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선생님은 '가야', '가락' 등은 '가라'의 이두 표기라고 보았다.

 

"가라는 이두로 가라()·가락()·가야()·구야()·가야() 등으로 표기됐다. 야()·야()·야() 등은 고어에서 ‘라’라 발음됐다. 가라는 관국()으로도 표기됐는데, ‘관’에서 초성 ‘ㄱ’과 더불어 중성 ‘ㅘ’의 ‘ㅏ’을 떼어 ‘가’로 읽고, ‘국’의 뜻인 ‘나라’에서 한쪽을 떼어내어 ‘라’로 읽은 것이다."

금관가야를 '신가라', 대가야를 '밈라가라', 아라가야를 '안라가라', 고령가야를 '고링가라', 성상가야를 '별뫼가라', 소가야를 '구지가라'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라 6국의 건설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가라 6국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에 변진(弁辰)의 열두 자치국이 세워졌다는 점은 제3편 제4장 삼조선 분립 이후의 말조선에서 설명했다. 이들 자치국은 흔히 가라로 불렸다. 가라는 ‘큰 못’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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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고구려에 맞선 신라·백제·임나가라·아라가라 4국 동맹

장수태왕이 신위례성을 침입하자, 근개루의 태자인 문주는 신라에 가서 급난을 알렸다. 신라는 꼭 동맹의 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출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비마립간이 병력 1만을 보냈지만, 근개루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도 파괴된 뒤였다. 문주왕은 수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웅진에 도읍을 정했다. 웅진은 광개태왕의 비문에 나오는 고모나라()다. 웅진과 고모나라는 똑같이 곰나루로 읽어야 한다. 전자는 뜻에 근거한 이두문자이고 후자는 음에 근거한 이두문자다. 지금의 공주가 당시의 곰나루다.

당시 한강 이남에는 신라·백제 외에 가라 등 6개국이 있어, 이들이 지금의 경상남도를 차지했다는 점은 제3편 삼조선 분립시대에서 설명했다. 처음에는 신가라가 종주국이고 임나·아라·고자·고령·벽진 다섯 가라가 그 아래에 있었다. 나중에 신가라와 고자·고령·벽진 가라가 약해져 정치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상실하고, 임나·아라 두 가라만이 강성하여 신라와 대립했다. 두 가라는 광개토태왕이 왜군을 칠 때 상당한 병력을 동원해서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도와 왜군과 싸웠다.

그러나 신위례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자, 놀란 두 가라는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신라·백제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고구려를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두 가라에게 동맹 가입을 종용했다. 이로써 신라·백제 양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이 신라·백제·임나·아라 4개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으로 바뀌게 되었다.

광개태왕이 왜군을 물리쳐준 은혜를 잊고 신라가 백제와 연합한 사실에 크게 분노한 장수태왕은 서기 481년에 대군을 동원해서 신라의 동북 지방을 침입했다. 신라의 소지마립간이 몸소 비열홀 즉 지금의 안변1)까지 가서 방어했지만 대패했다. 고구려군은 승세를 타고 남진하여 고명 즉 지금의 회양2) 등 일곱 성을 함락했다. 이에 두 가라국과 연합한 백제 동성대왕은 여러 길로 구원병을 파견해 고구려 군대를 깨뜨리고 잃은 땅을 회복했다(다음 장 백제의 북위 격퇴와 해외식민지 획득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에 맞선 신라·백제·임나가라·아라가라 4국 동맹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고구려에 맞선 신라·백제·임나가라·아라가라 4국 동맹

장수태왕이 신위례성을 침입하자, 근개루의 태자인 문주는 신라에 가서 급난을 알렸다. 신라는 꼭 동맹의 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출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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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4국 동맹의 40년 지속

4국 동맹으로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이 꺾이고 백제와 신라가 안정을 되찾았으니, 4국 동맹은 당시 조선 정치사의 일대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 동성대왕이 해외를 경략하고 백제가 고구려 이상의 국력을 자랑하는 동안에 이 동맹은 잘 유지됐다. 서기 494년에 신라군이 살수 즉 지금의 대동강 상류 근처에서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견아성에서 포위되자 신라가 백제에 구원을 요청한 일이 있다. 이때 동성대왕은 병력 3천을 보내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고 포위를 풀었다. 다음 해에 고구려가 백제의 반걸양을 치자, 신라 소지마립간은 구원병을 보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이 동맹은 대략 40여 년간 유지됐다. 동맹이 해체된 뒤에야 신라가 가라 침공을 개시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4국 동맹의 40년 지속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4국 동맹의 40년 지속

4국 동맹으로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이 꺾이고 백제와 신라가 안정을 되찾았으니, 4국 동맹은 당시 조선 정치사의 일대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 동성대왕이 해외를 경략하고 백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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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6가라의 멸망

김수로 6형제가 신가라(지금의 김해), 밈라가라(지금의 고령), 안라가라(지금의 함안), 구지가라(지금의 고성), 별뫼가라(지금의 성주), 고령가라(지금의 함창)1)를 각각 통치했다는 점과, 임라·안라 두 가라가 4국 동맹에 참가해서 백제를 돕고 고구려를 막았다는 점은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및 제7편 남방 제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에서 서술했다. 신라의 지증·법흥·진흥 세 대왕은 지속적으로 6가라를 잠식했다. 그러다가 진흥 때 6국이 모두 신라의 소유가 됐다. 이로써 지금의 경상 좌우도가 완전히 하나가 됐다. 이제 6가라 흥망의 역사를 약술하고자 한다.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금관국으로 표기된 나라다. 시조인 수로 때는 신라보다 강성했다. 신라 파사이사금은 인근 소국인2) 음즙벌국(지금 경주의 북쪽 경계 내)과 실직국(지금의 삼척)의 영토분쟁을 판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수로왕의 중재를 요청했다. 수로왕의 한마디로 판결이 나자, 세 나라는 다 승복했다. 그런 뒤 파사왕은 수로왕을 위해 감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신라 6부 중 하나인 한기부의 부장인 보제가 직접 나오지 않고 낮은 사람을 내보내자, 수로왕은 분노하여 하인인 탐하리를 보내 보제를 죽였다. 하지만 파사이사금은 수로왕에 대항하지 못했다. 탐하리에게 벌을 주라고 명령하고, 탐하리를 숨겨준 음즙벌국를 침공할 뿐이었다. 그러나 신가라는 수로 이후로는 국세가 날로 쇠약해져 임라가라의 침공을 받았다. 신라 법흥대왕 19년(서기 532년) 때에 신가라 제10대 왕인 구해가 보물과 처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안라가라의 경우에는 연대와 역사를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구려 광개태왕이 남쪽 원정을 했을 때에 고구려·신라와 함께 백제에 대항했고, 백제 문주왕이 구원을 요청했을 때에 4국 동맹에 참가해서 고구려를 막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소국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정치 문제에서 빠지지 않는 나라였다.

이전 역사서 중에 안라가라의 멸망 연도를 기록한 책이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증왕 15년 기사에 “소경()을 아시촌(지금의 경남 함안으로 추정_옮긴이)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라’의 이두문자가 아시랑()이므로 지증왕 15년 이전에 안라가라가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법흥대왕이 대병력으로 아시량국()을 멸하고”라고 했다. 선왕이 죽은 해를 신왕이 즉위한 해로 혼동하는 예는 《삼국사기》에 자주 나타나는 일인즉, 지증왕 15년 즉 지증왕의 사망 연도는 법흥대왕의 원년일 것이니, 혹시 안라가 법흥왕 원년에 망한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과 〈거도 열전〉에 의하면, 지증왕 때 김이사부는 변경의 군관이 되어 국경에 말떼를 모아 놓고 날마다 병사들이 타고 달리도록 했다. 가야인들은 이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예사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방비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 이사부가 습격해 멸망시켰다. 이 가라는 안라가라다. 따라서 안라가라는 대략 지증왕 말년에 이사부의 손에 의해 망했고, 법흥왕 원년에 안라가라의 수도가 신라의 소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다.

밈라가라는 6가라 중에서 신라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소()강국이다. 처음에는 신라와 싸워서 거의 다 이겼다. 그러다가 신라 내해이사금 40년(서기 209년)에, 밈라가라에 속한 바닷가 8개국(대체로 지금의 남해·사천 등지)이 연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밈라를 침입하여 대파하고 6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밈라왕이 왕자를 신라에 볼모로 보내고 구원병을 요청하자, 신라 태자인 석우로가 6부 정예병을 동원하여 8국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밈라에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는 밈라의 국세가 약해져 신라에 대항하지 못했다.

밈라가라는 신라와 합세하여 고구려 광개토태왕을 돕고 4국 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를 도울 정도로 국력이 되살아난 적이 있다. 하지만 신라의 지증·법흥 두 대왕이 안라가라 등을 멸망시키자, 두려움을 느낀 밈라가라 제6대 가실왕은 신라 귀족 비조부()와 결혼동맹을 맺어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3) 하지만 결국 신라의 기습을 받고 멸망했다. 그 뒤 가실왕은 신라에 불복하는 왕족과 인민들을 거느리고 미을성 즉 지금의 충주로 달아났다. 가실왕은 여기서 백제의 도움으로 신라를 막고 미을성을 서울로 삼았다. 서기 554년에 백제 성왕이 구양(, 발음은 글래) 즉 지금의 백마강 상류에서 신라를 기습했을 때에 밈라 병력도 함께했다. 이때 양국 연합군은 신라 신주군주()4)인 김무력(신가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의 아들)의 복병을 만나 전몰했다. 제9편 고구려의 대()수나라 전쟁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충주로 천도한 밈라가라는 서기 564년에 신라 병부령 김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에 의해 멸망했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대가야 즉 밈라가라가 지금의 고령에서 건국됐다가 고령에서 망했다고 기술했다. 그렇다면, 어느 사료를 근거로 밈라가 지금의 충주에서 건국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서는 “강수는 중원경 사량부5)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신은 본래 임나가량() 사람입니다”라는 강수 본인의 말을 소개했다. 중원경은 곧 충주이고, 임나가량은 곧 밈라가라다. 따라서 이것은 밈라가라가 충주로 천도했다는 첫째 증거가 된다. 또 《삼국사기》 〈음악지〉에는 “성열현 사람인 악사 우륵”이란 표현이 나온다. 우륵은 밈라가라의 악공이었다. 성열현 즉 지금의 청풍은 당시에는 충주 즉 미을성에 속한 땅이었다. 이것은 밈라가라가 충주로 천도했다는 둘째 증거가 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편에서는, 진흥왕 15년(서기 554년)에 “백제가 가량()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량도 밈라가라를 가리킨다. 관산성은 백제 고시산군(지금의 옥천) 구양 부근이다. 밈라가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옥천을 친 것은 지금의 영동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고령의 옛 서울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밈라가라가 충주로 천도했다는 셋째 증거가 된다. 밈라가라는 비록 멸망했지만, 강수의 문학과 우륵의 음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래서 6가라 중에서 가장 칭송할 만한 나라가 되었다.

구지·벌뫼·고링 세 가라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지리지〉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만 했을 뿐 그것이 언제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구지는 안라가라와 가까우므로 그 운명이 밈라가라와 같았을 것이다. 6가라가 모두 멸망하자 신라는 계립령 이남을 통일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혈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6가라의 멸망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6가라의 멸망

김수로 6형제가 신가라(지금의 김해), 밈라가라(지금의 고령), 안라가라(지금의 함안), 구지가라(지금의 고성), 별뫼가라(지금의 성주), 고령가라(지금의 함창)를 각각 통치했다는 점과, 임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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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의 지식카페>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문화일보입력 2020-07-15 10:49

<신용하의 지식카페>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 문화일보 munhwa

 

<신용하의 지식카페>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8)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고조선 해체 뒤 민족 대이동 … 기병대장 출신 수로, 김해에 도착 뒤 이진아시왕에 복속 않고 금관가라 건립 백제·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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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기병을 조각한 기마인물형 각배 가라토기(김해 고분 출토, 국보 275호, 경주 박물관 소장, 자료: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8)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고조선 해체 뒤 민족 대이동 … 기병대장 출신 수로, 김해에 도착 뒤 이진아시왕에 복속 않고 금관가라 건립
백제·신라엔 없는 철장검, 6가라 全지역 출토… 기마부대 야영용 구리솥도 부여족이 세운 국가임을 증명

고조선 연방제국이 해체되고 뒤이어 위만조선이 BC 108년 멸망하는 대폭발적 거대충격이 가해지자, 고조선 지배층 유민들은 이웃 후국들로 피란하거나 새 국가를 세우고자 해 민족대이동의 제1차 파동이 일어났고, 우선 한국 역사에도 ‘다국시대’가 시작됐다.

고조선 유민의 일단은 남하해 멀리 진한, 지금의 경주 지역에 6개 마을을 형성해서 정착했다가 고조선 왕족 청년이 말을 타고 찾아오자 그를 박혁거세 왕으로 추대해 고조선을 계승해서 BC 57년 신라(사로국)를 건국했다. 고조선 왕족의 한 가문은 북부여에 피란했다가 환영받지 못하자 주몽 집단이 말을 타고 압록강 중류 구려에 내려와서 BC 37년(일설 BC 277년)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왕위 계승에서 밀린 온조 세력은 한강 부근으로 남하해 BC 1세기 중엽 백제를 건국했다. AD 1세기에는 제주도에도 부여·고구려·양맥족 일부가 남하해 선주민 촌장들과 결합해서 탐라국을 건국했다.

