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가야고분군]

 

가야고분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가야고분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야고분군은 대한민국 세계유산 중 하나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7개 가야 고분군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포함된 고분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ko.wikipedia.org

 

 

가야고분군은 대한민국 세계유산 중 하나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7개 가야 고분군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포함된 고분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함안 말이산 고분군합천 옥전 고분군고령 지산동 고분군고성 송학동 고분군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등 7개 고분군이다.[1][2] 2023년 9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등재가 결정되었다.[3] 대한민국의 16번째 세계유산이다.[A]

가야고분군유네스코 ID고분군 이름위치한 지역사진

1666-001 대성동 고분군[B] 경상남도 김해시  
1666-002 말이산 고분군[C] 경상남도 함안군  
1666-003 옥전 고분군[D] 경상남도 합천군  
1666-004 지산동 고분군[E] 경상북도 고령군  
1666-005 송학동 고분군[F] 경상남도 고성군  
1666-006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G]
전라북도 남원시  
1666-007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H] 경상남도 창녕군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털 | 한국의 세계유산

[사진출처-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추진단] ‘가야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의 7개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7개 고분군은 대성동고분군, 말이산

www.heritage.go.kr

가야고분군

[사진출처-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추진단]

‘가야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의 7개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7개 고분군은 대성동고분군, 말이산고분군, 옥전고분군, 지산동고분군, 송학동고분군,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다.

신청유산은 지리적 분포, 입지, 묘제, 부장품을 통해 다수의 개별 정치체가 동질성을 바탕으로 상호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수평적 관계를 형성했던 가야의 독특한 정치 체계를 나타낸다. 가야 연맹은 내부적으로 여러 정치체 간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적으로 는 주변국과의 교섭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 사회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7개 고분군은 한반도 남부의 해안과 내륙의 각 정치체의 중심지의 가시성이 뛰어난 구릉지에 오랜 기간 군집 조성된 최상위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가야 연맹을 구성했던 각 정치체의 존재를 보여준다.

가야식 석곽묘와 토기를 비롯한 부장품은 동질성을 공유했던 가야연맹 전체의 지리적 범위를 알려 주고, 이들의 세부적인 차이는 연맹을 구성했던 각 정치체의 범위와 개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대등한 수준의 위세품과 교역품은 연맹을 구성한 각 정치체가 자율성을 가진 수평적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송고시간2023-05-11 09:15

대가야·금관가야·아라가야 등 당대 문화·사회 엿볼 수 있는 중요자료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올해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야고분군'(Gaya Tumuli)은 가야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 유적이다.

11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가야와 관련한 고분군이 780여 곳에 분포하고 있다.

관련 고분 수를 모두 따지면 수십 만기이며, 고분군은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꾸준히 조성돼 왔다.

각 정치체가 공존하며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은 형태로 조성해 가야 문화는 물론, 당대 사회구조와 변천 과정 등을 폭넓게 분석할 수 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그간의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고분군 7곳의 특징, 주요 출토 유물 등을 간략히 정리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5∼6세기 가야 북부 지역을 통합하면서 성장한 대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높은 구릉지 위에 고분군이 밀집해 조성돼 있는데, 연맹의 중심 세력으로서 대가야의 위상과 가야 연맹이 최전성기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일부 대형 무덤은 순장자를 함께 묻은 것으로 파악돼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백제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그릇, 신라에서 영향을 받은 새 날개 모양 관장식, 일본 오키나와 산 야광 조개로 만든 국자 등은 당시 대가야의 활발한 대외 교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가야 사회의 계층구조와 대내외 문물 교류를 볼 때 가장 많이 연구하는 고분군이기도 하다.

지난 1978년에 32호분에서 나온 금동관은 대가야의 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1∼5세기 가야 연맹을 구성했던 금관가야의 문화를 보여주는 고분 유적이다.

조사 결과 당시 지배집단이 묻혔으며 고인돌, 널무덤, 덧널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됐다.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모여 있어 시기적으로도 범위가 넓다.

대성동 고분 일대에서는 토기류와 철기류, 중국제 거울 등이 출토됐다.

특히 중국에서 들여온 청동거울, 북방에서 수입한 청동 솥 등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정치체가 중국, 가야, 일본 열도로 이어진 국제 교역에서 활발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자료다.

또, 보물로 지정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를 통해 가야인의 세련된 장신구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 무덤이 조성된 고분군이다.

말이산(末伊山)은 '머리'와 '산'을 한자로 표기해 합친 것으로 '우두머리의 산'이라는 의미가 있다. 나지막한 구릉과 능선을 따라 꼭대기에는 대형 무덤이, 경사면에는 중소형의 무덤이 모여 있다.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37기의 대형 무덤이 높은 곳에 모여 있는 점이 특징이다.

여러 출토 유물 가운데 말이산 45호분에서 나온 상형 도기 세트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10월 보물로 지정된 유물로 정식 명칭은 '함안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 도기 일괄'이다.

집 모양 도기 2점, 사슴 모양 뿔잔 1점, 배 모양 도기 1점, 등잔 모양 도기 1점 등으로 구성된 유물은 유물의 잔존 상태가 우수한 데다 가야인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창녕 일대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비화가야 최고 지배자 묘역으로 추정된다.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100기가 넘는 무덤이 확인되며 출토 유물과 구조 양상을 볼 때 5∼6세기가 중심 연대일 것으로 파악된다.

창녕 고분군은 최근 발굴 성과와 연구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학계의 관심이 쏠리는 유적이다.

봉토 지름이 21m, 높이가 7m인 63호분은 그간 한 차례도 도굴되지 않아 원형이 보존된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교동 고분군에서는 무덤 출입구에 개를 매장한 사례가 몇 차례 확인된 바 있다. 63호분에서도 개 3마리의 흔적이 나왔는데 무덤을 수호하라는 뜻에서 묻은 것으로 추정한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5세기부터 가야 연맹의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떠오른 소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다른 고분군과 비교하면 봉토분 숫자는 적은 편이나 가야 고유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는 평가가 많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1호 무덤은 지방의 우두머리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무덤 방을 만드는 가야 형식을 따른 것으로 확인됐다.

