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 과학전문기자입력 2022. 6. 22. 07:00수정 2022. 6. 22. 11:34

유전자로 복원한 가야인의 얼굴, 현대 한국인과 판박이 [사이언스카페] (daum.net)

 

유전자로 복원한 가야인의 얼굴, 현대 한국인과 판박이 [사이언스카페]

삼국시대 한반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인과 상당히 닮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삼국시대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였던 것이다. 울산과학기술원(UNIT) 바이오메디컬공학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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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한반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인과 상당히 닮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삼국시대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였던 것이다.

울산과학기술원(UNIT) 바이오메디컬공학과의 박종화 교수 연구진은 22일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삼국시대 한반도인의 게놈(유전체)을 최초로 분석한 결과 고대 한국인에는 큰 틀에서 최소 2개의 유전자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게놈 정보를 활용한 몽타주를 예측한 결과 삼국시대 한반도인은 외모 상 현대 한국인과 상당히 닮았던 것으로 추정됐다.

고대 한반도의 두 유전자 그룹 확인

이번 연구는 UNIST 게놈센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서울대학교, 게놈연구재단, 오스트리아 빈대학, ㈜클리노믹스가 공동으로 수행했다.

연구진은 가야에 해당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유하리 패총 두 곳에서 출토돼 박물관에 보관 중인 서기 300~500년 유골을 분석했다. 고대인 22명에서 나온 뼈와 치아 시료 27개에서 유전정보가 담긴 DNA를 추출해 해독했다. 그 중 8명에 해당하는 고품질 게놈 정보를 확인했다.

분석 결과 고대인 8명 중 6명은 오늘날 한국인과 신석기시대(기원전 8000년~기원전 1500년) 한국인, 고훈시대(古墳時代, 서기 3~7세기)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가깝게 나타났다. 반면 2명은 상대적으로 오늘날 일본인과 조몬시대(縄文時代, 기원전 1만년~기원전 300년) 일본인과 가까웠다.

박종화 교수는 “삼국시대 한반도 인구집단의 다양성이 지금보다 더 컸고, 큰 틀에서 최소 2개의 유전자 집단이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게 보면 대륙에서 확장된 유전자 집단과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다가 한반도 남부 섬과 일본에만 남은 유전자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대륙에서 벼농사로 인구가 급증한 집단과 달리 조몬인은 수렵이나 조 농사를 하다가 티벳 고원이나 동남아시아, 한반도 섬지역과 일본에 고립됐다”며 “삼국시대 가야인에도 이런 조몬인의 흔적이 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입력 2018.06.01 23:43 수정 2018.06.20 23:59기자명차태헌 기자  

美 학자 코벨, '일본왕가는 가야인들이 세웠다' < 쟁점기사 < 기사본문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美 학자 코벨, '일본왕가는 가야인들이 세웠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고대한일관계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들은 하나같이일본열도는 우리 땅에서 이주해간 사람들 역사라고 한다미국인 코벨, 북한학자 김석형, 한국 최재석 등이 대표학자다북한은 이미 50년전에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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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학자 코벨, '일본왕가는 가야인들이 세웠다'

 
통일시대를 맞이하여 남북한 역사 간극을 좁히는 것이 숙제다.

고대한일관계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열도는 우리 땅에서 이주해간 사람들 역사라고 한다
미국인 코벨, 북한학자 김석형, 한국 최재석 등이 대표학자다
북한은 이미 50년전에 임나일본부설 극복하다
반면에 국내 강단식민사학계는 여전히 일제치하에서 살다

 

 

 

박병식 역사학자 | 기사입력 2007/12/04 [11:08] 

˝우리 조상 가라족(韓族)이 일본인 조상˝ (breaknews.com)

 

˝우리 조상 가라족(韓族)이 일본인 조상˝

매우유감스러운일이지만,우리민족의상고사(上古史)는,오늘까지도,검은안개에가려진채,오리무중(五里霧中)속에버려져있는딱한형편에놓여있다.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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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제2탄>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실상

 

 
일본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열도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열도(列島)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열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 혈연관계(血緣關係)가 없는 천손(天孫)이다"라는 비과학적(非科學的)인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유전학적(遺傳學的) 증거의 부상(浮上)으로, 그들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주장은, 더 이상 지탱할 근거를 잃고 말았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그네들은 이제, 좋건 싫건,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가라족(韓民族)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게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가라족(韓民族)이라면, 그들이 쓰는 말도 우리말과 같아야 할텐데, 두 나라 사람들의 말은 통역(通譯) 없이는 서로 이해할 수가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일본말은, 백제(百濟) 성왕(聖王)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파견하여, 불전(佛典)을 일본에 전(傳)한 서기552년까지도 우리말과 꼭 같았다. 그렇던 것이, 차차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을 제공(提供)한 것은, 어려운 한자(漢字)로 씌어져 있는 불전(佛典)을 쉽게 읽기 위하여 그들이 창안(創案)한 가다가나(片假名)였다.

왜냐하면, 가다가나(片假名)에는, <ㅓ>·<ㅡ>·<ㅐ> 모음을 표기할 문자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ㅓ>·<ㅡ>·<ㅐ> 모음소리를 표기할 문자가 없는 가다가나(片假名)로 교육받으며 자라난 세대(世代)는, <ㅓ>·<ㅡ>·<ㅐ> 모음으로 구성된 우리말을 발음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오늘날 같이 우리와는 다른 발음으로 말하게 된 게다." 즉 50가지 소리밖에 없는 가다가나(片假名)로 교육받게 된 사람들은, 우리말 가운데서, <ㅓ>·<ㅡ>·<ㅐ> 모음으로 구성된 부분을, 가다가나(片假名)에 있는 다섯 모음<ㅏ>·<ㅣ>·<ㅜ>·<ㅔ>·<ㅗ> 등으로 대체(代替)해서 발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게다.

예컨대, 우리말 <어머(母)>는, 모음 <ㅓ>로 구성 돼 있기 때문에, 그 모음 <ㅓ>를 <ㅏ>소리로 바꿔 놓은 것이 일본말 <아마(母)>다. 이런 현상(現象)이 일어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일본 학자들은, 「나라시대(奈良時代. 서기 720년부터 784년)까지의 일본말에는, 모음이 여덟 있었는데, 그 후부터는 모음이 다섯으로 줄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모음이 셋이나 줄어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다가나(片假名)의 결함(缺陷)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일본말이 더욱 더 우리말과 달라지게 된 것은,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創製)하여 반포(頒布)하신 이후부터다. 왜냐면, 그때부터 우리말 표기에, 예전엔 없었던 <바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다가나(片假名)에는 <바침>으로 쓸 수 있는 문자가 <ん=ㄴ>과 촉음(促音)으로 씌어지는 <つ=쯔>소리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네들은, <바침>으로 끝나는 우리말은, <바침>을 삭제(削除)하거나, 또는 <바침>이 돼 있는 자음을, 가다가나(片假名)에 있는 적당한 모음과 결합시켜서, 아래와 같이 대치(代置)하고 있다.

<바침> 일본말 표기하는 예

*사물이나 현상, 또는, 성질 따위를 추상적(抽象的)으로 이르는 명사(名詞)인   우리말 <것>을, 일본말로는 <こと=고도>라 발음한다. 이 경우에는, <것>에 쓰인 모음 <ㅓ>를 <ㅗ>로 대체(代替)해서, 우리말의 <거> 소리를 <고>로 나타냈다. 그런 다음, 우리말의 <ㅅ 바침>은, 자음 <ㄷ>에다 모음 <ㅗ>를 결합시켜서, <도> 소릴 만들었다. 그 때문에, 단음절(單音節)인 우리말 <것>은, 두 음절인 일본말 <こと=고도>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소리 <념(念)>은 일본말로는 <ねん=넨>이라 발음한다. 이 경우에는, 모음 <ㅓ>소리가 바탕이 돼 있는 <ㅕ> 소리를 표기할 수단이 없는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ㅔ> 소리로 대치해서 <네> 소리를 만든 다음, <ㅁ 바침>은, 그들이 갖고있는 유일한 자음 <ん=ㄴ>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우리말 소리 <념>은, 일본에서는 <ねん=넨>으로 변했다.

