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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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라의 멸망
김수로 6형제가 신가라(지금의 김해), 밈라가라(지금의 고령), 안라가라(지금의 함안), 구지가라(지금의 고성), 별뫼가라(지금의 성주), 고령가라(지금의 함창)1)를 각각 통치했다는 점과, 임라·안라 두 가라가 4국 동맹에 참가해서 백제를 돕고 고구려를 막았다는 점은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및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에서 서술했다.
신라의 지증·법흥·진흥 세 대왕은 지속적으로 6가라를 잠식했다. 그러다가 진흥 때 6국이 모두 신라의 소유가 됐다. 이로써 지금의 경상 좌우도가 완전히 하나가 됐다. 이제 6가라 흥망의 역사를 약술하고자 한다.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금관국으로 표기된 나라다. 시조인 수로 때는 신라보다 강성했다. 신라 파사이사금은 인근 소국인2) 음즙벌국(지금 경주의 북쪽 경계 내)과 실직국(지금의 삼척)의 영토분쟁을 판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수로왕의 중재를 요청했다. 수로왕의 한마디로 판결이 나자, 세 나라는 다 승복했다. 그런 뒤 파사왕은 수로왕을 위해 감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신라 6부 중 하나인 한기부의 부장인 보제가 직접 나오지 않고 낮은 사람을 내보내자, 수로왕은 분노하여 하인인 탐하리를 보내 보제를 죽였다. 하지만 파사이사금은 수로왕에 대항하지 못했다. 탐하리에게 벌을 주라고 명령하고, 탐하리를 숨겨준 음즙벌국를 침공할 뿐이었다.
그러나 신가라는 수로 이후로는 국세가 날로 쇠약해져 임라가라의 침공을 받았다. 신라 법흥대왕 19년(서기 532년) 때에 신가라 제10대 왕인 구해가 보물과 처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안라가라의 경우에는 연대와 역사를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구려 광개태왕이 남쪽 원정을 했을 때에 고구려·신라와 함께 백제에 대항했고, 백제 문주왕이 구원을 요청했을 때에 4국 동맹에 참가해서 고구려를 막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소국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정치 문제에서 빠지지 않는 나라였다.
이전 역사서 중에 안라가라의 멸망 연도를 기록한 책이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증왕 15년 기사에 “소경(小京)을 아시촌(지금의 경남 함안으로 추정_옮긴이)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라’의 이두문자가 아시랑(阿尸郞)이므로 지증왕 15년 이전에 안라가라가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법흥대왕이 대병력으로 아시량국(阿尸良國)을 멸하고”라고 했다. 선왕이 죽은 해를 신왕이 즉위한 해로 혼동하는 예는 《삼국사기》에 자주 나타나는 일인즉, 지증왕 15년 즉 지증왕의 사망 연도는 법흥대왕의 원년일 것이니, 혹시 안라가 법흥왕 원년에 망한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과 〈거도 열전〉에 의하면, 지증왕 때 김이사부는 변경의 군관이 되어 국경에 말떼를 모아 놓고 날마다 병사들이 타고 달리도록 했다. 가야인들은 이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예사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방비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 이사부가 습격해 멸망시켰다. 이 가라는 안라가라다. 따라서 안라가라는 대략 지증왕 말년에 이사부의 손에 의해 망했고, 법흥왕 원년에 안라가라의 수도가 신라의 소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다.
밈라가라는 6가라 중에서 신라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소(小)강국이다. 처음에는 신라와 싸워서 거의 다 이겼다. 그러다가 신라 내해이사금 40년(서기 209년)에, 밈라가라에 속한 바닷가 8개국(대체로 지금의 남해·사천 등지)이 연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밈라를 침입하여 대파하고 6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밈라왕이 왕자를 신라에 볼모로 보내고 구원병을 요청하자, 신라 태자인 석우로가 6부 정예병을 동원하여 8국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밈라에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는 밈라의 국세가 약해져 신라에 대항하지 못했다.
밈라가라는 신라와 합세하여 고구려 광개토태왕을 돕고 4국 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를 도울 정도로 국력이 되살아난 적이 있다. 하지만 신라의 지증·법흥 두 대왕이 안라가라 등을 멸망시키자, 두려움을 느낀 밈라가라 제6대 가실왕은 신라 귀족 비조부(比助夫)와 결혼동맹을 맺어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3)
하지만 결국 신라의 기습을 받고 멸망했다. 그 뒤 가실왕은 신라에 불복하는 왕족과 인민들을 거느리고 미을성 즉 지금의 충주로 달아났다. 가실왕은 여기서 백제의 도움으로 신라를 막고 미을성을 서울로 삼았다. 서기 554년에 백제 성왕이 구양(狗壤, 발음은 글래) 즉 지금의 백마강 상류에서 신라를 기습했을 때에 밈라 병력도 함께했다.
이때 양국 연합군은 신라 신주군주(新州軍主)4)인 김무력(신가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의 아들)의 복병을 만나 전몰했다.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충주로 천도한 밈라가라는 서기 564년에 신라 병부령 김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에 의해 멸망했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대가야 즉 밈라가라가 지금의 고령에서 건국됐다가 고령에서 망했다고 기술했다. 그렇다면, 어느 사료를 근거로 밈라가 지금의 충주에서 건국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서는 “강수는 중원경 사량부5)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입니다”라는 강수 본인의 말을 소개했다. 중원경은 곧 충주이고, 임나가량은 곧 밈라가라다.
따라서 이것은 밈라가라가 충주로 천도했다는 첫째 증거가 된다. 또 《삼국사기》 〈음악지〉에는 “성열현 사람인 악사 우륵”이란 표현이 나온다. 우륵은 밈라가라의 악공이었다. 성열현 즉 지금의 청풍은 당시에는 충주 즉 미을성에 속한 땅이었다. 이것은 밈라가라가 충주로 천도했다는 둘째 증거가 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편에서는, 진흥왕 15년(서기 554년)에 “백제가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량도 밈라가라를 가리킨다. 관산성은 백제 고시산군(지금의 옥천) 구양 부근이다.
밈라가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옥천을 친 것은 지금의 영동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고령의 옛 서울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밈라가라가 충주로 천도했다는 셋째 증거가 된다. 밈라가라는 비록 멸망했지만, 강수의 문학과 우륵의 음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래서 6가라 중에서 가장 칭송할 만한 나라가 되었다.
구지·벌뫼·고링 세 가라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지리지〉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만 했을 뿐 그것이 언제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구지는 안라가라와 가까우므로 그 운명이 밈라가라와 같았을 것이다. 6가라가 모두 멸망하자 신라는 계립령 이남을 통일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혈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깊이 읽기 신가라와 신라의 관계
과거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는 상호 대등한 국가 관계라는 것은 원칙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국제 관계는 형식상 불평등한 관계였다. 강대국은 황제국 또는 상국(上國)이 되고 약소국은 신하국이 되는 양상이 거의 모든 국제 관계에 존재했다. 초기의 가라-신라 관계도 그러했다. 초기의 양국 관계에서 가라가 황제국 또는 상국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수로왕과 파사이사금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신하국이 황제국 혹은 상국에 부담한 주요 의무 중 하나는 내부 문제 보고의 의무다. 신하국이 수시로 사신을 보내 내부 문제를 보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파사이사금이 소국의 분쟁에 관한 사항을 수로왕에게 보고한 것도 의무 이행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주의할 것은 신가라와 신라의 관계가 언제나 수직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때는 이런 관계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본문의 사건이 있은 지 4년 뒤인 서기 106년에 신라는 신가라를 침공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6가라의 멸망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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