변한 지역의 6가라는 어떻게 건국됐는가? 가라 출토유물들에는 이웃 신라와 백제에 없는 북방 ‘부여(扶餘)’의 선진 철기문화, 기마문화 유물과 동일한 것이 한반도 낙동강·섬진강 사이에서 많이 출토돼 있다. 변한 지역에서 이 정도 선진적 철기문화와 기마문화 유물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나오려면 성장 과정의 미숙한 초기 철기들과 초기 기마문화 출토유물이 반드시 이 지역에서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갑자기 부여의 최선진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변한지역에 쏟아져 나온 경우에 우리는 부여기마민족의 변한 정복에 의한 6가라 건국설을 일단 정립할 수 있다. 필자는 1995년 사회사연구회에서 단군 실재 발표 때 이 해석을 구두로 발표했으나(‘단군설화의 사회학적 해석’,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제47집, 1995), 단군 실재 논쟁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이를 글로 정리해 독자들의 새 패러다임 전환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대가야의 금동관(3C) (자료: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고문헌에는 2가지 설화가 남아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이정(李貞)으로부터 채록한 건국 설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政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 금관국(金官國)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이다”라고 수록돼 있다.

고령군은 변한 시대에 ‘미오야마나(국)(彌烏邪馬國)’이었다. 가야산 산신으로 표현된 미오야마국(고령) 모주(母主) 여성 족장이 천신(天神, 고조선·부여 왕족 상징)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라국 시조 ‘이진아시’왕(별칭 ‘붉은 해(朱日)’)과 금관국의 ‘수로’왕(별칭 푸른 후예(靑裔))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붉은 해’의 ‘해’(의역 朱日, 음역 解)는 부여 왕족의 성씨라는 사실이다. 부여 왕족 ‘해’ 씨 ‘이진아시’왕이 ‘대가라’(고령가라·임나)를 건국한 것이다. 한편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했는데 모두 천신의 아들이지만 ‘푸름의 후예(靑裔)’라 했다. 부여 왕실 ‘해’ 씨는 ‘태양’과 ‘새’ ‘사슴’을 토템으로 했다. 한편 고조선연방의 유목민들, 산융·실위·정령… 등은 ‘태양’과 함께 ‘푸른 이리’를 토템으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조선·부여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대가라의 이진아시왕이 부여왕족이고, 금관가라의 수로왕은 유목민의 자손 기마부대장이었음을 대학자 최치원이 시사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건국설화는 후에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라는 관직자가 고려 문종(1075∼1084) 때 기록했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다. 이것은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설화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18년) 3월에 구지봉에 함성이 들려 9간(9개 마을 촌장)이 모여 가 봤더니,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사내아이로 변했는데, 맨 처음 나온 아이의 이름을 수로(首露·처음 나타났다는 뜻)로 해 대가락(大駕洛)의 왕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도 각기 돌아가서 5가라의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구지봉 봉우리’의 ‘함성’을 통해 수로 등이 ‘육로’로 집단 이동해 왔으며, ‘붉은 줄’ ‘붉은 보자기’ ‘황금알’로 동일한 고조선·부여족을 상징하고, ‘가라’의 한자를 ‘駕洛’으로 써서, ‘말’(馬)위에 ‘가’(加)를 얹은 글자를 택해 부여의 ‘가’(장군, 대장)들이 말을 타고 내려왔으며, 6개 편대의 기마부대에 선봉대장은 ‘수로’였고, ‘대가라’를 건국했으며, 나머지 5개 기마부대장도 각각 주둔지에 돌아가서 각각의 가라를 건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은 기마부대의 정복이었지만 전투 없이 지방 촌장들이 합의해 수용·봉대한 무혈 정복 융합이었음이 잘 시사돼 있다.

유수노하심 부여 동복(제1형)

고문헌에서 ‘가라’ 관련 지명을 찾아 연결해 보면, 백두대간(태백산맥)의 서쪽 육로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남해안 김해 지역까지 ‘가라’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서기 42년 부여 기마족의 한 갈래가 기병부대를 나눠 황해도 수안 부근 멸악산맥 등성이를 거쳐서 충청도 죽령과 조령을 넘어 낙동강 상류에 도착했다고 본다. 왕족은 낙동강 상류에서 가장 농경과 기마 활동에 적합한 지금의 가야산 밑 고령(高靈)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용감하게 앞길을 개척한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는 남해안 끝 김해(金海)까지 도착했다고 본다.

이 두 개 건국설화를 종합해 보면, 처음 6개 기병부대가 하나의 통일 ‘가라국’을 건국하지 못하고, ‘6가라’를 각각 건국하게 된 요인을 알 수 있다. 고령 ‘대가라’ 이진아시왕은 부여 왕족이므로 신분상 전체 6개 부대 정복지의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족일 뿐 전투 실력은 부족했다. 반면 ‘수로’는 신분은 ‘가’이지만 가장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 대장이고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는 ‘해’ 씨가 아니라 청예(靑裔·유목민의 후예)였으므로 최강의 무력에 기초해서 독립 금관국을 건국했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6가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기록했다. ‘임나’와 ‘가라’를 분절시키면, 그 뜻은 ‘임나’는 ‘임금의 나라’이고, ‘가라’는 ‘가(장군·대장)의 나라’의 뜻이 된다.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신분은 부여 유목민 후예 ‘가’였으나 그의 역량은 가장 탁월했다. 그는 선봉부대로 서기 42년 김해 지방에 도착하자 고령의 이진아시왕에게 복속하지 않고 금관국을 건국했다. 부여족 기마군단이 남하해 6가라를 건국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 고고유물로는 특히 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된 철장검들은 부여 유적인 만주 요령성 서차구 유적과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BC 1세기∼AD 1세기)에서 다수 출토된 철장검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이다. 이 유형의 철장검은 황해도 이남 한반도(백제·신라 지역)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고, 탐라국(제주도) 용담동 유적(AD 1세기)에서만 2자루 출토돼 있다.

(2)고령 지산동 44호 및 45호 무덤을 비롯해 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되는 철제 말 자갈, 말 멈추개 등 철제 마구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출토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형이다.

(3)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의 철제 투구와 갑옷, 합천 옥전 M3호 무덤의 금동장식 투구, 부산 복천동 10호 무덤의 철제 단갑 등 가야 철제 갑옷과 투구는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2기(中기)층 56호, 67호, 97호 무덤 출토의 각종 갑옷과 투구, 길림성 대안현 어장토광묘 207호 출토 갑옷(편)과 동일한 유형으로 계승·발전한 것이다.

(4)가라 유적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 출토 동복(銅·구리솥)은 부여 유적인 길림성 동단산 유적과 요령성 서차구 유적 및 길림성 유수노하심 2기층 출토 동복 2점 가운데 제2형 동복과 완전히 동일하다. 부여 기마부대에서는 동복을 야영용 필수장비로 사용했다. 대성동 출토 가라 동복은 흉노의 동복이 아니라 부여 기병부대의 동복이라고 본다.

(5)가라 토기는 ‘경질’ 토기의 굳기와 높은 그릇받침대의 구멍(물, 바람구멍)과 다양한 도안으로 큰 특징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기는 섭씨 800도 이하로 구운 농경사회의 토기다. 필자는 가야에서 1200도 이상 고열로 ‘경질토기’를 구워낼 수 있게 된 것은 부여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철기문화가 철 생산 고열기술을 토기에 적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97호 무덤 출토 제1형 동복(銅)을 다시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동복은 본 동복(높이 25㎝, 구경 14㎝)에, 높이 4.2㎝의 받침대(器臺)가 붙어 있고, 받침대에는 가라 경질토기처럼 전후좌우에 구멍 4개가 뚫려 있다. 토기를 얇게 만들어 1200도의 고온으로 매우 단단하게 소성할 때 불길이 고르게 들어가 구워내도록 새 기술이 도입된 것이고, 그 기원이 부여의 동복 제조 기술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6가라는 북방에서 AD 42년에 부여족의 기마군단이 새 정착지를 찾아서 육로로 남하해 변한 12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해 세운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여 기마족의 정치적 지휘자인 부여 왕족은, 막강한 선봉 기마부대(김수로)가 앞길을 남해안 김해까지 안전하게 개척하자, ‘고령’에 도착해 여기에 정착했다. 고령에 부여 왕족은 ‘임나(任那)’를 건국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5개 기병부대장을 다 통솔하지 못했다. 선봉부대장 ‘수로’는 신분은 부여왕족이 아니라 가(加·아마 狗加인 듯)였지만, 능력은 가장 탁월했으므로, 역시 AD 42년에 정착지 김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세웠다. 나머지 4개 기병부대장도 각기 군립했다. 그 결과 1개 임나(任那·임금 신분의 나라)와 5개 가라(加羅·가 신분의 나라)가 수립됐다. 부여의 선진 철기 문화·기마 문화와 변한의 선진 농경 문화의 융합에 기초한 6가라 연맹국가가 수립된 것이었다. AD 4세기 말까지에는 가장 강성한 금관가라가 6가라 연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백제 아신왕이 399년 신라를 정복·병합하려고 백제·금관가라·왜의 3개국 동맹 연합군을 편성할 때 이에 참가한 것이 금관가라 실패의 변곡점이 됐다. 백제·금관가라·왜군이 연합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점령한 즈음에, 위기의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로의 신속(臣屬)을 결정하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명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부대 대군이 AD 400년 경주로 직행 남하해 백제·왜 연합군을 참패시키고 김해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때 백제군 4만 명 가운데 전사자는 셀 수도 없고, 포로가 된 백제군만도 8000명이었다니 얼마나 큰 참패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금관가라군과 바다를 건너온 왜군도 대패했다. 이에 1세기 이후 300여 년간 크게 번영했던 금관가라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고, 신라 연합공격에 불참했던 대가라(임나)가 5세기 초부터 6가라의 맹주가 된 후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래의 가라 건국사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 용어설명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 과정
금관국 건국은 6년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그는 ①건국(서기 42년) 이듬해 ‘수도’를 김해에 정하고 나성(羅城)을 쌓았으며, ‘궁궐’을 44년 2월에 완공했다. ②이해(44년) 탈해(脫解)가 지휘하는 군사들이 바닷길로 쳐들어오자 막강한 기병과 500척을 이끈 수군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 그들을 쫓아 보냈다. ③수로왕은 서기 48년 중국 상선 편으로 회계(會稽)에 망명한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16세) 허황옥(許黃玉)을 맞아 정식 왕비로 삼고 왕족 신분을 갖췄다. 수로의 부여 신분은 왕족이 아니라 그 아래의 ‘가(加)’였다. 이제는 아유타국왕의 공주와 결혼했으니, 부여의 제도로도 ‘고추가’가 되고, ‘왕족’이 된 것이다. ④수로왕은 대대적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농경과 제철수공업, 국제무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김수로왕의 금관국은 AD 1세기 중엽 고대국가 구성요를 다 갖춘 부강한 고대왕국을 건국했다.

 

 

입력 2007. 7. 3. 15:50수정 2007. 7. 3. 15:50
에가미 나미오라는 일본학자가 있었다. 그는 고대 일본 민족의 원형이 북방에서 한반도를 거쳐 내려온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심심찮게 출토되는 북방계 유물이 그 증거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주장대로 옛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김해지역에서는 북방계 유물이 몇 점 출토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르도스형 청동솥'인데, 분명히 이 청동솥은 남방계 유물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에가미 나미오의 주장은 고대 한국과 일본의 미스터리를 규명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더군다나 에가미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터라 한국 입장에서는 다소 거북한 인물이기도 했다.

 

박물관 입구

이런 에가미가 지난 1990년에 대성동 고분군 발굴현장을 방문해서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어떤 유물을 보고 한편으로는 기쁨을,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기뻤던 이유는 학자였기 때문이었고, 착잡한 이유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유물이었기에 북방 유목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그가 그런 심정에 빠졌을까?

쇠의 바다인 김해시 구산동에 가면 김수로왕의 탄강지인 구지봉이 넉넉하면서도 안온한 자태를 지닌 채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 구지봉 정상에 오르면 우선 수로왕비인 허황후릉이 눈에 뜨이고, 부산에도 없는 국립박물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1998년 7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이 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고고학 전문 박물관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방계 청동솥

이런 특성답게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지난 1990년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대 가야 고분군의 유물이 다수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들과 가야사 전공 학자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에가미 나미오로 하여금 기쁨과 착잡함을 동시에 안겨준 유물 또한 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고대 일본 왕족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것으로 알려졌던 '파형동기(바람개비형상 동기)'라는 유물이다.

'파형동기'는 대성동 고분군을 경성대학교 박물관 팀이 발굴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에서 보듯이 바람개비 형상을 한 이 유물은 일종의 장식품으로서 나무 방패에 부착하였던 액세서리였다.

이 유물은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6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여태까지 이 유물은 고대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대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13호분에서 일본 것보다 훨씬 큰 파형동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는 주장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또한 이 유물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일본 지배층이 가야에서 건너간 계층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제4의 제국' 흔적, 파형동기와 청동솥

 

신비의 파형동기

에가미가 기뻤던 것은 자신의 학설인 북방기마민족설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파형동기가 가야 지배자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층을 형성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배층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착잡했던 것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한반도인이 고대 일본을 경영했음이 '파형동기'에 의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파형동기'라는 유물은 고대 가야와 일본의 관계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물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 최인호씨도 가야를 다룬 소설인 '제4의 제국'의 서두를 '파형동기의 발굴 장면'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국립김해박물관'은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김해를 경주 못잖은 문화관광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전임 시장과 시청 직원들의 열정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1도 1국립박물관의 원칙을 가진 문화부와의 갈등, 시공사의 부도, 부지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립김해박물관'은 1998년 7월 정식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박물관 내부

현재 김해박물관은 두 개의 실내 전시실과 1개의 야외 전시장을 갖추고 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유물을 집대성하고 있으며, 부산·경남지역의 선사사대의 문화상과 변한의 문화유산도 아울러 전시하고 있다. 특히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유적과 유물을 복원하는 사업과 가야 관련 학술회의와 강좌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지역의 문화 사업을 향상시키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와 변한, 금관가야의 유물을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전시실 입구에 마련된 타임터널은 관람객들에게 고대 가야로 날아가는 듯한 흥미로움을 안겨준다. 또한 당시의 매장의례를 보여주기 위해 실물크기로 복원한 창원 다호리 1호 무덤과 그 출토유물은 보는 이들에게 고대인들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준다.