 

*우리말 소리 <발호(跋扈)>는 일본말로 <ばっこ=받고>라 발음된다. 우리말 소리 <발>에 씌어진 <ㄹ 바침>은, 일본에서 촉음(促音)으로 씌어지는 <つ=쯔>소리로 대치했다. 우리말 소리 <호>가 <고>로 바뀐 것은, <ㅎ>소리와 <ㄱ> 소리가 서로 바뀌는 자음교체(子音交替) 법칙 때문이다. 예컨대, 한자(漢字) 韓·寒·汗·漢을, 우리는 <한>이라 읽지만, 일본에서는 <간>이라고 발음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전에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그곳을 오늘과 같이 살기 좋은 땅으로 개척한 가라족(韓族)이 일본 사람들의 조상이란 것은, 천황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가라가미(韓神)로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이미 유전학적(遺傳學的) 연구로도 확인(確認)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認定)하지 않으려는, 황국주의(皇國主義)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완고(頑固)한 일본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한일(韓日) 고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현대사 마저 날조하고 왜곡하기를 떡 먹듯이 하며, 일본말의 뿌리가 우리말이라는 사실조차 부정(否定)하고 있다. 그런 탓으로,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죄 없는 일본 국민이다.

왜냐면, 저들의 국어사전이, 「일본말의 뿌리는 한국말이 아니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편찬돼 있기 때문에, 자라나는 일본 아이들은, 죄다 그릇된 지식을 주입(注入)받고 있는 딱한 실정에 놓였다. 그들 때문에, 애꿎은 일본 아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는지, 저들이 현재 쓰고있는 사전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일본말 사전 오류(誤謬)의 예(例)

*우리말 <떠 나부끼다=떠서 나부낀다>. 일본말로는 이것을 <다나비구=たなびく>라 발음하고, 그 뜻을「구름이나 안개가 엷은 층(層)을 이루어, 옆으로 길게 끌리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저들의 말 <다나비구=たなびく>가 우리말 <떠 나부끼다=떠서 나부낀다>로부터 변화된 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말 사전의 주석(註釋)에는, 「<다=た>는 <나비구>에 부쳐진 접두어(接頭語)다」라고 돼 있다. 일본말에서 접두어(接頭語)라 함은, 「독립된 어휘로서는 아무 기능을 갖지 않는 것」이라 한다. <떠 나부끼다=떠서 나부낀다>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떠=浮>다.

그 <떠=浮>는, 모음 <ㅓ>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기할 수단이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모음 <ㅏ>로 교체하고, 우리의 된소리 <떠>를 단순모음(單純母音) <다=た>로 표기해서, <다나비구=たなびく>로 적은 것은 이해(理解)할 만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다=た>가 「아무 기능도 없는 접두어에 지나지 않다」라고 하니, 그러한 주석(註釋)은, 단순한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큰 오류(誤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말 <칠석(七夕)>. 칠석(七夕)은 일본말로 <다나바다=たなばた>라고 한다. 일본어 사전은 이 어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고 주석(註釋)하고있다.
①베틀(織機)
②베를 짜는 여성(織女)
③칠석(七夕)에 나타나는 직녀성(織女星)
④칠석 축제(祝祭). 「원래는<다나=たな(棚板)>를 부친 직기(織機)라는 뜻인데, 이렇게 전용  (轉用)됐다」고 덧 부쳐 설명돼 있다.

칠석(七夕)은, 「견우직녀(牽牛織女)가 일년에 한번 만난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는 칠월칠일(七月七日)의 저녁」이다. 그「칠월칠일(七月七日)의 전녁」을 뜻하는 일본말 <다나바다>가, 일본어 사전(辭典)에 「원래는<다나=たな(棚板)>를 부친 직기(織機)라는 뜻인데, 이렇게 전용 (轉用)됐다」고 설명돼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나라 초등학생들 마저, 배꼽을 잡고 웃을 게 아닌가?

저들이 <다나>라고 발음한 것은, 원래 고구려(高句麗) 때에 씌어지던 수사(數詞) <나나=일곱(七)>이였는데, 자음 <ㄴ>와 <ㄷ>의 소리바뀜 법칙(예: 鐵=가나→가다 地=나→다→따 누더기→두더기)에 따라서, 본래 소리<나나>가 <다나>로 바뀌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나바다>의 <바다>는 원형(原形)이 <밤 때=저녁 때=夕>다. 바침이 없는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바침을 삭제해 버린다. 그리고, 된소리와 모음 <ㅐ>를 표기할 수단이 없는 일본 사람들은, <때>를 <다>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말 <다나바다>는 「七일 밤 때」즉 칠석(七夕)을 이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에미나>

<계집아이>를 뜻하는 사투리 <에미나>는, <어미=어머니>를 <에미>라고도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 원래 꼴은 <어미나>다. 일본어로는 이것을 <오미나=おみな>라고 한다. 모음 <ㅓ>를 표기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ㅗ>로 대치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사전은, <오미나=おみな>의 뜻이 「나이먹은 여자·노녀(老女)·노파(老婆)」라고 가르치고 있다. <계집아이(少女)>를 뜻하는 말이, 졸지에 노파(老婆)가 돼 버렸으니, 이게 될 말인가?

*우리말 <너>.  상대(相對)를 부르는 이인칭(二人稱). 일본어 사전에는 이것이 <나=な>라고 돼 있다. 물론 모음 <ㅓ>를 표기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모음 <ㅏ>로 대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알만하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 사전에 <나=な>는 일인칭(一人稱)이라고도 적혀있는 데 있다. 인간사회의 질서(秩序)는, 자기 스스로와 상대(相對)를 분간하는데서 비롯되는데, 이 세상 어느 곳에, 일인칭(一人稱)과 이인칭(二人稱)이 꼭 같다는 민족이 있겠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오류(誤謬)라 아니 할 수 없는데, 일본 학자들은 그런 모순된 표기가 사전(辭典)에 실려있는 이유에 대하여 한마디 설명도 안 한다.

*우리말 <먼 곳>.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일컫는 낱말 <먼 곳>은, 원래 <멀은>과 <곳=장소>라는 두 낱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멀은 곳>이 그 원형(原形)이다. 그 <멀은 곳>이, 오늘날 <먼 곳>이 된 이유는, <멀은 곳→머른 곳>으로 연음화(連音化)된 다음, <ㄹ>소리가 소실(消失)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ㄹ>소리는, <거닐다>가 <거니다>가 되고, <깔다>가 <까다>가 되는 예에서 보듯이, 자주 소실되는 습성이 있다. 그 <머른 곳>을, 일본말 고어(古語)로 <모로고시=もろこし>라고 한다.

일본어에서는 모음 <ㅓ>와 <ㅡ> 소리를 표기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두 모음을 각각 <ㅗ>로 대체(代替)해서 <모론 곳>으로 만든 다음, <모론>의 바침 <ㄴ>을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의 바침 <ㅅ>에는, 모음 <ㅣ>를 합쳐서, <시> 소리로 발음했기 때문에, 우리말 <머른 곳>이 일본말에서 <모로고시>로 발음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말 사전에는, <모로고시>에 대해서 대략 다음 같은  참으로 엉뚱한 설명이 실려있다.

「<모로고시>는 당(唐)나라를 뜻한다. <모로고시>의 <모로>는 전부·모두를 뜻하는 한자(漢字) <諸>의 훈독(訓讀)이고, <모로고시>의 <고시>는 넘다(越)를 뜻한다. 그 두 낱말이 결합해서 합성(合成)된 <모로고시>는, 백월(百越=많이 넘어가다)와 뜻이 같다. 그런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바다 멀리 넘어간 곳에 있는 당(唐)나라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게 아닐까?」
이러한 억지 논리(論理)가 지금도 당당하게 일본어 사전에 실려있으니, 그런 것으로 수업(授業)받으며 자라나는 일본 아이들이 딱하기만 하다.