무덤에서는 소가야식 토기뿐 아니라 토기, 마구 등 교역품으로 쓰였을 유물이 다양하게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백제와 가야, 일본 열도를 잇는 해양 교역의 창구였던 소가야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고분군으로 보기도 한다. 인근에 있는 고성 동외동 조개더미와 더불어 지역 내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합천 옥전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합천 옥전 고분군

낙동강의 한 지류인 황강변 구릉에 있는 4∼6세기 전반의 가야 고분군이다.

무덤이 총 1천여 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지름이 20∼30m 정도인 18기가 한 지역에 밀집돼 있다.

옥전 고분군에서는 토기류, 철제 무기류, 갑옷 마구류, 장신구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구슬이 많이 나는 밭'(玉田)이라는 뜻처럼 'M2호분'이라 이름 붙은 한 무덤에서는 2천여 개가 넘는 구슬이 나왔다.

화려한 장식의 금귀걸이와 장신구도 여럿 출토됐다.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3쌍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최고 수장급의 무덤에서만 나오는 유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M3호에서는 최고 지배자의 상징인 봉황무늬, 용무늬 등을 새긴 둥근 고리 큰 칼이 4자루나 나왔다. 한 무덤에서 많은 양이 발견된 건 드문 사례다.

또 투구, 갑옷 등도 여러 점 발견돼 가야는 물론, 우리나라 고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진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가야의 서쪽 영역과 그 범위를 엿볼 수 있는 고분군으로, 운봉고원의 가야 정치체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지리산 줄기인 연비산에서 내려오는 언덕 능선을 따라 40여 기의 무덤이 조성돼 있다. 전북 지역에 있는 가야 고분군 중에서는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무덤에서는 가야뿐 아니라 백제의 흔적도 곳곳에 묻어있다.

예를 들어 32호분에서는 백제 왕릉급 무덤에서만 나오는 청동거울, 백제계 금동신발 조각이 나온 바 있다. 무덤의 축조 방식을 봐도 가야와 백제 고유의 특징이 함께 보이는 경우가 있다.

토착 세력, 가야, 백제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이 함께 출토돼 5∼6세기 전북 동부 지역의 고대사와 고대문화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적이다. 호남 지역의 가야 유적으로서는 처음 사적으로 지정됐다.

 
 
[그래픽]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

(서울=연합뉴스) 박영석 기자 = 한반도 남부에 남아있는 가야 유적 7곳을 묶은 '가야고분군'(Gaya Tumuli)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전망이다.
11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사·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는 한국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가야고분군을 평가한 뒤 '등재 권고' 판단을 내렸다.
zeroground@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yes@yna.co.kr

 

 

 

세계유산 등재 앞둔 '가야고분군' 의미는…고대사 한 축 풀어낼 '단서'

"가야 문화 내에서도 지역 따라 '따로 또 같이'…가야사의 물적 증거"

함안 말이산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한국의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확실시되는 '가야고분군'(Gaya Tumuli)은 한국 고대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야를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다.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주로 낙동강 유역에서 번성했던 작은 나라들의 총칭이다.

경남 김해에 있었던 금관가야를 비롯해 함안·고성, 경북 고령·성주·상주 등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5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누릴 시에는 22개의 소국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역사가 가야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에 존속했음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옛 문헌에 가야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단편적이거나 일부에 그쳤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등에 기록이 일부 전하지만,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대상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지의 왕국' 가야를 드러낼 단서로 꼽혀온 자료가 바로 수많은 무덤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따르면 한반도 남쪽에는 가야와 관련한 고분군이 780여 곳 남아있다. 구릉 능선을 따라, 혹은 나지막한 언덕에서 조성된 무덤을 모두 합치면 수십 만기에 달한다.

합천 옥전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 안에서 나온 수많은 토기, 철기, 장신구 등의 유물은 가야의 면면을 담은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는 11일 "가야와 관련한 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눈에 띄고 많은 유물이 나온 고고학적 자료가 가야의 무덤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가야의 무덤에는 가야가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당시 동아시아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했는지 등 역사와 문화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라고 강조했다.

가야 고분군은 총 7곳의 가야 유적을 모은 연속 유산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연속유산은 지리적으로 서로 접하지 않은 두 개 이상의 유산을 포함한 것으로, 같은 역사나 문화적 집단에 속하거나 지리적 구역의 특성을 공유할 때 적용할 수 있다.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등 주요 사찰 7곳을 묶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년 등재)이 비슷한 사례다.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학부 명예교수는 "따로, 또 같이"라는 말로 고분군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가야의 무덤을 살펴보면 백제, 신라와는 문화적 특징이 구분된다. 그러나 가야 토기라 할지라도 창녕, 고령, 함안 등 각 지역에 따라 각각의 유형, 스타일이 다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가야 고분군은 당대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물적 증거"라고 덧붙였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당초 김해와 함안 고분군, 고령 고분군 등이 각각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해 잠정목록에 올랐으나 문화재청은 지난 2015년 '가야고분군'으로 묶어 등재를 추진하기로 하고 총 7곳의 유적을 선정했다.

이영식 교수는 "2013년부터 각 지자체에서 등재를 추진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라며 "고분군이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데 10년간 지속성을 갖고 사업을 추진해온 사례는 드물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그간 국정 과제로 가야사 복원이 추진되면서 조사·연구, 문화유산 정비 등이 함께 이뤄져 왔다.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상당한 연구 결과와 자료를 축적한 게 주요한 성과"라고 말했다.

그는 향후 과제와 관련해 "등재 이후에 문화적 가치를 어떻게, 또 얼마나 유지할지 부분을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전문가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관리의) 지속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가야고분군은 올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가야고분군 7곳의 위치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es@yna.co.kr

 

[김해대성동고분군]

금관가야 대표고분…가야 성립·전개 연구에 절대적 가치

중국∼가야∼일본 동아시아 국제교역 입증 유물 가득

하늘에서 본 김해 대성동고분군 전경

[경남 김해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해=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된 대성동고분군은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 자리 잡고 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시민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주택과 아파트 등이 코앞이다.

고분 명칭도 지역 명칭을 땄다.

대성동고분군은 1∼5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대성동 유적은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구지봉과 봉황동유적 사이의 표고 22.6m의 왜(애)꼬지(애구지: 애기 구지봉)라 불리는 구릉과 구릉의 주변 일대에 위치한다.

