예정이다.

‘요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한4군은 만주에 있었다

고조선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었다. 지리지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줘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고 밝혀놓았으니 조선은 곧 기자조선이다. 8조법금은 기자가 만들었는데, 지리지도 ‘그(기자)가 8조법금을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요양에 도읍했음을 재확인했다.

지리지는 기자조선이 40여 대 왕을 이어오다 중국 연(燕)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과 ‘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秦)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漢,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황제가 된 유방(한고조)은 고향 친구이자 부하 무장으로 공을 세운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다. 유방은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그들이 한나라 왕실을 넘보지 않을까 의심했다.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항우 군을 궤멸시킨 1등 공신 한신을 특히 의심해, 몇 가지 혐의를 씌워 그의 허리를 잘라 죽였다(요참형·腰斬刑). 그때 한신이 원한에 사무쳐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한신이 죽임을 당하자 책사 장량은 재빨리 낙향했다. 장량이 은둔한 곳이 오늘날 유명 관광지가 된 장가계(張家界)다. 유방이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해가자 연왕인 노관도 불안을 느껴 흉노의 땅으로 도망갔다. 노관 밑에서 장수를 하던 이가 위만인데, 상사가 달아나자 그도 위기를 느껴 요양으로 도주했다. 지리지는 ‘그때 요양 일대는 빈 땅이었는데 위만이 들어와 왕을 했다’고 밝혀놓았다. 위만조선이 일어난 것이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이 때문에 유방의 손자로 7대 황제가 된 유철(한무제)이 해륙(海陸)으로 맹공격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세웠다. 지리지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을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郡)으로 삼았다고 밝혀놓았다. 그렇다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웠다

우리는 요령성 땅을 세로로 가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遼東)’, 서쪽을 ‘요서(遼西)’로 부른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강을 요하로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 요나라를 세운 다음이다. 요나라가 있기 전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인만 남겨놓았는데, 요양은 중국인의 역사 무대인 중원(中原)에서 너무 먼 곳이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요하의 ‘요(遼)’는 ‘멀 요’자다. 한족은 요하를 ‘멀리 있는 강’으로만 이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을 ‘요하’라고 불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로 통칭됐다.

산해관 동쪽으로 난하, 대릉하, 그리고 지금의 요하가 있다. 진나라 때의 중국인들은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니 난하 동쪽이 요동이었다. 난하 동쪽은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요나라 이전인 고구려 시절에는 요동이 요서가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보고, 고구려 성(城)이 전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던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수(隨)와 당(唐)의 성은 지금의 요하까지 이르도록 동진(東進)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헌납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는 ‘요양은 진(秦)나라 때 요동의 변방에 속했다’고 밝혀놓았다. 요양은 요하 바로 동쪽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이라면 요동의 변방에 있는 것이 맞다. ‘요사’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요양이 고구려 수도 평양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혈전’

고구려를 굴복시킨 전연은 고국원왕이 살아 있던 370년 새로 일어난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국원왕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진나라를 부추겨 전연을 공격해 무너지게 했다. 전연을 무너뜨린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 등과 다르다. 사가들은 이 진을 다른 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前秦)’으로 적고 있다.

전연이 전진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전, 모용황의 동생 모용수가 전진에 투항해, 부견의 부하가 됐다. 전연이 무너진 이듬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평양 동황성인 듯)까지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371년). 기사회생을 위해 애쓰던 풍운아 고국원왕은 그렇게 스러졌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진 전연을 대신해 고구려의 새로운 원수가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등극하면서 국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382년 전진이 동진(東晉)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전진에서 부견의 부하로 있던 모용수가 독립해 384년 다시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이를 ‘후연(後燕)’으로 부른다.

후연이 출범한 해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죽고 동생인 고국양왕이 등극했다. 이듬해(385년) 1월 고국양왕은 후연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해 11월에는 후연이 반격해 승리했다. ‘고연전’이 재개된 것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391~412)이 등극했다. 396년 후연에서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황제가 됐다.

광개토태왕은 400, 402, 404, 407년 연거푸 공격해 후연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광개토태왕 군은 지금의 내몽골과 하북성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비려(碑麗)’로 표현하면서 광대토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고 적어놓았다. 지리지는 모용보가 이끄는 후연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게 된 것을, ‘모용보가 고구려왕 고안(高安·광개토태왕의 이름)을 그곳(요양)에 살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후연은 광개토태왕 군과 함께 탁발 씨가 세운 또 다른 선비족의 나라 위(魏·북위)의 공격을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됐다. 탁발 선비는 위나라를 세운 뒤 성을 원(元)씨로 바꿨다. 이 위나라를 조조가 세운 위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위’ 또는 ‘원위’로 표기한다. ‘요사’ 지리지는 ‘원위의 태무제가 그(광개토태왕)가 살고 있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것도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요양으로 재천도했음을 보여준다.