* 우리말 <어째?>. <어째?>를 만요-슈-(萬葉集)가 편찬된 8세기의 일본어로는 <아제=あぜ>라고 하며, 현대 일본어로는 <나제=なぜ>라 한다. 우리말 <어째>를 <아제>로 표기한 8세기 때의 일본 고어(古語) <아제=あぜ>는, <ㅓ> 모음을 <ㅏ> 소리로 대체한 동시에, 된소리 <ㅉ>와 모음 <ㅐ>로 구성된 <째>를, 자음 <ㅈ>와 모음 <ㅔ>로 합성한 <제>로 대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일본어 <나제=なぜ>는, 고어(古語) <아제=あぜ>가, <ㅇ>소리와 <ㄴ>소리가 교체되는 법칙(예: 쌀알→쌀낟 앙기다→안기다(抱) 옛(昔)→녯 옆→녑 옆구리→녑구리)에 따른 변화다. 그런데 일본어 사전에는 「고어(古語) <아제=あぜ>는 동국(東國) 지방의 사투리다」라고 풀이 돼 있다.

*우리말 <쌀(米)>. 현대 일본 표준말로는 <쌀(米)>을 <고메=こめ>라고 하지만, <샤리>라고 도 한다. 된소리 <ㅆ>을 표기하는 수단이 없기 때문에 단순(單純) 자음 <ㅅ>으로 표기하고, 바침 <ㄹ>에는 모음 <ㅣ>를 결합시켜서 <사리>라고 했었는데, 연대(年代)가 내려오면서 모음교체를 일으켜서, <샤리>라고 발음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초밥을 팔고있는 일본식당에 가면, 그들이 쌀로 만든 밥을 <샤리>라고 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일본말 사전에는, 「<샤리>는 원래 범어(梵語)에서 온 말이며, 불타(佛陀)나 성자(聖者)의 화장(火葬)한 유골(遺骨)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그 빛과 모양이 쌀과 닮았기 때문에 <쌀>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라고 풀이한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소리냐!

이상(以上)에서 우리는, 변화된 우리말을 쓰고 있는 가라족(韓族)의 후예(後裔), 즉, 일본 사람들이, 일본어의 뿌리가 우리말이란 사실을 부정(否定)함으로써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대충 살펴보았다. <계속> minjock1944@hanafos.com

**필자/박병식

역사학자.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쓴 책으로는 "일본어의 비극" "일본어의 발견" "야마토언어의 기원과 고대조선어"등의 저서가 있다.

 
 
 
박병식 역사학자 | 기사입력 2007/11/26 [10:45] 

˝일본 황실은 왜 韓神을 떠받들고 있나?˝ (breaknews.com)

 

˝일본 황실은 왜 韓神을 떠받들고 있나?˝

매우유감스러운일이지만,우리민족의상고사(上古史)는,오늘까지도,검은안개에가려진채,오리무중(五里霧中)속에버려져있는딱한형편에놓여있다.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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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제1탄>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실상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는, 오늘까지도, 검은 안개에 가려진 채,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에 버려져 있는 딱한 형편에 놓여 있다. 바로 그러한 우리의 등한(等閒)함이 원인이 되어, 일본은 오래 전부터 역사를 제 멋대로 왜곡(歪曲)해 왔으며, 최근에는 중국사람들 조차 그들 정부가 앞장서서「고구려는 중국민족이 세운 나라였다」는 기막힌 망언(妄言)을 서슴없이 하기 시작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들의 국사교과서 내용마저 그렇게 고쳐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目的)은, 일본과 중국 문헌(文獻)에 남아있는 우리 낱말 몇몇을 예시하여, 그 어원을 밝힘으로서, 저들의 그러한 왜곡행위(歪曲行爲)를 근원적으로 봉쇄(封鎖)하여, 다시는 그러한 망발(妄發)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학자(史學者)들 사이에 오랜 고질이 되어온 중대한 오류(誤謬)도 차제(此際)에 시정(是正)하고자 한다.

가라(명사. 나라 이름). <가라>는 문헌(文獻)에 남아있는 우리민족 최초(最初)의 국호(國號)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 『삼국사기』에는, 우리나라를 처음 세운 분은 단군(檀君)이며, 최초의 국호는 조선(朝鮮)이라고 명기(明記)돼 있지 않는가!」라고 항변(抗辯)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해가 아름답게 비치는 나라"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아야 할 점은, 『삼국사기』의 그러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전재(轉載)된 것이며, 따라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는 수도(首都)의 이름 <아사달>을 한자(漢字)로 의역(意譯)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순수한 우리말인 <아사달>은, <아작 달=아침 달>의 옛 형태로서, <아사>는 <밝음·해*가 비침>을 뜻하는 고어(古語)이며, <달>은, <양달=햇빛이 비치는 밝은 땅>, <음달=그늘진 땅>등에 씌어진 <달>과 같이, <땅·곳·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조선(朝鮮)>은 「해가 아름답게 비치는 나라」라는 뜻으로, <아사달>에서 유래되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음달>이란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한 가지 지적(指摘)해 놓자. 우리말 사전에는, 「<음달>은 원래 <응달>이라고 적는 게 옳다」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국어학자들이, <음(陰)>의 <ㅁ>소리는 <ㅇ>으로 바뀌기 쉬운 소리라는 소리바뀜 법칙(예: 골마지→골아지. 林檎=림금→능금. 매?→왜?)를 깨닫지 못한 탓에 저지른 잘못이다. 따라서, <응달>이 옳은 게 아니라, <음달(陰地)>이 옳은 표기다. 우리가 쓰고있는 <양달(陽地)·<음달(陰地)>이란 낱말은, 한자(漢字)와 우리말이 결합된 합성어(合成語)다.

그건 그렇고, <아사달>을 건국한 임금의 이름도 역시, 한자(漢字)로 <단군(檀君)>이라고 표기하지만, 그것도 우리말 <밝은 달=밝은 땅=해 비치는 나라>의 변형(變形)인 <밝은 달→밝달→박달(檀)>과, <임금(君)>을 의역(意譯)하여 합성(合成)한 것으로서, <단군(檀君)>은 「해가 비치는 땅의 임금·해의 나라의 임금」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사달=해가 비치는 나라"

이렇게 해서, <아사달=해가 비치는 나라·해의 나라> 즉 <밝달>이 우리민족 최초의 국호임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가라>가 처음 국호라는 것은 웬 소리냐? 이 물음에 대한 정답(正答)은, 「<가라>도 <아사달>과 마찬가지로, <해가 비치는 나라·해의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여야 할텐데, 과연 <가라>가 그런 뜻을 지닌 말일까? 그것을 풀자면, 두어가지 기초적(基礎的)인 소리바뀜 법칙을 알아야 한다. 우선 그 첫째는, <해(日·太陽)>의 원형(原形)이 <하>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출가(出家)해서 중(僧)이 된 이후, 나이, 즉 연세(年歲)를 셀 때 <하>라고 하는데, 그때 쓰는 말인 <하>가 <해=年>의 원형임을 확인함으로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 것=나의 물건」을 <내 해>라 하는데, 그 말에 쓰이는 <해=것>의 원형 역시 <하>임은 우리 말 사전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다.