애구지 구릉은 길이 약 280m, 너비 약 50m에 이르며 북쪽에서 남동쪽로 완만하게 뻗은 독립 구릉이다.

유적의 동쪽에는 김수로왕릉이 인접해 있고 서쪽에는 해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고분군 발굴조사는 경성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90년부터 2001년까지 모두 4차례의 발굴이 이뤄졌고 이후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2009년부터 2020년까지 6차례의 학술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모두 10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대성동고분군은 전기 가야의 중심 고분군으로 가야의 성립과 전개, 성격, 정치, 사회 구조를 해명하는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확인됐다.

특히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묘역과 피지배층의 묘역이 별도로 조성됐음이 밝혀져 금관가야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해석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무덤은 지석묘, 옹관묘,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수혈식석곽묘 등 여러 종류가 확인됐다.

목관묘는 주로 구릉 주변의 낮은 곳과 평지에 조성됐다. 목곽묘, 수혈식 석곽묘와 같은 대형 무덤은 입지조건이 좋은 구릉의 능선부에 자리 잡았다.

고분군이 형성될 당시엔 남쪽이 바다였으나 점차 퇴적물이 쌓이고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 매립공사가 이뤄지면서 1970년대에 이르러 도시 건설을 위한 넓은 대지가 조성됐다.

금관가야 지배층의 무덤을 찾아 김해시 칠산동고분군을 발굴했던 경성대학교박물관에 의해 1990년 6월 대성동고분군 학술발굴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됐다.

이 발굴조사를 통해 중요성이 인정돼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주변 일대가 유적공원으로 정비됐다.

금관가야의 무덤 모형

[연합뉴스 자료사진]

 

금관가야의 최상위 지배층 고분군인 대성동고분군은 김해분지 내 있으며 1세기부터 5세기 후반까지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가 순차적으로 축조됐다.

초기에는 구릉지 주변 평지에 목관묘가 축조되고 2세기 후반부터 구릉지 상부로 목곽묘가 확장해 간다.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까지 구릉 등선 매장부의 공간이 넓은 대형 목곽묘가 축조되고 중·소형 목곽묘는 대형 목곽묘의 주위와 구릉지 사면부에 축조됐다.

구릉지 남쪽 끝과 수릉원에서 금관가야 멸망 직전까지 석곽묘가 조사됐다.

문헌에도 금관가야는 532년에 멸망했고 이후 김해지역은 신라에 복속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형 목곽묘와 석곽묘에 부장된 가야토기는 고배·기대·장경호로 구성되며 가야연맹의 공통적 장례풍습을 보여준다.

김해 대성동고분군 출토유물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청동거울과 용무늬 허리띠, 북방에서 수입한 청동솥, 일본에서 수입한 청동제 의기 등의 교역품은 대성동고분군을 조성했던 정치체가 중국∼가야∼일본열도로 이어진 동아시아 국제교역 체계에서 활발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보물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해시는 이번 대성동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다양한 후속 사업을 한다.

우선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통합관리기구 유치와 대성동고분군 세계유산방문자센터 건립, 세계유산 표지석 설치로 대성동고분군의 가치를 더 높인다.

또 내년에 열리는 전국체전을 비롯해 2024 동아시아 문화도시, 김해방문의 해 등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 김해시 브랜드를 국내외 방문객에서 널리 홍보할 계획이다.

홍태용 김해시장은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된 김해를 비롯한 경남, 경북, 전북 등 관련 지자체의 브랜드 가치 상승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choi21@yna.co.kr

 

[말이산고분군]

함안말이산고분군 | 함안박물관 (haman.go.kr)

함안말이산고분군

  •  
1/4
이전다음

문화재 소개

말이산고분군 현황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1964년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과 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으로 관리하여 오다가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동일한 시대와 성격의 무덤들이 조성되어 있는 하나의 고분군으로써 2011년 7월 28일 사적 제515호로 통합ㆍ재지정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지번은 도항리 484번지 등 562필지이며, 면적은 525,221㎡로 가야시대 고분유적으로서는 최대급의 규모를 자랑한다.

 

말이산의 소유는 2013년 10월 현재 국유 78%, 사유 22% 정도이며, 관리자는 문화재청에 의해 함안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함안군에서 고분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는 가야시대 봉토분은 총 37기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1호분부터 남쪽으로 진행하면서 주능선-가지능선 순으로 일련번호가 붙여져 있으며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고분이 37호분이다. 하지만 1991년 국립창원대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기존 37기를 포함하여 모두 113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며, 또 그간의 발굴조사 성과로 보면 봉토가 삭평되어 원형을 잃어버린 것까지 있어 이를 포함하면 1,000기 이상의 가야시대 고분이 조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산의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집중 조영되었으며, 그 분포는 남-북으로 이어진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가지능선의 정부(頂部)에 대형의 봉토분이, 사면부에 중소형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말이산의 북쪽 일대에는 아라가야의 전신인 삼한시대 안야국(安邪國)의 목관묘와 목곽묘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말이산고분군은 기원 전후부터 아라가야 멸망 때까지 약 550년간의 고분들이 누대로 조영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말이산고분군의 출토유물은 토기 2,010점, 철기 2,479점, 장신구 3,381점, 기타 91점 등 총 7,961점의 다종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아라가야가 독자적으로 형성, 발전시켰던 찬란한 문화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원으로서 주변국가의 교류, 갈등, 정복 등의 관계상을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주로 통모양굽다리접시와 불꽃무늬굽다리접시, 손잡이잔, 문양뚜껑, 각종 항아리와 그릇받침 등으로 4~5세기대 아라가야 양식의 특유의 토기들이다. 철기는 ‘철의 왕국’이라 일컬어지는 아라가야답게 수준 높은 철기들이 출토되는데, 둥근고리큰칼을 비롯한 쇠창, 화살촉 등의 무기와 투구와 판갑옷, 비늘갑옷 등의 무구, 말투구와 말갑옷을 비롯한 재갈, 안장 등의 말갖춤, 새모양장식을 붙여 만든 미늘쇠 등이다. 특히 대형봉분에만 부장되는 덩이쇠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고대 국가로 성장한 아라가야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각종 말띠드리개나 말띠꾸미개 등에는 금과 은을 활용한 장식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지배층의 화려한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또 아라가야의 대외교류를 가늠할 수 있고 아라가야를 상징하는 불꽃무늬토기가 있어 ‘철의 왕국’으로 불리었던 아라가야의 우수한 문화상을 엿볼 수 있다.

