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2/12 [19:54] 

˝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 (breaknews.com)

 

˝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

얼마전박노자라는국적불명의한학자가이상한논조로고구려에대해헛소리로지껄인것을신문에서보았다.한마디로논박할가치조차없는기사였다.그런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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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를 정사서로 인정하는 길 만이 민족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얼마 전 박노자라는 국적 불명의 한 학자가 이상한 논조로 고구려에 대해 헛소리로 지껄인 것을 신문에서 보았다. 한마디로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기사였다. 그런 떠돌이가 짖는 소리를 기사화 하여 우리 역사의 진실을 왜곡한 신문사의 역사인식이 더 큰 문제이다.

국민의 여론을 주도한다는 언론이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엉터리 역사칼럼을 함부로 기사화해 국민정신을 좀먹게 하고 황폐화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 가희 매국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 칼럼을 싣는 언론이 대한민국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왕은 king으로, 황제는 emperor로 적는다. 그리고 왕국은 kingdom, 제국은 empire라고 한다. 그럼 우리 고대사의 고구려/발해는 왕국인가 제국인가? 즉 kingdom으로 적어야 할지 empire로 적어야 할지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고조선시대와 북부여시대에 임금인 단군을 단제(檀帝)로 불렀고, 고구려/대진국(발해) 시대에는 황제로 칭했다. 그러므로 영어로는 king이 아니고 emperor로 써야 하며, kingdom 대신에 empire로 써야 한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를 적을 때는 ‘the korea empire’로 적어야 하며, 광개토태왕은 ‘the kwanggyeto emperor’로 적어야 한다.

그리고 나라의 임금을 가르키는 황제라는 용어는 진시황 때부터 중국에서 사용한 단어이고, 우리는 단군, 성왕, 명왕, 태왕, 대왕 등 다른 용어를 사용했음을 우선 알아야 한다. 그걸 중국식으로 이해해 고구려의 x왕을 마치 중국의 제후인양 간주하여 우리 역사를 해석하면 엄청난 역사왜곡인 것이다. 같은 의미를 한족과 우리가 서로 쓰는 용어가 달랐을 뿐이다.

즉 고구려는 임금을 왕 또는 x왕이라 했고, 중국은 임금을 황제라 하고 임금의 아들이나 친척을 왕(제후)으로 봉해 외지를 관리하게 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왕은 대통령이고, 중국의 왕은 주지사 격이다. 그러함에도 고구려의 임금(대통령)이 왕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중국의 제후(주지사)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임금의 용어만 중국의 황제와 다를 뿐, 독자 연호를 사용한 자주국이었으니 당연히 중국식으로 부른다면 황제라 해야 옳다. 이상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국방장관은 아니지 않은가!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신라계 고려인인데다가 지극한 모화사상에 젖어있던 유학자라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건원칭제(建元稱帝)한 사실을 적지 않았으며, 신라가 23대 법흥왕 때부터 독자 연호를 쓰다가 28대 진덕여왕 때에 비로소 중국의 연호를 쓴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다. 그러면서 삼국이 중국에 수도 없이 조공을 올렸고, 중원의 황제가 매번 조서를 내려 삼국의 왕으로 봉했다고 적어 놓았다. 즉 삼국의 왕들은 중원 황제의 제후국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부식은 조상과 민족의 역사적 진실보다는 자기의 정신적 지주인 공자와 중국을 더 흠모 했고,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고려인으로 태어난 것을 몹시 애통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부식은 정작 공자가 논어에서 “나는 구이(九夷:단군조선)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子欲居九夷)”라고 말한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왜 공자는 구이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고의로 고구려가 건원칭제한 기록을 적지 않았으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건원칭제한 고구려의 왕들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  )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연호, 제황명)

 

1대 동명성왕(?) (다물, 고주몽 성제) 책봉기록 없음
6대 대조대왕 (강무, 태조 무열제) 책봉기록 없음
19대 광개토왕 (영락, 광개토경호태열제) 책봉기록 없음
20대 장수왕 (건흥, 장수홍제호태열제)
(진) 고구려왕낙안군공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송)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
(남제) 표기대장군
21대 문자명왕 (명치, 문자호태열제)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남제) 거기장군  (양) 무군대장군개부의동삼사
25대 평원왕 (대덕, 평강상호태열제)
(북제) 요동군공고구려왕 (진) 영동장군 (주)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수) 대장군요동군공
26대 영왕왕 (홍무, 영양무원호태열제)
(수) 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28대 보장왕 (개화, 보장제)
(당)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

게다가 김부식은 신라가 삼국통일했다는 위업을 강조하기 위해 하대(下代) 신라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던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전혀 언급 안한다. 대진국 역시 건원칭제한 국가였다는 것이 <환단고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참고로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은 중국식으로 시호와 묘호와 연호를 사용한다. (  )는 사용 연호.

1. 세조 진국열황제(대중상, 중광)---> 2. 태조 성무고황제(대조영, 천통)---> 3. 광종 무황제(대무예, 인안)---> 4. 세종 광성문황제(대흠무, 대흥)---> 5. 인종 성황제(중흥)---> 6. 목종 강황제(정력)---> 7. 의종 정황제(영덕)---> 8. 강종 희황제(주작)---> 9. 철종 간황제(태시)---> 10. 성종 선황제(건흥)--->11.장종 화황제(함화)---> 12. 순종 안황제(대정)---> 13. 명종 경황제(천복)---> 14.애제(청태)  *(청색 9개 연호는 중국 사서에도 나와 있는 연호임)

혹자들은 “우리나라 최고이며 불후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도 않은 고구려의 건원칭제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판정한 <환단고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는 건원칭제를 한 사실이 없고, 단지 민족적 감성으로 그렇게 되고 싶었다는 희망사항을 적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두 사서의 기록이 서로 다를 때에는 정오(正誤)를 판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유물이 있으면 된다. 만일 유물이 없으면 주변국의 사서를 참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가 건원칭제한 사실은 유물과 주변국의 사서 두 가지로 다 입증할 수 있다. 

1. 주변국 사서의 기록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隋書)>에 보면 “位宮玄孫之子 曰昭烈帝 (위궁(산상왕)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 말한다)”라고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을 소열제(昭烈帝)라고 적어 놓았다. 중국에서 고구려의 임금(왕)을 자기네 방식으로 황제라고 적은 것이다. 고구려 임금 중에서 유독 고국원왕만 황제였을까?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수서>에서 소열제라 칭한 고국원왕에 대하여 왜곡된 기록이 있다.
* 13년 왕은 아우를 시켜 연나라에 들어가 칭신(稱臣)하고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 25년 연나라는 왕을 정동대장군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왕(樂浪公王)으로 봉하였다.

<수서>에는 황제로 쓰여 있는 고국원왕이 연나라에게는 신하로 칭하며 어떻게 왕을 책봉 받은 것일까? 김부식이 <수서>를 참조 안했을 리가 없는데, 소열제(고국원왕) 부분에서는 사대주의 모화사상 때문에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발해)이 독자 연호를 쓴 사실은 <신당서 발해전>에도 나와 있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건국을 대조영부터로 보고 있으며, 광종의 ‘인안’부터 장종의 ‘함화‘까지 9명 황제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만 독자 연호를 썼을까?

무릇 연호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발해가 독자적인 황제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사서에 고구려/발해가 버젓이 독자 연호를 쓴 황제국이라고 적어놓고도, 고구려/발해는 자기네 지방정권이란 터무니없는 동북공정의 주장은 이 대목에서 거짓임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2. 유물

▲&nbsp;&nbsp;불상 뒷면에 장수제의&nbsp;건흥5년이라 쓰여있다.

 

현 집안에 있는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생략) 이어 17세(世)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했다.(이하 생략).”

비문에 나와 있듯이 광개토태왕은 ‘영락’이란 존호(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호는 황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천제의 후손으로 17세를 전함은 당연히 황제를 나타내는 것이고, 중국에서 쓰는 황제라는 용어 대신에, 광개토왕은 ‘태왕’이란 우리만의 용어도 썼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고려대왕(高麗大王: 장수열제)’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장수왕에게는 우리만의 용어인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nbsp;&nbsp;&nbsp;정효공주의 묘지석. 문왕의 연호와 황상이란 글이 적혀있다.

 

1949년 길림성 돈화현에서 발견된 4대 광종 세종문황제 대흠무의 2녀 정혜공주의 묘비와  1980년에 발견된 4녀 정효공주의 묘비에는 문왕의 연호가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었다는 사실이 적혀있고, 광종을 ‘황상(皇上)’으로 적은 것이 발견되었다. 비문에 적혀 있기를 “(이전생략)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이하생략)" 

이러한 유물들로 인해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가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비문의 발견은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내기 전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진국 세종문황제의 연호가 ‘대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저술한 이맥선생과 계연수선생이 이 무덤 안에 미리 들어가 보고 또 중원고구려비와 불상이 발견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태백일사>를 썼을까?

본시 북부여와 고구려는 한나라로 보아야 하나 편의상 고구려만 따로 떼어 보면, b.c 58년  건국되어 a.d 668년 망했으니 그 존속 기간이 726년간이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의 왕조 변화를 보면 아래와 같이 9왕조가 고구려와 만나게 된다.



b.c206 전한(前漢)--->a.d5 신--->25년 후한(後漢)--->220년 3국시대--->265년 서진--->317년 동진과 5호16국시대--->439년 남북조시대--->581년 수--->618년 당(唐)

중원의 통일국가 중 300년가량 된 국가는 당나라(290년) 뿐이며, 200년가량 된 나라도 전한(211년)과 후한(195년) 뿐이고, 신과 서진과 수나라는 단명으로 그친다. 나머지는 삼국/5호16국/남북조시대로 찢겨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나라와 당나라도 고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

어떻게 이런 나라들이 700년이 넘는 사직의 대국 고구려를 일개 제후국(지방정권)으로 둘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종주국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한 지방정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지방정권은 종주국이 없어지더라도 대물림이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방정권(제후국)이 어떻게 감히 건원칭제를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어거지이고 허구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중국 각국에서 삼국의 왕을 봉했으며, 삼국은 수시로 여러 나라에 조공을 올렸다고 적어 놓았다. 고구려 전성기인 장수왕/문자명왕 시대에도 온통 “사신을 x나라로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즐비하다. 중원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나라들에게 삼국이 왕으로 책봉 받고 조공을 올렸다는 기록을 믿어야 할까? 또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원래 중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왕으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림으로서 스스로 자국이 황제국임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고 또 일방적인 자기네의 습성이었다. 즉 책봉은 서로의 문화 차이로 이해해야 하며, 조공은 외교사절의 파견으로 봐야지 그걸 액면(글자) 그대로 보고 역사를 해석하면 곤란하다.

▲&nbsp;&nbsp;&nbsp;고구려제국의 역사의 진실. 주변국들을 연방으로 또는 직속으로 편입했다.

 

황제로 칭한 대국(고구려)이 뭐가 아쉬워 중국의 일개 작은 나라에게 왕의 책봉을 받을 필요가 있었고 조공을 수도 없이 올렸겠는가? 아마 중국이 보낸 책봉조서를 보고 고구려의 황제들은 가소롭다고 웃고는 문화의 차이 때문에 대꾸도 안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보면 고구려의 위 황제들은 중국과 상대로 전쟁을 해 고구려의 강역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책봉을 받고 조공을 올린 제후국이 종주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 영토를 넓혔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서로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어느 기록이 옳을까?