 

둘째로 밝혀야 할 소리바뀜 법칙은, <ㅎ>소리는 <ㄱ>소리로 바뀌기 쉽다는 법칙이다. 그와 같은 소리바뀜의 예로는, <王>을 뜻하는 우리 옛말은 원래 <가시하나>이지만, <가시가나>라고 도 했으며, <지나게=지나도록>이라고 하는 말의 고어(古語)도, 원래는 <지나히>라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가라=해가 비치는 나라·해의 나라>의 옛 꼴도, 원래는 <하라>이었을 게 라고 추정(推定)하게 한다. 그리고, <하라>의 <라>는 <땅·나라>를 뜻하는 옛 말이며, 고어(古語) <다라=높은 곳> <다라=들·들판> 따위에 쓰인 <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고증(考證)으로, 우리 민족의 첫 국호인 <가라>의 옛 꼴은 <하라>이며, 그 원래 뜻이 <해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태양의 자손을 자부"

이렇게 되면, 당연히,「왜 우리 조상(祖上)은, 나라 이름을 <하라=해의 나라>라고 했을까?」하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은, 「우리는 이 지구상(地球上)에서 유일(唯一)하게 스스로를 <태양의 자손>이라고 자부(自負)하는, 독특(獨特)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집사람(妻)을 <아내>, 자식을 <아이>라고 부르는 데, 그것들의 원형은 각각 <안해=집 안에 있는 해>·<아해=어린 해·아기 해>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현대(現代) 말로, 우리 스스로를 나타내는 칭호(稱號), 즉 일인칭(一人稱)은  <나>인데, 그 원형은 <라>다. 모-든 사람이 다 알다시피, <라>는 에지프트(egypt)에서 태양신(太陽神)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즉, 우리는, 태양신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까닭에, 스스로를 <라(太陽神)>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연대(年代)가 내려옴에 따라서, <ㄹ> 소리를 <ㄴ> 소리로 바꿔 발음하는 <우랄-알타이>어족(語族)의 특성(特性) 때문에, 원래는 <라>이던 일인칭(一人稱)이, 지금은 <나>로 바뀌었다. 그러나, 원형인 <라>는, 일본 쪽에 가까운 동해(東海)에 있는 오끼섬(隱岐島)의 사투리가 되어, 현재도 씌어지고 있어서, <라>→<나> 소리바뀜이 있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어 사전(辭典)을 뒤져보면, 일본 사람들도, 만요-슈-(萬葉集)가 편찬(編纂)된 8세기(世紀)까지는 일인칭(一人稱)으로 <나>를 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들이 사는 땅"

이러한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조상님은, 「<태양의 자손>인 <해>들이 사는 땅>」이란 뜻으로, 최초의 국호를 <하라→가라>라고 했던 게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라>를 한자(漢字)로 <加羅>·<伽羅>·<迦羅>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8세기 초에 편찬 된 일본『고사기』와『일본서기』에는 <가라>가, <加羅> 및 <韓>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봐서, 적어도 8세기까지는, <가라>라는 우리 국호가 일본열도에서도 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가야(上伽倻)가 신라에게 멸망당했던 서기562년 이후까지도, 고구려·백제·신라 등을 통 털어서, 우리나라를 <가라=태양족이 사는 나라>라고 불렀던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의 저자(著者) 이병도(李丙燾)는, 「<가라>는, 변진(弁辰) 제국(諸國)이 낙동강 유역(流域)에 세운 부족국가(部族國家)다」라고 했는데, 『고사기』와『일본서기』의 기록(記錄) 하나만 봐도, 그것이, 상고사를 무시한 맹랑한 잘못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인가! 이병도(李丙燾)는 한 술 더 떠서 말하기를, 「우리의 국호 <가라=태양족이 사는 나라>의 <가>는, 변두리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며,「<가라>는 강(江)이나 해변(海邊)에 자리한 나라를 뜻한다」는 망발(妄發)을 해 놨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조상을 더럽히는 일본(日本)

일본 사람들은, <가라>가 「태양족이 사는 나라」라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가라가미(韓神)를 황실(皇室)의 시조(始祖)라고 하며, 천황(天皇)의 거처(居處)인 궁성(宮城) 안에 모시고 있다. 일본정부의 손으로 서기927년에 편찬된 『연기식(延喜式)』이라는 문헌이 있다. 거기에는 그 책이 편찬될 당시, 일본 전국의 신사(神社)에 모셔진 신(神)들을, 신격(神格)의 고하(高下)에 따라, 제사(祭祀)를 모셔야할 사람의 신분과 제사의 격식(格式)을 자세히 규정(規定)해 놓았다.  거기에 따르면, 가라가미(韓神)는 천황이 몸소 제주(祭主)가 되어,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제사(祭祀)를 받들어 모시도록 돼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근년(近年)에 이르러 서는, 봄에 가라가미(韓神) 제사를 지내는 날인 2월 11일을, 우리나라 개천절(開天節)에 해당하는 건국기념일(建國記念日)로 정하고, 국경일(國慶日)로 삼고 있다. 평소엔 우리민족을 말끝마다 서슴없이 경멸(輕蔑)하는 저들인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들이 우리 가라가미(韓神)를 그토록 떠받들지 않을 수 없을까? 그런 의혹(疑惑)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기사(記事)가, 2003년6월23일자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의 보도에 나타났다. 인용한다.

교-도-통신(共同通信) 보도문

"동경대학의학부(東京大學醫學部) 인류유전학교실(人類遺傳學敎室) 도꾸나가 가쯔시(德永勝士)교수는, 인간의 6번 염색체 내(內)에 존재하는 “hla유전자군”을 이용한 인간유전자(게놈)을 비교 연구한 결과,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結論)에 도달하였다. 「도꾸나가」교수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比較分析)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끼나와인(沖繩人)이나 혹까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가까웠다고 밝혔다.

일본 본토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hla유전자형태는, hla-b52-hla-dr2로, 북규-슈-지방(北九州地方)부터 야마가다현(山形縣)에 이르기까지의 사람들에게서는 12%이상 존재했고, 몽골인(蒙古人)에게서는 5-8% 나타났다. 반면, hla유전자는 오끼나와인에게서는 2%, <아이누>족에게서는 1%에 끄쳤다. 이런 연구결과는, 7월 동경대학출판부(東京大學出版部)가 출간(出刊)할 예정인 공개강좌(公開講座) 총서(叢書)에 수록될 예정이다.

한편, 돗도리대학(鳥取大學) 의학부 이노우에다까오(井上貴央)교수 팀은, 벼농사 도입(導入)과 청동기(靑銅器) 전래(傳來)로 상징(象徵)되는 <야요이>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결과(硏究結果)룰 내놨다. 돗도리대학(鳥取大學) 연구팀은, <야요이>시대 유적(遺跡)인 돗도리현 아오야가미(靑谷上) 절터(寺跡)에서 출토된 <야요이>인(人)의 유골(遺骨)에서 추출(抽出)한 <미토콘드리아>dna 염기배열(鹽基配列)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그 연구팀은, <야요이>인 유골 29점 가운데 7점으로부터 dna를 추출하는데 성공한 뒤, 그중 4점에서 <미토콘드리아>dna 염기배열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이들이 한국의 현대인 및 혼슈-(本州)의 일본인과 동일(同一)한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박병식=역사학자.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쓴 책으로는 "일본어의 비극" "일본어의 발견" "야마토언어의 기원과 고대조선어"등의 저서가 있다.

 

 

문화일보 입력 2020-09-23 10:25

<신용하의 지식카페>5세기 부여·가라 기마민족 日열도 정복…‘임나일본부설’은 날조 :: 문화일보 munhwa

 

<신용하의 지식카페>5세기 부여·가라 기마민족 日열도 정복…‘임나일본부설’은 날조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20)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백제·금관가야·왜 3국 동맹, 신라 구원 요청 받은 광개토왕 부대에 참패… 일본으로 들어가 ‘야마토’ 왕국 건국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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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설을 보여주는 유물들. 왼쪽은 3세기 대가야의 철갑 기병 출토 유물. 오른쪽은 이와 유사한 5∼6세기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가라식 투구(위)와 말가리개(아래).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20)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

백제·금관가야·왜 3국 동맹, 신라 구원 요청 받은 광개토왕 부대에 참패… 일본으로 들어가 ‘야마토’ 왕국 건국
한반도·대륙서 출토되는 마구류·갑옷·칼자루 등 5세기 초부터 일본서도 출토… 역사적 사실로 증명

고조선 문명은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고대국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8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東京)대 교수는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을 발표했다. 그의 학설은 ‘대륙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과 천황가 및 일본 고대국가 형성설’과 ‘한·왜 연합 왕국설’로 구성돼 있다. 필자는 ‘한·왜 연합 왕국설’은 일제 어용사가들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집착해 허구에 빠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은 일본 고대국가 건국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창의적 학설이라고 생각한다.

