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김해 구지봉]

김해시, 구지봉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착수 예정

영남취재본부 이세령입력 2023. 7. 25. 16:24
 

김해시, 구지봉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착수 예정 (daum.net)

 

김해시, 구지봉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착수 예정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란 구지가(龜旨歌)가 울려 퍼졌다는 경남 김해 구지봉의 정밀발굴조사가 착수될 예정이다. 가야 건국신화를 간직한 구지봉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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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유적]

 

입력 2017. 11. 21. 09:24수정 2017. 11. 21. 10:42

금관가야 추정 왕궁지에서 대형 건물터·의례용 유물 나왔다

박창욱 기자
 
봉황동 조사구역 전경. 이하문화재청 제공 © News1

 

(서울=뉴스1) 박창욱 기자 = 문화재청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삼기)가 금관가야 추정왕궁지로 알려진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가야의 대형 건물지군과 의례용 유물을 다수 발견했다고 21일 밝혔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주변 일대에서는 지금까지 70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주거지, 기둥을 세워 높여 지은 건물 터인 고상건물지, 토성, 접안시설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기존의 조사 성과와 '김해군읍지'(金海郡邑誌)의 수로왕궁터 기록을 근거로, 금관가야 중심세력의 실체를 찾고, 그 실증적 자료 확보를 위해 2015년부터 매년 김해 봉황동 유적 내의 추정왕궁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건물지군 © News1

 

올해 3월부터 시행한 2017년도 발굴조사에서는 그동안 파악하지 못했던 봉황동 유적(동쪽 지점)의 전체적인 층위 양상과 가야 시기 대형 건물지군의 존재를 확인했다. 또 화로형토기, 통형기대(筒形器臺, 긴 원통을 세워둔 모양의 그릇받침), 각배(角杯, 뿔 모양 잔), 토우 등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을 다수 발견하였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4.5m 아래에서 기반층을 층위조사해, ‘삼한(三韓) 시대’로 불리는 원삼국 시대 민무늬토기가 출토된 문화층, 가야 시기의 건물지와 소성유구(燒成遺構, 불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 시설물) 등이 중복된 문화층, 이후 통일신라 시기와 조선 시대까지의 문화층 등을 확인했다.

조사구역 층위 모습. ( Ⅱ: 현대 / Ⅲ: 조선 / Ⅳ: 통일신라 / Ⅴ~Ⅻ: 가야 / ⅩⅣ ⅩⅤ: 원삼국 시대)© News1

 

지금까지 봉황동 유적 일대에서 시행한 수차례의 소규모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기반층부터 현 지표면까지의 전체 층위의 양상을 밝혀낸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조사 성과가 앞으로 유적 형성과정을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가야 시기 문화층 조사에서는 다수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건물지들은 대체로 지름 10m 이상으로, 일정 구역 내에 밀집된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건물지는 3호 건물지인데 바닥은 타원형이며 이 일대에서 가장 크고 기둥자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벽주건물지'(외곽에 벽을 돌린 형태로 벽 사이에 기둥을 세운 건물지)이다.

 

봉황대 진입로 개설구간의 46호 주거지(1999년, 부산대학교박물관 조사), 창원 신방리유적 5호 주거지(2005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대형 건물지군은 그동안 봉황동 유적 일대에서 발견된 일반 생활유적과는 차별화된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로는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유물인 화로형토기, 통형기대, 각배, 토우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화로형토기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수장급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통형기대는 막대기 모양의 띠(봉상, 棒狀)가 부착되어 있고, 띠 전면에 일렬로 찍혀 있는 둥근 고리무늬(원권문, 圓圈文)와 몸체에 둘러진 물결무늬, 엇갈리게 뚫은 사각형 구멍(투창, 透窓) 등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독특한 형태이다.

© News1
© News1

 

통형기대는 가야의 수장급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는 유물로, 생활유적에서는 발견된 사례가 없다. 이 유물들은 전년도 발굴조사에 출토된 차륜형(車輪形, 수레 바퀴 모양)토기, 구슬‧곡옥 등의 장신구류와 함께, 봉황동 유적을 점유하고 있었던 유력 집단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이번 김해 봉황동 유적의 추정왕궁지 발굴조사에서는 당시 유력 계층의 흔적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가야의 왕궁’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지만, 상위 계층의 존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유구와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연차적인 전면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을 뚜렷하게 밝히고 이를 가야사 복원과 연구에 필요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길 기대한다. 조사 성과는 오는 22일 오후 2시에 김해 봉황동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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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관가야 추정 왕궁지에서 대형 건물터·의례용 유물 나왔다 (daum.net)

 

금관가야 추정 왕궁지에서 대형 건물터·의례용 유물 나왔다

(서울=뉴스1) 박창욱 기자 = 문화재청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삼기)가 금관가야 추정왕궁지로 알려진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가야의 대형 건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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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2016-11-22 10:51

김해 봉황동 유적서 가야·신라 토기 440점 출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조사…"금관가야 생활 터전 증거"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서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봉황동 유적 북동쪽 평탄면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굽다리접시, 그릇 받침대, 손잡이가 달린 굽다리바리, 수레바퀴형 토기와 생활용품인 독(甕), 사발, 시루 등 토기 440여 점을 찾아냈다고 22일 밝혔다.

또 굽은 옥과 유리구슬 등 장신구, 토우와 가락바퀴, 뼈로 만든 손칼 손잡이, 사슴·돼지·고래·상어 등 포유류와 어류의 뼈도 발견됐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문화층(특정 시대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이 확인됐고, 수혈(竪穴, 구덩이)과 주거의 흔적도 드러났다.

다만 왕궁터로 판단할 수 있는 대형 건물 유구(遺構, 건물의 자취)나 적심(積心, 초석 밑 다짐돌)은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나온 토기들. [문화재청 제공]

 

이에 대해 국립가야문화재 연구소 관계자는 "전체 조사 면적 5천㎡ 중 약 30% 정도만 발굴이 이뤄진 상황이어서 대형 건물터의 유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면서 "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소 큰 유구를 조사하고 있는데, 내년이면 이 유구의 전체 규모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는 "가야 토기와 신라 토기가 혼재돼 나타나고 수레바퀴형 토기와 장신구 같은 권위 있는 계층이 사용하던 유물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봉황동 유적이 금관가야의 주요 생활 터전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07년부터 60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돼 패총(貝塚·조개무지), 토성 등이 발견됐으나, 금관가야의 왕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금관가야의 도성이었다는 내용이 없지만, 1899년 발행된 '김해군읍지' 고적(古蹟)조에는 "수로왕궁지는 지금의 (김해)부 내에 있다고 전해지며, 고궁지는 서문 밖 호현리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관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남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나라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내년 3월께 발굴조사를 재개할 예정이다.

김해 봉황동 유적. [문화재청 제공]

psh59@yna.co.kr

 

출처; 김해 봉황동 유적서 가야·신라 토기 440점 출토 | 연합뉴스 (yna.co.kr)

 

김해 봉황동 유적서 가야·신라 토기 440점 출토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서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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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2016-03-31 10:50

가야 왕궁터 나올까…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 재개

문화재청, 창녕 교동 39호분도 발굴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금관가야 수로왕대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의 발굴을 내달 4일 재개한다고 31일 밝혔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일제강점기부터 60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돼 패총(貝塚·조개무지), 토성, 건물터 등이 발견됐으나, 금관가야의 도성이나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연구소는 지난해 9월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를 시작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층(특정 시대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과 각종 수혈유구(竪穴遺構, 구덩이)를 확인했다.

가락국으로도 불린 금관가야는 532년까지 경남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부족국가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지난해 발굴조사에서는 주로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 유물이 나왔다"면서 "2∼3m는 파내려가야 금관가야와 관련된 유적이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가야의 또 다른 부족국가인 비화가야의 무덤군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내 지름 25m의 대형 봉토분인 교동 39호분도 다음달 초부터 발굴한다.

앞서 연구소는 2014년부터 2년간 교동 39호분 주변 지역을 발굴해 기존에 알려진 무덤 3기 외에 21기를 발견했으며, 둥근고리큰칼 등 유물 410여점을 찾아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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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야 왕궁터 나올까…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 재개 | 연합뉴스 (yna.co.kr)

 

가야 왕궁터 나올까…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 재개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금관가야 수로왕대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의 발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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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14 20:05:07  수정 : 2015-09-15 16:16:34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왕궁터 실체 규명될까

 

14일 오전 김해 봉황동 유적지에서 발굴 조사 시작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렸다. 강원태 기자 wkang@

 

금관가야 왕궁과 도성이 실체를 드러낼까?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금관가야 왕궁터로 알려진 경남 김해시 봉황동 유적지(사적 제2호)에 대한 본격 발굴에 착수하고 지난 14일 오전 11시 첫 삽을 뜨는 개토제를 진행했다. 이날 개토제는 초헌례와 아헌례, 종헌례와 망요례로 진행되었으며 인근 주민들과 함께하는 음복이 뒤이었다.

왕궁터 추정지 김해 봉황동
개토제 실시하고 발굴 시작
3년간 5천㎡ 규모 조사 진행

김해 봉황동 유적지는 김수로왕 건국 이래 김해를 중심으로 500여 년간 세력을 떨친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1907년 첫 조사와 일제강점기 이후 간헐적인 발굴을 통해 회현리 패총과 토성, 주거지 그리고 마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랑인 환호가 확인된 바 있다. 부산대학교 박물관은 1999년 이곳이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취락지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김해 회현동 패총에서 출토된 동검.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금관가야는 기원전부터 532년까지 김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너른 평야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했고, 낙동강 하구에서 무역을 발전시켰다.

1899년 발행된 '김해군읍지'에는 '수로왕궁지는 지금의 김해부 내에 있다고 전해지며, 고궁지는 서문 밖 호현리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번 발굴에서 금관가야 왕궁의 실체가 규명될지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날 개토제에 참석한 동국대학교 안재호(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경북 고령이나 경남 함안에서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된다는 곳을 발굴했지만 눈에 띌 만한 결과물을 찾지 못했다"면서 "이번에 멀지 않은 곳에서 토성과 환호가 발견돼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인제대학교 이영식(역사고고학과) 교수는 "봉황동 유적지 중간에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 은행나무 앞에는 숙종 5년에 세운 비석이 있고, 비석에는 '수로왕이 왕궁을 만든 터'라고 기록되어 있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는 "흔히 가야 유적하면 고분군만 떠올린다"면서 "가야의 사후세계관 말고 중흥기의 역사를 증명해줄 유적이 출토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발굴조사는 앞으로 3년간 김해 봉황동 316 일대 약 5천㎡에서 진행한다. 하지만 수백 년 넘게 이곳에 주거지역이 형성되었기에 발굴이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최인화 학예연구실장은 "누적된 시간이 오래된 고대 유물인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3m 정도 깊게 팔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조소희 기자 sso@busan.com

 

출처;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왕궁터 실체 규명될까 - 부산일보 (busan.com)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왕궁터 실체 규명될까

금관가야 왕궁과 도성이 실체를 드러낼까?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금관가야 왕궁터로 알려진 경남 김해시 봉황동 유적지(사적 제2호)에 대한 본격 발굴에 착수하고 지난 14일 오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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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고분군]

입력 2020. 7. 30. 10:13

김해 대성동고분군 도굴안된 귀족무덤 유물 600여점 출토

김상우
 
청동거울, 화살촉모양 옥제품, 호랑이·말모양 청동허리띠고리 등
원형 유지 108호분 400여점 나와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관장 송원영)은 30일 가야 귀족층 무덤인 대성동고분에서 발굴한 보존 상태가 양호한 유물을 공개했다. 청동거울 2020.07.30 (사진=김해시 제공)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 김상우 기자 = 가야시대 지배층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에 있는 도굴 되지 않은 원형의 귀족무덤에서 가야시대 유물 600여점이 출토됐다.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관장 송원영)은 30일 가야 귀족층 무덤에서 보존 상태가 양호한 출토유물을 공개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지난해 12월 9일부터 올해 7월 31일까지 박물관 마당 평지 3700㎡에서 10차 발굴조사를 진행해 목곽묘(덧널무덤) 29기, 목관묘(널무덤) 26기, 옹관묘(독무덤) 3기, 수혈(구덩이) 5기 등 63기를 조사해 600여점의 가야유물을 발굴했다.

 

출토된 주요 유물은 청동거울, 화살촉모양 옥제품, 호랑이·말모양 청동허리띠고리 등이다.

발굴 무덤 중 108호분(덧널무덤)에서는 가야 무덤 최로로 문양이 새겨진 다량의 칠기(漆器) 흔적을 발굴한데 이어 국내 최초로 청동 화살촉 등 400여점의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청동거울은 무덤 주인공 머리맡에 칠기로 추정되는 유기물 아래서 출토됐다. 거울의 지름은 9.2㎝ 가량이며 거울 꼭지(鈕)를 내행화문(內行花文)으로 새기고 다시 침선으로 장식했다.

벽옥제(碧玉製)로 만든 화살촉은 9점이 한 무덤에서 출토된 최초의 사례로 실제 화살촉이 아닌 의기용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모양 청동허리띠고리는 115호분(널무덤)에서 출토됐다. 널무덤 중앙부에서 나란히 출토됐으며 호랑이 허리띠고리와 말모양 허리띠고리가 함께 부장된 사례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박물관 관계자는 “대성동고분군의 10차 발굴 성과는 가야사 복원 국정과제와 우리 시 가야유적벨트 조성의 핵심 과제로 활용되는 동시에 목전에 둔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관장 송원영)은 30일 가야 귀족층 무덤인 대성동고분에서 발굴한 보존 상태가 양호한 유물을 공개했다. 옥으로 만든 화살촉. 2020.07.30. (사진=김해시 제공)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관장 송원영)은 30일 가야 귀족층 무덤인 대성동고분에서 발굴한 보존 상태가 양호한 유물을 공개했다. 호랑이모양 청동허리띠. 2020.07.30 (사진=김해시 제공) photo@newsis.com

☞공감언론 뉴시스 woo@newsis.com

출처; 김해 대성동고분군 도굴안된 귀족무덤 유물 600여점 출토 (daum.net)

 

김해 대성동고분군 도굴안된 귀족무덤 유물 600여점 출토

[김해=뉴시스] 김상우 기자 = 가야시대 지배층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에 있는 도굴 되지 않은 원형의 귀족무덤에서 가야시대 유물 600여점이 출토됐다.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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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 10. 17. 03:17수정 2012. 10. 17. 03:17

대성동 고분이 밝혀줄 가야의 진실은?

KBS1 18일 밤 '역사스페셜'

[서울신문]18일 오후 10시 KBS 1TV에서 방영되는 역사스페셜은 '대성동 가야고분의 미스터리-가야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내놓는다. 지난 6월 경남 진해시 대성동에서 발굴된 고분군에서 목곽묘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 발굴이 시작된 이래 가장 놀라운 발견이 이뤄졌다. 88호분에서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밝혀 줄 파형동기, 91호분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선비족 계통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미지의 나라 가야에 대해 이 유물들은 어떤 정보를 담고 있을까.

91호분에서 나온 유물들은 주로 말과 관련 있다. 또 3구의 시체는 순장 풍습을 드러낸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고유문화다. 학계에서는 선비족의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흔히 선비족의 발원지라 꼽히는 중국 알선동과 라마동을 찾았다. 여기서 최근 대성동 유물을 살펴봤다는 중국 랴오닝성 고고학연구소의 톈리쿤 교수는 다른 해석을 내놨다. 대성동 고분과 비슷한 중국 라마동 고분군은 지금껏 선비족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톈리쿤은 이 무덤이 부여인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성동 무덤의 주인도 결국 부여인이란 뜻인가. 흔히 부여는 선비에게 압박을 받아 세력이 약해졌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이 남하해 가야로 간 것은 아닐까. 가야문화의 뿌리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을 소개한다.

 

88호분은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대성동 발굴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고고학자들이 직접 찾아오고 일본 언론들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이유는 파형동기. 이 유물은 흔히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 일컬어졌다. 이게 가야 유물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파형동기는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제품으로 4세기 일본 야마토 정권의 왕들이 방패 장식품으로 썼던 것이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대성동에서만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수가 한두 점이 아니라 무려 12점에 이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출처; 대성동 고분이 밝혀줄 가야의 진실은? (daum.net)

 

대성동 고분이 밝혀줄 가야의 진실은?

[서울신문]18일 오후 10시 KBS 1TV에서 방영되는 역사스페셜은 '대성동 가야고분의 미스터리-가야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내놓는다. 지난 6월 경남 진해시 대성동에서 발굴된 고분군에서 목곽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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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12.08.12. 오후 8:15 수정2012.08.12. 오후 9:36

김해 가야 고분에 북방 선비족 유물이?


[한겨레] 4세기 동북지방 선비족 유물 출토

“중국 이주민이 가야문화 성립 주도”

“해상교역의 산물일 뿐” 의견 맞서


‘가야 미스터리’ 재점화

고구려·백제·신라와 삼국시대 역사를 이끌었던 한반도 동남쪽 가야의 선조들은 어디서 왔을까. 최근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4세기께 금관가야시대 대형 고분 2기가 새로 발굴(<한겨레> 8일치 6판 12면)되면서 학계에서 가야인의 뿌리를 둘러싼 수수께끼가 새 화두로 떠올랐다.

김해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지난 8일 설명회를 열어 공개한 두 고분 유적(88호, 91호분)은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 북동쪽 구릉에 있다. 단연 주목되는 건 두 고분 껴묻거리(부장품)들이 명확하게 ‘국적’이 다르다는 점. 91호분에서는 4세기대 중국 동북지방에서 전연·후연·북연(삼연) 왕조를 세웠던 유목민인 모용선비족의 마구와 말방울, 동분(청동 대야), 동완(청동으로 만든 바닥 둥근 그릇) 등 금속공예품들이 쏟아졌고, 특유의 장법인 순장 인골도 발견됐다.