407년 ‘고연전’이 끝나자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연이 새 왕조를 열었다. 고연은 연을 그대로 국호로 삼았는데, 사가들은 이를 ‘북연(北燕)’으로 명명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그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략해 아신왕을 생포해 항복을 받았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광개토태왕비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새겨놓았다.

북한도 ‘평양 수도說’ 합세

고구려와 합세해 후연을 무너지게 한 북위는 5호16국 시절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이러한 북위는 고구려와 싸우지 않고 외교 관계로 경쟁했다. 고구려와 북위가 양대 효웅이던 시절 또 다른 선비족인 거란이 등장했다.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그 후 거란은 고구려가 약화될 때만 반기를 드는 고구려의 반(半)복속 종족이 됐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했다. 시차는 있지만 평양 동황성에 있던 고구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장수태왕 때 옮긴 평양은 서경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 때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국사학계는 장수태왕 때 고구려가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게 됐다. 북한 역사학계는 평양이 고향인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혼란이다. 고구려와 싸운 거란이 요양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해놓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북한의 평양인가, 중국의 요양인가.

고구려 말기인 영양왕 때 수나라가 대군을 보내 공격했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다. 내호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패수(浿水)를 따라 들어가 평양을 공격하려다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기에 패수를 대동강으로, 살수는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은 다르다. 살수에 대해 거론한 중국 사서는 거의 없지만, 패수를 거론한 사서는 많다. 중국 사서들은 패수가 요령성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요사’ 지리지가 요양 인근의 강 이름을 거론하는 중에 패수가 있다. 패수가 요양 인근에 있다면 수나라와 싸울 때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수도인 요양이라는 얘기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뒀다고 했다. ‘요사’ 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안동도호부는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았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을 수도인 평양으로 삼고 있을 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요양이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훨씬 서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곳을 요동으로 불렀으니 전방 성들은 그곳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을 해자(垓字)로 삼아 수도인 요양을 보호했을 것이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위치가 다르다

<지도2>는 사회과부도에 표시된 발해의 5경. ‘요사’대로라면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요양에 있어야 한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당(중국) 쪽으로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고구려에 복속한 종족 중 가장 충성한 것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수, 당과 전쟁할 때 적극 참전했다. 대(大)씨 성을 쓰는 말갈족이 고구려의 귀족이 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무너지자 대씨 집안의 대조영이 일어나 ‘대진국(大震國)’을 세웠다. 중국 사서들은 대진국을 ‘발해’로 표기했다.

대진국은 과거보다 세력을 키운 거란을 지배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스러질 무렵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야율(耶律)씨가 이끄는 거란족이 일어나 대진국을 무너뜨렸다. 그 후 요나라를 세우고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국이 됐다.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는 위-촉-오가 다툰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삼각체제를 형성하며 부딪쳤다.

황제를 자칭한 나라들은 3경이나 5경 제도를 택했다. 발해는 대이진(大彛震)이 이끌 때 5경 제도를 택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 실학자들의 추정을 근거로 중경 현덕부가 중국 길림성 서고성자(西古城子)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는 우리 교과서의 발해 강역과 5경의 위치다. 그러나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여 km 옮긴 새로운 발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경이 요양에 있었다면 서경은 중경 서쪽에 있을 테니,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의 요하 건너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와 다툰 인접 국가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작은 영토선을 그려놓았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가깝다. 이렇게 하니 중국은 “얼씨구나” 하며 동북공정을 밀고 들어온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었다고 고집하는 것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만 살았다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 때 생겼다. 우리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 중종 때 인쇄된 것이 전해진다. 중종 이전 ‘삼국사기’는 여러 번 개수(改修)됐으니 여기에도 소중화 사관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또 축소했다.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이를 적극 전파해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것에 짓눌려 대륙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 확장하고 있는데.
 