요지는 이렇다. 한반도와 대륙에서 출토되는 철제 마구류와 갑옷, 기마전에 편리한 복식 등이 5세기 초부터 갑자기 일본열도에서 출토되고, 동시에 금·은 장식의 관·귀걸이·칼자루 등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열도 내의 자생적 문물이 아니라 대륙의 기마민족과 왕후 귀족적 문화가 갑자기 출현한 것이다. 이는 일본열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대륙문화 수용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대륙으로부터 ‘기마민족’이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특히 출토품이 ‘마구류’뿐 아니라 각종 무기, 복장, 장식품까지 일종의 문화복합으로, 대륙 기마민족과 동일한 것이다. ‘기마민족’이 말과 함께 일본열도로 건너와 소국들을 정복·통일해 ‘야마토(大和)’ 고대국가를 수립하고 ‘천황’ 등 일본 ‘지배층’을 형성했음을 증명한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은 발표되자마자, 일본 학계에 큰 충격을 줬고 일부는 경악하며 에가미 교수의 학설에 반발했다.

일본 야마토 고대국가 건국은 반드시 두 단계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 이동해 들어가 야마토 소왕국을 세운 사람들은 한반도 변한 고령(高靈)지방의 ‘미오야마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AD 42년에 남하한 부여족의 기마군단에게 미오야마나를 빼앗긴 후 약 1세기 동안 함께 생활하다가, 대가라(임나) 통치에 불복한 왕족과 무장세력 일부가 AD 2세기에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을 새 정착지로 정하고 “야마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야마토’ 소왕국을 건국했다. ‘미오’는 ‘성(聖)’ ‘왕(王)’ ‘궁(宮)’의 뜻이고, ‘야마’는 족명이며 ‘토’는 한국 고대어 ‘’(地, 土)의 변음이다. ‘야마’(야마토)는 ‘야마족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본국이 ‘미오야마나(任那)’이기 때문에 ‘미오야마나’를 읽을 때 줄여서 ‘미마나’로 읽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의 최초 기원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열도에 각각 출신 나라 호칭의 자치공동체 분국을 세웠다. 그 결과 AD 2∼4세기경에는 규슈(九州)와 혼슈(本州) 등 일본열도 여러 곳에 한반도 마한·진한·변한·임나·가라·고구려·백제·신라의 분국(分國)이 다수 존재하게 됐다. 중국 고문헌에 의하면 AD 1세기경 일본열도에 100여 개의 소국이 존재했다.

야마토 소왕국 건국(AD 2세기 중엽) 약 70년 후 세습왕자가 없자 무장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결국 AD 3세기 초 ‘히미코(卑彌呼)’를 여왕으로 추대해 야마토 소왕국이 안정됐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는 히미코 여왕을 무녀(巫女)로 설명하고 있는데, 중요한 요인 설명이 결여돼 있다.

필자는 ‘히미코’가 부여 왕족 왕녀 출신이었고, 야마토 왕국의 안정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부여 왕족 성씨 ‘해’는 일본어에서 ‘히’로 변음된다. 아침‘해’가 아사‘히’로 변음된 것과 같은 것이다. ‘미’는 ‘왕’ ‘궁’의 뜻이며, 코는 ‘자·녀’(子·女)의 뜻이다. 일본에서는 ‘미·코’를 합해 ‘미코(尊)’로 읽기도 한다. ‘히미코’는 (부여)‘왕족 해 씨의 왕녀’의 당시 용어이고, 이것을 ‘비미호(卑彌呼)’라고 표기한 것은 고중국 위(魏)나라 사신 장정(張政) 등이 나쁜 뜻 한자를 골라 음차 표기한 것이다.

‘삼국지’ 왜전에 의하면, 히미코 여왕이 (AD 248년) 별세하자, 지름이 100여 보나 되는 큰 무덤을 만들고, 100명의 노비를 순장했다. 이러한 ‘순장제도’는 부여·가라 왕족의 풍속이다. 히미코 여왕의 승계자로 남자 왕이 등극했다. 그러나 무장들의 내란이 일어나서 피살된 자가 1000명에 달했다. 다시 히미코 여왕의 종실 여성 ‘이요(壹與·일여)’를 왕으로 세우자, 나라 안은 안정됐다. 여기에 깊이 개입한 위나라 사신 장정 등은 귀국해 야마토 상황을 위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중국 고문헌의 정보는 여기서 끝나고, 그 후 2세기간 일본열도와 야마토국에 대한 정보는 일본에도 거의 없다. 6세기 초에 가서야 기나이(畿內) 지방의 야마토에 대한 편린이 일본 고문헌에 몇 점 나오기 시작한다. 일본열도 역사기록이 없는 AD 5세기에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는 고고유물이다. 이 시기 5세기 초부터 일본열도의 출토 고고유물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일본열도에 갑자기 나타난 대륙과 한반도의 가라식 선진 철제 마구, 무기와 금은 장식물들이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의 근거가 되는 유물이다. 그러나 에가미 교수는 정복 주체인 기마민족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필자는 5세기 초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의 주체 이름을 가라(加羅), 특히 금관가라(金官加羅) 기마부대와 그 연합 세력이라고 특정해 설명하려 한다. AD 399년에 백제 아신왕은 신라를 병합하고자 백제·금관가야·왜의 동맹을 맺어 3국 연합군을 편성했다. AD 399년에 왜는 기병이 없이 모두 보병이었다. 백제·금관가야·왜의 연합군은 신라군을 격파해 400년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 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 부대를 남하시켜서 백제의 3국 연합군을 참패시켰다. 백제 4만 명의 보병은 대부분 전사하고 포로가 8000명이었다니 그 참패를 추정할 수 있다. 금관가라의 기병부대와 왜 보병도 참패해, 금관가라의 수도 김해까지 점령당했다. 그 후는 어떻게 됐을까? 백제 패잔병 중 보병의 희생은 막심했지만 기병부대 패잔병은 백제로 돌아갔을 것이다. 살아남은 왜군 보병은 물론 일본열도로 귀환길에 올랐을 것이다. 막강했던 금관가라 등 가라 기병부대들은 어떻게 됐을까? 김해 수도까지 점령당하고 갈 곳이 없는 가라 주력 기병부대는 패전한 왜 보병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들어갔다고 본다. 보병전에서는 아직도 막강한 대규모 가라 기병부대가 왜 원정보병과 연합해 일시에 일본열도에 상륙한 것이다. 일본열도에서 5세기 초부터 갑자기 출토되는 다수의 가라 마구가 이를 증명해준다.

필자는 5세기 초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의 주체는 금관가라 기병 부대를 중심으로 한 ‘가라’ 기마부대라고 본다. 즉 가라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이 되는 것이다. 가라의 기마문화와 기병부대의 계보는 부여(夫餘)의 그것이다. 기원까지 넣으면 부여·가라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이 되는 것이다. AD 5세기 초 일본에 들어간 가라 기병부대는 일본열도를 일거에 휩쓸 막강한 기마부대는 아니었다. 광개토대왕 기병부대와의 전투에서 패전한 기병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라 기병부대는 일본열도의 한반도 가까운 지방에서 거의 20년간 양마와 철제무기 제조 등 기병부대 실력을 증강한 후 동정(東征)해 야마토 소왕국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본다. 이때 정권을 교체해 왕이 된 세력은 ‘금관가라계’ 기병무장세력으로 추정된다.