반면 88호분에서는 고대 일본에서 주로 사용한 청동창 등의 무기류와 방패 장식 등만 주로 나왔다. 특히 91호분에서 나온 4세기 선비 계통의 금속공예품들은 국내 처음 나온 것으로, 동시대 선비족 유적인 중국 동북지방 랴오닝성 차오양의 위안타이쯔(원대자)벽화묘와 허난성 안양시 샤오민툰(효민둔) 154호묘 유물들과 거의 같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왜 랴오닝성과 무려 2000㎞ 가까이 떨어진 한반도 동남쪽 끝 김해에서 선비족 유물들이 발견됐을까.

일단 박물관 쪽은 중국·일본 교역을 맡은 지역유력자들 무덤으로 추정했지만, 학계에서는 가야문화의 뿌리를 놓고 여러 논란이 일 전망이다. 선비족 계통 이주민들이 육로·해상으로 이동해 가야문화 성립을 주도했을 것이란 설과, 해상교역교류의 산물로 한정된다는 설이 맞서는 모양새다. 옛 사서에는 가야인의 원류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90년대 대성동 고분군 29호분에서 북방 부여 유목민 문화 계통의 동복(청동항아리)과 순장 흔적 등이 확인되면서 신경철 부산대 교수 등이 부여인 원류설을 펴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 발굴에서 한반도 다른 곳엔 없는 4세기 이른 시기 선비계 유물들이 대거 확인돼 가야 지역이 북방 유목민족과 신속하고 긴밀한 경제·문화 네트워크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은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송원영 김해시 학예사는 “그동안 가야는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 신화처럼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의 연합정권일 것이라는 설이 많이 제기돼왔는데, 예상밖의 선비계 유물 발굴로 북방 선비족과의 연관관계를 푸는 것이 학계의 새로운 숙제로 떠오르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4~5세기 선비족이 중국 동북 요서 지역에 세운 삼연은 우리 고대사와도 인연이 적지 않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주된 정벌 대상이었고, 고구려인 후예가 삼연 중 하나인 북연의 왕에 등극해 고구려 우방이 되기도 했다. 삼연의 말갖춤(마구) 문화는 5세기 이후 황남대총 등 신라 고분과 가야의 마구 유물 등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출처; 김해 가야 고분에 북방 선비족 유물이? (hani.co.kr)

 

김해 가야 고분에 북방 선비족 유물이?

‘가야 미스터리’ 재점화 고구려·백제·신라와 삼국시대 역사를 이끌었던 한반도 동남쪽 가야의 선조들은 어디서 왔을까. 최근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4세기께 금관가야시대 대형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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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양동리고분군]

20.02.11 11:10l최종 업데이트 20.02.11 11:16

가야시대 독특한 '등고선 평행 배치' 양동리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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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 13일 일반에 공개 ... 국가사적 제454호 지정

  김해 양동리고분군(목관묘).
ⓒ 김해시청 관련사진보기
 
가야시대에 등고선을 따라 평행하게 무덤을 배치한 고분군이 발굴되어 공개된다. '등고선 평행 배치'의 독특한 양상 연구가 필요한 고분은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 3번지에 있는 '양동리고분군'이다.

김해시는 13일 오후 발굴현장에서 양돈리고분군을 시민에 공개하기로 했다. 양동리고분군은 국가사적 제454호로 지정돼 있다.

이번 학술발굴조사는 양동리고분군의 보수정비를 위한 문화재청 국고보조사업으로 2019년 7월부터 시작해 이달까지 진행된다.

매장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인 한화문물연구원(원장 신용민)이 발굴조사하고 있다.

7개월에 걸친 발굴 결과 500㎡ 남짓 좁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가야시대 목관묘(나무널무덤) 37기, 목곽묘(나무덧널무덤) 3기, 석곽묘(돌덧널무덤) 11기, 석관묘(돌널무덤) 1기, 옹관묘(독널무덤) 5기, 수혈(구덩이) 7기가 조사됐다.

또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무덤 4기도 확인됐다. 가야 무덤에서는 1~4세기 통모양그릇받침, 철검, 수정제 구슬 등 150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김해시는 "이번 발굴조사는 그간 조사된 적이 없었던 중앙부에 대한 것으로 중소형 무덤이 집중 확인된 반면 대형 무덤은 전혀 확인되지 않아 고분군 내 신분에 따라 무덤을 조성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김해시는 "특히 무덤들이 지속적으로 매우 조밀하게 중복 조성돼 있는데다 등고선과 평행하게 5~6열 배치되는 독특한 양상이 확인돼 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양동리고분군은 1984년 첫 발굴 이후 2011년까지 동의대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과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 합동 발굴 등 모두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이곳은 2004년, 가야고분군으로서 학술‧·보존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454호로 지정됐다.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대표적인 전기 가야 무덤유적으로 가야 무덤의 변천과정은 물론 청동솥(銅鼎)과 청동거울, 청동창 등 고대 중국, 일본과의 교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다량 출토돼 학계로부터 크게 주목받아 왔다.

김해시 관계자는 "김해의 가야고분군들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만큼 도굴 피해가 적지 않으며 양동리고분군은 피해가 특히 심하다는 것이 이번 조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며 "조속히 정비해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김해 양동리고분군의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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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양동리고분군(목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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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양동리고분군(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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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양동리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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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야시대 독특한 '등고선 평행 배치' 양동리고분군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가야시대 독특한 '등고선 평행 배치' 양동리고분군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 13일 일반에 공개 ... 국가사적 제454호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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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원지리고분군]

 

입력 2021.09.13

금관가야 쇠퇴기 풀 열쇠, 사유지에 위태롭게

  • 기자명최석환 기자

6세기 축조 추정 봉토분 13기 경운산과 이어진 야산에 분포
지역 최대 규모 고총고분 확인 당시 독자 지배세력 존재 가늠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민간 소유 토지라 관리 한계

현재 대가야는 경북 고령으로 통하지만, 원래 가야에는 2개의 '대가야'가 있었다. 1~4세기 전기에는 김해 가락국이 '큰 가야'였고, 5~6세기 후기에는 고령 대가야가 '큰 가야'였다.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가락국기를 보면 수로왕이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명명했다고 나와 있다. 가야에 속한 나라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가락국이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국명이다.

김해지역에 가야 관련 문화유산이 즐비한 것은 가야 거대 세력이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 가야유적이 대성동고분군과 양동리고분군이다. 기원후 1세기부터 400년 고구려 남진까지 금관가야 지배계층이 조성한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해 김해지역에는 양동리고분군·예안리고분군 등 수많은 고분이 분포한다. 이들 유적 규모만 보더라도 거대 세력이 김해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김해에는 후기 금관가야 때 주축을 이루던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3년 전 경남도 지정문화재(경남도 기념물 제290호)로 지정된 원지리고분군은 금관가야가 무너지기 전 관련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위에서 내려다본 원지리고분군 전경. /김해시

 

이 유적은 대성동고분군·양동리고분과는 5~6㎞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경운산으로 이어지는 야산에 조성된 감나무밭 맞은편 산길로 들어서면 커다란 중대형 고분이 여럿 나타난다. 현재까지 김해지역에서 확인된 고총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 봉분이 이곳에 있다. 이를 보려면 길이 나 있지 않은 숲속 안쪽으로 가야 한다. 사방에 퍼져있는 170㎝ 이상 높이 잡초와 잡목을 손으로 비집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해발 30~50m까지 5분가량 산을 타야 고분군이 나온다.

9일 오후 3시께 찾은 원지리고분군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잡목에 뒤덮인 채 방치되고 있었다. 감나무 과수원과 민묘로 이어지는 길목을 제외하고 유적으로 가는 길은 따로 나 있지 않았다. 임도에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토기편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유적 일대에는 현대식 민묘가 조성돼 있었으며,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맞은편에는 감나무 밭이 일궈진 상태였다. 고분군을 나타내는 안내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산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 세워진 컨테이너에 문화재 유존 구역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가 유일했다.

▲ 김해 원지리고분군 3호분. /최석환 기자

 

김해시 가야사복원과 여창현·강주성 학예연구사와 함께 수풀을 헤집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 학예사는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원지리고분군 일대 토지가 민간 소유여서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풀로 뒤덮인 고분군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대성동고분군·양동리고분군은 3~4세기 크게 융성했던 세력에 의해 조성된 곳이에요. 지금까지 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 세력 말고도 또 다른 세력이 김해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고 있어요. 김해지역에서 고총이 안 보여서 다른 세력이 없는 줄 알던 때가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된 거예요. 금관가야 집단의 마지막 세력이자 대성동·양동리 이후 가장 큰 세력이 이곳에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대성동과 양동리에 있던 세력이 쇠퇴한 뒤에 남은 세력이 원지리 쪽으로 넘어오거나, 새로운 세력이 원지리에 와서 세를 구축했던 것으로 추정돼요. 이 정도 규모 고총고분은 김해에서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서 역사적 가치가 큰 거죠."

▲ 원지리고분군 M4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김해시

 

원지리고분군은 1977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처음 확인된 유적이다. 축조 시기는 6세기로 추정된다. 1984년 부산대박물관 지표조사, 1992~1993년 동아대박물관 금관가야권 지표조사, 2004년 대성동고분박물관 지표조사, 2017년 경상문화재연구원 긴급발굴조사, 2018~2019년 가야문물연구원 정밀 발굴조사, 2019년 가야역사문화연구원 정밀지표조사 등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횡구식석실분(돌방무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M3호분은 6세기 횡구식석실분으로서 현존하는 금관가야 후기 고분군 중 최대 규모 고총고분이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조사가 충분하지 않아 정확한 성격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이 고분군은 금관가야 쇠퇴기에 해당하는 400년 시기를 규명해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는 판단도 받았다. 긴급 발굴 조사 결과 이후 김해시는 유적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원지리고분군 1만 35㎡ 일대를 경남도 기념물 제290호로 지정 고시했다.

유적에서 확인된 봉토분은 13기다. 2019년 1월 가야문물연구원이 발굴 조사할 때까지는 12기로 보고됐으나,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1기가 추가 확인됐다. 대형 봉토분은 M3호분 1기뿐이다. 나머지는 중형분 5기, 소형분 7기다. M3호분은 장축직경 21.6m, 단축 18.8m, 높이 4m 규모다. 매장주체부 내부 규모는 길이 730㎝, 바닥너비 약 145㎝, 높이 157㎝이며, 봉토 정상부 고도는 해발 39.1m다. 지배계층 중 수장급이 묻힌 무덤으로 추정된다.

▲ 원지리고분군 M3호분 석실 내부. /김해시

 

2017년 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3호분은 상당 부분 도굴된 상태였다. 대부분 파괴돼 원위치를 알 수 없었으며, 고분 주변은 현대묘와 경작지 조성, 임도 개성 등으로 훼손돼 있었다. 이 유적에서는 단각고배(짧은 굽다리접시), 연질통형기대(원통모양그릇받침), 발형기대(화로 모양 토기) 등 토기류 19점, 철기류 90점, 환옥(공 모양의 옥) 19점이 출토됐다. 유개고배(굽다리접시), 자라병(자라 모양 병) 등 소형 토기와 유리구슬 등도 유적에서 일부 출토됐다.

여 학예사는 원지리고분군에서 발견된 횡구식석곽 역시 가야지역 내에서 유사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밝혔다. 사적이 아닌 기념물로 지정된 이유에 관해서는 추가 조사를 거쳐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면 추후 사적으로 지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 김해 원지리고분군으로 가는 임도에서 발견한 토기편. /최석환 기자

 

여 학예사는 "좁은 석곽식 묘제와 신라식 묘제가 결합돼 독특한 형태가 원지리고분군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내부 공간이 좁으면서 횡구식으로 돼 있고 길까지 나 있는 형태인데, 이러한 것은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관과 내부 형태, 규모면을 다 따져볼 때 역사적인 가치가 크고, 금관가야 마지막 쇠퇴기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적이 원지리고분군"이라고 밝혔다.

그는 "고분군 가치 규명도 중요하지만 제반적인 것도 중요하다"며 "선제적으로 사유지를 매입하고 조사도 충분히 진행해 성격을 규명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2기만 발굴조사가 돼 전체적인 양상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중소형 중에서도 가치가 큰 유적인 만큼 추가 조사를 해 성격이 명확해지면 추후 사적 신청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금관가야 쇠퇴기 풀 열쇠, 사유지에 위태롭게 < 기획·연재 < 기사본문 - 경남도민일보 (idomin.com)

 

금관가야 쇠퇴기 풀 열쇠, 사유지에 위태롭게

현재 대가야는 경북 고령으로 통하지만, 원래 가야에는 2개의 '대가야'가 있었다. 1~4세기 전기에는 김해 가락국이 '큰 가야'였고, 5~6세기 후기에는 고령 대가야가 '큰 가야'였다. 삼국유사에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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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원지리고분군 발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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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유물 100여점이 나온 김해 원지리고분(경남도 기념물 제290호)이 일반에 공개된다.

3일 김해시는 금관가야 유일의 고총고분군인 '김해 원지리고분군'에 대한 최신 발굴조사 성과를 4일 오후 2시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번 공개 행사에는 관심 있는 누구나 참석 가능하며,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산2-2번지 발굴현장에서 안내받을 수 있다.

원지리고분군은 2017년 긴급발굴조사에서 금관가야의 최대급 봉분을 갖춘 횡구식석실(橫口式石室)이 확인됐다. 이후 가야 후기 고분의 학술적 중요자료로 인정받아 도문화재(기념물 제290호)로 지정됐다.

이번 조사는 현 정부 국정과제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의 하나로 김해시는 자체 가야유적 발굴조사비뿐만 아니라 경남도 가야유적 사적승격 지원사업을 신청, 도비 1억원을 추가 확보해 실시했다. 조사기관은 (재)가야문물연구원이며 발굴조사는 작년 9월 12일에 착수, 올해 1월 말까지 이뤄진다.

지난해 발굴조사에서는 3·4호분과 3·4호분 사이에 조성된 3-1·2호분, 3호분의 남동쪽 소형의 고분 2기 등 총 6기가 조사됐다.

3호분은 남동쪽에 입구가 조성된 6세기의 횡구식석실분이다. 봉토는 타원형이며, 규모는 직경 약 11.2~12.8m, 높이 약 3.3~4.5m이다.

4호분은 가야권역 최초로 발굴된 높은 봉분을 가진 토광묘로 자라모양 토기, 단경호, 고배, 단각고배, 안장, 등자 등 약 100여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유물의 부장 양상으로 보아 김해지역 특유의 주부곽식 무덤의 부곽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 중 자라모양 토기는 고대 가야와 왜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해시는 "이번 조사의 성과는 원지리고분군이 금관가야 유일의 고총고분이라는 것과 금관가야의 마지막 단계인 6세기 전반의 역사와 문화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다는데 있다"며 "4호분이 부곽으로 확인됨에 따라 앞으로 주곽인 5호분의 조사 성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출처; 가야유물 100여점 나온 김해 원지리고분군 현장공개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가야유물 100여점 나온 김해 원지리고분군 현장공개

김해시, 4일 오후 2시 "누구나 참여 가능" ... 도 기념물 제 290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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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유하리유적지]

등록 2020.05.11 13:57:43

김해서 가야시대 제사유적 원형 상태 발굴

  • 유하리 유적 건물지, 굽다리접시 등 유물 55점 원형 상태 유지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는 유하리 유적에서 가야시대 제사를 지냈던 건물 등이 원형상태로 발굴됐다고 11일 밝혔다. 사진은 발굴 고분 전경. (사진=김해시 제공) 2020.05.11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 김상우 기자 = 경남 김해시 유하동 유하리 유적에서 가야시대 제사를 지냈던 건물 토기 등이 원형상태로 발굴됐다.

 김해시는 가야시대 고분 출토 유물이 원형 상태로 다량 출토된 제사 추정 건물지는 가야권역 최초의 사례라고 11일 밝혔다.

 시는 경남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된 유하패총 정밀발굴조사에서 패각층을 비롯해 건물지 7기, 구덩이시설(수혈(竪穴)) 15기, 인공 도랑시설(구(溝)) 3기, 주혈군 등이 조사됐다. 건물지 중 1기는 제사를 지내던 유적이다.

 제사 건물지에서는 인접한 양동리고분군에서 출토한 것과 동일한 굽다리접시 등 총 55점의 유물들이 원상을 유지한 상태로 발굴됐다.

 특히 굽다리접시는 5겹, 3줄로 제사를 지냈거나 포개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이러한 사례는 생활유적에서 처음 조사됐다.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들은 넓은 나무판재 위에 놓여 있었으며 제사를 지내거나 유물 보관을 위해 의도적으로 나무판재를 깐 것으로 조사됐다.

 김해시는 2019년에도 이번 조사구간의 북쪽과 동쪽 인접 지역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를 진행해 대형 건물지와 집자리 등을 조사한 바 있다.

 김해시는 유하리유적의 국가사적 지정 근거자료 확보를 위해 지난 3월부터 이달 중순까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화문물연구원(원장 신용민)에 맡겨 학술발굴조사를 했다.
 
 유하리유적은 금관가야의 대표 유적인 인근 양동리고분군(국가사적 제454호)에 묻힌 가야인의 생활유적지로 주목받고 있다.

