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국 ‘소가야’ 최전성기 이끈 왕의 무덤 열렸다

최상원 기자2024. 9. 9. 07:05
고성 송학동 고분군, 가야 고분 최대 규모 확인
“조성 시점 6세기 초중반보다 50년 앞당겨”
소배경 삼강문화재연구원 부장이 지난 6일 경남 고성군 고성읍 기월리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 발굴 현장에서 발굴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최상원 기자

옛 ‘소가야’ 지역인 경남 고성군 고성읍 기월리에 있는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이 지금까지 조사된 모든 가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고분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 지금까지 조사된 소가야 왕릉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삼강문화재연구원은 8일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의 규모는 남북 47.5m, 동서 53m, 높이 7.6m로 지금까지 조사된 가야 고분 가운데 최대 규모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 발굴 유물을 통해 확인한 조성 시기는 5세기 중후반으로, 소가야 왕릉 조성 시작 시점을 지금까지 밝혀진 6세기 초중반보다 최소 50년 정도 앞당기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과 경상남도는 삼강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5월부터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의 매장주체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14호분은 고성군종합운동장 부근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소가야 왕릉 밀집 지역인 고성박물관 쪽 고분군과는 직선거리로 700m가량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가야고분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고, 발굴조사도 일부분이나마 이번에 처음 하게 됐다.

가야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된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을 아래에서 바라본 모습. 남북 47.5m, 동서 53m, 높이 7.6m로 신라 대형 왕릉 규모이다. 최상원 기자

14호분은 언덕 위에 3단에 걸쳐 7.6m 높이의 봉분을 쌓은 뒤, 가장 높은 3단의 가운데 부분에 무덤 주인의 묘를 설치(분구묘)한 형태였다. 언덕 위에 봉분을 쌓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언덕과 봉분이 하나가 되어 실제보다 훨씬 웅장해 보인다. 삼강문화재연구원은 봉분 겉면 흙을 30~50㎝ 정도 걷어내고, 꼭대기의 매장주체부를 발굴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매장주체부는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철기 유물과 토기 400여점이 발굴됐다. 철기 유물은 갑옷 한벌과 투구, 대도(긴칼) 4점, 농경시대 우두머리의 상징물인 살포 1점, 꺾쇠, 화살촉, 창날 등으로 가야는 물론 왜·백제 유물이 뒤섞여 있었다. 토기는 전형적인 소가야 토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왜계 원통형 토기도 나왔다. 또 신라부터 조선까지 후대에 묻은 토기와 도자기도 주변부에서 발굴됐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에선 앞면(왼쪽 사진 아래)과 뒷면(오른쪽 사진)으로 이뤄진 철제 갑옷 한벌과 투구(왼쪽 사진 위)가 발굴됐다. 최상원 기자

 

발굴조사 책임자인 소배경 삼강문화재연구원 부장은 지난 6일 현장설명회에서 “큰 무덤은 곧 강한 권력을 상징하는데, 신라 대형 왕릉 수준의 규모와 발굴 유물을 볼 때 소가야는 5세기 중후반 왜·백제 등과 활발히 교류하는 해상왕국으로서 최전성기를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봉분 전체를 해체해서 조사한다면, 당시 소가야 왕릉의 축조 방식을 밝히는 것은 물론 훨씬 많은 유물을 발굴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현장설명회에 참가한 박천수 경북대학교 박물관장은 “이번에 발굴한 매장주체부를 중심으로 주변부에 왕비·신하 등 적어도 10기 이상의 무덤이 더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주변부 발굴조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투명한 재질로 왕 무덤 위를 덮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야외박물관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학종 전 국립김해박물관장도 “전형적인 소가야 토기가 쏟아져나온 것을 볼 때 소가야 최전성기 왕 무덤인 것이 확실하다”며 “주변부 조사를 하면 훨씬 많은 유물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에서 발굴된 소가야 토기. 최상원 기자

 

가야는 비록 단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지만,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생겨나 562년 대가야 멸망 때까지 고구려·백제·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작은 나라들이다. 가야의 영역은 낙동강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부산과 경남 양산·밀양까지, 서쪽으로는 전북 남원·장수와 전남 곡성·구례·광양·순천 등 호남 동부지역까지 이르렀다.