 

말이산의 제3~4가지능선 일대에는 함안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함안군의 대표적인 문화시설로서 고분군의 경관과 잘 어울리고, 아라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전시를 통해 말이산고분군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자료출처 : 함안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안말이산고분군 고분 분포도

 

 

 

[지산동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 디지털고령문화대전 (grandculture.net)

 

 

 

 
[상세정보]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대가야시대의 고분군.

[개설]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치소지(治所地)의 주 고분군이다. 피장자(被葬者)는 대가야의 최고 지배자인 왕을 위시하여 치소지에 살았던 유력층과 일반 주민 및 멸망 후의 주민으로 판단된다. 고령 주산성의 서남쪽 주능선과 거기서 파생된 치소지 방향 및 그 뒤쪽으로 파생된 여러 능선과 사면에 봉토분 700여 기가 있고, 일대에는 약 1만여 기의 소형 석곽묘[돌덧널무덤]가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주산의 서남쪽 산등성이와 산록을 중심으로 고아리 고분군 뒷산의 정상부까지 분포한다. 지산리에 있는 고분군은 지형상 국도를 기준으로 북쪽 고분군과 남쪽 고분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쪽 고분군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범위도 더 넓을 뿐 아니라 봉토분과 소형 석곽묘의 분포 밀도가 훨씬 더 높다. 한편, 시기적으로 늦은 횡구·횡혈식 석실분은 전체 분포 범위 중에서 주로 능선의 말단부나 하위 사면에 분포하며 일부는 주위에 다른 고분이 없이 단독으로 분포한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연구 자료 확보와 복원 정비를 전제한 기획 조사, 각종 시설을 위한 긴급 조사로 이루어졌다. 2009년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고분은 모두 443기이며, 그중 중·대형 봉토분이 20기이다. 하나의 봉분 안에 추가로 설치한 것과 순장곽 및 배장곽을 포함하면 전체 매장 구조물의 수는 모두 530여 매장 공간 시설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두 11기가 발굴되었다. 1915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가 [구]갑호분·[구]을호분·[구]병호분을,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갑호분·을호분·병호분을 조사하였다. 1918년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구]1호분·[구]2호분·[구]3호분을 조사하였다. 1920년 야쓰이가 절상천정총(折上天井塚)을 조사하였다. 1938년 사이토 다다시[齊藤忠]·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금림왕릉(錦林王陵)으로 구전된 최대 고분인 지산동 47호분을 조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분들은 지산동 47호분의 위치만 알 수 있고, 나머지 고분은 발굴 자료만 전할 뿐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방 후에는 모두 434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1963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의 내부 구조를 실측 조사한 다음, 1984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실측 조사와 봉토 표면 조사를 하였다. 1964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고아2리 고분을 발굴 조사하였다. 1977년과 1978년 대형 봉토분 2기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제44호분을 조사하였고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제45호분을 조사하였다. 이 두 고분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순장한 고분임이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78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서 제32~제35호분 및 주변 돌덧널무덤 군(群)을 발굴 조사하였다. 1994년과 1995년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 대가야왕릉전시관 대지의 제30호분과 주위의 269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00년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서 대가야박물관 대지의 소형 돌덧널무덤 116기를 발굴 조사하였고, 2002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덕곡재 도로변의 돌덧널무덤 12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07년과 2008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서 대형 봉토분인 제73호분·제74호분과 중형 봉토분인 제74호분 및 주변 돌덧널무덤과 횡구식 석실[앞트기식 돌방] 등 모두 12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형태]

고령 지산동 고분의 매장 주체부는 할석으로 축조한 세장방형 수혈식 석실[구덩식 돌방]과 석곽이고, 이전의 목곽묘[덧널무덤]가 마지막 단계에서 도입되었다. 중·대형분의 대다수는 석실 옆에 부장곽 및 순장곽이 설치되었다. 부장곽은 석실과 평면 T자 형태로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11자 형태로 나란하게 배치된 변화를 보인다.

순장곽은 대체로 고분의 규모가 클수록 많이 지닌 등차적 현상을 보인다. 순장이 사라지게 된 6세기 전반 무렵이 되면 배장곽(倍葬槨)이 크게 유행한다. 그리고 6세기 중엽에 가까워지면 백제 지역의 횡구식 석실분[앞트기식 돌방무덤]과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소형분은 할석 또는 판석을 세워 벽체를 축조한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가 주류이며, 석곽 중에는 양 단벽의 한쪽에 칸막이를 세워 부장 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내부의 석관을 두면서 외부에 석곽을 축조하였다.

봉토분에는 호석을 갖추었는데, 형태는 약한 타원형을 이룬다. 축조 방식에는 수평식 성토 방식이 기본이며, 구획성토(區劃盛土)와 흙둑기법[土堤技法] 및 흙주머니쌓기[土囊築造]가 확인되기도 한다. 봉토분의 위치는 대개 5세기 전반부터 낮은 지형에서 시작하여 6세기 전반까지 높은 쪽으로 변한다. 그 뒤에 새로운 앞트기식 돌방과 횡혈식 석실[굴식 돌방]이 도입되면서 다시 낮은 쪽에 축조하는 추이를 보인다.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절상천전총은 평면 방형과 합장형 천장으로 이루어진 현실(玄室)[널방]과 긴 연도(羨道)[널길]가 달린 굴식 돌방무덤이다. 그 밖에 횡구식 석실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방형 또는 장방형 현실과 짧은 묘도를 갖추었다.

[출토유물]

출토된 유물은 매우 다양하다. 장신구는 금동관, 금동관식, 철제 관식, 금·금동·은·동제 귀걸이, 구슬목걸이, 팔찌, 휴대용 숫돌 등이다. 무장구(武裝具)는 판갑옷, 투구·마갑 등이며, 무기류는 고리긴칼 등의 긴칼과 검·소도·도자·창·화살통 장식 및 화살·유자이기(有刺利器)·도끼 등이다. 생활용구는 방추·야광 패제 국자·청동합 등이며, 마구는 안장·등자·재갈·행엽·운주·십금구[띠 연결구]·교구·각종 말띠 장식 등이다. 그 밖에 관 또는 곽에 사용한 꺾쇠 및 쇠못이 있다.