 금관가야의 도성인 봉황동유적(국가사적 제2호)에 버금가는 유적으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발굴조사 등 학술조사가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김해시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는 유하패총의 범위가 북쪽으로 확장되며 양동리고분군과 유하리유적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자료를 확보한데 의의가 있다”며 “유하리유적의 성격 규명과 국가사적 지정을 위해 올 하반기에 유하리유적의 분포조사와 학술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는 유하리 유적에서 가야시대 제사를 지냈던 건물 등이 원형상태로 발굴됐다고 11일 밝혔다. 사진은 출토유물. (사진=김해시 제공) 2020.05.11   photo@newsis.com

◎공감언론 뉴시스 woo@newsis.com

 

출처; 김해서 가야시대 제사유적 원형 상태 발굴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김해서 가야시대 제사유적 원형 상태 발굴

[김해=뉴시스] 김상우 기자 = 경남 김해시 유하동 유하리 유적에서 가야시대 제사를 지냈던 건물 토기 등이 원형상태로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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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 기자입력 2023. 9. 13. 09:42

가야시대 ‘김해 퇴래리 유적의 현황과 전망’ 학술대회 (daum.net)

 

가야시대 ‘김해 퇴래리 유적의 현황과 전망’ 학술대회

[김해=뉴시스] 김상우 기자 = 가야시대 생활유적지인 김해 퇴래리 유적에 대한 학술대회가 15일 개최된다. 김해시가 주최하고, 두류문화연구원이 주관하는 학술대회는 ‘김해 퇴래리 유적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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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 12. 5. 13:04

김해서 가야시대 논 경작층 발견

오성택
 
기존 발굴조사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어.. 역사적 의미 커
가야인들의 식량생산지에 대한 존재근거자료 확보

기존 발굴조사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어.. 역사적 의미 커
가야인들의 식량생산지에 대한 존재근거자료 확보

 

경남 김해에서 가야시대 논 경작층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김해=오성택 기자】
경남 김해에서 가야시대 논경작지가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해시는 5일 가야사2단계 조성사업 부지에서 문화재 발굴 조사 중 청동기시대 무덤과 구(溝), 주혈, 가야시대 논 경작층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가야시대 논 경작층은 그 동안 김해에서 조사·발굴됐던 무덤과 취락유적에 비해 조사된 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또 대성동 고분군 등을 조성한 집단의 식량 생산지에 대한 존재근거자료를 확보하였으며 이를 통해 금관가야권 내의 무덤과 취락 공간 및 생산 공간을 구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가치가 높다.

 

경남 김해에서 가야시대 논 경작층이 발견돼 가야인들의 식량생산 지역에 대한 논란이 일단락 될 전망이다.

이번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무덤과 구(溝), 주혈의 존재를 통해 구지봉 지석묘와 대성동 구릉 내 지석묘 사이공간인 본 유적도 선사시대 유적군으로 연결돼 선사시대 문화 복원을 위한 자료를 확보했다.

시는 가야시대 논 경작층에 대한 자연과학분석(식물규소체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논 경작지에 대한 검증과 금관가야의 농경사(農耕史)를 규명해나갈 계획이다.

한편 학계는 현재 김해평야 일대가 가야시대에는 바다였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가야인들의 식량생산 지역이 어디였는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으나, 이번 발굴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시는 논 경작층에 대한 분석 결과와 발굴 조사 결과보고서가 나오는 대로 가야사2단계 조성사업 부지 일원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신청하고 체계적인 발굴과 정비·보존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다.

ost@fnnews.com 오성택 기자

 

김해서 가야시대 논 경작층 발견

기존 발굴조사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어.. 역사적 의미 커가야인들의 식량생산지에 대한 존재근거자료 확보 경남 김해에서 가야시대 논 경작층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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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11.25 14:09:26

김해서 가야시대 원형 인골 발굴…가야인 복원 기대

편두 출토된 김해 예안리고분군 원형인골 2구 발굴

4~6세기 가야인 모습 복원 가능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는 편두(이마를 납작하게 변형시키는 풍속) 유골 출토로 알려진 예안리고분군(국가사적 제261호)에서 훼손되지 않은 가야시대 인골 2구를 발굴했다고 25일 밝혔다. (사진=김해시 제공). 2019.11.25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김상우 기자 = 가야시대 원형 모습을 간직한 인골 2구를 발굴해 가야인 복원이 기대되고 있다.

 경남 김해시는 편두(이마를 납작하게 변형시키는 풍속) 유골이 출토된 예안리고분군(국가사적 제261호)에서 훼손되지 않은 가야시대 인골을 발굴했다고 25일 밝혔다.

 김해시는 예안리고분군 정비사업에 앞서 대동면에 있는 예안리고분군의 인골과 무덤 분포에 대한 새로운 자료 확보를 위해 지난 10월 조사에 착수했다.

 발굴조사를 맡은 두류문화연구원(원장 최헌섭)은 가야시대 목곽묘(나무덧널무덤) 6기, 석곽묘(돌덧널무덤) 31기를 확인했다.

 무덤마다 인골의 흔적들이 나왔으며 이중 목곽묘 1호와 21호에서 완벽한 모습을 한 인골 2기가 출토됐다.
 
 출토된 인골은 형질인류학분석을 통해 성별, 나이, 질환 분석을 할 수 있다. 또 안정동의원소 분석으로 식생활 분석, DNA분석으로 친족관계 분석 등을 진행해 가야인의 생활상에 근접할 수 있게 됐다.

 이번에 출토된 인골에 편두(이마를 납작하게 변형시키는 풍속)가 있는지는 인골 분석이 완료되면 알 수 있다.
 
 무덤 조성 시기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로 밝혀졌다. 함께 나온 유물은 토기와 철기 위주이다.

 예안리고분군은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최초 조사가 실시돼 가장 많은 편두 2구 등 가야인골이 다수 출토됐다.

 특히 국내 처음으로 편두가 확인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또 목곽묘에서 석실묘로 변해가는 무덤의 변천과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자리했다.
 
 김해시 관계자는 “70~80년대에 비해 분석 기술의 발전으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며 “예안리고분군 보존 정비를 위해 종합정비계획을 수립 중이며 가야인 복원과 고인골전시관 조성 같은 보존 정비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말했다.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는 편두(이마를 납작하게 변형시키는 풍속) 유골 출토로 알려진 예안리고분군(국가사적 제261호)에서 훼손되지 않은 가야시대 인골 2구를 발굴했다고 25일 밝혔다. (사진=김해시 제공). 2019.11.25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 경남 김해시는 편두(이마를 납작하게 변형시키는 풍속) 유골 출토로 알려진 예안리고분군(국가사적 제261호)에서 훼손되지 않은 가야시대 인골 2구를 발굴했다고 25일 밝혔다. (사진=김해시 제공). 2019.11.25   photo@newsis.com

출처; 김해서 가야시대 원형 인골 발굴…가야인 복원 기대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김해서 가야시대 원형 인골 발굴…가야인 복원 기대

[김해=뉴시스]김상우 기자 = 가야시대 원형 모습을 간직한 인골 2구를 발굴해 가야인 복원이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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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골’을 통해 확인된 가야사람의 풍습 '편두'

가야 문화 복원 프로젝트 - ④가야인의 풍습과 인골

  •  기자명고영민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 입력 2019.09.24 16:09
  • 수정 2019.09.24 17:29
 
▲ 정상 두개골과 편두의 X-ray 사진( 좌) 김해대성동고분군 85호, (우) 김해 예안리고분군 99호.

가야의 다양한 유적에서는 옛사람의 뼈인 '고인골' 자료가 많이 발견됐다. 고인골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 시대에 걸쳐 주로 무덤에서 확인되고 있다. 초기의 고인골 연구는 성별이나 나이, 신체적 특징과 같이 체질인류학적인 분야가 중심이었다. 최근에는 화학적 분석이나 분자인류학,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해 친족관계, 식생활, 영양학적 측면 등 기존에는 알 수 없었던 뼈 속에 감춰진 정보들이 보고되고 있다. 하나의 인골로 개인의 삶을 알 수 있다면 무덤 군에서 출토된 많은 인골은 당시 사회를 보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가야 문화권에서는 김해 대성동·예안리, 고령 지산동·본관리, 함안 도항리 등지에서 많은 고인골 자료가 출토됐다. 오늘날 우리는 가야시대 무덤에서 확인된 고인골을 통해 기록 속 가야사람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현재 파악된 것보다 가야 사람들은 더욱 다채로운 모습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가야의 대표적인 풍습은 순장, 편두, 발치, 문신 등이다. 이중 발굴조사를 통해 실제 확인된 가장 독특한 풍습은 바로 편두이다. 


유아기 때 머리 눌러 두개골 변형
김해 예안리서 출토, 여성 비율 높아
아프리카~남아메리카 세계적 유행 
미용·주술적 의미 등 다양한 이유 추정
국립김해박물관, 27일 편두 학술대회



■ 가야시대 가장 독특한 신체 변형 풍습
가야사람의 풍습에 관한 문헌 기록은 서기 3세기 중국의 진수(陳壽 : 233∼297)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이 대표적이다. 이 중 편두는 가장 극단적인 신체 변형 풍습으로, 1976년부터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김해 예안리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편두로 변형한 두개골이 확인되었다.
편두(?頭)란 뼈가 성장하는 단계인 유아기 때 나무나 돌, 천 등을 머리에 둘러 두개골을 인공적으로 변형하는 것을 말한다. '편(?)'의 사전적 의미는 '납작하다'로, 삼국지에서는 '진한 사람의 머리가 모두 납작하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관이 주목할 정도 영남지역에서 상당히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편두는 두개골 변형의 일종으로, 예안리 유적의 편두와 같이 돌로 눌러 변형한 납작한 형태나 끈 등을 감아 만든 장두형의 긴 두개골, 후두골 변형 등 세계적으로도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 편두로 보기 위해서는 특이하게 두개골을 변형한 형태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두개골과 비교하여 인공적인 변형의 흔적이 확인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아프가니스탄 틸리야 테페 편두 인골이 쓴 황금관.
▲ 틸리야 테페 6호.


■ 김해 예안리 유적서 확인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는 모두 210개체의 고인골이 출토됐다. 이중 편두로 변형한 두개골과 변형이 의심되는 개체는 모두 10개체이다. 이는 모두 서기 4세기 단계로, 5세기 이후에는 편두로 변형한 인골이 전혀 확인되지 않으므로, 비교적 짧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야 이전 시기인 가덕도 장항 유적이나 사천 늑도 유적 등지에서는 많은 인골이 발견되었지만, 편두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아서, 이전 시기에도 유행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두가 출토된 무덤은 동시기의 예안리 유적의 다른 무덤과 비교할 때 편두의 비율은 20% 정도이다. 또한 편두 인골이 출토된 분묘의 부장품은 적은 편이며, 여성 비율이 매우 높다.


■ 가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유행 양상 보여 
편두, 즉 두개골을 변형하는 풍습은 가야에서만 행했던 독특한 풍습이 아니었다. 선사시대부터 유라시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까지 분포 양상이 확인된다. 전 세계적으로 고대부터 행해진 독특한 풍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을 대표하는 고대 역사가인 헤로도토스(B.C.484∼425)는 지중해 일대의 고대국가와 민족에 대해 저술한 자신의 저서에서 편두를 독특한 습속으로 다루었다. 히포크라테스도 저서에서 편두를 만드는 방법 등에 대해 저술하였다. 이처럼 편두는 고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었던 신체 변형 습속의 대표적인 예로 인식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편두는 신석기시대로 알려져 있다. 2011년에서 2014년까지 발굴된 중국 길림성 송눈 평원 일대의 호우타오무가(后套木?, Houtaomuga) 유적에서는 약 12,000년 전의 편두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리와 가까운 러시아 연해주의 보이스만Ⅱ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두개골 변형 인골이 확인됐다.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지역에서도 편두는 유행했다. 서기 1세기경의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야 테페 고분군에서는 화려한 금관을 착용 한 채 매장된 편두 여성 인골이 발견됐다. 또한 동유럽에서는 4~7세기 많은 숫자의 편두가 확인됐다. 훈족의 대이동으로 알려진 이시기에는 초원 지역의 문화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시기였다. 훈족의 중심지였던 헝가리와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는 수백기의 편두로 변형한 인골이 나왔다.


■ 편두는 왜 했을까?
이처럼 선사시대부터 편두는 세계적으로 유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영남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편두를 행했던 목적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알려진 것은 틸리야 테페 유적과 같이 황금 관을 쓰기 위해 편두를 하였던지, 훈족의 경우처럼 우월한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계층을 구별하기 위해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예안리 유적의 경우 이러한 유적들과 상황이 다르므로 똑같이 보기는 어렵다. 다만 가야 사람들이 편두를 했던 이유는 성형을 위한 미용적인 목적이나 다른 계통의 사람과의 구분, 주술적인 기능 등 현재로서는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 편두 두개골 만드는 모습.(상상도)                                ▲ 예안리 유적 99호분 편두 인골 사진. 제공 = 부산대학교 박물관


■ 국립김해박물관, '가야사람 풍습연구-편두' 학술대회
고인골로 통해본 가야 사람의 풍습은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면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지에도 기록될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며,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풍습은 가야만의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 편두는 고대 유라시아 전역에서 행해진 두개골 변형의 일종으로 특히 예안리와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서 같은 형태로 널리 유행하였다. 가야 사람이 가진 이러한 풍습은 고대의 동서 교류라는 네트워크 속에서 볼 때 독특한 모습이 아니라 고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일 것이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는 편두에 대해 살펴보고자 '가야사람 풍습 연구 - 편두' 학술대회를 오는 27일 국립김해박물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다. 부산대학교 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학술 대회를 통해 김해 예안리 유적과 편두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해뉴스





고 영 민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처;‘고인골’을 통해 확인된 가야사람의 풍습 '편두' < 가야 문화 복원 프로젝트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김해뉴스 (gimhaenews.co.kr)

 

‘고인골’을 통해 확인된 가야사람의 풍습 '편두' - 김해뉴스

가야의 다양한 유적에서는 옛사람의 뼈인 '고인골' 자료가 많이 발견됐다. 고인골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 시대에 걸쳐 주로 무덤에서 확인되고 있다. 초기의 고인골 연구는 성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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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입력 2017.06.16. 16:00 댓글 84

경북 고령서 해자 등 대가야 방어시설 흔적 나와 

자동요약

경북 고령 대가야 시대 궁성지로 보이는 구릉 바깥쪽에서 성 주위 도랑인 해자(垓子)와 성벽 흔적이 드러났다.

가온문화재연구원은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단독주택 신축 터에서 유적 발굴 조사로 해자, 성벽, 토기 등 유물을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한 해자, 성벽 등은 구릉 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가야 중요 거점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보여 관심을 끌고 있다.

 

(고령=연합뉴스) 한무선 기자 = 경북 고령 대가야 시대 궁성지로 보이는 구릉 바깥쪽에서 성 주위 도랑인 해자(垓子)와 성벽 흔적이 드러났다.

 

[가온문화재연구원 제공=연합뉴스]

 

가온문화재연구원은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단독주택 신축 터에서 유적 발굴 조사로 해자, 성벽, 토기 등 유물을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해자는 폭 6∼8m, 깊이 최대 1m, 길이 16∼17m 크기로 경사면 위쪽인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도록 굴착된 형태로 나왔다.

 

성벽은 폭 7m, 길이 16m 규모인데 조사구역 바깥으로 성토 범위가 이어지고 있어 실제 이보다 클 것으로 추측한다.

또 해자와 성벽 축조과정에서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단경호와 토기, 기와 다수가 성벽 보강토 안에서 나왔다.

조사지역 남쪽 구릉은 사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가야 궁궐터, 어정(御井)이 있는 궁성지로 추정한다.

 

고령군 대가야문화권 개발 사업계획에 따라 2000∼2001년 경북대 박물관이 이 일대에서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를 했지만 대가야 궁성임을 입증할 근거는 찾지 못했다.

 

이번에 발견한 해자, 성벽 등은 구릉 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가야 중요 거점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보여 관심을 끌고 있다.

 

가온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발굴한 유적이 연조리 일대가 대가야 중요 거점임을 증명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주변 지역을 추가로 조사해 대가야와 연결되는 부분을 찾을 계획이다"고 말했다.

mshan@yna.co.kr

출처; 경북 고령서 해자 등 대가야 방어시설 흔적 나와 (daum.net)

 

경북 고령서 해자 등 대가야 방어시설 흔적 나와

(고령=연합뉴스) 한무선 기자 = 경북 고령 대가야 시대 궁성지로 보이는 구릉 바깥쪽에서 성 주위 도랑인 해자(垓子)와 성벽 흔적이 드러났다. 가온문화재연구원은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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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고분군]

 

입력 2017.02.21. 11:35 댓글 38

"6세기 고령 대가야인, 시차 두고 순장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지산동 518호분 조사보고서 발간

 

고령 지산동 고분군 제518호분.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가야 무덤이 모여 있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의 518호분은 시차를 두고 순장(殉葬)이 이뤄진 무덤으로 확인됐다.

 

지산동 518호분은 봉분의 지름이 17m이며, 무덤 내부는 점토 덩어리를 이용해 공간을 나눠 쌓는 구획성토(區劃盛土) 방법이 사용됐다.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은 주인공을 중앙부에 두고 순장자 5명 중 일부는 동시에 묻고, 나머지 사람들의 무덤은 나중에 만든 것으로 조사됐다. 순장 무덤을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한 사례는 지산동 518호분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 같은 발굴조사의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고 21일 밝혔다.

 

지산동 518호분에서 나온 관모 장식(왼쪽)과 귀고리. [문화재청 제공]

 

이 무덤에서는 관모(冠帽)에 다는 새 날개 모양의 금동제 장식, 하트 모양의 장식을 매단 귀고리, 갑옷과 투구, 화려하게 장식된 마구(馬具) 등 유물 480여 점도 출토됐다.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순장자는 무덤 주인공의 가족 혹은 그를 모시던 사람으로 생각된다"며 "순장 풍습은 고대 가야 고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가야 지배집단의 고분 700여 기가 있으며, 44호분에서는 32개의 순장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연구소는 보고서를 관련 기관에 배포하고, 누리집(www.cch.go.kr)을 통해 공개할 방침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고령 대가야박물관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출토 유물을 선보일 계획이다.

 

[문화재청 제공]

psh59@yna.co.kr

출처; "6세기 고령 대가야인, 시차 두고 순장했다" (daum.net)

 

 

"6세기 고령 대가야인, 시차 두고 순장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가야 무덤이 모여 있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의 518호분은 시차를 두고 순장(殉葬)이 이뤄진 무덤으로 확인됐다. 지산동 518호분은 봉분의 지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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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고시간2008-05-21 09:58

고령서 대가야 유물 1천여점 쏟아져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
(서울=연합뉴스) 30년만에 본격 학술발굴을 재개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 중 대형 봉토분인 75호분 중 부장곽 개석(덮개돌)을 연 모습. 각종 토기가 그득히 쌓여있다. 이 고분은 호석(護石) 기준 봉토 지름 22~25m이며 주곽(主槨)과 부곽을 T자형으로 배치했다. << 문화부 기사참조 >>

7명 순장 확인..한ㆍ일 순장논란 종지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가야 본거지인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을 30년만에 재발굴한 결과 1천여 점에 이르는 대가야 시대 유물이 쏟아졌다.