현재 한반도 남부지역 780여곳 고분군에 수십만기 고분이 남아 있어, 가야의 뛰어난 문화가 확인된다. 특히 소가야는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진해·통영·거제·남해 등을 아우르는 해상왕국을 형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9월1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고성 송학동 고분군을 포함해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등 7곳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인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1)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조성돼 있다. 경남도 제공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에서 발굴된 대도 4점과 살포 1점. 무덤 주인공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한다. 최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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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의 또다른 가야고분군, 계성고분군 1호분 55년만에 재발굴조사 진행

최일생2023. 10. 12. 11:14
창녕 계성고분군 1호분 축조기법 확인
가야사람들의 음식문화 밝혀

경남 창녕군은 오는 16일 오전 10시부터 ‘창녕 계성고분군 1호분 및 주변 발굴조사’ 전문가 자문회의 및 현장공개회를 개최한다.

군은 2023년 문화재청 국가지정문화재 보수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창녕 계성고분군 정비사업을 계획, 경남연구원(원장 송부용)에 발굴조사를 의뢰해 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조사는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지난 5월부터 착수해 10월 중순에 조사가 완료될 예정이다.

창녕 계성고분군은 계성면 일대에 축조된 고분군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됐다.

5세기부터 가야가 신라로 병합된 7세기까지 지속해서 축조된 계성고분군은 비화가야의 성립, 발전과 쇠퇴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번에 조사된 계성고분군 1호분은 1968년 영남대학교박물관 조사 이후 55년 만의 발굴조사로 매장주체부 재조사와 봉분 복원을 위한 봉토 조사를 함께 진행했다.

1호분은 계성고분군 내 가장 우월한 입지에 축조된 대형분으로 봉분의 직경은 30m이다. 1호분 주위로는 11기(15~17호분, 292~299호분)의 중소형 고분군을 배치해 1호분 주인공의 우월함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1호분 매장주체부는 천석(하천돌)으로 축조한 지상식의 수혈식석곽묘(돌덧널무덤)로 내측길이 10.8m, 너비 2.6m, 높이 2.3m이다.


석곽묘는 격벽에 의해 주곽(주인공 공간)과 부곽(부장유물 공간)으로 구분되며, 주곽의 규모는 내측 길이 6m, 부곽은 내측길이 4m로 주곽의 규모가 더 크게 축조됐다.

유물은 주곽과 부곽에서 고배(굽다리접시)와 호(항아리) 등 토기류와 함께 행엽(말띠드리개), 등자(발걸이) 등 다양한 마구류(말갖춤새)가 출토됐다.

특히 금동제 관과 관식을 비롯한 장신구가 출토돼 계성고분군에서 최고수장층에 해당하는 인물이 주인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호분 주변으로 기존 정밀지표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15~17호분 외에 292~299호분 8기의 중소형고분이 추가적으로 확인됐다.

1호분의 배치형태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Ⅰ지구 7호분의 배치양상과 유사성이 확인되고 있어, 비화가야 최고 수장층 무덤의 매장과정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파악된다.

추가로 조사된 293-1호분 석곽묘에서 출토된 고배(굽다리접시) 안에는 물고기뼈와 새뼈가 확인됐으며, 295호분 주석곽묘에서는 조개껍데기(백합류)가 확인돼 계성고분군을 축조한 비화가야 사람들의 음식문화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군 관계자는 “창녕 계성고분군의 사적 지정 이후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거쳐 지속해서 조사와 복원 정비를 진행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과 같이 가야의 대표고분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방침이다”라고 밝혔다.(2)

창녕=최일생 기자 k7554@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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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무덤이라는 창녕 고분, 쏟아져 나온 건 신라 장신구

허윤희 기자2020. 10. 28. 18:11
학계 "이미 신라에 편입됐다는 증거"
경남 창녕 교동 63호분에서 금동관이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가야인가 신라인가. 경남 창녕 교동 고분에서 금동관 등 신라 장신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발굴단은 “5세기 후반~6세기 초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밝혔지만, 피장자의 몸을 감쌌던 장신구 일체는 모두 신라 유물이라 고분의 성격을 둘러싸고 향후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에서 도굴되지 않은 교동 63호분을 지난 1년간 발굴한 성과를 28일 발표했다. 높이 21.5㎝의 금동관을 비롯해 관 좌우에 길게 늘어뜨린 장식인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1쌍, 유리 구슬 목걸이, 은반지 4점, 은허리띠 등 ‘머리에서 허리까지’ 장신구 일체가 나왔다. 연구소는 “신발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지난 9월 화제가 됐던 경주 황남동 신라 귀족 여성 무덤과 판박이 구성”이라고 했다.