 

제2전시실에 가면 다양한 가야 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금관가야를 제외한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의 유물이 관람객들을 반기게 된다. 이 전시실을 찬찬히 둘러보면 관람객들은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어디에서도 6가야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은 분명 6가야였는데. 그리고 '비화가야'는 또 어디에 있던 곳인가 말이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학자에 따라 가야제국의 수를 6개에서 20개까지 본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제국 중에서 유물과 유적이 입증된 곳은 금관, 대, 아라, 소가야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 4개 가야제국에 대한 유물은 있지만 나머지 가야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동안 우리들이 가야에 대한 알고 있었던 것은 일종의 '도그마(교조적인 지식)'였던 셈이다. 현장 학습은 이래서 중요하다.

 

전사들의 판갑옷

넓고 훌륭한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난 후 야외로 나가보니 우선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하나가 눈에 쑥 들어온다. 이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고인돌이라고 한다. 그것 참 넉넉하게 생겼다!

야외전시장에는 이밖에도 '돌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이 실물크기로 전시되어 있어 옛 사람들의 자취를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 고분들은 지배자들의 무덤이다. 그래서 이 무덤들에는 가야 민중들의 피와 땀이 애잔하게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의 정치체제가 어떠하였든지 간에, 그 시절의 민중들이 어떤 어려움을 갖고 살았든지 간에 이 유물들은 나직하게 외칠 것이다.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너희들의 행위도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박물관의 잔디밭에 내리고 있었다. 야외에 마련된 민속마당에서는 젊은 부모들과 함께 온 어린이들이 굴렁쇠를 굴린다, 널뛰기를 한다, 제기차기를 한다 하면서 즐거운 웃음을 터트린다. 그 해맑은 웃음이 보기 좋아 나도 덩달아 웃어본다. 문화의 향기란 이렇게 즐거운 것이다.

┃국정넷포터 김대갑(kkim40@hanafos.com)

 

 

김해·함안·합천 '역사문화도시'로 도약 기대…"꼼꼼한 발굴 필수, 연구인력 양성해야"

(김해=연합뉴스) 최병길 황봉규 박정헌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하면서 가야문화 중심지인 경남 김해 등 관련 지자체의 가야사 발굴·복원 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

특히 경남은 가야사 관련 국가 사적 28곳 중 22곳이 위치한 가야국의 주 무대다.

가야사 복원은 '제4의 제국' 역사 되찾기라는 측면은 물론 동서화합과 발전을 이끄는데 열쇠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야역사문화도시' 지정 힘 받아

경남·경북도와 경남 김해시·함안군, 경북 고령군 등 5개 지자체는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리려고 지난 2월 14일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추진단'을 발족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515호),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79호) 등 3개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올리기 위해서다.

 

함안 말이산고분군

 

◇ 함안·합천 가야문화 관광단지·유적 정비 '햇볕'

아라가야의 역사를 간직한 함안군은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려는 말이산고분군 관광단지 사업에 힘을 얻었다.

 

김해시청 앞에서 세워진 기마인물형토기

 

하늘에서 본 김해 대성동고분군

 

 

 

[가야역사를 찾아서] (1) 가야(伽倻)는 어떤 나라였을까

이점호의 ‘가야역사를 찾아서’는 7월부터 매주 화요일 총 20회 계획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경남·북을 비롯한 옛 가야땅에는 가야인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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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2) 구지봉(龜旨峰)과 개국

거북 모양의 조그마한 동산인 구지봉. 김해지방의 선주민들이 새 나라 건설을 위해 구지봉에 올라 왕의 강림을 기원하며 구지가를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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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3) 인도에서 수로왕에게 시집온 허왕후

옛 가야땅 김해는 가락국의 시조대왕 수로(首露)와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 간의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낭만적인 고장이다. 허 공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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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4) 장유화상(長遊和尙)과 일곱 왕자

가락국 시조대왕 수로와 허왕후는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두었다. 첫째 왕자는 왕위를 물려받아 거등왕(居登王)이 되었고 둘째, 셋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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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5)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가락국 500년 역사 가운데 내용이 비교적 사실에 가깝고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유적이 수로(首露)왕릉과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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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6/22 [04:09]

[단독보도] ˝가야는 천축국이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금관가야]

 

김해 가락국 시조대왕 수로왕 춘향대제 봉행 :: 경남신문 (knnews.co.kr)

 

"한반도엔 없는 돌"..가락국 허황후 '파사석탑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 기자입력 2019. 12. 17. 06:00수정 2019. 12. 19. 09:23
 

[경향신문]

김해 허황후릉 옆에 서있는 파사석탑. 기원후 48년 허황후 황옥이 수로왕과의 혼인을 위해 서역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실은 탑이라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반도엔 없는 돌"..가락국 허황후 '파사석탑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돌이라면….’ ‘가야본성’ 특별전이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아주 괴이하게 생긴 돌을 6층으로 쌓아놓은 탑이 하나 서있다. 이름하

v.daum.net

 

 

 

수정 2019.10.22 14:24 게재 2019.10.18 15:21

김해 파사석탑, 2000년 만의 나들이 < 종합 < 뉴스 < 기사본문 - 김해뉴스 (gimhaenews.co.kr)

 

김해 파사석탑, 2000년 만의 나들이 - 김해뉴스

허황옥 인도서 배에 싣고 왔다 전해져중앙박물관, 12월 가야 전시서 공개 김해 구산동에는 오래 되고 모양도 특이한 석탑이 있다.'파사석탑'인 이 석탑은 약 2000년 전 수로왕비 허황옥이 서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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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왕도 김해시가 가야사 재정립의 하나로 추진하는 가야복식 복원사업을 맡은 부산대학교 한국전통복식연구소는 7개월간 진행한 연구내용과 진행계획 발표했는데, 금관가야인들의 옷 매무새가 같은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금관가야인 복식 고·백·신과 달라"

 

기자명 허균  입력 2018.11.20 15:47

 

가야복식 연구용역 중간보고회서

금관가야인들의 옷 매무새를 유추할 수 있는 장신구 유물.
 
 

지금까지 수집 조사된 주요 연구내용을 보면 금관가야의 복식은 고구려 왕 과 관리들의 삼(윗도리)과 백제, 신라의 유(저고리)와 다른 포(두리마기)와 장유(긴저고리)를 모두 착용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장신구의 경우 관모, 머리장식, 허리띠, 신발 130여점을 조사 후 아이템별, 신분별, 남녀별로 구분했다.

갑주분야에서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에서만 확인되는 종장판갑(縱長板甲: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을 분석하고 있다. 종장판갑에는 금관가야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궐수문(고사리 모양의 무늬), 새문양, 세선 장식이 확인됐다.

 

"금관가야인 복식 고·백·신과 달라" < 종합 < 뉴스 < 기사본문 - 김해일보 (gimhaeilbo.com)

 
 

"금관가야인 복식 고·백·신과 달라" - 김해일보

금관가야인들의 옷 매무새가 같은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가야왕도 김해시가 가야사 재정립의 하나로 추진하는 가야복식 복원사업 연구용역 중간보고

www.gimhaeilbo.com

 

 

 


금관가야 문화의 산실인 '대성동고분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전경
ⓒ 김정수 관련사진보기

김해시 대성동에 자리한 대성동고분박물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4차례의 발굴조사로 출토된 자료들을 전시해 금관가야의 중심지가 김해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3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는 실내전시관과 노출전시관·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족나들이 장소로 손색이 없다.

대성동고분은 길이 약 300m, 높이 20m 정도의 구릉지대에 자리한 가야의 무덤들이다.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자리로 고인돌, 널무덤, 덧널무덤, 굴실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가야무덤이 발견되어 있어 가야시대 문화 이해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박물관의 고분전시관은 크게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도입의 장은 박물관 관람에 대한 정보 검색 공간이다. 인터넷 대성동, 전시정보 검색 코너가 설치되어 있으며, 모니터를 통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유물 약 160여 점에 대한 3D영상(이미지월)을 관람할 수 있다.

개관의 장은 철을 기반으로 성장한 금관가야의 기상을 이미지화한 철제 갑옷과 철기로 무장한 무사상과 기마인물상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다. 4종류의 무사상이 당시 무사들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전시된 묘 축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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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동고분박물관 노출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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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의 장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무덤과 유물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복원하여 전시한 공간이다. 목관묘와 목곽묘를 1:1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함과 동시에 대표적인 유물을 전시하였다. 축조과정과 출토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 금관가야 고분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교류의 장과 문화의 장에서는 교역 모습과 순장풍습, 고구려군과의 전쟁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노출전시관에는 대성동고분군 무덤배치의 중복현상을 고려하여 29호와 39호 목곽묘를 전시하고 있다. 고분의 내부를 개방하고 그 위에 보호각을 씌워 보호하고 있다. 이렇게 매력적인 볼거리를 간직한 곳이 무료입장이라 더욱 반갑다.

매주 월요일 휴관으로 추석연휴 중 24일은 관람이 불가능하다. 문의 : 055-331-2357, ds.gsiseol.or.kr

많은 볼거리가 있는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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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지봉고인돌의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정수 관련사진보기

김해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들르게 되는 곳이 수로왕릉이다. 반면 수로왕비릉은 발걸음이 뜸하지만, 볼거리는 이곳이 더 많다. 입장료를 받는 수로왕릉보다 무료입장인 수로왕비릉이 더 많은 볼거리가 있다는 것도 의외다.

수로왕비릉은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능이다.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형봉분은 지름 16∼18m, 높이 5m에 이른다.

능 주의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에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경내에 내삼문·승보제·외삼문·홍살문 등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능의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석탑은 허황옥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전해져 오는 설화를 뒷받침해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돌로 밝혀져 있는데, 닭벼슬의 피를 찍어 시험했다는 기록이 신농본초에 남아 있다.

능 옆의 구지터널 위로 연결된 구지봉으로 올라 천천히 산책하기에 좋다. 구지봉은 김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구지봉에 오르다 보면 릉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시원스럽다. 구지봉 정상부에 자리한 구지봉고인돌은 남방식으로 돌에 새겨진 '구지봉'이란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해온다.

출처; 가야 설화 구경하다보면 하루도 짧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가야 설화 구경하다보면 하루도 짧다

[추석 가볼만한 여행지-경남] 김해 숨은 명소 3곳

www.ohmynews.com

 

 

 

입력 : 2007/06/15 [02:39]

[단독보도] 제11편 수로왕능과 허왕후능은 가짜 묘이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7/06/29 [08:31]

˝수로왕능은 방장산 밑에 있었다˝-˝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둔갑했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신선과 왕의 신비로운 놀이터 '초선대'
입력 2007. 6. 25. 17:50수정 2007. 6. 25. 17:50
'마애불'은 석불의 일종으로 흔히 자연의 낭떠러지나 큰돌에 불상 등을 음각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이 양식은 BC 3세기경에 인도에서 처음 나타났다. 인도의 아잔타 석불이 그 대표적인 양식이며, 중국의 유명한 돈황 석불도 마애불 양식이다. 이 석불들은 대개가 거대한 불상들인데, 우리나라의 마애불도 그 규모나 크기가 자못 장대하다.

우리나라의 마애불 중에서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유명하다. 또 경주 남산의 마애불 군상도 꽤 볼만한 석불이다. 부산의 경우에는 근래에 지어진 금정산 남단의 석불사에서 이런 마애불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경상남도 김해의 삼안동에 가면 그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마애불상이 초선대의 암벽 위에 소박하게 새겨져 있다.

 

초선대 입구

 

혹자는 이 마애불상의 존재야말로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곳이 '가야'라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불상이 고려시대의 거불 양식에 불과하다면서 앞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마애불을 놓고 오늘도 여러 학자들과 향인들은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는 초선대에는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흔히 'OO대'라고 하면 고풍스런 정자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초선대는 그런 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숲과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초선대는 말 그대로 하자면 '신선을 초대하는 대'라는 뜻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초대했다는 말인가?

 

멀리서 본 초선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 초선대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눈에 뜨인다.

'옛 말에 이르기를, 가락국 거등왕께서 칠점산의 담시선인을 부르시면 담시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이곳에서 바둑을 두며 함께 즐겼다. 이로 인하여 초선대(招仙臺)라고 하였다. 그때 왕과 선인이 앉았던 연화 대석과 바둑판 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칠점산(七點山)은 양산군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으며, 산이 칠봉(七峰)인데, 칠점(七點)과 같으므로 칠점산이라고 이름하였다.'

초선대와 관련된 설화는 바로 이 기사에서 비롯된다. 그럼 거등왕과 담시선인은 누구인가? 거등왕은 가락국의 2대왕이라고 전해지는데, 주지하다시피 가락국의 첫째 왕은 김수로왕이며,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중 첫째가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 셋째는 허왕후의 성을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따라 일곱 부처로 성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등왕은 김수로왕의 첫째 아들이란 말이다.

담시선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선'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가 머물렀던 곳이 칠점산이라고 했는데, 이 칠점산은 부산 강서구 대저동의 어느 곳에 있었던 산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담시선인에 대해서는 여타의 사료에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국선도에서는 이 담시선인을 박혁거세의 선맥을 계승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어 아주 흥미롭다.

즉, 담시선인은 박혁거세를 보좌했던 '고공선인'의 선맥을 계승한 사람으로서 옥처럼 맑은 얼굴과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물계자는 신라 화랑도를 창설한 사람이며, 제자인 원광법사로 하여금 세속오계를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초선대 내부

 

물론 국선도의 주장은 명확한 증거나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초선대'라는 명확한 유적지에 관계된 인물인지라 그 신비한 모습을 추론하는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어찌 보면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아득히 먼 그 시절에 친구인 거등왕의 초대를 받아, 푸른 바다 위에 조각배 하나를 띄우고, 옥쟁반에 굴러가는 맑은 거문고소리를 내며 나타난 신선이라.