둥근고리갖춤 큰 쇠칼인 환두대도(環頭大刀) 8점이 한 꾸러미로 발견됐으며, 화폐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정(쇠판)은 단일 유적으로는 최다인 100여 점이 수습됐다.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
(서울=연합뉴스) 30년만에 본격 학술발굴을 재개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 중 대형 봉토분인 75호분 봉분을 걷어낸 모습. 주곽(主槨)과 부곽을 T자형으로 배치했다. 묘광 주변으로 순장자를 위한 순장곽이 보인다. << 문화부 기사참조 >>

 

나아가 한 고분에 최소 7명에 이르는 사람을 한꺼번에 순장(殉葬)한 것으로 드러났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대동문화재연구원(원장 조영현)은 지산동 고분군의 복원정비 일환으로 고령군 의뢰로 지난해 5월 이후 지산동 고분군 중 비교적 봉분이 대형인 73ㆍ74ㆍ75호분과 그 주변 일대 소형 고분들을 발굴조사한 결과, 5세기 무렵 대가야 왕국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했다고 21일 밝혔다.

조사대상 고분 중 봉분 지름이 20m를 넘는 73호분과 75호분은 구조상 목곽분(73호분)과 수혈식 석실분(75호분)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평면 배치에서 모두 T자형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였다.

무덤 주인공을 안치하는 주곽(主槨)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두는 장방형으로 마련하고, 그 서쪽 끝에다가 대형 토기를 비롯한 각종 기물을 빼곡히 넣어 두기 위한 창고와 같은 시설인 부장곽(副葬槨)은 남-북 장축 방향으로 설치했다.

이런 양식은 이 무덤이 축조되던 무렵 경주지역 적석목곽분에서 전형적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미 5세기 무렵에 대가야가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가된다.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

 

(서울=연합뉴스) 30년만에 본격 학술발굴을 재개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 대형 목곽봉토분인 73호분 출토유물로 ①톱니무늬 작은 바리 ②주름무늬병 ③,④단봉문 환두대도 ⑤환두대도 및 운주와 재갈이 출토된 상태다. << 문화부 기사참조 >>

 

발굴단장인 조영현 원장은 이번 조사의 의미 있는 성과 중 하나로 한일 고고학계 순장 논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 점을 들었다.

조 원장은 "75호분 석실(돌방) 주변을 조사한 결과 순장자를 묻은 공간임이 확실한 순장곽(殉葬槨)이 모두 7군데서 일정한 간격으로 확인됐으며 이 외에도 사람이 아닌 동물을 묻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순장곽도 확인했다"면서 "이로써 순장곽은 물론이고 순장이 있었다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대가야 지역 순장 흔적으로는 1970년대에 조사한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 조사에서 드러났으며 이 중 44호분에서는 모두 22기에 이르는 순장곽이 확인됐으나, 이것이 순장곽이 아니라 나중에 별도로 조성된 무덤들이라는 견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 재발굴이 이뤄진 고분들에서는 여러 차례 도굴이 이뤄져 기대했던 금관이나 금동관이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관모장식과 은제 귀면장식, 금동제 팔찌장식을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금동제 봉황문을 고리에 새긴 환두대도,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환두대도 8자루가 한 꾸러미로 묶인 채 발견됐으며, 이 외에도 찰갑과 말갑옷, 등자와 재갈, 철정 등이 다수 수습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출처; 고령서 대가야 유물 1천여점 쏟아져 | 연합뉴스 (yna.co.kr)

 

고령서 대가야 유물 1천여점 쏟아져 | 연합뉴스

7명 순장 확인..한ㆍ일 순장논란 종지부

www.yna.co.kr

 

 

 

입력 2008-05-22 02:55수정 2009-09-25 01:35

출처; 대가야 유물 1000점 1600여년 만에 햇빛|동아일보 (donga.com)

 

 

대가야 유물 1000점 1600여년 만에 햇빛

고령 고분서 무더기 출토1977년 이후 30년 만에 발굴한 경북 고령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에서 1000여 점에 이르는

www.donga.com

 

 

 

고령 30년만에 국내 최대규모의 봉토목곽묘 학술발굴

【고령=뉴시스】대동문화재연구원(원장 조영현)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제73호분~제75호분 및 그 주변부에서 노출된 소형분 10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지난 해 5월부터 시작, 현재 마무리 조사

v.daum.net

 

 

 

입력 2019.04.09. 17:45 댓글 50

고령과 먼 창원에서 대가야 가마터가 나온 이유는

대가야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대가야 토기 공방' 특별전

 

창원 중동 유적에서 나온 토기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 2010년 발굴조사를 한 경남 창원 중동 유적에서는 특이하게도 대가야 가마터와 토기들이 출토됐다.

 

대가야 중심지는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경북 고령. 두 지역 사이 직선거리는 약 60㎞이고, 창원은 고령보다 오히려 금관가야 중심지인 김해가 가깝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조성하고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가야 가마터와 토기가 창원에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고령 대가야박물관이 국립김해박물관과 함께 준비해 9일 개막한 특별전 '대가야의 토기 공방, 고령 본점과 창원 분점'은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나름의 답을 알려준다.

 

전시는 고령 송림리 가마터와 지산동 고분군, 창원 중동 가마터와 중동 유적에서 나온 토기와 전돌 등 자료 200여 점과 토기 조각 수백 점으로 꾸몄다.

 

대가야 토기 생산과 유통 의미를 살피고, 고령과 창원에서 발견한 토기를 한데 모아 소개하며, 송림리 가마터에서 찾은 송풍관을 백제·신라 유물과 비교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출토 토기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대가야박물관 관계자는 "중동 가마에서 나온 토기는 고령 토기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며 "대가야가 토기 장인을 파견하거나 기술을 제공해 창원에서 토기 공방을 운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창원 다호리나 반계동 유적에서도 대가야 토기가 나왔는데, 중동 가마터에서 생산해 유통했을 것"이라며 "학계에서는 대가야가 정치적 이유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창원에서 토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6월 16일까지 이어진다.

psh59@yna.co.kr

출처;고령과 먼 창원에서 대가야 가마터가 나온 이유는 | 연합뉴스 (yna.co.kr)

 

 

고령과 먼 창원에서 대가야 가마터가 나온 이유는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 2010년 발굴조사를 한 경남 창원 중동 유적에서는 특이하게도 대가야 가마터와 토기들이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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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함안군 가야리 왕성유적]

최일생입력 2023. 2. 15. 09:37수정 2023. 2. 15. 17:18

함안군-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아라가야 왕성유적 실체 규명 나선다 [함안소식] (daum.net)

 

함안군-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아라가야 왕성유적 실체 규명 나선다 [함안소식]

경남 함안군은 지난 14일 오후 함안 가야리 유적의 체계적 조사 추진을 위해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2023년 국가지정문화재 보수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이

v.daum.net

 

 

입력 : 2018-06-07 21:43:37 수정 : 2018-06-07 21:43:37

한국 고대사의 또 다른 주역 ‘아라가야 왕성’ 실체 첫 확인

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군 가야리 발굴조사 / 금관가야·대가야와 함께 중심세력 / 최대 높이 10m·폭 40m 토성 확인 / 백제 몽촌토성보다 2m이상 높아 / 토성 내부에서 통형기대·토기 등 / 최고위층 사용 추정 유물 출토 주목

 
“백사리 북쪽에 옛 나라의 유허(遺墟)가 있는데 주위 둘레가 1606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가야국의 도읍이라 한다.”

1587년 편찬된 조선시대 읍지 ‘함주지’(咸州誌)의 내용 중 일부다. 지금의 경남 함안군 가야리 일대에 대한 설명이다. 이곳에는 ‘남문외고분군’, ‘선왕고분군’, ‘신읍’(臣邑) 등 왕궁과 관련된 지명이 전하기도 한다.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일제강점기 이래 각종 조사에서 금관가야, 대가야와 함께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한국 고대사의 한 주역으로 꼽히는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됐다.

이 같은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아라가야 왕궁추정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돼 7일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당대 가야권역에서는 최대 규모인 토성이 확인됐고, 5∼6세기 최고 지배층의 거주공간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발굴되어 아라가야 왕성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남 함안 가야리의 아라가야 왕성 추정지에 대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높이 8.5m, 폭 20∼40m의 당대 최대 규모의 토성이 확인됐다. 이만 한 규모의 토성은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막강한 정치권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높이 8.5m… 당대 최대 규모의 토성

아라가야는 5세기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신라와 동맹을 맺은 대가야가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뭉치는 연맹 국가들이 생겼다. 아라가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세력을 과시하며 전성기를 구가한 건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이었다. 아라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투 속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라를 이어갔으나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물리친 신라가 가야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펼치면서 끝내 신라에 투항했다.

가야리 일대가 아라가야의 왕성일 것이라는 짐작은 문헌을 기초로 일찍부터 있었지만 왕성 추정지에 대한 발굴은 지난 4월 우연히 그 흔적이 드러나면서 처음으로 진행됐다.

발굴을 진행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토성의 높이는 확인된 것만 8.5m에 달한다.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부분까지 합치면 10m 정도는 될 것이라는 연구소의 예상이다. 초기 백제의 도성 혹은 방어용 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높이 6m)보다 2m 이상 높고,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가야 권역의 성산토성(4.1m), 순지리토성(4m)의 2배가 넘는 규모다. 토성의 상부 폭은 20∼40m였다.

토성을 축조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쌓은 흙이 밀려내려가지 않도록 나무기둥을 설치했으며 지반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나무를 태우면서 만들어진 목탄층이 확인됐다. 연구소 강동석 학예연구관은 “땅을 다지기 위해 나무를 태운 흔적이 발견된 다른 사례가 없다. 큰 공을 들여 토성을 만든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암석을 파서 조성한 긴 네모꼴의 수혈(사진 위)과 의례 공간에 주로 발굴되는 통형기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막강한 권력의 존재 보여주는 증거”

토성 내부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과 함께 건물터, 구덩이 등이 발견됐다. 건물터는 현재로선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고상건물지(기둥을 세워 높여 지은 건물 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암석을 파서 조성한 구덩이는 긴네모꼴로, 용도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구덩이 안에서 부뚜막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고, 주로 고분 등 의례 공간에서 나오는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가 출토돼 특수한 목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붉은색의 연질토기가 나온 것도 주목된다. 강 연구관은 “이전의 가야 관련 유적 발굴은 대부분 고분을 대상으로 한 것이서 연질의 생활형토기가 드물었다”며 “발굴이 좀 더 진행되면 가야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구소 측은 “이번에 확인된 토성은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권력의 존재를 보여 주는 증거다. 아라가야가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던 정치·경제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최고지배층의 생활문화와 가양의 토목기술, 방어체계, 대내외 교섭 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함안=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송고시간2018-06-07 16:03

아라가야, 토성 나왔지만 왕성 전모 파악은 장기 과제

[그래픽] 아라가야 왕성 실체 드러낼 8.5m 높이 토성 확인

(함안=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7일 함안 가야읍 가야리에서 개최한 발굴조사 설명회에서 공개된 토성 성벽.

(함안=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아라가야 왕성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조사 지역 일대가 왕궁터로 알려진 만큼 중장기 조사가 필요합니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그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조사 성과를 7일 발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5∼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5m, 폭 20∼40m인 성벽과 성벽 위에서 확인된 2열 나무기둥, 건물터, 구덩이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공개됐다.

성벽은 나뭇가지나 잎을 올리고 태운 목탄층을 만들고, 그 위에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사용해 공들여 축조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넓은 성벽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기둥 열이 나왔고, 구덩이 유구 안에서는 인근 말이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사한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를 비롯한 각종 토기가 출토됐다.

연구소 측은 지금까지 가야 권역에서 조사된 토성 높이가 2∼4m였고, 성벽 축조 과정에서 목탄층이 드러난 사례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아라가야 왕성 실체를 드러낼 실마리를 찾았다고 역설했다.

게다가 아라가야 권역에서는 말이산 고분군 같은 무덤만 조사된 상황에서 생활유적을 발견한 이번 발굴은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아라가야, 토성 나왔지만 왕성 전모 파악은 장기 과제 | 연합뉴스 (yna.co.kr)

 

아라가야, 토성 나왔지만 왕성 전모 파악은 장기 과제 | 연합뉴스

(함안=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아라가야 왕성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조사 지역 일대가 왕궁터로 알려진 만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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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06.07. 16:32 수정 2018.06.07. 16:49 

"앞으로 조사가 더 중요..아라가야 전성기 실체 다가갈 듯" (daum.net)

 

"앞으로 조사가 더 중요..아라가야 전성기 실체 다가갈 듯"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5~6세기, 이 시기에 부뚜막 시설을 가지고 있는 수혈(竪穴·구덩이) 구조는 지금까지 확인된 예가 없습니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7일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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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남문외 고분군]

 송고시간2015-04-13 16:14

함안서 아라가야 최후의 왕묘 추정 고분 발굴

 
아라가야 최후 왕묘 추정 함안 남문외 11호분

(함안=연합뉴스) 경남발전연구원이 최근 발굴조사를 한 경남 함안군 가야읍 남문외 고분군 11호분 전경(위)과 석실 내부(아래) 2015.4.13 <<경남발전연구원>>
seaman@yna.co.kr

(함안=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경남 함안군과 경남발전연구원(이하 연구원)은 가야읍 남문외 고분군에서 아라가야 최후의 왕묘로 추정되는 고분을 확인했다고 14일 밝혔다.

연구원은 지난해 10월 말부터 올해 1월말까지 남문외 11호분을 발굴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연구원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설실)으로 봉분 규모가 지름 29m에 이르는 11호분이 아라가야 봉토분 가운데 가장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그 크기와 6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을 고려해 아라가야 최후의 왕묘일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원은 또 11호분이 목제구조물을 설치해 석실 입구를 만든 점도 확인했다.

이런 형태는 아직 국내에서 조사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원은 또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 사이 진행한 말이산 고분군내 21호분 발굴조사에서 비늘갑옷, 재갈, 철모, 화살촉 등 무기류와 마구류, 순장인골 2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함안군과 연구원은 가야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하고 남문외 고분군,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해왔다.

seaman@yna.co.kr

출처; 함안서 아라가야 최후의 왕묘 추정 고분 발굴 | 연합뉴스 (yna.co.kr)

 
 

함안서 아라가야 최후의 왕묘 추정 고분 발굴 | 연합뉴스

(함안=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경남 함안군과 경남발전연구원(이하 연구원)은 가야읍 남문외 고분군에서 아라가야 최후의 왕묘로 추정되는 고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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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13호분]

 
 
 
 
강원식입력 2019. 12. 20. 16:46

말이산 가야고분, 치밀한 토목기술 설계로 축조

 

[서울신문]가야시대 고분군인 경남 함안군 함안말이산고분군 13호분은 ‘특수통로시설’과 봉토를 효율적으로 쌓기 위한 ‘중심분할석벽’ 축조공법 등 아라가야 왕묘의 독창적인 토목기술로 축조된 고분으로 확인됐다.

함안군과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말이산 13호분과 주변지역에 대해 지난해 부터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한 뒤 20일 조사성과 및 현장을 공개했다.

조사단은 그동안 조사결과 13호분 대형 돌덧널무덤의 축조와 관련된 ‘특수통로시설’과 봉토를 효율적으로 쌓기 위한 ‘중심분할석벽’ 축조공법 등 아라가야 왕묘의 독창적인 토목기술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함안 말이산 13호분 가야고분

 

북쪽 특수통로시설은 벽석재와 부장용품 운반 및 제의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로, 위에서 아래로 매장이 이뤄지는 돌덧널무덤에서는 처음으로 조사된 독특한 구조다.

조사단은 중심분할석벽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봉토고분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조로 대규모 암반대 조성공정에서 생성된 암반석재를 봉분축조에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구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석성의 성벽과 비슷하고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3m에 이른다.

조사단은 석벽은 정확히 돌덧널의 중심축 상부에 축조돼 13호분이 치밀한 설계를 통해 축조됐다는 것을 보여주며 2018년 조사된 함안 안곡산성 등의 성벽 축조기술과도 비슷해 당시 국가주도 토목기술의 상호관련성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돌덧널은 암반대 상부를 반반하게 만든 뒤 뒤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굴착하고 축조하였는데 모두 14매의 덮개돌을 덮었다. 특히 화강암제 등 강도가 높은 석재를 5매 정도 덮어 봉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했다. 덮개돌과 벽석 최상단석 사이에는 점토를 깔고 너비 10cm 정도의 얇은 각재를 놓아 최상단 벽석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수평을 조절했다.

함안 말이산 13호분 가야고분

 

돌덧널은 길이 8.7m, 너비 2.1m 규모로 내부는 모두 적색안료(산화철이 포함된 석간주)를 사용해 붉게 채색한 채색고분이다. 벽에서는 말이산고분군의 특징적 시설인 들보시설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들보시설 바닥면에는 나무재질 흔적도 관찰됐다.

조사단은 13호분 돌덧널의 세부적인 축조기술은 고대 기술사적 비교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조사결과 1980년대까지 많은 도굴피해로 원상이 훼손된 상태였지만 꽤 많은 유물도 출토됐다.

조형미가 뛰어난 두 귀 달린 장군(물이나 술을 담는 그릇)을 비롯한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류와 청동제 말갖춤장식편 및 갑옷편, 금동제 투조(透彫·금속판 일부를 도려내는 것) 허리띠장식구와 비취 곡옥(曲玉·굽은옥) 등이 출토됐다.

함안 말이산 13호분에서 출토된 토기 등 유물

 

조사단은 출토 토기 등을 근거로 13호분은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했다.

13호분 주변지역에서 봉분은 유실됐지만 86호분과 129호분 2기의 돌덧널무덤이 조사됐다. 86호분은 돌덧널의 길이가 6.5m로 들보시설을 갖춘 중형급 무덤으로 내부에서 그릇받침, 불꽃무늬굽다리접시 등의 토기와 화살촉, 창(철모) 등 무기류, 말갖춤새(등자, 재갈)가 출토됐다.