토기는 긴목항아리·중경호(中頸壺)·짧은목항아리·대호(大壺)·유대호(有臺壺)·파수부호(把手附壺)·유대파수부호(有臺把手附壺)·유공소호(有孔小壺)·각종 그릇받침류[器臺類]·굽다리접시·뚜껑접시·대부완(臺附碗)·뚜껑 등이며, 그중에는 닭뼈·누치[잉어과]뼈·바다 고둥 등의 식용품이 들어 있다.

[현황]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의 역사를 연구하고 문물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핵심 고분군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면적은 814,816㎡이다. 발굴 고분 중 대가야왕릉전시관 대지에 편입되거나 도로를 확장하면서 포함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복원되어 잔디가 입혀진 상태이다. 중·대형분은 옆에 탐방로가 있으며, 그 사이에 발굴 내용의 개요와 고분 번호가 새겨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제44호분의 경우는 대가야박물관의 서쪽에 건설된 원형 전시관 안에 발굴 상태의 실물 크기로 복원되어 있어 휴관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쉽게 관람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고분 문화의 실체는 물론 삼국시대의 고분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 문헌 기록으로만 알 수 있었던 순장이 가장 먼저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대가야 특유의 순장곽과 대규모 순장, 그리고 고분 내 다양한 순장처에 관한 내용이 밝혀졌다. 또한 봉분의 축조 방식에 고대 토목 기술의 적용에 관하여 가장 상세하게 밝혀져 고대의 기술사 부문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밝혀진 대가야 문물은 문화권 문제와 교류 등 고대사 복원에도 매우 중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성 송학동고분군]

[기획- 세계유산 등재 가야고분군] (4) 고성 송학동고분군 :: 경남신문 (knnews.co.kr)

가야 연맹 유력한 해상 세력 소가야 왕·지배층 무덤

  • 기사입력 : 2023-09-25 21:03:10
  •  
  • 무기산 구릉 주변 고분군 7기 위치
    숫자 적지만 군집 조성 특성 보여
  • 일제시대 발굴조사 명목 파헤쳐
    대부분 도굴돼 출토 유물 많지 않아
  • 봉토 축조 뒤 상부 굴착 석곽 조성
    해양 교역 창구 소가야 위상 과시

https://youtu.be/UI9sH76PFFo

  •  
  •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5세기부터 가야 연맹의 유력한 해상 세력으로 떠오른 소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성읍 무기산서 뻗어나간 구릉 주변에 위치한 고성 송학동고분군./고성군/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의 중심 고분군으로 이 지역에서 북쪽으로 300m 거리에 기원리 무덤들이 있고, 동쪽으로 300∼400m 거리에 송학동 조개더미가 있어 삼국시대 소가야국의 자리를 나타내주고 있다.1호 무덤은 앞이 네모나고 뒤가 둥근 무덤인 전방후원형 무덤으로 보이기도 하나, 발굴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무덤방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7기의 무덤은 1호 무덤인 무기산 무덤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1호 무덤을 보호하는 딸린무덤(배총)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호 무덤은 위치와 무덤의 규모 등을 생각했을 때 이 지방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며,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400년을 중심으로 앞뒤 50년의 범위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소가야복원사업의 하나로 진행된 2021년 7호분의 발굴조사에서는 하부구조 축조에 석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성이 다른 토괴를 접착해 구획을 만드는 등 진보된 토목 공법으로 고분을 축조한 것을 확인했다.

    7호분에서 발굴된 토기와 파편들./고성군/

    7호분에서 발굴된 토기와 파편들./고성군/
    고분들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발굴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쳐 대부분 도굴돼 출토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소가야식 토기와 마구 등 교역품으로 쓰였을 유물이 다양하게 발견됐으며, 송학동고분군 동북쪽에 자리 잡은 동외동 조개더미에서는 널무덤(토광묘)·독무덤(옹관묘)·돌널무덤(석관묘) 등의 유적과 청동 투겁창(청동광모)·청동 칼자루 끝 장식(검파두식)·거울조각·불탄쌀·회색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이 일환으로 고성 송학동고분군 14호분 시굴 조사 및 비지정문화재인 15·16호분 시굴 조사를 실시했으며, 조사 결과 문화재 지정구역의 확대 등 소가야 유적의 종합정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김성호 기자 ksh@knnews.co.kr
  • 이상근 고성군수는 “고성 송학동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되기까지는 고성군민 모두가 하나가 돼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며 “소가야 유적의 종합정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해 세계인들이 찾는 고성으로 한 발 더 나아가는 데 차질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고성군은 2020년 9월 고성 송학동고분군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현재 문화재청 승인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종합정비계획은 세계유산 등재 후 방문객을 대비하고 유산을 보존·관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수립됐다.
  • 학계에서는 고성 동외동 조개더미와 더불어 지역 내 중요한 유적으로 꼽는다. 특히 5~6세기 후기 백제와 가야, 일본 열도를 잇는 해양 교역의 창구였던 소가야의 위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평가다.
  •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다른 가야 고분군들과는 달리 선봉토 후매장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먼저 봉토를 축조한 뒤 상부를 굴착해 석곽 혹은 석실을 조성하는 분구묘 구조다.
  • 전체적인 숫자는 적은 편이나, 무덤을 군집해서 조성해 온 가야 연맹의 특성을 보여준다.
  • 고성읍 무기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구릉 주변에 있는 7기의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 1호 무덤이 점차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머지 6기의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계층분화 보여주는 비화가야 무덤 < 창녕 < 지역 < 기사본문 - 경남도민일보 (idomin.com)

  •  기자명이일균 기자
  • 입력 2023.09.19
5∼6세기 비화가야 유적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창녕박물관 근처 산재, 순장 '송현이' 많이 알려져

이번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는 창녕군의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포함됐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의 하나였던 창녕지역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발굴 초기 신라 유적이냐 가야 유적이냐 논란이 있었지만, 무덤 전체 형태와 부장품을 통해 신라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분군은 창녕분지의 배후 산지에서 서쪽 평야를 향해 뻗은 구릉지에 조성됐다. 모두 115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며, 봉토분이 분포하지 않는 지대에도 지하에 많은 수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전경 /창녕군

◇순장 소녀 '송현이'로 상징 = 또 다른 특징도 있다. 5세기에 축조된 고분은 구릉지 능선을 따라 위치하고, 조금 늦게 6세기에 축조된 고분이 구릉지의 동쪽 사면으로 위치한다.

