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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야(가라) 고고학 (1) 김해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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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야(가라) 고고학 (1) 김해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

대야발 2024. 5. 2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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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대성동 고분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

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신경철 부산대 교수가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 29호 고분을 복원한 노출전시관에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해=서영수 기자 kuki@donga.com“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김해 패총과 고인돌, 대형 옹관묘가 자리 잡고 있어 신경철이 금관가야 왕릉 후보지 중 하나로 올려놓고 있었다. 앞선 실패로 한동안 실의에 빠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스무 번 넘게 대성동 주변을 드나들면서 토기편들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990년 8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1호 고분 발굴 직후 신경철 교수(오른쪽)가 현장에서 출토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신경철 교수 제공

 



첫 발굴 고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사립대의 열악한 재정 여건상 또 헛물을 켠다면 발굴은 곧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신경철은 1990년 6월 대성동 구릉에서 가장 높고 입지가 좋은 동남쪽 능선 정상부에 삽을 꽂았다.

 

 

지표로부터 채 1m도 파지 않은 곳에서 토기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도굴 갱이 발견돼 잠시 절망했지만, 곧 3m 깊이의 흙구덩이 밑에서 통형동기(筒形銅器·창자루 끝에 꽂는 의례용 청동기)가 나왔다.

 

 

일본 고훈시대 수장급 고분에서만 1, 2점씩 들어 있는 통형동기가 8점이나 나온 데다 함께 출토된 금동 마구, 철제 무기, 그릇받침(器臺·기대)의 제작 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신경철은 전율했다. 게다가 목곽의 규모는 길이 6m, 폭 2.3m에 달했다. 그는 이곳이 근 20년을 찾아 헤맨 금관가야 왕릉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신경철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고고학자로 통한다. 그는 발굴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부여에서 건너왔다는 파격 주장을 1992년 논문에서 처음 발표했다.

 

 

1호분 발굴 이후 4개월 만에 찾아낸 29호분(서기 3세기 말 조성)에서 중국 네이멍구 고원지역의 이름을 딴 ‘오르도스형 청동솥(銅복·동복)’과 도질토기(陶質土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 토기), 순장 등 북방계 유목민족의 문화적 속성이 잇달아 발견된 것.



“오르도스형 동복은 중국 동북지방부터 중앙아시아, 이란까지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29호분 동복을 세부적으로 관찰하면 귀의 단면이 볼록한데 이것은 주로 중국 지린(吉林) 성 북부나 헤이룽장(黑龍江) 성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형이죠. 바로 부여의 근거지입니다.”



 

 

 

■ 부산 복천동 고분

 

 

빼곡히 밀집된 주택가 한복판 풀 떼를 입은 거대한 구릉이 나타났다. 거북이 등처럼 야트막한 언덕들 사이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정상부에 있는 대형 무덤은 길이가 7, 8m에 이른다. 21일 답사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과 더불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묻힌 공동묘역으로 추정된다.

 

 

1980년 10월∼1981년 2월 이곳을 발굴한 김두철 부산대 교수(59)는 “6·25전쟁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던 동네에 금관가야의 거대한 고분이 잠들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산 복천동 53호 고분(1989년 발굴)을 보존한 야외전시관에서 김두철 부산대 교수가 내부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무덤 바닥 한가운데 일렬로 놓인 덩이쇠(철정)들이 보인다. 부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1600년 묵은 ‘처녀분’ 열리다

“철도레일 같은 게 바닥에 쭉 깔려 있다!”


1980년 11월 말 야심한 밤 복천동 22호 고분 발굴 현장. 무덤의 뚜껑돌(개석·蓋石)들 사이에 박힌 돌멩이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 뒤 손전등을 비춰 보던 김두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행한 신경철 당시 부산대 조교(현 부산대 명예교수)와 조영제 부산대박물관 학예연구원(현 경상대 교수)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멍 아래로 가야의 대표적 교역품이자 화폐였던 덩이쇠(철정·鐵鋌)가 마치 레일처럼 무덤 바닥에 줄지어 깔려 있었다. 굽다리 접시(고배·高杯)와 그릇받침(기대·器臺) 등 각종 제의용 토기들도 잔뜩 쌓여 있었다.

 



복천동 22호분과 11호분은 1600년 동안 한 번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이른바 ‘처녀분’임이 분명했다.

 

 

 

○ 두근두근 ‘덮개돌’ 들어낸 순간

1980년 복천동 고분 발굴현장에서 작업자들이 3t 무게의 무덤 덮개돌을 도르래로 들어올리고 있다. 부산대박물관 제공

 

 

 

본격적인 유물 출토에 앞서 발굴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덤을 덮고 있는 거대한 덮개돌 4개를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들어내야 했다. 너비 1.4m, 길이 2.7m의 덮개돌 한 개는 무게가 3t에 달했지만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현장에 밝은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에게 SOS를 쳤다. 그의 소개로 경주에서 활동하는 석탑 드잡이공들을 불러들였다. 드잡이공은 인력용 도르래를 이용해 석탑을 해체, 조립하는 이들이다.