위에서 보았다시피 유물과 다른 사서의 기록으로 입증된 <환단고기>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삼국사기>가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은폐하려 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강단사학계는 자신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는 일제의 분서갱유에도 살아남은 책이다. 왜 살아남았을까? 이유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빼야 하는데 <삼국사기>라는 사서가 자기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반도사관의 빌미를 일제에게 제공하여 악용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환단고기>를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정사서(正史書)로 인정하는 길만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일본의 황국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왜곡한다면 조상과 민족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길만이 국가와 민족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09/01/29 [16:33]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 고구려를 세운 벤처 기업가 주몽.: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9/02/13

고구려를 수성한 기업가 유리왕.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9/03/22

여자에게 당한 고구려 모본왕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9/04/26

˝해모수의 '해'씨는 고구려 태조때 '고'씨로 변경˝: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9/04/05

원수의 자식을 거둔 목도루-고구려 신대왕편 임동주 서울대 초빙교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5/02/23 [13:01]

고구려판 장희빈과 중천태왕의 사냥터 (1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5/03/1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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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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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8 [10:18]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에서 왕이 된 이유는? (5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7.11.26

[열린세상] 태왕사신기 유감/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 서울신문 (seoul.co.kr)

 

 

2007/08/23

[단독]광개토 태왕, 일본을 멸망시켰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입력 2014.06.14. 03:01

 

로물루스(로마의 건국신화 주인공)와 주몽(고구려 시조)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로물루스로마의 건국신화 주인공와 주몽고구려 시조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유럽과 아시아는 실크로드 따라 왕래 비단옷·황금 장식 등 무역 교류 활발 스키타이족·고구려 건국신화 등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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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시아는 실크로드 따라 왕래… 비단옷·황금 장식 등 무역 교류 활발
스키타이족·고구려 건국신화 등 문화 전파되면서 이야기 구조 비슷해져

  

 

송고시간2016-02-02 11:45

동명성왕부터 보장왕까지…고구려 700년을 읽다

살림,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 2탄 '고구려왕조실록'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제1대 동명성왕부터 제28대 보장왕까지 고구려왕조 700년의 역사를 다룬 '고구려왕조실록' 전 2권이 나왔다.

고구려왕조실록은 살림출판의 '한국사 왕조실록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이다. 앞서 2015년 '조선왕조실록' 전 6권이 출간된 바 있다.

책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가 점차 세력을 키워 중원을 호령하는 대국으로 성장했으나 결국 쇠락의 길을 걷는 과정을 왕조의 변화에 따라 정리했다.

1권은 고구려의 시작인 동명성왕(주몽)부터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렸던 광개토대왕(19대), 2권은 고구려 남방정책을 편 장수왕(20대)부터 최후의 왕 보장왕까지의 역사를 담았다.

앞으로 요하문명, 고조선실록, 백제왕조실록, 신라왕조실록, 가야왕조실록, 발해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이 나올 예정이다.

출판사는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까지 반만년을 지속한 한국사의 맥을 왕대별로 묶었다"며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에 대항할 역사관을 심어주고자 시리즈에 요하문명도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1권 136쪽, 2권 144쪽. 각 권 4천800원.

 

 

 

역사연구 <제3탄> 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실상

박병식 역사학자 | 기사입력 2007/12/18 [15:49] 

˝고구려 건국이념은 中에 뺏긴 조선회복˝ (breaknews.com)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는, 오늘까지도, 검은 안개에 가려진 채,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에 버려져 있는 딱한 형편에 놓여 있다. 바로 그러한 우리의 등한(等閒)함이 원인이 되어, 일본은 오래 전부터 역사를 제 멋대로 왜곡(歪曲)해 왔으며, 최근에는 중국사람들 조차 그들 정부가 앞장서서「고구려는 중국민족이 세운 나라였다」는 기막힌 망언(妄言)을 서슴없이 하기 시작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들의 국사교과서 내용마저 그렇게 고쳐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目的)은, 일본과 중국 문헌(文獻)에 남아있는 우리 낱말 몇몇을 예시하여, 그 어원을 밝힘으로서, 저들의 그러한 왜곡행위(歪曲行爲)를 근원적으로 봉쇄(封鎖)하여, 다시는 그러한 망발(妄發)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학자(史學者)들 사이에 오랜 고질이 되어온 중대한 오류(誤謬)도 차제(此際)에 시정(是正)하고자 한다.

우리와 북쪽에서 접경(接境)하고 있는 중국(中國)사람들은, 가라족(韓族)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歷史)를 왜곡하는 중국

요새,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는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다"라고 아주 맹랑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저들이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가 어떤 경유(經由)로 세워졌는지를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더 앞으로 나가기에 앞서, 우선 임승국이 펴낸(번역·주해)'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 중국의 사학자(史學者)인 왕동령(王桐齡)이 저술한 '중국민족사'(4페이지)의 한 구절을 잠시 옮겨 소개하기로 하자.

"4000년 전(…중략…), 현재의 호북(湖北)·호남(湖南)·강서(江西)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시작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君主)는 치우(蚩尤)다」

 

▲역사학자 박병식 &nbsp; &nbsp; &copy;브레이크뉴스

 

여기서 <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중국 고서(古書)에, <句麗)>·<九黎> 따위로도 표기돼 있다. 그리고, <치우(蚩尤)>는 단국(檀國) 시대에 치우대왕(蚩尤大王)이라고 불려지던 용맹한 가라족(韓族)의 임금이므로, <구려>라는 국호는, <가라(韓)>에서 모음교체된 형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호북(湖北)·호남(湖南)·강서(江西) 등지」라 하는 곳은, 대만(臺灣) 건너편에 위치한 복건성(福建省) 부근 일대(一帶)다. 따라서, 왕동령이 기술(記述)한 내용으로 봐서,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년 전의 가라족(韓族)은, 중국 본토(本土)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강력한 민족(民族)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치우대왕(蚩尤大王)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가 처음이 아니다. 전한(前漢. bc202년-ad8년)의 사마천(司馬遷)이 찬(撰)한 중국의 정사(正史)'사기(史記)'에도, 치우대왕(蚩尤大王)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莫强)했는지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제후(諸侯)가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蚩尤)가 매우 난폭(亂暴)하였으나, 천하(天下)에 능히 이를 막을 자(者)가 없었다."

이러한'사기(史記)'의 서술(敍述)은, 왕동령(王桐齡)의'중국민족사'에 나오는 가라족(韓族)의 강력한 세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구한이 부여를 세웠다"

'사기(史記)'나'중국민족사'에 기술돼 있는 <구려(句麗)> 는 원형(原形)이 <하라→가라→구려=해의 자손이 사는 나라>이었다. 그들은 여러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으므로, 그들 전부를 통 털어서 구한(九桓)이라도 했고,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에는 구이(九夷)라 적혀있다.
그 구한(九桓)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부여(夫餘)>라고 불려진 나라를 세웠다. 그 건국(建國) 시기(時期)가 언제였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아마도 진(秦. bc 221년-bc 207년)나라 보다 빨랐던 게 아닌가 싶다. 왜냐면, 진(秦)나라 때 사람인 복생(伏生)이, 그가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 말하기를, 「해동(海東)의 제이(諸夷)는 모두 부여(夫餘)에 속(屬)한다」라 했을 뿐 아니라, 중국문화대학(中國文科大學) 출판부가 발행한 중국역사지도의 진대통일지도(秦代統一地圖)에도 부여(夫餘)가 뚜렷이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 부여(夫餘)는, 수도(首都)를 송화강(松花江) 유역(流域)에 세우고, 그 수도(首都)이름을 부여부(夫餘府)라 했다. 지금도 그 부여부(夫餘府)라는 지명이, 중국문화대학(中國文科大學) 출판부가 발행한 중국역사지도책의 51 페이지, 오대도(五代圖)에 뚜렷이 남아 있다.

<부여(夫餘)>라는 이름은, <하라=해의 자손이 사는 나라>에서 유래(由來)된 것인데, 그 소리 변화과정은 <하라→바라→부라→부려→부여>다. <ㅎ>소리가 <ㅂ>소리로 바뀐 것은, <하라=넓은 땅(原)>이 <바라>로 바뀐 다음, 모음교체를 일으켜서 현대어(現代語) <벌(原)>이 된 것과 같다.

우리의 옛말 <화라(弓. 활)>을 <바라>라고 도하며, <가잘하다=비유하다>를 <가?비다>라고도 하는 것 역시, 그런 자음변화(子音變化)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그 <바라>는, <바라→부라>를 거쳐 <부려>가 된 다음, <려>는 <여>로 소리바뀜 됐는데, <ㄹ>소리가 <ㅇ>소리로 바뀐 것은, 나라이름 <가라(加羅)>가 <가야(伽倻)>로 변하고, <달래다>를 고어로 <달애다>라고 한 것과 같은 자음변화다.

부여(夫餘)의 시조(始祖) 이름은 <해부루>라고 전해져 오며, 왕실(王室)의 성씨(姓氏)는 <해>라고 했다. <해부루>의 <해>가 태양을 뜻하는 <하>의 모음교체 꼴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해부루>의 <부루>는 <넓은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하는 현대어(現代語) <벌(原)>(예: 서라벌=신라)의 옛 형태다.

이로서, 부여(夫餘)의 시조(始祖)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해부루>도, 우리의 최초의 국호인 <가라=태양의 땅·태양족이 사는 땅>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실려있는 부여조(夫餘條)를 보면, 「부여는 장성이북(長城以北)에 있으며, …중략…남(南)쪽에는 고구려, 동(東)쪽에는 읍루(?婁=肅愼), 서(西)쪽에는 선비(鮮卑), 북(北)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부여의 위치는, 중국역사지도의 19페-지, 한대서역도(漢代西域圖)에서 확인된다.

이것으로, 부여라는 나라가 창건(創建)됐을 때엔, 그 남쪽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이름은 도대체 무슨 뜻을 나타내는 것일까?

 

우리민족은 태양신의 자손

우리민족은 스스로를 태양신(太陽神)의 자손이라고 자부해 오는 탓으로, 그들이 정착(定着)한 땅(나라)를 <가라>라 했으며, 부여(夫餘)라는 이름도 거기에 유래 된 것임을 앞에서 확인(確認)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도 역시 그런 뜻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렇다! <고구려>의 <구려>는, 우리의 첫 국호인 <가라>가 모음교체를 일으켜 변화된 형태로서, 중국 사서에 <구려=句麗·九黎·九麗>라고 표기돼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고>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한자(漢字) <고(高)>에서 빌려온 것이며,「종래의 <가라>보다 더 위대한 <가라>라」고 뽑내는 의미(意味)로, <높은 가라>, 즉 <대가라(大加羅)>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가라(高加羅)>라고 했던 것인데, 연대가 내려오면서 차차 <고구려>로 바뀐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현대의 우리가, <한국(韓國)>인 나라이름을, <대한(大韓)>이라 하고, britain(영국)이 great britain(대영국)이라 하는 심리(心理)와 같은 현상이다.