129호분은 86호분보다 규모가 작고 내부에서 뿔잔, 굽다리항아리 등 토기가 출토됐다.

 

조사단은 86호분과 129호분은 13호분과 비슷한 시기인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배치관계로 볼때 13호분에 딸린 배장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말이산 13호분은 사적 제515호 함안말이산고분군의 최대급 고분으로 일제강점기인 1918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한차례 약식조사를 했으나 몇 장의 도면과 사진만 남겨 고분의 역사적 가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뒤 많은 도굴이 이뤄져 원상이 훼손된 상태에서 2017년 봉분 중앙에 꺼짐 현상이 나타나 함안군은 원인규명과 보존조치를 위해 2018년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2018년 12월 18일 중간 조사성과 공개에서 덮개석에 새겨진 남두육성·청룡별자리 등 가야 최초의 별자리와 무덤방 내 4벽면을 붉게 채색한 채색고분, 고암반대 축조기법 등이 확인돼 관심이 쏠렸다.

함안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출처; 말이산 가야고분, 치밀한 토목기술 설계로 축조 | 서울신문 (seoul.co.kr)

 

말이산 가야고분, 치밀한 토목기술 설계로 축조

가야시대 고분군인 경남 함안군 함안말이산고분군 13호분은 ‘특수통로시설’과 봉토를 효율적으로 쌓기 위한 ‘중심분할석벽’ 축조공법 등 아라가야 왕묘의 독창적인 토목기술로 축조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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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2019-11-25 09:57

1천500년전 가야 사슴모양뿔잔, 네 부분 접합

박상현 기자기자 페이지

국립문화재연구소, CT로 제작기법 확인…"몸통은 비어"

함안 말이산 고분 출토 사슴모양뿔잔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올해 출토한 아라가야 사슴모양뿔잔은 네 부분을 각각 만든 뒤 접합해 완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5∼6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모양뿔잔을 X선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로 살펴본 결과, 원통형 뿔잔·몸체 상부·몸체 하부·굽다리를 개별적으로 제작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함안군과 두류문화연구원 요청으로 이뤄졌으며, 토기 길이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약 20㎝다.

사슴 머리는 몸체 하부로 연결되고, 그 위에 상부를 따로 덮은 것으로 조사됐다. 표면은 매끄럽게 다듬었고, 기벽 내부에는 바탕흙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손으로 누른 흔적이 있었다.

아울러 머리와 목 부분은 흙으로 가득 채웠으나, 원통형 뿔잔과 이에 연결된 몸체 내부는 액체를 채울 공간이 있다는 점도 알아냈다.

함안 말이산 고분 출토 사슴모양뿔잔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박종서 문화재보존과학센터 학예연구관은 "사슴 형상 머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몸체 바닥 부분을 먼저 만든 뒤 원통형 뿔잔과 붙은 몸체 상부를 접합하고, 굽다리 받침을 연결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센터가 사용한 장비는 12∼20㎛까지 조사가 가능하며, 익산 쌍릉 대왕릉에서 나온 인골 조사에도 활용됐다. 센터는 사슴모양뿔잔 외에도 가야 집모양 토기, 배모양 토기, 등잔모양 토기를 CT로 촬영했다.

함안 말이산 고분 출토 사슴모양뿔잔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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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천500년전 가야 사슴모양뿔잔, 네 부분 접합 | 연합뉴스 (yna.co.kr)

 

1천500년전 가야 사슴모양뿔잔, 네 부분 접합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올해 출토한 아라가야 사슴모양뿔잔은 네 부분을 각각 만든 뒤 접합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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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2018-12-18 09:00

함안 말이산 고분서 '별자리' 나왔다…"아라가야 천문사상 확인"

정아란기자

함안 가야유적 발굴현장 공개…"가야무덤서 첫 별자리 확인"

인근 왕성지서는 무기와 특수건물지 확인…"왕성 방어군대 거주 추정"

함안 말이산 고분 13호분에서 발견된 '별자리' 덮개돌

[문화재청 제공]

 

(함안=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아라가야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에서 '별자리' 그림이 발견됐다. 무덤 천장 한복판 덮개돌에 새긴 별자리다.

가야 무덤에서 별자리는 처음으로, 옛 아라가야인의 천문사상을 엿보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함안군과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조사 중인 경남 함안군 가야급 도항리 936번지 소재 '함안 말이산 13호분'(사적 515호)에서 네 벽면을 온통 붉게 채색한 구덩식 돌덧널무덤 덮개돌에서 125개 별자리를 찾아냈다고 18일 밝혔다.

13호분은 말이산 고분군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봉분 규모도 직경 40.1m 높이 7.5m에 달하는 아라가야 최대급 고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한 차례 조사한 적이 있으나 유물 수습 수준이었다.

100년 만에 재개된 이번 조사에서는 13호분이 붉은 채색을 입힌 이른바 주칠(朱漆)고분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무덤방 내부 4개 벽면은 먼저 점토를 바르고 그 위에 적색 안료로 채색했다.

돌방무덤에서 주로 보이는 붉은 채색고분이 시기적으로 앞서는 돌덧널무덤에서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함안 말이산 13호분

[문화재청 제공]

 

무덤방도 길이 9.1m, 폭 2.1m, 높이 1.8m 최대급 규모로 도굴구멍에서 수습한 유물 연대로 보아 5세기 후반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방을 덮은 덮개돌 아랫면에서는 125개 별자리 그림인 성혈(星穴)이 발견됐다.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으로, 각각 다른 성혈 크기는 별 밝기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혈을 새긴 면을 주인공이 안치된 무덤방 중앙부에 배치한 것을 보면, 무덤을 축조할 당시부터 이렇게 구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사단은 "성혈이 고분 덮개돌 윗면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되기는 하지만,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옛 아라가야인들의 천문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편 지난 6월 확인된 인근 아라가야 왕성지 추가 발굴조사에서는 망루, 창고, 고상건물, 수혈건물, 집수지로 추정되는 특수목적 건물지가 다수 발견됐다.

현재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14동으로, 중앙 빈터를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돼 왕성 내부 공간 구조에 대한 의도적인 기획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 중 10호 건물지는 판석을 세워 긴네모꼴의 정교한 건물터를 조성하고, 길이 5m 부뚜막도 설치했다.

가야 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구조로, 고대 건축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자료다.

이밖에 여러 수혈(구덩이식) 건물지에서는 쇠화살촉, 쇠도끼, 비늘갑옷편 등 일반적인 집자리나 건물지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들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이것으로 보아 수혈건물지는 철제무구로 무장한 군사집단이 왕성을 방어하고자 상시적으로 거주했던 시설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아라가야 왕성 발굴지 조사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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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안 말이산 고분서 '별자리' 나왔다…"아라가야 천문사상 확인" | 연합뉴스 (yna.co.kr)

 

함안 말이산 고분서 '별자리' 나왔다…"아라가야 천문사상 확인" | 연합뉴스

(함안=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아라가야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에서 '별자리' 그림이 발견됐다. 무덤 천장 한복판 덮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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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안곡산성]

 

송고시간2018-12-31 06:01

아라가야 산성 성벽 규모·축조방법 처음 드러났다

함안 안곡산성 내성 동벽 발굴…너비 14m·높이 6m

깬돌과 점토로 석심 조성…"다른 지역에는 없는 구조"

함안 안곡산성 내성 동벽 발굴조사 모습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올해 아라가야 추정 왕성지와 왕릉급 무덤인 말이산 13호분에서 잇따라 눈길을 끄는 조사 성과가 나온 경남 함안에서 아라가야 산성 성벽의 웅장한 규모와 독창적 축조방법이 최초로 확인됐다.

함안군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원장 배덕환)은 아라가야 산성으로 확실시되는 함안 칠서면 안곡산성 내성 동벽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성벽 너비가 약 14m, 잔존 높이가 약 6m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31일 밝혔다.

연구원은 지난해 시굴조사를 한 장소에서 남북 길이 15m, 동서 길이 30m인 부지 450㎡를 발굴했다.

이를 통해 안곡산성 내성이 할석(割石·깬돌)과 점토로 너비가 8m에 이르는 석심을 조성한 뒤 외부를 흙으로 마감한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함안 안곡산성 내성 동벽에서 드러난 석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조사단은 성벽 축조 과정도 알아냈다. 먼저 약 23∼24도 경사로 지표를 걷어낸 다음 약 10∼20㎝ 두께로 두 차례에 걸쳐 점토를 발라 땅을 다졌다. 점토층에는 성벽 중간쯤에 나무기둥을 박았다.

연구원 관계자는 "나무는 성벽 내측과 외측의 구분점이자 석심을 조성할 때 버팀목 역할을 한 중심목인 것 같다"며 "나무기둥 사이 거리는 1.4m 정도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이어 20∼80㎝ 크기 할석과 점도가 높은 점토로 중심목 언저리까지 층을 이뤄가며 석심을 만든 뒤 아래쪽을 보강하고, 중심목 위로 다시 한번 석심을 올리고 흙을 덮어 마무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토석혼축성 대부분은 기단부에 일부 석재를 사용할 뿐, 안곡산성처럼 많은 할석과 점토로 석심을 조성한 예는 없다"며 "이러한 축조기술은 말이산 13호분에도 적용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석심토성 구조는 다른 가야 지역은 물론 고대 어느 국가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며 "석심 외측의 층단식 축조 상태는 합천 전(傳) 초팔성과 유사한 부분이 관찰된다"고 덧붙였다.

함안 안곡산성 성벽에서 나온 기둥 구멍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이번 조사에서는 성벽 위쪽에서 지름 47∼66㎝, 잔존 높이 17∼28㎝인 기둥 구멍 4개가 일렬로 나타났다.

또 유물로는 개(蓋·뚜껑), 단경호(短頸壺·목짧은항아리), 고배(高杯·굽다리접시), 기대(器臺·그릇받침) 조각이 발견됐다.

연구원 관계자는 "기둥 구멍은 아라가야 추정 왕성지에서 나온 것과 유사하다"며 "성벽과 평행하게 4개만 있다는 점에서 나무울타리보다는 장대나 망루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토기에 대해선 "고배는 함안 도항리 고분군 1호 석곽묘, 오곡리 유적에서 출토한 유물과 비슷하다"며 "산성은 아라가야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운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사로 아라가야 산성의 실체를 처음으로 규명하고 특징을 밝힐 실마리를 찾았다"며 "안곡산성은 말이산 13호분과 아라가야 추정 왕성지에서 사용한 토목기술이 적용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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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라가야 산성 성벽 규모·축조방법 처음 드러났다 | 연합뉴스 (yna.co.kr)

 

아라가야 산성 성벽 규모·축조방법 처음 드러났다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올해 아라가야 추정 왕성지와 왕릉급 무덤인 말이산 13호분에서 잇따라 눈길을 끄는 조사 성과가 나온 경남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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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3 16:14

"함안 안곡산성, 5세기 아라가야시대에 축조…가야토기 출토" | 연합뉴스 (yna.co.kr)

 

"함안 안곡산성, 5세기 아라가야시대에 축조…가야토기 출토" | 연합뉴스

(함안=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경남 함안군에 있는 안곡산성 시굴 결과 축조 시기가 옛 아라가야 시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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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 기자입력 2023. 5. 20. 12:37

함안 칠원산성 "아라가야 축조 토성·석성과 조선시대 석성 확인" (daum.net)

 

함안 칠원산성 "아라가야 축조 토성·석성과 조선시대 석성 확인"

기사내용 요약 함안군, 정밀측량·시굴조사 결과 오는 23일 공개 [함안=뉴시스] 김기진 기자 = 경남 함안군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과 함께 오는 23일 ‘함안 칠원산성(경상남도 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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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현동고분군]

 

KNN 박명선 기자입력 2019. 6. 5. 21:15수정 2019. 6. 5. 22:15

'가야무덤 600여 기' 쏟아졌다..거대한 부부 묘 '눈길'

https://tv.kakao.com/v/399118617

 

<앵커>

경남 거제와 창원을 잇는 도로 건설 현장 근처에서 가야 시대 최대 규모의 고분군이 발견됐습니다. 고대왕국 가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토기와 청동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가운데 거대한 부부 묘가 눈길을 끕니다.

KNN 박명선 기자입니다.

<기자>

 

경남 창원시 현동 고분군입니다.

가야 연맹체의 하나인 아라가야 덧널무덤에서 발굴조사 결과 발표가 진행 중입니다.

1천6백여 년 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6백여 개가 한꺼번에 발굴되면서 가야 시대 유물 1만여 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 가운데 특히 규모가 유독 큰 목곽묘 2기는 해발 76m 선상에 나란히 만들어진 거대한 부부 묘로 추정됩니다.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부부 묘인데요, 다른 고분군의 2배 이상으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황철주/삼한문화재연구원 팀장 : 각각의 묘들은 여성과 남성으로 볼 수 있고 나란하게 조성된 점을 봤을 때 이 묘는 부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또 낙타 모양을 띈 토기와 제철 생산 유적도 나와 당시 상당히 거리가 먼 지역과도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배 모양 토기의 경우 근해가 아닌 먼바다를 오가는 배로 국제적인 교역 양상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양하석/삼한문화재연구원 부원장 : 이곳에 철을 생산하는 기반이 있었고 철을 운반하는 배가 있었고 낙타 머리가 부착된 상형 토기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대규모 유물들은 고대왕국 가야 사람들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사료로 큰 의미를 더 하고 있습니다.

출처; '가야무덤 600여 기' 쏟아졌다..거대한 부부 묘 '눈길' (daum.net)

 

'가야무덤 600여 기' 쏟아졌다..거대한 부부 묘 '눈길'

<앵커> 경남 거제와 창원을 잇는 도로 건설 현장 근처에서 가야 시대 최대 규모의 고분군이 발견됐습니다. 고대왕국 가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토기와 청동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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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

[고성 송학동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7호분 발굴조사 현장 공개회.
ⓒ 고성군청 관련사진보기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7호분 발굴조사 현장 공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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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국 '소가야(小伽倻)'의 뛰어난 토목기술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경남 고성군은 송학동고분군 7호분의 발굴조사 현장 공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28일 오후 고성읍 송학리 460번지 일원 발굴조사 현장에서 군민공개회가 열렸다.

이번 발굴조사는 가야사복원정비사업과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 준비의 하나로 유적의 성격과 축조방법을 규명해 향후 정비 방안을 결정하고 세계유산등재의 기반자료로 활용하고자 시행되었다.

고성군은 "고분의 하단부에 대한 정밀조사를 통해 석재가 아닌 '물성'이 서로 다른 흙덩이(토괴)를 이용하여 분할 흙쌓기(성토)하는 등 매우 정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성군은 "이를 통해 최초로 소가야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7호분과 바로 인접한 남쪽에서 통일신라기로 추정되는 기둥구멍(적심) 1.8m 내외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지에서는 기와와 '송(松)○'이 새겨진 명문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성군은 "이를 볼 때, 송학동고분군 일원이 소가야의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성 역사의 타임캡슐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고성군 관계자는 "지난해 12월에 시작된 고성 만림산 토성의 발굴조사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송학동고분군이 세계유산등재, 소가야왕도 복원에 한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가야복원사업과 세계유산등재에 군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고 당부했다.

소가야는 여섯개의 가야 가운데 신라 유리왕 19년(42년)에 경남 고성 부근에 세워진 나라를 말한다.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7호분 발굴조사 현장 공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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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7호분 발굴조사 현장 공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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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 7호분 발굴조사 현장 공개회.
ⓒ 고성군청
 
 

[고성 동외동패총]

 

최일생입력 2023. 7. 26. 20:31
 

‘고성 동외동패총’, 소가야를 대표하는 국가사적 지정 성큼 [고성소식]

경남 고성군은 고성읍 중심지에 위치한 삼한시대 소가야의 대표 생활유적인 ‘고성 동외동패총’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해 7월 25일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주민설명회를 개최했다. 고성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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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허윤희 기자입력 2020. 10. 28. 18:11수정 2020. 10. 29. 14:25

가야 무덤이라는 창녕 고분, 쏟아져 나온 건 신라 장신구

학계 "이미 신라에 편입됐다는 증거"

경남 창녕 교동 63호분에서 금동관이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가야인가 신라인가. 경남 창녕 교동 고분에서 금동관 등 신라 장신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발굴단은 “5세기 후반~6세기 초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밝혔지만, 피장자의 몸을 감쌌던 장신구 일체는 모두 신라 유물이라 고분의 성격을 둘러싸고 향후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에서 도굴되지 않은 교동 63호분을 지난 1년간 발굴한 성과를 28일 발표했다. 높이 21.5㎝의 금동관을 비롯해 관 좌우에 길게 늘어뜨린 장식인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1쌍, 유리 구슬 목걸이, 은반지 4점, 은허리띠 등 ‘머리에서 허리까지’ 장신구 일체가 나왔다. 연구소는 “신발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지난 9월 화제가 됐던 경주 황남동 신라 귀족 여성 무덤과 판박이 구성”이라고 했다.

창녕 교동 63호분 석곽 내 피장자 장신구 일체가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신라 유물로 치장한 비화가야 수장?

교동 63호분은 봉토 지름 21m, 높이 7m의 대형 봉토분으로 남북이 약간 긴 타원형이다. 이 일대 고분군에서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흔치 않은 사례다. 경주 고분은 돌무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도굴꾼이 팔 수 없는 구조인 반면, 창녕 고분은 맨 위 뚜껑돌만 열면 빗자루로 쓸어담을 수 있는 구조라 일제강점기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다행히 63호분은 나중에 축조된 39호분 봉토에 가려져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창녕 교동 63호분 및 주변 고분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금동관은 맨 아래에 너비 약 3㎝의 관테가 있고,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 3개를 세운 형태. 관테 아래 곱은옥과 금동구슬로 이뤄진 금동 드리개를 늘어뜨렸고, 관테 양 측면에는 원통형 금동막대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금동관”이라고 했다. 금동관 내부에는 관모(冠帽·모자)로 추정되는 직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덤 주인공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도 6점 확인됐다.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아직 흙더미인 상태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치아만 6점”이라며 “허리에 큰 칼을 차는 대신 작은 손칼 2점이 나왔고, 굵은 고리 귀걸이가 나온 점 등으로 볼 때 여성으로 추정된다. 목관의 꺽쇠 위치 등으로 보아 키는 155㎝ 정도”라고 했다.