창녕 교동 63호분 석곽 내 피장자 장신구 일체가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신라 유물로 치장한 비화가야 수장?

교동 63호분은 봉토 지름 21m, 높이 7m의 대형 봉토분으로 남북이 약간 긴 타원형이다. 이 일대 고분군에서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흔치 않은 사례다. 경주 고분은 돌무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도굴꾼이 팔 수 없는 구조인 반면, 창녕 고분은 맨 위 뚜껑돌만 열면 빗자루로 쓸어담을 수 있는 구조라 일제강점기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다행히 63호분은 나중에 축조된 39호분 봉토에 가려져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창녕 교동 63호분 및 주변 고분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금동관은 맨 아래에 너비 약 3㎝의 관테가 있고,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 3개를 세운 형태. 관테 아래 곱은옥과 금동구슬로 이뤄진 금동 드리개를 늘어뜨렸고, 관테 양 측면에는 원통형 금동막대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금동관”이라고 했다. 금동관 내부에는 관모(冠帽·모자)로 추정되는 직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덤 주인공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도 6점 확인됐다.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아직 흙더미인 상태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치아만 6점”이라며 “허리에 큰 칼을 차는 대신 작은 손칼 2점이 나왔고, 굵은 고리 귀걸이가 나온 점 등으로 볼 때 여성으로 추정된다. 목관의 꺽쇠 위치 등으로 보아 키는 155㎝ 정도”라고 했다.

순장의 흔적도 나왔다. 무덤 주인공의 발치 바닥을 약 40㎝ 낮춘 공간에 순장자 2명이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금동제 가는 고리 1점, 항아리 2점, 쇠도끼 2점과 쇠낫 1점이 출토됐다.

창녕 교동 63호분 석곽 내 유물 노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계 “이미 신라에 편입됐다는 증거”

연구소는 “장신구는 신라계 유물이지만 무덤 구조는 전형적인 가야 양식”이라며 “비화가야 지배세력이 신라에서 받은 위세품(威勢品·왕이 지방세력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하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을 묻었거나, 당시로선 가장 선진문물이었던 신라 스타일을 모방해 직접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학계에선 “금동관 등 장신구를 착장한 방식이 신라 무덤 양상과 일치한다는 건 창녕 일대가 이 시기에 이미 신라에 확실하게 편입됐다는 증거”라는 반론이 나왔다. 이한상 교수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학계에서 가야냐 신라냐를 두고 논란이 계속돼왔는데, 이번 발굴로 신라라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며 “무덤 양식은 가장 보수적인 것이라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 지역 고유의 풍습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했다.

창녕 교동 63호분 금귀걸이가 노출된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지난 3월 끝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에서도 창녕 유물을 죄다 ‘비화가야’로 소개해 논란이 됐었다. 국내 가야사 연구를 대표하는 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당시 본지 통화에서 “창녕 고분은 5세기 이후는 신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최근 2020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가야고분군’을 선정한 바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 7곳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이 안에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포함돼 있다.(3)

창녕 교동 고분 조사 지역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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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가야의 위엄 서린 황금칼, 전설의 왕국 ‘다라국’의 실체 밝히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5월 24일 09시 01분 
 

<33> 합천군 옥전 고분군
M1호분서 발굴된 로만글라스… 서역과의 문물 교류 알 수 있어
다라국 전성기 대표하는 M3호분… 정교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 금귀고리-갑옷 등 유물 쏟아져
“가야연맹 소속됐던 다라국… 6세기 후반 백제와 동맹 맺어”

조영제 경상대 교수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1985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합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19일 경남 합천군 옥전서원(玉田書院) 옆 야산에 들어서자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무덤들이 나타났다.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길게 늘어선 20여 기의 봉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낙타 혹 같다.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인데….’ 지난 시리즈에서 취재한 발굴 유적 32곳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야트막한 구릉에 고총(高塚)들이 빽빽이 자리 잡은 모습이 부산 동래구 복천동이나 경남 김해시 대성동의 금관가야 고분을 닮았다.

답사에 나선 조영제 경상대 교수(64)가 심중을 읽은 듯 한마디 거들었다. “이곳 합천 옥전 고분군에 묻힌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은 순수 토착세력이 아닙니다.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하자 김해 금관가야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죠.”

○ 지중해산 로만글라스 발견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이건 금관보다 더 귀한 거요….”