그런 기백(氣魄)에 넘치는 나라였던 고구려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은, 중국에 빼앗긴 조선(朝鮮)의 옛 강역(彊域)을 도로 회복(回復)하자는 것이어서, 고구려 말로 <다물(多勿)>은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있기도 한다.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구려(句麗)>나 <고구려(高句麗)>라는 이름이,  모두 우리민족의 첫 국호인 <가라=태양족의 나라>에 유래된다는 게 확실한데, 어찌 중국 사람들이「고구려는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다」라고 우겨댈 수 있겠는가!

▲가라. 검은 빛을 뜻하는 형용사(形容詞). 만주의 북부지역을 흐르는 대하(大河)를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한다.  그 지역 전체는  <가라족(韓族)>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을 흐르는 강물 이름을 왜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했을까가 궁금하다.

예컨대, 부여(夫餘)가 자리잡았던 지역을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이름은 「가라족(韓族)의 물(江)」이란 뜻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왜냐면, 그 이름은, 지금도 여진어(女眞語)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이름 <솔궈>에 유래되기 때문이다. 즉 <솔궈>의 <솔>을,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漢字)인 <松>으로 표기하고, <솔궈>의 <궈>소리가 꽃(花)과 흡사(恰似)하므로, 한자(漢字) <花>를 써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遼) 나라가 위치했던 지역을 흐르는 강물은, 요하(遼河)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흑룡강(黑龍江)이라는 이름도 역시, 가라족(韓族)의 물(江)」이란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면, 흑룡강(黑龍江)의 <黑>은, 우리의 고어(古語)로 <가라>라 하지 않던가? 다시 말하자면, <가라=黑>라는 우리의 고어(古語)는, <가라족(韓族)>의 <가라>와 꼭 같은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용(龍)>은 우리말로 <미르>라고 하는데, 그 원형(原形)은 <마라=신성한 것>이었으며, <마라>→<무르>→<미르>와 같은 모음교체를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물(水)의 원형도 <마라=신성한 것>이었던 게, <마라>→<무르>→<무르>→<물>의 모음교체를 거친 것이다. 즉 흑룡강(黑龍江)의 <黑龍>은, 우리말 <가라마라=黑水>가 <가라마라=黑龍>와 꼭 같은 소리이기 때문에 오기(誤記)된 것임을 추정(推定)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어원을 캐 보면, 한자(漢字)로 흑룡강(黑龍江)이라 표기돼 있는 이름은, 원래 <가라마라=가라의 물(江)>이라고 불리던 것<마라=물>과 <마라=龍>가 같은 소리였던 탓으로 흑룡(黑龍)이 되었고, 원래의 뜻을 모르게 된 후세(後世) 사람들이, 거기에 다시 강(江)을 덧 부쳤기 때문에 흑룡강(黑龍江)이라는 새 이름이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한족이 세운 나라라고?

이와 같이, 중국 사서(史書)에 남아있는 <九麗>·<句麗)>·<九黎>라는 나라이름은,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을 나타내는 것임이 너무도 분명한데, 어찌 고구려(高句麗)를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일본 유전학자(遺傳學者)들이 밝혀낸 바와 같이, 옛 고구려 영역에 살고있는 조선족과, 한반도에 살고있는 우리의 dna는 동일(同一)하지만, 한족(漢族)의 dna는 조선족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끝>
minjock1944@hanafos.com

**필자/역사학자.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쓴 책으로는 "일본어의 비극" "일본어의 발견" "야마토언어의 기원과 고대조선어"등의 저서가 있다.

 

 

이현우기자 입력2018.09.29 08:00 수정2023.03.05 12:27

 

[통계로 읽는 역사]수·당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인구가 대체 얼마였을까? - 아시아경제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7세기 초 고구려와 당의 숨막히던 혈전을 다룬 영화 '안시성'이 인기를 끌면서,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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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엄청난 대군을 잇따라 물리쳤던 고구려의 실제 인구가 얼마였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지배했던 고구려의 인구가 정확히 얼마였는지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고구려측의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다만 중국 당나라의 기록인 구당서에 고구려의 인구가 69만7000호로 나와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이 기록을 좇아 69만호로 기록하고 있다.

69만7000호를 5인 가족으로 생각해 계산한다면 대략 35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다만 이를 글자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역시 구당서에 나오는 백제의 인구 때문이다. 백제 패망 당시 인구가 76만호라고 적혀있어 고구려보다 더 많게 기록돼있다. 만주와 요동 일대가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비해 토질과 환경이 척박한 것을 고려한다해도, 영토 크기가 2~3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일반인들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350만이란 숫자로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이은 대대적 침략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미지수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 때 대략 30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전체 인구가 350만명 내외라면 짧은 기간동안 전체 인구의 10% 가까운 병력을 계속해서 동원했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 인해 고구려 인구가 최소 500만명에서 1000만명 근처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냐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나라 인구가 1000만명을 처음 넘어선 것이 조선 중기인 1500년경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에 이 역시 확실치 않다. 앞으로 남북한의 교류가 활발해져 공동연구가 진행되고, 중국, 러시아 등 과거 고구려 영토가 걸쳐져있는 주변국들과의 학술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면 더 정확한 고구려 인구 추정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기자명신완순 입력 2016.04.02 11:01 수정 2018.12.01 04:49
 
 

중국 북제는 고구려 속국이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중국 5호16국 시대의 북조정권은 사실상 모두 우리 역사다...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역사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사서를 보다보면 이러한 냉엄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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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공정 끼여 들 틈없어...

중국 5호16국 시대의 북조정권은 사실상 모두 우리 역사다...

 

▲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중국역사지도집 중의 ‘진ㆍ제ㆍ주 시기전도’ - <속후한서>에서 북제 강역의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하였으니 요동은 지금의 섬서성과 황하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북제는 고구려 별부(別部)... 발해왕(渤海王)이 통치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 또한 마찬가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가 위(魏)나라 중심으로 편찬된 사서인 반면, 유비의 촉한(蜀漢)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서가 <속후한서(續後漢書)>이다. <속후한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송(宋)나라 때 소상(蕭常)이 편찬한 <속후한서>를 <소씨속후한서(蕭氏續後漢書)>라하고 원(元)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속후한서>를 <학씨속후한서(郝氏續後漢書)>라 부른다. <속후한서>는 유방이 세운 한(漢, 보통 전한 또는 서한이라 부른다)과 유수(劉秀)가 세운 후한(後漢, 동한이라고도 한다)에 이어 유비가 세운 촉(蜀)을 촉한이라 하여 앞선 두 왕조를 잇는 정통왕조로 보는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 편찬된 사서들이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다.

<삼국지>는 유비를 황제가 아닌 ‘선주(先主)’로, 그 아들 유선을 ‘후주(後主)’라 칭하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반면 <속후한서>는 유비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하고 유선을 ‘소제(少帝)’ 또는 ‘말제(末帝)’라 하여 황제로 칭하고 정통성을 이은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족 중심의 역사로 끌고 가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 철저히 계산되어 ‘만들어진 역사(a made-up history)’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송(宋)나라와 명(明)나라로 이어져 <삼국지연의>와 <초한지> 등의 소설을 만들어냈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의 소중화 사상에 물든 일부 잘못된 선비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현대의 우리들도 여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소씨속후한서>에는 흔히 말하는 사이(四夷) 즉 우리 역사에 관한 기술이 빠져 있으나 <학씨속후한서>에서는 동이(東夷)에 관한 역사 기술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끈다.

원래 <학씨속후한서>는 90권으로 된 원(元)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사서이다. 편찬자 학경의 자는 백상(伯常)이며 능천(陵川)사람이다. 벼슬이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이르렀고 소문관대학사 영록대부(昭文館大學士榮祿大夫)에 추증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기국공(冀國公)으로 추봉,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학씨속후한서>는 위(魏)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개편하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주해한 <삼국지>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비교하여 뺄 것은 빼고 취할 것은 취하여 교간된 것이다. 이 중에서 동이(東夷)에 관련된 사항은 <속후한서>권81 열전 제78편에 부여, 고구려, 발해 등 11개의 나라에 관하여 기술된 부분이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속후한서 동이열전>중에 동옥저, 읍루, 삼한 등 나머지 7전은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이전 고구려조에 우리 학계에 일반화된 기존의 역사 인식을 흔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에 관한 기술이며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별부(別部)는 발해이다. 그 땅의 동쪽은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풍속이 점차 중국과 같아졌으며 수인(蓚人) 고환(高歡)에 이르러 위(魏)나라 효무제(孝武帝)를 축출하고 그 아들 고양(高洋)이 마침내 동위(東魏)를 빼앗아 제왕을 칭하고 나라 이름을 제(齊)라 하였다. 고위(高緯)에 이르러 주(周)나라 무제(武帝)에게 멸망하였다.(句麗別部曰渤海其東際海西接遼東俗漸同中國至蓚人高歡逐魏孝武帝其子洋遂簒東魏稱尊號國號齊至緯爲周武帝所滅)”

 

요수는 황하... 요동지역은 황하 유역

북제(北齊)는 남북조 시대 550년에 건국되어 577년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선비족인 탁발씨에 의해 386년에 세워진 북위(北魏)가 6진의 난으로 인하여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누어졌는데 동위는 북제가 되고 서위는 북주가 된다. 동위는 실질적으로 발해왕(渤海王) 고환(高歡)이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들 고양이 나라 이름을 북제라 한 것이다.

이러한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로서, 바로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비록 51자의 짧은 기록이지만 남북조 시대의 고구려의 역사를 밝힐 핵심적 요소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중화 사관에 의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된 ‘중국역사지도집’의 ‘진(陳)·제(齊)·주(周) 시기 전도’- (그림1)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학경의 <속후한서>의 내용과 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요동의 위치문제이다. 지도에서 북제의 강역을 보면 서쪽 경계는 위쪽으로는 황하 동쪽과 아래쪽으로는 낙양(洛陽)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양자강 북쪽을 표시하고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서쪽의 요동은 현 중국의 섬서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가 그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동이라는 개념은 요동과 요서를 나누어서 분류가 되지만 일반적으로 요동은 요동과 요서를 합한 개념으로 사서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요동이 그냥 고구려를 가리킬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을 ‘요동정벌’이라 하였다. 따라서 북제의 강역으로 보는 요동은 현재의 요녕성이나 하북성 지역이 아닌 황하 인근 유역이며 황하가 자연스럽게 요수(遼水)였음을 밝혀준다.따라서 ‘요동은 현 요녕성에 있는 요하의 동쪽이었다.’는 기존의 지명 비정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하며 현 요하 동쪽으로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하는 역사인식 또한 바뀌어야 할 것이다.

▲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였다는 것을 담고 있는 학경의 <속후한서>, 청나라 건륭제 때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사고전서에 실려있다.

 

또한 송나라 악사(樂史)가 편찬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 172 하 동이편에 보면 “동이의 땅은 흉산(胸山)으로부터 동쪽이다. 그 북쪽은 낙랑(樂浪)·조선(朝鮮)·요동(遼東)이며 그 남쪽은 민(閩)·월(越)·진안(晉安)의 동쪽 모두가 그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흉산(胸山)은 현재의 중국 하남성에 있는 숭산(嵩山)으로 보인다. 태산(泰山), 항산(恒山), 형산(衡山), 화산(華山)과 함께 중국의 5악으로 불리는 숭산은 5악 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숭산은 인체의 심장 부근에 해당되는 산이며 의미상으로 흉산(胸山)이며 이 흉산은 발음은 숭산과 유사하다.