아마 그 신선의 주변에는 백설기처럼 눈부신 학들의 군무가 펼쳐졌을 것이다. 시원하게 펼쳐진 남해의 푸른빛과 학들의 군무에 휩싸인 채, 녹음이 우거진 숲 속의 바위에서 고요히 바둑을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란…. 상상만으로도 그 신비한 광경이 우리의 머리에 투명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비록 사실이든 아니든 초선대 설화는 우리의 정서를 풍부히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1500년의 신비

초선대의 마애불은 둔탁한 암벽 끝에 3cm 두께의 선으로 얕게 새겨져 있는 불상이며, 이 불상이 누구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설에는 거등왕 혹은 장유화상의 초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상의 전체적인 형상을 보건대 아미타여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불상은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를 한 모습이며, 불상의 뒤쪽에는 두광과 신광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양쪽 어깨에서 무릎까지 옷자락이 풍성하게 드리워져 있다.

현재 이 마애불 주변에는 '초선대 금선사'란 작은 절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애불 앞에는 불단이 놓여 있어 신도들로 하여금 경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금선사의 주지스님은 <돌배를 타고 부처님 오시다>라는 책을 통해 금선사과 마애불의 역사가 1500년을 상회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 진위여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마애불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새겨진 '족적'이다. 스님은 이 족적이 부처님의 발바닥 자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애불과 금선사가 고대 인도에서 가야로 불교가 처음 전래된 증거라고 말한다. 역시 그 진실이야 알 순 없지만.

 

금산사 입구

어쨌든 세간의 평가나 주장이 어떠하든 간에 초선대의 마애불은 오늘도 웃을 듯 말 듯한 신비로운 모습으로 신어천과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전체 높이 5.1m에 4.3m의 몸체를 자랑하는 마애불은 경남 유형문화재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재라는 위상과는 달리 시내 주택가와 공장 주변에 둘러싸여 있어 쓸쓸함과 을씨년스러움을 안겨주고 있다.

상상과 신비로 가득 찬 금관가야의 고도 김해. 이 도시에는 경주 못지않은 훌륭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그런데 1500년 전 금관가야가 신라에게 패망한 이후 김해는 잊혀진 도시가 되고 말았다. 신라의 고도로써 엄격한 보호를 받는 경주와 달리, 김해는 금관가야의 고도임에도 불구하고 홀대받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국정넷포터 김대갑(kkim40@hanafos.com)

 

출처; 신선과 왕의 신비로운 놀이터 '초선대' (daum.net)

 

신선과 왕의 신비로운 놀이터 '초선대'

'마애불'은 석불의 일종으로 흔히 자연의 낭떠러지나 큰돌에 불상 등을 음각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이 양식은 BC 3세기경에 인도에서 처음 나타났다. 인도의 아잔타 석불이 그 대표적인 양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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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12)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구형왕릉(仇衡王陵)

▲어찌 흙속에 묻힐 수 있으랴‘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내가 어찌 흙 속에 묻힐 수 있으랴. 차라리 돌 속에 들어가서라도 가야백성을 지키겠노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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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 가야사 복원? 산청 전 구형왕릉을 소개합니다 (daum.net)

 

[모이] 가야사 복원? 산청 전 구형왕릉을 소개합니다

[오마이뉴스이희동 기자] ⓒ 이희동 ⓒ 이희동 ⓒ 이희동 ⓒ 이희동 ⓒ 이희동가야사 복원? 산청 전(傳)구형왕릉을 소개합니다 산청 왕산 밑에 위치한 전(傳)구형왕릉입니다. 김유신의 증조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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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가야역사를 찾아서] (8) 대가야(大伽倻)

산 능선에 줄지어 선 낙타등 모양의 지산동고분군. ▲가야연맹의 맹주경북 고령군(高靈郡)은 가야산과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이뤄 놓은 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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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수로왕은 동생"…장난감 방울에 그린 대가야 신화 06:0:

이기환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2.25 06:00 수정 : 2020.02.25 16:52

2019년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5세 어린아이 무덤에서 발견된 토제방울. 직경 5㎝도 채 안되는 방울에 심상치않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발굴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가야국 신화를 6컷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수로왕은 동생"…장난감 방울에 그린 대가야 신화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수로왕은 동생"…장난감 방울에 그린 대가야 신화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을 세 번 보았다. 한번은 허황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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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수준 높은 문자 문화 꽃피워

가야 문화 복원 프로젝트 (2) 가야 사람들이 남긴 기록, 문자

  • 기자명 이현태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 입력 2019.05.28 17:06
  • 수정 2019.06.18 16:29
 
 
▲ 창원 다호리 1호분 출토 붓.

 

합천·산청 출토 유물서 명문 발견
가야 문자자료 모두 5~6세기 해당
사람들이 직접 남긴 생생한 기록
대가야 국가 발전 단계 진전 시사
문자기록법이 갖는 의미 연구 필요





오래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예전에 끼워둔 낙엽 한 장을 마주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뭇잎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산물이다. 고대 사람들이 남긴 문자자료도 이와 비슷하다. 토기를 비롯해 일상생활 용기에 새긴 단편적인 글자부터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글자를 새긴 금석문에 이르기까지 문자자료의 범주는 무척 넓다. 토기의 한쪽에 새겨진 문자는 비록 그 내용은 소략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직접 남긴 생생한 기록이란 점에서 소중하다. 가야의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문헌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가야 사람들이 남긴 문자자료는 더욱 의미가 있다.


■ 중국 통해 문자 문화 수용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창원 다호리에서 도굴의 피해가 심했던 무덤 1기를 발굴 조사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 내부에서는 붓이 출토됐다. 그리고 사천·김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의 거점 지역이나 밀양과 창원 등 해안에서 내륙으로 진출하기 수월한 지역에서는 중국에서 제작된 문자가 새겨진 거울이나 동전, 솥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되는 지역에서 일찍부터 중국을 통해 문자 문화가 수용됐고 문자를 사용하기 위한 여건이 마련됐음을 알려준다. 특히 창원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은 수입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문자를 사용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이른 시기부터 문자가 사용되었지만 중국에서 제작된 외래품을 제외하면 가야 사람들이 남긴 문자자료의 양은 매우 적은 편이다.
 

▲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 나온 ‘이득지’ 명문이 적힌 사발.


■ 합천·산청 등지서 명문 새긴 유물 출토
현재까지 알려진 가야의 문자자료로는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는 명문이 새겨진 짧은 목항아리가 있다. 1986~1987년 합천댐을 건설하기에 앞서 수몰 예정 지역인 저포리를 발굴조사 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한 1989년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에서 발견된 '합천 매안리'와 2008~2009년 산청군 생초면 하촌리 일대의 도로 확장 부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득지'라는 명문이 새겨진 손잡이 달린 사발이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합천에서 출토됐다고 전해지는 긴 목항아리도 포함된다. '대왕(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뚜껑 있는 항아리로 현재 충남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창녕 등지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큰 칼이 있지만, 가야의 문자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 ‘대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긴목 항아리. 합천에서 출토됐다.


■ 대가야의 부(部) 존재· 왕의 위상 확인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대가야 양식의 짧은 목항아리에 새겨져 있는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는 명문은 하부에 소속된 사리리라는 인명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였던 것은 하부라는 구절이었다. 이를 통해 대가야에도 다른 삼국과 마찬가지로 부(部)가 존재하였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뚜껑과 긴목항아리에 각각 '대왕(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뚜껑 있는 긴 목항아리도 6세기 전반에 유행한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 토기에 해당한다. 대왕이란 명문은 6세기 전반 대가야 왕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데,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명 짧은 목항아리와 더불어 대가야가 다른 가야에 비해 한 단계 진전된 국가 발전 단계에 이르렀음을 뒷받침한다. '합천 매안리비'에는 6세기 전반 가야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수십 명의 간지(干支)들이 모여 모종의 회의를 하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많지 않아서 그 이상의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가야 비석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 합천 매안리비 탁본(왼쪽), 간지가 새겨진 부분(오른쪽).


■ 가야 문자자료 모두 대가야 관련
현재까지 알려진 가야의 문자자료는 시간적으로는 5세기 말~6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모두 대가야와 관련된다. 대가야는 479년 중국 남제(南齊)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섭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자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가야의 문자자료가 바로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야와 관련된 문자자료가 유독 대가야와 관련된다는 사실은 대가야가 다른 가야에 비해 국가 발전 단계가 진전되었음을 시사한다.

 

▲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짧은 목 항아리. ‘하부사리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문자 기록 방법은 풀어야 할 과제
이처럼 가야의 문자자료는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이 반영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글자를 새긴 방법 등에서 흥미로운 점이 확인된다. 산청 하촌리 유적에서 출토된 '이득지'라는 인명이 새겨진 손잡이 달린 사발의 경우, 토기를 거꾸로 세운 상태에서 토기 내면에 글자를 새겼다. 토기에 명문을 새기는 경우에는 토기 외면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굳이 글자를 새기기 힘든 토기 내면에 그것도 토기를 거꾸로 세워서 글자를 새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충남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대왕'명 항아리의 경우 긴 목항아리에 새겨진 '대왕'이란 명문은 글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새겼다. 이와 달리 뚜껑에 새겨진 '대왕'은 마치 왼손으로 쓴 것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글자를 새겼다. 주술적 성격이나 신비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명문을 새겼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지만, 그 이유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처럼 남겨져 있다. 최근 가야 유적의 발굴조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어서 가야와 관련된 문자자료의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김해뉴스

 

 

이 현 태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처; 대가야, 수준 높은 문자 문화 꽃피워 < 가야 문화 복원 프로젝트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김해뉴스 (gimhaenews.co.kr)

 

대가야, 수준 높은 문자 문화 꽃피워 - 김해뉴스

합천·산청 출토 유물서 명문 발견가야 문자자료 모두 5~6세기 해당사람들이 직접 남긴 생생한 기록대가야 국가 발전 단계 진전 시사문자기록법이 갖는 의미 연구 필요오래된 책장을 넘기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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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매안리비는 6세기 대가야 발전상 알려주는 자료"

박상현기자 송고시간2019-05-30 17:54

국립김해박물관·한국역사연구회 가야 학술심포지엄

합천 매안리비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89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에서 발견된 이른바 '매안리비'는 6세기 전반 대가야가 건립한 비석으로 당시 사회 발전상을 입증하는 유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김해박물관과 한국역사연구회가 내달 1일 '문자로 본 가야'를 주제로 여는 학술심포지엄에서 이현태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매안리비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한다.

30일 배포된 발표문에 따르면 매안리비는 하단이 60㎝가량 땅속에 묻혔고, 비신 높이는 265㎝·너비는 최대 56㎝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큰 조명을 받지 않았고, 가야비인지 신라비인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 연구사는 "매안리비는 삼국시대 비석치고는 큰 편"이라며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사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점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매안리비는 앞쪽에 크기 5.5㎝인 글자를 새겼는데, 1행에만 확실히 글자가 존재한다. 뒤쪽에는 중앙부에 뫼 산(山)자가 있고, 아홉 구(九)자로 보이는 글자도 있다고 이 연구사는 설명했다.

그는 그간 학계에서 나온 1행 14개 글자 판독안을 종합해 '△亥年△月△日△△村卄六干支'(△해년△월△일△△촌이십육간지)라는 문구를 제시하면서 '△해년 △월 △일 △△촌에서 26명의 간지(干支)가 모였다'로 해석했다.

이 연구사는 대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시점이 562년 전후이고 '간지'라는 표현이 561년에 건립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나오지 않는 점을 근거로 '△해년'을 507, 519, 531, 543, 555년 중 하나로 추정했다.

이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가야 고읍인 고령군에는 야로현과 신복현이 있었는데, 야로현은 오늘날 합천 야로면·가야면·묘산면 일대"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매안리비에 등장하는 '간지'는 우두머리, 즉 수장을 뜻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 의견이 일치한다"며 "26명에 이르는 간지의 수는 세력 분화 정도를 알려주고, '△△촌'은 대가야가 도읍을 제외한 지역을 어떻게 편제했는지 암시한다는 점에서 매안리비는 대가야 국가 발전 단계를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대해 김양훈 김해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토론문에서 "일반적으로 578년에 세웠다고 보는 대구 무술오작비에 '귀간지'(貴干支)라는 글자가 있다"면서 "6세기 촌락의 장을 중앙 지배층과 동일하게 '간지'로 칭한 점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대왕'명 유개장경호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심포지엄에서는 광개토왕비와 충남대 박물관 소장 '대왕'(大王)명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뚜껑이 있고 목이 긴 항아리),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명 토기에 대한 발표도 진행된다.

연세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신가영 씨는 광개토왕 남정(南征)을 '400년 전쟁'으로 명명하고 "고구려는 신라에 자주 침범하는 왜를 격퇴하기보다는 신라의 낙동강 하류 지역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백제와 왜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동주 경북대 강사는 도굴품인 '대왕'명 토기 출토지로 고령 지산동 고분을 지목하고 글자를 바르게 새긴 몸체와 달리 뚜껑에는 '대왕'이라는 글자를 좌서(左書·오른쪽과 왼쪽이 뒤집힌 글자)로 쓴 것은 중국 남조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또 동국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정상희 씨는 '하부사리리'명 토기를 연구해 대가야 상부는 고령, 하부는 합천 옥전 일대에 존재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합천 매안리비는 6세기 대가야 발전상 알려주는 자료" | 연합뉴스 (yna.co.kr)

 

"합천 매안리비는 6세기 대가야 발전상 알려주는 자료"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89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에서 발견된 이른바 '매안리비'는 6세기 전반 대가야가 건립한 비석으로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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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분 1만기, 대가야의 타임캡슐 열리나? 