1991년 9월 옥전 고분군 M1호분(M은 봉분(Mound)을 뜻함) 발굴 현장. 발굴 지도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와 속주에서 제작된 유리그릇) 출토품을 손에 쥐고 읊조렸다. 한국 고고학의 대가는 감격에 젖어 손마저 가늘게 떨었다. 혹여나 귀한 유물을 떨어뜨릴까 봐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로만글라스 아래로 손을 뻗었다.

현재는 고인이 된 고고학계 원로들이 당시 흥분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한반도에는 투명한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를 만드는 제조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멀리 지중해로부터 광활한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로만글라스는 서역과의 문물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다. 당시 로만글라스는 경주 신라고분에서만 나왔는데, 경주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건 이것이 유일했다.

로만글라스의 출토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출토 1년여 전 인근 옥전서원 문중에서 “안산을 함부로 파헤칠 순 없다”며 발굴을 막았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오히려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고 설득해 1989년 4월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지만 그새 주곽(主槨) 일부가 도굴됐다. 크게 낙심했던 발굴팀이 시신 발치 쪽에 깔려 있던 갑옷을 노출하던 도중 로만글라스 조각을 찾아냈다. 다행히 마구 밑에서 나머지 조각들이 나와 로만글라스를 완전체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학계는 M1호분이 조성된 5세기 3분기(451∼475년)부터 옥전 고분에서 로만글라스와 창녕계 토기 등 신라 계통 유물이 나타나고, 거대한 봉분 무덤이 출현하는 데 주목한다. 5세기 신라에서도 높은 봉분의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다. 다라국이 신라와 교역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분석된다. M1호분보다 시기가 앞서는 5세기 초 무덤에서 갑옷과 투구, 금장식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목곽묘 규모가 갑자기 커지는 양상도 눈길을 끈다. 조영제는 “이때 부장품은 김해 지역의 가야고분과 연관성이 깊다”며 “5세기 초 광개토대왕 남정을 계기로 금관가야 세력이 합천으로 옮겨온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황금빛 용과 봉황 함께 날다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용봉문 환두대도)’ 손잡이. 5∼6세기 다라국의 정교한 금속공예 기법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용띠 해에 합천에서 용이 승천했다.’

1988년 초 옥전 고분군 M3호분에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자, 국내 언론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한껏 들뜬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 보도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용이나 봉황 문양을 새긴 둥근고리자루큰칼이 한 무덤에서 4점이나 나온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화려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된 곳은 무령왕릉과 천마총밖에 없었다. 더구나 옥전 고분 둥근고리자루큰칼은 금·은 장식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름이 21m에 이르는 M3호분은 다라국 전성기를 대표하는 거대 무덤이다. 이곳에서는 둥근고리자루큰칼뿐만 아니라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말 투구(馬胄), 쇠도끼 등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강점기 때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석곽 가운데가 아닌 측면의 돌무더기를 뚫는 바람에 대부분의 유물이 온전할 수 있었다.

역사학계는 옥전 고분군이 일본서기에 몇 줄만 언급된 다라국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열쇠라고 평가한다. 조영제의 설명. “5세기 말, 6세기 초 옥전 고분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다가 6세기 후반 백제계 유물이 주로 나옵니다. 이는 다라국이 대가야를 주축으로 한 가야연맹에 소속됐으며, 6세기 후반 신라에 맞서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보여줍니다.”(4)

 

 

기마민족설은 임나일본부설의 변종이다

[책&생각]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17)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의 숨겨진 역사, 가야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 거쳐 일본열도 정복 주장…한반도 지배 미화 논리로
가야 고분에서 일본 토기 나오는 건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의 교류 증거일 뿐

  • 수정 2019-12-27 20:51 등록 2019-12-27 05:01
가야를 대표하는 판갑(갑옷). 당시 초원의 유목 전사들은 사용하지 않은 형식이다. 실제 전쟁용이라기보다는 신분을 과시하는 가야인들만의 갑옷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최근 삼국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되어왔던 신비의 나라 가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야의 유물은 삼국시대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부하다. 그럼에도 가야가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배경에는 20세기 초부터 가야를 일본 침략의 합리화 도구로 사용했던 식민지 역사 연구가 존재한다. 원래 임나는 가야를 말하는 별칭이다. 일제는 <일본서기>에 가공되어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들어서 모든 가야는 곧 일본의 식민지라고 왜곡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나일본부를 이용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약간의 표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임나일본부라는 망령을 주장하며 한국을 비하하는 주요 근거로 사용한다. 최근 가야를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지만 여전히 가야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야의 진정한 재평가는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의 가야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야 한다.