따라서 <태평환우기>에서 말하는 동이의 강역은 하남성 낙양 부근 숭산의 동쪽에 해당되며 황해 연안을 따라 현 하북성에서 복건성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이는 동쪽 지역에 있는 유(幽)·영(營)·청(靑)·서(徐)·양(揚) 지역이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이(夷)를 가리킨다는 것을 앞서 학경의 <속후한서> 동이전의 맨 첫머리에 싣고 있어 <태평환우기>의 기사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 북제와 북위의 전신 선비 정벌

북제의 전신이 되는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북위와 고구려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잘 지낸 것을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외교력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비족은 고구려 2대 임금임 유리명왕 때 이미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관계가 후대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별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북위에서 동위로 또한 동위가 북제로 변천하는 과정에는 항상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며 이들은 실질적인 고구려의 전위부대 성격의 국가였던 것이다. 북제가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이들 고구려의 연방에 대한 국가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중국의 한족들은 속으로는 오랑캐라 경멸하면서도 선비족의 역사까지 그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연방의 일원이었던 선비 등의 역사까지 포함하여야 한다.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온 대륙의 역사는 동이가 나설 때 정리가 되고 안정이 되었다는 것을 많은 사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항우를 노래한 시처럼 언젠가 동이가 중원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는 공포를 항상 안고 살고 있다. 우리는 항우의 권토중래, 아니 고구려의 다물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글 :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 입력 2017.10.03 15:44 수정 2017.11.02 16:25
 

<진짜고대사> 고구려 4방 2천리, 낙랑국과 낙랑군의 비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2부) 글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3. 『삼국지』는 고구려 강역을 사방 2 천리로 기록했다.기경량은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로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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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낙랑군이 서기313년 평양에서 요서지역으로 이사갔다는 식민사학계 주장도 허구다

<진짜고대사>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2부)

 

3. 『삼국지』는 고구려 강역을 사방 2 천리로 기록했다.

기경량은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로 진수(233~297년)의 『삼국지』를 제시하면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경량은 두 가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르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삼국사기』‘신라본기’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5년(314)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위와 같이『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기림 이사금 3년인 서기 300년 “3월에 낙랑국과 대방국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 313년에 낙랑군을 침략하고, 314년에 대방군을 침략하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낙랑국과 대방국이 있었으며,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은 따로 있었다. 기경량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반도의 낙랑국과 대방국을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있다.

 

둘째,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누락시켰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삼국지』위서30, 동이전, 고구려

기경량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가장 중요한 고구려 강역의 크기를 고의로 누락시켰다. 역사왜곡의 전형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리인데, 기경량의 주장대로 요동군의 위치를 요령성 일대로 보면 고구려 강역은 사방 800리도 나오기 어렵다. 『삼국지』의 기록보다 고구려 강역이 1/5이하로 줄어드는 것이다.

『삼국지』의 기록대로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찾아보자.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동쪽 국경선을 대략 백두산 일대로 보더라도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를 가면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요령성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과는 사뭇 다르다. 혹시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가 잘못된 기록일까? 아래 <그림1>지도 참조

▲ 그림1 고구려 2천리를 계산해 보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요하를 훨씬 넘어 내몽골자치지역까지 뻗어간다. 그런데 강단식민사학계는 고구려가 절대로 요하 서쪽까지 넘어 가지 않은 것으로 일관되게 그려놓고 있다.

 

그렇지 않다.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을 통하여 교차검증 된다.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특히 『통전』은 아래와 같이 시대별 고구려 강역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통전』권 제185, 변방1, 동이 하, 고구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강역은 신라,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남북은 1천여 리에서 2천여 리까지 변하지만, 동서의 길이는 2천여 리 보다 좁아진 적이 없었다. 즉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보다 줄어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강역이 동서 6천리로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을 넘어 섬서성 지역까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은 어떤가? 광개토태왕 이전의 강역은 요령성의 천산산맥을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 때도 현 중국 요령성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강단사학계는 중국의 수많은 정사기록들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강단사학계가 고구려 강역을 『삼국지』의 기록보다 1/5이상 좁게 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 요동의 위치를 잘못 비정했기 때문이다. 고대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요동이라는 지명이 요령성으로 이동한 것은 중국 요나라(916 ~ 1125) 시대 이후이다.(필자의 저서 『고조선으로 가는 길』89~109쪽 참조)  
고대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은 중국 서진시대의 정사인 『진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문의가 모두 멋대로 요동에 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사服事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으며,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로 합하였다. 공손문의가 멸망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고 양평에 거하였다. 함녕 2년(AD 276)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개현을 다스리고, 18,100호이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護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진서』권14, 지제4, 지리상, 평주

위의 『진서』‘평주조’ 기록은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한나라 낙랑군이 기원전 108년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어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42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를 지배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진서』기록은 전혀 다르다. 『진서』는 한나라와 삼국시대 그리고 서진에 이르기까지 중국 군현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지』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현 요령성지역과 한반도 북부는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다.

▲ 일제 조선총독부는 세키노타다시(關野貞) 같은 일제관학자들을 동원하여 평양=한나라 낙랑군을 만들어내기 위해, 북경 유리창가에서 한나라 시기 낙랑군 유물을 집중수집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가져왔다. 사진 왼쪽 세키노타다시, 오른쪽 세키노타다시가 서울 홍제동에 있는 5층석탑을 조사하고 있는 모습.

 

『진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였던 요동지역은 위나라가 서기 238년 공손연을 멸하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으며, 서진 또한 위나라를 멸하고 함녕 2년(AD 276) 10월에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다. 서진의 평주가 고대의 요동지역이며, 한나라 낙랑군․대방군과 요동군 등이 설치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서진의 평주 위치는 어디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진서』는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고 하였다. 서진의 평주는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는 지역이다. 고대의 요동과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서진의 평주를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 일대로 보고 있다. 이는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다. 아울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북위서』‧『주서』‧『북사』‧『수서』‧『구당서』‧『통전』등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과도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다. 

 

기경량과 강단사학계에 묻는다.

1. 낙랑국과 대방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2.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어디에 있는가?
3. 『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라고 하였다. 이들 지역의 위치가 하북성인가? 한반도인가?  

 

4. 낙랑군은 하북성지역에서 하북성지역으로 교치되었다.

기경량은 중국사서에서 낙랑군이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을 서기 313년 한반도 평양의 낙랑군이 교치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이 수차례 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진서』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낙랑군, 창려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서기 313년 장통이 낙랑․대방에 의거하다가 1천여 가를 이끌고 창려에 위치한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는데, 낙랑․대방과 창려는 모두 고대 요동인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서 하북성 지역으로 교치된 것을 알 수 있다.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서 창려지역으로 교치되었다는 주장은 『진서』의 기록과 맞지 않다.

『자치통감』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여 수 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자치통감』313년

위의 기록에서 ‘요동의 장통’이라는 표현은 ‘요동사람 장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요동지역의 장통’이라는 뜻이다. 즉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했다.”는 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은 많이 있다. 앞에서 『진서』의 기록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지역에 있었으며, 고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재야사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고대 요동지역인 하북성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은 기경량의 주장처럼 재야사학자들이 중국의 역사 전개나 교치 개념의 이해가 전무한 탓에 생긴 ‘무지의 소산’이 아니다. 중국 정사들의 기록이 낙랑군은 처음부터 하북성 지역에 설치되었고, 하북성 지역 내에서 수차례 이동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경량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스스로의 무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오류를 교정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 연구에는 자료의 성격을 정확히 판단하려는 전문적 훈련·지식과 연구 대상에 대한 겸손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학문으로서 ‘역사학’과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이비역사’ 사이에 놓인 결정적 간극이다.”

기경량에게 충고한다. 스스로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라고 하였으니 아직 젊은 나이인 모양이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라는 우물에 갇혀 꽃다운 청춘을 허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선총독부가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삼은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은 모두 이동․교류․왜곡이 가능한 것들로 역사지리를 확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것은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유물들을 핵심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은 자료의 기본 성격도 판단하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와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려면 최우선적으로 고조선의 산과 강 그리고 해안선 등 자연지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지리의 상식이다.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 의하면 고조선의 중심부에는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습수․열수․산수․패수라는 강물이 흘렀다. 이들 고조선의 강산을 연구해보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북경 일대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끝> 

 

 

입력 2015.05.18 22:17

[북앤북] 우리가 잊고 있던 '위대한 국가' 고구려  - 이코노믹리뷰 (econovill.com)

  • 기자명 주태산 
 
 
 
 
 

<주식회사 고구려> 양은우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고대의 국가는 늘 살얼음판을 걷듯 생존이 위태했다. 힘센 국가도 방심하는 순간 멸망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아 국경은 의미가 없었다. 고구려가 비류수 유역에서 조그마한 벤처 국가로 건국되어 동북아 지역의 맹주로 성장해가던 시기, 주변 정세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수많은 나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한나라를 비롯해 신, 후한, 위, 촉, 오, 서진·동진, 5호 16국, 송, 제, 양, 진,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수, 당 등 주변국의 수는 무려 40여개국에 달했다. 한나라가 전한과 후한을 합하여 410여년, 당나라가 290년을 버텼지만 대부분 국가의 존속 기간은 평균 20년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가 무려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됐다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漢)에 맞서 세력을 키웠던 강성한 국가였다. 992년 동안 존속했지만 오랫동안 한반도 남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비호를 받으며 힘겹게 역사를 이어가던 신라와는 달랐다.

 

고구려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이기도 했다. 수나라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에 따르면, 전성기 고구려의 영토는 좌우로 무려 6000리(2400㎞)였다고 한다. 서울-부산 간 거리의 5배에 달한다. 고구려는 중국에 사대 관계를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가를 경영한 자주 독립국이었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만큼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동북아의 거대한 시장을 보유하고 있던 경제 대국이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6세기 말에 이미 중국 요서 지방의 유성에 고구려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수나라가 거란을 공격할 때 몰래 거란에 잠입하기 위해 잘 훈련된 정예군사 2만명을 뽑아 장사꾼처럼 옷을 입힌 뒤 고구려의 시장이었던 유성을 통해 거란까지 몰래 들여보냈다고 한다. 수치의 정확성은 떨어지더라도 고구려 유성 시장은 그토록 많은 장사꾼이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던 셈이다. 고구려가 멀리 서역 국가에까지 교역을 하고 외교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이미 고대의 국제 무역 국가였다.

 

또한 고구려는 수레의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말과 수레를 이용하던 나라였다. 이러한 속도 경영 덕분에 고구려는 건국 초기인 6대 태조왕 때 신속한 기동력을 앞세워 지금의 베이징 근처까지 점령하는 등 고조선 땅의 상당 부분을 한시적으로 회복하기도 했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영락 8년에 백신의 토곡을 정벌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토곡은 오늘날 티베트 지역에 해당한다.

 

이 책은 약육강식의 밀림 같은 고대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700년 이상 강국으로 생존할 수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아가 고구려를 통해 오늘날 기업 생존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책에서는 고구려의 성공 및 장수비결을 ‘다물 정신’으로 불리는 명확한 비전 제시, 건국이념으로 충성을 유도하는 스토리텔링 마케팅, 다민족을 받아들이는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조직 문화, 패전 경험을 통해 확립된 리스크 관리법, 철제 무기 등 기술 개발, 소서노-유화부인-평강공주 등 여성 인재의 활용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국가경영과 기업경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이 망하듯 국가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다. 굳이 경영과의 연계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우리가 잊고 있던 위대한 국가 고구려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일독을 권한다.

