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2. 가야(가라)의 강역 (1) 본문
지금까지 가야의 건국 연대, 건국 초의 사회수준, 건국 뒤의 성장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에 관한 기본사료인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이 연대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 · 백제 · 고구려의 건국과 한韓의 쇠퇴라는 당시 주변의 정치 상황을 살펴볼 때 서기 42년에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기 42년은 기본사료에 나타난 가야의 건국 연대이므로 이를 부인할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야는 그 지역 토착인들이 건국하였는데 그들은 가야를 건국하기 훨씬 전부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조선시대와 한韓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의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여 정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붕괴되고 한이 독립하였으나 통치질서가 확립되지 못하여 사회가 어지럽자 그들은 가야국을 세워 독립했던 것이다.
가야는 한韓의 변한 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 한의 사회수준을 계승한 나라인데, 한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상당히 발달한 국가단계의 사회였다. 따라서 가야는 건국 초부터 국가단계의 사회였고, 서기 42년은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한 연대임이 한층 분명해지는 것이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결과들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가야에서는 고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 종교사상의 핵심을 이루었던 하느님 숭배사상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야의 국가 성격은 봉국제 국가로서 금관가야를 대가야라 부르고 그 통치자가 가야의 국왕으로서 가야 전체를 통치하였고, 그 밑에 다섯 가야가 있어 그 통치자들을 주主라 하였는데, 그들은 대가야의 왕을 공동의 군주로 받들었다. 이러한 봉국제는 고조선과 한의 거수국제와 같은 것이다.
가야는 서기 400년경까지는 지금의 김해 지역에 있었던 금관가야가 대가야로서 가야 전체를 통치하였으나, 서기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은 뒤로는 금관가야의 국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가야 전체의 통치권을 갖는 대가야가 지금의 고령군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후 금관가야는 서기 532년에 신라에 투항하였고 가야의 나머지 세력은 고령군 지역 대가야의 통솔 아래서 서기 562년까지 존속하였다.
가야의 강역은 초기에는 지금의 김해를 중심으로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북은 가야산, 서북은 지리산을 경계로 한 지금의 경상남도 일부였다.
그러나 서기 4세기경에는 북쪽은 낙동강 상류유역인 상주와 선산 일대, 동쪽은 대구 · 창녕 · 밀양 · 양산 · 부산 · 김해 일대의 경계선으로 낙동강 동쪽의 지역, 서쪽은 소백산 줄기와 섬진강을 잇는 경계선으로서 매우 넓은 지역을 차지하여 가장 강성함을 보여주었다.
금관가야가 몰락하고 대가야가 지금의 고령군 지역으로 옮겨간 서기 5세기에는 그 영역이 고령군과 김해를 포함하여 동쪽은 낙동강을 경게선으로 하고 서쪽으로는 거창 · 합천 · 함양 · 산청 · 의령 · 진양 · 하동 · 사천 · 고성 등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남원군의 일부 지역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지역은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하기 전부터 대량의 철 생산을 기반으로 사회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가야국은 독립한 초기에 이미 신라를 침공할 정도의 국력이었으며 수로왕의 명망 또한 매우 높았다. 서기 3세기 초부터는 신라와 서로 돕는 화평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서기 400년에 신라를 침범한 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하한 고구려 군대에게 금관가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리하여 금관가야가 몰락하고 대가야가 지금의 고령군 지역으로 옮겨간 뒤에 가야는 신라 · 백제 등과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데 힘을 모았으며 혼인동맹을 맺는 등 우호를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관가야는 서기 532년에 신라에 투항하였던 것이다. 그 후 가야는 신라의 팽창을 막기 위하여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가야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신라 진흥왕은 배후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서기 562년에 가야를 침공하였는데 이로써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출처;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266-268쪽)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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