이때 야마토 소왕국의 정권을 교체해 새 왕조를 시작한 왕은 누구일까? 일본의 고문헌 자료가 완전히 결여된 시기이므로, 야마토 왕이 중국왕조에 보낸 조공사신에게 중국 황제들이 내린 ‘왜5왕’의 칭호에서라도 흔적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421년경 찬(讚) 세력이 이전의 ‘변진미오야마나·부여·임나’ 세력으로부터 무력으로 정권을 교체해 야마토 소왕국의 권력을 장악해 새 왕조를 연 ‘금관가라’ ‘가라’ 세력이라고 본다. 그러나 송(宋)나라는 이 왕조교체와 새 왜왕을 공인해주지 않았다. 새 왕조는 438년 진(珍)왕 때 송나라로부터 ‘왜국 왕’으로 인정받았다. 이어서 제(濟)의 아들 무(武) 때는 막강한 기병부대로서 일본 통일을 수행했다고 본다. ‘왜 5왕’은 모두 가라(특히 금관가라) 기병부대장 계보라고 추정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AD 451∼479년 사이에 왜왕 무가 중국 측에 대해 조공사절을 연달아 파견하며 정복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송서(宋書) 왜국전에 보면, AD 478년에 “왜왕 무가 송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자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의 호칭을 내리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듬해 AD 479년에 야마토의 무왕은 남제(南齊)의 고제(高帝)로부터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AD 502년에 야마토 무왕은 양(梁)의 황제로부터 정동장군(征東將軍)의 칭호를 받는다. 필자는 야마토 소왕국에서 제왕과 무왕이 AD 451∼AD 479년에 동정을 감행해 대부분 통일을 달성해서 야마토 고대국가를 수립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일본열도의 소국들을 다수 통일한 야마토국의 무왕은 누구인가? 일본역사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AD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이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그들의 역사적 기원이고 고향으로 동경해 왔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갑자기 일본이 한반도 임나 가라 지역을 AD 4∼6세기 약 200년간 무력점령해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둬 식민지 지배를 했다고 서술해 넣었다. 진실은 백제와 가라 연합군이 신라를 점령하려고 왜(倭)에 참가를 요청하자 보병부대 지원군을 AD 399년경에 김해에 상륙시켰다가, 이듬해 AD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기병부대에 참패해, 가라 기병부대와 함께 패잔병을 배에 싣고 급히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 후 5세기에는 막강한 고구려 세력 영향 아래 한반도 각국 경쟁이 있었고, 왜군은 전혀 한반도에 상륙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열도에서는 가라 기마민족에 의한 야마토 왕국의 정권교체와 새 야마토 왕의 일본열도 다수 소국에 대한 통일 정복 활동이 6세기 초까지 전개됐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열도 내의 한반도 왕국 계열 다수 분국(김석형 교수)을 가라계 새 야마토 조정이 통일 지배한 일본열도 내의 사실을 왜곡해, 마치 야마토 왜가 한반도에 상륙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지배한 것으로 날조한 것이었다. AD 4∼6세기 당시에는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었다. 일본 명칭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처음으로 정립된 것이었다. 5∼6세기에 가라 기마민족에게 정복당한 왜가 도리어 한반도의 가라6국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200년간 식민지 통치를 했다니, 동서고금의 역사책에서 이러한 왜곡은 다시 볼 수 없는 최악의 날조였다.

2세기 후반 일본 최초의 야마토 소왕국은 한반도 미오야마나(변한 고령지역)와 부여족 일단이 바다를 건너가 건국했다. 5∼6세기 야마토 고대왕국은 에가미 교수가 고고유물자료들로 증명한 바와 같이 대륙 및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해 건국했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면서 그 기마민족은 AD 400년 광개토대왕의 기병부대와 싸웠던 금관 가라국 및 가라국 기마민족임을 밝힌다. 즉 가라 기마민족이 원정왜군과 연합해 일본열도에 들어가서 일본열도를 정복해 통일 야마토 고대왕국을 건국했다고 밝힌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 왕실을 그 이래 한반도 진왕(辰王)계라 했는데, 필자는 이것도 더 좁혀 5세기 이후 일본 야마토 왕족은 금관가라 및 가라 기마부대장 왕족의 후예이며, 척족은 5세기에 그 왕족에 결합된 백제 기마부대장의 후예임을 지적하는 바이다. <시리즈 끝>

 

 

 

중앙선데이 입력 2019.02.16 00:20

[이훈범의 문명기행] 후쿠오카에 웬 가야산? 열도 곳곳엔 5세기 가야인 흔적 | 중앙일보 (joongang.co.kr)

 

후쿠오카에 웬 가야산? 열도 곳곳 '5세기 가야인' 흔적 | 중앙일보

가야 멸망 후 가까운 외국으로 망명한 가야 백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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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김해 금관가야의 철기 유물들. 투구와 갑옷, 말투구 등이 보인다. 말투구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으로 챙과 얼굴, 볼 가리개가 완전히 갖춰진 실전용이다. [사진 복천박물관]

 

백성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난 기사에서 가야 유민에서 신라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한 김유신 가문을 언급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라는 가야를 정복한 뒤 오늘날 충주지역에 지방도시 중원경(中原京)을 만들어 가야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진흥왕의 총애를 받은 가야금 명인 우륵(于勒)조차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아닌 중원경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 가야 귀족 출신으로 신라 최초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강수(强首) 역시 그렇다. 그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보내는 문무왕의 친서를 써 문무왕의 칭찬을 받았다.

“강수가 문장 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 서한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에 뜻을 전한 바, 능히 우호를 맺는 공을 이뤘다. 선왕이 당나라에 병력을 청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 덕분이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어찌 강수의 공을 소홀히 하랴.” (『삼국사기』 <열전 제 6>)

 

그럼에도 강수가 신라 17관등 중 8등에 해당하는 사찬(沙飡) 벼슬에 머문 것은 스스로 고백하듯 “중원경 사량(沙梁) 사람”인 까닭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신분이 낮은 수많은 가야 백성들은 가야 멸망 후 노비나 그와 비슷한 신분으로 전락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운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다. 가장 가까운 곳이 일본이다. 가야 때부터 교류가 많았던 만큼 이질감도 덜 했을 것이다. 국가나 국민, 국경의 개념이 오늘날처럼 확고하지 않았던 시기인 만큼 일본의 거부감도 심하지 않았다.

 

당시 왜인들이 만난 첫 외국인은 가야인

2017년 오사카에서 열린 사천왕사 왔소 축제.

 

오늘날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는 매년 11월 ‘왔소 축제’가 열린다. 가야와 백제, 고구려, 신라, 조선의 사절단 복식을 한 가장행렬 참가자들을 향해 길가에 모인 인파들이 “왓쇼이!”를 외친다. 이는 우리말 ‘왔소?’에서 유래한 것이다. 불교와 한자, 도예, 건축 등 선진 문명과 문화를 전한 한반도 도래인들에 대한 과거의 환영식을 재현하는 것이다. 1000여 명의 가장행렬에서 가야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선두에 선다고 한다. 그만큼 수가 많았다는 뜻이다.

가야 유민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스에키.

 

실제로 일본에서 도질 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출현하는 시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가 중단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전 시기의 일본 토기는 좀 더 무른 토기인 하지키(土師器)가 대부분이다. 스에키는 철분 함량이 많아 짙은 회색 빛이 나고 단단해 왕실과 귀족들이 애용하던 토기다. 5세기 즈음 일본으로 건너간 김해 가락국의 유민들이 만든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어 사전을 보면 ‘가라(から)’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사람, 외국문화’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일본 열도에서 왜인들이 만난 최초의 외국인이 가라인, 즉 가야인들이었던 것이다. 이 ‘가라’에는 또한 ‘당(唐)’이란 뜻도 있다. ‘가라’가 처음엔 외국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다, 일본이 당나라와 직접 교역을 시작하면서 외국의 대명사가 당이 됐고, 원래 있던 발음 ‘가라’를 당 자에 붙였다는 해석이 그럴듯해 보인다.

일본에 건너간 가야인들의 기술이 당시 일본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것이었던 만큼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작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주 가야인들은 대부분 일본 지배층에 편입된다.

가야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일본 지명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가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후쿠오카현의 가야산(可也山), 가라(韓良), 다타라천(多多羅川), 다타라촌(多多羅村), 사가현의 가라쓰(唐津), 야마구치현의 다라(多羅), 다타라산(多多良山), 나라현 아스카의 가야나루미 신사(賀夜奈流美神社), 지바현의 다타라(太太良) 등이 그런 곳이다. 이러한 지명들은 “가야인들이 일본 열도의 입구인 규슈 북부로 건너가 야마토 지역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각지에 정착하면서 남긴 흔적”이라는 게 조원영 합천박물관장의 설명이다.