 

 

 

입력 2007-08-18 03:01업데이트 2009-09-26 18:06

◇한말유럽학자의 고구려연구/서길수 지음/438쪽·2만8000원·여유당

◇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마다정 외 지음·서길수 옮김/792쪽·3만8000원·여유당

 

고구려연구회 서길수(서경대 교수) 이사장의 저력을 보여 주는 2권의 책이 동시에 출간됐다. 하나는 유럽에 고구려를 소개한 프랑스 및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 시작된 중국 동북공정의 나침반 역할을 한 ‘고대 중국 고구려역사 총론’(2001년)을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이 두 권을 펴내기 위해선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에 모두 능통해야 한다. 독학으로 공부한 에스페란토어로 세계에스페란토어협회 이사에 선출될 만큼 뛰어난 서 교수의 어학 실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명의 학자가 쓰고 옮겼지만 고구려에 대한 두 책의 인식은 크게 다르다.

먼저 ‘한말유럽학자의 고구려연구’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주인공은 1865년생으로 나란히 대학에 진학한 뒤 동양어학교에서 동문수학한 모리스 쿠랑과 에두아르 샤반.

쿠랑은 국내에서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을 유럽에 소개한 학자로 더 유명하지만 1898년 유럽에 최초로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을 소개한 학자이기도 하다. ‘고구려왕국의 한문비석’이란 그의 논문은 1884년 태왕비를 발견한 일본을 빼고는 최초의 연구였다.

쿠랑보다 일찍 학계에 들어선 샤반은 쿠랑의 이 논문에 자극 받아 유럽 학자로는 처음으로 광개토태왕비 등 고구려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조사했다. 그는 1907년 고구려 국내성을 닷새간 현지 답사하다 고구려벽화를 최초로 발견했다. 그는 이를 정리해 ‘한국의 고대 왕국 고구려 유적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들의 연구는 몇몇 오류는 있었지만 훗날에도 감탄할 만큼 사실관계에 충실했다. 쿠랑은 광개토태왕비문을 프랑스어로 옮기며 “한국의 지명과 인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한국 발음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또 그가 그린 고대 역사지도에서 현재 중국 지린(吉林) 성 일대 부여의 영토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 읍루를 중국어 한자 발음이 아닌 한국어 한자 발음으로 옮겼다.

샤반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면서 당시 중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고구려유적이 훼손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장수왕릉 위에 별도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보고했고 태왕릉을 처음부터 광개토태왕릉으로 추정했다.

반면 ‘∼총론’을 번역한 ‘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에서는 당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존 연구를 손바닥 뒤집듯 한 파천황적 행태를 펼치는 중국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동북공정의 야전 지휘관 마다정(馬大正)은 머리말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역사의 소수민족 정권”이며 “고구려·고려와 조선을 구별하라”고 처음부터 연구방향을 못 박았다. 그러면서 책 말미에는 “이전의 일부 대가, 권위 있는 견해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다른 견해를 내놓고 논쟁을 벌여야만 인식의 비약과 연구 결과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혀 이러한 방향에 어긋나는 기성 연구를 과감히 무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민족편을 맡은 양바오룽(楊保隆)은 “고려를 세운 왕건은 중국 성씨”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동북공정 초기부터 이미 고려사 침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정치편을 맡은 리다룽(李大龍)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도 중국 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했다. 백제가 부여와 고구려를 세운 부여계가 세운 나라이고 신라의 전신인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으로도 불린 것은 중국 진(秦)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주장과 함께….

같은 필자들이 2003년 발표한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속론’을 지난해 ‘동북공정 고구려사’(사계절)란 책으로 펴낸 서 교수는 “동북공정이 고구려를 빌미로 처음부터 삼국사는 물론 고려까지 역사 침탈을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기사입력 2008/01/28 [15:53]

'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사실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nbsp;고대 문헌들과 고고학적 유물들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직간접 지배권이 미친 최대 광역도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1/30 [15:46]

고구려 사직은 700년인가 900년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8/08/11 [11:26]

새로운 고구려 역사책 나왔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수정 2008-02-12 07:14 등록 2008-02-12 07:14

뉴욕타임스에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 광고 실려 (hani.co.kr)

 

뉴욕타임스에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 광고 실려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 타임스(NYT)에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임을 알리는 광고가 실려 눈길을 모으고 있다. 11일 뉴욕 타임스 18면에는 '고구려'(Goguryeo)라는 제목으로 412년 당시 고구려가 만주를 차

www.hani.co.kr

 

 

 

기사입력 2008/05/04 [14:20]

고구려에서 통일한국의 미래 찾는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윤명철 교수  | 
 

고구려는 21세기에 당면한 민족문제의 대응방법론을 모색하고 설정하는데 참고해야할 모델이다. 고구려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동아시아 역학관계의 기본틀을 이해할 수가 있다. 현재 세계의 각국들은 군사동맹 외에도 나름대로 EC(유럽공동체) EU(유럽연합) NAFTA(북미자유협정) ASEAN 등 국가간의 결합을 매개로 광범위한 블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소위 유사한 문명권, 종족, 지역을 중심으로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自集團主義'를 실현하고 한다. Ghassan Salame는 地域化는 새로운 영향권 형성을 위한 완곡한 위장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미국이 초강대국을 선언하고 있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넘어서 합중국을 지향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동아시아 지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최고목적으로 삼고 각국 간의 역학관계와 위치조정을 숨가쁘게 조정하고 있다. 아시아는 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을 필두로 해서 급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 성년이 된 아시아는 세계최고라는 꿈을 꾸고 있다."라는 마이클 블라오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말레이지아 국제전략연구소장인 Noordin Sopiee는 동아시아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서기 2000년이 되면 동아시아의 GNP가 북미나 서유럽보다 커질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계가 '황인종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도록 세계를 설득해야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곳에서 말하는 동아시아는 현재 동남아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소위 동아시아의 핵, 동아지중해 국가들은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군사적인 역할과 영향력, 경제력의 향상과 체제의 개편, 정치적인 영향력의 확대 등 많은 면에서 서로 간에 경쟁을 하거나 갈등을 빚고 있다.

▲&nbsp;&nbsp; 하북성을 통과하며 산서성 태원까지 쳐 들어가는 고구려-북방 유목민족들의 맹주였던 고구려에게 중국대륙과 한반도라는 지역은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는 공간이였다. 그리고 중국대륙과 한반도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쉬운 위치로써 고구려의 중심지역은&nbsp;소서노세력과 함께 고추모의 초기 수도로 삼았던 만주 집안 골본성이후 고토회복차원과 함께 이전한 고구려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하북성 난하(고구려의 조상들인 고리국의 발원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고리국'의 왕손 출신이다)지역으로&nbsp; 추정된다.[편집자 주]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근의 사태에서 보듯이 세계 여타의 강력한 블록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협력체 내지 내지 블록을 결성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즉 '갈등과 경쟁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협력과 동맹의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갈등을 계속해온 각 나라들은 물리지 않은 의심과 긴장의 시선으로 상대국을 바라보았다. 특히 한국전쟁의 군사적인 충돌 이후에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아직은 정치적인 것 보다는 경제나 교역, 문화교류 등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조심스레 협력체의 결성과 파트너쉽의 가능성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좀더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협력체제로 갖추기 위해서는 각국들은 서로간의 역사적 경험을 이해하고, 어떠한 역할분담이 가장 바람직한가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주변국들에 비하여 정치 군사 경제 문화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 있다. 그러므로 역학관계의 본질을 신속하고 정확히 파악해서 능동적으로 질서재편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러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고구려가 발전했던 당시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地政學的 要因에 큰 변화가 없으므로 북방의 유목종족, 중국, 우리와 일본이라는 4각의 기본적인 구도와 정치적인 역학관계에는 거의 변함이 없다. 다만 일본이 7세기 이전까지는 우리의 영향을 받는 종속적인 존재였고, 고구려의 발전기에 중국은 南北朝로 분단되어 있었던 반면 현재는 우리가 분단된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중국은 동아시아의 강력한 중심부였고, 패권을 오랫동안 장악해왔다.

이러한 기본구도 속에서 고구려는 자기의 대응방식을 갖고 발전하면서,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중국세력과 대등하게 관계를 맺고, 때로는 외교적으로 주도권을 쥐었으며, 상당기간 동안 전면전을 치룬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정치체제와 외교전략, 경제체제 및 주변국에 대한 문화정책, 군사전략 등에 대한 기본패턴을 이해하므로써 현재는 물론 향후 전개될 질서재편의 방향과 내용을 예측할수 있다. 또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교훈을 얻을수 있다.

필자는 좀더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추진한 정책을 '東亞地中海 中核調整論'이라고 설정하고 그것을 모델로 하여 동아시아의 기본구도와 함께 향후 우리민족의 위치와 역할을 모색하고자 한다.  

< 동아지중해론>

먼저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자.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동아시아의 각국들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여러 군도들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해 등을 포함하고 있어 지중해적 형태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소위 역동적인 동북아경제권(Dynamic North-East Asian Economies)은 동아시아에서도 중심부인 동아지중해 지역이 된다. 따라서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ean-sea)라고 명명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모델로 삼은 것이다.