 
 
 

기사입력 2008/04/02 [19:05]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흉노의 선우':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nbsp;&nbsp;&nbsp;서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피라미드. 중국정부는 발굴 3일만에 이 피라미드는 동이족(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것으로 결론짓고 발굴을 중지하고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nbsp;은폐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평양성은 하북성에서 찾아야 한다

동이족에 대한 열등감으로 역사를 곡필하기도 했던 고대 쥐나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헌에서 자백하고 있다. 기존 사학자들은 눈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즉,  [구당서 열전 제 149 “동이(東夷) 고구려”]편을 보면 高麗者,出自扶余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裡 고려자,출자부여지별종야。기국도어평양성,즉한낙랑군지고지,재경사동오천일백리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다.한나라때 낙랑군의 땅이며 경사(장안)의 동쪽 5천백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는 당(唐)의 건국(618)에서 멸망(907)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후진(後晉) 개운(開運) 2년(945) 국사(國史)를 감수한 재상 유후(劉煦)가 이끄는 학자들이 편찬했다. 총 200권으로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당서 唐書〉였지만, 송대 구양수(歐陽修) 등이 편찬한 〈신당서〉와 구별하기 위해 〈구당서〉라고 했다. 당조의 국사실록은 당대 말엽의 전란을 거치면서 산실되어 완전하지 못했다. 오대(五代)의 양(梁)·당 두 왕조 때 여러 방면으로 사료를 찾아 모았고 후진에 와서야 비로소 이 책을 완성했다.

 

기후변화와 식량부족으로 유럽에 갑자기 출몰하여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유럽을 지배한 아틸라 훈족의 판도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 Daum 카페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1. 머릿글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존재한다. 『한서지리지』의 현도군 속현 중에 이미 ‘고구려현’이

cafe.daum.net

 

 

입력 2021. 2. 22. 06:00수정 2021. 2. 23. 10:42

'# 十'..경주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유물에 새겨진 비밀코드 [이기환의 Hi-story] (daum.net)

경향신문 선임기자
[경향신문]
 

1933년 4월 3일이었습니다.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장신구 10여점을 발견했습니다.

즉각 신고가 이뤄졌고,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07~2011)를 급파합니다. 발굴결과 순금제 목걸이 33점과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조선시보>는 4월9일부터 20일과 21일까지 ‘고고학상 중대자료 희대의 귀고리 장식 발견’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아리미쓰는 유물이 발굴한 곳을 노서리 140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발굴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등그릇 세트에는 ‘광개토대왕’ 관련 명문과 함께 명문의 맨 윗부분에 ‘#(井)’ 자 혹은 문양이, 명문의 맨 마지막에는 ‘十’ 자 혹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十’자는 그냥 ‘10’을 기리킨다고 보아 ‘광개토대왕의 서거’를 기리는 청동그릇을 시쳇말로 ‘리미트 에디션’, 즉 한정판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 청동그릇은 한정판 중 10번째 그릇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국립박물관의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 을유문화사, 1948년에서


■한국-일본-미국 합작발굴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현해탄을 건너 귀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후 국립박물관장이 된 김재원 박사(1909~1990)의 눈에 띈 이가 바로 일본인 아리미쓰였습니다. 아리미쓰는 패망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한국인에게 인계하느라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교토대(京都大)를 나와 15년간 식민지 한국땅에서 발굴조사를 했던 고고학자였습니다.

급기야 1945년 12월 3일 인수인계가 마무리되어 아리미쓰는 귀국선을 타야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김재원 관장이 막아섰답니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 좀 해봐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우리끼리 하면 될 거 아니냐, 왜 일본인을 곁에 두느냐 하는 의문이 들겠죠.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발굴경험이 전무했답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발굴을 했지만 일본인들은 새끼줄을 쳐놓고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놨으니 뭐 발굴을 배울 재간이 없었죠. 해방이 되었지만 당시는 미군정청 치하였습니다.

1946년 5월 해방 후 첫 발굴인 ‘노서리 140호분(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그릇. 그릇 밑바닥에서 ‘을묘년(415년)에 제작된 고구려 광개토대왕 관련 청동그릇’을 의미하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명문이 보였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래서 아리미쓰를 귀국하지 못하도록 미 군정청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당시 발굴은 미 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에서 한국 미술 및 역사보호 담당이던 유진 크네즈(1916~2010)가 동분서주 한 끝에 발굴허가를 이끌어냈습니다. 미군정청은 발굴비용까지 댔답니다. 발굴대상으로는 아리미쓰가 1933년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노서리 140호분’으로 낙착되었습니다. “하는 김에 경주의 단독고분 중 가장 큰 봉황대(지름 82m, 높이 22m) 고분을 파보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굴 경험이 없는데 괜히 팠다가 감당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답니다.