일본 천황계가 백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설 역시 일본사회에 대한 가야 유민들의 이 같은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여전히 가설일 뿐이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우리가 일본 왕실에 대해 친권을 행사할 것도 아니잖는가. 일본은 일본이고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2008/01/14 [21:23]

˝일본은 가야 땅, 한-일 이제 미워말자!˝: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일본은 가야 땅, 한-일 이제 미워말자!˝

강동민이사장도시국가연합체인가야(태양민족.광명의민족)의한부족이었던신라가경주쪽에서고구려로부터독립신라를만들게되고,옛가야시대때이미일본

www.pluskorea.net

 

 

 

희미해진 역사의 이상한 공백…
양쯔강과 한반도 인간집단

출처; 희미해진 역사의 이상한 공백…양쯔강과 한반도 인간집단 < 사회/르포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희미해진 역사의 이상한 공백…<br/>양쯔강과 한반도 인간집단 - 주간조선

한국의 고대사, 혹은 그 이전의 상고사(上古史)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보자. 최근 출토된 가야 유물을 보면 일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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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의 오나라 이전 양쯔강에 한민족이 살고 있었다

 

손권의 오나라 이전 양쯔강에 한민족이 살고 있었다 - 주간조선

중국의 삼국시대는 지구 기후변화의 역사 속에서 수백 년의 주기로 찾아왔던 온난기, 그 중에서도 정점 부분에 해당하는 시기에 있었다. 이렇게 따뜻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더 따뜻하고 토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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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서 사라진 가야의 역사
‘천문관측지도’는 알고 있다?

 

기록에서 사라진 가야의 역사<br/> ‘천문관측지도’는 알고 있다? - 주간조선

2009년 방영됐던 ‘선덕여왕’이라는 TV 드라마가 있다. 이 작품엔 ‘월천대사’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천문과 책력에 통달한 인물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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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 가야가 베일을 벗고 있다

 

‘사라진 왕국’ 가야가 베일을 벗고 있다 - 주간조선

이상하리만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한국 고대사. 그 중에서도 가야는 특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조차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가야의 건국신화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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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왕국’ 가야의 전혀 다른 두 얼굴

 
 

출처; ‘철의 왕국’ 가야의 전혀 다른 두 얼굴 < 사회/르포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철의 왕국’ 가야의 전혀 다른 두 얼굴 - 주간조선

“가야는 도대체 어떤 나라였을까?”지난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사 특별전 ‘가야본성’을 다녀온 한 기자가 쓴 기사는 이런 의문문으로 끝난다. 지금까지 가야에 대해 밝혀진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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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가야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 주간조선

가야가 어떤 나라였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역사를 보던 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가야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용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그 존재를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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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사용 뒤에 감춰진 가야의 진짜 역사

 

화폐 사용 뒤에 감춰진 가야의 진짜 역사 - 주간조선

중국 신(新)왕조의 화폐 화천은 묻혀진 한반도 역사의 한 단면을 확실히 보여준다. 가야를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한 교역이 일상이었던 때의 모습이다.그 교역 루트는 공간적으로 동아시아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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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건국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네 가지 근거

출처; “가야 건국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네 가지 근거 < 사회/르포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가야 건국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네 가지 근거 - 주간조선

가야 건국은 서기 42년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조에 발행된 두 권의 역사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그렇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밝혀지고 있는 관련 역사적 팩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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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국 페니키아와 가야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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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기원전 1세기 전반에 건국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네 번째 근거는 가야가 양쯔강 중류에 안정적으로 영토를 확보, 경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이 추정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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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한반도에 형성한 해양 파트너 지역은?

 

가야가 한반도에 형성한 해양 파트너 지역은? - 주간조선

“들을지어다, 파에아키아의 명장, 고관들이여. / 이 손님은 동에서인지 서에서인지 몰라도 / 표류 끝에 이곳에 당도하였소이다. / 이분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 과거 여느 때처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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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의 무대 알자스 로렌과 우한, 그리고 가야

 

‘마지막 수업’의 무대 알자스 로렌과 우한, 그리고 가야 - 주간조선

우한(武漢).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불편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도시다. 하지만 이곳은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특성을 가진 지역 중 하나다.이 글에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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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생산과 교역 활성화를 위한
호혜적 공존, 가야와 우한

 

철의 생산과 교역 활성화를 위한 <br/>호혜적 공존, 가야와 우한 - 주간조선

우한, 그리고 김해. 하나는 중국 대륙 양쯔강 중류에, 하나는 한반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다. 얼핏 보아선 두 도시 사이에 특별한 관련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직선거리로 2000 km 이상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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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왜 일본보다 중국과 먼저 교류했을까

 

가야는 왜 일본보다 중국과 먼저 교류했을까 - 주간조선

가야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은 속속 발견되는 유물과 일본의 고(古)기록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가야가 상당 기간 중국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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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들은 어떤 경로로 중국까지 갔을까?

 

가야인들은 어떤 경로로 중국까지 갔을까? - 주간조선

전기 가야연맹의 종주국이었던 가락국(금관가야)과 중국 황하 중류 유역 중심지는 빈번히 교류하던 사이였다. 중국 신나라 화폐 화천과 다양한 철기 유물들이 그 증거다. 가락국과 양쯔강 중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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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 사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숨은 진실

 

 

출처; 설화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 사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숨은 진실 < 사회/르포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설화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 사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숨은 진실 - 주간조선

우리의 고대사를 증언하는 고문헌 중 조선시대 이전에 발행되어 전해지는 책은 단 두 권이다. 고려조인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1281년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다. 고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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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왕국’ 금관가야가
규슈로 진출한 까닭은

출처; ‘제철왕국’ 금관가야가 규슈로 진출한 까닭은 < 사회/르포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제철왕국’ 금관가야가 <br/>규슈로 진출한 까닭은 - 주간조선

서기 20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기 가야연맹 종주국인 가락국(금관가야)은 지금까지 다니던 중국 양쯔강 유역과의 관계를 접고 대신 일본으로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한다. 260년 세월 공들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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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의 가락인 석상은 왜 얼굴이 사라졌을까

 

규슈의 가락인 석상은 왜 얼굴이 사라졌을까 - 주간조선

갑자기 길이 끊어지며 웬 종유동굴 하나가 검은 입을 떡 벌린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겁도 없이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여 컴컴한 어둠을 헤치고 동굴 속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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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해외에 제철기지를 둘 수 있었던 이유

 

가야가 해외에 <br/>제철기지를 둘 수 있었던 이유 - 주간조선

가야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가락국(금관가야)을 맹주로 한 전기 가야연맹 지역인 낙동강 및 섬진강 하류 일대에서는 엄청난 양과 고품질의 철 덩이, 무기‧갑옷‧기타 도구 등 철제품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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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암 가득한 日 야쓰시로, 가야인들의 제철기지였을까?