순장의 흔적도 나왔다. 무덤 주인공의 발치 바닥을 약 40㎝ 낮춘 공간에 순장자 2명이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금동제 가는 고리 1점, 항아리 2점, 쇠도끼 2점과 쇠낫 1점이 출토됐다.

창녕 교동 63호분 석곽 내 유물 노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계 “이미 신라에 편입됐다는 증거”

연구소는 “장신구는 신라계 유물이지만 무덤 구조는 전형적인 가야 양식”이라며 “비화가야 지배세력이 신라에서 받은 위세품(威勢品·왕이 지방세력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하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을 묻었거나, 당시로선 가장 선진문물이었던 신라 스타일을 모방해 직접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학계에선 “금동관 등 장신구를 착장한 방식이 신라 무덤 양상과 일치한다는 건 창녕 일대가 이 시기에 이미 신라에 확실하게 편입됐다는 증거”라는 반론이 나왔다. 이한상 교수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학계에서 가야냐 신라냐를 두고 논란이 계속돼왔는데, 이번 발굴로 신라라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며 “무덤 양식은 가장 보수적인 것이라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 지역 고유의 풍습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했다.

창녕 교동 63호분 금귀걸이가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지난 3월 끝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에서도 창녕 유물을 죄다 ‘비화가야’로 소개해 논란이 됐었다. 국내 가야사 연구를 대표하는 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당시 본지 통화에서 “창녕 고분은 5세기 이후는 신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최근 2020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가야고분군’을 선정한 바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 7곳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이 안에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포함돼 있다.

창녕 교동 고분 조사 지역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출처;가야 무덤이라는 창녕 고분, 쏟아져 나온 건 신라 장신구 (daum.net)

 

가야 무덤이라는 창녕 고분, 쏟아져 나온 건 신라 장신구

가야인가 신라인가. 경남 창녕 교동 고분에서 금동관 등 신라 장신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발굴단은 “5세기 후반~6세기 초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밝혔지만, 피장자의 몸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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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29 06:00 수정 : 2019.12.05 12:38

빨간 고무대야에 빵봉지까지…1500년전 가야 무덤에서 보이는 도굴의 흔적

 

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군 중 39호분애서 눈에 띈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버킷…. 발굴단은 이뿐이 아니라 빵 봉지까지 수습했다고 전했다. 1960~70년대 도굴의 흔적일 가능성이 짙다. 창녕|이기환 선임기자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버킷, 그리고 삼립빵 봉지까지….’ 28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내에서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63호분 덮개돌 개방행사를 현장취재하던 기자의 눈을 찌푸리게 한 장면이 있었다.

제비뽑기로 TV 기자들을 위한 공개가 시작돼 신문기자들은 차례를 기다리던 차에 63호분 위에 조성된 39호분 발굴성과를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으로부터 듣고 있었다. 5세기 후반 무덤으로 보이는 39호분은 교동·송현동 고분 250여기 중 세번째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450~500년 사이 가야연맹의 소국 중 하나인 비화가야를 다스린 39호분의 주인공은 약 50년 가량 먼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뻘 조상의 무덤 위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밑에 있던 63호분은 교동·송현동 고분군 중 유일하게 도굴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무덤 밑에 또 다른 무덤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한창 설명을 들으면서 39호분 사진을 찍고 있던 기자의 눈에 명색이 언론공개행사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잡혔다. 길이 6.9m 너비 1.6m, 깊이 1.7m 규모인 무덤방에 흙이 덮여 있고, 토기류가 일부 보였는데, 아 글쎄 안쪽에 빨간 고무버킷(속칭 바케쓰)이 버젓이 드러나 있는게 아닌가. 버킷에는 줄이 달려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무덤 입구 쪽에는 역시 흙이 묻은 빨간 고무대야가 보였다. 기자는 내심 ‘조사원들이 발굴하다가 놓고 올라온 물품이겠거니’ 하고 ‘그래도 뒷정리는 제대로 하고 공개해야지 저게 뭐냐’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양숙자 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의 설명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저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버킷은 도굴범이 놓고 간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해서 물어보니 “대야와 버킷 뿐 아니라 흙묻은 빵 봉지까지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굴범이 놓고 갔다? 그렇다면 도굴범은 저 커다란 빨간 고무대야와 버킷으로 흙을 파고 유물을 실어날랐으며, 심지어 무덤방에서 유유히 빵까지 먹었다는 것이 아닌가.

39호분에 뚫린 도굴구덩이. 8개의 덮개돌로 밀봉했지만 옆에서 뚫은 도굴구덩이는 피할 수 없었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박종익 연구소장은 “수습한 흙묻은 빵 봉지를 파악해보면 어느 회사의 어느 때 제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양숙자 실장은 “잘못 세척했다가는 봉지의 포장 디자인과 글씨가 지워질 수 있어 조심히 다룰 것”이라고 덧붙였다. 발견된 빵 봉지 위에는 ‘주식회사 기린’과 ‘삼립빵’이란 상표, 300원의 권장소비자가격이 선명하게 보였다. 회사가 당초 삼립식품에서 1981년 (주)기린으로 바뀌고, 이후 1980년만 ‘삼립빵’이란 상표를 같이 쓴 것을 감안하면 도굴은 80년대 중·후반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39호분 현장에서 발견된 삼립빵 봉지. 과거 도굴의 흔적으로 보인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무덤방의 양상으로 보아 도굴이 몇차례 자행됐는지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39호분에서는 두 개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양숙자 실장은 “2개의 도굴 구덩이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서 “그러나 두차례 도굴로 생긴 구덩이인지, 혹은 도굴범이 한차례 구멍을 뚫었다가 실패한 뒤 다른 새로운 구덩이를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한 개의 도굴 구덩이는 무덤방 옆을 두른 1.5m, 두께 10㎝의 판석에 막힌 흔적이 보였다. 반면 다른 도굴구덩이는 판석과 판석 사이를 뚫고 무덤방과 통한 모습이었다.

사실 창녕을 비롯한 고령·함안·김해·성주·선산 등 영남지방은 일제강점기부터 무단발굴과 도굴의 무대였다.

일제관학자들은 ‘가야지역에 고대 일본의 식민지라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믿고 1900년대 초부터 그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369~562년 사이 야마토(大和) 정권이 백제, 가야, 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일제는 그렇게 대대적으로 발굴해간 가야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임나일본부 증거를 잡기 위해서’ 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보도를 보자.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동국동문화(同國同文化)라는 사상이 있으면….”

하지만 일제 관학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끝내 찾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도쿄대(東京大)의 명을 받고 가야지역 발굴에 나선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이렇게 토로했다.

“막상 임나일본부라고 해도 연구해보면 조선풍이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임나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발굴을 맡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쓰이는 창녕·교동 고분군 중에서도 규모가 큰 7호분과 89호분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을 대거 일본으로 빼돌렸다. 7호분에서만 700여점의 유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임나일본부와의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의 마구잡이식 발굴과 유물반출의 결과는 처참했다. 임나일본부와의 관계를 입증하지 못한 일제는 ‘용도폐기’된 가야고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결국 창녕의 교동·송현동 고분 역시 도굴꾼의 소굴이 됐다. 물론 일제에게만 화살을 돌릴 수 없다. 해방 이후에도 이와 같은 문화유산의 방치가 이어졌고, 결국 기자가 1500년전 비화가야 지배자의 무덤에서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버킷, 빵 봉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출처; 빨간 고무대야에 빵봉지까지…1500년전 가야 무덤에서 보이는 도굴의 흔적 - 경향신문 (khan.co.kr)

 

빨간 고무대야에 빵봉지까지…1500년전 가야 무덤에서 보이는 도굴의 흔적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버킷, 그리고 삼립빵 봉지까지….’ 28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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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11-28 14:35수정 2019-11-28 19:30

1500년만에 열린 가야 권력자 무덤 속은 빨강 빛으로 덮여있었다

28일 덮개돌 개봉한 창녕 교동 63호분 발굴현장
돌 올리자 토기와 흙으로 채워진 무덤방
무덤 돌벽은 진흙 바르고 빨간 주칠 흔적 인상적
주칠 흔적은 귀신 쫓는 벽사 의미로 추정
개석을 들어올린 뒤 드러난 63호분 묘실 내부. 도굴되지 않은 매장 당시의 유물 상태가 그대로 살아있다. 바닥에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창녕식 토기’들과 금속제 도구 조각, 흙층이 뒤섞인 상태로 채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8일 오전 11시께 경남 창녕읍 교동고분군 63호분 발굴현장에서 크레인이 3톤 넘는 덮개돌을 들어올리는 장면이다.

 

5세기 가야소국인 비화가야 권력자의 큰 무덤이 1500년만에 처음 열렸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8일 오전 11시께 경남 창녕읍 교리 산 5번지 교동기야고분군에서 최근 도굴되지 않은채 발견된 대형무덤인 63호분의 덮개돌(개석)을 들어내고 길이 6m가 넘는 묘실 내부를 취재진과 학계 전문가들에게 내보였다.무게 2.8톤, 3.8톤의 개석 2개를 기중기가 걷어올리면서 드러난 묘실 안은 목긴항아리(장경호)와 뚜껑 달린 굽다리접시(장경호) 등 특유의 창녕식 토기들이 벽에서 흘러내린 흙과 섞인 채 바닥 공간을 가득 채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토기들 사이로는 신분 높은 무덤주인의 상징물로 묻는 농기구 일종인 살포와 철화살촉, 말갖춤 등으로 추정되는 금속제 유물의 조각들도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덮개돌 안쪽으로는 토기가 없는 여백 공간도 보였는데, 순장자가 변힌 구역으로 추정된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또다른 관심거리인 무덤주인 인골이 남았을지에 대해서는 겹겹이 쌓인 토기들과 흙층을 수습하고 물체질해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63호분 무덤 석곽을 덮고있던 개석(덮개돌) 한개가 크레인에 매달려 들려지는 순간. 아래 작은돌들을 다듬어 쌓은 무덤방 양벽과 토기로 가득찬 바닥 부분이 보인다.
국립가야연구소 학예사가 개석이 들어내어진 뒤 드러난 무덤방 바닥을 보면서 설명하고 있다.
수화기 모양의 색다른 몸체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비화가야 지역 특유의 등잔형 토기. 창녕 교동고분군에서만 유일하게 출토된 유물이다.
수화기 모양의 몸체 디자인을 지닌 비화가야 지역 특유의 등잔형 토기.
 
작고 각진 돌들을 쌓아 만든 묘실 사방벽도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진흙을 전면에 펴바른 뒤 빨간 주칠을 한 흔적이 곳곳에 뚜렷하게 남아 있어 취재진과 전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개석을 들어내기 전 내시경을 넣어 사전 조사하는 작업에서도 확인된 주칠 흔적은 63호분 발굴 작업에서 가장 도드라진 특징으로 꼽히는 성과다. 다른 어느 고분보다도 주칠 범위가 넓고 흔적도 뚜렷하다고 한다. 연구소 쪽은 고대인들이 삿된 귀신을 망자한테서 내쫓는 벽사의 의미로 무덤벽 사방에 빨간 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무덤방 벽에 숱하게 주칠한 흔적이 발견되는 고대 일본 열도의 고분 축조 양식과도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발굴현장 아래 임시 진열대에는 63호분 인근의 62호분에서 출토된 등잔형 상형토기가 단연 주목 대상이었다. 전화 수화기 혹은 천칭 모양의 몸체에 2개의 등잔 모양을 균형감 있게 얹은 이 상형 토기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비화가야 장인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뽐냈다. 박종익 연구소장은 “대형가야고분이 전혀 도굴되지 않고 매장 당시의 상황을 유지한채 발견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비화가야의 장묘의례와 생활사를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묘실 바닥에 두껍게 겹을 이루어 쌓인 토기들과 흙층을 걷어내면 인골과 금관, 귀고리, 말갖춤 같은 중요유물들이 다수 출현할 가능성도 상당하다는게 연구소 쪽의 전망이다. 양숙자 학예실장은 두어달 정도로 예상되는 묘실 수습작업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창녕/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출처;1500년만에 열린 가야 권력자 무덤 속은 빨강 빛으로 덮여있었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1500년만에 열린 가야 권력자 무덤 속은 빨강 빛으로 덮여있었다

5세기 가야소국인 비화가야 권력자의 큰 무덤이 1500년만에 처음 열렸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8일 오전 11시께 경남 창녕읍 교리 산 5번지 교동기야고분군에서 최근 도굴되지 않은채 발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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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 12. 29. 10:35수정 2008. 12. 29. 10:35

창녕 고분 순장자 매장자세, 3D 스캔 복원 (daum.net)

 

창녕 고분 순장자 매장자세, 3D 스캔 복원

【서울=뉴시스】무덤의 주인공과 종속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함께 묻는 고대 순장(殉葬) 풍습이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됐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현)가 올해부터 6세기 중반

v.daum.net

 

 

 

 

 

송고시간2007-12-20 11:54

귀고리 찬 1천500년전 가야인 인골 발굴

귀고리 찬 가야인 인골

귀고리 찬 가야인 인골
(서울=연합뉴스) 귀고리를 찬 1500년전 가야 사람 인골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에서 발견됐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귀고리 찬 가야인 인골

귀고리 찬 가야인 인골
(서울=연합뉴스) 귀고리를 찬 1500년전 가야 사람 인골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에서 발견됐다. 도굴로 인해 유물 상당수가 도난당했음에도 각종 토기류가 다수 발견됐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가야문화재연구소 창녕 송현동 고분조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귀고리를 찬 1천500년 전 가야 사람 인골이 발굴됐다.

1500년전 각종 금제품

1500년전 각종 금제품
(서울=연합뉴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 출토 각종 금제품.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유적 보존 정비 차원에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을 발굴조사한 결과 봉분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 2기를 비롯해 중형 고분 2기, 소형 석곽묘 6기, 제의(祭儀)와 관련된 매납 유구 2기, 묘역 조성과 관련된 주변시설 등을 확인했다고 20일 말했다.

 

대형 고분인 15호분은 도굴로 인해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무덤 주인공과 함께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장자 4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1500년전 동물 문양 토기

1500년전 동물 문양 토기


(서울=연합뉴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 출토 동물 문양 새김 토기.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이 중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은 순장자 1구의 인골은 금귀고리(지름 2㎝)를 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토기의 동물문양과 같은 무늬를 새긴 토기편 등이 고배(굽다리접시)를 비롯한 다른 토기류와 같이 수습됐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이 외에도 15호분에서는 금동관 파편과 금반지, 금구슬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마구류 등이 일부 수습돼 이곳이 왕릉급 무덤임이 확인됐다.

1500년전 가야인 금반지

1500년전 가야인 금반지


(서울=연합뉴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발굴조사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제15호분에서 발견된 금반지.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15호분은 무덤방 한쪽(북쪽)에 입구를 마련한 횡구식(橫口式) 석실분(길이 856㎝, 너비 170㎝, 높이 225㎝)로 바닥과 천장, 그리고 벽면까지 회칠을 해서 내부를 마감했다. 8장 천장 뚜껑돌 바깥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돌을 쌓고 점토를 발라 밀봉함으로써 내부 석실을 보호한 적석 석실묘(積石石室墓) 구조로 밝혀졌다.

봉토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고 외곽에는 호석(護石.두름돌)을 설치했으며 , 묘역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주변 경사면에 석축단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조사됐다.