1933년 4월9일자 <조선시보> 기사. 경주 노서리의 주민 김인동씨의 아버지가 호박을 심다가 금제 장신구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고고학상 중대자료이며 희대의 귀고리 장식이며 삼국시대 왕족의 유품이라고 흥분했다.


■‘쎈세이순’한 발굴성과

마침내 1946년 5월 2일부터 노서리 140호분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발굴 12일이 지난 뒤인 5월14일 엄청난 유물이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1948년 발간된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국립박물관)가 전하는 그 날짜 발굴 일지는 “(1946년) 5월14일…청동제 용기를 채취(採取)했는데, 용기의 밑부분에 명문이 나타나 큰 ‘쎈세이순’을 일으켰다. 16자 외에도 무슨 기호 같은 것이 있다”고 기록해놓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만주 호태왕비문에서와 같은…‘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명문이 있다. 약 1530년전 당시 신라와의 관계가 깊은 고구려에서 서거한 광개토대왕의 유업을 사모하여 제작한 그릇을 신라에 보낸 것….”(1946년 5월25일)

조선시보 1933년 4월 20일과 21일자가 연속으로 노서리 140호분의 발굴소식을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된 아리미쓰 교이치가 발굴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일본인 아리미쓰의 조사는 해방후 우리 손의 첫발굴로 이어졌다. |


■광개토대왕비문과 동일인의 필적?

한마디로 경주의 호우총에서 고구려 정복왕인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깜짝 놀랄만한 발굴성과였죠. 발굴보고서도 “이 청동기는 이번 경주발굴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품이며 고적발굴사상 특필(特筆)할 만하다”고 흥분했습니다.

특히 청동항아리 명문의 글씨체가 1883년 중국의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동일인의 필적인 것처럼 흡사했구요. 글자구성과 내용도 거의 같았습니다. 발굴자들은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단 그 고분의 명칭은 ‘노서리 140호’에서 ‘호우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인공을 모르는 고분의 경우 도드라진 출토유물의 특징을 따서 이름을 붙입니다. 140호 고분의 경우 ‘호우(壺우)’(항아리와 그릇)에서 명문이 나왔다고 해서 ‘호우총’이란 명칭을 얻게 됩니다.

1948년 간행된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는 청동그릇에 보이는 ‘광개토대왕 명문’이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문 글씨와 동일인이 쓴 것처럼 비슷하다고 기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누가 가져온 청동그릇일까

궁금증이 난무했답니다. 먼저 ‘을묘년’은 어느 해일까요.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이 서기 412년에 죽고 난 지 3년 후가 되는 서기 415년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 청동항아리는 그 해에 제작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이 청동항아리를 신라에 가져왔고, 누구를 묻을 때 이 항아리를 넣어준 것일까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복호’라는 인물이 일단 손꼽힙니다.

즉 “412년(실성왕 11년) 고구려에 갔던 복호가 418년(눌지왕 2년) 제상 나마와 함께 돌아왔다.”(‘신라본기·눌지왕조’)는 기록이 눈에 밟힙니다. 신라 제17대 내물왕(356~402)의 왕자이자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복호(卜好)가 412년 인질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갔다가 6년 만인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호와 이 호우총 유물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노서리 140호 고분(호우총)’의 발굴조사를 위해 찍은 사진. 고분 위에 집에 들어서 있었다.|국립박물관의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 을유문화사, 1948년에서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이 청동그릇을 415년 광개토대왕 서거 3주기 혹은 안장 1주년을 기념해서 광개토대왕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인질로 와 있는 복호에게 기념으로 준 것일까요. 그게 맞다면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 그 항아리를 가져왔고, 훗날 그가 죽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고분의 주인공은 복호가 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호우총의 연대는 출토된 유물의 연대로 미루어볼 때 6세기 전반 쯤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이 청동 항아리가 제작된 시기(415년)와 100년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게 너무 무리한 주장이라면 할아버지(복호)의 유품을 대대로 간직하고 있던 직계자손이 묻힌 무덤이라는 견해도 나올 수 있겠네요. 다르게 본다면 이럴 수도 있죠. 이 청동항아리를 당시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한 제사에 참석했던 신라 사절이 가져온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죠,

전국 삼국시대 유적에서 ‘#’문양이나 ‘우물 井’자가 새겨진 토기 등이 종종 출토된다. 제작지나 제작지, 혹은 주문처를 표시했거나 귀신을 쫓는 벽사의 의미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十’자의 정체…‘리미티드 에디션’일까