지중해는 나름대로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해양문화의 성격을 구비하
고 있는 만큼 이동성(mobility)이 강하다. 각 나라들이 내해(inland-sea)를 공유하고, 긴 연안이 여러나라로 갈라져 있으므로 국경이 불분명하고 변화가 심하다. 때문에 해역지배권(海域支配權)의 대립을 둘러싸고 국가간의 다툼이 벌어지며, 해양력(sea-power)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또한 지중해는 정치 군사적인 것 보다는 교역 문화 등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완전한 의미의 지중해는 아니지만 바로 多國間地中海(multinational-mediterrean-sea)의 형태로서 모든 나라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동아시아는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공존하며 협력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동아시아가 협력체 내지 연합체, 불록, 혹은 그 이상을 구성한다면 해양을 매개로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유럽지중해와 카리브 및 걸프지중해, 동남아지중해 등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동아지중해의 형성이 절실한 것이다. 최근에 일본의 학계에서 지중해이론을 제기하며 21세기 일본의 앞날을 조망하고자하는 시도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 이러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떻게 설정하며,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남북통일은 불투명하며, 주변국의 방해로 인하여 民族力의 결집 또한 매우 어렵다. 남북통일이 이루진다해도 향후에 경제 정치 군사력이 주변강국들에 비해 열세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회의적인 처지이다. 그러나 신질서가 편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하나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nbsp;고구려 최대 전성기 시대인 광개토태왕시절를 비롯하여 고구려가 점유한 영역은&nbsp;토곡혼(티벳)과 양자강 등 중국 동남부 지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지배했던 고구려는 고추모 시절 소서노 세력이 존재한 만주 집안의 골본성에 잠시 터를 잡았다가 이후 고구려의 조상들의 터전인 하북성 난하지역(고구려의 발원지=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이 위치)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nbsp; 참고로 [한단고기]에 "요동성은 오늘의 창려성"으로 주해하고 있다 .&nbsp; 북한 덕흥리 고분 (고구려 유주자사 진 묘비=유주자사 진의 고향이 평안도로 보인다)에서 발견된 &nbsp; 위 그림은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 등 13개 지역을 통치하는 태수들을 관리했던 유주자사 '진'의 관할지역을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가 통치한 영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하겠다. 아마도 아시아 전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nbsp;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고추모의 다물정신을 실현한 고구려인들의 의지와 강인성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nbsp;[편집자 주]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동아지중해의 中核(core)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분단시대, 냉전시대에는 적대적인 양대 힘이 격돌할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요인으로서, 스스로 풀어버릴 수 없는 굴레가 씌워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연결과 협력의 시대'이다. 남북이 긍정적으로 통일될 경우,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특히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우리 바다를 통해서만이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안심하고 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 이러한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와 한반도의 중핵 조정지로서의 바람직한 역할과 가능성을 우리는 지나간 고구려의 역사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다. 고구려가 진정으로 발전한 이유는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할 경제력 문화력은 물론 국제정치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바로 해양활동이 활발하였고, 해양을 장악하므로써 주변국들간의 외교망을 통제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국제정치에 해양력(sea-power)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해양전략은 이미 3세기 전반부터 위(魏)와 오(吳)의 갈등을 이용하면서 사용하였으나, 4세기를 거쳐 5세기경에 이르러 광개토대왕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국제전략으로 채택하고, 지중해적 국가로서 발돋움 하였다. 즉 대륙의 동 서 북으로 팽창하여 만주지방을 완전히 석권하고, 남으로 과감하게 진출하여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지역까지 국가전략수립의 영향권하에 두었다. 뿐만 아니라 동해는 물론이지만 해양력을 바탕으로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장수왕 시대에는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중부지방은 소백산맥의 이남, 동으로는 포항 근처의 흥해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속에 넣고 조정할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中核자리를 확보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질서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그 전 시대처럼 몇 개의 線이 중간국가를 경유하여 평면적으로 연결되는 외교형태가 아니라 다수의 선이 동시에 연결되는 '다중 방사상(多重放射狀)' 혹은 '다핵방사상(多核放射狀)'형태로 되었다. 즉 분단된 南北朝(상해와 북경), 북방의 柔然(러시아,몽골), 그리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동등한 中心核이 되고, 백제 신라 가야 왜 거란 말갈 등 주변국들은 서로간에 교섭을 갖게되었다. 지금의 구도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과거에는 중국이 분단되었고, 지금은 우리가 분단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면서 각국들의 교섭을 관리(管理)하고, 통제(統制)하고, 조정(調整)했다. 백제 신라 가야,왜 등이 북중국정권(현 북경)과 교섭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때로는 남조정권과의 교섭마져 막았다. 뿐만 아니라 해양통로(海洋通路)의 확보(確保)를 잇점으로 분단된 중국세력들(북경, 상해)간의 복합적인 갈등을 등거리 해양외교(等距離 海洋外交)로서 적절히 이용했다. 통일된 나라가 분단국가를 대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 후에 고구려는 경기만을 상실하는 등 해양력이 약화되므로써 정치군사력은 물론 교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중핵조정 역할을 상실하였다. 그 후 7세기에 벌어진 소위 東亞地中海 國際大戰의 결과로 인하여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실패하였다. 결국은 고립된 채 주변국들의 협공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서 탈락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흥망은 동아지중해의 성격과 유용성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알려주고 있다.

한편 동아시아의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역할은 향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효한 모델 이 된다. 21세기의 신질서 속에서 동아시아는 협력이든 동맹, 혹은 그 보다 더 강고한 형태로의 결속이 필요하다. 다른 지역에 대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부간의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연적이다. 이때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이나 地政學的 조건, 地經學的 조건, 地文化的 조건, 그리고 현실적인 필요로 보아 그 결속의 공통분모로서는 해양을 매개로한 동아지중해적 형태가 가장 유효하다.

그런데 이 결속은 국가들의 단순한 지리적, 물리적 연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국가들 간에는 철저한 힘의 균형(均衡-balance of power)이 필요하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국력이 현저히 약하면 종속되거나 주변부화될 우려가 있다. 반대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힘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면 패권국가를 지향하거나 맹주(盟主)로서의 유혹을 느낀다. 동일한 민족 내부에서도 지역 간의 갈등, 계급간의 차별과 모순이 있게 마련이므로, 신 협력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일어날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러므로 구성되는 첫 단계에서부터 내부 소단위인 기존의 국가들은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큰 단위인 동아시아의 안녕과 존속,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앙금과 균열이 있는 단위가 다른 단위와 효율적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고구려가 중핵조정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그 시대에 동아시아에 평화구도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다른 2개의 힘, 즉 중국세력과 북방세력에 비하여 힘이나 문화 경제 등에서 대등하였기 때문이다. 중간에 있는 힘이 약할 경우에는 조정역할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향후 신동아시아 질서에서 중핵조정역할을 해야만 하는 우리는 남북통일이 되어야 능력을 갖추고 균형축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동아시아는 견제와 균형속에서 평화와 협력구도를 연출할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주변국가들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면서 실제로 우리의 통일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도와 주도록 설득해야한다.

둘째, 신 질서는 각 국가들간의 역할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협력체의 결성은 자연환경에 걸맞게 역사적 경험과 문화, 구성원들의 능력과 지향성, 군사적인 능력과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형태를 고려하여 갈등이나 경쟁 등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하고, 분업과 상호협조로서 시너지(相生)효과를 창출시킬수 있도록 해야한다. 다행하게도 현대의 동아지중해 삼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문화 지리 군사력 정치체제 경제체제 등이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랜 역사속에서 형성된 공질성(共質性)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을 서로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호보완성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발전단계와 양식이 다르므로 결합하면 강력한 힘을 지닌 하나의 단일경제공동체가 완성될 수 있다. 중국이 주장했던 D-N-U (D는 선진일본, N은 신흥 한국,U는 중국 북한) 즉 횡향연합(橫向聯合)은 한반도의 그러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것 같다. 아시아의 거인인 중국은 경제규모가 현재의 보통 추세대로 한다면 21세기 중반에는 7배나 확대되어 규모면에서 미국과 겨루게 될 것이며, 만약 낙관적인 고도성장을 할 경우에는 현재의 11배로 확대되어 세계최대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는 매우 독특한 자연환경 속에서 중국세력, 북방세력과는 다른 체제를 유지하며, 동이시아 역사형성에 역할분담을 하여 왔다. 경제적으로는 말 초피(貂皮) 등 북방의 산물을 중국지역이나 남방에 수출하고 반대로 남방의 물품들을 북방으로 수출하는 중계무역 등을 하였다. 해양로와 육상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물류체계(物流體系)를 원(circle)으로서 연결시켰다. 문화적으로는 영역 내부에 농경문화 해양문화 초원유목문화 수렵삼림문화 등을 공유하고 발전시켰으므로 서로 다른 문화들을 수용하여 충격을 흡수하면서 발전시키거나 전달할수 있었다. 동이시아 문화가 생동감있고, 정체성(停滯性)을 띄지않고, 환류(環流)시스템과 균형감(均衡感)을 유지한 것은 고구려문화의 역할이 크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핵에서 균형과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동아의 평화구도를 만들었고, 물류체계(物流體系)와 文化體系의 거점 내지 중계로 역할을 하였다.

21세기의 신질서 속에서 통일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은 이해가 잘 조정된 협력체 내지 공동체를 구성하여 세계사속에서 東亞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입지는 더욱 중요해진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열세에 놓여있는 한반도는 통일을 한 후에 고구려처럼 지리적으로 중핵에 있는 조건을 잘 활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문화 군사적으로 조정역할을 하면서 정당한 자기 위치를 확보해야만 한다. 더욱이 정치 문화 경제 사상 등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20세기 구질서(냉전질서)의 양극단인 남과 북이 만나 이루어졌으므로 적지않은 차별과 충격을 흡수하고, 대립과 갈등 등을 조정하면서 역할분담을 유효하게 할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살아있는 역사로서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절박한 메세지를 전달해준다. 통일한국이 활발한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적 인식을 토대로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을 유리하게 주도하고, 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 역할을 수행한다면 우리 민족은 21세기를 보다 긍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동아시아도 지구라는 거대한 단위 속에서 영향력있는 중간단위가 될 수 있다.

민족통일의 모델과 고구려  

고구려는 그 밖에도 우리에게 닥친 여러가지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임새있는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통일에 대한 고구려적인 접근방식과 그것이 실패한 과정, 멸망과 그것이 가져온 결과와 역사적의의 등은 21세기를 맞이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난 현시기에 민족모두가 지향하고 있고, 당위의 문제로서 접근하고 있는 통일에 대하여 매우 쓰임새 있는 교훈을 제공해준다.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고구려는 끝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멸망한 나라이다. 물론 실패한 역사는 아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 정치하던 무렵인 5세기의 고구려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방과 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 주변 종족들에 대한 통제력도 지니고 있었으며, 自國內의 신민으로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으며, 신라는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이 시대는 북방전선에서 긴장이 완화되었던 만치 군사력을 남으로 전면배치하여 공격을 하였다면 통일의 가능성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적어도 사료를 보면 고구려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은 별로 없다. 왜 그랬을까?

통일의식이 없었을까? 한 민족 아니면 한 종족이라는 인식이 없었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 등은 '一統三韓' '三韓一家'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정당성이 결여된 행위가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치장하기 위하여 후에 명분으로 선택한 용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사료를 그대로 신뢰한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하나의 종족 내지 文化共同體라는 의식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인식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唐 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周以封箕子爲朝鮮,漢分置三國, 謂玄 樂浪帶方(北帶方)'라고 하였으며, 帝王韻紀 권 下에는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 또 같은책 [漢四郡及列國紀]에는 '--三韓各有幾州縣---數餘七十何足徵,於中何者是大國,先以扶餘沸流稱,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부---世系亦自檀君承'라고 하였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濊傳에는 '濊及沃沮 句驪本皆朝鮮之地也.'라하여 중국인들이 인식도 대체로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사서에는 열전 동이전에 삼국을 다 같이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인식되었음이 확실하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동일한 조상에서 출발했고, 동명신앙이라는 공동의 시조를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魏書}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北史}에서도 백제는 색이국(索離國)의 東明으로부터 나왔다고 하고 있다. 결국 三國 내지 四國은 서로를 동아시아의 다른 종족들과는 다른 관계라고 구성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를 분점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결국은 신라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nbsp;&nbsp;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증명하는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 관련 유물-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이라는 의미의 '동이매금'(충북 중원 고구려비 기록)으로 고구려에 의해 칭해질 만큼 고구려의 속국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왜 전성기에 四國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당시 고구려의 지배방식이나 통치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가한 것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는 달리 삶의 터전도 농토만이 아니고, 삶의 양식도 농경문화의 그것이 아니다. 국가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영토와 주민을 지배하는 방식도 백제 신라 같은 농경위주의 나라들과는 다르다. 정복국가와 유목종족들의 지배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고구려 역시 직접통치(直接統治) 외에 간접통치(間接統治)나 영향력(影響力)을 확대(擴大)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종족내부의 질서를 느슨한 형태의 간접지배나 영향력확대라는 수준에서 접근한 것은 아닐까하는 가능성도 고려해본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서 보이는 용어와 그 곳에 담겨진 인식들은 나름대로 천하의식을 지니고, 역사공동체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그러한 시도마져 하지 않았다면 당시 고구려인들은 민족의 시대적 책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가 통일하지 못했고, 민족간의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신라가 자구책으로 추진한 외세의 참여로 인하여 강제적 통일(强制的統一)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 답습해 내려온 불행의 씨를 잉태하였다. 고구려로서는 전성기에 북방 종족들과의 대결구도보다는 같은 종족의 통일을 이루는데 비중을 두었어야 했다. 지배방식이나 통일방식 또한 현실과 지역에 걸맞는 방식을 취했어야 했다. 결국 한 집단의 운명은 동일한 역사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데서 결정되는 것이다.