출처; 귀고리 찬 1천500년전 가야인 인골 발굴 | 연합뉴스 (yna.co.kr)

 

귀고리 찬 1천500년전 가야인 인골 발굴 | 연합뉴스

가야문화재연구소 창녕 송현동 고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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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7-12-25 13:27

창녕 송현동 고분 석실은 맞배지붕형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 제15호 석실분 내부 북벽에서 발견된 순장자. 이곳에서는 모두 4구에 이르는 순장자 인골이 발견됐다. 이 중 북쪽 벽면과 나란히 누운 인골은 20-30대 성인 여성으로 신장은 135cm 가량으로 밝혀졌다. 창녕/연합뉴스
순장자 1명은 성인 여성..키는 13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지난 22일 개최한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은 올해 조사된 유적 중에서도 대형급 무덤에 속하는 15호분 구조가 횡구식(橫口式) 석실분(石室墳)인지, 아니면 수혈식(竪穴式) 석실분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석실분이란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을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을 말한다. 석실 위에는 거의 예외 없이 흙이나 돌을 쌓아 봉분(封墳)을 만들기 마련이다.이런 석실분을 학계에서는 외부에서 석실 무덤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 문을 무덤방 한쪽에 마련하되, 거기로 통하는 통로가 있으면 횡혈식(橫穴式)이라고 하고, 그런 별도 통로가 없이 문만 덩그리니 있는 형식을 횡구식이라 한다. 반면 문이건 통로건 없으면 수혈식이라 한다.15호분은 발굴 조사 결과 원형 봉토 중심부 지하에서 남-북 방향으로 중심축을 마련한 단면 사다리꼴, 평면 장방형 석실이 확인됐다. 규모는 길이 8.56m, 너비 1.70m, 높이 2.25m, 면적 14.5㎡였다. 남북 방향 장축과 동서 방향 너비 비율은 5대 1.이미 식민지시대에 도굴이 이뤄져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석실 남쪽 벽 부근에서는 이 무덤 주인공 시신(혹은 그를 넣은 관)을 놓았던 단인 길이 2.70m의 시상(屍床)이 드러났고, 그 반대편(북쪽 벽)에서는 순장자 4구의 시신과 토기를 비롯한 관련 부장품 일부가 발견됐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 제15호 석실분 내부(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 벽에 순장자와 각종 부장품을 넣었다. 이 석실은 맞배지붕 모양을 본떴다. 창녕/연합뉴스

특이한 대목은 석실 남쪽 벽 가까운 곳에 놓였던 주(主) 피장자는 머리를 남쪽, 다리는 북쪽으로 둔 데 비해 그 반대편 순장자 시신 4구는 모두 석실 너비 방향으로 배치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 순장자는 한결같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 아쉽게도 도굴 과정에서 순장자들은 대체로 두개골과 발뼈만 남긴 채 몸통 부분 인골은 파괴돼 버렸다.순장자 4구 중에서도 석실 북쪽 벽면에 바로 붙어 발견된 인골 왼쪽 귀에서는 금귀고리 1점이 발견됐다. 이 순장자는 인골 출토 상황으로 보아 석실 천장, 즉, 하늘을 바라보며 '一' 자형으로 누워 있었다. 시신을 구부려 매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거의 분명하게 드러났다.이들 인골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기획과 서민석 박사가 감정을 했다. 치아 발육상태나 그 숫자, 무릎 연골쪽에 있는 성장판, 골반뼈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20-30대 여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15세 이후가 되면 닫힌다는 성장판은 닫혀 있었으며, 치아상태로 보아 성인으로 밝혀졌다. 또 골반뼈를 통해 여성이라는 점도 입증됐다.그렇다면 이 성인 여성 키는 얼마일까?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줄자로 측량한 조사단은 135㎝를 기록한 눈금에 놀랐다. 머리나 다리쪽 피부를 고려한다 해도 137㎝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 고대인들의 신장이 현재보다 작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고고학 증거로 확인됐으나, 그래도 성인 여성 신장 치고 135㎝는 너무 단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석실은 암반을 파내고 바닥을 편평하게 조성했으며, 동서남북 네 벽면은 깬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천장은 대형 판석 8장을 덮어 조성했다.이런 구조를 관찰한 자문위원들은 북쪽 벽면을 외부와 연결하는 문 즉, 횡구(橫口)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신경철 교수와 김두철 교수 같은 부산대 고고학과 팀은 북벽이 횡구로 볼 만한 특징을 지니긴 했지만, 축조 상태로 보아 나중에 그것을 다시 열고 닫기 위한 구조가 아닌 점으로 보아 횡구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표출했다.그렇지만 동아대 고고학과 박광춘 교수는 "북벽을 보고도 어떻게 횡구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지난해 조사한 같은 송현동 6-7호분 조사에서도 횡구식 석실분임이 명백히 밝혀졌다"고 반박했다.이런 논란이 오간 이날 자문회의에서 다소 의외인 점은 석실 전체 구조가 완연한 맞배지붕형 건물인 점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 제15호 석실분 외부. 측면을 보면 석실이 맞배지붕 모양을 본뜬 건물형임을 알 수있다. 창녕/연합뉴스
 
15호분은 전체 석실 중 3분의 1 가량이 외부로 완전 노출되어 공개됐다. 그 결과 석실 내부 구조 뿐만 아니라 그 천장 위 구조까지 완전히 드러났다. 그 결과 석실은 사다리꼴 몸통을 마련하고 그 위는 대형 판석 8장으로 천장을 얹고는 다시 그 위에는 단면 정삼각형으로 깬돌을 쌓아 올린 모습이었다.이는 누가 봐도 맞배지붕형 건축물을 본 뜬 형식이었다.가야문화재연구소 박종익 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초가집 형식이라고 본다"면서 "이런 독특한 석실 구조는 국내에서는 명확한 실물로는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등록 2019-11-04 12:42수정 2019-11-04 13:42

가야인 토기 굽던 가마터, 역대 가장 큰 규모로 드러나다

창녕 퇴천리서 토기가마 유적 발굴
현존 최대규모의 가야토기 가마
천정 벽면 가장 완전한 상태로 남아
가야 토기가마 얼개 조업방식 한눈에
역대 최대규모로 확인된 경남 창녕 퇴천리 가야토기가마의 전경.
 
4~5세기 고대 가야 연맹의 소국 비화가야의 본거지였던 경남 창녕에서 당시 토기를 굽던 가야인의 가마터가 역대 최대규모로 확인됐다.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원장 배덕환)과 창녕군은 지난 7월부터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사업의 일부로 발굴조사를 벌여온 군내 퇴천리 유적에서 길이 15m, 깊이 2.3m에 달하는 가야시대의 대형 토기가마 1기와 토기 흙을 캐는 토취장과 폐기장의 구덩이, 배수로 흔적 등을 찾아냈다고 4일 발표했다.발견된 토기 가마는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시대의 토기 가마들 가운데 가장 크다. 특히 가야인들이 10여차례 보수한 가마의 천정부 벽면(두께 130cm)이 온전한 상태로 처음 드러났다. 1500여년전 가마에 불을 때고 고열로 내부를 가열한 흔적이 천장벽면에 고스란히 아롱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토기 가마의 얼개와 더불어, 토기를 넣고 배열하고 굽고 꺼내는 등의 세부 작업 방식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획기적 단서를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출토품은 큰 항아리와 화로형 그릇받침, 짧은목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이다. 유물들이 나온 양상으로 미뤄 가마는 큰 항아리를 주로 굽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생산시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또, 토기가마터 위로 7세기 전반께의 신라 돌방무덤 3기가 조성된 흔적이 나타나 이후 창녕 지역을 차지한 신라인들이 무덤 자리로 버려진 가마터를 썼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1500여년전의 불때고 가열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퇴천리 가마의 천장부분. 가야토기가마들 가운데 천장 부분이 온전한 상태로 드러난 유일한 사례다.
퇴천리 토기 가마 내부의 근경.
 
창녕군은 가야 토기 생산의 실체를 찾기 위해 군내 옛 토기가마터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으며, 이 유적을 비롯한 6개 가마터가 군내 용석천을 중심으로 흩어진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창녕군과 연구원은 6일 오전 발굴 유적에서 학술자문회의를 여는데 이어, 이날 오후 2시에는 조사성과를 일반인들에게 현장공개할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합천 소오리고분군]

김기진입력 2020. 11. 4. 15:56

합천 삼가면 소오리고분군 1호분

 

[합천=뉴시스] 김기진 기자 = 경남 합천군(군수 문준희)은 삼가면에 위치한 가야시대 비지정고분군인 소오리고분군 1호분에 대한 발굴조사와 학술자문회의를 통해 특이한 무덤 구조를 확인했다고 4일 밝혔다.

소오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면서 국유림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관리되고 있다.

1954년 촬영된 항공사진을 통해 100여기가 넘는 중소형 봉토분으로 이루어진 고분군으로 파악됐으나, 현재는 민묘 조성 및 도굴에 의해 일부 훼손된 상태이다.

 

합천 소오리고분군은 작년 12월부터 올해 6월까지 시굴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인접한 삼가고분군과 같은 다곽식 고분이 주묘제로 축조된 고분군임을 확인했다.

1호분은 직경 11m, 높이 2.5m의 중소형 봉토분으로 총 8기의 석곽묘가 하나의 봉분에 순차적으로 축조된 삼가식고분임을 최종 확인했다.

봉분 내 확인된 소오리 1~6호 석곽묘는 수평확장됐으며, 7,8호 석곽묘는 수직확장된 것으로 8호 석곽묘가 축조된 이후 봉분이 최종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연구원 발굴조사단 관계자는 “소오리고분군은 삼가고분군 하위집단의 묘역으로 판단되며, 1호분은 아주 좁은 면적에 8기의 석곽묘가 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곽묘간 훼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인근 삼가고분군에서 확인되는 삼가식고분의 독특한 매장 절차를 그대로 받아들인 증거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한편 독특한 다곽식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삼가식고분은 삼가고분군을 중심으로 주변의 소오리고분군, 안계리고분군, 의령 천곡리고분군을 비롯하여 남강유역의 산청 명동고분군, 진주 가좌동고분군, 의령 오천리고분군 등에서 확인된다.

합천군 관계자는 “이번 소오리 1호분 발굴조사를 통해 삼가식고분의 독특한 구조가 확인됨으로써 이 일대의 중심고분군인 삼가고분군의 국가사적 승격 추진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양산 다방동패총]

경남CBS 최호영 기자입력 2021. 2. 23. 16:54

조개 쓰레기더미인줄..53년만에 발굴했더니 양산도 가야 무대 (daum.net)

 
양산 다방동 패총 반세기 만에 발굴..가야 전기 전형적인 고지성 취락 확인

 

양산 다방동 패총. 경남도청 제공
 
경남 양산의 다방동 패총을 53년 만에 제대로 발굴했더니 이곳도 고대 가야의 생활 무대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23일 경상남도에 따르면, 다방동 패총은 양산의 고대 생활유적으로만 알려져 왔을 뿐 그동안 후속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문가들 조차 상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양산 동산 서쪽 구릉에 위치한 다방동 패총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처음 발견된 이후 1967년 국립박물관의 소규모 학술 조사에서 발견된 골각기와 철기, 토기 유물, 도랑, 목책 등이 전부였다.

도는 이곳을 가야유적 국가지정 문화재 승격 지원사업 대상으로 선정하고 지난해 12월부터 경남연구원을 통해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53년 만에 제대로 된 학술조사다.

발굴 지점은 유적이 분포한 구릉의 정상부와 동쪽으로 이어진 평탄지, 사면 부 일대다. 구릉의 가장자리를 따라 취락을 방어하기 위한 도랑인 '환호'가 확인됐다. 안쪽 공간에는 원형주거지와 망루로 추정되는 고상 건물이, 사면부에서는 패총이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양산 다방동 패총. 경남도청 제공

 
환호 내 중앙부를 빈 공간으로 두고 주거지도 조성됐다. 주거지에는 연질과 와질의 항아리와 바리, 옹 등 저장용 토기가 출토됐다. 패총에는 먹고 버린 참굴, 백합 등의 패각이 두껍게 퇴적된 흔적이 발견됐다.

이번 발굴조사로 지금까지 쓰레기장인 조개더미로만 알려졌던 다방동 패총이 낙동강과 양산천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리적 이점과 깎아지른 사면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 전형적인 취락 유적임이 드러났다. 양산도 가야인의 생활무대였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경남도 임학도 문화재위원은 "양산의 가야시대 생활상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국립박물관 조사 후 반세기 만에 발굴이 재개된 것은 다행한 일로, 가야 생활유적이 드문 만큼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남도 노영식 문화관광체육국장은 "경남의 가야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밝혀지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할 수 있도록 국가문화재로 지정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수 동촌리고분군]

입력 2019.07.22. 

전북 최대 가야 무덤떼 '장수 동촌리 고분군' 사적 된다

마봉산 주변에 80여기 조성..발굴조사서 편자·재갈 나와

 

장수 동촌리 고분군 28호분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전북은 물론 백두대간 서쪽 지역 최대 가야 무덤떼로 꼽히는 장수 동촌리 고분군이 사적이 된다.

 

문화재청은 5세기 초반부터 6세기 초반 사이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83기가 분포한 '장수 동촌리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고 22일 밝혔다.

 

지난해 3월 호남 지역 가야 유적으로는 최초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사적이 된 데 이어 장수 동촌리 고분군도 사적으로 지정 예고되고 전북 가야 유적 조사를 전담할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가 출범하면서 호남 가야 유적 조사·정비 속도가 빨라지는 형국이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 무덤 분포 모습 [문화재청 제공]

 

장수군 장수읍 해발 724m 마봉산 산줄기와 능선을 따라 조성한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2003년 발굴조사가 처음 진행된 뒤 지난해까지 6차례 조사가 이뤄졌다. 고분 중에는 지름 20∼30m에 달하는 중대형 무덤도 있다.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槨墓·구덩식 돌덧널무덤)에서 가야계 토기와 백제계 토기가 함께 발견돼 가야와 백제 사이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봉토 아래에 주곽(主槨·으뜸덧널)과 부곽(副槨·딸린덧널)을 함께 둔 점이 가야 고분 특성으로 분석되지만, 고분 평면이 타원형인 1호분은 무덤 주변에 돌을 쌓은 시설물인 호석(護石)이 없어 영남 지역 가야 고분과는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아울러 지표면과 생토면을 잘 고른 뒤 1m 내외 높이로 흙을 쌓고 다시 되파기를 해 무덤을 조성했는데, 이러한 기법은 마한 분묘 영향을 받은 독창적 요소로 파악됐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서 나온 편자 [문화재청 제공]

 

2015년에는 가야계 고분 중 최초로 징이 박힌 편자(말발굽에 덧대어 붙이는 쇳조각)와 말뼈가 발견됐고, 2017년 조사에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나 합천 옥전 고분군 같은 가야 수장층 무덤에서만 출토된 재갈이 나왔다.

 

또 둥근고리자루칼, 은제 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가야계 고분에서 나타난 유물과 비슷한 부장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그동안 백제권으로 인식된 장수 지역에 가야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 중요한 유적이자 고대 사회상을 밝혀줄 가치 있는 문화재"고 평가했다.

 

최재원 장수군 문화관광과장은 "지속해서 학술조사를 하고 유적을 정비하겠다"며 "삼봉리 가야계 고분군 사적 지정과 동촌리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서 나온 토기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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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news.v.daum.net/v/20190722093045991

 

전북 최대 가야 무덤떼 '장수 동촌리 고분군' 사적 된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전북은 물론 백두대간 서쪽 지역 최대 가야 무덤떼로 꼽히는 장수 동촌리 고분군이 사적이 된다. 문화재청은 5세기 초반부터 6세기 초반 사이에 축조한 것으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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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기자 입력 2018.10.24.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 일반인에 공개..말 재갈 등 발굴

자동요약

전북 장수군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3일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에서 호남지방 가야고분 첫 발굴조사 성과발표와 함께 현장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고 24일 밝혔다.

동촌리 고분군은 일원에 80여개소의 고분이 자리하며 그동안 3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가야토기들과 철기류가 확인됐다.

이날 현장공개에서는 Δ동촌리고분 발굴조사의 다양한 축조방법 활용 Δ무덤내부 내 희귀한 유물 확인 등에 대한 설명과 소개로 진행됐다.

      

말 재갈, 소가야 교류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장수군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말의 재갈.(장수군제공)2018.10.24/뉴스1© News1

 

(장수=뉴스1) 김동규 기자 = 전북 장수군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3일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에서 호남지방 가야고분 첫 발굴조사 성과발표와 함께 현장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고 24일 밝혔다.

 

5월부터 국비 3억원이 투입된 동촌리 고분 전수조사는 25-1호분과 28호분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로 진행됐다.

가야토기와 둥근고리칼, 말발걸이, 재갈, 화살통, 은귀걸이, 금귀걸이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말에 사용된 재갈은 소가야 계통에서 1점밖에 출토되지 않은 중요 유물로 소가야와의 교류사에 있어 중요 자료로 평가됐다.

 

화살통은 기존 다른 유적에서 확인된 화살통 꾸미개인 성시구뿐만 아니라 유기물(가죽혹은 목재로 추정)로 만들어진 본체(화살보관함)가 함께 출토돼 고대 화살통 연구의 중요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동촌리 고분군은 일원에 80여개소의 고분이 자리하며 그동안 3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가야토기들과 철기류가 확인됐다.

 

장수군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화살통.(장수군제공)2018.10.24/뉴스1© News1

 

고분조성 방식은 봉분 조성 후 석곽묘의 자리를 되파기 하는 방식으로 밝혀져 지역적 특색이 이번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28호분 주석곽은 길이 5.4m, 넓이 1m, 높이 1.8m의 대형 석곽묘로 내부에 놓인 목관의 크기도 3.2m였다.

 

이날 현장공개에서는 Δ동촌리고분 발굴조사의 다양한 축조방법 활용 Δ무덤내부 내 희귀한 유물 확인 등에 대한 설명과 소개로 진행됐다.

 

곽장근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교수는 “장수가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 유적이 이번 조사를 통해 확인돼 매우 기쁘다”며 “장수지역 가야세력의 위상을 예상했을 때 국가사적과 세계유산 등재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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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news.v.daum.net/v/20181024134240530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 일반인에 공개..말 재갈 등 발굴

(장수=뉴스1) 김동규 기자 = 전북 장수군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3일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에서 호남지방 가야고분 첫 발굴조사 성과발표와 함께 현장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고 24일 밝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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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미 기자 입력 2017.11.08. 09:09 수정 2017.11.08. 09:17

전북 장수서 6세기 가야 지배계급 '마구류' 등 다량 출토

장수 동촌리 고분군서 마구류·토기류 등 유물 출토

"경상도서 출토된 재갈과 같아..타 지역 교류 흔적"

 

장수 동촌리고분 출토유물(마구 등 철기류). (문화재청 제공) © News1

 

(서울=뉴스1) 김아미 기자 = 전라북도 장수의 동촌리 고분군에서 가야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마구류 등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마구(馬具)는 말을 부리기 위해서 말에게 장착했던 각종 장구를 뜻한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장수군(군수 최용득)과 전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유철)이 조사하고 있는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서 가야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재갈 등의 마구류와 토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8일 밝혔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백두대간의 서쪽에 자리한 가야계 고총고분군(봉분 높이가 높은 고분군)으로 고분 80여 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중에서 올해 4월부터 10월까지 발굴조사를 시행한 고분은 30호분으로, 봉분 규모가 남북 17.0m, 동서 20.0m, 잔존높이 2.5m 내외의 타원형 형태다.

 

고분 근경(주부곽 모습). (문화재청 제공) © News1

 

봉분 안에는 무덤 주인이 묻힌 돌널무덤 양식의 주곽 1기와 껴묻거리 등을 묻는 부곽 2기가 배치돼 있다. 주곽은 당시의 지표면과 흙 표면을 고른 후 1m 내외의 높이로 흙을 쌓고 다시 되파기해 쌓아 올렸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마구류와 각종 토기류이다. 특히, 30호분 주곽에서 확인된 마구류는 재갈, 발걸이, 말띠꾸미개, 말띠고리 등으로 다양하며, 이 중에서도 재갈은 고령 지산동44호분, 합천 옥전M3호분, 함안 도항리22호분, 동래 복천동23호분 등 경상도 지역의 주요 가야 수장층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는 유물로 이 무덤의 주인공 역시 가야 수장층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라는 분석이다.