또다른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호우십(壺우十)’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호우’란 ‘술과 같은 무엇을 담는 용기(사발)’로 보면 되겠지만 ‘十’의 의미는 알쏭달쏭합니다. 발굴보고서는 “해석이 곤란하다”면서 “그 경우 이 十자를 다만 여백을 채우는 의미로 보아야 할 줄 안다”고 얼버무려 놓았답니다. 그러나 혹자는 그냥 숫자 십(十)으로 보면 된다고 합니다. 415년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10개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청동항아리는 엄청난 ‘리미티트 에디션(한정판)’이 되는 셈이 아닌가요. 그 10개 중 1개가 신라에 왔다면 얼마나 값어치가 대단했을까요.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1946년·국립박물관)에 실린 호우총 출토 유물들. 유물의 연대로 보아 6세기 전반 무렵에 조성된 고분으로 추정된다.|국립중앙박물관 아카이브·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완 제공


■#(井)은 해시태그인가 우물인가

또하나 해결해야 할 궁금점이 또 있네요. 바로 명문 윗부분에 새겨진 ‘우물 井’자 혹은 ‘#문양’입니다.

당시의 발굴보고서는 “井(#)자형은 이 보이는데 이 역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요.

소설가 최인호씨는 소설 <왕도의 비밀>에서 이 ‘#’자는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제대로 된 논문조차 거의 없다”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답니다.

‘#’가 새겨진 유물은 호우총 한곳에서만 출토되는 것은 아닙니다.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발견되는 등 끊이지 않고 확인되고 있어요.

호우총에서 발견된 유물. 유리 눈알에 푸른 빛 홍채를 옻칠한 나무에 표현했기 때문에 발굴자들의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이 유물은 훗날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종종 출토되는 화살통 장식으로 밝혀졌다.|국립박물관의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 을유문화사, 1948년에서


삼국시대 토기 중에는 井, 小, X,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답니다. 이를 두고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피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뭐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최근 #문양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뜨고 있죠. ‘해시태그(hashtag)’ 운동인데요. 아시다시피 ‘해시태그(hashtag)’는 게시물에 일종의 꼬리표를 다는 기능이죠. 특정 단어 또는 문구 앞에 해시(#)를 붙여 관련정보를 한곳에 묶을 때 사용합니다.

안그래도 고구려 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그릇에 새겨진 #표시가 대체 뭔지 몰랐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구요. 고구려인들이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라 새긴 것이 해시태그 운동의 표시일 수 있다구요. 그저 웃자고 하는 얘기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사진에 찍힌 ‘호우총 발굴조사’ 기념사진. 해방 후 최초의 고고학 학술발굴이었던 호우총 조사는 발굴주관은 한국, 발굴지도는 일본(아리미쓰), 발굴장비와 비용은 미국(군정청)이 나눠 맡은 국제발굴이기도 했다. 발굴현장에 김재원 국립박물관장 등 한국측 조사단원과 일본인 아리미쓰, 미국인 크네즈 대위 등이 모였다.|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화살통을 귀신가면으로 오해

한가지 여담을 소개해드리자면요. 호우총에서는 발굴자들을 평생 가위 눌리게 한 유물이 출토됐는데요.

나무로 만든 위에 옻칠을 했는데 눈알은 유리이고 그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은 푸른빛이었으니 발굴자들이 소름끼칠 만했죠. 당시 연구자들은 그 유물을 ‘방상씨면’이라 규정하고 “방상씨는 웅피(熊皮)를 쓰고, 황금 눈 넷을 단 면을 쓰며 무기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존재”라는 <주례(周禮)>를 인용했어요.

 

그러나 이 유물은 훗날 백제·가야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화살통이었답니다. 화살통을 역귀를 몰아내는 무서운 존재로 여기고 호들갑을 떨었다니 쓴웃음이 나옵니다.

호우총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었고 발굴주관은 한국, 발굴지도는 일본, 발굴 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각각 담당한 최초의 국제발굴이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또하나의 여담.

발굴이 끝난 뒤 김재원 관장은 일본인 아리미쓰를 지프에 태워 부산 부두까지 태워주었답니다. 아리미쓰는 한국 국립박물관의 환대를 받는 몇 안되는 일본인이었는데요. 1967년 방한 때에는 때마침 회갑(11월10일)을 맞아 한국측이 회갑연까지 베풀어 주었답니다. 1907년생인 아리미쓰는 2011년 향년 104살의 천수를 누리고 타계했습니다. 일본인이지만 그나마 해방후까지 한국의 최초 고고학발굴에 도움을 주었으니 그렇게 장수한 것이 아닐른지요.(이 기사를 쓰는데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도움말과 자료 제공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장수태왕이 수도를 옮긴 평양이 북한 평양인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 기자명오종홍 
  • 입력 2016.10.12 12:27
  • 수정 2016.11.08 14:59
 
 
소중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북한 평양은 장수태왕이 옮긴 평양이 아니었다.