김명진(팩트체크담당) 작성 2018.01.20 08:49 수정 2018.01.20 10:07 조회 15,930

산을 허물어 수십 개의 고분을 파헤쳐 놓은 듯한 광경, 고령 지산동 44호분 발굴 당시의 모습입니다. 단 한 개의 고분이 이 정도로 컸습니다. 봉분 지름이 27m, 높이는 6m에 달하는 왕릉급 무덤입니다.

 

지산동 44호분 발굴 장면

 

무덤 주인이 잠들어 있던 돌방, 그 옆엔 부장품만 따로 모아둔 돌방이 두 개가 더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대가야 고유의 토기와 갑옷, 투구 등 무기, 말갖춤, 장신구,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등이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발굴 참가자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생생한 순장 현장이었습니다. 무덤 주인이 매장된 돌방을 호위하듯 자그마한 돌덧널 32개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각각 1~2명의 뼈가 나온 것입니다.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부장품을 넣는 딸린돌방 두 개에서도 순장자가 발견됐습니다. 사후에도 무덤 주인을 모시기 위한 시종과 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인 셈입니다. 이렇게 한 무덤에서 나온 순장자가 40명에 이르렀습니다. 
https://youtu.be/or5No6VV-eM

 

인골을 분석해보니 부녀로 보이는 30대 초반 남성과 8살 소녀가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고, 30대 남녀가 함께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순장자 옆에는 말갖춤 유물, 무기류, 장신구, 농기구가 발견됐습니다. 무덤 주인을 모실 마부, 호위 무사, 농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1년이 흘렀습니다. 이번주 초 경북 고령군과 대동문화재연구원은 지산동 일대 고분 74기를 추가로 발굴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부장품 중에는 A구역 2호분에서 나온 금동제 관모와 환두대도의 손잡이가 특히 주목을 끌었습니다. 금동제 관모는 주로 백제 고분에서 출토되고, 잎사귀 모양의 환두대도 장식은 신라 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유물입니다. 무덤 양식도 시신을 무덤 옆면을 통해 매장하는 신라식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었습니다. 하나의 무덤 안에 가야와 신라, 백제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죠.

 

 A구역 제2호묘 출토 금동제 관모

 A구역 제2호묘 출토 삼엽문 환두대도

A구역 제19호묘 출토 말등 기꽂이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왼쪽) B구역 제3호묘, (오른쪽)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B구역 제3호묘 전경

 

B구역 제3호묘 유물 출토상태(마구류)

 

귀하지 않은 유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앞서 본 44호분에 비해 너무 빈약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발굴한 고분은 모두 소형분들입니다. 봉분이 아예 없어서 발굴 전까지는 관람객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던 이동로였습니다. 이 길을 CCTV와 조명용 케이블을 매설하기에 앞서 발굴해봤더니 나온 유물들인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분이 감춰져 있길래 이렇게 간단히(?) 74기나 나왔을까요? 대가야박물관 정동락 학예사는 "지산동에서 육안으로 봉분이 확인돼 고유번호가 매겨진 고분은 현재 704기"라며 "봉분이 없거나 서로 겹쳐진 고분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기, 많으면 2만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고분 수만 놓고 보면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라는 것입니다. 가야는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부족국가 연맹에 머물렀다고 배워온 우리로선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야 국가들의 운명을 바꾼 일대 사건은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었습니다. 신라의 구조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이 5만명의 병사를 낙동강 하구까지 내려 보내 가야와 왜군을 토벌한 사건이었습니다. 고구려 군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아라가야의 함안까지 추격해 들어왔고, 이후 신라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는 급격히 쇠퇴했고, 그 대체 세력으로 내륙에 있던 고령의 대가야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대가야가 고구려-신라 연합군에 협조해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영토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는 수수께끼입니다. 대가야 특유의 토기들이 합천, 함양은 물론 멀리 백두대간 넘어 남원, 진안, 장수 등 전라도 동부 지역에서도 발굴되고 있어서 대가야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가야가 고대 왕국으로 성장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왕' 칭호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도굴 유물이어서 어느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대가야에서 만든 금관 2개와 '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령 향교 자리에서 대가야 당시 궁성 터와 주위를 둘러싼 해자(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앞을 둘러 인공적으로 판 연못)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vhhVMjYDjPU

 

 

다시 지산동 현장으로 가봅니다. 고령군 읍내를 굽어보며 남북으로 흐르는 해발 310m 주산 능선을 따라 수많은 고분들이 봉긋봉긋 일대 장관을 이룹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20m 이상 고분은 11기에 불과합니다. 이보다 큰 왕릉급 5기는 일제에 의해 마구 파헤쳐졌습니다. 파헤쳐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겠다며 변변한 발굴보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마구 부장품을 뒤져갔기 때문입니다. 발굴이라기 보단 약탈에 가까웠습니다. 고령군의 한 관계자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기 직전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에 트럭 3대분의 엄청난 유물이 실려 있는 것을 본 주민이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산동 고분 가운데 상당수는 도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20m가 넘는 대형 고분 10여 기가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그보다 작은 1만기가 넘는 고분은 고대 가야의 비밀을 간직한 채 땅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가야의 타임캡슐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야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밝혀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기록상으로 대가야는 서기 42년 건국돼 562년 신라 진흥왕때 이사부 장군에 의해 멸망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장장 520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한 국가지만 문헌 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래도 각자 역사서를 남겼고, 그 기록의 일부가 삼국사기 등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가야는 역사서 자체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덤마다 출토되는 그 많은 덩이쇠가 어디서 생산돼 어떻게 유통됐을까? 수없이 쏟아지는 철제 갑옷과 투구, 가야 국가별로 특색을 보이는 각종 토기들은 또 어디서 누가 제작했을까? 가야금과 우륵으로 대표되는 가야의 예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아직 우리는 뚜렷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가야사의 비밀을 밝히는 작업은 198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상태입니다.  
출처 : SBS 뉴스

[취재파일] 고분 1만기, 대가야의 타임캡슐 열리나? (sbs.co.kr)

 

 

대가야 도읍지 경북 고령군 "가야사 복원에 기대"

송고시간2017-06-04 07:11 

 
고령 지산동 고분군 [연합뉴스 자료사진]

 

1천600년 전 대가야국 도읍지로 역사성을 브랜드화하고자 2015년 4월부터 고령읍을 대가야읍으로 바꾸는 등 가야 역사와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사적 79호인 이곳에는 704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다.

 

고령군 관계자는 "대가야국은 554년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한 뒤 562년 신라가 병합해 역사에서 사라졌다"며 "영호남에 걸쳐있는 가야 문화권이 화합과 상생 터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대가야 도읍지 경북 고령군 "가야사 복원에 기대" | 연합뉴스 (yna.co.kr)

 

대가야 도읍지 경북 고령군 "가야사 복원에 기대" | 연합뉴스

(고령=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해 달라고 주문한 것과 관련해 대가야 도읍지인 경북 고령군은...

www.yna.co.kr

 

 

[새 연재 한국의 산신(山神) | 가야산]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 낳은 정견모주가 산신으로 化해

Season Special월간산

  • 입력 2016.03.29 13:04
만물상 상아덤서 천신 이비가지 만나… 동생 수로는 금관가야 시조로 탄생
가야산 만물상 끝자락에 있는 상아덤.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를 만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가야산은 고대 가야국의 진산이다.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고대국가는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국가의 통치자와 겸했다. 따라서 국가를 건국한 왕은 신격화된 건국신화가 반드시 뒤따랐다. 하늘로부터 받은 왕권을 더욱 신성시하고 통치권을 공고히 다지는 차원에서라도 신화적으로 만들었다. 왕을 낳은 부모부터 왕까지 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각색됐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 신화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고대국가들이 그렇듯이 가야도 당연히 건국신화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존재한다.

<고려사> 지리지 경상도 김해도호부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3월에 가락의 9간(干)인 아도(我刀)·여도(汝刀)·피도(彼刀)·오도(五刀)·유수(留水)·유천(留天)·신천(神天)·오천(五天)·신귀(神鬼)가 물가에 모여 술을 마시다가 귀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가서 보니 자색(紫色) 새끼줄에 매인 금합(金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합을 열고 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금빛 알이 있으므로 아도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이튿날 아홉 사람이 다 모여서 또 열어 보니 알 여섯 개가 껍질이 쪼개져 여섯 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쯤 되었고 용모가 매우 거룩해, 모두 절하며 축하했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나서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자나 됐다. 무리들이 드디어 한 사람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곧 수로왕(首露王)이다. 금합에서 났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나라 이름을 가야라 하니,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서기 41년, 박혁거세의 손자)의 일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자 헤어져 가서 다섯 가야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지금의 낙동강)을, 서남쪽은 바다를, 서북쪽은 지리산(智異山: 당시 표기는 地理山)을,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을 경계로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에도 유사하게 소개한다. 김해를 본거지로 둔 금관가야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내용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건치연혁편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다.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무릇 16세 520년이다.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그러나 가락국 고기(古記)의 육란(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서 믿을 수 없다. 또 <석이정전>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정견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참고할 것이 못 된다.’

1 가야산 만물상의 전경. 온갖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다양한 자세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2 가야산 정상 우두봉 비석을 앞에 두고 등산객이 서 있다.
금관가야 6란신화와 다른 대가야 형제신화

<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는 금관가야가 아닌 대가야 중심으로 건국신화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했다.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부분만 맥을 같이할 뿐이다. 정견모주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왜 두 개의 건국신화가 존재하는지부터 한 번 살펴보자. 

가야의 건국신화는 당연히 금관가야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1세기 중반 건국한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는 한반도의 철기문화를 주도했다. 족장 중심의 연방체제를 유지했다. 건국 시기는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혼인한 것으로 알려진 서기 48년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남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한 5세기부터 금관가야는 급격히 국력이 약해진다. 가야 연방제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내륙에 있던 대가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나게 많은 역사적 사실은 차치하고 대가야가 6가야의 중심이 됐다는 사실은 대가야 중심의 새로운 건국신화가 당연히 필요했을 성싶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가 혼인해서 두 아들을 낳았고, 큰아들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고, 작은아들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됐다는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형이 큰 나라인 금관가야가 아닌 대가야의 시조로 둔갑한 사실은 이 신화가 금관가야 이후 각색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는 532년으로 알려져 있고, 대가야는 562년이다. 금관가야는 광개토대왕이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한 5세기부터 국력이 쇠약해져 사실상 신라와 병합됐다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반면 대가야는 독자세력을 구축해서 6세기 중반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저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신이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가야의 후손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가야 역사에 대한 기록의 부재는 저항세력에 대한 흔적 자체를 모조리 없애 버린 영향도 컸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승자의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가야의 역사를 끝까지 저항한 대가야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평가했을 리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가야의 형제신화(또는 설화)보다는 금관가야의 ‘6란신화(설화)’에 더 힘이 실렸을 가능성이 크다.

두 역사서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형제 신화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라고 하는 사실이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해인사 경내에 있는 국사단 전경.
 
小부족 제사장은 분명한 듯

형제설화든 6란설화든 이들의 어머니인 정견모주는 모든 역사서에 가야산 산신으로 기록돼 있다. 사실 가야산은 대가야의 진산으로서, 대가야가 중심이 된다. 금관가야의 진산은 김해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며, 그 산에서 알이 내려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가야산 산신을 언급하면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정견모주를 중심으로 한 가계는 남편인 천신 이비가지, 큰아들 뇌질주일, 작은 아들 뇌질청예로 구성된다. 이비가지는 일본식으로 이히고(伊日者), 즉 ‘이서국의 제사장’이라는 의미다. 정견모주도 이서국의 후예로서 제사장 역할을 한 여인으로 추정한다. 즉 이서국의 제사장 정견모주는 가야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서 천신 이비가지를 만나 혼인해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정견모주와 이비가지가 만난 장소가 가야산 만물상 끝자락에 있는 ‘상아덤’이다.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 성경호 탐방과장과 박소현 학예사와 함께 상아덤을 찾았다.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말이고, 덤은 ‘바위’를 가리킨다.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뾰족하면서 화살촉같이 생긴 바위가 땅에 있는 바위를 쪼갠 듯 양쪽으로 벌어진 그 사이에 절묘하게 꽂혀 있다. 인간의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이곳이 바로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전설이 서린 신비스런 장소다.

전설에 따르면,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마련하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천신 이비가지는 어느 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에 내려왔다. 천신과 산신은 성스러운 땅 가야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아들 둘을 낳았다. 형은 아버지 천신을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아우는 어머니 여신을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됐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최치원의 <석순응전>과 이를 인용한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하지만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나온 <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될 정도면 당시까지는 존재했다는 얘기다. 그 이후 전란 등으로 소실됐거나 분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순응과 이정은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들이다. 최치원이 이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기 형태로 쓴 책이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이다. 여기에 가야산 산신과 해인사 창건에 관련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사실 한 국가의 건국은 어느 날 갑자기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듯 뜬금없이 생겨날 수 없다. 수많은 단계를 분명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건국신화는 그 이전 단계는 모조리 무시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시조부터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변신한다. 가야도 마찬가지다. 가야는 <일본서기>에 나오듯 이서국이라는 소부족국가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서국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가야라는 연맹체로 성장하고 이후 국가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 국사단에 있는 산신화. 정견모주가 두 아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수호신도 옆에 있다.
이진아시왕 의미는 세상 다스리는 사람

이름에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왕이며, 다른 이름은 뇌질주일 또는 내진주지였다. 여기서 ‘뇌질’의 뜻은 노리들 또는 누리들이며, 노리와 누리는 고어(古語)로 ‘세상’이란 의미다. 이는 평원을 나타낸다. 내진이나 이진도 음은 다르나 그 의미는 비슷하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특히 이진(伊珍)에서 ‘이’는 위(上), ‘진’은 들이나 도리의 뜻이 되어, 귀인의 존장이라는 의미로 결국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란 뜻이 된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리산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신관(神觀)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의 아들인 천신이 강림해서 땅의 신과 혼인해서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이 지상의 통치자가 되고 신격화된다. 이른바 천신인(天神人)이고, 신인복합(神人複合)이다. 고대사회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신인복합은 사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인지 구별할 수 없다. 기록(fact)적 역사와 허구(fiction)적 신화가 혼재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구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신화를 무시할 수 없다. 신화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례도 세계사적으로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노아의 방주’나 ‘트로이전쟁’ 같은 것들이다. 특히 트로이전쟁은 터키의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수천 년간 구전되어 오던 신화가 마침내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됐다. 가야 건국신화도 어디까지가 신화고, 어디까지가 역사인지 실제로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역사적 사실로 하나씩 구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견모주는 ‘한 부족의 제사장’으로서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구체성을 띤다. 그런데 정견모주가 가야 건국 이후 한참 지나서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견이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특성과 건국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비교할 때 연결되지 않은 부분, 즉 의문의 여지가 많이 남기 때문이다.