 

고분 출토유물(토기류). (문화재청 제공) © News1

 

이와 함께 목긴항아리, 목짧은 항아리, 그릇받침, 뚜껑 등의 토기류도 출토됐다. 출토된 토기들이 백제, 소가야, 대가야의 토기류와 혼재된 양상이어서 고분 축조 집단이 전라북도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지역과 교류했던 사실과 생존시 이뤄온 문화 양상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평가다.

 

문화재청은 "이번 조사에서 30호분은 고분 축조방법과 출토유물 등을 미뤄볼 때 6세기 전반경의 고분으로 추정하며, 고분의 구조와 성격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확인돼 장수지역의 가야 묘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성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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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news.v.daum.net/v/20171108090914603

 

전북 장수서 6세기 가야 지배계급 '마구류' 등 다량 출토

(서울=뉴스1) 김아미 기자 = 전라북도 장수의 동촌리 고분군에서 가야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마구류 등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마구(馬具)는 말을 부리기 위해서 말에게 장착했던 각종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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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 전북기념물 132호 지정

김동욱 입력 2017.02.03. 13:57 댓글 0

출처; https://news.v.daum.net/v/20170203135752495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 전북기념물 132호 지정

전북 장수군은 동촌리 가야고분군이 전북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됐다고 2일 밝혔다. 동촌리 가야고분군은 장수읍 두산리와 동촌리 일원 마봉산 자락에 자리한 가야계 수장층 묘역으로 80여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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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7.01 15:46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에서 '말뼈·편자' 출토

김수영 기자

 

전북 장수군은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군에서 징이 박힌 상태의 '편자'가 출토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편자는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이 문화재청과 한국매장문화재협회의 지원과 장수군의 토지사용 동의를 얻어 지난달부터 장수읍 두산리 일대에서 발굴 조사를 하던 중 발견됐습니다.

말뼈와 함께 출토된 편자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고구려 태왕릉과 몽촌토성 주거지, 발해 유적, 산청 평촌리유적 등에서 보고됐다고 장수군은 설명했습니다.

이번 발굴에서는 편자를 비롯해 목이 짧은 항아리인 단경호와 그릇 받침인 '기대' 등의 토기류도 함께 출토됐습니다.  

 

출처; SBS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53453&oaid=N1003255250&plink=REL&cooper=SBSNEWSEND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에서 '말뼈·편자' 출토

전북 장수군은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군에서 징이 박힌 상태의 '편자'가 출토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편자는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이 문화재청과 한국매장문화재협회의 지원과 장수군의 토지사

news.sbs.co.kr

 

 

 

[장수 삼고리고분군]

 

2018-09-19 16:29

장수 삼고리 고분군서 가야 금제귀걸이·철제고리칼 출토

장수군 삼고리 고분군 현장[장수군제공]
 

(장수=연합뉴스) 이윤승 기자 = 전북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에서 철제고리칼과 가야시대 금제 귀걸이가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장수군은 문화재청 매장문화재 긴급 발굴 대상사업으로 선정돼 19일 실시된 장수 삼고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및 자문회의를 열고 이 같은 발굴결과를 발표했다.

현장설명회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금으로 만든 장식 귀걸이와 쇠로 만든 큰 칼 등 많은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공개됐다.

 
삼고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금제 귀걸이 [장수군제공]
 

금제 귀걸이는 원형의 장식이 달린 것으로 백두대간 서쪽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철제고리칼의 손잡이 끝장식 형태가 오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삼고리 고분군 발굴조사를 맡은 전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유철)은 이번에 조사한 3기의 무덤은 지난해 고분군 분포조사를 통해 추가로 확인된 7기 중 3기로 지난 6월에 시작해 이달 말 마무리할 예정이다.

3기의 무덤군에는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11기와 토광묘(土壙墓) 12기 등이 확인됐고 가야계 토기·철기류를 비롯해 금제 귀걸이, 철제 고리칼 등 130여 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2호분에는 2기의 석곽묘가 나란히 축조됐으며 1호 석곽묘에서는 금제 귀걸이와 옥 등의 장신구와 가락바퀴가 나왔다.

2호 석곽묘에서는 철제 고리칼, 쇠화살촉, 쇠낫 등의 무기류와 재갈 등의 마구류가 출토돼 한 봉분에 여성과 남성의 무덤을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됐다.

3호분에서는 석곽묘 7기와 토광묘 11기가 조사돼 장수가야를 기반으로 하는 대가야와 소가야, 신라계 양식 등의 토기가 함께 부장돼 당시 장수 가야가 주변 세력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짐작게 했다.

발굴조사가 이뤄진 3기의 무덤 외에도 주변에 봉토가 남아있는 큰 무덤이 분포하고 있어 추후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더 많은 가야문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장영수 군수는 "가야사의 중심에 장수가야가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가 마련돼 기쁘다"며 "지속적 노력을 통해 국가사적 추진은 물론 문헌이 미비한 장수가야의 옛 이름 찾기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love@yna.co.kr

출처;

장수 삼고리 고분군서 가야 금제귀걸이·철제고리칼 출토 | 연합뉴스 (yna.co.kr)

 

장수 삼고리 고분군서 가야 금제귀걸이·철제고리칼 출토 | 연합뉴스

(장수=연합뉴스) 이윤승 기자 = 전북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에서 철제고리칼과 가야시대 금제 귀걸이가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www.yna.co.kr

 

 

[장수 삼봉리산성]

 

김동규 기자입력 2019. 7. 11. 16:40

장수 삼봉리 산성서 토기·성벽 등 가야산성 흔적 발견

남쪽 성벽 시굴조사로 축조기법 확인
출토된 유물 가야 고총군 출토품과 흡사

(전북=뉴스1) 김동규 기자 = 전북 장수 삼봉리 산성 유적에서 가야 토기와 성벽 등 가야산성(봉수) 흔적이 발견됐다.(장수군제공)2019.7.11 /뉴스1

전북 장수 삼봉리 산성 유적에서 가야 토기와 성벽 등 가야산성(봉수) 흔적이 발견됐다.

11일 장수군에 따르면 군산대학교가야문화연구소(소장 곽장근)가 진행 중인 발굴조사에서 가야토기와 성벽, 봉수의 기초부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됐다.

이번 발굴조사는 현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된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며 전북도와 장수군이 지원한다.

삼봉리 산성은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와 계남면 화음리의 경계를 이루는 백화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지류의 정상부(해발 555m)에 위치한다.

 

이곳은 호남과 영남을 이어주는 백두대간 육십령의 서쪽 초입이며 전북지역 최대의 가야 고총군으로 알려진 ‘장수 삼봉리·호덕리·장계리 고분군’과 인접해 있다.

이 유적은 학계에 ‘장수 삼봉리 산성’으로 보고됐으며 주변 마을 주민들에 의해 ‘봉화터’로 전해지고 있다.

산 봉우리를 한 바퀴 둘러 성벽을 축조한 형태며 둘레는 300m 내외다. 이번 조사는 산 정상부 발굴조사와 남쪽 성벽 시굴조사로 나눠 진행됐다.

정상부에서는 자연암반을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과 무너진 석재들이 확인됐고, 대부장경호(굽달린목긴항아리)와 유개장경호(뚜껑 있는 목긴항아리), 시루 등 가야계 토기가 출토됐다.

명확한 지상 구조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조성기법이 삼국시대 봉수로 알려진 장수 영취산, 봉화산 봉수의 기초부 조성기법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도 인근 가야 고총군 출토품과 흡사해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쪽 성벽 시굴조사를 통해 축조기법이 확인됐다. 성벽은 외벽만 쌓았는데 자연암반 위에 다듬지 않은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됐다.

성돌과 기저부,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었다. 이러한 축조기법은 최근 전북 동부지역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봉수의 봉대(烽臺, 봉수의 거화시설을 조성하기 위한 기초부) 및 소규모 산성에서 확인되는 축조기법과 매우 유사하다.

전북 장수군 삼봉리 산성에서 발굴된 철기류.(장수군제공)2019.7.11 /뉴스1

이밖에도 8세기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화장묘를 비롯해 나말여초기의 토기편과 기와편, 철기류 등과 함께 건물 조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주혈(기둥을 박았던 구멍)이 확인됐다.

특히 출토된 철기 중에 철제 약연(藥碾, 약재 도는 찻잎 등을 가는 도구)이 있다. 매우 희소한 것으로 창녕 화왕산성, 문경 고모산성, 부소산성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양상으로 볼 때 삼봉리 산성 유적은 삼국시대 산성 혹은 봉수의 기능으로 축조된 뒤 통일신라시대에는 묘역으로 그 기능이 바뀌고 나말여초기에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과 같은 시설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삼봉리 산성 유적이 삼국시대 장수군에 존재했던 가야계 정치권과 관련성이 깊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향후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면 가야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장영수 군수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연구 성과를 통해 1500년 전 장수가야의 역동적 역사성이 확인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앞으로 잊혀진 장수가야의 옛 이름을 찾는데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장수 삼봉리 산성서 토기·성벽 등 가야산성 흔적 발견 (daum.net)

 

장수 삼봉리 산성서 토기·성벽 등 가야산성 흔적 발견

전북 장수 삼봉리 산성 유적에서 가야 토기와 성벽 등 가야산성(봉수) 흔적이 발견됐다. 11일 장수군에 따르면 군산대학교가야문화연구소(소장 곽장근)가 진행 중인 발굴조사에서 가야토기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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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2018-11-18 14:41 송고

1500년 감춰져 왔던 완주의 가야, 조금씩 모습 드러내

가야와 백제 국경…제철유적 31개 발견
탄현봉수, 가야 봉수로 확인

완주 탄현봉수./뉴스1&copy; News1

 

(완주=뉴스1) 김동규 기자 | 2018-11-18 14:41 송고
1500여년 동안 감춰져 왔던 전북 완주군에서의 가야(伽倻)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완주는 가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제철이 집중됐고 이를 지키기 위한 산성, 봉수가 상당수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완주군은 가야사 복원 연구 사업을 통해 봉수와 제철 유적지를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특히 철(鐵)의 왕국 가야를 대표하는 제철 유적지는 31개소가 발견돼 가야사의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완주군은 4월부터 2억원의 예산을 토입해 가야문화 유적을 조사했다. 조사는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곽장근 교수팀이 맡았다.
운주면 금당리 탄현봉수는 발굴조사 결과 가야의 봉수로 확인됐으며 잔존상태도 매우 양호했다.
탄현봉수는 서쪽의 경천면 불명산, 경천면 용복리, 화산면 각시봉의 봉수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또 동쪽으로 향한 봉수도 발견됐다.
곽장근 교수는 “백제나 고려시대에 완주에 봉수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며 “모두 가야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완주 탄현봉수에서 출현된 유물./뉴스1&copy; News1


철(鐵)을 제조한 유적은 고산면과 경천면, 동상면, 비봉면, 운주면, 화산면 등에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동상면(1개)과 운주면(10개)에 집중됐다.
완주에서의 가야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도 다양하게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곽장근 교수는 “완주는 백제와 가야의 국경이었다”며 “국경을 지키기 위해 가야의 군사력이 집중됐던 곳이다. 완주 북쪽지역의 산성도 가야가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철유적이 있는 곳에 봉수와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일본 문헌에도 가야에 산성과 봉수가 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완주지역의 산성과 봉수는 축조 방법이 비슷하다”며 “정확한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완성 산성으로 알려진 화산면 화평리 고성산성도 가야가 쌓았다는 것이 곽 교수의 주장이다.
곽 교수는 “미완성 성으로 확인됐으며 내부에는 아무런 역사를 남기지 않았다”며 “만일 백제가 쌓았다면 유물이나 유적이 있었을 것이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완주군은 탄현봉수를 국가사적화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완주군 관계자는 “완주군에서 가야사가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며 "완주에서의 가야사가 제대로 밝혀지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출처;1500년 감춰져 왔던 완주의 가야, 조금씩 모습 드러내 - 뉴스1 (news1.kr)

 

1500년 감춰져 왔던 완주의 가야, 조금씩 모습 드러내

(완주=뉴스1) 김동규 기자 | 1500여년 동안 감춰져 왔던 전북 완주군에서의 가야(伽倻)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특히 완주는 가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제철이 집중됐고 이를 지키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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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청계리고분]

입력 : 2019.11.06 09:20 수정 : 2019.11.06 19:00

호남 최대의 남원 31m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 나무빗의 정체

이기환 선임기자

 

남원 청게리 고분에서 확인된 수레바퀴형 토기. 아라가야 영역인 함안 말이산고분에서 확인된 것과 같다. |국립나주·완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길이 31m의 호남 최대의 가야고분이라는 전북 남원 청계리 고분에서 대가야 및 아라가야, 왜와의 교류한 흔적인 수레바퀴형 토기와 나무 빗 등이 출토됐다. 국정과제인 가야문화권 조사·연구·정비사업의 하나로 전북 남원 청계리 고분군을 발굴 중인 국립나주·완주문화재연구소는 6일 청계리 고분이 호남지역에서 발굴한 가야계 고총(高塚) 중에서 가장 이르고, 가장 규모가 큰 고분임을 확인했다. 고분의 규모는 남아있는 봉분을 기준으로 길이 약 31m(도랑 포함 34m 내외), 너비 약 20m, 남아있는 높이는 5m 내외 정도다. 매장시설은 돌덧널(석곽)로 총 3기가 ‘T’자형의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청계산 고분에서 확인된 나무빗. 묶은 머리를 고정시키는 작은 빗이다. |국립나주·완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발굴 성과로는 수레바퀴 장식과 불꽃무늬 굽구멍 등 비롯한 함안 아라가야계 토기와 왜계 나무 빗, 대가야계 종모양 굽구멍 토기 등이 함께 출토됐다는 것이 특히 눈에 띈다. 이중 2호 돌덧널에서 확인된 수레바퀴 장식토기는 아라가야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호남에서 최초로 확인됐다. 굽다리 접시 대각 위에 U자 모양으로 뿔잔 2개가 얹혀져있고 좌우에 흙으로 만든 수레바퀴가 부착되는 형태다. 지금까지는 함안 말이산 4호와 전(傳) 의령 대의면에서 나온 출토품이 보고되어 있다. 또한 일본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부터 보이는 나무빗은 묶은 머리를 고정시키는 작은 빗이다. 국내에서는 부산(복천동)·김해(대성동)·전남 고흥(길두리 및 야막리)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중국자기와 대가야 토기 등도 확인된 점도 눈에 띈다. 출토유물로 보아 청계리 고분군의 연대는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전용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고분의 축조기법이나 출토유물에서 토착적인 요소(성토와 매장시설의 동시 조성, 도랑의 확인)와 외래적인 요소(T자형의 돌넛덜의 배치, 아라가야·대가야·왜계·중국 유물)가 함께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전용호 학예관은 “5세기 전반 이 지역이 대가야 영역이었다는 주장들이 많았지만 아라가야·왜·대가야·중국 등의 요소들이 골고루 보이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당대 이 지역은 다른 가야문화권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따라서 대가야의 영역이라는 주장은 제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원 청계리 고분 세력은 5세기 격동기를 맞아 아라가야 등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모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나주·완주 문화재연구소 제공

5세기 초중반이면 400년(광개토대왕 2년) 고구려의 남진 등으로 전기가야의 맹주이던 금관가야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다. 전용호 학예관은 “따라서 이 무렵 청계리 고분 축조세력은 주변 다양한 세력과 교류 이러한 요소들은 당시 주변 지역과 활발한 대외교류를 통해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출처; 호남 최대의 남원 31m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 나무빗의 정체 - 경향신문 (khan.co.kr)

 

호남 최대의 남원 31m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 나무빗의 정체

길이 31m의 호남 최대의 가야고분이라는 전북 남원 청계리 고분에서 대가야 및 아라가야, 왜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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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죽림유적]

 

입력 2008. 5. 26. 16:08수정 2008. 5. 26. 16:08

【여수=뉴시스】

 

전남 여수시 죽림지구 택지개발 중 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터와 무덤, 토기가 출토됐다.

26일 여수시와 죽림지구 문화유적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재)마한문화연구원은 "죽림 2,3지구에서 주거지 30기와 토광묘 7기, 석곽묘 19기, 옹기가마 1기가 조사됐다"고 밝혔다.

연구원에 따르면 주거지의 경우 2지구는 평면 원형계가 우세하며 3지구는 원형계와 방형계가 비슷하게 확인됐다. 3지구의 경우 원형계보다 방형계가 많은 양상을 띠고 있다.

 

출토유물에서도 원형계 주거지에서는 주로 장란형토기 또는 주구토기, 호형토기 등 연질토기가 주로 출토됐으며 방형계 주거지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 가야계토기 등과 문양과 제작기법에서도 늦은 시기의 속성을 지닌 토기들이 확인되고 있다.

반면 3지구 15호주거지에서는 다량의 가야계토기만 출토됐다.

연구원관계자는 "이번에 조사된 주거지는 인접한 화장동 선사 유적의 주거지와 유사한 양상으로 이 지역의 고대 주거 형태와 5,6세기때 전남 동부지역과 가야지역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편 2지구 10호에서는 갑옷과 함께 철촉군.낚시바늘.철부 등 다량의 철기류와 대부직구호.대부완이 함께 출토됐다.

 

 

최일생입력 2023. 5. 3. 08:01

거제 방하리 고분군 발굴조사 성과 시민에 대공개 (daum.net)

 

거제 방하리 고분군 발굴조사 성과 시민에 대공개

경상남도 ‘2023년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경상문화재연구원(원장 노태섭)에서 조사 중인 거제 방하리 고분군(A=345㎡)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v.daum.net

 

 

[가야의 미스터리] 1부 미완의 제국, 가야의 수수께끼 / YTN 사이언스

https://youtu.be/qgyiq_v7-KI?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가야고분군 문명과 교류의 타임캡슐 _ MBC경남 특집 다큐멘터리

https://youtu.be/auFeUQyZsjI?list=PLRAmvpNm4pmkVYM9AZD9e8laWwxslWU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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