 



복천동 11호분 안에서 발견된 ‘금동관’.

 

 

 

 

 

드디어 1980년 12월 4일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 고고학계 원로들과 언론사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뚜껑돌을 조금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거대한 뚜껑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래 있는 고대 가야 유물들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조영제의 회고. “하루 종일 뚜껑돌 4개를 서서히 들어내는 동안 얼마나 긴장했던지…. 불상사라도 생기면 우리 발굴팀은 ‘민족의 죄인’이 되는 거였어요.

 

 

다행히 드잡이공들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뚜껑돌이 제거된 11호분 안에는 치아가 남아 있는 인골과 더불어 가야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11호분 바로 옆 부곽(10호분)에서는 판갑(板甲·상반신을 보호하는 쇠 갑옷)과 말투구(마주·馬胄)가 출토됐다. 말투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 임나일본부설 역사왜곡 극복



복천동 11호 고분 옆 부곽(10호분)에서 출토된 ‘말투구(마주)’.

 

 

 

 

사람이 쓰는 판갑과 더불어 말투구가 함께 발견된 건 의미가 적지 않다. 왜가 4세기 가야를 점령했다는 일본 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깨지는 근거가 됐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전 일본 고분에선 갑옷만 발견될 뿐 말갖춤(마구·馬具)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보병만 있었고 기병은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4세기 말∼5세기 초 복천동 고분에서는 말투구와 마갑 등 각종 말갖춤이 출토됐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왜가 보병만으로 가야의 기병대를 제압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영제는 “복천동 고분 발굴은 가야를 둘러싼 역사왜곡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터전을 잡았던 부산 동래 복천동 구릉. 그러나 이곳은 자연구릉이 아니라 AD 2~AD 7세기 사이 500년간이나 조성된 옛 선인들의 공동묘지였다. <복천박물관 제공>

 

 

 

 

 

복천동 고분에서 노출된 말머리 모양의 뿔잔. 보물로 지정됐다.

 

 

 

 

 

1969년 확인된 금동관.

 

 

 

 

 

 

주술적 의미로 나무에 달아 흔들었던 칠두령.

 

 

 

 

 

 

기병전투때 말의 얼굴을 보호하는 데 쓰인 실전용 말머리가리개(마면주).

 

 

 

 

 

 

전사의 머리를 보호한 투구.

 

 

 

 

 

 

4세기대 제작된 판갑. 복천동 고분의 상징 유물이다.

 

 

 

 

 

 

 

처녀분인 22호분에서 확인된 철정, 즉 덩이쇠. 금괴와 같은 맥락이다.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소재로 쓰였고, 화폐로 유통되기도 했다. 무덤에 묻을 때는 관의 밑바닥에 깔아놓았는데, 이는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다. 복천박물관 제공

 

 

 

 

 

 
 
 

<자료 출처>

 

 

20년만에 찾은 금관가야 왕릉… “이게 꿈인가” 등골이 오싹|동아일보 (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누가 알았을까, 판자촌 아래 금관가야의 魂이 잠들어 있을줄|동아일보 (donga.com)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0)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上 - 경향신문 (khan.co.kr)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1)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下 - 경향신문 (khan.co.kr)

 

 

 

 

 

<참고자료>

 
 

 

김해시, 구지봉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착수 예정 (daum.net) 2023. 7. 25. 

 

 

가야시대 ‘김해 퇴래리 유적의 현황과 전망’ 학술대회 (daum.net) 2023. 9. 13.

 

 


가야유물 100여점 나온 김해 원지리고분군 현장공개 - 오마이뉴스 (ohmynews.com)2019.01.03

 


김해 대성동고분군 도굴안된 귀족무덤 유물 600여점 출토 (daum.net) 2020. 7. 30. 

 

 

가야시대 독특한 '등고선 평행 배치' 양동리고분군 - 오마이뉴스 (ohmynews.com)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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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서 가야시대 제사유적 원형 상태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등록 2020.05.11 13:57:43

 

 

김해서 가야시대 원형 인골 발굴…가야인 복원 기대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9.11.25

 

금관가야 추정 왕궁지에서 대형 건물터·의례용 유물 나왔다 (daum.net)2017. 11. 21.

 

 

 

대성동 고분이 밝혀줄 가야의 진실은? (daum.net)2012. 10. 17.

 

 

김해 가야 고분에 북방 선비족 유물이? (hani.co.kr)2012.08.12. 

 

 

김해서 가야시대 논 경작층 발견 (daum.net)2017. 12. 5.

 
 
 

 

 

 

 

 

 

가야고분군 문명과 교류의 타임캡슐 _ MBC경남 특집 다큐멘터리

https://youtu.be/auFeUQyZsjI?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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