정견모주는 기본적으로 불교식 명칭이자 개념이다. 정견(正見)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취해야 할 8가지 바른 자세 중에 으뜸으로, 글자 그대로 ‘바로 본다’는 의미다. 불교에서 세상을 바로 본다는 의미는 매우 심오한 뜻을 지닌다. 모주(母主)도 성모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이자 정견모주의 10세손으로 알려진 월광태자도 불교식 명칭이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처음 도래한 시기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다. 신라에는 이보다 몇 십 년 뒤인 거의 4세기 말에 들어온다. 가야가 건국될 시기인 1세기 중반에는 불교보다는 샤머니즘 같은 종교 이전의 신앙이 지배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정견모주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건국한 가야가 불교식 명칭과 개념을 사용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최소한 5세기 이후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관가야 쇠퇴하면서 형제신화 탄생한 듯

그러면 어느 때, 누가 건국신화를 새롭게 각색했을까?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학자들은 월광태자와 그의 측근이나 후손들이 불교적으로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금 합천 야로의 월광사는 월광태자가 창건한 절이며, 그 이후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과 이정은 의상의 법손이며 월광의 후손으로 추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제신화’는 대가야가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했던 6세기 당시의 상황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봐야 한다. 가야산은 대가야시대 당대부터 가야 건국의 성소로 인식됐고,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는 대가야 왕실의 최고 정점에 있는 인물로서 신화적으로 탄생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고 가야산을 소사인 가량악으로 편제한 것은 가야산이 가지는 상징성과 전통 제사장소를 계승하는 의미도 함께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통일신라 때 도입된 삼산오악은 국가의 제사와 호국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삼산(大祀三山)·중사오악(中祀五岳)·소사(小祀)로 나눴다. 대사삼산은 첫째가 경주에 있는 내력(奈歷)산, 둘째가 영천에 있는 골화(骨火)산, 셋째가 청도에 있는 혈례(穴禮)산이다. 수도 경주를 방어하기 위한 주변 3개의 산을 삼산으로 삼았다.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은 백제 지역이었던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은 고구려 지역이었던 태백산, 그리고 중악은 공산(지금 팔공산)으로 지정, 기존 지배세력들을 다스릴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선택했다. 중사를 지낸 곳은 이 외에도 전국의 군사적 거점지역을 골라 해안 등지에 사진사독(四鎭四瀆) 등도 있었다. 소사를 지낸 곳은 고성 상악(霜岳), 북한산주 부아악(負兒岳), 청주(지금의 고령) 가량악(加良岳, 현재 가야산), 무진주(지금 광주) 무진악(무등산) 등지다.

신라 이후 소사 가량악, 즉 가야산에서 매년 수차례 국가 제례인 산신제를 지냈다. 기우제까지 지낸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명산으로 등재되어 국제(國祭)가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그 전통은 계승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가야의 건국신화가 그대로 인용돼 있고, ‘정견모주를 모시는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해인사 경내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은 정견천왕사는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해인사 내 국사단에서 정견모주의 흔적을 유일하게 찾을 수 있다. 정견모주와 두 아들을 그린 산신화도 걸려 있다.

1 합천문화원 이병생 향토연구소 소장이 국사단 산신화를 보며 정견모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 고령 대가야박물관 정동락 학예담당이 가야산 정상 우두봉에서 찾은 통일신라시대 기와조각들을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 국사단에 정견모주 자취 남아

합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이병생 소장의 안내로 국사단을 찾았다. 국사단은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가기 전 중간 지점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국사단 앞 안내문에는 ‘국사단은 국사대신을 모신 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산국(山局)을 관장하는 산신과 토지가람신을 가리킨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지가 생략)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아들 수로왕은 금관가야국을 각각 건국했다고 한다. 국사대신은 인간 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하면서, 신비스런 현풍(玄風)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고 돼 있다.

이병생 소장은 “가야산 상아덤에는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를 만나 몸을 합하는 돌 모양이 상징적으로 아직까지 전한다”며 “만물상 끝나는 지점 하늘과 통하기 가장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정견모주는 가야산 산신일 뿐만 아니라 해인사 보호신으로서도 자리매김 한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거나 나라가 힘들 때 국사단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말했다.

가야산에서 조선시대 때 산신제나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한 번 살펴보자.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합천군조편에 ‘산형이 천하에 뛰어났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정수(精修)할 땅이다’고 돼 있다. <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2월 6일에 ‘내시 별감을 보내어 가야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권174 선조 37년 5월 26일에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이 장계하기를, “한재(旱災)가 너무 심합니다. 가야산·우불산·주흘산 등의 곳에서 기우제를 지낼 향축(香祝)과 예폐(禮幣)를 내려 보내주소서”라고 했는데, 예조에 계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담당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사 가량악으로서 제사를 지내던 장소를 찾아 수년째 가야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우두봉에서 찾은 기와조각은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연대를 추적할 수 있다. 이는 이곳에 분명 제사를 지내던 어떤 형태의 사당이나 암자와 같은 건물이 존재했을 것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우두봉에서 국가 제례를 지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조선시대 들어서부터 산 아래로 내려오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사당은 사당대로 분명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가야산 이름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소머리산 또는 우두산이라 불렸고, 불교 전래 후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므로 가야산이란 이름이 정착됐을 것으로 본다. 또한 가야산은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서 신성시되는 산이라 불교 성지로 꼽힌다. <동국산수기>에는 우두산(牛頭山), 비봉산(飛鳳山), 또는 상골산(象骨山), 상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기록돼 있다. 다양한 산 이름을 거치면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산의 산신이 정견모주라는 것이다.

정견모주의 영정을 얼마 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살려냈다. 역사적 인물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다. 역사 속의 정견모주와 신화 속의 정견모주, 그리고 산신으로서 정견모주에 대해서 정리된 기록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 정부 표준영정으로 제작

고령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잠정 등재목록에 올라 활용키로

정부에서 2015년 12월 공식 지정한 정견모주 표준 영정.

대가야 건국 시조의 어머니이자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의 영정이 정부 표준영정으로 제작됐다.

대가야의 주요 근거지였던 고령군에서 건국신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나아가 가야국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가야고분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15년 12월 완성했다고 밝혔다. 고령군은 2014년부터 영정작업을 시작해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고증과 수정작업을 거친 끝에 표준영정 제96호로 공식 지정받았다고 확인했다.

정견모주 표준영정은 가야국 시조의 어머니로서 위엄 있는 여성상을 나타내고, 가장 왕성하면서 활동적인 40대 중반의 나이로 설정했다. 위풍당당한 국모의 풍모와 근엄함을 동시에 갖추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표현해 냈다. 정제된 안정감을 나타내도록 전체적으로 철선법을 사용했으며, 특히 쌍구법을 많이 사용해서 부귀와 권위를 강조했다. 복식도 깊이 있게 고증했다. 머리는 고구려벽화고분에 등장하는 여인상을 참고, 중후한 이미지를 살려내려고 했다. 또 권위의 상징으로 가야 금관의 입식 장식을 고졸(古拙)하게 표현한 관장식을 배치했다. 의상도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복식을 토대로 참고했다.

고령군은 “표준영정을 기반으로 가야라는 고대국가의 역사적 사실을 가야문화권에 속한 지자체간 공유하며,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고령의 지산동고분군과 김해 대성동고분군 및 함안 말이산고분군과 함께 가야고분군에 대한 인식을 공동으로 확산시켜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가야문화권의 통합 정견모주 사당건립과 영정봉안 및 ‘정견모주제’ 봉행 등의 후속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있다.

정견모주 표준영정을 제작한 손연칠 경주 동국대 명예교수는 그간 성삼문·이익 선생 등 다수의 표준영정을 만든 전문가다.
현재까지 정부에서 지정한 표준영정 중 대가야 및 고령과 관련한 영정은 1997년 제작한 우륵과 함께 2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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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 연재 한국의 산신(山神) | 가야산]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 낳은 정견모주가 산신으로 化해 < Season Special < 테마산행 < 기사본문 - 월간산 (chosun.com)

 

[새 연재 한국의 산신(山神) | 가야산]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 낳은 정견모주가 산신으로 化해 - 월

가야산은 고대 가야국의 진산이다.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고대국가는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국가의 통치자와 겸했다. 따라서 국가를 건국한 왕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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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가야역사를 찾아서] (6) 아라가야(阿羅伽倻)

▲신라 백제와 맞선 큰 세력함안군 가야읍은 6가야 가운데 비교적 세력이 컸던 옛 아라가야(阿羅伽倻)의 고도(古都)다. 해발 50m 안팎의 도항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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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왕궁터 주방에 웬 소가야 토기?

입력 :2021-06-10 22:30ㅣ 수정 : 2021-06-11 01:55 
   

아궁이·구들 등 취사전용 공간 확인
이웃 가야세력 교류 이해할 토기류도

 

▲ 경남 함안 아라가야 왕궁터에서 확인한 취사전용 공간. 가운데가 아궁이, 왼쪽 큰 원이 물을 보관하는 집수정으로 추정된다. 일정 간격으로 뚫려 있는 중간 크기의 원은 외벽을 세운 기둥 위치로 보인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아라가야 왕궁터에서 취사전용 공간이 확인됐다. 당시 가야 세력 간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토기류도 함께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에 있는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발굴조사에서 취사전용 건물지를 확인했다고 10일 밝혔다.

경사진 기반암을 길이 11m, 너비 5m, 깊이 80㎝ 정도로 파내고 내벽을 설치해 취사 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벽은 길이 8m, 너비 3.5m, 높이 15㎝ 정도다. 황갈색 점질토를 1~2㎝ 두께로 다졌는데 열을 가해 단단하게 만드는 불다짐 기법을 사용했다. 취사시설은 동서로 길이 5m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였다. 동쪽에는 아궁이를 두었고, 서쪽 배연부 사이에 구들을 설치했다. 다만 아궁이는 하단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규모와 형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구들은 최대 길이 약 1m, 높이 약 50㎝의 평평한 돌을 놓았고, 외부를 회색 점질토를 발라 연기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했다. 구들 내부의 평평한 돌로 볼 때 측벽과 같은 방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연부는 깬돌을 가로로 눕혀 쌓아 만들었으며 연기가 잘 빠질 수 있도록 계단식으로 구축해 높이 차를 두었다.

취사시설 부지 외곽에 배연부와 가까운 곳에는 기반암을 원형으로 판 구덩이가 확인됐다. 연구소 측은 취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보고 있다. 건물지 내부에는 6세기에 볼 수 있는 원통모양그릇받침과 적갈색의 취사용 토기류가 출토됐다. 특히 원통모양그릇받침은 물결무늬 장식, 원형의 창 등이 있어 가야토기의 공통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라가야만의 속성인 둥근 옥 또는 새 모양 창과 소가야의 특징인 점줄무늬 장식과 한 쌍의 장방형 창도 확인됐다. 연구소 관계자는 “아라가야와 다른 가야 세력의 교류와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조사는 2018년부터 진행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아라가야 왕궁터 주방에 웬 소가야 토기?

아궁이·구들 등 취사전용 공간 확인 이웃 가야세력 교류 이해할 토기류도, 아라가야 왕궁터에서 취사전용 공간이 확인됐다. 당시 가야 세력 간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토기류도 함께 나왔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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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 천문학 입증 실증자료 '함안 말이산 13호분' 공개

송고시간2019-12-20 17:09

김동민 기자기자 페이지

가야-일본 기내지역 교류 추정 가능한 장식도 발견

'별자리' 확인된 함안 말이산 13호분 공개

(함안=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20일 오후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에서 열린 '말이산 13호분 조사성과 발표 및 현장 공개'에서 참석자들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2019.12.20 image@yna.co.kr

 

(함안=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가야 시대 천문학 존재를 밝힐 실증자료가 되는 말이산 13호분이 시민과 언론에 공개됐다.

경남 함안군과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20일 오후 아라가야 지배층 무덤이 밀집한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13호분을 공개하고 조사 성과를 발표했다.

5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13호분은 말이산 구릉(1.9㎞)의 중앙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흙을 쌓아 올린 봉토 고분 형태다.

전체 면적은 1천904㎡며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 위치한다.

봉분 규모는 직경 41m, 높이 8m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한 차례 조사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수차례 도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별자리' 확인된 함안 말이산 13호분

(함안=연합뉴스)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13호분 무덤 덮개돌인 천문개석 아랫면 모습. 천문개석에는 동양 별자리 '남두육성'과 '청룡 별자리가 표기돼있다. 2019.12.20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image@yna.co.kr

 

천문학 흔적은 매장 주체부 내 무덤 덮개돌(천문개석)에서 발견됐다.

천문개석은 길이 230㎝, 너비 53∼78㎝, 두께 25㎝로 무덤 덮개돌 14개 중 남쪽에서 다섯번째에 위치했다.