 

유라시안네트워크 인문학특강,

복기대 교수, “지금 평양은 식민사관에 따라 왜구가 만들어 준 것...”

도대체 식민사관은 어디까지 스며들어 있는가?

 

우리의 뇌리에는 고구려의 장수태왕이 현재 북한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망할 때 까지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고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구가 수십 년 동안 공들여 만든 일제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서기2016.10.10. 한국통신(KT)광화문 건물에서 열린 ‘유라시안연결망(이민화 이사장)’ 강좌에서 인하대학교 복기대 교수(융합고고학)가 이 같이 말했다.

왜구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서기19세기 말부터 식민사관을 구축해 나갔는데, 문헌학, 고고학 등 전방위적으로 진행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식민사관을 구축하면서 소중화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의 사관을 끌어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소중화 조선의 사대주의 중화사학 자들이 북한 평양을 장수태왕이 옮겨온 곳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마리를 얻은 왜구가 문헌과 고고유물로 확정해 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왜구 관학자로 도리이류조, 이마니시류, 시라토리 쿠라키치를 들었다. 이것을 이병도 등 왜구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인물들이 해방 후 그대로 우리 국사책에 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는 역사를 밝힐 때, 문헌자료를 먼저 깔아 놓고 그 위에 고고유물을 적용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역사학의 기초라는 것이다. 또한 할 수 없이 식민사학으로 학위를 취득했다고 하더라도, 취득 이후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고 하였다. 복기대 교수는 중국에서 학위를 받을 때, 중국 교수가 '고조선=비파형 동검으로 논문을 쓰지 마라, 학위통과 후 하고 싶은 것 마음것 얘기라'고 했다며 강단주류사학계에서 학위를 취득하려는 초심자를 향하여 이 같은 조언을 하였다.

 

그렇다면 장수태왕이 옮긴 진짜 평양은 어디일까? 복기대 교수는 장수태왕이 옮긴 평양이 어디인지 밝혀내고자 수년동안 매달렸다고 하였다. 그 결과 북한 평양은 결코 장수태왕이 옮겨온 평양이 아니고 대륙에 있었음을 알아냈다고 하였다. 복교수는 그 증거로 수많은 문헌사료를 내놓았다. 복교수가 내놓은 자료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유사>다. 여기에 “살펴보면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 일명 안정홀인데 요수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으로 지금의 안민강이라고 한다.”라고 나온다. 요수는 지금의 요하로 비정되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까지만 하더라도 압록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요사> ‘지리지 동경도’ 조에는 분명히 평양성이 동경요양부로 나오는데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이라는 것이다. 이곳이 당나라 고종이 침략한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고 나온다. 고구려가 망할 당시의 평양이 이곳 요양이라는 얘기다.

이외에 소중화 조선, 성종 때에 최부가 제주도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명나라해안에 난파하여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기록한 <표해록>에도 중국 요령성에 평양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까지만 하더라도 그곳 주민들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 평양성이 그곳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 묘를 각 나라의 도읍지에 설치하고자 하는데 고구려만 평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결국 고구려의 시조묘는 세종이 고구려땅에 설치하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 평양이 고구려 마지막 도읍지로 둔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2부 강의에서는 만주지역의 고고유물로 보는 역사가 소개되었다. 우리의 사실상 머리역사에 해당하는 조선(단군)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고고유물이 많이 나와 주목을 받았다.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교수는 수십 년 동안 만주를 누비며 직접 발굴에 참여하여 쌓은 고고학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체를 그려나갔다. 고고학적 유물을 볼 때 서기전 25세기경에 요서지역은 이미 청동기시대에 있었고, 그 청동기는 중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고 조선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 지역서 발굴된 인골을 체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옛날 동북지방유형의 인류로 밝혀졌다고 하였다. 서기전25세기까지 나오는 청동기 유물의 주인공은 중원에서 온 인류가 아니라 동북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날 눈길을 끄는 것은 시루와 삼족토기류였다. 요동의 남만주 일대에는 단절되지 않고 시루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서기전2천년 만주 본계시 태자하 단동일대에서 발굴된 고고유물 중에 세발그릇과 시루가 나오는데 이것을 요동남만주의 마성자 청동기문화와 연결시켰다.