1922년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김해 패총을 조사하는 일본인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왜 조선총독부는 가야에 집착했을까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함께 쇼군이 각 지방 세력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고 각자 통치하던 바쿠후(막부) 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서양의 식민지 개념을 본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한론이 대두했다. 일본열도 안에서 천년 가까이 바쿠후 체제로 살던 그들이 갑자기 바다 건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니 표면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꺼내 들었다.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고,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이 존재했다는 논리를 세운다. 한반도는 태생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은 그들의 명분을 입증할 자료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찾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일제강점 이전이었던 1907년에 도쿄대학교의 이마니시 류는 김해의 봉황대 언덕에 있는 김해 패총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 야요이시대~고분시대에 사용했던 토기와 유사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김해는 현해탄을 두고 일본을 바라보는 지역이니 교역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것이 곧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상징한다고 단정했고, 이후 30여년간 수많은 일본 학자가 김해 패총을 조사했다.

2016년 나온 책 <고대 일본은 최강의 침략국가였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지금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일제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조사를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다. 1910년대에 일제의 고적 조사를 담당한 야쓰이 세이이쓰라는 일본인은 강연록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신공황후에 의해서 신라와 백제, 임나는 우리(=일본)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 후 남한은 우리의 손을 떠났지만, 1200년을 지나 드디어 한반도 전체가 우리의 보호국이 되었다.”

총독부는 그들의 지배논리를 역사를 이용해서 선전하려고 했다. 1915년에 개관한 총독부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전신)에서도 주요한 전시를 ‘임나와 낙랑’으로 삼았다. 총독부의 한국 고대사 정책은 전방위적이어서 인류학에도 미쳤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류학자들은 한국인의 형질을 조사해서 북조선계와 남조선계로 나누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은 천손의 단일민족이지만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혼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생김새를 들어서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제 이후 관습적으로 쓰일 뿐 형질인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다.

왜 일제는 특히 가야에,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욕망을 투사했는가. 그 이유는 가야에 대한 문헌 기록이 너무나 적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는 점진적으로 신라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자료에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의 기록에도 삼한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독 <일본서기>에서만 가야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수많은 왜곡된 서술로 점철된 <일본서기>는 자기 나라를 찬양하기 위해서 수많은 부분에서 한국과 관련된 부분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 다시 말해, 가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가야를 위한 역사서는 아니다. 게다가 외국 학자들이 난해한 <일본서기>를 제대로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하면서 가야는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이용되기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가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전에서 선보인 일본의 옹관과 토기들. 가야에서 출토된 일본 토기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지역의 교류의 증거에 불과할 뿐인데, 일제는 이를 임나일본부의 역사적 증거라고 왜곡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임나일본부에서 기마민족설로

가야는 영토를 확장하는 대신에 교역 네트워크로 작지만 강한 나라들의 연맹으로 남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은 가야에 강대국의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했다. 임나일본부설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도쿄대 쓰다 소키치는 <임나강역고>에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점을 언어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임나가 전라도 일대까지 널리 퍼져서 한반도 남부 전체를 지배했다는 ‘한반도 남부 경영론’으로 확대했다. 당시 일본은 가야를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로 둔갑시켰으니 가야를 거대한 나라로 보는 것이 한국의 식민지 경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가야에 대한 왜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기마민족설로 이어졌다. 에가미 나미오가 제기한 이 설은 서기 4세기에 송화강 중류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를 정복했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전사가 세운 일본의 야마토국은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고, 따라서 한반도 남부를 정복할 수 있는 국력이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즉, 기마민족설은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막연하게 가야의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 배경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가야 하면 흔히 철이 떠오른다. 가야는 이 철을 사방과 거래하면서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가야의 무덤에서는 갑옷(판갑)은 물론 화려한 마구(말에 끼우는 갖춤새)가 발견되니 군사강국이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북방 유라시아를 호령한 흉노와 선비족들 사이에서 판갑은 없었으며, 마구도 가야처럼 화려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게다가 가야가 있었던 지역은 험난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말이 달릴 평원이 없다. 실제 무기로 정복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가야 세력은 지리산 자락을 따라서 전라도 일대로 퍼졌다. 이것을 지도로 보면 가야의 영토가 아주 넓어졌기 때문에 가야도 거대한 국가로 보인다. 하지만 새롭게 가야로 편입된 남원이나 장수 같은 지역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역이다. 그러니 이들 전라도 지역은 사실상 토착민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지역의 가야 무덤에서는 가야 물건뿐 아니라 백제의 왕족들이 가장 아끼던 귀중품들도 나왔다. 가야에 편입은 되었지만 독자적으로 백제와도 밀접한 사신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역사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야를 폄하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결여한 채 거대한 나라로 보려는 것은 자칫 일제의 논리로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1931년 일제가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가야고분(창녕 117호분)을 파헤치는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새로운 가야사 연구를 위하여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이 초래한 또 다른 피해는 우리 역사 안에서 가야가 소외되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있다. 가야가 일본 식민지의 정당화에 이용되어왔고, 가야와 관련한 많은 역사 기록을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일제가 만든 프레임을 벗어난 다양한 시각의 연구가 어려웠다.