▲&nbsp;&nbsp;고구려의 한반도 지배을 상징하는 충북 '중원 고구려비'

 

고구려는 멸망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델이 될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을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세력과 무모한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패망했다는 의식(이러한 의식은 발해의 高王인 大祚榮의 작은 아들, 즉 武王의 동생인 大文藝가 발해와 갈등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을 바탕으로한 비판이 있다. 또 고구려의 내부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독재정치를 해서 내부의 균열이 생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형제들 간에 권력쟁탈전이 일어나 결국은 패망했다는 비판이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전쟁을 1년간 계속하다가 패배한 것도 그렇게 돌리고 있다. 물론 내부분열때문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패망의 한 원인이 될 수있으나 중요한 인자(因子)가 되지는 않는다.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동아시아의 서쪽에서 수백년 만에 분단된 중국을 통일한 수.당(隋.唐)과 동아시아의 동쪽에서 이미 600여년이상을 발전해온 고구려가 대결한 것은 국제환경과 역학관계의 피할수 없는 산물이었다. 東아시아의 종주권(宗主權)과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의 교역권(交易圈)을 둘러싸고 양 세력은 전면전을 벌였으며, 주변의 국가와 종족들이 참여하는 국제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고구려 내부의 세력들은 다양한 대응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고,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고구려는 통일된 중국세력과 598년부터 659년까지 전면전과 국지전을 벌이면서 국제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660년에 백제가 급습당하면서 멸망하자, 신라와 당의 협공(挾攻)을 받으면서 다시 8년을 버텼다. 이러한 전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의 멸망은 정권내부의 분열 때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국력의 약화와 국토의 황폐화, 인민의 희생 등은 일반적인 전쟁의 기본요인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요인으로서 단기적으로는 신라와 당의 협공이었고, 장기적으로는 당시의 국제질서(國際秩序)를 인식(認識)하고, 활용(活用)하는 전략(戰略)에서 문제점(問題點)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 전쟁은 분명히 배경이나 전개과정, 결과 등을 놓고볼 때 분명히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역시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중국세력의 잠재적(潛在的)인 가상적국(假想敵國)이지만,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는 우군(友軍)으로 변신하여 고구려에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북방세력을 동맹국으로 삼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국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작업을 소홀히 하였으며, 실패했다.  

* 윤명철(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해양문화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08/04/21 [02:15]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고구려 정신: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8/03/21 [03:10]

[대담]우리에게 고구려는 무엇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입력 2007. 5. 1. 03:12수정 2007. 5. 1. 03:12

[서울신문]고구려(高句麗)는 '고구리', 고려(高麗)는 '고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경대 서길수 교수는 3일부터 이틀간 '고구려의 시원과 족원에 관한 제문제'를 주제로 경성대에서 열리는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에서 "高句麗를 고구려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년밖에 안 됐다."며 "高句麗의 표기를 원래의 발음인 고구리로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서 교수는 30일 미리 배포한 논문'高句麗,句麗,高麗 국호의 소릿값에 관한 연구'에서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세가지를 제시했다.

 

 자치통감 등서 麗를 '리´로 읽어

우선 자치통감, 신당서 등 중국 고대사서에서 '麗'에 주석을 붙여 바로읽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고구려, 구려, 고려에 쓰이는 '麗'의 소릿값에 대한 주석이 모두 69개나 등장하고, 신당서에도 7개, 책부원귀에는 1개가 있다.

자치통감 등에는 '麗'의 소릿값과 관련, 려(呂)·력(力)·린()자의 첫자음(ㄹ)과 지(支·知·之)자의 끝 모음(ㅣ)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주석이 붙어 있다. 즉 고구려, 구려, 고려에 쓰이는 '麗'자를 '리'로 읽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한·중·일 자전 등서 '고구리´ 강조

두번째 근거는 한·중·일 자전과 옥편의 기록이다. 청나라 시대의 '강희자전', 우리나라 옥편의 시조격인 정조때의 '전운옥편', 최남선의 '신자전' 등에 '고려'를 '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광복 후 한글학회가 편찬한 '큰사전'에는 '고구리'라는 단어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과 타이완에서 출판된 자전에도 '麗'자를 '려'와 '리'로 읽을 수 있으나 '리'로 읽는 사례로 '고구려'와 '고려'를 들고 있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조선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도 '高句麗'를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를 달고 있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신채호, 이병도 등은 '高麗'의 소릿값을 '카우리' 등으로 읽었는데 이때도 '麗'자는 '리'로 읽었다.

 

 서교수 "교과서 먼저 고쳐야"

서 교수는 "중국에서도 高句麗를 현대 중국어식으로 읽지 않고 고대 사서의 기록대로 읽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 나오는 중요한 나라 이름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학계의 깊이 있는 토론을 거쳐 교과서를 고치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또한 고구려가 고려로 국호를 변경한 시기가 서기 423년쯤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구려의 국호 변경시기와 관련, 서기 398년(양보융)∼581년(이병도) 등으로 다양한 의견이 나와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서 교수는 장수왕11년(423년)부터는 공식적으로 高麗를 국호로 썼고, 그 뒤 한번도 高句麗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423년쯤을 고구려의 국호변경 시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국호를 바꾼 이유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427년)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무예는 기본… 남녀귀천 구분않고 가무 즐겨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벽화 등을 통해 어렴풋하게 알려진 고구려의 이미지는 '무(武)'를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과연 '무예'만 중시한 사회였을까.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출간한 두권의 책 속에 그 해답이 실려 있다.

고구려 문화사를 다룬 국내 최초의 단행본인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은 고구려인의 문화·사상적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강현숙 교수 등 10명의 연구진이 집필한 이 책은 1990년대 이래 고구려 고분벽화, 산성 등 고구려 유적 및 유물에 대한 접근이 부분적으로 이뤄지면서 촉발된 고구려 문화사 연구의 축적물이다.

연구진들은 고구려인의 문화적 특징을 '기백' '웅장' '낙천' 등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우선 무예 못잖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고구려인들은 생활전반에서 활력과 기백이 넘쳤다고 한다. 걷는 것을 뛰는 것처럼 했기 때문에 반드시 허리띠를 매는 등 활동적인 옷차림을 선호했고, 격투기 연마나 사냥을 즐겼다는 것이다. 높이가 6.39m인 광개토대왕릉의 규모는 같은 시대의 비석 가운데 가장 높다. 왕릉급 적석총과 왕궁인 안학궁의 규모 또한 같은 시대 일본, 중국의 왕릉과 궁궐을 능가한다. 이처럼 고구려의 문화는 웅장하다고 연구진들은 주장하고 있다.

낙천적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남녀,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노래와 춤을 즐겼고, 장례 때도 북을 치고 춤을 추는 등 낙천적인 인생관을 지녔다고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에서는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도 독자적인 체제를 마련한 고구려의 자주적 면모가 부각돼 있다. 정치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전통적인 관습법을 시대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율령의 반포 ▲역사서 '유기(留記)' 100권 편찬 ▲독자적인 연호('영락' 등)의 사용 등이 제시됐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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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05

'고구려’는 ‘크크리’다 : 문화생활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hani.co.kr)

 

기사입력 2013/07/05 [00:24]

‘고구리’로 불러야! ‘고구려’는 중국 동북공정용 용어: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13/03/02 [13:48]

KOREA, ˝고구려 그것이 바로 코리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 걸리버 여행기 3부의 지도로서 'sea of corea'가 보인다.&nbsp;&nbsp;그러나 대한제국 시절 공문에도 korea(코리아)라고 썼다.그리고 Corea/Korea 역시 일제 침략 이전에 이미 영어권 국가에선 C/K로 쓰고 있었다.&nbsp;&nbsp;&nbsp; &copy; 편집부

 

 

 

기사입력 2008/03/15 [03:35]

고구려 군대의 전쟁승리 원동력은 과학: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최강의 강철국가'였던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개마무사

이종호  | 
 

고구려가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갖고 있는 고구려 나름대로의 노하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양국은 전투 방법부터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의 전투 비법이 축적되어 있었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비장의 전투 기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기원전 1028년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백대, 용사 3천명, 갑사 4만5천명을 거느리고 위수를 따라 동쪽으로 출발하여 맹진(孟津)에서 여러 부락과 연합한 후 은나라 주왕(紂王)을 공격했다고 사마천은『사기』에서 적었다.

당시의 전쟁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주례(周禮)』에 의하면 병사 5명을 오(伍)라고 하고 5오를 1량(兩), 4량을 1졸(卒), 5졸을 1려(旅)라고 하였고 5려를 1사(師)이라고 하며 5개의 사를 군(軍)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1량(兩) = 25명, 1졸(卒) = 100명, 1려(旅) = 500명, 1師 = 2천500명, 1군 = 1만2천500명이 된다. 근래 사용되는 여단(旅團)이나 사단(師團)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중국의 전투는 주로 전차전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차 1대에 보병이 30명씩 호위하였다. 이 때 사용된 전차(戰車, 또는 兵車)는 크게 공격용 전차인 치차(馳車)와 수비용 전차인 혁차(革車 : 가죽전차)로 나눠진다. 치차는 공차(攻車) 또는 경차(輕車)라고 하는데 대개 경차 1대에서는 말이 4필, 갑사 3명, 병졸 72명이 따라다녔다. 혁차는 수차(守車), 또는 중차(重車)라고 하는데 혁차 1대에는 4마리의 소와 25인의 병졸이 따랐다.