가야 멸망 이후 비화가야의 창녕분지가 신라의 주요 거점으로 변화하면서, 고분군 내에 7세기 후반까지 신라 고분이 추가로 축조되기도 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발굴은 20세기 초 대규모로 이뤄졌다. 그 규모와 가치를 인정한 일제는 1939년 국가유적에 해당하는 '고적(현재의 사적 개념)'으로 지정했다. 당시에는 고분군 분포와 행정구역을 경계로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으로 각각 지정됐다.

해방 이후 정부는 1963년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을 '사적'으로 전환·지정했다. 이후 200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두 고분군의 연관성이 밝혀졌고, 2011년부터 현재 명칭인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으로 통합해 재지정됐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위치를 쉽게 이해하려면 창녕박물관을 기준으로 잡는 것이 좋다. 특히 창녕박물관 맞은편 고분군 중 가장 큰 7호분 주위에는 중소형 고분이 위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가야 지배층의 계층분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송현이'를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창녕박물관을 방문하는 모든 관람객이 비화가야의 16세 소녀 '송현이'를 만난다. 송현동 15호분에는 매장 당사자 외에 4구의 인골이 함께 순장됐는데 그중 가장 보존이 잘된 인골을 복원한 결과 송현이가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시신을 안치하는 석곽이 가늘고 긴 형태지만, 매장부의 한쪽 끝에 입구부가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의 가야식 석곽묘가 확인된다. 입구부는 장례 시 피장자의 관을 이동하기 위한 시설로, 창녕박물관 뒤쪽 3호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창녕박물관 내 전시돼 있는 순장 유골 복원 소녀 '송현이'와 발굴 당시 유적들의 모습 /창녕군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유네스코위원회 현장에 참석한 성낙인 창녕군수와 관계자들이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촬영을 했다. /창녕군

◇창녕군의 세계유산 활용 계획 = 창녕군은 이번 세계유산 등재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원상태로 보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창녕군은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이후 찾아올 관광객을 위해 다양한 활용사업 공모를 준비 중이다. 또, 고분군 야간경관 조성과 세계유산 방문자센터 건립 등을 준비하고 있다.

성낙인 창녕군수는 "앞으로 군은 우리 고분군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용사업을 활발히 진행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창녕군에는 세계유산이 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우포늪, 국보 진흥왕 척경비와 술정리 동 삼층석탑 등 112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영산줄다리기가 포함됐다. 군은 또, 우포늪과 화왕산지역을 핵심구역으로 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을 2020년부터 추진 중이고, 2024년 지정 목표다.

/이일균 기자 

 

 

[합천 옥전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오마이뉴스 김종신 기자]

 

  합천 옥전고분군 여기에서는 시간이 머문다. 천 년의 역사가 여기 다 모였다. 숨이 멎을 듯 말을 잃게 한다.
ⓒ 김종신
순간 내가 연어가 된 기분이다. 경남 합천 쌍책면에 가면 연어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1000년 전 시간 속으로 간다. 11월 27일, 고대왕국 다라국으로 찾아갔다.
 
  합천 옥전고분군 나무에 벌레 한 마리가 꽂혀 있다. 어느 누구의 겨울에 일용할 양식일까.
ⓒ 김종신
황강교를 건너 만나는 작은 회전로에도 지배자의 상징과도 같은 용봉 문양 고리자루 큰 칼(龍鳳文環頭大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동네는 온통 가야 시대의 한 나라였던 다락국의 생활상이 담긴 벽화로 순간 가야시대로 온 듯 착각하게 한다. 다라국 당시의 나루터와 저잣거리, 마을을 지키는 무사의 모습 등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근처 합천 박물관에 차를 세웠다. 내가 찾은 11월 27일은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문을 닫았다(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은 정기휴일). 그런데도 찾은 이유는 가야인들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만난 목련 겨울눈이 꽃필 봄을 기다리듯 무덤은 우리에게 천 년 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권한다.
ⓒ 김종신
주차장에서 나와 박물관 쪽으로 향하다 먼저 만난 조형물이 '마음에 정원'이다. 한때는 이곳은 다라국의 신성한 정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박물관 정면에 용봉문양 고리자루 큰 칼(龍鳳文環頭大刀) 분수대가 반긴다.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가 색다르다.
 
  합천 옥전고분군
ⓒ 김종신
마치 내가 용봉문양 고리자루 큰 칼을 찬 듯 당당하게 걸어 올라가는 데 사라, 가라, 아라 등과 같은 순우리말 나라이름인 '다라' 캐릭터가 어서오라고 인사를 건넨다. 옆에는 옛날 구슬밭이라 불리던 곳을 한자로 바꾼 옥전 고분군의 특징을 드러내는 '구슬이' 캐릭터 조형물이 웃는다.
 
  황강 변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옥전고분군은 복원된 고총고분(高塚古墳) 28기를 포함, 고분의 총수는 약 1,000여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 김종신
박물관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자 언덕 위 다라국의 무덤들이 봉긋봉긋 모습을 드러낸다. 급한 마음에 바삐 걸음을 옮기려는데 '다락국의 뜰'이란 표지판이 걸음을 붙잡는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한순간에 가려한 성급함이 후회스럽다. 숨을 골랐다.

삼가면 도로 확장 공사에서 발견한 삼가 고분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봉분 안에 돌덧널무덤이 서로 잇닿아 만들어졌거나 겹쳐서 만들어진 삼국시대 대형 봉토분으로 토기류와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합천 지역 내 또다른 가야 세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바라본 쌍책면 일대
ⓒ 김종신
박물관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빽빽하게 채운 나무들이 그런 나를 다시금 붙잡는다. 나무 가지에 벌레 한 마리가 꽂혀 있다. 일용할 양식으로 잡은 벌레를 저장한 것인지 모르겠다.
 