최근 오랜만에 가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며 과거 가야 연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잡았다. 식민지 시대의 가야 연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하여 우리 속에 남은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 아울러 세계사의 보편성에 근거해 가야의 특성을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가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가야를 알리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막연하게 가야의 고분이 크고 유물이 풍부하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계적으로 보면 가야보다 더 눈에 띄는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만 해도 북방 유라시아나 중원에는 가야 것보다 거대한 크기에 황금 유물을 넣은 고분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야의 소중함은 그 규모가 아니라 독특한 그들만의 삶에 있다. 가야는 세계적으로도 무척 독특한 나라다. 서로 정복하여 통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웬만한 나라 못지않은 거대한 고분들도 만들었다. 첨단 소재인 철로 무역을 하며 살았던 그들의 언어는 지금도 남아 있다. 경상도 일대에는 유독 고대의 언어 흔적이 잘 남아 있고 각 지역의 사투리가 잘 남아 있다. 그 기원을 가야에서부터 찾는 언어학자들이 많다.

작지만 부유했으며 사방과 교역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의 참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가 지난 세월 어떻게 왜곡되어왔고,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땠는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급하게 짧은 기간에 가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지난 세기를 돌아보며 가야가 우리 역사 안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부터 알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5)

경희대 사학과 교수

 

 

 

<주>

 

(1) https://v.daum.net/v/20240909070508311

 

 
 
 
 
 

 

 

 

 

<참고자료>

 


‘고성 동외동패총’, 소가야를 대표하는 국가사적 지정 성큼 [고성소식] (daum.net)2023. 7. 26.

 

 

해상왕국 소가야 궁금증 풀었다…'만림산 토성' 문화재 지정 - 노컷뉴스 (nocutnews.co.kr)2021-08-28

 

 

 
 
 

 

창녕 송현동 고분 석실은 맞배지붕형 : 한겨레 (hani.co.kr)2007-12-25 

 

 

 

가야인 토기 굽던 가마터, 역대 가장 큰 규모로 드러나다 : 한겨레 (hani.co.kr)2019-11-04 

 

 

 

 

 

합천 옥전고분군, 다라국 가야 장군 무덤 발굴 (daum.net)2020. 6. 18.

 

 

 

 

 

 

 

 

전북 최대 가야 무덤떼 '장수 동촌리 고분군' 사적 된다 (daum.net) 2019. 7. 22. 09:30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 일반인에 공개..말 재갈 등 발굴 (daum.net)  2018.10.24.

 

 

전북 장수서 6세기 가야 지배계급 '마구류' 등 다량 출토 (daum.net)  2017.11.08.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 전북기념물 132호 지정 (daum.net)  2017.02.03.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에서 '말뼈·편자' 출토 (sbs.co.kr)  2015.07.01 

 

 

 

장수 삼고리 고분군서 가야 금제귀걸이·철제고리칼 출토 | 연합뉴스 (yna.co.kr)2018-09-19 

 

 

장수 삼봉리 산성서 토기·성벽 등 가야산성 흔적 발견 (daum.net) 2019. 7. 11. 

 

 

 

1500년 감춰져 왔던 완주의 가야, 조금씩 모습 드러내 - 뉴스1 (news1.kr)2018-11-18 

 

 

호남 최대의 남원 31m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 나무빗의 정체 - 경향신문 (khan.co.kr)2019.11.06

 
 
 
 

거제 방하리 고분군 발굴조사 성과 시민에 대공개 (daum.net) 2023. 5. 3. 

 

 

 

 

소가야 해상교역의 중심지 고성 동왜동패총

https://youtu.be/QuPPQjn1N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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