별자리는 돌 아랫면에 표기돼 겉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천문개석에는 말이산고분군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밤하늘 별자리와 은하수 등이 표기됐다.

최경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단장은 돌에 표기된 별자리는 동양 별자리 '남두육성'과 '청룡 별자리'라고 설명했다. 서양 별자리 '궁수자리'와 ' 전갈자리'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말이산 13호분에는 직호문(직선과 곡선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특수문양)모양의 뼈 장식 2점이 출토됐다.

최 조사단장은 "직호문은 3∼6세기 일본 교토, 오사카 등 기내지역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이라며 "13호분을 통해 5세기 후반 가야와 일본 사이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매장 주체부에서는 비취 곡옥(曲玉·굽은 옥)과 금동제 투조(透彫·금속판 일부를 도려내는 것)된 허리띠 장식도 나왔다.

이외에도 13호분 발굴 조사로 특수 통로시설, 중심분할석벽 등 당시 고대 가야인의 창조적인 무덤 축조기술 등도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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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13호분 출토품

(함안=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20일 오후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에서 열린 '말이산 13호분 조사성과 발표 및 현장 공개'에 출토품이 전시돼 있다. 2019.12.20 image@yna.co.kr

출처; 가야시대 천문학 입증 실증자료 '함안 말이산 13호분' 공개 | 연합뉴스 (yna.co.kr) 

 

가야시대 천문학 입증 실증자료 '함안 말이산 13호분' 공개 | 연합뉴스

(함안=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가야 시대 천문학 존재를 밝힐 실증자료가 되는 말이산 13호분이 시민과 언론에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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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과 아라가야 왕릉의 남두육성..그 깊은 뜻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입력 2019. 1. 4. 09:36수정 2019. 1. 4. 09:48

[경향신문]

신라 부부조각상에 새겨진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고대인들은 북두칠성을 죽음을, 남두육성을 삶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여겼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5~6세기 아라가야인들은 왜 남두육성을 무덤방 덮개돌에 새겨 넣었을까. 지난해 12월 18일 아라가야 왕릉급 고분인 함안 말이산 13호분(사적 제515호)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사수)자리 등의 별자리 125개가 새겨진 덮개돌이 확인됐다. 더욱 특이한 것은 별자리가 새겨진 구덩식 돌덧널 무덤방의 벽면이 붉게 채색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과 아라가야 왕릉의 남두육성..그 깊은 뜻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5~6세기 아라가야인들은 왜 남두육성을 무덤방 덮개돌에 새겨 넣었을까. 지난해 12월 18일 아라가야 왕릉급 고분인 함안 말이산 13호분(사적 제515호)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사수)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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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가야시대 토기의 최고 걸작 나왔다

최근 함안 말이산 아라가야 45호고분서 나온 상형토기
깨진 몸체만 공개된 직후 무덤 안에서 사슴 머리쪽 추가발견

맞춰보니 가야 조형미 정점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
전문가들 “아라가야예술의 최고 정점” 극찬

기자노형석 수정 2019-07-14 15:56 등록 2019-07-14 15:56
등잔 모양 상형토기들 사이로 머리통 없이 깨어진 사슴형 상형토기뿔잔(당시엔 동물형 뿔잔으로 표기)의 애초 모습이 보인다.

1500여년 전 한반도 남부 아라가야의 토기 장인은 어떤 상상을 하면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뒤돌아보는 사슴(또는 노루)의 자태와 표정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며 빚어낸 가야시대 상형토기의 최고 걸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불룩한 양감, 유연한 윤곽선을 지닌 몸체에 고개 돌린 사슴류의 갸날픈 머리와 목이 붙어 초현실적인 미감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경남 함안군과 두류문화연구원은 지난 5월말 군내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의 45호분 목곽묘(나무덧널무덤)의 발굴조사성과와 출토품을 공개할 당시 몸체만 남은 상태로 내보였던 동물모양 뿔잔을 최근 사슴류의 머리가 붙은 온전한 뿔잔으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함안군 쪽은 “이 상형토기가 언론에 공개된 직후 목곽묘 무덤방 바닥을 다시 수습하다가 사슴 혹은 노루로 보이는 머리 쪽 조각을 찾아냈으며 이 조각이 뿔잔의 몸체와 딱 들어맞아 사슴모양의 조형물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말 말이산 45호분 발굴성과를 발표할 당시 공개됐던 사슴모양 뿔잔의 애초 모습. 당시엔 상반신이 깨어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어 동물모양 뿔잔으로 표기됐었다.

 

길이 17㎝, 높이 19㎝에 달하는 이 작품을 살펴본 고고학계 전문가들은 빼어난 조형미를 지닌 가야 상형토기의 최고걸작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슴류 동물이 뒤를 바라보는 순간의 특징적인 모습을 절묘하게 포착한 머리통 부분의 사실적 표현과 불룩하면서도 유연한 타원형 몸체의 초현실적인 이미지, 몸체 위에 놓인 브이(V)자 모양의 뿔잔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어우러졌다. 아래 굽다리 받침 몸체에는 아라가야 토기 특유의 불꽃방울 모양의 뚫음무늬(투창)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무덤주인을 장사지낼 때 술 등을 따르는 의례용 제기로 쓰고나서 무덤 묘실 안의 주검 머리 맡에 부장품으로 묻었다고 추정된다.

가야시대 상형토기는 대부분 경남 함안, 창원 등지의 아라가야 권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차륜(마차바퀴)모양 토기, 집 모양 토기 등 사물형 토기나 기마인물형 토기가 전해지고 동물로는 오리 모양의 토기가 거의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유물을 본 고고학계 한 전문가는 “이렇게 동적이고 조형미도 빼어난 동물 모양의 토기는 처음 본다. 출토지가 명확한 유일한 사례란 점에서도 국보, 보물급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 말했다.

지난 5월말 말이산 45호분 발굴성과를 발표할 당시 무덤주인의 묘곽서 나온 출토품으로 공개됐던 아라가야 상형토기들. 집과 배

말이산 고분군은 5~6세기 경상도 남부에서 융성했던 가야 소국인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무덤떼 유적이다. 45호분은 말이산 능선에 흩어진 아라가야 고분들 가운데 최정점의 능선에 위치한 왕릉급 고분으로, 지난 2~5월 함안군과 두류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집과 배 등의 모양새를 띤 상형토기 다수와 말갖춤, 투구, 갑옷 등의 고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주목을 받았다. 아라가야가 유력한 정치체로서 처음 두각을 드러냈던 5세기초 아라가야 지배자의 첫 왕릉급 무덤으로 보고있다. 함안군은 유적에 대한 보고서 작업을 끝내는대로 사슴모양 뿔잔을, 다른 상형토기 출토품들과 함께 군립함안박물관에서 공개전시할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함안군 제공

 

출처; [단독] 가야시대 토기의 최고 걸작 나왔다 (hani.co.kr)

 

[단독] 가야시대 토기의 최고 걸작 나왔다

1500여년 전 한반도 남부 아라가야의 토기 장인은 어떤 상상을 하면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뒤돌아보는 사슴(또는 노루)의 자태와 표정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며 빚어낸 가야시대 상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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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가야]

 

[가야역사를 찾아서] (9) 성산가야(星山伽倻)

아련하게 남은 역사 흔적… 깨어날 준비하다
실체 증명할 기록·유물 부족
삼국유사 ‘가락기찬’서 언급

  • 기사입력 : 2017-09-04 22:00:00

▲수로왕 넷째 동생 벽로(碧露)가 건국

성산가야(星山伽倻)의 고도(古都)인 경북 성주 (星州)에는 옛 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주 땅은 가야문화권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이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성주는 가야역사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벽진가야(碧珍伽倻)라고도 불리는 성산가야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네 번째 동생 벽로(碧露)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관련기록과 유적 유물을 거의 남기지 않은 탓이다.

성주군청의 성주군 연혁과 역사소개에서조차 이 고장은 ‘기원후 1~3세기에는 소국(小國)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기원후 4세기경에는 성산가야로 발전했다’ 정도로만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이곳 성주지방을 6가야 중의 하나인 성산가야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성주 땅에는 성산가야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고 또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성산가야는 언제 건국됐고 시조는 누구이며 몇 대 왕까지 몇 년간의 역사를 가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성산가야의 실체나 성주가 성산가야의 고도(古都)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렵다.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알려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성산동고분군, 보수·정화사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삼국유사 5가야(五伽倻)조 ‘가락기찬(駕洛記贊)’에 의하면 ‘한 자색(紫色)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主)가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國)이 다섯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석(註釋)을 달고는 ‘아라가야(阿羅伽倻,咸安), 고령가야(高寧伽倻,咸靈), 성산가야(星山伽倻,京山 혹은 碧珍), 소가야(小伽倻,固城)라 하였고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천복 5년(太祖天福 五年)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 번째가 금관(金官), 두 번째가 고령(古寧), 세 번째가 비화(非火),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성산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성산가야의 실체는 틀림이 없으나 경산(京山)이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를 중심으로 한 지명이라면 이곳 또한 도읍지임에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성산가야의 고도(古都)답지 않게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왜 이렇게도 없는가 하는 점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성주는 비교적 좋은 지리적 조건으로 삼한시대부터 주변에 여러 부족사회들이 있었다. 서기 42년 가락국 건국을 시작으로 여러 가야가 들어설 무렵 이곳 성주지방에서도 주변의 여러 부족사회를 통합해 성산가야가 건국됐다.

성산가야는 낙동강변의 비옥한 농토와 가야산 등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6세기 전반 신라가 가야지역에 진출함에 따라 성산가야는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돼 본피현(本彼懸)이 설치됐다.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신안현(新安懸)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라말기에 벽진군(碧珍郡)으로 승격됐다. 따라서 성산가야를 벽진가야라고도 한다.


1986년 성산동고분군 38호분에서 발굴된 유개단경호 (有蓋短頸壺), 계명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싱거운 역사 흔적

성산가야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망했는지 알 수가 없어 역사도 싱거울 수밖에 없지만 성산가야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줄 유적이 없지는 않다.

성주에는 성주읍 성산리에 사적 제86호인 성산동고분군(星山洞古墳群)을 비롯해 270여 기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군은 성산(星山, 해발 389.2m)의 북사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성주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번호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는 것은 129기이나 파괴돼 멸실됐거나 봉토(封土)가 깎여나간 고분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 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성산 아래 성산리, 선남면 신부리, 용암면 장학리 등에 흩어져 있는 이 고분군은 성산가야의 왕족 또는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전해온다.

이 고분군은 일제시대 때 대부분 도굴돼 완전한 고분은 몇 기에 불과하다.

고분의 구조는 직사각형으로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부장품을 함께 묻었다. 돌방의 벽은 평평하고 큰 돌을 몇 개 덮은 후 한쪽 입구 역시 돌을 쌓아 막은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다.

이와 함께 작고 간략한 형태로 돌을 쌓아 만든 돌널무덤(石棺墓)이 있어 순장(殉葬)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관을 비롯해 동·철제품, 자기, 도기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성산가야시대로부터 신라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석기와 철기의 병용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도 성주군에는 금수면 명천리, 대가면 옥화리와 도남리, 월항면 인촌리 용각리 등에 크고 작은 고분이 흩어져 있다.

성주에는 가야백성들의 피난지였다는 일명 백운산성(白雲山城)이라고 하는 가야산성지 (伽倻山城址)가 있다.

가야산 상봉에서 산줄기를 따라 수륜면 백운리 중기마을 뒷산에 이르는 높이 1.5m, 길이 4780m가량 되는 산성이다. 산줄기를 따라 돌로 쌓았기 때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더러 있으나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져 완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중기마을 뒷산 봉우리다.

산성의 길이는 10리가 넘는 거리이나 허물어져서 성을 따라 길을 다닐 수 없어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형편으로는 산성의 길이가 수십리나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산성의 끝인 중기마을 뒷봉우리에 봉화대(烽火臺)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 주위 1만5935척, 높이 5척’이라 기록돼 있을 뿐 언제 어떤 구실로 성을 쌓았는지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역사 보존하려는 노력 곳곳에 엿보여

지금 성주에는 옛 가야의 아름다운 문화전통과 역사의 향기를 찾아 보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엿보인다.

성주군은 고분군을 보수·정화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의 발굴사업을 통해 옛 성산가야 고도(古都)의 풍모를 되찾을 목표를 갖고 있다.

군은 20여년 전부터 보수·정화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거의 마무리 단계다. 이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성산동고분군의 반듯한 봉분 등에서 잊혀진 성산가야 500년의 옛 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앞으로 성곽 복원, 유물전시관 등이 건립되면 옛 성산가야의 역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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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야역사를 찾아서] (9) 성산가야(星山伽倻) :: 경남신문 (knnews.co.kr)

 

[가야역사를 찾아서] (9) 성산가야(星山伽倻)

▲수로왕 넷째 동생 벽로(碧露)가 건국성산가야(星山伽倻)의 고도(古都)인 경북 성주 (星州)에는 옛 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주 땅은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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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

 

 

[가야역사를 찾아서] (7) 소가야(小伽倻)

옛 소가야(小伽倻) 땅 고성(固城)에는 왕국이 실존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작은 왕국의 고도(古都)다운 분위기도 아니다. 6가야를 세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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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국 소가야 궁금증 풀었다…'만림산 토성' 문화재 지정

핵심요약

경남 고성 만림산 토성이 '가야 산성'으로는 처음으로 경남도 문회재(기념물 제303호)로 지정됐습니다. 소가야 중심 세력이 축조한 토성의 실체를 규명한 첫 사례이기도 한 만림산 토성은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의 대표적 성과로 꼽힙니다.