이 당시의 전쟁들은 대부분 전차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주로 전차가 거동하기 편리한 지역을 전쟁터로 선택했다. 그러므로 주로 넓은 평원이 있는 곳에서 국경지대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당시의 전쟁을 ‘강장지사'(疆場之事, 국경의 일)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에 들어서자 철기의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보병들에게도 질이 좋은 무기들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질 좋은 철기는 무기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당시에 주력 무기는 강한 쇠뇌(弩)였는데 사정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한(漢)나라의 경우 6백보까지 쏠 수 있는 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산악 작전이나 경사지 등에서 전투를 할 수 없는 전차전보다는 보병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보병들이 밀집대형으로 화살을 발사할 때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하던 전차 진영(車陣)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405년, 단구(亶丘) 전쟁에서 ‘전차 2천대를 노획하고 3만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보병은 인원만 많다면 산악지나 구릉지, 평지 등 전쟁터에 제한을 받지 않으므로 전쟁터의 범위가 넓어지고 작전을 펼치기가 유리했다.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의하면 위나라(조조의 위나라가 아님)에서는 보병을 선택할 때 ① 세 가지 물건으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했고, ② 12석(石)의 힘을 가진 쇠뇌를 쏘는 것은 물론 쇠뇌살 50수를 등에 질 수 있고 ③ 무기를 휴대한 채 3일간의 식량을 짊어지고 하루 1백리 길을 달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즉 이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정규 무졸(武卒)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당시 보병이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는 춘추전국 시대까지 기병(騎兵)이 단독 병종으로 편성되지 않고 전차병과 혼합작전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차츰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자 기병이 독립 병종으로 발전하지만 그래도 기병은 고작 5천 필~1만 필에 불과했다. 중국의 장점은 장병 수이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각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관료기구도 발전하였고, 초모제도(招募制度)를 실시하면서 경쟁적으로 국방을 강화했으므로 십만 명의 병력은 보통이었고 한 전쟁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형태는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국경에 관문을 만들어 방어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평소에 대병력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이 침공해올 때에 한해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자 보병전 위주로의 전투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지형에 따라 성을 방어진지로 삼아 공격군으로 하여금 소모전을 펼치게 하므로 당연히 성(城)의 공격과 방어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군대가 상주하고 정(亭, 변경의 토담 위에 설립된 감시용 건축물)이나 장애물 등이 건축되고 봉화 설비도 갖추면서 성이나 요새를 서로 연결한다. 이것이 유명한 만리장성의 시원이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자 전쟁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곧바로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국된다. 진나라의 전투 방법을 계승한 한나라는 전략 전술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나타낸다. 유명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한 초한전(楚漢戰)을 보면 조직과 지휘 면이나 보급 문제가 매우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번의 전투가 전체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대치와 수비, 공격 등에 대한 다양한 전술이 구사된다. 이것은 전쟁터가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어서 여러 방향에서 하나의 전략적 목표를 중심으로 작전이 수행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이 사용한 대규모 보병전은 가장 작은 단위 부대인 소대(小隊)의 경우에 앞줄에 궁병(弓兵) - 창병(槍兵) - 칼과 방패를 가진 보병(步兵) 등의 순서로 정렬했다. 이것은 일단 화살로 공격해오는 적을 공격하여 예봉을 꺾은 후 계속하여 적들이 공격해오면 창병들 간의 교전을 벌인다. 상황에 따라 밀집 보병이 투입되어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이때 대규모 보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진법(陣法)이 사용되었다. 진법이란 전쟁시 병력 배치의 방식을 말하는데 진법 가운데는 팔진법(八陣法)이 대표적인 것이다. 64개의 소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적과 교전을 할 때는 정면과 측면을 지키는 부대로 나머지는 예비 병력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팔진법은 사령관이 군대의 정중앙에서 중군(中軍)으로 전체 병력을 지휘하는 것으로 이 중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개의 방향과 북동ㆍ북서ㆍ남동ㆍ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두는 병력 배치법이다.

『삼국지』에는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고안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전부터 운영되던 진법이다. 그것은 제갈공명 이전에도 팔진법에 대한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여하튼 팔진법은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전투병과 지원팀이 매우 효율적으로 짜여 있어 최적의 공격 및 방위 진형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도 발견된다. 한식궁은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이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써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로 하여금 기마술에 있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케 하는 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탔다고 볼 수 있다. 말 타는 기술이 수준급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상대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 데 능하다’고 적혀 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온달장군의 아내인 평강공주는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일렀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말사육의 실제적인 기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일상 생활화했음을 암시해 준다.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전쟁을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은 이와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 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단원은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 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런 밀집대형도 로마군단의 변형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

로마군은 그리스 대형에 맞서기 위해 먼저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투창병을 내세웠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투창은 끝이 무겁기 때문에 그리스 진형의 앞 대열에서 장창을 사용하더라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투창병들이 방진의 앞 대열과 중간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사이, 키가 작은 로마 군병들이 작은 단검을 들고 방진 밑으로 침입하여 공격한다. 이 때문에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의 주력군이 돌진하여 방진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은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소대형과 백인대 등의 작은 부대로 구성된 집합체로 이들의 역할과 간격을 적절히 배치해 마케도니아의 밀집대형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의 승리는 아무리 견고한 방진이라도 침착하게 맞선다면 이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에 따라 변형 작전을 구사하였고 후대에는 귀갑형(거북형)이라는 유명한 밀집대형을 발명한다.

그러나 이들 귀갑형도 100전 100승을 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가야는 고구려 활의 위력을 몰라서 패배했지만 중국은 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병의 약점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러한 기병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해 기병들은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다 화살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군마의 부상은 기병에 치명상을 주므로 고구려가 개마로 말의 외부를 감싸도록 해 부상을 방지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궁수를 동원하더라도 활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개마무사의 장점이다. 개마의 효용성은 궁수가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미터이고 절대 살상거리는 3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일단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 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화망을 뚫기만 하면 궁수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궁수들이 개마무사들에게 집중해 화살로 공격하더라도 한두 번밖에 화살을 발사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기병은 5미터나 되는 창을 갖고 있으므로 궁수나 보병과의 간격이 20~30미터 거리로 좁혀지면 기병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개마무사가 화살을 피하는 순간 이미 궁수에게 다가와 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가야는 고구려의 위력을 간과해 패망했지만 중국의 경우 고구려와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즉 궁수의 역할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또 다른 방비책을 준비하곤 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지만 화살망을 뚫고 중장기병이 공격해 오면 20~30미터 정도의 저지선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해 함정에 빠지도록 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의 중장갑기병이 돌진하자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해 대비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장기병의 경우 장갑력은 강하지만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진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진격이 저지되면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나 준비된 기병들이 역으로 공격에 나선다. 중장기병이 육박전에 휘말리게 되면 오히려 패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개마무사에 대한 중국의 대비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경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병은 대체로 중무장하지 않고 말의 기동력과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하는 임무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연합하더라도 보병 밀집 대형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경기병대는 주로 맥궁으로 무장한 후 적군의 궁수와 보병을 상대로 활을 발사해 적진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임무를 갖는다. 맥궁의 사정거리가 중국 활보다 긴 것은 물론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했으므로 어느 장소에서건 재빠르게 화살을 발사하고 빠지는 데 적격이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경기병대가 공격해오면 이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체력을 소모해야 하므로 대형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만약 적진이 완강해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경기병대는 무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이럴 때 고의적으로 후퇴하는 위장술을 겸용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공격해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집요한 매에 당해 낼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수비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면서 약점을 보이면 준비된 개마무사가 출동해 승부를 결정짓는다. 훈족(흉노)이 막강한 로마군을 비롯한 게르만 족을 격파한 비법은 바로 기동력을 기반으로 공격과 후퇴를 번갈아 가면서 승리할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는 데 있었다.

중장기병대와 경기병대는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출동해야만 전투 효과가 배가되므로 군의 체계에 따라 중장기병과 경기병대 숫자를 조정했다.

고구려보다 후대이기는 하지만 금나라는 아예 기병대 자체를 20명의 중장기병과 30명의 활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섞어 편제했다. 고구려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를 운용했을 것으로 임용한 박사는 추정했다.

중장기병대는 다른 병종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선발된다. 말과 갑옷이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군마는 소처럼 여물을 먹이지 않고 반드시 생초나 곡물을 먹여야 한다. 더구나 기마술을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장기병은 전쟁에 나갈 때에도 종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마무사의 장점은 철이지만 철의 약점은 녹이 잘 쓰므로 갑옷을 매일 닦아주고 기름 치고 조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중장기병대는 보병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 대 1 정도이며 또한 중장기병을 전체 기병의 40퍼센트(금나라를 계상) 정도로 설정한다면 전체 병력의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튼 고구려는 기병과 보병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고구려가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무모하게 개마무사 등 최정예 부대들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당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력부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할 만큼 최첨단 군수품으로 무장했고 적절한 작전을 구사하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장병들의 전투력 즉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뜻한다. 개마무사가 승리의 보증수표였음은 의미한다.

<개마무사는 철기 생산이 확보돼야>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해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개마무사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기병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또는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했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마무사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들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뉘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됐다.

성질이 다른 철을 만드는 기본 제련 방식은 유사하다. 과거에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로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쯤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괴련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고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쇠를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것은 쇠의 금속 성질 때문이다. 쇳덩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네모, 육각형, 오각형 등 모양만 다양한 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런 조직들이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두드리는 동안 괴련철 속의 규소 등 이물질이 압출되고 조직이 치밀해진다. 그리고 이물질 중 배출되지 않는 것도 조직 안에 고루 분산되므로 조직이 균일화되고 전체적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한 가열된 괴련철을 숯에 넣으면 숯의 탄소가 철에 흡수돼 자연스레 철의 표면은 적당한 탄소를 함유한 괴련강(塊鍊鋼 : wrought iron)이 되며 이를 침탄법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쇠의 날과 등의 두께를 달리하면 쇠의 성질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쇠의 색깔이 황혼 빛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안쪽 날부터 시작해 등 부분까지 순간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반복했다. 날 부분은 갑작스레 담금질하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날 부분은 강하게 만들고 가운데와 등 부분은 약하지만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칼은 칼의 표면 부분만 탄소가 함유된 강철이고 그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므로 칼을 사용함에 따라서 표면의 강철은 부서지게 되고 칼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사리 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점이다.

 

밥심! 고구려 동아시아 지금보다 밥 4배 더 먹어 (daum.net)

입력 2007. 12. 22. 01:50수정 2007. 12. 22. 01:50
 

[서울신문]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제패한 원동력은 '밥심'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밥을 네 배나 더 많이 먹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두 배, 고려시대에는 세 배를 먹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양의 밥을 먹은 셈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가 운영하는 토지박물관이 21일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밥그릇과 요즘 쓰는 밥공기에 각각 쌀을 담아 무게를 비교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경기 성남 분당신도시에 있는 토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이날 막을 연 '땅에서 찾아낸 역사' 특별전에서 이 밥그릇들을 비교전시하고 있다.(031)738-7382.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임동주 사학자  | 기사입력 2008/01/08 [00:35]

고구려사, 방송사들의 놀라운 역사왜곡: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6/09/07 [13:39]

고준환의 '고구려 만주벌판을 달리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10/02/22 [14:44]

세계최강 고구려와 로마의 최후 승자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 최대지배 영역 추정라인(빨강색:고구려/파랑색:백제/분홍색:당나라/초록색:로마제국)

 

 

 

윤복현 시사칼럼  | 기사입력 2009/05/28 [11:07]

지금은 고구려가 강성대국이 된 이유를 알아야 할 때: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제1부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高談德)

https://youtu.be/tp0k2YzF0BM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제2부_팍스 코리아나, 고구려에 의한 평화

https://youtu.be/-80Re2lUWaI

 

 

 

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수당전쟁 1편 수나라 백만 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최초 공개: 2019. 12. 16.

https://youtu.be/zq_ulX5Gn0g?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KBS역사스페셜 – 고구려 남부전선 최후의 증언, 임진강 철갑옷

최초 공개: 2020. 8. 10.

https://youtu.be/l90qGwTkE8Y?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역사 천문 기록을 통해 살펴본 고구려 관측지 - 양홍진 박사 (한국천문연구원) [히스토피아]

2016. 6. 19.

https://youtu.be/tmTYPktrIVM?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북경에서 사들인 유물이 평양에서 발굴된 것으로 둔갑 | 한나라의 통치 기관인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우기는 일본과 남한강단사학

2020. 7. 19.

 

<참고자료>

고구려(高句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고구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분자인류학논단 | 고리국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구려 ..고구려 ..고려..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고리족과 맥족은 다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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