  합천박물관 주위 산책로
ⓒ 김종신
'가야는 김해의 옛 국명인 '가락'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가락의 어원으로는 '개간한 평야'라는 뜻의 남방 잠어 kala유래설, 갓나라 유래설, 가람(江)유래설, '韓의 나라'유래설 등이 있는데 어원적으로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셈이다. 지금까지 국명(혹은 지역명)으로 사용되어 온 가야(加耶)는 흔히 사용되고 있는 '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당대의 국명은 아니라 중국 역사서에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는 '가라(加羅)'라는 명칭이 가야 당대에 사용된 것(합천박물관 홈페이지)'으로 보고 있다.
 
   합천고분군 뒤편에 복원된 삼가고분
ⓒ 김종신
언덕 위에 올랐다. 천 년 전 시간 앞에 섰다. 황강 변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옥전고분군은 복원된 고총고분(高塚古墳) 28기를 포함, 고분의 총수는 약 1,000여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여기 유적은 1985년 겨울부터 1992년 봄까지 5차에 걸쳐 경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구분은 모두 146기인데,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의 갑옷과 투구, 각종 무기, 말갖춤, 귀걸이 등 무려 2,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합천박물관 뒤편 옥전고분군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다라국의 뜰’
ⓒ 김종신
'여기 옥전고분군의 주인공은 『양직공도(梁職貢)』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하는 다라국의 지배자였을 것이다. 고분군에서는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봉화문 고리자루 큰 칼(龍鳳文環頭大刀)과 금동제의 말안장, 금 귀걸이가 나왔다. 아라비아 계통의 로만그라스를 통해 당시 활발했던 대외 무역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연꽃무늬 목관장식을 통해 불교문화 유입도 확인할 수 있다.(합천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다라국 최전성기 왕의 무덤인 옥전M3호에 이르자 머리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두 날개를 펼쳐 푸른 하늘을 맴돈다.

 

  합천박물관 용봉문양 고리자루 큰 칼(龍鳳文環頭大刀) 분수대
ⓒ 김종신
무덤은 그대로 있지만, 사람만 바뀌었다. 목련 겨울눈이 꽃필 봄을 기다리듯 무덤은 우리에게 천 년 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권한다.
 
  합천박물관
ⓒ 김종신
여기에서는 시간이 머문다. 천 년의 역사가 여기 다 모였다. 숨이 멎을 듯 말을 잃게 한다. 우리가 알던, 잊고 있던 가야···. 가야는 아직 건재하다. 신라에 멸망했지만 지금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옥전고분군에 한 걸음을 더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천 년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은 오늘 우리에게 평안한 안식처를 안겨준다. 겨울 문턱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가야를 찾았다.
 
  합천 옥전 M3호분(합천박물관 제공)
ⓒ 합천박물관
무덤 사이를 거닐면서 천 년 전 당시를 떠올리는 나는 걸음을 쉽사리 옮길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고운 햇살은 무덤 하나하나를 무대의 주인공인 양 비춘다.

도움 글 : 합천박물관(http://mus.hc.go.kr/)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서울=연합뉴스) 한국의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고분군'(Gaya Tumuli)은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다.

17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과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가야와 관련한 고분군이 780여 곳에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은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2023.9.17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1700년 전 가야인이 찬 영롱한 유리 목걸이..'철의 왕국' 아닌 '유리의 왕국'이었다 (daum.net)

이기환 선임기자입력 2020. 9. 7. 09:34수정 2020. 9. 7. 09:37
[경향신문]
김해 양동리 270호분에서 확인된 1800년전 제작된 수정목걸이. 이 목걸이’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 20점과 주판옥 120점, 곡옥(曲玉) 6점 등 총 146점의 수정으로 구성됐다. 전체 약 142.6cm의 길이에, 육각다면체형, 주판알형, 곡옥형(曲玉形) 등 여러 형태로 수정을 다듬어 연결했다. |문화재청 제공


“(가야인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아 혹은 옷을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삼국지> ‘위서·동이전’)

가야를 흔히 ‘철의 왕국’으로 알로 있지만 실은 ‘유리의 왕국’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가야 시대를 대표하는 두 고분인 김해 대성동 및 양동리 고분에서 출토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등 목걸이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7일 밝혔다. 지정 예고된 목걸이 3건은 ‘철의 왕국’으로만 알려진 가야가 다양한 유리 제품 가공 능력도 뛰어났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유물이다.

김해 대성동 76호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수정제 구슬 10점, 마노제(瑪瑙製·수정 같은 석영광물, 말의 뇌수 즉 머릿골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구슬 77점, 각종 유리제 구슬 2,386점 등 총 2,473점으로 이루어졌다. 평균 지름이 6~7mm 정도로 아주 작은 형태로 다듬었다. |문화재청 제공


출토 정황이 명확하고 보존상태가 좋으며 형태도 완전해서 보물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동안의 발굴결과 가야인들은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 곡옥이나 둥근 옥을 만들어 목걸이로 착용했다. 구슬의 재질도 금, 은, 유리, 금박 입힌 유리, 수정, 호박, 비취 등으로 다양했다. 형태도 판옥(板屋·편평하게 가공한 옥제품), 곡옥, 대롱옥(대롱처럼 기다란 형태의 옥제품), 다면옥(多面玉, 여러 면을 깎은 옥제품) 등 다채롭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2011년 발굴조사 중 목곽묘에서 발견됐다. 6가야 중 하나인 금관가야는 서기 전후~532년까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존속한 전기 가야연명채의 맹주국으로 알려져왔다. 가락국이라고도 했다. 목걸이가 출토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은 3~5세기 무렵 금관가야 시대 수장층(首長層)의 공동묘지이다.

양동리 322호에서 확인된 목걸이. 수정제 곡옥 147점, 대형 수정제 다면옥 2점, 마노 환옥 6점, 파란 유리 환옥 418점, 유리 곡옥 1점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 총 574점으로 구성됐다.|문화재청 제공


목걸이는 서로 길이가 다른 3줄로 구성되었다. 수정제 구슬 10점, 마노제(瑪瑙製·수정 같은 석영광물, 말의 뇌수 즉 머릿골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구슬 77점, 각종 유리제 구슬 2,386점 등 총 2,473점으로 이루어졌다. 평균 지름이 6~7mm 정도로 아주 작은 형태로 다듬었다. 맑고 투명한 수정과 주황색 마노, 파란색 유리 등 다양한 재질과 색감을 조화롭게 구성한 것이 특색이다. 유리를 곡옥(曲玉)이나 다면체 형태로 섬세하게 가공하고 세밀하게 구멍을 뚫어 연결하거나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등 조형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이 목걸이는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에서 보이는 굽은 옥.