 

석회암 가득한 日 야쓰시로, 가야인들의 제철기지였을까? - 주간조선

“저건?”홈을 살피다가 그것이 굴뚝임을 알 수 있었다. 홈통을 이룬 석회암 표면에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을음이 껍질처럼 벗겨졌다. 쇠를 제련할 때 나오는 철매(鐵媒)였다. 이곳에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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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과 야쓰시로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닮은 꼴 ‘묘켄’ - 주간조선

“내려주시오.”갑자기 차를 멈추게 했던 것은 한반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찰의 외양과 단청까지 꼭 닮은 건물이 눈앞에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로 야쯔시로 신사였다.(이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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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해상왕국 가야<br/> 바닷길 통해 일본 열도로 넘어간 이유 - 주간조선

‘가야’라는 명칭은 상당히 포괄적이다. 현재 문헌을 통해 이름과 소재지가 확인되고 있는 곳만 해도 32곳이며, 최근 속속 발굴되는 가야 유물들까지 고려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소국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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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탄 가야인, 마쯔리에 남은 역사 - 주간조선

빙하시대 이후 오랫동안 고립되어 왔던 일본에 처음 대륙의 문물을 전해준 것은 가야, 특히 수로왕이 건국했던 가락국(금관가야)이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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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을 타고 뱀의 인도를 받아”<br/>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 - 주간조선

서기 2세기 말 어느 때, 새로운 제철기지의 후보지를 찾아 지금의 일본 규슈 야쯔시로시(市) 앞 바다에 도착한 가락국 사람들. 이들은 배에서 말을 타고 내려 해변을 가로질러 달려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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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묘켄’은 누구일까? - 주간조선

그 옛날 일본 규슈 야쯔시로 앞 바다를 건너서 왔다는 묘켄은 야쯔시로 일대에서 ‘신(神)’으로서 숭상되어 왔다. 그녀가 지었다는 궁전은 ‘묘켄궁’이라는 신사(神社)로 아직도 존재하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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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와 연꽃, 철제 농기구... <br/>가락국이 섬나라에 가져간 선물들 - 주간조선

막강한 힘을 가진 신적 존재인 묘켄을 숭배하는 전통 신앙은 일본 전역에서 발견된다. 그 묘켄은 가야에서 건너 온 왕가의 여성일 것으로 추정된다.궁금해진다. 어떻게 해서 묘켄이라는 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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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민담 캐릭터 ‘갓빠’에 드리워진 <br/>가야의 그림자 - 주간조선

일본의 민담이나 믿음에 가락국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묘켄만이 아니다. 묘켄보다 훨씬 더 대중적으로 폭넓게 회자되고 있는 캐릭터에 ‘갓빠’(カッパ)가 있다. 이 갓빠가 가락국에서 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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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빠’와 ‘가랏빠’,<br/>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적 해석 - 주간조선

갓빠는 일본 전래 민담의 캐릭터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친숙한 존재다. 갓빠 전설은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일본의 공식 담론에서는, 즉 지자체 홈페이지 등의 관광 정보 같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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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에 ‘가락국산’이 있는 이유 - 주간조선

일본 규슈 남쪽 깊숙한 곳에 ‘한국악(韓国岳)’이라고 쓴 표지판이 붙어 있는 산이 있다. 규슈 북쪽 도시 후쿠오카로부터 직선 거리로 200km 정도 내려온 남쪽 깊숙한 산지, 얼핏 보아 한국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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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에 ‘가락국산’이 있는 이유 - 주간조선

일본 규슈 남쪽 깊숙한 곳에 ‘한국악(韓国岳)’이라고 쓴 표지판이 붙어 있는 산이 있다. 규슈 북쪽 도시 후쿠오카로부터 직선 거리로 200km 정도 내려온 남쪽 깊숙한 산지, 얼핏 보아 한국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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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야’ 벌판 전투와 규슈의 에비노 고원 - 주간조선

‘왜’의 침략 얘기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꽤 익숙한 주제다. 주로 남쪽 해안 지방에서 있었던 소소한 노략질에서 임진왜란 같은 대규모 전쟁에 이르기까지.그런데, 그와는 성격이 다른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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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듯 같은 운명, 가야와 로마 - 주간조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해 거기서 자국으로 향하는 육지와 바다의 길들을 닦았다. 그 길을 따라 이집트 나일강 유역 평야의 곡식, 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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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년 전 한반도로의 인구 이동과 가야의 건립 - 주간조선

해양대국 가야의 베이스 캠프였던 한반도 동남부는 살기 좋은 땅이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흙먼지가 많은 찬 바람이 불어오는 북서쪽을 막아주고, 거기서 발원하는 긴 낙동강이 흐르면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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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문학 지도 한 장에서 출발한<br/> ‘가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 주간조선

최근 끊임없이 진행되는 대규모 개발로 인해 유물들이 속속 출토되고 있고, 또한 이들의 연대 및 특성을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기법들이 일취월장 발달하고 있다. 그에 따라 고고학계에는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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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기 문명의 연결고리, <br/>한반도 가야와 인도 부다가야 - 주간조선

한반도 동남단에 있던 살기 좋은 터전에 자리했던 나라 가야. 그 자리에선, 가야라는 나라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테다. 평민들이야 대체로 대대손손 비슷한 자리에서 삶을 이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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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한반도 낙동강까지... <br/>‘가야’가 새겨진 역사 - 주간조선

인도에도 ‘가야’라는 지명이 있고, 이곳이 고대 철기문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또 궁금해졌다. 다른 곳에도 가야라는 지명이 있을까?세계의 어느 곳이든, 지명을 확인하는 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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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50년 인도-베트남-한반도<br/> '제철인 핫라인'의 탄생 - 주간조선

지난 세기까지 철기문명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설명하는 게 대세였다. 한반도와 관련해서도 그랬지만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육로로 중앙아시아로부터 제철을 전파받은 중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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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철기문명, 시작은 어디였을까? - 주간조선

아래 지도는 ‘가야’라는 명칭과 철기 유물이 발견되는 곳과 관련해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표시한 것이다. 검은 화살표는 가야라는 명칭과 철기 유물이 한 지역에서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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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한반도-일본 열도’ <br/>동아시아는 가야를 중심으로 교류했다 - 주간조선

‘동이전’(東夷傳), 즉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글이라는 기록이 있다. 서기 3세기, 그러니까 가야가 몇 백 년 이상 제철제국으로 이름을 떨쳐오고 있던 때, 중국 촉나라 출신으로 서진(西晉)의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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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고 가야로 온 아유타국 공주... 신화의 미장센에 깔린 역사적 사실 - 주간조선

우리 역사서로서 제목을 제대로 달고 가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기록은 단 하나뿐이다. 이 조차도 가야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 전기 가야연맹의 대표국가인 가락국, 즉 금관가야에 대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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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 속 244자에 담긴 <br/>‘500척’과 ‘중국’의 의미 - 주간조선

‘노발리스(Novalis)’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18세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하르덴베르크는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문체로 유명하다. 독일 낭만주의 기조에 자신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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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야 터의 이국적 ‘돌’... <br/>남방 해양교류의 역사 품었다 - 주간조선

한반도 남서해안,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에 가면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마을에 돌담이 많다는 점이다. 마을 외곽 이진성엔 돌담 비슷한 모양으로 석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오래 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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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은 가야가 아니라 ‘가락국’의 개국시조였다 - 주간조선

가야 역사의 시원에서부터 출발해보자. 무대를 좁혀 보면 낙동강 하구다. 이곳엔 한반도에 인간 정주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사람들이 살아왔다. 높은 산기슭의 기름진 평야, 그 평야와 나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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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문명은 바닷길을 통해 확산됐다” - 주간조선

기원전 350년, 한반도에 남방으로부터 철기문화가 도착했다. 그때부터 어느 정도 동질적인 하나의 사회집단을 가리키는 말로서 ‘가야’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가설엔 받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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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01 12:47:18

가야는 대륙 안휘성(安徽省) 지역에 있었다 (skyedaily.com)

 

스카이데일리, 가야는 대륙 안휘성(安徽省) 지역에 있었다

스카이데일리, 우리 역사는 유라시아역사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왜곡된 역사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우리 역사를 반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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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金首露王)은 한반도에 없었다

 

 

17. 가야(伽倻) 1,000년의 비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17. 가야(伽倻) 1,000년의 비밀

17. 가야(伽倻) 1,000년의 비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6가야가 서기후 42년에 각각 건국되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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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가야

대륙절강의 가야 김수로왕의 가야가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에 가야의 선조가 대륙의 절강성지역에 있었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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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영토분쟁

가야와 백제의 영토문제(인용글-편집) <일본서기>에 백제와 가야의 영토분쟁 기록이 있는데 왜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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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항쟁

<일본서기>의 백토설화(인용글-편집) 일본열도의 <고사기>'신대기'에 백토설화(白兎說話)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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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멸망

가야와 백제의 전쟁(인용글-편집) 백제가 한반도의 가야를 364~ 36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공격하고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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