고성 만림산 토성. 경남도청 제공
 
소가야 중심 세력이 축조한 토성의 실체를 규명한 첫 사례인 경남 고성 만림산 토성이 '가야 산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도는 소가야 대표 성곽 유적인 고성 만림산 토성이 도 기념물 제303호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만림산 토성은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간행)에 '불암산(佛巖山·현 만림산)에 토성 옛터(土城古基)가 있다'라고 기록되면서 고대 성곽일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과제인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의 하나로 '비지정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 사업'이 2019년부터 시작하는 등 정밀 조사가 이뤄지면서 만림산 토성이 5세기 소가야 중심 세력이 독특한 토목기술로 축성한 토축성곽임이 밝혀졌다.

만림산 토성은 그동안 학계에 알려진 다른 가야 중심지들의 토성과는 달리 고성만과 고성읍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부 입구에 있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성곽을 두른 '테뫼식 성곽'이다.

소가야 중심지로 드나드는 선박을 조망, 방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토성으로, 해상왕국 소가야 문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성 만림산 토성. 경남도청 제공
 
전체 둘레 720m, 성벽 너비 20~22m, 최고 높이 6m에 이른다. 평면 모습이 삼각형에 가깝다. 완만한 ∩자 형태의 토성벽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을 완연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다.
 
경남도 김옥남 가야문화유산과장은 "고성 만림산 토성의 도 문화재 지정은 경남이 가야사 연구복원을 위해 적극 추진 해오고 있는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의 대표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이어 "향후 체계적 보존은 물론 세계유산 등재 추진 중인 송학동 고분군과 연계한 활용 방안도 함께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도는 거창과 창녕 등 비지정 가야 유적의 중요 발굴 유물에 대한 도 문화재 지정 절차를 진행 중이어서 올해 안에 가야 유적·유물에 대한 문화재 추가 지정도 전망된다.
 
 

해상왕국 소가야...고성군 왕도 복원 추진

2021년 05월 23일 07시 46분

 

https://youtu.be/J44fg_x1ZkA

 

출처; [문화]해상왕국 소가야...고성군 왕도 복원 추진 | YTN

 

해상왕국 소가야...고성군 왕도 복원 추진

[앵커]정부가 가야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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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녕가야]

 

 

[가야역사를 찾아서] (10) 고령가야(古寧伽倻)

경북 상주시 함창읍은 낙동강 중류에서 남해에 이르는 가야의 권역 중 최북단에 위치한 고령가야(古寧伽倻)의 고도(古都)다. 이곳에서 하류로 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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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녕가야 역사찾기' 불교계 앞장서다

  • 기자명 김종렬 기자 
  •  입력 2021.08.29 01:04
  •  수정 2021.09.01 07:20 

'경북 상주 함창 권역 고녕가야 재조명 학술대회' 열려


< 앵커 >

경북 상주 함창과 문경일대에 꽃 피웠던 고대왕국 고녕가야의 역사를 되찾는 일에 불교계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식민사학의 잔재가 남은 가야권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불교계가 마련한 상주 함창 고녕가야 학술대회를 대구BBS 김종렬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문경 봉천사 주지 지정스님이 '고녕가야 사료 해석 오류와 종속사관의 잔재'에 대해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BBS불교방송 김종렬기자
강영석 상주시장이 28일 함창읍행정복지센터 회의실에서 열린 '경북 상주 함창 고녕가야 권역의 제조명 학술대회'에 참석에 축사를 하고 있다.

 

< 리포터 >

잊혀진 왕국 가야는 '임나일본부설'을 구축하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가 가장 많이 마수를 뻗친 고대국가입니다.

낙동강 700리 물길을 축으로 김해 금관가야와 양축을 이뤘던 고녕가야는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부정으로 가야문화권에서 소외됐습니다.

한국불교사학회와 상주문경불교연합회, 고녕가야선양회는 고녕가야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 28일상주 함창 고녕가야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병도의 6가야. 상주 함창의 '고녕가야'를 진주 '고령가야'로 설정했다. 이병도는 경북 상주 함창 '고녕'은 경남 진주의 옛 이름인 '거열'과 발음이 가깝다며 진주로 견주어 정했다. 

 

고영섭 한국불교사학회장. BBS불교방송 정민지 기자

[인서트] 고영섭 회장 / 한국불교사학회(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우선은 고녕가야의 정체성을 밝히는, 정치체를 밝히는 연구들이 좀 먼저 돼야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이렇게 제1회 고녕가야 학술회의가 그런 계기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문경 봉천사 주지 지정스님은 기조발제를 통해 이병도 박사가 고녕은 진주의 옛 이름인 거열(居烈)’과 발음이 비슷하고,‘함녕이 가야연맹체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진주를 고령가야라 설정하며 지금까지 고녕가야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병도 박사가 거론한 지리적 중요성인 웅주거목(雄州巨牧)’ 역시 진주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물산이 풍부한 큰 고을 상주를 일러 불러왔다고 반박하며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경남 합천군 박물관 지도에 나타난 '일본서기'의 임나10국+25국. 우리 사료에 나오는 가야명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정스님 제공

 

고녕가야 선양회 봉천사 주지 지정스님. BBS불교방송 정민지 기자

[인서트] 지정스님 / 봉천사 주지

그 이유란 것이 뭐야 하면 상주가 웅주입니다. 수컷, 기상이 있는 고을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한국의 기를 꺾고 역사적인 맥락을 없애기 위해서 제일먼저 한 것이 고조선 역사를 부정한 거 하고, 바로 함녕의 고녕가야 역사를 누락시킨 것 이 두 가지가...”

고영섭 한국불교사학회장도 이병도 박사의 잘못된 비정 이후 고녕가야 연구는 다른 가야문화권에 비해 연구와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강조했습니다.

토론 참석 학자들은 고녕가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유물의 발굴과 객관적 학술적 검증 등의 후속작업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상주 함창에 있는 고녕가야 태조왕릉. BBS불교방송 김종렬 기자

 

고녕가야국 사적지. 주차장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다. BBS불교방송 김종렬기자

 

[인서트] 고영섭 회장 / 한국불교사학회(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고녕가야가 실제로 하나의 정치체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지속적인 학술회의가 먼저 선행이 되면서 고분 발표를 활용하는 연구들이 동시에 진행된다면 고녕가야의 정체성이 회복이 될 수 있고요, 그런 결과를 통해서 우리 고대, 상고사 연구가 리셋 될 수 있지 않을까. 제자리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불교계가 첫 단추를 끼운 고녕가야 재조명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지역 공동체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임이자 국회의원, 고우현 경북도의회 의장, 정재현 상주시의회 의장 등 지역정치권과 자치단체도 고녕가야 역사 찾기에 적극 나서기로 했습니다.

공검지-고대 영남 제1의 저수지. 지정스님 제공
강영석 상주시장은 함창 일대 고분군 발굴 조사 등을 통해 고녕가야 실체 규명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 BBS불교방송 정민지 기자

[인서트] 강영석 시장 / 상주시

금년에 예산 10억원을 편성해서 오봉산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유물이 찾아진다면 우리는 학술대회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정식으로 학계에 정부에 고녕가야에 대한 재조명을 같이 하자고 요구를 할 것입니다.”

가야란 2천 년 간 이 땅에 자리 잡은 역사이며 문화입니다. 끊어지고 사라진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는 것은 후세의 몫입니다.

고녕가야의 재조명은 상주지역의 정체성 확립뿐만 아니라 일제가 심어놓은 왜곡된 우리역사를 바로세우는 길입니다.

상주에서 BBS 뉴스 김종렬입니다.

 
 
 
 
 

승인 2021.08.29 14:38

"경북 상주 문경지역은 고대 '고녕가야국'이었다" - BTN불교TV (btnnews.tv)

 
 
 

합천 옥전고분군, 다라국 가야 장군 무덤 발굴

강종효입력 2020. 6. 18. 19:40수정 2020. 6. 18. 21:25
 

[합천=쿠키뉴스] 강종효 기자 = 가야의 대표 고분군인 합천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에서 다라국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과 함께 금귀걸이, 봉황모양 고리자루큰칼 등의 중요 유물이 출토돼 옥전고분군의 위상을 다시 입증하고 있다.

옥전고분군은 고대 합천에 존재했던 '다라국'의 최고 지배층이 묻혀 있는 공동 묘역으로 수 천점의 유물이 출토돼 가야사 연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합천군은 옥전고분군의 보존․정비 및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지난 4월부터 (재)한빛문화재연구원에 발굴조사를 의뢰해 그간 진행된 결과를 18일 학술자문회의 및 현장공개를 통해 밝혔다.

이날 학술자문회의는 이상헌 부군수, 조영제 경상대 명예교수, 박광춘 동아대 교수, 김두철 부산대 교수를 비롯해 문화재청 관계자, 경상남도와 합천군 관계자, 한빛문화재연구원 조사단, 현장공개를 통해 관련연구자 및 관심 있는 지역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한빛문화재연구원은 조사를 통해 나무덧널무덤(木槨墓) 14기, 돌덧널무덤(石槨墓) 4기 등 총 18기의 무덤을 발견했다.

발굴조사에서 나무덧널무덤의 경우 대형 장방형 무덤과 중․소형의 세장방형 무덤이 확인됐다.

나무덧널무덤은 굴착면과 덧널사이를 흙 및 돌을 사용해 충전했는데, 크게 세가지로 구분된다.

흙으로 충전한 형태, 흙과 돌을 함께 충전한 형태, 납작한 돌로 면을 맞춰 쌓아 덧널을 보호한 형태가 있다.

특히 12호 덧널무덤은 노출 당시 무덤의 가운데가 긴 장축방향을 따라 돌들이 일렬로 나란하게 진행되고 있어 다른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무덤구조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무덤 내부에서는 다종다양한 유물이 출토되는데 금귀걸이, 고리자루큰칼, 말갖춤, 무기, 토기 등 다라국을 대표하는 유물이 다수다.

고리자루칼은 봉황문양(單鳳文), 세잎문양(三葉文) 등의 문양이 확인됐다.

이 중 금귀걸이와 봉황모양 고리자루큰칼은 지난해 12월 보물 제2042호로 지정된 장식고리자루큰칼과 견줘도 될 만큼 상태가 양호하고 문양이 화려하다.  

이와 함께 4기의 덧널무덤에서 말갖춤과 관련된 발걸이(鐙子), 재갈(轡), 말띠드리개(杏葉), 말띠꾸미개(雲珠), 안장(鞍橋), 화살통(盛矢具), 띠고리(鉸具) 등이 확인되고 있어 말갖춤 연구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신라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물고기꼬리모양의 말띠드리개가 출토되어 양 지역의 교류관계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주목되는 4호 덧널무덤의 경우 동쪽에서 금귀걸이 1쌍,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고리자루큰칼 및 큰칼 6점, 서쪽에서 말갖춤과 무기류, 토기류 등 다수의 유물이 확인돼 주검의 위치와 유물의 부장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큰칼 6점과 투구 및 비늘갑옷 등의 유물은 무덤의 주인이 장군의 지위임을 알려준다.

합천군 관계자는 "현재 진행 중인 옥전고분군의 정밀발굴조사 성과를 통해 종합정비계획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이와 함께 다라국의 도성인 성산토성도 사적지정을 추진해 여타 시군과 차별화된 가야역사문화 탐방지로 만들어 찾아오는 관광과 연계해 나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k123@kukinews.com

 
 
 
 

합천 옥전고분군, 다라국 가야 장군 무덤 발굴

[합천=쿠키뉴스] 강종효 기자 = 가야의 대표 고분군인 합천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에서 다라국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과 함께 금귀걸이, 봉황모양 고리자루큰칼 등의 중요 유물이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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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영역=임나일본부?’ …한일 학자들의 ‘고대사 배틀’

등록 :2019-07-21 12:08수정 :2019-07-21 19:38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가야사 주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일본쪽 “임나4현 영산강 일대 위치”
한국쪽 “고고학적 물증 거의 없어”
결론 안 나 가야사 연구 소홀 아쉬움

 

출처; ‘가야 영역=임나일본부?’ …한일 학자들의 ‘고대사 배틀’ (hani.co.kr)

 

‘가야 영역=임나일본부?’ …한일 학자들의 ‘고대사 배틀’

“가야의 역사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가야 대신 임나라는 명칭을 주로 씁니다. 임나의 영역을 경상도 동쪽부터 전라도 서쪽의 영산강 기슭까지 한반도 남부권 전역으로 보고 일본 교과서 지도

www.hani.co.kr

 

 

 

[이덕일의 한국통사] 삼국사기에서 갑자기 사라진 가야 미야자키현 배낭여행에서 발견한 충격적인 고분군

2020. 6. 3.

https://youtu.be/uYDF-UmhxvY?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현장답사] 고령(녕) 가야국 태조왕릉을 찾아서 | 족보를 왜 연구해야 하는가

2020. 7. 23.

https://youtu.be/YeKVb7VxZ94?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가야답사] 고령가야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됐다면 | 고령가야왕의 계보는 함창김씨 족보에 나온 내용

2020. 8. 4.

https://youtu.be/NxN8iseex6s?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이덕일의 한국통사] 일본열도에 널린 가야계 유물과 유적

2020. 6. 11.

https://youtu.be/VyNtiOUq7G4?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이덕일의 한국통사] 3세기 일본 천황가 발상지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김해 지역에서 나오는 가야 유물과 동일 북한학자 김석형 분국설로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임나일본부설 폐기돼야 #3

2020. 2. 11.

https://youtu.be/UPCoMcvXo2E?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가야사 바로잡기]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시 역사왜곡 가야건국 허황후 후손 노무현정부 허성관장관 가야사 복원 국정 과제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가야전시회

2020. 3. 9.

https://youtu.be/0m95Sc7FO_s?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가야사 바로잡기]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시 역사왜곡 희산 김승학선생 증손 김병기 박사의 가야 전시 문제점 일본서기를 근거로 전시 기획

2020. 3. 9.

https://youtu.be/ymFOcd8aho8?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참고자료>

 

가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가야인 - Daum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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