서기전 2천년이면 조선단군시대다. 시루는 한민족의 고유한 음식문화로 나타난다. 한땅과 만주 심지어 연해주에서도 시루가 발견된다. 시루는 통상적으로 떡을 쪄먹을 때 사용된다. 떡은 쌀을 주로 이용한다. 쌀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넣고 김으로 찐다. 시루 밑에 솥을 걸고 솥안에는 물을 붓고 불을 때면 솥안에서 김이 일어나고 뜨거운 김이 시루 밑바닥에 뚫어 놓은 여러개의 큰 구멍으로 들어가 떡을 찌는 것이다. 이렇게 음식 만드는 방법은 고도의 사고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술이 오랬동안 쌓이지 않고는 어렵다. 서기전 2천년경에 이렇게 어려운 음식문화를 발달 시켰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상당한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떡찌는 기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시루를 이용한 떡찌는 기술을 통해서 조선단군의 문명발달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 세발 달린 '채회도' 를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가 소개하고 있다. 이 세발 그릇에 그려진 문양은 중국 상나라의 수 많은 청동 제기류에 새겨진 도철문의 원조라고 하였다. 조선단군의 전형적인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24세기~서기전15세기)에서 출토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하가점 하층문화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서만 나타나고 중원에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주목을 끄는 것은 세발 그릇류다 물론 세발달린 시루도 나왔다. 세발그릇류는 중원문화라기 보다는 우리 고유문화와 더 친하다. 세발은 삼신 또는 삼사상을 뜻한다. 삼신, 삼사상의 대표적인 문헌사료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다. 한인-한웅-단군으로 이어지고, 천부인 삼개를 이야기하고 3천의 무리가 나온다. 또한 조선의 서울도 평양성, 태백산 아사달, 장당경으로 세 개의 도읍을 말하고 있다. 거의 삼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뿐만아니다. 우리의 고유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무당굿의 노래에서도 삼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삼으로 꽉 차있다. 이 날 복기대 교수가 내놓은 고고유물 중에는 동경도 있었다. ‘여러꼭지 세문경’이라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 한웅천왕이 가지고 내려온 천부인 3개중의 가장 으뜸이 거울이다. 동경은 이 거울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땅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청동거울이다. 이 청동거울의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땅과 요동 그리고 중국 하북성과 내몽골지역인 요서지역에서 이런 거울이 출토된다는 것은 이 지역이 중원문화와는 상관없는 한국문화와 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기대 교수는 이 날 요서지역의 하가점 하층문화를 발굴할 때 경험한 충격을 소개하였다. 서기전 1천7백년을 상회하는 삼좌점석성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였는데 치가 있는 석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소규모로 알고 있었는데 흙속에서 드러나는 성의 규모는 ‘봄페이’와 맞먹는다고 하였다. 수십 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였다 최소한 1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국가로 봐야 한다고 하였다. 이미 이때 국가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가 사실임을 말해주는 유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복교수는 강단주류사학의 한국사 파괴가 도를 넘고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 ‘역사전쟁은 향후 6개월 이내에, 길면 1년 안으로 우리가 완승할 것’라고 잘라서 말했다. 그 만큼 지금까지 축적해 놓은 정보와 자료가 많다는 말로 들렸다. 이날 강좌는 지정토론자 2명을 선정해서 진행하여 내실을 더 다졌다. 다음번 강의는 상명대학교의 박선희 교수가 ‘한국 금관문화의 기원과 정체성 인식’으로 강의를 한다. 서기2016.11.14. 17시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오종홍 mukto@naver.com

 

 

 

  • 2015-09-19 14:43
(사진=KBS 제공)
 
동북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고구려의 장수왕은 400여 년간 도읍지였던 국내성을 떠나 돌연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중심을 한반도로 좁힌 악수인가, 아니면 고구려에 최전성기를 가져온 신의 한 수인가.

오는 20일 밤 10시 35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고구려 장수왕, 평양 천도하던 날'이라는 주제로, 평양 천도와 함께 최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의 모습을 짚어본다.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15년)

단 한 줄의 평양 천도 관련 기사다. 국가의 중심지이자 고위 지배층의 세력 기반인 도읍지를 옮기는 것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대한 일이다. 자연스레 400년 도읍지인 국내성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 귀족들의 반발도 거셌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천도와 관련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 천도가 그 이전부터 기획되고 준비된 것은 아닐까?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은 재위 2년, 평양에 아홉 개의 불교 사찰을 창건한다. 그리고 재위 19년에는 동쪽에 여섯 개의 성을 짓고, 평양의 주민들을 이주시킨다. 즉, 광개토대왕 때부터 평양 천도의 기획이 준비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평양 천도는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아들 장수왕 2대에 걸친, 장대한 국가적 개혁의 상징인 셈이다.