또 다른 목걸이인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는 1992년 동의대 박물관의 제2차 발굴 조사 중 토광목곽묘에서 발굴됐다. 양동리 고분 270호는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으나 고배(高杯· 높다리 그릇)를 비롯해 토기류나 철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고분으로 꼽힌다.

이 목걸이’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 20점과 주판옥 120점, 곡옥(曲玉) 6점 등 총 146점의 수정으로 구성됐다. 전체 약 142.6cm의 길이에, 육각다면체형, 주판알형, 곡옥형(曲玉形) 등 여러 형태로 수정을 다듬어 연결했다. 제작 시기는 고분의 형식과 부장품 등으로 보아 3세기로 추정된다. 영롱하고 맑은 투명 무색과 황색, 갈색 등이 약간 섞인 은은한 색의 수정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었다. 형태와 크기가 다른 수정을 조화롭게 배치해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다. 그동안에는 목걸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정(水晶)은 한동안 외국산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계의 연구를 통해 경상남도 양산(梁山) 등 국내에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수정목걸이는 3세기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지배계층의 장신구다. 3~4세기 가야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목걸이처럼 100여점 이상의 수정으로만 구성된 사례는 드물다. 가공 기법 또한 요즘의 세공기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양동리 322호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의 곡옥(파란색), 마노구슬(주황색) 세부. |문화재청 제공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는 1994년 동의대 박물관이 목곽묘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함께 발굴된 유물 중 중국 한나라 시대 청동 세발 솥(靑銅鼎·청동정) 등을 통해 3세기 경 축조된 금관가야 시대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목걸이는 수정제 곡옥 147점, 대형 수정제 다면옥 2점, 마노 환옥 6점, 파란 유리 환옥 418점, 유리 곡옥 1점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 총 574점으로 구성됐다.

특히 경도 7의 단단한 수정(水晶)을 다면체로 가공하거나 많은 수량의 곡옥 형태로 섬세하게 다듬은 제작 방법은 가야인들의 기술 면모를 보여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 대까지 유행한 가야의 장신구는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로 곱은옥이나 둥근옥(球玉)을 만든 목걸이였다.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목걸이의 수정다면옥. |문화제청 제공


김해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이러한 가야 구슬 목걸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투명한 수정을 육각형으로 다듬고 거기에 붉은색 마노와 푸른색의 유리옥을 더하여 영롱한 빛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가야 목걸이 3건은 각각 개별 유적에서 일괄로 발견됐고, 금관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중 많은 수량의 구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이다. 또 가야인들이 신분 위상과 지배 계층의 권위를 장신구를 통해 드러내었음을 실증적으로 말해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또한 금과 은 제품을 주로 다룬 신라, 백제인들과 달리 수정이나 유리구슬을 선호한 가야인들의 생활상과 연관이 깊은 작품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가야 금속공예 정수 보여주는 금귀걸이들 보물 된다

송고시간 | 2019-10-23 10:12

문화재청, 가야 유물 5건 보물 지정예고…칼·말갑옷도 포함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91023056000005?input=1179m

 

가야 금속공예 정수 보여주는 금귀걸이들 보물 된다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가야 금속공예 대표작으로 꼽히는 '합천 옥전 28호분 금귀걸이'를 비롯해 1980∼1990년대 출토된 가야 유...

www.yna.co.kr

 

 

국보 ‘가야금관’ 왜 리움에 있을까

등록 :2016-01-28 20:30수정 :2016-01-29 10:35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28415.html?dable=30.1.3 

 

국보 ‘가야금관’ 왜 리움에 있을까

이병철-이건희 부자 대이어 ‘국보급’ 문화재 사모은 뒷얘기 대표작 20점 사진 곁들여 해설

www.hani.co.kr

 

 

 

가야시대 집모양 토기 진해서 출토

입력 2014.01.07. 04:32 수정 2014.01.07. 04:32 댓글 3

삼국시대 20점뿐인 희귀유물

http://v.media.daum.net/v/20140107043236847

 

가야시대 집모양 토기 진해서 출토

[서울신문]4세기 무렵 가야의 가옥 구조를 띤 가형토기(家形土器)가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삼국시대의 집모양을 지닌 토기는 국내에서 20여점만 보고된 희귀 유물이다.문화

news.v.daum.net

 

 

 

 

도재기의 천년향기

(15)가야토기- ‘잊혀진 왕국’ 가야? 개성 만점 토기를 보면 잊혀지지 않을걸!

경향신문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입력 : 2018.08.31 17:06:00 수정 : 2018.08.31 17:08: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311706005&code=960100 

 

[도재기의 천년향기](15)가야토기- ‘잊혀진 왕국’ 가야? 개성 만점 토기를 보면 잊혀지지 않을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의해 망한 뒤 기록·유물이 적어 역사적으로 홀대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

www.khan.co.kr

 

 

 

김해서 국내최초 로만글라스 출토

김상우 입력 2013.03.08. 11:05 수정 2013.03.08. 11:05 댓글 2

http://v.media.daum.net/v/20130308110508084

 

김해서 국내최초 로만글라스 출토

【김해=뉴시스】김상우 기자 = 경남 김해시는 가야시대 왕들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국내 최초 340년 전후 로만글라스(로마양식유리용기)가 출토됐다고 8일 밝혔다. (사진=김해시 제공)

news.v.daum.net

 

 

금관가야 왕급무덤서 국내 最古 '로만 글라스' 출토

송고시간2013-03-08 11:25

 금관가야 왕급무덤서 국내 最古 '로만 글라스' 출토 | 연합뉴스 (yna.co.kr)

 

금관가야 왕급무덤서 국내 最古 '로만 글라스' 출토 | 연합뉴스

(김해=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금관가야 왕급 무덤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양식 유리용기인 '로만 글라스'가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

www.yna.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