◇ 한반도 남부 긴장 고조…백제·신라 동맹 맺고 고구려 견제

(사진=KBS 제공)
 
고구려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의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중국은 수많은 나라가 난립하던 5호16국 시대를 끝내고, 유연·북위·송 3개 강국이 안정적으로 세력을 재정립하고 있었다.

이들 세 나라는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며 크고 작은 전쟁을 반복했지만,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이렇듯 고구려는 수상 교통의 요지인 평양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장수왕의 세련되고 뛰어난 외교술,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군사력 덕에 고구려는 동아시아 4강의 한 축으로 떠오른다.

 

 

 

입력 2014-07-11 03:00업데이트 2014-07-11 08:26

싸우지 않고 이긴 장수왕은 ‘셔틀외교’의 달인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 논문서 ‘한국사 최고 외교 군주’ 평가
강력한 힘 가지고도 조공 활용… 라이벌 북위와의 현안 평화적 해결
동시대 백제는 조공 중단 고립 자초… 고구려 침략 받아 수도 한성 내줘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394∼491)이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힘을 과시하기보단 조공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외교의 달인’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현대 외교로 치면 ‘왕복 외교(shuttle diplomacy)’와 같은 수법을 썼다는 것이다.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국제정치학)는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와 신라사학회의 공동 학술회의에 발표한 논문 ‘삼국통일과 국제정치’에서 장수왕을 “한국사가 낳은 최고의 외교 군주”라고 평가했다. 한반도(백제, 신라)와 중국이라는 2개의 전선에 끼여 전략적으로 취약할 수 있었던 고구려의 안보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특히 장수왕이 79년 동안 집권하면서 중국 북연(北燕)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백제 한성을 무너뜨리는 등 남북으로 크게 위세를 떨쳤는데도 중국 북부 지방의 강자였던 북위(北魏)에 수시로 조공을 바친 점에 주목했다.

 
‘조공’은 흔히 약한 나라가 힘센 나라에 어쩔 수 없이 각종 공물을 건네야 하는 굴욕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장수왕은 주체성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상대의 예봉을 피하는 고도의 정책으로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기 436년경 북위는 북연과 전쟁에 들어가기 직전 고구려에 군사적 행동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이를 무시하고 북위와의 전쟁에 대비하던 북연을 약탈해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에 북위 측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장수왕은 이듬해인 437년 북위의 숙적이자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의 왕 풍홍(馮弘)을 사형에 처한 데 이어 조공 사절을 두 달 연속으로 보냈다.

구 교수는 “장수왕은 조공 사절을 양국 간 현안을 해결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데 활용했다”며 “이는 오늘날의 ‘왕복 외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반면 백제는 조공 외교에 실패해 고립을 자초했다.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 잡아 고구려처럼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동시에 협공을 당할 위험이 적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조차 중국 측 공격을 막아내느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백제를 크게 위협하지 못했다.

백제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딸을 보내 후궁에서 비질을 하도록 하고 아들들을 보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다”는 표현까지 쓰며 고구려를 함께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위가 고구려의 강한 군사력에 부담을 느껴 이를 거절하자 개로왕은 조공을 즉각 중단했다.

강대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중요한 동맹의 한 축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이후 고립된 백제는 3년 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한성을 빼앗기는 참화를 당했고 이때 개로왕도 목숨을 잃었다. 구 교수는 “백제의 단교는 결국 대(對)고구려 관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008/07/06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어디가 목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nbsp;&nbsp;&nbsp;돈황석굴의&nbsp;벽화는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된다.&nbsp; 성벽이 치양식으로 동이의 것이고, 호피 오우관의 깃털 등

 

 

역사추적 – 광개토대왕 청동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

최초 공개: 2019. 9. 27.

https://youtu.be/Ohe3EaKFb2c?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KBS HD역사스페셜 – 장수왕의 승부수, 고구려 남진 프로젝트

https://youtu.be/k0pf6oc3pqs

 

 

[질문과 답변] 삼국사기 대무신왕조 15년,20년,27년조에 관해

2020. 5. 27.

https://youtu.be/NdUtW3KEmc8?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참고자료>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고구려가 장안을 점령한 것은 장수태왕초기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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